2023 구리시 국가유공자 기록화사업

잠들지 않는 이야기다섯 번째

권오진 어르신 외 국가유공자 12인 구술

목차

조국의 독립을 염원한 독립운동가

06

부끄럽지 않은 일생

독립운동가 故 김공순의 유족 이정혜 어르신

처절하게 외친 독립만세

18

독립운동가 故 정길모의 유족 정진광 어르신

삶을 일으켜 세운 가족

30

독립운동가 故 황하운의 유족 황덕호 어르신

조국을 지킨 영웅 6h25전쟁 참전유공자

아직도 생생한 그날의 기억

46

6h25전쟁 참전유공자 김창옥 어르신

고향에 꼭 돌아가리라

62

6h25전쟁 참전유공자 지성영 어르신

76

순리가 이끈 삶

6h25전쟁 참전유공자 표기산 어르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한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살아남았다는 기적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권오진 어르신

92

106

내 생애 단 하나의 이름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故 정종남의 아내 김분순 어르신

조국에 바친 20년

122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故 조병태의 아내 김춘자 어르신

138

천국에 있는 당신을 기억하며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故 김일동의 아내 안성화 어르신

여전히 전우들과 함께인 삶

154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임항빈 어르신

168

조국과 동료를 위한 헌신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장대일 어르신

새로운 봄을 기다리며

184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정영석 어르신

조국독의립 독운립을동 염가원한

부끄럽지 않은 일생

독립운동가 故 김공순의 유족 이정혜 어르신

어린 소녀가 총칼을 든 일본 경찰 앞에 나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친다는 것은 아주 큰 용기가 필요하다.

김공순 선생은 나라를 구하는 일이라면

기꺼이 목숨을 내놓을 용기가 있었다. 어머니도 어린 딸이지만 구국의 대열 앞에

당당히 앞장서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1919년 3월 13일 기전여학생들은 태극기를 들고

전주 남부시장으로 나아갔다.

김공순 선생의 진취적인 정신은 자녀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이정혜 어르신도 평생 교직에 있으면서

의로운 사회인을 기르는 데 매진했다.

국가유공자

이정혜 1932. 01. 05. _

독립운동가

김공순 1901. 08. 05. _ 1988. 02. 04.

1919. 03. 13.전주군 전주면 만세시위 주도1919. 06. 30.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형 선고

1995.독립유공자 지정

1995.대통령표창 추서

열여덟 살 어린 소녀가 총과 칼을 든 일본 경찰이 에워싼 거리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누가 봐도 위험하고 무모해 보였다. 일본 경찰에 잡혀서 끌려가기라도 한다면, 그 뒤에 벌어질 일은 불을 보듯 뻔했다. 모진 고문이 기다릴 것이고, 감옥에 갇힐 것이었다. 그 이상의 비극을 상상하는 일도 결코 이상하지 않았다.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집을 나서기 전, 소녀는 긴 머리를 단단히 똬리를 틀어 올린 채 어머니에게 큰절을 했다. 나라를 되찾겠다며 만세운동을 나가겠

다는 딸을 앞에 두고 어머니는 말문이 막혔다. 손도 뻗지 못하고 어린 딸의 구석구석을 애타게 바라만 볼 뿐이었다. 이미 제 아비가 독립운동을 하다 상해 임시정부로 떠난 뒤였다. 어린 딸이 사지로 나가겠다는데, 말리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을까. 그것이 어떤 이유건 반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라를 되찾겠다는 거였다. 어머니는 딸의 결심을 돌려세울 수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검은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문밖으로 뛰어나간 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맥을 놓고 지켜보았다. 어머니는 끝내 딸을 붙잡지 못했다.

당시 전주 기전여학교를 다녔던 김공순 애국지사는 학교로 가,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다른 여학생들과 합류했다.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태극기와 선언서를 준비했다. 1919년 3월 13일 정오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당시 여학생들의 굳은 의지를 읽을 수

부끄럽지 않은 일생11

있는 기록이 있다. 1982년에 발간한 기전여학교 80년사에 적힌 대목이다.

t얘들아, 우리도 역사상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처럼 자그마한 힘이지만 뭉쳐서 왜놈들을 물리치자. 이대로 있다가는 도대체 분통이 터져 못살겠다. 무슨 일을 해보자꾸나. 우리가 여학생이라 하여 남자들처럼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니 조금도 겁내지 말고 조국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자.u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을 접한 천도교 인종익 선생은 전주의 천도교구실에서 독립선언서 1,000여 장과 독립운동 지침을 등사해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인근에 있는 다른 지역 사람들도 만세운동에 합류해야 했기에 날을 장날로 잡았다. 3월 13일 남부시장 장날, 천도교와 개신교 신자, 학생들이 남문시장에서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시위를 시작했다. 고종황제의 명복을 비는 뜻으로 모두 상복으로 갈아입고 흰 띠를 머리에 동여맨 뒤 남문에서 인경을 알리는 소리와 함께 함성을 질렀다. t대한독립만세!u

전주 남부시장에는 수많은 인파가 외치는 만세 소리가 울려

12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퍼졌다. 일본 경찰은 삽시간에 불어난 만세운동 인파를 해산시키려 총을 쏘았고, 헌병과 소방대원을 동원해 물을 끼얹었으며 무력진압을 시도했다. 그러나 무력진압이 거세질수록 만세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김공순 선생도 목이 터져라 만세를 외쳤다. 그러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매를 맞고 있던 삼촌을 목격했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졌지만, 삼촌을 도와줄 수 없었다. 김공순 선생은 눈물을 흘리며 더 소리 높여 만세를 외쳤다. 시위 인파가 많아지자 일본 경찰은 만세를 외치며 도망가는 사람들의 등 뒤로 붉은 잉크를 흩뿌렸다. 그들은 붉게 물든 옷을 입은 사람을 일일이 찾아내 만세시위에 참여한 자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이날 김공순 선생을 포함한 열네 명의 학생들 전원이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6월 30일 광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아 공소했으나 9월 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기까지 6개월여의 옥고를 치렀다. 김공순 선생을 비롯한 기전여학교 학생들은 재판에서도 당당하고 떳떳하게 외쳤다.

부끄럽지 않은 일생13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박은식 선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전주의 여학생 김공순, 최요한나. 최애경 등이 독립운동을 하다 갇혔는데, 여학생들은 필사의 결심으로 음식을 단식한 지 4일이 되었다. 일본 검사가 위압적으로 심문하였으나 여학생들은 화평한 기상과 담대한 언사로 대답하되,

t우리가 어찌 너희의 판결에 복종하랴 너희들은 우리 강토를 강탈하고 우리 부모를 학살한 강도이거늘. 도리어 삼천리 주인이 되려는 우리를 비법(非法)이라 하니 이는 불법(不法)한 판결이라!u 당시 기전여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열네 명의 학생을 훗날 r14인의 결사대s라 불렀다.

딸 이정혜 어르신은 평소 어머니 김공순 선생을 따뜻하고 강직한 분으로 기억한다. 평생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는 삶을 사셨다. 긍정적인 성격이어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낙담하는 법이 없었다. 김공순 선생의 사랑은 가족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14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부끄럽지 않은 일생15

까지 널리 이어졌다. 집안일은 물론 마을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도 늘 앞장섰다. 어머니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야기에 결혼을 결심했다는 아버지도 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다. 책을 가까이하고 음악을 즐겨 듣고 부르던 어머니는 자녀들 교육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덕분에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불구하고 다섯 형제 모두 그들이 원하는 대로 대학교육까지 받을 수 있었다. 이정혜 어르신도 외할아버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교육자가 되어 평생 학생들을 가르쳤다. 어머니 김공순 선생은 집안일을 할 때나 가족이 모이면 늘 노래를 불렀다. 노랫소리가 끊어지면 지옥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할 정도였다. 한번은 친구가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기에 찬송가는 물론 가곡을 애창했으니, 그 친구의 기억에도 어머니 김공순 선생은 남다른 분으로 기억되었다. 아마도 이러한 음악적 재능과 지향은 외할아버지인 김진상 선생의 영향일 텐데, 그는 전주 신흥무관학교 역사 교사로, 교가 작사를 하기도 했다.

16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김공순 선생은 1920년 8월 7일, 전주시 수해 이재민을 위한 기부금 모금 목적으로 열린 자선 음악 연주회에서 기전여학교 동창회원으로서 참여했다. 1977년 2월 21일, 기전여학교에서 함께 만세운동을 했던 임영신 박사의 영결식이 중앙대학교에서 거행될 때에도 임영신 박사가 복역 중 지었던 <독립의 노래> 가사 전문을 중앙대학교로 보냈다.

평소 이정혜 어르신은 어머니 김공순 선생이 강조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t보이지 않는 곳까지 깨끗하게 씻어라. 자세를 바르게 해라. 마음을 밝게 가져라. 이웃을 사랑해라.u 어머니의 단정한 품성에서 나온 평온한 가르침이 이정혜 어르신에게는 평생 삶의 지침이 되어주었다. 큰 어려움이 닥쳐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힘이 생긴다는 이정혜 어르신은 지금도 그리움에 눈물을 훔친다. 1988년 김공순 선생이 돌아가시고 7년 뒤인 1995년 정부는 그의 3·1운동 공훈을 기리어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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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하게 외친 독립만세 독립운동가 故 정길모의 유족 정진광 어르신

청양군은 정산면을 시작으로 만세운동이 시작되었으며,

5일 동안 7,000여 명이 15회에 걸쳐 만세를 부르고 횃불시위를 펼쳤다.정길모 애국지사는 일본 경찰에 거세게 항거하다 목숨을 잃은

권흥규 지사의 운구행렬에도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유족인 정진광 어르신은 어릴 때는 아버님의 행적을 알지 못했으나

지금은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선 아버님을 존경하며

후대에 그 업적을 전하고 있다.

국가유공자정진광

독립운동가

정길모 1896. 03. 23. _ 1952. 10. 22.

1919. 04. 05.충남 청양군 정산시장 만세운동 참가_ 04. 06.

국가유공자 지정

2004.대통령표창 추서

n

청양군은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진 이세영 선생 일화로 유명

하다. 1908년, 이세영 선생은 청양으로 와 성명학교를 설립해

후진양성에 힘썼다. 교육을 통해 청년들을 계몽하고 장기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한 덕분인지 이 지역의 3·1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거세게 일어났다.

1919년 4월 3일, 운곡면 미량리에서 처음 시도되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첫 시도는 시도로만 끝이 났다. 경찰에게 들켜 제지

된 탓이었다. 끝내 독립만세를 부르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는 얼

마 지나지 않아 정산시장에서 들끓었다.

정산면의 만세시위는 정산면 백곡리의 홍범섭의 주도로 전개

되었다. 홍범섭은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하던 3월 상경했

다. 종로의 한 여관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한 그는 정산면으로 돌

아가 마을 청년들인 임의재, 윤석희, 홍세표, 박상종, 임창순, 임철

재, 김세환, 김필현, 윤구학, 이건호 등을 자택으로 불러 모았다. 그리고 이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보여주었다. 우리도 망국의 한을 풀게 되었다며 서울의 정세를 이야기해주고 함께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했다. 이들은 정산 장날인 4월 5일에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고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세시위를 준비했다.

1919년 4월 5일 오후 3시경, 청년들은 시장에 모인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을 본 일본은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날 것을 감지하고 조기 진압 방침을 세우고 있었다. 일본 경찰은 전국에 장이 서는 곳마다 미리 나가 경계를 서며 시위가 일어나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정산시장에도 일본 경찰과 헌병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홍범섭과 청년들은 만세를 외치며 시장으로 들어섰으나 이내 제압당했다.

홍범섭과 청년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며 다시 시장으로 진입했다. 이에 장꾼 100여 명이 호응하며 만세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정길모 애국지사를 비롯해 군중들도 이 대열에 합세했다. 일본 경찰은 거센 시위대를 제

24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압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한번 일어난 시위 행렬을 쉽게 잠재울 수 없었다. 만세운동은 점점 확산되었다. 군중도 늘어났다. 100여 명에서 시작된 군중은 금방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가 격화되자 일본 경찰은 붉은 잉크를 뿌리며 만세를 외치는 군중을 향해 해산을 명령했다. 해산에 응할 군중이 아니었다. 시위는 더욱 거세졌고, 일본 경찰의 손에 잡히는 대로 모조리 체포됐다.

처음 붙잡힌 인사는 30여 명이었다. 이들은 주재소로 강제 연행되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군중들은 분노하며 그들을 뒤따랐다. 연행자를 석방하라는 목소리는 계속해서 커졌다. 군중은 점점 늘어나 어느샌가 700여 명이 되어 있었다. 석방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점점 격렬해졌다. 헌병들은 군중을 향하여 두 차례 공포탄을 발사했다. 해산을 강요하는 위협에 일순 분위기가 얼었다. 이때, 만세시위 군중 가운데 선두로 나선 남자 한 명이 자신의 앞가슴 옷고름을 풀어헤치고 달려들어 더욱 거세게 항의했다. 그때였다. 총성과 함께 남자가 쓰러졌다. 정산향교 직원 권흥규였다.

