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학원 50년사

학교법인 한성학원

한성학원 50년사

학교법인 한성학원

내가 염려하던 우리 나라의 광복은 이루어졌으나, 이 민족의 진정한 자렵은 바로 지금부터의 일이다. 형식이나 외면만의 자립을 가지고 진정 옳은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실질적으로 이 나라, 이 국민을 교육할 적기(適期)는 이제부터인 것이다.

「우촌 김의형 박사 어록」

설립자 김의형 박사

1904년 중님 공주군 탄전면 견동리에서 출생 일본제육대학 졸업

• 한성학원 이사장 (1945. 10. 5-1971. 10. 28)

(1977 4. 22-198 1. 10.31)

• 한성여자고등학교 교장 (1945 9.25-1977 2.28)

• 한성여자중학교 교장 (1952 5. 31-1977 1. 5)

• 한성여자대학 학장 (1973 3. 5- 1977 2. 28)

설립자 이희순 여사

• 동덕여자고등학교 졸업 (1936 3~1939. 3)

• 이화여자전문학교 수료 (1939 4~1941. 3)

• 한성학원 이사장 (1971 10. 29~1977. 4. 21)

• 한성대학 학장(1977. 3. 1~1978. 7. 30)

9~11대 이사장 안호상 박사

• 독일 국립예나대학(1925-1929)

• 초대 문교부장관

• 학술원 회원 (1956- 현재)

• 한성학원 이사장(1981 11. 1-1992. 2. 14)

명예이사장 서정희(徐廷熙) 박사

• 학력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미국 콜로라도 대학원(공학박사)

• 주요경력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현재)

학교법인 한성학원 이사, 이사장

학교법인 한성학원 이사진

이사장 김옥자(金玉子)

• 학력 : 숙명여자대학교

• 주요경력 : 동덕여자고등학교 교사

학교법인 한성학원 이사

이사 이상혁 (李相赫)

· 학력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한앙대학교 대학원(법학박사)

· 주요경력 ‘ 변호사(현재), 학교법 인 고려중앙 학원 감사(현재)

이사 김영수(金榮洙)

. 학력 :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컬럼비이대학교 신문대학원

· 주요경력 : 문화방송 보도국장, 국회의원, 연합굉고 대표이사 사장, 문화방송 대표이사 사장, 한국빙송개발원장, 강서케이블 대표(현재)

이사 노철용(盧哲容)

• 학력: 고려대학교 정치학과

• 주요경력: 서울신문 · 중앙일보 기자 및 경향신문 감사, 쌍용해운 ·쌍용제지 사장, 쌍용제지 고문(현재)

이사 이현순(李賢順)

• 학력 : 이화여자대학교 의예과, 독일 쾌팅캔 대학, 서울대학교 대학원(이학박사)

• 주요경력 : 성균관대학교 교수,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현재)

학교법인 한성학원 이사진

이사 정창현(鄭昌炫)

· 학력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미국

MIT 대학원(공학박사)

· 주요경력:서울대학교

공과대학교수(현재)

이사 이환호(李桓浩)

• 학력 : 고려대학교 상과대학, 서울대 경영대학원

· 주요경력 : 대전피혁(주) 이사, 학교법인 한성학원 감사 LMI컨실팅 시장(현재)

이사 민경덕(閔康德)

• 학력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학사, 석사), Texas A&M 대학교(박사)

· 주요경력: 언세대학교 이과대학 지질학과장, 과학기술처 자문위원, 대한지질학회 이사1 연세대학교 이과대학 교수(현재)

이사 한대림(韓大林)

. 학력 :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 주요경력 : 우경산업(주) 이사, 서전통상(주) 대표이사(현재)

이사 이자행(李홈律)

· 학력 : 이화여자대학교

• 주요경력 · 한미재단 기획부 및 유학생 지도부 근무1 주식회사 홍인 이시(현재)

감사 고기영(高基永)

• 학력 : 정주대학교 상과대학

• 주요경력 : 공인회계사(현재), 재무부 세무공무원 강사, 한국공인회계사 이사, 신동아 건설 · 한국보안공사 고문

역대 한성대학교 학장 및 총장

1대 학장 김의형

(1973 3.5-1977. 2. 28)

2대 학장 이희순

3대 학장 김옥형

(1979 2. 1-1982. 2. 17)

4대 학장 강병규

(1982 2. 18-1984. 8. 22)

5대 학장 홍순태

(1984 8.23-1988. 8. 21)

6대 학장 신영기

(1988 8. 22-1990. 10. 15)

7대 학장, 초대 총장 원형갑(1991 4. 1-1995. 3. 31)

2대 총장 이용남

(1995 4. 1- 현재)

역대 한성여고 교장

9 - 10대 임양수

(1977 3. 1-1985. 5. 13)

10 - 11대 염홍천

(1982. 2. 6-1988. 1. 12)

13대 김인자

(1991 . 2. 13-1995. 2 28)

14대 윤성렬

(1995 3. 1 - 현재)

역대 한성여중 교장

8-9대 김영희

(1977 1. 6-1982. 2. 5)

11-12대 염홍천

(1985. 5. 14-1991. 2. 12)

12.14대(현) 김인자

(1988 1. 13-1991. 2. 12)

(1995 3. 1- 현재)

13대 송대빈

(1991 2 13-1995. 2. 28)

한성학원 4계절

낙산의 의화정(봄)

삼학송의 자태(여름)

한성학원 4계절

대학 지선관 풍경(가을)

낙산정원(겨울)

학교법인 한성학원 발자취

초창기 한성여중고 (1945)

한성여중, 뒤에는 신죽중인 한성여자대학건물(1971)

학교법인 한성학원 발자취

낙산 수영장(학교가 소유한 수영장중 한국죄조 국제규격, 1971)

한성여고 본관 모습 앞에는 연못이 보인다(1973)

학교법인 한성학원 발자취

한성여자대학 정문(1975)

한성여고에서 바라본 체육관(앞에는 연못과 방공호, 1980)

학교법인 한성학원 발자취

신축중인 대학 학생복지회관(현 학생회관, 1983)

한성농장에서 모내기 봉사활동을 하는 한성대학 재학생들(1988)

한성대학교 근황

한성대학교 본관(우촌관 1994)

한성대학교 과학관(1994)

한성대학교 근황

한성대학교 지선관(1994)

한성대학교 진리관(1994)

한성여중·고 근황

한성여고 전경(1994)

한성여중 전경(1994)

<축사〉

한성학원 지난 50 년의 회고와 앞으로의 각오

공학박사 서정희

학교법인 한성학원 명예이사장

우촌(友村) 선생이 이 낙산언덕에 한성학원을 설립하시고 해방 후의 좌· 우 충돌과 6 .25 사변, 4 . 19와 5.16 등 허다한 파란과 곡절을 겪으시며 한성 여자중 · 고등학교와 한성대학교를 키워 오신지가 이제 꼭 50년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이 이 학원을 설립하실 당시에는 기본적으로 우리나라의 교육기관이 질적인 면은 물론이고 그 양적인 면에서도 너무나 부족한 상태이었고 막 출범한 국가예산 역시 빈약하기 짝이 없어서 공교육만으로

국가의 백년대계를 기약하기 너무나 어려웠으므로 뜻있는 독지가들이 사재를 모두 털어서 초라하게 나마 이나라 곳곳에 중 · 고퉁학교들을 다투어 설립하여 우리나라 고등교육의 대강을 이루었고 따라서 이들 설립자들은 그 당시에 국가나 국민으로부터도 높은 존경과 깊은 애정을 받았습니다.

설립 당시의 이러한 상황과 교육환경은 곧 이어 발생된 6.25사변과 그 복구 과정에서조차 20 여년 간 거의 큰 변화 없이 계속되어 왔고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교육계도 점차 안정된 환경을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생활이 윤택되어진 반면 6.25 와 5.16등 극한적 상황논리에서부터 발생된 사회 전반의 부정, 비리 무질서와 혼돈은 이를 바로 잡고자 하는 정부의 의지 때문에 수차례의 사회 전반의 사정과 비리척결의 매서운 바람으로 이어져 왔고 또한 교육계 특히 사학들도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 아닌 오히려 비리, 무능, 부정의 온상으로 치부되어져서 또다시 20여년 간의 경직된 정부의 감시 · 감독 체제의 운영

으로 현재까지도 교육계는 자율속의 성장과는 거리가 먼 거의 완전한 정부의 간섭과 통제하애 움추려 왔습니다.

그러나 소련및 동구권의 공산주의 소멸과 함께 이들 국가들의 자유주의, 자본주의로의 복귀와 현대의 급속한 정보 통신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급격히 이루어진 세제회의 물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의 교육계의 정부통제와 간섭은 점차 자유경쟁체제와 자율성으로 전환될 수 밖에 없으며 우리의 특수한 상황논리애 입각한 열악한 교육환경도 국제적인 수준으로 급속히 향상되지 않으면 이제 우리와 같은 중소 사학들은 그 존립조차도 어렵게 될 사정이 되었습니다.

한성학원의 창립 50주년을 맞이하여 한성여중 · 고등학교와 한성대학교에 근무하는 모든 교직원들은 이러한 환경변화를 절감하고 우촌 선생이 50년 전 이 학원을 설립하실 때의 비장한 각오와 애국애족의 충정으로 이학원이 다시 태어나도록 필사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이제 우리 학원이 살아 남아서 국가와 민족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세계적 수준의 학원으로 만드는 일 뿐입니다. 더 이상 정부의 통제와 규제만을 빙자하여 무사안일한 학교경영이 이루어져도 안될 것이고 오로지 교직원 모두의 뼈를 짝는 희생과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봉사만이 이 한성학원이 앞으로의 생존과 번영을 이룩하고 국민의 애정과 존경을 되찾는 것이 가능케 될 것입니다. 부디 하느님의 가호 하에 교직원 여러분들의 건승과 한성학원의 발전이 앞으로 영원하기를 간독히 기원하는 바입니다.

<발간사>

학원 설립 50주년을 축하하며

이사장 김옥자

학교법인 한성학원

작년과 금년의 유난스러운 한발과 홍수에도 불구하고 요즘 국화가 만발한 낙산의 언덕은 그 동안의 고르지 못한 날씨 때문에 짜증스러웠던 마음을 모조리 씻어내듯 평화스럽고 아름답기 그지없으며 한성학원 50주년을 맞아 새삼 우촌 선생의 백년지대계에 깊은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새롭게 하게 됩니다.

그통안 우리나라의 여러가지 어려웠던 사정과 마찬가지로 우리 학원도 수많은 우여독절을 겪어 왔습니다마는 이제는 중 · 고등학교와 대학교가 각기

굳건한 발판을 만들어 계속 성장하고 양적인 변에서 뿐만 아니라 그 질적인 수준을 향상시키고자 교직원 모두가 혼연일체가 되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겪어 왔던 것보다도 더욱 큰 시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한가닥 두려운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금년부터 시작된 교육개혁의 큰 흐름과 세계화에 따른 교육개방의 파도가 점차 거세어 질것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의 각별한 주의와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는 각기 그 실정에 알맞는 나름대로의 발전계획을 수립하여 목표를 뚜렷이 정립하고 현실의 여러 흐름을 슬기롭게 수용하여 앞으로의 성장과 발전이 지속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학원 모두 가족들의 큰 노력으로 우촌 선생이 이 학원을 설립하신 취지를 받들어 앞으로 한성학원이 우리나라 고등교육의 모범이 되고 사학의 중심이 되도록 하느님의 보살펌이 계속되어지기를 바랍니다.

한성학원 50년사 목차

화보

축사

발간사

제 1 편 한성학원 창학정신과 교육이념............................... 9

제 1 장 서장 ..............................11

제 2 장 한성학원 연혁.............................. 12

제 3 장 설립자 우촌 선생과 한성학원 창립정신 .............................. 18

제 1 절 우촌 김의형 박사의 생애와 약력 .............................. 18

제 2 절 우촌 선생 의 교육정 신 .............................. 20

제 4 장 한성학원의 교육 이념 .............................. 27

제 l 절 한성학원의 교육 이념 .............................. 27

제 2 절 교육목적과 목표 .............................. 28

제 3 절 교육목표와 3대 덕목 .............................. 31

제 2 편 우촌 김의형 박사의 생애와 인간 .............................. 37

제 1 장 유년과 유학의 시절 .............................. 39

제 2 장 교직과 육영의 시절 .............................. 56

제 3 장 완성과 노년의 시절 .............................. 82

제 3 편 한성학원 설립배경과 창학정신 구현 .............................. 95

제 1 장 한성 학원 설립 배경 .............................. 97

제 1 절 8. 15 정국과 한국사회 .............................. 97

제 2 절 청소년교육을 통한 영재교육 .............................. 104

제 2 장 한성학원 설립과 교세 확장 .............................. 110

제 1 절 한성학원 설립 .............................. 110

제 2 절 교세확장과 지 • 덕 • 체 교육의 구현 .............................. 112

제 3 장 체육관 건립과 ICHPER회의 성료 .............................. 114

제 1 절 체육관 건립 .............................. 114

제 2 절 WCOTP총회와 ICHPER회의 .............................. 115

제 3 절 제9회 ICHPER회의 성료 .............................. 118

제 4 편 중고등학교편 .............................. 121

제 l 장 건학기 (1945-1949) .............................. 123

제 1 절 건학의 기틀과 설립자 우촌 선생 ............................... 123

제 2 절 건학의 시대적 배경과 지역적 특성 .............................. 124

제 3 절 교육 환경 조성과 학칙 제정 .............................. 135

제 2 장 격동기(1950-1954) .............................. 145

지11 1 절 6.25 전쟁과 시 런 .............................. 145

제 2 절 성북훈육소 교육과 복교 .............................. 153

제 3 절 재단법인 설립과 한성여중고 상징물 .............................. 156

제 3 장 발전기(1 955-1976) .............................. 177

- 중고 통합기 -

제 l 절 학교의 시설 획충과 교육환경 개선 .............................. 178

제 2 절 교육방침 과 활발한 특활부 훨동 .............................. 185

제 3 절 ‘체육 한성’을 빛낸 운동부 활약 .............................. 221

제 4 장 도약기(1977 -1995) .............................. 228

- 고등학교편 -

제 l 절 역대 학교장의 취임과 교육방침 .............................. 229

제 2 절 교육환경 개선과 다양한 교육활동 .............................. 235

제 3 절 한성여자 중·고등학교 연표 .............................. 258

시1 5 장 도약기(1 977-1994) .............................. 283

- 중학교편 -

제 l 절 중 · 고 분리와 도약하는 한성여자중학교 .............................. 283

제 2 절 내 실 있는 교육 활동 .............................. 296

제 3 절 교사 및 학생 활동 .............................. 317

제 4 절 학생 자율 활동 .............................. 343

제 5 편 대학교편 .............................. .365

제 l 장 설립기(1972-1980) ............................... 367

제 1 절 한성여자대학 설립과 초대 김의형 학장 .............................. 367

제 2 절 남녀 공학 시대 연 제2대 이희순 학장 .............................. 383

제 3 절 제3대 김옥형 학장 취 임 .............................. 390

제 4 절 학과 증과와 전 학과 교직과정 설치 .............................. 393

제 5 절 종합관 신축과 대학 미전 수상 .............................. 394

제 2 장 발전기(1981-1984) .............................. 398

제 1 절 안호상 박사 이사장 취임과 교육환경 개선 .............................. 398

제 2 절 제4대 강병규 학장 부임과 학사행정 개혁 .............................. 402

제 3 절 김의형 박사 서거와 캠퍼스 이전 계획 확정 .............................. 421

제 3 장 성장기(1985-1990) .............................. 425

제 l 절 제5대 홍순태 학장 취임과 학생복지관 준공 .............................. 425

제 2 절 성장을 위한 진통 .............................. 429

제 3 절 교사 이전 및 시설 확장 .............................. 432

제 4 절 제 6 대 신영기 학장 취임과 교육의 질적 향상 .............................. 444

제 5 절 대학원 신설 및 경영 · 행정대학원 분리 .............................. 455

제 4 장 도약기(1991- 현재) .............................. 459

제 1 절 서정희 이사장 취임과 전임교수 확충 .............................. 459

제 2 절 각종 연구위원회 구성, 활성화 .............................. 473

제 3 절 부속기 관 활성화 .............................. 486

제 4 절 홍보활동 강화와 대학 이미지 제고 .............................. 497

제 5 절 교육환경의 획기적 개선 .............................. 501

제 6 절 학생활동을 통한 대외적 이미지 향상 .............................. 511

제 7 절 종합대 학교 승격 .............................. 518

제 8 절 김옥자 이사장 및 이용남 총장 취임 .............................. 519

부록

제1편 한성학원 창학정신과 교육이념

제1장 서장

한성학원은 1995 년 10월로서 학원창립 50주년을 맞이한다.

1945 년 일제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그해 10월 5 일 우촌 김의형 선생에 의해 재단법인 한성학원이 설립되었다. 이렇듯 한성학원은 신생(新ιI=.J 대한민국의 태통 이전에 새로운 나라 건설의 역군 양성을 목적으로 낙산(縣山) 언덕에 자리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 이다. 한성학원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는 본 학원은 해방 이후 해방 공간의 혼란

과 6.25 전화 그리고 1960년대 4.19, 5.16 등 혼란한 정변 속에서도 인재양성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수행함으로써 학원창립 반세기를 맞이하며 명실상부한 서울 장안의 사립 명문으로서의 위상을 정립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조상들은 한 가정이나 단체, 심지어 국가적인 국난에 접했을 때 이를 헤쳐나가는 지혜를 지나간 역사적 교훈(敎칩JI)으로부터 그 해결책을 모색하곤 하였다. 이에 본 학성학원은 학원창립 50주년을 기념하며 지난 반세기동안 한성학원의 발자취를 돌아보는 『한성학원 50년사』를 발간하고자 한다. 이에 1 편에서는 한성학원을 창립하신 창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의 창학정신과 한성학원의 건학이념과 교육목적 및 목표정립 등을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제2장 한성학원 연혁

북한산과 도봉산을 바라보며 동대문을 굽어보는 유서깊은 낙산 기슭 서울시 성북구 삼선통에 소재한 한성학원이 설립된 것은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1945년이다. 따라서 올해로서 한성학원 설립 50년이라는 기념비적 해를 맞이하게 되었다. 평소 교육사업에 남다른 집념과 의지를 갖고 있었으나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서 그 뜻을 펼 수 없었던 우촌 김의형 박사께서 광복을 맞이한 바로 그해 10월 재단법인 한성학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모체가 되어 오늘의 한성여자중학교

와 한성여자고퉁학교 그리고 한성대학교를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러 기념비적인 한성학원 창립 50주년을 맞이한 것이다.

우촌 선생은 한성학원의 설립취지를 “과거 일제의 압제 하에서 우리 민족이 눈물겹도록 배움에 굶주렸던 것과 8.15 광복과 함께 외국의 그릇된 풍조가 노도와 같이 잘못 밀려 들어오는 것을 안일하게 좌시할 수 없어서 우리 한국정신을 이어 받아 국가를 위해 이바지할 인재를 양성할 뜻”에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어찌보면 매우 단순한 설립동기인듯 보이나 이 취지문에서 분명한 우촌 선생의 교육이념과 그의 역사의 식 그리고 한성학원이 지향해야 할 건학정신의 일단을 발견하게 된다. 광복을 맞이한 한국사회는 새롭게 태어날 ‘신생국’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새사회 건설을 위한 인재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40여 년간의 식민

지배의 구각(舊殼)을 벗을 겨를도 없이 해방의 물결을 타고 밀어닥친 외래의 그릇된 풍조가 만연되던 당시 상황에서 진정한 ‘한국정신’을 가진 젊은 인재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바로 이점에 주목한 우촌 김의형 박사는 ‘한국정신’을 바르게 가르쳐 새국가 건설을 위해 이바지할 ‘참한국인’의 양성을 목적으로 한성학원을 설립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설립자의 한성학원 설립정신과 교육이념을 토대로 진리(員理), 지선(至善)이라는 지고(至高)한 교훈 아래 지난 반세기 동안 발전해 온 한성학원의 주요 발자취를 되돌아보면 대체로 아래와 같다.

본 한성학원은 1945 년 9월 해방과 더불어 김의형 박사께서 경성여자기예학교(京城女子技藝學校)를 인수하여 그해 10월 5 일 한성고등여학교를 개교하면서 시작되었다. 1946년 4 월 9 일 한성고등여학교(6년제)로 인가를 받고 같은해 7 월 5 일 학제 변동에 따라 한성여자중학교(漢城女

子中學校)로 교명을 변경했다가 1952년 5 월 한성여자중학교 6 학급, 한성여자고등학교 6학급으로 분리되었다.

한편 1972 년 본 학원의 숙원사업이었던 대학을 창립하게 되었다. 즉 한성여자대학(漢城女子大學)으로 설립되어 국어국문학과, 영어영문학과, 가정학과, 의상학과, 생활미술학과, 비서학과 등 6개학과 150명 정원의 야간대학으로 출범하였다. 1973년 3월 초대 학장에 우촌 김의형 박사가 정식으로 취임하면서 한성대학은 급속한 속도로 발전해 나갔다. 우촌 선생은 학장 취임과 동시에 학과 증설에 나서 대학설립 1년도 안되어 기존의 6개 학과 중 비서학과를 폐과시키는 대신 불문학과, 무용학과, 경영학과, 무역학과 등 4개 학과를 증과, 인문학부, 예술학부, 사회학부 등 대학이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체제와 면모를 갖추었다.

이어 1976년에는 불문학과를 폐과하는 대신에 국사학과를 신설하는 변화가 있기도 하였다. 이때 기존에 있던 불문학과를 없애고 국사학과

를 신설한 데는 이 시기 정치 사회 일각에서 세차게 불기 시작한 ‘민족주체성 논쟁’과 이에 따른 ‘국적(國籍)있는 교육(敎育)’이 강조되던 시대적 흐름의 한 영향이기도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촌 선생의 교육이념 곧 ‘한국정신’을 고취하겠다는 의지가 깊게 작용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상과 같이 한성학원의 설립자인 초대 김의형 학장에 의해서 대학으로서의 면모와 발전의 토대가 마련된 한성여자대학은 제 2 대 학장으로 이희순(李喜順) 여사가 취임하면서 도약의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1977 년 3 월 2 대 학장으로 취임한 이희순 학장은 괄목할 만한 몇 가지 조치를 단행, 한성여자대학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우선 ‘한성여자대학’을 ‘한성대학’으로 교명 (校名)을 바꾸었다. 이것은 단순히 교명이 변경 되었다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까지 여학생만을 교육의 대상으로 삼았던 여자대학에서 교명을 한성대학으로 바꿈

으로써 공히 님-녀공학( 뛰女핏헬)의 대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뿐만아니라 이때부터 야간대학(夜|펴大學)에서 주 · 야간대학(꽉 夜|쉐大씬)으로 바뀐 점도 괄목할 만한 변화의 하나였다.

이러한 접에서 볼 때 이상의 변화는 한성대학 발전사에 일대 획을 긋는 시-건이라고 보아 결코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밖에 이희순 제 2대 희-장 지}임기간에 있었던 중요한 일로는 1978 년에 또 한 번의 증과 증원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국어국문학과, 영어영문학과, 의상학과, 생활미술학과, 무용학과 등 5 개 학과의 정원이 각각 30명씩에서 10 병씩 증원되었고, 경영학과와 무역학과 등 2개 학과는 50 명씩이 늘어났으며 여기에 가정학과 대신 행정학과가 신설되어 총 9개 학과에 입학생 수가 380명으로 늘어났다. 한편 국사학과를 사학과로 학과 명칭을 변경한 조치도,이때인 1977 년에 이루어졌다.

이 시기 사립대학들은 예외 없이 대학의 정원을 늘리는 문제를 학교

발전의 최대의 관건으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증과, 증원 문제는 모든 대학의 최대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우리 대학과 같은 열악한 대학의 경우 증과 증원문제는 더욱 절실한 문제였다. 대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준까지는 학생 수가 늘어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79년 2월 제 3 대 학장에 취임한 김옥형(金玉術) 선생 역시 이 문제 해결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때 마침 문교부측의 ‘대학 학과정원 조정 승인 조치’에 힘입어 1979년 9월 한성대학은 의상학과, 생활미술학과? 무용학과, 행정학과에 각각 10명씩, 그리고 사학과에 20명의 증원이 허락되어 총 입학생 수가 440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대학정원 수는 여타대학에 비하면 적은 규모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1980년 ‘대학정원 증원 조치’가 취해짐에 따라 기존의 입학정원 수에 20% 의 증원이 가능해지고 한편 경제학과와 도서관학과가 새로 신설되어 우리 대학은 l17H 학과에 입학정원 수가 676

명(졸업정원 520 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아직은 크다고 할만한 규모는 아니지만 학생 수가 창립 당시에 비해. 4배 이상으로 늘어남에 따라 자연히 새로운 대학 건물이 요구되었다. 1981 년 지상 4층의 종합관(현 중학교 교사)이 준공됨으로 서 일단 비좁은 공간문제가 해결되었다. 한편 그 해 생활미술학과를 미술학과로 학과 명칭을 변경한 조치가 있었다.

1982 년 2월 제 4대 학장으로 강병 규(휩 짜 딱) 박사가 취 임 하였다. 다양한 정치적 경력과 교수 출신의 강병규 학장은 학장 취임사에서 대학문화의 창달과 정보화 시대에 부응한 획기적인 대학으로 발전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러한 의지의 표시로 그는 취임 초기 대학발전을 위한 각종 위원회를 구성하는 한편 민족사상연구소, 사회산업연구소, 한국전통예술연구소, 학생생활연구소를 개설하는 등 대학발전을 위한 의욕적인 개혁과 의지를 보였다. 이 밖에도 성격이 유사한 학과들을 묶

어 인문학부, 사회학부, 예술학부, 교양학부 등 4 개 학부를 두어 향후 종합대학(짜상 大행)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여러 조치들은 그가 임기 도중에 학장직을 사임함으로써 이렇다할 결실을 보지 못한 채 뒤로 미루어지고 말았다.

1983 년 3 월 l 일 한성학원 초대 학장이자, 한성학원의 설립자이신 우촌 김의형 박사께서 향년 80세로 타계하시는 등 학내외의 풍랑에 부딪혀 일시 어려움에 봉착하는 시련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83 년 10월 개교 10주년을 맞이하여 착공한 학생복지관(현 학생회관)이 1년만인 1984 년 8 월에 준공되는 등 큰 동요없이 발전해 나갔다. 이후 제5대 학징으로 홍순태(파 淳캄한) 선생이 1984 년 8 월 부임하였다 홍순태 학장은 그의 남다른 경력과 과감한 결단력을 발휘하여 학생들의 요구사항의 하나였던 ROTC 의 창설과 대학캠퍼스의 이전 사업 그리고 현재 대학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우촌관(友村젠)을 건립하였다. 또한 1987

년 산업공학과, 전산통계학과, 의류직물학과, 산업디지-인학과 등 4개 학과를 신설하여 총 15개 학과, 720명 정원의 대학으로 발전하였고 경영 · 행정대학원의 설립 인가도 홍순태 학장의 재임기간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1987 년, 이 해는 한성대학에 새로운 발전의 전기를 마런한 획기적인 해였다고 할 수 있다 전산통계학과, 산업공학과 등 자연과학분야의 4개 학과가 증설됨으로써 지금까지 인문, 사회, 예체능계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한성대학의 위상을 폭넓게 펴나갈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1988 년 8 월 평생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교수로 봉직했던 신영기( L!J永]까iD 박시-가 제 6 대 학장으로 취임한 것은 이러한 자연계 신설과의 탄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학술원(學術院) 회원이며 매사를 상식적인 선에서 합리적으로 운영하려했던 신 학장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개인적인 사정으로 사임하게 된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었다.

신영기 학장의 사임 이후 한 동안 감내하기 힘든 진통기를 넘긴 한성대학은 1991 년 2월 교수 직선에 의해 국어국문학과의 원형갑(元亨l뭔) 교수를 제 7 대 학장으로 선임한 후 1995 년 2월 임기를 마쳤으며 그 후임으로 1995 년 3 월 제 2 대 직선 총장으로 문헌정보학과의 이용남(李I需男) 교수가 선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이사장 또한 안호상(安浩相) 박사에 이어 1991 년 4월 서정희(徐廷熙) 이사장이 취임하면서 ‘제 2 의 창립기’를 맞이할만큼 대내외적인 변화와 발전의 새역사를 창조했다. ‘ 젊고 푸른 대학’‘실력 있는 대학’을 새로운 교육지표로 설정한 서 이사장은 교육환경 개선과 교육시설 확장 및 교육행정의 개선 등을 과감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추진함으로써 한성학원의 변화와 발전은 새로운 도약의 전기와 토대를 굳건히 다져지게 되었다. 이러한 새롭게 태어난 기반 하에 서정희 이사장에 이어 1995 년 4월 한성학원 창립 50주년이라는 기념비적인 해를 맞이하며 김옥자(金玉子) 이사장이 취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성학원은 지난 날의 우여곡절을 거울삼아 앞으로 비상의 나래를 펴나갈 것이다. 7 천에 달하는 전 한성인(쏘漢城人)은 ‘국운(國週)의 도래(到來)’의 민족사적 전기와 새로운 세기(반紀)를 바라보며 새시대에 부합하는 젊은 엘리뜨를 키우고 배출하는 일에 함께 통참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제3장 설립자 우촌 선생과 한성학원 창립정신

제1절 우촌(友村) 김의형(金義術) 박사의 생애와 약력

우촌 김의형 박사는 1904년 8 월 25 일(음력) 충남 공주군(公州那) 탄천면(柳川때) 견동리(J천댔뿔)에서 부친 김우창(金禹|틸 ) 선생과 자당 경주(파 州) 이씨(李民) 숙부인(淑失人)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남달리 엄격한 유교(댐敎) 가정에서 자란 우촌 선생은 유년시절을 고

향에서 전통적인 한학(漢學)과 신학문(新學附)을 수학하며 자랐다. 이시절 고향에 서울에서 내려온 구한말 군인 출신이자 일찍이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이은우(李股雨)라는 분이 세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다니면서 어린 우촌 선생은 개화(開化)되었으며 장차 일제(티 帝)에 빼았긴 민족의 주권(초樞)을 되 찾기 위한 독립정신(獨立챔세1)을 품게 되었다. 특히 이은우 선생은 체육(體育)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체조 등 체육시간을 많이 할해했는데, 어린 우촌 선생은 남달리 강건한 신체적 조건을 천부적으로 타고나 총애를 한몸에 받았다. 훗날 우촌 선생이 체육분야를 전공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인연과 무관하지 않다.

고향에서 보통학교 과정을 마친 소년 우촌 선생은 좀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중등교육 과정을 마친 후 20세 되던

1924년에 현해탄을 건너 일본 동경(東京)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식민지 ‘조선인’에게는 입학문이 매우 좁았던 일본체육전문대학(현 日本體育大學)에 입학한 그는 ‘식민지 백성’이라는 일인 학생들의 멸시와 눈총을 굳은 의지로 극복하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우촌 선생이 체육을 전공하려 한데는 남다른 뜻이 있었다. 어린 시절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은사, 이은우 선생으로부터 평소 신체의 단련과 건강이 중요하다는 교육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우촌 선생 자신의 생각에도 과거 고루한 유학자들 모양 연약한 신체와 정신으로서는 향후 일제에 강점 당한 나라의 국권을 되찾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따라서 남들이 별반 관심을 갖지 않으나 기실 체육교육(體育敎育)이 어느 분야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체육분야를 전공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일본 유학길에 오른 한인 학생들 대부분은 법학이나 의학 등을 공부하고 돌아와 총독부

관리가 되거나 아니면 안정된 직업에 안주하기를 바랬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우촌 선생과 같이 처음부터 남들이 외면하고 있던 체육분야를 전공하려했던 점은 외로운 길을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대단한 용기 없이는 결정하기 어려운 결단이었다.

교육자로서 우촌 선생의 출발은 1927 년 3 월 20 일 일본 체육전문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천안보통학교(天安普通學校) 교사로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집안 어른들과 주위에서는 일본 유학까지 마치고 돌아와 국민학교 ‘훈도’를 자청한 우촌 선생의 결정에 완강하게 반대와 불만을 표했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교육자로서의 우촌 선생은 그후 공주 영명학교(公州 永明學校) 교사를 거쳐 1930년 4월 서울 광신상업고등학교(光新商業휩等學校)와 동덕여자고등학교(同德女子高원學校)의 이름난 체육교사로 봉직하다가 일제 말엽인 1939년 4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京城女子醫學專門學校) 교수

로 근무하며 체조와 육상 등 체육분야 전반의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체육인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1945 년 광복을 맞은지 한달 만인 그해 9월 오늘의 한성대학교의 모체가 된 한성여자중고퉁학교의 설립을 설립하여 교장과 이사장으로 여러해 봉직하였다.

한편 우촌 선생은 신생국, 대한민국의 체육발전사0.씹育發展굉)에 적지 않은 공헌과 족적을 남겼다. 1961 년 대한핸드볼협회(大젠 핸드볼協젠) 회장직을 시작으로 우촌 선생은 대한체육회(大폐씹 育會)와 올림픽 위원회(올림픽委뒀웰) 이사를 거쳐 1966년 대한체육교원회(大歸將育敎침젠) 회장의 중책을 역임하는 등 한국 체육의 발전을 위해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이러한 체육회 발전의 공적이 인정되어 1970년 12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동백장(國民勳할짱따 템)을 수상하였다.

한마디로 우촌 김의형 박사는 1983 년 3월 1 일 이 땅을 떠나기까지

80여 전 생애를 교육구국(敎育救國)의 일념과 한국 체육의 발전을 위해 헌신 봉사한 교육자이자, 체육인이었다. 그리고 그의 전 생애에 가운데 40 여 성상을 낙산(縣山) 언덕에 웅비의 나래를 펼친 ‘한성’(평 城)을 위해 그의 생애를 바쳤다.

제 2 절 우촌 선생의 교육정신(敎育精神)

8.15 광복(光짜)을 맞이하자 우촌 김의형 박사는 과거 오욕된 일제 36년의 식민통치를 초래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를 민족과 역사에 대한 소명의식(젠命덴짧)을 품은 청소년(흙少年)에 대한 교육을 소홀히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광복 이후 가장 시급한 사업은 신생(初시 J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 헌신 봉사할 수 있는 젊은이를 양

성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1945 년 10월 한성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한 우촌 선생은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점을 한성학원의 건학정신과 이를 교육 현장에서 실천하는 일에 평생을 받쳤다.

1) 역사소명의 고취

역사는 시대의 흐름과 함께 변천한다. 이 변전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변치 않는 진리와 도리에 역행하는 톰과 마음가짐은 역사의 이름으로 후세에 지탄을 받게 마련이다. 이같은 역사의 변천 속에서도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는 참된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몸과 마음가짐은 교육을 통한 역사소명(歷史검命) 의식의 배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촌 선생은 사람이 일생을 사는데 있어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보

았다 하나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을 찾아 하는 개인주의적(個人主義的)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개인적으로는 하고 싶지 않으나 해야할 일이기에 이를 피하지 않고 일생을 그 일에 매달리며 헌신 봉사하는 희생적인 삶을 사는 유형이 있다고 보았다 이같은 두 가지 유형 중 이른바 역사의 소병(검命)에 합당한 삶은 말할 것도 없이 후자의 경우를 말한다.

우촌 선생은 바로 이와 같이 역사에 부름에 나아가 쓰임 받는 인재를 양성함을 그의 첫 번째 교육사상이자, 교육정신으로 삼고 있다.

2) 민족정신의 계승

우촌 선생께서 평생을 교육자로서의 외길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8.15 광복 이후, 향후 이 사회와 국가의 주인이 될 젊은이들에 대한 교

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시대인식(따代認、誠)에서 비롯되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한편 어떤 정신의 젊은이들을 양성할 것인가에 대해서 또한 우촌 선생의 교육목표는 분명하였다. 즉 ‘한국정신’에 투철한, 말하자면 우리민족에 대한 분명한 주인의식(초人意識)과 민족의식(民族쉽淑)에 기초한 젊은이들을 교육하고 양성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우촌 선생은 1966년 10월 5 일 한성학원 창립 21 주년 기념식사를 통해 당신께서 한성학원을 광복과 동시에 설립하게 된 통기를 아래와 같이 밝힌 바 있다.

일제의 압제에서 우리 민족이 눈물겹도록 배움에 굶주렸던 것과 8.15 광복과 함께 외국의 그릇된 풍조가 노도와 같이 빌려 들어오는 것을 안일하게 좌시할 수 없어서 ‘한국정신’을 이어받아 국가와 이 사회를 위한 인재

를 양성해야겠다는 의욕과 취지에서였다.

위에서 보듯 우촌 선생의 한성학원의 창학이념(創헬뺑念)과 교육철학(敎펀젠웬)은 ‘한국정신’ (펴國精꾀11)을 계승, 발전하기 위해 젊은이들에게 우리민족에 대한 투철한 민족혼(民값짧)을 심어주어 다시는 외세(外평)의 식민지 지배를 받는 오욕(펀황)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역사의식(修뭔참淑)과 민족정신(民族精패)에 기초하고 있다.

우촌 선생은 일제 통치하에서 일본의 최고학부의 고등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자신의 영달을 위한 고급관리의 길을 택하지 않고 청소년들에게 민족정기 계승의 불벚을 밝히기 위한 교육자의 길을 택하였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京城女子醫學함 門學校) 교수 등 각급 학교에서 교직생활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정기(民族精氣)의 혼(쐐)을 불어넣어 주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일인들이 한인을 멸시하고 그들의 우월성을 뽑

내는 태도에 한민족의 우수성과 항거의 기개를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이는 대부분의 지식인이 지식은 많으나 이를 행동으로 실천하는 실천의지와 용기가 부족했던 점과 비교할 때 그렇게 흔한 일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진리탐구는 아무리 훌륭한 지식과 논리를 갖고 있더라도 이를 바르게 실천의 길로 옮기지 못하였을 때 그 진리는 그 순간 빛을 잃게 된다.

3) 지(智) 덕(德) 체(體)의 조화

우촌 선생의 교육사상과 이념은 위에서 제시한 민족의 소명의식의 개발과 민족정신을 불어넣는 민족교육의 토대 위에 지식(知識)과 덕성(德性) 그리고 체력(體力)을 갖춘 참 지혜(智慧)를 갖춘 실력 있는 지성인과 신체적드로 건강한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을 한성학원의 교육의

지표(指標)로 삼았다. 요컨대 우촌 선생은 ‘한국정신’을 바르게 가르치는 한편 그 위에 지, 덕, 체를 조화 있게 갖춘 ‘참 한국인’양성을 그의 교육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교육의 일차적인 목적과 목표는 피교육자에게 새로운 지식을 가르쳐 알게 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말이 있듯 교육의 일차적인 목표는 무지(無知)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무한한 것이기도 하다. 단순한 사실의 지식에서 시작하여 복잡하고 고등(高等)한 것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여기서 낮은 데서 높은 곳으로 전개하여 나가는 발달과정이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같은 교육을 통하여 얻어지는 산물이 곧 지력(智力)이다. 이 지력을 가리켜 사고(恩考)라고도 하며, 사회는 보다 생산적인 지력을 요구한다.

한편, 지력의 교육과 함께 참다운 인간 교육을 위해 인간의 품성도 야(品性I써治)가 전제된다 즉 인격적인 교육이 결핍될 때 학습자의 올

바른 가치정립(않뼈鼎立)이 불가능한 법이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교육은 지력의 신장 못지 않게 도덕성이 내포된 정의(情意)의 개념이 그 교육 속에 담겨져야 한다.

어느 시대, 어느 냐라이건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훌륭한 인간의 배양 즉 ‘품성도야’와 ‘인격교육’의 근본을 도덕교육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교육을 통하여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더 나아가 그 사회의 번영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구성원을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같은 교육의 목적은 의식적이며 의도적인 데서부터 출발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옛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지칭될 만큼 예의와 도의심을 모든 가치관에 우선하는 사회 윤리로 지켜왔다. 우촌 선생은 이점을 기회 있을 때마다 늘 강조하며 예의도덕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우촌 선생은 덕성(德l따)의 함양을 그의 중요한 교육의 덕목(德、 딘 )으

로 삼았다 우촌 선생은 기회 있을 때마다 ‘덕(德)은 충(많)과 효(孝)외선(젠)의 기본 바탕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매사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한 마음과 태도를 보이는 것이 덕성을 함양시키는 첫 걸음이라고 당신 자신이 생활 속에서 본을 보여온 우촌 선생은 항상 사람은 인간답기 위해 매사 겸허하고 성실한 몸과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 그는 평소 주위 사람과 제자들에게 “실없는 생각은 정신을 상하게 하며 망령된 행동은 화를 자초하는 법이며, 한 때의 분함을 참으면 백년의 근심을 변한다”는 고사( 故펌)를 즐겨 인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사람의 성품은 물과 같아 그 성품을 한 번 놓아 버리면 돌아킬 수 없어 반드시 양심의 제방을 쌓아 제어하여야 한다’는 점과 ‘귀한 재물은 없어져도 쌓은 덕은 흐트러짐이 없으며, 충성과 효도는 덕에서부터 싹트게 마련이다’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올바른 인간의 성품은 평소 덕성을 꾸준히 쌓을 때 비로소 바람직한 인간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음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선생에 관한 일화 ,중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6.25사변 때의 일이다. 한때 공산주의자들에게 ‘반동’으로 몰려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공산당의 한 간부가 우촌 선생을 알아보고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김 교장 선생님 저를 몰라보십니까? 제가 전에 한성여중 학교림 가시철망을 청부맡았던 사람입니다. 그때 저의 어려움을 도와주셔서 그때 일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념과 사상을 달리하더라도 평소 쌓은 덕은 이념의 높은 벽도 념을 수 있다는 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끝으로 우촌 선생의 교육사상이자 교육이념으로 간과할 수 없는 것

이 바로 체육교육(體育敎育)을 남달리 강조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는 점이다. 사실 아무리 지력과 덕성을 갖춘 사람이라도 체력이 뒷받침 해주지 못하면 절름발이 용기 없는 기형적인 인간이 되기가 십상이다.

일찍이 고대 그리이스 시대부터 정신교육과 신체교육의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의 교육이 강조되었던 것도 이같은 배경에서이다. 체육활동을 통하여 한 개인의 잠재적인 신체에 감추어진 가치를 최대한 발휘하도록 지도함으로써 이상적인 인간상을 형성하는 첩경이기도 하다. 여기서 체육활동을 보다 활발하게 촉진시키는 것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보다 건강하고 ‘인간답게’라는 희망에서부터 출발되며, 이같은 체육활동을 통한 주체성 있는 굳굳하고 용기 있는 결단성과 추진력을 배양시켜 준다.

우촌 선생은 동경 유학시절, 어느 날 체육시간에 띔틀넘기에서 가장 높은 띔틀을 무난히 뛰어 넘자, 이에 평소 식민지 한인을 멸시하며 일

인의 우월성의 자만을 가진 몇몇 일인 학생들이 질투를 느껴 100미터 달리기를 하는 그의 뒤에서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이때 약간의 부상도 입었다고 한다.

우촌 선생은 이같은 일인 학생들의 야비한 행위에 대한 분노로 적지(敵地) 일본 땅에서 한 순간 일어나 넓은 운동장이 떠나가도록 고성(高游)과 함께 일인 학생들에게 일격을 가하여 그 학생을 졸도시킨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과감한 행동을 목격한 일인 교수와 학생들은 오히려 우촌 선생의 흥분과 격정의 모습에 놀라 자기들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였다 한다 여기서 우리는 민족을 향한 우촌 선생의 남다른 민족애와 용기 있는 대답한 담력의 일단을 엿볼 수 있으니 이것이 훗날 한성학원의 건학이념과 우촌 선생의 교육정신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제4장 한성학원의 교육 이념과 목표

제1절 한성학원의 교육 이념

이상과 같은 설립자의 건학정신에 따라 한성학원은 진리(쉴理)와 지선(至풀)을 교육이념으로 삼아 창립되었다. 여기서 진리라 함은 교육기관의 궁극적인 목적이 진리탐구라는 데 있다는 보편적인 의미에서 출발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한성학원의 교육이념에 담긴 진리의 의미는 이 밖에도 ‘ 진리

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는 성서의 말씀에서 보듯 인간이 추구하는 ‘참 자유로움’을 뜻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로움을 누리기에 앞서 진리 를 깨달아야 하며 이를 위한 사명이 교육기관에 부여되어 있는 것 이다. 교육기관을 흔히 ‘ 진리의 전당’이라고 지칭하는 연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성학원의 또 하나의 교육이념인 지선(至훨) 역시 진리의 개념과 동일한 선상의 덕목(德、티 )에 해당한다. 본래 『대학(大學) .!I 의 ‘지어지선’(止於至普)에서 비롯된 이 말은 ‘더할 수 없는 지극한 선(普)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자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의 완성 을 위하여 수득(修得)할 대학의 도는 사람의 본성 내변에 자리잡고 있는 사리(펄햄)를 올바로 인식할 영명(핏明)한 재덕(才德、)을 개발하여 지고(至高)의 선(善)에 이르도록 부단히 노력하

는 것이다.

결국 학문을 완성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도 지선(至善)을 목표로 할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고 또한 학문추구의 결실도 선(善)함으로 귀결되는 법이다.

이와 같은 선한 인성계발(人性랜發)을 한성학원의 교육이념으로 삼았다는 것은 진리탐구의 근본을 올바로 인식하였다는 견지에서 한성학원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션을 확고히 해주고 있다. ‘진리는 궁극적으로 선에 이른다’는 갚고 오묘한 건학정신은 본교의 인문, 사회, 예술, 지-연학부 등 전 분야의 학문영역에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케 해 줄 것이며 바람직한 학문활동을 보장케 해 줄 것이다 그리하여 학문연구를 통한 인성(人센)의 계발(1함發)은 새로운 이론의 정립과 더불어 이 시대가 요구하는 교육기관의 사명이며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바람직한 민주시민과 사회의 지도자, 더 나아가 건강한 한국인을 육성하

기 위한 좌표인 것이다 따라서 전 한성인은 이러한 훌륭한 건학이념의 뜻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실천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예컨대 상징적이고 전시적인 교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진리(한꾀!.), 지선(至普)의 참 의미를 깨우쳐 생활하는 교육기관인이 될 때한성학원의 교육이념은 한성인의 활력소로 영원히 빛을 발할 것이다.

제 2 절 교육 목적과 목표

교육의 목적과 목표를 설정하는 일은 교육을 실시하는 현장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문제이다. 그것은 교육과정의 개발 절차 또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을 규제함에 앞서 교육이 추구해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목적과 목표는 이보다 앞서서 교육의 이념에 의하여 방향이 결정되거나 영향을 받게 된다 따라서 교육목적과 목표는 위로는 교육의 이념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하며, 아래로는 교육과정이라는 실제 교육 현장에서의 실천방향을 제시해 주는 중간 매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렇게 볼 때, 교육목적은 교육과정보다 교육의 방향 또는 중점을 지극히 일반적 · 포괄적으로 서술하게 되며 가치를 규정짓는 가치규범(價個規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교육목표는 이들 교육과정에서 실제로 무엇을 다루어야 하고, 어떠한 것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하고, 어떠한 내용을 선정하고 어떠한 것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하고, 어떠한 내용을 선정하고, 어떠한 학습경험을 강조해야 하는지 등 구체적인 행통지침을 제시해 주는 일종이 행동강령(行動網領)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일의 목표는 목적에 대한 분석과정을 통해서 결

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과 위해서 논의된 여러 견해와 입장을 정리하여 한성학원의 교육목적과 목표를 설정해 보고자 한다.

우리 나라 교육법 제 1 조에서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고 하는 교육이념이 모든 교육의 근간으로 자리잡고 있어 우리나라의 모든 교육기관의 교육 지표로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교육법 제 108조에는 ‘대학은 국가와 인류사회 발전에 필요한 학술의 심오한 이론과 응용방법을 교수 · 연구하여 지도적 인격을 도야한다’라고 하는 대학 교육목적(敎育티的)이 명시되어 있다. 이같은 대학교육의 보편적인 목적 아래 모든 대학은 그 대학의 특수한 설립 취지에 따라 대학 나름의 교육목적을 설정하고 있다. 이 중에 특히 종교단체에서 설립한 대학이 특히 두드러진 교육목표와 목적을 갖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사립대학의 경우는 설립자의 설립 통기가 주요 항목으로 추가되고 있다.

한성대학교는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가 1972년에 창립하여 여자대

학으로 출발하였으며, 이보다 앞서 8.15광복 직후 한성고등여학교의 설립이 그 모체가 되었다 설립 당시 우촌 선생의 학교 설립 취지와 목적을 앞에서 밝힌 바 있으나 이를 좀더 분석적(分析的)으로 정리함으로써 설립자의 건학정신과 한성학원의 교육목표를 연계시켜보고자 한다.

과거 일제의 압제 하에서 우리민족이 눈물겹도록 배움에 굶주렸던 것과 8 .1 5광복과 함께 외국의 그릇된 풍조가 노도와 같이 잘못 밀려들어오는 것을 안일하게 좌시할 수 없어서 우리 한국정신을 이어받아 국가를 위해 이바지할 인재를 양성함. (한성학원 설립 21 주년 기념사, 1966. 10.)

위의 내용에서 보듯 우촌 김의형 박사가 한성학원을 8.15광복과 동시에 설립했던 취지는 세 가지로 축약된다. 첫째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배움에 굶주림’을 당한 민족적 설움의 극복을 위해서였으며, 둘째 해방 직후 ‘빌려드는 잘못된 풍조를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가 바로 ‘한국정신’에 바로 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이상 설립자의 한성학원 설립 취지와 의도에 유념하여 한성학원은 교육목적과 목표를 첫째 진리탐구, 둘째 인격도야, 셋째 인재양성으로 설정하고자 한다. 아래의 〈표〉는 우촌 선생의 한성학원 건학정신과 한성학원의 교육목적과 목표를 관련시켜 본 것이다.

설립자 한성학원 건학정신 교육목표 및 목적

배움의 굶주림 극복 진리탐구(평뺑探究)

그릇된 풍조를 바로 잡음 인격도야(人格剛治)

한국정신에 기초한 인재배출 - 인재양성(1\才養成)

제3절 교육 목표와 3대 덕목

모든 교육기관의 교육체계는 가장 우위 개념언 교육이념을 모체로 하여 세워진다. 따라서 한성학원은 첫째 설립자의 건학정신과 교육부(敎育部)의 교육이념을 토대로 진리(員理) . 지선(至善)이라는 교육이념 아래 교육목표를 진리탐구, 인격도야, 인재양성 등 3 대 과제를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상의 3 개 교육목표의 구현을 위해 각각의 목표마다 아래와 같은 시행덕목을 두고 있다.

진리탐구 인격도야 인재양성

。진리탐구 。덕성 함양 o 민족 자부심 함양

o 창의성 개발 o 건전한 신체 단련 o 건전한 시민의식 고취 l

。바른 가치관 확립 o 책임 · 의무 이행 o 국가 · 인류번영 기여

1) 진리탐구(훨理探究)

진리탐구는 상아탑 본연의 임무요 사명이다.

진리(헬理)란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 타당한 논리의 법칙이요 참된 도리를 뜻한다. 이같은 진라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규정되어 왔다. 곧 새로운 시대에는 이에 부응한 새로운 지식이 요구되는 법이다. 그러나 사물의 근본원리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 원리를 밝혀내기 위하여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온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이를 탐구하기 위해 무엇보다 창의력(創意力)의 개발이 있어야 한다 우리 인간 내면에 잠재되

어 있는 무한한 창의력을 개발, 창출하여 인류문화 창달에 기여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교육기관교육의 중요한 목표이자, 목적이라 할 것이다

문화란 인류의 산물로서, 인간에 의하며 칭-조되고 생성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선조로부터 대대로 전승되어 온 하나의 민족적인 유산이다. 이같은 문화의 전승은 진리 탐구를 전제로 계승 발전한다.

한편 진리의 탐구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탐구의 올바른 자세가 요구된다. 사물을 올바로 보는 시각 및 탐구의 바른 자세가 확립되어 있지 않다면 진리를 찾아낼 수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진리 탐구의 자세는 어느 시대, 어느 환경 속에서도 흔들림이나 굴함이 없이 참된 도리를 찾아 밝혀 나가는 데 있다. 따라서 한성학원의 첫 번째 교육목표인 진리 탐구의 구체적인 시행 목표로서 진리 탐구 외에 창의성의 개발과 올바른 가치관의 확립을 덕목(德딘)으로 설정하였다.

2) 인격도야(人싸써治)

한성학원의 두번째 교육목표는 인격도야(人格l써 治)이다. 교육기관은 진리를 탐구하는 전당(般덴)이자, 인격도야의 장(楊)이다. 따라서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됨이 바르지 못하다면 그는 올바른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올바른 사람은 세상의 시류에 끌려다니지 아니하고 참된 도리를 바르게 지켜 나가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일찍이 우리 동양(까펴F)에서는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사람은 학문 연마와 함께 인격수양(人格修찮)에 힘써 덕을 쌓는 일을 중하게 여겨왔다. 인간으로서 참된 도리를 지켜가며 살아가지 않거나,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속마음과 다른 말이나 몸가짐을 가지고 행하거나, 자기 고집을 내세우는 사

람을 바른 인격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즉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도 인격을 갖추지 못했을 때 그 사회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평가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움이 넓어가고 깊어갈수록 그에 비례하여 올바른 가치관이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 먼 앞날을 내다보며 바른 몸과 마음가짐을 가지고 행하지 아니한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의 지성인(知性人)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듯이 한 인간이 인격을 도야하는 데 있어 전제조건의 하나가 건전한 신체의 단련이다. 특히 한성학원의 경우 설립자 우촌 선생의 교육이념 가운데 체육교육(體育敎育)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건강을 잃을 때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올바른 지식의 함양과 함께 건전한 육체 단련을 위한 이원적 교육이 강조된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덕을 쌓은 이라도 건강하지 못하면 용기와 과단성과 추진력의

결핍으로 그 배운 바 참뜻을 바로 실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여러 교육자들에 의해 지식교육 못지 않게 체육교육이 강조되었던 것도 여기에 있었다 요컨대 개인의 인격도 야는 물론 민족 구성원 전체의 건전한 인격과 건강한 사회인을 양성하기 위해 체력을 단련하며 연마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교육기관교육의 과제이자 목표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오늘날 민주시민사회(民主市民社會)에서 아무리 배운 것이 많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녔더라도 그 사회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그 사회로부터 환영받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작고 변변치 못한 일이라도 자기에게 맡겨진 일과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할 때 비로소 민주시민으로서의 자격이 부여되는 것이다.

이상의 점에 유념하여 한성학원은 두번째 교육목표로 인격도야(人格附펴)를 설정하였으며 그 실천 덕목으로 첫째, 덕성(德、性)의 함양과 둘

째, 건강한 신체의 딘-랜 셋째,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인간상을 한성학원의 또 하나의 덕목으로 삼았다.

3) 인제양성(人才줬成)

한성학원이 설정한 세벤째 교육목표는 인재양성이다. 교육기관의 사명은 국가사회에 유익하고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있다. 교육기관은 그 니라의 최고학부로서 옛부터 국가의 고 급 인재양성 기관으로서 역할을 다 해 왔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최고 교육기관에서는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재양성을 기본적인 목표로 삼고 ‘배달겨레’의 민족적 지-부심괴- 긍지를 심어주는 교육에 온 힘을 모아왔다 이를 한 마디로 힘축히고 있는 교육이념이지 교육철학이 홍익인간(弘싫人1폐 )구현이다.

흉익인간 사상은 우리 배달겨레의 건국신화이지 단군 조선의 건국이념을 함축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이다. 여기서 단(J띤)이란 ‘밝-달’이라 하여 ‘밝·은 땅’이란 뜻으로 ‘ 배달’이라고 전해 왔으며, 우리가 딴하는 ‘한얼’은 ‘단일민족’ 또는 ‘백의민족’을 의미하며, 시조(셈폐)딘-군( ~꾀 꾀 )의 혈통을 그대로 계승하였음을 뜻하는 사상이다. 그리고 ‘ 흉익인간’ 이란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정신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이자 오늘날 우리 교육의 최대 덕목으로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 정신과 사상에 부합한 인재양성을 한성학원의 교육목표의 실천 덕목의 하니-로 삼고자 한다. 따라서 우리 한성학원은 이 덕목의 실천을 위해 첫째,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과 민족정신에 투철한 ‘참한국인’을 양상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불어넣어 한민족애 대한 주체성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둘째, 건전한 시민의식을 소유한 지성인을 양성하는 일에 주력하고 자 한다. 우리 민족이 유구한 역사에 비하여 근대적 시민의식에 기초한 민주사회를 건설한 것은 1945 년 해방 이후이다 따라서 장구한 민족사에 비해 매우 일천하다.

최근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이기적 개인주의나 공공의식의 절대 결여 현상도 우리 사회가 진정한 의미의 민주 시민으로서의 훈련과 경험을 축적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향후 우리 사회가 진정한 민주시민사회건설을 담보(땀保)하기 위해서는 교육기관에서 젊은이들에게 건전한 시민의식을 고취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과제의 하나이다.

모든 교육기관의 궁극적인 교육목표가 그러하듯 한성학원 역시 인재양성의 최종목표를 민족과 국가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머물지 않고 세계 인류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적인 지도자를 양성, 배출

하는 데 두고자 한다. 작금 우리 민족은 과거에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민족사적인 국운의 도래를 맞이하고 있다. 안으로는 지난 40여년간 미·소 양대 냉전체제 하에서 대립과 반목을 거둡하였으며 민족분단의 벽을 쌓아 왔다. 그러나 최근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의 변화와 북방정책에 힘입어 통일운동이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88올림픽 개최 이후 세계 속에서의 한국의 위상이 날로 높아져 가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현재 우리 민족 2천년의 역사 이래 한민족의 최대 민족적 중흥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 장래를 책임져야 할 인재양성의 책무를 담보하고 있는 오늘의 교육기관의 사명에 유념하면서 한성학원은 이같은 대내외적인 변혁기와 함께 도래한 민족겨레의 국운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갈 유능한 인재양성을 한성학원의 교육지표로 설정하였다.

이상에서 언급한 교육이념과 교육목적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3

대 덕목 하에 한성학원은 이 땅에 많은 인재를 배출했으며 이 원칙은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것이다. 한성학원의 건학이념과 교육목표를 하나의 〈표〉로 만들어 보면 아래와 같다.

* 한성학원의 교육이념과 교육목표 *

교육 이념

진리

지선

교육목적

본 희원은 대한민국의 교육 이 념 애 입각하여 학술의 이 론과 응용 빙법을 교수 연구하여 국가와 인류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지도적 인 격을 도야하는 것을 목적으로 힌다.

교육목표

진리와 지선의 교육이념 아래 지식을 탐구하고 덕성을 함양하여 국가 사회 미치 인류 발전에 이바지 하라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데 그 목표를 둔다.

진리탐구

진리 탐구

창의성 개발

바른 가치관 확립

인격도야

덕성과 함양

건전한 신체 단련

책임 의무 이행

인재양성

민족 자부심 함양

건전한 시민의식 고취

국가 인류번영 기여

제2편

우촌 김의평 박사의 생애와 인간

제1장 유년과 유학의 시절

우촌 김의형 선생은 선조들의 위대함을 이어 나갔으며 나아가 선조들의 뜻한 바를 자신이 몸소 실천함으로써 션조들 뿐 아니라 자신의 이름과 업적도 후세에 남긴 인물이다.

선생의 위대함은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조상의 벚나는 가계(孩系)에서 이어진 것이기도 하다.

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인 928 년,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淑

!I떠王)은 그렇게도 찬란했던 신라의 사직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 나라를 고려 왕조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망국의 비통함을 처절하게 느낀 경순왕의 태자(太子) 일공(싫公)은 비분과 통한의 눈물을 삼키며 금강산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마의(페i衣)만 입고 풀뿌리만으로 연명 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마의태자(페ilt 衣太子)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둘째 아들 황공(랜公) 역시 속세를 떠나 가야산의 해인사로 들어가 불교에 귀의하였다. 법호(찮減)를 범공(짧空)이라하고 세상사의 무상함을 깨달아 제행무상(掛行빡휩)의 불심에 오로지 몰두하였다.

범공대사가 해탈하여 입산하기 전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범공 대사의 장남 운발(펀發) 이 나주(餘州) 김씨의 시조(꾀 j빠) 나주군(젠州찌 )이다. 나주군의 16세 손은 정준(廷網)이었다. 그는 천성이 온화하고, 한편

으로는 강직하여 주변에서 칭송이 자자하였다. 특히 충성과 의리가 대단하였다, 그의 관직은 도총부 부총제에 이르렀다. 조선 정조 때에 왜구가 변방을 어지럽히자 용맹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선두에 서서 이를 격퇴함으로써 나라의 위세를 떨치는 한편 개인에게도 영예가 되었다.

그는 문무 양변에 출중하여 무예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문학과 음악에도 훌 륭 한 재능이 있었다. 만년에는 경기도 포천군 기을산 기슭에서 지손을 비 롯 한 청소년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정 준 공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 양공(따公)은 황해도 해주목 판관(收判끼’)을 지냈고 둘째아들 증공(펙公)은 사옹원직장( 피經院띤괴)윤 지냈으며 세째아들 저 공 (:1씌公)은 성균진사CJi\i; J침進:1: )를 역임하였다.

저공은 난리를 평정한 공신으로 금성군(페 城혜 )에 책봉(JTU 셉 )되었다.

그 의 손자인 취장공(파찮公)은 문과에 급제하여 의성(義城) 현령(싼 令)으로 있 을 때에 그의 외조부인 김종서(金宗해) 장군이 수양대군(힘 I場大1 J) 에게 화를 당하자 이에 항거하여 거사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뜻을 이 루 지 못하였다. 그 후 세상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

정준 공 의 증손인 봉서공은 통정대부 절충장군 의홍위호군(通政大夫까術Wí 피쉰뱃 術펀따) 가선대부 병조참판(첼핑太夫;닥 멤參判)이 었으며, 그 다음인 현손(玄孫) 경석공(景셨公)은 무과 출신으로 전공을 세워 일등훈을 제수 받았다. 5대 손인 적공(述公)은 왜적을 영암포(찮I股패)에서 무찌르고, 행실이 훌륭하여 서원(훨 院)에 배향되었다.

그의 자제인 충수공(밑、秀公)은 임진왜란 때 선무공훈으로 가선직(첼딴l[iíl;)에 제수되었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의리에 순국함으로 조정에서는 적공과 함께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사창리에 있는 서원(휩院)에 배헝:히-였다. 더구나 그의 부인인 금성(해城) 나씨도 절개를 지켜 의에 죽

으니, 이는 한 가문에서 나온 쌍절(판節)이었다. 조정에서는 그 충의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공주군 탄천면 대학리에 충신, 효자, 열녀가 났다하여 정문(파 1~ln을 세웠다.

우촌 선생이 태어난 1904년은 러일전쟁이 일어난 해이다 국제 정세는 나날이 변화하는 가운데 서구 열강들은 식민지 확장에 혈안이었다. 시대의 변화에 무심하고 나라의 치세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던 이 나라는 밀려드는 외세 앞에 나라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고 조선왕조의 국운의 종말은 다가오고 있었다.

우촌 선생은 충청남도 공주군(公州째) 탄천면(‘願川耐) 견몽리( 兒까i 필) 256번지에서 태어났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환기 백제왕조의 유서 깊은 땅에서 태어난 그는 어차피 역사의 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숙명을 지니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거센 물결과도 같이 밀려드는 외세들, 미·영 · 불·독·이 등의 유럽 국

가들 뿐 아니라 북쪽의 러시아, 그리고 10년전 청국을 격파하고 동아시아 전체를 한 손에 넣고자 하는 신흥 강국 일본, 삼천리 금수강산은 이제 그들의 힘의 각축장이 되어 언제 어떻게 어느 나라의 손아귀에 떨어질 지 모르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중에서도 국가의 숙원인 남하정책을 달성하고자 하는 러시아와 일본이 가장 큰 위협이었다.

러시아와 일본은 이러한 팽창주의와 제국주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어 피할 수 없는 전쟁에 몰두하게 되었다. 결국 일본의 함대가 인천 근해에서 러시아 군함 두 척을 불시에 기습하여 격침시키니 이것이 러일전쟁의 시작이었다 우리 나라를 가운데 놓고 양국이 치열한 전쟁을 벌이게 되니, 이 나라는 10 년전 청일전쟁에 이어 또 다시 강국들의 이권 싸움에 희생되어 나라를 싸움터로 내주고 도탄에 빠져 불쌍한 백성들만 고통을 겪게 되었다.

드디어 다음 해인 1905 년의 을사 5조약으로 나라의 외교권마저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이 나라는 한탄과 슬픔만이 가득한 채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역사의 흐름앞에 우리 민족 모두가 무력했으며 사태의 파악에 정확한 안목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우촌선생의 가문과 당시의 시대 상황이 이러하였거니와, 이제 선생이 태어난 고장은 어떠하였던가.

이 곳은 그 옛날 마한(.1펀 iF덴) 시대에는 웅진성(熊젠 城) 또는 웅천(熊) 11) 이라고 하던 곳이었다. 또한 백제 때에는 5 대 여년간 도읍이었으며 사비성(뻐빠減)이라 하던 부여와 함께 백제의 왕성이었다. 그러나 1300여년 전 황금시대를 이루었던 백제의 찬란한 문화와 문명을 지금은 찾아 보기 어렵고, 다만 곰나루의 전설이 있는 용당리(龍파띤)의 사당이 고대의 향기를 풍길 뿐이다.

이 곳에는 거란의 침입으로 파천을 하였던 고려 현종의 고시 한 수

가 문헌에 전해지고 있다.

암 |쇠J i:fJl띠 ?:c 公州 전에 들으니 남쪽에 공주가 있다네,

3iIJ 此心↑려 따쨌! ~ 여기 다다르니 심정 기쁘고 즐거읍구나.

{rll 채쇄}泌永핑 休 신선의 경계 영롱하니 길이 다행스럽고 좋도다.

따 l뭔낀젠 放千愁 여러 신하 함께 모여 천수의 끈심을 푸는도다.

조선 시대에는 인조(仁패)가 이괄(李造)의 난(亂)으로 이곳에 피신하였다. 이때 건조한 산성공원에는 쌍수정(燮樹亨)과 쌍수정 앞에 서 있는, 인조가 금 대(金뺨)와 관직을 하사하여 유명해진 쌍수라는 나무가 있다.

백제의 도읍이었으며 그 후로도 임금이 몸을 의지했던 이곳에 지금 남아 있는 유적이 너무 희미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지만, 유구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왕도로서의 품위와 단아함이 전설처럼 보존되고 있음은 이곳을 찾는 이들이 모두 마음으로 느끼고 있다. 이곳

의 유적 가운데 무열왕릉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유산이다.

풍요와 멋과 기개가 어울려 전통을 빛내던 공주땅은 옛 시인 신공유의 한시로 더욱 빛난다.

- )누띔城↑xrl짧頭 일편의 황성은 나루를 베고 있는데,

젠人說與興亡훤 홍망의 일을 말해주는 이 없네

형江끼\젠 ï!:ï 今流 장강은 변함없이 예나 지금이나 흘러가고,

↑lt JdJRJ風]펀滿‘洲 다만 통풍에 풀이 모래 섬 에 가득함을 볼 뿐.

여기 공주군 탄천면 견통리가 바로 우촌 김의형 선생이 탄생한 곳이다. 여기는 백제의 고도 부근이기도 하거니와, 30 리 떨어진 곳에는 유명한 명산 계룡산이 우뚝 솟아 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건국시에 도읍을 정하려고 하였던 곳이다. 산세가 뛰어나고 장엄한 정기를 품고 있는 땅은 지금도 지나가는 사람이 옷깃을 여밀 정도로 서기(혜 氣)가 어린 곳이다.

우촌 선생 생가

예로부터 견동리 (ι 싸민)에 대한 풍수설이 있었다.

:i5 i1낌휴水 늙은 용은 물을 돌고

:tυ I:: ì않‘ ü: 검은 소는 강을 건넌다

1111 人îi녔 … 선인은 책을 읽고

]I~/<<{t~ 페Lílt 누런 학은 둥지로 돌아간다

이러한 형상이라고 하였으니 이곳의 지형과 산세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 수가 있다. 순딱하고 의연한 인심의 마을에, 그리고 멀리 가까이에 계룡산과 금강을 끼고 있는 볼외(꾀짜 L띠는 이 나라 삼천리 금수강산 중에서도 몇 안되는 풍광수려한 곳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유서 깊은 땅에 우촌선생이 탄생한 것은 이미 예삿일이 아닌 듯 하였다. 하물 며 이 곳 탄생시에는 선생의 그 학소리 같은 고고지성(삐삐之랜)이 있었으메 앞날의 일에 대한 예견의 조짐이 갖춰져

있었다.

아버지인 우창공은 엄하였으나 그의 천성은 더할 나위 없이 온화하고 인정이 많았다. 우칭-공은 자녀들에게 엄격하였으며, 그것은 아랫사람에 대한 자세에서도 마참가지였다. 그러나 자녀들은 물론 하인들도 우창공의 너그러운 마음씨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우창공 댁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부농이었다. 가을이 되어 추수를 할 때나 보리를 거두어 들일 때가 되면 수많은 일꾼들이 모여들어 일을 하였다. 이런 때에는 부근의 가난한 사람들도 모여들어 일군들 틈에 끼어 벼나 보리 이삭을 주워 갈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벗다발을 풀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주었다.

이런 것을 보고 자란 우촌 선생은 어려서부터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며, 욕심 없이 성장하였으니, 이것은 훗날 선생이 오로지 남을 위해 몸을 바치고자 하는 위대한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일찍부터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다른 사람보다 앞서야 할 것이며 절대로 남에게 뒤지지 말라’고 우촌 선생은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이렇게 말하였는데, 이것은 선생이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폼소 실천하였던 정신이다. 우촌 선생의 고향인 공주는 전봉준(쏘짧準)의 동학군(댔學떤)이 관군과 맞서 싸우다가 크게 패했던 옛 전투장이기도 하였다. 전봉준은 호남 고부군의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당시 부패의 절정에 이른 봉건왕조(封建王꽤)에 항거하여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권을 위해 평민주의를 부르짖으며 봉기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북진하다가 이곳에서 관군과 마주쳤던 것이다. 이러한 교전이 있은 지불과 10 여년 후, 1907년 8월에 일제의 강점으로 비통하게도 구한국의 군대가 완전히 해산되었다. 이에 항거하는 구한국의 군대가 각지에서 궐기한 의병군(義兵꿇)이 되어 일어나, 선생의 고향 인접지인 공주읍을

비롯하여 유구, 정산, 청양 등지에서 일본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나라는 일본에 병탄(ifr- 휴)되었고 온나라는 비통한 슬픔에 빠지고 말았다.

우촌 선생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반일 감정과 신학문의 습득 사이에서 일어나는 고민이었다. 오래전 동학 농민전쟁 때의 일이다. 조정의 군대가 일본 병사들을 앞세우고 이 고장으로 동학군을 치러 왔을 때, 활이나 창으로 이들에게 대항하여 결국은 패퇴하고 말았다. 따라서 이 고장의 민심은 일본인에 대해 극도로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중앙의 조정에서는 일인들이 강압적으로 조선의 조정을 억눌러 무슨 조약이니 무슨 협약이니 하여 우리의 국권을 날로 침탈해 가고 있었으니 국민의 배일감정은 더욱 날로 악화되었다.

더구나 우촌 선생의 선조인 충수공(핍秀公) 내외가 정유재란(T띤따亂) 때 왜인에게 무참한 변을 당했던 까닭으로 김씨 일문의 일인들에

대한 감정은 더욱 나쨌다.

당시의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신학문이나 개화사상, 또는 세계의 새로운 사조에 발맞추려는 것에 대해 이 지역 사람들은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신학문과 사조 등을 일본의 학문이라고 몰아부쳤으며, 친일사상, 매국행위라고 공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촌 선생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남다른 시대인식과 혜안(慧|따)의 안목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태를 냉정하고 예리하게 분석하고 판단하고 있었다. 우촌 선생은 구한국이 외국에게 침략을 당하는 것은 우리 니라가 신문명에 뒤졌기 때문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신문명을 받아 들이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에 우촌 선생에게 진로의 방향을 인도해 주는 하나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것은 한성에서 군관학교에 근무했던 이은우(李股雨)라는

분이 이 고장으로 내려왔던 것이다.

이은우 선생은 구한국 군대가 해산될 때에 군에서 나와 잠시 일본에 건너가 그 곳에서 군사공부를 하다가 나라가 나날이 쇠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관직을 버린 채 이 고장을 찾아 온 것이다 나라의 힘을 다시 회복하여 국권을 찾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그는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 아무리 주변에서 반대를 한다 해도 그는 지-신의 확고한 신념을 꺾지 않았다. 그는 구국의 길은 교육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 곳의 후배를 모아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을 알게 된 마을의 어른들은 무턱대고 선생을 친일분자니, 심지어는 일인에게 매수를 당한 끄나풀이니 하며 비벙-하고 백안시 하였다. 이은우 선생은 더욱 마음을 굳건히 하며 참고 견디면서 교육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다져나갔다. 이은우 선생은 이러한 생각에서 이 고장에서 유력한 어른이며 이해가 깊

은 우촌 선생의 부친 우창공을 기회 있는대로 찾아가 협조를 부탁하였다. 우창공 선생은 그 생각의 타당성을 인정한 나머지 마침내 학교 설립에 협조하기로 하였다.

이인면(利仁面)에 자리하고 있던 구 찰방관사(察誌官舍)를 교사로 정하고 반탄면(半離面), 대곡천면(大曲川面), 목동변(木洞面) 등 3개 면에서 공동으로 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3 개 면이 학교를 설립했다는 뜻으로 삼흥학교(三興學校)라고 교명을 지어 개교를 하였다. 이은우 선생이 교장과 교사, 그리고 사환까지 겸하면서 신학문의 교육을 시작하게 되었다.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으나 이은우 선생의 노력으로 이 학교가 후에 이인공립보통학교(利仁公立普通學校)로 계승된 것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였다.

신식 학생 우촌 선생은 삼흥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는 이후 난

다음에는 친척인 성국(成國)을 비롯한 여러 친구들의 부모님을 찾아뵙고 자제들을 신문명의 교육을 받도록 간콕히 말씀드렸다. 그리하여 여러 학부모로부터 승락을 얻어내어 많은 소년들이 신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우촌선생은 이미 보통학교 시절부터 이렇게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보이며 장차 위대한 교육자가 될 기초를 쌓아 나갔다. 마치 쑥티고개에서 성황당에 돌 하나하나를 쌓아 나가듯 실력과 소양을 쌓아 나갔 던 것이다. 한 사람의 인물이 형성되기까지는 이같은 훌륭한 선생이 그 뒤에 있게 마련이다.

고등보통학교 재학 당시(앞줄 중앙)

우촌 선생은 삼흥학교의 후신인 이인보통학교(利仁필패쟁校)에서 초등교육 과정 을 이수하였다. 스스로 학업에 열중하고 스승 이은우 선생의 정성어린 지도를 받은 우촌 선생은 하루가 다르게 학문의 깊이를 더해 갔으며 인격도 고매하게 도야되어 갔다.

우촌 선생은 경성으로 유학갈 마음은 있었으나 부모님의 허락 여부와 만 곳에 가서 혼자 공부해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음을 애태우고 있었다. 그러나 졸업식이 가까운 어느 날 하늘같은 아버지의 유학 권유와 사려 갚음으로 선생은 결국 유학을 결심한다.

이렇게 하여 탄천면과 이인면에서 최초의 서울 유학생이 탄생하였다 우촌 선생은 단신으로 경성을 향하여 청운의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경성에서 홀로 병을 앓기도 하고, 고독함을 참아야 하는 어려움을 겪어가면서 학업을 예정대로 마친 우촌 선생은 여기에서 학교를 마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상급학교로 진급하여 앞길을 개척해 보고 싶었다. 우촌 선생의 고민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청년의 고뇌를 몇번이나 거듭한 끝에 마침내 결론에 도달하였다.

우촌 선생은 몇 년 동안이나 심사숙고하고 자문자답한 끝에 마침내 체육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체육을 전공하려면 일본으로 가야만 했다. 국내에는 체육을 전공할 수 있는 학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일할 결심을 하고 그 준비에 착수하였다.

우촌 선생의 결심은 굳었고 이상은 컸오나 그 실천은 어려웠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부친인 우창공이 허락하지 않는 점이었다.

그 당시 국내에는 전문 교육 시설이 거의 없어 중등교육을 마치는 것이 고작이었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퉁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특수층과 친일파 몇몇 사람의 자제 등 극소수에 한정되어 있었다. 더구나 배일(排EI ) 사상이 투철한 우창공으로서는 자제를 도일시켜 교육을 더

받게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지체가 일본 유학길에 오르면 당사자는 물론 온 가문이 친일파로 지목되어 비난받을 염려도 없지 않았다. 따라서 그 위험한 일을 자처할 수 없는 처지였다.

우창공의 생각으로는 당시 실정에서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유식계급에 속하므로 고향에 돌아와 일제의 관리가 아닌 교육자가 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교육에 종사하며 은연중에 민족정기를 양성케 하고 착실하게 가정을 꾸려가기를 바랬던 것이다.

이러한 판단에서 우창공은 자제를 도일시키려는 의사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우촌 선생이 방학이 되어 고향에 돌아올 때나, 편지로 장래의 진로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일본유학 문제에 대해서만은 단호한 입장이었다. 아버님의 뜻이 이러하니 효성이 깊은 우촌 선생은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일본 동경으로 길을 떠나고 싶었으나 마음속으로 생각할 뿐 이 뜻을 쉽게 내비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는 사이에도 세월은 흘러 우촌 선생의 경성 유학도 마칠 때가 다가왔다 이제는 유학을 갈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기로에 놓여 있었다. 우촌 선생은 고민에 고민을 거둡하고, 갈등에 갈등을 거듭한 결과 일본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오로지 일본으로 가겠다는 결심만 세웠을 뿐, 일본에 갈 수 있는 기준에 맞는 조건은 아무것도 없었으니, 도일하는 데에 필요한 도항증이라는 것을 얻을 길이 막막하였다. 일본행 배를 타려하니 일경은 운항증을 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막았다.

우촌 선생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경을 찾아가 사정을 호소했다. 일경은 처음에는 말대꾸도 하지않고 거절만하더니 하루 이틀 지나자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사흘이 지나자 우촌 선생의 끈기와 집념에 감통이 되어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승선을 허락해 주었다.

일단 결심을 하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그 일을 완수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것이 선생의 성격이었다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도착한 우촌선생은 여러 난관을 헤치고 입학하기 어렵기로 이름 난 일본체육학교(현재의 일본체육대학)에 유일한 한인 학생으로 입학하였다 이렇게 해서 우촌 선생은 소망대로 유학의 첫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나 이역만리 타국의 외로운 생활에서 오는 고초는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가는 콧마다 일인들이 자기네 식민지의 백성이라고 깔보고 멸시하는 것이었다 또 편파적인 성적 평가는 끝까지 시정되지 않았으며, 우촌 선생의 당당한 항의는 번번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부딩한 처사는 교수 뿐만이 아니었다. 일인 학생들도 선생의 뛰어난 자질과 노력에 대해 시기심을 가지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거나 방해 공작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즈음 고향의 우창공으로부터는 지금 당장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하라는 독촉이 성화같았다. 그러나 우촌 선생이 귀국할 뜻을 보이지 않자 우창공께서는 급기야 학비의 송금을 중단시켜 버렸다. 이 때부터 경제적으로 매우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모든 일에 있어서 여유가 있고 늠늠한 자세를 보이던 선생이었지만 갑자기 당하는 경제적 어려움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님의 뜻에 따라 귀국할 수도 없었다. 그 동안 많은 시련을 겪으며 어렵게 계속한 학업이므로 지금에 와서 중단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와신상담하는 수 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풍족한 국가에서도 대학생이 되면 자력으로 학비를 조달하는데, 하물며 남의 나라 식민지가 된 나라의 학생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학비는 자신이 조달해야 된다고 생각한 우촌 선생은 이때부터 학비 마련을 위해 거리로 뛰쳐 나왔다

고국의 유복한 가정에서 아무런 부족함 없이 자란 우촌 선생이 무슨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나, 지금 수만리 타국에서 적수공권이 되고 보니 무슨 일이든지 하여 학비를 조달하여야만 하였다.

가장 먼저 시작한 돈벌이는 일인의 가정에서 어린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일이었다. 줄기차게 울어대는 어린애를 업어주고 안아주고 달래는 일은 성질이 급한 선생에게는 무척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참고 계속하는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고국에서는 사남매 중에 막내로 자라 장난으로라도 누구를 업어 본 일이 없는 선생으로서는 어린애를 업어 준다는 것이 여간 어색하고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학업을 계속해야만 한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밤늦게까지 교과서를 펴들고 공부를 하였다. 훗날, 그 때의 일을 회고하는 선생의 회고담에 의하면 여러가지 고된 일을 해보았지만 그 중에서도 아이 보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선생의 고생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러나 아이 보는 일도 오래 계속할 수가 없어, 그 다음에는 한인 학생들이 많이 하고 있던 신문 배달을 시작하였다. 이 일은 이른 새벽 등교하기 전과 하교 후에 하는 일이라 학생에게는 시간적으로 아주 적합했으나 수입이 너무 미미하여 학비에 별로 보탬이 되지 못히였다.

좀 더 수입이 좋은 일거리를 찾던 우촌 선생은 인력거 끌기를 시작하였다. 이 일은 수입이 제법 넉넉하였으나 무척 고된 일이었다. 그러나 신체가 단련되고 체육을 전공하고 있는 선생에게는 차라리 거의 움직이지 않고 서 있어야만 하는 아이 보는 일보다는 힘이 덜 들었다.

일본체육대학 시절(1925-1926, 둘째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인력거에 한 사람을 태우고 가파른 고개길을 오를 때면 온폼에서 땀이 비오듯 흐르고 뼈마디는 쑤시고 아랐다. 그러나 이것도 식민지 국민이 겪어야 할 시련이라고 생각하며 달게 받았다. 선생이 나중에 신경통으로 고생한 것은 이 때의 과로에서 얻어진 병이 아닌가 싶다.

또다른 일거리도 생겼다. 정초가 되어 떡을 쩡는 품팔이 일이었다. 이 일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어서 하려고 하는 일꾼들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선생은 그들과는 반대로 몸에 이로운 전신운동이 된다고 하면 서 품샀도 많이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기꺼이 떡메를 메고 나섰다.

땀흘려 가며 떡을 찔다 보니,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지내던 설날의 머슴들이 넓은 마당에서 떡을 치느라고 법석을 떨었고, 아낙네들은 커다란 쟁반이며 소쿠리를 들고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드느라고 분주히 오가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혔다. 우촌 선생 형제와 일가 친척 소년들은 입맛을 당겨주는 흰떡이며 인절

미, 그리고 부침개들을 주는데로 받아 먹으며 즐거워 했다. 정초 음식이 다 되면 세배차 오는 동네 어른들을 위해 음식 접대를 하며 재미있게 지내기도 했다.

지금 그 일들을 생각하니, 너무나 처지가 달라져 마치 아득한 다른 세계의 일로만 여겨졌다 땀을 빨빨 흘리며 힘에 겨운 떡메질을 해대는 우촌 선생은 지나간 시절을 생각하니 콧날이 시큰해지며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리고 불효한 자식을 기다리며 애태우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니 두 분의 모습이 눈 앞에 어른거리며 웹고 싶은 정이 한없이 치미는 것이었다.

하염없는 고향을 향한 그리움과 부모님 생각에 온몸이 떨려 오는 우촌 선생은 떡메가 무척이나 무겁고 한던 일도 몹시 힘들게 느껴졌다.

이런 외로움을 견디고 이렇게 힘든 노동을 하면서 과연 뜻을 이루어 고

국에 돌아갈 수 수 있을까? 그리고 고국에 돌아가서 과연 보람있는 일을 할 수 있을까?

우촌 선생은 이같은 의구심이 들 때마다 곧 머리를 저었다.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나는 할 수 있다. 힘차게 씨워 반드시 뜻을 이루어 고국에 돌아갈 것이다.

잠시 가졌던 의구심 을 떨쳐 버린 우촌 선생은 다시 의욕을 불태우며 떡메를 힘차게 내려쳤다.

선생의 중노동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정초에는 떡치기를 하였고 그것이 끝 나면 긴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도로꼬(사람이 밀고 가는 토목공사용 철로 경차량)를 밀었다. 이 일은 너무 중노동이라 일인들은 별로 하려 들지 않는 일이었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렇게 힘든 일을 주저하지 않고 하는 우촌 선생을 보며 일인들은 그의 장사 같은 힘과 성실성에 찬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역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나라의 앞날을 위해 훌륭한 교육자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온갖 험난한 길을 걸어가는 우촌 선생의 습은 숭고한 한국인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큰 뜻을 품고 일본으로 건너가 온갖 고초를 겪으며 유학 생활을 하는 우촌 선생은 마음 속으로는 항상 고향과 고국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촌 선생은 일본에서 발생되는 〈동경일일신문〉을 우편으발송하였고, 고향의 남정관씨는 고국에서 발간하는 〈동아일보〉를 보내 주었다.

이렇게 고향 소식을 신문을 통하여 알게 된 우촌 선생은 간접적으로 나마 긍금증이나 고독감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리고 힘든 고학을 하며 생기기 쉬운 좌절감도 가라앉힐 수가 있었

다. 그러던 어느 날 부친 우창공이 중병으로 위급하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던 것이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 싶으나 바람은 멈추지 않고, 자식이 부모를 모시고 싶으나 부모님이 기다려 주지 않는구나.

이런 옛 글귀를 되뇌이며 우촌 선생은 그칠 줄 모르는 눈물을 뿌리며 황망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무심한 것이 하늘의 뜻이런가, 부친 우창공은 선생을 비롯한 온 가족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고요히 눈을 감았다. 우촌 선생은 애통을 가눌 길이 없어 단지(斷指)의 효심마저 나타냈으니, 가족의 비통함은 더욱 애절하였다. 이 때 우창공의 나이는 52세였고 우촌 선생의 나이 22세였다

우촌 선생은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그리고 또 다시 온갖 고난을 겪어 가며 학업을 계속하여 1927년 3월 20일 드디어 선생은 일본 체육전문학교를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제2장 교직과 육영의 시절

스위스의 위대한 교육가였던 페스탈로치는 교육의 개량을 통해 빈민을 향상시킬 수 있고, 이것이 일반 사회에까지 보편화될 때 인류의 복리는 크게 증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손수 실행에 옮김으로 써 자신의 이상을 달성한 위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가로서 지금까지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우촌 선생 또한 페스탈로치 못지 않은 사람이어서 교육으로 우리 국

민을 향상시키고, 우리의 애잔한 국가를 개진하여 국민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동시에 국가를 부유케 하고자 하는 대사업을 흉중에 품고 있었다. 일찍이 동경에 유학을 한 것도 그렇고,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교육현장에 투신하신 것도 그같은 커다란 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선생의 결연한 자세와는 달리 촌로들은 이를 이해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우촌 선생은 계획대로 1927 년 천안 보통학교로 부임하였고, 여기서 학문을 통해 얻은 지식을 실제로 활용하는데 전력을 다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천안 보통학교는 그 당시 체육 연구 지정 학교여서 하나에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천안보통 고등학교 재직 당시(둘째줄 왼쪽에서 두번째)

우촌 선생 덕분에 천안 보통학교는 일반 도수 체조는 물론이고, 다른 학교에서 감히 엄두도 못 내던 육상경기의 각 종목과 기계체조, 그리고 여학생들의 율동과 무용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실시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체육을 보급하는 데에도 앞장섰던, 선생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구국 운동은 가정에서부터 개량하여야 할 것이며, 그러자면 가정을 올바르게 만들고, 가정이 올바르면 여자 교육이 충실해야 한다.

이렇게 순수한 이념을 가지고 교육에 임하였다. 선생의 지론대로 숭고한 교육 정신을 실천에 옮기는데 더욱 매진하였으매, 그 성과는 대단히 놀라웠고, 당시 각종 운동경기에서 전국 대표가 되는 운동선수들을 무수히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을 통해 우촌 선생의 지도 이

념과 정신이 변변이 계승, 발전되어 오늘의 한국 체육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침략자의 일원이었던 일본인 본전(7-j;;:任1) 훈도의 콧대를 꺾어 놓은 일이 있기도 했지만, 그것이 바로 교육정책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인들은 〈일선융화〉니 〈내선일체〉니 하는 정책을 내세워일인화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촌 선생과는 서로 상충하는 바가 많았다. 민족정신을 고취시켜 보고지- 했던 선생의 뜻이 전혀 융통성이 부여되지 않았다 민족정신을 고취시켜 보고자 했던 선생의 뜻이 갈수록 어렵게되지 보다 자유로운 사립학교로 옮겨 보기로 작정하였다.

그 당시 선생의 행적은 직접 선생에게 훈도를 받았던 제자 박태석씨의 회고담을 들어보면 이러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난 후 나는 마음을 굳혔고, 그것이 나의 커다란 생훨지침이 되어 오늘끼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 부동의 신념’을 훈시하셨습 니다. 그 내용은 ‘우리 나라의 독립’과 ‘자유, 자립정신’ 이었습니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항상 ‘부동의 신념’을 지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촌 선생은 감화력과 영향력이 탁월한 교육자였다. 그렇다고 완고하거나 무미건조한 도학자같은 인상을 풍기는 분은 더욱 아니었다.

영명학교에서 뜻있는 교편생활을 하던 우촌 선생은 1930년에 서울에 있는 협성실업학교(후, 광신상업고등학교)로 영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오래 있지 않고 그 이듬해인 1931 년 4월 1 일에 다시 동덕여자중학교(후, 동덕여자고등학교)로 발탁되어 가게 된다. 우촌 선생은 바로 여기에서 장구한 세월을 두고 한국 여성의 체육교육을 위하여 온갓 정열을 바치게 된다. 뿐만아니라 우촌 선생의 인간적인 면에서 보

아도 가장 화려했던 청춘시절에 해당하며, 열과 성을 교육에 커다란 공헌을 한 곳이기도 한다.

공주 영명학교 재직 당시(1928년대 여섯째줄 왼쪽에서 세번째)

선생이 동덕여고에 취임하면서 첫번째로 착수한 일은 학생들의 기강과 규율을 바로 잡는 일이었다. 선생이 생각하기에는 우리나라 국민성이 개인적으로 놓고 볼 때는 침략자인 일본인보다 월등히 우수한 면이 많았고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특출했으나, 일단 단체를 구성하고 보면 그 반대로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낙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시정하려면 우선 질서있는 생활 태도를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또 다른 일변에서 보면 체육교육이란 외적인 형식에서부터 시작하여 내적인 내용을 형성해가는 것이므로 질서생활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운동을 하는 것이 강인한 체력을

기르기 위힘- 뿐만 아니라 그에 걸맞는 정신을 기르기 위함 같이, 학생들의 기강과 규율을 바로 잡는다는 것은 이들의 정신을 바로 잡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우촌 선생은 동덕여고에 재직하는 동안 체육의 진흥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했다. 그러나 학생들이나 선수들이 알지 못하는 비화들도 숱하게 많았다. 각 선수들의 경기 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관련 서적들을 구입하여 밤새도록 공부해야 했고, 각 분야의 권위자들을 초빙하거나 필요한 코치를 초빙하는데 필요한 경비를 학교 당국으로부터 지급받지 못하여 자비로 해결했던 일 등으로 그의 열정과 봉사정신을 엿볼 수가 있다.

동덕여고 재직시 육상선수들과 함께(1934. 7. 1)

동덕여고는 매년 국민학교의 여자 아동의 경기대회를 개최하여 여성 체육의 향상을 꾀하였고, 이것 역시 해외의 이목이 집중되는 행사였다. 이럼으로써 동덕여고는 당시 ‘여성체육왕국’으로 불리게 되었고, 체육교육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다른 한편으로 우촌 선생은 의리에 살고, 보은을 중시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곧, 그의 애향심 또한 남다른 데가 있었던 것이다.

그의 고향인 공주군 탄천면 견동리에 가변 동구 잎을 우회하며 흐르는 금강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금강을 따라 견고한 제방이 길게 뻗어 있는데 이를 견통제라고 한다. 이 제방 입구에 보면 아담한 돌로 깎아세운 기념비 하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촌 선생을 영구히 기리는, 순수한 뜻에서 자진하여 건립한 보기드문 송덕비이다.

견동리 제방 신축을 감사하는 뜻으로 주민들이 세운 불망비

선생의 애향심의 발로는 구석구석을 누비며 선생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면 서슴없이 일을 착수하가 시작하였다. 그의 고향견동리에서 또하나 선생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교육의 전당인 학교의 설립이었다.

선생의 헌식적인 노력으로 1972년 3월 1일자로 견동국민학교 설립과 인가를 당국으로부터 받게 되었다. 이로써 이 고장의 숙원이었던 국민학교가 정식으로 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선생의 열렬한 애향심을 기리기 위해 동네 사람들은 ‘우촌 김의형 선생 기념비’를 이 날 함께 세우게 되었다 그 기념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애향심이 돈독하신 선생은 향리에 국민교육기관이 없음을 개탄하시던 중, 견통국민학교의 설립이 운위되자 1967 년 2월 10일 학교 교지 전부를 매수하시는 동시에 제반을 적극 추진하시어 견동국민학교의 설립과 승격

인가를 당국에서 받게 힘쓰셨으니 이것이 1972년 3월 1 일이다. 선생의 숭고한 공적으로 이 고장은 제 2세 국민교육이 날로 융성하니, 이 위대한 공덕은 영구불망할 성사엄에 전 주민의 도의로 기념을 세워 길이 기념하노라.

옛 성현의 말씀에 의리를 보고도 행치 않으면 그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우촌 선생은 이 의리를 지키기 위해 무한히 노력하는 사람이기도 하였다.

동덕여고 재직중의 일이었다. 춘강 조동식 교장은 약관의 나이 때부터 시작하여 일생 동안 우리 나라 민족교육계의 공로자였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촌 선생은 이 교장의 노후를 위해 뭔가 해드리는 것이 교장 선생님이 이룩한 공로에 대한 보답이 되겠다고 생각하여 모금 운동에 직접 나섰다.

이런 의지의 결과로 경기도 포천땅의 한 전답을 매수하여 조동식 노교장 선생님에게 증정함으로서 보은교육의 귀감이 되었다.

우촌 선생의 의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과거 소년시절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은사 이은우 선생에게도 쏠리게 되었다. 그렇게도 갈망하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외롭게 살다가 별세한 이은우 선생의 분묘는, 자손이 없었으므로 방치되어 형체마저도 분간키 어려운 실정에 놓여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우촌 선생은 산소를 개수하고 비석을 세우기로 마음 먹었다.

또 한가지의 일이 있다. 여기서 우의를 소증히 생각했던 선생의 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박장열씨는 같은 학교 동료였다. 그러나 6.25시변종서울에서 온 박장열 씨가 덕산까지 피난 와서 어렵게 살다가 객사를 하자 동네 사 람들이 통정하여 가매장 해 주었다는 전말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상횡을 대하고 돌아온 우촌 선생은 고인의 유택을 새로 미-련하고 비석을 세워주었다.

이처럼 우촌 선생은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그것이 옳다고 생

각되는 것이면 서슴없이 실행에 옮기는 그런 인물이었다.

우리 민족이 1919년 3월 1일에 전세계 만방에 성명한 바 유명한 기미독립선언문 중에 이러한 대목이 있다.

...凍氷寒雪에 呼吸을 閉蟄한것이 彼一時의 勢라하면 和風暖陽에 氣脈을 振舒함은 此一時의 勢이니...

제국주의 혹심한 억압 통치 아래서 어둡고 우울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그 시대는 정말로 엄동설한 매운 계절에 호흡마저 막히는 때라고 한다변, 일제의 강철 사슬이 더 이상 맥 못쓰고 풀리워지던 1945 년 8월 15일 광복의 이 날은 정녕 온화한 바람과 따사론 햇볕에 맥박이 살아니는 그같은 형세의 때임이 분명하였다. 우리 국민이 피압박 민족의 비운에서 시달리기 36년 햇수에 이르러서, 그 동안 이루 다 셀 수 없는 온갖 굴욕과 수모를 있는대로 당하다가 얻은 나라의 민족 해방이요

광복이었다.

이 때가 우촌 선생이 그의 생애를 통해서 일대 자신의 경륜을 실현하고 그것을 왕성하게 펼쳐나가기에 가장 좋은 42세 되는 해였다. 우촌 선생이 자신의 교육적 이념을 구현해 보이겠다는 의욕은 하필 해방을 맞은 그 해에 비로소 불타 올랐던 것은 아니었으니, 이미 여러 해부터 갈고 닦아온 일이었다.

일찍이 1939년 4월 5 일 이후, 그 당시 우리 나라에서 유일한 여자의학도의 경성여자 의학전문학교의 교수 겸 학생주사로서 강의를 담당했던 일을 비 롯해서, 과거 국민학교 교육기관과 중학교육기관을 단계적으로 거치고, 나아가 고등교육기관인 전문학교에 이르기까지 골고루관여한 우촌이었다. 그러니 그의 이와 같은 경험들이야말로 앞으로의 교육사업에 그가 직접 계획하며 착수하는데에 있어서 자료적 바탕이 되리라 함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처럼 보였다. 더욱이 선생에게는 남다

른 교육 이념과 뛰어난 실천 의지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남은 일은 이것을 실제로 구현시키는 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몽매에도 잊지를 못하던 나라의 광복을 되찾았고, 따라서 새로 맞은 조국의 봄에 기맥을 더 불어넣어 줄 기막힌 호기(好機)가 찾아든 것이다.

8.15 해방을 맞아서 대부분의 일반 국민들은 이후에 어떻게 해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보다는, 우선 너무도 큰 해방의 환희에 도취되어 가두가두에 홍수처럼 몰려다니면서 흥분에만 사로잡혀 있는 듯 싶었다.

그러나 이 때에 우촌 선생에게는 벌써 남모르는 헤아림이 있었다.

됐다! 진정한 한국 교육을 건설할 때가 온 것이다. 초등교육까지를 모두 경험해 알고 있는 나의 총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할 시기가 이제야 온 것이다!

이같은 심증(心1:1=1) 의 독백과 함께 밤에 잠도 못 이룬 채로 선생의 마음 속 포부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입안(立햇)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는 도중에, 한편에서는 출세와 공명(찌名)을 노리는 일부의 친지나 동료들이 그의 앞에 찾아와서는,

우촌, 이제 좋은 시기가 왔으니 교육계에서는 그만 손을 떼고 정계로 나가세. 우촌의 그 기상은 정치에 맞는단 말이거든 더구나 그 혹독하던 일인U3 人)의 탄압 하에서도 한국 여성 체육계에 새로운 기풍을 진작시키던 그러한 역량으로, 따분하고 또 보답도 별로 없는 교육계에서 무슨 보람을 느끼겠다고 머무시겠소? 적어도 일국에 호령을 할 자리가 얼마든지 생길 터인데.

정치적 출세길로 유인도 하고, 또는

어떤 세상이 되건 황금만능이란 말야. 그러니 일인이 경영하던 영리사업체를 인수하세. 니-와 함께 이런 일을 착수하세. 천직이니 무엇이니 하여 늘 한심한 선생을 하게 마련인 교육계가 이젠 지긋지긋하지도 않은가?

이렇게 경제적 변신을 권고하는 인사(人土)도 있었는가 하면,

젤 운동을 해서 공립학교장으로 진출하시지. 내가 아무개에게 말만하되 김선생이 의사가 있다고 말만하면 그 당장에 연결이 될것이니까 ...

하는 등등의 유인과 권유, 권고가 수도 없이 날아 들어왔다.

우촌 선생이라고 인간이 아니랴. 인간인 까닭에 친지나 동료들이 마치 모진 겨울 속에 웅크리고 있던 별나비들이 오래 머물던 둥지를 떠나 한번 날개를 치고 창공을 향해 날듯이, 입신양명을 위해 저마다 진

출하는 모습들을 볼 때마다 얼마간 심적인 동요를 느끼지 않을 수는 없으나, 다시 생각하고 또 돌이켜 생각하여 자신에게 이렇게 타이르게 되었다.

내가 염려하던 우리 나라의 광복은 이루어졌으나, 이 민족의 진정한 자립은 바로 지금부터의 일이다. 형식이나 외면 만의 자립을 가지고 진정 옳은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실질적으로 이 나라, 이 국민을 교육할 적기(週期)는 이제부터인 것이다. 보아라, 소위 과거에 교육한다던 인물들 대부분이 교단을 버리고 공리주의(功利파義)나 이기주의(利E파義)에 사로잡혀서 교단을 떠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이 국가의 중요한 기초요 지주인 이교육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 그렇지 그래! 나 혼자 만이라도 교단을 지켜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처음에 천안보통학교(天安뀔 通學校)로 부입할 당시 일생을 교단에서 살자고 생각한 그 결심을 굽혀서는 안되지!

우촌 선생은 이와 같이 마음속의 결론을 짓고 끝까지 교단에 설 것을 결연히 작정하였다.

마침 이 무렵이었다. 그 때까지 일본사람들이 운영하고 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 2가 389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경성여자기예학교(京城女子技평젤校)를 양도하고 저희들 본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이야기가 들어왔다. 그리하여 이 교섭에 일단 응하기로 하고 그 학교의 보다 자세한 내용을 조사하기에 이르렀다.

원래, 경성여자기예학교라는 것은, 서울 서소문 턱에 있던 일인의 빈약한 사설학교였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 바로 여기 삼선동 부지로 이전을 해 왔으니, 전체 평수 불과 2290평인데다가 교사(校술)는 모두해서 373 평에 더 지나지 않는 초라한 규모의 학교였다.

