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城大學校
二十年史
.‘.,
한성대학교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
축시
그대
교훈석
이사장
공학박사 서정희
학장
문학박사 원형갑
역대 이사장 및 학장
현 이사장 서정희 박사
2대 이사장 이희순 여사
4대 학장 강병규 박사
현 학장 원형갑 박사
2대 이희순 학장
5대 홍순태 학장
6대 학장 신영기 박사
교기 변천사
(1972-1977)
(l984~1990)
학교전경(현재)
V한성학원 설립 당시 학교모습(1945)
현재는 이 자리에 우촌관이 들어서 있다.
V한성학원의 수입사업원
한성농장
V 한성여자대학 개교당시 교사 (1972)
전국의 어떤 화료뻐| 뒤지지 않는 시설을 갖춘 전시실 연중 전시가 계속되어 학생들의 창작 욕구에
많은 뒷받침을 하고 있다.( 1992년 4월 개관 )
축구부
1986년 창단 이래 5년만에 ’91 년도 전국 대학축구 언맹전에서 우승의 영광을 차지함으로써 전교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다.
탁구부
상징탑(1991)
발간사
우촌 선생의 건학 20주년에 즈음하여학장 원형갑본 학원의 창업주이신 깅의형 박사께서 서거하신지도 어언 10여년의 세월입니다. 그동안 한성대학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변했습니다. 아마 선생께서 한성이 그리워 산책이라도 내려오신다면 낙산의 이기숨 저 그늘에 앉아 책에 파묻히고 대화에 여념이 없는 남녀학생들을 보게 되실 것입니다. 선생께서 해방후 한국교육계에 자랑하시던 수영장이 지금은 과학관으로 변신했습니다. 내년 한해 동안의 준비만 끝나면 우리가자랑하는한성대학교공과대학A로발전할것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그 건울 안에는 선생의 학생들이 첨단기기와 대결하느라 바쁜 눈빛들이고 그 밖에서는 가을의 햇빛을 온옴으로 받으며 정구에 열을올리고 있습니다.
그리운이여!지선관을 잊지 않으시겠지요. 선생께서 손수 돌을 나르며 꾸미신 아름다운 분수대와 더불어 서있는 건물. 그 사랑의 건물이 향긋하고 품위 넙치는 새 단장을 했습니다. 물이 끊어진 지 오래인 분수에서도 꿈의 물기풍이 솟아오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래 험상굿고 영성하기 짝이 없던 스텐드들이 사라져버렸다는 소식을 전해드려야 하겠습니다. 그 자리에 강원도의 큰바위들이 날아와 설악에서도 볼 수 없는 이미 백미터나되는 길이의 바위와 바위 사이에는꽃과 나무로그유1합니다만 이 가을이 다가기 전에 그수려한 아름다움드로 학생들의 좋은벗이 될 것입니다.
고마우신 이여!그 바위벽 아래 운동장에는 지금 파란 유니폼의 한성축구부 학생들이 전국대회를 앞두고 날쌘 몸을 한껏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작년의 전국대학 축구연맹에서 우승한 우리 선수들입니다. 3,500명의 한성대학생들을 영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자랑스러운 건아들. 이들의 승리의 의지와 전통이 선생님의 한성창업정신을 두고두고 빛낼 것입니다.그리운 이여!마음이 답답하고 속상하실 때마다 쉼터로 찾으시고자 마련하신 의화장까지 아낌없이 한성학원에 쾌척하신 이여!심지어 선생께서 탄생하신 생가까지 한가닥의 거리낌도 없이 한성재단으로 내던지신 교육계의 스승이시여!이제 선생께서 생애의 모든 것을 걸고 염원하시던 사학의 이상이 선생의 그땅에 나래를 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일이니 어찌 잘못이 없고 불안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선생의 포부는 워낙 겨레의 앞날을 내다본 거시적 실천의지였으며 선생의 교육관은 워낙 실사구시적인 현실관에서 그 기초가 세워져야 했습니다. 그러한 선생의 투시력과 자상한 마음씨를 선생께서 가신지 10년의 오늘 우리가 선생의 낙산마루에서 바라보며 우러러본다는 것은 얼마나 고맙고 즐거운 일업니까.
이제 우리 한성대학은 어려움을 딛고 일어났습니다. 흩어졌던 마음들이 오직 선생의 건학이념으로 하나가 되었고 차분하고 견실하게 종합대학의 채비를 갖추었습니다. 막연하게 남의 북소리에 들뜬 종합대학이 아니라 온 캠퍼스의 구석구석에 싱어넣은 한그루 한그루의 나무들처럼. 저 지선관의 벽에 쌓아올라깐 한덩어리 한덩어리의 바윗덩이처럼 우리의 실력 A로 쌓아올려진 우리 우촌의 종합대학이고자 합니다. 선생의 투시력처럼 시대사회를 선취하고 선도하는 일꾼의 종합대학이고자 합니다.선생님 고맙습니다.편/찬/개/황
올해 10월 5 일로 한성 대학교 설링 20돌을 맞게 되었다.설렵자 김의형 박사의 ① 역사소명의 고취 ② 민족정신의 계승 ③지 · 덕 · 체의 조화와 숭고한 교육정신의 구현을 위해 여성 전문 인재양성을 위한 최고학부인 한성여자대학을 1972년 2월 설립 하였던 것이다.
초대 학장에 김의형 박사가 취임한 후 이어 1977년 3월 제2대 이희순 학장이 취임해, 1978년 1월 남·녀 영재들에게 보다 깊은 학문의 장을 열어주기 위하여 한성대학으로 교명을 바꿔 새로운 도약의 터전을 마련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금년 4월 본교 92년 대학발전 과제연구 6개 분야가 선정되었을 때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올해로 20주년을 맞는 한성대학교 20년사 편찬을 그 하나의 과제로 선정하고 본인을 그 연구책임자로 위촉하였다.한편 이 해 5월 중에 한성대학교 20년사 편찬 연구위원으로 윤경로(사학과),김원중(경영학과), 정후수(국문학과) 등세 교수와 중앙도서관 김명수 사서 과장 등 모두 4명을 위촉했다.그리고 한성대학교 20년사 편집방향 및 시기구분과 집필 분담 및 집필자 선정은 학기중이었기 때문에 여름방학 기간을 이용하여 구체적인 작업으로 들어가기로 하였다. 이에 앞서 연구위원 각자는 흩어져 있는 20년사 관련 자료 수집에 나서기로 하였다.그 후 금년 10월 5 일로 맞는 개교 20주년 기념행사 중에서 한성대학교 20년사말간이 그중기념사업의 하나로선정되었다.
원래 계획은 한성대학교 20년사 편찬도 본교 92년도 6개 발전과제와 같이 금년 12월 31 일까지 연구결과를 보고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7월말한성대학교 20년사 편찬이 본교 개교 2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선정됨에 따라 10월 5 일 개교기념일까지 발간해 주도록 통고를 받게되어 8월초부터 본격적인 착엽 착수에 들어가게 되었다.8월 10일 한성대학교 20년사 편찬위원회를 열고 이 자리에서 시기구분과 집필자 선정 문제를 논의하는 한편 그간수접한 20년사관련 자료의 수집에 따른 정보교환을 하였다. 여기서 집필 시기구분을 다음과 같이 가름하였다.① 요람기 ② 도약기 ③ 확장기 ④ 성장기 등으로 시기구분을 하기로 하고하고 ① 요람기는 1972년 개교에서부터 1982년까지, 설립자 초대 김의형 학장, 2대 이희순 학장, 3대 김옥형 학장 집무시기까지를 집필시기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② 도약기는 1982년부터 1984년까지의 시기로 제 4대 강병규 학장 접무시기를 ③ 확장기는 1984년부터 1988년까지 제 5대 홍순태 학장 칩무시기를 ④ 성장기는 1988년부터 현 1992년까지의 제 6대 신형기 학장과현 원형갑학장집무시기를그대상으로집필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김병수 사서과장은 관련 자료수집 및 교직원 부임연표 빛 퇴임 교직원 명단과 각 보직교수 이 · 취임 연표 등 각종 도표 작성에 따른 분담 접필을 하기로 하였다.