처절하게 외친 독립만세25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순국과 헌병들의 무력을 행사하는 강압적인 위협으로 군중은 흩어져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다음 날인 4월 6일, 다시 모인 군중은 주재소 뜰에 거적으로 씌워 놓은 권흥규의 시신을 헌병들로부터 인수해 자택인 목면 안심리로 운구하였다. 권영진이 쓴 r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s 명정(銘旌)과 수많은 만장을 들고서 운구 행렬은 안심리로 가는 길목마다 노제를 지냈다. 지곡리에 이르러서 권영진이 만든 r독립만세s 깃발과 정일택이 만든 태극기를 운구 행렬 군중에게 배포해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1,000여 명이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운구 행렬에 동참했다. 목면에 이르는 고개에 배치된 청양 헌병과 공주수비대는 만세를 부르는 운구 행렬에 사격을 가했다. 정길모 선생도 이 행렬에 있었다. 일본 경찰의 사격에 최윤안, 유행길, 장응렬, 윤광원, 김국삼 등이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권흥규의 어린 딸도 중상을 입는 등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제의 무자비한 만행에도 불구하고 운구 행렬은 계속되었다. 권흥규의 시신은 자택으로 무사히 운구되었다. 이어 4월 7일에도 정산면 내에서 횃불 독

처절하게 외친 독립만세27

립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목숨을 구한 것이 다행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정길모 선생은 일경에 체포되었다. 정길모 선생은 1919년 4월 24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청양헌병분견소에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이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태형을 받은 인사는 그를 비롯하여 166인이나 되었다. 석방된 후 정길모 선생의 궤적은 구체적으로 전해진 바가 없다. 평범한 삶을 사시다 1952년 10월 22일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사망했다. 2004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다. 그의 유해는 본래 청양군 정산면 대박리에 안장되었다가 2010년 4월 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백곡리새마을회는 1985년 3월 1일, 정산 3·1독립운동에 참여한 청양군 정산면 백곡리 주민의 애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청양군 정산면 백곡리 마을회관 옆에 백곡 삼일운동 기적비를 건립했다. 기적비에는 백곡리 출신의 홍범섭 등 5명과 태형 90대를 받은 조종원 등 12명, 일경의 총칼에 중상을 당한 김필현 등 2명의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28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애국지사 정길모 선생의 유족인 정진광 어르신에게 아버지는 대부분 활자로 남겨졌다. 집의공파(執義公派)-충헌공파(忠憲公派) 30세 모(謨) 항렬을 쓰셨던 것만을 기억한다. 늦둥이 개구쟁이였기에 아버지께 야단맞은 기억이 전부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정진광 어르신 열한 살 무렵 정길모 선생이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정진광 어르신은 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도 전혀 몰랐다. 국가에서 사실 추적, 확인을 통해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었고 그제야 청년 때의 아버지를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처절하게 외친 독립만세29

삶을 일으켜 세운 가족

독립운동가 故 황하운의 유족 황덕호 어르신

가족보다 먼저 나라를 걱정한 故 황하운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국민이라면 모두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면에서 일어났던 3h1운동을 앞장서 이끌었고,일본 경찰에 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하지만 평생 자신의 활동을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돌아가셨다.

유족인 황덕호 어르신은 늦게 알았지만

아버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이어받아

애국지사를 돕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국가유공자

황덕호 1944. 03. 28._

독립운동가

황하운 1892. 01. 13. _ 1962. 12. 30.

1919. 03. 12.함경남도 북청군 신창면

신창헌병분견소 만세시위 주도

1919. 05. 14.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징역 1년형 선고

1990.독립유공자 지정

1990.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t아버지의 삶을 기억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탄생과 성장에 작으나마 기여한 아버지에 대한 존중이며, 동시에 다른 한편으

로는 우리 가족의 역사를 손주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자부심이

기도 합니다.u 올해 일흔아홉 살이 된 황덕호 어르신은 아버지를 떠올리면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나라를 잃은 시대에 태어나 나라를 되찾으려 청춘을 바쳐야 했던 아버지, 그를 한 개인의 삶으로 조

망하면 참으로 가엽게 여겨졌다. 안전한 나라에서 자신의 미래를 위해 열정을 불태웠어야 할 청춘이 그러한 삶을 살지 못했기에.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 온 국민이 일제히 태극기를 휘날리며 만세를 외쳤던 날, 아버지가 맨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덕호 어르신은 아버지의 용기가 자랑스

러웠다.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십여 일이 지나서야 그 소식이 함경남도에 있는 황하운 애국지사에게까지

34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전해졌다. 소식을 접한 청년 황하운 애국지사는 바로 김원섭, 최인균 등 동지 7명을 모아 거사를 준비했다.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에 함경남도도 빠르게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3월 11일,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김원섭의 집에 모여 독립선언서 300여 통을 인쇄했다. 그러고는 광목천에 r조선국자주독립(朝鮮國自主獨立)s이라고 써서 깃발을 만들었다. 다음 날 신창헌병분견소 앞에서 2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일제히 만세를 외치며, 황하운 애국지사는 선두에서 시위대열을 지도했다. 만세운동은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3월 13일 신창 장터에 나가 미리 준비한

36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깃발과 독립선언서 전단지를 나눠주며, 하루 빨리 독립된 나라가 되기를 바라며 만천하에 만세로 호소했다. 일본 경찰은 이때 시위를 주도한 사람들을 잡아들여 모진 고문을 했다. 5월 14일, 도청소재지인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았다. 바로 항고하였으나 경성복심법원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옥살이와 매일 이어지는 고문은 힘들었지만, 황하운 애국지사는 나라를 아끼는 애국심과 자신을 걱정하며 기다릴 가족을 생각하며 참고 또 참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년 뒤 황하운 애국지사는 출소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어야 할 가족들이 보이지 않았다. 온기마저 사라진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분하고 원망스러워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가족이 힘들게 지내고 있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설마 죽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 나라를 되찾겠다고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하다 옥살이를 하게 되었거늘. 이웃이 보살펴줄 만도 했을 텐

삶을 일으켜 세운 가족37

데, 어찌 된 일인가. 황하운 애국지사는 가족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황덕호 어르신은 아버지 심정을 반추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t아버님은 살아생전 독립운동을 하셨단 이야기를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저는 그게 이때 받은 충격과 상심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1962년 아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신 뒤에도 당신이 젊어서 어떤 고생을 하셨는지 아버님이 말씀하신 바가 없기에, 저희는 자세히 알지 못했습니다. 왜 말씀을 하지 않으셨는지 잘 모릅니다. 아마도 본인께서는 큰일을 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던 까닭인지, 자식들에게 누가 될까 봐 그랬던 것인지, 혹은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고통스러운 시간이었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1989년 묵호에 사는 한 친척이 알려주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습니다.u

어느 날 친척이 황덕호 어르신에게 전화를 해왔다. 지역에서 발행하는 신문에 아버지 황하운 애국지사의 재판기록이 실렸다고 했다. 아마 지역에서 독립운동사를 정리하면서 발견한 모양이었다. 신문을 찾아보니 아버지가 독립만세운동을 하다 옥고

38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를 치르셨다는 내용이 상세히 나와 있었다.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황덕호 어르신은 그때 많이 뉘우치고 반성했다. 아버지에 대해 어떻게 이리도 무심할 수 있었을까. 그때부터 황덕호 어르신은 아버지 황하운 애국지사의 발자취를 꼼꼼하게 되찾아보기 시작했다. 국가기록보관소에 찾아가 아버지의 기록을 찾고, 이전에 아버지를 알던 분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들었다. 만세운동을 하던 과정, 가족을 모두 잃게 된 사연을 알게 되면서 참 많이도 울었다. 황덕호 어르신은 아버지의 활동을 꼼꼼하게 정리해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다. 그 결과 신청이 받아들여져 나라를 지켜낸 분으로 아버지 이름 석 자를 당당히 등록할 수 있었다. 1990년 세종문화회관 광복절 행사 때 독립유공자증을 받았다.

독립운동을 하다 온 가족을 잃은 아픔은 황하운 애국지사에게 쉽게 가시지 않는 상처였다. 방황하던 황하운 애국지사를 일으켜 세운 건 우연히 만난 선교사들이었다. 선교사들은 복음 전파에 열심인 청년 황하운을 보고 감동했다. 그를 신학교에 다닐 수 있

삶을 일으켜 세운 가족39

게 해주었고,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하도록 힘써주었다. 황하운 애국지사에게 새로운 인생이 펼쳐졌다. 공부를 하면서 아내 될 사람도 만났다. 강원도 횡성이 고향인 황덕호 어르신의 어머니는 당시 감리교회에 다니다 선교사의 추천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때 주변에서 황하운 애국지사를 적극적으로 중매했다. 둘은 결혼했고, 슬하에 8남매를 둘 정도로 금실이 좋았다. 희망으로 가득했던 아버지 황하운 애국지사는 함경남북도에 교회 열세 곳을 지을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하셨다. 1944년 함경남도 흥남시 서호교회에 있을 때, 황덕호 어르신이 태어났다. 당시 이북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공산화가 이뤄지던 시기였다. 김일성이 집권한 뒤 공산주의 정권은 강압적인 지배를 시작했다. 이에 반발한 지주·지식인·종교인들이 항거하는 일이 있었고, 그들이 r처단s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서호교회 목사였던 황하운 애국지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교회를 다니던 분이 몰래 아버지를 찾아와 공산당이 눈여겨보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가족이 잡혀가 처형을 당할 수 있다고

40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생각한 황하운 애국지사는 그 길로 온 가족을 데리고 피신했다. 흥남부두에서 쪽배를 타고 연안으로, 금강산 입구에서 속초로, 이윽고 주문진에 도착했다. 주문진에서 어렵게 손수레를 구해 세간살이들을 싣고 밀고 끌며 계속 남쪽으로 이동했다. 대관령-평창-정선-영월-제천까지 내려왔다. 제천에 감리교회가 있었다. 다행히 감리교회에서 황하운 애국지사를 받아줘 2대 목사가 되었다. 1946년도의 일이었다. 하지만 제천 생활도 만만치 않아 가족은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횡성을 거쳐 서울에 정착했다. 지금에 와서 다시 지도를 살펴도 온통 고되기만 한 동선의 생을 산 셈이었다.

서울에서의 삶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분위기가 어수선하더니 6·25전쟁이 터졌다. 가족은 다시 피난을 준비했다. 어렵게 인천으로 가 남쪽으로 가는 군함을 탈 수 있었다. 6,000톤 이상 되는 큰 군함이었지만,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피난민은 모두 춥고 배고팠다. 그 와중에도 고구마를 챙겨온 가족이 있었는데, 그들이 먹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부러웠다고 황덕호 어르

삶을 일으켜 세운 가족41

신은 회고했다. 배는 계속 남쪽으로 갔다. 군산을 지나고 목포를 지나고 여수까지 갔지만, 배에서 내리지 못했다. 결국 제주도까지 가게 되었다. 제주도에 간 피난민들은 모두 서귀포 한라산 밑자락에 있는 토평에 수용되었다.

1953년, 휴전을 하면서 피난생활 끝내고 서울로 복귀했다. 피난 통에 4형제나 잃은 뒤였다. 폐허가 된 서울에서 살아남은 가족들은 갈 곳이 없었다. 혜원동 남대문시장 쪽에 일제가 남기고 간 빈 적산가옥이 여러 채 모여 있었다. 거기로 가, 여러 가족들 사이에 자리 잡고 살았다. 아침이면 형제들은 남대문시장에 나가 막일을 한 뒤 먹을 것을 얻어왔다. 당시 서울은 피난에서 돌아온 사람들로 붐비었다. 서울시는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을 여러 지역으로 나눠 살게 했다. 황하운 애국지사 가족은 모래내로 이주했다. 가난했지만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는 의지를 품어야 했다. 아이들은 일을 하며 공부를 했다. 황덕호 어르신도 홍대 끝에 있던 서강국민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월사금을 내지 못해 졸업을 하지 못했다.

42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황덕호 어르신은 공부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다. 형편 때문에 중학교는 가지 못했지만, 끝내 야간고등학교를 다녔다. 공부를 많이 해서 대학교수가 되기를 꿈꾸었다. 꿈을 이루고자 신문배달, 우유배달을 하면서도 공부를 계속했다. 결국 한양대학교 체육과에 들어갔고, 이후 숭의대학교에서 평생을 교수로, 학장으로 재직했다. 다른 형제들은 아버지 황하운 애국지사의 뒤를 따라 목회자가 되었다. t무참한 현실이었지만 아버님의 의지로 우리 가족은 그나마 험난한 세월을 견디며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제 남은 생의 목표는 독립운동을 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드는 것입니다. 지금은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광복회 구리시지회를 발족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애국지사 생존자들을 돌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후손에 남기려 합니다. 그들의 정신을 미래에 전하는 것을 본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u

삶을 일으켜 세운 가족43

6h25조전국쟁을 지참킨전 영유웅공자

아직도 생생한 그날의 기억 6h25전쟁 참전유공자 김창옥 어르신

우리의 유일한 선택이 전쟁이었을까 이 질문에 김창옥 어르신은 답을 내릴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겨우 열일곱 살이었다.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로 군대에 입대해보름 동안 훈련을 받고 바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최전방에서 암울한 시절을 보냈지만,

아흔이 넘은 지금 되돌아보면

용감하게 어둠을 이겨낸 청년기를 보낸 듯해 후회는 없다.

6·25전쟁 참전유공자

김창옥 1934. 06. 30. _

1950. 12. 10.제1신병훈련소 교육

1951. 01. 06.육군 제6사단 제19연대 제2대대제5중대 제2소대 제2분대 배치

1952. 08. 05.강원도 화천군 간동면 구만리화천수력발전소 지구 전투

화랑무공훈장 수훈

1952. 11. 10.1952. 12.

강원도 화천 금성지구전투

1954. 04. 20.

충무무공훈장 수훈

1954. 05. 10.