그러나 우촌 선생은 의도하는 바의 학교를 경영하겠다는 목표 밑에, 일인에게서 이 학교의 경영권을 인수해 받기로 최종 결정을 하였다.이러한 것을 안 주위의 친지들은 우촌 선생을 위한다는 마음에서,

그까짓 형편없는 학교를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일인들에게 전별금(廳別金)으로 주고 학교를 인수한다는 일이 도리어 골치만을 사는 결과 뿐이란 말야.

라며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뚜렷한 학교법인을 세우게 되면야 모르겠지만, 아직 그렇 게도 되지 않은 처지에 도리어 모험이지. 처음부터 손을 대지 않는게 옳아.

이런 말로 만류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미군 군사정부인 문교부에서조차,

일인의 경영체를 인수하는 일은 찬성할만한 일이고, 또 이제 해방된 오늘날 교육이 무엇보다 긴급한 문제이니까 크게 의미가 있는 사업이긴하나, 확고한 재단의 확립이 당장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니, 좀 곤란하겠다.

고 난색을 표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촌 선생은 의구심 을 품는 친지 및 단념을 종용하는 동료를 비롯해서, 찬성치 않는 당국자앞에 열정을 기울여서 설득을 폈다. 특히 당국자에게 자신의 간곡한 심정을 이렇게 펴 보였다.

일제 억압시대에는 배우고 싶어도 그들의 우맹(愚、판)정책으로 말미암아 교육을 받지 못했던 것만도 우리 민족에게는 한없이 비통한 일이었는데, 이제 조국이 광복된 지금에 와서까지 학교법인이며 재단의 완성만을 내세우면서 학교의 교문을 소위 ‘좁은문’으로만 만들려고 하니, 그것이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살리는 길이라 생각하시오? 학교를 경영함에 있어 물론 재원은 필요한 것이지요. 그러나 종래에 있던 몇 군데의 사학기관 말고야 오늘날과 같은 시급한 학교 설립에 있어 어떻게 모든 조건이 구비되어 개교

를 할 수가 있겠소? 또 다른 면으로 생각해 보시오. 현재와 같이 모든 질서가 혼란된 지금, 학교라도 속히 열어 점차 나라의 질서를 세워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뜻에서도 학교의 개교를 서둘러야 할 단계입니다. 내가 신청한 학교를 조건부라도 좋으니 인가만 해 주시면 기필코 곧 학교법인도 완성하고 확고한 우리 교육장(敎育場)을 이룩시켜 놓을 것이니, 그렇게 하여 주시지요.

우촌 선생이 이렇게 당시 문교장관 앞에 강경하게 두세 차례에 걸쳐 의견을 제시하니, 문교부에서도 결국은 그 열의며 이론의 타당성에 사뭇 감동을 받아, 비록 ‘조건부인가(條件附認可)’라는 단서를 붙이기는 하였으나, 그의 소원대로 학교 경영을 인가해 주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945 년 9월 25 일. 학교 경영을 인가해 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한성

고등여학교(漢城高等女學校)가 공식적으로 개교하게 된 날이 1945년 10월 5 일이었다 하지만 이때의 모집 학생의 숫자는 30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우촌 선생은 모든 정성을 다하고 학교 건설의 일 못지 않게 학생을 감화시키는 일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우촌 선생의 진정한 교육자적 신념이 이러하였고, 또 불타는 교육열에 뒤따랐던 것이나, 바깥에서는 이러한 의지의 숭고함을 이는지 모르는지 사태는 노도와 같이 거세기만 하였다. 그것은 오르기에는 너무도 아득히 높고, 무너뜨리기에는 너무도 무겁고 단단한 철벽과도 같았다. 그만큼, 해결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문제가 앞에 완강히 버티고 있었다.

해방의 기쁨과 환회는 둘 없는 하나였는데 이념의 갈림이 생겨났다. 이 학교에도 맨 먼저 신임교사들이 취임을 하여 교단에 서서 수업을 시작하면, 학생들은 그 새로 부임한 교사가 어떠한 사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아보고 가려내느라 바쨌다. 공부에 최우선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생각의 방향이 과연 좌익에 가까운지 우익에 쏠리는지

를 통계잡아 보는 일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이다.

이렇게 사회적 정치적 분위기에 흐르고 거기 휩쓸리기 일쑤였으니, 이제 학교라 한들 일반 사회의 난류를 차단하는 방파제를 확보하고 있지는 못하였다. 한마디로 교사거나 학생이거나 대부분이 좌 · 우익의 두 갈래로 나뉘어 서로를 반목(反I~I) 질시하였다.

이렇 듯, 나라 전체의 혼란 상태와 더불어 우촌 선생의 학교 또한 극도의 문란함을 겪었지만, 참된 한국의 여성교육을 건설해 보이겠다는 가록한 포부를 지닌 그는 일백 번 꺾어도 굽힘이 없는 정신으로 학교건설에 온 힘을 쏟았다

우선은 일본인으로부터 인수 받은 자그마한 학교 부지를 확충시키는 것이 선생이 첫번째 목표로 삼은 일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이같은 기원을 실현코자 착수하였던 일차적 과정은 단층짜리 교사(校깎)를 2층으로 올려 증축하는 작업이었다. 실제에 있어서는 시-회 혼란으로 인

해 나날이 뛰어오르는 물가고 때문에 부딪치는 일마다 예상을 벗어나 난맥에 난맥을 거룹하였다 그러나 선생에게 남아있는 단 한 가지 그 불타는 교육띨과 집념은 모든 난관을 용케 극복하면서 그 어려운 공사를 서서히 점진 시켜 나갔던 것이다.

1950년 6월 25 일 북한의 돌발적 인 남침으로 인한 6.25사변으로 조선의 온 천지는 들끓었다. 그 파급의 기운은 삼선동에서 학교사업에 열중이던 우촌 선생에게도 들이닥치었다.

선생을 해치려 연행을 하였으므로 선생 자신도 모든 것을 단념하고 말았다.그랬는데 의외에도 좌익분자들이 선생이 평소 교육자로서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망(人펼)을 보고 선생에게 한가지 제안을 해왔다. 소위 인민공화국의 적색사상에 따라 학생들을 교육하여 줄 것을 갖가지 감언이설로 유인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촌 선생은 조금도 두려워함아 없이, 오히려 노한 기운을

띠며 그들 앞에 소리쳤다. 이제 이러한 상태에서는 선생에게 남은 것이란 참혹한 죽음 밖에 더 없을 것이었다. 이 때 좌익의 무리 중의 한사람이 전에 학교의 수풀 가시철망을 청부맡았던 사람이었다. 그가 처했던 곤경을 펴서 살려 주신 일을 잊지 않고 선생에게 은혜의 보답이라면서 이른바 자수서라는 것을 써서 제출하라 하고는 순간에 석방해 주었다. 그러나 어이없는 추방의 아프고 쓴 잔을 마시게 되니, 아무리 불법적 침략으로 인하여 일어난 국가적 비극의 소치라 하더라도, 선생이 학교에 대한 애착이 컸으면 컸던 만큼 학교를 빼앗긴 그 비애와 비함은 설명할 필요 조차 없이 크기만 했다.

저 조선시대 인조 조에, 만주의 호족에 의해 이 강토를 침략당하던 때에, 그 시대의 아픈 운명을 젊어져야 했던 척화신(투和많) 가운데 한사람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한양을 떠나면서 옳은 유명한 다음과 같은 시조가 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수상하니 올통말통하여라

이 시조가 자아내는 심경과 어쩌면 꼭 같다 싶은 심정으로, 선생도 서울에 작별을 고하고 한강을 건너서 갔던 것이다.

맨걸음으로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면서 고향으로 피난한 선생은 실로 오랜만에 아늑한 고향의 산천, 그 품 안에 안기움과 동시에, 자당(孫堂)을 모시어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전심전력으로 온 마음과 붐을 바쳐 키워 온 학교를 도적당한 허탈감이 밀리곤 하였다.

게다가 남침의 기세가 점점 심각하여 북한 군대의 총화(統火)가 계속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는 전쟁 상황을 듣는 선생의 초조감은 날로 더

하여갔다. 그러나 선생은 인간의 자유와 정의가 마침내는 승리한다는 신념을 항상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국군이 끝내는 이 전쟁에서 개가를 울릴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선생의 이 예감은 적중되었다. 서울이 북한 군대에 의해 점령을 당한지 3개월만인 1950년 9월 28 일, 맥아더 장군의 9월 16 일 인천상륙작전이 전세를 성공리에 역전시켰던 것이었다. 이에 서울도 감격적인 수복을 맞이하였다.“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처럼 하늘은 정성이 가득한 우촌 선생을 크게 절망시키지는 않았던 것이다.

북한군이 한성여자중고교의 교사 안팎을 수라장으로 만들어 놓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건물 만은 옛 모습 그대로 이어서 파괴된 곳이 없었다. 이렇듯 다행한 모습을 확인한 우촌 선생은 감격의 눈물과 함께 깊

이 안도의 숨을 쉬어 볼 길 있었던 것이다.

그 감격의 9.28 서울 탈환 이후, 무사한 몸으로 다시 학생으로 돌아온 학생들은 우촌 선생의 건승함을 보고는 한결같이 재회와 솟구치는 격정을 못이겨 결국은 소리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렇듯 다시금 뿌듯한 학교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된 선생은, 새로운 기분으로 보람찬 교육의 도(펴)를 쌓아 올리고자 쉬임 없는 나날을 보내었다.

그러나 선생은 다시 한번 학교를 비워둔 채 서울시민과 함께 남하(南下)하는 피난 대열에 끼게 되었으니, 이것이 1.4후퇴인 것이다.

니라의 운명이 아직 불행을 다 면치 못하면서, 몇 차례이고 이러한 쓰라림을 당해야만 하는 선생의 비통한 심정은 이루 말로 형언해 볼 길조차 없었다. 기가 막힌 노릇이나 현실 앞에 벌어지는 일을 달리 어떻게 해 볼 방도는 없었다.

또 다시 서울을 내놓게 되는 그 마당에 선생은 학교의 문을 닫고는 참혹한 심경으로 다시금 고향을 찾아야만 했다.

이렇게 애로 투성이의 험난한 환경 속에서 교육을 진행하는 중에,

문교 당국은 세계 여러 나라의 학제(學制)와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종래의 중학교를 중학교와 고등학교로의 분리를 시행하였다. 이것을 각각 3 년제로 하여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만들게 되었으니, 한성여중고도 이제는 한성여자중학교와 한성여자고등학교의 둘로 하는 동시에, 우촌 김의형 선생이 두 학교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것이 1952 년 5 월 31 일의 일이었다.

돌이켜 보면, 우촌 선생이 1945 년 10월 그의 개인 재산을 희사하여 한성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한 이래 몇 번의 학제가 바뀌었다 처음 설립 당시는 수업 연한이 4 년이었으나, 1947 년에 6년으로 연장되고 한성여자중학교로 개편되었던 것인데 6.25 전쟁 중의 학제 개편에 따라 지금처럼 3 년제 한성여자중학교와 한성여자고등학교로의 분리 개편을 보았

다.

이로써 우촌 선생은 해야 할 일이 더욱 많아졌음을 느꼈다. 그는 이제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분리에 따른 각각의 구상을 새롭게 펴 나아가는 일에 한층 더 쉴 사이 없이 분주한 붐이 된 것이다.

학교를 온전하게 건설하기 위한 우촌 선생의 피땀어린 노력은 진정 국가와 사회의 혼란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또 전시(펠時)임에도 구애없이 끈질기게 계속 되었다.

우촌 선생이 법인 설립을 위하여 여러 방면으로 주선의 노력을 거듭하였으나, 법인을 설립할 재원을 내놓겠다는 인사(人士)를 막상 만나보면 그 모두가 학교 운영에 사리(私利)를 따지는 면들이 많았다. 후생을 교육시켜서 나라의 역군(役軍)을 만들고자 하는 선생의 순수한 의도와 는 근본적으로 어긋나 있음이었다. 선생은 이를 깨닫고서 더 이상 외부에서 법인 설립자를 구한다는 일은 아주 포기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이제는 어떻게 해서든 자력으로 해 내지 않을 수 없다는 결심과

함께, 그것을 실천으로 추진해 나가기로 시작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전쟁 중간에도 꾸준히 진행되어 왔던 것이어니와, 이제 선생의 소유로 되어 있던 임야를 아낌없이 희사하여 학교법인의 인가를 받으니, 이에 오랫동안 숙원해 오던 재단법인 ‘한성학원(淡싸젠찮J)’이 완성된 것이다.

이것이 1953년 1월 20일의 일이며, 설립자인 우촌 김의형 선생이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휴전이 성립되고 얼마 안된 8월 15일에는 정부도 임시수도로 지내던 부산에서 서울로 다시 환도를 하니, 부산에 있던 한성분교도 서울에 있는 본교로 모두 복귀하게 되었다. 때가 9월 1일 이었다.

우촌 선생은 참기 어려운 이 비운과 역경을, 학교의 중흥과 건설이라는 대사업에 온갖 정열을 다 쏟아 부음으로써 자신에게 닥친 모든 가난을 용케 극복 하였다.

그리하여 한성학원은 이제 교사(校숨)가 219,492평방미터, 강당이 62,142평방미터, 부속건물이 67, 108평방미터에 운동장 넓이 8,264평방미터의 규모를 갖춘 채 낙산(縣111) 기슭에 훌쩍한 모습을 나타나게 되었다.

한성 여자고등학교(1958)

고등학교 교사(校舍)와 운동장과 강당이 준공된 1958년의 다음 해에 원래 있던 중학교의 동쪽편 교사를 2층으로 증설하였다. 이어서 고등학교 남쪽편 언덕 위에 4층짜리 과학관의 신축 공사를 또 착수하였다. 이 공사는 전에 없이 상당한 난공사였기에 순간적으로 무서운 좌절감에 사로잡히는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그러나 선생은 그 굳은 의지로써 자손을 잃은 슬픔과 공사의 어려움, 더하여 재정의 곤란 등 이런 모든 역경을 용케 극복해 냈다.

1945 년 광복을 맞은 지 한달 만인 그해 9월 오늘의 한성대학교의 모체가 된 한성여지-중고등학교 설립과 동시에 교장과 이사장으로 계속 봉직해 오는 동안, 지금까지 기술(記述)해 왔던 것처럼 학교 일에 영일(젠티)이 없었던 그 와중에서도 한국체육의 성장을 위한 폼짓을 게을

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선생은 1968년 11월 30일까지 약 7년에 이르는 장기간을 두고 우리나라에 도입된지 얼마 아니한 운동 종목인 핸드볼운동 육성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선생의 임기중인 1963년에는 핸드볼 경기 규칙에서의 11인제를 폐지하고 세계조류에 발맞추어 7 인제 만을 채택한 일도 특기할만한 일이었다.

선생의 한국 체육에의 발전을 위한 노력은 누가 보아도 진지하고 열성적인 바가 있었던가 보았다 그의 우리나라 체육교육계에 이바지한 공로와 그 큰 업적에 따라서 전국의 명예로운 한국체육교원회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던 것이다.

세 계 문화 유네스코(UNESCO)의 교육 부분 중의 이 치 피-(ICHPER) 대회를 제 9차로 우리 나라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그 기구 내의 교육분야인 이치파에서는 문맹퇴치, 초등 의무교육의

보급, 난민교육을 위한 활통을 벌여 나가고 있었는데, 이 해 한국에서 개최하게 된 것이고, 그 주관을 다름아닌 한국체육교원회에서 하기로 한 결과, 우촌 선생의 지휘 아래 진행하기에 이르렀다.

대회의 기간은 1966년 7월 28일부터 8월 2일까지이고, 대회의 연구주제는 ‘건강과 체육과 레크레이션의 교육계획’이었다. 이에 참가자는 이치파의 회장인 베르지움의 훼르체씨를 비롯하여 구미 각국의 대표와 멀리 님쪽의 아프리카의 캐냐며 에디오피아 등지에서 온 27개국 47명의 유능한 교육계 인사들이 모여 왔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40명의 대표가 참가한 세계적언 행사이었다.

선생은 세기적인 대행사를 주재해 나감에 있어서, 우리 나라를 교육을 통하여 국제 사회에 뚜렷이 인식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교육 자체가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과업이니만큼, 이 회합도 역시 나라를 위하는 사업임을 선언하고 온갖 정성을 다한 결과로 여기 모였던

외국의 이름난 교육자들마다 두 세번 감탄을 거둡하며 돌아갔던 것이다.

이처럼 선생이 또다른 각도에서 나라에 공헌한 바가 결코 적지 않은 것이었다.이 해 1966년 10월 5일에 선생은 한성여자중고등학교 개교21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그 동안 쌓아올린 사업을 회고하면서 본교육성에 협력한 교직원들을 표창하고 노고를 치하했다.

그가 학교법인 한성학원의 설립자로서 이날 남긴 기념사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목은 그의 교육정신 및 민족정신의 일단을 엿보기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하건대, 예로부터 이르기를 군자(깜子)에게 삼락(三樂)이 있다 하였으

니, 그 중에 하나로 천하의 영재(英才)를 얻어 교육을 시키는 일을 군자로서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손꼽아 왔는데, 이 사람이 본 학원을 창설한 통기에는 전자(前者)와 같은 심정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보다도 으뜸가는 목적으로서 과거 일제( 13 帝)의 억압하에서 우리 민족이 눈물겹도록 배움에 굶주렸던 것과, 8 . 15 광복과 함께 외국의 그릇된 풍조가 잘못 노도(忽합)와 같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안일하게 보고 앉았을 수가 없어서, 우리 한국정신을 이어받은 여성교육을 하여 이 민족, 이 국가에 이바지하여 보겠다는 의욕 에서 이 사람의 미력(微力)도 돌보지 않고 감히 8 . 15 해방과 더불어 출발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념 아래에 본 학원의 창설을 하였던 것이었으나, 원래가 여러 조건의 미비함으로 말미암아 험준한 역정 (I쩔웬)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21 년간을 두고 걸어오는 동안에 태산과 같은 풍랑도 있었고, 준령(iI浚鎭)과 같은 격렬한 파도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 나라, 이 민족을 위하여 내디딘 초지(初志)를 굽히지 않겠다는 심정에서 작은 힘을 돌보지 않고 온갖 힘을 기울여 온 것입니다.

이 동안에도 선생은 서울특별시교육회의 공로 표창이며 또 서울신문사가 제정한 체육공로상을 위시하여 대한 체육회의 공로상 등 무수한

표창을 받았다. 이것은 모두 우리 국가와 민족을 위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심혈을 기울였던 노력의 결과로 나타난 것 외에 달리 아무것도 아니었다.

선생이 육영사업에 쏟는, 그 세상에 보기드문 정열은 날로 빛나는 것이어서 1967 년 10월 5 일에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변 팔딩리에 교직원 휴양을 위한 ‘의화정’을 시설하였다 학생의 지도에 피로한 교직원들의 휴양할 자리를, 마련해 줌으로써 간접적으로 학생 지도에 교사들의 활력을 더욱 불어넣어 주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이렇 듯 선생이 그 하는 일마다 모두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일이었고, 자라나는 2세들의 보다 나은 교육과 성장을 위해 진력하였던 결과로 정부로부터 영예로운 국민훈장동백장을 받게 되었으니, 이것이 1970년 12 월 5 일의 일이었다 또 한 가지 빠뜨리지 못할 일이 있다. 이는 비단 우촌 선생의 명예일 뿐아니라 전체 한성학원의 영예로 찬연히

빛나는 일이라 할 만 했다 다름아니라, 1968 년 11 월 이후 1972 년에 이르는 동안을 두고 매년 전국체육대회에 본교생 삼천여명이 서울운동장에서 전개되는 입장식에 소위 카드섹션 (card section) 연기를 기묘하고 도 화려하게 연출하여 운동장에 꽉찬 관람 대중의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는 시-실이다. 그 자리에 함께 임석 (!:i까따)했던 박정희대통령 내외도 그 연기를 다시 보여줄 것을 재청하였으며 다시금 만장한 관중들의 눈을 현란케 하였다. 정부로부터도 이에 대해서 학교로서는 유례없는 ‘대통령단체표지’를 받게 되었으니, 이는 길이 두고 자량스런 기념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렇듯 벚나는 사업의 펼쳐나감 속에 또 하나의 크고 새로운 전기가 이루어졌다. 1972년 12월 10 일에 인가를 얻은 한성여지-대학(평城女 γt젠)의 개교가 그것이었다.

우촌 선생이 해방을 맞던 1945 년 한성학원을 처음 설립하였을 당시

일찍부터 지녔던 교육사업에 남다른 관심과 의지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에서 그 뜻을 제대로 펼 수 없었던 것이지만 마침내 조국의 광복을 맞이한 바로 그 해 10월 한성고등여학교를 설립한 이래, 온갖 파란 속의 전진을 거듭해 온 지 27 년 광음의 흐름 뒤에 드디어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오랜 전통적 토대 위에 한 단계 더 나아간 상아탑(象牙搭)의 완성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일찍이 선생이 처음 한성학원을 설립하였을 당시에 밝 혔 던 취지 가운데, ‘과거 일제의 압제하에서 우리 민족이 눈물겹도록 배움에 굶주렸던 것과 8 . 15광복과 함께 조국의 그릇된 풍조가 노도와 같이 잘못 밀려 들어오는 것을 안일하게 좌시할 수 없어서 우리 한국정신을 이어받아 국가를 위해 이바지할 인재를 양성할 뜻’을 밝힌 바가 있었거니와,

여기서 벌써 우촌 선생의 분명한 교육이념과 역사의식, 그리고 거기에 따라 한성학원이 지향해야 할 건학정신의 중요한 실마리를 파악할 수 있다.

광복을 맞아 들인 당시 한국 사회는 새롭게 태어날 신생국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인재를 한없이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피지배시대의 오랜 껍질을 벗어 청산할 겨를도 없이 해방의 물결과 함께 밀어닥친 외래의 그릇된 풍조가 길게 만연되어 내려오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진정한 ‘한국정신’을 가진 젊은 인재를 찾는 다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바로 이점에 주목한 우촌 선생은 ‘한국정신’을 바르게 가르쳐 새 국가건설을 위해 이바지할 참 한국인의 양성을 목적으로 한성학원을 설립하였던 것인데, 이제야말로 바로 그러한 청년한국인을 지도, 양성할 수 있는 새로운 발판을 확보할 수 있었으니 가슴 뿌듯한 일 아니었으랴!

한성여자대학 신축교사 입주식

첫 해 학과의 설정은 국어국문학과(1패꾀 |행| 文헬 科), 영어영문학과(핏낌 핏 文젠 1" 1-), 가정학과(家政댈 N), 의상학과(衣줬젠 N), 생활미술학과(갚.폐팎術Ilj!핑1-), 비서학과(秘훤 學N) 등 여섯 개 학과, 150명 정원의 야긴대학으로 출범하였다.

이에서 먼저 1969년 8월 12일에 착공한 교사(校舍) 건축 예정지8,250평방미터, 연건평(延짧:ltp) 7,260평방미터의 건물을 대학의 교사(校깜)로 잡아 준공을 보기도 하였다.

정녕, 선생이 밤낮으로 구상하면서 오랫동안 숙원(챔願)해 오던 한성학원의 완벽한 체계가 이루어지는 본격적인 단계에 올라선 것이다.

이 상아탑을 반석과도 같이 견고하게 올려 놓는 일은 오로지 선생의 그 쉬임 없고 굽힘 없는 철석같은 의지와 정열에 힘입어 소기(J까企)의 완수를 이룰 일이 불 보듯 뻔하였다. 하물며 선생이 평생 교육사업에 혼백을 받친 관록의 노장이니 바로 그 갚고 넓은 경륜으로 더욱 큰 한

성학원의 일대 캠퍼스가 웅장하게 펼쳐질 일이 스스로 기약되고도 남음이 있던 것이다.

우촌 선생이 천직으로 맡은 바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노력을 쌓아온 그 육영사업이 이미 적지 않았다. 그 큰 보람이 여러 방면으로 나타났던 것이지만, 이제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공적은 바로 이제부터 전개시켜 나갈 더 크고 새로운 규모의 교육사업을 열어주기 위한 초석과도 같은 것이었다. 진정 이것이야말로 과거의 그 커다란 경륜과 칠순이 되도록 닦아온 완숙한 인품으로 교육의 또 다른 경지를 건설해 나갈 다른 하나의 출발점이었다. 바야흐로 교육계의 귀중한 보배이고, 이 민족을 늘 푸르게 키워 주는 만년수(萬年樹)와도 같은 선생은 다시금 크고 육중한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제 3 장 완성과 노년의 시절

1972년 12월 문교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아 우촌 김의형 박사는 한성학원에 한성여자대학을 세우게 되었다. 70년대 경제 성장 위주의 정책이 한반도를 흔들고 있을때 우촌 선생은 자칫 인간 소외가 만연되는 우려를 금치 못하였고, 한성여대 설립에 즈음하여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기본이 바로 참다운 교육을 통한 올바른 가치관 성립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우촌 선생은 자신의 교육정신과 오랜 교육생활

을 통한 웅지를 펼치기 위해 초대 학장에 취임하여 앞선 다른 대학과 어깨를 견주고 더욱 더 훌륭한 교육을 펼칠 수 있는 터전을 닦기 위해 서 불철주야 이와 관련된 고민과 실천으로 꾸준히 한성의 발전을 기획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가시적인 결과는 곧 나타나 1973 년 12 월, 장래성이 희박한 비서학과를 과감히 폐과하고 무용학과 20 명, 경영학과 및 무역학과 각 30명과 불문학과 20명 등 4개학과를 새로 증과 개편하였다.

그리하여 개교 당시 입학정원 6개학과 1 백 50 명에서 9개학과 2 백 30명으로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다. 이것을 단순히 행정적인 팽창으로 치부해 버릴 수 없는 것은 우촌 선생은 오직 한성의 발전만을 일념으로 삼아 매일 새벽 6시에 출근, 저녁 9시가 되어서야 퇴근하였다. 또한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도 쉬는 날 없이 학교에 나와 교정 화단에 심어진 한

그루의 장미에도 남다른 관심으로 손길이 부족한 곳은 없는지, 눈길이 가지 않았던 곳은 없는지, 일일이 살펴보고서야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낙산의 꽃을 가꾸며

1974년 5월 어느날.

학교를 뒤에서 감싸주고 있는 낙산에 야생하던 소나무가 고사 직전에 있는 것을 발견하시고 손수 이 소나무를 정성스럽게 돌보시어 소생시켜 놓았다.

이 사실을 안 딩사 학생처장이며 우촌 선생의 평생교육 동지고, 보필자이었던 윤태영 교수 등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 세 그루의 소나무를 선생은 ‘삼학송(三學松)’이라 명명하고 한성의 상징나무로 삼기로 했다.

삼학송의 유래는 1636년 청 태종의 침입으로 일어난 병자호란 때 끝까지 결사 항전의 자세로 민족의 정기를 지키기 위하여 홍익한(파줬淡L 윤 집( 킷| 찢), 오달제(핏迷펌) 등은 청을 오랑캐라 하여 청과의 싸움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인조는 삼전도(三|王| 泌)에서 항복하였고, 그럼에도 청은 이 정도로 끝내지 아니하고 청과의 싸움을 주장한 척화

파의 강경론자인 이들을 청으로 끌고 가 심양에서 참형에 처하였다.

이 후 소신을 끝내 굴복하지 않은 세 유생을 ‘삼학사(三떻 ::1: ) ’ 라 하였으니, 우촌 선생은 이들 삼학사의 높은 기개와 지조를 기린다는 의미에서 ‘삼학송(三學松)’이라 명명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삼학송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삼학사의 혼이 조국의 미래를 책임지고자 하는 한성인을 굽어 보고 자신들의 못다한 꿈을 한성인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는 확신을 보는 듯하다.

이러한 선생의 학교 안팎에 대한 무한한 애정은 학생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나, 모교에 대한 뜨거운 애교심을 다투어 교정 화단에 장미와 목련 을 심어 그 아름다움을 캠퍼스 내에 한껏 발산시켰다. 이제는 고등혁교 교사가 된 당시 대학 본관 교사에는 색색의 장미와 흰 목련이 수줍은 촌아가씨처럼 서 있는 모습에서 봄이 왔음을 실감케 한다. 우촌 선생은 이같은 여대생들의 아름다운 애교심의 표현을 받아들이고 이 장미동산에 ‘통일 동산’이란 표말을 붙이도록 하였다. 그 통일 동산

에는 이제 여고생의 순수한 마음으로 되피어나 한껏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안보문제 연구회와 불교 학생회,R.c. y등 세 동아리로 표출되어 한성에 피어났다. 또한, 웅변반이 조직되어 신설교인 한성여자대학을 대내외에 홍보하는 데 힘쓰기도 했는데, 특히 1974년 7관왕을 차지하여 대학웅변을 제패하여 한성의 이름을 전국에 떨치니, 이에 우촌 선생은 입상하고 돌아오는 모든 학생들에게 격려의 말씀과 함께 기념사진도 함께 촬영하여 그 입상학생에게 주어 학생들로 부터 뿌듯한 자긍심을 느끼게 함과 동시에 선생의 자애스러운 마음을 은연중에 전달하기도 했다.

일본 체육대학을 졸업하고 일찍부터 체육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우촌 선생은 한 평생을 우리 나라의 교육과 체육 발전에 바친 그 공이 지대하여 1974년 12월 11 일 문교부장관 표창을 받았다. 국민교육

훈장 통백장을 수여한 바 있던 선생이 4 년 뒤 또 하나의 큰 상을 받게 된 것은 선생이 우리 나라 교육계와 체육계에 끊임없는 애정으로 손길을 닦았던 공로를 반증한다.

선생은 1968 년 2월 29 일부터 1974년 12월 현재까지 대한 체육회 이사로서, 1962년 3 월 1 일부터 1974 년 12월까지 대한 올림픽 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면서 체육교육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였다. 특히, 당시로서는 절대 취약의 비인기 종목이었던 핸드볼 육성에 앞장 서1961년 12월부터 1968년 11월까지 대한핸드볼협회장으로 7 년의 긴 세월을 핸드볼 볼모지 한국에 그 씨앗을 심고 새싹을 가꾸어 후일 올림픽 2연패의 큰 재목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주었다 선생은 우리나라 여성의 신체적 조건과 근성이 언젠가는 핸드볼로서 세계를 휘어잡을 수 있을 것을 미리 예견한 선견지명(先강之明)의 혜안(慧m~)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체육공로상 수상(1967년 제13회 서울신문사 제정)

주위로분터 인기종목 협회장 추대가 있을 때마다 이를 극구 고사하고 핸드볼 육성에 그 정성을 쏟았다. 말년, 선생이 병석에 누워 있을적에 일본 체육대학 후배 중의 한 사람이었던 한병철(덴};패시 j!fi!f - 1970년대 초 성균관 대학교 체육교수로 정년 퇴직) 교수가 한성대학교에 핸드볼 팀 조직을 구상하고 있다고 언질을 준 바 있었다. 이와같이 선생은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도 한성의 발전과 핸드볼 육성에 대한 생각을 멀리 한 적이 없었다.

우촌 선생은 밀-년에 우리 나라의 당대 석학들과 빈번히 모임을 갖고 서로에게 한없는 우정과 존경을 표시하면서 애정어린 교류를 하였다.

초대 문교장관을 역임한 안호상(安땀돼) 박사를 비롯하여, 국문학의 대가 양주동(梁柱폈) 박사, 고매한 인품으로 이름난 김두헌(金斗펠) 박사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학문과 교육을 논하고 미래의 조국

을 이끌어 나갈 젊은이들의 발전된 의식에 대하여 기쁨을 나누었다.

이 시기에 우촌 선생께서 한 평생을 우리 나라 여성교육의 발전에 끼친 공이 지대함을 학계 인사들의 입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건국대학교 상허 기념사업회 회장 이대위(李大偉 - 미군정 시대 초대 노동부 장관 역임) 박사 등이 우촌 선생을 명예박사로 추대하려고 추진 중에 있을 때, 동국 대학교 이선근(李造根) 총장이 우촌 선생의 숨은 공을 기려 명예박사 학위를 통쿄에서 수여하기로 동교 대학원 위원회를 통해 알려왔다. 명예철학박사 학위 수여에 앞서 우촌 선생의 노고를 치하하는 만찬을 이선근 총장은 통교 대학원 관계자 임원과 우촌 선생 등의 인사들과 뜻 있고 보람찬 오찬을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1976년 2월 25 일 화창한 초 봄에 한성가족들이 참석하여 지

켜보는 가운데 우촌 선생은 영예의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우촌 선생은 매우 가정적인 인물이었다. 밖에서는 자상하고 근엄한 교육자로서, 가정에서는 자상한 남편이고, 자애로운 아버지였다. 그리고 8 남매의 대가족을 이룬 아버지로서 근엄할 때는 매우 엄격하게 가르치심을 폈고, 감싸줄 때는 한없이 넓은 아량으로 8남매의 어느 하나도 소홀함이 없이 포옹하였다. 우촌 선생과 부인 이희순 여사는 평소 잉꼬 부부로 교육계에서도 금실이 좋기로 소문난 아름다운 사이였다.

1977년 초에 접어들어 우촌 선생은 한성여자대학의 설립과 핸드볼 볼모지 한국에 핸드볼을 심고 새싹을 키우는 등 우리나라 여성교육 및 체육계에 참으로 헌신적으로 봉사를 하였다. 그러한 정력적인 활동은 아무리 철저한 교육봉사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을 한 우촌선생이었지만 정신적으로 또한, 육체적으로 많은 무리를 가지고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7년 3월 1 일 초대 한성여자대학 학장 자리를 내조자인 이희순 여사에게 넘겨주고 여사의 외조자로서 자리를 바꾸셔서 이사장의 자리를 담당하게 되었다.

제 2대 학장으로 취임한 이희순 여사는 무엇보다 우선 폭넓은 사학 발전을 위한 첫 작업으로 국사학과를 사학과로 개편하는 용단을 내리는 한편, 한성여대를 남·여공학의 한성대학교로 재편하는 역사적인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일로 한성대학교의 앞날을 더욱 굳건히 하게 되었고, 한성에 다양한 인재를 모아서 나라 발전의 시금석이 되는 교육의 폭을 더욱 넓히게 되었다 우촌 선생은 이희순 여사의 이와 같은 일련의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용단을 옆에서 지켜보고는 매우 흐뭇하게 느끼셨고, 한성가족들은 한성의 비약적인 발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이희순 여사가 시행한 한성여자대학교에서 한성대학교로의 발전적교병 변경 조치를 당시 본교 경영학과에 강사로 출강하였던 당대 노동경제학의 석학인 김윤환(命11꾀뺏) 박사와 인사관리학의 거두 횡-대석(괜太秘) 박사 등은 한성대학의 장래가 매우 밝다고 하는 등 극찬의 말들을 아끼지 않았다. 기실 1978 년 1 월 한성대학으로의 교명 변경으로 한

성대학교의 위상은 대외적으로 매우 높아졌으며 여대 시절보디- 훨씬 성숙된 대학으로서의 명실상부한 교육여건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이희순 학장은 우촌 선생과 거둡 숙의를 한 끝에 1978년 10월 15일 문교부로부터 학과 승인을 얻어 가정학과를 폐과하고 남 ·여 공학으로 서 새로운 면모를 보이기 위해 행정학과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입학정원도 2백 50명에서 3백 80명으로 느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후 1980년 10월 15 일 문교부로부터 경제학과와 도서관학과 등 2개학과를 증설, 국어국문학과를 비롯하여 영어영문학과, 사학과, 무용학과, 미술학과, 의상학과, 경영학과, 무역학과, 행정학과, 경제학과, 도서관학과 등 l17H 학과에 졸업 정원 5백 20명, 입학 정원 6백 76명으로 장족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1981년 12월 29일 설립자 우촌 선생과 이희순 여시-는 다년간의 공사 끝에 종합관 교사를 신축하였다. 두 분께서 심혈을 기울여 신축한 종합관 교사는 지하 2층, 지상 5층 연건평 1,772

평의 철근 콘그리트 건물로서, 이 교사가 완공됨으로 해서 부족한 연구 교실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대학은 하나의 사회이다. 따라서 대학사회의 이념과 학문, 더 나아가 서는 그 대학의 정신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고 그 대학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한 대학신문의 발간은 중요한 사업의 하나였다. 평소 이같은 대학의 얼굴이자, 언론매체인 대학신문이 발간되지 못하고 있는 점을 안타까워하던 우촌 선생은 1976년 개교 4주년 을 맞이하여 우선 경영학과에서 〈한성경영학보〉를 발간하게 되었다. 그 발간사 가운데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다

... 돌이켜 보건대 우리 한성여자대학이 고고의 성을 울린 지 4개 성상, 이짧은 시간 동안 우리 학교 안팎으로 내실 을 기하는 데 힘써 왔습니다. 우리는 대내외적으로 여러 어려운 요건을 극복하면서 오늘에 이 르렀고 앞으로

이 를 이겨나가며 명문 한성여자대학의 굳건한 상아탑을 쌓아 올려 나가야 합니다. 도전 (ChalIenge)과 응전 (Response) 의 되풀이 속에서 문화가 발전한다는 20세기 영국이 낳은 석학 아놀드 토인비의 말이 이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고대 인류문명의 발생이 비옥한 초원지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가뭄과 홍수가 빈번한 황하유역이나 나일강유역에서 일어난 것도 인간이 지연의 도전에 대한 굽힐줄 모르는 슬기와 용기의 응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한성경영학보〉의 빌-간이 발판이 되어 이어 문공부로부터 정기 간행물 허가를 받고 격월간 대학신문인 <한성여지-대학보>가 역사적인 창간을 보게 되었다. 여기에 실린 선생의 창간사는 이러하였다.

오늘날 사회는 그 자처l 내에서 끊임없이 변히고 있습니다. 그 끊임없는 변화에 다각적으로 적응힐 수 있는 갖기-지 지식들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을 ‘지식의 폭발시대’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편안히 이 지

식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을 지니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생활의 일부를 담당하면서, 폭발하는 이 다량의 지식을 보호할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새로운 지식, 새로운 교육이념을, 그리고 높은 지혜와 두터운 덕행, 튼튼한 체력을 갖춘 미래지향적인 인격형성을 위하여, 우리 선인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살리고 심오한 이론을 실제의 현장에 실현시키기 위하여(중략) 또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모교애 를 지녀야 합니다. ‘대학의 입’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본 학보는 우리 학문의 깊이요, 정서의 향취, 대화의 광장으로서 우리 모두의 정신의 집결지요, 시선의 춧 점이 되어야 합니다.

1976 년 12 월 10임자로 창간된 한성여자대학보

위의 두 창간사에서 느낄 수 있듯이 우촌 선생은 학문과 자연과 사회에 대한 도전정신을 학생들에게 당부하였으며, 학교 사랑은 일부 교직원이나 교수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의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이러한 선생의 도전정신은 이후 많은 전국대회 우승과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학생들에게로 이어져 지금도 전국 각지 각 분야에서 한성인들의 국가발전과 개인의 인격 완성을 위해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있다.

우촌 선생은 한 평생 교육을 통한 구국사업을 펼치기 위하여 불철주야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오직 그 높은 뜻을 이루고자 몸과 마음을 봉사와 헌신으로 일관하였다. 일제 강점 당시의 어려운 현실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 홀홀 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체육을 전공하시고 돌아와 교직에 톰담은 지 50 여 년만에 한성학원이라는 커다란 업적을 남긴 채 누적된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1983 년 3 월 1 일 평생의 소원이었던

조국 통일을 보지 못한 채 향년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선생이 세상을 하직한 날이 공교롭게도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던 3월 1일인 것이 선생을 경애하였던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말았다. 땅위의 사람들의 슬픔을 하늘도 아는 듯 거인이 가던 날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선생의 서거는 한성학원을 비롯한 전 교육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 아픈 마음과 애석함은 한순간 말들을 잃게 하였다.

선생의 영결식은 내외 귀빈과 전 한성여자 중, 고등학교 고직원과 한성대학교 교수, 염직원 그리고 동창 및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선생이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도 걱정하시고 애정이 그유한 눈길로 구석구석을 바라보았던 교정에서 염숙하게 거행되었다 한성학원 제3대이사장인 안호상 박사가 장례위원장을 맡아 주관하였고, 교무처장 이용남 교수의 사회로 3 월 5 일 한성학원장(댄城學털! 첼)으로 치뤄졌다. 한

성학원의 전 교직원을 대표하여 연정열교수의 조사(끼폐)가 봉정되었다.

한성대학교의 설립과 우촌 김의형 박시님의 서거를 당하여 온 한성 가족은 이 청천벽력과 같은 부음의 슬픔으로 앞이 캄캄합니다. 한 평생을 교육사업으로 조국광복과 영재교육으로 근새 한국문화 창달에 위업을 남기신 우촌 김의형 박사님은 낙산 기늙에 우리 한성학원을 세우시어 중학교에서 부터 고등학교와 최고학부인 대학까지 진리 탐구의 전당을 마련해 주셨습니다.(중략) 박사님! 비록 몸은 타계하셨지만 그 영혼은 항상 저희들에게 힘과 슬기를 주시어 저희들이 빗나기지 말고 정도( 1 1)를 향해 쉬임 없는 발전의걸음을 걸을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십시오.

이상과 같은 조사( i I ~떼)말씀이 애틋하게 낭독되는 동안 전 한성의 모든 가족은 다시 한번 선생의 숭고한 생애 를 되돌아 보며 옷깃을 여미었다. 많은 조문객들은 영결식을 마치고 선생의 영구가 평생 정들었

던 교문을 나서 장지를 향할 안타끼움으로 오열을 참지 못하였고, 그 울음을 차마 떨쳐버렬 수가 없는 듯 영구는 걸음을 더디하고 자꾸 뒤를 돌아다 보는 듯하여 더욱 사람들은 가슴을 도려내는 슬픔을 감출 길이 없었다.

교문을 나선 영구 행펠은 충남 공주군 탄천면 견동리 장지를 향해 떠났다. 이 날 오후 이희순 여사를 비롯한 유족과 한성학원 산하 각급 학교 교직원 대표 및 학생 대표들의 안타까운 눈물 속에 선생은 유택에 안장되었다 선생의 육신은 펀히 쉬고 계시지만 그 넋은 여전히 한성학원은 부지런히 닦고, 강의실의 작은 책상에도, 운동장의 작은 풀에도 살아 계셔서 그 분의 분신인 제자들의 어깨 위에 사랑스러운 손길을 얹어주고 계실 것이다.

우촌 김의헝 박사 영결식

한 개인이 ‘역사적 인물’이 된다는 것은 그 생애가 그의 삶의 현장이었던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속에서 순기능이었든 역기능이었든 간에 공적인 족적을 남기었을 때 비로서 ‘역사적 반열’애 오르는 법이다.

우리 나라에서의 인물론이나 위인전은 주로 그 대상 인 물의 ‘위대한 점’을 부각시키는 데에 치중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까지 나온 역사적 인물에 대한 위인전이나 개인의 전기류를 보면 크게 세가지 유형으로의 분류가 가능하다.

첫째는 나라가 존방의 위기에 처했을 때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초윌하여 민족과 국가를 위해 톰바친 인불들에 대한 일대기( --代記)인 영웅형 위인전이요, 둘째는 한 평생을 학문 연구에 받쳐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셈신!)과 학문(젠빔D을 개척하고 정립한 인붙들의 위인전인

학자형 위인전이요, 끝으로 음악, 미술, 체육 등 예체능 분야와 발명가등 과학 분야에 님다른 재능을 천부적으로 타고나 개인의 재능을 통해 우리 민족의 우월성( j상팩 tl:.)을 세계에 선양한 인물의 전기인 재능형위인전이 그것이다. 이러하였을 때 우촌 김의형 박사는 위의 세 가지 조건을 고루게 갖춘 인불이었다고 보아 과히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우촌 김의형 박사는 1904년에 태어나 1983년 서거하기까지 80년의 생애를 영위하였다. 80여년의 그의 생애는 바로 파란 만장하게 진행된 한국 근·현대사의 운명과 맥락을 같이 하면서 민족이 안고 있던 아픔과 역사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응한 시간들이였다.

제3편

한성학원 설립배경과 창학정신 구현

제1장 한성학원 설립배경

제1절 8.15 정국과 한국사회

학성학원이 낙산기숨에 터를 잡은 것은 지금부터 꼭 50년전인 1945년 10월이었다. 따라서 한성학원의 창립은 광복 50주년과 역사적 맥락을 함께하고 있다.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는 지난 반세기 통안 한국

현대사가 걸어온 발자취는 간단치 않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 36년 간의 질독과 수난의 고통을 딛고 1945 년 8 월 해방을 맞이했으나 그 광복의 감격과 기쁨은 잠시 잠간이었으니 이후 정치사회적 혼란과 동족간의 싸움 그리고 민족분단 이후 계속된 정변 속에서 민족과 국가적인 간난의 아픔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교육입국을 향한 백년대계를 전망하며 인재양성 곧 교육사업은 계속되었으니 오늘의 세계 속에 명실상부한 위상을 정립한 대한민국을 건설하기까지 교육사업이 미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한성학원 또한 신생 대한민국 건설과 함께 이 땅에 태동되어 지난 50년 동안 이 민족과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고 배출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할 것이다. 이에 우선 한성학원의 창립 당시 정치 사회적 상황과 배경 및 창립경위를 먼저 살펴보기로 한다.

(Q)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히로이도 천왕이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의 목메인 메세지 낭독이 전파를 타고 한반도에 전해졌다.

이 날 오후, 서울 시내 한국인 가정마다 가까운 친지, 이웃들끼리 모여 앉아 대통아전쟁(大핏[떠꽉셈)에서 일본이 항복을 하였기 때문에 머지 아니하여 자주 독립을 하게 될 것이라고 수근수근 나직이 말없는 미소와 환희의 벅찬 밀담들을 나누었다.

그러나 아직 드러내놓고 기뻐하기에는 왜경들의 감시의 눈초리가 무섭기 때문에 숨을 죽여가며 기쁜 마음을 자제하여야만 하였다.

돌이켜보건대, 비록 이같이 숨을 죽여가며 내심이나마 환희에 젖을 줄 며칠 전까지만 하여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암울하였던 한국사람들이었다.

대동아전쟁 막바지에 접어들어 연합국의 물량공세를 감당치 못한 일

본군 수뇌들은 마지막 최후의 일인까지 결전하겠다는 비장한 다짐을 되풀이하면서 일본의 젊은이는 물론, 한국 젊은이까지 징병, 징용으로 사지로 내몰고, 심지어 정신대란 이름아래, 한국의 어린 처녀들까지 최전빙 일본군 위안부로 유린당하였던 것이다.

그해 7월 초순, 시내 동대문밖에 미전폭기 B29 에서 다쓰고 떨어뜨린 가솔린 통을 당시 서울 시민들은 폭탄으로 오인하고 대피소동을 벌인 해프닝도 한순간, 시내 중학교 학생(지금의 중,고등학생)들로 하여금 그 떨어뜨린 가솔린 통을 어깨에 매게 하고 최후의 일인까지 성전(聖때)을 다짐하는 궐기대회를 전개하여, 앞으로 한달여 뒤에 일본이 연합국에 그렇게 빨리 항복할 줄이야.

우리 한국 국민들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암흑 같은 하루하루의 연속된 날이었다.

일본군의 군수품과 군량미의 쪼달림이 서울시민들로 하여금 양에 차

지않는 배급미에 의존한 배고픔의 비참한 민생고이었다. 그리고 적의 폭격에 대비한다는 미명아래, 서울시내 초가집(당시 서울시내에는 상당수의 초가집이 있었음)과 폭격과 전략에 대비해 거리를 넓힌다고 많은 주거용 건물들을 강제로 헐어내고 시골로 소개(陳開)시켰다.

그리고 전세가 악화되어 7월 초순, 국민학교와 중학교 등 각급학교는 여름방학도 아닌데, 무기한 휴교와 동시에 국민학교 아동까지 시골로 소개할 것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이 때, 후일 한성학원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도 당시 유일한 여자 의대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학생주사(현 학생처장)교수로 재직하시다가 총독부령(維督府令)에 의해 각급학교가 무기휴교에 들어가자, 충남 공주군 탄천면 향리로 잠시 몸을 피하시었다. 날이 갈수록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본 행정당국은 한국의 청년들은 물론, 40세의 장년까지 징용으로 내몰아 장년들까지 몰래 타지방으로 몸을 숨겨야 하는 난세이었다.

당시 전문대학생들은 학업을 중단하고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말하는 성전(聖戰)이란 이름아래, 우리 한국청년들은 광활한 중국대륙이나 남방의 이름모를 고도(孤鳥)에서 전사 도는 굶어 죽어갔다. 물론, 우리 한국청년들은 일본군의 눈을 피해, 전선의 배속부대에서 탈출, 대한 독립군[光復單]에 편입된 경우도 있었으나, 그 수는 극히 드문 행운이기도 하였다.

징용도 전선에서 전투를 하지 아니하였지만, 위험이 뒤따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전투병에게 군수품 조달 등 위험한 역할은 물론, 활주로 공사의 잡부 또는 광산 등지에서 군수물자 조달을 위하여 광물을 캐내면서 주린 배로 혹사당하면서 고국땅에 발도 디뎌보지 못하고 고혼이 되어갔다.

이같은 불리한 전세의 전개 속에서도 일본군의 최후의 발악은 극도

에 달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성전’을 위한 최후의 일인까지를 외치며 훈련도 제대로 시키지 아니하고 무장도 변변히 갖추지 못한 젊은이들을 계속 사지로 몰아내기만 하였다.

그해 8 월 6 일 히로시마[파 ,鳥]상공에서 한 대의 B29 미폭격기가 떨어뜨린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대량파괴 살상폭탄인 한 개의 원자폭탄이 일본군 수뇌의 전의를 쩍어놓게 하였다.

이 한개의 원자탄의 투하로 인명만도 20 여만이 죽고 옹 시가지는 한순간에 갯더미로 화하였다 뒤미처 사흘 후인 8 월 9 일, 니-가사끼[長빠]에 또 한개의 원자폭탄의 투하로 더이상 버틸 수 없어, 8 월 14 일 일본 내각은 항복을 결정하게 되었다. 그 다음날인 8 월 15 일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 받아들일 것을 연합국 측에 정식으로 통고하고 이날 정오, 히로이도 천왕은 항복 메세지를 전파를 통하여 세계에 전하게 된 것이다.

이에 앞서 8월 8일 소련군의 참전은 일본 패전을 더욱 재촉케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포츠담 선언이란, 1945 년 7월, 독일 베를린 근교에 위치한 포츠담 시에서 미.영 중 3국의 공동 선언을 채택한 것이다 그것은 대일 항복 요구 선언으로 @ 일본은 군국주의 배제 。영토의 제한 @ 전범의 처벌 @ 군수산업의 금지 @ 점령군 철수조건 @ 국민의 기본권 존중 @ 경제 자립 등을 규정하고 있었다. 여기서 소련도 대일전선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 포츠담 협정 내용에 앞으로 일본 영향권에 있었던 연합국의 점령지 점령관리에 대한 기본원칙이 세워졌다

8 월 15 일이 며칠 지나니, 왜경들의 보복이 두려워 움츠리고만 있었던 시민들이 어느 사이인가 일장기의 붉은 바탕 위에 빨간색과 파란색의 음양 대신에 먹을 갈아 파란색 대신, 검은 색으로 칠하고 네커에 4패를 그런 급조 태극기가 등장하였다.

어디에서 난 소문인지, 서울역에 소련군이 입성한다고 붉은 기, 붉은 완장을 차고 서울역을 향해 행진하는 대열이 종로 네거리에서 시민들의 눈에 띄기도 하였다 이들은 일제 치하, 지하에 숨어 있었던 좌익세력들이 중심이 되어, 그 세를 불리기 위한 전주곡이기도 하였다. 이때, 우리 시민들의 거개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민주주의 참뜻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였다. 단지 해방이 되었으니, 이제 배불리 먹고 잘 살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젖어 있었을 뿐이다. 원체 일제 말기, 배고픔을 겪었던 한국민이기에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사회야말로 최상의 목표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이 같은 희망의 구현은 고사하고 조국 광복의 환희에 젖기에는 사회 각 분야에서 새로운 혼란이 야기되었다.

한편으로는, 우리 한국인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38 선이 끊어져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리어 남북을 자유롭게 다닐 수 없게 되었다.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각각 신탁통치를 펴게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우리 한민족은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이같은 남북 신탁통치의 군정을 펴게 된 것은 이미 1945 년 2월 4 일부터 11일까지 소련 우크라이나에 위치한 얄타(Yalta) 에서 미국, 영국, 소련 등삼국 수뇌들간에 의한 얄타협정이 결정되었다.

이 협정에서 전후의 배상 및 소련의 대일참정과 소련의 사할린(極太)과 지시마(千圖列옮 )의 영유 그리고 남만주 여순(旅順)의 권익회복 등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여기에 미소가 종전 후 한반도를 38도선을 군사경계선으로 한 분할, 일정기간 동안, 군정인 신탁통치를 펼 것을 합의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같이 후일, 한반도 국토 분단의 고착화를 가져오게 된 것은 미국과 소련의 두 외세의 결정적인 작용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미국은 일본군의 막판전쟁의 최후 발악으로부터 미국 청년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서, 소련은 일찍이 구러시아 시절부터 눈독을 들여 온 남만주와 한반도 분할의 절호의 기회란 양국 간 국익의 일치가 38도선을 경계로 한 한반도 분단이란 우리 한민족사의 아픈 상처를 안겨 주었다

이같은 한반도의 국토분단은 우리 힘만으로 한반도에서 일제를 축출하지 못한 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전승국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분단을 막을 수 없었던 피치 못할 현실이었다.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 한국에 관한 미국의 무관심은 전후 대책마저 미숙하여 한국인의 독립마저 의심, 신탁통치를 구상한 후, 극동전(따핏戰)에 소련군을 끌어들임으로써 분단에 결정적인 우를 범하였던 것이다.

반면, 돌이켜 보건대, 러시아는 역사적 관심을 갖고 1895년과 1903년 두번이나 일본과 한반도를 38 선 또는 36도선으로 분할할 것을 논의한 바 있다

미국으로부터 대일전 침-전의 권유를 받은 소련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곧 참전에 응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종전 6일 전인 8월 8일 비로소 소련 모루도프(Molotov) 외상과 일본 마쓰오까(松!해1$ 까’) 외상 간에 체결하였던 일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힘 안 들이고 순식간에 만주와 북한지역을 석권(댄卷)하게 되었다.

이로써 소련은 극동에 적화기지(~化첼地)를 얻는 역사적 숙원을 달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같이 우리 국토분단은 무관심이 빚은 미국의 즉흥적인 정책결정과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관심이 깊은 소련의 짜여진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인 것이다.

미·소 두나라의 한반도에 대한 관심도의 차이는 해방 초기부터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같은 두 나라의 한반도에 대한 관심과 인식의 차이는 남북상황전개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남한실정에 어두운 미군정 당국은 일관성 없고 즉흥적인 미봉책 때문에 남한은 좌.우 정치세력의 격전장이 되어 버렸다.

좌우익 충돌은 사회 각 분야에서 야기되어 남한사회는 정국불안과 혼란으로 큰 몸살을 앓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북한은 이미 종전 전부터 준비해 온 짜여진 계획에 따라 소련에서 데리고 온 선택된 인물 중심으로 물리적 공권력을 행사하여 기존의 조만식(탤 U免植) 선생을 중심으로 한 민족세력을 제압하고 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한편, 설립자 김의형 박사는 해방을 맞자, 서울로 돌아와 한민족 자주독립의 기초를 마련하는데 무엇이 우선되어야 할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문 밖에 나오면 해방 정국을 틈타 하루에도 몇 개의 정당이 탄생되고 사라지는 혼미 속에서 좌 · 우 충돌이 첨예하여 좌익세력들이 곳곳에서 파괴와 인명살상 등 좌익세력 확장에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에 우촌 김의형 박사는 이같은 좌익세력

의 난동에 울분을 품고 먼저 좌익세력의 난동을 근본적으로 저지하여 야겠다는 굳은 다짐을 하게 되었다.

그 후, 김박사는 생전에 반공투사로서 반공교육자의 화신의 산 표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현실에 민감하지 못하고 어두운 미군정 당국은 좌익세력에 대한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그 근절책을 강구하지 아니한 체 그때그때 미봉책으로 일관하여 더욱 남한 정세는 각 분야마다 좌 · 우익 충돌 속에 사회가 어지러워지게 되었던 것이다. 미군정 당국이 이같이 파괴와 인명살상도 서슴치않은 좌익세력에 대해 언론 · 집회 · 결사의 자유를 선별없이 무제한 보장해 준 결과라 하겠다. 여기서 기회있을 때마다 우촌 김의형 박사는 서슴치않고 미군정 당국에 그 시정책을 강력히 촉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김박사는 좌 · 우익의 갈등 속에서 탈피하여 우리 조국이 앞으로 잘 살 수 있는 터전은 앞날 우리나라 주인공이 될 2세 교육에 있다는 확신을 갖고 교육사업에 온 생애를 바칠 것을 다짐하게 되었다.

앞서 일제 통치하 우리 청소년 교육의 장인 경성여자전문대학 교수를 역임하였지만 그때는 교사로서의 역할이었고, 이제 광복된 조국에서 젊은 청소년의 배움의 터전을 세우고 교육백년대계를 실현시켜야 하겠다는 우촌 김의형 박사의 원대한 포부가 한성학원 설립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일의 젊은 인재육성 및 발굴은 앞날 훌륭한 2세를 낳아 키울 여성교육에 힘써야 하겠다는 것이 한성학원 설립의 또 하나의 배경이라 하겠다.

제 2 절 청소년교육을 통한 영재교육

나라는 망하여도 역사는 망해서는 아니된다고 한다. 비록 나라가 망해도 언젠가는 그 나라를 다시 재건할 수 있으나, 역사가 망하면 다

시는 이 지구상에 그 나라의 재건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일찍이 기원전 나라는 망하였지만, 유대의 역사는 죽지 않고 오랜 기간 면면히 이어져 1948 년 나라를 되찾았다. 그러나 금(값) 나라나 요(避) 나라는 오랜시간 세계 1 등국가로, 그 위세를 떨쳤던 중국 본토에 비록 일부이지만 정복 왕조(位服::E 폐)까지 세웠던 나라들이지만 나라가 망한 후, 그 역사마저 끊겨 이 지구상에서 이들 나라의 재건 따위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이 우리 인류의 기억속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이같이 비록 나라는 망하였어도 역사는 죽지않고 이어져 언젠가 다시 나라를 되찾게 하는 바탕의 힘은 청소년 교육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나라를 잃은 청소년들이지만 자기 조상의 역사와 말과 글과 정신을 앓지 않고 이어간다면 언젠가 나라를 되찾을 기회가 올 것이다. 유대 젊은 청소년들은 나라를 잃고 오랜기간 세계 각지에

서 흩어져 삶을 이어가면서도 자기 조상의 역사와 말과 풍습을 잊지 않고 꿋꿋하게 동류의식(同類意識)을 꾀하여 드디 어 는 1948년 5월 이스라엘 독립을 쟁취하였던 것이다. 어느 문명사학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계 어디에 가서도 하루세끼 중 반드시 한끼는 꼬삽을 먹는 동류 의식의 확인이 오늘의 이스라엘 독립을 가져온 요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꼬삽이란 우리나라 조밥과 유사한 식품으로 유대사람들은 식생활 풍습까지 오랜기간 버리지 않고 간직해왔던 것이다.

나라를 되찾은 이스라엘이지만 수억의 아랍 여러나라 틈바구니에 끼여 여러차례 전쟁을 겪고서도 꿋꿋하게 이 지구상에 이스라엘 깃발을 휘날릴 수 있는 그 저력은 이스라엘 청년들의 역사의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같은 젊은 청소년들의 역사의식의 효율적인 고취는 오직 청

소년 교육에서 가름된다.

우촌 김의형 박사는 일찍이 청소년 시절, 우리 한국이 비록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지만, 우리 한국 젊은이들이 한국혼이 죽지않고 불타고 있음에서 언젠가 다시 나라를 일본으로부터 되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었다고 그 생전에 그와 가까운 교육통지들에게 들려주곤 하였다. 이같은 그의 확신은 앞으로 우리의 역사를 젊은 청소년들에게 올바르게 가르쳐 한국의 역사가 면면히 이어지켜져, 조국광복의 한줌의 밑거름이 되어야겠다는 굳은 신념이 교육자의 길로 나서게 된 동기였다.

구한말 개화파와 수구파의 격심한 논쟁으로 일찍부터 서구 신문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여, 이로 인하여 우리보다 몇 발짝 앞서서구 신문화를 받아들인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국치(國따)를 당하였다. 이같은 나라 잃은 설움을 가슴에 안고 적도(敵都) 일본 동경(핏京)을 비롯한 교토(京郭) 오사가 등지에서 앞선 신문화를 배우고 있는 한인 유학생들은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을 크게 느꼈던 것이다.

우촌 김의형 박사도 이러한 한인 유학생 가운데서도 가장 청소년 교

육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일본에 나라를 잃은 국치를 당하였던 것도 일본보다 몇 발 신문화와 청소년들의 신교육이 뒤늦었던 것이 이렇게 나라 잃은 서러움을 멀리 이국 땅 일본 하늘 아래, 쓰린 가슴을 안고 공부를 하는 만큼 일본인 학생보다 더 열심히 배우고 익혀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앞선 일본의 신문화를 익혀 고국에 돌아가 우리 청소년들을 가르쳐서 언젠가는 광복의 한줌 밑거름을 만들겠다고 재삼 마음속으로 다짐하였던 것이다.

특히 김의형 박사는 일본에서 학문연구에 정진하면서, 틈틈이 일본이 오랜 기간 동안 우리 한국문화의 영향을 받아오디-가 최근 1세기도 채 안되는 극히 짧은 기간 통안에 우리를 앞서, 우리가 그들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국치 (1패 따)를 왜 당하게 되었는가를 곰곰히 생각하여 원인규명도 하였던 것이다.

이웃 일본은 한국이나 중국, 동남아 여러 나라와 같이 앞선 서양문

화를 자의의식(쪼파;한誠)이나 두려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솔직하고 거리낌없이 서양 문명과 그 문물을 받아들였던 것이 바로 일본이 우리 한국을 앞서게 되었던 그 큰 원인이었다.

그리고 일본인 같이 전 아시아에서 서양지식 흡수에 전념하였던 나라도 없었다. 또한, ‘ 5개조문(五個條文)의 서문’을 국가 지상목표로 삼고 서양화(패덴化)의 강력한 국가건설을 위해 신체제 확립에 힘을 기울었던 것이다. 후일, 아시아 최강의 나라로 만든 기초가 되었다.

일본 최고의 근대화 주창자의 한사람이었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輸è;=, 1855-1901)는 1860년, 도쿠가와(幕府) 막부의 무인관리 80병과 함께 일본인 선장과 선원이 운항하는 네덜란드제 군함 칸린마루(成臨九)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가서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기 앞서, 이미 일본은 서잉:화 과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귀국 후, 일본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케이오오

(慶應) 대학을 설립하고, 앞선 서양문화를 일본 청년들에게 익혀 주는 데 전념하게 되었다. 이같은 선진 서양문화를 배운 일본 차세대 주역들이 우리 구한국을 빼앗고 동북아 침략의 기수들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청소년 교육의 힘이 국가 백년대계의 초석이 되며 차세대 국력의 기준이 된다는 것을 젊은 우촌 김의형 선생은 뼈저리게 절감하였다.

일찍 이 중국 명(明) 나라 말기, 1498 년 바스코. 다. 가마(Vasco dagama)가 인도항로(印度船路)를 발견한 후부터 포루투갈인, 스페인 인, 네덜란드인, 영국인, 프랑스인 등의 상업자본가와 뒤미처 제스윗드 교단(敎펄)의 선교사들이 잇달아 중국을 찾게 되었다.

이러한 외국인 부류 중에 마테오 릿치 (Matteo Ricc)등과 같이 뛰어난

과학자도 있어 서양의 발달된 학술을 전해 주었다 그리하여 서양의 지리, 역법, 산술, 측량, 포술(쩌術) 등 서양학술이 전해져 이를 배우고 익혀 뛰어난 서양학문을 전수(傳受)받은 서광계(徐光햄)와 같은 이도 배출되었지만, 명말( 明末) 청초(淸初)가 지나 서양학술문화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거부한 자의의식은 뒷날 1840년 1 월 아편전쟁에서 영국의 앞선 과학기술앞에 그만 세계 노대국(老大國)의 자존심이 꺾이게 된 결과를 가져왔다. 명말 청초 중국인들이 서양문화를 대하였던 태도를 통해 아무리 좋은 학문이라도 배우고 익혀 이를 전해 보존하지 않는다면 무용지물이라는 깨우침 을 우촌 김의형 박사는 크게 느낀 바 있었다.

구한말 우리 조정(朝廷) 관료와 사회 지도층들이 앞선 서양문명과 문물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너무나 인색하였던 점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앞으로는 이러한 우(뽑)를 범하는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아니되겠다고 새삼 업술을 깨물며 마음 속 깊 이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였던 것이다.

특히 일본이 서양문화와 문물을 짧은 기간에 받아들여 일본현실에 맞게 소화 정착시킨 것은 일본 지도층이 일본 청소년들에게 국가주의 교육을 통하여 애국심을 고취한데서 기인되었음을 우촌 김의형 선생은 간파하였던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이같이 청소년들에게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배양시켜 일본 젊은이로서의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하여 다른 민족들을 얄보고 약소국가에 대한 군사적 침략을 꾀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군비확장과 국가의 부력을 신장시켜 제국주의 바탕 위에 자본주의를 발전 시켜서 식민지로부터 원료를 약탈하고 가공품 시장으로 만들어 일본의 부를 늘려 나가고 있는 그 저력도 청소년 교육에서 김의형 선생은 찾았던 것이다

우촌 김의형 선생은 일제 36년만에 되찾은 우리 한국의 광복이 다시는 외세에 의하여 침해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독립의 기초

가 되는 청소년 교육에 있음을 다시 한번 절감하였던 것이다.

한편 해방정국의 좌 · 우익간의 피나는 동족상잔은 전일 당파싸움을 연상한 김의형 박사로 하여금 민족 장래에 암담한 그늘을 느끼게 하여 다음 세대 주인공인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나라사랑과 겨레사상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어린 청소년 시절부터 올바른 애국관과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이 급선무임을 착안하여 우선 학교를 세우고 젊은 청소년을 가르쳐야겠다는 굳은 신념이 한성학원 설립의 또 하나의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예로부터 효자, 충신을 만드는 근본은 어진 어머니의 정성어린 가정교육에 있었음을 돌이켜 생각한 우촌 김의형 선생은 여성교육기관 섣립을 착안하였다.

특히 우촌 김의형 선생은 율곡 이이와 같은 훌륭한 성리학자도 어머니 신사임당(E13 師任堂)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하였고, 훌륭하고 어진 어

머니의 세심한 가정교육이 있었기에 후일 성선설(性善說)의 주인공인 맹자(굶子)가 있었음을 지난 옛일을 돌이키며 생각하였던 것이다.

제2장 한성학원 설립과 교세확장

제1절 한성학원 설립

1945 년 8 월 15 일, 조국광복을 맞은 우촌 김의형 선생은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은 우리 조국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과제는 미래 우리 한국의 주인공이 될 젊은이 교육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예로부터 맹모삼천(폐 l굉 三適)이란 말이 전해오듯이, 미래 훌륭한 어머니를 양성하는 여성교육의 비중이 크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즈음, 우촌 김의형

선생 주변에서는 광복된 조국에서 정치를 할 것을 권유하는 친지도 있었고, 힘 안 들이고 공립학교 교장으로 2세 교육에 몸담을 것을 권유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우촌 선생은 비록 작은 배움의 터전이나마 새룹게 마련하고 광복된 조국의 바른 정신을 가르치겠다는 굳은 각오를 하였던 것이다

이즈음, 한 친지로부터 성북구 삼선동 2가 389 번지에 위치한 일본인이 경영하던 경성여자기예학교(京城女子技행學校)를 인수할 것을 제의받게 되었다. 이 경성여자기예학교는 대지 2,290평에 세워진 373 평 작은 교사에, 일본인 여자중학교(6년제)를 졸업한 젊은 여성들에게 시집가기 전까지 바느질, 꽃꽂이, 수예, 재봉 따위를 가르쳤던 신부수업의 미니스쿨이었던 것이다.

우촌선생의 친지 가운데에는 “이같은 작은 학교를 전별금(錢別金)까지 주고 인수할 것까지 뭐 있겠느냐”고 만류하는 이도 있었다. 여기서 전별금이란 패망한 일본인들이 남한에서 경영하던 기업이나 가옥 따위를 두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이들에게 위로금으로 지급했던 돈을 말한다. 공산 치하의 북한에서는 전별금이란 생각조차 못하였다.

우촌 김의형 선생은 이같은 만류에도 겸허하게 이 작은 미니학교를 앞으로 기존의 어떤 큰 학교보다 더 훌륭한 학교로 키울 것을 마음 속 깊이 다짐하였던 것이다

우촌 선생은 평소 존경하던 페스탈로치 선생이 일찍이 부르크(Brugg) 지방에서 빈민학교를 열고 훌륭한 인재를 키워 후일 스위스뿐만 아니라, 전세계 교육계에 새로운 교육사상의 출현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을 돌이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학습자에게 학습활동을 통한 능력계발 및 인간성 도야에 역점을 두었음을 상기하고, 이 인수한 학교를 여성교육의 참된 명분으로 만들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특히, 전일 보통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에게서 한 어린이가 붐이 약해 평소 비실비실하였는데, 어느 날, 동네에서 다른 아이들융 힘껏 뛰어놓고 있는데, 한쪽 구석 양지 쪽에서 볕을 쪼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시고 “이 놈! 그렇게 봄이 약해서 무엇을 할 것이냐? 이리와 나와 함께 뛰자”하면서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아니한 학교 운동장으로 그 어린이를 데리고 가 운동장을 2바퀴 같이 돌아 주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 어린이는 튼튼하고 건강한 어린이가 되었다는 일화가 생각났다.

여기서 우촌 선생은 비록 작은 배움의 터전이지만, 학습자와 마주 대할 수 있는 새로운 교육의 장의 마련은 광복된 조국에 참다운 교육 지도자의 길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우촌 선생은 이렇게 마음 속으로 굳은 각오를 하고 이 미니스쿨을

인수하였지만, 당시 미군정 당국은 이 학교의 재정과 시설의 미비 등을 들어 학교법인으로서 허가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우촌 선생은 당시 문교부장(현 교육부장관에 해당)을 3 번씩이나 찾아 그의 포부를 피력, 우촌 선생의 끈질기고 뜨거운 교육열의에 감명, 조건부인가를 얻어내게 되었다. 드디어 1945년 10월 5일, 재단법인 한성학원 설립과 동시에 총학생 3백여명의 한성고등여학교(6년제)를 개교하게 되었고, 1946년 7월 5일 한성여지- 중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제2절 교세확장과 지 · 덕 · 체 교육의 구현

한성여지-중학교 개교의 벅찬 첫발을 내디디기는 하였지만, 좌 · 우익의 해방정국의 혼란이 이 학교에도 불어닥쳤다 일부 교사와 학생 가

운데, 좌익사상에 빠져 학사행정을 방해하는 사태도 있었지만, 김의형 교장의 확고하고도 신념에 찬 교육정신은 이같은 좌익분자들을 덕화로 써 교화시켰다. 그러나, 머지 아니하여 6.25동란과 9.28 수복, 1. 4후퇴 ,그리고 수도서울 수복 등 동족상잔의 전란 속에서도 한성학원 발전에 대한 굽힘없는 의지는 변하지 아니하였다. 1951년 10월 1일. 수도 서울 수복 후, 서울 시내의 동서남북 네 곳에 잔류 중고등학생을 위한 훈육소가 개설되었다. 우촌 김의형 선생은 북부 중고등학생 훈육소를 개설, 배운에 목말라하는 3천명 학생이 모여들었다.

세계각국의 추세에 따른 문교부 방침에 의해 한성여자중학교도 1952년 5월 31일, 한성여자중학교와 한성여자고등학교로 분리하고 두 학교의 교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 후, 교세확장에 힘써 돌산인 닥산을 갈고 닦아 만오천평의 대지 위에 4층 철근 콘크리트 건평 천이백 평의 새 본관 건물을 신축하는

한편, 연건평 천백평 4층 과학관 건물을 지었다. 이어 강당, 체육관 등을 짓고 불모의 낙산 언덕에는 진달래와 각종 수목을 심고 의화정의 정자를 세워 서울시내 여자고등학교 캠퍼스 가운데 가장 경관이 아름다운 캠퍼스로 탈바꿈시켰다.

한편, 지 · 덕 · 체 교육에 힘써 앞날 어진 부덕을 가진 현모양처 교육을 교육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인다는 우촌의 교육철학은 한성여고 출신 여성 처놓고 아름답고 건강하지 아니한 여성이 없다는 사회와 교육계로부터 예찬을 받아왔다는 것도 예사로 넘길 일이 아닐 것이다.

제3장 체육관 건립과 ICHPER회의 성료(盛了)

제1절 체육관 건립

우 촌 김의형 선생은 “체력은 국력”이라는 굳은 신념의 교육철학을 가지고 캠퍼스 내에 독립건물로서 체육관을 지었다. 그리고 후일 낙산 언덕에 국제규격의 풀장도 마련하였다. 특히 여자고등학교에 독립건물로서의 체육관 건립은 우리나라에서 한성여고교가 처음이다.

서울시에 남자중고교 기존의 체육관들은 강당과 겸 용으로서 강당 한쪽에 농 구 벽판을 부착한데 불과한 실정이었기에 한성여중고교의 강당 건물과 별도로 건립한 체육관은 서울 시내 중고교는 물론 우리 체육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 히 체육관 건물 정변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오륜마크를 부착하여 체육계 인사들의 깊은 관심과 호응을 얻기도 하였다. 이 오륜마크의 체육관은 대한체육회 인사들과 중앙대학교 임영신(任永띔) 총장 및 대한교련 정태시(젠菜땀) 사무총장과 체육계 교육계 인사들에게 우촌 김의형 선생의 높은 교육관을 느끼게 하였다.

제2절 WCOTP총회와 ICHPER회의

WCOTP 란 세계교직단체 총 연합회를 뜻한다. 1951 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각 대학에서 한국역사를 강의하고 있던 당시 교련 명예회장백낙준 박사가 미국교육회를 통하여 WCOPT(세계교직단체 총연합World Conferdation of Roganizations of the Teaching Profession)의 모체 인WOTP(세계교직단체)가입활동을 전개한 것이 오늘날 한국 교총이 세계 각국의 교직단체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게 된 시초였다. WCOPT는 1952년 8월 1 일 댄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25개 자유진영 국가의 교직단체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WCOPT발기 총회를 개최하였다. 대한 교련은 그 발기 단체의 하나가 되었다.

자유세계의 유일한 교원단체로 등장한 WCOPT는 교원사업에 종사하

는 모든 교직자들을 하나의 강력한 국제적 조직체로 결집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대한교련은 WCOPT창설에 참여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회원 단체의 자격으로 매년 열리는 연차총회와 전문별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였고 교육개선을 위한 국제활동에 참여하는 한편, 한국의 교육문화 전반에 걸친 발전상을 세계 각국에 널리 소개하여 왔다.

오늘날 한국교총(대 한교련)은 WCOPT의 200 여 개 정 회 원 단체 중 그 규모와 회세(흰찢)에 있어서 굴지의 단체로 성장 발전하였고 아시아 지역에서는 일본, 필리핀과 함게 3 대 단체의 하나로서 WCOPT의 전반적인 정책과 사업 운영에 큰 영향을 주고 있다.

돌이켜보건대 1966년 WCOPT 제 15차 총회를 서울에서 개최하고 싶다는 요청은 1962년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에서 개최된 제12차 총회때 한국대표들에 의해 처음으로 제의되었다. 그 결과 파리에서 개최된 제 13차 총회 때, 한국개최에 대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으나 이 결정은 잠정적이고 예비적인 것으로 국내에 특수사정이 발생하여 개최가 곤란

할 대는 변경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런 결정이 있은 후에도 대한교련은 총회 유치 및 개최를 위하여 전력을 경주하여 왔다.

WCOPT총회는 관례적으로 매년 장소를 달리하여 개최하되, 격년째에는 유럽에서 개최하여 왔다. 따라서 1965 년 제 14 차 총회가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 수도 아디스 아바바에서 하기로 결정되었으므로 그 다음 해인 1966 년의 15 차 총회는 다시 유럽에서 개최해야 할 순서였다.

그러나 대한교련의 대회유치를 위한 다각적인 로비활동의 결과로 한 해 걸려 총회를 유럽에서 개최한다는 창립 이래의 관계를 깨뜨리고 유럽, 아프리커 아시아 미주의 4개 지역으로 나누어 순번으로 총회를 개최한다고 하는 새로운 관례를 세워, 한국의 교직단체인 대한교련이 첫 번째로 아시아 지역을 대표하여 제 15 차 총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제 14차 총회에서 서울을 1966년도 총회장소로 확정하는 데 있어서 유럽과 일본대표의 일부가 집행위원회와 아시아 위원회에서 한국의 국

내정세가 평온치 못하다는 점과 유럽으로부터 너무나 먼 거리에 있어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를 들어 약간의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14차 총회에 참석한 당시 대한교련의 대표였던 유진오회장과 정태시 사무총장의 간독한 초청, 그리고 다년간에 걸친 대한교련의 공적을 인정받아 WCOPT회장 로날드 굴드경과 사무총장 윌리엄 G. 카아 박사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서울개최가 확정되었다.

WCOPT총회는, 물론 WCOPT의 직접적인 계획과 운영으로 진행되지만, 개최국은 개최국대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만 했다. 서울총회의 주관단체인 교련이 총회를 위하여 준비하였던 중요 사항은 다음과 같다. WCOPT총회 서울 개최를 위한 제반 준비를 하기 위하여 거국적인 세계 교직자 대회 (1ι界敎職者大쉽) 집행위원회가 1965 년 초에 구성되었다. 그 주요 구성인사를 일별하면, 국회의장, 국무총리를 포함하는 고문과 전국대학교 총학장, 국회의원, 각계지도자를 포함하는 기획, 총

무, 회관, 섭외, 재정 등의 위원과 일반위원 수백명으로 구성되었으며 위원회의 위원장, 부위원장은 대한교련 의장단과 행정부의 해당 장, 차관이 담당하였다.

동 위원회가 단순한 준비 업무만 담당한 것이 아니라 서울총회 준비에 거국적으로 대처하였다는 점은 보다 적극적인 대응 전략으로 평가될 수 있다.

대한교련은 국제회의에 경험이 있는 대학교수, 전문가, 기타 인사들을 실무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여 위원회를 수시로 개최, 세부적인 준비에 만전을 기하도록 하였다. 총회준비업무를 실제로 담당하는 총회준비국을 1966년 초 교련 사무국 내에 설치하고 준비국에 기획 영접, 교통, 공보, 재무 등 각 부서를 두어 초회가 끝날 때까지 업무를 전담케 하였다.

한편 WCOPT본회와 병행하여 열리는 전문별 회의에는 유진호 고대 총장에 이어 새로 대한교련회장으로 선출된 중앙대총장 임영신박사가 우촌 김의형 박사 등 다섯 분에게 각각 전문별 회의 준비위원회 책임자로 위촉하였다.

그 중 그 규모가 큰 ICHPER의 준비위원장으로 우촌 김의형 박사를 위촉하게 된 것은 이미 오륜마크의 체육관 건립에 대한 깊은 관심과 존경의 뜻이 담겨져 있었다. 그리고 당시 대한체육회 측에서도 대한교련 임영신 회장의 결정에 대한 깊은 신뢰와 호응을 보내왔다. 여기서 ICHPER란 세계 보건체육 레크레이션 협의회를 말한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도 WCOPT총회와 ICHPER회의에 직접 참석 격려의 인사와 메세지를 각각 보내었던 국가적 차원의 거국적인 행사였다.

제 15차 WCOPT총회 본회와 병행해 개최되었던 전문별 회의 준비위원장은 다음과 같다.

@ 보건체육레크레이션 협의회 (ICHPER) 의 준비위원회 - 김의형

한성여고 교장

@ 성인 교육회의 준비위원회 - 황종건 한국교육학회

@ 국제교원양성협의회 (ICET) 회의 준비위원회 - 이종수 서울사대 학장

@ 과학교육회의 준비위원회 - 홍경섭 수도공대 학장

@ 시청킥- 교육회의 준비위원회 - 김은우 이화여대 교수

제3절 제9회 ICHPER회의 성료(盛T)

교육계의 올림픽이라 할 수 있는 WCOPT 제 15 차 총회는 1966년 8월 3일부터 세계 각국 교육자 대표 3 백여명과 국내교육자들이 워커힐 메

일관 4층 대회의실(현재 본건물은 철거, 쉐라톤 호텔이 세워짐)에서 8월 9일까지 7일간 “교육계획에 있어서의 교직단체의 역할”이란 주제로 각국 대표들의 열띤 토의를 가졌다.

이에 앞서 7월 28일부터 8월 2일까지 시내 시청 건너편 뉴코리아 호텔 7 층 회의실에서 ICHPER 서울회의가 “건강과 체육과 레크레이션 교육게획”이란 주제로 열렸다. 다른 전문별 회의는 당일 하루씩 열렸지만 제9회 ICHPER서울회의는 6일간에 걸쳐 열렸다.

당시 뉴코리아 호텔은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위치)보다도 최신 설비를 갖추어, 냉방과 동시통역시설을 갖춘 초특급호텔이었다. ICHPER 서울 회의는 세미나에 앞서 7월 28일 하오 2시 새로 건립된 대한교련9층 대강당 (현재 광화문에 위치)에서 성대한 개회식을 가졌다.

이날 27개국 ICHPER정회원 27명과 우리나라 측 대표 48명을 포함한 전국 각급학교 체육교수 및 체육교사들이 장내를 메운 가운데 열린 개회식에서 ICHPER회장인 베르지움 훼르체 박사는 개회인사에서 한국에

서 WCOPT 총회와 ICHPER회의가 열리게 된 것은 발전하는 한국교육의 경사이며, 이번 회의에서 교육과 체육을 통하여 세계가 하나로 융화되는 계기를 마련하자고 강조하였다.

한편, 김의형 ICHPER서울 총회 준비위원장은 환영사에서 “우리나라를 찾은 ICHPER 세계 각국 대표들을 중심으로 환영하며 이번 ICHPER서울총회에서 풍성한 연구결과가 나와 세계 보건 체육교육에 큰 기여가 있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개회식에 ICHPER서울 총회 김의형 준비위원장이 주재하는 이번 회의에서 큰 토의성과가 있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메세지를 보내와 참석한 ICHPER세계 각국 대표들을 격려해 주었다.

대한 교련 국제담당이었던 홍순범 씨(현재 주한 뉴질랜드 대사관 메니져)는 그 때를 돌이켜보면서, 당시 김의형 준비위원장의 물심양면의 회의 주재로 그 어느 ICHPER회의보다 짜임새있고 알찬 회의였다고 서

울 ICHPER회의에 침-석한 세계 각국 대표들은 입을 모았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회의 마지막날 채택한 107R 조항의 ICHPER결의문 내용 중에 회의 주재국인 한국측 수고에 대하여 전일에 없었던 개최국 수고를 한개 조항으로 덧붙였다.

결의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아시아 올림픽 대회의 개최 직전에 소집될 전문위원회에 참석할 아시아 국가 대표들은 보건, 체육, 오락을 개선시키는데 ICHPER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논의 제안할 것을 요망한다.

@ 집행위원회는 계획의 개선, 연령별 지역별, 지적수준에 따른 여러가지 교육자료를 개발하는데 지원하며, 세미나, 연구소, 워크삽 등 지도계획을 마련해 줌으로써 회원국이 ICHPER사업을 원활히 수행하도록 돕는다.

@ 난관에 봉착해 있는 회원국의 보건, 체육, 오락교육을 위해서

ICHPER는 관계서류, 서적, 그림, 필름, 경기지구를 보내주고 관계회의와 세미나에 이러한 회원국의 참석을 초청한다. 또 잘 훈련된 전문가 팀을 해당국에 보내 실질적인 지도를 하게 한다.

@ 인간관계의 과학은 보건, 체육 오락교육과는 너무나 떨어져 왔다. 그러므로 ICHPER는 이러한 이론학문을 실지 연관시켜 보건, 체육, 오락교육을 유지 발전시킨다. 이런 시도는 청소년의 보건, 체육, 오락교육의 방향을 선택 설명시키는데 도움을 주며 또 겪어온 경험을 분석 개선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 보건, 체육, 오락교육의 교사와 지도자를 양성하는 대학당국은 교사 훈련계획의 가치를 다른 교사의 것과 같은 수준에서 취급해야 한다.

@ ICHPER는 보건, 체육, 오락교육을 담당한 교수와 학생을 교류하는데 노력을 경주한다.

@ 모든 회원기관은 ICHPER뉴우스를 각국의 정기간행물에 소개 게재한다.

@ 회원 국은 회원국의 뉴우스를 뉴우스 편집자에게 보내야 한다.

@ ICHPER 정기간행물은 잡지를 간행 못하는 회원국의 의견을 설명하기 위해서 회원국란을 마련한다.

@ 전문지도자의 지도하에서 모든 학교의 시설을 방과후에도 청소년들이 수용할 수 있게 개방한다.

@ 집행위원회의 참가국을 대신해서 ICHPER는 9 회 총회를 마련한 한국측의 수고에 대해서 경의를 표한다.

제4편

중고등학교편

제1 장 건학기(1945-1949)

제1절 건학의 기틀과 설립자 우촌 선생

예로부터 인재 양성은 나라의 백년지대계(띈年之大計)라 하였다. 한성학원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는 인재를 양성하는 길이 민족 정기를 바로 잡는 길이라는 일념 하에 평생을 교육사업에 전념한 분이다.

우촌 김의형 박사는 조국 광복을 맞이하자 1945 년 10월 5 일 한성고

등여학교를 설립 개교하였다. 이는 과거의 치욕적인 36년의 식민 통치가 청소년에 대한 교육을 소홀하게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였고, 민족 정기를 이어받는 교육의 원대한 꿈은 민족과 역사에 대한 소명의식( 낌命꾀;減)을 지닌 청소년을 알차게 교육시켜 나라의 큰 동량(싸梁)으로 양성함으로써 실현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우촌 선생은 1920년대부터 교육 구국(敎 救I평)의 신념을 가슴에 안고 교육계에 투신하였다. 즉 식민지 조국을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교육을 통해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일이 첩경이라는 판단 아래 일본 유학 길에서 돌아오자마자 교육계에 투신한 후 그의 전 생애를 교육에 몸바쳐서 한번도 교육 현장을 떠나지 않고 교육자로서의 외길을 걸어온 분이다. 이처럼 굳은 집념으

로 육영의 터전을 마련하고 굳센 의지로 수많은 영재들을 육성한 분도 보기가 드물다.

우촌 선생은 교육 사업에 있어서 어느 누구보다도 엄연(械然)하고도 장엄(파嚴)하신 분이었다. 거목(1프 木) 같은 큰 뜻으로 우리 한성 학원을 이룩하였으니 오늘의 낙산 언덕에 자리한 한성 학원의 어느 곳이라도 그의 손길과 의지가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우리 한성 학원에서 자라나는 젊은이들은 우촌 선생의 건학 이념과 그의 민족애(하族變)에기초한 교육 정신을 받들어 한성 학원의 고유한 정신과 학맥(웰派)을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아울러 그의 드높은 건학 정신을 낙산에서 세계로 범쳐 나가는 젊은이로서의 꿈과 의지를 가지고 구현해야 하고, 바로 이 길이 우리 모두가 숭앙(뿔 씨)하는 우촌 선생의 그 숭고한 건학 정신을 이어가는 길이 된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제 2 절 건학의 시대적 배경과지역적 특성

1) 시대적 배경

한성학원의 모체인 한성여자중고등학교(淡城女子1*1 핀經j벨校)가 낙산 언덕에 터를 잡고 개교한 것은 지금부터 꼭 50년 전인 1945년 10월5일이다 따라서 1995 년 올해는 광복 50주년에 해당하는 동시에 한성학원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는 기념비적 해인 것이다. 1945 년 8.15 광복 직후인 9월 25일 한성학원의 설립자이신 우촌 김의형 선생이 현재 한성학원 자리에 있던 경성여자기예학교를 인수하여 신생 대한민국의 건국을 전망하면서 이에 필요한 역군 양성을 위한 중등과정 학교 설립을 추진한 것이 오늘의 한성학원의 모체가 되었다. 1945년 10월 5일 학생

모집에 나선 후 1 년반 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쳐 한성고등여학교로 정식 인가된 것은 1946년 4월 9 일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52년 5 월 31 일 학제 개편에 따라 한성여자중학교 6학급과 한성여자고등학교 6학급으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 장에서는 이와 같은 한성중고등학교가 설립되기까지의 경위를 당시 시대적 배경과 지역적 특성 그리고 본 학원을 창립한 우촌 선생의 건학정신 및 초창기 교육활동 면모를 살펴보기로 한다.

(1) 일제 하의 식민 교육

한성학원은 우촌 김의형 선생에 의해 창립되었다. 그러나 창립자 우촌 선생의 교육활동은 이미 일제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일제시대

부터 시작되었다. 1904년에 태어나 광복이 되기까지는 거의 대부분을 일제의 식민지 교육하에서 뼈아픈 고통과 설움을 당하며 민족이 안고있던 아픔과 역사의 현실을 체험했다. 이에 일제의 가혹한 식민 통치 하에서 획책된 우리 한민족에 대한 민족 말살 정책을 극복하고 더 나아가 광복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세대에게 새로운 교육을 가르치는 일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단정하였다.

1906년 이 땅에 통감부(統값府)를 설 치 하고 1945 년까지 식 민 통치한 일본의 한국인에 대한 일관된 교육 정책은 민족 의식을 말살시키고 우리 국민 을 황국신민화( 띈. 1패 |쥔 j콧 化)하려는데 집중되었다. 그들은 “대동아 공영권(大폈파共榮|철1)" 건설이란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웠고 한국인에게는 “내선일체 (1깨빡 -웹)"니 “일시동인(-페 同仁)"이라는 미명을 내걸고는 한국인의 일본인에 대한 적대 감정을 무마하고 민족 의식을 말살시키려고 애썼다. 그리고는 그들의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 무한정으로 소모되는 인력과 자원을 한민족과 한반도에서 착취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

되는 모든 방법과 수단을 동원하였는데, 그 첫째가 “우민화(파 l강 化) 정책”이요, 둘째가 “언어 말살( 言괜 짜殺)," 셋째가 “창씨 개명(創f~ ll5c êfl )," 넷째가 “신사 침-]페(세l' jiU: 參젠)"였다. 이에 따라 일본은 특히 우민화 정책으로 한국에서 인문계 학교와 고등 교육기관의 설립을 억제해 오다가 말기에는 인문제 학교를 전부 실업 이공계 학교로 통협 개편하였다. 왜냐하변 지도지급 인재 양성 교육기관인 인문계 학교의 설립을 불허함으로써 민족 의식의 성장을 막고 한국인을 우민화하려는 저의가 깔려 있었기 떼문이다. 그래서 고급 관리는 일본인이 다 차지하고 한국인들은 관리로 출 세힐- 기회가 막혀서 실업학교에 진학하여야만 기술이나 주산 부기 등 의 시-무 기술을 배워 졸업 후에 취직을 할 수가 있었다. 힌펀 한국 어(폐 1행l 파)는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 민족의 유대 를 강화하는 힘이리- 믿어 우리말과 글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대신 일본어를 강요하였 는 데 통감부 시대에는 우리말 시간이 보통학교에서 10시간이

었던 것이 이 시기에 오면서 수의 (1삶쉰、) 과목으로 밀려니-고 대신 일본어가 필수 과목으로 등장하였다. 또 창씨 개멍을 실시하여 우리 이름을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었고 신사 참배를 강요하여 일본 천황( 天!친 )을 숭배하도록 만들었다.

민족 말살이라는 그들의 정책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되는 모든 문화활동을 제한 했으며 그들의 정책에 불복종하는 학교는 모두 폐교 조치를 하거나 공립으로 흡수했고 여의치 않을 때는 사학(젠젠)의 경영권을 일본인들에게 넘기도록 강요하였다. 1910년에 2,2507R 학교였던 사학의 수가 1919년에는 7427R교로, 다시 1940년에 는 400여 개교로 줄었다는 사실로도 그들의 교육정책을 알 수 있거니와 400여 개 교에 대해서도 겁독과 위협은 날로 가중되었다. 교과목 중 일본어나 일본 역사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지게 되었으며 어떤 학교에서는 우리의 민족정신과 상롱하는 무궁화를 교정에서 파헤쳐 버리기도 하였다 1943 년

제 4차 조선 교육령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교육령을 수차 개정하면서 강압의 강도를 높였고 1944년에는 “학도 근로 동원령”을 공포하여 학행 일체(學行一웹)의 전시 교육을 내 걸었다. 각 학교는 수업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송탄유 채집, 고사포 및 진지 구축, 비행장 닦기, 군인 피복 만들기 등에 학생을 강제로 동원하였다.

이와 같은 탄압 아래서 민족의 운명은 가혹한 시련에 부딪혔으니 개화기부터 싹터 온 민족의 자각에 의한 교육 구국의 건학 정신도 변질되거나 말살되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이 암흑의 시대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에 투신한다는 것은 가혹한 시련과 엄청난 정신적, 물질적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우촌 선생은 모든 것을 희생한 채 홀연히 이 교육 사업에 뛰어들었다 즉 교육으로 잃었던 나라를 되찾아 자주 독립을 쟁취해야 된다는 투철한 교육 신념이 가일층 심화되어 가던 중 우리 민족이 피압박 민족의 비운에서 일

제의 강칠 사슬이 풀리던 1945년 8월 15일의 조국 광복이 찾아왔다. 이 때가 우촌 선생이 그의 생애를 통해서 자신의 소망을 실현하고 왕성하게 그의 경륜을 펼쳐 나가기에 가장 알맞은 42세가 되는 해였다.

(2) 8.15 광복과 혼란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오랜 암흑과 질곡(젠띔)에서 해방된 온 겨레는 장차 이 땅에 건설될 조국의 미래에 대한 저마다의 부푼 꿈으로 온통 환희와 흥분에 젖었고, 빼앗긴 이름을 되찾고 금지된 모국어로 마음껏 조국을 구가했다. 그리고 일제에 강점 당했던 사학(젠、적;~ )들은 옛 주인의 손으로 되돌아가고 황국신민화의 시녀로 타락했던 교육은 개화기의 건학 정신들을 되찾아 교육 입국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 하였다.

이처럼 8.15 광복을 맞으면서 대부분의 국민들이 해방의 환희에

젖어 지나친 흥분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촌 선생께서는 “됐다! 진정한 한국 교육을 건설할 때가 온 것이다. 초등교육부터 전문대학 교육까지 를 모두 경험해 알고 있는 나의 총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할 때가 이제야 왔구나!"라는 심중의 독백과 함께 밤잠을 설치면서 마음속으로 자신의 포부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러는 동안에도 주위에서는 출세와 공명을 유혹하는 손길을 뻗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 나라를 위한 국민 교육의 적기는 바로 이제부터이다. 다들 공리주의나 이기주의에 빠져서 교단을 버리고 떠나 버려도 니-민-은 교단을 지킬 것이다 내가 처음에 ‘천안보통학교’에 교사로 부임할 당시 일생을 교단에서 살자고 결심했던 것을 굽혀서는 안되지!’라는 마음 속의 결론을 내리고 끝까지 교단을 지킬 것을 맹세하였다.

이 무렵, 그 때까지 일본 사람들이 운영하고 있던 서울 특별시 성

북구 삼선동 2가 389번지 (당시에는 성북구 돈암동 산 48 번지)에 자리잡고 있던 ‘경성여자기예학교’를 양도한다는 이야기가 들려 왔다. 우촌선생은 일인으로부터 이 학교의 경영권을 인수받기로 하였다. 그러나 당시 미군정 하의 문교부에서도 “일인의 경영체를 인수하는 일은 찬성할 만한 일이며 해방된 오늘날 교육이 무엇보다도 긴급한 문제인 탓에 큰 의미가 있는 교육 사업이기는 하나 확고한 재단(떠 l폐)의 확립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니 좀 곤란하겠다”라며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램에도 불구하고 친지와 동료 그리고 문교 당국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심정을 토로하면서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일제 억압 시대에는 배우고 싶어도 그들의 우민화를 위한 식민 정책으로 인해 교육을 받지 못했던 것만도 우리 민족에게는 한없이 비통한 일이었는데 이제 조국이 광복된 지금에 와서까지 학교법인이며 재단의 완성만을 내세우띤서 학교의 교문을 소위 ‘좁은 문’으로만 만들려고 하니 그것이 나라

를 사랑하고 국민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하시오? 내가 신청한 학교를 조건부라도 좋으니 인가만 해주시변 기필코 곧 학교 법인도 완성하고 확고한 우리의 교육장(敎育場)을 이룩시켜 놓을 것이니 그렇게 하여 주시오.

라고 강경하고도 충정 어린 설득 끝에 조건부 인가를 받아 내는 데 성공했다. 그 때가 1945년 10월 5일 이었으니 한성고등여학교라는 교명으로 개교 하였다.

1945년 11월 미군정 하의 ‘조선교육심의회’가 새교육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 9개 분과위원회를 설치하고 가을 학기인 9월을 학년초로 하는 연 2학기의 6.3.3 -4제의 새 학제를 결정함으로써 새로운 민주주의교육 체제가 출발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현재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미국식 교육의 시작이었다. 정부가 수립되기 전 미군정시대의 교육은 구체적 교육 방침으로 @ 의무교육의 실시 @ 중·고등교육의

확충 @ 성인 교육의 확충 등을 정했고 현실적 행정 조치로는 @ 학교 차의 철폐 @ 남녀공학 실시 @ 입학시험의 개혁 @ 한자 폐지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겨레의 희망찬 감격도 잠시 뿐이고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함으로써 조국의 분단을 자초했고 님-쪽에서는 좌·우익의 이데올로기 투쟁이 날로 격화되어 갔다. 찬탁(贊託)과 반탁(反託)의 대립으로 가두 시위가 벌어지고 좌익의 선전 공세와 테러 행위는 급기야 학원에까지 파급되었고, 일제의 손에서 조국을 되찾은지 불과 얼마만에 동족간의 사상적 혈투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하여 학원은 좌익 교사와 우익 교사간의 설전 장으로 화했고 일부 좌익 교사의 사주를 받은 학생들은 우익 교사를 협박하고 갖은 테러 행위를 일삼았으며 낮에는 우익 교사에 의한 학교가 되고 밤이면 좌익 교사에 의한 전단 살포 등으로 학원은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우촌 선생은 “이 혼란한 사태를 내 진심과 열성

어린 충정을 보여 주면서 덕으로 수습하는 길밖에 없다”라는 굳은 결심으로 모든 정성을 다하여 학생을 감화시키는 일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진정한 교육자적 신념과 불타는 교육열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숭고한 교육 정신을 외면한 채 사태는 노도와 같이 거세기만 하였고 무너뜨리기에는 너무나도 높고 단단한 철벽과도 같았다.

(3) 시련의 극복

기나긴 36년간의 일제 압박에서 벗어나 광복의 기쁨을 맛본 것도 잠깐 사회는 물론 국민들도 정치적, 사상적, 이념 분쟁에 휩쓸려 혼란을 거룹하였고 학교도 이러한 사회의 혼란한 기류를 차단하는 방파제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한 마디로 말해 교사거나 학생이거나 대부분이 좌 · 우익의 두 갈래로 나뉘어져 서로가 질시하고 반목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좌익계 학생들은 그들 배후의 지령에 따라 교사들의 눈을 속여서 교무실에 침입하여 출석부를 훔쳐 가는가 하면, 조회 때에 갑자기 전교생 앞에 등단하여 선동 연설을 일삼고 밤중에 교내에 침입하여 국기 게양대에 적색기를 게양하는 등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우촌 선생은 그의 교육 정신이 한없이 침식되어 가는 상황에서 나날이 번뇌를 거둡하게 되었지만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 아무리 좌익의 불순분자들이 난동을 친다 해도 모든 일은 사필귀정(짧 必歸IE) 이다. 내나라 내 민족의 숭고한 민족정신은 교육으로써 높여야 한다” 라고 다짐에 디-짐을 거듭하면서 좌익계 학생들을 교화시키는데 정열을 쏟았다. 경찰 당국에서 좌익 난동 학생의 혐의가 있다고 하여 억류하려고 하면 친히 경찰서까지 찾아가서 그 학생의 신원을 보증하고 다시는 그러한 경거망동한 행위가 없도록 교육시킬 것을 확약한 다음 혐의 학생들을 인계 받아 데려오는 일들이 다반사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좌익

세력의 조종을 받은 학생들은 우촌 선생의 사랑에 어린 갚은 배려에도 불구하고 거칠어지기만 하여 심지어는 선생의 사택에까지 “ ~우리의 요구에 응한다는 뜻으로 내일 오전 중에 교문에다 백묵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놓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신상에 해가 있을 것이니 각오하시오" 등과 같은 협박장을 수십 차례나 보내기도 하였다. 이에 불응하자 급기야는 어느 날 등교하는 우촌 선생을 낙산(總山)기숨에서 7-8명의 불순 학생들이 습격해 난타를 감행함으로써 심한 중상을 입혀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게 하는 불상사를 일흐키기도 했다. 그러나 선생의 교육적 신념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정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다 “남아(땀兒)가 불의에 굴복할 수 있겠는가?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민족을 위하는 정신, 그리고 학교를 건설하고자

하는 내 심정만큼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결단 속에 아무일도 없는 듯 태연히 등교하여 불순 학생들을 덕으로서 교화하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렇듯 나라 전체의 혼란 상태와 함께 우촌 선생이 건립한 ‘한성여자중학교’도 극도의 문란함을 겪었지만 참된 한국의 여성 교육을 건설해 보이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먼저 학교 부지를 확충시키는 것에 목표를 세우고 단층에 불과한 교사(校舍)를 2층으로 증축하고 학교 주변에 철조망 울타리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이 또한 쉽지는 않았다. 사회의 혼란 속에 나날이 껑충 뛰는 물가고로 인해 예상하는 일마다 수많은 난관들이 밀어 닥쳤다. 한 예를 들어보면 교정 앞 1만 평이 넘는 학교 숲 주변에 가시철망을 두르는 공사가 착수되었는데 나날이 뛰는 물가로 인해 이를 맡은 청부업자가 계약 당시의 금액과 엄청난 차이가 난 공사비로 막대한 손해를 입어서 그를 따라 품팔이하던 사람들의 노임조차 지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청부업자가 인부들로부터 구타를 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우촌 선생은 이러한 청부업자의 곤

란한 처지를 그냥 넘기지 않고 학교와 청부업자 사이의 원래 계약과는 틀리는 일이었지만 업자의 공사 과정에서 생긴 손해를 충당해 주고 덧붙여 업자에게 얼마간의 이익까지도 배려해 줌으로써 청부업자의 어려운 곤경을 구해 주기도 했다. 이처럼 오직 한가지 불타는 교육 구국의 투철한 신념과 피땀어린 교육열로 모든 난관을 용케 극복하면서 그 어려운 공사를 서서히 점진시켜 나갔던 것이다.