그후 격주로 한벤씩 9월 18 일까지 정기적 A로 모임을 갖고 펀집에 따른 세부사항과 종합성 빛 체계성을 기하기 위한 토론과 협의를 하면서 한편으로는접필에 들어갔다.그리하여 9월 20일까지 각시기구분에 따른 탈고를 하고, 편칩 인쇄에 들어가기로 잠정 합의를 보았다.수차의 모임을 갖는 동안 각종 자료사진 및 관련자료 수칩 등이 시간의 제약과 연구위원들의 능력의 부족을 통감, 차후 짜임새 있고 풍부한 자료를 바탕드로 보다 능력 있는 이들에 의한 한성대학사 편찬을 기대한다.
8월 31 일 20년 편접 소위원회를 열고 편집 지첨을 다음과 같이 확정하였다.각 장별 서술은 편년체 기솔방법을 채택하기로 하고, 그 나열 순서는 이 · 취임에 따른 보직명단(교수, 그리고 학생 간부 명단) 순서로 기술키로하였다.한편 그 다음으로 그 해 일어났던 각종 행사 및 사건들을 요약해 싣기로하였다.기술문자는 처음에는 국한문 흔용으로 하되 고유명사에 한하여 한자로 표기하고 나머지는 모두 한글을 기술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자료수집에 따른정리과정에서 확인이 어려운고유명사가속출하여 표기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모든 기술은 한글로 통일하기로 의견을 모았다-한편 시기구분에 따른 각 장별로 그 기술자의 문책을 밝혀, 사건기술의 정확성을 기하기로 하였다.〈연정열〉목차
題字:卷宇洪짧格축시 ............................................................... 4화보 ............................................................... 5발간사 ...... . ........................... . .............. .. ......... 19편찬개황 ......................................................... 21제 1 장 요람기 ................. : .............................. 311. 한성여자대학 인가 발족 .......................................... 33
ll. 우촌 선생의 교육정신 .......................................... 371. 역사 소명의 고취 ............................ .. .......... ... .. 382. 민족정신의 계승 ............................................. 383. 지(智) . 덕(德) . 체(體)의 조화 .. .. ....... .. .............. 40III. 저 11 회 입학식과 교시(校是) 및 건학이념 ..................... 431. 제 1 회 입학식 ............................ . ...................... 432. 교시 (校是) .................... .................................. 44N. 증과 증원과 활발한 학생활동 ................................. 481. 무용 · 경영 · 무역 증과 ....................................... 482. 각종 서클 탄생과 웅변반의 활약 ........................... 483. 삼학송과 선비절개의 교훈 ................................. 49V. 학도 호국단의 설치와 활동 .......... . ......................... 51VI. 보직 개편과 학술활동 ................................ .......... 53
1. 보직개편 ......................................................... 532. 국문과 방언 · 민속 학술조사 활동 ........................ 533. 한성 경영학보의 말깐 ................................ ....... 544. 한성여자대학보의 역사적 창간 ........................... 56VlI. 제 1 회 졸업식 개최 ............... . ................................ 59VllI. 저 12대 이희순 학장 취임 ............. . ......................... 601. 이희순 학장 취임과 새로운 도약 다짐 ..................... 602. 제 2회 낙산체전 a ........................................... …… 623. 제 3대 학도호국단 구성 ....................................... 63IX. 남 · 여 공학으로 교명 변경, 제 2의 탄생 ..................... 63
1. 제 2의 탄생 남 · 여 콩학우로 .............................. 632. r한성대학보」로 제호 변경 ................................. 643. 남 · 여 공학처l 제 학도호국단 설치 ............ . ........... 644. 탁구를 통한 스포츠 명문 터천 마련 ..................... 655. 전국 대학 미전서 특선 입상 ................................. 66X. 김옥형 학장 취임 및 동창회 조직 ........................... 661. 제 3회 졸업식 ................................................... 662. 제 3대 낌옥형 학장 취임 .................................... 663.5개학과 증원승인 ............................................. 674. 경영 · 무용 두 학과 교직과정 설치 ........................ 675. 제 5대 학도호국단 출범 ....................................... 676. 한성대 동창회 조직 .......................................... 687. 본교 탁구팀 연승가도 달려 ................................. 68X 1. 학과 증원 및 직제 개펀 ....................................... 69
1. 직제 개편과 보직개편 .................................... 692. 제 4회 학위 수여식 거행 ................................. 693. 경제학과 · 도서관학과 증과 .............................. 694. 전학과 교직과정 설치 ................................ .... 69xn. 김옥형 학장 사임과 대학미전서 큰 성과 거둬 ......... 701. 신학기 맞아 보직개편 .................................... 702. 학보 편집인 학생처장이 겸직키로 ..................... 703. 제 5회 학위 수여식 ...................... ; ................... 704. 남학생 주축이 된 제 6대 학도호국만 .................. 705. 대학미전에서 큰 성과 거둬 .............................. 716. 종합관 신축교사 준공 .................................... 727. 동남아 해외연수 .......... . .................................. 72
8. 김옥형 학장 사임 .......................................... 739. 안보우수 서클교로 선정 ................................. 73제 2 장 도약기 ................................................ 751. 제 4대 강병규 학장 취임 ....................................... 77n. 대학기구의 정비와 학사행정의 개혁 ........................ 811. 한성대학 종합화 계획의 발표 .............................. 812. 위원회 신설 ................................................... 813. 학사행 정 체제의 정 비 ....................................•..... 834. 학부제 운영과 인사개편 .................................... 85lll. 학문연구체제의 확립과 대학 이미지 구축 .................. 87
1. 부설연구소 설립 ............................................. 872. 국제 교류와 대학이마지 구축 .............................. 90N. 설립자 우촌 선생의 타계 ....................................... 931.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의 타계 ........................... 932. 우촌 선생의 생애 ............................................. 96V. 시련과 새로운 도약 ............................................. 981. 학장의 퇴임 ................................................... 982. 새로운 도약 ................................................... 99제 3 장 확장기 ................................................ 101
1. 홍순태 학장 취임 ................................................ 1031. 제 5대 홍순태 학장 취임 .................................... 1032. 학생복지회관건립 .......................................... 1053. 각 위원회 통폐합 작업 .................................... 1061I. 성장을 위한 진통 ................................................ 1061. 제 9회 학위 수여식 거행 .................................... 1062.85학년도 신입생 입학식 .................................... 1073. 축구부 창단 ................................................... 1074. 지하철역명 개명 ............................................. 1085. 성장을 위한 진통 ............................................. 108lll. 교사 이전 및 확장 ............................................. 1091. 제 10회 학위 수여식 .......................................... 1092. 86학년도 신입생 입학식 .................................... 110
3. ROTC 창설 ................................................... 1104. 대폭적인 인사 개펀 .......................................... 1115. 교사이전 빛 본관 신축 기공식 ........................... 1126. 졸업정원제에 따른 학칙개정 ................... ........... 113N. 시설확충 및 대학원신설 ....................................... 1141. 제 11 회 학위수여식 .......................................... 1142. 신축건물 준공 ................................................ 1153. 인사이동 ...................................................... 1164. 졸업시험 실시 ................................................ 1165.4개학과 및 경영 · 행정대학원 신설 ..................... 116V. 홍순태 학장 퇴임 ................................................ 117