육군본부 고급부관실 인사과 발령

1954. 09. 20.의가사 제대n

국가유공자 지정

1934년 6월 30일, 김창옥 어르신은 서울 신당동에서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던 부모님이었지만 살림 형편은 그리 좋지 않았다. 김창옥 어르신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t그때는 모두 어려웠죠. 경제보다 정치가 중요했던 때라 서너 갈래로 나눠진 이념을 두고 매일 싸웠지요.u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아침은 조용했다. 아버지와 함께 시장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대문을 나서 큰길로 나갔을 때, 여의 때와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군용차가 지나가며 방송을 했다. t휴가나 외출 중인 장병은 부대로 즉시 복귀하시기 바랍니다.u시장으로 나가려던 가족은 집으로 돌아와 라디오를 켰다. t북쪽 괴뢰군이 불법남침했습니다. 우리 국군은 즉각 반격을 개시해 적을 물리치고 있습니다.u 전쟁이 났다는 소식이었다.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설마 서울까지 쳐들어올까, 하는 생각을 했다. 평소처럼 아버지를 따라 시장에 나가 잔일을 하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왔다. 전쟁이 일어난

50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첫날이었지만, 생각보다 일상은 평온했다. 하지만 학교는 곧바로 휴교에 들어갔다. 학교에 가지 않으니 심심했다. 종일 라디오를 들으며 보냈다. 라디오에서는 국군이 적을 무찌르고 있다고 했지만, 포탄 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고 있었다. 다음 날 저녁에는 포탄이 더 가까이 들리더니, 6월 28일 새벽에는 북한군이 서울로 들어왔다. 당시 김창옥 어르신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경기공업중학교 3학년에 다니던 때 6·25전쟁이 났다. 인민군은 학생들을 잡아가 전쟁터로 보냈기 때문에 김창옥 어르신은 인민군의 눈을 피해 숨어 지냈다. 살림살이는 어려웠지만 나름 행복하게 살았는데, 일순간 모든 것이 공포로 변했다. 하루하루가 두렵고 불안했다. 흙벽을 무너뜨릴 듯한 굉음이 사방에 울려 퍼졌고, 그 소리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힘든 것은 둘째 치고 들킬까 봐 무서웠다. 숨어 지내던 김창옥 어르신은 북한군에 잡혀가느니 국군에 입대해 싸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루아침에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인민군 편에 붙어 인민군의 앞잡이가 된 주민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어떻게 어제까지

아직도 생생한 그날의 기억51

식구처럼 함께 밥을 먹고 웃고 지내던 이웃이 돌변해 이웃을 괴롭히고 잡아갈 수 있단 말인가. 인민군이나 인민군 앞잡이가 되느니 국군에 입대하는 편이 옳은 일이었다. 열일곱 살이면 다 큰 어른이지 않은가. 대한의 아들이라면 누구나 같은 마음일 것이었다. 결연히 의지를 다진 김창옥 어르신은 1950년 12월 10일 소년지원병으로 자원입대했다.

자원입대와 함께 대구에 있는 육군 제1신병훈련소 제7교육대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15일간 훈련을 받고 바로 충북 진천에 있는 육군 제6사단에 배치를 받았다. 요즘은 주특기로 나눠 한 달

정도 신병교육을 시킨 다음 자대로 배치하지만, 그때는 짧게는

10일 만에 소총 쏘는 법만 가르쳐서 바로 실전에 배치했다.

차를 타고 가보니 6사단 19연대였고, 거기서 다시 2대대 5중

대 2소대로 배정받았다. 멀고 낯선 곳이었지만 숨 쉴 틈을 주지

않았다. 바로 .1 소총 한 자루씩을 나눠주고 손질하게 했다. 기

름이 잔뜩 발린 소총을 깨끗하게 닦아 검사를 받아야 했다. 불합

격하면 얻어맞았고, 합격할 때까지 총열과 방아쇠 등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닦아야 했다. 총 손질이 끝나면 바로 실탄을 지급했다.

그리고 일렬로 줄을 세워 산으로 데려갔다.

첫 임무는 300미터 고지 능선에 있는 참호에서 북한군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폭설로 산과 들이 온통 흰색이었다. 한겨울 매서운 추위를 뚫고 멀리서 쿵쿵 포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양 볼은 새빨갛게 트고 손발은 얼어 잘 움직일 수 없었지만, 북한군이 바로 앞에 있다고 생각하며 추위를 이겨야 했다. 하지만 참호도 추위를 막아주지 못했다. 안이나 밖이나 온도가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북한군의 위협보다도 얼어 죽을 것 같은 추위가 더 견디기 어려웠다. 야외에서 경계근무를 하며 벌벌 떨었던 순간을 김창옥 어르신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 자대 배치를 받은 뒤 줄곧 경계근무를 섰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전투에 참가하였다. 낮에는 들키기 쉽기 때문에 적은 주로 밤에 움직였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낮에는 움직이지 않고 경계만 했다. 교전이 벌어지면 곁에 있는 전우를 더욱 의지했다. 서로 간격을 유지해야 했지만 총을 쏘다 보면 서로 붙어 있곤 했다. 분대장의 명령에 따라 간격을 유지해야 했으나 그게 쉽지 않았다. 밤새 기어서 이동하고 총을 쏘다 보면 날이 밝아왔다. 그러면 적은 다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때 함께했던 전우들을 아직도

54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잊지 못하고 있다. 이 중사, 김 중사, 김 하사, 김 일병, 이 일병. 고참들의 긴박한 목소리에 맞춰 참호를 방패 삼아 교전했던 그때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다시 몇 달이 지났다. 그사이 가까이 지냈던 전우 몇 명이 죽었다. 그때마다 눈물을 흘렸고, 한편으론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그리웠다. 1952년 8월, 부대가 이동했다. 화천 구만리에 있는 면적이 수십만 평 되는 광활한 화천저수지로 향했다. 화천저수지는 파로호전투로 유명했는데, 우리 군은 화천저수지전투에서 최소 2만 5,000명 이상의 중공군을 사살해 대승을 거두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기리기 위해 r오랑캐를 대파한 호수s라는 이름의 r파로호s라고 이름 붙였다. 그 구만리 화천저수지에서 다시 전투를 치르게 된 것이었다. 우리 군은 방어 작전을 펼치며 저수지로 올라갔다. 이미 하늘에서는 미국 전투기가 쉴 새 없이 날아와 기관총을 쏘아댔다. '86 세이버전투기와 r구라망 비행기s라고 불렀던 전투기 헬캣이 내는 굉음이 온 산하에 울려 퍼졌다. 인민군 부대를 향해 기총소사하고, 이후 네이팜탄을 터트렸다. 네이팜탄은 섭씨 3,000도에

아직도 생생한 그날의 기억55

가까운 열을 내며 낙하지점 반경 수십 미터를 불바다로 만드는 폭탄이었다. 아무리 날고뛰는 북한군이라고 해도 미국 전투기의 집중 폭격에는 이겨내지 못할 것이었다. 적은 후퇴했고 우리는 전진했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마다 인민군의 시체가 늘어져 있었다. 뜨거운 여름 뙤약볕이라 살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며 진동했고, 시체에선 구더기가 득실댔다. 참혹한 광경을 그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모두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몇몇은 오장육부를 뒤집고 구토하기도 했다. 상황은 처참했지만 그럼에도 물러서거나 패배할 순 없었다. 김창옥 어르신은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공이 인정되어 1952년 11월 10일, 화랑

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6·25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수록 중공군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며 전투를 이어갔다. 전투를 하지 않을 때는 부족한 잠을 잤다. 교대로 불침번을 서고 적의 동정과 상황을 살폈다. 캄캄한 밤이면 사방은 고요했고, 이따금 총소리가 들려왔다. 불침번을 서는 병사가 잠시 졸면 인민군에게 목이 잘리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졌다. 혼자 불침

56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번을 서는 날이면 또렷이 정신을 차리려고 졸린 눈을 몇 번이고 비볐다. 이따금은 전우들과 둘러앉아 고향 얘기, 친구 얘기를 나눴다. 고향에 돌아가면 무얼 하고 싶은지 누군가 물을 때면, 김창옥 어르신은 t공부. 학교 다니는 게 꿈이다.u 하고 말했다.

1953년 2월, 옆 사람도 분간이 어려운 칠흑 같은 캄캄한 밤이었다. 산꼭대기에서 나팔 불고 장구를 쳐댔다. 저쪽 산 능선에 있던 육군 3사단, 육군 6사단, 육군 7사단을 인민군이 포위하며 인해전술로 사위를 좁혀 왔다. 중공군과의 전투가 시작되었을 땐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악착같이 살아야지, 마음을 고쳐먹었다. 살겠다는 일념 하나로 싸웠다.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사활을 걸고 교전했으나, 역시 어려웠다.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중공군은 쉬지 않고 몰려왔다. 김창옥 어르신은 밭도랑을 엎드려 포복했다. 웅덩이에 몸을 엎드려서 총알이 날아오는 것에 응사했다. 7일간의 교전이 있었고, 사력을 다해 방어사격을 하며 철수해 경기도 가평군 사창리까지 후퇴했다. 군인으로서 죽음보다 싫은 후퇴였지만 모든 면에서 열세였기 때문에 후퇴는 어쩔 수 없었다. 그곳에서 다시 부대를 재편성

아직도 생생한 그날의 기억57

해 중공군과 마지막까지 싸웠다.

전쟁이 끝나고 다시 평온한 일상을 되찾았다. 군대 생활을 하고 있던 1954년 4월 20일, 6·25전쟁에 참전해 나라를 지킨 공로로

충무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훈장을 받고 얼마 뒤인 5월 10일, 대구에 있는 육군본부 고급부관실 인사과 통역장교반으로 전속되어 근무했다. 휴가를 나간 동료의 편으로 가족들의 편지와 소식이 전해졌다. 함께 근무하던 이우인과 같이 집에 가기도 했다. 이후 의가사 제대 신청자를 모집했고, 증명서를 제출했다.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1954년 9월 20일, 가정형편의 사정으로 의가사 제대를 했다.

군인 생활을 끝내고 다시 민간인이 되었다. 열한 살, 열일곱 살 차이가 나는 동생들을 먹이고 입히고 학교까지 보내야 했다. 가장이고, 아들이고, 형님이었다. 스물한 살의 청년은 모든 역할을 해내야 했다. 1955년 동대문구청에 입사해 낮에는 근무하고 밤에는 단국대학 법률학과에서 공부했다. 돈을 벌지 않을 수 없는 가정형편이었음에도 법 공부는 놓지 않았다. 주경야독으로 열심

58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히 공부해 대학을 졸업했지만, 고시공부를 할 형편까지는 되지 않았다. 대학까지 공부한 것에 만족하며 가정을 돌보는 데 전념했다. 마흔 무렵 중매로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3년 뒤 큰아들을 품에 안았다. 그렇게 26년간 공직생활을 했다. 법관을 꿈꿨던 어린 학도병은 어느덧 여든아홉이 되었다. 승리할 때면 목이 찢어져라 t대한민국 만세, 만세u 하고 함께 외쳤던 전우들, 난리 통에 같이 입대했던 동네 친구들은 여전히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다. 김창옥 어르신은 해마다 10월이면, 장진호 전투 전사자 의령제를 찾았다. 자신이 참여한 전투는 아닐지라도, 그곳을 찾아 그 시절을 함께 보냈던 이름 모를 이들을 향해 묵념한다.

아직도 생생한 그날의 기억59

6고h25향전쟁 에참전 유꼭공자 돌 지성아영 어가르신리라

황해남도 벽성군 일신면 천석리 213번지.

지성영 어르신은 구십 평생 이 주소를 잊지 않기 위해

매일 외우고 또 외우신다.

국군에 지원해 6h25전쟁에 참전했고,

전쟁이 끝난 뒤 영천으로 발령받아 남한에 남으면서 실향민이 되었다.

언제고 통일이 되면 꼭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6·25전쟁 참전유공자

지성영 1934. 06. 30 _ 1950.

n

6h25전쟁 참전국가유공자 지정

지성영 어르신은 2023년 올해로 여든아홉 살이 되었다. 태어난 것은 1934년 황해남도 벽성군 일신면 천석리에서였다. 천석리는 1945년 경기도 연백군 소속이 되었다가 1950년 황해남도 남연백군으로 편입되었고, 다시 1952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청단군 남촌리에 편입되면서 폐지되었다. 지성영 어르신은 통일이 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명이 없어진 천석리 주소를 잊지 못하고 있다. 죽었다 깨어나도 잊을 수 없는 r황해남도 벽성군 일신면 천석리 213번지s가 어르신의 고향 주소였다. 이제는 부모님은 물론 시집 장가간 형과 누나, 아래로 누이동생 얼굴마저 기억에 가물가물하지만, 그래도 고향에 가서 그 흔적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만은 여전히 뜨겁고 간절하다. 농사를 짓는 부모님은 6남매를 낳고 평범하게 살았다. 그중 가운데 다섯째인 지성영 어르신은 어려서 총명해 부모님과 선생님으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지성영 어르신이 평생을 통틀어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열여섯 살 청년이었던 때였다. 6·25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 평온하던 가족이 모두 이산가족이 되어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안타까움을 어찌 말로

66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다 할 수 있을까.

전쟁이 나자 마을이 떠들썩했다. 한창 농사철이었지만 모두 일손을 놓고 피난 떠날 채비를 했다. 하지만 지성영 어르신 부모님은 달랐다. 고향을 절대 버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수많은 마을사람들이 일찍이 북한군을 피해 피신을 떠났다. 그리고 멀리서 낯선 사람들이 마을로 몰려왔다.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고자 인근 지역 사람은 물론 황해북도 사람들까지 내려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부모님인들 왜 피난을 떠나고 싶지 않았을까 하지만 조상이 묻힌 선산과 생활 터전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피난 가는 것보다 고향에 남아서 전쟁이 끝나길 기다리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분명 일손이 잡히지 않았지만, 그래도 매일 논이며 밭으로 나가 제 할 일을 하셨다. 그러나 열여섯, 어린 지성영 어르신은 생각이 달랐다. 전쟁이 벌어지는 지역에 있으면 아무리 민간인이라 하더라도 피해를 볼 터였다. 심지어 본인은 물론 가족들 목숨도 잃을 수 있었다. 누이와 부모님을 지키고 싶었던 지성영 어르신은 부모님을 설득하고자 애썼다. 그럼에도 부모님 의지는 완강했다. 전쟁이 계속될

고향에 꼭 돌아가리라67

수록 마을에는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로 붐볐다. 마을 지리를 잘 알았던 지성영 어르신은 피난민들에게 남쪽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주었다. 피난을 떠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서 안전한 지역으로 피신하라고 조언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성영 어르신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결심 이상의 확신이 들었다. 죽어도 고향에 남겠다는 부모님은 하는 수 없지만, 아직 어린 누이만이라도 데리고 자신도

피난을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끝내 누이도 부모님을 두고 떠날 마음을 먹지 못했다. 많은 고민 끝에 지성영 어르신은 일단 혼자라도 떠나기로 했다. 바깥이 어떤 상황인지 알아야 했다. 막연했지만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피난길은 고달팠다. 마음은 불안했고, 몸은 피곤했다. 집 떠 나온 것을 금방 후회했다. 하지만 떠나온 길을 되돌아갈 마음도 먹을 수 없었다. 험난했던 바닷길을 따라 밤낮으로 걷기도 하고, 사람들을 따라 배로 물길을 건너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서 불안이 커져갔다. 의지할 사람이 없어 홀로 떠난 피난길이라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피난을 가면 낯선 곳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막막했다. 그러던 중 마냥 떠돌 수는 없다는 생각에 지성영 어르신은 학도병으로 국군에 자원입대했다. 신분도 보장됐을 뿐만 아니라 우선 먹을 것이 해결되었다. 지성영 어르신은 나이로 보면 학도병이었지만, 포술훈련을 받고 포병대에 배치되었다.