무질서와 혼란의 미군정시대가 끝나고 남한에서만 우리의 의사에 의한 우리의 정부가 1948 년 8 월 15 일 수립되어 민주적 교육의 기치 아래 자주 독립의 사상이 그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초대 문교부장관인 안호상(잦관제) 씨는 국민 사상을 통일시키고 반공 민주 정신을 확립하기 위해 일민주의 ( -- J풋主談)사상을 역설하는 한편 1949 년 12월 31일에는 대한민국 신교육법을 공포하여 새로운 교육의 장이 열리게 되었다 우리의 교육 이념이 담긴 이 법의 제 1 조에는 “홍익인간(弘徐人{돼 )

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게 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이상 실현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1950년 5월에는 제2대 문교부 장관에 백낙준 (1꾀 梁젠) 씨가 임명되었는데 이때 밝힌 문교 정책으로는 @ 자립인 교육 @ 자유인 교육 @ 평화인 교육 퉁이었다. 그러나 취임 두 달도 못 되어 6 .25 전쟁이 일어났으니 학교는 다시 혼란의 와중에 빠지고 학생과 교사는 학교를 잃고 뿔뿔이 흩어지는 수난을 당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해방 직후의 혼란기를 어렵게 극복하고 정부 수립 후의 안정기플 지나 6 .25 동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우촌 선생과 교직원들의 본교에 대한 자부심과 애교심으로 학교를 위하는 정성과 헌신적인 노력을 통해 학교 생활은 점차 안정되었고 내실 있는 성장을 차분히 해갔다. 이것은 우촌 선생의 교육 신념에 바탕을 둔 본교의 건학 정신이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2) 지역적 특성

본교의 위치가 설립된 당시에는 성북구 돈암동 산 48 번지였으나 정부의 행정 구역 개편에 의해 성북구 삼선동 2가 389번지로 바뀌었다. 이후 학원 발전 장기 계획에 의거 한성 대학교와의 교사(校舍) 교체로 1986년 7 월 현재의 위치인 삼선동 2가 392의 2번지로 이전해 왔다.

한성여자중·고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성북(城北)지역은 옛부터 서울의 성(城) 외 지 역으로 조선 태조(太패) 5 년 (1396 년) 한성부(漢城府)내 통부 숭인방(뿔仁防) . 인창방(仁昌행)에 소속되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조선 시대의 한성부 즉, 서울이라 하면 도성(都城)의 4대문안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조선 시대의 행정 구역이 도성 밖 5 리 내지 10리까지를 서울로 알아 이를 성저(城底)10리라고 일컬었다. 또 4산 금표(四山禁標)란 지도에도 서울의 범위를 동쪽은 중량천, 남쪽은 한강, 북쪽은 북한산 및 수유리 일대로까지 정한 것을 보면 성북 전역

은 옛부터 서울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융희(隆熙) 4년(1910년), 일제가 우리 나라를 강점하자 곧 이듬해 종래의 한성부를 경성부(京城府)로 고치면서 지역도 축소시켜 버렸다. 이때 서울의 많은 지역이 경기도로 격하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는데 성북 지역도 동대문, 도봉 등 많은 지역과 함께 수십 년간 서울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그후 20년이 지난 1936년 4월 일제는 조선 총독부령 제 8호로 경성부를 다시 확장함으로써 서울의 성외 지역 중 경기도 고양군 등 일부 지역이 서울로 편입되었는데 이때 경성부로 편입된 성북 지역은 안암리, 성북리, 돈암리, 신설리(보문동 포함)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또 1943년 4월 동대문구가 새로 설치되면서 돈암리, 안암리, 성북리, 종암리도 이 동대문구에 속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일제는 이렇게 새로 편입된 동리 명을 종래의 우리 고유 마을 명칭인 리(필)가 아닌 일제식명칭인 정(lUT)으로 바꾸어 쓰게 하였다. 그러다가 광복이 되자 1946년

10월에 이를 폐지하고 동<11폐)으로 정하였다. 그후 1949년 8월 13일 서울시는 행정 구역을 확장 개편하면서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의 새로 편입된 지역과 동대문구의 일부 지역을 합해서 새로이 성북구를 설치하였는데 ‘성북’이라는 명칭은 이 지역이 대체로 서울의 도성 북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성북구는 위치적으로 북한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데 옛부터 산수가 아름다워 자연을 즐기려는 많은 도성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어지질 않았다. 조선조의 태조도 자신의 수능(파 俊)을 찾으러 다니다가 안암동에 이르러 산수가 너무 이-름다워 그곳에 능지를 정하려고 하다가 자신의 사랑하는 왕비 신덕(패1\ 1經) 왕후가 죽자 그곳에 묘를 정하려고 했을 정도였다 이렇게 성북은 옛부터 지연의 아름다움이 극치(따겠)를 이룬 곳이었다.

현재 우리 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성북구 삼선동은 혜화문[파化!’ 1'] :

속칭 동소문(냈小!꾀)] 밖의 평평한 들판인 삼선평(뜨끼IJI 따)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으로 오늘날의 동소문동, 동선동, 삼선동 일대 를 말한다. 원래 삼선평이란 이름은 삼선통 남쪽의 옥녀봉(玉女11댄 ;현재 낙산 정상)에서 하늘 에서 내려온 세 신선이 옥녀와 더불어 놀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전해지는데 삼선이랑 지명으로 보아 이곳에서 회랑(花파1:1)들이 심신 단련한 곳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는 우리 나라 지명에서 선(仙)자가 있으면 대부분 화랑과 관련이 있고 통일 신라때 화랑도를 국선도( 段네 11 째)라 칭하였기 때문이다. 한편 이 삼선평은 평평하고 넓어서 대한 제국 시대까지 훈련장(리11 縣쩌)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1907년 국운이 쓰러져가던 시절 미국에서 돌아와 신민회(新닷會)라는 비밀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한 도산 안창호(安됨핍) 선생이 이곳 삼선평에서 대중연설회를 개최한 일로도 유명한 곳이다.

이곳 성북구에는 혜화문을 비롯해서 성락원, 선잠단지, 숙정문, 심

우장, 돈암장, 서울 성곽, 삼군부 총무당, 정릉, 북한산성 등등 수많은 명소와 유적 유물이 있어 민족정기(民族精氣)가 흠빽 서린 우리 조상들의 우국충정(憂國忠情)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처럼 역사적 서기(瑞氣)가 깃든 곳에 설립자 우촌 선생은 배움의 전당을 건립하여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민족혼(民族塊)과 얼을 심는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다시는 이 땅에 침략의 그림자가 드리 우 지 않도록 해야 되 겠 다고 결심했다. 더구나 이처럼 풍광이 수려하고 역사적 숨결이 서린 곳에 후세들의 교육을 위한 교육장(敎育場)이 희소했고 가난과 일제하의 억압적인 생활로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했던 많은 지역민들이 오래 전부터 학교의 설립을 갈망하고 고대하고 있었다. 이에 우촌 선생은 서울 성곽을 뒤로하고 북한산을 바라보며 아담한 자태로 앉

아 있는 낙산 중턱에 한성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성북 지역의 유일한 배움터를 마련함으로써 온 지역민의 뜨거운 찬사를 받게 됨은 물론이고 민족 의식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 새나라 건설에 주역이 될 훌륭한 현모양처(賢母良쫓)를 육성하는 여성 교육의 산실이 탄생되었다는 점에서 정부에서도 환영의 뜻을 나타내 주었다.

제3절 교육 환경 조성과 학칙 제정

1) 교사(校舍) 증축과 주변 정비

교육구국(敎育救國)의 신념 에 불타던 우촌 선생 이 1945년 9월 25일 구 ‘경성여자기예학교’를 인수하여 그해 10월 5일 ‘한성고등여학교’로 개교를 할 당시에는 학교 교사(校舍)가 단층으로 연건평 면적이 373평이었고 정지(빨 地)가 되지 않은 운동장이나 잘 가꾸어지지 않은 학교

림 등을 모두 합해서 총 면적이 2,290평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운동장은 제반 학교 행사나 체육 등의 학습 활동을 하기에는 매우 부적합했고 교사 주변의 화단 등 모든 교육 환경이 적극적인 교육 활동을 전개하기에는 매우 빈약하고 미비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조국의 광복을 맞이한 직후라서 우리 국민들의 힘으로 건립 개교한 학교가 희소한 탓에 국민들이나 정부를 비롯한 각계에서 우리 ‘한성여자중고등학교’에 대한 관심도가 매우 높아 학교의 환경을 조성하는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듬해인 1946년 4월 5일에 정부의 방침에 따라 정부의 각계 요인들, 학부모, 학생, 교직원들이 모두 함께 모여 본교의 학교림에서 전국 해방 기념 식수를 거행한 사실만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1946년 4월 9일에 한성여자급중학교 6년제 12학급을 인가를 받았고 곧 바로 7월 5일 ‘한성여자중학교 (6 년제)’로 학교명(젠淡名)을 변경한 후 줄 곧 학교 체제 정비와 환경 조성에 주

력해 온 우촌 선생의 피땀어린 정성으로 1949년 12월 5일 드디어 본관을 2층으로 증축하여 보통 교실 7개, 강당(도합 건평 360평)을 준공하기에 이르렀다. 참으로 눈물겨운 열성으로 얻은 결과로 정부 당국이나사회 각계의 감격 어린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로써 교육 활동에 필요한 기본적인 외형적 시설 을 정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체육 학습이나 각종 행사 교육 등을 위한 운동장을 정지(經地)해야 하고 여기에 따른 철봉, 멀리뛰기 모래판, 농구대, 배구대, 띔틀 등등 체육 시설을 구비 확보하는 일들을 늦출 수가 없었다. 교사 준공의 환희도 잠깐 앞서 열거한 일들을 완수하기에 온갖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집념의 의지를 지닌 우촌 선생은 숱한 어려움을 감내 하면서 노력에 노력을 경주한 결과 학교림 주변에도 철조망을 둘러 명확한 교지를 확보하게 되었고 아울러 운동장을 말끔하게 정지하여 철봉 등을 비롯한 각종

체육 교육을 위한 시설과 기구들이 고루 갖추어짐으로써 체육 학습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각종 행사 교육의 활성화를 이루게 된 것이다. 명실 상부한 교육의 장(場)으로써 그 기능을 다하게 된 것이다. 정말로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2) 학칙 제정

개교 당시에는 학칙을 제정할 겨를이 없었고 1946년 7월 5 일 ‘한성여자중학교’로 교명 이 변경, 1951 년 8월 11 일 ‘한성여자중고등학교’각 6학급 학생수 300명 인가, 1952 년 5월 31 일 중·고 분리 설치 등 다양한 제도 변화 등으로 학교 체제가 제대로 확립되기는 어려웠다. 잠정적

으로 학칙이 제정되어 있었다고 추정은 되지만 이것 마져 8.15광복 후의 혼란기에 접어들어 좌익 불순분자들에 의해 제반 서류나 학교 비품 등이 탈취, 파괴되는 과정에서 훼손 분실되었고 이후 재정비가 될 겨를도 없이 또다시 6 .25 의 전쟁에 휩싸여서 그나마 남아 있던 사무 용품이나 학습 교자재 마져도 분실 또는 소실되었기 때문에 이를 참고로 할 수 없음을 무척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1953년 9월 1일 부산에서 분교가 서울 본교에 통합되어 명실 상부한 학교 체제가 정비되기 시작한 이후에 마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학칙을 여기에 기록해 본다

학칙

제 1 장 총칙

제 1 조 (목적) 본교는 교육법에 의거 고등 보통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 2 조 (명칭) 본교는 한성여자중고등학교라 한다.

제 3 조 (위치) 본교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 2가 389번지에 둔다.

제 2 장 수업 연한 및 업학 자격

제 4 조 (수업 연한) 본교는 수엽 연한을 3년으로 한다.

제 5 조 (입학자격) 본교 제 1학년에 입학할 수 있는 자는 다음 각 호 1 에 해당하는 자로 한다.

< 중학교 >

1. 국민학교 제 6학년을 졸업한 자

2. 문교부장관이 지정하는 학교를 졸업한 자

3. 외국에서 6년 이상의 초등 교육을 받은 자.

< 고등학교 >

1. 중학교를 졸업한 자.

2. 문교부장관이 지정하는 학교를 졸업한 자.

3. 외국에서 9년 이상의 학교 교육 과정을 수료한 자

4. 위와 동등한 학력이 있다고 인정된 자

제 3 장 학급수 및 학생 정원

제 6 조 (학급수) 학급수는 각 학년 2학급씩 6학급으로 한다.

제 7 조 (학급정 원) 본교의 학생 정 원은 각 학급당 60 명 씩 총360명으로 한다.

제 4 장 교과과정, 수업일수 및 시험

제 8 조 (교육과정) 각 학년의 교육 과정은 문교부장관이 정하는 바에 의한다.

제 9 조 (수업일수) 수업일수는 매학년 230일 이상으로 한다.

제 10 조 (고사)

1. 정기고사는 중간고사와 학기말고사로 구분하여 실시함을 원

칙으로 한다.

2. 학교장은 필요에 따라 임시고사를 시행할 수 있다.

제 5 장 학년 · 학기 및 휴업일

제 11 조 (학기) 학년은 이를 2학기로 나눈다. 제 1 학기는 4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제 2학기는 10월 1일부터 다음해 3월 31일 까지 한다.

제 12 조 (휴업일)

l. 휴업일은 다음과 같다.

(1) 국경일 (2) 공휴일 (3) 개교기념일 (10월 5일)

(4) 하기휴가 - 7월 21 일부터 8월 31일까지

(5) 동기휴가 - 12월 25일부터 다음해 1월 31일까지

(6) 학년말 휴가 - 3월 25일부터 3월 31일 까지

2. 제 1 항의 (4) 및 (5) 의 휴가 기간은 필요한 경우 제 9조의 수

업일수를 이수하는 범위 내에서 학교장이 조절할 수 있다.

3. 제 1 항의 각호외 비상, 재변 기타 급박한 사정이 발생한 경우 임시 휴업을 할 수 있다.

4 휴업일 이라도 필요한 때에는 실습을 과할 수 있다.

제 6 장 수료 및 졸업

제 13 조 (수료 및 졸업)

1. 각 학년의 과정 수료 또는 졸업을 인정함에는 출석 일수와 평상시의 성적을 사정하여 정한다.

2. 각 학년의 수료에 필요한 출석 일수는 수업일수의 % 이상으로 한다.

제 14 조 (졸업장) 학교장은 학교의 전 과정을 수료하였다고 인정한 자에게는 졸업을 인정하고 졸업장을 수여한다.

제 7 장 입학 · 전입학 휴학 · 편입학 · 재입학

제 15 조 (입 학시 기) 입 학시 기는 학년초 30일 이내로 한다.

제 16 조 (입학방법) 입학 방법에 관해서는 별표 1의 기준에 의거학교별로 정한다.

제 17 조 (전, 편입학) 전, 편입학에 관해서는 별표 1의 기준에 의거학교별로 정한다.

제 18 조 (재입학) 본교를 자퇴한 지-로서 다시 입학을 지원하는 자가 있을 때에는 결원이 있을 경우에 한하여 동일 학년 이하의 학년에 학교장이 입학을 허가할 수 있다.

제 19 조 (입학서류) 본교에 입학하려는 자는 따로이 정한 절차에 의하여 입학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여야 한다.

제 20 조 (전, 편입학 서류) 본교에 전, 편 입학하려는 자는 입학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하여야 한다.

제 21 조 (서약서) 입학(전, 편입학 포함)을 허가 받은 자는 따로

정하는 절차에 의해 보증인 연서의 서약서를 제출 하여야 한다.

제 22 조 (보증인)

1. 보증인은 학생의 친권자 또는 후견인으로 한다.

2. 제 1 항의 보증인이 학교 소재지에 부재한 경우에는 달리 본교 소재지에 주소를 가지고 독립의 생계를 영위하는 성년자 중 에서 부 보증인을 정하여야 한다.

3. 보증인 부보증인이 그 신상에 이동이 생길 때 또는 주소를 변경할 때에 즉시 학교장에게 신고하여야 한다

지11 8 징- 휴학 · 퇴학 및 상벌

제 23 조 (휴학)

1. 질병 기타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휴학하려는 자는 그 사유서에 내용을 증명할 만한 증빙서류를 첨부하여 보증인

연서로서 학교장에게 출원해야 한다.

2. 휴학을 허가하는 기간은 매회 마다 3개월 이상 1 년 이하로 하되 3회 이상 거듭할 수 없다

제 24 조 (자퇴) 스스로 퇴학(타교 전학을 포함)하고자 하는 자는 보증인 연서로서 그 사유를 제출하여 학교장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 25 조 (표창) 학교장은 품행 이 방정 하고 학업 이 우수한 자.근면성이 뛰어난 자, 선행이 있어 타인의 모범이 되는 자 또는 공로가 있는 자에 대하여 표창할 수 있다.

제 26 조 (징계)

1 학교장이 교육상 필요가 있다고 인정할 때에는 학생에게 징

계를 가할 수 있다.

2. 징계는 그 정도에 따라 근신, 정학 및 퇴학으로 한다.

제 27 조 (퇴학처분) 학생이 다음 각호의 1 에 해당할 때에는 퇴학을 명할 수 있다

1. 성행이 불량하고 개전의 가망이 없다고 인정한 자.

2. 학력이 열등하여 학업 이수의 가망이 없다고 인정한 자.

3 정당한 사유 없이 결석이 잦은 자

4. 정치에 관여하는 행위를 하거나 학생 본분에 어긋나는 집단적 행동으로 수업을 방해한 자.

제 9 장 입학금 및 수업료

제 28 조 (정수금) 입학금 및 수업료의 징수에 관하여는 문교부령및 교육 규칙이 정하는 바에 의한다

제 29 조 (감변기준) 학년말 또는 학기말 평균 성적이 당해학년 또는 학급의 상위 5% 이내인 자로서 경제적 사정이 곤란한 자에게는 수업료를 면제하거나 감액할 수 있다.

제 30 조 (체납자 조치) 학교장은 수업료를 제납한 자에게는 출석을 정지하거나 퇴학을 명할 수 있다

부칙

1. 이 학칙은 공포한 날로부터 시행한다.(1 954 .4. )

2. 이 학칙은 시행상 필요한 세칙은 학교장이 이를 정한다.

3) 학도 호국단 결성

조국의 광복과 동시에 개교한 본교는 민주주의 교육에 입각해 ‘한국정신(꾀|或1*폐111) ’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한다는 건학 이념에 따라 학생들로 하여금 자치 능력을 길러서 장차 민주적 사회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목표를 지니고 었었지만 국가는 그 체제가 온전하게 정립되지 못해 미군정( 핏 ][1 政) 하에 있었고 사회는 이-직도 질서가 잡히지 못해

어수선한 분위기이었다. 그러나 1948 년 8 월 15 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펌에 따라 취약했던 국가와 사회의 제반 조직이나 제도의 정비로 새로운 국가 건설을 하는 입장에서 학생들의 조직도 체계적으로 강화해야 힐-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초대 문교부 장관인 안호상 박사는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로 하여금 배우면서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기틀을 미-련할 것을 의무화하였다. 문교부는 단체 훈련을 통하여 신체를 단런하고 정신을 연마하여 학원 내에서의 좌익 계열 책동을 분쇄하며 또 민족 의식을 고창함으로써 애국적 단결심을 함양해야 된다는 취지에서 1948 년 12월 중등학교 이상의 각급 학교에 학도 호국단을 조직하도록 시달하였다. 그런데 이 학도호국단 조직에 관한 정부의 방침은 오히려 국민들의 강력한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그것은 일제의 군국주의 입체에서 벗어난지도 얼마 되지 않은데 이 학도호국단 조직이 군국주의적 인상을 주는 한편 민주주의적 교육에도 역행하는 제도라는 이

유에서였다. 그러나 정부는 이에 개의치 않고 각 중등학교의 학생 간부 2, 400여명을 선발 ‘중앙 학도 훈련소’에 입소시켜 단기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고 1949년 1 월 23 일에는 ‘학도호국단 조직 운영’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각 중등학교는 1949년 2월 중에 학도호국단 결성을 완료하고 4월 22 일에 중앙 학도호국단의 결성을 보게 되었고 동시에 문교부 내에 학도호국단 사무국이 설치되었다. 이어서 동년 9월 28 일에는 대통령령 제 186호로 ‘대한민국 학도호국단 규정’이 공포되었다.

이 학도호국단 구성은 그 뜻하는 바 전시체제를 염두에 두고 무엇보다도 정신 무장에 역점을 두어 학풍쇄신(學風剛新)과 전력배양(戰力培養)으로 ‘배우면서 지킨다’라는 호국 이념을 함양시켰다. 이 학도호국단이 결성된지 반년이 되지도 않아서 우리 민족사에 그 유래가 없는

동족 상잔의 6.25 동란이 일어나 엄청난 희생과 고난을 겪게 되었는데 이때 이 학도 호국단을 바탕으로 학도 의용대가 편성되어 참전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때부터 학도 호국단 편제가 거의 군대식으로 조직, 운영되었는데 간부들의 명칭도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분대장 등의 군대식 명칭을 사용하였고 교과 과정에 교련 과목이 있어 서 군인 출신의 교련 교사가 학교에 근무하면서 군대식 제식 훈련과 사열과 분열 퉁을 시행하였다. 또 당시에는 국가적 행사가 자주 있었는데 이 때마다 동원되어서 밴드를 앞세워 시가 행진을 했고 학도 호국 단가를 우렁차게 불렀다. 당시의 학도호국단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태평양 큰 물 기슭 대륙 동녘에 우뚝 솟은 백두산 민족의 정기 화려한 금수 강산 이루었으니 하늘이 주신 나라 지켜 나가자 우리들은 삼천만 민족의 태양 피 끓는 호국단 학도 호국단

학도호국단기

본교에서도 국가의 방침에 순응하여 1949 년 2월에 학도 호국단이 조직 결성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도 호국단이 진정한 의미의 학도호국단으로 명실 상부한 학생 자치단체가 되지못하고 정부의 주도하에 활동하는 상의하달(J二침 下迷)식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힌 체제는 지-유딩- 정권 말기에 정치적으로 악용되는 일이 허다하다는 정부의 판단과 국민 여론에 밀려 제 2 공화국 시절(1 960년)에 폐지되었다.

러나 1961 년 5.16 군사 혁명에 따라 탄생된 제 3공화국 시절(1 963 년)에 다시 부활되어 시행되기도 했지만 1982년에 또다시 폐지되었다.

제2장 격동기(1950-1954)

제1절 6.25 전쟁과 시련

1) 6.25의 소용돌이

우리의 5 천년 역사에 그 유래가 없는 통족 상잔이라는 뼈아픈 상처를 안겨 준 6 . 25 의 돌발적인 북한 남침은 어려운 역경을 헤쳐 가며 그 기초를 다져 가던 ‘한성여자중고등학교’에도 밀어 닥쳤다. 극단적인 좌익의 무리들은 오직 교육만을 천직으로 여기고 학교 운영에만 몰두

중이던 설립자 겸 학교장인 우촌 선생을 ‘반동분자’라는 낙인을 찍어 위해(危害)하기에 이르렀다. 소위 그들의 내무서라는 곳으로 연행한 후인민 공화국의 적색 사상에 따라 학생들을 교육하여 줄 것을 갖가지 감언이설로 제안하였다. 그러나 우촌 선생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한 태도와 분노에 찬 음성으로 소리치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의 근본 사상이 너희들과 틀림은 물론이고 또 다른 변으로 보아서도 이제까지 학생들 앞에서 애국 정신을 고취하며 우리 대한민국을 사랑하자고 외치던 내가 이제 와서 소위 인민공화국이니, 또 괴뢰 정치에 충성을 다하자는 그러한 이중 교육을 하라는 말인가? 나는 양심에 비추어서 그렇게 는 할 수가 없다. 내 한 목숨을 건지겠다고 나의 정신을 꺾을 수는 없는 일이니, 너희들하고 싶은 대로 나의 생사를 맡기겠다.

온갖 수단으로 유혹괴 공갈 협박을 일삼던 흉악하고 무도한 악질적인 좌익 분자라도 우촌 선생의 단호한 태도에는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에 좌익의 무리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 우촌 선생 앞에 나서더니

김의형 교장 선생님이시죠?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교장 선생님, 저는 전에 선생님 학교의 수풀 울타리 가시칠망 공사 청부를 맡았던 사람입니다. 그때 제기- 처했던 곤경을 아시고 은혜를 베풀어 살펴주신 일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우촌 선생의 그 두터운 은혜를 잊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 당시에 는 좌익 분자들이 체포해 온 사람들을 성분 판단 기준에 따라 A, B, C의 세 급으로 분류하였는데 내무서 간부로 있던 그 청부업자는 A급

(총살형으로 분류된 반동분자)으로 분류된 우촌 선생을 B급으로 고쳐놓고,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면서 자수서(딩 首헬)를 써서 제출하면 석방해 준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자수서 내용 가운데는 “인민 공화국에 따른다”로 쓰여져 있었다. 우촌 선생은 그 서약 내용을 과감하게 물리치고 오히려 본래의 주장대로 “~대한민국 정부의 교육 정신과 그 방침에 의해 교육하였다 라고 고쳐 써서 내놓았다. 이것을 본 내무서원들은 펄쩍뛰며 노발 대발 하였으나 우촌 선행의 철벽같은 고집과 의지에 란복하고 곧 석방해 주었다. 이 나라 교육의 앞길이 쉽게 허물어질 일이 아니었고, 또한 ‘한성여자중고등학교’의 운명 또한 그렇했다.

2) 9. 28 수복과 복교

맨 걸음으로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면서 고향으로 피난은 왔지만 온 마음과 온몸을 다바쳐 키어 온 학교를 잊을 수가 없었고, 자신의 생명

과도 같은 학교를 도적 당한 허탈감 속에서도 자유와 정의가 승리하여 멀지 않아 학교를 되찾을 수 있다는 굳은 신념으로 그날이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우촌 선생의 이 기대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1950년 9월 15일 하오 6시를 기해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의 지휘 아래 감행된 인천 상륙 작전은 2시간만에 월미도를 탈환하고 파죽지세로 인민군을 쫓아 전진하여 9월 17일에는 김포를 탈환하고 9월 19일에는 서울 한강을 도강, 9월 26일에 는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 게양 등을 수행한 후 9월 28일에 서울을 완전 탈환하였다. 적치 3개월 동안 숨어 있던 시민들이 드디어 거리를 쏟아져 나와 서울은 다시 활기를 뛰기 시작했다. 서울이 탈환되었다는 희소식에 접한 우촌 선생은 감격의 눈물 속에서 “대한민국 만세” “한성여자중고등학교 만세”를 몇 번이고 외쳤고

온 마을을 어린애처럼 껑충껑충 뛰어다니면서 감격의 기쁨을 통네 어른들에게 전하는 등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했다 함께 고향에 은둔하고 있었던 직원 몇 사람과 논의한 후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등에다 각각 쌀 한말씩을 나누어 진 채 서울길에 올랐다. 상경 길에서도 예기치 못했던 숱한 어려움과 생사에 관련된 고비들이 많았지만 곤욕과 고역을 극복하고 어렵게 서울에 도착하였다.

구사일생으로 서울에 올라온 우촌 선생과 그 일행은 학교 상태가 궁금하여 초조한 마음을 안고 한달음에 삼선동 학교로 달려갔다. 북한 인민군들이 ‘한성여자중고등학교’의 교사 안팎을 온통 수라장으로 만들어 놓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그간 우촌 선생의 피땀어린 열성에 하늘도 감복한 탓인지 “지성이면 감천” 이라는 말처럼 학교 건물만은 옛모습 그대로 이었다. 이를 확인한 우촌 선생과 그 일행은 감격의 눈물과 함께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9.28 수복으로 다시 학교로 되돌아온 피난 가지 못해 시내에 잔류한 학생들도 우촌 선생의 건재함을 보고는 한결같이 재회의 기쁨과 솟구치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여 서로를 부둥

켜안고 소리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9.28 수복의 감격을 가슴에 지닌 채 시내 잔류 학생들을 불러 모아 10월 1 일 다시 학교 수업을 시작하게 된 본교는 우촌 선생 이하 전 교직원과 학생들이 매일 쓸고 닦아 가꾼 보람으로 차츰 전쟁의 상흔을 씻어 가고 있었고 일반 시민들도 아군의 진격 보도를 접하면서 장차 통일될 조국의 앞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이렇듯 다시금 뿌듯한 학교 생활을 계속하게 된 우촌 선생과 교직원들은 새로운 기분으로 보람찬 교육의 길을 걸어가는 데 쉬임 없는 나날을 보냈고 학생들 역시 희망에 가득 찬 내일의 꿈을 가꾸기 위해 그들의 학업에 열심으로 몰두했으며 학부모님을 비롯한 주위의 많은 분들과 시민들도 우촌 선생의 교육을 향한 일편단심의 열정에 아낌없는 찬사와 격려의 박수를 보내 주었다.

한편 전쟁의 수렁 속에서 풍전등화와 같은 조국의 운명 앞에서는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조국을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불타고

있었다. 건국도상에 있던 조국이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인하여 100만 인명의 희생과 400 억의 자산을 잃는 참상을 빚어내게 되었고, 수 십만의 이 나라 청년과 유엔군으로 파병되어 참전한 수만의 자유 우방의 청년들이 희생되었다. 당시 국군의 병력은 15만에 미치지 못했 고, 병력의 수로나 군수 장비에 있어서 북한 공산군에 비해 열세에 있었기 때문에 후퇴에 후퇴를 거둡한 국군의 사기는 극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이에 1950년 6월 28 일, 서울이 북한 괴뢰군 수중에 들어가자 피난길에 나섰던 서울 시내 각 대학 학도 호국단 간부 200 여명이 수원에서 회동하고 비상 학도대(非常學徒隊)를 조직하여 6월 29일부터 처음으로 종군(從펀)을 하게 되니 이것이 학도 의용군의 시초였다. 이 시-실이 전국의 방방곡곡에 전해지자 의분(義熾)에 찬 애국 학도의 가슴마다 메아리쳐 급기야는 100만 학도들의 궐기를 촉구하였고, 중학교 2,3 학년의 어린 학생들은 물론 여학생까지 상당수 학생들이 학

도 의용군에 참가하였다. 정부는 이러한 온 국민들의 성원을 입어 정식으로 학도 의용대를 조직하기로 방침을 세워 각 학교에 시달했다. 정부는 학생들에게 단기적인 군사 교육을 시켜 군의 각 부대에 배치하거나 각 정부 기관 및 각 시 · 도의 행정 사무를 보좌하는 일에 임하도록 한다는 방침이었다. 각 시 · 도에서는 운집해 오는 자원( 딩願) 학생들로 학도 의용대 지부를 결성하여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였고 희망에 따라서는 자기가 원하는 지방에 가서 근무하기도 했다. 유엔군과 국군이 승승장구 파죽지세로 북진하고 있을 때 우리 ‘한성여자중고등학교’에서도 국방부로부터 학도 의용대에 참가할 학생의 선발 의뢰가 왔다. 상급생들로 약 20 여명의 모범 학생을 엄선하였고 이들은 타교의 여학생들과 함께 1950년 10월 말경 지금의 서울 중구청 자리 에서

입대 선서식을 가진 후 곧 참전하여 조국의 위기를 구하는데 꽃다운 청춘을 바치기도 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중공군의 참전은 통일을 향한 우리의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 가고 말았다. 1950년 12월 4 일, 평양에 진격하여 주둔하게 된 모든 군기관, 행정기관 및 민간 단체는 작전상 즉시 철수하라는 정부의 명령이 하달되었고 이 내용이 각 도하(都下) 신문에 게재되자 서울 시민은 다시 술렁이며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중공군을 포함한 공산군의 대규모 신정 공세로 유엔군과 아군의 전세가 불리해 지자 정부는 1951년 1월 2일 서울에 대하여 소개령을 내렸고 1월 4일을 기해 정부의 모든 기관과 시민이 다시 고달픈 피난길에 나서게 되었다. 이것이 1.4 후퇴이다.

3) 1.4 후퇴 와 부산 분교

유엔군 사령관인 맥아더 원수의 9월 15 일 인천 상륙 작전에 이어 9

월 28 일 서울 수복을 성공리에 마친 유엔군과 국군이 10월에는 평양을 접수하고 더욱 북진을 계속하여 마침 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하는 등, 승승장구의 기쁨 속에 이어진 보람찬 학교생활도 잠깐이었고, 예기치 못했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군이 다시 남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이에 우리 한성여자중고등학교도 다시 휴교에 들어가 학교의 문은 닫혀지고 우촌 선생은 다시 한번 학교를 비워 둔 채로 서 울 시민과 함께 납하하는 피난민 대열에 나서게 되었으니 그 분한 마음은 가눌 길이 없었다. 다시 고향으로 되돌이-온 우촌 선생은 비감한 마음을 억제하지 못한 채 한시도 편안한 시간을 보내지 못하고 상심에 상심 을 거둡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부산을 임시 수도로 지정한 뒤 정부의 모든 기관이 부산으로 옮기게 되자 우촌 선생은 학교에 대한 수습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모색할 목적을 지닌 채 고향을 등지고 단신으로 일단 부산을 향해 떠났다. 전란 중이라 이용할 교통 수단이

여의치 않아서 그 먼 여정을 거의 걷다시피 하여 부산에 당도한 우촌 선생은 서 울 에서 헤어졌던 서울 시내 학교의 학교장들을 만날 수 있었고, 곧 이 들 과 함께 문교부 당국자들과 서울시 교육 당국자들을 방문하여 시 국을 걱정하면서 향후 정세에 대한 논의를 했다. 특히 우촌 선생 은 적치하에 있는 서울의 학교와 피난지의 분교 설립 을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스러웠다. 그래서 그는 교육계의 원로이자 지난날 동덕여자 중고 등 학교 에 재직시 모시고 있던 조동식 교장을 찾아갔다. 조동식 교장의 의견은 임시 분교를 설립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우촌 선생은 한성여자중고등학교와 동덕여자중고등학교를 임시로 합병하여 분교를 설치하지-는 의견을 제시한 후 1951 년 2월초 서울로 올라왔다.

한편 이즈음 유엔 총회에서는 중공을 침략자로 결의하고 한반도에서 종공군이 즉각적인 철수를 하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이 이에 불응하자 유엔군의 반격이 강화되었다. 2월 10일에는 인천과 김포

를 탈환하고 3월 14일에는 서울을 재탈환하였으며 3월 24일에는 38선 돌파에 성공했다. 그런데도 9.28서울 수복 당시의 조급하였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조심성 때문에 정부의 여러 기관들은 서울로 환도하지 않고 임시 수도인 부산에 그냥 남아 있었다. 모든 국가적 행정을 모두 부산에서 처리하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천리 타향으로 유랑의 신세를 겪어야만 했던 서울 시민들은 하루 빨리 서울로의 환도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정치적 파벌 논쟁으로 국가나 사회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여러 가지 혼란을 가져와 서울 환도로의 기미는 좀체 보이지 않았다.

한편 전시 상황 속에서 형편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본교에서는 1951년 3월 12일 뜻깊은 제1회 졸업식을 가졌었다 이미 1950년 겨울

로 접어들면서 졸업을 앞둔 학생들은 슬픔의 그림자가 한발 한발 다가 오는 느낌 속에서 지냈다 이제 해가 바뀌고 나면 곧 정들었던 낙산의 의화(義花) 동산을 떠나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 학생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서글픈 일로 매우 심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해방 이후의 좌 ·우익 사상 대립에 따른 혼란과 6.25 의 동족상잔과 같은 쓰라린 소용돌이 속에서 숱한 어려움을 헤쳐 나와 이제 ‘한성’의 산 증인으로 또는 ‘한성’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그들이 애써 갈고 닦아이룩한 이 ‘한성’이 민족과 국가, 사회가 요구하는 훌륭한 영재들을 많이 배출하는 산실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과 애교심을 불태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성’의 첫 딸로써 소박하고 정겨운 가족적 분위기 속에서 착실한 학교 생활을 해 온 이들이었기에 정작 졸업을 하던 졸업식장에서는 졸업생 대표의 울먹이는 답사를 계기로 온통 울음바다를 이루기도 하였다. 떠나는 졸업생들의 마음 못지 않게 귀엽고 자랑스러운 ‘한성’의 첫딸들을 험난한 세파 속으로 내보내는 우촌 선생과 교직원 일동도 다정

했던 이들과 헤어진다는 서운함에 눈물이 고였다. 이런 정감 어린 졸업식의 정경은 점차 물질 만능 주의로 치닫고 있는 시류에 휩쓸려 오늘의 시대에는 찾아볼 수 없는 정경으로 되어 버렸다. 한 회에 졸업하는 학생 수가 수백 명에 이르는 커다란 학교로 성장한 지금의 학교에서는 그런 정감 어린 분위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끈끈하고 다정다감한 사제 관계로 맺어진 당시의 분위기를 우리는 다시 한번 되살려 볼 필요가 있다.

이즈음 1951 년 5 월 20 일을 기하여 부산에서 ‘한성여자중고등학교’와 ‘동덕여자중고등학교’가 합병해 분교를 설치하고 학생 교육을 시작했지만 고향에 내려와 잠깐 쉬고 있던 우촌 선생은 그가 생명같이 사랑했던 서울의 학교가 궁금하여 그 초조감을 이기지 못하고 사방 팔방으로 주선을 하여 한강을 넘어도 좋다는 증명서인 이른바 ‘한강 도강증’ 을 얻어서 함께 머무르고 있던 여러 교직원과 같이 위험을 무릅

쓰고 서울로 향하였다. 지난 ’ 50년 여름 때처럼 쌀을 등에 지고 맨 걸음으로 천신만고의 고통을 다 겪은 후 간신히 서울에 당도하였다. 우촌 선생과 그 일행은 초조한 마음을 안고 한달음에 학교로 달려갔다. 가보니 학교 건물은 텅 빈 상태로 조금도 파손되지 아니한 채 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거의 반년만에 보는 학교의 모습 앞에 우촌 선생의 감회는 형언할 수 없이 벅차 올랐다. 생각해 보니 시내에 있는 대부분의 학교 교사는 유엔군이나 국군이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런대로 교편물이나 학습에 필요한 교재, 책상과 의자 등의 학교 비품들이 거의 대부분 남아 있었지만 우리 ‘한성여자중고등학교’만은 텅빈 상태로 그냥 놓아두었던 까닭에 교실의 비품들은 물론 책상과 의자가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고, 애써 마련했던 교편물이며, 학습 교재 교구들 은 그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학교 건물만이라도 파손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에 만족을 하면서 내일의 교

육을 위해 학습 환경을 차근차근하게 정리해 나갔다. 그러면서 때때로 지나온 순간들을 되뇌이면서 어떠한 역경이 닥치더라도 이를 극복하고 학교 설립 당시의 건학 정신을 꼭 실현하리라 다짐했다.

제 2 절 성북훈육소 교육과 복교

1) 성북훈육소 교육

1951 년 2월 초 부산 분교 문제를 상의하고 서울에 올라온 우촌 선생은 앞으로의 방책을 협의하기 위해 당시 서울에 들어와 있던 일부

서울시 교육 당국자를 찾아갔다. 그렇지 않아도 피난을 못해 시내에 잔류하고 있던 중고퉁학교 학생들을 위한 교육을 하루 빨리 실시해야 하고 이를 위해 교육 시설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대두되고 있었던 터라 이에 시교육 당국은 비어 있던 ‘한성여자중고등학교’를 잔류 학생을 위한 교육 장소로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우촌 선생도 그렇게 하고 싶었던 차에 이런 제안을 받고 교사의 사용을 흔쾌히 승낙을 한 후 곧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교육을 위한 제반의 준비를 갖추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진정한 나라의 자립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이 가장 시급함을 항상 역설해 오던 우촌 선생의 이 때 심정은 다시 교육을 실시할 수 있다는 심정으로 가슴이 벅쳤다. 더구나 이러한 전쟁을 당하여는 국력을 키워야 하고 침략의 무리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어느 것보다도 교육이 앞서야 되며 전란의 한 가운데 있는 상황이라도 교육을 시켜야만 정신적 힘이 배양될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뿐만 아니라 살별한 분위기에 물들기 쉬운 후학들을 바르게 인도하고 올바른 사회인으로 순화시킬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오

로지 교육밖에 없다고 생각한 우촌 선생은 나라가 역경에 처할수록 더욱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서울시 교육 당국자는 서울 시내를 동서남북 네 지역으로 구분하고 각 지역마다 훈육소를 하나씩 설치하여 피난길에 나서지 않고 서울 시내에 남아 있던 남녀 중고등 학생들을 모아 그 동안 중지되었던 정규적인 학교 수업을 실시하게 되었는데, 1951 년 10월 l 일 ‘한성여자중고등학교’에 ‘성북훈육소’가 개설되었고 우촌 선생이 ‘성북훈육소’ 소장의 무거운 책임을 맡았다 선생의 가슴은 매우 벅갔다. 이러한 때가 오기를 그 얼마나 고대했던가? 책상과 의자도 제대로 없는 빈약한 교실이었지만, 6.25 전쟁 발발 이후 일년도 넘게 학업에 굶주려 왔던 학생들을 온갖 열의와 성의로써 지도를 하게 되나 우촌 선생의 집념과 그고귀한 성품에 탄복한 학생들이 우촌 선생의 지도를 받으려고 구름처럼 모여들게 되어 무려 3000여명에 이르렀고 평화로운 때보다 몇 십

배의 교육 성과가 오르는 듯하였다.

이 무렵 서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북쪽에서는 우리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 공산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치열한 반격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전쟁의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학교 생활은 매우 진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학생들은 언제, 어디에 적의 포탄이 떨어질 줄도 모르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더더욱 공부에 열중하였고 이들을 지도하는 여러 선생님들도 하나같이 전심전력을 기울여 학생들 지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같은 전시 교육 체제라도 부산에서 실시되고 있는 분교등의 교육과는 비교가 안되었고 아직 서울로의 환도가 안된 상태에서 의 학교 운영과 학생 지도에는 많은 애로가 따랐다 어쩌다가 분교 관계라던가 문교 당국과의 연락 관계로 부산에 가면 서울서 피난한 다른 교육자들이 하나같이 부산으로 내려올 것을 강권했다. 그러나 우촌 선생은 이같은 권유에 눈을 돌리지 않고 서울로의 복교를 서둘렀다.

2) 부산 분교 서울로 복교

6.25 전쟁이 발발하자 그 기능이 마비되었던 정부는 피난지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하고 점차로 조직을 정비하여 전쟁의 장기화에 대처하기 시작했다. 1951 년 2월에는 ‘전시하 교육 특별 조치 요강(戰時下敎育特別擔置要網)’을 제정 발표하여 그 동안 중단되었던 수업을 재개할 것을 시달하였다 전시 교육 체제로 전환된 전시 교육은 피난 온교사들이 모여서 개울가 혹은 산비탈 등에 천막을 치거나 아예 노천(路天)에서 교과서 없이 생활 중심의 교육으로 실시됨으로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에 문교부는 전시 생활의 지도를 위해 교과서 대신 ‘전시독본(戰時續本)’이라는 책을 발간하여 국민학교와 중학교에 제공하였는데, 전쟁 중의 교육 목적은 주로 멸공통일과 동란 이후의 국가 재건에 있었다. 1951 년 3 월 20일에는 ‘ 50년 초부터 개편이 착

수했던 학제 개편을 단행하는 교육법 개정령이 공포되어 과거의 6.4.2.4제에서 6.3.3.4제의 단선형(單線型) 학제가 수립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한성여자중고등학교’도 중 · 고 분리에 들어갔으나 실제로는 명목상의 분리에 그쳤다. 1951 년 6월에는 문교부가 “일인 일기 교육실시 요강”을 발표함으로써 체험과 근로를 통해 개인의 적성에 맞는 기술을 습득하게 하여 자주적 생활 능력을 키우는 동시에 전쟁 뒤의 복구에 역점을 두었다.

1952년 5월에는 교육제도의 자치화를 의미하는 구체적 형태로 시· 군 교육 위원회의 위원이 선출되었고 바로 다음 해인 1953년 3월에 는 휴전 협정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는 실정에서 교육 정상화를 위한 구체적인 실무 계획을 실천에 옮겨도 좋겠다는 판단 속에 문교부가 서울 성북 지역의 잔류 학생을 가르치던 공간인 성북훈육소(城北訓育所)의 해체를 결정했다. 이러한 문교부의 방침에 따라 ‘한성여자중고등학

교’에 수용되어 교육을 받던 3천여 명의 학생들도 각기 자기네의 본교로 돌아가게 되고 본교생인 ‘한성여자중고등학교’학생만을 수용하여 지도하게 되었다. 이러기를 약 4개월, 3년여에 걸친 오랜 6.25전쟁은 전선이 일진일퇴를 거룹하다가 소련의 휴전 제의로 1953 년 7월 27일휴전협정이 조인됨에 따라 매듭을 짓게 되고 부산에서 활동하던 임시정부가 서울로 환도하게 되었다. 이로써 부산에 있던 ‘한성여자중고등학교’ 분교도 9월 1 일 서울의 본교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그 이전에 학교법인이 설립되고 이제 부산의 분교가 서울 본교의 본래 터전으로 복귀하게 되어 본교생만을 모아서 명실 상부한 통합교로써 교육을 실시하게 된 우촌 선생은 이제야말로 가슴속에 항상 품고 있던 자신의 교육 이념을 한껏 펼 수가 있다는 생각으로 너무 기쁜 나머지 주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힘을 학교 교육 활동과 교육 환경 조성에 쏟았고 이

로 인하여 학교도 몰라보게 빠른 속도로 제 모습을 찾아 일취월장(1:1파까 )1건)발전되어 갔다.

제3절 재단법인 설립과 한성여중고 상징물

학교를 온전하게 건설하기 위한 우촌 선생의 피땀어린 노력은 국가와 사회의 혼란과 어려움, 그리고 전시 중임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그러나 내실적인 변에서는 나날이 충실하게 그 기반을 다져 가고 있는데 반해 아직 문교부에 정식으로 재단법인 인가 신청서를 제출하지 않은 상태였다.

우촌 선생은 법인(法人) 설립을 위하여 여러 방면으로 노력을 거듭하였으나 뜻대로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법인을 설립할 재원(財源)을 마련할 길이 막막했고 그나마 법인 설립 자금을 내놓겠다는 인사(人1:)들을 막상 만나 보면 그 모두가 학교 운영에 개인의 이익을 앞세워

사욕을 내세우는 경우들이 너무 많았다. 교육적 공도(公道) 실천이라는 관념보다는 개인적 수익을 염두에 두었고 학교의 전체 권한을 차지하겠다는 목적 하에 학교 운영에 참여하겠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이에 우촌 선생은 후학들을 교육시켜서 이 나라의 역군(投單)을 만들고자 하는 순수한 의도와 근본적으로 어긋났기 때문에 더 이상 외부에서 법인 설립에 동참하는 사람을 물색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이제는 어떻게 해서라도 자력으로 학교 법인을 설립할 수밖에 없다는 결심으로 우촌 선생은 자신의 소유로 되어 있던 임야를 아낌없이 모두 희사하였다. 이로써 학교 법인을 설립하여 문교부로부터 정식으로 인가를 얻게 되어 오랫동안 숙원 해 오던 재단 법인 ‘한성학원’이 완성 되었다. 설립자인 우촌 선생이 초대 이사장에 취임함으로써 ‘한성학원’은 명실 상부한 교육기관으로 힘찬 약진을 시작하게 된 것이 다. 설립초 한성학원의 이사진 명단과 그 정관(定款)은 다음과 같다.

초대 한성학원 이사진 명단

직위 성명 생년월일 임기

이사장 김의형 1904년 8월 25일 5년

이사 조동식 1897년 7월 8일 5년

이사 안호상 1902년 1월 23일 5년

이사 박종만 1897 년 7월 11일 2 .5년

이사 이석기 1908년 1월 2일 2.5년

감사 한상길 1902년 3월 6일 2년

감사 임명순 1902년 12월 3일 2년

1) 한성학원 정관 제정

제 1 장 목적 및 사업

제 1 조 본 법인은 대한민국 교육의 근본 이념에 기초하여 중고등 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 2 조 본 법인은 전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한성여자중학교 및 한성여자고등학교를 유지 경영한다.

제 2 장 명칭 및 사무소

제 3 조 본 법인은 재단법인 한성학원이라 칭한다

제 4 조 본 법인의 사무소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산 48 번지에 둔다.

제 3 장 재산 및 경리

제 5 조 본 법인의 자산(資應)은 기본 재산 및 보통 재산의 2종으

로 나눈다. 기본 재산은 별지 목록의 재산 및 장래 기본 재산에 편입할 재산으로 한다. 보통 재산은 전항 이외의 재산으로 한다.

제 6 조 기본 재산은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문교부장관의 인가를 얻지 아니하면 매매, 기부, 양도 또는 담보(擔保)를 할 수 없다.

제 7 조 본 법인의 경비는 기본 재산에서 나오는 과실(폈찮), 기부금 및 기타 수입으로써 이에 충당한다.

제 8 조 매년도 세계(歲計) 영여금은 다음해에 이 월 사용하는 금액 이외에는 이를 기본 재산에 편입한다.

지11 9 조 수지 예산(收支據算)으로써 정한 것 이외에 의무적인 부담 또는 권리 포기는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문교부장관의 인가를 얻어야 함. 단, 예산 내의 지출을 위하여 그 회계연도

의 수입으로서 상환하는 일시 차입금(借入金)은 문교부장관의 인가를 요하지 아니한다.

제 10 조 본 법인의 회계년도는 4월 1일부터 다음해 3월말일까지로 한다.

제 4 장 임원

제 11 조 본 법인에는 다음과 같은 임원을 둔다.

이사 5명, 감사 2명

제 12 조 이사 및 감사는 이사회에서 선출하여 문교부장관의 인가에 의해 취임한다

제 13 조 이사의 호선(互線)으로 이사장 1 명을 선정하여 문교부 장관의 인가에 의해 취임한다

제 14 조 이사장은 본 법인을 대표하고 그 사업을 관리한다.

제 15 조 이사장의 유고 시에는 이사장이 지명하는 이사가 이사장의 직무를 대리한다

제 16 조 감사는 본 법인의 회계를 감사한다.

제 17 조 임원의 임기는 4년, 감사의 임기는 2년으로 한다.

1) 제 1 차 이사 반수의 임기는 2년, 감사 반수의 임기는 1년으로 한다.

2) 보결에 의하여 취임한 임원의 임기는 전임자의 잔임 기간으로 한다.

3) 임기 전의 임원의 해임은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문교부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제 5 장 이사회

제 18 조 이사회는 매년 1회 개회하고 필요가 있을 시에는 수시로 개회한다. 이사회는 이사장이 소집하여 그 의장이 된다.

이사회는 현재적 이사의 과반수가 출석치 않으면 개회하

지 못한다.

제 19 조 이사장은 이사 3 명으로부터 회의 목적을 명시하여 이사회의 개최를 요구할 시에는 이를 소집한다.

제 20 조 1. 이사회에서 의결할 사항은 특히 규정됨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래와 같다.

1) 예산 결산 및 재산의 취득 관리에 관한 사항

2) 학교장 진퇴에 관한 사항

3) 일시 차입금에 관한 사항

4) 기타 본 법인에 관한 중요한 사항2. 학교장인 이사는 전항 제 2) 의 학교장에 관한 결의에 참석할 수 없다.

제 21 조 이사회의 의사는 출석 이사의 과반수로써 이를 결정한다.

1) 가부 동수인 때에는 이사장이 이를 결정한다.

2) 감사는 이사회에 출석하여 의견을 진술할 수 있다.

제 22 조 이사장이 부의 사항(附露핍편)의 내용이 경미하다고 인정할 시에는 서면 회의로써 이사회의 결의를 대신할 수 있다.

제 6 장 해산

제 23조 본 법인을 해산하고자 할 때에는 이사 전원의 의결로써 문교부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제 24 조 본 법인을 해산하였을 때의 잔여 재산은 이사회의 의결에 의하여 국가 또는 본 법인과 동일 혹은 유사한 목적을 가진 단체에 기부한다.

제 7 장 부칙

제 25 조 본 법인 설립을 위한 기부 행위는 이사 % 이상의 동의로 써 문교부장관의 인가를 받지 아니하면 변형할 수 없다.

제 26 조 본 법인 설립을 위한 기부 행위 시행에 관한 세칙은 이사회에서 이를 정한다.

학교 안팎의 모든 것들이 체계를 이루자 그 기틀이 우선 바르게 섰다. 그러나 육영 사업(育英랜業)이 인재를 육성하는 일종의 소비성 사업이고 보니, 학교 운영에 따른 경비를 지속적£로 충당할 수 있는 수입원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는 우촌 선생은 학교 법인이 운영하는 기업체를 만들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즉, 법인의 단계 사업오로써 기업체 운영에 착수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대개는 기업체가 없는 까닭에 학교가 학부형들의 경제적 부담을 무리하게 요구하게 되고 학교가 개인의 이익이나 꾀하는 기관처럼 되어 국가나 사회의 원성을 사는 대상이 되다시피 함으로써 본래의 취지에 어뭇나 본말이 바뀌는 현

상마저 생겨 왔던 것이다 이것을 극히 비판해 온 우촌 선생은 오랜 궁리 끝에 마침내 충청남도 당진군에 이미 설비되어 있는 적당한 염전이 있음을 알고 이것을 법인 운영체로 사들였다. 그리하여 총면적이 4,270,563 평방미터인 이 염전을 학교 법인 ‘한성학원’의 경영체로 삼게 됨으로써 국가 인재 양성으로 교육 구국이라는 이념 아래 ‘한국정신’의 배 양을 위한 건학의 기초를 튼튼하게 다지게 된 것이다. 이 염전은 후일 국토 개발과 간척지 조성을 위한 국가의 계획 등에 발맞추어 한성농장(파城앓傷)으로 개편되었고 현재까지 ‘한성학원’의 수익성(收徐센) 기업체로 운영되고 있다

2) 한성여중고의 상징물

(1) 교명(校名)

우리 학교의 교병 인 ‘ 한성(꽃城) ’은 1394 년(태조 3 년) ‘한양부’에 조

선이 천도(避都) 하고서 ‘한성부(찢城}전)’로 고쳐 사용된 ‘서울’의 옛 이름에서 따옹 것이다 본교가 교명을 ‘한성(평城)’으로 선택한 것은 ‘한성’ 즉 ‘서울’이 우리 나라의 수도인 것처럼 본교에서 교육을 받은 학생들이 설립자 우촌 선생의 건학 정신인 “한국정신(韓I뚫l精페1)"을 이어받아 지(젠 ) . 덕(德) . 체(섬뭔)를 고루 갖춘 품성 높은 인재가 되어 장차 조국을 위해 봉사하는 나라의 큰 일꾼이 되라는 뜻에서이다.

1945년 개교 당시에는 ‘한성여자고급중학교 ’ 로 교명이 제정되었다가 1946년 4월 9일 6년제로 학제 변경과 함께 ‘한성고등여학교’로 교명이 개명되었다. 그후 1946년 7월 5일 다시 6 년제 ‘한성여자중학교’로 바뀌었고 1952년 5월 31일 3년제 ‘한성여자중학교’, 3년제 ‘한성여자고등학교’로 각각 분리되었다. 그러나 이는 명실 상부한 실질적인 분리가 아니고 국가의 방침에 따른 제도적인 명목상의 분리였다.

(2) 교훈(校訓)

교훈은 설립자의 투철한 교육관인 건학 정신이 담겨지고 그 학교 특유의 교육 이념을 지니고 있는 숭고한 지침이다 이 지침은 교육의 목적 이나 그 목표를 나타내기도 한다.

교육의 목적과 목표를 설정하는 일은 교육을 실시하는 현장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교육 과정의 개발 절차 또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을 규제함에 있어서 교육이 추구해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목적과 목표는 위로 는 교육의 이념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하며 아래로는 교육 과정이라는 실제 교육 현장에서의 실천 방향을 제시해 주는 중간 매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교육 목적은 교육 과정보다 교육의 방향이나 중점을 지극히 일반적 포괄적으로 서술하게 되며 가치를 규정짓는 가치 규범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교육 목표는 이들 교육 과정에서 실제로

무엇을 다루어야 하고 어떠한 것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하고 어떠한 내용을 선정하고, 어떠한 학습 경험을 강조해야 하는지 등의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제시해 주는 일종의 행동 강령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나라 교육법 제 1조에는 ‘홍익인간’ 이라고 하는 교육 이념이 모든 교육의 근간으로 자리잡고 있어서 우리의 모든 교육 기관은 이를 교육의 지표로 삼고 있다. 이에 8 . 15 광복과 더불어 설립된 우리 ‘한성여자중고등학교’는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의 건학 정신에 바탕을 두고 “ 1) 진실한 사람이 되자. 2) 씩씩한 일꾼이 되자. 3)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라는 교훈을 제정하여 민족주의적인 자아 의식과 용기있는 인재를 양성함에 온 힘을 기울여 왔다.

진실은 인간이 추구하는 목적이자 목표이기도 하다. 학문을 완성하

여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도 진실을 목표로 할 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진실을 바탕으로 한 인성 계발을 본교의 교훈으로 삼은 것은 본교의 교육 방향과 그 비전을 제시한 것으로 설립자 우촌 선생의 건학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첫 과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광복 후의 새 시대가 요구하는 지상(至上)명령이기도 했고 광복 이후 접하게 된 민주주의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바람직한 민주 시민과 사회의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한 좌표였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우리 동양에서는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사람은 학문 연마와 함께 인격 수양에 힘써서 덕을 쌓는 일을 중하게 여겼고,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도 인격을 고루 갖추지 못하였을 때는 그 사회에서 진실된 사람으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올바른 사람은 세상의 시류에 끌려 다니지 아니하고 참된 도리를 바르게 지켜나가는 진실된 사람이라 할 것이다. 그럼으로 배움이 넓어지고 깊어져 갈 수록 올바른 가치관이 정립되고 바른 마음과 사람다운 도리를 다하는 참다운 인격을 지닌 진실된 사람으로 성장되는 것이 매우 중요

하다.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말이 있듯이 한 인간이 진실된 인격을 갖추는데 있어서는 건전한 신체의 단련이 그 전제 조건이 됨은 자명한 사실이다. 건강을 앓을 때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은 올바른 지식의 함양과 함께 건전한 육체의 단련을 위한 이원적 교육(二j다I상敎함)을 강조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덕을 쌓아도 건강을 잃으면 용기와 과단성 그리고 추진력과 진취성 그 모든 것이 부족하여 배운바 뜻을 올바르게 실천할 수 없게 된다. 요컨대 개인의 인격 도야는 물론이고 민족 구성원 전체의 건전한 인격을 위해 건강한 신체를 지닌 온전한 사회인을 양성함에 있어서는 체력을 연마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이에 건전한 육체를 지니고 민족과 국가를 위해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씩씩한 일꾼을 기르는데 본교의 교훈이 설정됨은 설립지- 우촌 선생의 건학 정신에 매우 합당함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은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오는 동안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았고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세계가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일제의 강점 하에서 숱한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선조들은 의병을 일으키는 등 의연하게 궐기하여 맨손으로 이에 대항해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고 후손들에게 민족과 국가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독립을 위한 자주정신을 길러 주기에 온갖 심혈을 기울여 왔다.

설립자 우촌 선생께서도 조국이 일제하에 있을 때 성장기와 청년기를 맞아 식민지 교육을 받았는데 이때 조국의 광복과 장래에 대한 생각은 불론, 어떠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이 땅에서 일인을 몰아내고 자주 독립의 주권 국가를 이룩하여 우리 민족의 우수성과 자주 정신을 세계 만방에 지-랑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길러야 되겠다는 생각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민족 정신 즉, ‘한국정

’60년 이전의 교훈

’60년 이후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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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건학 정신으로 삼았고, 이를 우리의 후손들에게 길러 주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교육적 신념으로 “죽음으로써 나라를지키자”라는 좌표를 내세워 교훈으로 정립하게 된 것이다.위 와 같은 교훈은 1959학년도까지 사용되 다가 1960학년도에 와서“ 1) 참되고 착한 사람이 되자. 2) 슬기롭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 3)의롭고 건강한 사람이 되자”로 바뀌었지만 그 표현이 다를 뿐이지 그근본 취지와 바팅은 먼저 번 교훈과 같이 우촌 선생의 건학정신에 두고 있다.(3) 교가(校歌)교가는 교훈을 보다 구체화한 것이다.“산 높고 물 맑은 이 땅에 나서 찬란한 새 나라를 꾸밀 우리들로시작되는 본교 교가는 ‘한국 정신’이란 건학 이념을 나타내고 있

다.이 교가를 힘차게 부르면서 자신이 ‘한성인’임을 확인하고 ‘한성인’으로서의 긍지외- 자부심을 키운다.교가는 3절로 되어 있고 각 절에 후렴이 들어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 다.교가를 작시-한 서항석(徐'1펀錫 1900-?) 씨와 작곡한 채동선(茶싸.((t、(: : 1901 - 1963) 씨는 설립자 우촌 선생과 함께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한 동료로서 평소 우촌 선생의 ‘교육구국(敎育救國)’에 대한 신념을 익히 알고 있었고, 서로 어울려 나라의 장래를 의논하고 걱정하던 친교(젠 交)가 매우 두터운 분들이었다. 우촌 선생의 건학 이념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있던 중,본교 개교 직후에 작사와 작곡의 요청을 받게 되자곧 이에 기꺼이 응해 줘 본교의 무궁한 발전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교가

轉& 높만고년 물빛-난맑문화은 이다시땅 작 작 에-가-- 곡ζ亡 사i 꿔 나채 - 서I=서 서 도。。 하륨석선 ­ 닦아얻은 힘과빛 으로

難좋 불훌 I 4.-.-.. 훌릎 흉 E 쿼 찬란한 새나라-를 꾸밀 우리들 더 고운 꽃다발-을 엮을 우리들 무궁화 삼천리-를 수놓 아내어 “ 難轉끓 세 꽃 자지 피겨랑키륜l 를 는은는어륜룰 l 월를보 옛「나 크龜 성 란산 도듯 언 가-다-이,「” 터에 -블‘- 여 자 모•클 기 여랑 훌하 모 자를릎여 였 라 결네 네라 혁혁 ----•-- ,--,. 이사 랑은 호→숭 노도 하 다 다우리 한 λ。4 름를훌 훌킬 우 리한 성 우 리한 성 배움의 꽃 밭

작사자 서항석 씨는 1929년 일본 동경 제국 대학 독문학과를 졸업한 후 중앙 국립극장장, 문총최고위원을 거친 예술원 원로 회원이었고작곡자 채동선 씨는 1929년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베를린 유학을 마친 권위 있는 작독자였으며 현악 4중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 발전에 큰 공헌을 남긴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4 교표

교표는 학교의 상징이다.

학생이 교표를 왼쪽 가슴에 자랑스럽게 닮으로써 그 학교 학생임을 나타내고 '한성인'임을 자부한다. 설립 당시부터 우촌 선생 자신이 제정한 교표는 지금까지 변함없이 우리 '한성'을 산징하고 있으며 앞으로 무궁하게 그 전통을 이어나갈 것이다.

1 명칭인 '한성'은 옛 서울(조선시대)의 이름으로 설립자 우촌선생의 건학 정신인 '한국정신'의 앙양과 국적있는 교육을 하자는 근본 취지를 나타낸다.

2 전체의 바탕은 흰색으로 우리 민족의 순결과 평화를 애호하는 배달 민족의 기상을 상징하며 성숙한 목화로서의 순결한 여성상을 나타내기도 한다. 주위의 5개 꽃잎과 원 그리고 한성의 두글자는 자주색으로 진취적인 기상을 나타낸다. 또 목화가 개화하기 시작할 때의 색채로서 장차 만개하여 결실할 장래성 있는 청소년기를 상징하기도 한다.

3 교표의 전체 모양은 예로부터 우리 나라 여성들이 천직으로 알고 순응하던 직조(織造)의 자료인 면사(縮絲)의 꽃인 꽃송이다.

@ 교표 주위의 “ { "은 “사람(人)"을 나타내며 “ { "가 5개인 것은 서울의 5 개 진산(鎭山 : 나라의 도읍지나 각 고을 뒤에 있는 큰산)인 인왕산(仁l!f山), 북악산(北찮山), 북한산(北평 山), 남산(南山), 낙산(!.路山)을 나타내기도 한다.

@ “ 0 "은 5 대 진산(챈山)에 둘러싸인 서울을 상징한다.

(5) 교기(校파)

한성여자중학교 교기

한성여자고등학교 교기

본교의 교기는 교색(校떤)인 자주색 바탕에 가로 98cm, 세로88 .2 cm로 되어 있다. 교기의 중앙에는 직경 26 cm 의 원형과 그 주위에 서울의 5 개 진산(鎭山)을 나타내는 “ { "가 둘려져 있는 “한성”의 상징인교표가 수놓아 져 있다. 그 아래에는 ‘한성여자중학교’와 ‘한성여자고등학교’라는 각각의 교명이 은색 수실로 수놓아져 기재되어 있다. 교기는 학교 행사 때에도 필수적으로 사용되어 본교를 대외적으로 상징하며 이를 볼 때마다 본교를 설립한 우촌 김의형 박사의 건학 정신을 되

새기게 되고 우리 모든 ‘한성인’으로 하여금 자긍심과 애교심을 갖도록 한다.

(6) 교복(校服)

교복은 일제의 식민지에서 8 . 15 광복을 맞이한 직후라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탓에 제대로 정비가 되지 않아 개교 직후 잠깐 동안 일본식 써라복이 사용되긴 했어도 설립자 우촌 선생이 워낙 자주 독립에 대한 ‘한국정신’이 투철한 관계로 곧 제정되어 착용되었다. 그 모양은 중고 분리 없이 통일되어 똑 같았다. 이런 형태의 교복은 1952년 중 ·고등학교의 분리에 의해 각 학교의 실정과 학생들의 체위(體位)의 차이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었고 형태의 변경이 있었지만 1981 학년도까지 착용되다가 제 5공화국 정부의 자유 개방 정책에 따른 사회 전반

에 팽배한 자율 분위기에 편승하여 1982학년도부터 학생들의 교복과 두발에 대한 완전 자율화가 이루어 졌고, 본교에서도 교복이 폐지되었다 그러나 교복 자율화 이후 가정 경제의 격차에 따라 각양 각색의 의복이 착용되었고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여학생 상호간에 위화감이 조성되어 명랑한 학교 생활을 저해하는 큰 요소로 작용하였다. 뿐만아니라 계절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의복을 준비하는데 따른 학부모의 경제적 부담이 가중되는 폐단까지 따랐고 정부나 사회 가정 학교 모두 가 학생들의 생활 지도까지 커다란 어려움과 난간에 봉착되기도 했다. 이러한 여러 요인을 해소시키고 학생들로 하여금 밝고 명랑한 학교 생활을 영위하며 공동체 의식 함양에 따른 일체적인 소속감과 애교심을 고양시키기 위해 1992학년도부터 다시 교복을 착용하게 되었는데 중 ·고가 각기 학교의 실정과 특성을 살려 자율적인 형태로 정해졌다. 각 학교의 교복에 대한 특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 중학교 >

※ 큰 뜻 : 조화롭고 기능적이며 활동량이 큰 것으로 하였음.

흰색 블라우스 : 여성스러운 디자인으로 청결과 순결을 상징하며 현대 여성으로서 무한한 창조력과 가능성을 나타내었다.

감색 자켓 : 평화와 젊음, 희망을 상징하는 색이며 테일러 칼라 디자인은 학생다운 단정함과 활동감을 느끼게 한다.

체크무늬 스커트 : 어느 시대에도 유행에 구애받지 않고 애용되는 무늬로 화려하거나 자극적이지 않고 안정된 느낌을 주므로 학교 환경이나 분위기에 적합하다

자주색 오버코트 : 동서를 막론하고 지-주색은 고귀함을 상징하는 색으로 쓰여져 왔다. 한성여자중학교 학생들은 어느 학교의 학생들보다도 품위가 있고 고귀한 학생들임을 상징하여 교복에도 자주색을 이용했다 어깨는 폼에 꼭 맞게 하여, 긴장감 있고 자신감 있게 학생 신에 알 빚는 행동을 하도록 하였고, 옷이 아래로 갈수록 서서히 넓어 낀음은 자만하지 않고 모든 희로애락을 폭 넓게 감싸주는 너그러움을 나

타냄으로써 따뜻하고 우아한 멋을 풍겨 학창시절을 풍요로운 이지로 가득 채움을 상징했다.

< 고등학교 >

대부분의 한국 여학생들의 교복 모양은 2차 세계대전 후 세계적인 유행이었던 new looks 를 본뜬 디자인이 주종을 이루었고 본교의 교복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형태로 허리를 날씬하게 하고 긴 후레아스커트였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동복과 하복만 있었다가 경제력의 향상으로 춘추복을 1970년대 중반부터 입게 되었다. 그 모양은 긴 소매의 흰색 블라우스에 청회색 스커트로 소매 위 아래에 주름을 약간씩 잡고 커프스를 달았고, 셔츠 칼라에 앞 중심선 양쪽에 3줄의 pin tuck 로 섬세함을 강조하였다. 그 후 교복 자율화에 의해 학생 신분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에서 자유복을 입다가 그로 인한 많은 폐단과 학생 지도상의 문제점 때문에 점차적으로 교복을 원하게 되어 다시 교복을 입게 된 것이다 지금의 교복은 활동성을 높이는 동시에 세련되고 유

행에 구애받지 않는 디자인과 색상에 중점을 두었다.

감색 자켓 : 테일러 칼라에 double button 과 허리선 부근에 주머니를 달아 기능성과 보온성을 고려했다.

스커트 : 회색 바탕에 감색 선을 넣은 천으로 상,하의에 통일감을 주고 앞뒤 중심선에 맞주름을 주어서 단정하면서도 활동성을 고려했다.

흰색 블라우스 : 정결한 흰색으로 소매 끝에는 band cuffs 를 달고 셔츠 칼라로 긴장감을 주는 동시에 감색 자켓과 조화가 되게 하였다.

조끼 : 스커트와 같은 천이며 허리선 정도의 길이로 기능성을 살리고 늦은 봄, 초가을 기후에 적합하게 하였다.

오버코트 : 소매를 넓게 하여 기능성을 살렸고 목부분을 퉁글게 감싸는 롤칼라 식으로, 또는 단추를 열어서 명칼라가 되게 하여 보온성을 조절하면서 전체적으로 여유 있는 모양이 되게 하였다. 색상은 속

에 입은 자켓과 조화되는 짙은 회색으로 전체적으로 통일감이 갖게 하였다.

(7) 교화(校花)

가. 순백의 정갈함 속에서 연연한 분홍빛 화사함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본교 학생의 마음을 나타낸다.

나. 꽃이 진 후에도 하얀 솜을 맺어 의행활의 주된 재료로 쓰임은 사회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인재로 자라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다. 추위를 따뜻하게 감싸는 목화 솜의 쓰임은 가정과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정신을 배우게 한다.

목화송(木花체)

강인한 정신으로

늦가을 된서리 내렬 때까지 목화 다래는 익어 가다가

흰털같은 솜꽃을 피우며 벌어집니다.

솜꽃은 옷감과 이불솜으로

계란꽃 종지-는 식용유와 등불 기름으로 쓰여져

끝까지 남을 돕는 희생 정신을 보여줍니다.

(8) 교목(校木)

가. 은행나무는 그 수명이 긴 나무로 학교의 무궁한 발전을 기약한다.

나. 나무의 모양이 수려하고 고상한 기풍은 본교 학생들의 순결한 마음과 고상한 인품을 뜻한다.

다. 열매는 식용과 약용으로, 나무는 고급 가구로 이용됨과 같이 국가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유능한 새 일꾼이 되어야겠다.

교목(은행나무)

의화( 교지표지)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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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발전기( 1955-1976)

- 중고 통합기 -

창립의 고난과 6.25 의 수난을 굳세게 극복한 본 중.고등학교는 50, 60년 대를 맞으면서 안정을 찾게 되고 발전을 구가하게 되니 실로 학교가 학교답게 모습을 갖춘 중요한 시기였다. 설립자이신 김의형 교장께서도 이 시기는 그의 인생의 절정기인 장년기이기도 했으며 이에 걸맞게 학교도 그의 불타는 교육 입국의 의지와 함께 그와 학교가 찬연히 벚나는 업적을 남기니 오늘의 더 높은 한성의 위상과 한성대학교가 이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우선 이 시기의 발전상을 개관 약술해 보면 첫째, 학교 시설 확충면

에서는 1958 년에 학원 재단 염전 경영과 고등학교 신축 교사의 건립, 1961 년에 과학관의 건립, 1963 년에 한국 최초의 여학교 체육관 건립, 1967 년에 생활 교육관 의화장 운영, 1971 년에 국제 규모의 수영장 건립 개장, 1972 년 한성 대학교를 창설하였다.

둘째, 교육 활동변에서는 학력 신장과 입시 성적을 향상하고, 교지‘의화’의 발간과 월간으로 ‘의화’지를 발간하였으며, 한국 최초의 여학생 취주악부를 창설, 운영하고, ‘체육한성’을 국내외에 선양한 각종 운동부의 활약이 있었으며, 생활관 교육, 예술제 행사를 통해 학술과 예술계에 발군의 실력을 과시하였다.

세째, 대외적인 변에서는 한국 최초의 차드 섹션 연출로 대통령 단체 수치를 수상을 하고, 연극 공연 및 각종 전시회를 개최하였으며, 새

마을 청소, 자연 보호 활동, 불우 이웃 돕기, 자매 부대 위문과, 견동국민학교 건립과 견동제 축성을 하였고, 4.19 학생 혁명 때 열사 진영숙 학생 순국 등으로 학교의 위상을 높혔다.

네째, 교장 선생님 개인적으도 한성 학원 건립과 재단 이사장, 교장, 학장을 역임했고, 문교부, 체육부의 중요 부분의 단체장 역임과 공로상를 수상하고, 국민 훈장 목련장의 수상과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애향 활동의 결과로 향리로부터 시혜불망비(파 惠不忘찌)를 봉정 받았다.

위 에 서 약술한 바 이 시 대 (1955-1976) 의 한성 은 한국 여 성 교육의 선두주자로서 손색이 없었으며 타학교에 모범을 보였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과 역사 앞에 큰 공헌을 남겼다 한성학원 50년 역사 중에서특히 이 시기는 한성인의 지-존심과 자긍심을 굳게 심어준 가장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는 모두가 설립자 김의형 학교장을 비롯 교사, 학생, 학부모 퉁이 학교와 관계있는 모든 한성 가족들의 정성과 노력의 결과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인은 설립자 김교장의 투철한 역사 의식과 확고한 교육 철학과 강력한 지도력이었다.

제 1 절 학교의 시설 확충과 교육환경 개선

1) 염전 경영과 고등학교 교사, 강당 신축

학교법인 설립에 성공은 하였으나 원래 육영사업이란 일종의 소비성 사업이라 학교 운영을 위한 경비를 지속적으로 충당할 수 있는 수입원이 필요한 것을 절감한 선생은 제 2단계 사업으로 기업체 운영을

계획하게 되었다. 당시만해도 수입원이 없었던 학교들은 학부모에 무리한 부담을 주게 되어 학교가 이익이나 꾀하는 집단처럼 국가 사회에 원성을 사기도 한 때라, 의를 강조하신 선생은 이를 크게 우려하여 법인체 운영 사업을 여러가지로 구상하던 끝에 드디어 1958년 당진에 있는 적당한 염전을 구입하였다. 염전은 충남 당진군 분향만에 있으며 그 규모는 4,370,563m2 로 연간 총 생산량이 25 ,000가마나 되는 대규모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에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학교의 시설 확충은 물론, 교사의 복지 사업, 각종 운동부의 지원 등 학교 운영의 중추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선생은 이 염전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육성 발전시켰는데 매년 교사, 학생 대표들과 함께 염전을 시찰 방문하시고 위문품도 전달 격려하셨다.

염전 경영에 성공하여 학교의 근간을 튼튼히 한 선생은 다음 단계로 교사(校舍) 규모 확장과 시설 근대화에 매진하였다. 원래 구교사는 규모도 작고 구시대적 목조 건물이라 많은 학생을 수용하기 어렵고 현대적 교육 시설도 별로 없었다. 구교사는 중학교 건물도 사용하고 고등학교 교사와 강당을 짓기도 하고, 건축설계, 자재구입 등 불철주야 노심초사 하게 되어 피로의 누적으로 한때 졸도하여 건강을 크게 상하신 적도 있었다 한다.

새 교사인 운동장, 강당 등의 공사가 어렵게 진행되던 중 호사다마라 했던가, 불행하게도 선생의 독자 아들을 잃게 되는 횡액과 변괴를 당하셨다. 선생의 일생 중 이보다 더 큰 가슴 아픈일은 없었으리라. 그러나 선생은 이에 굴복 좌절하지 않았다.

“육영사업은 나의 천직이요, 후생을 육성하여 민족 번영에 이바지하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선생 특유의 ‘부동의 자세’로 일심 학교 건설에 매진하여 1958 년 12월 1 일 모든 공사를 마무리 하였다.

새교사 3 층 건물(후에 4층으로 증축 1964)은 21949m2 이며, 강당은 62,142m2, 부속건물 67,108m2, 운동장 넓 이 8,564m2의 위용을 갖추니 누가 보나 학교다운 학교의 모습을 현대식으로 갖추었다.

교장 선생님은 참기 어려운 비운과 역경을 학교 건설이라는 대사업에 옹갖 정 열을 다 쏟아 부음으로써 자신에 닥친 모든 간난을 극복하시니 이야말로 거인의 발자취가 아닌가.

2) 중학교 교사 증축과 과학관 건립

고등학교 교사에 비 해 중학교 교사가 너 무 초라하여 1959년 8월 10일에는 중학교 동쪽편 교사를 증축하는 공사가 시작되어 완성 을 보았다(현재 이 건물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대학교 본관 우촌관이 건립되어 있다) 한편 1959년부터 고등학교 교사 남쪽 언덕위에 4층짜리 과학

관 신축공사가 또 시작되었다. 이 공사는 난공사였다. 지반이 암반층이라 폭파 작업을 수없이 해야 했으며 공사가 예정대로 잘 진행되지 않았다. 재정의 어려움과 후손을 잃은 슬픔이 겹쳐 때로 무서운 좌절감에 빠지기도 하였다. 허나 그 특유의 ‘부동의 자세’와 집념으로 이 난공사를 완성하시니 1961 년 10월 5 일이었다.

이 건불은 교실뿐 아니라 국내 처음으로 물리실, 화학실, 가사실, 재봉실, 미술실, 음악실, 도서실 등을 갖춘 종합 과학관으로 손색이 없었다. 연건평은 853 평, 소요 경비는 약 2 억환 정도였으며 현재는 대학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한성여고 과학관 일부

3) 체육관 건립과 고등학교 교사 증축

전술한 바와 같이 김의형 교장은 체육인이셨다. 학생 시절부터 운동을 좋아했고 잘했다. 그러나 선생이 체육을 전공한 것은 단순한 취

미나 성격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잉ㄹ제 식민지 지배로부터 민족해방의 길이 건강한 민족 육성이란 민족사적 사명감 대문이며 아울러 지덕체의 조화로운 인격 양성을 교육의 본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체육관

당시 어느 분야보다 낙후되었다 할 수 있는 이 부분의 육성 발전에 기여한 체육계의 한 거성(巨星)이셨다.

학생들의 체육 활동이나 전국 규모의 각종 대회를 열 체육관 하나 없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한 선생은 1962년 체육관 건설에 착수하여 1963 년에 완공하였다.

선생의 평생의 소원이자 꿈이었던 이 웅장, 화려한 체육관은 당시 여학교 체육관 건물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이며 학교 정문앞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다. 총면적은 390평 정도이며 이 안에서 배구, 농구, 정구, 핸드볼, 육상 경기 등을 할 수 있는 종합 경기장으로 자가 발전 시설이 있어 야간 경기도 할 수 있다. 총 수용 인원은 4천명 정도이며 무대를 설치하면 연극, 무용공연도 가능하다. 외부 전면에는 오륜마크를

그려 넣어 체육관으로서 위용이 더욱 돋보인다 한편 1964년에는 새교사(고등학교 교사)의 4층 증축공사를 완료하였다.

4) ‘의화장’ 준공과 수영장 개관

선생의 육영 사업에 쏟은 보기드문 정열은 날로 벚나 1967 년 10월에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변 팔당리에 있는 ‘의화장’을 구입, 개설하였다. 교직원 휴양 및 학생 생활 교육의 장으로 삼고 있는 이 의화장은 풍광도 화려한 팔당천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숙소 건물 및 잔디밭, 연못 등의 시설을 갖추어 학생 심신 수양과 훈련에 최적의 장소이다. 한편 1969년 교직원의 친목과 편의 시설로 교직원 식당을 개설하고 숙직실을 준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한성학원의 최대 학교 시설 확충사업은 수영장을 낙산 언덕위에 만든 일일 것이다. 여성 건강 증진의 한 방법에 수영을 뺑 수 없다. 1970년에 들면서 국가는 상당한 경제 발전을 보여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여가 선용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되어 각종 스포츠나 레저 활동이 시작되어 가기도 하면서 수영장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우리 학교도 체육한성의 위상윤 더욱 높이며 학생 건강을 위하여 수영장 건설에 착수하였다. 교육 환경 시설과 개선에 남다른 경륜을 가지신 선생께서는 수목 청청한 통일 동산 속에다 1971 년수영장 공사 착공 완성하였다.

수영장 개장 축사에서

국력 배엉:에 으뜸가는 것은 우리 민족의 체력 을 증진시키는 일임과 동시에 후손을 잇게 해 줄 여성의 신체를 깅건하게 해 주어야 할 것이며, 나아가서는 우리나라기 3 면이 해양을 대히고 있으떤서 물 에 접근히지 않았던 끼닭에 데외로 헝-히는 진취성이 없어 매사가 퇴영적으로 니라 발전이 드디어 오 늘 에 이 르 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물과 친하면서 건강을 추진시켜야

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선생의 말씀 중에는 원대판 포부가 깃들여 있음을 본다. 이 수영장은 딩-시로는 여학교 수영장으로 최초이며 국제 규격에 맞는 최신 시설이었고 부대 시설도 아름답고 완벽하였다. 매년 여름이면 우리 학교 학생은 물론 학부모 또는 타학교 학생에까지도 개방하여 지역 시-회에 공헌하기도 했다.

5) 교사 이전

1986년 중 고. 대학간의 대대적인 교사 이전 사업이 실시되었다. 중.고등학교를 모태로 하여 창립된 한성대학은 1980년대 들면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여 교사와 운동장의 태부족한 상태를 맞게 되었다. 재단에서는 여러가지 궁리끝에 중. 고교 교사와 대학교사를 맞바꿀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1986 년에 교환, 이전을 보게 되니 대학 본관 건물을 주로 고등학교가 대학 제 2건물을 중학교가 입주하게 되고 중.고교 모든 건축물과 운동장, 수영장, 체육관을 대학이 입주함으로 오늘에 이르렀다.

이상에서 열거한 바 오늘의 이 웅장한 한성 캠퍼스는 설립자 선생과 영부인의 피와 땀의 결정체로 수십년에 걸친 대공사의 결과이며 이를 보조한 수많은 교사, 교직원, 학생들의 노력과 염원의 산물이니, 향후 국내 유수의 사립대학의 하나로 발전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성학원에 속한 한성여중고와 한성대학은 교사 이전 사업을 통해 학원발전사에 새로은 일대 전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제 2 절 교육방침과 활발한 특활부 활동

시설의 확충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교육 내용이다. 올바른 정신을 훈도하고 알찬 실력을 갖추어야 하며 건강한 신체를 키워야 한다. 이른바 지덕체의 3 위일체를 겸비한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여야 하며 세계와 민족에 이바지 할 수 있는 동량을 만들어내야 한다.

학생 개개인의 숨은 잠재력을 개발하고 육성하여 그의 일생을 복되게 해주어야 한다. 또한 인문계 고등학교로 상급학교에 진학시켜 보다 많은 교육 기회를 줄 수 있도록 그 토대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특히 본교는 여성 교육기관으로써 한 가정의 운영 주체로 부덕 양성에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교육학자들은 중고등학교 시절을 청소년기라 하여 인간 발달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시기로 꼽는다. 사람의 모든 인격은 이 시기에 만들어진다. 인생의 승패는 바로 이 시기에 달려 있다. 학교의 승패는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교육자들의 알찬 교육을 위한

하루하루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훌륭한 교육 목표를 설정하고 이의 실천을 위한 각고의 성의를 다해야 한다.

1) 교육 목표 및 방침

(1) 교육 목표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에 바탕을 둔 국적있는 교육의 실현으로 조국의 통일과 근대화 및 복지 국가 실현에 공헌하는 한국인의 육성하는 데 목적을 둔다.

(2) 학교의 운영 방침

이상과 같은 교육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자율적이며 협동하는 생활태도와 건강한 체력 단련과 봉사정신 등 함양하는 학교 운영방침을 설정했으니 주요 학교운영 방침과 중점교육 활동을 요약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애국애족하는 민주적 생활 태도 함양

자율적이며 성실, 협동하는 생활 태도의 함양

신뢰받는 교육 풍토의 조성

선량하고 봉사하는 민주정신의 육성

과학적인 생산 교육의 추진

건강한 체력 및 정서 생활의 함양

(3) 중점 교육활동

애국 애족 정신 함양을 위해

국민 의례를 통한 애국심 고취

국어, 국사 교육의 철저

민족 중흥관의 설치 및 운영

공산주의 및 북한 체제의 비판 지도

민주 질서 준수 지도

민족 문화에 대한 이해 심화

계획적인 훈화지도

자율정신 함양을 위해

준법 정신의 생활화 지도

책임ㅇ 완수하는 생활 태도 교육

자율적인 학습의 강화

무지각, 무결석 운동 추진

신뢰받는 교육 풍토 조성을 위해

면학 분위기 조성

교육 환경의 개선 및 교육 시설의 정비

연구하는 교사상의 확립

도서실 활용의 효율화

수업 내용의 충실

국민 생활 안정에 기여하는 교육 추진

민주적 학교, 학급 운영

봉사하는 시민 정신 육성을 위해

언어 순화 지도

생활 지도 및 교도 활동의 강화

공중 도덕과 예절의 생활화

깨끗한 학교 만들기 지 보건 위생 관리의 철저

도 안전 교육 철저

근검 절약하는 생활 태도 함양

지역 사회 계도 활동 강화

자원 절약 지도

과학적 사고 육성을 위해

실험 실습을 통한 창조력 개발

특별 활동의 강화

직업 과정 운영의 철저

1인 1기 교육의 철저

과학 교육의 철저

체력 향상과 정서 교육을 위해

체육 교과 과정 운영의 철저

특활 체육부의 육성

기초 체력의 함양

체육 시설의 보완 정비

(4) 각부의 활동 중점

이 상의 교육목표와 중점교육 실현을 위해 교무부 등 각부 에 서는 아래와 같은 활동을 지속적으로 추진했으니 각부별 주요 활동 내 용을 요약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교무부

실력 향상을 위해 수업량을 최대 확보한다,

수업 철 저와 철저한 숙제를 하도록 하고 학습지도안을 수시 감독한다

휴가중 괴제는 중요 교과별로 문제를 선정하여 프린트 배부한다.

결 강이 없 도록 시전 지도한다

고사는 떤간 고사계획에 의해 실시하고 출 제 원칙을 사전에 제시힌다

고사 관리에 철저를 기하고 감독에 잘못 이 없도 록 한다

채점 관리의 칠 저를 기하도록 한다.

성적 처리 일체 과정을 철저 관리한다.

킥자 담당 사무는 창의성을 발휘하도록 한다.

공문서 입안 처리를 변밀히 한다.

대학 입시 경향을 분석하여 수업 에 반영시킨다.

능력벨로 부진 학과 에 대한 보안책을 수립한다.

성적 부진아 에 대 한 특별 지도책을 강구한다.

진학 상담의 과학화를 기한다.

@ 생활 지도부(학생부)

합리적 계획으로 학생 지도에 임한다.

능동적인 참여와 솔선 수범하는 기풍을 기른다.

근검 절약하는 생활 습관을 기른다.

예방 지도에 힘쓴다.

정숙하고 예절을 아는 여성을 기른다.

책임과 공덕심을 배양한다.

자학 자습과 여가 선용의 습관을 기른다

승공 교육, 행사 교육, 기회 균등을 통하여 애국 애족심을 함양한다.

안전 및 체위 향상에 힘쓴다

교외 지도를 강화한다.

예절 바르고 언행이 단정한 학생을 기른다.

은혜에 보답하는 사람을 기른다

남을 돕고 사회에 봉사하는 학생을 기른다

건강한 몸과 건강한 정신을 갖도록 한다.

@ 연구 활동을 위해

교무실의 연구실화, 학구적 분위기 조성

각종 연수회에 적극 참여

월 1회 이상 교내 연구 수업 실시

우량 도서 권장 독후감 쓰기 지도

저명 인사 초청 자체 연수

월 1회 이상 교과 혐의회 개최

각종 고사의 종합 평기- 개선 방안 강구

학력 경시 대회 개최

@ 교도 활동을 위해

상담실 이 용 에 대한 관심도를 높인다.

제반 검사를 실시 교육적 활용에 이용한다.

학생 실태를 명확히 파악하고 생활 향상에 적응시킨다.

상덤운 통한 문제아 선도에 노력한다,

진로 지도에 모든 자료를 활용 한다.

교도 교사의 전문적 자질 향상을 도모한다

@ 윤리, 빈-공 정신 함양을 위해

@ 윤리, 반공 정신 함양을 위해

국기 국기, 국가 원수에 대한 예절 지도를 철저히 한다.

충효의 실천을 생활화 하도록 한다.

국민 교육 현장 교육을 강화한다‘

반공 정신 생활화에 힘쓴다.

민족사적 전통성을 함양한다.

애국, 애족심 함양에 힘쓴다.

호국 안보 교육을 강화한다.

가정예절 지도에 힘쓴다.

사회 질서 확립에 힘쓴다.

산행 학생을 표창한다.

2) 교육 활동의 실제

(1) 실력 향상을 위한 노력

인문계 고등학교는 우선 실력이다. 모든 것이 다 예뻐도 눈이 미우면 미인이 아니다 실력이야 말로 인문계 학교의 눈에 해당한다. 이를 위해 본교는 1962년부터 매년 ‘실력 충실의 해’를 선포하여 교육 활동의 우선 순위로 삼았다.

이를 위해 우수학생을 표창하는 장학생 제도를 만들고 (1959년 이후), 교내 학력 경시대회를 실시(영,수,국 중심)하고 (1961 년 이후), 성적우수반을 발표 표창(의화지에 발표)하고 (1956 년 이후), 휴가 중 과제물 전시회를 실시하고(1 958 년 이후), 매월 월례 고사를 실시하고(1964년 이후), 영어 외우기 대회를 개최하였으며(1 966년 이후), 각종 시청각 교재를 꾸준히 구입하고(창립이후부터), 교사의 연구 수업과 참관 수업을

강화하고(창립 이후부터), 무감독 고사를 실시하기도 하고(1968 년), 영어 이야기 대회를 개최하였다(1976년)

이와 같은 노력의 결과 매년 실력이 향상되어 주변 여학교에 비해 우수한 대학 진학률을 보여 왔고 현재도 이 부분에서의 노력은 계속 점증되고 있다.

(2) 월간 ‘의화’지 발간

월간 ‘의화’지는 1956년 처음 발간되었다. 창간사에서 김의형 교장은 다음과 같이 발간 목적을 밝혔다.

낙산 언덕 한성의 보금자리에서 성장하는 여러 학생들의 모습을 엮어서 서로 보고 읽는 가운데 돈목(敎陸)한 정의를 더욱 두럽게 하고자 한다.

발전하는 학교의 모습을 전하고 교사 학생들의 연구의 장 또는 대

화의 장으로 삼아 알찬 교육 활동에 보탬이 되고 전인 교육에 일익을 담당케 하기 위해서 월간 의화지를 계속 발간하였다

의회-지의 내용은 각종 학교 행사의 내용을 소개하고 학교장 훈화, 치사, 발간사를 개제하고 각종 고사 성적 발표, 출결 통계, 청소 성적발표등 각종 성적 을 발표하고 시시- 논설, 반설, 교사, 학생의 연구 논문, 교사, 학생의 문예 작품, 각종 고지 사항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화지는 1956년 10월 10 일 창간호부터 1981 년 7 월 15 일까지 25 년간, 총124호까지 넬간하고 이후에 폐간되었다.

〈‘의화’ 표제 해 설〉

본교는 여성을 교육하는 배움의 전당이다. 이에 비-른 인간으로서의 여 성을 교육하고자 하는 이념으로 본교 교지의 표제를 ‘ 談花’(의화)라고 했으니, 이는 한마디로 ‘정의롭고 아름다운 여성’을 상정하는 의미

이다. ‘ IF 파’(정의)는 모든 사물의 가치 척도의 기준이 되는 것이며 誠(성)과 젠'(지)와 仁(인 )의 바탕을 이루는 것으로 인간되게 함에 그 뜻이 있고, 또한 본교의 교화인 木花 (목화)의 소박 순수한 의미와 일맥 상통되는 뜻으로서 ‘ 꽉 ’(의)지-를 택했으며, 이것은 본 학원의 설립자이신 김의헝(公찌짜) 박사님을 영원히 기리는 뜻도 겸하게 된 것이다.

여성에게 있어 아름다움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아름다움은 여성을 여성답게 할뿐더러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아름다움의 상징은 꽃으로 나타낸다. 그러므로 다소 의연하긴 하지만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으로 가장 적잘한 ‘花’(화)자를 연결시켜, ‘정의롭고 아름다운 여성’의 의미를 두어 그 표제로 취한 것이다.

<‘의화’ 표제〉

<1956-1978>

<1979 -1980>

<1981>

(3) 교지 ‘ 談花’발간

월간 ‘의화를 창간한 2년 후 1958년부터는 연간 종합지 ‘의화’ 책자를 간행하였다. 이는 현재까지 중단없이 간행해왔다. 한 해의 모든 학교일을 종합 정리하고 교사 학생들의 연구 발표의 장으로 삼아 교육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의화’ 교지는 한성 학원 발전 모습의 살아있는 역사로서 그 중요성을 크다.

표제 ‘의화’는 월간지 ‘의화’나 그 뜻을 같이히며 총 발행 부수는 37년 간 37호를 간행 하였다.

<1958-1977> 그림 김상완 (중고 종합지)

<1977> 중, 고 완전 분리부터는 매년 표지 그림이 바뀌었다

(그림 이두환) (고등학교 교지)

(4) 생활관 교육

여성 교육 목적 중 하나는 훌륭한 부덕 양성이다. 이를 위해 본교에서는 고등학교 건물 뒷편에 특별 교사를 지어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추고 생활관 교육장을 개설한 것 이 1959년 10월 1 일이었다. 이 날은 교장 선생님과 교시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 1 기 입소식을 하였다. 당시에는 3학년 졸업반을 대상으로 실시하였는 데 24 명 단위로 일주일

간 순번 입소하여 지도 교시-의 감독하에 합숙 훈련을 하였다.

교육 내용은 φ각종 음식 만들기, 밥상 차리기

@차 끓이는 법 실습

@예절 교육(한복 입는 법, 절 하는 법)

@강시- 초빙을 통한 정신 교육 등이었고

특히 예절 교육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 생활관 교육은 시대적 변천에 따라 3학년에서 2학년으로 다시 1 학년 대상으로 실시하였고 1980년대에 들어 학교에서 실시하지 않고 전문 수련원에서 실시하였는데(대성의 집, 명성 수련원) 교육 내용도 극기 훈련 또는 심성 훈련 중심으로 바뀌었다.

한편 우수 학생(반장, 회장)을 선발하여 간부 학생 수련회도 계속 되었는데 이는 서울시 교육청에서 실시하는 교육 프로그램의 하나로 사임딩- 교육원, 회-랑 교육원 등에서 실시해 오고 있다.

(5) 선행 학생 표창

불우이웃 돕기, 노인 공경, 소녀 가장 돕기 등 사회의 어두운 곳을 밝히는 착한 일을 한 학생을 발굴, 표창함으로 본인은 물론 타학생들에게 착한 심성을 갖도록 하는 선행, 덕행 학생 표창제로는 1957년부터 지 금 까지 계속되고 있다.

[1957 : 홍성옥(고이-원 무료 봉사), 1956 차병숙, 이명지-(이웃돕기), 1966 : 정순호(노인공경) ]

(6) 출석 성적, 청소 성적 우수반 표창

근면과 청결과 봉사 정신이 강한 품성을 육성하기 위해 창립 이후 부터 매월 그 달의 청소 출석 우수반을 선정 표창하고 ‘의화’지에 그 내용을 발표하였다. 그 결과 출석률이 크게 향상되고 청소상태도 많이

개선되었고 출석률이 가장 우수한 학교가 되었다 학생뿐 아니라 교사들도 연말을 기해 개근 교사를 표창하여 그 노고를 치하하였다.

(7) 어버이 날, 스승의 날 행사

효성이 극진했던 교장 선생님은 어버이날 행사에 쏟은 정성도 유별나, 매년 어머니날(5 월 8 일)이 면 어머님들을 학교에 초청하여 그 은혜와 노고에 감사하는 축제를 열었다. 각종 운동경기도 같이 하고 취주악부의 연주, 매스게임, 공연 등을 실시하여 즐겁게 하루를 보냈다. 아울러 장한 어머니를 매년 뽑아 표창하여 그 뜻을 기렸다. 이 행사는 1967년 5 월 8 일(제 12주년 어머니날)에 처음 시작하여 1972년까지 6회에 걸쳐 대대적인 행사를 하다가 이후에는 큰 행사는 없어져 갔다.

한편 5 월 15 일 스승의 날에는 학생들이 자치적£로 기념식을 주관케 하여 스승의 은혜에 대한 보은의 뜻을 전했다. 1969 년부터 시작된 이 행사는 기념식에 이어 선생님께 꽃을 달아 드리고 조그만 선물을 전하면서 사제지간의 정을 두럽게 했다. 이 날을 이용, 학교 당국에서 는 장기 근속자 교사를 표창하기도 하고 교사 체육대회를 열어 교사 상호간의 친목을 돈독히 하였다.

이러한 축제 행사들은 74년 평준화 실시기를 전후하여 차츰 행사가 줄어들고 그 의미도 퇴색되어 갔다.

(8) 수학여행

학교 수업의 연장으로 더욱 생생하고 현장감있는 교육 활동이 수학여행이다. 사적지를 탐방하면서 민족의 얼을 마음에 새기고 각종 병승지나, 산업 시찰을 통해서 젊음의 호연지기와 민족적 자긍심을 높임은 물론 젊음의 낭만을 한껏 발휘할 수 있는 여고 시절의 꽃다운 행사다. 본교에서 수학여행이 시작된 것은 1959 년 10월이었다. 실시대상 학년

은 3학년이었고 수학여행지는 경주와 부산, 해운대, 일정은 3박 4일이었다. 1972년부터는 2학년, 1986년부터는 l 학년을 대상으로 실시하여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장소도 약간씩 달랐으나 경주 중심은 변함이 없다.

(9) 자매부대 위문

분단 조국의 현실을 실감하고 올바른 국가관을 확립하고 국토 방위에 힘쓰는 장병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본교는 1962 년애 육군제 2839부대와 자매 결연을 맺었다. 전교생의 정성 어린 위문 편지와 위문품, 위문금을 가지고 교사 대표와 학생 대표가 부대를 방문하여 전달하고, 때로는 본교의 무용부, 연극부, 합창부, 취주악부 등의 위문활동도 있었고, 1970년에는 장병 돕기 바자회를 열기도 했다. 한편 자매부대에서도 직접 만든 싸리비를 학교에 기증하기도 하고 독수리 장

학금을 보내오기도 하면서 학교와 부대의 우의를 다졌다. 1970년대는 자매부대가 2355부대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10) 모내기 실습

농사의 중요성과 근로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모내기 실습을 매년 실시한 것은 본교 특유의 행사 중 하나이다. 서울 농대 실습장, 또는 시펌대 설습장에서 봄소풍 대신 종일 힘든 일을 봄소 체험케 함으로 농민들의 어려웅을 체득케 하고 식량의 귀중함도 알게 했다. 농촌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던 교장 선생님은 교내 의화 연못 앞에다 조그만 논을 만들어 벼를 심어 몽소 키워 학생들에게 보여 주기도 하고 본교교화 복화를 심어 현관 앞에 전시하기도 하여 주부 후보생인 여학생들에게 무언의 교육을 남기시기도 했다

(11) 한성의 지-부섬, 카드섹션

@ 카드섹션(card section) 이란

여러 층의 계단에 수천명이 앉아 각자가 지정된 순번의 카드를 구령에 맞춰 동시에 들어 올려 어떤 목적하는 바 그림을 스탠드에 그려내는 일종의 stand mass game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사용되는 카드는 대략 크기가 가로 세로 45cm 정도(가슴 넓이)이며 가운데 구멍이 뚫려있어 앞 지휘자를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한 학생이 9 색깔의 기본 카드와 특수 카드를 가지고 지정된 순번대로 지정된 카드를 얼굴 앞으로 들어 올리면 하나하나 카드의 색깔을 모아 스탠드 전체에 목적하는 바큰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다. 카드 섹션의 원리는 프랑스 자수와 같은 원리라 이야기 되고 있으나 그 만드는 모양의 유사점이 있을 뿐 어느나라에서 처음 창안하여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부분적으로 각종 오락 게임이나 장식에 이용하고 있어 stand recreation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우리나라를 비롯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각종 행사에서 두루

사용되고 있다.