1. 저112회 학위 수여식 .......................................... 1172. 신설 학과장 임명 ....................................... ...... 1183. 제규정 심의위원회 발족 .......... ... ... .................... 1184. 인사이동 ...................................................... 119제 4 장 성장기 ................................................ 1211. 제 6대 신영기 학장 취임과 교육의 질적 항상 .......... .. 1231. 교육의 질적 항상을 위한 노력 ........................... 1271) 과학관 준콩 ................................................ 1292) 전자계산소 설립 .. .................. ................... …1303) 북방문제 연구소 설립 ................................. 1334) 출판부 설 렵 ................................................ 133
5) 대학원 신설, 경영 · 행정대학원 분리 증원 ......... 1346) 연구분위기 조성 .......................................... 134rr. 제 7대 원형갑 학장 취임 ....................................... 1361. 대학의 생명은 교수확충에서부터 ........................ 1431) 대폭적 인 교수충원 ............................... ... ..... 1432) 객원교수 초뱅 ....... ......................... ........... .. 1453) 명예교수제도 도입 ....... . ............................... 1494) 대우전임교수제도 도입 ................................. 1502. 대학발전 연구위원회 발족 .... .......... ... .. .............. 1511) 한성대학 발전기금 조성 · 운영위원회 ............... 1512) 대학발전 과제 연구위원회 ...................... ...... .. 155
3) 제 2차 대학발전 과제연구 .............................. 1573. 부속기관 활성화 .. ' ........................................... 1581) 중앙도서 관 ............. ........................... ...... .. 1582) 전자계산소 ................................................ 1633) 민족문화연구소 .......................................... 1684. 홍보활동 강화와 대학이미지 제고 . ....................... 1691) r한성대 소식」 발간 .................................... 1692) 홍보자문위원회 구성 운영과 대학 기념품 제작판매... 1725. 교육환경개선은 교육내실의 밑걸음 .............. .... … 1721) 실내 환경 .................... .... .......... ................. 1722) 실외환경 ................................................... 1743) ’92년도 1 학기 교육환경 개선 내역 ............. ; .... 178
6. 체육을 통한 대외적 이미지 향상 ....................... . 1801) 탁구부 ......................... … ........................ .. 1812) 축구부 ..................................... ...... ... ....... . 182〈부 록> .......................................................... 1851. 한성대학교 연표 ........................................... 1872. 한성대학교 약사 ........ ...... ............................ 1903. 학과인가 및 년도별 정원조정 내역 ..................... 1954. 졸업생 현황 ..................... ~ .......................... 1975. 재직 교수 명단 ............................................ …1996. 재직 교직원 명단 ........................................... 201
7. 퇴직 교수 명단 ............................................. 2028. 퇴직 교직원 명단 .......................................... 2039. 역대 학장 명단 ............................... . ............. 205io. 역대 동창회장 명단 ........ ............................... 20511. 10년 근속 표창자 명단 .................................... 206편집후기 ......................................................... … 207보직자연대표제1장 요람기
(1972~1982)
제 1 장 요람기
I. 한성여자대학 인가 발족우리나라 교육계의 거성인 우촌 검의형 박사는 한국 여성 전문 영재양성기관인 한성여자대학을 1972년 12월 문교부로부터 설럽인가 받아 창립하였다.일찌기 설럽자 우촌 김의형 박사는 일제치하 암흑기에 교육만이 조국광복을 앞당기는 길임을 확신하고 교단에 선 이후, 광복을 맞은 해인 1945년 9월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 2가 387번지 소재에 한성학원을 창립, 6년제 한성여자중학교를 설립하였다.1953년 1 월 재단법인 한성학원을 문교부로부터 인가 받았으며, 1955년 2월 설렵자 우촌 김의형 박사는 충남 당진군 송산면 동곡리 소재 한성염천 십만팔천 평을 수익사업으로 재단법인 한성학원에 회사, 교육재정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1955 년 중 · 고 분리 에 따라 고등학교 9 학급, 중학교 12학급으로, 1959년 고등학교 18학급, 중학교 30학급으로 확장 발전을 시킨 바 있다.한성여자대학은 문교부로부터 야간 4년제 여자대학으로, 압학정원 국어국문학과 30명, 영어영문학과 30 명, 비서학과 20명 가정학과 30명, 의상학과 20 명, 생활미술학과 20 명 등 모두 6개학과 150명으로인가를받게 된 것이다.
한성여자대학 개교에 즈음해 초대 학장에 취임하신 김의형 박사는 다음과 같은 취지의 내용이 담긴 개교사(開校蘇)를 발표 하시었다.60년대 중반부터 일기 시작한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조국 근대화 운동은 동남아 빚 남미 개발도상국가들간에 깊은 관심을 끌기 시착하였다.이들 개발도상에 있는 나라들이 조국 근대화 운동이 국가발전을 위한 운동A로 표현된 말로 받아 들여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경제면을 비롯한 여러 국가생활면에서 발전의 의욕을 담고 있기 때문에 후진개발도상국들의 관심을끌지 않을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경제를 내세운 국가발전 계획과 그 전략은 양질의 교육 성과에서만 가능한 것이다.특히 경제의 중요성만을 강조하고 교육적인 연을 등한시하면 자칫 인간소외 현상마저 초래하기 쉽다. 그러므로국가발전 계획에 경제전략 못지 않게 참다운 인간교육이 병행되어야 한다. 여기서 참다운 인간교육이란 바람직한 가치관이 정링된 교육을 뜻한다.
이제 70년대에 들어선 우리나라는 오랜 후진국에서 탈피, 당당히 중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음을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그쳐서는 아니되며 선진국을 향한 목표설정과 이에 대한 실천이 우리에게 당면과제로서 주어졌다.이같은 선진국 달성을 목표로 한 국가발전이란 우리가 당면한 이시점에서, 미래 우리나라를 젊어지고 나갈 전문 인재를 육성하는 한성여자대학의 탄생은우리 국가발전에 하나의 새의미를부여하게 되었다고 확신하는바다.앞으로 우리 한성여자대학은 이같은 시대가 요청하는 교육을 통한 국가발전계획을 펼쳐가는 물줄기의 흐름 속에서 그 맡은 바 임무를 다하며, 우수한 여성전문 인력을 배양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우리 대학은 교육을 통한 영채 발굴과 계발에 힘써, 학문 연마를통한개인의 창의 력을높여 앞날국가발전에 기여할수 있는 인재 양성을그교육목표의 하나로삼기로하였다. 그리고 지 · 덕 · 체(智 · 德·體)의 삼위 일체가 된 이 세가지 요소 중에 어 느 하나도 빠뜨림 이나 빈틈이 없는 균형 잡힌 교육을 구현해 펼쳐 나가고자 한다.
한편 이같은 지 · 먹 · 체(智 ·德·體)의 균형잡힌 교육의 구현은 학교 시설 환경 못지 않게 교수의 질에서 가릅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여기서 전문인력 양성을위한꾸준한교수의 질을높이기 위해 종합장기교육계획의 일환으로쉽없고계획성 있는교수들의 교육연구분위기 조성에 힘 써 나가고자 한다.그리고 지난날 순국 선열들의 애국애족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학생들에게 계 승 진작시켜, 후세에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바람직한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인채로서 육성시키는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이는 우리나라 교육이념인 홍익인간 교육의 나라사랑 마음의 함양과도 일치되는 일이기도 하다.
한편 반공의식 고취로서 국가안보에 빈틈없는 통일 역군 배양을 위해 확고한 국가관 확럽에도 힘쓸 것이다. 이는 나의 교육신조로서 나의 일생을 통해 항일 반콩의 신념을 한시도 잊어 본 적 이 없기 때문이다.끝으로 우리나라 여성 최고학부의 막내로 태 어난우리 한성여자대학은 재단 · 학교, 그리고 교수 · 학생이 합심 합력하여 빠른 시일 내에 한국의 명운교의 하나로 만들어 가꾸어 나갈 것을 굳게 다짐하며 개교사(開校解)에 가릎하고자 한다.1972. 12한성여자대학 초대 학장 검의형한펀 초대 한성 여자대학 이희순 이사장은 개교에 즈음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축사를 하였다.우리가 흔히들 말하기를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이블 셋:로 똑같이 우리 생활과 관심 및 사고의 대상인 것처럼 가름하려고들 합니다.그러나 기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관심사는 과거의 것이 아니면 현재의 것입니다. 한펀 미래의 것도 없지 않으나, 있어봐야 기껏 1.2년 앞이나, 한껏 길어봐야 10년 앞의 것에 불과합니다.돌이켜보면 우리의 역사적 지식은 이같이 과거로는 수천년에 뻗어있음에 반하여 앞날을 내다보는 역사적 지식은 고작 10년도 뻗지 못합니다.이같이 미래는 그저 막연하고 때로는 불안한 구름이나 안개처럼 앞을 막는 것과 갇고 그것은 돌이켜 몇천년의 괴-거를 돌이켜 돌아보는 것보다도 선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같은 앞을 내다보기 힘든 우리의 역사적 지식은 교육을 통해서만이 보다 선명하게 미래를 내다보고건설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교육의 비견과 힘이 숭겨쳐 있습니다.