고향에 꼭 돌아가리라69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지성영 어르신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다시 돌아온 고향은 어수선하고 낯설었다. 아는 사람은 없었고, 치안은 불안했고, 북한군 패잔병들이 여기저기 숨어 있었다. 지성영 어르신은 고향으로 돌아온 다른 청년들과 함께 학도의용대를 결성하고, 유엔군이 다시 진격해올 때까지 치안과 북한군 패잔병 소탕에 참여했다. 하지만 유엔군보다 중공군이 먼저 쳐들어왔고, 청년대원들은 여러 섬으로 흩어졌다. 지성영 어르신은 용매도로 철수해 게릴라전을 이어갔다.

1951년 미국 극동사령부의 첩보부대인 ,-0 8240부대가 새롭게 창설, 육군첩보대와 연결되어 을지 제2병단으로 편성되었다. 마침 이 지역에서 미군이 유격대를 창설하려 했고, 이에 육군본부는 을지 제2병단을 미군 예하에 편입시켰다. 을지 제2병단은 미 제8군 통제하의 백령도 기지사령부 소속으로 전환되어 동키 제5부대로 편성되었다. 이후 강화도에 창설된 울팩기지의 통제를 받게 되면서 타이거여단으로 개편되었다. 타이거여단은 3개 연대로 재편되었고, 이 가운데 제3연대가 용매도로 이동했다.

70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용매도에 있던 지성영 어르신은 제3연대 유격대에서 활동하며 한국전에 참전했다. 남진하는 북한군을 교란시키는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고, 적진으로 침투해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유격대의 활동은 빛났다. 유격대 안에 내륙 침투를 위해 특별히 공수중대와 파괴공작대를 두었다. 이들이 후에 공수중대 낙하산부대로 성장했고, 별도로 파괴공작대를 편성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목숨을 바쳐 전투에 임했지만 통일은커녕 휴전을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필사적으로 휴전을 반대했다. 나라가 두 쪽으로 갈라진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38선을 경계로 하게 되면 고향은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이 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성영 어르신의 간절한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고, 6·25전쟁은 휴전상태가 되었다. 1953년 을지 제2병단은 한국군으로 군적을 갖게 되었고, 지성영 어르신은 정식 군인이 되었다. 1954년 이 부대는 해체되면서 한국군 각 부대로 분산 배치되었다. 지성영 어르신은 경북 영천으로 발령받았다가 이후 대구에 있는 육군통신부대 75가설

고향에 꼭 돌아가리라71

대대로 옮겼다. 통신설비가 전혀 없었던 시절이었다. 용문산 꼭대기에 통신중개소를 설치하기 위해 맨몸으로 오르기도 하고 길이 없는 산에 길을 내며 2_3일씩 걸어 발전기를 나르기도 했다. 어쩌면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 위해 남들보다 더 열심히 군 생활에 임했는지도 몰랐다.

통일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지만, 세월은 잘도 지나갔다. 홀로 생활하는 것이 안쓰러웠는지 주변에서 중매를 서줘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자녀도 넷을 두었다. 지성영 어르신은 t통일이 될 때까지 군인으로 있으면서 힘을 보태겠다.u고 결심하고 열심히 살아왔다. 상사를 달고 1979년 정년퇴직을 했다. 전역하고 일주일쯤 지났을 때 군대에서 알았던 사병 한 명이 지성영 어르신을 찾아왔다. 주소를 수소문해 찾아와서 일자리를 제안해주었다. 망설임 없이 선뜻 응했다. 좋은 인연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무엇보다 부족한 자신을 잘 봐주어서 참으로 고마웠다. 모든 게 부모님 가르침대로 평생 성실하게 살아온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 생활도 성실히 잘 마칠 수 있었고 이후 좋은 인연

72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으로 직장도 갖게 되었으니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부모님이 늘 하시던 말이 있었다. t남에게 섭섭한 말은 하지 말아라!u 지성영 어르신은 평생 그 말을 새기며 살았다. 되돌아보니 멀어진 사람보다 가까이 지내는 사람이 더 많은 인생이었다. 다 부모님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지성영 어르신은 부모님의 말씀을 그대로 자식들에게 전하곤 했다. t남에게 피해 주지 말고 살아라. 섭섭한 말보다 좋은 말을 먼저 해라!u 덕분에 네 명 자녀 모두 사회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며 살아가고 있다. 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했다. 전쟁은 평온하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고, 그리운 고향을 다시 갈 수 없는 땅으로 만들었다. 나라가 혼란스럽고, 전 세계 여러 나라가 분쟁으로 들끓는 순간에도 지성영 어르신은 t결코 전쟁은 있어서도 안 되고, 생각도 해서는 안 된다.u고 힘주어 말했다. 전쟁으로 인해 헤어진 가족, 무고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무수히 보아온 까닭이었다. 꼭 통일이 되기를, 한 번만이라도 고향에 갈 수 있기를. 지성영 어르신은 앞으로도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해 소원을 빌 거라 말했다.

고향에 꼭 돌아가리라73

6순h25리전쟁가 참전 이유공끈자 표 기삶산 어르신

6h25전쟁 때 미군 공병대에 차출돼 노무자로 일을 시작했다.

공병대였지만 표기산 어르신의 주업무는

부대에 문서를 정리하고 전달하는 문서연락병이었다.

6h25전쟁이 끝난 뒤 정식으로 군대에 입대해 군복무를 마쳤다.

결혼도 제대를 하기 몇 달 전에 치러 주변의 부러움과 축하를 동시에 받았다. 군대에 갈 때도 결혼을 할 때도 망설임이 없었던 표기산 어르신.

자신에게 다가온 인생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이치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겠다는 평소의 소신 때문일 것이다.

6·25전쟁 참전유공자

표기산 1935. 05. 03. _

1953.미군 공병대 입대

2010. 01. 12.국가유공자 지정

신창 표씨 21대손인 표기산 어르신은 경기도 남양주시 주암면 송촌리가 고향이다. 어르신은 수종사 아래에 위치한 농촌 마을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들이 다 함께 주일예배를 가는 신실한 기독교 집안의 2남 2녀 중 셋째였다. 당시 대부분 아이가 그러하듯 학교에 다녀온 뒤에는 집안일인 농사를 돕는 평탄한 일과를 지내곤 했다. 오전에 학교에 갔다 오면 점심을 빨리 먹고 부모님이 일하는 논과 밭으로 나갔다. 김을 매고, 뿔을 뽑고, 소 꼴을 먹이고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왔다. 평범한 하루하루, 그런 날들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일과는 평탄해 보였을지 몰라도 표기산 어르신 역시 역사의 소용돌이를 지나치던 시절이었다.국민학교 1학년 2학기, 그러니까 어르신 나이 열한 살에 우리나라가 해방되었다. 표기산 어르신의 동네에서도 커다란 잔치가 벌어졌다. 막걸리와 먹을 것을 쉼 없이 날라, 먹고 마시며 장구를 치고 노래 불렀다. 해방이 되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더욱 격렬한 논쟁과 다툼이 일상적으로 일어나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고, 경제적으로도 식량이 부족해 굶주린 나날들이 많았다. 해방과 함께 해외에서 동포들이 귀국해 인구가 늘어났고, 그들과 잦은

80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분쟁도 생겨났다. 해방이 가져온 새로운 기대는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여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표기산 어르신의 당시 나이는 열여섯이었다. 수도권은 삽시간에 전쟁터로 바뀌었다. 북한군이 워낙 빠르게 남침을 해서 피난을 떠날 새도 없었다. 이곳저곳에서 포탄 터지는 소리와 총소리가 들렸고 사람들도 길거리에서 죽었다. 마을 곳곳에서 불이 나 집이 타는 일도 빈번했다. 위험하고 불안한 나날이 이어진 전쟁 통이었지만, 다행히 표기산 어르신의 가족은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전쟁 초반은 북한군이 압도적으로 승리를 하는 듯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국군이 전력을 회복해 북한군을 몰아냈다. 10월쯤에는 38선 이북으로 진군했다. 곧 전쟁이 끝날 수 있도록 온 가족이 기도를 하며 숨죽이고 있었다. 하지만 겨울이 되자 중공군과 함께 북한군이 다시 남쪽으로 내려왔다. 1h4후퇴로 다시 피난민들이 남쪽으로 몰려갔다. 표기산 어르신 가족도 더는 고향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순리가 이끈 삶81

온 가족이 모여 피난을 어떻게 가야 하나 궁리를 했다. 결론은 부모님은 고향에 남고 자녀들만 피난을 떠나기로 했다. 부모님은 다니던 교회의 친한 장로에게 말해 표기산 어르신과 형제들을 맡겼다. 꼭 필요한 옷가지 몇 개만 챙겨 급히 짐을 꾸려 피난민들 사이에 섞였다. 정말 많이 걸어야 했다. 동이 트기 전부터 걸었고, 밤이 되고 새벽이 되어도 계속 걸었다. 새벽 3_4시쯤 되면 인근에 있는 집

82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으로 가 빈방을 얻어 새우잠을 잤다. 잠시 자고 일어나 또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다행스럽게도 길가에 시체가 있는 처참한 시기는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과 함께 걷고 또 걸어 충북 진천까지 갔다. 그곳에 모인 사람 모두 피난민이었다.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많았다. 하루는 진천의 어느 마을에서 창고를 열어 피난민들에게 배를 나눠주었다. 참으로 고마웠다. 배를 받아서 그것을 서로 나눠 먹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정부는 피난민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했다.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에 뛸 듯이 기뻤다. 부모님이 계시는 남양주로 얼른 돌아가고 싶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정부가 귀향을 돕는다고 했으나, 차나 기차를 얻어 탈 수는 없었다. 진천에 도착했을 때처럼 걷고 또 걸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집은 불에 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고향집은 물론 마을 전체가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부모님이 이곳에서 어떻게 하루하루를 버티셨을까, 싶을 정도였다. 다행히 부모님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피신해 계셨다. 온 가족이 다시 만나니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가족이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우리는 다시 집을 짓기로 하고 잿더미가 된 집을 정리했다. 온돌을 다시 손보고 흙벽돌을 만들어 벽을 세웠다. 안방과 건넛방을 나누고 아궁이도 둘로 만들었다. 열여덟 젊은 나이였기 때문에 부모님을 도와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먹을 것을 해결하는 것이 시급했다. 다시 농사도 짓고 끼니를 챙겼다. 그렇게 다시 1년이 지났다. 살림은 나아지지 않았다.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해야 했다. 표기산 어르신은 군대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군인도 귀했고, 군대에서 일할 사람도 없었기에 마을 사람들 가운데 일을 할 수 있는 남자를 뽑아가는 일이 많았다. 다행히 미군 공병대에 노무자로 입대할 수 있었다. 표기산 어르신은 105사단 5027부대 소속이 되었다. 가평, 화천, 철원 일대에서 근무했다. 공병대는 주로 아군의 기동을 원활히 하기 위해 길을 내거나 방호 진지를 만들었다. 때로는 적이 쉽게 침투할 수 없게 장애물을 설치하기도 했다. 표기산 어르신은 키는 컸지만 몸이 말라 문서연락병으로 발령받았다. 낯선 사람들 가운데 고향 친구가 있어 다행이었지만, 같이 업무를 하지는

84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못했다. 결국 다른 직무를 하게 되어 특별히 친하게 지내기 어려웠다. 그래도 오며 가며 인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마음이 든든해지곤 했다. 전쟁이 끝나가던 시기였다. 38선 근처였으나 전방은 아니었기에 전운이 감돌지는 않았다. 문서연락병은 각 부대에 오는 문서를 정리하고, 사무실을 관리했다. 가끔 윗선에서 필요한 보고 문서를 작성하고 정리하는 일을 하는 행정직이어서 힘든 일은 없었다. 일이 쉬워 적응도 빨리했다. 전쟁 통이었지만 나름 평온하던 시절이었다. 입대도 우연히 이뤄졌듯이 소집해제도 갑작스러웠다. 여러 지역을 돌다 서서히 하는 일이 줄었다. 근무기간이 오래된 사람부터 소집해제를 시켰다. 각 부대에서 일정한 기간 이상 근무한 사람들을 모아 몇 가지 행정절차를 마친 뒤 귀가시켰다. 자신의 짐을 챙겨 한곳에 모이게 하고 춘천역으로 보냈다. 다시 기차를 타고 용산역까지 와서 해산시켰다. 아침 일찍 출발한 기차가 플랫폼에서 우리를 내려놓고 다시 떠났다. 십여 명이 같은 군복을 입고 서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순리가 이끈 삶85

희게 빛바래 가는 기억처럼, 표기산 어르신에게는 따뜻한 날씨와 지금은 얼굴마저 흐려진 이들이 서로를 향해 작별 인사하던 장면만이 남았다. 표기산 어르신은 이때의 활동이 인정되어, 2010년 1월 10일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다.