@ 한국 카드섹션의 시작 : 한성여중.고

우리나라 차드 섹션은 우리학교가 1967 년 전국 체육대회에서 선을 보인 것이 처음이다 이는 1960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제 5 회 아시아 경기대회 개막식에서 연출된 것을 보고 당시 체육계의 원로 민관식 문교부 장관과 본교 김교장 선생님께서는 이를 전국 체전 행사에 이용해 보려고 궁리 중, 서울 운동장 스탠드가 마침 우리 학교 스탠드(지금 이 스탠드는 없어짐)와 모양과 크기가 같아 착안,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40 여종의 그림을 연출한 것이 고작이었으나 연출을 거듭하면서 수도 많아지고 규모와 모양도 다양해지고 사람의 얼굴까지 연출해냄으로 전국민의 사랑과 찬사를 아낌없이 받았다. 이 키-드 연출은 1971 년부터는 국군의 날 기념식(여의도 광장)에서도 실시함으로 전군의 사기 진

작에도 큰 몫을 한 바, 이는 한성의 자랑이요 국가의 자랑이었다. 각국의 대표들이 카드를 배우기 위해 본교를 방문하여 배워가기도 하였으니 한성의 카드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하였다.

카드섹션(박정희 대통렁 소상화)

@ 연습과 연출

카드는 일사분란한 단체 게임이기 때문에 그 준비와 연습이 결코 쉽지가 않으며 단결된 집단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고도의 단결력이 요구된다 행사 40 일전 2학기가 시작되면 우리 학교는 이 준비 및 연습을 시작한다. 주로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에 1 시간 정도 매일 연습을 한다 전교생이 스탠드에 앉고 앞에는 교장 선생님도 직접 참여하시고 하나하나 연습을 한다. 한 학생이라도 카드를 잘못 들면 전체 그림이 망가지는 것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긴장을 풀 수가 없는 중노동이다.

연습이 끝나면 행사 전날과 행사날에 서울 운동장 또는 여의도 광장(당시 5.16광장)에서 연출을 하는데 서울 운동장은 각자 가지만 5.16 광장에 갈때는 군용 트럭을 이용해서 집단적으로 가게 된다. 이른 새벽, 군용 트럭 50 여대에 전교생이 나누어 타고 학교에서 여의도까지가게 되는데 덮개도 없는 군용 트럭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한성여중.고라는 프레카드를 차옆에 달고 시민들의 환시속에서 오고 가는데 이 모습도 가히 장관으로 당시의 교사와 학생들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거리라 할 수 있다.

@ 연출 내용

전국 체전시

식순을 알리 는 글자

각 시도 대표 입장시 시도 상정의그림

대통령 치사시 초상화

식순에 맞춰 관계되 는 글자나 그림

국군의 날

식순을 얄리는 글자

각 부대 입장시 상징 그림

분열과 사열시 관계 되는 그림

대통령 치사시 내외분 초상

@ 카드 연출에 대한 각종 훈표상 수상

1968 카드섹션 공로에 대한 대통령 표창과 하사금 수상

1969 카드섹션 공로에 대한 문교부 장관 표창

카드섹션 공로에 대한 체육회장 감사장 수여

1970 카드섹션 연출 공로로 김영희 교장, 임양수 교김, 이인영 선생 국민훈장 석류장 표상

대통령 하시-금과 단체 표칭(대통령 수치 수상)

1971 국방부 및 각군에서 표칭패 수여

1975 국방부에서 대형 시계 기증

@ 연출일지

1967 전국 체전 입장시 처음 연출 (40 여종)

1968 제 49 회 전국 체전 참가(서울 운동장. 2 , 800 명 참기 80여종 연출. 박대통령 초상화 동장)

1969 제 50 회 전국 체전 참가(박대통령 내외분 초상화 연출. 257종 연출)

1971 전국 체전, 국군의 날 참가

에디오피아 군인 대 표 본교 방문, 카드섹션 배워가다.

1972 체전, 국군의 날 참가

1973 체전, 국군의 날 참가

1974 체전, 국군의 날 참가

1975 체전, 국군의 날 참가

1979 카드 없어짐. 이후에는 본교에서 실시하지 않고 상업 고등학교로 넘어감.

@카드 연출에 대한 각계의 찬사(신문기사 제목)

반세기의 체전은 카드섹션으로부터, 삼천 의화 슬기가 여기 꽃피다. (‘의화’지)

색종이의 묘기 체전에 첫선, 절찬받은 카드섹션 (1967.10.7. 서울신문)

카드섹션, 오색찬란하게 스탠드에 꽃피우지-4만 관중의 박수 갈채, 메인스타디움이 떠나 갈 듯 (1967.10.7. 서 울신문)

펼쳐지는 카드섹션 힘찬 국력 수놓아(1969.10 .24 . 대한일보)

카드섹션 마스게 임 표창, 박대통령 문교부 장관에 지시 (1969 . 10. 31. 조선일보)

장관의 카드섹션 우렁찬 팡파르 (1967.10.6 통아일보)

힘찬 율동, 가을 하늘 아래 만개(1 970.1 0.6. 경향신문)

민족의 염원 그린 한성 여그 카드섹션 , 장관의 극치 (1970. 10 . 6. 중앙일보)

화려한 입 장식 카드섹션, 겨례의 합창, 약동의 젊음 펼쳐(1 970. 10. 6. 일간스포츠)

소문난 학교 한성여중고, 카드섹션과 브라스 밴드(1968 . 1 1.4 . 경향신문)

(12) 4.19 학생 혁명과 본교 진영숙 학생 순국

1960년 4 월 19 일,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에 길이 빛날, 한국 학생운동사의 이정표가 될 4.19 학생 혁명의 날이다. 3.15 부정 선거와 자유당 독재 정치를 타도하겠다는 학생 시위 운동을 총칼로 저지하겠다는 당국의 강경조치 때문에 아깝게도 수많은 학생들이 민주제단 앞에 희생되는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학생 혁명 운동에 본교가 무관할 수가 없었다. 일찍부터 민족정신과 의를 학교 정신으로 삼아 교육해 온 학교 전통은 헛되지 않아 이 운동에 앞장서 활약하였다(당시의 교훈에는 ‘씩씩한 일군이 되자’, ‘죽음으로써 나라를 지키자’라고 되어 있었다). ‘의’에 살고 죽자던 본교생 다수는 독재 타도를 외치는 시위대에 자동적으로 참여하게 되었

고 이 학생 혁명 과정에서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진영숙양이 총탄을 맞고 민주제단에 희생되고 말았다 이날 진양은 어머님께 유서 한장을 남기고 종로 거리에서 장열하게 희생되고 말았으니 가정과 학교의 비통함은 컸다. 그러나 그의 의거는 헛된 죽음은 아니다. 민주 역사의 한장을 장식하는 쾌거이며, 한성 정신의 보배로운 발로로서 우리학교는 민족과 역사 앞에 살아 있는 교육 도장으로 떳떳하였으며, 우리 모두 가 이어갈 의화 정신의 귀감으로 길이 길이 이 학교와 함께 전해져 내려가리라.

(진양의 유서)

) 1

φ 유서내용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곁까지 부정선거 데모로 싸우겠읍니다. 지금 저의 모든 동무들 그리고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하여 피를 흘립니다. 어머님께서는 데모에 나가는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연 누구가

데모하겠읍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압니다. 그러나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읍니다. 저의 모든 학우들 죽음을 각오하고 나간 것입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읍니다. 어머니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만,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기뻐해주세요. 이미 저의 마음은 거리로 나가있읍니다. 너무도 조급하여서 손이 잘 놀려지지 않는군요. 부디 몸 건강히 게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칠려고 결심하였읍니다. 시간이 없는 관계상 이만 그치겠읍니다.

2 조시

4월에 지는 봄

넌 벗꽃 진 하이얀 그 길로 갔다

숙아!

너와 친하자던 한 울타리에

하찮은 일에도 웃고 울던 소녀야!

그 책상머리에 고였던

네 눈빛의 자취와

수면처럼 고요한 그 마음을 몰랐노라

깃빨하나 찢어지고

꽃도 하나 스러진

힘찬 용기를 남기며

이제 막 눈트려는

파아란 싹이

무잠이도 끽이고 마는

오늘 四九

피외 바꾸자던 주권앞에

자꾸만 주저되는 마음아!

치라리 살아있다는 것이

부끄러운 마음들이

네 혼앞에

머리숙여 들 줄 모르고

정녕 오늘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미지막 옷 자락을 집는다,

우린 모두

앞일을 모르는 철부지

그에 넌 四월에 졌다

이 눈 서운 봄날을

뉘게 주려고

四 -九 순국학생 본교 中二

陳永淑故影

당시 ‘의화’지에 실린 조시의 제목

민주 제단에 뿌린 피. 아! 장하다 진양의 의거

민주주의 교본될 유서 한장 남기고 결사대로 뛰어든 한성의 유관순

장하여라 민족의 횃불

진영:의 의혈에 재미교포들도 갔음

@ 본교에서는 진양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960년 5 월 17 일 학교 교정에서 위령제를 거행하고 이후 1962년에는 본 중학교에서 병예 졸업장을 전달하였고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삼학송 옆에다 추모비를 세웠다(지금은 없어짐). 국가에서는 1962 년 건국 포상을 수여하고 가족돕기 장학회를 설립하였다. 민주 정신의 불시-조 진양의 넋이여 편히

쉬리라

3) 특활부 활약

50년대와 60년대는 특활반 활약 시대라 할 만큼 특활부 각부분에 괄목할 만한 발전을 보아 대내외적으로 학교의 위상을 높힌 때이다. 특활부 활동이란 일반 교육 활동에서 도야하기 어려운 교육 훈련을 쌓는 과정으로 학생들로 하여금 집단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고 자기 취미와 소질을 연마하는 기회를 통해서 심신의 조화로운 발달을 도모하고 민주시민으로서 자질 함양을 목적으로 하는 전인 교육의 실천이다.

본교에서는 여러가지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특활반 육성에 심혈을 기울인 바, 개인의 정서 함양과 개성 신장은 물론 학술과 예술, 체육 퉁에서 타학교의 모범이 되었고 각계 각층으로부터 찬사와 훈표상을 받아 학교와 학생의 사기가 충천했었다

학예 부문에서는 연극부, 취주악부, 무용부, 웅변부, 음악부, 미술부, 서예부, 문예부 등에서 각종 전국대회를 석권하였고 체능 부문에서는 탁구부, 정구부, 핸드볼부, 육상부, 배구부 퉁이 체육 한성의 깃발을 각 운동장에서 휘날리며 개선하였다

(1) 연극부의 활약(지도교사: 김영진)

연극부는 창학기서부터 의욕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각종 기념행사때 학교 자체에서 독자적으로 만든 연극을 공연하여 찬사를 받았다. 전교생을 대상으로 공연하기도 하고 졸업생 학부모를 초청하여 공연하기도 했으며, 지역 사회 일반인들에게까지 공연하기도 했다. 특히나 1963 년 제 6회 종합 예술제때는 드라마센터에서 오페라 ‘춘향전’을 일

반에게 공연함으로 학생 오페라 공연의 신기원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연도 공연내용

1958.12.20. 신교사 입주식대 ‘정의의 길’ 공연(제1회 예술제)

1958 졸업생 환송회 때 ‘마의 태자’ 공연

1959.10.3 1. 개교 14주년 기념 ‘신라의 애사’ 공연

1959 제9회 졸업생 환송회 ‘어둠을 헤치고’ 공연(제2회 예술제)

1960 제3회 예술제 ‘ 화랑도 ’ 공연(전교생 에 공연, 졸업 생 학부모에 공연, 일반에 공연)

1961 제4회 종합 예술제 ‘호동왕자’ 공연

1962.10.12-14 제5회 예술제(전교생에 공연, 국민학생에 공연, 일반에 공연)

1963.10.5-6 제6회 예술제 오페라 ‘춘향전’ 공연. 드라마센터에서 일반에 공연

1965 제7회 예술제 ‘낙링공주’ 공연

(2) 취주악부(한국여성 취주악부의 원조)

취주악부의 창설 목적

‘한성 하면 밴드, 밴드하면 한성’을 연상케 할 정도로 본교 취주악부의 약진은 대한성의 상징이며 우리만의 자랑이다 약 30년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성 취주악부의 탄생은 해방의 기쁨과 더불어 본교의 발족과 동시에 비롯되었다.

당시의 사회상은 일제 식민지 지배 체제로부터 해방된 직후라 사회의 모든 풍조가 봉건적 사상에서 탈피하지 못하여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말할 수 없이 열등시되었고 남존여 비 의 사상이 우리 사회에 극히 지배적이었던 시기였다. 이와 같은 세태에 즈음하여 본교의 설립자 이신 김의형 교장선생님께서는 다년간의 우리나라 여성 교육의 경험에

비추어 여성의 정서 교육의 시급한 앙양과 여성의 열등한 사회적 지위향상이란 민주적 이념에 입각해서 취주악부를 창설하였다. 남학생들도 하기 힘든 관악기를 가지고 여학생만으로 구성된 밴드부는 수많은 고난과 애로에도 불구하고 ‘여자도 할 수 있다’는 신념아래 대내외적으로 눈부시게 활약하여 여성의 긍지를 심어주고 학생들에게 애교심과 자부심을 심어주었다.

@ 활동 내용

처음에 20 인조에서 40인조로 발전한 본교 밴드부는 학교의 각종 행사(입학식, 졸업식, 애국조호, 각종 운동대회, 각종 예술제)는 물론 국가적 행사에도 참여하였고 각계 각층의 초청을 받아 연주하기도 하고 각 방송국에서도 연주 활동을 계속하는 등 여성의 힘을 과시하고 한성인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다. 이렇듯 한성여고의 활발했던 취주악부 활동에 비해 현재 이를 전해주는 구체적인 자료를 접할 수 없음은 매우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다행이도 1959년도 한해의 활동 기록이 있어 이를 통해 당시 취주악부의 활약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이를 편의상 표로 만들어 보면 아래와 같다.

연도 활동내용

1958 일산국민학교 초청연주회

본교 중.고등학교 졸업식 참가

삼선국민학교 졸업식 참가

3.1절 기념행사 참가

본교 종고등학교 신입생 입학식에 참가

춘계 청소 작업 성북구 행사에 참가

제일 교포 북송 반대 데모에 참가

6.25 기념 행사에 참가

1959 서울특벨시 학도호국단 주최 체육대회 입장식 참가

세계일보사 주최 전국 정구 대회 개막식에 참가

유격회관 낙성식에 참가

전국 체육대회 지방대표 환영에 참가

윤교감 선생님 교육 공포 표창식에 참가

본교 예술제 참가

추계 청소작업 성북구 행사 참가와 학생의 날 기념행사에 참가

진영숙 위령제 참가

이대 음대 주최 음악 콩클 애서 입상

1960 HLKA 방송국 초청 연주회

제3회 예술제 참가

1961 미 대통령 아이크 환영회 참가

종협예술제 공연시 ‘대한성을 노래합시다’ 공연

제8회 이대 음대 주최 음악 콩클에서 입상

제2공화국 수립 기념 행사에 참여

취주악부 연습 장면

@ 해체의 아쉬움

1974년 고교 평준화 실시로 고등학교는 대학입시 경쟁시대를 맞게 되어 실력 향상이란 지상 명령때문에, 재정적 어려움때문에 밴드부는 없어지기 시작했고 상업계 고등학교의 몫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3) 무용부 활동 일지(지도교사: 이순희, 양일권)

50, 60년대 휠-약한 특활부 활동 가운데 빼놀 수 없는 것이 무용부의 할동이다. 여성교육의 선두 주지-로서 본교가 여성적 건강미와 아름다움의 극치라 할 수 있는 무용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했다. 정규무용시간은 물론 특활활동의 히-니-로 무용부를 조직하여 보다 전문적인 기술을 개발, 보급하는 데도 앞장 서 여고생 무용부의 모법을 보였다. 이는 각종대회에서 본교 무용부가 매번 입상한 사실이 이 를 잘 반영해 주고 있다. 따라서 무용부의 활약은 자연 한성여고의 학교 명예를 높혀주는 데 큰목을 차지 했던 것이다.

이 시기 무용콩쿨대회는 수도여사대(현 세종대학교), 경희대, 덕성여대 등에서 주최하는 대회가 가장 큰 것이었는 데 이 대회에 출전한 본교 무용부는 매번 대회를 석권함으로써 한성학원의 이름을 드높혔다. 이 시기 무용부 출신 가운데는 현재 한국무용계의 중진으로 발전해 활동하는 졸업생이 다수 있다. 1 950년대 이후 70년대 초반까지 본교 무용부의 입상 경력과 입상자 명단 등을 정리해 보면 아래의 〈표〉와 같다.

연도 활동내용

1958.10.18 서울 특별시 학도호국단 매스게임 참가

1959.10.17-18. 덕성여자대학 주최 전국 국악경연대회 무용 3등 고 3-1임희진

1961.10.25. 제 4 회 예술제 농악 공연

1968 강선영 무용단 동남아 순회공연 본교 고3 최정식 참가 활약

1971.9.1 4-15. 수도여사대 주최 전국 여자중고등학교 무용경연대회

1972.10.18. 수도여사대 주최 무용 콩쿨 2등 고3 최명순

1973.9.14-15. 수도여사대 주최 무용 콩쿨 2등 고3 이벙희

1973.9.20-21. 경희대 주최 무용경연대회 고3 이명희 차하상, 중2 강명희 3등

(4) 웅변부 활동

본교의 창학 이념과 교육 목표는 ‘사회발전과 민족중흥에 기여할 수 있는 여성인재의 양성’에 두고 있다. 본교의 웅변부(지도교사: 남주희) 육성과 활발한 활동은 이러한 본교와 한성학원의 창학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의 하나였다. 아래의 활동일지에서 보듯 한성여고 웅변부 활약은 대단했다. 서울시 주최 웅변대회를 비롯해 각 대학의 웅변대회 그리고 전국 규모의 대회에 참가하여 우승함으로써 학교의 명예를 높혔다. 특히 50, 60년대 반공교육이 강화되던 시기 반공과 관련된 웅변대회가 자주 있었는 데 이러한 대회마다 본교 웅변부가 참가해 매번 우승을 차지했던 것이다. 이같은 웅변대회는 7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때마다 본교 웅변부의 활약이 눈부셨다. 한편 웅변부 활동과 관련해 본교의 영어과와 웅변부가 주축이 되어 전국 규모의 영어웅변대회를 개최한 것은 주목되는 활동이었다 할 것이다 아래의 〈표〉는 웅변부의 활동과 입상자 명단을 정리한 것이다.

교내 웅변대회 모습

연도 활동내용

1956.10.23. 방첩웅변대회 2등입싱상 고2 이교식(성북경찰서 주최 남여 중고등학교 방첩웅변대회)

1957.10.20. 방화사상 고취 교내 웅변대회

1958.6.25 ’ 6.25웅변대회와 행진

1958.8.6. 제4회 방첩고취 웅변대회 개최

1959.6.25 6.25멸공정신 함양 웅변대회

시민반공대회 참기(고2-2)

학교장 6.25 회고담

1959 방첩주간행사 성북경찰서 주최 웅변대회 1등 고 1-1 이승

1960.12.1 공주에서 개선, 전국 남여웅변대회 고 1 -4 우금자 문교 장관상 수상, 고2-3 이승 김학준 의원상

1961.3.27. 국무총리 특별상 수상 . 이승(고 3-3). 대한혁도 동지회 서울시 본부 주최 반공사상 재무장 촉진 전국 남여 중고등학교 웅변대회

시상자 전국순회대회 개최(서울, 대전, 공주, 이리, 전주, 광주, 목포 순회대회)

1961. 11.19 동국대 주최 전국 학생 웅변대회 단체우승, 우승기 획득

1961. 11.24. 성균관대 주최 전국 학생웅변대회 단체 우승, 우승기 획득.

우금자 개인상 최우수상 수상. 이승 우수상 수상

1962.5.20 단국대 주최 재건학생회 주최 웅변대회 개가

1963.6.23. 5 .16 개념, 6.25 기념 국어, 영어 웅변대회 개최

1963.6.25. 웅변대회

1968 6.25 교내 웅변대회 1등 고3 유연화, 박순천

1968 년 이후 1 977까지 6.25웅변대회 계속

(5) 음악부 활동

이 시대는 각 학교마다 여학생 정서함양을 위해 음악 콩쿨대회(합창대회)를 다투어 실시하였다. 우리학교도 밴드부와 함께 음악부(지도교사: 김명길, 유인경, 정운철)의 활동이 활발하였다. 1962년 제 1 회 음악경연대회를 시작으로 1993년 제 4회를 맞이한 교내 합창대회는 우리학교의 주요행사의 하나로써 뿌리를 내렸다. 처음에는 합창, 독창, 중창은 물론 피아노 및 기악까지 포함하는 ‘종합음악제’로까지 실시해오다가 70년대 후반부터 규모를 축소해 반별 합창대회로 현재는 실시하고 있다. 합창대회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은 매우 커서 대회 몇개월전부터 연습을 하고 대회에 임박해서는 강당 무대에서의 연습을 위해 새벽 3,4시에 등교 하는 열심을 보일만람 관심이 높았다.

교내 합창대회

음악부 활동 일지

연도 활동내용

1959 개교 14주년 기념 예술제 공연

1962.11.22. K-TV출연

1962 제1회 교내 음악 경연대회(합창, 중창, 독창, 피아노, 클라리넷부 다수 입상)

1963.6.8. 동아 방송국 개국 기념 중창 콩쿨에서 우승

1963.10.25-27 제2회 교내 음악 콩쿨 대회

1964 제3회 교내 음익 콩랄 패회(종합상 중 1-7, 고 1-7)

1966 제5회 교내 음악 콩쿨 대회(종합상 중2-1 , 고2-1)

제6회 교내 음악 콩쿨 대회 : 기악부 1 동 중 이해진, 고

1967 임옥재 독창부 1동 중1 김현경 , 중2 이병숙, 고 1 정혜심, 고2 김송이 중창부 1등 중 이혜선 팀, 고 김선기 팀 합창부 1동 중 1-1, 중2-8, 고 1-3, 고2-7

1968 제7회 교내 음악 경연대회

제9회 교내 음악 경연대회. 합창1등 중 1-1 , 고 1-5

1970 개인 부 기악 1등 중 1-12 김성희, 고2-3 이인희 성악 1등 중 1 -4 이정란, 고2-5 이병숙

제12회 교내 음악 경연대회: 피아노1 등 중2-8 유미경, 고

1973 1-2 허성희 성악 1 등 중2-10 이재령, 고 1-5 김혜연 합창 1등 중 1-3 , 2-8, 고 1-3, 2-4

1974 제13회 교내 음악 경연대회: 합창1등 중 1-12, 2-1, 고 1-7, 2-4 성악 1 등 중3-3 김정숙, 고 1-7 김은정 피아노 1 등 중 1-7 신재우, 고 1-5 이혜영

1975 제14회 교내 합창대회 . 합창우승 고2-2

(6) 미술부 활동

‘전인교육’을 지향했던 본교는 학업에 충실히 실시하여 실력을 양성하는 한편 예체능 교육을 강회해 학생들의 정서함양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으니 그중에 하나가 바로 미술부(지도교사: 김상완, 임숙경, 이두환) 활동이다. 본교 미술부는 우선 전교생을 대상으로하는 교내 미술대회를 개최하여 그램 그리기에 소양있는 학생들을 선발, 미술부를 조직하여 지속적으로 지도함으로써 이후 큰 성과를 가져왔다. 즉 본교 주최로 여러번의 미술전람회를 개최하였으며 대학등 이 분야의 각종 대회에 참가해 수상의 영예를 차지했던 것이다. 특히 1963년 동양화랑에서 한성여중고 미술 전람회를 1 주일간 열어 관람자들의 찬사와 미술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1968년에도 YMCA강당에서 본교 4회 미술 전람회를 여는 등 그 활약이 대단했다.

한성여중고 미술전시회

미술부 활동 일지

연도 활동내용

1956.10. 서울시 주최 전국 방첩 포스터전 1등 당선(중 3-2 이양순, 고 1-1 최부자)

1958.10.31 대한 미 술협 회 주최 잔국 중고등학교 스켓치대회 (100% 입선, 특선 가가작, 입선 당선)

1959 전국 애림녹화사상 앙양 포스터 모집 가작, 입선 당선(고 2-2 유정오가, 유주숙, 이양숙)

1959.5.31. 대한민국 미 술교육연훼 회 주최 스켓치 대회(12명 입선)

1959 홍익대 미술대 주최 스켓치 대회 당선(수채화 특선 고 3 -2 윤주숙 등 다수 입선)

1960 홍익대 미술대 주최 스켓치 대회 당선(수채회부 입선 6명 당선)

1962.5.30. 단국대 주최 미술 실기대회 다수입상

1963.4.21. 전국 아동시생대회 김독으로 본교생 동원(동아일보 주최, 덕수궁 에서)

1963.10.4-9. 한성여중고 미술전람회(동랑화랑에서)

1964 교내 미술전시회

1966.5.4. 제2회 전국 초중고 파스텔화 실기대회 다수입선(서울 신문사 주최)

임경숙 선생 미술 지도자상 수상

1968. 11.19-22. 본교 제4회 미술 전람회 (YMCA강당 에서)

(7) 서예부 활동 일지(지도교사: 신달우)

우리학교 서예부의 활동은 지도교사 신달우 선생의 노력에 힘입은 바 크다 신선생은 당시 자타가 인정하는 서예가의 한 사람이었다. 국전에 수차례 입상경력을 갖고 있는 신선생은 국전 추천작가의 한분이 기도 했다. 또한 서예교본을 편찬 감수한 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서예계의 권위자를 지도선생으로 본교 서예부가 활동했기에 그 활약 또한 눈부셨다. 즉 매년 실시하는 전국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여러번 수상하였으니 현재도 당시 활동한 졸업생들이 중심이되어 ‘한묵회’라는 서예연구회를 조직 활발하게 활약중이다.

서예부 활동 일지

연도 활동내용

1963.4.28. 전국 학생휘호대회 특선 2명 당선(중3 홍순기, 고2 김병혜)

1964.4.26. 제 4회 전국 남여 휘호대회 중학교 단체우승, 고등학교 장려상(상명여고 강당에서)

1966 중앙일보 주최 중앙서예전 본교 서예부 단체상, 문교장관상 수상

한국 서예교육협의회 주최 서예경서대회 중등부 우승

1967.5.16. 동국대 주최 서예경서대회 최우수상 수상

1967 서예부 한국서예전 석권

1968.5.29. 전국중고 서예경서대회 최고성적발휘(수도사대주최)

1968 전국 교원 서예강습회 개최(본교에서, 강사: 신달우 교사)

1974대한 서예교육과 협회 주최 서연대회 우수상 중1 김명희, 중3 최복희

수도사대 주최 우수상 중3 최복희, 중1 김병희

제4회 대한 서예학회 주최 단체상 수상

동방연서회와 동아일보 공동주최 최우수상 중1 김맹희, 우수상 3명

성균관대 주최 서예 대회 특선 중3 최복흐, 중 1 김명희

(8) 문예부 활동

본교 문예부(지도교사: 윤태영, 박재열, 이무일, 조주옥, 최성희)의 활동도 할발했다. 문예 창작활동을 통한 자기 표현의 장으로 각종 백일장 참여는 물론 현상 공모전에 많은 학생이 입상하는 의욕적인 활동을 보였다. 창학기부터 문예 반원들은 문학작품 낭송과 감상 그리고 독후감 발표회 등 개인의 문학 역량을 특활 시간에 발표하기도 하고 방과 후에는 문예실에서 현역 문인을 초빙, 강연회를 갖기도 하였다. 한편 학교에서 매년 교내 문예 백일장을 실시하여 학생들의 문학 자질 함양과 정서 교육에 노력하였 다.

문예부 활동일지

연도 활동내용

1959.5 학도호국단 주최 제5회 전국 남여 중고동학교 현상문예작품 모집 당선(고 3-1 성춘자, 중3 김기옥)

1959.6.16. 제1회 문학좌담회 개최

1959.10. 한양대 주최 전국 남여 중고등학교 문예작품 낭송회(꽁트 1석: 문교부장관싱· 고3-1 윤태숙, 시: 입상 고 2-1 민욱자, 수필: 입상 고 1-3 이정희)

1960.10.8. 한양대 주최 전국 남여 중고등학교 문예작품 낭송회(꽁트부 1석 당선 고 이지자)

1963.5.4. 동국 대 주최 전국 남여고고1 백일장 특선 당선(고3 흥청자)

1963.7.5. 교내 글짓기대회

1964.7.2. 교내 글짓기대회(장윈 고 1-5 김영숙, 고3-6 김은희)

1965.5.25 교내 글짓기대회(장원 중3-4 권혁수, 고3-5 김복희)

1965 제3회 동경 문학 콩쿨 당선

1966 제4회 달 짓기대회(장원 중2-2 정진숙, 고3-5 윤선희)

1967 제5회 글짓기대회(장원 중 박계성, 고 이옥경)

1968 제6회 글짓기대회(장원 중 윤여희, 고 강복희)

1971 제9회 글짓기대회

1972 제10회 글짓기대회(장원 고3 정미소, 중2 강현숙)

1976 글짓기(장원 고3 이미선, 중 1 두숙)

제 3 절 ‘체육 한성’을 빛낸 운동부 활약

설립자 김교장은 체육대학 출신의 체육인이었다. 그가 한국 체육 발전에 공헌한 바는 몇 줄의 글로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지대하다. 한국 현대 체육사는 우리 교장선생님 없이는 말할 수 없다. 각종 체육회 임원을 역임하여 국가 체육발전에 공헌한 바 크시며 본교 경영에 있어서도 이 점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할 수 있다.

‘체력은 국력’, ‘여성 건강은 나라의 보배’라는 뚜렷한 신념 아래 여학생 체육 활동의 본을 보였다. 여학교 체육관을 처음 건립하신 점, 여학생 수영장을 국제 규격에 맞게 건설하신 점, 각종 운동부를 지원 격려하시어 일간신문의 스포츠란을 ‘한성’으로 장식하신 점 등 실로 체육계의 거인으로서 그의 면모와 한성학원의 위용은 한국 여성 체육의

선두주자로서 찬연히 빛난다. 본교사 동서쪽 현관에 장식되어 있는 수많은 우승기, 상장, 상패 우승컵은 체육한성의 금자탑이며 우리 학교의 자랑이자 심장이다.

1) 탁구부 활동

1950년대 60년대 초는 탁구부(지도교사: 이인영)의 활약이 가장 돋보였다 할 수 있다. 전국체전을 비롯 각종 대회 를 수십차례 석권하였고 또 우리학교에서 각종 탁구대회를 주최하기도 하여 후진 양성을 위해 노력하였다. 본교 탁구부의 활약은 눈부셨다.

1952년부터 전국 남녀 중고등학교 닥구대회를 석권하기 시작한 이래 매년 전국 규모의 대회에서 늘 우승을 독차지할 만큼 활발하였으니 활동 내용을 연도별로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탁구부 활동 일지

연도 활동내용

1952-1955 전국대회 석권

1956.10.24-29. 제11회 전국 희생 탁구대회 및 제2회 전국 남여 중고등학교 탁구 선수권 대회 무적한성 틱구부 전국 제패 개인전, 단체전 석권(딘식: 준우승, 복식: 우승 문양지 이정희 조)

1957.4.30. 서울 특밸시 탁구 협회 주최 남여 선수권 대회(서울 중고등학교 교정)

단식 우승 중 3-3 이정희, 복식 준우승, 단체전 3위

1957.10. 1. 울특별시 학도호국단 주최 시내 중고동학교 제6회 탁구대회(서울운동장)

중등부 우승 이정희, 한명자, 이유지 김영내

고등부 준우승 이등자, 문양자

1958.5.1 6-18. 대한 탁구협회 주최 중고등학교대상 틱구대회(서울상고) 단식 우승 중3 김유자, 3등 중3 김순해

1958.8.16-19 서울 특별시 탁구 대표로 선발되다

중 3-3 이유자, 중2-3 권성자, 중2-4 이문자

1958.9. 18-19. 서울특별시 대표로 대전 전국대회 참가 우승

1959.6.27 전국 탁구 선수권 대회 우승

중등부 대표로 선발, 단체전, 개인전 우승

1959.6.27 세계일보사 주최 84회 이대통령 탄신 경축 탁구 대회 우승, 중3 이문자, 김병진, 권성자

1959.9.2-4 서울특별시 학도호국단 주최 틱구대회 본교 강당에서 개최(본교 3등)

2) 핸드볼부(송구부) 활동

본교 핸드볼부 활약도 탁구부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활발했다. 1959년 핸드볼부 창립된 이래 국내 중고등부 핸드볼부 시함의 우승을 휩쓴 것은 물론 일본 체육대학의 초청을 받아 해외 원정까지 나아가 우승하는 그 활동이 매우 활발해 한성의 이름을 국내외로 홍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핸드볼부와 그 밖에 운동부의 주요활동 내용을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핸드볼부 활동 일지

연도 활동내용

1959 송구반 조직 활동 시작

1960.10.29. 대한헨드볼 협회 주최 한일 친선경기 오픈게임에 본교 출전

1961.10.2 1. 일본 체육대학 핸드볼부 초청경기에 본교 핸드볼부 오픈게임 참가(일본체대에서 감사장 보내옴)

1962.9.6. 한일친선 핸드볼부 경기 일본선수단 본교 방문

1962.8.22. 서울특별시 중학교 핸드볼 경기대회 본교에서 개최(본교 우송)

1963.5.25-26. 국민학교 대항 핸 E 볼 경기대회 본교에서 개최 (본교와 대한 핸드볼협호 공동 주최 본교 운동장)

우승 남: 안산국민학교, 여: 충무국민학교

1965.5.3 1. 고교 핸드볼 선수권 대회(부산) 준우승

1965 춘계 종별 연맹전 우승

일본 남여 고교초청 대향팀 선발전 준우승

서울특별시 종별 선수권 대회 우승

전국 종별 선수권 대회 준우승

서울특별시 체육대회 우승

서울특별시 학도 체육대회 우승

1966 제4회 국민학교 대항 핸드볼 경기대회 개최(본교체육관)ㅓ 우승 남: 강원 남춘천국민학교, 여: 경기 광주동부국민학교

1967 제2회 전국 학도체육대회 핸드볼부 우승

1968 전국 선수권 대회 최우수팀으로 추천됨

대한 핸드볼 협회 주최, 본교 체육관에서 거행

3) 정구부 활동

아래 활동일지에서 보듯 본교의 정구부(연식정구,지도교사: 김종옥, 김현수)의 활약도 매우 괄목한만 했다. 김종욱, 김현수 선생 지도아래 성장한 정구부는 학교 내에 정구코트를 만들고 선수들을 선발하여 맹연습을 해 서울시 대표 선수권과 전국 체전에서 우숭하는 등의 성과를 올렀 다. 특히 중학교 팀의 활약이 더욱 넷났으 니 1 965 년 한일친선 경기 를 위해 일본까지 원정경기를 갖기까지 하였다

정구부 활동 일지

연도 활동내용

1962.8.29-30. 서울대 약대 주최 정구대회(무학여고)

서울대표선수권 획득(결승전 한성:신광 3:2)

1962.10.2 1. 제43회 전국체전 정구부 재패, 중등부 선수권 장악

1963.4 .11. 서울특별시 남여 중고등학교 춘계 정구대회 우승기 셋을 독차지(대한정구협회 주최)

1963.6.2-4. 전국 여자 연식정구대회 본교 중학팀 연스의 개가: 우승기 독차지(서울운동장)

1963.9.13. 전국 종별 정구 선수권 대회 우승(부산공설운동장)

1963.9.15 성북경찰서 주관 관공서 기관별 정구대회 본교 교직원팀

1964 춘계 각종 정구대회 본교팀 우승기 셋 수상

1965 한일 친선 정구원정

1965 R.S.B컵 쟁탈전 우승

4) 육상부 활동

육상부(지도교사: 강건영, 정광수, 박영환)는 우리학교의 운동부 가운데 가장 역사가 지니고 있다. 설립자 우촌 선생의 각별한 관심과 지도하에 육성된 육상부는 지도교사와 코치들의 노력으로 ‘체육한성’의 기초가 되었다.바탕을 이루었다. 한성체육하면 육상부를 떠올릴만큼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 달리기는 물론 투포환, 투창, 원반던지기, 높히뛰기, 멀리뛰기 등에서 발굴의 실력을 발휘하여 각종 일간지의 스포란을 크게 장식하였다 따라서 우리 학교 체육부 활약중 가장 많은 우승기와 우승컵을 회득한 운동부도 역시 육상부였다. 이러한 성과로 우촌 김의형 학교장께서 중고교 육상경기연맹 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각종 대회에서 획득한 우승컵

육상부 활동 일지

연도 활동내용

1959.10.15-17. 서울특별시 학도호국단 주최 제8회 체육대회 출전

중2-4 이신자 600m 3등, 중3-1 400m 3등

1960.9.3-13. 서울특별시 체육대회 및 전국체전 예선대회 여고부 800m 3위 고 1-4 강윤자 서울시 대표로 선발

1963.9.21. 제21회 학도 체육대회 중학부 종합 3위

육상 5명 서울특별시 대표선수로 피선

1963.9. 제 44 회 전국 체육대회 본교 선수 다수 참가

1964 제45회 전국 체육대회 본교 선수 다수 참가 넓이뛰기 황정인 우승

1965.29-30. 아시아 경기대회 본교 선수 6 명 선발됨

1966.4 .29-5.5. 제15회 서울특별시 학도 체육대회(서울운동장)

중-준우승, 고-3위 입상

제48회 전국체전 우승

제15회 서울특별시 학도 체육대회(중등부 트랙부, 필드부, 종합우승. 고등부 트랙부 우승. 필드부 종합 준우승)

제1회 서울특별시 남여 중고등학교 학년별 대항 육상경기대회(중학교 1,2 학년 우승, 3학년 준우승, 고등학교 1,2 학년 우승, 종합 준우승)

1966 제1회 전국 학도체육대회(중학교 서울대표로 6명 출전 우승, 고등학교 서울 대표로 7명 출전 우승)

아세아 경기대회 파견선수 3차 선발대회(고등부 6명 출전 4명 입선)

제47회 전국 체육대회(중등부 5명 출전, 고등부 7명 출전 4명 우승)

1967 제16회 서울 학도체육대회(여중부 준우승, 여고부 우승)

제2회 전국 학도체육대회 육상부 우승

1968 한국일보사 주최 범국민 체조 보급을 위한 마스게임 참가 (중 3, 고1. 효창구장)

1975 여교 육상대회 우승

1976 제 2회서울 사립 여자고등학교 육상경기대회 우승

5) 배구부 활동

본교 배구부(지도교사: 전해인, 윤성열)는 60,70 년대 그 활약이 대단했다. 중등부, 고등부 배구부가 함께 활동했던 본교 배구부는 1965년 부산에서 개최된 전국 배구선수권대회에서의 우승했으며 이 대회에서 본교 선수 이정자 양이 최우수 선수로 선발되기도 했다. 이러한 성과로 1968 년 일본 전지 훈련까지 다녀왔으며 이후 각종 배구대회에 참가해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현재 그 화려한 전적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아래와 같이 일부가 전해질 뿐이다.

배구부 활동 일지

연표 활동내용

1962.5. 16. 5. 16 기념 배구대회 우승

1965 배구패권 전국 선수권 대회 우승(부산) 최우수 선수 이정자

1966.4 .1-7. 춘계 연맹전 우승(중등부)

1966.12.12. 배구 추계 연맹전 여중 1 부 우승, 여고 1부 준우승

1968 일본에서 배구 전지 훈련

1976 자매부대와 친선경기

위에서 소개한 각 부문의 활동 내용은 빙산의 일각이고 모든 분야에서 활약이 대단하였으리라 짐작되나 기록의 부족으로 전모를 밝힐 수 없어 안타깝다.

제4장 도약기(1977~1995)

-고등학교 편-

1974 년 고교 평준화 실시는 우리나라 모든 고등학교에 큰 충격과 변화를 가져왔다. 서울의 모든 인문계 고등학교가 시 교육위원회의 추첨에 의해 학생을 배정 받으므로 각 학교의 학생 선발권이 없어지고 학교 나름의 특성이니 개성도 퇴색되고 획일화 되어 갔다. 이제 똑같이 나누어 가졌기 때문에 상급 학교 진학률에 따라 학교의 우열이 결

정되는 시대가 되었고 각 학교의 특징을 살리는 특별 활동은 하나씩 둘씩 없어지고 입시 부담이 적은 실업계 고등학교로 넘어갔다. 전인교육의 도장인 학교가 어찌보면 입시 준비 기관같은 모습으로 전락한 것도 사실이었다.

본교에서도 이와 같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할 수 밖에 없었다. 카드섹션도 상업계 고등학교로 넘겨주고(1978) , 취주악부도 없어지고 체육 한성의 명성을 자랑하던 운동부도 없어지거나 축소되어 갔다. 그러나 한편 본교에서는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는 호기회를 맞게 되기도 했다. 우수한 학생을 보다 많이 확보할 수 있게 되므로 어떤 다른 학교보다 더 잘 할 수 았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학교의 분위기가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마음 가짐으로 모든 교사와 학생들이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그 결과로 강북 여자고등학교 중에서는 모든 면에서 가장 앞서가는 오늘의 한성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대외적으로 활동이 많이 준 것은 안타까운 일이나 내실을 다지는 알찬 교육을 해 온 이 시기 (28 년 간)는 한마디로 실력 향상을 위한 줄기찬 노력 시대라 할 수 있다.

제1절 역대 학교장의 취임과 교육방침

1) 임양수 교장 취임과 도약의 토대 마련(1977 -1984)

설립자 교장 선생님께서는 연세도 연만하시고 후학들에게 길을 열

어준다는 뜻에서 1977 년 교장직을 사임하시고 고등학교 교장으로 임양수 교감 선생님을, 중학교 교장에 김영희 교감 선생님을 각각 승진 발령함으로 새로운 체제가 시작되었고 이로써 본 학원은 명실 상부하게 중 · 고등학교가 완전 분리 되 었다.

임 교장 선생은 충청도 공주 출신으로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본학원에서 오랫동안 지리과를 담당하고 취주악부를 맡아 키우는 데도 큰 공을 남겼다. 설립자 선생님의 사위이시기도 한 임교장은 지금까지 의 발전 기반위에서 새로 도약하는 학교를 만들기 위해 패기찬 신념과 남다른 노력으로 일과를 보냈다.

‘전통의 탑을 쌓자’, ‘실력있는 학교를 만들자’, ‘건강하고 정직하고 신의있는 사람이 되자’를 늘 강조하는 선생님은 선천적으로 심성이 매우 착하고 격의없이 소탈하며 인정이 많아 그를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학교의 모든 일을 혼자서 결정하지 않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존중

하여 중론을 모아 학교 행정을 이끈 온화한 성품의 교육자였다. 실력향상뿐 아니라 명랑한 학교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엄격한 권위보다 모든 선생님들과 친구처럼 지내며 격려하고 수고에 감사해 하였다. 그러므로 전교직원이 일치 단결하여 자발적이고 헌신적으로 학교 발전에 참여하여 최고의 진학률을 나타내므로 학원의 도약 발전에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지병으로 말년에 고생하다가 아깝게도 1984년 회갑을 눈앞에 둔 향년 59세로 타계하여 공주 선영에 안치되었다.

임양수 교장의 학교 운영방침

오늘날의 모든 국가들은 복지사회의 실현을 최대의 목표로 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 민주시민적 자질 향상에 역점을 두고 있는 교육의 힘에 크게 의존한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번영을 위해 알찬 교육적 전진을 하고 있으며,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와 국민 교육 헌장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니라와 민족을 아끼고 안정과 번영된 새로운 민주 한국의 건설에 매진하는 참된 한국인의 육성을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경주해왔다. 그러나 이직도 민족 주체성에 입각한 국적있는 교육 풍토의 쇄신을 위해서는 많은 어려운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에 본교는 1977학년도에 즈음하여 첫째 교육의 질적 발전, 둘째 서윷 교사명의 생활화, 세째 학교 행정의 창의적 쇄신이라는 서울 교육 시책에 의거 다음과 같이 우리학교의 경영 목표를 설정한다.

@ 자유 민주적 봉사, 협동하는 새마을 정신의 함양에 힘쓴다.

@ 지역 사회에 봉사, 협동하는 새마을 정신의 함양에 힘쓴다.

@ 과학적 생활 태도의 함양을 위해 학생들의 창의력 계발과 기초과학 교육에 주력한다.

@ 성실한 학교 생활 운영을 위해 변학 분위기 조성에 주력한다.

@ 자율적 생활 태도의 신장으로 참된 사회인으로서의 자질을 배양시킨다.

2) 염홍천 교장 취임과 학습 내실화 주력(1 984-1991)

임양수 교장의 갑작스런 유고로(1984년 5 월) 본 고등학교는 큰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진학지도에 차질이 생기고 교사들의 허탈감도 컸다. 재단에서는 이런 점을 감안하여 중학교 염 교장을 고등학교 교장까지 겸임케 하다가 이어 정식으로 교장으로 발령하고 중학교 교장에는 김인자 교감 선생을 승진 발령함으로 염 교장 시대가 시작되었다.

염 교장 선생님은 이북 출신으로 배문중학교 교장으로 오랫동안 계시다가 한성여중 교장으로 오신 분이셨다. 성격이 매우 차분하고 온순하시며 외유내강의 선비형으로 조용한 개혁과 순리적 발전을 도모하시는 합리적인 분이셨다.

섬세하고 자상하여 친화력이 강하고 자율적 노력을 당부하시는 후덕한 분이셨다.

‘실력 제일주의’, ‘명랑한 학교 분위기 조성’, ‘여성교양’ 퉁을 강조하셨고 교사로서의 봉사 정신과 사명감에 호소하시었다. ‘언제나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 사심없이 최선을 다하자고 강조하셨다. 또 교장선생님은 개인적으로도 늘 공부하시고 탐구하는 모범을 보이신 실력있는 분이셨는데 애국 조회시 그 유명한 훈화 말씀은 모든 학생, 모든 교사들에게 큰 감명을 주기에 충분했다.

선생님 재임 중 교사 이전 사업이 있었는데(1 986) 대학이 사용하던 건물이 고등학교에 맞지 않아 여성교육 환경으로 고치기 위해 교실 안팎의 각종 시설물을 정비하고 아름답고 깨끗한 학교 분위기를 만들어

놓으셨다.

염홍천 교장의 학교 운영방침

학생 개개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개성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게 함과 동시에 우리 민족의 문화 전통을 전달 계승하게 하여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생활로 자랑스런 한국인임을 인식하게 하고 조국에 헌신할 수 있는 유능하고 적격한 민주적 사회인을 육성할 목표에 따라 다음과 같이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주력한다.

1 사랑으로 학생 육성

교사는 부모가 자기의 자녀를 가르칠 때와 같은 순수한 사랑의 심정으로 수업에 임하고 교단을 지키며 하나의 개체로서의 학생의 인격을 존중함으로써 즐거운 학교 생활을 이루게 하려는 마음가짐으로 교육에 전념하여 학생들을 조화롭고, 폭넓은 교육의 보금자리에서 바르

게 자랄 수 있게 한다.

(2) 연찬으로 수업 개선

학교 생활의 핵은 무엇보다도 수업에 있으므로 현장 연수를 강화하여 수업 개선, 자질 향상 및 전문성 제고를 위한 연구 풍토 조성에 전념하게 한다. 교사로서 담당 교과목을 깊이 연구하면서 자아혁신을 통하여 학생들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받고 청렴을 명예로 아는 교사상을 정럽하기 위해 참고 견디며 노력을 기울이는 자세를 잊지 않는 생활을 하도록 한다.

(3) 존경으로 상호협조

교사 상호간에 불신과 오해, 그리고 소외감이 없도록 한다. 품위있언행이 교사 상호간에 오고 갈 때만이 서로 존경하고 협조하는 분위기가 무르익게 되므로 전교직원의 마음과 지혜를 더욱 합하고 정열과 힘을 같은 방향으로 모아 올바르고 풍요로운 교육의 풍토를 이루게

한다.

본교 교육 계획을 충실하게 운영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교사들의 수업에 임하는 자세와 교사 상호간, 교사와 학생간의 관계를 중심적으로 조언하고 지도하여 건전한 교육기관으로 육성 발전시킨다.

3) 김인자 교장 취임과 건학정신 제고(1 991-1995)

1991 년 3 월 염 교장 후임으로 김인자 교장 선생님이 부임하셨다. 선생님은 설립자 선생님의 따님으로 숙명여대에서 학사, 석사를 마치시고 1968 년부터 본교에서 오랫동안 국어 교사로, 교감으로, 교장으로 계시면서 설립자 선생님의 숭고한 교육입국의 뜻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해서 노심초사하시는 분이시다 김 교장의 고등학교 부임은 여러가지 면에서 학교 분위기가 쇄신되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님은 누구보다 학원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뜻과 포부도 크시다. 그러므로 분위기보다는 실질과 능률을 강조했다. 무엇보다 주인의 식과 자긍심을 중시했다. 학원 발전의 웅장한 뜻을 가지셨기 때문에 사소한 개인적 정리보다는 전체를 위한 대의를 강조하시는 대인의 모습이시다. 교육 철학이나 사고 형태에서는 신세대 젊은이지만 설립자 선생님의 거인다운 모습을 많이 닮으셨다 우선 첫째 중고 교사 이동을 통해 젊은 교사를 많이 확보함으로 학교 분위기를 젊게 바꾸어 놓았다. 둘째 과감한 시설투자를 통해 여학교다운 깨끗한 환경을 조성하였다. 세째 실력우선주의를 강조하여 실력있는 학교를 만들었다. 본 고등학교는 김 교장을 맞으면서 60, 70년대의 활기를 되찾았다. 일사불란한 지도력으로 연구하는 학풍을 조성하였다.

학교장의 학교 경영관

새로운 문민정부시대를 맞이한 우리나라는 ‘세계화’라는 대 명제아

래 교육 개혁을 첫 과제로 내걸고 온 국민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요망에 따른 학교 교육의 역할은 그 어느때보다도 중차대하다고 할 것이다. 교육이 국가 발전의 구심접이 되어 그 가운데서 도 학교 교육의 비중이 가장 큰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따라 교육 행정의 민주화와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교육 제도의 정비, 일선학교의 교육 환경 개선, 도덕성이 투철한 전인적인 민주시민 육성, 자긍심을 갖는 교직 풍토 조성, 과학 기술 교육의 강화 등이 급선무가 되었다.

92학년도에 접한 본교는 학사 운영에 관한 교육계획을 수립함에 인간 교육중심의 교육과정 운영, 국가 경쟁력을 높이는 인재 양성, 사랑과 꿈을 심어주는 학교 운영이라는 시 교육청의 기본 방침에 따라 ‘창조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신 한국여인 육성’이라는 교육 목표를 내걸고 다음과 같이 학교 운영 방침을 설정하였다.

@ 바른 세계관, 국가관, 인생관을 지닌 애국애족하는 여성을 육성한다.

@ 도덕성 확립과 근면, 성실, 봉사하는 기본적인 생활 태도를 함양시킨다

@ 교사의 확고한 교직관과 탁월하고 창의적인 지도력을 바탕으로 학생들의 자율적인 학습 태도를 신장시키는 새로운 교육 환경조성에 힘쓴다.

@ 과학 기술 교육의 강화로 세계화에 앞장서는 능력을 기른다.

@ 지성과 덕성의 토대가 되는 기초 체력 향상을 위해 보건 체육교육을 강화하고 이를 생활화하도록 지도한다.

제 2 절 교육환경 개선과 다양한 교육활동

1) 교육환경 쇄신과 연간학사 일정

(1) 교육환경 개선

1986년 교사 이전으로 고등학교는 종래 대학이 사용하던 건물로 오게 되었다. 건물자체와 시설이 고교 교육 여건에 맞지 않아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다. 화장실을 비롯한 제반시설을 여학생 교육환경으로 바꾸기 위해 상당한 기간동안 시 설개조 공사를 계속하였다. 특히 91년 김 교장 선생님의 부임으로 획기적 시설 보수 공사를 실시하여 이제는 어느 정도 여성교육기관으로 손색없이 아름답고 깨끗한 교육 환경을 갖추었다.

시설 개선 일지

연도 활동내용

1988 교사휴게실 설치

1989 무용실 개수, 교사 도장 공사, 전기 보수 공사

1990 2,3 학년 각교실 교육용 TV를 칼라로 교체, 옥상 방수공시 온실 만듬, 체육기자재실 마련, 4,5,6,7층 게시판 설치

1991 창호설치공사(2중창으로 개조), 담장보수공사, 7층 교사 연구실 마련, 천정 택스 공사, 도장공사

1992 1학년 교실 천정 공사, 도서실, 미술실 도장공사, 7충 화장실 내부 개수 공사, 음악김상실 마련

담장보수 공사, 교무실 서고제작, 교실 현관 등 배전판 공사, 1993

후문 바닥 콘크리트 포장 공사(주차장 마련), 교실 관리실 페인트 도색 공사, 현관 양쪽 대형유리 부착, 체력단련실, 교직원 후생 복지시설개선

1994 정화조 설치, 5,6층 화장실 개수공사

(2) 연간 학사일정

1977년부터 현 재 까지는 대 략 다음 과 같은 연간계획으로 학교 행사가 있어 왔다 때로 사정 에 따 라 약간씩 변경된 것도 있지만 큰 줄거리는 비슷했다.

월별 교육활동

3월

입학식, 시업식, 신입생 학력고사, 신입생 과제물 수합, 환경정리, 특활 평가 키드, 상담카드 배부, 격주 한번씩 명상조회, 학급 염원 선거,급 훈제정, 학생회 조직, 특활반 편성, 월요일마다 애국조회, 2 ,3 학년 학력평가, 월말저축, 충효사상 앙양 시조 백일장, X-ray촬영

4월

5월

중간고사, 어버이날 행사, 춘계소풍, 소변검사, 학교간 육상 경기

6월

환경 정화 국립묘지 꽃꽂이,진로 자료 영상 교육, 자매부대 위문, 영어듣기시험, 모의고사

7월

1학기말 고사, 상담카드 정리, 방학, 방학 보충수업

8월

과학 캠프, 개학, 모의고사

월별 교육활동

9월

과학경시대회, 체력장, 모의고사

10월

개교기념일 행사, 중간고사, 수학여행, 생활관 교육

11월

특활발표회,체육대회,합창경연, 대학교 예비고사(학력고사, 수능고사), 2학기말 고사

12월

취업지도, 3학년 사정회, 문제학생 지도, 방학 및 보충수업

1월

전기대 입시, 후기대 입시

2월

개학, 1,2 학년 사정회, 각종 자료 정리, 졸업식, 봄방학,새학기 계획

(3) 상담실 운영

상담실(지도교사: 김명선, 김대희, 구영희, 양일권, 오현숙) 운영은 교도부에서 맡았는 데 교도부는 1994년부터 진로 지도부로 명칭이 바뀌면서 좀더 포괄적으로 학생들의 생활지도를 담당하게 되었다. 문제학생을 선도하고 상담하는 일외에 모든 학생들의 당면 과제인 진로문제를 좀 더 실질적 인 도움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지도하고 있다.

지능 검사 및 적성 검사

교우관계 조사 및 지도

부적응 학생 조사 및 지도

요선도 학생 조사 및 지도

진학 상담록 작성 및 정리

가정 결손 학생 조사 및 지도

개인 상담

학습 부진아 상담

표준화 검사 결과 지도(이문, 이과 지도)

하숙 및 자취생 지도

집단 상담 지도

취업 정보 수집 지도

불우학생 조사 및 결연지도

처벌 학생 지도

진학, 진로 상담

인성 검사

진로의 발달 단계상 진로 준비의 단계에 와 있는 학생들은 학업, 진로, 진업의 선택, 이성문제, 인간관계 등 많은 문제에 당면하고 그것을 현명하게 처리함으로써 행복하고 생산적인 한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진로 교육은 학생들로 하여금 삶의 목표와 방향을 바르게 선택하고 자기에게 알맞은 소질과 적성을 발견하여 자아를 실현시키고 만족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교육이 되어야 하고, 진로 지도부는 학생 각자에게 합당한 진로 교육이 이뤄지도록 도와주는 여러가지 프로그렘을 준비하여 학생 모두의 생활을 행복한 개인으로 생산적인 성원으로 성장케 둡고 있다 상담실에서 하고 있는 연간활동 내용은 위와 같다.

진로상담실 운영

2) 충효사상 앙양과 다양한 문예활동

(1) 충효사상 앙양을 위한 각종 백일장 대회

1977년부터 시작한 교육활동 중 다른 학교에서 볼 수 없는 본교의 특별한 것으로는 충효사상 앙양(담당 윤리부, 지도교사:김현수, 김재훈, 박승응)을 위한 시조 백일장(문예 백일장 및 문학 활동 지도교사: 최성희, 김동화, 홍인표, 조성희)을 실시한 점이다

평소에는 그냥 스쳐 지나치기 쉬운 조상에 대한 자부심과 부모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백일장을 통해 상기해 봄으로서 우리 민족 정신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게 하는 이 행사는 당시 윤리부와 국어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백일장 실시와 수상자 명단

연도 횟수 수상자

1977 장원 2-1 이진영

1978 2 장원 3-1 이민재

1979 3 장원 2-2 강경소, 1-4 김연희

1980 4 장원 1-3 장금, 3-2 김호연

1981 5

1982 6

1983 7

1984 8

1985 9

1986 10

1987 11 장원 3-1 오윤나, 1-7 임지연

1988 12 장원 3-7 유현숙, 2-5 조정주

1989 13 장원 1-6 우일선, 3-8 박잔희

1990 14 장원 2 지윤경

1991 15 장원 3 이은복

1992 16 최우수작 2 황정훈

1993 17 장원 3 황혜원

1994 18 차상 1-6 김보영, 1-2 이상란

매년 신학기가 시작되면 각 반 담임 책임하에 전교생에게 각 한수씩의 시조를 모든 국어 선생들의 엄정한 심사를 거쳐 장원직 우수작 등을 뽑아 표창하고 우수 작품을 액자화하여 교내 복도에 게시하므로 환경 미화에도 도움을 줄 뿐 아니라 학생들이 매일 보고 읽으므로 효에 대한 기본 정신을 몸에 익히고자 했다. 이 행사는 본교의 독창적 교육 활동으로 학생 인격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실시해야 할 바람직한 행사이다.

(2) 특활 발표회

한편 1977 년 부터 시화전(지도교사:조주옥, 최성희, 조선희, 홍인표, 윤장근, 신언희, 양일전)을 비롯한 사진전, 꽃꽂이전, 서예전, 무용발표회 등이 다양한 문예활동과 행사가 있었는데 1983년부터는 특활발표회란 이름으로 종합행사가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와서는 학교 행사를 줄 이기 위해 3년 윤번제로 실시하기로 하였다.

특활발표회

연도 행사 수상자

1977 제1회 시화전최우수 3-1 한자경, 우수 2-2 오은정, 2-7 오재해

1978 제 2 회 시화전

1등 3-6 최재록, 2등 1-4 길은주, 2-7 안미영

1981 제5회 시화전, 사진전, 꽃꽂이전, 서예전

1983 특활발표회(시화전, 꽃꽂이 전,서예전, 사진전, 무용발표회)

1994 특별발표회(도서실, 무용실)

문예부 행사 및 수상자 명단

연도 행사 수상자

1977 제19회 교내 글짓기 대회 북부지구 백일장 장원 2-1 이진영 장원 오재혜

1978 제200회 교내 문예백일장 3-3 오재혜, 단체상 1-7, 2-3, 3-3 차하 김미경

1979 제21회 교내 백일장 10지구 백일장 장원 3-8 박화영, 우수학급 1-1, 2-6, 3-3, 입션 1-1 이정란

1981 제23회 교내 백일장 11지구 문예 백일장 한국가스안전공사 주최 가스안전사용 수필공모 장원 박진숙 차하 박진숙 가작 왕석순

1982 12지구 장학협력회 백일장 차하 1-2 이윤선, 1-1 방현숙

1983 제25회 문예백일장 북부지구 문예백일장 입선 엄지현, 최경원 차하 이윤선, 김연진

1985 제27회 문예백일장 14지구 문예백일장 교내 독후감 발표대회 장원 조은아, 차하 이영주, 최우수작 이순진

1987 제29회 교내 문예백일장 장원 1-7 노윤희, 입선 2-4 정은선

1988 제30회 교내 문예백일장 14지구 문예백일장 장원 한진희 장원 박영미, 차상 노윤희

1989 제31회 교내백일장 차상 최선희, 심애경 우수반 2-6, 1등 1-2 김설형, 2등 2-6 김은혜

1990 제32회 교내백일장 독후감 발표대회 장원 권지영, 차하 송은정, 차상 이선화 1등 김정완, 2등 박정은, 차진수

1991 제33회 교내백일장 제10회 교내독후감발표대회 장원 이수영, 하상 김현경, 이선주 최우수 최윤희 우수 위지연, 김찬성

1992 제34회 교내백일장 민족공동체 의식 함양 글짓기 차상 이선양 차하 김희연 차상 석근숙

1993 과학독후김 쓰기 우수 강혜경, 장려 정혜선, 김성은

1994 과학독후감 쓰기 우수 조은영, 김희경, 김성미, 김민경

3) 생활지도와 생활관 교육

(1) 생활지도

생활지도의 기본 취지와 목표는 가정과 학교에서의 생활 습관을 올바르게 형성하며 협동, 자율적인 생활태도를 길러 건전한 생활 기풍을 조성하고 인성 지도의 심화, 정의로운 사회 건설의 일환으로 질서 생활 교육을 강화, 올바른 생활 태도를 기르는데 있다. 그리고 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한 훈련방침으로

(ü 가정, 학교, 사회 생활에서 기본이 되는 예절 및 근검 절약하는 생활 습관을 철저히 훈련하여 습관화 되도록 한다.

@ 통일 교육, 행사 교육, 질서 교육 등을 통하여 애국 애족심을 함양한다.

φ 합리적인 계획으로 국민 교육 헌장 이념을 생활화 한다.

ψ 상담 활동을 통하여 학생을 바르게 이해하고 개별 지도와 정서 순화 지도에 노력한다.

ctv 생활 평점 제도 운영으로 학생들의 자율적인 행동을 기른다 등을 설천빙-침으로 교육하였다.

(2) 연간 생활 지도 내용

이를 위한 연간 생활지도 내용은 정기적으로 가정통신문을 발송과 특별 수련회 및 예절지도 그리고 불량서클 단속 과 등하교 지도 등 다양한 지도를 실시하였는 데 그 주요 지도 내용을 표로 작성해보면 아래와 같다.

주요생활지도 내용

지도내용 주요내용

불량 써클 단속 졸업생과의 관계 파악, 써클가입 강요단속

문제 학생 지도 개별 상담 지도, 대화 확대

등하교 지도 좌측 통행, 거리 질서 지도

언어 순화 지도 유행어, 저속한 말 단속

교외 생활 지도 학생의 긍지를 잊지 않는 생활 양식 지도

가정 통신문 발송 학생 지도에 필요한 때

정숙 지도 공부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

용의 복장 지도 자율 의식 함양 지도

소지품 검사 불필요한 물품 휴 대 단속

특별 수련 활동 (2학년) 생활관 수용 집단 교육

소풍,수학여행 지도(1학년) 기차 버스 숭하차 지도, 안전 지도

단체 표창을 통한 협동심

각종 행사를 통하여 앙양

교우 관계 지도 담임 수시로 파악 지도

위문 활동 일성 장병, 자매부대, 양로원, 고아원 등 위문

학생회 운영 체제 강화 지도 위원회, 운영 위원회 운영

예절지도 국기, 국가 원수에 대한 예절 기본 생활 습관 지도

(2) 생활관 교육과 극기 훈련

본교 생활관에서 실시해오던 생활관 예절교육은 1980년대에 들면서 는 전문교육기관에 의뢰하여 실시하였다. 대성의 집, 명성수련원 등 풍광 화려한 대자연 속에서 2박 3 일동안 합숙 훈련을 하면서 본교 교사와 전문 지도요원의 지도, 감독하에서 교육하였다.

1980년에서 1982년까지는 I 학년이 생활관 교육을 2 학년이 수학여행을, 1983년부터는 1 학년이 생활관 교육과 수학여행을, 2학년에서 극기훈련을 실시하였고 1990년부터는 극기훈련은 없어지고 1 학년 수학여행 2학년 생활관 교육으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개인 훈련으로는 간부학생

들이 실시하는 1 주간 수련회가 교육위원회 주최로 1977년부터 사임당 교육원, 화랑교육원 등에서 실시한다.

한편 생활관 교육의 목적과 교육 내용을 요약해보면 φ단체생활을 통힌 협동정신 함양 @신체 단련과 정신수양을 통해서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정신력 배양 @예절 교육을 통한 한국적 부덕 양성 @애국애족히-는 청소년 자세 확립 @‘나도 할 수 있다’, ‘하면된다’는 적극적 사고외- 행동, 적응력 양성 @단체의 일원으로서 규칙준수 정신 함양 φ 건전한 심신의 수련 등이다 생활관 교육과 극기 훈련 일정표를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생활관 교육과 극기 훈련 일정표

시간 교시 일자 제1일 친교의날 제2일 도전의 날 제3일 화합의 날

5:50 기상

6:00- 7:00 의식,청소,세면 체조

8:00- 8:20 아침식사 산행

8:30- 9:20 1 집합완료 아침식사

9:30-10:20 2 출발 설문지작성

심성훈련 주변환경

10:30-11 :20 3 정화활동

11:30-12:20 4 도착 편지쓰기 자유시간

12:30-13:50 점심식사

14:00-14:50 5 입소식 퇴소식

15:00-15:50 6 초청강연회 출발(1 :30) 체육활동

16:00-16:50 7 학교도착예정

17:00-17:50 8 전통예절교육

18:00-18:50 저녁식사

19:00-19:50 9 창조의 밤 축제의 밤

20:00-20:50 10

21:00-21:50 11

22:00-22:30 12 실별토의 취침준비

23:30 취침

(3) 사생대회와 미술활동(지도교사 이두환)

한성여고의 예체능활동은 대외적으로 이름을 떨친 체육 활동 외에도 사생과 미술활동도 눈부셨다. 수도시패를 비롯한 각 대학 주관하는 미술실기대회에 나아가 특선을 차지하곤 하였는 데 이는 매년 5월 중에 교내 사생대회를 개최하여 학생들의 재주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 준 결과였다. 1970년대까지는 주로 한성학원에서 실시했으나 1980년대 접어들면서 아린이공원과 경북궁 등 야외로 장소를 옮겨 좀더 넓은 시야를 바라보며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하였다. 1970년대 종반 이후 1993 년 현재까지 사생대회와 미술대회를 개최한 시기와 장소 및 수상자 명단을 정리해 보면 아래와 같다.

사생대회 모습

연도 행사 및 장소 수상자

1977.5.13 제1회 교내 사생 대회 우수상 2-7 염주경, 3-4 서순오

1977.5.15 건국대 주최 제3회 전국 여자 중고등학교 미술실기대회 특선 3-4 차숙희, 2-6 서계숙, 1-4 하민수

1977.6.4. 수도여사대 주최 전국여자 고등학교 미술실기 대회 특선 3-4 고희선

1978 제2회 교내 사생대회

1979 제3회 교내사생대회

우수상 1-6 이정희, 1-2 박성혜, 2-4 윤금술, 2-4 김은옥

1980 교내사생대회 우수상 2-3 변희소, 3-4 황심숙, 1-1 김용희, 2-6 김은희, 2-8 구지희, 1-7 강미경

1981 제5회 교내사생대회 13 지구간사학교 주최 반공포스터전 우수상 1-2 안묘순, 2-7 방혜정 , 2-8 서연정, 3-6 김우정 최우수상 3-7 김지선

1985 제9회 사생대회-어린이대공원

1987 제11회 사생대회-어린이대공원 최우수 2-5 조현정 , 1-2 윤수진

1989 제13회 사생대회-어린이대공원 최우수 2-6 이형주, 1-1 임병은

1990제14회 사생대회-어린이대공원 최우수 1-6 김언주, 2-5 임병은

1990 4지구 간사학교 미술실기대회 금상 2-5 이정립, 은상 1-6 김언주, 2-5 임병은

1991 제15회 사생대회-어린이대공원 최우수 2-3 한지선, 우수 2-5 우경원, 1-8 정경원

1993 제3지구 자율장학회 주최 미술실기대회-경복궁 최우수 2-4 이은정, 우수 2-5 이경화

3) 학력경시 대회와 각종 교육행사

(1) 학력경시대회

대 학교 입시제도는 여러가지 형 태 로 변화하였다 예 비 고사제, 학력고사제, 수능고사제 등으로 바뀌면서 크게 혼선을 빚었고, 선지원 후시험, 선시험 후지원 등 일관성 없이 계속되므로 치열한 눈치작전으로 비교육적 사회현상을 낳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다양한 고사제도 변화에 맞추어 본교에서는 한치의 착오없이 대학입시제도에 적응해 왔다. 학력 신장을 위해 자율학습을 실시하고 보충수업을 계속해 갔으며 영, 수,국 경시대회를 열어 시상하기도 했다. 영,수,국 학력대회는 처음에는 학교 자체적으로 출제하다가 81 년 이 후에는 전문입시기관에서 실시하는 모의고사로 대 체되었는데 매년 4-10회 정도 실시하는 모의고사에서 는 깅북 제일의 여고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학력경시대회 및 우수자 명단

연도 대회 우수자

1979.6.27 수학 1위 1-1 심영수, 2-5 박문숙, 3-1 배현주

영어 1위 1-8 구지희 , 2-3 박서애 , 3-2 이은실

우수반 수학 1-2, 2-2, 3-2

영어 1-1, 2-2, 3-1

1980.6.24 국,영,수

국어 1위 1-1 승희진, 2-1 정혜경, 3-3 백유경

영어 1위 1-3 이은숙, 2-2 유형진, 3-7 박문숙

수학 1위 1-8 김혜영, 2-2 심연수, 3-1 김경원

우수반 국어 1-1, 2-2, 3-2

영어 1-4, 2-2, 3-2

수학 1-8, 2-2, 3-1

1981 국,영,수

국어 1위 1-8 정난희, 2-5 최연희, 3-2 김남희

수학 1위 1-2 백수영, 2-6 임혜영, 3-1 최영주

영어 1위 1-4 이혜은, 2-1 최수희, 3-1 심연수

이후 모의고사로 대체

(2) 우수도서 선정과 독서지도

중고등 과정에서 독서지도는 매우 중요하다. 독서생활을 습관화 시키며 간접적인 경험을 독서를 통해 함양시킬 목적으로 본교에서는 독서지도를 학생생활지도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우선 우수도사를 선택하는 일이 중요했다. 국어과 교사와 사회과 등 관련 교사들로 우수 도서 선정위원회를 두고 실시된 이 지도는 매달 우수도서를 선정 발표하고 연중 독서 목표량을 10권으로 결정하며, 학급문고는 학생 l 인당 1-2 권씩 제출케 하여 학예부장이 목록을 작성 보관토록 지도하였다. 독서시간은 매주-정규 시간표에 주1 시간의 독서 시간을 배정, 자율적으로 독서케 하고, 독후감 작성-매월-독후감 노트를 비치게 하여 독후감을 기록, 국어과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독후감 발표

회는 연중 매월 마지막 주의 독서 시간에는 제출된 독후감 노트중에서 우수작을 선정 학급별로 발표시키고, 시상은 6 , 10월말에 학년별로 우수작을 시상하고 시상 종류는 최우수작, 우수작, 가작을 뽑아 학생들로 하여금 독서를 생활화하도록 지도하였다.

(3) 합창대회와 수학여행

가 합창대회

본교의 합창대회(음악경연대회, 지도교사: 정운철, 강동식, 김요섭, 전정위)는 1962년 이래로 실시해 오던 중요한 학교 교육 활동의 하나이다. 처음에는 합창뿐 아니라 기악, 독창, 중창까지 포함되었으나 1977 년 중고 분리부터는 주로 합창 중심으로(반별 대항) 바뀌어 축소 되었다. 반의 명예를 걸고 반 전체가 1 개월 이상 점심시간, 쉬는 시간, 방과후, 이른 새벽을 이용 그 준비가 대단한 행사였다.

학교 합창대회에서 1 등을 하면 학교를 대표하여 지구별 대회에 나가고 이 대회에서 1 등을 하면 서울시 연합 발표회에 참가하기도 하였

다. 이 대회도 1990년부터는 3년에 한번씩 실시하고 있다.

교내합창대회 및 수상자 명단

연도 행사 수상자

1977 제15회교내합칭대회 구별 합창대회 서울시 종합 발표회 참가우승 2-2 우승 2-2 세종회관, 2-2

1978 제16회 교내 합창대회 합창 1등 1-7, 2-2. 지휘자상 1-7 김희진, 2-3 교내 합창대회 김미경. 반주자상 1-7 구성은, 2-1 이현진

1979 제17회 합창 1등 1-6, 2-1

교내 합창대회

1980 제18회 교내 합창대회 합창 1등 1-5, 2-2

1981 제19회 교내 합창대회 합창 1등 1-7, 2- 1. 지휘자상 1-7 황현이, 2-8 박현주,반주상 1-5 박수현, 2-7 임유숙

1986-1992 합창대회 없었음

1993 제24회 교내 합창대회

나. 수학여행

학창시절의 가장 큰 추억일 수 있는 일중에 수학여행이 제일이다. 가정과 부모를 떠나 처음으로 학우들과 객지에서 생활하는 경험은 성장 발달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본교의 수학여행은 1959 년부터 실시되

어 왔다. 여행지는 해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주로 경주를 중심으로 주변의 명산대천과 산업시설이었다.(울산, 부산, 포항) 처음에는 3학년에서 실시하다가 1972년부터 2학년에서 1983년부터 지금까지는 1학년이 실시하고 있으며 수학여행 실시 목적과 일반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

목적은

@ 고적답사를 통해 조상의 빛난 얼을 되새긴다.

@조국의 참모습을 견학하고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갖는다.

@문화재 보호와 자연보호정신을 재인식시킨다.

@학우들과의 공동 생활을 통해 이해와 봉사, 협동, 단결심을 배운다데 두고 있다.

수학여행

(4) 반공교육행사(민방위 훈련, 웅변대회, 교련검열, 각종 강연회)1974년 월남 공산화는 국내외에 큰 충격을 주었다. 교육 정책에도 반영되어 반공교육을 강화하게 되었다. 민방위 훈련을 더욱 강화하고 교련 검열도 생기게 되었다. 단결력이 깅-한 본교는 각종 훈련과 검열에 우수한 성적으로 평가 받았고 시범 훈련도 하게 되어 타학교의 모범을 보였다.

가. 민방위 훈련

처음 갑작스런 공격에 효과적으로 벙어하는 민방위 훈련은 재난을 대비하는 예방 훈련으로 매달 15 일을 민방위(또는 민방공)날로 정하여 철저히 실시하여 왔다. 특히 1978 년 3 월 15 일 제 74 차 민방위날에는 본교가 서울시 지정학교로 시험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는데 이때는 서울시장까지 참관하는 대규모적 훈련이었다. 이 훈련에 수고하신 교사로는 이혜옥 선생, 신언회 선생(교련교사)를 비롯 당시 체육교사로 윤성열선생, 김광수 선생 등이 있다.

훈련 내용

훈런경계경보 발령

실외수업 학생 대피, 민방위대 본부 설치 운영, 의료반 설치, 구호소 설치, 전학급 수업중지 방공태세 갖추고 간소복 착용, 경계요원 배치, 창문열고 대피

준비, 중요문서 대피, 신체 장애자 우선 대피

훈련공습경보 발령 청색기 게양, 학생대피, 폭격과 부상자 발생 및 처리, 응급처치 훈련, 부상자 후송 훈련, 가상 소화 훈련, 화생방 훈련

훈련경계경보 발령 훈련 종료- 강평

나. 교련 검열

1974 년 7 월 8 일 교련(담당교사: 이혜옥, 신언희) 교육확인 지도(교련검열)가 시작되어 80년대 초반까지 계속되었는 데 그 목적은 국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반공 정신에 투철한 애국애족의 정신을 기르며, 군사에 관한 지식과 기능을 습득시키며, 훈련을 통해 강인한 체력을 연마시킨고, 단체 훈련을 통하여 규율 정신을 익히고 단결심을 굳게 하고, 국가에 봉사하는 태도를 기르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한편 검열 식순은 임석상관에 대한 경례로 시작해 개회사, 국기에 대한 경레, 애국가 제창, 국민 교육헌장 낭독, 열병, 학교장 훈화, 분열, 실기확인지도, 강평, 단가, 교가 제창, 폐회사의 순으로 진행되며 임석상관에 대한 경례 순으로 진행되었다.

다. 을지연습 77(학교 이통 및 소산 훈련)

전시대비 학교 이통 및 소산을 위한 도상 훈련으로 1977 년에 실시했던 훈련으로써 @학교의 모든 서류와 기재를 A급, B급, C급, D급, 폐기로 구분하여 대피 우선 순위를 정하고 @수송 수단 획득에 따른 물품 운반 계획을 세우고 @이동제대편성을 하고 @이동경로 선정의 타당성을 사전 검토하는 훈련이 주 내용이었다.

라. 반공웅변대회

6.25 사변 기념행사의 하나로 반공웅변대회를 실시한 것은 이미 1950년대 말부터였다.77년 제 19회 웅변대회로부터 1992년 제 34회까지 중단없이 계속되었다. 각반 한명씩 연사를 뽑아 예선을 거쳐 강당에서 1, 2학년을 대상으로 대회를 열고 심사, 시상하였다. 이어서 반공 강연회도 실시하고 선생님들의 6.25 회고담을 들려주는 등 중요 행사의 하나였다. 이외에 반공교육 행사로는 반공 강연회 , 통일 안보 글짓기 대회, 반공 포스터전 개최, 1 일 숭공학교 입교, 명-굴 견학등도 있었다. 시

상 기록은 기록 미비로 지-세히 알 수 없으나 그 중 몇회의 웅변대회 행사와 수상자 명단을 보면 이폐와 같다.

웅변대회 및 행사

연도 행사 수상자

1979 제21회 반공웅변대회 및 영화감상 1등 이선옥 2등 전미성

1981 제23회 반공웅변대회 1등 장금

1990 제32회 웅변대회1등 1-5 김혜란, 2등 2-5 김찬휴

1991 제33회 반공웅변대회 1등 김혜란, 2등 변유정

4) 교내 체육대회와 운동부 활동

(1) 교내체육대회

교내 체육대회가 정식으로 시작된 것은 1977년도였다. 이 날은 학교 전교직원과 학생이 함께 뛰고 즐기므로 심신의 피로도 풀고 애교심도 향상시키는 축제의 날이었다.

경 기 종목은 피구, 줄다리기, 800m 계주, 100m 달리기, 배구, 응원, 기-장행렬, 교직원 경기 등으로 주로 반별 대항이었다. 담임올 중심으로 반 전체가 혼연일체되어 반의 명예를 걸고 뛰고 응원하므로 반의 단결심과 긍지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운동 경기도 치열하였지만 응원이나 가장 행열 준비도 대단해서 즐거움과재미를 보여주는 중요 학교 행사의 하나였다.77년 1회 대회를 시작으로 92 년 8 회 대회까지 실시하였고 (87,88, 89년 없었음) 금년(1 995)제 9회 대회를 준비중이다. 한편 87년 이후에는 5월 15일 스승의 날에 교직원 운동 경기를 하기도 했다. (발야구, 축구, 배구 등)

체육대회 종목과 우수반

연도 종목 우수반

1979

피구 1-8, 2-6, 3-2

줄다리기 1-6, 2-8, 3-4

800m 계주 우승 1-6, 2-8, 3-4

100m 달리기 1-6 임난희, 2-7 이태화, 3-3 홍성옥

응원 3-8

가장행렬 1-2

1980

100m 달리기 1-8 박나미, 2-5 임난희, 3-8 임영희

800m 계주 1-8, 2-3, 3-8

피구 1-8, 2-3, 3-8

줄다리기 1-1, 2-7, 3-8

가장행렬 2-6

종합우승 1-8, 2-3, 3-8

1981

100m 달리기 1-2 정지영, 2-6 박나미, 3-1 정수인

계주 1-8, 2-7, 3-7

줄다리기 1-5, 2-8, 3-6

배구 1-1, 2-7, 3-2

피구 1-1, 2-7, 3-8

응원 1-6, 2-8, 3-7

가장 행렬 2-4

종합우승 1-1, 2-7, 3-8

(2) 운동부 활약

1977 년 이후의 운동부 활약은 초창기 보다는 많이 위축되었다 할 수 있다. 운동부(지도교사: 박영환)의 수도 많이 줄고 그 실적도 전보다는 저하되었다. 이는 평준화(1974) 이후 실력 향상에 치중한 탓도 있고 학교의 재정적 지원도 부족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육상부만은 최근까지 활약하여 그 성과가 좋았다. 1991 년도 활동 내용만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을 뿐 활동에 비하여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여기서 대표적인 사례로 1980년대 이후 한성여고 육상부 활약을 살펴 정리해보면 아래의 표와 같다

운동부 활약 내용

연도 활약내용

1980.6. 제11회 교육겁배 쟁탈 전국 육상 경기 대회 3학년, 3위

1981 동아 마라톤 대회 여지- 고교 중 2위

1982 서울시 육싱- 경기 연맹 회장기 쟁탈 본교 육상부 종합 3위

1990.4.4. 서울시 육상 경기 회정 l세 대회 400m 1위 노숭희(3-8)

넓이 뛰기 3위 노승희(3-8)

4. 6. KBS배 전국 육싱 경기 대회 400m 1 위 김혜영(2-8)

5. 1 전국 종별 육싱 경기 선수권 대회 800m 1 위 김혜영(2-8)

6.11 아시아 주니 어 대표 선수권 대회 4위 김혜영(2-8)

9.28 북경 아시안 게임애 국가대표로 출전 김혜영(2-8)

10.15-21. 전국 체전 육상 종목 금메달 1, 은메달 1, 동메달 1, 김혜영(2-8)

1991.4.3-4 제 12회 회장기 쟁탈 및 제72회 전국 체전 예선 300m 3위 김현정(3-3)

4.25 종별 육상 선수권 대회 1600m 계주 3위 김연화, 김혜영, 김현정,

5.16 김은정. 800m 1위 김혜영

6.8-9. 제 20회 중고 육상 선수권 대회 1 600m 계주 2위 김현정(3-3)

6.21 제 45 회 전국 육상 선수권 대회 800m 1위 김혜영(3-5)

9.12 체육부 장관기 시도대항 대회 800m 1위 김혜영(3-5)

10.30-3 1. 제 20회 추계 전국 남여 중고 선수권 대회 80αn 1위 김혜영

제10회 서울시 장기 육상 경기 대회 100m 2위 200m 2위 400m 2위

김연화(3-8), 멸리뛰기 1위 김은정(1-8), 1500m 2위 400MR 김현정,

400m 1 위 looMR 2위 김혜영(3-5), 포환 던지기 1위 강연숙(2-5),

50αn 경보 l 위 박은숙(2-6), 원반던지 기 l 위 이 선미(3-7)

5) R.C.Y. 활동과 한묵회

(1) R.C.Y. 활약

본교의 R. C.Y(지도교사: 송나정, 신언희)는 1964년도에 정식으로 발족되었으나 활발하지 못하다가 1977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였다. 주요 활동 내용은 교내 청소, 학교주변 정화활동, 교통사고 줄이기 캠페인과 스승의 날 선생님께 꽃 달아드리기, 1 년에 두번씩 고아원, 양로원, 라파엘의 집에 가서 봉사 활동을 하며, 빈곤과 재난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웃나라 아통과 청소년들에게 전달할 상자를 제작하고 구호품을 보내는 우정의 상자 보내기, 매년 연말에 단원 또는 전교생이 쌀 한봉씩을 모아 적십자사회에 전달하는 사랑의 쌀 한줌 모으기 운동퉁이 었

는 데 이 국제적인 어려운 세계의 이웃들과의 나눔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2) 한묵회 활동

본교 졸업생들의 서예 친목 모임인 ‘한묵회’는 1978 년 제 1 회 서예전을 학교에서 열어 지금까지 매년 한번씩 학생을 상대로 일반인을 상대로, 전시회를 하고 있다 지금은 가을에 출판문화회관 화랑에서 행사를 하고 있는데, 회원중에는 국전 초대작가도 있고 국전에 다수 입상하기도 했다. 주요 회원으로는 권화자, 이순옥, 신상회, 김경희, 이정희, 김상숙, 이수용 등이 있다.

제3절 한성 여자 중고등학교 연표

[1945-1955]

1945.9.25. 8.15 해방에 따라 설립자 겸 교장 김의형 씨가 구 한성여자기예학교를 인수

1945.10.5. 학생을 모집하여 개교함

1946.4.5. 전국 해방 기념식수를 정계 요인 및 미군정 장관 참석하에 본교 학교림에서 거행함

1946.4.9 . 한성고등여학교로 인가를 얻은 동시에 학제 변경으로 6년제 12학급의 고급중학교로 인가 받음

1946.7.5. 한성여자중학교로 교명 변경

1950.6.25. 북괴 님-침으로 임시 휴교

1950.10.6. 9.28.수복으로 수업을 계속하고 서울시 성북구 잔류 중.고등학생 훈육소 개설

195 1.5.20. 1. 4후퇴로 재차 임시 휴교하고 부산에서 분교를 개설

1952.5.3 1. 학제 변경으로 한성여자중학교 6 학급, 한성여자고등학교 6학급으로 분리 운영하고 김의형 교장 취임

1953. 1.20. 설립자 김의형 박사 희사로 재단법인 한성학원을 완성하여 인가를 득하고 이사장에 취임

1953.3.3 1. 성북구 훈육소를 해체하고 본교 한성여자중고등학교로 수업을 계속함

1953.9.1. 환도하여 부산 분교를 본교로 복귀

1955.2. 1. 재단 법인 한성학원에서 천일염전을 경영함

1955.12.31. 고둥학교 3 학급 증설인가

1956.9. 1. 고등학교 신축교사 부지 작업 착공

1956.11.5. 고등학교 신축교사 677 평, 강당 188 평, 부속건물 203 평, 운동장 500평 공사 착수

[1956]

10.30. 월간 ‘의화’ 발간

10.23. 성북 경찰서 주최 남여 중고등학교 방첩 웅변대회 참가 2등 입상(고2 이교식)

10. 서 울시 주최 전국 방첩 포스터 전 1 등 당선(중3-2 이 양순 3 등 당선(고 1-1 최부자)

10.24-29. 무적한성 탁구부 전국 제패(개인전, 단체전 석권)

[1957]

-제 11 회 전국 학생 탁구 선수권 대회 및 제 2 회 전국 남여 중고등학교 탁구 선수권 대회

2.2 1. 제 6회 졸업생 송별회

4.30. 탁구부 개가(서울특별시 탁구협회 주최 선수권 대회)

9.30. 교내 작품 전시 회

10.6. 김의형 교장 표창 받음-서울특별시 교육회에서 교육계에 공헌한 공덕으로 서울고등학교 강당에서 표창받음10. 1. 탁구 한성 교기 성동 원두에 휘날리다(서울특별시 학도후국단 주최

시내 중.고등학교 제 6회 탁구대회우승)

10.20. 방화사상 고취 교내 웅변 대회

11.24. 선행학생 표창(홍성옥)

[1958]

1.21. 고등학교 12학급 증설 인가

2. 교감 윤태영 선생 취임(송근영 교감 사임)

2.22. 졸업생 송별 연예 대회 개최(본교강당)

2.26. 고등학교 제 7 회 졸업식(졸업생 l43 명)

3. 1. 3.1 절 경축 가장행렬 성료

5.12. 김의형 교장 시혜 불망비 제막식(공주 탄천에서 영육의 공과 민족 복지의 공으로 향리 인사들이 건립)

5.22. 본교 염전 위문 (교사 학생 대표)

5.16. 탁구 한성 위력 발휘(대한 탁구협회주최 ? 중고등학교 대항 탁구대회)

6.25. 6.25 웅변대회와 행진

6.21 송충이 잡이(학교 뒷산)

7.4. 모내기 실습(서울농대)

7. 학도호국단 조직

8.30. 방학숙제 전시회(구내깅당)

9.18-19. 탁구부 서울시 대표로 대전 전국대회에 참기

8.6. 제 4 회 방첩 고취 웅변대회 개최, 학교 환경 정화 위원회 조직

10.4. 밴드부 일산 국교 초청 연주회 (2박3 일, 임양수 선생 인솔)

10.3 1. 대한 미술 협회 주최 전국 중고등학교 스케치 대회 당선(1 00% 입상, 특선, 가작, 입선 당선)

10.25. ‘읽고 깨끗한 학교’ 수상(홍릉에서. 성북경찰서)

10.18. 서울 특별시 학도 호국단 체육대회 mass game 참가

10.24. UN day 기념 행시· 참가

11.5. 이 대통령 월님 방문 환송 전교생 동원

11.14. 틱구부 활약(충남 공주 틱구 협회 주최 탁구대회 시범 참가)

12.20. 새교사 업주식 예술제

고퉁학교 새교사(1956-1958) 2년 반 공사

12.30 대구 청구대학 주최 전국 남여 학생 시작 현상 모집 입선 당선(고3 조신자)

[1959]

2.24 제 8 회 졸업식

2.19. 졸업생 송별 예술제

치안국 주최 전국 애림녹화 사상 앙양 포스터 모집 가작, 입선 당선(고 2-2 유정옥, 유주숙, 이양순)

2.24. 동창회 정 기 총회

학도호국단 주최 제 5 회 전국 남여 중.고등학교 현상문예 작품 모집 당선(고 3-1 성춘자, 중 3 김기옥)

5.8. 학도호국단 결성식 거행

:학도호국단 특활반 지도교사 닥구부 이인영

육상반-정광수

연극반-김영진

무용반-이순희

음악반-김명길

취주악반-임양수

5. 한성 염전 위문(충남 당진군 분향만, 연산 25,000 가마 생산)

4.25-27. 전국 탁구선수권 대회 우승

6.27. 세계 일보사 주최 이 대통령 탄신 경축 탁구대회 우승(탁구부)

5.31 대한민국 미술교육 연합회 주최 스케치 경연 대회 12 명 입선

6.25. 6.25. 멸공 정신 함양 6.25 9주년 웅변대회 개최

시민 반공 대회 참가(고2)

학교장 6.25 회고담 강연

6. 장학 제도 신설(각 학년 최우수 학생 표상, 특기생 장학제도)

6 모내기 실습 참가(서울 농대)

6.16. 제 1 회 문학자담회 개최

7. 5 과학관 신축 공사 시작

7.30. 숙제 전시회

8.2. 학도호국단 간부 훈련 참가(고2 민욱자)

탁구대회 성료(서울특별시 학도호국단 주최 탁구대회)

10.5. 개교 14주년 기념식

윤태영 교감 30년 근속 표창(서울 교육회)

상장 상품 사태(육상, 웅변, 미술, 무용, 문예)

10.8. 한양대 주최 전국 남여 작품 낭송회 1 위 고2 윤태숙

10.1 0. 생활 지도관 개관 1 기 업소식(이필옥 선생 지도)

10.4 사라호 태풍 재해지 위문겸 경주 수학여행(의연금 18 ,800원, 의류 124 점)

10.29. 개교 14주년 기념 예술제 성료 (4 일간, 연예, 무용, 음악, 취주악)10.28. 본교생에 공연

[1960]

10.29-30. 각 국민학교에 공연

11.1. 일반에 공연

핸드볼 반 조직 활동 시작

4.19. 4.1 9. 학생혁명에 참가, 본교 진영숙 학생 순국

5.1 7. 진영숙 양 위령제 거행

9.30. 숙제품 전시회

9.3- 13. 서울시 체육대회 및 전국 체육대회 예선대회

: 육상부-300m 강윤자(고 1-4) 서 울시 대표로 선발됨

8.27-28. 동아일보 주최 32 회 전국 남여 학생 수상경기 대회 100m, 200m평형 입상

미술부 입선(흥익대 주최) 수채화부 입선 6명

학도호국단 해체-학우회 조직

9.4. 제 2 회 생활지도관 입관

10.8. 한양대 주최 남여 중고등학교 작품 낭송회

꽁트부 1 석(고2 이기자)

10.8. 전교생 신체 검사 실시

10.26. 이대 음악 콩클서 밴드부 입상

11.19. 종합 위문딘 파견 공연(육본강당)

무용, 밴드부, 합창(육본에서 감사장 보내옴)

12. 1. 웅변부 공주에서 개선(전국 남여 웅변대회 고 1-4 우금지 문교부 장관상, 고2-3 이승 김학준 민의 원상)

12. 1. HLKA방송국 초청 밴드 연주

12.1. 특별 반공 강연(대강당, 단국대 김기석 학장 초청)

[1961]

3.27. 웅변부 이 승(고 3-3) 국무총리 특등상 수상(대 한 학도동지 회 서울특별시 본부 주최)

반공사상 재무장 촉진 전국 남여 중.고등학교 웅변대회 시상자 전국 순회 웅변대회 개최(서울, 대전, 공주, 이리, 전주, 굉주, 목포 순회웅변)

5.24. 제 1 회 학력경시대회(국,영,수, 사생)

3. 교과 시간표 대폭 개편

10.5. 과학관 개관(연건평 853 평. 도서실, 음악실, 미술실, 물리실, 화학실, 재봉실, 가사실 등 특별부대 시설 갖춤. 기공 3년만에 약 2 억환 경비소요)

10.29. 핸드볼반 활약(대한 핸드볼 협회 주최 한,일 친선 경기대회 오픈게임에 본교 출전)

10.25. 제 4 회 예술제(연극:‘호동왕자’ 공연, 무용부: 농악공연, 밴드부:‘대한성을 노래합시다’ 공연) 제 8 회 이대 콩클에서 밴드부 입상

11.19. 동국대 주최 전국 학생 웅변대회 단체우승-우승기 획득

11.24. 성균관대 주최 전국 학생 웅변대회 단체 우승(우금자: 개인상 최우수상, 이승:우수상 수상)

10.29 일본 체육대학 핸드볼부 초청 경기에 본교 핸드볼부 오픈게임 참가(일본체대에서 감사장 보내옴)

[1962]

한달 빠른 시업식 (3월 2 일 시업시작)-실력제일 주의, 특활 강화, 모범 토의

3월 독감 휴교에도 불구 본교 수업 계속(본교 학생들의 건강 과시)

4.4. 고 진영숙 열사 건국 표상 수여

3. 62년을 ‘실력 충실의 해’로 선포

6.4 자매부대 결연 (2839부대와)

5.16. 5.16 기념 배구대회

5. 제 4 회 생활 지도관 입소

5.20. 웅변부 개가(단국대학재건 학생회주최)

5.30. 미술부 입상 사태(단국대 주최)

6.23. 5.16 기념, 6.25 기념 국어, 영어 웅변대회 개최

4.2 1. 도서관 개관

7.1. 자매부대 위문공연(연극, 음악, 무용, 취주악)

7.28-29. 향토 사회를 위한 예술제 성료

9.6. 한,일 친선 핸드볼 경 기 일본선수단 본교 방문

8.29-30 서울대 약대 주최 정구대회 우승

서울 대표 선수권 획득

9.10. 교내복 착용

9.3 휴가중 과제물 전시회

8.22. 서울시 중학교 송구대회 본교에서 개최(본교 우승)

10.5. 자매부대 에서 독수리 장학금 보내오다

11.22. 음악, 밴드부 K-TV 출연

10.12-14. 제5회 예술재 개최(국민학교 공연, 주민공연, 학부모 공연)

10.2 1. 제43회 전국 체전 정구부 완전 재패, 선수권 장악(중등부)

11.22. 체육관 공사 착공

12.10. 우수학생 뺏지 달이-주다(송구부, 정구부, 미술부)

[1963]

제 1 회 교내음악 경연대회(합창 l 등 중 1-5 , 2-6, 3-7, 고 1-6, 2-1, 중

독창, 피아노, 리넷부 다수 입상)

졸업기- 제정(이 1칭구 직시 최춘근 작곡)

아시아 직가데회 참가(교사 이병구)

63 년을 ‘실력 충실의 해’로

4.26. 제 1 회 체육주간 행사

4.4. 문화방송 주최 장학생 퀴즈 담당 우승(서울상고, 동북고교를 물리치고)

4.9 일본체육대학 주최, 한.일친선 럭비 경기팀 본교 예방

5.4 동국대 주최 전국 남여 고교 백일장 특선 당선(고3 흥청자)

4.28. 전국 학생 휘호 대회 특선 2 명 당선(중3 홍순기, 고2 김병혜)

4.1 1. 서울시 남여 중고교 춘계 정구 대회 우승기 셋을 독치-지(대한정구협회 주최)

4.2 1. 전국 아통사상 대회 감독요원으로 본교 학생 파견(덕수궁, 현대 미술연구소 주최, 동아일보 후원)

5.25-26‘ 국민학교 대항 핸드볼 경기대회 개최(본교와 대한 핸드볼 협회 공동주최, 본교 운동장에서, 우승 남:안산국교 여:충무국교)

6.2-4. 전국 여자 연식 정구대회 본교 중학팀 연승의 개가: 우승기 둘차지(서울운동장에서)

6.8. 동아방송 개국 기 념 중창콩클에서 당당 우승

6.25. 6.25.웅변대회

7.5. 교내 글짓기 대회

10.5-6. 오페라 ‘춘향전’ 공연(드라마센터에서)

9.13. 전국 종별 정구 선수권 대회 우승(부산 공설 운동장)

10.4-9. 한성여중.고 미술전람회(동랑화랑에서)

9.2 1. 제 12 회 학도체육대회 중학부 종합3 위(서울특별시 주최)

:육상부 5종목 서울특별시 대표로 선발됨

9. 제 44회 전국체육대회 본교 팀 다수 참가

9.15. 성북 경찰서 주관 관공서 기관별 정구대회에서 본교 교직원팀 우승

10.25-27. 교내 음악 콩클 대회

12.7. 체육관 준공, 입주

[1964]

매월 월고사 실시

64학년도 체육과 연구 지정학교가 됨(서울특별시 교육청)

-시 지정 체육과 연구 발표회 교사 강건영

4.26. 제 4회 전국 남여 중.고등학교 휘호대 회

-중학교 단체우승, 고교 장려상(상명여자고둥학교 강당에서)

춘계 각종 정구대회에서 본교팀 우승기 셋을 차지

5.15-16. 국민학교 대항 핸드볼 대회 개최(본교 체육관에서)

-우승 남:숭신국교, 여:용강국교

7.2. 교내 글짓기 대회-장원 중 1 -5 김영숙, 고3 -6 김은희

제 45 회 전국체전 넓이뛰기 황정인, 400계주 우승

9.2. 과제물 전시회

11.10-16. 교장 선생님 일본 시찰

11.23-29. 제 2회 미술전시회(화신 화랑에서)

제3회 교내 음악 경연대회

[1965]

교육목표 ‘실력 향상 학생 선도’ 선포

5.3 1. 고교 핸드볼 준우승(선수권대회, 부산에서)

5.29-30. 제 5 회 아시아경기대회 본교 선수 6명 피선됨

5.25. 제 3 회 교내 글짓기 대회 장원 중3-4 권혁수, 고3-5 김복희

[1966]

선행학생 표창 고2-3 차병숙, 이명자

제 7 회 예술제 연극공연 ‘낙랑공주’ 공연

한일 친선 정구원정

배 구 패 권 (8호 p149)

제 3 회 동경 문학 콩클 당선

정 구부 활동(R.S.B.컵 쟁 탈전 우승)

핸드볼부 우승

4.1-7. 춘계 연맹전 배구팀 우승

5.28-29. 제 4 회 국민학교 대항 핸드볼 대회 개최(본교체육관)

-우승 남:깅-원 남춘천국민학교, 여: 경 기 광주 동부국민학교

5.28 체육장학금 수여받음(중 1 송정희)

5.4 미술실기대회, 서울신문사 주최 제 2회 전국 초.중 고 파스텔화 실기대회 다수 입선, 임경숙 선생 미술 지도자상 수싱

6.17. 제 4회 교내 글짓 기 대회 장원 중2-2 정진숙, 고3-5 윤선희

서울특별시 과학전 입상

8. 1. 세계 건강 오락 체육 협의회 만찬회 (ICHPER) , 협의회 한국 회장 김의형 교장

중앙일보 주최 중앙서예전에서 활약, 본교 문교부 장관 단체상 수상, 특선 다수

9. 1. ICHPER 세계사무총장 본교교장에서 감사장 전달

9. 도서실 최고 이용자 수상 중2-6 강순남, 고2-3 김병숙

10.5. 한성학원 창립 21 주년 기념식 10년이상 근속 표창(재단-조동식, 안호상, 학교-이필옥, 김성열, 김정용, 김영회, 윤태영, 이인영, 신응균, 이종범, 이혁, 이양수, 최경순, 최응환, 김상완, 김성택, 김성항, 송휘림, 김옥희, 홍계표, 황일성)