특히 20세기에 대한 오늘의 미래는 어제의 미래와 엄청나게 다릅니다.왜냐하면 오늘의 미래는 아제의 미래와 달리 급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새로운 발명 빛 발견 그리고 새로운 제도 및 새로운 양식이 쉬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계속 터져 나오게 하고 있으며 우리 눈앞에 이려한 것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교육도 이같은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이에 뒤떨어지지 않는 미래를 내다본 한치의 오차도 없는, 빈틈 없는 바람직한교육관의 확립과 교육 내용이 선행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한편 이같은 긍변하는 세계 속에서 여성에 대한 종래 구속적이고 그릇되고 안일한 인식의 굴레에서 벗어나 남성과 모든 분야에서 명실상부하게 실질적으로 평등한 미래에 대한 준tJ]와 각오가 새롭게 정렵되어야 할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이같은 사회 각 분야에 걸쳐 명실상부한 미래를 향한 무대의 설계는 오직 여성 최고학부의 교육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20세기 세계 속에서 오늘 우리 한국은 앞으로 30년 남짓한다가오는 21 세기 2천년대 세계의 움직임 속에 남의 뒤를 따르는 수동적이 아닌 지구촌을 움직여가는 능동적인 존재 곧 다름아닌 우리 청소년 세대입니다.이같은 세계사적인 전환기에 대한 우리 대학가에 한성여자대학의 탄생은 우리나라 여성계에 새로운 희망이요, 우리나라 대학가에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특히 여성 최고학부의 교육은 심요한 천문적인 학문 연마와 이에 못지 않게 사랑과 믿음의 성실히-고 근면한 여성상의 확립이 무엇보다 도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성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몽과 마음이 다같이 아름다워야 합니다.우리 한성여자대학은 이러한 21세기 미래를 향한 사회 각 분야에걸쳐 사회에 희망의 등불이 되고, 국가 사회에 봉사의 기수가 될 여성지도자 양성을 우리 대학의 교육목표로 상을 것입니다.
끝으로우리 한성여자대학은우리 사회에 부응하는 진실되고 성실하고 참된교육 혁신을 통하여 미래를 향한 한치의 빗나감이 없는 여성인재양성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굳게 다짐하며 축사의 인사에 가름합니다.1972. 12한성여자대학 이사장 이희순ll. 우촌(友村)선생의 교육정신한성여자대학 및 한성학원 설립자 우촌 깅의형 박사는 조국광복과 인재양성을 위해 교단에서 한 평생을 받쳐오는 동안 한성인을 비롯한 이 나라 젊은 청소년들에게 우촌 교육청신을 남겼다.우촌 교육정신의 그 뿌리는 @ 역사소명의 고취 @ 민족정신의 계승@지·덕·체의 조화 등 세 가지 교육정신에서 찾아야할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우촌 김의형 박사는 과거일제36년의 오욕된 식민통치를 초래하게 된 그 원인 중 하나는 민족과 역사의 소명의식을 가져야 할 청소년교육의 소홀에서 비롯되었다고 통감하고 광복이후 가장시급한것은 청소년교육이라 진단하였던 것이다.1.역사소명의고취역사는 시대의 흐름과 함께 변천한다.이변천하는시대의흐름속에 서 인간으로서의 도리에 역행하는사람은역사의이름으로후세에지탄을받게마련이다.이같은 역사의 변천속에서도 한정 부끄러움이 없는 참된 도리를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몸과 마음가짐은 교육을 통한 역사소영(歷史김命)의식의배양에서찾아야할것이다.우촌선생은 일찍부터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데 는두 가지 유형이있다고 보았다. 하니-는자기가하고싶거나 이익에 결부된 일만을 찾아하는 개인주의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개인적으호는 하고싶지 않으나자기가소속된 사회의 필요에 의해 이를 피하지 않고 일생을 그 일에 매달리며 헌신 봉사하는 희생적인 삶을 시-는 유형이 있다고 보았다. 이같은 두 가지 유형 중 이른바 역사의 소명 (B命)에 합딩-한 삶은 말할 것도 없이 후지-의 경우를 말한다.
우촌 선생은 이외- 같이 역사에 부음과 민족과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 양성을 그의 첫벤째 교육사상이자, 교육정신으로 삼고 있다.2. 민족정신의 계승우촌선생께서 평생을 교육자로서의 외길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8.15 광복이후 이 사회와 국가의 주인이 될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시대인식에서 비롯되었음은 이마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한편 어떤 정신의 젊은이들을 양성할 것인가에 대해서 또한 우촌 선생의 교육목표는 분명하였다. 즉 ‘한국정신’에 투철한, 말하자연 우리 민족에 대한 분명한 주인의식과 민족의식에 기초한 젊은이들을교육하고 양성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
우촌 선생은 1 966년 10월 5 일 한성학원 창립 21주년 기념식사를 통해 당신께서 광복과 동시에 한성학원을 설립하게 된 동기를 아래와 같이 밝힌 바있다.“일제의 압제에서 우리민족이 눈물겹도록 배움에 굶주렀던 것과 8.15 광복과 함께 외국의 그릇된 풍조가 노도와 같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안일하게 좌시할수 없어서 ‘한국정신’을 이어받아국가와 이 사회를 위한 인재를 양성해야겠다는 의욕과 취지에서였다위에서 보듯우촌선생의 한성학원의 창학이 념과교육철학은‘한국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젊은이들에게 우리 민족에 대한 투철한 민족흔를 심어주어 다시는 외세의 지배를 받는 오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아야겠다는 역사의식과 민족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우촌 선생은 일제 통치하에서 일본 최고학부의 고등교육을 받았으면 서도 자신의 영달을 위한 고급관리의 걸을 택하지 않고 청소년들에게 민족정기 계승의 불빛을 밝히기 위한 교육자의 걸을 택하였다. 그는 일제치하에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京城女子醫學專門學校) 교수 등 각급 학교의 교직생활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정기의 혼을 불어넣어 주는 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그는 일제치하에서 일인들이 한인을 멸시하고 자기들의 우월성을 뽑내는 태도에 한민족의 우수성과 항거의 기재를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이는 대부분의 지식인이 지식의 양에 비하여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의지와 용기가 부족했던 점을 돌이켜볼 때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말하자면 진리탐구는 아무리 훌륭한 지식과 논리를 갖고 있더라도 이플 실천의 걸로 옮기지 못하였을 때 그 진리는 그 순간 빛을 잃게된다.3. 지(智) . 덕(德、) . 체(體)으| 조화
우촌 선생의 교육사상과 이영은 위에서 제시한 민족의 소명의식 제발과 민족정신을 불어넣어 주는 민족교육의 토대 위에 지식과 덕성(德性), 그리고 체력을 갖춘 참 지혜의 실력있는 지성인과 신체적으로 건강한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을 한성학원의 교육 지표로 상았다. 요컨대 우촌선생은‘한국정신’을바르게 가르치는한편 그위에 지 · 덕 · 체를 조화있게 갖춘 ‘참 한국인’ 양성을 그의 교육목표로 상았던 것이다.교육의 일차적인 목척과 목표는 피교육자에게 새로운 지식을 가르쳐 알게 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과 같이 교육의 일차적인 목표는 무지(無知)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무한한 것이기도 하다. 단순한 사실에 대한 지식에서 시작하여 복잡하고 고등(高等)한 것흐로 전개되어 나간다. 여기서 낮은 데서 높은 곳으로 전개하여 나가는 발달과정은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지며이같은 교육을 통하여 얻어지는 산물이 곧 지력(知力)이다. 이 지력을 가리켜 사고(思考)라고도 하며, 현대 사회는 보다 생산적인 지력을 요구한다.