그 후 표기산 어르신은 스물두 살 때, 정식으로 입대해 군 생활을 했다. 2사단 31연대에서 보병으로 3년간 근무했다. 어르신이 근무한 백마고지는 6·25전쟁 당시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장소로 유명했다. 열흘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고지의 주인이 열두 번 바뀌었다고 하니 밤낮으로 벌어진 전투가 생생히 그려질 법도 했다. 백마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것은 9사단이었지만 고지를 완전히 탈환한 뒤에는 2사단이 고지를 장악해 경계 근무를 섰다. 이때만 해도 38선이 허술해 북한군 수색대가 밤이면 몰래 넘어와 국군을 죽이고 가는 사례가 많았다. 표기산 어르신은 당시를 회고하며 경계근무를 설 때면 북한군이 넘어와 목을 따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염려로 긴장을 많이 했다고 했다.

86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제대를 하기 전 중매가 들어왔다. 어르신보다 한 살 어린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제대를 하려면 아직 몇 개월이 남아 있었지만, 첫눈에 반해 먼저 결혼식을 올렸다. 남양주에 있는 용진교회에서였다. 부모님을 비롯해 하객들이 기꺼이 축하해주었다. 지나온 과거를 되돌아보면 참으로 힘들었지만 그날만은 정말 크게 웃을 수 있었다. 제대를 하니 신혼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보다 어찌 더 행복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기쁜 나날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아들 셋, 딸 하나가 생겼다. 그렇게 사랑하는 가족이 생겼으니 이제는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지고 사회인으로서도 제 역할을 해내야 했다. 표기산 어르신은 시에서 환경미화 일을 시작했다. 27년 근무하고 정년퇴임했다. 이후에도 일을 멈추지 않았다. 85세까지 아파트 경비로 일했고, 지역에서 미화 일을 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슬하에 둔 자식들이 모두 출가해 저마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나라를 지켰던 마음으로 아이들을 키웠던 아버지로서는 그저 대견할 따름이었다.

순리가 이끈 삶87

자유와 평화를 수호한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베살트아남전남쟁았 참전다유는공자 기 권오적진 어르신

맹호부대원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긴 권오진 어르신.

머리에 파편이 박혀 있고,

고엽제 피해를 입어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용맹한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자유를 수호했다는자부심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권오진 1943. 12. 28. _

베트남전쟁 참전

1966. 04.

1994.고엽제후유의증 경도 판정1994.

국가유공자 지정

권오진 어르신은 1943년 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퇴곡리에서 태어났다. 권오진이라는 이름은 가문의 돌림자인 r진s자를 넣어 마을 훈장을 지내셨던 큰아버지가 지어주셨다. 퇴곡리는 오대산 소금강 입구에 있는 마을로 연곡천을 따라 생성된 마을이었다. 퇴곡 8경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연경관이 아름답고 대대로 권씨들이 살아온 집성촌이어서 이웃사촌이 일가친척이었다. 정월대보름에는 찰밥을 먹고, 단오제를 지내고, 봄이면 쑥을 캐 쑥국을 끓여 먹었다. 가을이면 연곡천으로 올라오는 연어를 잡았다. 겨울에는 강원도에서 유명한 감자로 끼니를 때웠다. 살림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어린 권오진 어르신에게는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헌데 일곱 살 되던 해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연곡천을 사이에 놓고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가 일어났다. 가족 모두 피난을 떠났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다. 부서진 집을 새로 짓고 농사도 새로 지었다. 권오진 어르신은 늦게 국민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시작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면서 가족과 서울로 이사를 왔다. 서울은 구로공단을 중심으로 공장이 들어서고 일

96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거리도 많았다. 당시 서울에는 구로구 들판, 관악산 아래, 철길 주변에 무허가로 판자로 대충 집을 짓고 여러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권오진 어르신 가족도 그들과 함께 살며 공장으로 일을 다녔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왔기 때문에 공부도 계속하고 싶었다. 당장 배고픔이야 공장에서 받은 월급으로 해결했지만 앞으로가 막막했다.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거나 하고 싶은 사업을 하려면 분명 공부를 해야 했다. 하지만 당장 공부를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가정 형편상 부모님에게 도움을 받을 처지가 되지 않았다. 권오진 어르신은 하는 수 없이 학업을 포기했다. 그 무렵 군대에 입대하라는 소집통지서가 날아왔다. 사병으로 입대한 지 두 달쯤 지났을 때, 하사관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떴다. 권오진 어르신은 그 공고를 보고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 하사관이 된다면 안정적인 직업을 얻는 동시에 새로운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망설이지 않고 바로 지원했다. 그렇게 간부훈련을 받고 하사관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군대생활을 하면서 다시 한 번 기회가 찾아왔다. 월남전 참전

살아남았다는 기적97

이었다. 1964년 베트남전쟁에 전투부대를 보낸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권오진 어르신은 베트남전쟁에 참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미국의 거듭된 요청으로 한국군은 1964년 9월부터 1973년 3월까지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이 기간 동안 파견된 한국군은 31만 3,000명에 달했다. 권오진 어르신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권오진 어르신은 베트남전쟁 참전을 인생을 바꿀 전환점으로 여겼다. 물론 월급도 많았다. 하지만 베트남전쟁에 참전하고 싶다고 해서 모두가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한국은 처음 외과병동 요원, 교관 등 지원 병력을 파견했다. 이어 건설 지원 임무를 담당하는 비전투부대를 파병했다. 하지만 전쟁이 계속될수록 전투병력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미국은 전투병력을 보내줄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해왔다. 그때가 1966년 4월이었다. 권오진 어르신은 전투병력인 맹호부대원으로서 베트남으로 떠났다.

베트남 퀴논지역으로 간 권오진 어르신은 처음 대대장 전령으로 발령을 받아 복무를 시작했다. 전투병으로 베트남까지 왔

98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는데 전령이라니, 권오진 어르신은 전투병으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요청이 받아들여져 일명 혜산진부대로 불리는 맹호부대 26연대 11중대 2소대 2분대장으로 전투에 투입되었다. 용감하게 싸워 승리를 거두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무리 악천후의 날씨여도, 총탄이 빗발치는 최전선이어도 꿋꿋이 앞장서 싸웠다. 밀림에서 야간수색을 하며 뜬눈으로 밤을 보내야 할 때도 많았다. 야간수색 도중 잠시 쉬고 있을 때 이따금 하늘에서 보슬비가 내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빗방울이 아니라 미군이 밤중에 몰래 뿌린 고엽제였다. 베트남답지 않게 들판의 나무며 풀들이 낙엽 지는 곳을 볼 때면 의아했다. 그것이 고엽제 때문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킬오계곡에서는 한 달 넘게 매복하며 적진을 수색했다. 지도를 들고 첨병으로 나아가 길을 열었다. 칼로 정글의 나무를 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미 우리의 움직임을 베트콩이 예의주시하면서 포위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부대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 실개천을 지날 때쯤 총소리가

살아남았다는 기적99

들려왔다. 권오진 어르신은 베트콩 총소리를 분간할 수 있었다. r핑s 하는 소리는 한참 옆으로 빗겨 간 총소리였고, r피잉s 하고 약간 먹먹하게 들리면 바로 옆을 스치는 소리였다.

총소리를 듣자마자 바로 엎드렸다. 적군이 내려오는 것을 보고 조준해 사격했다. 이러한 위험천만한 격전의 상황에서 전투 경험이 없는 사람은 무서워서 연발을 쏘게 되어 있었다. 그게 정말 위험했다. 총알이 금방 떨어져 탄창을 채우다 죽게 되는 경우가 많은 탓이었다.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실개천 옆으로 난 도랑을 이용해 뒤따라오는 아군과 합류한 뒤 전투를 이어갔다. 그날따라 총탄이 수도 없이 몸을 스쳤다. 철모를 쓰고 있었지만 머리가 따끔했다. 순간 총알을 맞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부모형제도 없는 타국에서 이렇게 죽는 것인가. 서늘한 생각이 먼저 스쳤다. 손으로 머리를 만져보았다. 다행히 피는 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심했지만, 고통이 계속되었다.

전투가 끝나고 병원에 입원했다. 검사 결과 파편이 튀어 귀 뒤편 힘줄에 박혔다고 했다. 전장에서 수술은 쉽지 않았다. 생활

100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에도 지장이 없어 그냥 두었다. 2010년이 되어서야 다시 검사를 했고, 그때 몸에 피탄이 남아 있다는 걸 알았다. 권오진 어르신처럼 위기 속에서 생명을 구한 이가 또 있었다. 같은 전투에 참여했던 윤세만 상병은 배낭에 넣어두었던 위문편지 덕에 목숨을 구했다. 총알이 편지 더미에 박힌 것이었다. 윤세만 상병은 그 총알을 간직한 채 군 생활을 지속했다. 아마도 그 기적의 총알을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을지 몰랐다. 끔찍한 전투에 죽어나간 전우도 많았지만 권오진 어르신은 다행히 살아남아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꼬박 24개월을 최전선에서 분대장으로 근무하고 1968년 4월

살아남았다는 기적101

귀국했다. 귀국 후 권오진 어르신은 스물아홉 살에 장가를 들었다. 당시로써는 좀 늦은 나이였다. 1972년 결혼식을 올릴 형편이 되지 않아 무작정 동거를 시작했다. 그때는 모두가 가난했기 때문에, 누구나 겪는 가난이 새삼스레 문제 될 건 없었다. 둘이서 열심히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오리라 확신했다. 근면, 성실이 어려운 삶을 헤쳐나가는 무기였다. 다음 해에 첫째 딸이 태어났다. 세상을 모두 얻은 기분이었던 권오진 어르신은 다시 한 번 열심히 살겠

노라 다짐했다. 권오진 어르신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해 아내에게 늘 미안했다. 한 집안을 꾸리고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었는데, 가난하다는 핑계로 식을 올리지 못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즈음 할머니 환갑도 있고 해서 식을 먼저 올리자 마음먹었다. 당시 4,000원을 주고 사모관대를 빌렸다. 조선시대 관리의 관복을 결혼식 예복으로 만들어 대여하는 곳이 많았다. 아내는 스란치마에 원삼을 입고, 머리에 족두리와 드림댕기를 했다. 영락없는 신부였다. 마당에 상을 차리고 서로 절을 올렸다. 그날만은 가족 모두의 축

하를 받았던 행복한 주인공들이었다.

102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전쟁은 끝났지만 권오진 어르신은 아직도 전쟁의 후유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이른바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 때문이었다. 미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정글 지역의 나뭇잎을 제거해 전투를 수월하게 하려고 1964년 7월부터 1970년 10월까지 무려 7년간 베트남 전 국토면적의 18퍼센트에 달하는 지역에 1,200만 갤런의 고엽제를 살포했다. 고엽제의 독성을 알고 있었던 미군은 오로지 전쟁에 이길 목적으로 이렇게 많은 고엽제를 살포한 것이었다. 적군을 쉽게 발견할 수 있어 전투에는 도움될지 모르지만, 고엽제를 맞은 사람들은 평생 그 후유증으로 고생해야 했다. 한국군은 물론 베트남 사람, 미군까지 그 피해가 여전히 크다. 미국의 요청에 따라 전쟁에 참여했지만, 한국군의 고엽제 피해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3년, 고엽제 후유의증 환자지원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고엽제 후유증 환자와 후유의증 환자, 그리고 2세 환자에 대해 국가유공자 예우에 준한 보상과 의료보호를 하고 있다. 권오진 어르신은 1994년 고엽제 피해로 병원 진단을 받아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다.

살아남았다는 기적103

내 생애 단 하나의 이름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故 정종남의 아내 김분순 어르신

한 동네에서 나고 자라 사랑을 하게 된 정종남, 김분순 어르신.

아름다운 연애를 하던 젊은 날. 정종남 선생은 군대에 가야 했다.

군대생활은 쉽지 않았다. 구타와 괴롭힘을 피해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하지만 그곳에서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을 얻었고

평생 낳지 않는 병에 걸리고 말았다.

하지만 두 분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고, 결혼을 했다.

서러운 시집살이와 남편 병간호를 하며 평생을 보냈다.

모진 세월 앞에 마음 바뀌지 않을 장사가 없다고 했지만,

김분순 어르신은 지금도 여전히, 세상을 떠난 남편이 그립다.

국가유공자

김분순 1952. 05. 27. _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정종남 1947. 11. 10. _ 2013. 09. 13.

1969.베트남전쟁 참전1971.결혼

2008.국가유공자 지정

아들이 아니라 분하다고 해서 분순이. 사연을 듣고 보면 서러운 이름이었지만 오직 한 사람에게만은 귀하고 고운 이름이었다. r순이의 웨딩드레스가js로 시작하는 애달픈 연애편지를 보내곤 하던 낭만적인 남자친구에게는. 정종남 선생과 김분순 어르신이 처음 만난 것은 196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구리 토박이었다. 김분순 어르신은 구리 박촌 이문안로에서 태어났고, 정종남 선생은 구리 백교에서 태어났다. 학창 시절, 단정한 교복 차림의 김분순 어르신을 마주친 정종남 선생은 그야말로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버렸다. 매일 등하굣길의 김분순 어르신을 남몰래 흠모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곤 했었다. 후에 공고생 정종남 선생은 졸업을 했고 사정상 월남전에 참전했다. 혹독한 시절을 보낸 뒤 고국으로 돌아온 정종남 선생은 더 늦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김분순 어르신에게 고백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시 김분순 어르신은 청량리 맘모스 백화점 양품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곧바로 그녀를 찾아간 정종남 선생은 자신이 품어온 오랜 마음을 고백했고, 둘은 곧 연애를 시작하게 됐다. 여행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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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는 없던 시절. 두 사람은 구리에서 시작해 워커힐, 남산으로 이어지는 드라이브로 데이트를 즐겼다. 1971년, 결혼을 마음먹고 집안 어른들에게 결혼 허락을 구했으나 김분순 어르신의 어머니와 오빠가 결사반대하고 나섰다. 정종남 선생은 이 사람 아니면 죽겠다며 절절하게 애원했고, 간신히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있었다. 둘은 평생을 구리에서 살았다. 그러니 결혼해 구리에서 신혼살림을 차리는 것도 그들로서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사람의 결혼은 시작부터 순탄치 못했다. 월남전 참전의 후유증으로 정종남 선생이 이곳저곳 병을 앓기 시작했던 거였다. 사실 정종남 선생은 결혼 전부터 후유증의 기색을 보였다. 월남전 참전 직후, 혀에 고름이 나서 치료를 받다 결국 일부를 잘라내야 했다. 결혼 후에는 옆구리에 고름이 나기 시작했고, 피부 가려움증으로 밤낮없는 고생을 해야 했다. 용종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10년이나 용종 제거 수술을 반복했고, 한 번은 용종을 30개나 떼어야 했다. 평생을 고생했던 갖은 질병은 결국 림프종 발병으로

내 생애 단 하나의 이름111

이어졌다. 그때는 도대체 왜 그렇게 아픈지 알 수도 없었다. 고엽제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건 아주 훗날의 일이었다. 그렇게 잦은 병치레로 고생했던 남편이었지만, 구리에서 그는 소문난 인격자이기도 했다. 말할 수 없이 사람이 착하고, 키도 크고, 인물도 좋았다. 월남에 가기 전에는 체구도 듬직했다. 월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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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와서는 병치레로 삐쩍 말라서 안쓰러울 정도였다. 주변 사람 들이 다 알아줄 만큼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다고, 아내 김분순 어

르신은 따스한 눈빛으로 추억했다.