11.23-24. 교내 음악 경연대회 (종합상 중 1-7, 고 1-7)

11.21. 한국 서예교육협의회 주최 서예 경서대회 중등부 우승

덕행상 표상(고 1-1 정순호, 차오희)

4.25-5.5. 제 15 회 서울학도체육대회(서울운동장) -중 준우승, 고 3위 수상

12.12. 배구 추계 연맹전 여중 l 부 우승, 여고 1 부 준우승

11.28. 제 1 회 수학 경시대회

[1967]

7.28-8 .2. ICHPER 제 4 회 대 회 만찬회

제 6회 서울 학도 체육대회 여중부-준우승, 여고부-우승

5.16. 동국대학 주최 서예 경연대회 최고상 수상

우수학생 표창: 핸드볼부-고 l 안성덕, 김창현, 이미라

고2 박영주, 최송미, 김혜경, 이명순

고3 김명숙, 강경애, 김정희

서예부- 고 1 김진윤, 우금주

고2 조병란, 황연수

중 조경희, 이규설

문예부- 고2 이귀영

5.8. 제12회 어머니날 기념식 및 장한 어머니 표상

6.27. 제5회 교내 글짓기 대회 (장원 중-박계성, 고-이옥경)

7.1 3. 김교장 대한 체육회 공로상 수상

9. 학교부지 공사 준공(3,000평)

6.12. 제2회 전국 학도 체육대회 육상부, 핸드볼부 우승

서예부 한국 서예전 석권

김교장 대한 교육연합회 교육공로자 연공상 수상(헌신의 반세기)

제6회 음악 경연대회

card section시작(전국 체전)

[1968]

어머니날 기념식

6.23-25. 무감독 고사 실시

제 6회 글짓기 대회 (장원 중-윤여희, 고-강복희)

6.8. 한국일보사 대한체조협회 주최 범국민 체조 보급을 위한 매스게임

참가(중 3,고 1)

6.17. 웅변대회

선행표창(중2-2 함형열, 이선희-불구친구 함께 동교)

6.25 . 전교생 영어 외우기 대회 (1등 중2-3 한기숙, 고2-7 김용숙)

5.29 전국 중 고 서예경서대회 최고 성적 발휘(수도여사대 주최)

11.1 9-22. 본교 재 4 회 미술서예 전람회 (YMCA강당에서)

9.12. 49 회 전국체전 카드섹션 참가(서울 운동장, 2 ,800 명) 카드섹션(stand mass game, stand recreation) 카드섹션은 1967 년부터 시작함

(박대통령초상화 등장) 처음-40가지, 1 968-80가지

11.5 국민 교육헌장 공표

11. 핸드볼부 최우수팀으로 추천(전국선수권 대회, 대한핸드볼 협회, 본교체육관에서 실시)

8.29. 카드섹션 공로에 대한 대통령 표창과 하사금 전수

무용부 훨약-강선영 무용단 동남아 순회 공연(고3 최정식)

숙제품전시

불국사 수학여행(고 3)

일본에서 배구전지 훈련

전국 교원 서예 강습회 개최(본교 주최, 깅사:신달우-문교부 교과과정 편찬위원, 대한 서예 교육회 부회장)

음악경 연대회(지도교사-정운철)

[1969]

5.8. 3 회 어머니날 기념행사-장한 어머니 표창(고 3 윤민정 어머니)

5.15 스승의 날 기념식

50회 전국체전 카드섹션 참가(박대통령 내외분 초상화 등장)

11.4. 문교부 장관 표창(차드섹션에 감사)

체육회장 감사장 수상

9. 1. 직원 식당 개관

10.3 1. -1 1.1.중앙대학교 주최 전국 초.중 .고등학교 무용대회 특선 당선(지도교사: 양일권)

10.14-15 서울특별시 지구별 미술실기 대회 특선 최미혜, 김순일

모내기 실습(서울농대에서)

[1970]

1.27. 제 19회 졸업식(중 10시, 고2시)

대한 체육 공로상 수상(김교장)

5.8. 장한 어머니 표창. 어머니날 매스게임

신축 8충 교사 공사중

국방 기금 헌납 바자회

모내기 실습(서울농대)

국민훈장 표상

교장 선생님 국민 훈장 동백장 수상

카드섹션(전국체전)

저1110회 음악 콩클을 끝내다(지도교사:유인경)

경주 수학여행(고3)

[1971]

수영장 개장

국민훈장 석류장 표상(김영희, 임양수, 이인영)

5.8. 어머니날 기념행사

제9회 글짓기 대회(주제:중-딸기와 우리집, 고-태극기와 수영장을 기다리는 마음)

11.2 1-25. 제11회 음악콩클(지도교사: 정운철)

·합창 1 동 중 1-11, 2-4

고 1-5, 2-3

카드섹션 참가(전국체전, 국군의 날)-대통령 하사금 단체 수치 수상

에디오피아 군인대표 카드섹션 배우러 오다

자매부대 위문(8733부대)

매스게임

경주 수학여행(고3)

[1972]

카드섹션 표창패 (220종 연출)수상(문교부 장관)

신축 8층 교사

5.16. 5 .1 6. 기념행사

학교장 송덕비 제막

견동국민학교 개교

11.15. 교련 검열(대대장:심숙자)

5.8. 장한 어머니 표창

고2 경주 수학여행

각종 특활부 활약(농구, 무용, 배구, 서 예)

글짓기 대회 개최(장원 고3 정미선, 중2 강현숙)

카드섹션(국군의 날, 전국 체 전)

10.18. 수도여사대 주최 무용 콩쿨 2등 고3 천명순

9.23. 경희대 주최 무용콩쿨 1 퉁 고3 이회란

[1973]

서울시 고퉁학교 학생 간부 수련소 제 8 기생 입소(대성리)

무용부 활약(지도교시 : 양일권)-9 . 14-15. 수도여시-대 주최 전국 여자 중.고등학교 무용경연 2동 차지(고3 이명희)

9.20-2 1. 경희대 주최 중2 강병희 3 퉁, 고3 이병희 차석상

배구부 스포츠 소년 대회 서울시 예선 대회 준우승(지도교시윤성열)

어머니 수영 교실(지도교사:이용)

대통령기 쟁탈 전국 자유 교양대회 l 퉁(중 1 김희경)

카드섹션(국군의 날)

교장 선생님 교육공로패 받음(대한 사립 중.고등학장회)

카드섹션 표창패 받음

사립 중고등학교장 부인회로부터 피아노 기증받음

교련 검열

모내기 실습(서울농대)

숙명여대 주최 전국 여고 문학 콩쿨 (2등 고2 김난희)

10.27-29.수학여 행 (고2: 경 주)

[1974]

고교 평준화 실시

3학송 명명

만년수 간행(김의형 교장 일대기)

가드섹 션 감사패 받음(국방부 장관)

교련 검열(연대장:진성숙)체력검사

모내기 실습(서울농대)

새마을 청소

육상부, 배구부 활약(지도교사:강건영, 윤성열)

장병 위문

어머니 수영교실(담당교사:정우형)

국교생 수영교실(담당교사:정우형)

밴드부 활약

김의형 교장 탄신송 제정

서예부 활동-제 l 회 동방연서회와 동아일보 공동주최 대회 최우수상

중 1 김명희

제 2 회 성균관대 주최 대회 특선 중3 최복희, 중 1 김명희

제 3 회 수도사대 주최 대회 우수상 최복희, 김병희

제 4회 대한 서예 협회 주최 대회 단체상 수상 특선 중3 최미숙

제 5 회 서예교육과 협회 주최 대회 우수상 중 1 김명희, 중3 최복희

새마을 청소(삼선교 일대)

경주 수학여행(고2)

과학경시대회 입상(고2 이혜숙)

국전에서 국무총리상 수상(교사 김경화:조각)

여고생 간부 수련회(대성리)

[1975]

대성리 간부 수련

여고 육상대회(본교 교장 개회사)

1 1.1 7-19. 제 13 회 음악경연대회(지도교사:정운철)

-합창 1 등 중 1-3, 2-8

고 1-3, 2-4

카드섹션 감사 고급 시계 증정(국방부에서)

경주 수학여행(고2)

교련 검 열(연대장:김은혜)

새마을 청소

모내기 실습(서울농대)

제 14회 교내 글짓기 대회(장원 고2 심미란, 중3 신시은)

[1976]

3.14. 학도호국단 발단식 . 배우면서 호국하는 역군 되길 다짐(연대장 고3-7 양소연)

2.25. 김의형 교장 철학 박사 학위 취득(동국대학교에서)

6.25. 6.25웅변대회(지도교사:지영원)

- 제 13 회 대통령배 쟁탈 전국 납여 웅변대회, 성북구 예선대회 2등

중 3-10 김미성

서울시 교육위원회 주최 6.2 5 웅변대회 최우수상 중 3-10 김미성

5.30 글짓기 대회 장원(고 3 이미선, 중 1 두숙)

5.15. 교내 체육대회 (400mR 1 위 중 1-3 , 2-12, 3-7, 고 1-1 , 2-3, 3-2)

5.10-11 . 제 2 회 서울 사립여자 중고등학교 육상경기 대회(높이뛰기 3 위 l-l !기 l직'- L 옥, 창던지기 I 위 신윤자, 400m 결승 5 위 최정숙)

5.19-20. 제 7 회 교육감배 쟁탈 중학교 육상경기대회(우승 중 1 , 준우승 중 2 , 준우승 중 3)

수영활동(제 21 회 전국 남여 수영 선수권 대회 중 1 조진아 배영

100m 대회 신기록)

KBS TV ‘우리들 세계’ 출연(지도교사:이무일, 주제 :20 년후)

재미동포 학생 본교 견학

영어 이야기 대회(지도교사:최택영)

배구부 자매부대와 친선경기

근로 청소

교련 검열

제 14회 음악경 연(합창 1 등 중 1-12, 2-1, 고 1-7, 2-4)

간부학생 수련(경주 화랑 교육원)

한성여자고등학교편

[1977]

김의형 교장 사임하시고 재단 이사장 취임

중.고등학교 완전 분리: 고등학교 교장 임양수, 교감 송대빈

중학교 교장 김영희, 교감 김인자

4. 제 1 회 효에 대한 표어, 시조, 시 공모(시조백일장)-장원 2-1 이진영

5.1 3. 제 1 회 교내 사생대회-우수상 2-7 염주경, 3-4 서순오

5.15. 건국대학 주최 제 3 회 전국 여자 고퉁학교 미술실 기대회 -특선 3-4 차숙희 , 장려 2-6 서 계숙, 1-4 하민수

6.4. 수도여자 사범대학 주최 고퉁학교 미술실기 대회-특선 3-4 고희선

제1회 교내 체육대회

8. 교내 과제물 전시회 우수 1-7 최명회, 2-7 정경미

9. 교련 검열

교내 합창대 회 우승 2-2

지구별 합창대회 우승 2-2

서울시 발표대회 참가(세종회관)2-2

제17회 교내 글짓기 대회-장원 2-1 이진영

대입 예비고사 개가(합격율 88%)

10. 고2 경주 수학여행

민방위 훈련

10.11. 10지구 장학 협력회 주관 미술 실기 대회-특선 2-7 염주경, 3-4 안혜영, 3-4 이미환

10.24-25. 제 1 회 시화전

[1978]

3.15. 민방위 서울시 시범학교 시범훈련(서울시장 참여)

제18회 교내 백일장(장원 3-3 오재혜)

제16회 교내 합창대회

제2회 교내 체육대회

과제물 전시회

교련 검열카드섹션 침가(국군의 날, 제 42 회 세제 시격대회:태능)

제2회 시화전(1퉁 3-6 최재옥)

신사임당 교육원 업소

서울시 백일장 차하 2-3 김미경

지구별 백일징- 차하 2-3 김미경

제1회 한묵회 서예전(학교에서· 졸업생 서예 동호회)

무용발표회

제1회 꽃꽃이 전

자연보호(정릉)

고2 수학여행

3.25. 제2회 충효사사아 앙양 시조, 표어 공모-장원 3-1 이민재

[1979]

제3회 충효 사상 앙양 시조 백일장 장원 2-2 강경소

제17회 교내 합창대회

제3회 교내 체육대회

제21회 반공 웅변대회 및 영화감상

3.24. KBS ‘푸른세 대 ’ 프로 참가(2 학년)-주제 ‘자랑’

효행상 수여 3-8 이정실

제 2355부대 위문

6.27. 영,수경시대회

제19회 교내 백일장

이병구 선생 작품집 발간 ‘남쪽 나라 이 사람들’

무용발표회

제 3 회 사생대회, 시화전

어머니 교실

자연보호 캠페인

카드섹션 없어지다

10지구 백일장 입선 1-1 이정란

[1980]

제4회 교내 체육대회

22회 문예백일장

국,영,수 경시대회

제 18회 교내 합창대회(음악콩쿨)

시화전, 꽃꽂이 전

제 4회 사생대회(미술실기)

제 4 회 충효사상 앙양 시조 백일장- 장원 1-3 장금, 3-2 김효연

서울시 과학전 입선(정혜경)

반공 포스터 대회 입상

성역 순례 대행진 참가

제 22 회 반공 웅변대회

6.24-25 제11회 교육감배 쟁탈 전국 고교 육상 경기 대회에서 본교 3 학년 3위 차지

10지구 백일장 차하 2-6 정순애

청소년 모범상 수상-고2 박왕영

독후감 발표회

땅굴 견학

자매부대 위문(제 2355부대)

생활관 입소

시화전, 꽂곶이전

제2회 한묵회전

[1981]

5. 1. 제 5 회 교내 체육대회

제 19회 합창대회

제 23 회 문예 백일장-학교교정

제 5 회 교내 사생대회-학교교정

김현배 선생 서거

동아 마라톤 대회 여자 고교 중 2 위 차지

제 5 회 충효 사상 앙양 시조 백일장

서울시 육상 경기 연맹 회장기 쟁탈전 본교 육상부 종합 3위

‘대성의 집’ 생활관 업소(1학년)

반공 포스터전 최우수상(3 지구간사학교)

국,영,수 경시대회

독후감 발표회 2-4 정은선, 2-3 곽수정

무용 발표회, 꽃꽂이 전, 시화전(강당), 제1회 사진전 금상 2-8 육영숙

제4회 교육감배 쟁탈 여자 고교 무용 경연 지구별 예선 대회 1 동 입상 2-7 황지숙

성북 지구 정화 위원회 주최 웅변대회 2등 1-7 정영숙

새마을 조기 청소

안호상 이사장 취입

장학협력회 주최 문예 백일장 장원 2-6 박은경

[1982]

제6회 교내 체육대회

제24 회 백일장

제6회 사생대회

제20 회 합창대회

시화전 꽃꽂이전, 서예전, 무용발표, 사진전

제1회 서울시장기 쟁탈 여자 고등부 육상경기대회에서 우승

12지구 문예 백일장 차하 1-2 이윤선, 2-2 방현숙

사임당 교육원 입소

경주 수학여행(고2)

l 일 승공학교 업교(고2)

[1983]

제21회 합창대회

시화전, 꽃꽂이전, 서예전, 무용발표, 사진전

새마을 청소

3. 1. 김의형 설립자 서거

[1984]

제 25 회 문예 백일장-입선 휴전선 1-5 최경원, 2-3 엄지현

북부지구 문예 백일장 차하 2-5 이윤선, 1-1 김연진

대성의 집 입소(1학년)

땅굴 견학

경주 수학여행(봄-고2, 가을-1 학년)

무용발표회

꽃꽂이전

야영훈련, 극기훈련(고2)

제 7 회 교내 체육대회

제 22회 합창경연대회

사진전

12지구 장학협력회 백일장-사문부 차상 1-7 조은아

간부학생 수련(사임 당 교육원)

[1985]

4.8 입양수 교장 서거

5.14. 염홍천 교장 취임

제 23 회 합창대회, 시화전, 서예전, 사진전

제 1 회 방송제 (HDS)

문예 백일장, 사생대회-어린이 대공원에서

체력장

반공강연회

자매 부대 위 문(제 2355부대)

14지구 문예 백일장-장원 산 2-3 조은아, 차하 산 2-5 이명주

교내 독후감 발표 대회-최우수 2-7 이순진

경주 수학여행(1학년)

[1986]

교표 수여식

신체검사

체력장

민방위 훈련

호국 의식 계도 강연반공 웅변 대회

교영: 강좌

백일정 사생대회-어린이 대공원

생활관 입소-극기훈련 (2 학년)

특훨 발표회(무용, 사진, 수예, 꽃, 서예)

교사이전

사임당 교육원 입소

경주 수학여행(1학년)

[1987]

5.15. 교직원 체육대회

생활관 예절 교육-1 학년 1 퉁 6반

특활 발표회

극기 훈련 -2학년 1 퉁 6반

이인영 선생 정년 퇴임

백일장-장원 1-7 노윤희(어린이대공원)

사생대회-최우수상 2-5 조현정, 1-2 윤수진반공 웅변대회-최우수 1-8 곽정임, 반공 강연회(연사 황현근)

시조 백일장-장원 3-1 윤나, 1-7 임지영

민방위 훈련

경주 수학여행(1학년)

14지구 자율장학회 문예 백일장-장원 1-1 박영미, 1-7 노윤희

[1988]

3.31 . 시조 백일장-장원 3-7 유현숙, 2-5 조정주

4.21. 과학의 날 기념행사(과학 독후감 발표회)-최우수 2-1 박영미, 1-8 오소희

5.9-11. 생활관 예절 교육(1 학년, 대성의 집)

극기훈련 2박3 일, 경기도 남양주군 서림수련원, 주제-우리는 하나(2학년)

5.15. 스승의 날 교사 체육대회

5.20. 제 30회 백일장, 제 12 회 사생대회-장원 1-8 한진희, 최우수 2-5 김주희(어린이대공원)

6.15. 민방위 훈련

6.24. 반공 웅변대회, 글짓기 대회 -1 위 2-2 곽정임

9.17. 서울 올림픽 개막

11.19. 자매부대 위문

[1989]

2. 김현수 선생 정년 퇴임

사생대회, 백일장(어린이대공원)

웅변대회

스승의 날 교사 체육대회

극기훈련(명성캠프, 2학년)

예절교육(1학년)

육상부활약

경주 수학여 행 (2학년)

[1990]

4.6. 시조 백일장

5.19-2 1. 야영극기훈련 (2학년)-산정호수 명성 캠프 종합 수련장

5.21-23. 생활관 교육(1학년)-대성의 집

5.29. 제 32 회 문예 백일장(어린이대공원)

5.29. 사생대회(어린이대공원)-최우수 1-6 김언주, 2-5 임병은

6.22. 교내 반공 웅변대회 -1 위 1-5 김혜란, 2 위 2-5 김찬휴

10.16-19. 경주 수학여행(1학년)

10.26. 호국의식 계도 강연회(홍종언 연사)

11.7. 독후감 발표대회 -1 위 2-3 김정완

11.16. 특활 발표회(무용실)-공예품 전시, 시화전

육상부 활약:김혜영, 노승희, 최서연, 조선미

제 4지구 장학 협력회 주최 사생대회-금상 2-5 이정림, 은상 1-6 김언주, 2-5 임병은

제 4지구 장학 협력회 주최 문예 백일장 차하 2-3 권지영

[1991]

2.12. 염홍천 교장 사임

2.13. 김인자 교장 취임

3.28. 충효 사상 앙양 시조 백일장

5.15 스승의 날 교사 체육대회

5.29. 제 32 회 백일장, 제 14 회 사생대회(어린이대공원)-장원 2-3 이수영, 차히 1-4 김현경, 최우수 2-3 황지선, 우수 2-5 우경원

6.20. 6.25 웅변대회(체육관) -1위 2-4 김혜란, 1-2 변유경

8.27. 이벙구 선생 정년 퇴임(국민 훈장 통백장 수상)

10.14-17 경주 수학여행(l학년)

10.30-31 시화전(무용실)

육상부 활약:제 10회 시장기 육상경기대회 -100m 2위 200m 2위 400mR2위 3-8 김연화, 1500m 2 위 3-3 김현정, 멀리뛰기 1위 1-8 김은정, 포환 던지기 1위 강연숙, 경보 1위 2-6 박은숙, 멀리뛰기 1위 1-4, 원반 던지기 1위 이선미

제12회 회장기 쟁탈 및 제72회 전국 체전 예선 -300m 3위 3-3 김현정 종별 육상 경기 대회 -800m 1위 3-5 김혜영, 300m 1 위 1500m 2위 3-6 정수희

[1992]

3.26. 충효 시조 백일장

4.27. 과학 독후감 쓰기

5.12. 소풍(어린이대공원)

5.16. 제 7 회 교내 체육대회

6.19 제 34회 교내 백일장-차상 1 이선향, 2 변유경

6갔, 자매 부대 위문

7.1 6. 제 10회 독후감 발표대회-최우수 2 이율희, 우수 1 위지연

10.1 9-22. 경주 수학여행 (1학년)

10.19-21 생활관 교육(2학년)

[1993]

민족 공동체 의식 함양 글짓기 대회-차상 2 석근숙, 차하 2 김진민

제 3지구 문예 백일장-차상 2 변유경, 차하 l 김희연

2. 황동의 선생 정년 퇴임

3.30. 시조 백일장

6.11 . 교내 합창 대회

8 . 20. 차수능고사

10.15 - 18. 경주 수학여행(1학년)

10. 13 - 14 . 대전 Expo 견학(2학년)

11.16. 2차 수능고사

[1994]

3.3. 신입생 학력고사3.28. 환경 미화 심사

3.29. 충효 사상 앙양 시조 백일장

4.1 1 과학 독후감 쓰기

4.15. 지능 적성 검사

4.23. 과학 강연회

4.25 간부 학생 수련

4.30. 보은 서신 작성

5.15. λ 승의 날 행사

6.15. 진로 자료 영상 교육

6.17. 자매 부대 위문

9.27. 과학 경시대회

10.12-15. 경주 수학여행(1학년), 대성리 생활관 교육(2학년)

11.4. 특활 발표회(도서실, 무용실)

11.23. 대입 수능고사

제5장 도약기(1977-1994)

-중학교편-

제1절 중·고 분리와 도약하는 한성여자중학교

1) 중 · 고 분리와 분리 당시의 학교 현황

중·고 분리 당시 중학교 입학 제도는 무시험 진학제가 실시 된 후였다 60년대 일류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과열 입시 경쟁은 학교 교육을 비정상화 시키고 계층간의 위화감이 날로 심화되자 1968 년 중학교 무시험 제도의 개혁이 단행 되었다.

중학교 무시험 제도의 핵심은 일류 중학교의 폐지, 즉 중학교의 평준화를 의미하였고 효율적인 평준화를 위해 중 · 고등 학교의 분리 독립 계획이 정부에 의해 강력히 추진되었다.

이에 한성 학원에서도 중 · 고 분리 정책에 따라 1976년 12월 31 일자로 설립자인 김의형 박사가 교장직을 사임하고 1977 년 1 월 6 일 교장으로 김영희 선생이 취임 하였다.

‘조국과 민족에 기여할 수 있는 충효 사상에 투철한 사람’을 기르

는데 역점을 두고 교육 실천에 적극 노력 했다.

분리 초기 당시의 학교 현황은 다음과 같다.

(1) 교육 과정 시간 배당표

교과 시간 배당표

과목 학년 1학년 2학년 3학년 12 12 12

도덕 2 2

국어 4 5 5

국사 2 2

지리 3

사회 지리 역사 일반사회

수학

과학 물상 생물

체육

음악

미술 서예 미술

한문

영어

기술

가정

특활

총계

(2) 교무 분장표

교무 분장표

교장

교감

교직위원회

학년별 담임회

교과분과협의회 부별협의회 선도위원회 전학지도위원회

운영기획협의회

교무부 기획행사계 문서계 수업계 학적계 고사계 통계계 기록계 전학지도계 간행물계

학생부 기회계 문서계 학생회운영계 미화계 생활지도계 주번계 선도계 동원계

연구부 기획계 문서계 연수계 특활계 도서계 교구관리 계 검사계

교도부 기획계 상담계 장학지도계

새마을 기획계 저축계 원호보사계 생활개선계

체육부 기획계 민방위계 훈련계 안전지도계 보건위생계

국민윤리 기획계 반공교육계 윤리지도계 홍보자료계

(3)시설 현황

가. 학교 교지 면적 : 9,337.25 m'

나. 운동장 : 7,57 1.30m'

다. 건물 면적 - 본관: 3,387.77 m' ’ 체육관':1 ,245.32 따

라. 보통 교실 및 특별 교실

구분 보통교실 시청각실 미술실 음악실 자료실 과학실험실 가정과실습실

실수

마. 관리실 및 부속실

구분 교장실 교무실 사무실 도서실 강당 양호실 상담실

실수

구분 숙직실 화장실 창고 급수시설

실수

(4) 1977 년 당시 교사 배치도(1 994 년 현재)

운동징

2) 학급 감축 및 교사 이전

1977년 중 · 고가 분리된 이후 학교 교육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던중 1984 년 한성 학원 재단에서 ‘ 한성 학원 장기 발전 계획‘을 발표했다.이 계획의 주요 내용은 한성여중 · 고와 한성 대학의 교사를 상호 이전한다는 것이었다.이 계획에 따라 1986년 7월 19 일 여름 방학이 시작함과 동시에 교사 이전을 단행했다.

현재 본교의 본관 건물은 전 교생을 모두 수용할 수 없는 시설때문에 부득이 1 개 학년 (1 학년)은 고등 학교 건물 2, 3층을 사용하게 되었다.한펀 교실부족으로 1984년 11 월과 1994년 8 월 2차에 걸쳐 서울특별시 북부교육청으로부터 각각 2개 학급씩 감축 승인을 받아 현재 30학급으로 편성되었다. 학급 감축을 하게된 주된 이유는 본관 건물의 열악한 시설과 특별 교실의 절대 부족으로 다양한 학습 지도와 자율적인 학생 지도에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현 교사 배치도

한성여자종학교 교사 l 새치도

욕딩 ( 7 ;;) F 폈펀필뭔 | 3 짧 1: 붐 | 6;; 뚫률뚫휩 강 r - ~웰~ 물 3-7 3-9 앙고 3-8 3-10 1 회녕 (고등학교 긴웅) 2F I 3F ,-,에서 2 용 '-8 인끼지 1 용 지히

3) 교복의 변천

(1) 교복의 자율화

본교의 교복은 개교이래 1982년도 까지는 대부분 여학생들이 입은 감청색 계통으로 통일되었다. 1982년 정부는 l 월 중 · 고교생 교복 및두발 자율화 방안을 발표였다. 두발의 자율화가 먼저 시행된 뒤 1983년 신학기 부터 교복의 자율화가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교복 자율화 조치는 변화하는 시대에 창의적이고 개성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 학부모들과 사회 여론이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본교에서는 학생들의 자유복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 주고 올바른 복장 예절을 지도하기 위해 같은 해 4월 20 일 교내 자유복 발표대회를 개최하였다

(2) 교복의 재 착용

교복의 자율화는 학생간의 위화감 조장,생활지도상의 문제 등 몇 가지 부정적인 측면이 지적되었다. 이후 교복의 장점이 다시 거론되면서 교복을 착용하는 학교가 확산되 어 갔다.

이에 본교는 1991 년 6월 교복을 재 착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교복 착용에 대한 기초설문지를 조사한 결과 학부모 84%, 학생 81% , 교사 76% 이상이 찬성하였다. 이어 교사, 학생, 학부모 대표 등이 견본 전시를 거쳐 1 학년 부터 단계적으로 착용케 된 교복 모형도는 다음과 같다.

〈교복도안> <1991 년도 가정통신문>

ㄱ. 하복 상의 스커트(앞, 뒤)

ㄴ. 춘추복 조끼 블라우스

ㄷ. 동복 상의 스커트(앞) (뒤)

L

4) 교육 시설의 확충

(1) 특별 교실의 시설 확충

교사 이전 직후 특별교실은 물상실, 생물실, 가사실, 서예실, 음악실(2개) 등 겨우 6개에 불과했다. 열악한 교육 여건에서 학생들의 다양한 소질과 특기를 계발하기 위해서 특별교실 확충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1991년 미술실에 이어 도서실, 시청각실 컴퓨터실 등의 교실이 마련되어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 조성에 큰 도움을 주었다. 시청각실에는 29 인치 대형 TV 2대와 벽걸이용 스크린을 설치하여 영화, TV, 비디

오, 슬라이드, O.H.P 등 모든 영상 교육이 가능하도록 설비되었다. 6층에 있는 강당은 학교의 대부분의 행사를 실시하는 대표적인 시설물 종의 하나이다. 그 동안 음향 시설이 고르지 못하고 잡음 등이 생겨 많은 어려움을 주었으나, 1993 년 5 월 강당의 음향 시설을 새로 설치하고 조명 기구도 할로겐 전구로 모두 교체하여 밝고 쾌적한 분위기로 새롭게 변모되었다.

(2) 학생용 책상, 걸상 교체

1988 년 7월과 1989년 10월 2차례에 걸쳐 학생용 책, 걸상이 모두 목제에서 칠제로 교체되었다. 목제 책, 걸상은 파손되기 쉽고 체격이 커진 학생들에게도 맞지 않아 건강을 해치고 능률적 학습에 지장을 주었다. 새로 교체된 철제 책, 걸상은 가볍고 견고할 뿐 아니라 밝은 색상으로 교실 분위기를 개선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본교의 교육 환경에

대한 개선은 계속되어 1991 년 3 월 신입생이 사용하는 교실의 교단, 교틱 청소함 등을 목공소에서 직접 제작하여 공급되었다.

(3) 교실 및 관리실 이중창 설치

1991 년 7월 본관 건물의 교실,관리실에 알미늄 이중창이 설치되었다. 현재 2, 3 학년 학생들이 사용하는 본관 건물은 대학 강의실 용도로 건설되어(키 높이의 창, 복도 양쪽으로 배치된 교실, 불량한 환기 시설 등) 하루 종일 교실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에게는 교실구조가 매우 불편하였다 특히 창문이 매우 낡아 안전 사고 위험과 방한, 방음 문제 등이 제기되어 시급을 요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실의 이중창 설치 공사로 겨울철 난방에 큰 효과를 보았다.

(4) 전 교실 유선 모니터 설치

1989년 3월 7 일 교실 및 특별 교실에 비디오 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유선 모니터가 설치되었다. 특히 3 학년 교실에는 TV를 설치하고 VTR 테이프만 준비하면 영상을 시청할 수있도록 하여 교과 수업, 특별 활동 시간 등에 직접 활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90년 8월 여름방학 중에도 방송실의 방송 시설 설비를 전면 교체하여 방송 활동을 보다 원활하게 전할 수 있게 하였다. 같은 해 별관에 있는 1 학년의 제2 교무실에도 별도 방송 시설을 설치하여 학생 지도에 많은 보탬을 주기도 했다.

(5) 컴퓨터 시설 확보

현대 산업 사회는 정보화 시대라고 표현한다. ’ 80년 대 이후 컴퓨터

는 정보화 시대를 이끈 최첨단의 과학 기기로서 정부, 공공 기관,기업 등 모든 곳에서 보펀화 되었다. 이러한 시대 발전에 호응하여 학교 교육에서 컴퓨터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988년 8비트 컴퓨터 50대를 들여와 컴퓨터실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후 3년 동안 희망 학생들에게 컴퓨교육을 실시하여 큰 효과를 보았다.

1994년 8월 북부 교육청 지원을 받아 용량과 성능이 훨씬 뛰어난 교육용 컴퓨터 486SX 28대가 설치되어 앞서가는 컴퓨터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컴퓨터실의 확보로 교과학습지도 CAI(컴퓨터 보조 학습)활용을 심도 있게 하게 되었고 학생들의 특기를 계발하기 위한 클럽활동 교육에도 중점 실시되고 있다.

컴퓨터 실습

(6) 옥외 시설의 환경 개선

본관 건물 주변에 학생들의 휴식처를 마련하기 위한 조경 사업과 계단 난간 공사가 1988년부터 연차적으로 시공되었다.

. 1987년 10월 등나무 휴게소 설치

. 1988 년 5 월 옥외 상수도 설치

. 1989년 11 월 동편,서편 교실 진입로 계단을 인조목 계단으로 교체

. 1991년 5월 동편,서편 계단 난간 설치

. 1994년 2월 외등 설치

. 1994년 5월 등나무터, 옥외 수돗가 주변 바닥 고압 블럭 교체 공사

. 1994년 8월 현관 앞, 화단 주변 바닥 콩크리트 포장 공사, 돌기퉁포천석 교체 공사

. 1994년 8월 옥외 수도관 40m/m에서 50m/m로 교체

(7) 교직원 복지 시설

교사 이전 이후 본관 1 층에 위치해 있던 교무실을 1992 년 7월 현재 3층 자리로 옮겨 교직원들의 근무 여건 개선에 최대한의 도움이 되도록 배려하였다.

이에 앞서 1990년도부터 교직원들의 복지 시설이 보완되면서 교육

환경 개선이 이루어져 교사들의 사기 진작은 물론 교육의 질적 향상에 도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최근 교직원에 대한 주요 복지시설은 다음과 같다.

1990년 2월 교무실 책상, 의자 교체

1990년 8 월 남,여 교사 휴게실 설치

1992년 7월 교무실 바닥 아스타일 포장1993 년 3 월 운동 기구 구입(역기,벨트마사지,토닉 사이클 등 다수)

1993 년 8 월 교무실 정수기 설치

1994년 5 월 교무실 컴퓨터 (486 SX) 구입

1994년 6월 교무실 천정 텍스 공사

5) 중·고 분리와 김영희 교장 취임

한성 학원의 중.고 분리 정책에 따라 설립자인 김의형 박사가 교장

직을 사임하고 교감으로 재직하던 김영희 선생이 1977 년 l 윌 6 일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1924 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하여 1941 년 한국 대학 문리학부를 졸업하고, 1948 년 본교와 첫 인연을 맺은 후 초창기 학교 발전을 위해 헌신적 노력을 한 한성 역시-의 산 증인이었다. 중 · 고 분리 직후의 어려운 여건속에서 학교의 기본 체제를 정비하고 학교의 기틀을 갖추기 위한 노력은 계속 되었다. 이러한 열정을 보인 결과 본교는 독립 체제로 기반을 다지면서 내실 있는 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김영희 교장은 불 같은 패기와 뚜렷한 신념을 지닌 선이 굵은 교육자였다. 학생과 교직원 들 에게 항상‘하면 된다’는 투 철한 신념을 강조하였다 즉 진취적인 이상을 가져 적극적인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학생들이 패기 없는 행동을 하거나 자신 없는 대답을 할 때 불호령을 내리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또한 삶의 자세를 늘 강조 하기를 ‘의롭게 살기 위한 노력’괴· ‘바르게 살려는 의지’를 높이 평가 하면서 특정한 목적에민· 쓰이는 사람보다 모든 분야에 적합한 사람이 되기를 바랬다. 김영희 교장의 학교 경영관을 요약 하면 다음과 같다

교육은 우리의 충효정신을 바탕으로 한 도의사회 재건의 관건으로 서 국력의 증강과 올바른 국가관의 확립을 기하는 원천이 된다. 그러므로 국민 교육 헌장 이념을 바탕으로 충효 교육을 강화하여서 의무• 자립 • 협동으로 연결되는 “책임”이라는 가치 체계와 봉사 • 복지 • 인간애로 연결되는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가치체계를 융합 조화시켜 우리 교육이 국가 발전의 근원으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있도록 힘써야 되겠다.

이에 우리는 교육의 근본목표를 국민교육헌장 이념에 두고 충효 사상과 새마음 갖기 운동을 생활화 함으로써 반사회적 행위와 사회 부조

리등을 제거하여 밝은 사회의 실현, 성실, 근면한 생활 기풍의 진작, 국민의 정신혁명 달성 등에 따른 새로운 국가관과 전통적 미풍 가치관을 재정비 하여야 할 것이다.

1991 년 2월 김인자 교장의 후임으로 고등학교 교감으로 재직하던 송대빈 선생이 교장에 취임하였다 송대빈 교장은 대전에서 출생하여 1949 년 서울 대학교 약학 대학을 졸업하고 대전 충남 고등학교에서 근무 하던 중 한성 학원 설립자인 김의형 박사가 본 학원의 우수 교사확보 정책에 따라 선생의 학식과 인품을 높이 평가하여 1966년 초빙하였다. 김의형 박사의 뜻에 따라 약 15 여 년간 고등학교 교감으로 재직하면서 한성 학원의 발전에 크게 기여 했다.

1991 년 본교 교장으로 취임하면서 그동안 한성 여중의 문제점과 보완점을 간파하고 민주적인 의견 수렴 과정을 통하여 적극적인 해결 책

을 모색 하였다. 교육의 주체를 담당하는 교직원들의 사기 진작이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는 핵심사항이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교직원 건강 관리를 위해 체력 단련 기구를 구입하고, 교무실에 정수기 및 컴퓨터 설치등 근무 여건 개선에 최선을 다하였다. 교직원 상호간의 협력과 단합을 특히 강조하여 분위기 조성을 위한 모임을 직접 주선하는 등 물심 양면으로 애쓰는 모습은 많은 교사들의 귀감이 되었다. 상대방을 편안하고 따뜻하게 감싸주는 자상함과 인자함은 학교가 내 집이요, 교정이 내 뜰이고 학생들이 내 자식이라는 40여 년간의 교직 생활에서 우러 나오는 교육자로서의 인품이요 붐가짐이었다.

항상 ‘분수를 지키며 서둘지 말고 순리대로 살자’ 라는 생활 신조로 당신 자신을 정립함은 물론 학생들이 결과 만능 주의에서 오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놓력을 갖추는데 힘써 왔다.

또 학생들의 소질과 특기를 계발하기 위한 도서실 확장, 미술실,컴퓨터실 등의 시설 확충으로 면학 분위기 조성에 큰 도움을 주었다. 송

대빈 교장의 학교경영관을 요익하면 다음과 같다.

교육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 항시 자문자답하며 교육의 본질적 측면에서 학교 경영을 시도해 보려고 고민도 하고 노력도 하지만 우리의 교육적 조건이 불충분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학교 교문을 들어 서면서 스스로 다짐하고 있는 것은 ‘오늘도 나는 한성 여중 1600 여 가족의 보람찬 내일을 위하여 그들이 올바르게 생각하고 행동하여 밝은 꿈을 이루어 나라와 겨레에 이바지할 수 있는 한국 여인이 될 수 있도록 나의 정성을 다하자’라고 다짐한다.

제 2 절 내실 있는 교육 활동

1) 교육 계획 수립과 운영

학교 교육 계획은 한 해의 다양한 교육 활통과 학교 운영 방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학교의 교육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합리적인 절차와 방법이 필수적이다. 본교의 교육 계획은 크게는 국민교육헌장의 이념을 구현하고, 작게는 교훈과 학교 운영의 실천 목표를 중심으로 당해년도의 중점 사항과 세부 실천 사항을 수립해 왔다.

본교는 교훈인 참되고 착한 사람, 슬기롭고 아름다운 사람, 의롭고 건강한 사람을 바탕으로 ‘나와 나라를 사랑하는 성실한 한국 여인을 육성’하는데 교육의 목표를 두고 있다. 교육 목표를 구현하고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교육 시책의 기본 방향을 기저로 삼고 교육 운영 전반에 걸친 자체 평가를 바탕으로 창의적이고 체계적인 학교 교육 계획이 추진되어 왔다 이러한 교육 목표를 추진하기 위하여 연도별 차

이는 있지만 그동안 추진되어 온 학교 운영의 기본 방향은 다음과 같다.

@ 도덕성 회복을 위한 인간 교육 : 바른 생활의 습관화

@ 교육의 질 향상 : 학습 능력의 신장

@ 파학,기술 교육의 충실화 : 전산 교육의 정상화

@ 교육 여건의 개선 : 학교 시설의 보완

@ 연찬으로 전문성 제고 : 교원의 품위 유지

@ 교육의 자율성 신장 : 학교 운영의 합리화

2) 교무의 조직과 운영

학교 교육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교무에 대한 분업적 협력 체제가 요구된다. 교무 조직에는 교육 조직,교무 분장 조직,운영 조직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학교 교무 조직 중 가장 핵심 역활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교육 조직이다. 이 조직은 교육 과정을 직접 담당하는 교장, 교감, 주임 교사, 학급 담임 교사, 교과 담임 교사 체계로 구성되어 업무를 분담하고 있다

교무 분장 조직은 교육 과정 운영을 지원하고 행정 업무의 기능을 위한 성격으로 교장 -교감 - 각 부 주임 - 각 부 계원으로 구성 되어 있다. 1977년 중 · 고 분리 이후 교무부, 학생부, 연구부, 교도부,새마을부, 체육부, 국민 윤리부 등 7부서로 운영되어 오다가 80년대 정부의 과학기술 교육의 진흥책을 계기로 1985년부터 과학부가 신설되어 8개 부서가 되었다. 이 조직은 1992년도까지 유지되어 오다가 장기적으로 학급 감축에 대비한 부서 조직 개편을 단행하여 1993 년부터 교무부, 연구부, 학생부, 교도부 등 4개 부서로 통폐합 되었다.연구부에는 과학부를 학생부에는 체육부, 새마을부를 교도부에 윤리부 업무를 통합하

였다. 1995년부터는 당국의 지시로 교도부를 진로지도부로 부서 명칭을 바꾸어 운영해 오고 있다.

운영 조직은 교육 조직과 교무 분장 조직을 측면에서 지원하고 협조 체제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전 교직원이 참여하는 교직원 회의, 주임 회의, 성적 관리 위원회, 생활 지도 위원회 등을 두고 있다.

교무조직

교장

교감

교과 협의회

부별 협의회

학년 협의회

성적관리 위원회

학생생활선도 위원회

기획계 기획계 기획계 기획계

학적계 연수계 학생지도계 상담계

수업계 교지간행물 환경미화계 심성계발계

고사계 교재교구계 G . S 계 음악감상계

기록통계계 특활계 저축통계계 병상계

의식행시-계 교육홍보계 자연보호계 안보충효계

교과서계 도서계 봉사계

과학교육계 민방위계

과학행사계 구호봉시- 계

방송 계

3) 교육 과정과 교육 평가

(1) 교육 과정

교육 과정은 학교의 지도 아래 학교 내외에서 이루어지는 학생의 모든 학습 활동이다. 즉 학생에게 영향을 주는 학교의 노력을 종합적으로 묶은 교육의 전처l 계획이라 할 수 있다. 지적 활동인 교과 편제와 학생의 심신과 조화로운 발달을 도모하기 위한 특별 활동 즉 클럽활동, 자치 활동, 민주적 시민 양성을 위한 생활 지도, 학교 행사 등의 모든 교육 활동을 말한다.

정부 수립 후 교육 과정은 6차례 개정되었다. 제 l 차(1 954-1955) 교육 과정은 지적 체계 중심의 생활 개념을 강조 하였고, 2차 (1963 년)교육 과정은 경험 중심 교육 과정으로 개정되었으며, 3차 (1 973 년) 교육과정은 기본 지식과 탐구력을 위한 학문 과정으로 새롭게 하였으며, 4

차(1981년) 교육 과정은 인성 교육에 역점을 두어 건전한 심신의 육성, 지식과 기술의 1:lH 양 도덕적인 인격형성, 민족 공동체 의식의 고양등에 중점을 두어 개정하였다. 제 5차 교육과정 개정 (1987 년 3월 31일 문교부 고시 제 87-7호)은 건강한 사람, 자주적인 사람, 창조적인 사람, 도덕적인 사람을 목표로 21 세기를 주도할 건전하고 건강한 사람을 기르고 산업화 정보화 시대에 대비한 기초 과학 교육을 강화 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본교는 개정된 제 5 차 교육 과정의 내용을 1989학년도 1 학년부터 적용하고 있다. 주요 편제의 개정 내용과 시간 배당은 다음과 같다.

주당 시수가 확대된 교과는 3학년 수학과 과학이 각 3-4 시간에서 4-5 시간으로, 3 학년 음악, 미술이 1 시간에서 1-2시간으로 되었으므로 본교는 과학 4 시간, 수학 4시간 으로 실시 하였다.

· 주당 시수가 축소된 교과는 3 학년 가사인데 5-7시간에서 4-6시간으로 변경되어, 본교에서는 주당 4시간으로 실시되고 있다.

· 특별 활동은 종전에 학급 활동, 클럽 활동, 학생회 활동의 3 개 영역에서 학교행사가 추가되어 4개 영역으로 편성되었다.

제5차 교육 과정 시간 배당표

학년 교과 1 기준 배당 2 기준 배당 3 기준 배당

도덕 9 2 2 2 2 2 2

국어 4 4 5 5 5 5

국사 2 2 2 2

사회 3 3 2- 3 2 2-3 3

수학 4 4 3-4 4 4-5 4

과학 4 4 3- 4 3 4-5 4

체육 3 3 3 3 3 3

음악 2 2 2 2 2 1-2

미술 2 2 2 2 1-2

한문 1-2 1-2

영어 4 4 3-5 4 3-5 4

가정 3 3 4-6 4

가사 4-6 4

자유선택 0-2 0 0-2 0 0-2 0

계 32-34 32 32-34 34 32-34 34

특별활동 2 2 2 2 2 2

종 계 34-36 34 34-36 36 34-36 36

(2) 교육 평가

학습 활동에 대한 성취도를 진단하는 교육 평가는 교사의 학습 지도에 대한 학생들의 상태를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과 교수 및 학습

빙-법에 대해 새로이 개선한다는 점 등에서 매우 증요하다. 본교는 이러한 관점에서 고시 계획 빛 성적 처리 규정 등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꾸준히 연구해 왔다.

가. 평가 종류

교과 학습 평가는 정기 고사와 비정기 고사로 구분 된다. 정기 고사는 매학기마다 중간 고사, 학기말 고시-를 연 4 회 실시하고 있다.비정기 고사는 학력 고시 모 의 고사 등이 있으며 학급 담임의 상담 자료나 진학 자료로 활용된 다.

모든 교과의 평가 문항은 동일 교과 교사들이 공동 출제토록하며 충분한 협의를 통하여 출제 해 왔다. 문항 유형은 창의럭과 사고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주관식 문항을 30% 출 제하도록 하였다.

행동 발달 평가는 학급 담임이 1년동안 학생들의 생활 태도를 누가 기록하였다. 학년말에 가 : 65%, 나 : 30%, 다 : 5% 기준으로 한다.

나. 성적 처리 규정

학생들의 학습 정도 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평가에 대한 공정성과 정확성을 위하여 성적 처리 규정을 제정하고,성적 처리 과정에서 일어나는 제반 문제를 심의 결정하는 성적관리 위원회를 두고 있다.

다. 실기 평가 기준

실기 평가를 실시하는 교과는 국어, 과학, 체육, 음악, 미술, 가정, 가사 등이며 모든 학생들이 객관성을 갖고 수긍할 수 있는 평가 기준을 매 학기초에 각 교과 협의회에서 설정하고 실기 평가 직후에는 반드시 학생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라. 성적 처리 전산화

성적 평가에 대한 정확성과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1987 년 1 학기 중간 고사부터 전산에 의하여 성적을 처리하게 되었다. 컴퓨터에 의한 성적 처리는 실업계 고교 추천제 입학에 따른 내신 성적의 신뢰성과 공정성을 기하게 되므로 경복 여상 전산실에 의뢰하였다. 그러나 외부기관에 성적 처리를 맡기는 데서 오는 문제점(성적 처리 기간의 장기화, 성적의 보안 유지, 경제적 부담 등)으로 1993 년 486 SX 1 대와 카드리더기을 도입하여 교육 통계, 성적 통계, 개인별 통지표, 신입생 분반고사 등을 컴퓨터로 자체 처리함으로써 학교 경영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정확성과 신속함은 물론 교사의 잡무를 줄이는데도 큰 효과를 가져 오게 되었다.

4) 교육협의체 결성과 우수학교 수상

(1) 각종 교육협의체 결성

가. 주임회학교 교육 목표를 중심으로 한해의 학사 운영 전반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는 기구이다. 주임 간부 회의로서 교장을 위원장, 교감을 부위원장으로 하고 각 부주임 교사로 구성된다.

나 부별 협의회

교무 분장에 따른 각 부별 담당 교사들의 협의 기구로 학교 교육의 효율적인 수행을 위하여 세부 계획을 수립하고, 학생들을 관리하기 위한 서류 취급 방법, 사무 분장에 따른 실무 처리 등 학교 행정 업무의 유기적인 협조 체제를 다지기 위한 기구이다.

다. 학년 협의회

각 학년 주임의 주관 아래 학년 담임 ,부담임으로 구성되며 매월 정기적으로 교육실천 방법을 위한 협의회를 갖는다. 학급 운영에 대한 정보 교환으로 학급 운영 기술 향상 되고 의견 수렴을 통하여 학교 경영에도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생활 지도에 대한 문제점을 다각도로 논의하고 그 대책을 세워 실천하고 있다.

라. 교과별 협의회

각 교과 주임의 주관 아래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교수 - 학습 지도를 위해 정기적인 협의를 갖는 조직이다. 본교는 교과 협의회를 8교과별로 조직하였다. 국어과 (한문 포함), 사회과, 수학과, 과학과, 체육과, 예능과, 영어과, 가정과가 그것이다. 매월 협의회를 실시하여 협동적인 수업 연구를 의논하고, 진도 조정, 효과적인 수업 모형 제시, 과

제물 부과, 시험 문제 출제와 채점 기준 설정 등을 다룬다. 영어, 수학과에서는 경시 대회를 전교생을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다.

마 성적 관리 위원회

학업 성적의 공정성을 높이고 합리적 관리를 위하여 시험 출제지 점검, 채점 과정 점검, 실기 평가 기준 심의, 성적 전표 기재 사항 점검 등의 업무를 분담하고 있다.

바. 학생 선도 위원회

학생의 포상과 정계 사항을 공정하게 처리하여 학생을 선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조직된 기구이다. 선도 위원회는 학생 선도의 방침을 징계 보다 포상 및 사전 예방에 역점을 두어 지도한다. 교감, 학생 주임, 진로 지도 주임, 학생부 기획계, 교내 외 생활 지도 교사 구성되며 교감은 위원장으로 본 위원회의 운영 전반을 통괄한다.

(2) 학교 경영 우수 표창

1983 년 12월 효율적인 학습 지도와 깨끗한 학습 환경 조성을 위해 전 교직원이 노력한 결과 서울 특별시 교육 위원회로부터 학교 경영우수 표창을 받았다. 또한 1994년 12월 교사, 학생, 학부모의 삼위 일체 교육을 모범적으로 운영하여 서울특별시 북부 교육청장 상을 받았다. 2차례에 걸친 학교 경영 우수 표창은 사회의 급속한 변화와 가치의 혼재 속에서도 오직 도덕적 인간상 회복과 교육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본교 교직원들의 최선을 다한 결과이기도 하다.

5) 면학 분위기를 위한 지원 활동

(1) 장학제도

학생들의 향학열을 복돋아 주고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가지도록 격려하기 위한 목적에서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교내에서 지급하는 특대상, 의화 장학금 퉁이었으나 점차 사회 독지가 및 교육 관련 단체 등에서 기부금을 희사하여 장학사업이 본격화 되었다 대내외 장학금 지급이 확대 됨에 따라 1991년 3월 주임 회의에서 장학금의 수혜자 인원 및 자격에 대한 규정을 제정하였다 장학생의 선발은 1 학기 1 회 학급 담임의 추천을 받아 교무 회의에서 심의하여 최 종 결 정된다. 본교의 주요 장학 종류와 선발 기준은 다음과 같다.

가. 특대상 장학금 : 1, 2, 3학년 각 5 명 계 15 명

본교 설립 이후 현재까지 지급하는 가장 영예로운 장학금이다.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모범적인 학생이 대상이 된다.

나. 의화 장학금 1, 2학년 각 2명 ,3학년 3명 계 7명

본교에서 지급하며 특대상 차순위자로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모범이 되는 학생이 대상이 된다.

다. 동창회 장학금 1, 2, 3 년 각 1명 계 3명

동창회에서 지급하며 학업 성적이 학년의 20% 이내이고, 학구열이 높은 모범적인 학생이 대상이 된다

라. 협 동 장학금 1, 2, 3학년 각 1명 계 3명

협동 조합의 이익금으로 지급하며 학업 성적이 70% 이내이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대상이 된다.

마. 자매 부대 장학금(독수리 장학금) : 1, 2, 3학년 각 l 병 계 3 명 자매 부대인 처12355부대에서 지급하며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의화 장학금 차순위의 학생이 대상이 된다.

바. 여교사 장학금 1, 2, 3학년 각 1명 계 3명

본교 여교시·회에서 지급하며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대상이

된다.

시 선교회 장학금 1, 2, 3학년 각 l 명 계 3명

본교 선교회에서 지급하며 기독교 학생으로 신앙심이 두럽고,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대상이 된다.

이 혜성 교회 장학금 1, 2, 3 학년 각각 1 명 계 3명

명륜동 혜성 교회에서 지급하며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대상이 된다

자. 소영 장학금 : 전교생 1명

본교 제4회 졸업생인 독지가가 지급하며 1993년부터 분기별 1회, 가정 형편이 매우 어려운 학생이 대상이 된다.

(2) 도서실 운영

도서실은 학생들이 스스로 자기 능력을 계발하고 교양을 쌓게 하는

곳 일뿐 아니라 수많은 학습 자료와 정보를 갖춘 곳이다. 그동안 공간시설 부족으로 도서실 확보에 어려움을 겪다가, 1991 년 8 월 육성회의 도움으로 칸막이 독서대 90석을 구입하여 도서실(본관 2층)을 개설하였다. 도서실은 도서 대출 업무보다 3 학년의 진학을 위한 자학 자습실로 이용되었다. 이어 1992년 8월 독서대 18석을 추가 구입하여 도서실 운영이 활기를 뛰게 되었다.

도서 대출과 관리 업무는 그 동안 소홀히 해오다가 ’ 92년 도서실 확보를 계기로 서고에 있는 도서의 분류와 목록 작성을 완료하고 ’94년 신학기부터 도서반 ‘여울목‘을 조직하여 효율적인 도서 관리를 추진하였다. 주요 활동을 보면 도서 대출은 점심시간(12 :45-13:25) 을 이용하고 대출 기간은 1 주일이며, 2학기 중에 독서왕 선발, 독후감 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도서실

(3) 학교 소식지 발간

학교의 교육 활동을 가정에 홍보함으로써 학부모의 학교에 대한 신뢰와 관심을 가지게 하기 위한 노력으로 학교 소식지 ‘한성 소식’이 1988 년 3 월 발간 되 었다.

‘한성 소식‘은 학교 인사, 학생 자치 활동, 성적 평가 규정, 교외 활동, 보건 활동, 각종 교내 학력 대회, 미담 사례, 교육 환경 개선, 각종 행사 등 교내외에서 실시한 교육 내 용을 매월 l 일자로 발간하여 가정에 보내고 있다. 학부모는 학교 소식지를 통하여 자녀들의 교육 내용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어 학교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고 있으며, 교육 활동에 대한 의견이나 건의는 회신란을 통하여 전달되고 그 다음해 학교 교육 계획에 침-고 자료로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4) 모범 학급 표창 제도

학생들에게 교육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상벌 제도를 적절하게 사용하는 것은 올바른 인간을 만드는 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가능한 벨보다 상을 주는 것이 교육적 효과를 극대화 시키고 인간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상에 대한 성취의욕과 파급효과는 대단히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교는 이러한 교육적 동기에서 모범 학급 표창 제도를 다음과 같이 실시하고 있다.

가. 출석 우수반 표창

출석상은 월말 통계 결과 출석이 100% 를 달성한 학급에 월 1회 ‘모범 출석’ 상패가 전달되고 있다. 1993년도에 3학년 1반(담임교사 이광우)이 ‘1년 무결석반’으로 탄생 되어 졸업식에서 시상되었다.이어 1994년도에도 1학년 4반(담임교사 손영애)이 ‘1년 무결석반’으로 종업식에서 시상되었다 연속 2년간 ‘1년 무결석반’이 나온 것은 다른 학

생들에게 모범이 되어 면학 분위기 조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나. 청소 우수반 표창

청소상은 평상시 학급 환경을 청결히 유지하여 쾌적한 학급 분위기를 조성한 학급에 월1회 ‘청소’ 상패가 전달되고 있다. 선도부 학생이 매일 학급 청소 상태를 점검하여 접수로 누가 기록 하였다가 월 단위로 표창한다. 청소 상태를 시상하는 날은 전교생의 관심도가 각별한 것으로 보아 평상시 학급환경 정리에 관심을 보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다. 환경 미화 우수반 표창

매학기 초 3월과 9월에 시상되고 있다. 학급 교실의 게시물 부착 상

태, 학습란의 충실도, 교실의 청결 상태, 청소 도구 정리 정돈 상태 등을 종합 평가하여 명랑하고 쾌적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학급에게 학년별로 시상한다.

라 체육 대회 종합 성적 및 응원상 표창

체육 대회의 구기 대회 종목에서 학년별 상위 학급에 시상한다. 응원상은 전 학년 대상으로 시상하고 있다.

마. 합창 대회 입상반 표창

학급 구성원들의 화음, 가창력, 태도 등을 종합 평가하여 학년별로 시상되고 있다

6) 인성 교육

현대 사회는 과학화,산업화의 발딜-로 물질 문명이 정신 문명을 크게 압도하였고 물질 문명과 이기주의는 가치관의 혼돈을 가져왔다. 이러한 불합리한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올바른 인성과 건전한 가치관을 정립시켜 주는 것이 우리 교육의 시급한 과제 중의 하나이다.

본교는 일찍부터 올바른 가치관을 갖춘 조화로운 인간을 육성시키는 인성 교육에 노력을 기울여 왔다. 훈화 조회, 음악 조회, 전교사 5분 훈화지도 명상 조회 등과 연계시켜 다읍과 같은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1) 훈화 조회

본교 설립 이후 현재까지 학교장이 직접 학생들을 대상으로 올바른

가치관의 정립과 도덕성 함양을 위한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매월 1회 실시하고 있다.

(2) 음악 조회

1980년 4월 첫째 목요일 음악 조회가 처음 실시되었다. 생소한 이 음악 조회는 매주 목요일 수업 시작전 20분간 시작되었는데 차분한 고전 음악, 명곡 등을 배경 음악으로 훈화방송이 실시 되었다. 평소 학교음악 교육에서 소홀히 다루어온 감상 교육을 보다 내실화하고 학생들의 건전한 인격 형성과 정서 함양을 하기 위함이었다 학생들에게 음악 감상노트를 준비하게 하여 악곡 해설 훈화 내용, 자신의 느낌 등을 감상 노트에 기록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음악의 특징을 감각적으로 이해하도록 하였고 무엇보다도 국악감상을 통한 전통 음악의 이해는 민족의 자주 정신을 갖게 하는데 큰 효과를 거두었다.

1984년부터 격주 월요일, 1993년부터는 매월 1회(월요일)에 실시하고 있다

(3) 전교사 5 분 훈화

1982 년 3 월 전교사 훈화 지도가 실시 되었다. 훈화는 청소년들이 느끼는 이상과 현실에서 오는 혼란과 가치관의 부재, 그들 세계만의 고민, 새로운 인생을 탐구해야하는 심리적 부담 등 학생들이 안고 있는 갈등이나 문제들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설득하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왔다.

전교사가 모두 참여하는 훈화 지도는 매주 수요일 조회 시간 (9:00-9:10) 에 방송을 통하여 전교생에게 실시되고 있다 전 교사 훈화 지도

는 나태하고 해이한 생활 태도에 자극을 주고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의 학생들에게 정서적 안정을 갖게 하는 등 생활 전반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통해 내면적 대화의 시간을 갖는 효과를 가져 왔다.

1993 년 부터 매월 1회(월요일 조회)실시되고 있다.

(4) 명상조회

학생들에게 건전한 가치관을 심어주고 올바른 자아 형성을 위해 1986년 4월 명상 조회가 실시 되었다. 병상 조회는 매주 화요일 조회시간 (9:00-9: 10) 에 배경 음악과 함께 명상 주제가 방송을 통해 실시되었다. 병상 주제는 주입식이고 일방적인 교육 방식에서 벗어나 학생들이 공감을 느낄 수 있는 자기 반성과 ‘나’의 존재 가치를 깨달을 수 있는 것 등으로 하여 인내심을 기르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느껴 정서 순화와 인격 형성은 물론 충효정신을 갖는데 도움을 주었다.하루 일과가 시작 되기전에 실시되어 마음을 평안하게 가다듬는 시간을 가짐으로써 학습 분위기 조성에도 큰 성과가 있었다.

7) 독서 지도

독서는 모든 학습 활동의 기초가 된다. 학생들은 독서를 통하여 폭넓은 지식과 경험을 가지며 풍요로운 정신 생활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게 된다. 본교는 학교교육에서 독서 교육이 교육과정의 주요한 한 분야로 인식히-고 독서 방법을 오래전부터 지도해 왔다.

효율적인 독서 지도를 위해 실천 방법을 여러 차례 수정해 오다 1984년도에 독서하는 생활을 습관하기 위해 독서 지도 운영위원회를 조직하여 독서 교육을 위한 모든 업무를 밑았다.

독서 지도 위원회는 학년 초에 독서 지도 계획을 수립하고 각 학년,반별로 필독도서를 선정해 주면 학급 학생 전원이 구입하여 3주 동안 읽으며, 4주에 독후감 발표회를 가진 후 다음반으로 인수 인계한다. 이 독서 지도 계획은 1991 년도부터 독서 습관을 타율적으로 길들인다.

는 지적에 따라 학급 필독도서 구입은 폐지했다. 그 대신 학급 문고를 설치하여 책을 읽은 후 반드시 독후감을 쓰게 하고 학급 담임의 검사를 받도록 했다. 이와 별도로 국어과 교사들은 수업시간에 올바른 독서뱀, 독후감 작성 요령을 지도하고 학기별 1 권의 도서를 선정하여 읽게 한 후 필기 고사(문학 부분)에 반영시켰다.

1990학년도 독서 지도 계획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90 학년도 독서지도 계획

1 목적

독서 지도를 통해서 전인적인 인격형성과 올바른 가치관 확립,정서를 순화하고 독서 후 발표회를 통하여 말하기, 듣기, 능력을 향상시켜 독서하는 생활을 습관화 하여 학교 교육을 정상화 하는데 있다.

2. 지도 방침

1) 독서지도 운영위원회를 조직, 운영하여 중학교 학생들에게알맞는 도서를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주고 독서하고자 하는 의욕을 불러일으켜 독서지도의 내실화를 기한다.

2) 각 학년별로 정규 독서지도 시간을 주당 1 시간씩 확보하여 실시한다.

3) 학년별 필독 도서를 선정 제시하고, 학급 문고를 비치 운영하여 독서 환경을 마련한다.

4) 독서 지도의 효율화를 위한여 월 l 회씩 학급별로 독후감 발표회를 갖고 우수 독후감을 학기별, 학년별로 시상한다.

5) 독서 지도의 결과를 학기별로 국어과 성적에 반영하여 독서 지도의 효과를 높인다.

6) 특활 부서에서는 독서반을 편성하여 학급 독후감 발표회와 상호 연관하여 지도한다.

3. 세부 실천 계획

1) 독서 지도 운영위원회 조직

가. 조직

중- 5 독서 지도 운영 위원회 조직표

위원장 교감 간사 연구주임

독서지도 담당교사 각 학년 주임 각 교과 주임 국어과 교사 독서지도 학년 담당

나. 기능

@ 독서 지도 계획 수립 및 학년별 필독서 선정

@ 학급 문고의 꾸준한 개선에 대한 요구

@ 학급 문고의 효율적 운영과 학교 장서 운영에 관한 연구

@ 우수 독후감 선정과 포상 결정

@ 교내 독서 관계 행사,계획 및 주관

2) 정규 독서 시간의 운영

* 1 학년 : 목요일 6교시 . 2 ,3 학년 :목요일 7 교시

가. 각 학년 반별로 필독서를 지정해 주고 각자 구입 하도록 한다.

(구입후 구입자,반,번호 ,성명을 기입 ,윤독 확인란을 만든다.)

나. 3 주 동안의 독서 시간을 이용하여 책을 다 읽고 독후감 노트에

독후감을 작성한 후 4주 째 독서 시간을 이용 학급별 독후감 발표 및 토론회를 갖는다.

다. 독후감 발표회가 끝난 후 우수 독후감을 각 학급별로 2편을 선정하여 그 다음 첫째주 토요일까지 원고에 정 리하여 연구부 독서계에 제출한다.

라. 디- 읽은 다음 윤독 순서에 따라담임 책임하에 다음 학급으로 인계한다.

마. 윤독반 순서 (1반→ 2반 • 3 반 • 4 반 • 5 반 • 6반 • 7반 •8 반 • 9 반 • 10반 • 1반)

바. 정규 독서 시간을 이용하여 월 1 권 이상을 읽도록 한다.

사. 연구부에 제출된 독후감은 우선적으로 국어 성적에 반영하여 매 학기별, 학년별로 최우수작, 우수작, 가작을 선정하여 시상한다.

3) 학급 문고 설치 운영

가. 학급당 확보 책수 :30 권 정도(학생 개인이 제출)

나. 적당한 기간 (약 3개월 정도)이 지나면 교체 한다

다. 수준과 내용이 학년에 적합한 것으로 하고 가능하면 권장 도서목록에 있는 책으로 한다. (별첨 권장 도서 목록 참조)

4) 독후감 노트 작성 지도

국어과 수업 시간에 독후감 쓰는 방법을 지도하고 독서 지도 담당교사가 학급의 도서위원회를 별도로 지도하여 학급에 전달 교육토록하고 모든 학생은 독후감 노트를 갖도록 지도 한다.

8) 서예 교육

현대 사회는 고도의 산업화와 기계 문명의 발달로 인간성이 상실되고 윤리 및 도덕 관념이 변질되어 여러 사회문제로 나타나고 있다.더구나 서구화 풍조에 밀려 청소년들의 무분별한 외래 문물 숭배는 우리의 전통과 주체성이 흔들려지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현실에서 본교는 우리의 민족 문화를 익히고 정서 순화와 인격 함양을 위해 서예 교육을 시작하였다. 서예 교육은 우리의 옛 문화를 계승 발전 시키고 글씨를 아름답고 깨끗하게 쓰는 동안 창조적인 정신 활동을 계도시키며, 또한 예술 적 인 감각을 기르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서예 지도를 위해 1960년 4월 당시 서예계에서 촉망 받던 낙산 신달우 선생을 초빙하였고, 3 년 후인 1964년도에 본교는 온정성을 기울여 서예 교실을 별도로 신축하였다. 서예실에는 각 70여개의 좌탁 책상과 벼루가 준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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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교 특유의 자랑 서예부

서예 교육은 1,2학년 미술 교과 2시간 중 l시간을 할애하여 실시해 왔고 특별활동 시간에도 별도 ‘서예반’을 편성하여 서예 지도에 온 정성윤 다 기울였다. 이러한 서예 교육의 열의에 힘입어 1963년 첫 대외 행사인 동아 일보사와 동방 연서회 주최 전국 서예 대회에서 참가자 전원이 입상하는 기쁨을 가졌다

이후 70, 80년대까지 서예 대회에서 본교는 단체상 및 개인상을 석권하기도 하였다. 더구나 본교의 서예교육이 인성교육을 위한 교육 과정의 일환이라고 주위 학교에 알려지자 서예과 공개 수업을 특색사업으로 실시해 줄 것을 여러 차례 간청하여 5-6 차례 자율 장학 협력의 연구수업 및 공개 수업을 실시하여 많은 참사를 받았다.

낙산 신달우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본교 졸업생 중에서는 개인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국전 서예 부문에서 입상하는 영광을 가지기도 하였다. 한편 서예가 좋아 학창 시절 빙-과 후에 따로이 낙산 선생에게 사사받은 일부는 본교 졸업 후에도 ‘한묵회’라는 서예 모임을 가져 사회활동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그러나 1993 년 낙산 신달우 선생의 정년 퇴임을 계기로 본교의 중점 교육이자 특색 활동인 서예 교육은 더이상 맥을 잇지 못해 아쉬운 실정이다.

제 3 절 교사활동 및 학생활동

1. 교사활동

1) 교사촬동

수업 학습 활동은 교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이며 학교 교육의 중심체라 할 수 있다. 본교 교사들은 개교 이래 뚜렷한 교육관을 가지고 자기 연찬을 통하여 교수-학습의 질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수업 방법을 꾸준히 연구해 왔다.

매 학년초 각 교과 협의회를 통해 수업 개선을 위한 토의와 새로운 수업 모형을 공동 협력하여 개발하고 발표 대상자를 혐의 결정하여 수

업 연구 및 공개 수업이 실시된다. 수업 연구 시에는 해당 교과 교사들만이 참관하여 평가회를 가지나 공개수업은 학기별 1 회씩 교과별로 실시되고 수업에 지장이 없는 교사는 모두 참관하여 자기 발전의 기회로 삼고 있다.

특히 깅평회 시간은 수업 참관 교사들의 진지한 강평속에 자신의 수업 방법에 대한 반성과 효율적인 교수 학습 방법에 대하여 깨닫게 되는 귀중한 시간이 되고 있다.

또한 본교에서는 북부 교육청 지구별 자율 장학회의 사업의 일환으로 실시하고 있는 시범 연구에 적극 참여하여 창의적인 수업 모형 개발에 노력하고 있다.

중-6 자율 장학회 시범 연구 수업 내용

연월일 과목 지도교사 학습내용 대상학급

1977.7. 8 서예 신달우 좌우명 2학년 1반

1980.9.29 사회 지영원 ‘ 80년대의 우리 경제 3학년 13반

1982.6.22 책 손철호 피다고라스 정리 3학년 9반

1984.10.31 서예 신달우 주자시 2 학년7 반

[986.5 .28 서예 신달우 부모은혜2학년 2반

2) 교사 연수 활동

(1) 자체 연수

현대 시-회는 과학 문명의 발달로 교육 환경이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급팬하는 사회에서 교육의 주체인 교사는 새로운 전문 지식과 기능을 연마하여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필요로 한다. 본교에서는 개교 이래 교직자로서의 자기 성장을 도모하기 위한 자체연수를 꾸준히 실천해 왔다.

실시한 주요 연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7 자체 연수 내용(1994년)

월별 연수주제 담당

3월

1. ’95학년도 학교 경영 중점 교장

2. 새교육 과정 편성 방향 교무1 부1

3. 학습 지도안 작성 연구부

4월

1. 실기 • 실험 평가 방법 개선 연구부

2. 교실 환경 개선 학생부

3. 신체 검사,보전 교육 학생부

5월

1. 교구 제작 및 사용법 (컴퓨터 연수) 연구부

2. 과학의 생활화(컴퓨터 교육) 과학부

3. 바람직한 1교사 1학생 지도록 작성 방법 진로지도부

6월

1. 근검 절약 운동(경제 연수) 학생부

2. 국민 정신 교육 진로지도부

7월

1. 학교 교육 계획 실천 자체 평가 (1학기) 연구부

2. 휴가중 학생 생활 지도 학생부

3. 하절기 안전 지도 체육과

월별 연수주제 담당

8월

1. 민주 시민 교육 진로지도부

2. 교구 제작 및 사용법(컴푸터 연수) 연구부

1. 체력. 검사 체육과

9월

2. 인성 교육 (심성 수련) 진로지도부

3. 3 절 운동 학생부

4. 경제 연수 진로지도부

10월

1. 통일 안보 교육 진로지도부

2. 식생활 개선 학생부

3. 교육의 전문성 제고 연구부

11월

1. 진학 지도 교육 교무부

2. 국제 정세와 안보 진로지도부

12월

1‘ 동절기 안전 지도 체육과

2. 연말 연시 학생 지도 학생부

2월

1. 학교 교육 계획 실천 자체 평가 (2 학기) 연구부

2. 사례 연구 발표 진로지도부

(2) 해외 연수

교육 현장에서 활동하는 교사들에게 국제적 안목을 넓히고 생생한 현장 경험 교육을 살리기 위한 목적에서 교육부는 각급 학교의 추천을 받아 해외 연수를 추진시켜 왔다. 본교에서 해외연수를 다녀 온 교시는 다음과 같다.

중-8 교사 해외 연수 현황

교사명 기간 목적 연수국 시행처

한용자 1991.12.9 - 12.15 일본속의 한민족 역사 탐방 일본 조선일보

윤종혜 1992. 6.21 - 7.1 교육 연수 중국,일본 교육부

이광우 1994. 1.3 - 1.28 아시아 태평양 문화교육 협회 영어 교사 어학 연수 미국 하와이 용옥문화재단

(3) 우수 교사 표창

학교 교육의 발전은 교사의 자질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우수한 교사로 부터 열정적인 학습지도와 인간적인 생활지도 및 상담을 통하여 교육을 받을때 교육적 사명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본교에서는 우수 교사 확보를 위하여 개교 이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공개 채용과 면접을 통하여 임용 체계를 확립 하였으며 임용후 교사 자질의 향상과 전문성 제고를 시키기 위해 지속적인 연수 활동을 실시해 왔다.

가. 우수 교사 표창

역대 우수 교사 표창자 명단(1977년 이후)

성명 연월일 표창내용 시행처

박영환 1977.1 대한육상 경기 연맹 공로 대한육상연맹

이용 1978. 9.30 모범 교사 문교부

이청자 1979. 6.4 걸스카웃트 지도자 10년 연수 교육감

김영희 1979.10.19 대한 중 • 고등혁교장 표창장 대한사립 중 · 고등학교회장

’1979.12.7 사학 육성 공로 한국사학재단연합회장

지영원 1979.12.31 모범교사 북부 교육 구청장

정우형 1980. 7.11 과학 전람회 유공 서울시 교육위원회

지영원 1980.12.31 모범 교사 북부 교육청상

박문학 1982. 5.1 모범 교사 서울시 교육위원회

송휘림 1982.12.5 모범 교사 문교부

박영환 1982.12 모범 교사 서울시 교육원회

’1982.1 2 육상 지도상 서울시 육상 연맹

최근식 1983. 4.21 모범 교사 서울시 교육위원회

이혁 1983. 4.21 모범 교사 서울시 교육위원회

혁 1983. 9.28 30년 연공 대한 사립중 • 고등학교회장

성명 연월일 표창내용 시행처

이광우 1983.12.5 모범 교시- 서울시 교육위원회

염홍천 1984. 9.27 연공 대한 사립중 · 고등학교회장

이선래 1984.12.26 모범 교사 서울시 시정

김영진 1984.12.28 모범 교사 북부교육청

염홍천 1985. 5.11 특별공로 서울시 교육위원회

김영진 1985. 5.15 교육 공로지 대한 교육 연협회

신달우 1985. 5.15 얀공 대한 교육 연합 회장

전태주 1985. 7.30 과학 전람회 유공 서울시 교육위원회

송대빈 1985.12.5 국민포장 대통령

유병수 1985.12.5 모범 교사 문교부

이청자 1985.12.23 모범 교사 북부 교육 구청장

이귀영 1985.12.23 모범 교사 북구 교육청

김희소 1985.12.31 청탁 배격 유공 교원 모범 교원 서울시 교육위원회

추미호 1985.1 2.31 교육 시책 구현 유공 교원 서울시 교육위원회

윤금순 1986. 3.26 동아 미술 대상전 동아일보사

이근태 1986. 4.21 과학 기술 유공 교원 서울시 교육 위원회

염홍천 1986. 5.10 연공 서울시 교육위원회

박문희 1986. 5.15 모범 교원 서울시 교육위원회

윤종혜 1986.12.5 국민교육헌장 선포 기념 모범교사 문교부

최상호 1986.12.15 청소년 지도 공로 서울시 교육위원회

이상의 1986.12.31 모범 교사 서울시 교육 위원회

박영환 1987. 5.15 경로 효친 문교부

권화자 1987. 5.15 제16회 스승의날 모범 교사 서울시 교육위원회

이선래 1987. 8.19 연공대한 사립중 · 고등학교회장

류은호 1987.1 1.3 모범 교사 서울시 교육위원회

성명 연월일 표창내용 시행처

정우형 1987.12.3 학생의 날 모범 교사 서울시 교육위원회

김민자 1987.12.5 국민교육헌장선쏘기념모범교사 문교부

송용석 1987.1 2.1 4 장학 지도 모범 교사 서울시 교육 위원회

박명회 1987.12.15 모범 교사 교육감

고영순 1987.1 2.19 모범 교사 대한 사립중고등학교회

이화승 1988. 5.15 제7회스승의 날 모범 교사 교육감

유병수 1988. 7.19 연공상 대한 사립 중 · 고등학교회

이경숙 1988. 8.29 밝은 노래 부르기 지도상 북부 교육 구청

이귀영 1988.12.9 교육시책 구현유공교사 북부교육청

이청자 1988.12.5 국민교육헌장선포 기념모범교사 문교부

지영원 1988.12.17 청소년 활동 지도 교육감

김명희 1988.12.29 올림픽 기장 대회장 체육부

고영순 1988.12.30 장학 지도 모범 교사 교육감

류은호 1989. 4.20 제24회서울 올림픽 대회 공로 문교부

지영원 1989. 5.13 한국G.S 연맹 지도자 문교부

김명회 1989. 5.15 제 8한승의날모범교사 교육감

이선래 1989. 8.31 동백장 대통령

한용자 1989.1 2.5 국민교육 헌장 기념 모범교사 문교부

구순희 1989.12.26 모범 교사 서울시 교육 위원회

이달순 1990. 5.15 제9회스승의날모범교원 서울시 교육 위원회

신달우 1990. 9.20 30년 연공 대한 사립 중고등학교장회

최근식 1990. 9.20 30년 연공 대한 사립 중고등학교장회

김희소 1990. 9.20 30년 연공 대한 사립 중고등학교장회

김용회 1990.10.25 북부 학예 종합 발표회 유공교원 북부 교육 구청장

성명 연월일 표창내용 시행처

노선영 1990.10.25 북부 학예 종합 빌표회 유공교원 북부 교육 구청장

최승란 1990.12.5 국민교육헌장 선포기념 유공교원 문교부

정우형 199 1. 4.21 과학 기술 교육 유공 교원 교육감

전태주 199 1. 4.21 과학 기술 교육 유공 교원 교육감

송대빈 199 1. 5.11 특별 공로 교육감

지영원 1991. 5.15 제10회 스승의 날 모범 교원 교육감

김희소 199 1. 5.15 제10회 스승의 날 모범 교원 교육부 장관

지영원 199 1. 9.26 30년 연공 대한사립중고등학교장회

최근식 1992. 5.12 30년 연공

박영환 1992. 5.12 30년 연공 서울교원단체떤협회장

김용희 1992. 5.15 ~11 1O회 스승의 날 모범 교원

이귀영 1992.10.23 분부 종합 여뚫 발표회 유공교원 북부 교육창

이광우 1992.11.27 G.S 대장 표창 한국 G.S 연맹

송대빈 1993. 5.15 35년 연공 서울 교원 단체 연합회

최근식 1993. 5.15 재 12회 스승의 날 모범 교원

지영원 1993. 5. 한국 G.S 삼엽상 한국 G.S 연맹

이경숙 1993. 9.15 밝은노래 부르기 지도 모범교원 북구 교육청

윤종혜 1993.10.22 30년 연공 대한사립중고등학교장회

이승연 1993.12.30 모범 교원 북부 교육청

이광우 1994. 5.21 G.S 모범 대장 표창 한국 G.S 연맹

손영애 1994.10.28 북부종합 학예 발표회 유공교원 북부 교육청

권회지 1994.12.15 모범 교원 교육부 장관

정우형 1994.12.15 모범 교윈 교육부 장관

나. 장기 근속 교사 표창

장기 근속 교사 명단

근속연수 성명 부임 연월일 성명 부임 연월일

30년

유병수 1958. 4.27 최근식 1960. 4. 4

남주희 1959. 4. 4 박영환 1961. 11. 7

김희소 1960. 4. 4

20년

이청자 1965. 9. 1 고영순 1970. 3. 6

지영원 1965.10. 5 윤영희 197 1. 3. 1

유은호 1967. 4.13 송용석 1972. 3.20

권화자 1968. 3. 6 최상호 1972.10.30

윤종혜 1968.10. 1 김명희 1973. 3. 2

김민자 1969. 3. 1 이근태 1973. 5.14

정우형 1969. 4.12

10년

박병희 1974.1 1.29 정연규 1979. 3.14

한용자 1975.5. 3 김태정 1980. 3.18

구순희 1975.3. 2 전태주 198 1. 3. 2

이달순 1975.4. 7 이귀영 198 1. 3. 4

김용희 1975.5.18 송윤옥 1983. 3. 2

이경숙 1977.5.26 조성학 1983. 4.13

추미호 1977.3.12 노선영 1983. 9. 1

이승연 1978.3.14 김강환 1983.12. 3

이경철 1984. 3. 2

4) 교직원 친목 활동

본교는 교직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상호 부조하여 본교 교육발전에 이비-지하기 위한 상조회를 두고있다. 상조회에서는 주로 하계, 동계 방학 중 명승지와 유적지를 답사하면서 우리 국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넓히고 각 지역의 풍물을 직접 체험하는 현장 연수를 가져 왔다. 평소 바쁜 업무로 나누지 못한 정을 현장 연수를 통하여 상호간의 깊은 애정과 우의를 돈독하게 하고 있다. 최근의 교직원 현장 연수는 다음과 같다.

현장연수

일시 장소

1992 .2.21 - 22 충주 문경 새 재(54명)

1992 .7.16 - 17 팔당댐, 용문사, 정약용 기념관 (47명)

1993 .2.19 - 20 설악산 동해안 일대 (43명)

1993 .5.15 스승의 날 친목 놀이

1994 .7.21 - 22 설악산 동해안 (31) 명

5) 선교회 활동

1981 년 3 월 당시 김인자 교감 (제 4대 교장 역임), 전정위(한성여고 전출), 이귀영 교사 등은 학생들이 기독교 진리를 통하여 참사랑을 실천하는 생활인이 되도록 신앙을 길러주자는 취지 하에 선교회를 설립하였다.

본교는 원래 기독교 정신에 입각해 설립한 학교는 아니었으나 그리스도의 신앙 생활을 통하여 사랑과 화합을 실천하는 참 인간상을 양성한다는 목표 아래 학생 개개인의 신앙의 자유에 따라 참여하게 하는

선교회 활동이 시작 되었다.

1982 년 3 월 부터 첫째 화요일 방과 후 교사, 희망 학생들이 참석하여 처음으로 예배를 보았다. 1990 년 선교회실이 독자적으로 마련되었고 현재는 20 여명의 교사들이 선교회에 참여하고 있다.

(1) 설립 목적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세계속의 ‘우리’라는 존재 의식을 가지며 사회적으로는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지도자를 양성하는 데 있다. 개인적으로는 빛과 소금이 되어 가정과 사회를 화합시키고 발전시키는 기독 여성을 양성하기 위함을 목적으로 한다.

(2) 주요 활동

가. 예배 활동

· 매주 1 회 주간 예배를 통하여 기독교 교육을 실시하고 학생과 교

사간의 마음의 교제를 한다.

·4 월 부활절, 11 월 부흥회, 추수 감사절, 12월 성탄절 등 특별 예배를 실시한다. 특히 전교생이 모두 참여하는 부흥회는 기독교 정신과 복음을 전도하는 거교적 행사로 정착 되어 가고 있다.

나. 장학 활동

· 선교회가 본교의 불우 학생을 위한 장학금을 매 학기 3 명 (1 ,2 , 3학년)에게 지급하고 있다.

다. 기타 활동

· 성경 암송 대회, 성가 합창 대회, 크리스마스 행사 등의 기독교 행사를 실시하여 학생들의 지도력, 단결력, 봉사정신을 갖도록 하였다.

· 북부 지구 종합 학예 발표회에 여러 차례 참가하여 간접적인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이로써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생활자세를 갖

도록 노력하였다.

2. 학생활동

1) 생활지도

현대 사회에서 청소년의 문제는 그 심각함이 날로 증대되어 가고 있다. 교내에서까지 학생들의 비행과 탈선이 잇달아 학교 생활 지도에 큰 어려움을 주고 있다.

그 동안 본교에서는 올바르고 도덕적인 사람을 잉:성한다는 점에서 학습 지도 못지 않게 생활 지도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본교의 생활지도는 사전 예방하는데 역점을 두고 있으며 문제 발생시에는 처벌보디- 선도 중심의 지도를 기본 방향으로 삼고 있다.

특히 교내의 학생 생활 지도는 기본 생활 지도 계획을 수립하고 교사들의 지속적인 훈화교육, 학급 회의를 통한 자율적인 해결 방안 등으로 꾸준히 반복, 실천 하게끔 지도하고 었다 본교에서 지도하고 있는 기분 생활 지도 계획은 다유과 같다.

예절 익히기

기본 생활 습관 지도 계획

(1)기본 생활 습관 항목

영역 지도내용 지도방법 지도시기

인사

* 수업 시작과 끝에 바른 자세로 인사하기.

- 수업 시작 . 안녕하세요

끝 : 감사합니다

- 구령은 주번이 한다.

‘ 교실에서의 인사 태도

멈춰서 목례만 한다.

입으로만 인사 안하기

뛰거나 뒤에서 인사 안하기

교무실 출입 태도

노크 하고 입실하기

입실, 퇴실시 인사 하기

용무자만 출입 하기

학교장훈화 (3.9), 담임 훈화(수시), 5분훈화(4 ,9) , 주훈반영(월 1 회), 학생회의(4, 6, 9, 11), 학생회의(4, 6, 8, 11), VTR 방영(3, 9), 가정통신문(4, 9)

언어예절

언어예절

학우간에 욕설 하지 않기

괴성, 고성 지르지 않기

음식물을 입에 넣고 말하지 않기

고운말 쓰기

목소리를 낮추어(상대방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말하는 습관 갖기

학교장훈환, 담임훈화, 5분 훈화, 주훈반영, H.R, 학생회의, VTR 방영, 가정통신문

식사

점심시간

도시락 꼭 지참하기(사먹지 않기)

도시락은 점심시간에 먹기

함께 어울려 먹되 식사중엔 이동하지 않기

돌아다니면서 먹지 않기

학교장훈화, 담임훈화, 5분훈화, 주훈 반영, 학급회의

영역 지도내용 지도방법 지도시기

VTR 방영 (3 ,9)

가정 통신문 (4 ,9)

행동

용의 예절

* 실내화,양말 신기

* 실내화, 운동화 청결 및 꺽어 신지 않기

* 사복가지고 다니지 않기

* 머리 염색하지 않기

* 머리에 염색, 무스, 스프레이 사용하지 않기

* 맹찰, 교표 패용하기

* 치마속에 반바지 입지 않기

* 치마를 접어서 올려 입지 않기

* 블라우스속에 짙은색 옷 입지 않기

학교장 훈화 (3 ,9)

담임 훈화 (수시)

5 분 훈화(4 ,9)

주훈 반영(월 1 회)

학급회의 (4 ,6 ,9 , 11)

학생회의 (4,6,9,11

VTR 방영 (3, 9)

가정 통신문(4,9)

행동 예절

* 낙서하지 않기

* 책상보 씌우기

* 책상에 낙서, 칼집 내지 않기

* 남의 반에서 책, 노트,준비물 등 빌리지 않기

* 껍 씹지 않기

* 휴지 아무데나 버리지 않기

(2) 기본 생활 지도 방안

· 교사가 교내에서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현장 교육 지도 한다.

· 학기초 예절 교육(기본 생활 습관, 예절에 관한 사항을 책자로 정리, 비디오 제작)

· 학생 회의, 학급 회의를 통하여 문제 인식 및 개선 방법을 스스로 토의케 한다.

2) 상담실 운영

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청소년들의 의식과 행동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더욱이 핵가족화로 가정에서 부모, 형제와의 유대는 점점 약화

되고 대화가 단절되어 갈등과 방황을 거듭하고 있다

학교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학생들이기에 이들이 건전하고 올바르게 성장, 발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 학교 상담실의 기능이라 할 수 있다. 본교에서는 학생들의 고민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상담 활동을 적극적으로 실시해 왔다.

1982 년 학교 경영의 최우선 과제로 상담 활동을 강화 시켰다. 상담실을 별도로 마련하고 상담 전문 교사를 배치하는 등 보다 효율성 있는 상담 활동을 해 왔다.

상담 활동의 주요 활동은 다읍과 같다.

(1) 기초 자료 검사

학생 개인에 대한 특성과 개성을 파악하기 위한 기초 자료 검사로 지능 검사, 적성 검사, 교우 관계 조사, 자서전 쓰기, 특수 환경 학생조사 등이 있다. 지능 검사와 적성 검사는 매년 학기 초에 신입생을 대상으로 실시되며, 교우 관계 조사, 자서전 쓰기는 학기초 담임 교사

가 해당 학급의 학생 파익을 위해 실시되고 있다.

(2) 상담 활동

가. 집단 상담

학생들의 생활 지도와 개개인에 대한 이해를 돕고지- 진로 상담부에서 각 학년 반장, 부반장, 회장, 부회장을 중심으로 실시하는 집단 상담과 특수 환경 학생들의 집단 상담을 1984년부터 실시하였다. 1학년을 대상으로 한 섬성 수련이 1992년부터 실시되었다. 심성수련은 1학년 전원이 학급별 집단 대화로 이루어지며 자기 자신의 발견,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 발표럭 향상 등을 목적으로 실시되아 학생들의 인격형성에 좋은 효괴-를 얻고 있다.

나. 개인 상담

개인 상담에는 학생 개인이 고민이나 갈등을 해결하고자 직접 진로지도부를 방문하여 상담을 희망하는 방법과 문제성이 있는 학생을 호출하는 상담이 실시되고 있다 절차는 구두 신청, 서면 신청, 서신 신청 등으로 가능하며 상담 내용은 비밀을 보장해 주고 있으며, 생활 지도상 문제점이 있는 학생을 학급 담임의 협조를 받이- 호출하여 상담하는 형태로 실시되고 있다.

3) 수련, 극기 활동의 강화

수련, 극기 활동은 푸른 대자연 속에서 평소 잊고 있던 이웃과 자연의 존재를 체험하고 집단 생활의 경험을 통해 질서와 협동심을 배우며 나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는 좋은 기회가 된다. 일상 생활에서 나약하고 인내심이 부족한 학생들이 고된 수련활동을 통하여 극기심을

배양하고 자신을 성찰하는 데도 좋은 효과를 거두고 있다.

본교에서는 1984 년 간부 학생 수련를 시작으로 1989 년 2 학년 극기훈련, 1990 년 2학년 고적 답사, 1992 년 1 학년 심성 수련이 실시되었다.

(1) 고적 답사

1990 년에서 1992년까지 3 년 동안 2학년 대상으로 공주, 부여를 중심으로한 백제 문화권을 답사했다. 종래 2학년을 대상으로 실시해 왔던 극기훈련 행사를 1990 년부터 고적 답사 행사로 변경했다 학교 교육에서 얻은 지식과 이론을 실제 경험해 보고 감상하여 성숙한 인간 형성에 도움을 주고자함이 그 목적이었다. 공주의 국립 박물관, 무령 왕릉, 부여의 정림 사지 5층 석탑, 국립 박물관, 부소산, 낙화암, 고란사, 논산 은진 관촉사 등을 1 박 2 일 동안 답사하여 역사 지식을 체험케하고 이지역의 풍물을 이해하는데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고적 답사

(2) 간부 수련회

간부 수련회는 1984 년 경기도 남양주군 수동변 마석 감리교 캠프장에서 1 박2 일 동안 실시되었다. 간부 수련회는 학생회 임원, 각급 반장, 부반장, 회장, 부회장 등을 대상으로 실시되며 간부 학생들의 지도력을 향상시키고 공동체 의식을 고취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3) 극기 훈련.

극기 훈련이 1989 년 2년간 2학년을 대상으로 경기도 포천군 영북면 명성 캠프에서 실시되었다. 숙소에 도착하여 훈련 기간 동안의 간단한 안내 교육을 받는 업소식을 가진 후 극기 훈련인 히-이킹 코스 훈련을 받았다. 이 훈련 과정을 통해 강인한 정신력과 참고 견디는 극기심을 단런시켰다. 저녁 식후에는 반별 장기 자랑 ,캠프 화이어, 단합의 밤을

통하여 집단 생활의 질서 의식과 협동심을 키웠다

(4) 심성 수련

1992 년 5월 1학년을 대상으로 경기도 포천군 산정 호수 유스타운 내의 은곡 종합 훈련원에서 심성 수련이 처음 실시되었다 학생 수련에 앞서, 효율적인 수련 활통을 위하여 전교직원에 대한 심성 수련 연수를 가졌다.

심성 수련은 ‘심성 계발 프로그램’을 줄인 말로 나, 너 그리고 나와 너에 대한 감수성과 사고력을 계발함으로써 자기 지-신의 내면 세계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인식과 조화를 기하고 타인과의 인간 관계를 협동적으로 발전 시키는 특수한 소집단 체험 학습이라 할 수 있다.

심성 수련 실시 상횡

연도 기간 장소 대상 학년

1992 5.27 - 28 ( 1박 2일 ) 포천 은곡 종합훈련 2학년

1992 10.1 - 2 ( 1박 2일 ) “ 1학년

1993 10.14- 16 ( 2박 3일 ) 남양주 수동유스타운 1학년

1994 9.29 - 10.1 (2박 3일 ) ” 1학년

심성 수련 일정표(2박 3일)

시간 심성확인의날(일) 자아 발견의 닐 (2 일) 공동체 확인의 날(3일)

6 기상, 세면 기상, 세면

7 선생님과 함께 ... 선생님과 함께 ...

체조, 에어로빅, 구보 체조, 에어로빅, 구보

8 아침 식사 아침 식사

9 휴식 및 교육 준비 휴식 및 교육 준비

10 서울출발 창문 열기 보트 구명 작전

11 멍석말기 및 신문지 위에 올라가기 벗단쌓기 및 그림 보고 연상화 전달하기

도착 및 식사

성냥 쌓기 및 신문지 말아치기. 소감문 작성 및 발표 12 업소식, 생활 안내

점심 식사, 점심 식사

13 숙소 배정 및 교육 준비

14 관심 기울이기 집단 결속력 강화 훈련 퇴소식

15 별칭 짓기 사제 통행 어울 마당 정신력 깅화 훈련 1 마당, 위기 극복

16 I can Do ! (1 -6단 2마당 Kim‘s 서울 도착 예정

계) 3 마당: HVFFMAN CaDS 4마당: 상황 부여

17 식사 예절 5 마당: 벽을 념어서 6마당: 그것을 찾아라 7 마당: 극기

18 저녁 식사 저녁 식사

19 반별 장기자랑준비 Camp Fire 환영의 밤 “스타들의 탄생” * 콘서트 * 불꽃 놀이

20 * Recreation * 시-랑의 공연 * 춧불 의식 * 반별 장기 자랑

22 학교 담임 및 선생님과의 대화. 학교 담임 선생님과의 대화 준비

23 세면 및 점호 준비 한밤의 멜로디 세면 및 점호 준비, 한밤의 멜로디

24 점호,취침 점호 및 취침

4) 보건 위생 관리

1973 년 3 월 중 · 고 양호실이 분리되었으나 두 양호 교사가 함께 같은 장소에서 보건 관리업무를 보다가 1979년도에 분리되었다. 1980년도부터 학교 특색 교육으로 보건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이 당시는 대부분의 학교가 서예,무용.음악 등을 학교 특색 교육으로 내세웠던시절로 타 학교에서 생각지도 못 하던 ‘보건’이라는 과목의 명칭을 사용하여 보건 교육을 실시하였다는 것은 법적으로 우선 힘든 때였다. 그러나 학교가 뒷받침 해준 이 사업이 1992년도부터 교실 수업이 중단되면서(그 이유는 보건 수업중에 환자를 간호 할 수 없다는 것과 사고가 났을 경우 등) 양호실 운영은 좁은 의미의 학교 보건 관리 업무로 되었다. 따라서 응급 처치와 상담, 환경 관리, 전염병 예방을 위한 접종, 신체검사 등에 치중하게 되어 학교 보건 업무의 목적에 따라 사업을 실시 해왔다.

학교 보건 업무의 목적과 목표는 다음과 같다.

목적 건강 유지 및 건강 관리 능력 개발

목표 인간, 건강, 환경의 개념을 이해하고 건깅 행위를 실천할 수 있다.

개념 인간 환경 건강 건강 행위

인간 : 총체적 유기체

환경 :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물리적, 사회적 안녕 상태.

건강: 불구나 결함이 없는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안녕 상태.

건깅행위 : 인간과 환경과의 상호 작용과정에서 개인, 가족, 사회와

인류의 건강을 유지하고 증진하기 위한 건강지향적 활동을 말함.

교실 수업의 보건교육이 중단된 이후로 개개인의 예방 접종과 건강상담에 치중하게 되었고 학생뿐 아니라 교직원의 건강 검진 사항, 예방 접종 사항을 관리하게 되었다.

1991 년도에 정수기를 설치하고 음용수 관리 업무도 시도해 왔다.

(1) 학교 보건 업무.

가. 기생충 검사

학생 전체가 참여한 기생충 검사의 경우는 통계적으로 매우 유익하다. 현재는 취약 지구 몇몇 도를 제외하고는 서울 특별시에서는 실시하지 않는다 1990년도 이후 집단 검사를 실시하지 않아도 자신 스스로 관리가 가능하리라 보고 학교 보건 사업에서 제외 되었다.

기생충 보유자 통계

양성자 수 학년도 1980 1981 - 1988 1989 1990

편충, 요충, 및 동양모양선충 편충 15명 매년 2-3명

요충 1명 없음 없음

동양모양 선충 5명

1985 년이후 0명

촌충, 십이장충 및 기타 기생충

1979년 촌충 :2명 이 기간 동안 총1명 없음 없음

나. 신체 검사.

신체 검사는 체격, 체질, 체력 검사로 나뉘어지고 이를 매년 실시하여 학교 신체 검사 규칙 별지 4호 서식에 의거 학교 건강 관리소로 그통계를 보고한다. 체질 검사시에는 모든 내용이 발견된 경우가 없고

의사가 현재 있는 질환을 확인하는 형식만 있고 대부분의 질병이나 이상 학생은 가정에서 이미 알고 있거나, 학창 생활 중에 담임 교사나 양호 교사에 의해 발견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류마치스성 심장 질환 환자가 91-93년 사이 1명이 고려대 의대 소아과에서 페니실린 주사로 수시 조퇴하는데 학교애서 협력, 휴식, 보호시켰으며 간질은 90-93년 사이에 총 4명으로 휴식,보호,가정,병원으로 의뢰하였다.

체질 검사 이외의 관찰 빛 쉰문에 의한 유소견자

년도별 질병별 B형 간염 항원보유자 Allergic Reaction 단백뇨 재생 불량성 빈혈 비만증 계

1990 10 109 6 126

1991 15 112 129

1992 23 124 147

1993 39 132 172

제 87 477 7 3 574

다 결핵 검진

매년 1 학년을 대상으로 학교 건강 관리소에서 간접 촬영을 실시하고 유소견자에 한하여 직접 촬영 후 보건소에 등록하여 유병자로 발견되면 치료를 받도록 한다. 매년 2-3 명이 유소견지-로 보건소에 의뢰하여 학교에 위촉 받아 접종과 투약을 하였다. 최근 3 년간 결핵으로 인한 유소견자가 거의 없고 대부분이 과거에 결핵을 앓았거나 폼의 자세에 이상이 있는 학생 또는 장기의 모양에 대한 내용을 알려온다.

라. 예방 접종

매년 B 형 간염, 콜레라, 장티푸스, 유행성 출혈혈, 뇌염, 인플루엔자(유행성 독감) 등의 예방에 대해 홍보하고 희망자에 한해 예방 접종하

였다 .B형 간염 보균자에 대한 통계는 90년 10명, 91년 15명, 92년 23명, 93년 39명, 94년 45명 등 총 132명이었다.

장티푸스 예방 접종은 보건소에서 무료로 약품을 받아 희망자에 한하여 실시하였다 94년도까지 매년 800 여 명이 희망하였다.

유행성 출혈열은 교직원에 한하여 접종되었고 학생들에게는 주의사항을 홍보, 교육하였다.

마. 소변 검사

매년 4-5 월에 2학년을 대상으로 실시하며 검사 항목은 뇨당, 뇨단백이다. 병원으로 의뢰 재검 후 치료토록 한다.

소변 검사 현황

검사종목 학년도 1990 1991 1993 1994 1994

뇨당 0 0 0 0 0

뇨단백 6 0 0 0

계 6 0 0

바 교직원 정기 건강 진단

매 2년 마다 의료보험관리 공단 주관으로 인근 희망 병원에서 검사하며 1,2차 검사 결과를 통해 건강 이상 유무를 판정 받는다.

사. 요양호학생 상담 및 지도

신체 검사 결과,담임 교사의 제언, 양호실 이용시 관찰, 각종 검사결과 및 학부모에 의해 의뢰된 경우 등 여러 경로를 통해 요양호 학생을 파악하고 상담 지도한다.

양호실 이용 현황

건강, 문제별 분류 년도 1992 남 여 1993 남 여 1994 남 여

1 감염성,기생충성

2 신생물

3 내분비,영양대사 질환,변역 장애

4 혈액,조혈기

5 정신 질환

6 신경계, 감각 기관 27 3 31 64

7 순환제 2 7 6 2 14

8 호흡 기계 24 286 40 360 397

9 소화 기계 18 271 20 281 516

10 비뇨, 생식기계 89 124 156

11 피부 피하 조직 2 7 11 17

12 근골격계,관절염,관절증 2 14 3

13 선천성 이상

14 사고, 손상, 중독 5 220 5 287 330

15 증상증후불명확한병태

경련 3

현기증 5 7

두통 16 21 10

흉통

심계항진

실신, 기절

임파 선종

비출혈

호흡 곤란

구토, 오심

속쓰림

복통

원인 불명 열, 고열

기타

총계

5) 환경 운동

70년대 이후 정부의 경제 성장 정책에 따라 산업화, 공업화가 급속도로 진행 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에 대한 훼손과 환경 오염이 날로 증대 됨에 따라 새로운 환경 문제가 발생하였다. 환경 문제가 매우 심각해지자 90년대 들어 지구와 자연을 살리자는 환경 운동이범세계적으로 전개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국민들사이에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폭넓게 확산되어 가고 있다. 특히 학교에서의 환경 운동은 일반 시민들에게 솔선 수범하는 모범을 보임과 동시에 젊은 청소년들의 인식과 태도에도 새로운 변화를 기대하는 입장에서최선을 다하여 지도하고 있다.