한편 지력의 교육과 함께 참다운 인간 형성은 인간의 품성도야가 천제된다. 즉 인격적인 교육이 결핍될 때 학습자의 올바른 가치정링이 불가능한 법이다. 그러으로 바람직한 교육은 지력의 신장 못지 않게 도댁성이 내포된 정의(情意)의 개념이 그 교육 속에 담겨져야 한다.어느 시대, 어느 냐라이건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훌륭한 인깐의 배양, 즉 ‘품성도야’와 ‘인격교육’의 근본을 도덕교육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교육을 통하여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더 나아가 그 사회의 번영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구성원을 만드는 데 그목적이 있는것이다. 이같은교육의 목적은의식적이며 의도적인 데서부터 출발한다. 특히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지칭될 만큼 예의와 도의심을 모든 가치관에 우선하는 사회윤리로 지켜왔다. 우촌 선생은 이 점을 기회 있을 때마다 늘 강조하며 예의도덕교육(禮義道德敎育)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다음으로 우촌 선생은 댁성(德性)의 함양을 그의 중요한 교육의 덕목으로 삼았다. 우촌 선생은 기회 있을 때마다 ‘댁 (德)은 충(忠)과 효(孝)와 선(善)의 기본 바탕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매사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한 마-음과 태도를 보이는 것이 덕성을 함양시키는 첫 걸음이라고 당신 자신이 생활속에서 본을 보여 온우촌선생은항상사람은 인간답기 위해 매사겸허하고성실한 몸과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그는평소주위 사람과제자들에게 “실없는생각은정신을상하게 하며 망령된 행동은 화를 자초하는 법이며, 한 때의 분함을 참으면 백년의 근섬을 면한다”는 고사를 즐겨 인용하였다.뿐만 아니라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사람의 성품은 물과 같아 그 성품을 한번 놓아버리면 돌이킬 수 없어 반드시 양심의 제방을 쌓아 제어하여야 한다’는 점과 ‘귀한 재물은 없어져도 쌓은 댁은 흐트러짐이없으며, 충성과 효도는 덕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올바른 인간의 성품은 평소 덕성을 꾸준히 쌓을 때 비로소 바람직한 인간으로 성장해나갈 수 있음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선생에 관한 일화 중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6 . 25사변 때의 일이다. 한때 공산주의자들에게 ‘반동’으로 몰려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공산당의 한 간부가 우촌 선생을 알아보고 이렇게 말했다는것이다.“김 교장 선생님 저를 몰라 보십니끼.? 제가 전에 한성여중 학교럼의 가시철망 공사를 맡았던 사람입니다. 그 때 저의 이려움을 도오}주셔서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습니다여기서 우리는 이념과 사상을 달리 하더라도 평소 쌓은 덕은 이념의 높은 벽도 념을 수 있다는 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끝우로 우촌 선생의 교육사상이자 교육이념으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체육교육을 남달리 강조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는 점 이다. 사실 아무리 지력과먹성을갖춘사람이라도체력이 뒷받침 해주지 못하면 절름발이 , 용기없는 기형적인 인간이 되기가 십상이다.
.健康第-’ 김의형 박사 친띨 (1969 년)
일찍이 고대 그리이스 시대부터 정신교육과 신체교육의 심신일원론(心身一元論)교육이 강조되었던 것도 이같은 배경에서이다. 체육활동은 한 개인의 신체에 잠재적으로 감추이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할수 있는원동력이 된다. 여기서 체육활동을보다활발하게 촉진시키는 것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보다 건강하고 ‘인간답게’라는 희망에서 부터 출발하며, 이같은 체육활동의 효과는 한 인간에게 주체성과 용기 그리고 결단성과 추진력을 배양시켜 주는 밑거름이 된다.
우촌 선생은 동경 유학시절, 어느 날 체육시간에 띔틀넘기에서 가장 높은 띔틀을 무난히 뛰이념자, 평소 식민지 한인을 멸시허던 몇몇 일인 학생들이 질투를느껴 100미터 달리기를하는 그의 뒤에서 다리를 걸어 넘어뜨렸다. 이때 약간의 부상도 입있다고 한다.우촌 선생은 이같은 일인 학생들의 야비한 행위에 대한 분노가 한순간 일어나 적지(敵地) 일본 땅에서 넓은 운동장이 떠나가도록 고성(高聲)과 함께 일인 학생에게 일격을 가하여 그 학생을 졸도시킨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그의 과감한 행동을목격한 일인 교수와 학생들은 오히려 우촌 선생의 흥분괴- 격정의 모습에 놀라 자기들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였다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촌 선생의 민족주의적인 자아의식과용기있는행동의 일단을엿볼수있으며, 이것이 훗날 한성학원의 설립동기로 이어 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III. 제 1 회 입학식과 교시 (校是) 및 건학이념
1.저11 회 입학식1973년 3월 5 일 역사적인 한성여자대학 제 1 회 입학식을 성대하게 가졌다.초대 학장 김의형 박사는 입학 개식사에서“우리 한성여자대학이 오늘 제 1 회 입학식을 갖게 된 것은 우리 한국 대학가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고 전제하고 여성 전문 영재 육성에 최선을 다할 것”을 강조했다. 이어 한성여자대학 재단 이희순 이사장은 축사에서 “ 급변하는 세계 정세의 변화는 여성 전문 영채 교육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 보다도 높다고 강조하고 앞으로 이같은 역사적 소명을 다하는 대학으로 만들어 나가겠다”고덧붙였다.
한편 73학년도 3월 제 1 회 신입생을 맞아 교무처장에 고창식, 학생처장에 윤태영 교수가 각각 취임하였다.
저11 회 입학식을 초대학장김의형 박사의 개교사로 시작되어 성대히 이루어졌다.
2. 교시(校是)
본교 설럼자이며 초대 학장 김의형 박사는 본교 교시(校是)를 진리(與쩔) , 지선(至善)무로 삼고, 본교 건학이념으로 @ 진리탐구 @ 인격도야@인재양성으로할것을밝혔다.(1) 진리탐구진리탐구는 상아탑의 본연의 임무요 사명이다.진리(꿇理)란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 타당한 논리의 법칙이요, 참된 도리를 뜻한다. 이같은 진리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규정되어 왔다. 곧새로운시대에는 이에 부응한새로운지식이 요구되는 법이다. 그러나 사물의 근본원리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 원리를 밝혀내기 위하여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온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끊임없는노력을기울여야하며 이를탐구하기 위해 무엿보다 창의력의 개발이 있어야 한다. 우리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무한한 창의력을 개발, 창출하여 인류문화 창달에 기여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대학교육의 중요한 목표이자 목적이라 할 것이다.
문화란 인류의 산물로써, 인간에 의하여 창조되고 생성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선조로부터 대대로 전승되어 온 하나의 민족적인 유산이 다. 이같은 운화의 전승은 진리탐구를 전제로 계승 발전한다.한편 진리의 탐구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탐구의 올바른 자세가 요구된다. 사물을 올바로 보는 시각 및 탐구의 바른 자세가 확렵되어 있지 않다면 진리를 찾아낼 수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진리 탐구의 자세는 어느 시대, 어느 환경속에서도 흔들렁이나 굴하지 않고 참된 도리를 찾아 밝혀 나가는데 있다. 따라서 본 대학의 첫번째 교육목표인 진리탐구의 구체적인 시행 목표로서 진리 탐구 외에 창의성의 계발과 올바른 가치관의 확럽을 덕목으로 설정하였다.(2) 인격도야본 대학의 두번째 교육목표는 인격도야이다. 대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전당이자, 인격도야의 장이다. 다라서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 라도 그 사람됨 이 바르지 못한다연 그는 올바른 사람이라할수없다.