그 시절 시집살이는 아주 혹독했다. 시누이의 이간질과 시어머니, 시아버지의 미움에 김분순 어르신은 남몰래 눈물을 훔쳐야 했다. 12월 한겨울, 메주를 쑤라는 말에 이른 새벽부터 콩을 주물러야 했고, 양푼을 조금 찌그러뜨렸다고 한겨울 바람보다 매서운 욕을 들어야 했다. 정육점을 할 때는 발등을 다쳤는데,

그깟 발등 좀 다쳤다고 집안일을 못 하냐며 불호령이 떨어졌다. 시누이는 제 성질에 못 이겨 빨래하려고 담아 놓은 빨랫감을 패대기치기도 했다. 남편만 바라보고 살기엔 너무 서러운 시집살이였다. 그래도 김분순 어르신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몇 번이나 도망칠까도 생각했지만, 하염없이 착하고 선한 남편을 보면서 r그래, 그래도 이 사람을 믿어보자s 싶어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정종남 선생 역시 그런 아내가 안쓰럽게 생각되었다. 자기만 바라보고 인내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아내의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 1973년에는 큰딸을, 1975년에는 작은딸을 낳았다. 사랑스러운 두 딸과 함께 화목한 가정을 꾸리며 살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두 사람의 가정에는 늘 월남전의 그늘이 여전했다. 집안에 짙게 서려 있던 그 어둡고 참담한 월남전의 흔적이 끝내 정종남 선생의 발목을 잡았다.

정종남 선생은 군 생활 동안 겪은 굶주림과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월남을 선택했었다. 졸병이었던 정종남 선생에게는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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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급이 자주 돌아오지 않았다. 철도 씹어먹을 나이인데 어찌나 굶주렸는지, 한밤중에 보초를 서기 위해 나가면 흰 돌멩이들이 감자로 보일 지경이었다. 보초를 서다 초가 주막집에서 밥을 얻어먹으려 했으나, 그 집도 가난해서 줄 밥이 없었다. 쓰레기통이라도 뒤지고 싶은 심정으로 버틴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선임의 폭력이 극심해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싶었다. 맞다가, 맞다가 지치면 물을 뿌리고 정신을 차리게 해 다시 때렸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혼자 힘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생활이었다. 그때쯤 월남에 가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월남에 가면 배급이 배불리 나올 거라는 생각에, 그리고 선임의 폭력을 피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정종남 선생은 자원해서 월남행을 결정했던 거였다. 차라리 전쟁터가 나을 거라는, 가슴 아픈 결정이었다.

그러나 월남전은 정종남 선생과 김분순 어르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앞서 말했듯 귀국하자마자 정종남 선생은 고름이 차오르는 혀의 일부를 잘라내야 했다. 혀는 짧아졌고, 발음은 부정확했다. 후에 요식업 지부장으로 활동했던 때에도 정

내 생애 단 하나의 이름115

종남 선생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데 애를 먹을 때가 많았다. 결혼 후에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t죽여! 죽여!u, t저놈 죽여!u 하면서 고함을 지르거나 이를 바득바득 갈아댔다. 김분순 어르신은 덩달아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 남편을 진정시켜야 했다. 김분순 어르신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날을 고통으로 끙끙 앓는 남편의 등을 쓸어주어야 했다. 전쟁이 남긴 상흔이었다. 결혼 후 30년, 정종남 선생은 단 하루도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 고름, 용종, 가려움증과의 싸움이었고, 어깨 통증과 두통도 꾸준했다. 목 상태가 안 좋았는데, 알고 보니 림프종이었다. 오랜 투병 끝에 마음조차 병들어 끝내는 우울증까지 왔다. 그래도 곁에 강인한 김분순 어르신이 있어 정종남 선생은 30년이라는 세월을 견딜 수 있었다. 그것은 김분순 어르신도 마찬가지였다. 한결같은 사랑을 주는 정종남 선생이 있어 모진 시집살이도, 고된 병시중도 기꺼이 감내할 수 있었다. 정종남 선생은 부부 동반 모임에 나가는 날에는 항상 김분순 어르신을 칭찬했고, 주변에서 김분순 어르신이 예쁘다고 칭찬하면 본인보다 더 기뻐했다. 친목회를 통해 딱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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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동반 여행을 다녀온 일도 있다. 속초였는데, 김분순 어르신이 당당하게 나가서 인사말을 하는 것을 보고 정종남 선생이 누구보다 놀라면서도 좋아하고 기뻐했다. 정종남 선생은 30년을 꼬박 앓으면서도 그것이 고엽제 후유증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고엽제 후유증인 것을 알게 된 것은 보훈회관의 총무를 지냈던 신영환 어르신 덕분이었다. 신영환 어르신 또한 월남전에 참전한 바 있었다. 그분이 먼저 정종남 선생을 알아보고 병원에 데려갔다. 고엽제 판정이며, 국가유공자 지정이며, 여러 가지 사정을 돌봐주었다. 정종남 선생과 김분순 어르신은 여태 새카맣게 모르고 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양대병원에서 고엽제 판정을 받았고, 고엽제 후유증 5급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보훈회관에 국가유공자로도 등록했다. 30년간 까닭 모를 고통과 싸워온 정종남 선생과 그 투병을 조력해온 김분순 어르신은 그제야 원인을 알게 되었다며,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고엽제의 후유증은 강력했다. 2013년, 정종남 선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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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세의 나이로 별세하셨다. 이제 밤이면 더는 끙끙 앓는 소리도, 아프다며 혀를 차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앓는 소리로 가득하던 밤이 일순간 고요해졌다. 김분순 어르신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모든 밤이 견딜 수 없이 쓸쓸했다.

김분순 어르신은 서울 동작구 현충원에서 깊은 잠을 자는 남편 정종남 선생을 자주 떠올리곤 했다. 두 딸이 살갑게 챙겨주고

잘해주지만, 남편만큼 든든한 내 편은 없는 듯했다. 딸들이 들으

면 서운하겠지만, 남편만이 메워줄 수 있는 외로움이 있는 법이라고 김분순 어르신은 생각했다. 노년의 부부 둘이서 손잡고 둘레길을 걷거나 여행을 다니는 것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길을 걷다 문득 좀 마르고 키가 큰 사나이가 보이면 우리 남편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하다가도 이내 깨달았다.

r아, 우리 남편 갔지.s

그러면 가슴속에 사무치는 외로움과 보고픈 맘, 그리고 그리움이 밀려왔다. 솔직히 시집살이도 고되었고, 병시중도 지긋지긋했다. 그래도 세상 가장 다정하고 착한 남편이었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 보고 싶을 때가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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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남편 정종남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꼭 10년이 되었다. 아직도 김분순 어르신은 정종남 선생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생전 특히 좋아하는 음식만 봐도 그를 떠올린다고. 그것은 오징어회, -갈비, 족발, 아이스크림 등 소박하고 일상적인 음식들이었다. 그러니 그만큼 자주 남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작년부터는 미망인회에도 나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많은 위로를 얻었다. 함께 활동하는 다른 분들과 같이 현충원에 가기도 했다. 이번 5월에도 함께 가기로 했는데, 남편이 좋아하던 음식을 들고 갈까 한다. 그리움은 오늘도 한 발짝 먼저 남편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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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에 바친 20년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故 조병태의 아내 김춘자 어르신

평생 군인으로 산 故 조병태 선생.

고등학교를 마치고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입대를 하자마자 6h25전쟁이 일어나 사병으로 전장에 투입되었다.전방부대에서 군 생활을 시작해

홍천, 화천, 인제, 조치원 등지로 옮겨 다녔다.

베트남전쟁 때는 장교로서 참전을 피할 수 없었다.

큰 전쟁을 두 번 치르고 전국으로 다니며

군인 가족으로 살아야 했던 아내 김춘자 어르신.

남편이 전쟁터로 나가 있는 동안 생활비를 벌며 가족을 지켰다.

20년 세월은 남편이 조국에 바친 시간이지만

동시에 김춘자 어르신이 나라에 바친 시간이기도 하다.

국가유공자

김춘자 1935. 02. 20. _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조병태 1930. 01. 14. _ 2007.

1950.6h25전쟁 참전

1964.베트남전쟁 참전

국가유공자 지정

n

조병태 선생은 한국전쟁 당시에는 어린 사병이었지만, 베트남전에는 장교로 참전했다. 베트남 맹호부대 보급과장으로 군 생활을 하며 고국의 집에 월급을 보냈다. 가족에게 보내고 남은 돈으로는 사병들의 구두를 사주거나, 굶주린 베트남 사람들을 도왔다. 군인으로 20년을 복무하며 매 순간 강하고 굳세어야 했지만, 일생 누구보다 여리고 착한 마음을 간직한 분으로 사셨다.조병태 선생은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친어머니가 3남매를 두고 일찍 돌아가셨고, 새어머니가 들어와 4남매를 낳아 총 7남매의 장남이 되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장남은 군인의 삶을 선택했다.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 육군 중위 신분으로 김춘자 어르신과 결혼해 아들 넷을 낳아 길렀다.

군인 가족의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결혼하자마자 아내에게 시집살이를 시켜놓고 떨어져 살아야 했다. 갓 결혼한 새색시는 남편을 만나러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서 강원도까지 혼자 찾아갔다. 주소도 알려주지 않았던 터라 아내 김춘자 어르신은 오직 군번 하나만 외운 채 무작정 길을 나섰다. 부대에 도착해 면회를 요청했더니, 남편 대신 사병들이 나왔다. 조병태 선생은 자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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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는 면회 올 사람이 없다며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김춘자 어르신은 군대 근처에 방을 하나 빌려놓고 남편을 기다렸다. 그렇게 살림을 시작했다. 그 뒤로도 군인인 남편의 이동이 많아 살림을 장만할 틈도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살림살이 하나 없이 홍천으로, 화천으로, 인제로, 조치원으로 군용 트럭을 타고 다녔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아이들도 이동 중에 태어났다. 첫째 아이가 태어날 때, 아내 김춘자 어르신은 남편인 조병태 선생에게 의사를 불러오라고 했다. 조병태 선생은 의사가 왕진 가고 없던 탓에 그냥 돌아와야 했다. 김춘자 어르신은 사람이 죽게 생겼다며 다시 다녀오라 채근했다. 몇 번이나 헛걸음을 하고서는, 결국 부대에서 의무관 장교 소령을 데리고 와 아이를 낳았다. 둘째도 인천에서 조치원으로 이동하는 차에서 낳을 뻔했다. 홍천에서 셋방을 얻으러 돌아다닐 때였다. 애가 셋이라고 하니 방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들 하나는 다른 데 맡겨놓고 둘만 우선 데리고 가서 살았다. 아들이 눈에 밟혔던 조병태 선생은 집주인과 술 한잔하며 사실 아들이 하나 더 있다고 고백했고,

조국에 바친 20년127

다행히 집주인은 내외의 딱한 사정을 이해했다. 그러고 나서야 맡겨놓았던 아들을 데리고 와 다섯 식구가 같이 살 수 있었다. 제대 후에는 막내아들이 태어나 아들 넷을 키웠다.

그랬다. 조병태 선생은 자식에게는 다정한 아버지였다. 강원도 인제에서 복무할 때, 한번은 아들이 없어져 온 동네가 뒤집어진 적이 있었다. 알고 보니 조병태 선생이 아들의 배냇머리를 깎아주려고 이발관에 데려갔던 거였다. 둘째가 태어난 직후에는 큰아들을 돌볼 사람이 없어 아이를 부대에 데리고 갔다가 저녁에 같이 퇴근해 오기도 했다. 베트남에 가 있는 동안에도 다달이 편지를 부치며 아이들의 안부를 물었던 그였다.

당시, 육군 장교에게 월남전 파병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병태 선생은 출국 전날에서야 아내에게 내일 월남 간다는 말을 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날, 그렇게 말 한마디만 남기고 맹호부대로 떠났다. 그래도 시집살이를 하고 있던 아내와 자식들에게 셋방 하나를 얻어주고 갔다. 당시 조병태 선생의 새어머니는 손자들에게 먹이는 쌀도 아까워하던 사람이어서, 가

족들이 눈칫밥을 많이도 먹었다.