이에 본교에서도 종래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실시돼 오던 자연

보호, 근검 절약 지도, 폐휴지 수집 등의 활동이 92 년도부터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환경 운동의 차원에서 계획을 수립하고 적극적인활동을 추진해 왔다.

(1) 자연 보호 활동 및 환경 정화 운동

우리 학교,우리 고장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가꾸기 위한 목적에서 자연보호 운동이 전개되었다. 80년대는 정릉 유원지, 북악 터널 입구, 90년대는 학교 주변 거리의 시가지 청소, 새마을 청소, 조기 청소 등으로 구분하여 매주 토요일 1 개반씩 지역 사회 자연 보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특히 87 년 교사 이전 후 본관 건물 주변이 비탈진 모래 언덕에 잡초로 우거져 황량한 인상을 주었으나 88 년부터 시작한 학교 산림 녹화 운동이 전개되어 교직원, 학부모, 학생 등은 과실수 무궁화, 철쭉 등 여러 종류의 나무를 학교에 기증 했다.

1990 년 들어 학교 주변 정화 운동에 따라 매월 첫째 토요일마다 학교 교육 환경 일제 정비 계획을 내세워 학교 주변의 유해 업소에 대한 계도를 실시했다.

교직원, 학생 등이 불법 부착불 떼기, 유해 오락업소 계도, 거리 질서 확립, 좌측 통행 지키기 등의 활동을 하였다

(2) 저축 지도

매년 신입생을 대상으로 l 인 l 통장 갖기 운동을 전개해 왔다. 학생스스로가 저축하는 습관을 길들이고 근검, 절약하는 것을 생활화 하는 목적에서 시작한 적금 빙-식의 저축 제도는 학생, 학부모들의 호응이 매우 커 신입생의 90% 이상 학생이 통장을 소유하고 있다.

(3) 근검 절약 지도

학생들의 학습 활동, 특별 활동, 담임 훈화 활동을 통하여 물자 절약하는 정신을 가지도록 지속적인 지도를 해 왔다 특히 우리나라의 자원 부족 현실을 바르게 인식하게 하여 아끼며 절약하는 것이 구호로 만 그치지 않고 옴소 실천하는 생활이 습관화되게 하였다. 절전, 절수운동과 졸업생들의 헌 교복 물려주기 등을 본교 근검 절약 지도의 가장 큰 성과이기도 하다.

(4) 폐품 수집 활동

물지- 절약 시책의 하나로 추진하는 폐.휴지 수집 운동은 본교에서 도 매월 1 회 실시되었다. 폐휴지를 매각한 대금으로 불우 이웃 돕기성금, 동료 학비 보조 등으로 유용하게 사용되기도 하였다. 1987년도부터 학교 생활에서 발생한 학생들의 안전 사고에 대한 보험금이 안전공제회 보험금으로 전액 지불하고 있다.

제 4 절학생자율활동

1) 학생회 조직과 활동

(1) 학생회 조직

1991 년 3 월 본교 강당에서 91 학년도 학생 회장, 부회장 선거가 실시되었다 1,2,3 학년 각 학급에서 선출된 10명의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 선거는, 본교에서는 처음으로 학생들 스스로 대표를 선출한 의미있는 민주적인 행사였다.

비록 간접 선거이긴 하지만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서 자신들의 대표를 선출하는 것은 자율적인 학생회 활동을 통하여 자치 능력을 배양하

고 민주 시민의 역량을 쌓는데 크나큰 도움이 되었다. 1993학년도부터는 전교생이 모두 투표에 참여하는 직선제로 치루어져 학생들이 많은 관심과 높은 열기를 나타냈다. 학생 회장 후보 자격은 2 학년 학생으로 2학년 1 학기 말 성적이 25% 이내인 학생으로 징계를 받은 사실이 없고 통학년의 30 명 이상 기명 날인한 추천서를 첨부하여 선거 관리 위원회에 제출함으써 학생 회장에 입후보하게 된다. 후보자들은 각 1 회의 합동 연설회와 VTR 방송을 통한 소견 발표를 가진 후 학생들의 직접 선거로 최고 득표자가 회장, 차접자가 부회장으로 당선된다.

학생회는 대의원회와 임원회를 두고 있다. 대의원회는 각 학급의 회장, 부회장으로 구성되며 매월 1 회 정기회의를 소집하여 자치 활동에 대한 모든 사항을 심의 의결한다. 모든 의결사항은 재적 대의원 과반수 이상의 출석과 출석 대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결정되며 임원회는 각 부의 부장과 차장으로 구성되고 대의원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집행한다.

학생회 운영조직

회장 부회장 총무부 학술부 바른 생활부 예술부 미화부 봉사부

역대 회장단 명단

연도 회장 부회장 비고

1991 신지혜 (3-1) 황성희 (3-6) 간접선거(선거인단에 의한투표)

1992 김정하 (3-5) 조은영 (3-4) 긴접선거 ( II )

1993 이효선 (3-6) 김미정 (3-9) 직접 선거

1994 서유진 (3-4) 김재미 (3-9) ”

1995 심선영 (3-10) 이윤선 (3-2) ”

(2) 학생회 활동

학생회는 학생 활동의 방향을 대의원회의에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사헝을 심의, 의결한 후 자치적으로 활동하였다.

일상 적인 활동으로 아침 등교 시간의 생활지도 (외모, 복장), 방과후 각 학급의 청소 상태 검사 등을 실시한다. 그리고 각종 교내 행사시 질서 지도, 방학중의 간부 수련회, 심성 수련 등의 지도력 배양을 위한 자체 연수를 실시하고 불우 학우 돕기, 불우 이웃돕기 운동 등의 다양한 봉사 활동을 펴고 있다.

가. 학우 돕기

1990년 3월 화재로 가옥이 전소된 3학년 2반 학우를 돕기 위한 모금 운동이 3학년 학생 및 교직원들에 의해 전개되어 837, 810 원을 해당 학생과 부모에게 전달하고 위로 하였다.

· 1993 년 4월 19일 종로구 혜화동에서 무장 탈영병의 총기 난사로 본교 3 학년 고은희 양의 부친이 별세 하였다 이에 학생회 주관으로 전교생, 교직원, 당시 교육 실습을 하던 한성대 교생 등이 학우 돕기 운동을 전개하여 1,685,580원의 모금액을 전달하고 위로하였다.

· 1994년 6월 20일 화재로 가옥이 전소된 3학년 4반 이형인양을 돕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여 위로금 1 ,648,890원과 쌀(2가마), 라면 (2 박스), 의류(50점)을 모아 전달하고 위로하였다.

나. 불우 이웃 돕기

· 불우 이웃 돕기 바자회 : 1994년도 부터 북부 교육청 주최 불우 이웃 돕기 바자회에 적극 참여하여 해마다 의류, 책, 완구, 생활 용품 등을 기증하였다.

· 사랑의 쌀 모금 운통 : 매 해마다 연말을 맞아 전교생이 모은 사랑의 쌀을 불우 청소년 가장 학생 및 학교 부근 노인정, 성심원(나병환자 요양원) 등에 전달하였다.

· 1990년 6월 기계 체조 국가 대표 선수 박소영(수유 여중) 양이 89년 동계 강화 훈련 중 “하반신 마비”라는 치병적인 부상으로 투병중인 소식을 듣고 여러 학교에서 모금 운동이 전개 되었다 이에 본교에서도 적극적으로 모금 운동을 전개하여 901 ,470 원을 전달하고 위로하였다.

1991 년 여름 전국적인 수해로 피해를 본 지역민을 위하여 전교생

과 교직원이 모금한 수해 의연금 822 ,000원을 동이-일보에 전달하였다.

2) 특별 활동

특별 활동은 심신의 조화로운 발달을 도모하기 위하여 전인 교육의 일환으로 실시되는 교과 이외의 교육 활동이다. 비-람직한 집단 활동을 통하여 공동체 의식과 봉사 정신을 기르는데 중점을 두고 지-기 표현의 기회를 마련하여 개성과 소질을 계발하고 건전한 취미와 여가를 잘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데 그 목표를 두고 있다.

특활 부서 편성표(1 994 학년도)

부서 지도교사 인원 부서 지도교사 인원

영아 시칭각반A 이청자 1년 (50) 수학반A 김영선 1년 (50)

역사도서탐독반 정영규 1년 (50) 과학도서탐독반 전태주 1년 (50)

영어 시칭각반B 이경철 1년 (50) Y - TEEN 장혜경 1년 (30)

성가 합창반 A 손영애 1년 (50) 음악 감상반 변지현 1년 (50)

베드민턴반 고영순 1 ,2년 (50) 공작반 이근태 1,2년 (30)

지점토반 구순회 1,2년 (30) 무용반. 노선영 1 ,2년 (40)

성경반 A 김강환 1,2 년 (50) 도서반 이철화 1,2년 (50)

G.S반 남궁미경 1 ,2 년 (50) 미술반 A 윤금순 1,2년

G.M.P A 2년 (50) 수학반 B 박병희 2년 (50)

수학반 C 정용기 2년 (50) 요가반 한용자 2년 (30)

독서 토론반 A 이달순 2년 (40) 탁구반 조성학 2년 (20)

고전 강독반 윤송현 2년 (40) 미술반 B 김혜선 2년 (40)

탐구 기술반 이수진 2년 (40) 시감상반 문소영 2, 3(50)

성가합창반 B 이경숙 2,3년 (50) 명상반 김명희 3년 (40)

베드민턴B 김용희 3년 (50) 수학반 D 이승연 3년 (50)

향토 조사반 김태정 3년 (50) 성경반B 이귀영 3년 (50)

자수반 송윤옥 3년 (50) 한국문화 감상반 김영호 3년 (50)

G.M.P B 이광우 3년 (50) 독서 토론반 B 김학량 3년 (50)

(1) 방송반

학생들의 정서 함양과 여가 선용의 올바른 계도를 위한 취지에서 한서여중 방송반 (HBS) 이 1977 년 독립 편성되었다. 초기에는 학교 행사의 보조 역할만을 담당하는 소극적인 활동이었으나 점차 학생들의 자율 활동이 확대되면서 매우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81 년에 점심 시간을 이용한 ‘희망 음악’시간에는 학생들의 희망 음악을 신청 받아 요일별 계획에 따라 팝송, 건전 가요, 클래식, 가곡, 국악 등 다양한 음악을 들려 주어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프로 그램 중의 하나였다.

방송반원은 방송 시설 전문성 등 여러 특성상 6-8 명 정도의 적은 인원으로 구성 되어 활동해 왔다. 매년 3 월에 2학년에서 방송 반원을 모집하여 필기 고사, 음성 테스트, 면접 등의 여러 단계의 시험을 거쳐 선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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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반

(2) 교지 문예반

1958 년 ‘義花’라는 지l 목으로 교지 창간호를 중 · 고 합본으로 발간하였다가 중 · 고 분리 이후 1978년 20호부터 독립적으로 발간하였다. 표지의 제자는 낙산 신달우 교사가 썼고 1-28호까지는 국판으로 펴 내다가 1987년 29호 부터 4x6배판 형태로 바뀌었다. 교지는 학생들의 성장 모습이나 학교 문화 인식의 정도를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학생자치 활동의 하나이다. 학생들의 살아 움직이는 소리가 있으며 교사연구 활동의 산실 역할도 하였다.

한편 본교에서는 교지 이외의 학교의 교육 활동을 학부모에게 홍보하고 학생들의 문예 활동을 적극 장려하는 차원에서 학교 신문도 발간 되었다. 학교 신문의 제호도 ‘設花’라고 하여 1956 년 10월 10 일 창간호를 발행 하였다. 학쿄 신문 ‘談花’는 l 학기 4-5 월, 2학기 10-11 월, 익년 2월 등 1년 3회 발행되어 학생들의 창작 활동, 선생님의 논단, 교내 행

사 안내, 독후감 등의 내용을 실었다. 그러나 1981 년 학교 재정의 어려움으로 제 124호를 끝으로 발행을 중단하게 되었다. 이후 학교 신문 ‘義TE ’의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1987 년부터 학교 소식지를 매월 1 회 발행히고 있다.

(3) 도서반

도서반은 독서 인구의 저변 확대를 꾀하며 독서를 통하여 학생들의 지-아 실현과 인격 형성을 도모하기 위한 목적에서 상설적으로 활동한 부서이다 종래 특별 활동 시간에 도서 대출 및 도서 분류 양서 선정, 독후감 작성 요령 등을 지도 받았던 도서반은 1994 년 4월 부터 본격적인 도서실 운영 및 서고의 도서 대출 임무를 새롭게 맡아서 시작하였다. 매일 점심 시간을 이용하여 도서를 대출해주고 있으며 대출 기간인 일주일 기간을 경과할 경우 담임 책임 하에 다음 날까지 추가 반납

하게 한다.

도서반원들은 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가장 읽고 싶은 책, 감명 깊은 책, 친구에게 권하고 싶은 책 등의 내용별 주제를 선정하여 게시판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홍보 활동도 활발히 하고 있다. 특히 독서 습관을 생활화 하는 방안을 지속적으로 토의하고 있는 모습은 큰 자랑거리라 할 수 있다.

(4) 걸 스카우트 (G.S) 반

1967 년 12월 30 일 본교에 걸 스카우트가 탄생되었다. 서울 연맹의 제 305 대로 발대되어 대 승인장을 받았다. 걸 스차우트는 하느님에 대한 의무, 국가에 대한 의무, 타인에 대한 봉사 등 3 가지 선서와 규율을

기본 정신으로 사랑과 봉사, 자기 완성을 위한 여성이 되기 위해 1 일 1선의 목표는 실천에 옮기는 전통 있는 서클 활동의 하나이다.

걸 스카우트의 주요 활동 목표는 자아 개발 ,지도력 배양을 통해대인 관계의 유지 야외 활동을 통한 자연과의 대화, 국제 친선 도모, 봉사 활동 퉁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활동 목표를 위해 걸 스카웃트는 5-6 명의 소그룹으로 반을 이루어 서로 협통하여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교육을 끊임없이 반복해 나가고 있다. 매년 여름 방학 동안에 실시하고 있는 뒤뜰 야영, 사제 동행 동산, 도전 활동 등의 야외 활동은 대원들이 개인 기능을 익히고 심신을 단련하여 항상 준비된 정신 자세를 갖추기 위해 최소한의 노력을 해왔다.

본교 걸 스차우트의활동에서 봉사 분야 활동은 매우 큰 자랑 거리였다. 매년 국립 묘지 헌화와 주변 묘역 정화 운동은 연례 행사로 실시하고 있으며 거리 질서 확립을 위한 등,하교길 교통 지도, 학교 주변거리 청소 및 거리 질서 캠페인, 주요 교내 행사시 내빈 안내 및 접대 등에 앞장 서 왔다.

1984 년부터 시작한 고아원, 양로원, 노인정 방문 활동은 이웃과 사랑을 니누는 봉사활동으로 ‘항상 남을 도와 준다‘는 걸 스카웃트의 기본 정신을 몸소 보여 주기도 하였다.

3) 교내 행사

(1) 교내 합창 대회

합칭- 대회는 화음을 통하여 학급의 다양한 학생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참 기회이다 이는 현대 사회의 삭막하고 이기적인 마음들을 한 곳에 집중시켜 협동심과 정서적 순화가 되게 하므로 교육적으로 큰 효과가 있다.

합창경연대회 모습

본교는 시설이 좋은 훌륭한 강당이 있어 1963 년도에 첫 교내 합창대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 80년대부터 ’ 82 년 까지 매년 개최하다가 ‘83년 격년제로 실시되고 있다.

합창 대회의 진행은 학급수가 많아 학년별 예선제를 실시하여 예선을 통과한 학급만 본선에서 경연을 가졌다. 본선에 참가한 학급은 자유곡과 지정곡을 차례로 불랬으며 공정한 심사를 위하여 외부의 심사위원을 초빙하기도 하였다. 시상은 학년별 구분없이 최우수, 우수, 장려상으로 하였고 개인상으로는 지휘상, 반주상 별도로 선정하여 개인상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대단하여 이상을 수상한 학생은 당시 최고의 인기인이 되기도 하였다.

(2) 체육대회

애교심을 고취하고 학생들의 단결력을 함양하며 학생 개개인의 건강한 신체를 단련시키 위하여 체육대회를 실시해 왔다. 본교 개교 이래 매년 실시 해오던 체육 대회는 1970년대를 전환점으로 매우 활기찬 행사를 해 왔다.

본교는 국군의 날, 국제 사격 대회, 국내의 각종 기념 행사에 카드섹손을 맡은 경험 때문에 교내 체육 대회에서 질서 의식이나 응원의 기동력은 매우 뛰어났다. 그러나 카드 섹흔 영향 때문에 체육대회의 경기 과정이나 내용 보다 응원전에 더욱 관심을 가져 학급의 단체복을 주문한다든지 응원 도구를 과다하게 구입하여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체육대회 진행은 학년별로 구분하여 경기를 하였고 주요종목으로 피구, 400M 릴레이, 줄다리기, 가장 행렬, 응원전 등이 있었다. 본교 체육 대회는 1983 년부터 격년제로 실시되다가 1987 년 교사이전 이후 1990년까지 운동장 문제로 개최하지 못하였다가 1991 년 이후 격년제로 현재까지 실시하고 있다

열띤 응원 모습

(3) 문예 백일장 및 미술 실기 대회

국어 교육에서 ‘쓰기’ 지도는 기초적인 언어 사용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꼭적을 두고 있다. 교육 현장에서 학생들은 글쓰기에 대해 상당히 두렘게 생각하고 거부감을 느낀다.

이에 본교는 자연과 호흡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상 생활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는 연습의 기회로 삼고자 문예 백일장을 1962 년 처음으로 개최하여 현재까지 매년 5 월중에 실시해 왔다. 1980 년 초반까지 본교

의 진달래 꽃이 만발한 낙산에서 시작하였으나 차츰 환경을 바꾸어 경복궁, 창경궁 등 궁궐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종목을 운문부와 산문부로 나누어 학생 개개인의 희망하는 종목의 글제를 선정하여 평소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하였다.

한편 미술 실기 대회는 중 · 고 분리 년도인 1977 년 처음으로 문예백일장과 함께 개최 되었다. 미술 실기 대회는 순수 미술 실기 부분(수채화)과 서예 부문으로 나누어 개최되고 있다. 학생들의 사물에 대한 아름다운 미적 감각을 키우고 정서 함양을 위해 가능한한 교외 장소를 택하여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실력을 겨루었다 한편 미술교육의 한 부문인 서예 부문은 학급에서 2 명씩 희망자를 선정하여 특활 시간에 휘호 대회를 가졌다.

(4) 나의 주장 발표 대회

나의 주장 발표 대회가 1993 년 6월 17 일 본교 체육관에서 전교생이 모인 가운데 개최되었다. 종래에는 6.25 전쟁을 상기하고 민족 분단의 아픔을 해소하는 방안을 모색하자는 취지에서 매년 반공 웅변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학생들이 학교,가장,사회생활에서 느끼는 여러 분야의 가치관 부재를 바르게 정립 시키고 발표자의 생각을 정리하여 발표함으로써 조화로운 인간 사회를 만드는데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이 대회 이전에는 반공 웅변 대회, 통일 안보 대회 등의 명칭으로 개최되었으나 1993 년부터 한 민족 공동체 의식 함양을 위한 나의 주장 발표대회로 변경되어 실시되었다.

나의주장 발표대회

(5) 작품 전시회

1991 년 10월 29 일 본교 강당에서 교내 시화전 및 특활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가 개최된 동기는 1977 년부터 교내 시화전이 매년 실시되어 오다가 ‘ 91 년 부터 좀 더 발전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모색하다가 클럽활동 시간에 작품 제작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특텔 활동 전시회는 학생들이 지도 교사 아래 클럽 활동을 통해 1년 동안 갈고 닦은 솜씨를 마음껏 발휘하게 하고, 자신의 작품 제작에 대한 성취감과 애착심을 동시에 가지는 큰 효과를 주었다. 3 일간 실시된 전시회 기간 동안 전교생은 물론이고 학부모, 지역 주민 등이 다수 참여하여 학교와 학부모가 상호 이해의 폭을 넓힘은 물론 학생, 교사

학부모가 하나가 되는 화합의 광장을 마련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였다.

1994 년도 주요 전시 내용은 시화 40 여점,교과별 전시 200 여점, 특활부서인 지점토반, 수편물반, 꽃꽂반, 서예반, 요가반, 사진반, G.S 반, Y-TEEN 반 100 여 점 , 가훈 전시 15 점 , 교사 찬조 출품 30 여 여 점 등의 알찬 전시를 하였다.

4) 교외 행사

(1) 자율 장학 협력회 활동.

자율 장학 협력회는 관내 중학교 간의 상호 협력 및 집단 사고를

통하여 교원의 전문성 신장과 교육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여 자율적 학교 경영 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목적에서 운영되어 왔다. 본교는 제 1지 구 (8 개 학교)에 소속되 어 활동해 왔다.

자율 장학 협력회는 학기초 간사 학교 주재하에 해당 학교 교장,교감, 연구 주임회의를 거쳐 연간 운영 계획을 수립하고 학교별 업무 분담, 예산 배정 등을 통하여 회원 한 학교 당 한개 분야의 역점 사업을 주관하여 추진하고 있다.

주요 사업 내용은 교원의 자질 향상과 전문성의 제고를 위하여 공개 수업 및 합동 강연회, 학교간 교육 경영 실태를 파악하기 위한 방문 장학 및 정보 교환, 학생들의 학예 활동인 밝고 맑은 노래 부르기 대회, 사생 대회, 문예 백일장, 경로 효친 실천 사례 발표 대회, 통일안보 글짓기 대회, 생활 지도 방법 개선 등 다양한 자율 장학을 통하여 학교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다.

자율 장학 협력 대회에 참가하여 최근 수상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91 - 합칭- 대 회 : 우수상 (2-1)

모형항공기 제직및 비행대회:장려 안효잉: (3-9) ,박선화(3-6)

영어 듣기 대회 : 2등 박유정 (3-1)영 어 말하기 대 회 : 장려 홍지 현 (3-10)

영어 학력 경진 대회 :2등 문정선 (3-1)

학생 탐구 발표 대회 : 장려 유지현 (3)

‘92 - 효행실천 사례 발표 대회 : 우수 한진경 (3-9)

통일 안보 웅변 대회 : 우수 고지영 (2-4)

통일 안보 그림 그리기 대회 : 우수 이향기 (3-9)

통일 안보 글짓기 대회 : 우수 강혜원 (3-6)

’93 -학생 자연 관찰 탐구 대회 :장려 오정(2-4)

경로 효친실천사례 발표 대회 :우 수 윤병현 (2-3)

문예 백일장 대회 :가작 이효선 (3-6) ,장현경 (1-9)

니의 주장 발표 대회 :우수 문지원 (3-2)

민족 공동체 의식 함양 글짓기,포스터 그리기 대회 : 글짓기 우수 박미란 (3-9)

포스터 우수 김지연 (3-3)

밝고맑은 노래 부르기 :최우수 (2-2)

‘94-자연 관찰 탐구 대 회 :장려 강유진 (2-9)

효행 실천 사례 발표 대회 :우수 최진성 (2-4)

나의 주 장 발표 대회 :우수 이성이 (3-10)

밝고 맑은 노래 부르기 대회 :우수 (2-1)

휘호 대회 : 입선 방영주(3-7)

문예 백일장 대회 : 차하 문지연 (3-6)

참방 최은주(3-2)

가작 서 리 나(2-10)

미술 실기 대회 : 우수 이상애 (3-2) , 입선 박수엄 (2-3) , 입선 송교선(3-10)

기타

1994년 성북 경찰서 주관 교통 안전 문예 작품 공모전 수상자

표 어 - 대상 백진주(2-1), 통상 유선미 (2-3)

포스터 - 대상 김영주(3-7), 장려 편현숙(2-4)

산문 - 은상 심선영 (2-7) , 장려 문지연 (3-6)

장려 문현경 (2-1)

서울 600년 기념 사생대회 수상자(북부 교육청 주관)

통상 박민선, 통상 이지연 (3-2)

(2) 북부 종합 학예 발표회 참가 활동

1988 년 북부 교육청이 주최한 제 2회 북부 종합 학예 발표회에 본교 학생 15 명이 중창단으로 참여하여 큰 호응을 받았다. 북부 종합 학예 발표회는 ‘학생, 교사, 학부모’ 삼위 일체의 학교 운영으로 교육활동을 극대화시키고 참여 기회를 확대 시킨다는 목적 하에서 시작된 행사였다. 이 행사를 통하여 학교의 행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며 관심을 제고하여 학교와 지역 사회의 연계성을 구축하는데 역점을 두어 관중과 함께 호흡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본교는 이러한 북부 교육청 취지에 적극 호응하여 거의 매년마다

독창, 중창, 뮤지컬 종류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 보였으며 학생, 교사, 학부모가 삼위일체가 되어 작품을 완성하는 데 온 정성을 쏟았다. 북부 종합 학예 발표회에 참여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88 년 뮤지컬 ‘꽃들에게 희 망을’ 교사 6명 , 학부모3명 , 학생 15명

1990년 ? ? 학생 20 명

1992년 중창 ‘신 아리랑’ 학생 15명 , 교사 3명

1994 년 독창 ‘꽃바람’ 교사 손영애

5) 졸업생 활동

(1) 한묵회 활동

1978 년 11 월 23 일 부터 27 일까지 본교 서예실에서 제 l 회 한묵회

전시회가 개최되었다

한묵회는 재학중에 낙산 신달우 선생으로 부터 서예 교육을 받았던 한성 여지- 중 · 고등학교 졸업생 동문들 몇명이 중심이 되어 1976년에 조직되었다. 회원은 학창 시절에 묵향을 맡으며 갈고 닦은 솜씨가 있고 붓끝을 통해 인간의 진실한 삶을 깨우치려는 회원으로 구성되었다.

1969년에서 1974년은 한성 여중 서예 활동의 전성기로 전국 규모의 휘호 대회에서 단체상 개인상을 석권하였다. 대한 서예 교육회, 동방연서회, 성균관대, 수도 사대 휘호 대회에서 최우수상, 우수상, 특선, 단체상 등을 여러 차례 수상하기도 하였다.

한묵회는 제 2회 전시회부터 교외로 발판을 넓혀 성북동 극동 미술관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었고, 3회부터는 12회 (94 년)까지 매년 11 월 중에 연례 행사로 종로구 출판 문화 회관 화랑에서 개최되고 있다.

회원들의 끊임없는 연구와 노력의 결과는 서예계의 최고의 영예인

국전과 서예 대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꽂내 신상희는 국전 입선 3 회,대한 민국 서예 대전 특선 2회 입선 6회의 수상 경력을 지니고 있으며 현재(‘ 94) 국전 초대 작가로 활약 중이다.

백천 이순옥은 대한 민국 서예 대전 입선 1 회 대한 민국 서예 전람회 입선 2회로 한신 국민 학교 강사로 활약하고 있다. 눈솔 조경희는 서예 대전 입선 2회, 충남 미술 대회 특선을 수상하였다.

6) 학교 명예를 드높인 대외 활동

(1) 자매 부대 결연

1960년 3 월 4 일 본교는 육군 제 2355부대 와 자매 결 연을 맺 었다.본교가 육군 2355부대인 오뚜기 부대와 인연을 맺게 된것은 6.25 전쟁때

본교 교정에 제 2355부대 본부 병력이 주둔한데서 비롯되었다 특히 당시는 제 1 공화국 때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불안으로 국토 방위에 전념하는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기 위한 군 · 민의 유대 관계가 어느때보다도 강조되는 시점이기도 하였다. 자매부대와 결연을 맺은 직후 본교 여교사와 학생들이 제 2355부대기를 정성들여 수 놓아 오뚜기 부대에 전달함으로써 군 · 민간의 단결과 친목을 한껏 과시하기도 하였다.

본교는 1994년 현재까지 매년 2차례 (6월, 12 월) 오뚜기 부대를 방문하여 재학생들이 정성을 다하여 작성한 위문 편지와 위문품을 전달하여 왔다. 자매 부대에서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독수리 장학금(각 학년에 1 명씩 수혜)과 싸리비를 만들어 본교에 전달하는 등 유대 관계를 돈독히 해왔다.

(2) 운동부 활동

가. 농구부

본교 농구부는 1972 년 이화승 교사가 감독을 맡으면서 창단되었다.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는 지.덕.체의 조화로운 인간을 육성하고자 하는 교육정신을 실천에 옮겨 본교에 운동부서가 창설되게끔 지원했다.

매일 아침 운동으로 기초 체력 훈련을 하고 방과 후 시간에는 개인 기술 연습으로, 방학 증에는 합숙 훈련을 통하여 매일 강훈련을 했다.

1972 년 전국 중.고 농구 연맹전에 처녀 출전하였으나 경험 미숙으예선 탈락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7년부터는 전국 규모 대회 입상을 시작하여 1979년에는 전국 중.고 농구 연맹전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농구부 주장인 박순옥 선수가 ‘최우수 선수상’을 차지하는 영광을 가졌다. 그 후 1983 년 학교 재정의 어려움으로 해체하

는 순간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 하였다.

농구부의 주요전적은 다음과 같다.

1977.4.25 :제26회 서울 학도체육 대회우승

1977.7.15: 제9회 대통령기 쟁탈 전국 남녀 중학교 농구 대회 3위

1977.11 .25 .제12회 소년체육 대회 평가전 2위

1977.4.15:제2회 교육감배 초.중.고 종별 대회 2위

1978.8.29:제3회 협회장 기 쟁탈 전국 남녀 중.고 대회 3위

1979.7.23:서울시 중학교 친선 농구 대회 우승

1979.9.20 :제19회 추계 전국 중.고 연맹전 우승

나. 육상부

육상부는 1977 년 이준 교사가 감독을 맡으면서 창단되었다. 국가적

인 육상부 장려 정착으로 본교도 창설되었으나 초기에는 적은 인원의 육상부 활동으로 어려움이 많았었다.

그 후 감독 교사의 과학적인 훈련 지도와 선수들의 의욕, 학교 당국 등의 지원등에 힘입어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육상부의 주요 입상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77.6.1 - 김 숙(제 6회 소년 체육 대회 넓이 뛰기 6위 : 5m 22)

1977.6.23 - 김 숙(제 6회 전국 중.고학교 대항 육상 경기 대회 넓이 뛰기 2 위: 5m38)

1978.5.21-23 - 조희 숙(제 7 회 전국 종별 선수권 대 회 100m 4위 :13"0)

1978.7.4 - 조희숙(제 6 회 KBS 배 쟁탈 육상경기대회 서울지구 예선 대회 100m 1 위 : 12"8)

1979.8.28 - 섬공주(제 7회 KBS배 쟁탈 육상 서울시 예선 대회

800m 2위 :2’24"5)

김재영( " “ ” “ 800m 5위 :2’36"4

1애979.9.18훈-19 - 섬공주(제8회 전국 중.고등학교 육상 선수권대회 400m 4위 : 1’3’7)

1980.5.2-3 - 섬 공주(제8회 KBS배 쟁탈 전국 육상대회 1500m 2 위 :4’52"0)

1980.5.15-17 - 심공주(제9회 전국 종별 육상 경기 선수권 대회 800m 2위 : 2’26"F)

1980.7.3-.+ - 심공주(제61회 체전 대표 선발 육상 경기 대회 800m 2위 :2’22"3)

1982.9.27-28 - 김정희(제11회 전국 중.고등학교 육상 경기 선수권 대 회 투포환 3위 : 5m86)

1982.9.27-28 - 김순덕(제11회 전국 중.고등학교 육상 경기 선수 권 대 회 400m 4위 : 1’03"3)

다. 개인 활동 : 수영

수영 선수 조진아는 본교 재학증에 (1976년 -1978) 강한 성취 의욕과 강도 높은 훈련으로 한국 신기록을 1978년 한해에 무려 15 차례나 갱신하였다. 국가 대표 수영 선수로 선발되어 국제 대회에 다수 출전하여 학교 명예를 크게 드높이고 국위를 선잉:하였다. 한편 김수연은 1992년 1 학년 시절부터 수영 전국규모 대회에 침-기-해 크게 두각을 나타냈다.

@ 조진아의 주요 수상 경력은 다음과 같다.

1977.6.22-23 제 23 회 서울시 수영대회 배영 100m 1 위(l’ 17"27대회 신)

1977.7.15-17 제 32 회 전국 수영대회 배 영 200m 1 위 (2 ’ 41"41 대회 신)

1977.10.29-11.1 제 22 회 남녀선수권대회 배영 200m 1 위 (2‘ 44“ 37: 대

회신)

※ 1977 년도에서 배영 100m, 배영 200m 에서 대회 신기록 2차례나 갱신힘

1978.6. 제 8 회 아시아 대표 최종 선발전 2 위(l’ 13"55 한국 신기록)

1978.7.7-9 제 33 회 전국 수영대회 배영 200m 1 위 (2 ’ 33"08 : 한국 신기록)

1978.10.2 1 제 23 회 남녀전국선수권대회 개인혼형 100ml 위 :5 ’ 36"82:한국신)

※ 1978 년에도 주종목얀 배영 100m, 배영 200m 부분에서 한국 신기록윤 각각 7 차례 갱신함

@ 김수연의 주요 수상 경력은 다음과 같다.

1992.7.19-20 제38회 서울시남여종별수영대회 접영 200m 1위 2’28"91)

1993.5.28-31 제22회 전국 소년 체육 대회 접 영 50m 2위 : 30"51)1993.7.1 8-19 제3 지구 전국 소년 체육 대회 접영 100m 1위 1’05"05)

1993.9.18-21 제12회 대통령배 전국 수영 대회 접영 200m 3위 2 ’ 24잉7)

1993.5.18-31 제23회 전국 소년 체육 대회 접영 200m 2위 2’22"02)

1994.6.10-22 제23회 국제 청소년 올림픽 접영 100m 2위 1’07"07)

1994.8.13-14 제1 회 서울 시장기 수영 대회 접영 100m 1위 1’05"05)

제5편

대학교편

제1장 설립기(1972-1980)

제 1 절 한성여자대학 설립과 초대 김의형 학장

1) 한성여자대학 인가와 경위

1945년 10월 낙산에 한성여중고를 건립한 이래 30 여년 한성학원을 명문사학으로 키워온 한성학원의 창립자이자, 우촌 김의형 박사는 한국 여성 전문 영재 양성기관인 한성여자대학을 1972년 12월 문교부로부터 설립인가 받아 창립하였다.

한성여자대학은 문교부로부터 야간 4년제 여자대학으로, 입학정원국어국문학과 30명, 영어영문학과 30명, 비서학과 20명 가정학과 30명, 의상학과 20명, 생활미술학과 20명 등 모두 6개학과 150명으로 인가를 받게 된 것이다 한성여자대학 개교에 즈음해 초대 학장에 취임하신 김의형 박사는 다음과 같은 취지의 내용이 담긴 개교사를 발표하였다.

60년대 중반부터 일기 시작한 우리나라애서 일어난 조국 근대화 운동은 동남아 및 남미 개발도상국가들 간에 깊은 관심을 끌기 시직하였다 이들 개딸도상에 있는 니라들이 조국 근대화 운동이 국가발전을 위힌 운동으로 표현된 말로 받아 들여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경제떤을 비롯한 여러 국가생활변에서 발전의 의욕을 담고 있기 대문에 후진 개발도상국들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디 그러니 이 경

제를 내세운 국가발전 제획괴 그 잔략은 양질의 교육 성과애서만 가능힌 것이다.

특히 경제의 중요성만을 강조하고 교육적인 변을 등한시하띤 지칫 인간소외 현상마저 초래하기 쉽디 그러므로 국가발전 계획에 경제전략 못지 않게 참다운 인간교육이 벙행되어야 힌다, 여기서 침디운 인간교육이란 바람직한 가치관이 정립된 교육을 뜻한다.

이재 70년대에 들어선 우리니리는 오랜 후진국에서 탈피, 당딩히 중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음을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힐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에 그쳐서는 이니되며 선진국을 향한 목표설정과 이에 대한 실천이 우리애게 딩면과제로서 주어졌디. 이길은 선진곽 딜성을 꼭표로 한 국가발전이란 우리가 딩떤한 이 시점에 서, 미래 우리니라를 짚어지고 나갈 전문 인재를 육성하는 한성여자대학의 탄생은 우리 국가발전에 하나의 새의띠를 부여하게 되었다고 확신하는 바다. 앞으로 우리 한성여자대학은 이길은 시대가 요칭히는 교육을 통한 국가발전제획을 펼쳐가는 물줍기의 흐름속에서 그 믿은 바 임무를 다하며, 우수한 여성전문 인력을 배양하는 데 최선을 다히고자 한다.

우리 대학은 교육을 통한 영재 발굴괴· 계발에 힘써, 혁문 연미-를 똥한 개인의 창의펙윤 높여 앞날 국기벨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 양성을 그 교육목표의 하나로 심 끼로 하였다 그리고 지넥체의 삼위일체가 된 이 세 가지 요소중에 어느 하나도

삐뜨림이니 빈틈이 없는 균형집힌 교육을 구현해 펼쳐나가고자 한다,

힌핀 이짙은 지닥체의 균형집힌 교육의 구현은 학교 시설 환경 못지 않게 교수의 집에서 가콤된다고 하여도 과언이 이닐 것이다 여기서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꾸준한 교수의 질을 높이기 위해 종합 장기교육계획의 일환으로 쉽없고 계획성 있는 교수뜰의 교육연구 분위기 조성애 힘써 나가고자 한다.

그퍼고 지난닐 순국 선열들의 애국애족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학생들에게 계승진직시치, 후세에 한 접 부끄러움 없는 바람직한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인재로서 육성시키는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나라 교육이념인 홍익인긴 교육의 나러시굉 마음의 함양과도 일치되는 일이기도 한다.

한떤 반공의식 고취로서 국가안보에 빈틈없는 통일 역군 배영:을 위해 확고한 국기핀 획럽에도 힘쓸 것이다. 이는 나의 교육신조로서 나의 일생을 통해 항일 반공의 신념윤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끔으로 우리나라 여성 최고학부의 막내로 태어난 우리 한성여자대학은 재단, 학i1l, 그리고 교수, 희생이 합심 합력하여 빠른 시일 내에 한국의 명문교의 히나로 만플이 가꾸어 니갈 것을 굳게 다짐하며 개교사에 갈음하고자 한다.

1972. 12.

한성여자대학 초대학장 김의형

한편 초대 한성학원 이희순 이사장은 개교에 즈음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축사를 하였다.

우리가 흔히들 말하기를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합니다. 이를 셋으로 똑같이 우리 생활과 관심 및 사고의 대상인 것처럼 가름하려고들 합니다.

그러나 기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관심사는 과거의 것이 아니면 현재의 것입니다. 한편 미래의 것도 없지 않으나, 있어봐야 기껏 1. 2 년 앞이나, 한껏 길어봐야 10년 앞의 것에 불과합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역사적 지식은 이같이 과거로는 수천년에 뻗어 있음에 반하여 앞닐을 내다보는 역사적 지식은 고작 10년도 뻗지 못합니다.

이같이 미래는 그저 막연하고 때로는 불안한 구름이나 안개처럼 앞을 막는 것과 같고 그것은 돌이켜 몇천년의 과거를 돌이켜 돌아보는 것보다도 선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같은 앞을 내다보기 힘든 우리의 역사적 지식은 교육을 통해서만이 보다 선명하게 미래를 내다보고 건설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교육의 비전과 힘이 숨겨져 있습니다.

특히 20세기에 대한 오늘의 미래는 어제의 미래와 엄청나게 다릅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미래는 어제의 미래와 달리 급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발명 및 발견 그리고 새로운 제도 및 새로운 양식이 쉬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계속 터져 나오게 하고 있으며 우리 눈앞에 이러한 것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교육도 이같은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이에 뒤떨어지지 않는 미래를 내다 본 한치의 오차도 없는, 빈틈 없는 바람직한 교육관의 확립과 교육 내용이 선행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이같은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여성에 대한 종래 구속적이고 그릇되고 안일한 인식의 굴레에서 벗어나 남성과 모든 분야에서 명실상부하게 실질적으로 평등한 미래에 대한 준비와 각오가 새롭게 정립되어야 할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이같은 사회 각 분야에 걸쳐 명실상부한 미래를 향한 무대의 설계는 오직 여성 최고학부의 교육을 통해서 만이 가능하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20세기 세계속에서 오늘 우리 한국은 앞으로 30년 남짓한 다가오는 21 세기 2천년대 세계의 움직임 속애 님의 뒤를 따르는 수동적이 아닌 지구촌을 움직여가는 능동적인 존재 곧 다름아닌 우리 청소년 세대입니다.

이같은 세계사적인 전환기에 대한 우리 대학가에 한성여자대학의 탄생은 우리나

라 여성계에 새로운 희빙이요, 우리니리 대학기에 새로운 이정표기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특히 여성 최고학부의 교육은 심오한 진문적인 학문 여마와 이에 봇지 않게 사랑괴 믿음의 성실하고 근변한 여성상의 호가립이 무엇보다도 전재되어이 합니다. 그리고 여성은 아름다워 합니다. 몸과 마음이 같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우리 한성여자대학은 이러힌 21세기 미래를 향한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시회에 희망의 등불이 되고, 국가 사회에 봉사의 기수가 될 여성지도자 양성을 우리 대학의 교육 목표로 심을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 한성여자대학은 우리 사회애 부응히는 진실되고 성실히고 참된교육 혁신을 통하여 미래를 향한 힌치의 빗나감이 없는 여성 인재양성애 총력을 기울일 것을 굳게 다짐히며 축시의 인시에 갈음합니다.

1972. 12.

힌성학원 이시정 이희순

2) 한성여대 인가의 숨은 일화

한성여자대학 설립인가가 있기까지 당시 문교부장관이었던 민관식 장관의 공이 컸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수도권 지역 대학설립 억제를 국가정책으로 삼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민관식 문교부장관이 빅정희대통령으로부터 재가를 얻기까지 그 숨은 일화가 있었던 것이다.

민관식 문교부장관과 우촌 김의형 박사는 대한체육회 발전에 힘써 온 사이였으며,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안호상 박사와 이 두 사람사이 또한 민족지도자들로서 갚은 인연 등이 한성여자대학 설립인가에보이지 않는 작용을 하였던 것이다.

민관식씨가 문교부장관에 취임전에 대한체육회장으로 있을 당시 방곡 아시안게임에 참석, 식전행사에서 일사불란하게 펼쳐지는 카드 섹션을 처음 대하고 내심 감탄하고 돌아온 바 있었다 귀국 후 대한체육회 사무국 임원을 당시 카드 섹션 수준이 세계 제일 높다는 캄보디아에 파견, 카드 섹션 연출 방법을 익혀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무국 임원이 그 연출 방법을 배워왔지만 이를 구현해 줄 학교가 나서주지

아니하였다.

민관식 대한 체육회장의 이같은 고민에 처함을 보고, 당시 대한체육회 이사직에 있던 우촌 김의형 선생은 선뜻 한성여자고등학교장으로 서 카드 섹션 구현을 시켜 전국체전의 근대화를 돕게 하였던 것이다.

한성여자대학 개교 당시 교사

민관식 대한체육회 회장은 문교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도 우촌 김의형 박사의 대한체육회장 시절의 뜨거운 성원에 보답할 기회를 찾던 중, 어느날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베푼 리셉션에서 한성여자대학 설립인가에 대한 건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민관식 문교부장관은 이 리셉션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다가가 “전번 전국체전 개믹식 식전에서, 카드 섹션에 각하(聞下)의 존영이 마음에 드셨는지요”라고 말씀을 드리니 박정희 대통령은 “그 카드섹선에 내 얼굴이 사진과 같이 선명하게 잘 나타내어 내심 놀랐었네” 하고 응답을 하니, 민장관은 다시 “각하! 그같은 작품이 연출되기까지 여러 달 동안 한성여고 김의형 교장 선생과 전 교직원 학생들이 일심단결된 피땀어린 결설업니다”라고 말을 이으니, 박 대통령은 나즈막하게 “하기는 그렇군요”라고 미소를 짓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힘입은 민관식 문교부 장관은 “전국체전에서 카드 섹션을 통해 그 공로기· 많

은 김의형 교장에게 여자대학 인가를 하나 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여 수도권 대학 억제의 전례를 깨고 대통령으로부터 한성여지-대학 설립인가의 재가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3) 한성여자대학의 교시와 제1회 입학식 거행

(1) 교시

본교 설립지-이며 초대 학장 김의형 박사는 본교 교훈을 진리, 지선으로 삼고, 본교 건학이념으로 @ 진리탐구 @ 인격도야 @ 인재양성으로 할것을 밝혔다.

(2) 제 1 회 입학식

1973 년 3 월 5 일 역사적인 한성여자대학 제 1 회 입학식을 성대하게

가졌다. 초대 학장 김의형 박사는 입학 개식사에서

“우리 한성여자대학이 오늘 제 1 회 입학식을 갖게 된 것은 우리 한국 대학가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고 전제하고 여성 전문 영재 육성에 최선을 다할 것”

을 강조했다. 이어 한성학원 이희순 이사장은 축사에서

“급변하는 세계 정세의 변화는 여성 전문 영재 교육의 필요성 그 어느때 보다도 높다고 강조하고 앞으로 이같은 역사적 소명을 다하는 대학으로 만들어 나가겠다”

고 덧붙였다.

한편 73 학년도 3 월 제 1 회 신입생을 맞아 교무처장에 고창식, 학생처장에 윤태영 교수가 각각 취임하였다.

4) 증과 증원과 활발한 학생활동

(1) 무용 • 경영 • 무역 학과 증과

1974년도부터 입학정원이 전년도인 1973 년 150 t경 보다 80명이 증원된 23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는 지난해 12월 20일 학과 정원 조정에 의하여 불문학과 20명, 무용학과 20명, 경영학과 30명, 무역학과 30명으로 각각 증과된 반면 비서학과(20명)는 폐과되었다. 그리하여 74년도부터 본교 입학 정원이 9개 학과 230명으로 증원을 보게 되었다.

한편 3 월 신학기를 맞아 보직개편이 있었다

교무처장 고창식, 학생처장 윤태영 교수를 임명하는 한편 국문학과장 윤태영, 가정학과장 김복길, 생활미술학과장 차주환 교수를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강사인 연정열을 경영학과 및 무역학과장 대행으로 명하였다.

(2) 각종 서콜 탄생과 웅변반의 활약

1974 년은 국내적으로 북한 공산집단의 사주를 받은 조총련 문세광이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시-를 저격 시해하는 등 그 어느때 보다도 북한공산주의자들의 도빌-행위가 극에 달한 시기였다. 이같은 북한공산집단의 도발행위는 싱대적으로 우리의 총력안보가 강조되었다. 이같은 국가안보와 총력안보의 강조는 대학을 비롯한 각급학교에 그 영향이 파급되어 안보교육이 깅조되었다 한편 개교 2년을 맞은 학생활동도 총릭안보 차원에서 활발하게 일어난 안보문제연구회(회장 조인지, 지도교수 연정열)을 비롯한 RCY( 회장 박옥면, 지도교수 윤태영), 불교학생회 등 세 서클이 처음으로 선보이게 되었다. 특히 안보문제 연구회는 한국반공연맹 산하 전국대학 빈-공서클 회원교로 가입하게 되었다.

이해 1974년은 국가안보와 총력안보의 각종 궐기대회 및 각종 행시·가 개최되기도 한 시기였다 이같은 시기에 부응하며 본교도 웅변반이

조직되고 웅변활동을 통한 신설교인 한성여자대학을 대외에 홍보하는 데 힘쓰기도 하였다.

꽁 웅변반은 서명애(영문과 1년), 이경숙(영문과 1년), 이정국(경영과 1년) 등 세명의 반원을 주축으로 연정열 지도교수 지도 아래 전국 규모의 웅변대회에서 그 해 7관왕을 차지 대학웅변을 제패한 해이기도 하다 이해 6월 31일 제 26 회 대통령 친수기 쟁탈 제헌절 전국남여웅변대회에서 본교 웅변반은 대학일반부 단체우승을 차지하였으며, 이날 전국웅변인회가 주최한 총력안보 전국 남녀 종별 웅변대회에서 서명애양이 최우수상을 희득, 하루 동안 두 대회에서 2관왕을 차지하는 진기록을 낳기도 하였다.

(3) 삼학송과 선비 절개의 교훈

1945년 5월 본교 정문 옆에 세그루의 나란히 우뚝선 소나무에 삼학

송(三學松)이란 이름을 붙이고, 한성인들에게 젊은 학도로서의 기개를 함양하는 상징나무로 삼기로 하였다.

이 소나무는 지난 1920 년부터 이곳에 야생하던 소나무로 고사 직전 설립자 김의형 박사가 손수 그 나무를 돌보시어 오늘의 거목으로 키워왔었다.

당시 학생처장이며 김의형 학장의 평생의 교육동지요 보필자였던 윤태영 교수 등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 세 그루의 소나무를 김의형 학장은 삼학송이라 명명하고 본교의 상징 나무로 삼기로 하였다.

여기서 삼학송이란 병자호란 때 나라를 위해 순절한 삼학사의 절개를 뜻하고 있다. 병자호란 대 적지 청나라에 끌려가 항복화친을 끝까지 반대 살해 당한 홍익한, 윤집, 오달제 등 세 선비의 절개를 받들어 삼학사의 이름을 따서 삼학송이라 이름을 칭하게 된 것이다.

5) 학도호국단의 설치와 활동

1975 년 2 월 직제개편에 따라 차장을 과장으로 직제를 바꿔, 교무과장 정기수, 학생과장 연정열 교수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불문학과장 정기수, 전임강사대우 김진걸 교수가 무용학과장 대행에 취임하였다.

75 년도는 전년도 74년에 이어 총력안보다 강조되던 시국적인 요청으로 본교에도 학도호국단이 처음으로 조직되었다.

대대장 조인자(국문과 3 년), 부대대장 박옥면(영문과 3 년), 총무부장 박순식(가정과 3 년), 지도부장(생미과 3 년), 새마을과장 정득영(가정 3년), 문예부장 문장옥(국문과 3 년), 체육부장 주순희(의상학과 3 년)을 각각 임명하였다.

그해 1975 년 11 월 초 한성여대 학도호국단 자체검열을 받았으며, 우중에도 한점 흩트러짐 없이 절도 있고 짜임새 있는 분열 태도에 검

열단으로부터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본교 학도호국단은 이같은 국가안보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하여 12 만원의 방위성금을 모금하여 경향신문에 기탁하기도 하였다.

한편 본교 웅변반은 75 년도 신학기를 맞아 조인자(국문과 3 년), 문현숙(가정과 1년), 정정숙(경영 1년) 등으로 개편하고 그해 7월 17일 제27회 제헌절 전국웅띤대회에서 전년도에 이어 단체우승을 차지 동대회에서 2연패를 달성하는 등 그해도 전년 74 년도에 이어 총력안보 웅변대회 등 대학 웅변 7 관왕을 차지 75 년도 대학웅변을 제패한 해이기도 하다.

이해에 접어들어 기독교 학생회, 등산반 등 서클들이 하나 둘식 새서클이 선보이게 되었고 본교 학생들의 대외봉사 활동도 개교 이래 처음으로 활발하게 펼쳐지기도 하였다.

75 년 7월 18 일부터 1 주간 본교 학도호국단 봉사단은 윤태영, 연정

열 두 교수의 인솔 믿에 충남 아산군 탐정면 신리 소재 온양 양로원에서 수익 사업체인 묘목밭 경작을 도와 김매기 등의 봉사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그해 12 월 5 일부터 1 주간 동 양로원에서 동계봉사활동을 하였다.

이에 앞서 이해 5 월 8 일, 전교생이 참가한 가운데 본교 안보문제연구회(회장 조인자) 주최로 북괴만행규탄 궐기대회를 갖고 3 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전국 각대학별로 북괴만행규탄 궐기대회를 갖고 대학생으로서 안보의식 고취와 결의를 다진 이 행사에 본교도 동참 이날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CD 우리 대학생은 총화단결로서 안보자세를 굳건히 할 것을 대학생들애게 호소한다.

@ 우리 대학생은 면학으로서 나라에 보답하고 총력안보에 기수가

될 것을 굳게 맹세한다.

@ 우리는 한마음 한뜻으로 굳건히 뭉쳐 북괴 야욕을 분쇄 승공통일의 지표를 굳건히 할 것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바이다.

6) 보직개편과 제1회 졸업식 거행

(1) 보직개편

개교 4년째를 맞는 1976년 신학기를 맞아 이제 1 학년부터 4학년까지 전학년이 함께 수강을 하게 되어 명실상부한 4 년제 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신학기를 맞아 교무과장 정기수, 학생과장 연정열 교수가 유임되었으며, 그해 6월 다시 보직개편이 있었다.

교무과장 이경식, 학생과장 이근수 교수가 각각 취임하였다. 그리고

국문학과장 이근수, 영문학 과장 이경식, 가정학과장 김복길, 생활미술학과장 차주환, 경영학과 및 무역학과장 연정열, 무용학과장 대우 조교수 김진걸 교수가 각각 임명되었다.

2학기에 접어들어 학도호국단 직제개편과 임원개편이 있었고 대대장이 제대장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제대장 이혜숙(국문과 3년), 부제대장 유선봉(무용과 3년), 제 1 중대장 길을남(생미과 3년), 제 2중대장 박영희(의상과 3년), 제 3중대장 홍연휘(의상과 3년), 총무부장 주완숙(경영과 3년), 새마을부장 이영란(가정과 3년), 지도부장 김병옥(생미과 3년), 문예부장 전미화(국문과 3년), 훈련부장 김수광(영문과 3년)을 각각 임명하였다.

(2) 국어국문학과 방언, 민속 학술 조사활동

이에 앞서 6월 국문학과 남해도 방언 미속 학술조사 활동을 이근

교수 지도 아래 펼쳐 본교 학술조사활동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한편 그해 10월 23일, 24일 이틀에 걸쳐 제1회 낙산축전이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이로서 낙산축전의 새로운 전통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

11월 13일 76학년도 학도호국단 병영실기를 포함한 지체검열을 받았다

(3) 『한성경영학보』의 발간

본교가 개교 4주년을 맞는 1976년 아직까지도 학보가 없다는 아쉬움을 느낀 경영학회(동년 4월 최초로 학회를 구성, 회장 주완숙)에서 처음으로 타블로이드판 신문인 한성경영학보를 11월 22일자로 창간호를 내놨다.

동신문은 발행인 김의형, 편집인 연정열로 되어 있으며, 편집장은 경

영학과 3년 정상란이 맡았다

이 한성경영학보가 발간됨으로써 요람기 본교 최초의 신문으로 선보이게 되었다. 동지가 나옴으로서 한성여자대학보 발간의 시급성을 촉진시켜 드디어 그해 12 월 한성여자대학보의 창간을 보게 되었다.

한편 한성경영학보 창간호에서 발행인 김의형 학장은 다음과 같은 발간사를 하였다.

경영희회룹 창립하고서 그나마 타블로이드 판 회지까지 창간호를 내놓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디.

촬이치보건대 우리 한성여자대학이 고고의 성을 울린지 4개 성상, 이 짧은 시간동안 우리학교 안팎으로 내실을 기하는데 힘써왔습니다.

우퍼는 데내외적으로 여러 어려운 요건을 극복하면서 오늘에 이르렀고 앞으로 이를 이겨나가며 명문 한성여자대학의 굳건한 상아탑을 쌓아 올려나가야 합니다. 도전파 응전의 되풀이 속에서 문화가 발전한다는 20세기 영국이 낳은 석희 아놀드 토인비의 말이 이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고대 인류문명의 발생이 비옥한 초원지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가뭄과 홍수가 빈번한 횡하 유역이나 나일강 유역에서 일어난 것도 인간이 자연의 도전에 대한 굽힐 줄 모르는 슬기와 용기의 응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경영학회 창립과 함께 이번 창간호를 내게 된 경영학회보의 탄생은 제반 어려운 요건을 극복하고 내일의 참다운 경영인으로서의 소양을 수련하는 광장으로서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성여자대학의 밑거름이 될 한 씨앗이기도 합니다.

경영학과 학생들은 이번 회지 창간을 제기로 더욱 열심히 연구하고 수양하는 바람직한 몸과 마음가짐을 갖고 내일의 올바른 경영인으로서의 자세를 다시 한번 새롭게 가다듬기 바랍니다

앞으로 이 회지가 판을 거듭할 때마다 더욱 짜임새 있고 알찬 내용으로, 경영학회의 새소식과 함께 참다운 학술지로서 발전있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이 회지가 나오기까지 힘쓴 지도 교수와 관계 학생의 노고에 다시 한번 치하하는 바입니다.

1976년 11 월 22 일 학장 김의형

(4) 「한성여자대학보」창간

1976년 11 월 30 일 문공부로부터 정기간행물 허가를 받고 격월간 대학신문인 「한성여자대학보」가 1976년 12월 10일자로 역사적인 창간을 보게 되었다. 통 신문은 학생과에서 관장 발간키로 하고 발행인 김의형, 편집인 주간 이근수로 등록을 마쳤다 한성여자대학보가 창간됨으로써 한성경영학보는 발전적 폐간을 하였다

한성여자대학보 창간에 즈음해 발행인 김의형 학장은 다음과 같은 발간사를 하였다.

고난을 무릅쓰고, 한국의 얼을 심음으로써 참된 여성교육을 실현하려는 건학정신을 정착한 지 벌써 4년, 이제 조출하게 우리의 솜씨로 「한성여대학보」를 창간하게 됨을 진심으로 경하해 마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그 자체내에서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 끊임없는 변화에 다각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갖가지 지식들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을

‘지식인의 폭발시대’라고플 혐-니다. 그리나 우리는 편안히 이 지식윷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을 지니지 뭇하였습니다 다만 생활의 일부를 담당히띤샤, 폭발하는 이 다량의 지식윤 보호할 태도를 가져이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애 따라 새로운 지식, 새로운 교육이념윤, 그러고 높은 지혜와 두터운 덕행, 튼튼한 체력을 갖춘 미래지향적인 인격형성을 위하여, 우리 선인들이 님긴 문회유신윤 살리고 심오한 이론을 실제의 현장에 실현시키기 위하여, 국제 초유의 순수 여성 야간대학을 성립한 것입니다.

우리가 당펜하고 있는 현실적 난관을 살피건대 독서삼여의 하나인 야간을 이용하여 학문을 연찬하고, 이것을 주간의 실무에 충실히 응용헬- 수 있도콕 험이 시급한 일임을 감득해야 할 것입니다.

이 주경야독의 자세외 그 판질은 의지의 응결입니다 그것은 남성의 시유물이 아넙니다. 펀대적 의의로는 여성으로끼지 획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랜 의미에서 본 희보의 창긴은 본과의 건학이념을 더욱 칭조적으로 구현하려는 노럭의 한 표현입니다 알찬 내용과 분팽한 논지, 다양한 편집으로 대학언론의 일익을 맡으면서 사계에 닐로 성가를 높이띤 우리의 의지는 서서히 구현되는 것임니다 우리는 본 학보를 의지 구현의 장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먼저 본 희보는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디. 우리의 관심

밖으로 나가서는 안됨니다 하니하니 미세한 것에도 관심을 두어 잘잘못을 가려보고 비핀과 질정윷 아끼지 않아 건전하게 이끌어가야 할 것입니디. 참여 없는 비판은 있윤 수 없습니다 학술을 연마히고 심오한 학술의 이념을 연결히여 국가와 민족, 나이기 인류시회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내용을 발표혈 징이 되어야 힘니다 그리고 조싱이 남긴 빛닌 문회유산을 보전해야 하며 나아가서는 새로운 문화칭조의 전진적 자세로 임해야 할 줄 압니다.

또 우리는 이것윤 통하여 모교애를 지녀야 합니다. ‘대학의 입’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본 학보는 우리 학문의 깊이요, 정서의 향취, 대화의 광장으로서 우리 모두의 정신의 죄겔지요, 시선의 촛점이 되어야 합니다.

지나온 짧은 몇년이지만 서서히 저력을 기르면서, 이 힘이 모교를 위히여 얼마나 활용될 수 있을까를 측정하여야 하겠습니다. 오늘날의 대학은 부하펀 기능이 다원화 되어가고 활동의 양상 또한 복집다양해지기 때문에 대학 내의 복잡한 그 의식을 본확보를 통하여 통일시키면서 공통된 최대공약수를 발견하도록 노럭히여야 합니다.

등숭엠 후 시회에 나이-간 뒤라도 모교와의 연락역은 역시 본 학보에서 담당하여야 될 것입니디, 모교에 대한 향수로 공허해진 마음의 여백을 한장의 학보기 날아듦으로써 메윤 수 있을 때 비로소 학보의 존재를 알게 되고 뜨거운 모교애를 느낄 수 있윤 것입니다.

또 학보는 학원 저널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학교 내의 행사, 학사 문제, 제반 학술 내용 등을 모두 수용하여야 하며, 미래의 문을 두드리는 자세로 ‘학원 입’ 노릇을 할 때, 학풍 수립의 선구적 역할을 할 때, 전 학생들에 대하여 선도적 자세로 일할 대 참다운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성대 학보 초창기신문

이제 시발의 시접에 서 있는 우리 한성여자대학보는 학교 딩균, 교직원, 그리고 학생들의 어느 한편에만 기울어지는 편향성을 띠지 밀고 한성여대 잔체를 투영하는 의연힌 지세로 균건히 발전해 주기를 비랍니다 젊은 지성의 소리휠 대변하고, 배움의 전딩 속에서 학구의 빈려가 되어 칭의적인 노력과 지융적인 의지로서 꾸준히 노력해 주길 비랍니다. 학생 스스로기 만드는 순수성을 상실히지 말고 강렬한 연학의열의로 자기를 통찰히여 여성교육기관의 기관지적 성격을 갖추는 것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 앞에 산지l 해 있는 지식의 본질운 외부애서민 펴악힐 것이 이니라 직접 그 인에서 템섹해 내는 자세로 임히길 바랍니다.

아무쪼록 뜻깊은 한성에대학보의 창간을 빚이 본교 발전애 새로운 초점이 될 것이며 아울러 본교 건학 이념의 발현체로서 지성의 선도지가 되어줄길 비라마지 않습니다.

(5) 제1회 졸업식 거행

1977 년 2월 25 일 한성여지대학 제 1 회 졸업식을 가졌다

이날 역사적인 제 l 회 학위수여식에서 김의형 학장은 개식사에서

오늘 우리 힌성여지대학 제1회 졸업식을 맞아 4년간 형설애 공이 쌓여 영예의 학위기괄 받는 졸업생 여러분들을 충심으로 축하합니다. 그리고 졸염생들이 오늘의 영광이 있기까지 뒷받침 해주신 학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여 사회에 나가 훌륭한 등불과 같은 흉륭한 일꾼이 되라.

고 깅조했다 이어 이희순 이사장도 축하에서

“오늘 영광의 학위를 받는 졸업생들의 졸업을 충섬으로 축하한다” 고 강조하고 “앞으로 졸업후에도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학교에서 배운 전공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 모교 한성여자대학을 빛내줄 것”을 강조하였다. 이날 영광의 학위기를 받은 졸업생들은 다음과 같다. 국문학과 25명, 영문학과 22명, 의상학과 6 명, 생활미술학과 14명, 가정학과 23명 등 모두 90명의 여학사를 배출하였다.

제 2 절 남녀 공학 시대를 연 제 2대 이희순 학장

1) 이희순 학장 취임과 발전의 토대 마련

1977 년 3월 1일 제2대 학장에 취임한 이희순(李喜)1펌) 학장은 여학생만으로는 학생자원의 근본적인 부족을 느껴, 남녀공학만이 본교 발전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다고 확신, 1978년 1월 11일 문교부로 부터 한성여자대학을 한성대학으로 교명(校名) 변경을 인가받았다 그 해 3월 첫 남녀공학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오늘날 본교가 서울 대학가에서 해마다 높은 입시대수를 낳게 된 터전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이희순 학장은 스포츠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탁구부 창단을 하였다. 일찌기 학창시절 스타 플레이어로 그 명성이 일본 탁구계에게까지 떨친 이희순 학장은 탁구부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갖고 성원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본교 탁구부는 창단 첫해부터 전국의 강호들을 연파, 영예의 우승을 석권하기도 하였다.

이희순 2대 학창은 직접 각학과 학술 세미나 및 각종 전시회, 발표회 등 한번도 빠짐이 없이 참석 격려를 아끼지 아니하여 학생들의 면학분위기 조성에 힘썼던 시기였다. 한편 이 학장의 취임에 따라 일부 보직개편이 있었는 데 보직자와 학과장 병단은 아래와 같다.

교무과장 이경식 교수

학생과장 이근수 교수

국문학과장 이근수 교수

영문학과장 이경식 교수

가정학과장 김복길 교수

생활미술학과장 차주환 교수

경영학과 겸 무역학과장 연정열교수

무용학과장(대우) 김진걸 교수

의상학과장 장석향: 교수

국사학과장 신은숙 교수

한편 이희순 학장은 제 2 대 학장은 다음과 같은 취임사를 하였다.

유닌히도 혹독했던 지난 겨울날씨에 한관 엎애 심어 놓은 꼭련이 그냥 얼어죽고 말았으려니 했으나 새땀윤 맞아 충분한 봄비와 따뜻한 닐씨에 다시 소생히여 어여쁜 꽃들도 피우고 이제는 푸풋푸풋 씩씩한 잎사귀들이 많이 돋아나서 신록의 여름을 맞고 있습니디.

이번에 본인이 뜻하지 않게 한성여자대혁 학정 서리로서 취임하게 되니 한편으로 는 부플어 오르는 빅친 희밍괴 함게 디·른 한편으로는 앞으로 히l 갤해야 될 여러 문제뜰이 이무리 생킥해도 능력에 부칠것 겉아 무거운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뜰이켜 보면 우리 한성여대는 지난 72년 창립 이래 해마다 한 학년씩을 늘려 나가는 빌돋음운 거룹힌 끝에 끝에 금년 봄에야 제1회 졸업생을 내떤서 명실공히 4년제 대한으로 출딸하게 되 었습니다.

이는 오로지 초대 희징 김의형 박사님을 위시힌 교직원 · 학생 • 여러분이 학교 발진윤 위해 진럭해 온 보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간 5년 동안은 대학의 모든 활동이 교실을 갖추고 학생괴 교직원들을 매년 맞아들이면서 대학의 기본기능에 대해 서는 겨우 힌 가지씩 시혐해 온 상횡이라 하겠습니다.

1J]치 지난 겨을 혹한애 시딜려 몸살을 앓던 나무들이 세봄을 빚이 겨우 대지에 새뿌퍼틀을 내리떤서 활착힌 단계라고나 할까봅니다 따라서 앞으로 수 년간은 열심히 이 니무들에 영향을 주고 정성껏 가꾸어서 어서 빨리 가지들을 나게 하고 많은 잎을 피위서 빠른 시간에 회사한 꽃들을 피우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제 이 단제에서 우리 한성여자대학 운영의 중책을 맡으며 본인은 다음과 같은 세기지 방침을 갖고 학교 운영을 하고자 합니다.

첫찌1 는 띤학분위기의 조성입니다. 본인의 소견으로는 대학 설립의 가정 큰 의의는 현대와 겉이 고도로 발달된 실업문명시회에서 심각한 경쟁얘 적응하여 자기를 획립하고 사회 및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문화인, 지식인, 과학인의 배양에 있디 하겠습니다.

띠라서 이제부터는 비록 빈약한 여건이나마 최소한의 여건을 그동안 갖춘 것으로 생각되므로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면학하는 대학을 만들도록 다같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이와 검은 변학하는 분위기를 조성 발전시켜 줄 대희의 여러가지 제도 및

기능을 확립하고 개선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5 년 동안의 초창기에는 창설 대학의 어려운 제반요건으로 많은 혼란도 있었고 시행착오도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그 동안의 여러 경험들을 바탕으로 하여 대학이 해마다 눈에 띄게 발전할 수 있고 전진할 수 있도록 우선 학내의 모든 제도와 기능을 재정비하여 학생 및 교수 여러분이 각기 본연의 업무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셋째로는 인화와 협조입니다 이는 어느 사회나 단체에도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바이겠지만 특히 우리 학교에서와 같이 여러가지 불편과 미숙한 점이 많고 경험과 역사가 짧은 데에서는 어느 무엇보다도 중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대학이 앞으로 힘찬 발전을 하기 위하여는 학생 및 교직원 여러분의 불타는 애교심에 바탕한 절대적인 협조가 필요합니다.

대학이란 본래 개성있는 자아를 발전시키는 특수사회이므로 다른 어느 단체보다는 자아를 내세우는 습성이 뚜렷합니다. 따라서 사사건건 시시비비 분명해야 하겠지만 서로가 상대를 자기와 같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기풍을 세움으로써 인화와 협조를 이룩합시다.

우선 학내에서 이러한 전통을 이룩함으로써 우리 대학은 학외에서도 자랑스럽고 존경받고 인정을 받는 대학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본인은 학장 재임 기간 동안 이상에서 말씀드린 목표를 달성시키기 위하여 학생 교직원 여러분의 뒷바라지에 최대최선의 노력을 본인의 능력이 자랄 수 있는 한 경주할 것임을 서약코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2) 활발한 세미나 참석과 면학분위기 조성

제 2대 학장에 취임한 이희순 학장은 학과별 세미나에 참석 면학분위기 조성에 힘썼다. 그해 5월 7 일 한국일보 빌딩 송현클럽에서 <21 세기를 향한 경영학도의 자세〉란 주제로 열린 경영학과 세미나에서, 이희순 학장은 “여성도 국제적 안목을 갖고 세계경영 무대로 진출할 것”을 강조, 학생들에게 미래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이날 내빈으로 참석하였던 당대 노동경제학의 석학 김윤환 박사(고대 교수)도 이희순 학장의 미래에 있어 여성들도 활발한 해외진출에 대한 공감과 함께 “노사 공동체의식의 확립만이 노동 3 권의 분쟁없는

한국의 침-된 산업평화를 가져오는 길”이란 연구발표를 하였다.

한편 건국대 상경대 교수인 한국 인사관리학회장 황대석 박사는 “인사관리의 효율은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연구발표를 가졌다.

이날 경영학회장 주완숙 양은 세미나에 참석한 내빈들에게 기념품을 전달하고, 앞으로 해마다 정기적으로 학교 밖에서 학술 세미나 개최의 전통을 세우겠다고 다짐 하였다.

경영학과장 연정열 교수는 “이같은 학생들의 학습분위기를 높이는 학술세미나와 함께 해마다 경영산업견학의 전통을 세워 실시할 것”을 다짐하기도 하였다.

한편 경영학과에 앞서 국문학과에서는 지방 방언조사를 정기적으로 실시하였고, 뒤이어 사학과에서 시-적지 답사를 무용학과의 무용발표회,

생활미술학과의 미술작품전시회 등 각종 학교 밖 행사의 전통이 세워져 갔다. 이같은 학교 밖 행사의 전통을 마련한 전기를 이희순 학장집무시 이루어졌다

한편 제2회 낙산체전과 제3대 학도호국단 결성 이해 10월 8일과 9일 양일간 제2회 낙산체전이 성대하게 열렸다. 전년도 제1회 낙산체전 때보다 그 규모나 내용변에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으며 서클도 카톨릭 학생회 서에반 퉁 새 서클의 탄생과 함께 낙산체전의 질적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제 3 대 희도호국단 임원 구성을 다음과 같이 편성하였다. 총학생제대장 연영순(국문학과 3년), 부제대장 이순분(가정학과 3년), 1 중대장정난순(생활미술학과 3년), 2중대장 정해펙(무용학과 3년), 총무부장 유하행(가정과 3년), 새마을부장 최명숙(경영학과 3년), 지도부장 배애숙(가정학과 3년), 훈련부장 황규인(생활미술학과 3년), 문예부장 백인숙(국문학과 3년), 체육부장 김정인(무용학과 3년)

3) 제2의 탄생 남녀 공학

1978년 1월 11일 본교는 한성여자대학에서 한성대학으로 교명 변경과 함게 종전 야간 여자대학에서 남녀 공학 주 · 야간 설치 등 본교 제2의 탄생을 한 해이기도 하다.

그해 10월 15일 문교부로부터 학과 정원 조정 승인을 받아 국문학과, 영문학과, 의상학과, 생활미술학과, 무용학과 입학정원이 각 10명의 증원을 보게 되었으며 경영학과와 무역학과는 입학정원이 각 50명의 획기적인 증원을 하게 되었다.

한편 가정학과 폐과로 행정학과(입학 정원 30명)의 신규 증과를 보게 되어 입학 정원이 종전 9개학과 230 명에서 9개학과 380명으로 늘어

나게 되었다.

1978년 3월 5일, 78학년도 입학식은 본교가 제2의 탄생을 하는 한성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날이기도 하였다.

이날 이희순 학장은 입학식사를 통하여 “우리 한성대학은 이제 명실상부한 남녀공학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오늘 입학의 영광을 안고 첫출발하는 신입생 여러분은 한성 역사의 새로운 역사적 소명의식을 가져주기를” 당부하였다. 이어 설립자이며 초대 학장인 이사장 김의형 박사는 축사에서 “오늘 입학시험의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여 영광의 이 자리에 참석한 신입생 여러분을 마음 속 깊이 축하한다”고 전제하고 “이번 남녀공학의 발전이란 새로운 탄생을 가져온 이희순 학장의 노고를 치사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앞서 2월 제2회 학위 수여식을 가졌었다.

이날 영예의 학위를 받은 여학사는 모두 82명이다. 학과별로 보면 국문학과 24명, 영문학과 21명, 경영학과 2명, 무용과 6명, 생활미술학과 15명, 의상학과 4명 가정학과 10명이다.

한편 이해 2월 교무괴장에 정연길 교수가 취임하였으며, 그해 3월 행정학과 신설에 따라 이창신 교수를 학과장에 임명하였다 이해 8월 일부 보직개편이 있었는 바 교무과장 정하경, 학생과장 이창신 교수를 각각 임명하였다.

4) 남 녀 공학체제 학도호국단 설치

지난해 77 년까지 여학생만으로 구성되었던 본교 희-도호국단은 78년 신학기를 맞아 남녀 공학에 띠-른 학도호국단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그 해 11 월 4 일 78 년도 정기검열에서는 총겸술 등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남학생들의 씩씩한 교련사열을 보여줌으로서 보는 이로 하여금 믿음직스러움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러나 남학생이 아직 1학년이기 때문에 학도호국단 간부는 될 수 없었다.

당시 학도호국단 임원명단은 다음과 같다.

총학생제대장 문현숙(의상과 3년), 부제대장 이은정(국문과 3년), 제1종대장 박소춘(무용과 3년), 제 2중대장 이은자(가정과 3년), 총무부장 신소영(경영괴 3년), 새마을부장 김숙(국문과 3년), 지도부장 이향숙(생미과 3년), 체육부장 이정희(무용과 3년), 문예부장 장 미(영문과 3년), 훈련부장 주은주(의상과 3년)로 구성되었었다.

한편 제 3 회 낙산축전을 그해 6월 2 일부터 4 일까지 성대하게 개최한바 있었다.

5) 『한성대학보』로 제호 변경

『한성여자대학보』는 교명 변경과 함께 제호를 『한성대학보』로 개칭하고 제7호부터 주간교수에 이창신 교수로 바캠과 동시에 편집인 이근

수, 주간 이창신 교수의 이름으로 학보를 발간하였다.

8호부터 연정열 교수가 주간교수에 취임하면서 종전 학생과장 주관으로 발간한 학보를 독립해 발행인 이희순, 편집인 주간 연정열의 명의로 문공부에 등록 허가를 받았다.

본교 학보는 대내적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기반이 닦여 전국대학 학보사 주간교수협의회에 연정열 주간 교수가 공동대표 및 감사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6) 탁구부 창단과 대학미전 수상

이해 본교는 탁구팀 조직을 통한 새로운 스포츠 명문의 터전을 마

련한 해이기도 하다.

일찍이 한국 여성탁구의 스타 플레이어였던 이희순 학장은 탁구팀 창단에 많은 도움을 주어 창단 첫해부터 대학탁구의 우승가도를 달렸다.

본교 탁구팀은 부장 연정열, 코치겸 주무 이석구, 선수 김혜정, 김길자, 안화순, 김정자로 팀을 구성하고 5월 10 일 부터 여린 전국종별탁구선수권대회에 처음 출전, 전년도 우승팀인 효성여대를 결승전에서 깨고 감격의 첫우승을 차지하였다. 이어 11 월 문교부 장관기 쟁탈 남녀탁구선수권대회 대학부에서 강호 동덕여대를 결승전에서 격파하고 우승을 차지, 창단 첫해부터 탁구 명문교의 전통을 마련하였다. 한편 그해 10월 중앙학도호국단 주최 제9회 전국대학 미전에서 생활미술학과 4학년 정란순 양이 당당히 동양화 부분 일부에서 특선에 입상, 미술 한성대학을 대내외에 과시하였다.

1977 년 창단된 탁구부

제3절 제3대 김옥형 학장 취임

1) 제3대 김옥형 학장 취임과 5개학과 증과 증원

1979 년 3 월 제 3 대 학장에 김옥형 학장이 취 임 하였다. 김옥형 학장은 취임시-에서 “날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한성대학을 보다 짜임새

있고 훌륭한 학교를 만들겠다”고 전제하고 “앞으로 한국의 명문교로서 손색이 없도록 발전시켜 나가자”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증과에도 힘써 경제학과와 도서관학과를 새로 설치 인가를 받게 되었다. 김옥형 학장이 취임 전 잠시 정연길 교수가 학장직무대리를 대행하였다 또 3월 신학기를 맞아 일부 보직개편이 있었다.

학생과장 김계욱 교수

도서관장 정연길 교수

국문학과장 정연길 교수

영문학과장 허광일 교수

의상학과장 이남희 교수

생활미술학과장 하인두 교수

한편 이해 9월 11일 문교부로부터 의상학과를 비롯한 5개학과에 대한 증원 증과 승인을 받았다. 의상학과, 생활미술학과, 무용학과, 행정학과 각 10명씩 입학정원이 늘어났으며, 77년 10월 20일 국사학과에서 학과 명칭을 바꾼 사학과는 20명의 증원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입학정원이 9개학과 44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2) 제3회 졸업식과 제5대 학도호국단 출범

1979년 2월 24일 제3회 학위수여식을 가졌다. 이날 영광의 학위를 취득한 여학사는 다음과 같다. 국문학과 14명, 영문학과 19명, 경영학과 7명, 무용학과 6명, 의상학과 7명, 생활미술학과 11명, 가정학과 12명 등 모두 76명의 학사를 배출하였다.

한편 제5대 학도호국단 임원 구성을 다음과 같이 새로 편성하였다.

총학생 제 대 장 고정 숙(무용학과 3년), 부제 대 장 윤오남(경영학과 3년), 제 1 중대장 송창희(의상학 괴 3년), 제 2중대장 김병식(무용학과 3년), 제 3중대장 강길순(영문학과 3년), 제 5중대장 민혜영(생활미술학과 3년), 제 6중대장 김경자(국문학과 3년), 총무부장 신현균(의상학과 3년), 문예부장 김호경(국문학괴 3년), 새마을부장 이춘미(영문학과 3년), 지도부장 오미숙(경영학과 3년), 체육부장 김정숙(무용학과 3년), 훈련부장 이정숙(가정 학과 3년)을 각각 임명 하였다.

한편 제4회 낙산체전이 이해 5월 16일, 17일 양일간 성대히 열렸다. 이어 10월 14 일 추계교내 체육대회를 가졌다.

3) 탁구팀 연승과 동창회 조직

본교 탁구팀은 79 년에 들어와서 더욱 짜임새 있는 팀원과 맹훈으로

이해 7월 31일부터 8월 6일까지 문화체육관에서 열렸던 전국종별탁구 선수권대회에서 강원대학교를 결승전에서 만나 시종 일방적인 공략을 펴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어 같은 해 11월 17일부터 열린 79년도 문교부 장관기 쟁탈 탁구선수권대회에서 강호 통덕여대팀을 만나 일전일퇴의 시소게임을 벌렸지만 본교팀의 패기에 찬 경기운용으로 동덕여대팀을 격파하고 이해들어 두번째 대학탁구의 패권을 누리게 되었다 한편 이해 7월 제1회 졸업생으로 재학시 초대 대대장과 안보문제연구회장을 지낸 조인자 동문(국문학과 77년 졸업)의 발기로 동문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동문 상호간 친목도모와 모교발전을 위한 터전마련을 목적사업으로 동문회를 조직하였는 바, 초대 동창회장에 조인자 동문이 선임 되었다.

제4절 학과 증과와 전 학과 교직과정 설치

1) 직제개편과 보직개편

1980 년 8 월 직제개편으로 교무과장 및 학생과장을 교무처장 및 학생처장으로 그 명칭을 바꾸고 교무처장 이근수, 학생처장 신은숙 교수를 각각 임명하였다. 그러나 3개월 뒤 교무처장 이근수 교수가 타교로 전직함으로써 후임에 최명규 교수를 교무처장에 임하였다.

이에 앞서 3 월 무역학과장 최명규, 무용학과장 김숙자 교수를 각각 임명하였다. 이어 국문학과장 이석주, 영문학과장 고정자, 사학과과장 지배선 교수가 임명되었다. 2학기에 접어들어 무역학과장에 김신 교수로 교체되었다

2) 제4회 학위수여식 거행

이에 앞서 1980년 2월 제 4회 학위수여식을 갖고 101 명의 여학사를 배출하였다.

국문학과 28명, 영문학과 21명, 경영학과 8명, 무용학과 6명, 생활미술학과 18명, 가정학과 14명 등 모두 101명의 새학사가 탄생되었다.

3) 경제학과, 도서관학과 증과

이해 10월 15일 문교부로부터 경제학과와 도서관학과 등 두 학과의 증과 승인과 함께 두 학과의 졸업정원을 각각 40명으로 인가받았다. 한편 140학점 실혐대학 채택에 따른 본교 학과정원을 11개 학과에 졸업정원 520명, 입학정원 676명으로 승인받았다.

4) 전학과 교직과정 설치

본교는 그동안 숙원사업의 하나였던 교직과정 설치가 79학년도 경영, 무역학과 두 학과에 교직과정 설치 인가를 받은데 이어 80년 12월 전학과에 교직과정 설치 인가를 받게 되었다 이로써 본 대학 학생들은 재학 중 일정한 괴정의 교직과목을 이수하면 졸업 후 교직에 나갈 수 있는 길이 띨렀다.

제 절 종합관 신축과 대학 미전 수상

1) 보직개편과 제5회 학위 수여식

1981 년 3 월 신학기를 맞아 보직개편이 있었다.

교무처장 연정열, 학생처장 신은숙, 사무처장 김범주 교수를 각각 임멍하고 도서관장에 검복길 교수가 유임되었다. 그리고 경영학과장에 최병규, 경제학과장 한창호, 도서관학과장 조점환 교수를 각각 임명하였다. 한펀 이해 3 월 학보사 편집인 주간 연정열 교수가 교무처장으로 전보됨으로써 공석이 된 학보사 편집인 주간 후속인사가 있었다. 학생처장 신은숙 교수가 학보사 편집인을 학생처장이 겸하도록 제의한 것을 김옥형 학장이 이를 받아들여 동학보는 편집인 신은숙, 주간 윤경로 교수의 명의로 문공부에 등록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전국대학 학보사 주간교수협의회 감사의 직은 연정열 교수에 이어 새주간인 윤경로 교수가 계속 맡게 되었다.

한편 이상과 같은 인사단행에 앞서 제 5 회 학위수여식을 이해 2월 25 일 가졌다. 이날 영예의 학위를 받은 학사는 모두 87 명으로서 국문

학과 6 명, 영문학과 15 명, 경영학과 18 명, 무용학과 12 명, 의상학과 15명, 생활미술학과 14 명, 가정학과 7 명 등 모두 87 명의 새 학사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김옥형 학장이 이해 12 월 개인 사정에 의해 사임하게 되자, 그 해 제 9 대 이사장에 취임한 안호상 박사는 학장 직무대리에 연정열 교수를 위촉하였다. 안호상 이사장은 전체교수회의를 열고 연정열 교수를 학장 직무대리에 위촉하고 “새 학장을 임병하기까지 학장 직무대리 연정열 교수를 중심으로 학교발전에 최선을 다해 줄것”을 당부하였다. 학장 직무대리로서 연정열 교수는 82학년도 입시관련업무를 다루고 그 이듬해인 1982 년 3월 1 일 제 4 대 학장으로 부임해 온 강병규 학장에게 업무를 인계하였다.

2) 제6대 학도호국단 창단과 동남아 해외 연수

81년도 신학기를 맞은 학도호국단은 전년도 2학기말에 남학생을 주축으로 임원을 구성하고 전날에 비하여 보다 활발한 사업을 펼쳤다. 제6대 학도호국단 조직 편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총학생장 호진규(영문과 4년), 총부학생장 문교승(무역과 4년), 총무부장 이승각(경영과 4년), 문예부장 박해영(국문과 4년), 새마을부장 이명아(생미과 4년), 지도부장 박찬암(경영과 4년), 체육부장 조영애(무용과 4년), 훈련부장 김해룡(무역과 4년), 여학생부장 전광의(의상학과 4년)등으로 임원을 구성하였다. 한편 국문학과 학생장 김성일, 영문과 학생장 황현, 무용과 학생장 정창영, 가정과 학생장 임재수, 생미과 학생장 구천회, 의상과 학생장 문진한, 경영과 학생장 한득희, 무역과 학생장 신영수가 각각 선임되었다. 한편 문교부 주관으로 실시한 해외연수가 본교 개교 이래 처음으로 행하여졌다. 이해 2월 중 실시한 동해

의 연수는 이석주 교수의 인솔로 필리핀, 자유중국, 태국, 일본 등 동남아 4개국을 순방하며 해외견문을 넓혔다.

이 해외연수에 참가한 견학 단원은 다음과 같다.

김영호(국문과 3년), 김선옥(영문 3년), 최예지(무용과 2년), 이근화(경영과 2년), 김진환(경영과 2년), 배기성(영문과 2년), 장동우(사학과 2년), 문경숙(생미과 2년), 정경애(무용과 2 년) 등 9명으로 구성되었다. 이에 앞서 영문학과 3년 호진규도 한국문예협회 주최로 가진 대학생 해외연수단의 일원으로 중동 지역을 견학하고 돌아왔다.

3) 종합관 신축 교사 준공과 대학미전 수상

이해 12월 29일 1년간의 공사끝에 종합관 신축 교사 준공식을 가졌다

이 신축 교사는 지하 2 층, 지상 5층 연건평 1 ,772 평 철근 큰크리트 교사로서 중강당을 비롯해 교수 연구실 및 일반 교실로서 사용키로 하였다 한펀 문교부 주최 제 11 회 전국대학미전에서 본교 생활미술학과는 동양화, 서양화, 디자인, 공예부분 등 4 개 부분에서 많은 입상자를 내어, 대학 미술관계 인사들을 놀라게 하였다.

하인두(서양화), 정하경(동양화) 두 교수의 열성어린 지도 아래 본교 생활미술과는 개교 이래 가장 큰 성과를 거둔 미전이기도 하다.

각 부분별 입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동양화 부분 특선

조연영, 김경해, 신순희

O 서양화 부분 특선

정화주, 김인숙, 전경숙。디자인 부분

이명아, 구천회

공예부분 특선

남윤선

4) 안보서클 우수교 선정

1982년 3월 바우회(회장 : 김양태, 일명 안보문제연구회)가 한국반공연맹 산하 130개 대학 서클 중 우수교의 하나로 선정되고, 동서클 지도교수인 연정열 교수(경영학과)가 전국대학 반공서클 초대 총책임 지도교수로 선임되어 88년 12월 31일까지 통직에 연임되었다. 연정열 교수는 그해 12월 한국반공연맹 이사장으로부터 15년 간 지도교수를 맡아 온 공로로 공로감사패를 받았다.

한편 바우회는 82년부터 88년까지 전국대학 반공서클 임원교로 연임하였으며, 특히 바우회장을 지낸 김양태 군은 본교 무역학과를 졸업한 후 아시아 반공청년회 부회장에 선임되어, 아시아 반공국가 청년들에게 본교 홍보에 기여한 바 컸다.

제2장 발전기(1981-1984)

제1절 안호싱- 박사 이사장 취임과 교육환경 개선

1) 제9대 이 사장에 안호상 박사 취임

1981 년 11 월 안호상(꽃쉰 tl~l) 박사가 제 9 대 한성학원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안박사의 이사장 취임은 여러면에서 의미가 있었다 안박사는 대한민국 건국 초대 문교장관을 역임한 한국 교육계 원로일 뿐 아니라 남달리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분으로 한민족의 고유한 역사와 사상 및 정신을 선양하는 국민정신운동을 전개하여 뜻있는 사람들로 부터 존경을 받고 있던 사회 원로의 한분이었다. 이같이 사회적으로 명망 있고 지명도가 높은 분을 이사장으로 모시게 된 것은 한성학원으로서는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안 박사가 본학원의 이사장에 취임하게 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한성학원과 안 박사와는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것이다 즉 한성학원의 설립자이신 우촌 김의형 박사와 안 박사는 오랜 지우로서 마치 의형제와 같은 막연한 관계였다 다시 말해 안 박사가 초대 문교부 장관으로 있던 시절부터 우촌 선생과 절친한 교우관계를 맺어온 남다른 관계였다.

이러한 인연으로 한성여중고를 창립할 때는 물론 장관직에서 물러난 후 한성대학 설립 때도 직간접으로 안 박사의 도움이 컷던 것이다. 1972 년 대학 인가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민관식 장관에게 한성대학 설립을 가능토록 조언해 준 분이 다름 아닌 안 박사였다. 이러한 인연을 생각할 때 벌써 전부터 안 박사는 한성학원과 직접적인 인연을 맺을만 했으나 그동안 다망한 가운데 있어 모시지 못하다 이제사안 박사를 9대 이사장으로 초빙하여 한성학원의 제 2 의 발전의 계기를 삼으려 했으며 안 박사 또한 이와 같은 제의를 흔쾌히 받아 들여 1981 년 11 월 이사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2) 종합관 신축 등 대학발전 기틀 마련

9대 이사장으로 안 박사가 취임한 후 학원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한성학원은 우선 그해 그 동안 숙원사업의 하나였던 대학 건물 한 동(짜)을 신축하였다. 1980 년 말에 착공하여 만 1년만인 1981년 12월 29일 준공식을 가진 이 건물은 중고등학교 맞은 편에 세워졌다. 지하 2층 지상 5층에 연건평 1,772평에 달하는 이 신축 건물의 완공으로 공간 부족을 해소하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이 신축교사에는 지하 1, 2층을 교수연구실로 그리고 3, 4층을 강의실로 그리고 5층은 실내 체육관으로 꾸며지는 등 다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이 건물명을 종합관이라 명명하였다. 그러나 후술하는 바와 같이 중고등학교 교사와 대학 캠퍼스를 상호 이전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에는 중학교 교사로 사용되고 았다.

한편 한성학원 재단은 당진의 농장을 개발하여 재단수입금을 마련하는 사업도 이 시기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충남 당진에 위치한 한성학원 재단 소유의 염전을 농지로 전환시키는 사업을 단행했던

것이다. 이 사업을 위해 한성농장 종합개발공사를 발족시켰으며 이를 통해 한성학원은 매년 일정한 재정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농장 개발 이후 여기서 생산된 쌀 일부를 전직원들에게 주기도 했으며 이를 시중 가격보다 싼 값으로 공급해 주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 학원 분위기를 안정시켰으며 한성학원 가족으로 서의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이같은 분위기 변화는 1981 년 3 월 신학기를 맞이하며 아래와 같은 보직개편을 단행한 사실에서도 그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개편된 보직과 책임자 명단은 아래와 같다.

교무처장: 연정열 교수

학생처장: 신은숙 교수

사무처장: 김범주 교수

도서 핀-장: 김복길 교수(유임)

학보사주간: 윤경로 교수

경영학과장: 최명규 교수

경제학과장 한창호 교수

도서관학과장:조점환 교수기타학과=장 유임

3) 제6대 학도호국단의 결성과 활발한 학생회 활동

1981 년에 결성된 제 6 대 학도호국단은 우선 남학생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는 특정을 갖고 있다 이전까지 야간 학생이 다수였으며 여학생이 대부분이었으나 1981 년부터 대부분의 학과들이 주간화 되면서 남학생 수가 대거 늘어났던 것이다 말하자면 과거 한성여대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주간 남자대학으로서의 위상을 찾아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학생회 즉 학도호국단의 활동은 전에 보다 훨씬 활기

찾으며 역동적이었다. 매년 5 월에 개최되는 체육대회에 학생들의 참여도가 높아졌으며 교수, 교직원의 참여도 전과 달리 적극적으로 참여해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을 보였다. 제 6 대 학도호국단 임원으로 활동한 주요 임원명단은 아래와 같다.

총학생회장 : 호진규(영문학과 4년)

총부학생장 : 문교승(무역학과 4년)

총무부장 : 이승각(경 영 학과 4년)

문예부장 : 박혜영(국문학과 4년)

새마을부장 : 이명아(생미학과 4년)

지도부장 : 박찬암(경영학과 4년)

체육부장 : 조영애(무용학과 4년)

훈련부장 : 김해룡(무역학과 4 년)

여학생 부장 : 전광의 (의 상학과 4 년)

한편 이 시기 학과에 따라 혹은 학생 써클의 대외적인 활약과 활동도 눈에 띠게 활발하였다 말하자면 한성대학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홍보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일들이 적지 않았다 우선 그해 문교부 주최 제 11 회 전국대학 미전에서 본교 생활미술학과 학생들이 대거 입상하는 개가를 올렸다. 즉 동양화과, 서양화과, 디자인, 공예부분 등 4개부분에서 특선과 입선을 했던 것이다 하인두(서양화), 정하경(동양화) 교수 등의 지도하에 출품하여 입상한 부분별 입상자 명단을 보면 아래와 같다.

동양화 부분 특선 : 조연영, 김경혜, 신순희

서양화 부분 특선 : 정화주, 김인숙, 전경숙

디자인 부분 입선 : 이명화, 구천회

공예 부분 특선 : 남윤선

문교부 주관하에 학생들이 최초로 해외연수를 떠난 것도 해에 있다. 1981 년 2월 동계빙-학 기간 이석주 교수(국어국문학과) 인솔하에 김영호(국어국문학과 3 년)를 비롯한 각과의 대표 9 명을 선발하여 필리핀, 자유중국(대만), 태국, 일본 등 동남아 4개국을 돌아보는 해외연수가 있었다. 우리와 지역적으로 인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생활 수준이 비슷한 동남아 지역을 돌아봄으로써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다 객관적으로 보는 안목을 키우는 한편 해외 견문을 넓힐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으나 정치적 목적이 없지 않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전혀 없지도 않았다 아무튼 이러한 일련의 변화와 함께 전국적인 학생회 대표적 안보써클의 하나였던 한성대 바우회(회장 김양태)의 활익-도 활발하였다 떤정열 교수(경영학과)의 지도하에 있던 이 써클은 연교수가 전국대학 빈-공써클 총책임 지도교수로 오랫동안 재임하면서 이 한성대 바우회 써클을 전국 1307R 대학 써클 가운데 가장 우

수한 단체로 키워 전국 우수써클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한편 1981년말 김옥형 학장이 개인 사정으로 사임하게 되자 그 해 9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안호상 이사장은 전체교수회를 회집하고 연정열 교수를 학장 직무대리에 임명하였다. 이에 따라 연정열 교수는 1982 학년도 입시 업무를 관장하는 등 과도기 행정책임을 맡아보다가 1982 년 3월 새로 취임한 강병규 학장에게 업무를 인계하였다.

이렇듯 1980년대 초기 정치사회적 요인 등으로 다소의 혼미가 없지 않았으나 안호상 박사의 이사장 취임과 강병규 박사의 학장 취임을 전기로 한성대학은 점차 안정을 찾고 새로운 발전을 향해 나아갔다.

제2절 4대 강병규 학장 부임과 학사행정 개혁

1) 강병규 박사 4 대 학장 부임

1982 년 2월 19 일 제 4 대 학장으로 강병규(姜秉奎) 박사가 취임하면서 한성대학은 발전기(發展期)를 맞게 된다 다양한 정치적 경력을 가진 교수 출신의 강 학장은 학장 취임식에서 장문의 취임사를 통해 향후 정보화시대에 부응한 미래지향적 대학과 대학 문화 창달의 산실로써의 면모를 갖춘 획기적인 한성대학의 장 · 단기적인 발전 계획과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의욕을 보였다.

강병규 학장은 그의 취임사에서 “새로운 대학상(大學像)의 정립(鼎立)"을 아래와 같이 정의하며 향후 발전기를 맞이한 한성대학이 지향해야 할 바를 아래와 같이 천명하였다.

무릇 대학은 진리(쉴뺑)의 전당(股파)이요 교육과 학문연구의 공동광장(핏同많場)인 바 민족의 발전과 함께 대학 또한 무한히 발전되어야만 하는 본질적 속성(木質的周性)을 가지고 있으니 본인은 오늘을 기하여 한성대학의 새로운 출발, 즉

발전에의 도약을 다짐하고자 합니다. (중략) 현대의 대학교육은 고대대학(피代大웰)과 같이 사서삼경 (I꾀많三經式) 대학이어서는 아니되며 추상적(fill 찢的) 역사철학적(歷史챔텔的) 대학이념(大젤팬念)에만 구애(해 6당)될 수 없습니다. 또한 현대의 대학기능은 근대대학(近代大學)처럼 무한한 학문의 자유만 고창(칩웹)할 수 없으며 민주주의 개념과 혼동되는 지도자만을 양성하는 기관에 그쳐서는 안되겠습니다. 즉 현대의 사회적 변천과 역사적 조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면 현대산업사회에 적합한 대학의 기능이 발휘되어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원적 사회기능(多7[; 的社평樣能)과 직업주의적(l때業쿄義的), 실용주의적(꽃씨主設的) 대학으로 개혁되어야 할 줄 압니다. 그리하여 대학의 본질인 진리탐구(펴페探究)와 창조 및 학생의 교육과 함께 대학이 지니는 모든 역량을 집약하여 국가발전에 공헌하는 사회봉사적 기능을 다할 때 비로소 대학이 고려(텀파) 충숙왕(忠패王) 교령(敎令)이 말하는 ‘학교풍회지원(젤校風化之폈)’이 되고 조선(폐빡폐) 유학(짜웰)이 말하는 사회의 ‘수선지지(띄헬之地)’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성대학은 사회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여 왔습니다만 앞으로 더욱 더 사회봉사 기능을 확충하는 것이 새로운 대학상을 정립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상의 취임사 내용에서 보듯 강 학장은 급변하는 현대사회에 부응한 대학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현대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다원적 사회기능과 직업주의적이며 실용주의적인 대학’으로 키워나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으며 이같은 대학의 사회기능적 능력을 고양하고 확충시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실천목표로 삼을 것을 밝혔다.

첫째, 새로운 대학전통의 수립과 창조

둘째, 학문연구체제의 정버

셋째, 면학의 기틀과 학풍의 진작

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편 당시 우리 대학의 현실적인 열악한 조건과 환경을 빠른 시간에 극복하면서 일정한 수준의 대학으로 진입하기 위한 단기적인 대학발전 방안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아래와 같이 제시하기도 하였

다.

일빈적으로 말씀드려샤 대혁이 성장하는데 백년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오늘날 구미 선진(!沙꽃允바) 각국(各l맺D 대혁이나 기타 세제의 유수한 대학은 그러한 정구한 시간에 부단힌 노력과 전통의 축적을 통하여 세제적 대학상(大댈찢)을 정립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발전의 속도외 평행해서 대학 또한 그 딸전사(發展셋)를 단축시키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와 사회적 기대 및 민족적 여밍 이 상승작용(上1i '{fm) 을 하여 국가적 필요에 부응하고 있습니 다.

그러힌 뜻에서 한성대학은 그 동안의 시간을 기반 조성을 위한 준비 기간으로 생각하고 이제부터 모든 대학 가족이 합심단결하여 비약적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면 그 숭고한 목표는 달성되리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말하자면 한성대학의 역사가 비록 일천하지만 지난 10년 간 쌓아 올린 기초를 토대로 삼아 한성인 모두의 의지를 결집하여 자신의 재임 기간에 한성대학 발전의 도약기를 마련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

명하였던 것이다 이날 장시간에 걸쳐 계속된 강 학장의 취임식은 그의 의욕과 패기에 찬 취임사로 식장에 참석한 교직원과 하객들을 고무시켰는데 그 가운데서도 향후 한성대학의 ‘비약적 발전’을 위한 다음과 같은 실천방안을 제시하는 대목에서 더욱 그러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한국의 유수한 대학으로 발전시켜 새로운 대학상(大學갔)을 확립한다.

학생정원의 증원 및 전문학과의 증과, 대학원설치, 전문연구소 운영

둘째, 학문연구의 생산체제를 재정비 · 확립한다

학문 자유의 보장, 교수 우선의 학사행정 전개, 연구기금 조

성 및 연구비 지급 확대, 논문집 편찬 활성화, 교수의 각종학 · 예술단체 가입 권장

셋째, 대학문화(大學文化)의 창달(성IJ 迷)에 힘쓴다.

‘문화창조계획(文化創造즘1- 필~)’을 수립하여 이를 매학기마다 시행, 축적 연구비 및 학생 장학금 확충, 올림픽 대비 교내 체육부(將育꼼I~) 강화, 학생후생시설 확충 및 해외연수 · 유학기회 확대, 교사정비와 교구, 교재 확보

넷째, 특색 있는 대학으로 육성 · 발전시킨다.