올바른 사람은 세상의 시류에 끌려다니지 아니하고 참된 도리를 바르게 지켜 나가는 사람이라할 것이다. 얼찍이 우리 동양에서는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사람은 학문 연마와 함께 인격수양에 힘써 덕을 쌓는 일을 중하게 여겨왔다. 인간으로서 참된 도리를 지켜가며 살아가지 않는 이는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속마음과 다른 말이나 몸가짐을 하거나 자기 고칩을 내세우는 사람을 바른 인격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즉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도 인격을 갖추지 못했을 때 그 사람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평가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으로 배웅이 넓어가고 깊어갈수록 그에 비례하여 올바른가치관이 확럽되어야할 것이다. 먼 앞날을 내다보며 바른 봄과 마음가짐을가지고행하지 아니한다면,그는진정한의미의 지성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듯이 한 인간이 인격을 도야하는 데 있어 전제조건의 하나가 건전한 신체의 단련이다. 특히 본 대학의 경우 설립자 우촌 선생의 교육이념 가운데 체육교육(體育敎育)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건강을 잃을 때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올바른 지식의 함양과 함께 건전한 육체 단련을 위한 이원적 교육이 강조된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덕을 쌓은 이라도 건강하지 봇하면 용기와 과단성과 추진력의 결핍으로 그 배운 바 참뜻을 바로 실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고대 그리이스 아테네의 여러 교육자들에 의해 지식교육 못지 않게 체육교육이 강조되었던 것도 여기에 있었다. 요컨대 개인의 인격도야는 물론 민족 구성원 전체의 건전한 인격과 건강한 사회인을 양성하기 위해 체력을 단련하며 연마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대학교육의 과제이자목표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오늘날 민주시민사회에서 아우리 배운 것이 많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녔더라도 그 사회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그 사회로부터 환영받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작고 변변치 못한 일이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일과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할 때 비로소 민주시민으로서의 자격이 부여되는 것이다.
이상의 점에 유념하여 본 대학은 두번째 교육목표로 인격도야를 설정하였으며 그 실천 덕목으로 첫째, 덕성의 함양과 둘째, 건강한 신체의 단련 셋째,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인간상을 본 대학의 또 하나의 덕목으로 삼은 것이다.(3) 인재양성본 대학이 설정한 세번째 교육목표는 인재양성이다. 대학의 사명은 국가사회에 유익하고 유능한 인채를 양성하는 데 있다. 대학은 그 나라의 최고학부로서 옛부터 국가의 고급 인채양성 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해 왔다. 역사적£로우리나라의 최고교육기관에서는국가와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재양성을 기본적인 목표로 삼고 ‘배달겨레’의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는 교육에 모아왔다. 이를 한 마디로 함축하고 있는 교육이념이자, 교육철학이 홍익인간 구현이다.
홍익인간사상은우리 배달겨레의 건국신화이자, 단군조선의 건국이념을 함축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이다. 여기서 단(樓)이란 ‘밝달’이라 하여 ‘밝은 땅’이란 뜻으로 ‘배달’이라고 전해 왔으며, 우리가 말하는 ‘한얼’은 ‘단일민족’ 또는 ‘백의민족’을 의미하며, 시조(始祖)단군(權君)의 혈통을 그대로 계승하였음을 뜻하는 사상이다. 그리고 ‘홍익인간’이란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이다.‘모든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정신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이자 오늘날 우리 교육의 최대 덕목으로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 정신과사상에 부합한 인재양성을본대학의 교육목표의 실천 덕목의 하나로 삼았다. 따라서 우리 대학은 이 덕목의 실천을 위해 첫째,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과 민족정신에 투철한 ‘참한국인’을 양성하고 자 하 였다. 다시 말해 우리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불어 넣어 한민족에 대한 주체성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것이다.둘째,건전한 시민의식을 소유한 지성인을 양성하는 일에 주력하고자 하였다. 우리 민족은 유구한 역사에 비하여 근대적 시민의식에 기초한민주사회를 건설한 것은 1945년 해방 이후이다. 따라서 장구한 민족사에 비해 매우 일천하다.
최근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이기적 개인주의나 공공의식의 절대 결여 현상도 우리사회가 진정한 의미의 민주시민으로서의 훈련과 경험을 축적하지 못한데 그원인이 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향후 우리사회가 진정한 민주시민 사회 건설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다학에서 젊은이들에게 건전한 시민의식을 고취시키는 일이 무엿보디- 성행되어야 할 과제의 하나이다.모든 대학의 궁극적인 교육목적이 그러하듯 본 대학 역시 인재양성의 최종목표와 목적을 민족과 국가를 위한 인채를 양성하는 데 머물지 않고세계 인류평화에 이바지할수 있는세계적인 지도자를 양성, 배출하는 데 두고자 하였다. 작금 우리민족은 과거에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민족사적인 국운(國運)의 도래를 맞이하고 있다. 안으로는 지난 40여년간 미소양대 냉전체제하에서 대럽과반목을거듭하였£며 민족분단의 벽을 쌓아 왔다. 그러나 최근 소련을 버롯한 동구권 국가들의 변화와 북방정책에 힘입어 통일운동이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88올림픽 개최 이후세계 속에서의 한국의 위상이 날로높아져 가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현재 우리 민족 2천년의 역사 이래 한민족의 최대 민족적 중홍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 장래를 책임져야 할 인재양성의 책무를 담보하고 있는 오늘의 대학은 이같은 대내외적인 변혁기와 함께 도래한 겨레민족의 국운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갈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는 일을 본 대학의 교육지표로 삼아 마땅할것이다.
N. 증과 증원과 활발한 학생 활동
1. 무용 · 경영 · 무역 증과1974년도부터 입학정원이 전년도인 1973년 150 명 보다 80명이 증원된 230 명」으로 늘어 나게 되 었다.이는 지 난해 12월 20일 학과정원조정에 의하여 불문학 20명, 무용학과 20 명, 경영학과 30 명, 무역학과 30명으로 각각 증과된 반연 비서학과 (20명)는 폐과 되었다. 그리하여 74학년도부터 본교 입학정원이 9개학과 230명으로 증원을 보게 되었다.한편 3월 신학기를 맞아 보직개펀이 있었다.교무처장고창식, 학생처장윤태영 교수를 임명하는한편 국문학과장 윤태영, 가정학과장 김복길, 생활미술학과장 차주환 교수를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강사인 연정열을 경영학과 및 무역학과장 대행을 명하였다.
2. ζ총 서클 탄생과 웅변반의 활약1974년은 국내적으로 북한공산집단의 사주를 받은 조총련 문세광이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저격 시해하는 등 그 어느 때 보다도 북한공산주의자들의 도발행위가극에 달한시기였다. 이같은북한공산집단의 도발행위는상대적으로우리의 총력안보가강조되었다. 이같은 국가안보와 총력안보의 강조는 대힐L을 비롯한 각급학교에 그 영향이 파급되어 안보교육이 강조되었다. 한편 개교 2년을 맞은 학생활동도 총력안보 차원에서 활발하게 일어난 안보문제연구회(회장 조인자, 지도교수 연정열)을 비롯한 R. c. Y.( 회장 박옥연, 지도교수 윤태영)불교학생회 등 세 서클이 처음흐로 선보이게 되었다. 특히 안보문제 연구회는 한국반공연맹 산하 전국대학 반공서클 회원교로 가입하게 되었다.이해 1974년은국가안보와총력안보의 각종궐기대회 및 각종행사가 여기 저기서 열렸으며 이같은 시대적 상황은 각종 만공웅변대회가
1975 년 제헌절 웅변대회 단체 우승을 하고
(왼쪽부터 조인자, 문현숙, 이성옥, 이경숙 및 연정일 교수)개최되기도 한 시기였다. 이같은 시기에 부응하며 본교도 웅변반이 조직되고 웅변활동을 통한 신설교인 한성여자대학을 대외에 홍보하는 데 힘쓰기 도하였다.
동 웅변반은 서명애(영문과 1 년) , 이경숙(영문과 1 년) , 이정국(경영과 1 년) 등 셰명의 반원을 주축으로 연정열 지도교수 지도 아래 전국규모의 웅변대회에서 그해 7관왕을 차지 대학웅변을 제패한 해이기도 하다. 이해 6월 31 일 제 26 회 대통령 친수기 쟁탈 제헌철 전국남여웅변대회에서 본교 웅변반은 대학일반부 단체우승을 차지 하였으며, 이날 천국웅변인 회가 주최한 총력안보 전국낭여종별웅변대회에서 서명애양이 최우수상을 희득, 하루동안 두 대회에서 2관왕을 차지하는 진기록을 낳기도하였다.3. 삼학송과 선비 절개의 교훈1945년 5월 본교 정문 옆에 세그루의 나란히 우뚝선 소나무에 삼학송이 란 이릎을 붙이고, 한성 인들에게 젊은 학도로서의 기개를 함양하는성-징나무로 삼기로 하였다.