128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그렇게 가족들을 두고 떠나온 전쟁터는 참혹했다. 조병태 선생은 장교였기에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는 않았으나, 가까이에서 사람이 총에 맞는 모습을 보았다. 총에 맞은 전우의 몸에서는 피가 솟구치듯 뻗어 나와 사방으로 튀었다. 군인 가족들도 삶이 고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쟁터로 간 남편이나 아들이 돌아와야 살았구나, 하며 마음을 졸이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에 파병 갔던 군인들이 부산항에 도착하던 날, 군인 가족들도 미리 마중을 나왔다. 아내 김춘자 어르신도 부산에 마중 나온 다른 군인들의 아내들과 함께 남편을 기다렸다. 마음은 초조해도 군인 가족들과 함께라서 덜 무서웠다. 커다란 배가 부두에 정박하자, 군인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와 가족들을 찾았다. 김춘자 어르신은 저만치 멀리서 손을 흔드는 모습만으로도 남편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남편 조병태 선생은 고국 땅을 밟자마자 아이들부터 찾는 옛날 그 모습 그대로의 아버지였다. 6h25전쟁과 베트남전쟁에 모두 참전한 조병태 선생은 20년을 꼬박 채우고 나서야 대위로 제대했다. 군인으로 살기에는 천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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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여리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군인이라는 사명으로 20년을 꼬박 복무했다. 조국을 위해 이십 년 세월을 바쳤는데, 제대 처리가 되는 데는 단 보름밖에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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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김춘자 어르신에 따르면 조병태 선생은 세상 물정에 썩 밝지는 못했다. 제대 후에 천호동에서 배밭을 하던 사람에게 땅을 샀다. 같은 군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땅을 덥석 살 정도로 남편은 순진했다. 그 땅에 양계장을 차렸다. 경험도 없이 시작한 사업이 순탄할 리가 없었다. 몇천 마리씩 들인 병아리들이 여름이면 더워 죽고, 겨울이면 얼어 죽었다. 할 수 없이 살아남은 것들로만 양계장을 꾸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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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꾼들도 죄다 군인들이었다. 닭을 잡아다 밥 해먹이고 나니 남는 것도 없었다. 운 좋게 선수촌에 납품하게 되었지만, 돈이 모이는 대로 당시 경리들이 돈을 빼돌렸다. 그러던 사이에 배밭이고 집이고, 다 어디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베트남에서는 편지를 부칠 때마다 가족들에게 사기 치는 사람이 많으니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제 앞가림은 어림없었다. 그 뒤에도 이것저것 해보려고 했지만, 남편은 돈 버는 재주가 없었다. 대신 김춘자 어르신이 장사해서 가족들을 먹여 살렸다. 마장동에서 장사하는 이모의 가게 문 앞에 노점을 차렸다. 처음에는 섣달대목에 잡는 소의 부속을 팔았다. 추운 줄도 모르고 몇백 근을 팔았다. 나중에는 돼지머리를 누른 잔치 고기를 팔았다. 새벽별이 떠 있을 때 나가 고기를 썰고, 다시 별이 뜰 때까지 일했다. 김춘자 어르신이 고기를 썰면 조병태 선생이 배달했다. 조병태 선생은 배달 가는 것도 어려워할 만큼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그래도 길눈은 밝아서 부지런히 배달을 다녔다. 그걸로 아들 넷을 키우고 공부시켰다. 그렇게 자식을 다 키워놓고, 노후를 편안히 보내기만 하면

132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되는데, 조병태 선생의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병원에서는 감기라고 했지만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다른 병원을 가기보단 감기라는 의사의 말을 믿기로 했다. 밥맛이 없으면 약을 줄이고, 약이 안 듣는 것 같으면 약을 늘렸다. 그러던 사이 조병태 선생의

폐에서는 종양이 자라고 있었다. 병원을 옮겼을 때는 이미 폐암 3기였다. 의사는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했다. 의사가 출장을 가면서 김춘자 어르신에게 남편이 오래는 못 살 것 같으니 준비를 하라 일렀을 정도였다. 그러나 조병태 선생은 의사가 돌아왔을 때까지 한두 달 이상을 버텨냈다. 의사는 보통 사람 같으면 절대로 이겨내지 못했을 고통이라며, 조병태 선생이 r군인 정신s으로 버틴 거라고 했다.

조병태 선생은 아픈 몸을 이끌고 보훈처로 갔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자기가 떠나도 어떻게든 아내 김춘자 어르신이 편하게 노후를 보내게 하고 싶었다. 그때까지도 김춘자 어르신은 고엽제가 뭔지도 몰랐다. 조병태 선생은 창백한 얼굴로 혼자 창구로 가 고엽제 보훈 신청을 했다. 나중에서야 김춘자 어르신은 조병태 선생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생했다는 것을

조국에 바친 20년133

알았다. 지금도 김춘자 어르신은 혼자 고엽제 국가유공자를 신청한 남편을 떠올리면 가슴이 아려왔다.

그날은 조병태 선생이 웬일인지 밥을 더 달라고 했었다. 평소 같지 않게 이상했다. 김춘자 어르신은 이튿날 젖은 수건으로 남편 조병태 선생의 머리를 감기고, 빗으로 말끔히 빗겨주었다. 새신랑 같다는 아내의 말에 조병태 선생은 힘없이 웃었다. 그러고는 조병태 선생은 자는 듯이 세상을 떠났다. 김춘자 어르신이 아침에 숨소리를 들어보니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조병태 선생의 장례식에 전우들이 왔다. 병원에 있는 동안 아무리 기다려도 찾아오지 않아 농담으로 앞으로는 상대도 하지도 말라고 했던 전우들이었다. 감사하게도 조병태 선생의 장례식에 왔던 장군들은 49재를 지내는 절에도 찾아왔다. 보답도 하지 못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제는 모두가 세상을 떠난 듯했다. 마찬가지로 군인으로 있는 동안 같이 지냈던 다른 군인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져 연락처를 알 수 없었다. 다른 군인 가족들은 살림살이가 있는 편이었지만, 조병태 선생 가족은 살림이라고는

134잠들지 않는 이야기 ◆ 다섯 번째

하나 없이 담요 한 장 가지고 거처를 옮겨 다녀야 할 정도로 이동이 잦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 시절을 함께 보냈던 군인 중 상당수는 세상을 떠났고, 살아있더라도 연락이 끊겨 생사를 알아볼 수도 없었다. 그렇게 저마다 한 세월을 살다 가는 게 우리의 인생이었나, 생각할 때마다 마음에 안타까움이 일었다.

조병태 선생은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아내 김춘자 어르신은 조병태 선생을 욕심 없고 마음 여린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스스로 생각해도 군대와는 맞지 않는 성격이라고 말했지만, 조병태 선생은 20년간 굵직한 두 전쟁에 참전하며 조국을 위해 몸을 바쳤다. 이를 r군인 정신s 말고는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아내 김춘자 어르신은 그 군인 정신이 남편 조병태 선생과 자신의 가족들을 지켜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조국에 바친 20년135

천국에 있는 당신을 기억하며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故 김일동의 아내 안성화 어르신

안성화 어르신은 결혼과 함께 남편의 병간호를 시작했다. 1964년부터 1967년까지 3년 동안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故 김일동 선생은 고엽제 후유증이 있었지만

그때는 정확한 병명을 알지 못했다.

17년 동안 긴 투병 끝에 정확한 병명도 알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정확한 병명을 몰랐기 때문에 국가유공자 신청도 번번이 반려되었다.

포기하지 않고 사망진단서와 병명을 추적해 세 번째에 국가유공자가 되었다.안성화 어르신은 늦게나마 남편의 죽음에 대한 이유를

밝힐 수 있어 덜 억울하다며 눈물을 보이셨다.

국가유공자

안성화 1954. 08. 15. _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김일동 1944. 05. 25. _ 1989. 05. 26.1965.베트남전쟁 참전

1994. 6. 1.국가유공자 지정

1964년, 스물두 살이었던 김일동 선생은 군인이 되었다. 맹호부대 1차 차출 포병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김일동 선생은 베트남에서 3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1967년이 되어서야 고국으로 돌아왔다. 1972년, 아내가 된 안성화 어르신과는 선으로 만나 결혼했다. 김일동 선생은 안성화 어르신보다 열두 살이 많았다. 김일동 선생은 안성화 어르신이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였을까, 월남에서 안전하게 중대장 차만 끌었다고 말했다. 행여나 참전한 자신을 꺼리면 어쩌나 걱정된 탓이었다. 사실 안성화 어르신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하지만 안성화 어르신은 1남 5녀 중 넷째였다. 결혼하기 싫다고 고집을 피우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김일동 선생과 얼굴을 몇 번 보지도 않았지만, 결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안성화 어르신은 김일동 선생의 고향 구리에서 살림을 시작했다. 김일동 선생은 결혼식 다음 날부터 아프다는 말을 했다. 두통이 있었고 어지럽다고 했다.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안성화 어르신은 김일동 선생이 막걸리를 마셔서 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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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만 알았다. 금방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은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좀처럼 낫지 않았다. 남편의 투병 기간은 점점 길어졌다. 안성화 어르신은 시댁에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여덟 살이었던 막내 시동생을 씻기고 먹였다. 결혼생활은 고됐다. 당시 고작 열아홉 살이었던 안성화 어르신은 결혼생활에서 행복을 느낄 수 없었다. 1972년에 첫째 아들이, 1973년에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아이들을 낳고 키우면서 비로소 행복을 느끼기 시작했다. 건강이 좋지 않은 남편이었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용인에 있는 자연농원에 나들이도 갔었다. 남편이 아프니 안성화 어르신이 가장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김일동 선생은 안성화 어르신이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항상 어르신을 안쓰러워했다. t내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나 때문에 당신 불쌍해.u

안성화 어르신은 남편을 위로했다.

t나는 건강해서 괜찮아. 당신만 나으면 되니까.u

그런데 막내딸을 낳고 남편의 건강이 더 악화되었다. 남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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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딸이 세 살 되던 해부터는 거동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리고 5년 동안 병상에 거의 누워만 있었다. 아픈 남편은 큰 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았다. 하지만 의사는 원인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원인을 알 수 없으니 마땅한 치료도 할 수 없었다. t외국은 이런 증상을 가진 환자들이 꽤 있어요. 하지만 여기서는 못 고쳐요.u 못 고친다니, 참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안성화 어르신과 김일동 선생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김일동 선생은 계속 말라갔다. 증상이 있는데도 병명조차 알 수 없었다. 몇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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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을 돌아다니다 다행히 병명을 알 수 있었다. 근위축성신경측색경화증. 의사는 남편을 위해 세 달치 약을 무료로 주기도 했다. 김일동 선생은 가장의 역할까지 도맡아 하는 아내에게 늘 미안했다. t베트남 가기 전에 당신을 만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으면 베트남 가서 당신한테 돈이라도 보내줬을 텐데.u 남편 김일동 선생이 베트남전쟁 참전으로 받은 돈은 남아 있지 않았다. 시댁 식구들이 생활비로 다 쓴 상태였다. 남편은 안성화 어르신에게 미안해서 어떻게 하냐고, 미안한 마음을 자주 표현했다. 안성화 어르신은 그런 남편을 위해 더 부지런히 살았다.

마당에 둔 야전 침대에 남편을 눕히고 씻겨 주었다. 남편이 먹고 싶은 음식을 말하면 곧장 장을 봐서 요리를 했다. 하지만 남편은 그토록 먹고 싶어 했던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남편은 점점 더 말랐다. 힘이 없어서 숟가락을 들지 못할 정도였다. 체중이 30킬로그램대였다. 1989년 5월, 긴 투병 끝에 결국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나중에 남산 팔각정에 같이 가자고 한 말은 끝내 지켜지지 않은 약속으로 남았다. 남편이 안성화 어르신보다 먼저 세상에서 가장 먼 곳으로 떠났지만, 어르신은 남편이 비로소 고통에서 벗어났겠다는 생각에 안도했다. 안성화 어르신은 남편의 얼굴이 좋아 보였다고 회상했다. 그 어느 때보다 오히려 환한 낯빛이었다고.

김일동 선생이 세상을 뜨고도 안성화 어르신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댁에서 살았다. 결혼을 했으니 이 집안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세 남매를 데리고 갈 곳이 없기도 했다. 그렇게 어린 세 남매와 시어머니, 시동생까지 모두 아홉 식구를 건사했다. 먹고 사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겨운 시절을 보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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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화 어르신에게는 기술이라고 할 것이 없었다. 배 따기, 벼농사, 지하철 청소 등 육체노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은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아이들을 씻기고 아궁이를 뗀 뒤 저녁을 준비했다. 부엌에서 앞마당을 거쳐 방으로, 방에서 다시 부엌으로. 몇 번의 상을 나른 후에는 새벽까지 집안일을 했다. 세탁기가 없던 시절이라 겨울철에도 마당에서 아홉 식구 옷가지를 모두 손빨래 해야 했다. 안성화 어르신은 그렇게 남편이 떠난 자리를 묵묵히 채웠다. 안성화 어르신은 자식들에게 당부를 자주 했다. 우리 가족은 신앙이 있으니, 믿음의 가정으로 살자고 말했다.