전일제(할더制) 수업을 통한 평생교육과 전인교육의 시행, 산학협동 체제의 강화, 지역개발 공개강좌 및 문화센터 개설 등 성인대학적(成人大學|페) 특성을 활성화함으로써 대학의 사회봉사기능을 강화함.

다섯째, 국제적 교류사업을 적극 추진한다

외국의 대학과 자매결연 추진, 교수 · 학생의 해외연수기회 확대, 국제적 대학 예술대회(첼術大향) 참가 및 개최를 적극 추진

끝으로 그는 이상에서 제시한 대학발전 벙-안을 실천화하기 위해 재단, 대학, 동창회 3자로 ‘대학발전협의회’를 구성하여 추진할 것을 제안하는 등 강 학장은 취임식에서 매우 의욕적인 태도와 자신에 찬모습을 한성인들에게 심어주었다. 이어 그는 자신이 제시한 일련의 대학발전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전면적인 인사 개편을 1982년 2월 22일자로 아래와 같이 단행하였다.

교무처장 : 정하경 교수(미술학과)

학생처장 : 김계욱 교수(교양학과)

사무처장:이승록

도서관장 연정열 교수(경영학과)

학과장 개편

국어국문학과 : 정연길 교수

영어영문학과 : 박양구 교수

사학과 : 지배선 교수

경영학과 : 연정열 교수

무역학과 : 김평광 교수경제학과 : 최명규 교수

행정학과 : 이창신 교수

도서관학과 : 이용남 교수의상학과 : 이남희 교수

미술학과 : 하인두 교수

무용과 : 김경자 교수

2) 대학 발전 종합화 계획과 학사행정 개혁

(1) 한성대학 종합화 계획 발표

강 학장의 취임사에서 제시되었던 대학발전협의회는 바로 구성되어 1982 년 4월 2 일 ‘한성대학 종합화 계획’을 발표하게 되는데, 그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은 것이었다.

첫째, 교육환경 개선을 위해 재단과의 지속적인 협조체제 유지

둘째, 1983 년 R. O.T.e 설치를 위해 해당부처와 적극 협의

셋째, 대학의 대외홍보를 위한 홍보지 발간

넷째, 교과과정 개선을 위한 교과과정 추진위원회 설치

다섯째, 국가인력 수급상황에 따른 적정학과 증과 · 증원에 총력

여섯째, 향후 3 . 4년 내에 획기적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구체적 사업계획 마련

이상의 계획안은 그동안 한성인 모두가 바라고 있던 주요 숙원사

업들을 망라한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대학의 규모와 그간의 대학운영의 정황 등을 감안할 때 대학체제의 정비 및 계획적이고도 예측 가능한 대학운영에 관한 청사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계획안은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2) 학사행정체제의 정비

한편, 학사행정의 개혁과 대학행정기구의 대폭적인 정비 그리고 대학운영과 관리 전반을 관장할 기구로서 지금까지 없었던 기획실을 대학의 주요 부서의 하나로 신설하였다.

1982 년 4월 기획과와 예산관리과로 구성된 기획실(초대 실장 : 손영일)은 우선 대학요람 및 영문요람 등을 처음으로 발간했으며 이를 각 대학과 관계 요로에 배포함으로써 대학홍보의 효과를 높이기도 했다. 또한 대학조직이 갖추어야할 제규정을 제정 · 배부함으로써 각 행정부서의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아울러, 정보화 시대에 부응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1983 년 10

월 25일 컴퓨터실을 설치하였으며 이어 이를 좀더 발전시켜 1984년 4월 정보전산연구원(초대 소장 : 이우범 교수)을 개원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모체가 되어 현재 전자계산소(1 989 년 설립)로 확대 발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기구 개편과 확대 작업이 이후 한성대학의 분위기를 일신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음은 물론이다. 우선 대학행정윤 정비· 확대함으로써 보다 적극적이고도 창의적인 대학행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교무처는 교과과정추진위원회와 함께 합리적인 교과과정의 개발을 위한 실무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의 개발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82 년 6월 7 일 무용학과 · 경영학과 학생 49 명에 한해 처음으로 교생실습을 실시한 이래 ’ 83 학년도 신학기부터 전 학과에 걸쳐

교직과정을 확대 개설하고 실습대상 중 · 고 교장을 초빙하여 간담회 등을 개최하여 대학홍보는 물론 학생들의 졸업 후 사회 진출의 활로를 마련해 주는 등 적지 않은 노력과 관심을 기울였다.

이같은 졸업 후 학생들의 진로 모색과 취업 알선을 위한 노력은 학생처에서도 시도되었다 우선 학생처는 이 시기 장학제도의 보다 함리적인 개선책을 마련하는 한편 외부 장학금의 적극적인 유치노력을 통해 수혜의 폭을 확대하는 등 학생 복지를 위해 제반 노력과 조치를 취했다.

이밖에도 전일제 수업에 따라 증원된 주간학생의 부직알선 및 졸업 후의 취업 강구를 위해 1984 년 2월 22 일 “취업대책위원회(위원장 : 한창호 교수)"를 구성 · 운영함으로써 학생들의 부업 및 취업알선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 “취업대책위원회”는 현재 “취업보도실”로 상설기구화하여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학생 복지

행정을 전개하고 있다.

한편, 당시 대학의 규모상 영세성을 면치 못했던 중앙도서관은 장서 확보 및 열람실의 확장에 지속적인 노력을 전개함으로써 대학내연구 기능의 산실로 자리잡을 수 있는 초석이 마련된 것도 이 시기였다. 특히, 1982 년 6월 10 일 -7 월 10 일까지 “도서수집운동”을 전개하여 대학 내 모든 구성원들에게 중앙도서관의 발전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는 효과와 함께 5 ,081 권에 달하는 도서를 수집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 “도서수집운동” 기간에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께서도 3 차에 걸쳐 소장도서를 기증하였는데 도서관측은 이 특별 기증도서를 한곳에 보관하였다가 우촌 선생께서 타계하신 후 고인의 뜻을 영원히 기르는 뜻에서 1983 년 4월 18 일 도서관내에 〈우촌문고>(友村文)훤)를 마련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학부제 운영과 인사개편

1983 년 2 월 18 일 단행된 학사개혁 조치로써, 학부제 운영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성격이 유사한 학과들을 분류해 4개의 학부를 두고 모든 학사행정을 학부 중심 운영체제로 전환하는 것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학부제 운영 방안은 당시 대학의 규모로 볼 때 매우 과감하고도 획기적인 조치였다. 이 때 단행된 학부제는 인문학부, 사회학부, 예술학부, 교양학부 등 4개학부로 나누어졌으며 각 학부에 소속된 학과와 학부장의 명단은 아래의 표와 같다.

학부 소속학과 초대학부장

인문학부 국어국문학과,영어영문학과,사학과 이동섭교수(사학)

사회학부 경영학과, 무역학과, 경제학과,

연정열교수(경영)

행정학과 ,도서관학괴

예술학부 미술학과, 무용과, 의싱학과 하인두교수(미술)

교영학부 교양과정 박양구교수(영문)

그러나 이상과 같은 학부제 도입은 처음부터 시기상조라는 일부 비판적 시각에서 이미 예견되었듯 운영상의 미숙과 기구 확대에 따른 부수적인 조치들이 진행되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활성화되지 못한 채 유명무실화 되고 말았다. 지나친 의욕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하겠으나 한편 돌이켜 보면 이같은 학부제운영은 향후 종합대학체제로의 전환에 대비한 의지를 실천에 옮겨 보았다는 점에서 다소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펀, 이상과 같은 학부제 운영방침에 따른 효율적인 학사행정을 위하여 이-래와 같이 대폭적인 인사개편이 단행되었다.

교무처장 : 이용남 교수(도서관학과)

학생처장 최명규 교수(경영학과)

도서관장 : 정연길 교수(국어국문학과)

학과장 개편

곽아국문학과 : 이석주 교수

영어영문학과 · 조효진 교수

사 학 과 : 지배선 교수

경영학과 · 최송길 교수

무역학과 : 김용정 교수

경제학과 : 한창호 교수

행정학과 : 김범주 교수

도서관학과 : 이우범 교수

의상학과 : 이명희 교수

미술학과 : 강국진 교수

무용과 : 김경자 교수

교양과 : 김용석 교수

교직과 : 김양현 교수

학부제 운영과 더불어 이시기 단행된 학사운영제도의 개편 작업 중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학과 전용강의실제를 도입했다는 점이다. 이는 국내대학 중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제도로써 강의실의 효과적인 활용과 학과 운영의 효율성을 좀더 극대화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사회산업발전연구소의 제안으로 처음 행정학과에서 시도한 이 새로운 학과 전용강의실제는 원래 목적이 학부제 운영의

내실을 기하기 위한 보조기능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전학과로 확대 ·발전되어 갔다. 효율적인 시청각 교육과 풍부한 연구자료를 갖추고 세미나식 강의 및 개인별 · 그룹별 연구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 이 독특한 교육시스템은 당시 학내외적으로 많은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이러한 교육환경의 개선은 자연히 각 학과별 연구활동을 활성화 시켰으며 그에 따른 연구성과물로 학과마다 논문집이 발간되기 시작하였다. 즉 1982 년 국어국문학과의 「演城語文學J , 사학과의 「演城양學J , 경영학과의 r 經營論集J , 미술학과의 「팽城美術」등 학과 논문집창간호가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교육환경개선이 가져다 준 구체적인 결실이자 산물이었다. 이로서 한성대학은 진리와 학문을 탐구하고 연구하는 대학 본래의 모습과 위상을 정립해 나가는 도약의 단계로 진입하였다.

3) 각종 대학발전위원회 구성과 대학 부설연구소 설립

(1) 대학발전을 위한 각종 위원회 신설

이같은 계획안은 대학내 기구 확장과 신설 및 개편 등의 작업으로 시작되었다

우선 주요사업별로 각종 위원회를 구성하여 연구 · 심의토록 하였는데, 1982 년 4 월 7 일 각과 학괴장을 위원으로 하는 교과과정추진 위원회를 비롯하여 아래와 같은 각종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위원회명 발족연월일 위원 구성 목적

연구소설립 추진 위원회 1982. 5. 6 이창신교수(행정),김길평교수(경영),정연길교수(국문),김중렬 교수(국문),하인두교수(미술),김숙자교수(무용)

학문연구지원 체제의 확립 및 대학문화의 창달에 기여

기획위원회 " 정연선교수(행정),조효진교수(영문),윤석효교수(사학),최해주교수(의상),이정숙교수(국문) 학시행정개혁 및 학교발전 계획 심의

대학요람편찬위원회 " 이석주교수(국문),강국진교수 대학요람 및 홍보책자 편찬

영문요람 편찬 위원회 " 박양구교수,고정자교수,김용석교수,조효진교수(이상 영문과) 해외 홍보용 요람편찬

위원회명 발족연·월일 위원 구성 목적

대학문화육성 심의 위원회

1982. 9. 17

위원장 . 강병규 학장

학술분과 : 김중렬교수(위원장),이정숙교수(국문),박양구, 고정자,김용석,조효진교수(이상 영문과), 지배선,강병식교수(이상 사학과), 이창신교수(행정) 술분과 : 강국진교수(위원장),김숙자,김경자교수(이상 무용과),이남희,이명희 ,최해주

교수(이상 의상학과),강은석수(교양) 출판분과 : 김길평교수(위원장),이동섭교수(사학),이용남교수(도서관), 이석주교수(국문),최송길교수(경영),김평광,김원중,김용정교수(이상무역) 사회·교육분과·김범주교수(위원장),윤석효, 윤경로교수(이상 사학과),조점 환교수(교양),한창호교수(경제),신은숙,김양현교수(이상 교직과)

대학문화 육성 방향 수립 및 심의·조정

표에서 보듯 당시 전임교수 전원이 참여해 ‘연구소설립추진위원회’를 비롯한 ‘기획위원회’, ‘대학요람편찬위원회’, ‘영문요람편찬위원회’, ‘대학문화육성 심의위원회’ 등 5 개 위원회의 구성은 과거에 없었던 획기적 조치였다.

새로 구성된 위원회는 기존의 각 위원회와 같은 심의 · 자문기구가 아닌 대학체제의 개헥을 목표로 하는 조사 · 연구기구로서의 한시적 (I싸빠 IYJ) 성격이 깅-한 것으로 그 활동이 의욕적으로 진행되었다.

(2) 부설 연구소의 설립과 활동

1982 년 6월 l 일 한성대학의 제반 여건을 종합 분석한 결과를 토

대로 본 대학의 실정에 맞는 이·래와 같은 4 개의 대학 부설연구소를 개설하였다. 대학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기능의 하나가 전문 분야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기능에 있다는 점에 유념할 때 다소 때늦은 감도 없지 않았으나 아무튼 이 때 한성대학 산하에 전문적인 연구기관이 탄생되었다는 것은 ‘연구하는 대학’, ‘공부하는 대학’으로서 의 대학 이미지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기억될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래의 표에서 보듯 이때 설립된 연구소는 민족사상연구소, 사회산업발전연구소, 한국전통문화예술연구소, 학생생활지도연구소 등 4개 연구소가 문을 열었으며 연구소의 특정과 성격에 따라 이 분야 전공교수들을 전임연구원으로 위촉하였다.

4개 부설연구소명과 연구원 및 설립취지

연구소명 연구원 설립취지

민족사상연구소

고문:안호상 박사(본교 이사장) 한국고유의 사상연구 및 관련있는 외국사상 상임 연구원:김중렬교수(국문),지배선,윤석효교수(이상 사학)

의 연구를 통해 한국 전통사상을 체계화

사회산업발전연구소

상임연구원:정연선교수(행정), 김길평교수(경영), 김평광교수(무역), 김원중교수(무역)

사회산업발전 및 과학분야의 전반적인 이론과 실체를 연구하여 국제문화 교류에 기여

한국전통예술연구소

상임연구원: 정하경,강국진교수(이상 미술), 김숙자,김경자교수(이상 무용)

한국전통예술의 발굴,연구를 통한 고유문화의 긍지 부여

학생생활지도연구소

상임연구원: 김계욱,강은석교수(교양),이석주교수(국문), 박양구교수(영문),김양현교수(교직),최해주교수(의상)

학생생활과 관련된 제반문제에 대한 지도,상담 및 정보 안내

이상의 4 개 연구소는 그동안 꾸준히 활동하면서 각종 학술세미나, 학술지 발간 등 활발한 연구활동 등을 통하여 학내의 중추적 연구기능으로 성장,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민족사상연구소’(초대 소장 : 정 연길 교수)는 1982년 10월 27일 창립기념강연회를 개최한 이래 매년 정기적인 강연회 · 학술세미나 개최 및 학술지 『민족문화(民族文化).!l 발간 등 인문과학 분야의 연구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1985 년 11 월 1 일 ‘민족사상연구소’는 연구활동의 효율화를 위하여 ‘한국전통예술연구소’와 통합, ‘민족문화연구소’로 새롭게 발족하였으며 현재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농기구와

생활도구를 상설 전시하고 있는 “전통생활시-전시관”을 연구소 산하에 두고 있다.

‘사회산업발전연구소’(초대 소장 : 이창신 교수)는 1982 년 6월 16일 창립기념사업으로 미국 스텐포드대학의 Richard. B. Foster 교수를 초빙하여 한국일보 대강의실에서 각계 인사들과 학생, 교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강대국의 동북아시아 전략 전망”이라는 주제로 대규모의 성대한 강연회를 개최한 바 있다. 그후 제 2 대 연구소장으로 취임한 정연선 교수(행정과)에 의해 보다 연구소로서의 체제가 정비되었다. 1983 년 3 월 31 일 ‘사회산업연구소’로 개칭하는 한편 각 전문분야별로 연구책임 교수제를 도입, 명실상부한 전문적인 연구소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다 이 때 개편, 확대된 사회산업연구소의 연구분야와 연구책임자를 정리해 본 것이 아래의 표와 같다.

사회산업연구소 분야별 연구실 명칭과 연구자 명단

연구분야 연구책임자 연구분야 연구책임자

경앙문제연구실 최명규교수(경영) 교육문제연구실 김양현교수(교직)

경제문제연구실 한창호교수(경제) 공산권문제연구실 홍봉춘교수(무역)

무역문제연구실 강석중교수(무역) 현대시장연구실 조정환교수(교양)

정보문제연구실 이우범교수(도서) 국제문화연구실 허광일교수(영문)

댐촬문제연구실 김범주교수(행정)

위와 같은 9개의 전문 연구설의 연구활동을 중심으로 정기적인 학술세미나 개최 및 학술지 『사회과학논집』발간 등 지속적인 활동을 해오고 있다.

한국전통예술연구소 (초대 소장 : 하언두 교수)는 1982년 11월 4일

창립기념강연회 개최 이후 국내 대학에서는 유일한 성격의 연구기관으로 독보적인 활동을 전개하던 중 연구활동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하여 ‘민족사상연구소’와 통합하여 ‘민족문화연구소’로 그 맥을 잇고 있다.

‘학생생활지도연구소’ 역시 단순한 학생지도 및 상담활동에 국한하지 않고 정기적인 학생의식 실태조사, 학생생활관계 학술지 발간, 세미나 개최 등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대학생활 및 졸업 후 사회생활에 대한 각종 정보를 제공해 온 이 연구소는 현재 그 명칭을 ‘학생생활연구소’로 개칭하여 보다 활발한 연구활동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

4) 국제문화교류의 시도와 대학 이미지 구축

이밖에도 이 시기 대학발전을 위해 추진된 또 하나의 괄목할만한 일로서 우리는 국외 대학과의 국제교류를 시도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83 년 1 월 12 일 본 대학은 국제문화교류의 일환으로 자유중국(딩돼r:I::J國• 꿇灣) 명전대학(銘傳大學)과 자매결연식을 가졌다. 이 나라 자유중국 대사 및 교육부장(문교부장관)이 배석한 가운데 갖게 된 이 조인식은 본대학이 외국대학과 맺는 최초의 자매결연사업이었으며 이를 통해 한성대학의 위상과 지평을 국제무대로까지 펼쳐 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1983 년 5 월 13 일 명전대학(싫함大學)의 이응조(李應~t) 이사장과 포덕명(셈德明) 학장 등 일행 4명이 강병규 학장의 초청으로 본대학을 방문함으로써 향후 한성대학과 자유중국, 명전대학 사이에 구체적인 교류 협력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그 가운데 교수 · 학생의 상호교환, 한중문화교류 및 공동연구 등을 추진할 것에 합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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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명전대학과의 자매결연을 통하여 학문의 국제화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한편 이처럼 국제교류의 추진과 학내 체제정비가 급진에 됨에 따라 자연히 한성대학을 대내외적으로 알리고 홍보하는데 긴요한 대학 상징불 제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기획실 주관하에 “상징불 제정 사업”이 계획되었고 이 작업을 위해 강국진 교수(미술과) 등이 증심이 되어 “상징물제정 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교직원, 학생

동창회 등 폭넓은 의견 수렴 과정을 통해 1 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1983 년 9월 26 일 개교 10주년을 기념하여 대학 상징물로서 “거북이”를 선정, 완성된 거북이 상징 도안물을 발표했으며 동시에 ‘삼학송’을 한성대학의 교목(校木)으로 선정하였다.

학생설문조사 및 전문위원의 연구를 토대로 제정된 상징물 “거북이”는 꾸준한 노력과 쉽없는 전진을 상징하며, 교목으로 선정된 “삼학송”은 본 대학 정문 앞에 마치 우리 대학의 수호목(守護木) 모양 우뚝 서있어 한성인 모두로부터 늘 사랑을 받아왔다.

또한 소나무의 변치 않는 푸르름은 대학의 청년성을 상질할 뿐만 아니라 우리 대학과 같은 ‘신생 대학’의 미래를 기약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독립된 세개의 소나무가 하나로 이루어

져 하나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 모습이 마치 대학을 형성하고 있는 학생, 교수, 재단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상징하는 의미까지 있어 그 의미를 한층 더해주고 있다.

이 시기 진행된 또 하나의 사업으로 우리는 대학발전을 위한 재정확보에도 다각적인 방안이 강구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83년 1월 20일 기공식을 가진 ‘한성농장종합개발공사(팽城農場縣合!뿔 l 發工댈)’는 재단과 학교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사업으로이 때추진되었다.

충남 당진군 (J휩뿐;那) 송산면(松111 때) 동곡리(폈션 ffi) 에 소재하고 있는 한성농장은 한성학원 설립자 김의형 박사께서 본 대학 발전을 위해 희사하신 것으로서 본래는 염전(팽|꾀)이었으나 1979년 10월 26일 정부의 농경지확장사업의 일환으로 삽교천 완성과 동시였다.

이 농장은 5개년 계획으로 총면적 145 , 852 평의 기계영농에 의한 농작물재배 및 축산영농을 병행할 수 있는 복합영농단지로서 보다 유용한 대학의 수입사업체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

한성학원의 수입사업원인 한성농장

이밖에도 1983년 10월 4일에는 개교 1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그간 학생들의 숙원이었던 학생복지관이 착공되어 1년여의 공사끝에 1984년 9월 5일 완공되 었다. 지상 4층 건물에 연건평 1350평으로 학생들윤 위한 각종 복지시설과 학생회 써클실, 학보사, 서점, 그리고 학생처 등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 상에 서 보듯 1982-1983년 사이 한성 대학은 대 학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환경과 여건을 일정하게 조성한, 다시 말해 대학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도약의 시기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시기 대학사회에 일기 시작한 이른바 스투던트 파우워 (student power) 의 세찬 불결과 설상가상(雪上JJIl 칩)으로 한성학원의 설립자이자 본 대학의 초대 학장을 역임하신 우촌 김의형 박사의 서거로 인해 한동안 시련의

늪에 빠지는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였다.

제 3 절 김의형 박사 서거와 캠퍼스 이전 계획 확정

1) 한국 사학계의 ‘큰별’ 우촌 선생 서거

1983 년 3 월 1 일 설립자로서 한성학원의 큰 기퉁이셨던 우촌(友村)김의형(金談術) 박사께서 향년 79 세를 일기로 타계(他헤)하셨다. 시대의 격랑을 헤치며 일평생을 교육이라는 지난하고도 고독한 외길을 걸어오신 한성인의 영원한 스승 우촌 김의형 박사, 그의 서거 소식은 전 한성인(딸짧城人)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가져다 주었다. 장례는 1983 년 3 월 4 일 한성여고 교정에서 한성학원장(팩城學l펀첼)으로 엄숙히 거행되었다. 한성학원의 전 교직원을 대표하여 조사를 봉정한 연

정열 교수의 아래와 같은 조사에서 당시 전 한성인들이 받은 충격과 우촌 선생을 떠나보내는 슬픈 심정의 일단이 잘 표현되어 있다.

“한성대학의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님의 서거를 당하여 온 한성 가족은 이 청천벽력과 같은 부음의 슬픔으로 앞이 캄캄합니다. 한 평생을 교육사업으로 조국광복(피 [1 隊!光t찌)과 영재교육(핏씨펴成)으로 근세 한국문화 창달에 위업을 남기신 우촌김의형 빅사님은 낙산 기숨에 우리 한성 학원을 세우시어 중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와 최고학부인 대학까지 진리탐구의 전당을 마련해 주셨읍니다, 우리 한성학원 산하 각 학교 교직원들은 박사님의 건학정신을 받들어 앞날 이 나라의 주인공이 될 청소년 학생 지도에 긍지와 사명감을 갖고 맡은 바 직무에 보람을 가져 왔읍니다.

그런데 박사님이 우리를 떠나서 타계 하시다니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고 이 막중한 박사님이 한 평생 이루어 놓으신 사업을 이끌어 나갈 것인지 핍답할 뿐입니다,

박사님은 우리 교육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체육계에 남기신 그 엽적 역시 크시어 대한체육교육회(大꾀鼎育줬펀템) 회장으로서 대한 올림픽 위원회 이사(.f! I! 빔)

로서 스포츠를 통한 대내외(힘內外)에 큰 엽적을 넘기셨습니다.

박사님은 생전애 일본으로부터 조국광복을 찾았으니 더 큰 소원은 없다고 하셨읍니다. 빅사님의 그같은 심정은 그 가신닐도 일제(티 1따)의 임-박으로부터 독립을 되찾기 위하여 온 겨레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3 . 1 절 기념일이라는 것은 우연의 일치반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 교육계와 체육제의 거성 (12 렐)이 떨어지니 하늘도 슬퍼 빅사님의 서거(迎1~) 와 떼릎 같이하여 언 이틀 조용히 비기 내렀읍니다.

우리 한성학원 각급 혁교 교직원들은 박사님 생전의 위업(f:'I~ 菜)을 돌이켜 보며 눈붙을 닦고 박사님의 위업을 더럽히지 않도록 온 힘을 기울여 맡은 바 직무에 충실힐 것을 빅시님 영전 앞에 굳게 다짐합니다. 이것이 박사님의 위업을 받드는 길임을 기슴 깊이 새기며 오는 봄과 함께 힌성학원의 힘찬 발전을 우리 온 한성 가족은 박사님 영전 앞에서 재차 다짐합니다.

빅시님! 비록 몸은 타계하셨지만 그 영혼은 항상 저희들에게 힘과 슬기를 주시어 저희뜰이 빗나가지 않고 정도GE 평)를 향해 쉬임없는 발전의 걸음을 걸을 수 있도콕 가르침을 주십시요.

빅시넘, 슬픔이 앞서 더 말을 이을 수 없습니다. 부디 평안히 눈을 감으십시요.

장례식에 참석한 3,000여 한성인은 위의 조사(뛰 E피) 내용처럼 큰 슬픔 속에서도 낙산 기숨 곳콧에 새겨진 고인 U& 人)의 위업({펴폈)과 건학정신(젤學淵폐)을 계승 발전시킬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2) 발전을 향한 진통과 캠퍼스 이전 계획 확정

1984년 신학기부터 전국대학에서 거세게 일고 있던 대학자율화의 바람은 각 대학마다 진통을 가져왔고 한성대학도 이 와중에 휩쓸리게 되었다. 1984년 3월 28일 -29 일 양일 간에 걸친 “대학발전을 위한 공청회”가 있었고, 학생들의 자율화 시위는 학업에도 큰 지장을 초래하였다.

이때 한성여자중 · 고등학교와 대학의 상호 이전을 골자로 하는 획기적인 한성대학 발전계획안이 제시되었다.

1984년 7월 4 일 강병규 학장은 4년간의 임기를 채우지 못한채 도중에 사임하게 되었다.

이 시기 교무처장이 이용남 교수(도서관학과)에서 김용석 교수(영문과)로, 다시 윤석효 교수(사학과)로 교체되었으며 학생처장도 김용석 교수에서 강은석 교수(교양,체육)와 한진만 교수로 바뀌었으며 사무처장도 최명규 교수(경영학과)에서 강석중 교수(무역학과)로 다시 김길평(경영학과) 교수로 교체되었고 기획실장 또한 강병식 교수(사학과)에서 김용정 교수(무역학과)로 바뀌는 등 한 해 통안에 보직 개편이 수차례 있었다.

한성여자중 · 고등학교, 한성대학 및 재단 관계자를 망라하여 구성된 교사이전추진위원회는 “교사이전 5 개년 계획”을 구체화하여 발표

하였는데, 그 주요내용은 아래와 같다.

l 차년도 (1985) : (l) 대학강의실(한성여고위치)및화장실 증축공사

(2) 대학강의실(한성여고위치) 목재 Flooring 철거후

Terrazzo 개축

(3) 종합기본 계획 확정

2 차년도(1 986) : (1) 한성 여 고 건물 대 학강의 동으로 완전 개 조(2) 대학강의실 및 종합관을 여중 · 고 건물로 개조

3 차년도(1 987)-5차년도(1989)

(l) 한성여중건물 철거 및 대학건물 신축공사

(2) 종합운동장 확보 및 학원부지의 효율적 재활용

이와 같은 계획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재단의 의욕적인 사업추진으로 예정보다 2년을 단축한 1987 년 8 월 대학 본관(우촌관)이

완공되면서 교사 이전(校깐修폐)의 대역사(太값바)를 완수하기에 이른다.

이상에서 보듯 제 4 대 강병규 학장 재임기간(1 982 ~ 1984) 은 대학을 성장 발전시키는데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대학 행정의 제도 정비와 기구 확대는 물론 향후 종합대학으로서의 비전을 바라 보며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발전기에 해딩-한다 하겠다.

제3장 성장기(1985-1990)

제1절 제5대 홍순태 학장 취임과 학생복지관 준공

1) 제5대 홍순태 학장 취임

1984년 9월 5일 신축된 학생회관 소강당에서 제 5대 학장으로 임명된 홍순태 학장의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난 홍순태 학장은 1943년 일본체육대학 사범과를 졸업하고, 1949년 육군사관학교 특별 871 로 입대 군복무를 마친 후 23년 동안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1984년 8월 정년을 맞게 되었다

그해 8월 재단 이사회의 인준을 받아 한성대학 제5대 학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50여년 간의 교육경력과 한국 체육문화발전에 혼신의 정열을 기울여 온 홍 학장의 취임식은 9월 5일 신축된 학생복지회관 소강당에서 거행되었다.

그는 취임사에서 국가와 인류사회발전에 필요한 학리 및 그 응용방법을 교수연구하여 지도적 인격을 도야함을 목적으로 하는 대학을

두고 말하기를 “대학은 학문과 진리팀구에 그 목적을 두고 이를 통한 창조적 연구로 인간생활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는 곳”이라 규정하고 “계속적이고도 신념 있는 교육의 개혁과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또 “앞으로의 학교 운영에는 본 대학의 설립자인 동시에 선배인 고 김의형 박시의 위업을 받들어 안으로는 내실화에 힘쓰며 밖으로는 한국 내의 명문대학으로 부상시키기 위한 알뜰하고도 충실한 성장을 기하고자 한다”고 포부를 밝혔다.

신임 홍순태 학장의 취임과 때를 같이하여 9 월 l 일자로 처장들의 인사개편이 있었다 12 월 14 일 개편된 인사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무처장 : 윤석효 교수 (사학과 신규)

시-무처장 : 김길평 교수 (경영학과 신규)

학생처장 : 강은석 교수 (교양학과 유임)

기획실장 : 김용정 교수 (무역학과 유임)

이어서 12 월 14 일에는 학생처장과 일부 연구소장 및 학과장의 인사개편이 단행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생처장 : 한진만 교수 (미술학과)

도서관장 : 홍봉춘 교수 (무역학과)

학보사 주간 : 이종수 교수 (행정학과)

민족문화연구소장 : 정연길 교수 (국어국문학과)

사회산업연구소장 : 최송길 교수 (경영학과)

영어영문학과장 : 김용석 교수

경영학과장 : 김원중 교수

행정학과장 겸 고시반 지도교수 : 황진수 교수

도서관학과장 : 이우범 교수

의상학과장 : 최해주 교수

미술학과장 : 정하경 교수

2) 학생복지회관 및 소강당 준공

소강당을 비롯하여 학생식당과 매점, 휴게실 등 학생들의 유일한. 휴식 공간이자 지식 재충전을 위한 도서관으로 건축된 학생복지회관이 9월 5일 완공되어 개관식을 가졌다.

1983년 4월 초에 착공 예정으로 되어 있었으나 허가상 문제 등으로 인하여 결국 본교 개교 12주년 기념일인 10월 5 일 착공식을 갖고 통년 12월 15일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학생회관

그동안 착공 지연으로 학생들의 원망과 빈축을 사기도 하였던 학생복지회관이 완공됨으로써 시설애 불편을 느껴왔던 학생들에게 후생복지시설로서의 편의를 제공하게 되었다.

이 건물은 당초에 지상 5층으로 설계하였으나 예산상의 부족으로 그 용도를 4층으로 변경, 완공을 보게 된 것이다.

본 복지회관은 연건평 총 1,348 평으로 층별 용도는 다음과 같다.

지하 - 교직원식당, 주방, 휴게실, 탈의실, 샤워실, 학생식당, 이용원,안경점

1층 - 학보사, 서점, 우체국, 의무실, 강당, 영사실, 학생처 2층 - 학생생활연구소, 총학생회장실, 여학생휴게실, 회의실, 학도호국단실, 학생장실, 도서관 연속간행물실, 정보검색실 3 층 - 도서관(도서관장실, 자료정리실, 참고열람실, 논문실, 특수자료실, 서고)

4총 - 도서관(일반열람실, 도서관 휴게실)

3) 각 위원회 통폐합

그 동안 복잡, 다원화하게 구성되어 왔던 각종 위원회들을 업무내용이 중복되거나 그 성격이 유사하다고 판단되는 위원회를 하나로 통합, 각 위원회의 업무 간소화는 물론 위원회의 실제적인 기능을 강화시키기 위한 작업이 11 월 l 일 확정 발표되었다.

이로써 기존의 21 개 위원회에서 147N 위원회로 통합조정되었다.

제2절 성장을 위한 진통

1984학년도 제 9회 학위 수여식이 1985 년 2 월 23 일 오후 2시 종합관 대강당에서 거행되었다. 금번 학위수여자는 11개학과 총 451명이며, 수석 졸업의 영예에는 사학과 신세준 군이 차지하였다.

그리고 1981 년에 신설된 도서관학과와 경제학과는 첫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다.

한편 1985 학년도 신입생 입학식이 2 월 25 일 2시에 대강당에서 거행되었다.

입학식에서 홍순태 학장은 “대학이란 인간으로서 독창적인 학문연

구를 지속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여 인간적으로 성숙하여 가는 곳이며 사회생활에 필요한 바탕을 마련하는 곳이며 자기 가치 확립 및 힘찬 정진에 대한 발판이 될 수 있는 곳으로서 질서를 중요시하며 차분히 스스로의 실력을 갈고 닦을 것”을 당부하였다.

한편 1985 학년도 신입생 입학 수석은 다음과 같다.

인문학부에는 영문학과(야간) 지원의 박동익 군이, 사회과학부에는 무역학과(야간) 지원의 박준련이, 예술학부에는 미술학과 지원의 유정일이 수석을 차지하였다.

1) 축구부 창단

예산 및 행정적 절차 등의 문제로 난항을 거듭해 오던 축구부가 1985 년 3 월 20 일 학생회관 소강당에서 창단식을 가졌다.

학생들이 모금해 온 체육진흥기금 8 백여 만원을 바탕으로 출범한 축구부는 홍순태 학장을 단장으로 감독에 김계욱 교수, 초대 코치에

는 정은식 선생을 초빙하여 4학년 3명, 3학년 6명, 2학년 5명 및 신입생 3명 등 총 14 명의 선수들로 구성되었다.

재학생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전국 대학 우승까지 이끌어 온 축구부의 정은식 코치는 가난한 살림을 힘들게 꾸려가고 있어 당장 큰 성괴를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앞으로 2~3 년 정도 강도 있는 훈련을 받고 나면 훌륭한 재목들로 성장할 것을 기대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호응도라고 강조하였다.

1986 년도 체육특기지-와 재학생 순수 아마추어선수로 구성하여 출범한 본교 축구부는 그동안 꾸준히 성장하여 ’ 89 년도에는 춘계대학연맹전에서 16강에 진출, 그 해 왕중왕 대회에서는 대학부 8 강에 오르는 선전을 보여왔다.

조선대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

당시 학생들의 단체 의식과 애교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활동을 모색, 창설된 축구부는 학교측과 학생회 나름대로의 지지로 빠른 속도로 성장하여 1991 년도에는 추계대학 축구연맹전에서 전국 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룩했다.

창단 5 년만에 얻은 이 우승의 영광은 감독과 선수, 그리고 축구에 대한 재학생들의 뜨거운 열의가 함께 한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축구부에서 배출한 영광의 주역들은 국가대표로 진출하는 등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1986 년 3 월 4 일 체육특기생 9 명, 일반재학생 5 명£로 출범한 한성대학 축구부의 연혁과 졸업생 활동현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연혁 및 전적-

초대 감독 : 정은식

제 2 대 감독 : 박종원

전 적 : 1989. 11 전국축구선수권대회 8강

199 1. 4 춘계전국대학축구연맹전 8강

1991. 11 추계전국대학축구연맹전 우승

1992. 4 춘계전국대학축구연맹전 8강

진출현황 : 국가대표 -- 우동병 (사학과 졸업)

현대프로팀 -- 입채용 (무역, 현 은평중 코치)

푸마프로팀 -- 노 웅 (경영)

제일은행 -- 신양균 (무역)

주택은행 -- 권정근 (경제)

철도청 -- 김 재 춘 (경영)

’ 95 년도 실업팀에 입단한 선수로는

할렐루야 --이동연,이남호

금 성 사 -- 홍길남

제 2 대 감독은 본교 최초의 공개채용으로 94 년 2 월 부임하게 되었다. 그 주인공은 왕년 축구계에서 명성을 날리던 박종원으로 연세대 1년 재학 중 대표팀에 발탁되어 뛰어난 개인기와 득점력이 인정돼 79년까지 대표팀의 주전공격수였다. 80 년 12 월 태국서 열린 킹스컵서 우승한 직후 박 감독은 분데스리가 차이저스라우테른에 입단, 제2의 차범근 붐을 기대케 했으나 부상으로 l 년만에 하차했다. 벨기에 프로리그서 잠시 뛰던 그는 지난 83 년 국내 프로리그 창설과 함께 귀국 대우에 입단했다. 하지만 85 년 6월 은퇴할 때까지 잦은 부상으로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박 감독은 은퇴 후 ‘지도자로서 소신껏 활동하기 위해 최소한의 경제력은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업에 투신해왔다. 지난 92 년에는 일본에 건너가 일본 프로축구 행정과 경기를 지켜보며 지도자 데뷔를 준비해왔다.

2) 지하철 역명 개명

서울 도심을 가로지르는 지하철 4호선(사당-당고개)의 “삼선교”역이 “한성대입구”역으로 개명하게 되었다.

본교에서는 서울시와 지하철공사에 건의, 이에 따라 4월 30일 서울시장과 안호상 이사장, 홍순태 학장과의 면담이 있었고 그 결과 서울시와 지하철공사가 이를 수용 승인함으로써 삼선교역을 “한성대입구”역으로 개명한다는 내용이 확정되었다.

제 3 절 교사 이전 및 시설 확장

제 10 회 학위수여식이 1986년 2월 22 일 종합관 대강당에서 거행되

었다. 이 자리에는 홍순태 학장을 비롯한 설립자 이희순 여사와 이사장, 그리고 교수들과 내외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금번 학위수여자는 11 개학과 총 408 명으로 영예의 수석졸업자는 행정학과의 김철수 군이 차지했다.

한편 2월 24 일에는 종합관 대강당에서 1986 학년도 신입생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개식사를 시작으로 교무처장의 국민교육헌장 낭독, 홍순태 학장의 식사, 이사장 안호상 박사의 축사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홍순태 학장은 “대학이란 가치 창조의 제 l 단계로서 자립자행하고 스스로 판단하여 나름대로의 자기 인생 수련을 위한 독립된 학

문연구의 장이며, 인생의 완숙을 목표로 볼 때 대학학문이라는 것은 기초에 불과한 것이니 행복의 토대라 할 수 있는 학문토대를 잘 닦도록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당부했다.

이어서 안호상 이사장은 “대학의 가장 큰 2 대 목표는 인격도야와 학문연구에 있습니다. 학생 여러분의 인격도야와 학문연구도 홍익인간의 위대한 이상을 목표를 두고 백두산을 바라보며 열심히 노력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부탁하였다.

한편 1986 학년도 신입생 입학 수석은 인문학부에 한진수(국어국문학과 야간) 군, 사회과학부에 유원준(무역학과 야간) 군, 예술학부에 이강은(미술학과 서양화)이 각각 수상하게 되었다.

1) 학군사관후보생 (ROTC) 창설

서울의 수도권지역에 속해있는 4년제 정규대학(여자대학 제외) 가운데 한성대학만이 학군사관후보생 (ROT C)제도가 설치되지 않았었다.

이에 홍순태 학장을 중심으로 한 관계자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12월 4 일 국방부령 제 281 호(1975. 9. 25) 학군무관후보생 규칙에 의거인교(1984. 11. 22) 학군사관후보생과정 설치 승인을 얻어냈다.

이에 따라 1985 학년도 1학기 재학증인 교련대상자 중에서 후보생을 선발하여, 1986 학년부터 명실공히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게 되었다.

본교는 금번 창설된 제 129 학군단 ROTC 설치로 학문과 무예를 갖춘 멍실상부한 대한민국 육군장교 후보생을 배출힐 수 있게 되었다.

학군사관후보생 (ROTC) 창설 및 입 단식 은 3 월 11 일 본교 대 운동장에서 인-호상 이사장, 홍순태 학장 및 학군단 관계지-들이 배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거행되었다.

본 행시-에는 ROTC 의 창설 결괴·보고, 계급장 수여, 후보생 선서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1985년 12월 4일 창단한 ROTC 입단식 모습

이날 행사에서 학군단장은 훈시를 통해 “대학은 학문을 연구하며 탐구하는 곳으로, 명예로운 학군사관후보생 과정에 선발된 후보생들에게 진심으로 축하하며 세가지 당부를 하였다. 그 첫째는 투철한 사병감과 긍지를 잃지 말 것이며, 둘째는 강인한 체력과 실력배양에 힘쓸 것 그리고 셋째는 예의 바르고 학교를 사랑하는 후보생이 될 것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홍순태 학장도 “여러가지 제반 여건이 부족하고 미흡한 가운데서도 ROTC 승인을 받게 된 것과 오늘과 같은 뜻깊은 자리가 마련된 것에 대해서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선발된 후보생 모두에게 진심으로 축하해마지 않는다”고 치하하였다.

2) 인사 개편 및 교사 이전과 본관 신축

28일 간에 걸친 장기적인 학내 사태가 수습되고 학원의 정상화를 기하기 위한 대폭적인 인사개편이 8 월 l 일자로 단행되었다.

개편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무처장 : 한창호 교수(경제학과)

학생처장 : 이우범 교수(도서관학과)

도서관장 : 이용남 교수(도서관학과)

학보사주간 겸 방송실장 : 황진수 교수(행정학과)민족문화연구소장 : 지배선 교수(사학과)

사회산업연구소장 : 허창재 교수(경제학과)

학생생활연구소장 겸 취업대책위원장 : 강석중 교수(무역학과)

국문학과장 : 김창룡 교수

사학과장 : 윤경로 교수

경영학과장 : 연정열 교수

무역학과장 : 김용정 교수

행정학과장 : 이종수 교수

경제학과장 : 권혁제 교수

도서관학괴정.. 정진식 교수

무용학과장 직무대리 : 김진걸 교수

미 술학과장 : 강국진 교수

교양과정 김계욱 교수

건설본부징 : 김길평 교수(경영학과)

체육부장 : 강은석 교수(교양학과)

교사 이전 및 본관 신축 기공식이 ’ 86년 8월 12일 오전 10시 기존 한성 여자중학교 자리에서 거행되었다

이날 열린 기공식은 안호상 이사장, 이희순 이시, 홍순태 학장, 3처장 등 내외 귀빈 50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건설본부장인 김길평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기공식은 공사 개요 소개와 김정웅 목사(영통성서침례교회)의 축도, 시상 등의 순서로 전행되었다.

새로 들어서게 되는 본관 신축 건물은 대지면적 2 ,294.3 평, 건축면적 735.5평으로 통림건축주식회사가 설계를 맡고, 우진토건주식회사가 시공을 맡았다

본관 신꽉건물은 전체 6층으로 칠근콘크리트라벤조 구조로 ’ 87년 8월 15일에 완공될 예정이었다.

한펀 이에 앞서 여중·고의 방학과 동시에 대학과 여중·고의 교사 이전을 위한 자리 바꿈이 이루어져 교사 이전이 마무리됨으로써 대학은 이제까지의 모습에서 완전히 탈바꿈하여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교사 이전의 단행으로 전 여자고등학교 건물이 본관으로, 전 과학관 건물은 별관으로 각각 명칭이 바뀌어 사용하게 되었다.

본관 건물인 우촌관 건물의 준공 87년 8월 25인이희순 여사와 안호상 박사의 테이프 절단 모습

3) 졸업정원제 운영

본 대학의 수준을 질적으로 향상시키고 졸업정원제 운영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한 학칙이 개정되었다

학칙 개정은 지난 9 월 26 일 교무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결정되었는데 금띤 학칙 개정으로 졸업정원제 운영시행에 대한 세칙이 새로이 제정되었고, 성적 평가에 관한 세칙 중에서는 제 3 조의 평가비율이 변경되었으며, 제 3조 단서 조항 (2) , 제 5 조 2 항, 제 8 조 2 ,4 , 5 항이 각각 삭제되었다.

또한 지;113 조 2 항이 변경되었다.

침가된 규정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졸업정원제 운영시행 세칙--

재학기간 중 학사 경고를 2 회 받은 자는 학칙 제 38 조에 의거 제

적펀다. (제3조) 재학 중 중도 수료에 대한 사정은 학년말에 각 처장, 도서관장, 각 학과장으로 구성되는 중도수료사정회의에서 결정하며 졸업운영 단위별로 사정한다. 81-84 년도 입학자로 휴학 또는 복학한 자는 재혁- 학년의 중도 수료 비율에 따라 사정한다. (제5조 1,2항) 중도수료의 학년별 비율은 2 학년 말 졸업 정원의 115% 초과 인원, 3학년 말 졸업 정원의 105% 초과 인원에 각각 적용된다. (제 6조) 중도수료의 사정 기준은 재학한 전체학기의 학기별 평점, 평균의 합계 점수로 시-정한다.(제7조) 학장은 중도 수료 사정회의의 결정에 따라 중도 수료자 중에서 학업성취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 유급을 허가할 수 있다. 단 유급은 4학년에 한한다.(제 9조) 유급은 1 년단위로 1회애 한해서 허가한다(제10조) 유급된 자가 해당 학년에서 취득한 학점은 무효가 되며 재이수해야 한다, 단, 군사교육학점은 예외(제11조), 유급된 자는 실제 졸업하는 학년도의 졸업 정원의 적용을 받는다.(제

12 조) 등이다.

- 성적 평가에 관한 세칙 -

평가 비율은 기말 성적 30%, 중간 성적 30%, 과제물 및 부정기시험 20%, 출석 및 수업 태도 20% 에 의하여 종합 성적으로 평가한다. 단, 중간 성적은 학사 진행상 기말 성적에 통합될 수 있다.(제 3조)학사 경고는 매학기 다음 각호의 1 에 해당하는 자에게 학장이 행한다. 학기 성적 평점 평균이 1. 75 미만인 자, 학기 수강신청 교과목 중 2과목 이상 낙제 (F) , 재학 기간 중 학사 경고를 2 회 받은 자는 학사제적이 된다. (제 13조)

위의 새로 개정된 세칙 및 개정들은 1987 년 3 월 1 일부터 시행된다.

4) 우촌관 준공

대지면적 2,994.3평, 건축면적 3,447평의 신축 건물이 8월 25일 준공되었다.

6층으로 된 우촌관 건물이 완공됨으로써 대학건물로서의 짜임새 있는 규모를 갖추게 되었고, 본교 발전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데 큰 의미를 두었다.

완공된 우촌관은 지난 ’ 86년 8 월 12 일 기공식을 가진 이후 만 378일만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그 동안에 투입 된 공사비는 총 22 억 3 천 9 백 68 만 4 천원(설계감리비 5 천 8 백 6십만 4천원 + 공사비 21 억 8 천 1 백 8 만원)으로 알려졌다.

우촌관의 주요 배 치 상황은 다음과 같다.

1 층 : 종합전시실, 교관실, 무용실기실 및 교수연구실

2 층 : 어학실, 컴퓨터실, 사회산업연구소, 교수연구실, 의상학과

실기실

3 층 : 교무처, 사무처, 당직실, 기획실, 교수연구실

4층 : 지-료실, 이사장실, 학장실, 법인사무국

5 ,6층 · 강의실

또한 5 , 6층에는 넓은 베란다를 두어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게 된다.

한펀 8 월 20 일자로 단행된 보직 교수 인사이동을 보면 학생처장에 이종수 교수(행정학과), 행정학과장에 정성택 교수, 방송실장에 김길평 교수(경영학과)가 각각 임명되었다. 이번 인사이동은 학생처장 이우범 교수의 일신상의 사유로 인하여 개편된 것이다.

지금까지 4학년 졸업예정자들에게 시행되어 왔던 졸업논문제도가 소수의 학생을 제외한 대부분의 학부 학생들에게는 논문작성을 위한 준비 기간이 너무 짧아 논문을 작성하면서 전공분야를 새롭게 연구하고 배워간다는 근본취지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다는 것과 논문을

작성하기에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점을 감안 대부분의 학과들이 졸업을 위한 논문제도를 종합시험제도로 대체하게 되었다.

졸업종합시험으로 대체하게 된 동기는 취업에 보다 능률적으로 대처하자는데 목적을 두고 9월에 1차, 10월 2차, 11 월 3차로 나누어 시행하게 되었다.

5) 학과 신설 및 경영 · 행정대학원 신설

인문과학을 비롯 사회과학과 예술분야의 11개 학과로 신입생을 모집해 오던 본교는 10월 19일 이공계열의 산업공학과와 전산통계학과, 의류직물학과, 산업디자인학과 등 4개 학과를 신설하게 되어 내년부터는 15개 학과 720명으로 증원하게 되었다.

또한 1981 년에 신입생을 모집해 온 도서관학과는 정보화시대에 편승, 학문의 영역을 확대시키고 교육과정을 개편하면서 전국에서는 두번째로 학과 명칭을 문헌정보학과로 개칭하게 되었다.

1987 년 11 월 9 일 문교부로부터 경영 · 행정대학원의 설치인가를 받게 되었다.

이로서 지금까지 학부로만 운영되어오던 한성대학이 학부와 대학원의 공존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학문의 전문화와 산학협동체제를 이루게 되었다.

문교부로부터 확정 발표된 대학원 설치인가 내용에 따르면 경영학과와 행정학과에 각각 40명씩으로 80 명의 정원이 책정 발표되었다.

야간에 강의하게 되는 이 특수대학원은 5학기를 기준으로 하며

석사과정까지 이수하게 된다.

대학원의 설치인가에 따른 당시의 인사개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학원장 : 홍순태 학장

대학원 교학과장 : 강병식 교수(사학과)

대학원 경영학과 주임교수 : 김용정 교수(무역학과)

대학원 행정학과 주임교수 : 황진수 교수(행정학과)

학생생활연구소장 : 최병규 교수(경영학과)

무역학과장 : 강석중 교수

6) 홍순태 학장 퇴임

(1) 학위수여식

1987 학년도 제12회 학위 수여 식 이 1988 년 2월 20 일 오후 2시 본교 대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이번 학위수여식에서는 l1개 학과 총 512명의 학사를 배출하였는데 이는 작년의 419 명보다 100 명이 늘어난 숫

자이다 학위수여식은 학장, 이사장, 동창회장 등 많은 내외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개식시, 국민의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국민교육헌장낭독, 학시-보고, 학위증서 및 상장수여, 학장격려사, 이사장 축사, 동창회장 축사, 기념품 증정, 교가제창, 페식사 순으로 진행되었다. 홍순태 학장은 격려사에서 “시련의 민족적 격동기 사회에 진출함에 있어서 자유정신 구현과 신뢰성의 확립이 중요하다” 고 당부했다.

이날 학위수여식에서 전체 수석졸업은 4.5 만점에 평균 평점 4.09 를 취득한 문헌정보학과의 임동혁 군이 최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국문학과의 한종휘 군 등 10 명이 우수상을, 행정학과의 김상복 등 36명이 공로상을 각각 수상하였다.

(2) 신설학과장 임명

이 때에 신설된 전산통계학과와 의류직물학과, 산업디자인학과, 산

업공학과 등 4 개 학과의 학과장이 다음과 같이 임명되었다.

전선-통계학과 . 이우범 교수(문헌정보학과)

산업공학과 : 김길평 교수(경영학과)

의류직불학과 : 임재영 교수(의상학과)

산업디지인학과 : 정하경 교수(미술학과)

한편 이번 학과장 임명은 현재 재직중인 교수들을 선별 발령함에 따라 학교측의 신설학과 전문적 양성을 위한 보다 성의 있는 교수 공개채용 방안이 지적되고 있다

(3) 제규정심의위원회 발족

제규정심의위원회가 3 월 16 일 발족되어 학칙 개정 및 학내 전반에 관한 제반 규정 준칙 등을 심의하게 된다 이날 발족과 함께 열린 제규정심의위원회에의 위원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 이용남 교수(문헌정보학과)

위원 : 한창호 교수(경제학과 교무처장)

최송길 교수(경영학과, 사무처장)

이종수 교수(행정학과, 학생처장)

윤경로 교수(사학과)지배선 교수(사학과)김용정 교수(무역학과)황진수 교수(행정학과)

이번에 구성된 제규정심의위원회는 각 대학에서 활발히 추진되고 있는 학칙 개정작업을 우선적으로 착수해 나가게 될 것이다.

(4) 인사이동

본교 보직 개편에 따른 인사 이동이 전면적으로 단행되었다. 6월

22일 열린 교수회의에서 일괄통보 된 이번 개편은 지난 1학기에 있었던 일련의 학원사태와 홍순태 학장의 임기 만료에 따른 것이다. 주요 보직 개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무처장 : 김용정 교수(무역학과)

학생처장 : 이석주 교수(국어국문학과)

사무처장 : 박양구 교수(영문학과)

학보사 및 교지편집실 주간 : 김용석 교수(영문학과)

방송국장 : 조점환 교수(교양과)

민족문화연구소장 : 윤경로 교수(사학과)

학생생활연구소장 겸 취업대책위원장 : 지배선 교수(사학과)

체육부장 : 김계욱 교수(교양과)

한편 도서관장인 이용남 교수(문헌정보학과)와 건설본부장인 김길평 교수(경영학과), 사회산업연구소장 허창재 교수(경제학과)는 각각

유임되었다. 이번 보직 개편과 더불어 각 학과의 학과장들도 이동되었다.

국어국문학과장 : 원형갑 교수

영어영문학과장 : 고정자 교수

(5) 홍순태 학장 퇴임

4년간 열정을 바쳐왔던 홍순태 학장은 그의 임기를 모두 마치고 퇴임하기에 이르렀다.

1988 년 8 월 21 일 홍순태 학장은 앞으로도 인연이 닿는 한 본교를 위해 열심히 도울 것임을 다짐하였다.

제 4 절 제 6 대 신영기 학장 취임과 교육의 질적 향상

1) 제6대 신영기 학장 취임

흉순태 학장의 염기 만료가 다가옴에 따라 신임 학장에 대한 문제가 학내외를 통하여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 본교의 후임 학장이 누구인가에 따라 학교 운영의 방향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이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학내에서의 관심은 대단히 컸다 당시 전국에 있는 상당수의 대학들은 그 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교수 중에서 총 · 학장을 선출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으며, 앞으로 거의 모든 대학이 그러한 추세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이 본교에 미친 영향도 있었다 이에 따라 교수협의회에서는 본교에 재직중인 교수 중에서 학장을 추대하자는 여론이 대두

되었고, 당시 재단에서도 이러한 여론을 과감히 수렴하여 적격자를 추천해 보도록 교수협의회에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교내의 실제 사정은 뚜렷하게 어느 누구를 추천하지 못하고 시일만 흘러갔다. 교수협의회에서 미온적인 태도로 나오게 되자 일부에서는 외부인사를 영입하자는 의견도 흘러나오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재단 이사회에서 는 학장 초빙을 맡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신영기 학장을 초빙하게 되었다. 일단 신임 학장이 내정되자 교수협의회에서 이에 대한 인준동의 절차를 거치고 최종적으로 확정이 되어 1988년 8월 22일 오전 10시 소강당에서 신 · 구 학장 이취임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신영 기 학장은 1921 년 2월 22 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1944 년 일본 동경대학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1975 년 동경대학에서 공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신 학장은 약 30년 동안 서울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86년 2월에 정년퇴임하였고 학술원 회원으로 재직한 바 있었다.

신영기 학장은 ‘뜨거웠던 정열을 부드럽게 누그러뜨려 화합과 단결로써 나라와 학교의 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자기 자신들의 개발과 성찰에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것’이라는 취임사를 읽으며 한성 가족 모두가 하나가 되자고 역설하였다.

지금 우리나라는 그 어느때 보다도 격심한 변혁기에 들어서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는 계속되는 노사분규나 학생운동으로 혼란스러워 보입니다.

이러한 시기에는 부드럽고 따뜻한 봄의 햇살이 펼요합니다. 잎은 채 무성해지기도 전에 너무 뜨거운 햇볕을 받게 되면 잎은 여물지를 못하고 오히려 시들게 되고 결실도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즈음 일부 젊은 학생들의 열기는 너무 뜨겁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마치 한 여름의 뜨거운 햇볕과 같습니다, 또 여러분들께 서는 금년 여름이 다른 해에 비해서 유난히 더웠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디, 부드럽고 따뜻한 햇볕이 필요할 때 이와 같이 뜨거운 열기들이 겹치면 이제 막 싹틔워 가꾸기 시작한 민주주의가 채 여물기도 전에 시들어 버리게 되지나 않을까 우려됩니다.

이제는 다시 냉정을 되찾아 그 모든 것을 역시의 지 편으로 흘려보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고 그 뜨거웠던 정열을 부드립게 누그러뜨려 화합과 단결로 서 나라와 학교의 발전에 기여함은 불론 지기 자신들의 개발과 성찰에도 게을리 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나널이 발전히는 우리 조국 대한민국 속에 서 더더욱 발전해 나가는 우리 한성대혁을 위해 제가 힘껏 봉사할 수 있도록 여러분 모두가 도와주시기를 간곡히 부닥드립니다.

1988년 8월 22일

학장 신영기

2)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한 노력

신영기 학장의 취임사에서는 학장으로서의 대학 운영 방향에 대

해서 언급한 점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학장으로 위촉받고 취임하기까지의 시일이 너무 짧은 나머지 미처 계획을 수립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신 학장은 바둑에 아마 5단이라는 고수로서 항상 조용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행동으로 옮길만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으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취임사라는 것은 평소에 품고 있던 내변의 성실성과 학교 운영의 기본적인 자세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면은 비단 취임사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해 10월 5 일 한성대학 개교 16주년 기념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한성학원 창립 43주년과 함께 개교 16주년을 맞이하면서 먼저 오늘의 한성학원이 있을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하신 설립자님과 역대 학원 이사장님 그리고 교직윈 여러분께 충심으로 경의와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아울과 한성학원을 거쳐간 모든 줄업생과 친애하는 재학생들에게 변함없는 기대와 격려의 뜻을 전하면서 한성 가족 모두와 더불어 오늘의 기쁨을 나누고자 합니다. 1972 년 민족정신을 되살

려 끊임없는 학문탐구에 기초하여 국가에 이바지하고 나아가 인류의 평화와 복리증진에 힘쓸 수 있는 지도자를 양성함을 설립 이념으로 진리와 지선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서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학문 연구를 통해 새로운 전통을 다져가기 위해 많은 시련과 난관을 극복하고 열과 성으로 만들어 온 한성 역사 16년,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속에서 발전이 발판을 만들기 위한 전통과 그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진 중 · 고등학교와의 교사 이전, 운동장 확장공사, 우촌관 신축건물의 완성 등 양적 팽창과 함께 학과의 신설 및 증원, 경영행정대학원위 설립 등 명실상부한 대학으로 변모를 갖추어 나가며 끊임없는 학문탐구로 개성 있는 전통 구축을 위한 한성인 전체의 결실이 오늘에 이른 것으로 한성인의 의지가 응어리져 가꾸어 온 한성의 역사가 값진 역사로 수놓아질 고귀한 시간들이 될 수 있도록 가일층 분발해야 할 것입니다.

개교 기념을 축하하는 참된 뜻은 이러한 우리 대학의 역사를 통찰하면서 그 토대 위에 내일의 포부와 자신을 다짐하는 새로운 결의를 갖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계기를 맞이하면 새로이 마음을 가다듬고 미래를 다짐하는 슬기를 지닌 바 개교 16주년을 맞아 우리 대학은 발전의 양적 추구에 앞서 질적으로 심화된 성숙한 안정기의 내실을 도모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 서 있다 하겠습니다 ...

이러한 신영기 신임학장의 불타는 듯한 투혼의 의지는 크게 두가지로 부각되고 있다.

그 하나는 질적 향상이며, 또 다른 하나는 양적으로 성장하자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의지는 곧바로 실전에 옮겨지기 시작했다.

취임과 동시에 착수되는 신영기 신임 학장의 학교발전 방안에 대한 장 · 단기 발전구상이 학보사에 의해 인터뷰된 바 있다.

그가 구상하고 있는 장 · 단기발전계획은 본교의 교육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데서 기인된 것이라 본다. 공간확보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주요 내용을 보면, 우선 과학관 준공을 비롯하여, 전자계산소설립, 그리고 북방문제연구소 개설, 출판부 설립과 아울러 대학원을 신설한다는 것이다.

2) 기획실 행정 강화

신영기 학장이 취임한 이래 기획실의 기능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기획실은 말 그대로 대학의 모든 기획업무를 추진하며 여기서 기획된 사업계획을 각 소관 부처가 시행하는 것이다. 그간 기획실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에 이르러 비로소 명실상부하게 기획업무에 주력하게 된 것이다. 1989 년 12월에 김경자 교수가 기획실장으로 임명 받아 모든 업무를 주관하고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다.

3) 부속기관 및 연구소 설립

가. 과학관 건축

신영기 학장은 이공대학의 교육공간확보 방안으로 과학관건축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사업은 곧장 실행에 옮겨져서 그 다음해인 1989년 1월 19일에 서울시청의 사업 승인을 얻게 되었고, 4월 7일에는 성북구청의 건축 허가에 따라 드디어 4월 15 일 과학관의 기공식을 갖게 되었다. 이로부터 10개월 간에 걸친 공사 끝에 1990년 2월 27 일 준공을 보게 되 었다.

이날 준공식에서는 그 동안 교내 건설 본부장을 맡아오던 김길평 교수의 경과보고에 이어 공로패 수여(김길평 교수 수상)와 감사패 증정(성북구청장, 성북경찰서장 수상), 테이프 절단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지상 5층의 A동과, 지상 4층의 B동으로 완공된 과학관은 총 면적 1 ,626평에 건축 면적이 366평이다. 당초 완공 예정은 1989년 12월이었으나 공기가 약 2개월 정도 늦어졌다. 이 과학관의 내부 현황은 강의실로 사용될 6개실, 산업디자인학과, 의류직물학과, 전산통계학과가 각각 4 개설, 과별 실험실로 사용하게 되었고, 교수 연구실 10개실, 전

자계산소 1 개실, 학과사무실 3 개 등 총 35 개설을 보유하게 되었다.

과학관 전경 (1990)

나. 노천극장 설치

과학관 주변으로 특기할 만한 것은 바로 노천극장이란 것이다. 1990년 9월 25 일 준공한 노천극장은 야외 에 아치 형 무대 형 태 를 지니고 있으며 이 극장이 설립됨으로써 교내의 각종 행사가 여기서 치러지게 되었다. 이 노천극장은 많은 인원이 참여할 수 있으므로 각종 행사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어 한성인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당시 김경자 기획실장이 노천극장과 지선교를 추진함으로써 대학의 시설을 보다 합리적이고 미적으로 꾸미기에 주력했던 점이 보인다.

다 지선교 건립

도서관에서 낙산이나 지선관에 기-려면 학교 중앙에 있는 운동장을 통해서 가야만 했던 것이 당시의 설정이었으나 이 지선관이 건립됨에 따라 곧비-로 통행 할 수 있게 되 었다. 1990 년 9 월 25 일 준공된 이 다리는 교량 건축의 원로인 신영기 학장의 아이디어를 근거로 설계하여 직경 익 1 미터 정도의 철파이프외- 침목으로 제작되었으며 길이 9 미터, 폭 2 미터의 구름다리 모양으로 설치되었다.

지선교

노천극장 및 테니스장

라. 전자계산소

전자계산소는 본 대학교 교육이념의 수행과 정보화시대의 도래에 따른 교직원, 학생들의 연구휠동 지원 및 실습 지원과 행정업무 전산화를 목적으로 1990 년 2 월에 개소하였다. 미국의 최신형 BVj 15000SYSTEM 에 터미널을 연결하여 전반적인 행정업무를 전산화함으로써 제반업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학생들의 컴퓨터 실습을 위하여 제 1 PC 실습실에 39 대의 486-DX II 컴퓨터와 제 2 PC 실습실에 35 대의 486-DX I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으며, 제 3PC실습실은 실습전용 PC 실로써 286 컴퓨터 386 컴퓨터가 20 여 대 설치되어 있어 학생들은 언제든지 지-유로이 실습실을 이용할 수 있다.

전지계산소는 개소 이래 꾸준히 업무 전산화를 추진하여 교무 ·학적 업무뿐만 아니라 비품 관리, 인사 관리. 예산 관리 업무 등을 전산화하여 ON-LU댄으로 자료를 처리하고 있으며, 94 학년도부터는 학

과에 연결되어 있는 단말기를 이용하여 수강신청을 하고 본인의 성적을 조회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 외에도 재학생 및 교직원이 전자계산소 이용에 불편이 없도록 전산실습상담을 운영하고 있으며 매학기 교직원을 대상으로 컴퓨터 특강을 실시하고 있다. 정보 전문화시대로 일컬어지는 현대사회의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첨단과학의 진보에 대비하고 이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재학생 전체에게 전산이론과 실무교육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에 따라 전자계산소에서는 본교의 실정에 맞는 혁신적이고 치밀하며 미래지향적인 전산망 구축계획을 추진중이다.

‘ 93 학년도부터 전산학개론이 교양필수 과목으로 정해짐에 따라 실습실에 대한 대폭적인 기자재를 확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제1 ,제 2PC실습실에 84대의 486-DX II 컴퓨터와 10대의 Deskjet Printer가 설치되어 있으며, 각각의 Main Memory는 8M이상의 최신기종으로

Upgrade 하여 학생들이 실습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제1, 2PC실습실은 수업중심으로 제 3 PC실습실은 실습전용으로 학생들이 언제든지 편리한 시간에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각 실습실의 PC들을 LAN 으로 연결하여 다양한 소프트웨어 및 하드웨어를 공유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 터미널 실습실

터미널 실습실에서는 중형기종인 MVj15000SYSTEM 에 설치되어 있는 각종 PROGRAMING LANGUAGE와 SOFTWARE PACKAGE를 사용할 수 있으며 사용 권한은 다음의 2 가지 경로를 통하여 부여 받는다.

가) 전산관련과목을 수강하는 학생으로 해당 교과목 담당교수가

일괄 사용 신칭유 하는 경우

나) 논문작성 등 필요한 경우 학과장의 추천에 의해 전자계산소로 사용 신청을 하는 경우

(2) PC실습실

PC 실습실에서는 개인용 컴퓨터를 이용하여 각종 LANGUAGE 실습 SOFTWARE PACLAGE와 WORD PROCESSOR 등을 사용할 수 있으며, 특별한 사용허가 없이 학생증만 제시하고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 컴퓨터 관련 교육

전자계산소에서는 급증하는 COMPUTER 수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수시 로 COMPUTER 기 본과정 , DATABASE, SPREADSHEET, WORD PROCESSOR 등의 특강을 실시하고 있으며, 새로운 요구가 발생할 경우 이에 적절히 대응해 나가고 있다.

@PC실습실 통합계획

각과의 PC 실습실과 전지-계산소의 PC실습실의 효과적인 유지관리와 실습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각 실습실을 ’95년 4월경에 통합할 예정이다. 통합되는 실습실은 정보전산계열, 전자계산사(3개), 전산통계학과, 산업공학과, 산업안전공학과, 산업디자인(매킨토시) 등의 8개의 실습실을 6개의 실습실로 통협-하게 된다.

뒀 PC실습실 이용안내

가) 학기증 이용시간

An 1,2PC 설습실 : 09:00 - 2 1: 00(평일), 09:00-13:00(토요일)

A113PC 실습실 09:00-15:00(평일)

나) 방학중 이용시간

제1PC실습실 : 09:00 - 15:00(평일)

북방문제연구소 설립

북빙-문제연구소는 1989년 4월 1일 설립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전세계는 이념의 대립에서 벗어나 서로의 필요성에 의한 실질적인 상호협력체제로 전환해 갈 것이 눈앞에 보이고 있다. 이미 소련이 해체되었고 종국의 모든 체제가 개방화로 전환되고 있음도 현실적인 상황이다.

본 연구소는 한국의 북빙-정책과 관련이 있는 중국과 소련 및 기타지역에 있는 공산국가들에 관한 지식의 학문적 연구를 통하여 인류 평화와 동서화해무드에 따른 강대국 관계의 재편, 한국의 국제적 지위 향상, 북한에 대한 한국의 통일 및 대화정책 등 한국의 국가이익 증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본 연구소는 소장과 운영위원, 연구소 후원회, 연구원 및 조교로 구성하고, 연구원으로는 교내외 유관 교수들을 위촉하였다. 사업 내용으로는 미국, 소련, 중국, 및 동유럽이나 기타 지역에 관한 도서 및 자료의 구입 비, 연구발표, 등 각종 학술회의개최, 연구논문집 및 문헌자료 등의 편찬 발행, 자료교환, 학자 초빙 및 국내외 연구기관들과 의 학술 교류 등을 추진하고 있다.

초대 소장으로는 1989 년 4월 l 일 행정학과의 유영옥 교수가 임명 되 었으며, 같은 해 9월 7 일에 문교부인가를 받았다. 1990 년 5월 25일 북방정책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였고, 같은 달 논문집 『북방연구』를 발행하였으며, 그 후 유영옥 교수가 학교를 그만 두고, 2 대 소장으로 무역학과 강석중 교수가 부임하였다.

바. 출판부

출판부는 대학교육의 목적이 전문 지식의 습득과 지성인으로서의 성실한 인격 도야에 있으므로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이상적인 교육내용을 담은 우수한 교재개발과 학술 연구물출판에 관한 교수들의 연구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1989 년에 설립되었다 본 대학교의 건학이념에 입각하여 충실하고 뛰어난 교재개발에 노력하고 있으며, 각종 학술 연구물 간행과 전공분야의 교재 및 교양 문고 간행 등을 출판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

제 5 절 대학원 신설 및 경영 · 행정대학원 분리

사회가 점차 고학력화 됨에 따라 대학원 진학자 수가 늘어나 대학원 출신자에 대한 인력 수요 증대로 인하여 대학원 교육 기회의

증대와 대학원 중심교육이 점차 활성화되어 가는 것이 요즈음 추세다. 본교에서도 연구활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는 대학원 교육의 내실화를 통해 보다 높은 수준의 학문을 연구하고 시-회가 필요로 하는 전문인력양성을 위해 대학원 신설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학부의 발전과 연계하여 본교의 교수진을 비롯한 외부의 우수 교수를 초빙, 강좌를 개설함으로써 보다 폭넓고 깊은 학문에 접할 기회를 마련하도록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89년 11월에 문교부로부터 국어국문학과, 사학과, 무역학과애 36명을 인가 받아 1990학년도부터 석사과정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한편 1988년에 신설한 경영 · 행정대학원은 문교부로부터 분리인가를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영대학원괴· 행정대학원은 1990년도부터 독자적인 행정체제를 갖추고 교육에 임하게 되었으며 각각 60명의 정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1989년 11월에는 문교부로부터 행정대학원 내에 정원 15 명의 교육행정학과 설치를 인가

받았다.

1) 대학원 신설과 경영 · 행정대학원 분리

본 대학원은 교육법 제 1 조와 제 108 조에 의거 학문 이론과 실무를 연구하고 과학적 벙-법으로 교수하여 지도자적 인격과 창의력 능률을 갖춘 유능한 인재를 배출하여 사회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대학원에 설치된 석사과정과 연구과정은 사회 각계각층의 우수한 인재 및 일반인들을 영입, 이들로 하여금 심오한 학문적 연구와 지도적 인격 완성을 통하여 산학협동체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내외 저명한 교수진의 과학적 교수방법과 진지한 변학분위기를 통해 국가발전에 이바지할 전문인을 중점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1990 년 설치된 대학원과 경영 · 행정대학원의 전공분야별 교과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 대학원 학과별 전공

학과 전공

국어국문 국어학, 현대문학, 고전문학

사학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

무역「국제경제,국제경영,무역실무

나. 경영대학원

학과 전공

경영 경영관리, 증권/보험, 경영정보, 중소기업경영

국제경영 국제무역,국제금융,국제경영

산업경제 노사관계, 공기업,산업경제

다. 행정대학원

학과 전공

행정 행정학, 정책학, 부동산학

교육행정 교육행정학

2) 학내 연구분위 기 조성

본 교는 1972 년에 개교한 이래 10 여년 간을 그런 대로 지내왔으

니 ‘ 80 년대 초반부터는 공간의 부족을 심각하게 느껴왔다. 비록 현재 중학교로 사용하고 있는 교사를 마련하긴 했으나, 운동장을 비롯한 모든 것이 불만족스러웠다. 이에 제 5 대 홍순태 학장이 취임하면서 한성여자중 · 고등학교와 대학 건불을 바꾸는 동시에 대형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건불이 우촌관이다.

이 우촌관은 지하를 포함한 6층 건물로서 상당한 건축비가 소요 되었다. 그러나 특별히 예산이 비축된 것도 아니 여서 교내의 모든 예산은 건축비를 위해서 집중 투자 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연구소의 활동이 위축되었고, 당분간 예산지원이 이루어지

지 않자 해마다 발행하던 논문집도 중단상태에 이르렀다.

이검은 고난을 극복한 결과로 드디어 1987년 8월 우촌관의 준공을 보게 되었고, 1년 뒤에 각 연구소에 예산을 지원하는 동시에 과학관 준공과 아울러 전자계산소까지 설치하게 되었다. 이로써 본교는 미력하나마 각 연구소가 제 기능을 회복하는 동시에 각 연구소의 논문집 발간이 속간을 보게 된 것이다.

그밖에 중앙도서관의 지속적인 확장 및 개수, 장서의 확보 등을 통해 면희-분위기를 조성하였고, 시청각교육실, 어학실습실, 컴퓨터실습실, 타자실습실, 트레이닝센터, 학생수련장 퉁 후생복지 시설의 확충을 지속적으로 시행하였다.

제4장 도약기(1991-현재)

제1절 서정희 이사장 취임과 전임교수 확충

1990년 일련의 사태로 인한 학내 소요가 일단 마무리 되면서 본교로서는 새로운 대학 분위기를 맞이하는 시기를 가졌다.

1991 년 1 월 한성학원 이사장인 안호상 박사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신임 서정희 박사가 재단 이사회의 동의를 거쳐 이사장 직무대리로

취임하였다.

1991 년 초는 서정희 이사장 직무대리 체제가 출범하면서 획기적인 시기를 맞기 시작하였다.

서정희 재단 이사장은 원형갑 학장을 비롯하여, 교수와 직원들을 격려하면서 모든 업무에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으로 발휘시켜 나감으로 써 한성대학의 면모를 새롭게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으며 1992년 2월 15 일 제 12 대 이사장으로 정식 취임함으로써 대학 발전은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에 1991 년 4월 공석중인 교무처장에 이종수 교수를 임명하는 동시에, 모든 업무를 단일화하고 집행력 있는 행정을 마련하기 위하여 기획실 활동을 강화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기획실의 행정력이 강화되

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이제 1991년 초부터 이루어진 학교의 변화 · 발전 모습을 항목별로 들춰보도록 하자.

이러한 구상은 처음부터 재단 이사장인 서정희 박사가 이미 세워놓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정희 이사장은 3월부터 학교 운영에 적극 적으로 헌신적인 노력과 아울러 그해 9월에 지신의 계획을 ‘한성대 소식’ 제10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다음은 그 요약 발췌문이다.

/센J:. o:1 2-1 꽉, 그퍼고 敎l따핏 0:] 2] 분, 디-낌이 llj;i JJA 大당l 의 發따을 위히여 잎으로 어떻게 헤이- 히겠습니끼? 지난 1 혁기 동안 대학에서 벨렀덴 에리기지 긴j 뿔뜰 속에 제니침-대파 생각해 온 뜻이 숭아있습니다.

갯 l겐씨Isc 제가 느낀 것은 대혁의 l강파이 좀더 공부히고 (iff 究히는 ~').1ii[1~[\ 가 되어 이-겠디 ;1 느셨습니디 이무퍼 음식이 흘풍하디고 히디리고 그 음식을 덤을 그릇이나 꽤싱이 7.1 자판해서이- 음식 빗·띨 기분이 니지 않겠지요 그래서 大젠 I쿄까j 여러곳의

흰정기1 선에 전팩을 기울였습니다

뚜밴째쿄는 교육의 주요 수딘인 깅의 |지짜을 좀더 일치가l 히기 위해서는 강사수꽉 디l 폭 쓸이고 대신 Wf£ 敎}깡의 수가 大II쉐 t셉i핫이 되어이겠다고 느낀 것입니다. 아푸리 암A 침 이주머니가 열심히 도와준디고 하더라도 자기 어머니의 剛淑애 u] 치겠습니끼‘ 그~J1서 약 201낌의 敎}장 i~H차 작업을 했습니다민 그 중 17~,만 충원하고 나머지단 내년에 다시 :i@)J11公짜키로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각 분이 교수 충원직업은 계속히겠습니디.

세밴찌l 쿄 4?! 쇠E 들도 요구해오고 있습니다만 장기발전 계획이 있어야 겠다는 것입니디‘ zj- ljL 서는 부서대로 또 大웰쏘↑냄로서는 大댄술般이 l 대한 +, . 長j비發따계획이있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il~찌부터 各젤 1"1, 各部팝別發따 ~trrtijf/F}j)(;을 부탁드려왔]1 ),、!}\소렌로는 몇개의 liFf究쫓쉴웰를 싸]!X;, 가능하면 -}c엘의 모든 교수넘틀이 參Wj~히이 JtI피|써力으로 發R갔 감!→젠j을 IjW,):;토록 부탁드렸습니다_ iF 末애 이들 Iff究가 兒了꾀밴 이룹 JII}子로 히여 여러분들이 모두 보실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이들을 파짧로히이 太센發따計꾀을 세우고 내년에도 또 그 이후애도 이러한 연구를 계속하여 大간;~iJ~}j1J: ~"1 꾀윤 계속 修IE 째完해 나갈 1'PE 입니다.

:1 ,,]니 션(\~J:. 여러분, 그리고 敎빠員여러분, 앞으로 정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지담끼지 제나름대로의 大學發따애 대한 所信과 그 실행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만 이것만 가지면 되겠습니까‘ 저의 짧은 생각에는 우선 앞서 말씀드랬던 外形

的인 것 한두 가지입니디.

두번째는 첫번째외 같은 맥락입니다만 뼈표 信뼈의 氣風입니다 敎빠쉰들은 벨~들을 귀찮은 一j웰性손님이 아니고 永찮히 뤘任져야 할 자기 자식과 같이 생각하고 보살펴야 한다는 마음으로 학생들은 敎l做員들을 자기들 등록금이나 축내고 있는 짜生蟲이 아니고 자기들을 위하여 또 大텔發따을 위하여 奉it 하고 있는 자랑스런 필城의 어른들로 예우할 때 앞서 말씀드린 모든 外形的發展도 이룩될 것으로 믿습니다

1991년 4월 1일 본교로서는 처음으로 본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수회의에 의한 제7대 원형갑 학장이 취임하였다. 원형갑 학장은 이보다 앞서 1990년 10월에 신영기 학장이 사임함으로써 당시 교무처장으로 있던 중 학장직무대를 맡아온 바 있다. 새로운 학장 선출은 본교에서 선출한다는 원칙 아래 2월 8일 1990학년도 동계 교수연수회를 이천군 소재 설봉 호텔에서 가졌으며, 이콧에서 제7대 학장 후보선출을 위한

회의가 있었다.

이 자리에서 교황 선출 방식을 통해 국어국문학과의 원형갑 교수가 학장 후보로 선출되었으며, 재단 이사회의 인준을 얻어 4월 1 일자로 취임하게 된 것이다.

다음은 학장 취임사 발훼문이다.

재단은 지난해 불행한 사태를 계기로 재기했고 일신했습니다 낡고 어지러운 껍데기는 깨끗이 벗겨내고 있습니다 서정희 이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추진력에 있어서 진취적인 의지와 기상은 누가 보아도 완연합니다. 교육환경은 날로 개선되고 있고 기자재 도입은 학과마다 확충되고 있으며, 2학기와 92학년도에 대비하기 위한 대대적인 교수 증원계획도 착실하게 세워져 잇습니다. 이러한 재단의 쇄신과 의욕에 대해서 우리는 매우 김사하는 마음으로 환영할 따름입니다.

우리 한성은 작고 아담한 대학입니다. 이건 저의 사견입니다만 앞으로 5, 6천명 정도의 알차고 이상적인 대학으로 발전하였으면 합니다 한성대 출신이라면 예외없이 교잉:있고 실력있으며 믿을 수 있다는 평판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대학말입니다. 정신의 공동화라는 말이 암시해주는 것처럼 어차피 찾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리고 이것이 그렇게 이뤄지기 어려운 꿈이 아니란 것도 우리는 서로 질 알고 있습니다. 띨은 바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 모두의 성실성이야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1) 대폭적인 교수 확충

대학의 발전은 양적인 발전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질적인 수준의 향상이 토대가 되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대학인의 인적 구성에서 우수한 교수의 확보와 우수한 학생의 유치는 교육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침경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의 자체적 노력으로 가능한 것은 우수한 교수를 최대한 으로 확보하여 교수 대 학생 비율을 가능한 한 낮추는 일이다.

(1) 전임교수 충원

교수확보율을 90% 로 끌어 올리기 위 한 끊임 없는 노력은 1991년도

초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의 교수란 전임교수는 물론이고, 대우교수, 객원교수도 해당하는 광범위한 폭을 갖는다.

1991년 8월부터 1995년 3월 1일까지 불과 4년 밖에 안되는 짧은 기간에 확보한 교수는 모두 67명이다.

특히 전임교수 초빙은 종래의 전통적인 방법을 과감히 개선하여 공개채용제도를 정착시키고 이에 따라 국내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우수교수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이 기간에 초빙한 교수는 67명으로서 특수 예술 분야를 제외한 전원이 콰내외 우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9 1. 8. 15 - 1995. 3. 1 까지 신규교수 확보현황(4년간)

199 1. 8. 15 일자 초빙

학과 성명 최종출신교 학위

행정 정주택 미국 아메리칸대학 박사

문헌정보 조인숙 성균관대 박사

의상 신인숙 프랑스 국립파리7대학 박사

산업디자인 김지현 미국 이스턴미시간대 석사

전산통계 차운옥 성균관대 박사

산업공학 홍윤기 미국 사우스캘리포니아대 박사

의류직물 전경숙 미국 매릴랜드대 박사

1992. 2. 15 일자 초빙

교양 강욱 미국 콜럼비아대 박사

경영 최명규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 박사

경영 홍용식 미국 미시간 주립대 박사

무역 최옥근 미국 뉴욕대 박사

경제 이우관 미국 노스혜스턴대 박사

무용 박인숙 미국 뉴욕대 석사

미술 문범 서울대 석사

산업디자인 김응화 일본 多塵미술대 석사

산업공학 위남숙 미국 버클리대 박사

1992. 8. 15 일자 초빙

사학 윤혜영 서울대 박사

무역유병호 미국 죠지아대 박사

행정 이창원 미국 뉴용 주립대 박사

미술 이인현 일본 동경미술대 박사

산업디자인 박진배 미국 pratt Institute 석사

전산통계 엄종석 미국 오하아오 주립대 박사

산업공학 박준영 미국 미네소타대 박사

1993. 3. 1일자 초빙

국어국문 박호영 서울대 박사

경제 강신일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박사

문헌정보 서은경 미국 일리노이즈 대 박사무용 김주자 미국 뉴욕대 박사과정의상 김경인 서울대 석사

의상 김용주 미국 캘리포니아대 박사

전산통계 권영미 미국 워싱톤대 박사

산업공학 원형규 미국 E 로이 뉴욕대 박사

의류직물 김성복 미국 뉴욕대 박사과정

의류직물 홍성애 미국 캔사 λ 대 박사

1994. 3. 1 일자 초빙

국어국문 고창수 고려대 박사

영어영문 이병은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 박사

경영 최용식 미국 뉴욕 주립대(버팔로) 박사

경영 민성기 미국 텍사스 주립대(알링톤) 박사

경영 정승환 미국 네브라스가 주립대 박사

무역 김상조 서울대 박사

행정 권해수 서울대 박사

문헌정보 강순애 성균관대 박사

회화과 강관식 한국학 대학원 박사과정

회회과 허은영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석사

산업디자인 고영란 미국 코넬대 석사

산업디자인 김미지자 한양대 박사과정

전산통계 이재문 한국과학기술원 박사

전산통계 강승식 서울대 박사

산업공학 이재득 미국 펜실바니아 주립대 박사

컴퓨터공학 황기태 서울대 박사

정보공학 김인철 서울대 박사

산업안전 이남식 한국과학기술대 박사

1995. 3. 1 일자 초빙

국어국문 김동환 서울대 박사

국어국문 신경숙 고려대 박사

영어영문 서영윤 이화여대 박사

영어영문 홍성훈 미국 아리조나대 박사

사학 황혜성 하와이 주립대 박사

무역 최용일 미국 퍼듀대 박사

행정 이태교 한양대 박사

행정 김백유 독일 Freiburg 대 박사행정 이성우 미국펜실바니아대 박사무용 박영애 미국 뉴욕대 박사의 상 정경임 이화여대 박사

산업안전공학 제무성 미국 UCLA 박사산업안전공학 최기흥 미국 버클리대 박사

정보전산학부 이민석 서울대 박사

정보전산학부 김진환 서울대 박사

정보전산학부 정영모 서울대 박사

단위:영

전임교수 입학정원 720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입학 정원 대비 전임 교수 증가율 추이

(2) 객원교수제도의 활성화

현대의 사회는 지적인 지식과 아울러 사회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역군을 길러내기를 각 대학에 바라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산학협동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지적해 주듯이 대학도 이제는 지식교육으로 서만 만족하고 주저앉을 수 없는 시대라는 말이다. 특히 전문대학원의 경우는 이를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본교에서는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강의실에서의 이론은 물론 사회 각계 각층에서 뿌리박은 전문가를 객원교수로 초빙하여 교육의 내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들 객원들은 각 대학원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현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특강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이들 객원교수뿐만 아니라 본교에 서는 사회 전반에 걸친 전문가를 초빙해 특강을 실시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이론 연구에 뒷받침하도록 보완적인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

다.

다음에, 초빙한 객원교수의 간단한 약력을 비롯하여 이제까지 실시했던 특강 내역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 객원교수 명단 및 약력

성명 학력 주요경력 현직

박용환 미국코네티컷대학원 행정고시합격 총무처 국장

유상현 서울대, 경희대박사 대통령 비서관 법제처 공보관

이종찬 서울대 11, 12, 13대 국회의원 국회의원

임경호 연대, 단국대 박사 경기도지사 지방행정연수원장정 연춘 서울대, 단국대 박사 한국학술진흥재단이사장 한국교육방송원장박찬종 서울대 9, 10, 12, 13 대 국회의원 국회의원

강경식 서울대,재무부장관 국회의원

황교선 홍익대 박사 한일약품 부회장

주덕 영 서울대, 중앙대박사 기술고등고시합격 상공부국장

오경희 고려대 한국은행 이사 금융결재원 전무

유인태 서울대 국회의원박태권 동국대 충남지사최평욱 연세대 철도청장

깅병천 서울대 (주)석천 대표

서정욱 텍사스대 박사 과학기술처 차관 한국이동통신 사장

나. 특강을 통한 현장 교육 강화

경영행정대학원에서는 현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교육에 중점을 두고 이론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특강을 시행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특강에는 본교 객원교수는 물론 각계의 저맹인사들로 구성되었으며 본교 교수들도 필요에 따라 참여하여 질높은 강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다음에 이제까지 이루어진 특강을 살표본다.

91. 5. 9 국제정세, 역사적상황변화의 의미/이규호/전문교부장관

9 1. 8.22 바람직한 매니저의 자세와 역할/황교선/한일약품부회장

91.10.29 학습권과(교육)행정/정태수/전문교부차관

91.11.14 한국안보와 통일문제/홍성철/평화통일자문회수석부회장

91.12. 6 ’ 92년도 경제 전망과 기업환경/강경식/전 재무부장관

91. 3.10 국내자본시장 동향과 기업경영상의 대응/최명규/경영학과 교수

3.10 통일독일의 복지정책/황진수/행정학과 교수

3.17 인생과 철학/김태길/전 서울대 교

3.31 중년기의 건강과 관리/김계욱/교양과 교수

4. 7 1992년 한국경제의 과제와 전망/강경식/현 국회의원

4.14 관리자의 역할과 책임/이상국/중앙공무원 교육원 교수

4.21 신국제경제질서 형성과 우리의 대응/이순우/대한상사중개원

4.28 한국 고속전철의 전망과 과제/주덕영/상공부국장

5.12 정보와 주식시장 그리고 외환시장/최옥근/무역과 교수

5.12 소음공해의 실태분석과 그 대책/정성택/행정과 교수5.19 금융환경 변화와 기업경영상의 대응/오경희/한국은행이사5.26 봉사와 소유의 상관관계/도재영/기아그룹 사장5.26 정책갈등과 가치결정의 정치/이종수/행정학과 교수6. 2 기업경영을 위한 합리적인 절세방안/황교선/한일약품부회장6. 9 한국정치의 현실과 과제/유상현/정치담당비서관6.16 지방행정의 당면과제/임경호/내무부 지방행정연수원장

8.25 신국제질서의 형성과 한국경제의 진로/이현재/전국무총리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본교의 객원교수제도는 상당히 효과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객원교수의 특강은 1 회성으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강의내용을 요약해서 ‘한성대소식’에 게재하여 널리 알리고 있다.

2) 대학 본고사 실시

전국적으로 9개 대학만이 실시하는 대학입학 고사(본고사)를 본교가 치뤄 냈다. 본교는 최근 2 - 3 년 동안 교육의 내실을 기한다는 목표를 두고 대학의 모든 역량을 기울인 결과 교수확보율은 이미 교육부에서 요구하는 수준을 념어섰고 기자재를 비롯한 각종 시설변에서도 타

대학에 뒤지지 않는 지-부심과 아울러, 본고사를 실시함으로써 대학의 위상을 높이고 보다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려는 목적으로 본고사를 치루기로 결정한 것이다.

3) 강의 평가제 실시

-’ 91 년부터 전국 대학 중 최초로, 벌써 5 회째 시행-

본교는 앞으로의 교육개방을 비롯한 21 세기의 무한경쟁 시대에 대비하기 위하여 「대학교육개혁운동」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는 것이 바로 강의평가제이다.

본교의 강의평가제는 1991 년 6월에 국내 최초로 한 학기 동안 대학에서 개설한 모든 교과목을 대상으로 하였다. 본교의 강의평가제는

1994 년 7 월 현재까지 총 5 회에 걸쳐 실시되었는데 평가의 결과가 교수들에게 환류 (feedback) 됨으로써 강의의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강의평가에서 조사한 항목은 다음의 5 가지이다.

1 학습량」

2 깅의의 질」

3 교수의 강의준비 정도」

4 교수 강의의 전달정도」5 학생들의 출석률」등 5가지 분야

구체적으로 1993 년 6월과 12월에 각각 실시된 강의평가 3 회째의 결과와 4회째의 결과를 학습면에서 중접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결과를 놓고 볼 때 한성대학교 전체 4개 대학에 강의의 수준을 나타내는 5가지 분야는 모두 향상되었으며 이러한 본교의 성공사례는 강

의평가를 통해서 강의평가의 결과가 교수들에게 환류 (feedback) 되는 것이 강의의 수준을 제고시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본교에서 실시한 강의평가제를 통하여 내릴 수 있는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 평가결과

·강의평가를 통하여 평가결과를 교수들에게 환류시키는 것은 대학교의 강의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다.

· 평가결과는 강의평가제 본래의 취지에 맞게 교수의 강의를 개선하는 데에만 사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나. 평가내용

· 평가내용을 결정하기 위한 강의평가 측정도구의 타당성 검증작업에 많은 노력과 시간을 투입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일단 강의평가를 위한 측정도구가 갖추어야 할 신뢰성과 타당성이 실증적으로 인정을 받아야 강의평가의 목적 즉,교수 자신의 강의 개선에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일단 과학적으로 타당성을 인정받는 강의평가 설문지를 전체적으로 개발하면 단과대학이나 학과의 특성에 알맞는 설문지를 변형 개발하고 다시 타당성 검증 작업을 수행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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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ι Rι 인문대 사회과학대 예술대 이공대 전체평균 ’ 93 년 1학 기 터 ’ 93 년 2 학기

주 : 강의평가에서 사용한 5점 척도는 1. 아주낮다 .2 낮다.3. 보통이다.

4 높다.5. 아주높다 따라서 강의평가제 시행에 따라 학생들의 학습량이 증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의 평가 결과

다. 평가방법

· 강의평가의 실시는 한꺼번에 전 교과목에 적용하여 실시하기 보다는 처음에는 희망교수의 희망 교과목만 실시하고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교수가 강의실에서 퇴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강의평가를 수행하는 것은 학생들에게 기밀성 (confidentiality)을 보장해 주지 못하므로,교수가 퇴실한 상황에서 조교가 임석하여 평가를 시행하던지, 또는 강의평가 설문지를 학생들 집에 직접 우편으로 발송하고 우편으로 회수하는 방법 등을 사용하는 것이 연구 결과의오염 (contamination)을 줄일 수 있다.

우리나라 대학에서의 강의평가제는 특이한 대학가의 기류와 결부된 교권 침해를 우려하여 그 시행이 일단 불투명한 상태이다 그러나 교육의 요체가 강의이며, 이러한 강의의 과정에서 교수와 학생은 서로를 평가할 수 밖에 없고 다만 무엇을 어떻게 평가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즉, 대학강의의 현장에는 교수와 학생들밖에 없는 상황에서 객관성이 결여될 수 밖에 없는 교수 본인에 의한 자체 강의평가로 타당성있는 강의평가가 어렵다면 학생들에 의한 강의평가는 교수의 강의

를 개선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제 2 절 각종 연구위원회 구성, 활성화

대학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과거의 자료를 수집·정리 반성하는 동시에 앞날에 대한 철저한 계획이 수립되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세워진 계획에 의거 수정·보완을 거치면서 끊임없는 실천에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어느 한 분야에서만 노력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학의 구성원 모두가 자기의 전문분야를 충분히 활용하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하겠다.

본교는 1991 학년도에 접어들면서 여러 분야에 걸친 위원회를 구성

하였다. 그 종에는 경제적인 목적을 지닌 것도 있고, 교육의 내실을 기하기 위한, 또 교내 공간 시설을 충분히 활용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한 위원회도 있다 이제 각각의 위원회 설립의 배경괴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1) 한성대학 빨전기금 조성·운영위원회

사립대학의 재정난 문제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각 신문지상을 통해 기회있을 때마다 만복되는 얘기이며, 각 대학의 재단 관계지-나 총·학장회의에서도 번번히 나오고 있는 것이 우리니라 사학의 실정인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이-니다. 특히 소규모 짧은 역사의 대학에서는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대학설법지-는 이미 대학을 세울 초창기에 개인의 전 재산을 투여했기

떼문에 더 이상의 투자를 바란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얘기다. 그렇다고 맥 놓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한 몇몇 대학에서는 동문을 비롯한 독지가들에게 눈붉어린 호소로써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여, 개중에는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한 사례도 있다. 우리 한성대학도 이 접에 착안하여 본 위원회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붉론 처음부터 큰 기대를 갖고 출발하지는 않았다. 다만 모든 한성대학 구성원괴, 한성대학과 연관이 있는 독지가를 침여시킴으로써 이뜻을 전달하고 함께 노력하는데 더 큰 의의를 둔 것이다.

위원회의 구성은 기획실에서 시작하였다. 1991년 2월 27일 첫번째 준비 모임에서는 우선 이 위원회의 설립 취지가 나왔고 위원이 결정되었다. 위원장에는 학장이, 위원에는 교무처장, 기획실장, 대학원장이 당연직으로 참여하고, 그 밖에 이석주·이종수·정후수 교수(간사)가 위원으

로 결정되었다.

그 후 몇 차례에 걸친 회의 결과 4월 24 일 최종안이 마련되었다. 여기서 결정된 사항을 보면 우선 본 위원회의 설립 취지를 알리는 동시에 기금조성에 참여할 수 있는 실질적 안내문과 기탁약정서를 학부모를 비롯한 독지가에게 전달하기로 하였다. 다음은 본 위원회의 설립취지와 사업 내용들이다.

(1) 대학발전 기금 조성

가. 설립취지

우리 한성대학은 1972년에 설립된 이래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교수 충원, 교사이전 및 신축, 대학원 설치 등 외형적인 성장과 함께 내적인 충실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습니다. 이는 교직원, 학생, 학부모, 동문을 비롯하여 우리 한성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의 열정어린 보살펌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가 놀라고 찬탄해 마지않는 기적적인 고도경제 성장을 이룩해 온 이변에 우리나라의 문교정책 특히 사립대학에의 국고지원은 아직도 대학 재정의 1% 수준에 머물고 있어서 이웃나라 일본의 22 .4%와는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미국, 일본 등에서는 국가뿐 아니라 사회 각계에서의 지원액도 상당 수준 (30-40%) 이므로 우리나라와 같이 교육비의 대부분을 퉁록금에만 의존하는 형편에서는 대학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경비를 조달하기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는 곧 대학에 대한 외부의 적극적인 투자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지식의 장이자 연구의 장이기도 한 오늘의 대학은 날로 그 사명과 영역이 확대되고 있을뿐 아니라 스스로의 변화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고도의 과학기술시대에 대응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이며 또한 급격히 변모하고 있는 인뭉사회 세계에 대해서도 그 수용능력과 발전능력을 창조적으로 배영: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입니다. 사실 대학은 이러힌 시대사회를 조감하는 장이며 앞장서는 실험적 성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대학이 이러한 시대사회적 요청에 부웅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적 지원이 요청됩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 한성대학은 개척정신으로 비교적 견실하게 발전하고 있는 것이 사실업니다 특히 금년에 들면서 우리대학은 설립자인 고 김의형 박사의 창

학정신을 일깨우는 기풍이 일기 시직했습니다 빅시께서 미련해 놓고 가신 학원의 재산은 생산적인 재정비운동이 진행되고 있으며 우리의 당띤목표인 이담한 종합대학애의 꿈도 지l 획이 수럼되는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디. 한성대혁의 비약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그 밑받침이 되는 교육시설확충과 연구 환경조성이 요구되는 바, 여러 뜻있는 분들괴 힘을 합히여 우리들의 공동 목표를 이루기 위헤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한성대희윷 시링하는 여러분

여러분분의 지-녀외 후진애 대한 성실한 교육은 대학의 시 1정이며 책임이지만, 그 책무를 다히기 위힌 내실있는 교육여건을 민드는 일은 우리 모두 함께 침여해야 할 공동 괴재입니다. 한성대학윤 l발전시키는 것은 갤국 우리 힌성대학외 관떤된 한사람한시람의 관심과 시링애서 시직되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 한성대혁을 구성히고 있는 모든 분들괴 우리대혁을 아끼는 인사들의 격려와 관심 아리l 정기적인 혁교발전을 추진하기 위히여 “한성대학 말전기금 조성·운영위윈회”룹 설립하오니 여리분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부턱드립니다.

니- 시-업 및 안내

힌성대학 발전기금조성·운영위원회 사업내용은 다음과 같다

. 장학금 확충

· 연구 출판 지원

· 도서관 장서 확충

· 학교 시설 보완

- 기타

이 위원회의 실제적 업무가 시작된 지 1 년 동안에는 별 성과가 없었다. 학부모 몇 분이 약간 액을 기탁해 옹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자 교내에 재직하고 있는 교수와 직원 들 사이에서 뜻있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본교에 재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솔선해야 할 것이 아니냐고 자성이 나온 것이다. 이에 따라 교수협의회와 직원협의회에서 곧 실천에 옮겨졌으며 현재까지 약정된 액수도 전년도와 비교될 것이 아

니었다. 앞으로는 더욱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해본다.

(2) 학교 채권 발행

대학의 운영 예산은 일정하게 정해져 있고 정부의 지원 역시 한계에 있는 우리 나라의 실정에서 각 대학이 자율적으로 예산을 증액할 수는 없다. 더구나 특별히 수익사업이 없는 대학으로서는 형편이 더 어려운 것이 우리 나라 대학이다. 이러한 점을 타개하기 위하여 각 대학에서 는 나름대로의 강구책을 쓰고 있는 바 그것은 대학 발전모금이란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어느 정도 한계점에 도달하면 더 이상 많은 액수를 기대할 수는 없다 여기에 착안한 것이 학교채권 발행이다. 대학 채권이란 한 마디로 대학과 관련이 있는 인사들이 대학에서 발행하는 채권을 매입하여 대학의 재정을 돕자는 뜻이다. 여기에는 대학 구성원과 그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일반 시중 금융권과는 다르게 이자

가 없다는 점이 특색이다 본교에서도 이러한 추세에 맞춰 대학 채권을 발행하여 대학 운영에 보조하고자 하여 이를 시행중이다. 다음에 이 취지와 아울러 그 내용을 간략하게 싣는다.

φ 학교채권 발행에 즈음하여

대빙의 신년, 을해년 (1995) 을 맞이하여 학부모님과 내외 여러분 가정에 행운이 깃드시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한 해에도 한성대학교에 대한 여러분의 각별하신 관심과 협조를 통하여 본교가 새로운 모습으로 성장혈 수 있게 되었음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본교는 지난해 여러분의 사랑과 지원에 힘입어 꿈이 있는 자만이 발전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불철주야 노력해 왔습니다. 이에 따라 우리 대학은 교수 확보율이 대학의 정상권인 83% 를 달성하게 되었으며 내실 있는 대학상을 하나하나 구현해 가고 있습니다. 본교에 대한 성가(i첼땀)는 해마다 놀라울만큼 상승하고 있으며 이발전의 속도를 늦추지 않고 매진해 나간다면 21 세기에 진입할 즈음에는 개성있고 자랑스러운 대학으로 굳게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1995 년 새해에도 대학발전을 위한 계획을 착실히 실행에 옮기고자 합니다.