이 소나무는 지 난 1920년부터 이 곳에 야생 하던 소나무로 고사 직전 설링자김의형 박사가손수그나무를돌보시어 오늘의 거목£로 키워왔었다.당시 학생처장이며 검의형학장의 평생의 교육동지요 보필자이었던 윤태영교수 등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 세그루의 소나무를 김의헝 학장은 삼학송이라 명명하고 본교의 상정나무로 상기로 하였다.여기서 삼학송이란 병자호란 때 나라를 위해 순절한 상학사(三學士)의 절개를 뜻하고 있다. 영자호란 때 적지 청나라에 끌려가 항복화친을 끝까지 반대, 살해 당한 홍익한, 윤 칩, 오달제 등 셰 선비의 절개를 받들어 상학사의 이릉을 따서 심-학송이라 이릉을 칭하게 된 것이다.
이 소나무는 설립자 김의형 박사가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절개를 받들어삼학송이라칭한 교목이다.
v. 학도호국단의 설치와 활동
1975년 2월 직제개편에 따라 차장을 과장으로 직제를 바꿔, 교우과장 정기수, 학생과장 연정열 교수를 임명하였다. 그리고 불문학과장 정기수, 전임강사대우 김진걸 교수가 무용학과장 대행에 취임하였다.75년도는전년도 74 년에 이아 총력안보가강조되던시국적인요청으로 본교에도 학도호국단이 처음으로 조직되었다.대대장 조인자(국문과 3년) , 부대대장 박옥연(영문과 3년) , 총무부장 박순식(가정과 3 년) , 지도부장(생미과 3 년) , 새마을과장 정득영(가정 3 년) , 문예부장 문장옥(국문과 3 년) , 체육부장 주순희(의상학과 3 년)를 각각임명하였다.그해 1 975년 11 월 초 비가 쏟아지는 속에 한성여대 학도호국단 자체검열을 받았으며, 한정 흩트러짐 없이 절도 있고 짜임새 있는 분열학도호국단 통일연수소 연수를 끝내고
(왼쪽 세번째부터 연정열, 윤태영, 통일연수소 소장, 고창식 교수)
태도에 검열단으로부터 칭송을 받기도하였다. 본교 학도호국단은 이같은 국가안보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하여 12만원의 방위성금을 모금하여 경향신문에 기탁하기도 하였다.
한편 본교 웅변반은 75년도 신학기를 맞아 조인자(국문과 3년), 문현숙(가정과 1년), 정정숙(경영 1년) 등으로 개편하고 그해 7월 17 일제 27회 제헌절 천국웅변대회에서 전년도에 이어 단체우승을 차지 동대회에서 2년패를 달성하는 등 그해도 전년 74년도에 이어 총력안보웅변대회 등 대학 웅변 7관왕을 차지 75년도 대학웅변을 제꽤한 해이기도하다.이해에 접어들어 기독교 학생회, 등산반 등 서클들이 하나 둘씩 새 서클이 선보이게 되 었고 본교 학생들의 대외봉사 활동도 개교 이래 처음으로 활발하게 펼쳐지기도 하였다.75년 7월 18일부터 1주간 본교 학도호국단 봉사단은 윤태 영, 연정 열두 교수의 인솔 밑에 충남 아산군 탐정변 신리 소재 온양 양로원에서 수익 사엽체인 묘목밭 경작을 도와 김매기 등의 봉사활동을 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5 일부터 1주간 동 양로원에서 동계봉사활동을 하였다.
이에 앞서 이해 5월 8 일, 전교생이 참가한가운데 본교 안보문제연구회(회장조인자)주최로북괴만행규탄궐기대회를갖고 3개항의 결의문을 채태하였다.전국 각대학별로 북괴만행규탄 궐기대회를 갖고 대학생으로서 안보의식 고취와 결의를 다진 이 행사에 본교도 동참 이날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채택 하였다.@ 우리 대학생은 총화딘결로서 안보자세를 굳건히 할 것을 대학생들에게 호소한다.@ 우리 대 학생은 띤학무로서 나라에 보답하고 총력안보에 기수가 될 것을굳게 맹세한다.@ 우리는 한마음 한뜻으로 굳건히 뭉쳐 북괴야욕을 분쇄 승공통일의 지표를 굳건히 할 것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바이다.VI. 보직개편과 학술활동
1. 보직개편개교 4년째를 맞는 1976년 신학기를 맞아 이제 1 학년부터 4학년까지 전학년이 함께수강을 하게되어 명실상부한 4년제 대학의 띤모를 갖추게되었다.신학기를맞아교무과장정기수,학생과장연정열교수가유임되었으며, 그해 6월 다시 보직개편이 있었다.교무과장 이경식, 학생과장 이근수 교수가 각각 취임하였다. 그리고 국운학과장 이근수. 영문학 과장 이경식, 가정학과장 킴복길, 생활미술학과장 치주환, 경영학과 맞 무역학과장 연정열, 무용학과장 대우 조교수 김진걸 교수가 각각 임명 되었다.2학기에 접어들어 학도호국단 직제개편과 임원개편이 있었다. 대대장이 제대장으로그병칭이 바뀌었다.제대장 이혜숙(국문과 3 년), 부제대장 유선봉(무용과 3 년), 제 1중대장 길을냥(생미과 3 년) , 제 2중대장 박영희(의상과 3 년) , 제 3중대장 흥연휘(의상과 3 년) , 총무부장주완숙(경영과 3년) , 새마을부장 이영란(가정과 3 년) , 지도부장 김명옥(생미과 3 년), 문예부장 전미화(국문과 3 년) , 훈련부장 검수광(영문과 3년)을 각각 임명하였다.
2. 국어 국문학과 방연 · 민속 학술 조사활동이에 앞서 6월 국문학과 남해도 방언 민속 학술조사 활동을 이근수 교수 지도 아래 펼쳐 본교 학술조사활동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한편 그해 10월23 일, 24 일 이틀에 걸쳐 제 1 회 낙산축전이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이로서 낙산축전의 새로운 전통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있디11 월 1 3 일 76학년도 학도호국단 병 영실기를 포함한 자체검 열을 받았다.3. 한성경영학보의 발간
본교가 개교 4주년을 맞는 1976년 아직까지도 학보가 없다는 아쉬움을 느낀 경영학회 (동년 4월 최초로 학회를 구성, 회장 주완숙)에서 처음으로 타블로이드판 신문인 한성경영학보를 11월 22 일자로 창간호를내놨다.동신문은 발행인 낌의형, 편집인 연정열로 되어있으며, 편집장 경영학과 3년 정상란이 맡았다.이 한성경영학보가 발깐 됨드로써 요람기 본교 최초의 신문으로 선보이게 되었다. 동지가 나옴으로서 한성여자대학보 발간의 시급성을 촉진시켜 드디이 그해 12월 한성여자대학보의 창간을 보게 되었다. 한편 한성경영학보. 창간호에서 발행인 김의형 학장은 다음과 같은 빌간사를하였다.
한성여자대 학보의 모체인 한성경영 학보는 1976년 11월 22일자로 장간되었다.