t동네 어른들한테 인사를 잘 해야 한다. 돌아가신 아버지 안 좋게 평할라. 우리 착하게 살자. 착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단다.u열심히 살아보겠다는 다짐이 무색하게 시댁살이는 정말 녹록하지 않았다. 시어머니는 안성화 어르신을 미워했다. 남편이 죽은 이유를 안성화 어르신에게서 찾았다. 안성화 어르신과 결혼해서 아팠고, 안성화 어르신 때문에 남편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어르신은 억울했지만, 아들을 잃은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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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을 헤아려 이해하고자 했다. 1993년,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4년이 흘렀을 무렵이었다. 동네 아주머니가 안성화 어르신을 찾아왔다. 그리고 고엽제에 대해 말해주었다. 고엽제에 대한 방송을 봤는데, 아무래도 김일동 선생이 고엽제 피해자 같다는 것이었다. 안성화 어르신은 남편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t베트남에 있을 때 비행기가 와서 무언가를 잔뜩 뿌리고 갔어.u안성화 어르신은 국가유공자 신청을 위해 남편이 다녔던 병원에 갔다. 하지만 당시 남편의 진단서에는 정확한 병명이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병명을 알 수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행히 사망진단서에 근위축성신경측색경화증이 기재되어 있었다. 근위축성신경측색경화증은 고엽제의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안성화 어르신은 1993년, 국가유공자 신청을 했다. 하지만 두 번이나 반려되었다. 1994년 6월 1일, 세 번의 시도 끝에 김일동 선생은 국가유공자가 되었다. 어르신은 자연농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서 있는, 아직 거동이 가능하던 시절 남편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진을 돌려주질 않아서. 그 탓에 남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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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사진이 얼마 없어 아쉽다고. 시어머니는 김일동 선생이 국가유공자가 되고 나서는 더 이상 안성화 어르신을 미워하지 않았다. 자신의 자식이 고엽제 때문에 아팠고, 고엽제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았기 때문이었다. 시어머니는 안성화 어르신에게 미안했다고 사과했다. 안성화 어르신은 남편이 고엽제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남편의 고통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농사를 짓느라 논에 농약을 뿌리면 하루, 이틀은 먹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농약에도 그 정도로 몸을 챙기기 어려운데, 베트남전쟁에서 남편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서 당신이 그렇게 아팠구나. 김일동 선생은 이미 세상에 없었지만, 이제는 모든 걸 이해할 수 있었다. 남편이 국가유공자가 되고 처음 받은 연금은 32만 원이었다. 안성화 어르신은 안심이 되었다. 사정이 있어 날품팔이를 걸러도 아이들이랑 밥은 먹고 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바르게 컸다. 어느덧 첫째 아들이 대학생이 되었다. 둘째 아들 대입 상담차 학교에 갔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대뜸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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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둘째는 대학교 안 보내실 거죠 집안 사정도 가뜩이나 안 좋은데.u 안성화 어르신은 선생님에게 말했다.

t아뇨. 우리 애 대학 보낼 거예요.u

국가유공자의 자녀는 대학교 등록금이 면제였다. 안성화 어르신은 세 남매를 대학까지 가르쳤다. 만약 대학교 등록금 면제를 받을 수 없었다면 혼자 힘으로 세 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보내지 못했을지 몰랐다. 첫째 아들과 막내딸은 대학원에 가서 학위도 받았다. 아이들은 안성화 어르신의 자랑이었다. 안성화 어르신은 남편 김일동 선생에게 떳떳했다. 엄마로서 아이들에게 도리를 다했으니 말이었다. 자식들은 모두 성인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살았다. 그제야 안성화 어르신은 자신의 마음이 시키는 배움의 길을 선택해 공부를 시작했다. 2008년 한림중학교 졸업장을, 2010년 한림실업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그리고 교회에 다니면서 성가대 활동을 했다. 25년 동안 성가대 활동을 하면서 근속상을 받기도 했다. 인내와 성실은 안성화 어르신이 가진 가장 큰 재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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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순 때에는 웨딩드레스를 입고 가족사진을 찍기도 했다. 2011년 뇌출혈이 발병했지만, 지금까지 꿋꿋하게 잘 견디고 있다. 뇌출혈이 아니었다면 대학까지 무리 없이 진학했을 것이다. 오랜 세월이 흐른 만큼 안성화 어르신에게도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은 바로 남편을 향한 그리움이었다. 1972년 남편을 만나, 부부의 인연으로 17년 동안 살았다. 그리고 1989년 남편을 떠나보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고엽제라는 몹쓸 병을 얻지만 않았더라면, 안성화 어르신에게 김일동 선생은 백 점 가까운 남편이었다. 고생만 하다 눈을 감은 남편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안성화 어르신은 언젠가 꿈에서라도 남편 김일동 선생을 만난다면 그의 오른쪽 다리를 어루만져 줄 것이었다. 남편의 오른쪽 장딴지에는 여덟 바늘 꿰맨 흉터가 있었다. 베트남전쟁에서 총을 맞아 생긴 상처였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해줄 것이었다. 당신, 참 고생 많았어. 당신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국가유공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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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베트전남전히쟁 참 전전유우공자들 임항과빈 어 함르신께인 삶

젊어서 군인이 되고 싶었던 임항빈 어르신은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원예연구소에서 일을 했다.

그 꿈은 후에 베트남전쟁에 참전하면서 이루어졌다.

기동타격대로 여러 작전에 참전하며 주어진 임무에 충실했다.

늘 첨병으로 가장 먼저 적과 대치하던 임무를 맡았기 때문에

적의 탄환도 가장 먼저 맞아야 했다.

안케패스전투가 터지기 전, 왼쪽 얼굴에 총알을 맞고 쓰러진

임항빈 어르신은 평생 그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고 있지만,

함께 전장을 누볐던 전우들의 위로 덕분에

아픔도 이기고 지금은 그들과 함께 여생을 행복하게 보내고 있다.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임항빈 1948. 05. 01. _

1966.백호부대 입대

1971.베트남전쟁 파병 자원

1972. 12. 31.군 제대

1973.국가유공자 지정

임항빈 어르신의 고향은 용인시 양지다. 교편을 잡으신 엄격한 아버지와 다정하고 인자한 어머니 사이에서 1948년 2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는 누님이 한 분 계셨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모두 양지에서 나왔고, 수원농생명과학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생활 3년간 합기도를 배웠다. 당시에는 합기도에 열심이어서,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으로 기계체조 특활반에 들어가기도 했다.

임항빈 어르신은 어려서부터 큰 외삼촌을 동경했다. 그는 해군사관학교를 나와 평생 군에서 일해오셨다. 장성으로 지내셨고, 타계한 뒤에는 현충원에 안치해 계셨다. 늘 배를 타고 어딘가로 떠나던 큰 외삼촌처럼, 임항빈 어르신 역시 배를 타고 싶었다. 하지만 꿈을 향한 길은 요원했고, 현실에서 어릴 적 꿈을 이루는 삶을 산다는 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어르신은 몇 번의 좌절 끝에 원예연구소에서 근무했다.

1966년, 임항빈 어르신은 입영통지서를 받고 최전방 백호부대로 입대했다. 양구에 자리한 탓에 겨울이면 온도계는 늘 영하 30도 아래를 가리켰다. 매서운 추위에 열 손가락과 발가락이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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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에 걸리는 일은 빈번했고, 여름이면 습진이 생기기 일쑤였다. 3년간 복무를 마쳤을 때, 월남전이 발발했다. 당시 맹호부대에서 월남 파병 자원을 받고 있었다. 1971년, 임항빈 어르신은 월남 파병에 자원했다. 훈련을 받고 베트남 송카우로 떠났다. 부모님은 어르신이 베트남에 간 후에야 본인들의 자식이 베트남전에 참전

한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기동타격대로 작전에 투입되었다. 기울어진 헬기의 바닥을 붙잡은 채 사격하고, 1.5_2미터 높이에서 뛰어내려 착륙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그래서일까, 어르신은 여전히 헬기 소리가 들려오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허공을 향하는 고개와 헬기를 찾으려는 시선을 스스로도 어쩌지 못했다. 보병으로 투입될 때면 첨병을 맡곤 했다. 고등학생 때 합기도를 하기도 했고, 군 사격대회에서 3등을 할 정도로 실력이 좋았던 까닭이었다. 가장 앞에 서서 밀림을, 개울과 습지를 헤쳐 지나갈 때면 신경이 곤두섰다. 어디에서 총알이 날아올지 알 수 없었다. 초록색 낚싯줄에 걸리기라도 하면 폭발물이 터져댔기 때문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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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사용해 앞을 가늠하며, 무더위 속을 걷고 또 걸었다. 이따금 식수가 부족한 전우가 물 좀 달라고 할 때는 t내 피나 빨아먹어라.u 말할 정도로 날카롭게 굴기도 했다. 그 모든 게 불안과 두려움 탓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혹여 스콜이 내려 강물이 불어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에 폭발물이 설치된 경우가 많아 더욱 조심히 경로를 탐색해야 했다. 계속된 전투 끝에 무심코 거울을 볼 때면 거울 속 사내에게서 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상대보다 강해야 살아남는다, 그렇게 믿어야 혹독한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스스로 무섭게 느껴질 정도로 독기가 가득 어린 얼굴이었다. 임항빈 어르신은 매 전투를 나갈 때마다 거창한 사명감을 떠올리기보다 그저 주어진 임무에 충실하자고 생각했다. 목숨을 운명에 맡긴다는 낭만적인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반대로 무조건 괜찮을 거라는 근거 없는 희망도 갖지 않았다. 우리가 살아남을 거라고 현실을 보장할 수도 없었고, 지금 살아 있다고 한들 누가 언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만 임무에 충실할 뿐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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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돌아가면 무얼 해야지, 생각한 적도 전혀 없었다. 당장 오늘 살아남는 것. 오직 그것만이 전부였다. 그날 역시 마찬가지로 같은 마음이었다.

1972년 4월에 발발한 안케패스전투가 터지기 전이었다. 임항빈 어르신은 요새·기지 침투 작전에 투입되었다. 어떤 경위로 자신이 투입된 것인지, 정확히 어떤 작전이었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당시 매복해 있던 적군들로부터 무차별 총격이 시작되었다. 그때 상대의 아카보소총 탄알이 첨병이었던 임항빈 어르신의 왼쪽 얼굴로 날아왔다. 당시 어떤 정신으로 버텼는지는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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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었다. 혼란스럽고 공포스러운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옆에서는 계속해서 누군가 죽어가고,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뒤에서 포복해 오라는 외침이 들렸다. 사격 소리가 밀림을 가득 메웠다. 이어서 헬기가 도착했다. 그 헬기가 30분 만에 왔는지, 1시간 만에 왔는지는 인지할 수 없었다. 기동사격대로 익숙한 헬기로 수송되는 과정에 극도의 추위를 느꼈고, 그 탓에 정신을 잃었다. 그러고 9일 뒤에나 의식을 차렸다. 임항빈 어르신은 중환자실에 두 달 정도 있었고, 그 후 필리핀을 거쳐 귀국할 수 있었다. 대구국군통합병원에서 몇 개월을 지냈다. 그리고 1972년 12월 31일, 총 44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했다.

목숨을 구한 것은 다행이었지만 왼쪽 뺨은 길게 찢어졌고, 잇몸까지 모두 날아간 상태였다. 한동안은 악몽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어지럼증 역시 계속됐다. 자신의 몰골에 비참함을 느꼈다. 당시에는 하루에 담배 서너갑을 피우며 편집증을 앓았다. 집 밖을 나서기 힘들었다. 그러니 남들처럼 결혼해 오순도순 아이 낳고 나이 먹으며 늙어가는, 보통의 생활은 하기 어렵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다. 여전히 그 시간을 떠올리기 힘든 어르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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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렇게 말했다. t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아무리 비참해도, 자살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했어요.u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교 선배가 프랑스외인부대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t너도 나랑 같이 갈래 u 임항빈 어르신은 선배를 따라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남들처럼 살지 못할 바에 평생 군인으로 살아야겠다, 싶었다. 하지만 어르신의 결심은 r장손의 증손s이라는 이유로, 가족들 반대에 부딪혀 꺾였다. 돌이켜 보면 잘된 일이었다.

1983년, 먼 동네에 계시던 당숙 고모의 중매로 36세에 결혼했다. 가장이 되었으니 가계를 꾸려야 했다. 임항빈 어르신은 피우던 담배를 끊었다. 부상으로 인한 통증이 계속되었지만, 다시 희망을 품고 살아보자 각오를 다졌다. 고대하던 큰아들을 낳았고, 이어 둘째 아들도 낳았다.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보면서 행여나 자신의 상처 입은 얼굴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면 어쩌나 걱정하기도 했다. 그런 애지중지한 마음으로 가정을 건사했고, 부상의 후유증에도 삶은 이어졌다.

여전히 전우들과 함께인 삶163

임항빈 어르신은 현재 에버랜드 전신인, 당시 중앙개발이라는 회사에서 조경사로 근무하다 1985년부터 2005년까지는 성신여대에서 조경을 담당해 근무했다. 2005년 이후에는 처갓집이 있는 광능내로 가 농사를 지으며 아이들을 키웠다. 봉사를 좋아해 갈매동에서 조경을 하기도 했고, 토평동 장자호수의 나무를 돌보기도 했다. 자신의 능력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게 보람으로 느껴졌다. 쌓여가는 나이만큼, 알약의 개수가 늘어갔다. 어느덧 64세에 64개의 알약을 먹어야 했다. 정확히 그 개수를 기억하는 건, 신기하게도 당시 어르신의 나이와 알약의 개수가 같았기 때문이었다. 후에 임항빈 어르신은 서울대병원에서 고관절을 잘라 잇몸을 대체하는 수술을 했다. 또 보훈병원에서 턱 아래 몽우리를 제거해 어지럼증을 완화했다. 그렇게 현재는 차츰 약의 개수를 줄여 20여 개 정도를 복용 중이다.

지금은 경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퇴근 후에는 1시간여 거리를 걸어 집으로 간다. 집에는 임항빈 어르신의 아재개그에 이따금 피식 웃어 주는 아내와 작은아들이 있다. 또한 어르신 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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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소중한 친구들이 있다. 어르신의 아재개그를 잘 받아주진 않지만, 임항빈 어르신 역시 이에 굴하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그들은 생사를 함께한 전우들이었다.

전우들과는 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자신의 친형제들이 듣는다면 서운할 테지만, 솔직히 형제들보다 더 자주 만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어깨를 나란히 한 자들이었다. 전우들과는 매년 현충일이면 함께 현

충원을 찾곤 한다. 다른 전우들의 가족들을 만나 안부를 나누고,

먼저 간 동료를 참배하고, 살아남은 이들끼리 지난 이야기를 나눴다. 보고 싶은 전우도 있다. 유은상, 그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전쟁 당시, 폭발물 파편을 온몸에 맞은 유만호, 최원동, 김광수. 여행사를 통해 그들과 함께 월남전 당시 부대가 있던 베트남 중부 송카우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불발탄이 그대로인 채였다. 임항빈 어르신과 그의 전우들은 전쟁의 상흔으로 얼룩진 삶을

살았고 어쩌면 지금도 살고 있을 터였다. 세월이 무상했지만, 그들은 살아남았고 여전히 함께였다. 그것으로 족했다.

여전히 전우들과 함께인 삶1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