더욱이 1996 년 ‘대희평기’렐 앞두고 각 교육 부분별로 지표룹 세우고 불합리한 요소들윤 과깎히 개선힘은 불론, 혁생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는 좋은 교육 여건을 갖추기 위해 힘쓸 것입니다.

그리나 시립대학의 재정 지원이 뒷받침돼야 한디는 전 χn 기 띠리야 할 것입니다.

이애 대한 재윈 조딜 1앙법의 히나로 우리 대학에서는 금넌에 새로이 학교채를 발행히기로 히였습니디. 우리는 언제까지나 국가나 사회로부터의 지원애 연연해 있을 수 없으며 우리 대희 스스로가 발전의도약기를 맞앙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선용함으로써 획기적인 결실윤 맺도록 할 계획입니다,

이제 대펙 발전을 위한 우리의 대열에 혁생, 학부모, 동문, 교수, 직원 모두의 더욱 큰 애정과 띨정윤 기디l 힘니다. 감사합니다.

@ 발행 내용

학교채 발행 총액 :4 억 7천만 원

발행 대상 : 본교 학부모, 통문, 대학원생, 교직원, 법인 임직원이자 : 무이자

발행기간 1995. 2. 1 - 1996. 1. 31

기체 용도 : 체육관 신축, 실험 실습 기자재 구입

상환 방법

-학부학생 학부모 : 학생 졸업 또는 제적 이후 6개월 이내 상환

-동문, 대학원생 기타 발행일로부터 4년 경과 후 6개월 이내 상환

발행 익-면가 및 매수

10만원 권 (1,200 매)

50만원 권 ( 500매)

100만원 권 ( 100 매)

l인당 매입 한도액 : 1억 원

매입 방법 : 학교에서 직접 매입, 은행을 이용

(3) 대학발전 기금 조성을 위한 작품전

본교의 위상을 높임은 물론 여기서 나오는 수익금을 대학발전 기금으로 조성한다는 취지 아래 작품전을 개최하였다. 일병 〈한성회화제>이는 한성대학교 발전기금 조성을 위하여 미술학과 전임교수들과 동문들이 합심하여 이루어냈다. 개교한 지 20년이라는 기간에 한성대학교는 사학의 명문으로 발돋움하고 있으며 특히 1993 년부터는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여 성장의 면모를 대내외에 과시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미술학과는 다가오는 21 세기의 국내 최고의 정예작가 양성소로 공인 받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대학발전에 앞장서고 있다.

한성회화제

그러한 위치에 있음을 자각하며 미술학과의 구성원들은 단합된 모습을 확인할 겸 전체 대학발전에 다소나마 힘을 더하기 위하여 이러한 행사를 마련한 것이다 더욱이 이번 전시회는 월간 『잖병빠저널』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국내 각 기업체나 디-른 대학에 산학협동의 모범이 되는 행사로 구성되었다.

2) 대학발전 과제연구위원회 활성화

1991 년도 신학기에 접어들면서 기획실의 기능이 활성화되었다 특히 대학의 지1 만 행정을 보다 합리적이고 전문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대학 발전에 관힌- 주요 과제를 선정하여 전임교수로 하여금 연구하도록 위촉하는 동시에 연구비를 지원해 주고, 여기서 도출된 연구결과를 토대로 대학행정에 침-고하여 수행해 나갈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결정

된 과제연구분야와 연구원들은 다음과 같다.

1991 년도

φ 한성대학 건학이념 및 교육목표 정립에 관한 연구

가. 연구 목표

- 한성대학의 교육 이념 확립

· 한성대학의 교육 목적 정립

한성대학의 교육 목적 정립

나. 연구 책임자 : 윤경로 교수

@ 대학시설 공간 사용의 효율성 극대화에 관한 연구

가. 연구 목표

· 연구실·강의실·실습실 공간 이용의 효율성 극대화

대학의 한계 시설면적에 적합한 공간 재배치 연구

나. 연구 책임자 : 이석주 교수

@ 대학 환경미화·개선에 관한 연구

가. 연구 목표

캠퍼스 조경미화에 관한 연구

· 캠퍼스 환경개선에 관한 연구

대학 고유 이미지 부각

- 대학 휴식공간 조성

나. 연구 책임자 : 정종해 교수

@ 대학 행정 및 부속기관 발전에 관한 연구

가. 연구 목표

· 각부서별 사무직원의 소요 판단

· 행정조직 발전 연구

· 행정 전산화 연구

· 각 부속기관 및 연구소 발전 모델 모색

나 연구 책임자 : 강석중 교수

@ 대학 이미지 형상화에 관한 연구

가.연구범위

· 대학고유 로고 제정

. 대학교표 개정에 관한 연구

· 교색 개정에 관한 연구

나. 연구 책임자 : 조열 교수

@ 학부·대학원 교과과정 개정에 관한 연구

가. 연구 목표

· 신커리률럼이론 적용·사회적 수요에 부응하는 교과과정 편성

· 각 분야의 학문발전을 교과과정에 반영

· 전임교수 위주의 교과과정 편성 지양

· 동일과목 및 유사과목의 전공간 학과간 통폐합

· 강의시간의 합리적 편성

나. 연구 책임지 조점환 교수

위와 같은 연구에 의하여 공간배치에 관한 띤구가 가장 먼저 완료되어 1991 년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교수연구실을 비롯한 교내 모든 공간의 재배치가 이루어졌다.

그 후 1992년 2 월 14 일 동계 교수연수회에서는 각 연구 단위별로 중간 보고를 가졌으며 2개월 뒤에는 연구결과를 팎어 ‘한성대학교 발전과제 연구 종합 보고서’ 제 1 집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총282페이지 4.61페판 엮어진 이 보고서는 각 연구단위별로 연구복적을 비롯하여 연구내용이 일목 요연하게 드러나 있다.

대학발전 과제 연 구보고서

한편 기획실에서는 이 1 차 연구결과를 토대로 미진한 부분에 대해서 는 계속적인 연구를, 그리고 새로 필요한 부문에 대해서는 새로운 과제를 선정하여 2차 연구과제를 설정하였으며 현재 진행중에 있다. 2차연구과제와 책임연구자는 다음과 같다.

1992 년도

φ 대학업무개선에 관한 연구 : 강석중(대학행정편람 발간)

@ 대학장기발전 계획에 관한 연구 : 박헌영(대학백서 발간)

@ 한성대학 20년사 연구 : 연정렬(한성대학 20년사 발간)

-대학자체평가 및 대학특성화 방안을 중심으로

대학이미지 형상화에 관한 연구 : 조 열

@ 대학시설공간의 효율적 사용에 관한 연구 : 김대홍

@ 대학·대학원 교과과정 발전에 관한 연구 : 조점환

가. 대학 교과과정 분야 : 김경배

나. 대학원 교과과정 분야 : 황진수

다. 교양 과정 분야 · 김종섭

@ 특별위원회

가. 우촌 김의형 박사 추모집 간행위원회

고문:안호상

위원장:윤경로

위원 : 김창룡, 강월도, 김진걸, 정후수

나. 한성대학 개교20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회

위원장:이석주

위원 : 정진식, 권 오, 조태병

다. 대학홍보 자문위원회

위원장:김원중

위원 : 이상원, 이상한, 문 범, 조덕현, 김응화, 정병용

1993 년도

CD 대학 장기발전 계획에 관한 연구

@ 대학시설 및 공간의 효율적 사용에 관한 연구

@ 대학원 고I과과정 빌전에 관한 연구

@ 대학 행정전산화 딸전에 관한 연구

@ 학생 지도 및 교수법 발전에 관한 연구

1994년도

φ 대학 장기발전 계획에 관한 연구 : 강신일@ 대학 시설 공간 사용의 효율성 제고 연구 . 원형규

@ 대학 교과과정 발전에 관한 연구 : 정성택

@ 대학 교양 교과과정에 관한 연구 : 박호영

@ 대학원 교과과정 발전에 관한 연구 : 김경배

@ 대학 행정전산화 발전 연구 : 홍윤기

1995년도

φ 대학 징-기발전 계획 연구 : 권혁제

@ 대학 교육 자율화 추진 연구 : 홍윤기

@ 대학시설 공간 사용의 효율성 제고 연구 : 이남식@ 대학 행정 전산화 발전 연구 : 김대홍

@ 대학 교과과정 발전 연구 : 김경배

@ 대학 교양교육 발전 연구 : 김용석

@ 대학원 교과과정 발전 연구 : 황진수

1995년 특별 위원회

φ 대학 자체 종합평가 연구위원회 : 이석주

@ 한성학원 50년사 편찬 위원회 : 윤경로

@ 대학 이미지 형상화 위원회 : 이상원

(1) w 한성대학교 20 년사』발간

우촌 김의형 박사의 건학 20주년에 즈음하여 이 책자를 발간하였다 이 책자는 경영학과 연정렬 교수가 중심이 되어 한성여자대학 인가 발족으로부터 요람기, 도약기, 확장기, 성장기, 부록 등으로 구성되어 지난 20년 간 한성대학교의 역사가 한 눈에 들어 있다.

(2) 우촌 김 의 형 박사 추모집 『짧山의 三體松』발간(1 993. 3. 1)1993 년 타계 10주기를 맞아 본교 설립자인 우촌 김의형 박사의 행적을 담은 이 책자는 우촌 선생의 생애와 업적을 비롯한 교육정신, 건학 이념이 담겨져 있어 한성인의 정체성을 고양시킬 수 있는 좋은 지침이 되고 있다

한성 학원 설립자 우촌 선생 추모집

제3절 부속기관 활성화

1) 중앙도서관

본교 도서관은 1973 년에 한성여자대학 도서관으로 개관하였다. 1978 년 3 월에 한성대학으로 변경됨에 따라 한성대학 중앙도서관으로 개칭하였고, 1981 년 10월 종합관 준공과 함께 이전히-였으며, 1984 년 8월 현 건물의 신축 이전과 더불어 지속적인 성장을 하였다. 특히 1988년 3월부터는 완전개가식 체재로 운영해 왔다.

도서관의 생명은 장서의 확보와 정보제공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도서관 시설도 이에 따라 신축성 있게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1991 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약 4년간의 변천 모습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장서 확보 및 도서구입비 추이

연도별 장서 추이를 살펴보면 1990 년에 비해 1994 년 말 현재는 지난 5 년간의 약 1.5배 성장하여 시설기준 대비 확보율이 96.5% 를 달성하였다. 지난 수년간 시장도서를 정리한 점을 고려한다면 실질적으로 최근의 장서 구입이 활성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간 중에 현설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장서어 대해서는 과감하게 정리한 것도 도서관의 활용도를 높인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

(2) 연속 간행물(종별)

1991 (192종)

1992 (183종)

1993 (241종)

1994 (355종)

(3) 시설 확충

1991. 8. 사무용 P.C 2 대 프린트기 1 대 구입

1992. 2. 도서관 환경 개선

· 금연 휴게실 설치

· 흡연 휴게실 설치

· 일반 열람실 대형 온풍기 교체

· 신문열람대를 계단 벽면으로 위치 변경

1992. 8 최신 에어콘 교체 설치

1993. 10. 정보검색실 개설

정보검색실 이용 방법 설명

(6) 전산망 구축

도서관이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좋은 시설을 지녔다는 것은 학문 연구를 위한 기본적인 여건은 될 수 있다. 문제는 최종적으로 도서관에 소장된 많은 자료를 어떻게 관리·운영하여 이용지-로 하여금 짧은 시간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느냐에 춧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이에 본 도서관에서는 정보의 효율적 제공을 위해서는 모든 정보를 전산망으로 엮어야 한다는 점을 감지하고 차근차근 실무작업에 착수하였다. 현재 수서작업부터 ’ 95 년도까지 대출 반납에 이르기까지 연차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전 직원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의욕에 따라 본교의 전산망은 착실하게 구축되고 있으며 도서관 공간확보와 전지·도서관 설립을 예정으로 학생회관 5, 6층에 증축공사가 95 년 완공하였고 정보전산원이 개설될 예정으로 있다.

1991 학년도부터 추진되어 용 도서 데이타 베이스 구축 작업이 지속

적으로 이루어져 현재 바코드 입력이 진행되고 있으며 1994학년도 한해 동안 신설된 장비로는 전자계산소에 연결된 달말기, 자료 보존을 위한 백업 드라이브 등이 있다,

특히 정보화 시대에 부응하여 국내 외 정보를 교수와 학생들에게 제공함으로 목적으로 한국섬유산업연합회 정보센타 등 각종 네트 워크에 가입하였고 국제적으로널리 쓰이고 있는 전산망인 인터네트를 실험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그 사용을 확대할 예정이다.

1995 학년도에도 지속적으로 도서관의 전산화 및 정보화를 위한 활동을 추진할 계획에 있으며, 특히 최근 수 년간 학교발전 연구위원회에서 제안되었던 자료를 바탕으로 하드웨어를 이용한 교내 전산망을 구축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한펀 본교 중앙도서관에서는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1994년 상반기에 일찍이 정보검색실을 설치하였으며, 이를 통하여 국내 외 정보를

각종 NETWERK 를 이용하여 교수와 학생들에게 무한 제공하고 있다. 이를 각 정보망별로 구분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천리안

공중정보 통신망인 데이콤 네트와 전화망을 통하여 메시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PC 통신 서비스에서부터 뉴스, 기상 등의 일상 생활, 세무, 노무, 교육정보 등의 정보 검색서비스 및 가정과 사무실에서의 상품 주문, 배달, 공연물 예약까지 할 수 있는 ‘종함정보 통신서비스’이다.

특히 교육, 문헌 취업은 대학의 진학 정보와 국립중앙도서관의 석박사 학위 논문 단행본을 검색할 수 있으며 문헌정보, 취업정보, 시사영어해설을 제공한다.

나· DIARLOG

DIARLOG 는 미국 록히드 항공사에 의해 개발된 세계 최대 종합 정

보은행으로 과학 의학 인문사회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정보를 수록하고 있고, 약 2 억 7 천 만 건에 이르는 3 백 70 여 개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보유하고 있다.

다· KINIT-IR

KINIT-IR 는 산업기술정보원(상공부 산하 정부출현 연구 기관)이 설계 구축한 ‘온라인 정보서비스 시스댐’으로 산업계와 학계에서 기술개발과 연구활동앵 필요한 국내외 과학 기술, 특히 산업 연구개발 등의 정보를 구축한다.

라· LINNET

LINNET 는 포항공과대학 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는 학술정보와 우리 대학교에 있는 자료를 통해 상호 이용하는 것인데, 특히 포항공대가 외국학술잡지 3 천 5 백 여종을 확보하고 있으므로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마. CD-ROM

이것은 백과사전, 외국 학술자료, 교양 등의 검색을 할 수 있다 특히 BOOK in print 는 서양도서의 서지사항을 URRICH ’ S는 서 양잡지의

서지사항을 찾아볼 수 있고, 또한 브리테니카 백과사전 등 여러가지 CD-ROM 을 학생들이 검색할 수 있다.

바. MICRO READER

마이크로 필름, 롤 필름 등을 이용하여 신문 등 학술자료를 검색, 프린트할 수 있다.

사 VIDEO

3백 94 개 비디오 테이프가 준비되어 있어 교양, 어학, 영화 등 교습 및 감상이 가능하다. 도서관 4층 휴게실에 비디오를 설치하여 프로그램에 의해 회화와 교양프로그램을 1 일 3 회 상영하고 있다. 이러한 서

비스 중에서 4번까지는 정보 이용 요금이 부과되지만 5 번 이후부터는 무료로 제공되고 있으며 연속간행물실 내의 정보검색실에 들르면 자세히 안내를 받을 수 있다.

2) 전지·계산소

본 대학 전자계산소(이하 “본 전산소”라 한다)는 본 대학 교육이념의 수행과 정보화 시대의 도래에 따른 교직원, 학생들의 연구활동지원및 실습 지원과 행정업무 전산화를 목적으로 1990년 2월 28 일 개소하였다.

본 전산소는 미국의 Data general사의 최신형 Computer 인 MV- 15, OOOSystem 에 30대의 터미널을 연결하고 각종 Programming 언어와 Software Package를 설치하여 학교행정의 전산화와 함께 학생들이 원하

는 시간에 실습을 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또한 개인용 PC사용을 원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제 lPC실습실(과학관 302 호)과 제 2 PC실습실(과학관 301 호)에 각각 35 대의 Pc.와 각각 40 MB씩의 Hard Disk를 장착하여 학생들이 원하는 시간에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본 전산소는 개소 이래 본교의 행정업무 전산화를 최대의 과제로 선정하여 가능한 빠른 시일내에 타대학보다 나은 완벽한 전산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 91 년 l 학기까지 교무, 학사관련 업무를 완전 전산화하였고 1 차로 학적과에 On-line을 설치하여 학생들이 제증명서를 신청하면 즉시 발급이 되도록 하였다. 2차로 교무, 관리, 기획, 경리업무 등을 전산화하여, 교무과에서는 학생신상이나 성적, 수강신청등 모든 필요한 내용들을 On-line으로 조회할 수 있게 되었으며, 관리과에서는 비품의 이동 상황이나 신규 배치 등을 즉시 처리할 수 있게 되어 불필요한 비품의 구입을 방지하고 필요한 비품만

을 적절히 배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예산의 효율적인 편성과 집행을 위하여 예산의 편성 및 지출에 관련된 일련의 작업들을 전산화하여 예산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직 전산화가 미비된 업무의 종류와 개발일정은 다음과 같다.

끝으로 전산화 추진 계획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교직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을 각각 년 2회 정도 실시하여 현대인의 필수지식인 Computer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수요에 따라 System을 적절히 증설해 나갈 예정이다.

(1) 전산교육

전자계산소에서는 급증하는 COMPUTER 수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수시 로 COMPUTER 기 본과정 , DATABASE, SPREAD-SHEET, WORDPROCESSOR 등의 특강을 학생 및 직원들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고 새

로운 요구가 발생할 경우 이에 적절히 대응해 니-가고 있다. 92년도 1학기에는 신입생을 대상으로 컴퓨터 기본 과정과 WORDPROCESSOR 과정의 특깅을 실시하였다.

첨단 PC를 갖춘 제2 실습실

(2) 부서별 행정 전산화

본 전산소 주도로 각 부서별로 부분적인 ON-LINE화가 추진됨에 따라 본교의 행정 전산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따라서 각 부서의 업무처리가 신속,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부서별 주요 작업 및 계획 내용을 업무별로 분류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학적 관리〈학적과〉

91 년 11 월부터 재학증명서를 비롯하여 졸업(예정)증명서, 재적증명서, 학적부 및 성적증명서 등 학적과 증명업무가 전산화되어 현재 전체 졸업 및 재학생들은 모든 증명서를 즉석에서 ON-LINE으로 발급받을 수 있다. 그 외의 기타 학적 업무는 변동이 발생하는 즉시 처리토

록 하여 학적업무의 신속 정확성을 높였다.

나. 교과과정 관리〈교무과〉

교무과는 연도별 교과과정표 관리, 교과과목관리, 담당교수 배정, 분반 관리, 강의실 관리, 시간표 작성 등의 업무를 전산처리한다.

이를 토대로 교원 책임시간 및 초과 강의시간관리 등 많은 교무업무 관련자료를 행정부서가 쉽게 이용할 수 있다.

다. 수강신청 관리〈교무과〉

학생들의 수강신청서를 전산소에서 입력하게 되는데 이에 발생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수강신청서를 학생 본인이 전산소 실습실 터미널을 이용하여 입력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수강신청 자료를 이용하여 대학 교무과에서는 초과 수강신청자, 미등록 수강신청자, 학점미달 수강신청지, 수강신청 누락자 등을 전산 관리할 수 있게 된다.

라 성적 관리<학적과>

매 학기 학적과에서 성적표를 교수에게 배부하면 담당교수는 소정기일내에 성적을 기입하고 서명 날인하여 학적과에 제출한다.

전산소에서는 담당교수의 성적표를 입력하고 학생은 성적 확인 및 정정기간 중에 전산소터미널에서 본인이 직접 성적을 확인하고 이상이 있을 경우 학적과에 이의신청을 하면 소정절차를 거쳐 수정하게 되며 전산소에서는 영구보관 성적화일을 만들어 보관한다. 이후 성적정정은 불가능하다.

미 장학 관리 기타〈학생과〉

매 학기 재학생 성적화일이 완성되면 학과밸 성적순 명부를 학생과 로 송부하여 장학위원회를 거쳐 장학생이 결정되면 장학생 및 장학금을 입력하여 등록금 고지서 발송사 이를 반영한다. 또한 학생과 관련된 제반 사항들도 ON-LINE 조회가 가능하다.

비 등록 관리〈경리과〉

전신·소에서 재학생 및 복학 예정자에 대한 등록금 고지서를 출력하여 경리과애 인계하고 경리과에서는 학생들에게 등록금 고지서를 발송

한다. 전산소는 등록예정자 화일을 은행으로 송부하고 등록기간이 끝나면 등록자 화일을 은행으로부터 받아 처리하여 이를 경리과에 통보한다. 미등록자 조회, 추가등록, 등록금 고지서 분실로 인한 재발급 등은 경리과 창구에서 처리할 수 있다 또한 등록사항에의 일지별, 시간밸관리도 가능하다.

시 교직원 인사 관리〈교무과, 총무과〉

교직원의 신상자료 및 임용, 승급, 논문, 보직 등에 관한 데이타 베이스를 구축하여 이를 활용한다 또한 중고등학교까지 포함하는 교직원 인시- 관리 업무를 개발하여 ON-LINE 으로 가동할 예정이다.

아 급여 및 회계 관리〈경리과>

급여 업무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연말 정산까지 자동 처리되는 급여 전산 SYSTEM 을 구축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회계 업 무까지 ON-LINE 화 할 예 정이다.

자 병사 및 예비군 관리〈예비군대대〉

전산 입력된 학적자료와 교직원 인사 관리자료에 의거 병무청 보고용 학적보유자 명부를 전산 처리하고 있으며 학적 변동 등의 각종 병사 및 예비군 관련자료를 추출하여 업무에 활용한다.

차. 예산 관리〈기획과〉

예산 관리 SYSTEM 을 도입하여 배정 예산과 사용내역을 즉석에서 입력조회할 수 있도록 하므로서 예산 설정에서부터 집행·결산에 이르기까지 효율적인 예산 관리를 하도록 한다.

타. 비품 관리〈관리과〉

비품 관리 SYSTEM 을 도입하여 비품이 사장되는 것을 막고 비품이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되므로 하므로서 경비 절감에 기여하도록 하기

위해 관리과에서 비품의 이동사항, 신규 배치 등을 입력하고 필요한 내용들을 즉시 출력하여 이용한다.

3) 민족문화 연구소

본교 부설 민족문화 연구소의 윤경로 소장을 비롯한 조교, 그리고 대학원 석사과정의 정통일씨는 우리 선조들이 사용해 왔던 농경 생활기구를 수집하여 1991 년 6월 11 일 전시관을 개설하였다.

본대학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오래 전부터 계획, 준비해온 ‘농경생활사 전시관’은 우리 농촌의 어제와 오늘의 모습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각종 농기구와 민속자료로 꾸며졌는데 아직 어느 대학 박물관에서 도 시도하지 못한 희귀한 전시관이다. 그래서 이 전시관은 전 한성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방문객들도 이구동성으로 칭찬의 소리를 한마디씩 남기고 간다. 우리나리는 일찍부터 전형적인 농업국가로 발전했기 때문에 생활양식과 관습, 풍속은 물론 민족의 애환이

‘땅’과 더불어 일구어진 농촌촌락과 그 가운데 형성된 농경문화 속에 담겨 오늘에 이르고 있게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추진으로 인하여 우리 모두의 삶이 터전이자 근거지였던 농촌사회는 빠른 속도로 무너져 가고 있다. 바로 이 점을 감안, 농촌사회에서 사라졌거나 잊혀져 가고 있는 농민들의 손때 묻은 전통적인 농기구류와 민속자료 등을 수집, 정리하여 꾸민 것이 이‘농경생활사 전시관’이다. 여러가지 모양과 각기 다른 용도의 농기구와 전통 생활용품을 통하여 우리는 수천년을 이어 온 우리 농촌의 삶의 모습과 선조들의 지혜를 배울 수 있게 된다.

현재 이 전시관의 소장품은 5 백여점, 품목으로는 2 백여점에 이른다. 이 전시품들은 주로 경기도 일원에서 최근까지 사용되던 농기구들을 수집한 것. 그러나 이들 전시품 중에는 이미 상당수는 우리 농촌에서 찾아보기 어렵거나 머지 않아 사라질 것들로, 시대적으로는 고대로부터 쓰여 오던 단순 농기구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비록 한국 농경문화 전체를 조망할 만한 규모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으나 오히려 그동안 항토사 연구분야에서 소외되어 왔던 경기 일원, 특히 한수 이북 농촌사회의 지역적 특성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들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농경생활사 전시관

제4절. 홍보활동 강화와 대학 이미지 제고

대학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점은 그 대학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본교처럼 역사나 규모가 대규모 대학보다 열세에 있는 경우에는 더욱 간절한 현실이다. 그것은요즘같이 취업난이 피부로 닿는 재학생들에게 절실하게 필요성을 갖게된다. 그러므로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각 대학은 대학 홍보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고, 이와 함께 우리 대학도 각종 홍보물 제작에 열의를 띠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나온 제작물이 ‘한성대 소식’이라는 홍보물이다.

1) ‘한성 대 소식 ’발간

1991년 3월 4일자 제 1 호를 낸 이 ‘한성대 소식’은 8 페이지 4.6배판으로 제작되었다. 기획실에서 발간한 이 홍보지는 학생들이 자치활동으로 제작하는 ‘학성대학보’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특별히 학생을 주대상으로 하지 않고 교직원 및 교육부를 비롯한 전국 주요 고등학교는 물론 서울 시내에 있는 중·소·대 기업에도 배포함으로써 동시에 여러가지 목적을 기대하고 있다. 이는 교내에서 움직이는 각 부서의 활동 모습을 포함하여 교직원의 동정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소식을 접할 수 있으며, 각 고등학교의 우수한 졸업생을 유치할 수 있는 계기도 가질 수 있다. 또 많은 기업체에 우리의 활동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졸업생들에게 취업의 관문을 넓힐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해봄직 하였다.

‘한성대 소식’은 1995 년 4월 현재 45호가 나왔으며 1 호부터 현재까지 기사의 취재에서 기사 작성, 편집의 모든 과정은 대학 자체에서 담당하고 있다.

2) 홍보자문위원회 구성 운영과 대학 기념품 제작 판매

한편 기획실에서는 각종 홍보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홍보자문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홍보자문 위원회는 기획실에서 제작한 안을 놓고 자문에 응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간 제작된 홍보물은 ’92 카렌다를 비롯하여 브로셔로서 주요 대학 관계 기관인 물론 서울 시내 고등학교에 배포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1) 대학 기념품 제작 판매

이와 아울러 대학에서 생활하는 교수직원 및 학생들에게 한성대학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각종 생활 필수 기념품을 제작하여 염가로 판매함으로써 학교 사랑하기 운동도 함께 펼치고 있다. 1992 년 여름 현재 제작된 기념품은 다음과 같다.

목시제, 라이타(l회용), 라이타(클리퍼), 스텐머그컵, 동호리컵, 액자,전화카드, 메모지, 타올, 다기 세트, 키홀더, 앨범, 레터지, 항공봉투, 20주년, 화집, 연하장, 골프/스포츠 타올, 지갑 / 벨트, 뱃지

(2) 홍보슬라이드 제작

대학의 발전상을 한 눈으로 보여주는 슬라이드가 제작되었다. 1992년 11월 24일 개교 기념식장에서 첫 방영된 이 홍보슬라이드는 디졸브방식으로 만들어졌으며 약 150 컷트 15분 정도의 분량으로서 대학의 모든 변을 자세하고 알기 쉽게 꾸며놓았다.

(3) 본대학 이미지 마크 제작

대학의 이미지를 제고하기 위한 방법은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으나 각 대학이 내세울 수 있는 이미지를 개발하여 독자적으로 사용하는 것

은 또 하나의 이미지를 위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본 대학에서 는 이러한 면에 착안하여 한성대학교만이 지니는 이미지 마크를 제정하여 이를 각종 홍보물에 사용함으로써 대학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있다. 본 대학의 이미지 마크는 ‘보든 행사와 각종 인쇄물에 활용, 대학의이미지를 세계화 속에 부각, 대학 구성원의의식개혁과 일체감 조성’을 목적 으로 1995 년 2월 제 작하였다.

이번에 제작된 이미지 마크는 대학의심볼 마크(교표)와 함께 모든 행사와 각종 인쇄물에 공식적으로 활용하게 되는데 그 제작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학의 이미지를 세계화 속에 새롭게 부각시키고자 하는 대외적인 면과 대학 구성원들의의식 개혀과 일체감을 이루기 위한 내적인 측면,

그리고 대학 이미지를 고양시킬 수 있는 유형의 다양화, 즉 너무 복잡하고 경직되어 보이는 기존 심볼 마크만으로는 각종 홍보물 적용에 한계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이를 보완한다는 측면에서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제작과정으로는, 먼저 각 기업이 최근에 도입한 이미지 마크 사례들을 조사 분석한 후 본 대학의상징적인 의미가 강한 요소들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보았다.

결국 대학은 인간, 교육, 미래 사회를 위한 장으로 귀결되어 이를 디자인 걷셉으로 설정 제작하게 되었고 여러 안 중에서 최종 안으로 A, B 타입이 선정되었는데 두 안으이성격이 서로 달아 상황에 따라 적절히 활용하기로 하였다.

이미지 마크의 의미는 A타업의 경우 학사모(대학 상징)를 단순화한 마름모형을 바탕으로, 지구의 하일라이트부분( 갇::0.-)을 조형 요소로 접목시켜 세계화를 향해 웅비하는 모습을 이미지화 하였고, 3개의 선형(:~)은 대학의 과거, 현재, 미래의 점진적인 발전상을 시각화하였다.

B 타입의 경우 대학의 이나셜인 ‘ u ’지-를 기본으로 반복 활용하였으며 두 개의 점은 교수, 학생, 또는 남녀를 상징하며, 마크 전체 분위기는 상호 보완 작용과 협동을 나타내는 형으로 국제화를 향해 끊임없이 창조하려는 대학의 정신을 형상화하였다.

색상 활용면에서는 A, B 타입 모두 대 1 학의 각종 인쇄물인 신문, 잡지광고, 홍보물, 선물용품 등에 활용되며, A 타입은 주로 대학의 공식적인 행사, B 타입은 대학축제, 스포츠 행시, 학생들의활동을 대내외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이벤트성 마크로 활용할 수 있다.

A 타입

B 타입

대학 이미지 마크

제5절 교육환경의 획기적 개선

본교가 개교한지 15 년에 접어들면서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면서 교육공간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과학과을 신축하는 등 공간문제에 많은 신경을 써 왔으나, 그에 비해 환경자체에 대해서는 미처 눈길을 돌리지 못했었다. 낙산은 좋은 숲이 우거진 공원이었으나 그대로 방치되었고, 실내의 시설물도 크게 손봐야할 부분도 많이 있었다.

서정희 이사장은 우선 교내 교육환경을 말끔히 정리하고 교육시설 개선에 주력하였다. 그 내용 중 중요한 몇가지는 그 내용을 소개하고, 아울러 현재까지의 모든 공사내역을 요약 정리해 본다

1) 실내환경

(1) 소강당 보수

학생회관에 자리잡은 소강당이 새모습으로 변모하여 개관되었다. 무대확장을 비롯하여 천장 텍스가 교체되고 환풍시설이 설치되었으며, 사면의 벽과 출입문을 방음처리하고 조명시설을 새로 교체하였다. 그리고 에어컨을 설치하여 냉·온방 장치를 갖추었다.

(2) 綠茶짧(휴게 실) 개 장

본교 우촌관 옥상에 스차이 라운지 형태를 지닌 휴게실 ‘녹다원’이 개장되었다. 이에 따라 교내의 손님을 맞아 마땅히 찾을 만한 곳이 부족하던 본교 교직원에게 큰 편리를 안겨 주었다. 50 여 평의 규모로 64석을 확보하고 있는 ‘녹다원’은 양식을 주로 하고 차와 와인 종류를 준비하고 있는 고급 휴게실이다. 한편 여기에 ‘주식회사 인켈’의 조석구사장이 오디오 셋트를 기증하여 클래실 감상도 겸할 수 있게 되었다.

(3) 우촌 전시실

본교 우촌관 1층에 지리잡은 ‘우촌 전시관’. 당초에는 65 평이던 우촌 전시관은 1층의 본 전시관 65 평과, 2층 소전시관 22평으로 총 87평을 갖게 되었다. 천정은 철재 H 빔으로 현대적인 공법으로 설계하였으며, 2층 현관문 옆에는 따로 야외 휴게실을 마련하였다.

1992 년 4월 15 일 완공된 ‘우촌 전시설’은 국내 여타의 대학의 전시실은 물론 어떤 화랑의 수준에도 뒤떨어지지 않은 공간으로서 한성인 누구도 자랑스럽게 여길만한 곳이다.

한편 이 전시관 개관을 기념하기 위하여 본교 미술학과 교·강사, 졸업생 재학생들이 마련한 ‘제 3 의 장’이란 주제의 전시회를 가졌다.

교내우촌전시실

(4) 교내 복지홀 및 이용실 개설

여학생들을 위한 학생 ‘복지홀’이 학생회관 1 층에 자리잡고 문을 열었다. 기존에 있던 서점이 우촌관 1 층으로 옮겨지고, 그 자리에 들어선 복지홀은 미용실과 아울러 화장품 코너가 마련되었다. 특히 미용실과 화장품코너는 시중보다 월등히 싼 가격으로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으며, 여학생들을 위한 휴게실을 겸하고 있어서 여학생만의 전용시설이 부족한 상황에서 여학생들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고 있다.

한편 매점 옆에는 이용실이 새롭게 단장되어 남학생들이 저렴하게 이발할 수 있게 되었고, 학생식당 옆에는 안경점이 설치되었다.

(5) 학생 휴게실에 오디오 셋트 설치

학생처에서는 이번 학기 학생회관 구내매점을 겸한 휴게실에 오디오 셋트를 설치하였다 총학생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학생처에서 설치한 오디오 셋트는 주로 학생들이 이용하고 있는 휴게실의 분위기를 아늑하고 밝게 꾸민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학교 전체 환경을 아름답게 한다는 학교의 방침과도 일치하는 일이다.

(6) 남·녀 체력단련실 및 샤워실 마련

학생회관 지하에 체력단련실이 말끔히 정리·보수되었다. 1·2년까지 는 주로 남학생만 이따금 이용되었던 체력단련실은 학생들의 인식부족과 분위기를 가지고 활동되게 꾸며졌다. 곧 남자와 여자의 구분을 두고 각자 취향에 맞는 운동기구를 이용할 수 있으며, 체력 단련실 곁에 는 남·녀 샤워실을 별도로 만들어 이용에 편리하게 만들었다.

2) 실외환경

(1) 상징탑

한성을 대표하는 상정탑 건립이 1991 년 11 월 완성되었다. 이 상징탑은 1983년 대학의 상정붙이 거북이로 결정됨에 따라 이를 상징하는 상징탑 건립이 요구되었다. 이에 김경지 기획실장이 1990년 3월 ‘상징물 건립 추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아 추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약 1년 동안 상징물인 거북이의 특성 및 의미의 상징화를 연구하였고, 1991 년부터 산업디자인학과 교수팀이 제시한 모텔에 따라 오늘날의 상징탑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상징텁은 십장생인 거북이를 형상화한 모습으로 대형탑, 소형탑과 수위실 3부분을 일체식으로 건립하였는데, 거북이가 지니는 의미-장수동물, 끈기, 신통성-와 함께 이제는 한성의 상징으로 한성인과 더불어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

가. 상정탑의 형태

상징탑은 십장생의 하나인 거북이를 형상화한 모습으로 대형탑, 소형탑과 수위실 3부분을 일체식으로 건립하였음

나 본대학 상징물 거북이의 의미성

생태학적 특성 : 100년 이상의 수명을 가진 장수통물, 성장기간이 짧다, 끈기의 상정

거북이의 상징성 : 거북이는 상서롭고, 신통성, 영통성을 지닌 우주를 대변하는 동물로 여겨져 왔다. 그리고 고대로부터 우리 인간을 구원해 준다는 우화와 실제적인 실화가 있다.

다 상징탑의 규모 및 재질

- 대형탑 12m, 소형탑 7.2m 수위실 3.7m임.

· 소요 자재 : 화강암언 황등석 152톤, 철근 10톤

상징탑 전경

(2) 낙산 談花팎 개축

낙산 중턱에 자리잡은 의화정이 말끔이 개축되었다. 원래 이 의화정은 한성학원 설립자 우촌 선생이 40여년 전 학교를 개교하면서 동네 어른들과 담소를 즐기거나 활쏘는 장소로 활용하던 곳인데 근래에 특별히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완전히 퇴락되었다.

이번에 개축하게 펀 의화정은 원래의 모습과 크기를 그대로 유지하되 지붕의 추녀를 좀더 길게 내리고 약간 치켜 올리는 모습을 한다. ‘談花판’이라는 현판은 옛날 것에 다시 색을 입혀 걸었으며 뒷편의 방은 모습을 달리해서 등파고라(등나무 그늘)시설을 하였다.

(3) 낙산야외 공원 정 비

본교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 뒷편에 6,000평 정도의 낙산(縣LLi )은 공원으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작년 봄부터 정비직업을 시작

하여 최근 마무리 지은 이곳은 울창한 숲 속에 잘 다듬어진 산책로와 그 사이 곳곳에 100여개의 벤취가 마련되어 틈틈이 학생들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4) 대규모 화단 조경 시설

지선관 앞에 자리잡고 있었던 스텐드가 화단 조경공사를 실시함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번에 꾸며진 조경은 학생들에게 스텐드라는 딱딱한 분위기에서 화단이라는 신선한 모습으로 선보이게 되었다.

한편, 지선관 앞 분수대가 있는 마당도 새로이 화단으로 모습이 바뀌게 되어 초록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5) 육각정자 騎山휴 설치

낙산 정상에 육각형의 아담한 정자가 마련되었다. 붉은 인조석으로 기등과 지붕을 얽어매고 그 위에 대나무 차양막을 얹어서 등파고라를 만든 이 정자는 낙산언덕 바위 위에 설치된 휴식처로 벌써부터 많은학생들이 이용하고 있다. 한편 그 주변에는 잡풀을 솜아내고 잔디를 입혔으며 곳곳에 벤취를 만들어 놓았다.

(6) 과학관 진입로 아스팔트 포장

학생회관에서 과학관까지 도로가 마련되면서 포장공사를 끝냈다. 이 공사는 기존의 운동장 스탠드를 전면적으로 바꾸어 조경시설을 설치하며, 그 아래에 과학관 진입로를 개설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이다. 이로써 종전에는 운동장을 가로질러야만 과학관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이 이 진입로가 완성됨으로써 운동장을 거치지 않고 곧장 과학관으

로 연결될 수 있게 된 것이다.

(7) 의화장

경기도 팔당 강변에 위치한 이곳은 설립자 김의형 박사가 사용하던 개인 주택을 한성학원에 기증한 건물로서 학생들의 수양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번에 새로 보수하거나 신설된 점을 보면,먼저 2층으로 된 건물 전체에 파손된 부분을 수리하였다. 떨어진 문짝을 새로 만들어 끼우고 방마다 산뜻한 분위기를 창출하도록 꾸며 놓았다.

한번에 200 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본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진 의화장은 원래 한성학원의 가족을 위해서 희사한 것으로서 대학인은 물론 한성여중·고까지도 개방을 해왔다.

(8) 분수대 설치

지선관에 분수대가 설치되어 조경 공사 및 휴식공간이 마련되었다. 회화과의 정종해 교수가 설제한 이 분수대는 10 - 14 미터의 높이에 스텐 파이프 6개와 1.5 미터 - 2.3 미터 높이의 스텐 파이프 24개로 구성되었고, 주변에 지름 7 미터, 원형 둘레 20 미터의 인조바위가 설치 되었다.

(9) 낙산 구름다리 설치

중앙도서관 3층과 낙산을 연결하는 구름다리가 종전에 설치된 지선교와 같은 형식으로 제작 완성되었다. 이 공사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쉬는 시간에 낙산의맑은 공기를 미-시며 힘을 재충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마련한 것이며 10 미터의 대형 철제로 건설되었다.

이 우촌관 광장에 이념탑 준공

우촌관 계단 광장에 새로운 조형물이 등장하였는데 바로 이념탑이 그것이다 회화과의 문범 교수가 제작한 ‘세계 - 나무’라고 이름이 붙여진 이 조형물은 하늘이 투영 반사되는 아메바 형상 위에 세계를 상정하는 지구의가 올려져 있다 아울러 이 조형물을 떠받치는 기퉁은 6개의 기둥으로서 이 6개는 본교 상징물인 거북의 등을 상징하고, 죽뻗어 오른 기퉁은 나무와 그를 둘러 싼 수풀을 나타낸다.

재로로는 스테인레스판과 파이프 브론즈캐스팅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는 6 미터, 기둥 반경은 1 미터이다.

이넘탑

자. 낙산 남문 준공 (1994. 9)

여름 방학 기간 중에 완성한 낙산의 남문 완공 낙성식이 9월에 있었다. 남문은 낙산 중앙에 길이 15 미터 높이 12 미터의 규모이며, 동대문 방향으로 곧장 통행 할 수 있다. 또한 남문 주변에는 길이 130t그1 터의 담장을 개방적인 펜스 형태로 제작하여 미적인 감각을 최대한 살렸으며 외등을 설치하여 야간 이용에 불편을 없었다.

낙산 주변은 관리인이 순찰을 돌고 야간에는 외등 30 여개를 설치하여 보안에 힘쓰는 동시에 CCTV 감시나 경보기를 설치하였다.

낙산 남문

제6절 학생활동을 통한 대외적 이미지 향상

대학의 사명이 연구와 교육이라고 간단히 규정짓는다면, 교육부문이 차지하는 비율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교육은 후진 양성에 곧바로 이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본교는 서울 시내에 위치하고 있을만큼 지방의 대규모 대학보다 우수한 학생을 유치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입학당시의 우수한 학생들을 어떠한 교육 과정을 통하여 보다 우수한 실력과 인격을 지닌 사회인으로 형성시키는가에 관심을 모여지게 되며, 결국 이 막중한 역할을 대학당국, 특히 교수의 책임이 크다고 하겠다.

물론 교육의 효과가 단기간에 가시적으로 나타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육의 과정에서 단기간에 가시적인 효과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각종대회에 참가하여 우수한 성적을 올리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 항목에서는 이러한 점에 춧점을 맞추어 몇가지 중요한 실적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1) 탁구부

본교의 탁구부는 전국 최고의 수준임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본교 탁구부 출신으로서 세계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국가대표선수만 해도 김기택, 김 완을 비롯하여 ’90 북경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은메달 획득한 홍차옥 등은 바로 좋은 예에 해당된다.

본교에 탁구부가 창설된 것은 1976년도부터였다. 그리고 최근까지 계속해서 국내외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둔 기록을 가지고 있다. 다음에

탁구부의 주요 연혁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연혁

1976.3.3 여자탁구부 창설

1981. 3. 여자 탁구부 해체 남자탁구부 창단

1982. 국무총리기 쟁탈대회 남자대학부 우

종별선수권 대회 남자대학부 우승

전국체육대회 대학부 우승

1983 제1회 대학선수권대회 남자부 단체, 개인, 복식 우승

1984.8.8.-1 5. 일본체육대학 탁구부 방한, 본교선수와 합동훈련실시

1985. 1.1. -15 일본 체육대학방문 합동훈련 및 상호교류협정서 작성, 대만방문 친선경기

1985.7 . 전국종별 선수권 대회 우승

1985.8. 일본체육대학본교방문 합동훈련실시

1986.10. 전국체육대회 준우승

1989.10. 제 22 회 체육부장관기 여대부탁구단체우승

1992.5. 제 10 회 전국춘계대학연맹 3위1992.6. 제 38 회 전국종별선수권대회 3위

특히 1984 년도에는 일본 체육대학 남 녀 탁구부가 여름방학을 이용해 한국 대학 최강인 본교 선수들과 합동훈련을 본교 김경자 교수에게 요청해와 그 해 8월 8일부터 15 일까지 임원 2 명, 선수 8명이 본교를 방문하여 합동훈련을 마련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 1월에는 일본체육대학 탁구부의 초청으로 홍순태 학장과 김경자 교수, 강은석 부장, 선수 10 명이 일본체육대학을 방문하여 합동훈련을 하였으며 매년 상호방문하는 ‘상호 교류 협정서’를

작성하여 교환하기도 하였다.

일본 체육대학 방문 후 이어서 대만 탁구협회의 초청으로 대만을 방문하여 대만 대학팀 3개 팀과 국가대표팀과의 네 차례 경기를 모두 이기는 전적으로 우리의 실력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기도 하였다.

1994 년도 전적

제12회 전국 대학탁구선수권대회

여대부 개인복식 우승 : 박혜연(국어국문학과 2학년)

임은정(문헌정보학과 1학년)

제27회 문화체육부 장관기 전국 남녀 종별 탁구선수권 대회

단체전 3 위여대부 개인 단식 우승 · 손지연(영어영문학과 1학년)

여대부 개인 단식 3 위 : 김나리(의류직물학과 2학년)

(2) 졸업생현황

이상국(쥬니어 대표 총감독)

김기택(제일모직 코치)

윤지훈(대우증권 대리)

노윤관(충북투자금융 감독)

황남숙(탁구클럽 운영)

김완(제일합섬 코치)

권오택(삼성라이온즈)

박용민(대우증권 여자 코치)

유시홍(강원대 코치)홍차옥(한국화장품 소속)

2) 축구부

본교에 축구부가 창설된 것은 불과 6년전의 일이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단체의식과 애교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사업을 모색하던 중 총학생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축구부를 창설하였다. 축구야말로 많은 사람이 동시에 관전하며 열성적으로 참여할 수 있느 계기를 마련

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학생회에서는 학생회 나름대로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왔다. 매년 등록금에 일부를 추기-시켜 축구부 후원금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원에 힘입어 드디어는 ’ 91 년도 추제대학 축구 연맹전에서 전국 우승이라는 감격의 순간을 차지했던 것이다 이울러 축구부에서 배출한 선수 중에서 국가대표끼지 길러내게 되었다.

다음에 축구부 연혁괴 졸업생 활동을 간략히 소개해 본다.

(1) 연혁

1986 년 3 월 4 일 체육특기생 9 명, 일반재학생 5 명 출범

감독 : 정은식

역대전적

1989. 11. 전국축구선수권대회 8강

199 1. 4. 춘계전국대학축구연맹전 8강

199 1. 11. 추계전국대학축구연맹전 우승

1992. 4. 춘계 전국대 학축구연맹 전 8 강

(2) 졸업생 현황

국가대표진출 · 우동병(사학과, 4 년)

좋업생 실업 및 프로진출

현대프로팀 임채용(무역)

퓨마프로팀 노 웅(경영)

제일은행 신양균(무역)

주택은행 권정근(경제)

철도청 김재훈(경영)

펠레루야 : 이동연 (4 학년), 이남호(4학년)

금성사 : 홍길남(4 학년)

창단 6년 만에 전국대학축구우승

3) 전국 대학미전 주최

제 24 회 전국 대학미전을 본교가 주최하여 성횡리에 마쳤다. 교육부가 후원하고 본교가 모든 행사를 맡아 진행한 이번 대학 미전을 1993 년 11 월 17 일 - 24 일까지 예술의전당에서 열렀다. 전국 100 여 개 4년제 대학의 적극적인 참여 아래 회화를 비롯한 서예 등 400 여 점이 출품된 이 대회는 예년에 비해 훨씬 훌륭한 대회였다고 관람한 인사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4) 한성대학을 빛낸 학생들의 모습

1994년도

(1) 무용학과

한국무용협회 신인무용콩쿨

한국무용 창작무용 남자부문 특상 - 윤성철 (4학년)

한국무용 창작무용 여자부문 특상 - 방현혜 (4학년)

현대무용 남자부문 수석 - 정순원 (3학년)

(2) 산업디자인학과

제 4 회 한국출판미술 신인대상전

시사 간행물 부분 특선 : 우용식 (2학년)

두살박이상 부문 가작 : 우용식 (2학년)

제 7 회 한국인테리어 디자인 대전

입선 김기상(4학년)

남용욱(4학년)

석태호(4학년)

임종원(4학년)

한국 장애인 고용촉진공단 포스터 공모전

이사장상 : 우용식(2학년)

World New사 표지 디 자인 공모전

문화체육부 주최 금상 : 우용식 (2학년)

위대한 한글, 아름다운 한글 공모전

문화체육부 주최 특선 : 김태연 (3학년)

박윤정 (3학년)

세계광고대상

세계일보사 주최, 일러스트부문 장려상 · 조현주(3학년)

김태연 (3학년)

제 1 회 지오다노 광고 페스티벌

지오다노 주최 우수상, TV, CF 부문 : 김범식 (2학년)

김천수(2학년)

윤창옥(2학년)

구선정(2학년)

제9회 서울일러스트레이션협의회 공모전

서울일러스트협회 주최 입선 : 유은아(2학년)

김선희 (2학년)

김형규(2학년)

우용식 (2학년)

(3) 회화과

MBC 미술대전

장려 상 : 정 용훈(서 양화, 4학년)

입선 : 김성범(서양화, 4학년)

입선 : 강지 용(서양화, 4학년)

미술세계 대상전

특선 . 양진호(서양화, 4학년)

입선 : 이인기(서양화, 4학년)

한국 현대 판화 공모전

입 선 · 안세 호(서 양화, 4학년)

공간 국제 판화 비엔날레

우수상 : 안세 호(서 양화, 4학년)

(5) 의상학과

대한민국 섬유패션대전본선 입선 : 은지희 (4학년)정혜영 (3학년)

에벤에설 패션디자인 경진대회입선 : 김건희 (4학년)

제7절 종합대학교 승격

1993 년 본 대학이 생겨난 지 21 년 만에 드디어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였다. 이것은 본교가 이제껏 바라던 소망의 일이었다. 종합대학교로 승격하게되자 이에 따라 자동적으로 대학의 기구도 바뀌게 되었다. 먼저 대학 본부에 4 개의 단과 대학을 두게 된 것이다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예술대학, 이공대학이 바로 그것이다 대학이 갑지기 종합대학으로 체제가 변하면서 단과대학별로 학장을 두지는 않고 당분간 종전의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하고 차후에 단과대학장을 임명하게 된 것이다.

제8절 김옥자 이사장 및 이용남 총장 취임

지난 4년 간 한성대학의 발전과 개혁을 단행해 온 셔정희 이사장과 원형갑 총장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새로운 이사장과 총장이 취임하게 되었다. 두 분은 각각 임기 내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여 ‘연구하는 대학’ ‘미래의 대학’을 이루어 내었고 이것이 앞으로 한성대학의 무궁한 미래를 보장하는 토대가 되었다.

김옥자 이사장은 학교 법인의 정관에 따라 이사회의 동의를 거쳐 제 13 대 한성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하게 되었으며, 이용남 총장은 2월 15일 전체 교수회의 석상에서 총장 후보로 추대되어 법인의 임명을 받아 제 2 대 총장으로 취임하게 되어 앞으로 4년간 한성의 모든 일을 추진해 나갈 것이다

부록

1. 한성학원 정관

제 1 장 총칙

제 1 조 (목적) 이 법인은 대한민국 교육이념에 입각하여 중등교육 및 보통 고등 교육과 고등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 2조 (명칭) 이 법인은 학교법인 한성학원(이하 “법인”이라 한다 )이라 한다.

제 3조 (설치학교) 이 법인은 제 1 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다음 각 호의 학교를 설치 경영한다.

1 한성대학교

2. 한성여자고등학교

3. 한성여자중학교

제 4조 (주소) 이 법 인의 사무소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2가 392 의 2 에 둔다.

제 5조 (정관의 변경) 이 법인의 정관의 변경은 이사 정수의 3 분의 2 이상의 찬성에 의한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교육부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제 2 장 자산과 회계

제 1 절 자산제 6조 (자산의 구분)CD 이 법인의 자산은 기본재산과 보통재산으로 구분하되 기본재산은 교육용 기본재산과 수익용 기본재산으로 구분하여 관리한다

@ 기본재산은 별지 목록의 재산과 제 11 조의 규정에 의한 적립금및 기타 이사회의 의결에 의하여 기본재산으로 정하는 재산으로한다.

@ 보통재산은 제 2항에서 정하는 재산으로 한다.

제 7조 (재산의 관리 )CD 제 6조 저]2항의 규정에 의한 기본재산을 매도

증여 교환 또는 용도를 변경하거나 담보에 제공하고자 할 때에는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관할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 기본재산과 보통재산의 운영과 관리에 관하여는 법령과 이 정관에 특별히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사회에서 따로 정한다.

제 8조 (경비와 유지방법) 이 법인의 경비는 기본재산에서 나오는 과실 및 수익사업의 수입과 기타의 수입으로 충당한다.제2절 회계제9조 (회계의 구분)(1) 이 법인의 회계는 학교에 속하는 회계와 법인에 속하는 회계로 구분한다.

@ 법인회계는 일반회계와 수익사업 회계로 구분할 수 있다

@ 제 1 항의 학교에 속하는 회계는 당해 학교의 장이 집행하고

법인의 업무에 속하는 회계는 이사장이 집행한다.

제10조 (예산외의 채무부담) 수지예산으로써 정한 이외의 의무부담 또는 권리포기는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관할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11조 (세계잉여금의 처리) 이 법인에 속하는 회계의 매년도 세계잉여금은 차입금의 상환과 익년도에 이월 사용하는 분을 제외하고는 적립하여야 하며, 이 적립금은 기본재산으로 한다.

제 12조 (회계연도) 이 법인의 회계연도는 3 월 1 일부터 익년 2월 말일까지로 한다.

제3절 예산·결산자문위원회

제13조 (예산·결산자문위원회의 설치) 학교회계에 속하는 예산의 편성 및 결산에 관하여 학교의 장의 자문에 응하기 위하여 학교별로 예산 결산자문위원회(이하 이 절에서 “위원회”라 한다)를 설치

한다.

제 14조 (위원회의 조직) φ 위원회는 11 인의 교직원으로 구성하되 교원인 위원의 수가 위원의 2분의 1 이상 이어야 한다.

@ 위원회의 위원은 학교의 장이 임명하되, 임기는 1 년으로 한다.

제 15조 (위원장 선출 및 직무) φ 위원회의 위원장은 위원의 호선으로 선출한다.

@ 위원장은 위원회를 대표하며,회무를 통리한다.

@ 위원회는 위원장이 소집하고 그 의장이 된다.

제 16조 (회의) 위원회의 회의는 학교의 장이 요청이 있을 때 또는 위원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소집한다. 이 경우 학교의 장이

회의 목적을 명시하여 회의소집을 요구한 때에는 3 일 이내에 회의를 소집하여야 한다.

제 17조 (위원회의 간사 등)CD 위원회의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간사를 둘 수 있다.

@ 간사는 교직원 중에서 학교의 장이 임명한다.

제 18조 내지 제 21 조 (삭제)

제 3 장 기관

제 1 절 임원

제 22조 (임원의 종류와 정수) 이 법인에 다음의 임원을 둔다.

1.이사 11인(이사장 1명 포함)

2.감사 2인

제 23조 (임원의 임기 )CD 임원의 임기는 다음 각호와 같다.다만,최초의 임원 반수의 임기는 그 임기의 반으로 한다.

1.이사 4년

2. 감사 2년

@ 보선에 의하여 취임하는 임원의 임기는 전임자의 잔임기간으로 한다.

제 24조 (임원의 선임방법)CD 이사와 감사는 이사회에서 선임하여 관할청의 승언을 받아 취임한다.

@ 임기 전의 임원의 해임은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관할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 임원 중 결원이 생긴 때에는 2월 이내에 이를 보충하여야 한다.

@ 임원의 선임은 임기만료 2개월 전에 하여야 하떠 늦어도 임기개시 1개월 전에 관할청에 취임승인을 신청하여야 한다.

제25조 (임원 선임의 제한)CD 이사 정수의 반수 이상은 대한민국 국민이어야 한다.

@ 이사회의 구성에 있어서 각 이사 상호간의 민법 제 777조에

규정된 친족관계나 처의 3촌 이내의 혈족 관계가 있는 자가 이사 정수의 5 분의 2를 초과하여서는 아니된다.

@ 이사 정수의 3 분의 1 이상은 교육경험이 1 년 이상 있는 자라야 한다.

@ 감사 중 l 인은 공인회계사의 자격을 가진 자라야 한다.

2. 역대 이사장 명단

대 성명 임기

1 - 5 김의형 1945. 10. 5 - 1971.10.28

6 - 7 이희순 1971. 10.29 - 1977. 4.21

8 김의형 1977. 4.22 - 1981.10.3 1

9 - 11 안호상 1981. 11. 1 - 1991. 3.30

직무대리 서정희 1991. 4. 1 - 1992. 2.14

12 서정희 1992. 2.15 - 1995. 3.30

13 김옥자 1995. 4. 1 - 현재

3. 한성여자 중고등학교 역대한성여고

1- 8 김의형 1945. 9.25 - 1977. 2.28

9-10 임양수 1977. 3. 1 - 1985. 5.1 3

11-12 염홍천 1985. 5.14 - 1991. 2.12

13 김인자 1991. 2.1 3 - 1995. 2.28

14 윤성렬1995. 3. 1 - 현재

한성여중

대 성명 임기

1- 7 김의형 1952. 5.31 - 1977. 1. 5

8- 9 김영희 1977. 1. 6 - 1982. 2. 5

10-11 염홍천 1982. 2. 6 - 1988. 1.12

12 김인자 1988. 1.13 - 1991. 2.12

13 송대빈 1991. 2.13 - 1995. 2.28

14 김인지 1995. 3. 1 - 현재

4 한성대학교 역대 학장 및 총장

대 성명 임기

1(학장) 김의형 1973. 3. 5 - 1977. 2.28

2 이희순 1977. 3. 1 - 1978. 7.30

직무대리 정연길1978. 8. 1 - 1979. 1.31

3 김옥형 1979. 2. 1 - 1982. 2.17

4 강병규 1982. 2.18 - 1984. 8.22

5 홍순태 1984. 8.23 - 1988. 8.21

6 신영기 1988. 8.22 - 1990.10.15

직무대리 원형갑 1990.10.16 - 1991. 3.3 1

7 원형갑 1991. 4. 1 - 1993. 2.28

1(총장) 원형갑 1993. 3. 1 - 1995. 3.31

2 이용남 1995. 4. 1 - 현재

5. 재직 교직원 명단

한성 여중

성명 성별 과목 교무분장 부임연 월일

김인자 여 교장 1995. 3. 1

유병수 교감 1959. 4. 3

최근식 남 과학 교무주임 1960. 4. 4

송용석 남 영어 연구주임 1972 . 3 .20

정우형 남 과학 학생주임 1969 . 4 .12

김민자 여 과학 교도주임 1969 . 3 .1

남주희 남 영어 의식 행사계 1959 . 4 .4

김희소 여 수학 저축 통계계 1060 . 4 .4

박영환 남 체육 민방위계 1961 .1 1 .7

이청자 여 영어 자연 보호계 1965 . 9 .1

지영원 여 사회 G.S 계 1965 .10 .5

권화자 여 가정 봉사계 1962 . 6 .13

류은호 여 영어 상담계 1967 . 4 .13

윤종혜 여 사회 안보 충효계 1968 .10 .1

고영순 여 가정 봉사계 1970 . 3 .6

윤영희 여 가정 심성 계발계 1971 . 3 .1

최상호 남 수학 교과서계 1972 .10 .30

김명희 여 도덕 교도 기획 1973 . 3 .2

이근태 남 과학 1 학년 주임 1973 . 5 .14

박병희 여 수학 상담계 1974 .11 .29

성명 성별 과목 교무분장 부임연월일

한용자 여 역사 교무 기획 1975 . 5 .3

구순희 여 윤리 안보 충효계 1975 . 4 .1

이달순 여 국어 교도 기획 1975 . 4 .7

김용희 여 체육 학생 지도계 1975 . 5 .1

이승인 여 수학 교안 및 연수계 1976 . 9 .6

이경숙 여 음악 음악 감상계 1977 . 3 .3

추미호 여 양호 봉사계 1979 . 3 .12

정영규 여 역사 연구 기획 1979 . 6 .28

김태정 남 역사 연구 기획 1980 . 3 .18

전태주 여 생물 과학 행사계 1981 . 3 .2

이귀영 여 사회 학적계 1981 . 3 .1

송윤옥 여 가정 기록 통계계 1983 . 3 .2

조성학 남 체육 2학년 주임 1983 . 4 .13

노선영 여 체육 학생 지도제 1983 . 9 .1

김강환 남 지리 교재 교구계 1983 .12 .3

이경천 남 영어 학생 기획 1984 . 3 .2

김영호 남 국어 교지 간행물계 1986 .1 1 .11

이광우 남 영어 3학년 주임 1988 . 3 .11

이수진 남 물리 방송계 1988 . 3 .2

김학량 남 국어 수업.고사계 1988 . 3 .2

윤승현 남 한문 교과서계 1988 . 3 .14

장혜정 여 가정 영상 녹화계 1990 . 3 .1

정용기 남 한문 영싱상녹화계 1990 . 3 .2

남궁 미경 여 국어 학생 지도계 1990 . 3 .14

손영애 여 음악 명상계 1985 . 3 .1

윤금순 여 미술 환경 미화제 1993 . 3 .15

김혜선 여 미술 특활계 1994 . 3. 2

문소영 여 국어 교육 홍보계 1994 .4 .28

성명 성별 직명 부임 연 월 일

맹형호 남 서무과장 1993 . 6 .21

한종호 남 서무주임 1983 . 3 . 1

이월희 여 서무직원 1993 . 5 . 1

이봉남 여 서무직원1991 .11 .15

정현석 남 기능직원 1974 . 8 . 1

이갑규 남 기능직원 1975 .11 .19

함정임 여 고용직원 1989 . 4 . 1

김숙희 여 고용직원 1991 .10 .25

고등학교 재직 교직원

번호 직위 성명 근무기간 비고

1 교장 유성열 1968. 8.30

2 교감 구영희 1972. 9. 1

3 교무주임 정부래근 1969. 5.21 지리

4 연구주임 김재훈 1970. 3.15 정경

5 3학년주임 박승응 1972. 9. 1 역사

6 진료지도주암 오현숙 1976. 4.16 가정

7 교시 신언희 1975. 4.30 교련

8 학생주임 이두환 1975. 5. 9 미술

9 교사 김광수 1975.11.10 체육

10 교사 권영서 1977. 5.26 불어

11 교사 바영혜 1994. 3. 1 가정

12 2학년주임 윤장근 1978. 5.31 화학

13 교사 전정위 1991. 3. 1 음악

14 교사 김시희 1993. 3. 1 국어

15 교사 김종철 1980.10.17 지학

16 교사 이태영 1981. 3. 2 수학

17 교사 이은숙 1981. 9. 8 양호

18 1학년주임 김동화 1981. 9. 8 국어

19 교사 서은경 1982. 3. 2 독일어

20 교사 이장한 1992. 3. 1 생물

21 교사 홍인표 1986. 3.10 국어

22 교사 황요환 1986. 3.19 수학

23 교사 김혁동 1988. 3.25 지리

24 교사 송나정 1988. 3.25 교련

25 교사 넘영우 1988. 4. 1 정경

26 교사 김영주 1988. 4. 7 물리

27 교사 류덕희 1989. 4. 1 윤리

번호 직위 성명 임용일자 비고

28 교사 최대혁 1991. 3. 1 체육

29 교사 안영길 1989.10.23 한문

30 교사 신현경 1992. 3. 1 영어

31 교사 양순희 1990. 3.29 국어

32 교사 김영일 1990. 3.29 영어

33 교사 조선희 1990. 6. 1 국어

34 교사 강인환 1992. 3. 1 국어

35 교사 한국희 1990.11.26 영어

36 교사 이강욱 1991. 3.28 수학

37 교사 김원숙 1992. 3. 1 수학

38 교사 안효근 1994. 3. 1 국어

39 교사 이승열 1992. 4. 1 영어

40 교사 유정숙 1992. 4. 1 무용

41 교사 홍영화 1993. 3. 1 수학

42 교사 배광수 1995. 3. 2 영어

43 교사 신재호 1995. 3. 2 수학

44 교사 유을규 1995. 3. 2 수학

45 교사 강석오 1995. 3. 2 역사

46 교사 정혜련 1994. 7. 1 영어

47 교사 박숙희 1995. 3. 2 영어

고등학교 직원 명단

번호 직위 성명 임용일자

1 서무과장 맹형호 1993. 7. 1

2 경리 빅영숙 1995. 5.15

3 기능원 정현석 1995. 6. 1

4 기능원 심순환 1990. 7. 6

5 기능원 양형용 1994. 4.20

6 사환 김미경 1994. 3. 1

한성대학교 재직교수 명단

소속 성명 임용년월일 전공

국어국문학과

이석주 79. 9. 2 국어학

이정숙 82. 3. 1 현대소설

김창룡 83. 3. 2 고전소설

박호영 93. 2.15 현대시

정후수 90. 3. 1 한문학

고창수 94. 3. 1 고전시가

김동환 95. 3. 1 평판

신경숙 95. 3. 1 고전시가

영어영문학과

빅양구 80. 9. 1 의미론

조효진 82. 3 1 영미희곡

고정자 80. 3. 1 영미시

김용석 81. 9. 1 통사론

김덕자 90. 5.14 영어교육

엄미숙 88. 9. 1 영미소설

이병은 94. 2.15 영시

서영윤 95. 3. 1 영미문학

흉성훈 95. 3. 1

사학과

윤경로 81. 3. 2 한국근현대사

윤석효 82. 3. 1 한국고대사

강병식 82. 9. 1 한국사

윤해영 92. 8.15 중국근현대사

황혜성 95‘ 3. 1 서양사

경영학과

김원중 81. 9. 1 인사관리

연정열 75. 2.10 법제사

최송길 80. 3. 1 회계학

김김평 81. 3. 2 경영과학

민성기 94. 2.15 재무관리

정승환 94. 2.15 생산관리

경영학과

최용식 94. 2.15 재무관리

홍용식 92. 2.15 회계학

최명규 92. 2.15 마아케팅

무역학과

강석중 83. 3. 2 무역법

김평광 81. 9. 1 경제정책

홍봉춘 83. 3. 2 마아케팅

권오 90. 3. 1 무역실무

유병호 92. 8.15 국제무역이론

최옥근92. 2.15 국제금융

김상조 94. 3. 1 화폐금융론

최용일 95. 3. 1

권혁제 83. 3. 2 국제경제학

허창재 84. 3. 1 화폐금융이론

경제학과

강신일 93. 2.15 산업조직

박헌영 89. 9. 1 개방거시경제이론

이상한 89. 9. 1 지역 도시경제학

이우관 92. 2.15 거시경제이론

이종수 83. 9. 1 행정이론

정성택 86. 3. 1 도시행정

황진수 84. 3. 1 복지행정론

정주택 91. 8.15 정책평가

행정학과 권해수 94. 3. 1 지방행정

이창원 92. 8.15 조직관리론

이태교 95. 3. 1 부동산학

김백유 95. 3. 1

이성우 95. 3. 1

문헌정보학과

이우범 83. 3. 2 정보학

정진식 84. 3. 1 정보학

문헌정보학과

조인숙 91. 8.15 정보학

순애 94. 2.15 서지학

서은경 93. 2.15 정보학

무용학과

김경자 77. 6. 1 운동기능학

김숙자 79. 4.17 한국무용

김학자 90. 5.14 발레

김주자 93. 2.15 무용이론

박인숙 현대무용

박영애 95. 3. 1

의상학과

양미경 의복구성

최해주 의류학

신인숙 섬유미술

김경인 93. 2.15 패션디자인

김용주 93. 2.15 페선머천이징

정경임 95. 3. 1

회화과

정종해 88. 9. 1 동양화

정하경 78. 3. 2 동양화

문범 92. 2.15 현대회화

강관식 94. 2.15 회회사

이인현 92. 8.15 판화

허은영 94. 3. 1 판화

산업디자인학과

김지현 91. 8.15 타이포그래픽

이상원 89. 9. 1 시걱디자인

조열 88. 9. 1 시각디자인

조태병 90. 5.1 4 종합종형

고영란 94. 2.15 디자인이론

김미지자 94. 2.15 디지인이론

박진배 92. 8.15 실내디자인

산업디자인학과

김응화 92. 2.15 포장디자인

전산통계학과

차운옥 91. 8.15 인공지능

최병수 88. 9. 1 군집분석

강승식 94. 2.15 한국어 정보처리

전산통계학과 권영미 93. 2.15 확률론

엄종석 92. 8.15 확률론

이재문 94. 2.15 데이타베이스

김진환 95. 3. 1

산업공학과

김대홍 88. 9. 1 생산관리

빅명환 89. 9. 1 작업연구

위남숙 92. 2.15 산업공학

홍윤기 91. 8.15 컴퓨터시율레이션

이재득 94. 2.15 인공지능응용

의류직물학과

임재영 83. 3. 2 생산관리

안영무 88. 9. 1 섬유학

전경숙 91. 8.15 의류 관리

김성복 93. 2.15 패션일러스트

홍성애 93. 2.15 의복구성

컴퓨터공학과

전화숙 89. 9. 1 컴퓨터통신

황기태 94. 3. 1 컴퓨터아키텍쳐

이민석 95. 3. 1

정보공학과

원형규 93. 2.15 품질,신뢰성 공학

김인철 94. 3. 1 영상정보통신

정영모 95. 3. 1

산업안전공학과

정병용 90. 5.14 인간공학

이남식 94. 3. 1 인간공학

제무성 95. 3. 1

최기홍 95. 3. 1

교양학과

강은석 81. 9. 1 체육사회학

김계욱 78. 3. 2 체육심리

강욱 92. 3. 1 철학

김종섭 89. 9. 1 섬유물리

교직과

김경배 83. 9. 1 교육심리학

조점환 81. 3. 1 교육행정학

대우 교수

구병두 건국대 교육과정

김동애 국립대만사범대 동양근 현대사

김일주 고려대 정치외교학

남궁승태 동국대 법학

서영순 이화여대 도서관학

신기명 건국대 교육심리

오종록 고려대 한국사

이순우 고려대 행정학

최재완 경희대 신문빙-송희

재직 교직원 명단

성명 근무부서 임용년월일 유정미 전자계산소 1990. 7. 15

최동운총무과장 1977. 6. 1 조현옥 전자계산소 7. 5

김명수 정보자료과장 1978. 4. 17 김성자 정보자료과 10. 1

김태식 정보봉사과장 1980. 3. 17 장영우 학생과 12. 10

노성수 교학과 1981. 3. 1 전조철 장학복지과 12. 10

정혁재 학적과 3. 13 이동준 총무과 1991. 2. 18

정대홍 기획과 10. 6 박철우 총무과 3. 2

이성민 정보자료과 10. 22 유제한 예비군실 3. 2

공대원 학적과 1982. 4. 1 이인숙 건강관리실 7. 1

유재국 교무과장 4. 1 김설희 경리과 11. 1

이정봉 경리과장 4. 1 한영철 관리과 11. 1

엄재용 관리과 4. 8 김순자 전자계산소 1991. 11. 2

정철환 교학과장 6. 1 강성진 학적과 1992. 3. 1

배종후 관리과장 1983. 1. 13 오진형 탁구코치 3. 1

김미숙 경리과 1984. 3. 26 이희돈 교무과 3. 1

전장배 시설과장 4. 1 오순명 관리과 5. 1

조승호 기획과 10. 23 원숙희 부속실 1993. 4. 1

강홍빈 법인과장 1987. 4. 6 김상기 정보봉사과 7. 1

이선준 교무과 1988. 3. 3 김범락 관리과 1994. 4. 1

임동혁 교무과 3. 3 조윤철 학생과 4. 20

소순무 학생과 9. 1 징재혁 기획과 4. 20

김두영 관리과 11. 1 황영호 교무과 4. 20

정영만 전자계산소 1989. 1. 4 황순필 정보봉사과 6. 10

박혜란 총무과 3. 1 박종원 축구감독 2. 1

김미영 교무과 8. 1 김양진 정보자료과 1995. 3. 6

유부상 전자계산소 1990. 4. 1 강용주 경리과 3. 9

조현호 전자계산소 4. 1 이상종 관리과 1973.12. 1

박인호 정보봉사과 4. 16 이인현 총무과 12. 1

성명 근무부서 임용년월일 정순출 관리과

김석기 총무과 1975. 4. 1 이기순 관리과 1989. 3. 1

전남순 관리과 1979. 9. 21 윤성만 관리과 1991. 8. 20

김길순 관리과 1981. 3. 11 안연화 관리과 1992.10. 26

문중일 총무과 1983. 1. 9 천충국 총무과 1993. 7. 26

김성준 총무과 1984. 8. 25 정명현 관리과 1994. 1. 1

김재정 총무과 1985. 2. 1 황의식 관리과 4.20

박노민 관리과 1986. 3. 1 김희자 관리과 1995. 4. 25

정문재 총무과 4. 11 김종만 총무과 4. 25

이영옥 관리과 1988. 3. 3 이성재 관리과 6. 1

6. 퇴직 교직원 명단

* 1977년(중•고 분리되던해) 이후 재직했던 구 교직원명단만실음

중학교

성명 성별 과목 재직기간 비고

김영희 남1948.9.1 - 198 1.12.20 교장으로 퇴직

염홍천 남 1982.2.6 - 1987‘ 2.28 교장으로 퇴직

이종범 남 영 어 1953.4.17 - 1981. 8.21 정년퇴임

이혁 남 화학 1953.4.21 - 1984. 8.29 정년퇴임

송휘림 남 국어 1956.4.10 - 1984. 2.28 ”

이선래 여 국어 1957.4.15 - 1989. 8.31 ”

김영진 남국어 1958.4.26 - 1987. 8.31 ”

신달우 남 서예 1960.4.6 - 1992. 8.31 ”

손유근 영어 1961.9.15 - 1983. 5.16 상도중 전출

성옥용 여 가정 1965.3.19 - 1985. 2.28 퇴 직

이상의 여 가정 1966.3.3 - 1990. 2.27 ”

염영자 여 영어 1967.3.2 - 1985. 2.28 은평중 전출

강재헌 남 영어 1967.3.10 - 1986. 3.1 상례여중 전출

박문학 여 가정 1967.4.4 - 1989. 2.28 대림중 전출

이용 남 체육 1969.3.1 - 1987. 2.28 장위중 전출

문백희 여 국어 1969.4.12 - 1980. 2.23 퇴직

신수진 여 미술 1969.5.15 - 1983. 8.31 ”

하옥남 여 수학 1970.3.1 - 1978‘ 8.31 ”

김옥소여 국어 1970.3.6 - 1986. 9.22 대림여중 전출

성명 성별 과목 재직기간 비고

이화승 남 체육1 1972.3.24 - 1988. 12.1 퇴직

김경순 여 체육 1972.9.7 - 1977. 7.1 "

최경자 여 화학 1974.3.1 - 1986. 8.31 "

김복련 여 국어 1974.3.13 - 1986.12.31 "

안영민 여 지리 1974.3.17 - 198 1. 2.28 "

이인정 여 수학 1975.3.1 - 198 1. 2.28 "

서혜원 여 가정 1975.3.24 - 1979. 2.24 "

최혜순 여 가정 1976.3.1 - 1977. 7.1 "

이영숙 여 영어 1976.6.29 - 1983. 2.28 "

윤혜영 여 윤리 1974.4.16 - 1979. 7.31 "

최승란 여 미술 1975.4.7 - 1994. 2.28 "

진영전 여 화학 1975.5.7 - 198 1.2.28 퇴직

곽길순 여 역사 1976.3.1 - 1979.2.24 "

성방현 여 국어 1976.9.6 - 1988.3.1 "

안회옥 여 국어 1977.3.11- 1979.2.24 "

김명선 여 수학 1979. 1. 10- 1994.4.28 언남중 전출

이준 남 체육 1979.3.2- 1982.1 1.12 체육중 전출

최자림 여 체육 1979.4.19- 1983.2.28 퇴직

김정중 남 국어 1980.4.2 - 1990.3.10 신창중 전출

손칠호 남 수학 198 1.3.7 - 1983.8.25 퇴직

성명 성별 과목 재직기간 비고

정미숙 여 생물 1983.4.1 - 1984.2.28 ”

채명식 남 국어 1988.3.2 - 1993.2.28 ”

변지현 여 국어 1992.3.2 - 1993.2.28 ”

이철화 여 국어 1990.3.17- 1994. ”

전정위 남 음악 1977.4.7 - 1991.2.28 한성여고 전출

최대혁 남 체육 1989.5.11- 1991.2.28 ”

홍윤선 여 영어 1983.3.2 - 1992.2.28 ”

이장한 남 생물 1984.3.2 - 1992.2.28 ”

강인환 남 국어 1990.8.23- 1992.2.28 ”

신현경 여 영 어 1990.3.1 - 1992.2.28 ”

김시희 여 국어 1979.7.31- 1993.2.28 ”

오묘환 여 수학 1979.7.20 -1993.2.28 ”

박영혜 여 가정 1976.3.2 - 1994.2.28 ”

안효근 남 국어 1992.3.2 - 1994.3.2 ”

고등학교

번호 직위 성명근무기간

1 교사 황재륭 1973. 6. 1 - 1975.10.31

2 교사 최경숙 1958. 4.15 - 1975. 2.20

3 교사 김경화 197 1. 3.22 - 1975. 2.28

4 교사 강권영 1963. 3. 2 - 1975. 9.28

5 교사 서영석 1973. 3.23 - 1975. 3.24

6 교사 조희영 1970. 3. 1 - 1975. 4. 1

7 교사 김현희 1973. 6.28 - 1975. 4.10

8 교사 박미자 1975. 3. 3 - 1976. 2.29

9 교사 김수길 1973. 6. 1 - 1976. 5.30

10 교사 강선영1972. 4.27 - 1976. 5.30

11 교사 허상봉 1975. 4. 3 - 1977. 3.30

12 교사 이무일 1970. 3.11 - 1977. 1. 1

13 교사 권순철 1970. 3.19 - 1978. 2.28

14 교사 송양자 1972. 3. 2 - 1978. 2.28

15 교사 손경희 1973. 3. 8 - 1978. 2.28

16 교사 김용수 1972. 3.27 - 1978. 2.28

17 교사 조주옥 1973. 3.10 - 1978. 9.30

18 교사 홍윤기 1977. 4.21 - 1978. 6.30

19 교사 이철희 1960. 4. 4 - 1979. 2.28

20 교사 정화자 1969. 3. 1 - 1979. 2.28

21 교사 김명선 1955. 5. 2 - 1980. 2.23

22 교사 이병택 1973. 6. 1 - 1980. 2.25

23 교사 양완전 1978. 4. 7 - 1980. 8.30

24 교사 박호진 1977. 3.20 - 198 1. 2.28

25 교시- 안인희 1978.12.29 - 198 1. 2.28

26 교사 조윤주 1975. 3. 3 - 198 1. 8.22

27 교사 김현배 1961. 4. 1 - 198 1. 4.27

번호 직위 성명 근무기간

28 교사 이정우 1975.10. 3 - 198 1. 8.22

29 교사 이영숙 198 1. 3. 2 - 198 1.12.31

30 교사 정운철 1968. 8.31 - 198 1. 9.30

31 교사 임재영 1978. 4.11 - 1982. 2.27

32 교사 안혜수 1980. 5.30 - 1982. 6.30

33 교사 김덕자 1980. 5.30 - 1983. 2.28

34 교사 이종위 1973. 4. 7 - 1983. 2.28

35 교사 김태희 1961. 8.15 - 1983. 5. 7

36 교사 강낙중 1978. 3.20 - 1983. 5.31

37 교사 강동제 1982. 3. 2 - 1983.10.12

38 교사 김우용 1978.1 1. 1 - 1986. 2.28

39 교사 김숙자 1977. 4.28 - 1978. 2.28

40 교사 지영자 1977. 3. 1 - 1980. 7.31

41 교사 양일권 1961. 9. 1 - 1992. 2.28

42 교사 장동열 1983. 5. 2 - 1985. 8.19

43 교사 박재열 1973. 6. 1 - 1986. 9.23

44 교사 이인영 195 1.11.27 - 1988. 2.29

45 교사 이혜옥 1977. 5.26 - 1987. 9.11

46 교사 이은지 1982. 3. 2 - 1988. 2.29

47 교사 김영란 1982. 3. 2 - 1988. 2.29

48 교사 김우경 1984. 4.10 - 1988. 2.29

49 교사 김현수 1957. 4. 6 - 1989. 2.28

50 교사 황옥 1979. 5. 2 - 1989. 9. 8

51 교사 최성희 1977. 5.26 - 1990. 4. 3

52 교사 최택영 1970. 3.11 - 1990.10.31

53 교사 김요섭 1983.1 1.28 - 1991. 2.28

54 교사 김진천 1982. 9. 3 - 1991. 3. 2

번호 직위 성명근무기간

55 교사 이병구 1958. 4. 7 - 1991. 8.31

56 교사 평동의 1962. 9. 5 - 1993. 2.28

57 교사 김양옥 1983. 7.12 - 1993. 6. 6

58 교사 정해인 1970. 9. 2 - 1995. 2.28

59 교사 이영숙 1983. 3. 2 - 1994. 5.19

60 교사 오묘환 1979. 4.1 1 - 1995. 2.28

61 교사 홍윤선 1992. 3. 1 - 1995. 2.28

번호 직위 성명근무기간

1 고용직 김흥기 1965. 3. 1 - 1977. 6.25

2 고용직 황일성 1954. 5. 8 - 1979. 3.31

3 사환 곽순익 1978. 5.16 - 1980.1 2.20

4 경리 박은자 1978. 4. 1 - 1980. 5. 3

5 서무 곽대석 1977. 5.16 - 1982. 1. 1

6 수위 김만형 1957.1 1.1 1 - 198 1. 1. 1

7 회계주임 김상기 1977. 3. 1 - 1985. 4. 1

8 사환 김인숙 1984. 7. 3 - 1985. 9.25

9 발간 김정희 1978. 6. 1 - 1986. 3.31

10 사환 황순옥 1980. 8.18 - 1986. 3.31

11 경리 정애영 1980. 7.11 - 1987. 1. 1

12 청부 김성귀 1985. 3. 2 - 1988. 3. 9

13 서무실장 최응환 1955. 3.28 - 1987. 1. 1

14 발간 황순옥 1986. 4. 1 - 1989. 7.31

15 교용직 한상철 1988. 3. 2 - 1991. 3. 1

16 회계주임 김영기 1985. 4. 1 - 1990.1 1. 1

17 회계주임 유제한 1988. 3. 2 - 1991. 3. 1

18 서무 원숙희 1988. 3. 2 - 1993. 4.30

19 청부 정명현 1979. 4. 9 - 1993.12.31

20 기능직 황의식 1994. 1. 1 - 1994. 4.20

21 기능직 윤창우 1965. 4. 7 - 1995. 2.28

대학교

1995. 9. 현재

성명 담당분야 임용년월일 퇴직년월일 비고

윤태영 문예창작 1973. 1. 19 1976. 6. 9 국문과 대우교수고

창식 국문학 1. 19 8. 31 국문과 부교수

김복길 가정관리 1974. 3. 18 1982. 2. 28 가정과 조교수.정년

차주환 생활미술 3. 18 1978. 2. 27 생활미술과 조교수

정기수 불문학 1975. 2. 10 1976. 9. 18 불문과 조교수

신은숙 교육학 1975. 3. 1 1986. 2. 28 교양과 부교수

김형표 한국무용 1975. 3. 1 1992. 2. 28 무용과 대우교수. 정년

이경식 영문학 1976. 3. 1 1980. 2. 11 영문과 부교수

이근수 국어사 1976. 3. 1 1980. 9. 11 국문과 부교수

장석향 가정관리 1976. 3. 1 1978. 4. 10 의상과 전임강사

정연길 현대문학 1977. 9 1 1993. 2. 28 국문과 교수. 정년

이창신 조직이론 1978. 3. 2 1983. 2. 28 행정과 조교수

이남희 의류학 1978. 3. 2 1989. 8. 31 의상과 부교수

하인두 서양화 1978. 3. 2 1989. 11. 12 미술과 교수. 사망

박명희 가정관리 1978. 3. 2 1982. 2. 28 가정과 조교수

허광일 영어학 1978. 9. 1 1987. 2. 28 영문과 부교수

최명규 재무관리 9. 1 1993. 8. 15 경영과 교수. 사망

김범주1978. 2. 16 1986. 2. 28 행정과 조교수

김중렬 국문학 1980. 3. 1 1984. 2. 29 국문과 조교수

김신 무역학 3. 1 198 1. 2. 28 무역과 전임강사

이시환 무역실무 3. 1 1982. 8. 22 무역과 전임강사

지배선 동양사 3. 1 1982. 2. 28 사학과교수

강국진 서양화 3. 1 1992. 3. 1 미술과교수. 사망

유명숙 영문학 9. 1 1985. 8. 10 영문학 전임강사

임영상 서양사 198 1. 3. 2 1982. 2. 15 사학과 전임강사

이병희 서양의복구성 3. 2 1985. 2. 15 의상과 전임강사

한창호 경제학 3. 2 1989. 2. 28 경제학과 교수. 정년

김양현 교육학 9. 1 1983. 5. 15 교직과 전임강사

정연선 행정학 1982. 3. 2 1984. 7. 4 법학박사

성명 담당분야 임용년월일 퇴직년월일 비고

김용정 상품학 1982. 9. 1 1990. 11. 1 무역학과 부교수

이동섭 서양사 9. 1 1995. 1. 23 사학과 교수

홍영표 경제학 1983. 3. 2 1984. 2. 23 경제학과 전임강사

한진만 동양화 3. 2 1988. 3. 1 미술학괴 부교수

김정수 발레 3. 2 1990. 1. 29 무용학과 부교수

원형갑 총장(국문학) 1983. 3. 2 1995. 3. 31 초대총장.명예문박.정년

신영기 학장 1998. 8. 23 1990. 9. 27 공학박사

유영옥 재무행정 9. 1 1992. 2. 28 행정과 조교수

조덕현 서양화 1990. 5. 14 1995. 3. 31 회화과 조교수

박준영 생산자동차 1992. 8. 15 1995. 2. 28 산업공학과 조교수

퇴직 교직원 명단

성명 최종부서 임용년월일 퇴직년월일 비고

임동순 교무과 1973. 3. 10 1982. 3. 17 사무직

박관현 교무과 3. 13 1977. 2. 18 사무직

김영기 사무처 12. 1 1985. 2. 15 서무과장

신은용 기능직 12. 1975. 10. 31 보이라공

이종욱 기능직 12. 1 1985. 9. 16 보이라조수

김성희 사무처 12. 1 9. 16 고용원,사망

김형자 사무처 12. 1 1976. 4. 2 고용원

김봉기 사무처 12. 24 1979. 4. 20 고용원

김복기 총무과 1974. 5. 3 1993. 6. 30 운전기사

허천욱 경리과 5. 6 1978. 11. 30 사무직

김성렬 사무처 1975. 3. 1 8. 30 사무처장

이정순 도서관 1976. 3. 25 1976. 9. 30 사서

성방현 비서실 4. 6 9. 6 비서

맹형호 교무과 4. 6 1993. 6. 30 교무과장

정옥향 도서관 4. 21 1978. 2. 21 사서

복란옥 사무처 7. 1 10. 30 고용원

한옥순 사무처 1977. 3. 15 1979. 9. 13 고용원

조치형 교무처 3. 28 1980. 10. 10 사무직

박정남 도서관 1978. 4. 17 1990. 4. 21 사무직

조정숙 사무처 5. 11 1984. 3. 17 교환

강경숙 사무처 5. 11 1978. 5. 30 교환

이종수 교무처 11. 6 1983. 8. 31 사무직

김순애 도서관 11. 6 1986. 2. 28 사무직

전미경 경리과 11. 20 1989. 8. 31 사무직

이천금 사무처 1979. 4. 1988. 3. 12 교환

박종규 학생처 5. 14 1990. 5. 31 학생과장

정금순 총무과 6. 1 1992. 10. 31 기능직

김금자 교무처 1979. 11. 1984. 3. 21 사무직

이윌희 학적과 1980. 3. 17 1993. 4. 2 사무직

이근천 사무처 1980. 10. 1982. 2. 15 운전기사

장대환 교무처 11. 1985. 10. 31 사무직

김우백 학생처 198 1. 1. 19 1985. 8. 30 사무직

최재훈 교관실 3. 1984. 2. 29 교관

김창희 사무처 3. 9 1986. 4. 수위

이원재 사무처 3. 11 1988. 11. 30 기능직, 사망

김경희 예비군실 3. 16 1992. 9. 21 사무직

강영숙 의무실 4. 14 198 1. 11. 26 간호사

홍길만 사무처 1982. 2. 19 1984. 7. 31 운전기사

손영일 기획과 1982. 2. 23 1984. 2. 23 기획실장

이승록 사무처 2. 23 3. 23 시-무처장

이화숙 비서실 3. 4 7. 31 비서

김환철 비서실 3. 4 7. 31 비서실장

김정순 학적과 3. 26 1989. 3. 10 사무직

정재문 전자계산소 4. 1991. 4. 30 주임

이철호 사무처 4. 1982. 12. 31 운전기사

윤옥희 사무처 4. 1 1987. 12. 17 교환

정희숙 기획실 4. 8 1982. 9. 30 사무직

최란 사무처 4. 8 1985. 10. 17 간호사

백남한 총무과 4. 8 1994. 6. 30 수위

박종욱 경리과 5. 1991. 7. 31 과장

주복식 사무처 5. 6 1987. 12. 11 사무직

진기숙 교무처 5. 6 1987. 6. 18 사무직

최용호 교관실 7. 10 1984. 9. 30 조교

송은순기획실 11. 15 1984. 3. 12 사무직

이금숙 법인사무국 1983. 9. 19 1987. 2. 28 사무직

이응권 학생처 1984. 3. 1987. 2. 28 장학복지과장

함숙희 우체국 10. 1987. 9. 30 사무직

유무열 사무처 1985. 2. 14 1990. 9. 27 사무처장

조혜선 의무실 1986. 3. 1 1987. 10. 31 간호사

정은식 학생처 3. 1 1993. 12. 28 축구감독

고석중 관리과 4. 3 1991. 3. 1 주임

이경의 우체국 1987. 9. 21 1993. 3. 25 사무직

정은성 우체국 1988. 1. 4 1994. 5. 23 기능직

조승익 도서관 1. 5 1994. 4. 18 사무직

정윤숙 의무실 3. 10 1995. 6. 30 간호사

김성귀 총무과 3. 10 1991. 3. 1 기능직

이백규 관리과 3. 10 1995. 6. 30 기능직

유숙이 사무처 3. 17 1988. 8. 31 기능직

이윤경 총무과 11. 1992. 7. 31 기능직

강윤자 대학원 1989. 3. 1 1989. 12. 20 사무직

오한석 도서관 10. 1 1992. 2. 29 사서

차용홍 예비군실 1990. 8. 22 1991. 2. 28 사무직

황의룡 총무과 1991. 2. 4 1991. 2. 4 사무직

이상주 총무과 3. 2 1992. 3. 22 기능직

김용만 총무과 1992. 3. 19 1995. 4. 30 운전기사

김미희 기획과 4. 1994. 4. 12 사무직

윤병용 관리과 4. 1995. 5. 13 기능직, 사망

조현명 관리과 10. 26 1993. 11. 30 기능직

7. 졸업생 현황

중학교 1977년 중 • 고 분리 이후

횟수 졸업년도 졸업생수 누계

26 1977 813 11,650

27 1978 800 12,450

28 1979 830 13,280

29 1980 840 14,120

30 1981 841 14,961

31 1982 902 15,863

32 1983 836 16,699

33 1984 837 17,536

34 1985 822 18,358

35 1986 830 19,188

36 1987 817 20,005

37 1988 652 20,657

38 1989 613 21,270

39 1990 588 21,858

40 1991 551 22,409

41 1992 527 22,936

42 1993 495 23,431

43 1994 490 23,921

44 1995 514 24,435

고등학교

회수 졸업년도 학생수 횟수 졸업년도 학생수

1 51 28 22 73 446

23 74 450

2 53 47 24 75 482

3 54 50 25 76 466

4 55 58 26 77 473

5 56 66 27 78 470

6 57 89 28 79 480

7 58 143 29 80 474

8 59 130 30 81 483

9 60 147 31 82 476

10 61 174 32 83 491

11 62 198 33 84 480

12 63 276 34 85 478

13 64 306 35 86 464

14 65 412 36 87 479

15 66 399 37 88 453

16 67 414 38 89 468

17 68 444 39 90 485

18 69 408 40 91 467

19 70 413 41 92 447

20 71 466 42 93 437

21 72 463 43 94 413

대학교

구분 총계 국문 영문 사학 경영 무역 경제 행정 문정 무용 의상 회화 가정 산디 전통 산공 의직

총계 7,356 669 623 LI69 1.042 1,032 411 481 458 519 568 521 87 ll7 121 90 148

1회(‘77) mω 25 22 6 14 23

2회(‘ 78) 82 24 21 ? 6 m

3회(‘ 79) 76 14 19 7 11 12

4회 ('80l 101 28 21 8 6 6 18 14

5회(‘ 8D 87 6 15 18 12 15 14 7

6회(‘82) 160 21 27 21 18 17 15 20 21

7회(‘ 83) 29'1 32 23 15 69 45 25 3.1 26 28

8회(‘ 84) :m 34 3LI 35 67 55니 38 39 38 34

9회(‘ 85) 452 30 35 22 86 80 29 28 35 39 39 29

10회(‘ 86) 416 3.1 36 25 58 91 21 20 37 3LI

11회(‘ 87) '132 33 11 35 64 79 22 28 37 32 41 30

12회(‘ 88) 518 36 43 41 81 71 43 40 45 36 ι19 33

13회(‘ 89) 57:3 LIS 46 52 93 87 34 41 54 36 LI7 38

14회(‘ 90) 561 11·1 32 52 83 92 44 47 46 117 42 32

15회(‘ 9 1) 555 LI4 35 44 83 83 53 34 54 38 46 ιII

16회(‘ 92) 654 52 42 43 72 76 ι18 45 3.1 39 LIO Li2 32 30 25 37

17회 nm (jt.J() 61 50 28 79 98 36 44 42 :30 37 :3LI 22 30 14 35

18회(‘ 94) 661 54 47 41 82 83 LI3 44 41 33 36 30 36 28 24 39

19회 ('95) 664 59 51 :36 73 76 4.1 47 36 39 L[O 36 27 33 27 37

7. 한성학원 연표

1945. 9.25 설립자 김의형 박사가 경성여자기예학교 인수

1945.10. 5 재단법인 한성학원 설립, 한성고등여학교 개교

1946. 4. 9 한성고등여학교 (6년제 12 학급) 인가

1946. 7. 5 한성여자중학교로 교명 변경

1952. 5.31 한성여자 중고등학교 각 6학급 300 명 인가

1952. 5.31 한성여중 교장에 김의형 박사 취임

1953. 1.21 재단법인 한성 학원 설립인가(문교부)

김의형 박사 초대 이사장 취임

1955.10. 염전 한성제염사를 한성학원에서 경영

1963.12 .7 실내체육관 준공

1964.1 .24 재단법인을 학교법인으로 개편

1971. 1.20 국제고인 규격 낙산수영장 준공

1971. 10 .29이희순 여사 제 2 대 이사장 취임

1972.12.2 1 한성여자대학 설립

1973.3 .5 한성여자대학 초대 학장에 김의형 박사 취임

1977.1 .6 한성 여중 제2대 김영희 교장 취임

1977.3 .1 한성여고 제1대 임양수 교장 취임(분리기)

한성여자대학 제2대 이희순 학장 취임

1977.4 .2 2 김의형 박사 제3대 이사장 취임1979.2 .1 한성대학 제3대 김옥형 학장 취임

1981. 11. 1 제4대 안호상 이사장 취임

1981. 11.1 종합관 준공

1982.2 .1 한성여중 제3대 염홍천 교장 취임

1982.2 .18 한성대학 제4대 강병규 학장 취임

1982.5 .1 한성대학교에 부설연구소 설립(민족사싱, 사회산업, 한국전통예술, 학생생활연구소)

1983.3 .1 설립자 김의형 박사 학원장 거행

1983.10 5 한성대학 학생복지관 기공

1984.8.23 한성대학 제5대 홍순태 학장 취임

1984.12.4 한성대 학 ROTC 창설

1985.5.14 한성여고 염흉천 교장 취임

1986.7 교사 획장 이전(중고등학교와 한성대학 교체)1987.3 .2 한성여중 제 4 대 김인자 교장 취임

1987.8 .25한성대학 우촌관 준공

1987.11 .30 한성대학 경영행정대학원 인가

1988.8 .22 한성대학 제6대 신영기 학장 취임

1989.1 1.6 한성대학 일반대학원 신설

1990.2 .27 한대학 과학관 준공, 전자계산소 개소

1991 .2 .13 한성 여중 제 5 대 송대빈 교장 취임

한성 여고 제3대 김인자 교장 취임

1991 .4 .1 한성대학 제7대 원형갑 학장 취임

1991 .11.29 한성학원 상징탑 제막

1991 . 4.1 - 1992.2 .14 서정희박사 이사장직무대리 취임

1992.2 .15 제5 대 서정희 이사장 취임

1994.3 .1 한성대학교 종합대학으로 승격

1995.4 .1 ~116대 김옥자 이사장 취임

제2대 이용남 총장 취임

<편집후기>

금년 10월로 한성학원은 학원 창렴 50주년을 맞이한다. 본학원은 이같은 기념비적 해를 맞이하며 기념사업의 하나로 <한성학원 50년사>를 발간하게 되었다. 1945 년 10월 우촌 김의형 박사에 의해 창립된 한성학원은 지난 반세기 동안 이 사회와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수많은 인재들을 양성하고 배출하였다. 설립자 우촌선생의 건학정신에 따라 여성지도자 양성과 ‘신생 대한민국’의 인적토대가 되는 건강한 인재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가운데도 특히 한국체육계 발전에 기여한 우촌선생의 업적과 한성의 활약은 한국체육사에 큰 족적을 남기었다.

한성학원의 지난 반세기의 사는 해방이후 우리민족사가 걸어온 험란

한 역사적 여정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따라서 본학원의 지난 50년의 역사 또한 그렇게 간단치 않은 역정을 지니고 있다. 이제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걸어온 한성학원의 역사를 정리하며 본학원의 교육이념과 설립자의 창학정신, 그리고 한성학원을 통해 이루어진 육영의 실상을 정리하였다. 이 작업은 한성학원의 50년 간의 역사성을 밝히는 일 외에도 이를 통해 향후 한성학원이 지향해야 할 교육적 지표와 방향을 정립하는 데 보다 큰 목적이 있다 할 것이다. 자료상의 미흡, 특히 초기 관련 자료들이 유실되어 학원 창립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으나 다행히도 중고등학교에 초기 자료 일부가 남아 있어 이를 토대로 창립경우와 한성학원의 건학이념과 설립자 우촌 선생의 창학정신 등을 복원할 수 있었음을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전체 5편으로 구성된 <한성학원 50년사>는 제 1편에서는 설립자, 우촌선생의 칭-학정신을 토대로 한성학원의 교육이념과 교육목표 및 교훈에 관한 내용을 기술하였다. 제 2편에서는 본 한성학원 설립자 우촌 김

의형 박사의 생애를 요약 정리하였다. 김의형 선생은 그의 전 생애를 한성학원과 함께 하였다. 따라서 그의 생애는 곧 한성학원의 역사 바로 그것이기애 독립된 편으로 우촌선생의 생애편을 다루었다. 제 3편은 한성학원의 설립배경을 구체적으료 기술하는 데 집증하았다. 제 4편은 중고등학교 편이디. 1977년 중고등학교 분리꾀기전끼지는 하나로 다루었으며 그 이후는 분리하여 기술하였다. 이 부분을 맡은 종고등학교측의 적극적인 참여로 순조룹게 진행되었다. 마지막 5편은 대학편이다. 1993년 <한성학원20년사>가 발간된 바 있어 이룹 토대로 기술할 수 있어 큰 어려움은 없었다

끝으로 2년간 <한성학원 50년사> 공동집필에 침-여한 여러 필자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참고로 편장별 필자분들을 부기해두고 자한다. 제1편은 윤정최교수, 제2편은 김창룡교수, 제3편을 연정열교수가 접필했으며 재 4 편 증고등학교편은 1 ,2장을 김재훈선생, 3 ,4장은 구영희 선생, 5장은 김태정 선생이 집필했으며 제5편 대학편은 1장을 연정열교수, 2장을 윤

정과교수, 3장을 정진식교수, 4장을 정후수 교수가 각각 책임집필하였다. 그리고 표지 디자인은 김지현 교수가 맡아주였며 이밖에 사진수집과 자료정리 및 이 책이 발간되기 까지 뒷마무리의 꽂은 일을 정후수 교수가 수고하였음을 부기하며 관계자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1995년 10월

『한성학원 50년사』 편찬위원회

위원장 윤경로

편찬위원

위원장| 윤경로

위원 | 연정열, 김창룡, 정진식, 정후수 강홍빈, 정대홍, 구영희, 김재훈 김태정

한성학원 50년사

1995년 10월 1일 인쇄

1995년 10월 5일 발행

발행인|김옥자

편찬인 | 한성학원 50년사 편찬위원회

인쇄|동양정밀인쇄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