경영학회를 창렵하고서 그나마 타블로이드판 회지까지 창간호를 내놓게 된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건대 우리 한성여자대학이 고고의 성을 울린지 4개 성상, 이 짧은 시간 동안 우리학교 안팎£로 내실을 기하는데 힘써왔습니다.우리는 대내외적 A로 여러 어려운 요건을 극복하면서 오늘에 이르렀고 앞무로 이를 이겨나가며 명문 한성여자대학의 굳건한 상아탑을 쌓아 올려나가야 합니다.도전 (Ch머lenge) 과 응전 (Response) 의 되풀이 속에서 문화가 발전한다는 20세기 영국이 낳은 석학 아놀드 토인비의 말이 이를 뜻하는 것강습니다.고대 인류운영의 발생이 비옥한 초원지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가뭄과 홍수가 빈번한 황하유역이나 나일강 유역에서 일어난 것도 인간이 자연의 도전에 대한 굽힐줄 모르는 슬기와 용기의 응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경영학회 창럽과 함께 이번 창깐호를 내게 된 경영학회보의 탄생은 제반 어려운 요건을 극복하고 내일의 참다운 경영인무로서의 소양을 수련하는 광장드로서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그리고 이것은 한성여자대학의 밑거름이 될 한 씨앗이기도 합니다.경영학과 학생들은 이번 회지 창간을 계기로 더욱 열심히 연구하고 수양하는 바람직한 몸과 마음가짐을 갖고 내일의 올바른 경영인드로서 의 자세를 다시 한번 새롭게 가다듬기 바랍니다.앞으로 이 회지기- 판을 거듭할 때마다 더욱 짜임새 있고 알찬 내용으로, 경영학회의 새소식과 함께 참다운 학술지로서 발전있기를 바랍니다.끝으로 이 회지가 나오기까지 힘쓴 지도교수와 관계학생의 노고에 다시 한번 치하하는 바입니다.4. 한성여자대학보의 역사적 창간
1976 년 11 월 30 일 문공부로부터 정기 간행물 허가를 받고 격월간 대학신문인 한성여자대학보가 1976 년 12월 10일자로 역사적인 창간을 보게 되었다.동 신문은 학생과에서 관장 말깐키로 하고 발행인 김의형, 편집인 ·주간 이근수로 등록을 마쳤다.한성여자대학보가창간됨£로써 한성경영학보는 말전적 폐간을 하였다.한성여자대학보 창깐에 즈음해 발행인 김의형 학장은 다음과 같은 발간사를하였다.고난을 무릅쓰고, 한국의 열을 심음 o 로써 참된 여성교육을 실현하려는 건학정신a로 정착한 지 벌써 4 년, 이제 조출하게 우리의 솜씨로 「한성여대학보」를 창간하게 됨을 진심 A로 경하해 마지 않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그 자체내에서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 끊임없는 변화에 다각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갖가지 지식들을 요구하게 됨니
1976 년 12월 10일자로 창간된 한성여자대 학보. 김의혈 박사의 창간사에서 동 신문을 「대학의입 j이라 칭하며 모교애의 터전이 되어야한다고격려 .
다. 그리하여 오늘날을 「지식의 폭말시대」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편안히 이 지식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을 지니지 못하였습니다. 다만생활의 일부를담당하면서,폭발하는이 다량의 지식을 보호할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새로운 지식, 새로운 교육이념을, 그리고 높은 지혜와두터운 덕행, 튼튼한 체력을 갖춘 미래지향적인 인격형성을 위하여, 우리 선인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살리고 심오한 이론을 실제의 현장에 실현시키기 위하여, 국제 초유의 순수 여성야간대학을 설렵한 것입니다.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 난관을 살피건대 독서삼여의 하나인 야간을 이용하여 학문을 연찬하고, 이것을 주간의 실무에 충실히 응용할 수 있도록 함이 시급한 일임을 감득해야 할 것입니다.이 주경야독의 자세와그본질은 의지의 응결입니다. 그것은 남성의사유물이 아닙니다. 현대적 의의로는 여성으로까지 확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 학보의 창간은 본교의 건학이념을 더욱 창조적흐로 구현하려는 노력의 한 표현입니다. 알찬 내용과 분명한 논지, 다양한 편집으로 대학언론의 일익을 맡으면서 사계에 날로 성가를 높이면 우리의 의지는 서서허 구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 학보를 의지 구현의 장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먼저 본 학보는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관섬밖으로 나가서는 안됩니다. 하나하나 미세한 것에도 관심을 두어 잘잘못을 가려보고 비판과 질정을 이까지 않아 건전하게 이끌어 가야 할 것입니다. 참여 없는 비판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학술을 연마하고 섬요한 학술의 이념을 연결하여 국가와 민족, 나아가 인류사회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내용을 발표할 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조상이 남긴 빛난 문화유산을 보전해야하며 나아가서는 새로운 문화창조의 전진적 자세로 임해야 할 줄 압니다.또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모교애를 지녀야 합니다 r대학의 입」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본 학보는 우리 학운의 깊이요, 정서의 향취, 대화의광장으로서 우리 모두의 정신의 칩결지요, 시선의 춧점이 되어야 합니다.
지나온 짧은 몇년이지만 서서히 저력을 기르띤서 , 이 힘이 모교를 위하여 얼마나 활용될 수 있을까를 측정하여야겠습니다. 오늘날의 대학은 부하된 기능이 다원화되어가고 활동의 양상 또한 복잡다양 하여지기 때문에 대학내의 복장한 그 의식을 본 학보를 통하여 통일시키면서 공홍된 최대공약수를 빌·견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졸업후 사회에 나아깐 뒤라도 모교와의 연락역은 역시 본 학보에서 담당하여야 될 것입니다. 모교에 대한 향수로 공허해진 마음의 여백을 한장의 학보가 날아옮으로써 메울 수 있을때 비로소 학보의 존재를 알게 되고 뜨거운 모교애를 느낄 수 있을 것입 니 다.또 학보는 학원 저널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학교내의 행사 · 학사문제 · 제반 학술내용 등을 모두 수용하여야 하며, 미래의문을 두드리는 자세로 「학원 입 」노릇을 할 때, 학풍수럽의 선구적 역할을 할 때 , 전 학생들에 대하여 선도적자세로 일할 때 참다운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시발의 시점에 서 있는우리 한성여자대학보는학교당국 · 교직원, 그리고 학생들의 어느 한편에만 기울어지는 편향성을 띠지 말고 한성여대 전체를 투영하는 의연한 자세로 굳건히 발전해 주기플 바랍니다. 젊은 지성의 소리를 대변하고, 배웅의 전당 속에서 학구의 반려가 되어 창의적인 노력과 자율적인 의지로서 꾸준히 노력해 주길 바합니다. 학생 스스로가 만드는 순수성을 상실하지 말고 강렬한 연학의 열의로 자기를 통찰하여 여성교육기관의 기관지적 성격을 갖추는 것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 앞에 산재해 있는 지식의 본질을 외부에서 만 파악할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안에서 탐색해 내는 자세로 임하걸 바랍니다.아무쪼록 뜻깊은 한성여대학보의 창간을 맞아 본교 말전에 새로운 초점이 될 것이며 아울러 본교 건학이념의 발현체로서 지성의 선도자가 되어주길 비라마지 않습니다.Vll. 제 1 회 졸업식 개최
1977 년 2월 25 일 한성여자대학 제 1 회 졸업식을 가졌다.이날 역시적인 제 1 회 학위수여식에서 깅의형 학장은 개식사에서“오늘우리 한성여자대학제 1 회 졸업식을맞아 4년간형설에 공이 쌓여 영예의 학위기를 받는 졸엽생 여러분들을 충섬으로 축하한다”고 전개하고 졸업생들이 오늘의 영광이 있기까지 뒷받캠 해주신 학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여 사회에 나가 훌륭한 등불과 같은 흘륭한 일꾼이 되라”고 깅조했다. 이어 이희순 이사장도 축하에서“오늘 영광의 학위를 받는 졸엽생들의 졸업을 충심우로 축하한다"
고 강조하고 “앞£로 졸업후에도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학교에서 배운 전공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 모교 한성여자대학을 빛내좋 것”을 강조하였다.이날 영광의 학위기를 받은 졸업생들은 다음과 같다.국문학과 25명, 영문학과 22명, 의상학과 6명, 생활미술학과 14명, 가정 학과 23명 등 모두 90명 여학시-를 배출하였다.
저11 회
졸업식에서는 김의형 박사의 식사에이어 이희순이사장의 축사로모교 한성여자대학을 빛내줄 것을 강조했다.VIII. 제 2대 이희순 학장 취임
1. 이희순 학장 취임 과 새로운 도약다짐1977년 3월 1 일 제 2대 학장에 이희순 학장이 취임하였다.한편 보직임명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교무과장 이경식, 학생과장 이근수 교수를 유임시키고, 국문학과장 이근수, 영문학과장 이경식, 가정학과장 검복길, 생활미술학과장 차주환, 경영학과장경 무역학과장 연정열, 무용학과장 대우 조교수 검진걸교수를 각각 유임시키고 새로 의상학과장에 장석향 교수를 임명하였다-한편 77학년도 불문학과 폐과에 따른 새로 인가를 받은 국사학과장에 신은숙 교수를 임 명 하였다.이희순 학장은 제 2대 학장에 취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취임사를 하였다.
유난히도 흑독했던 지난 겨울날씨에 현관옆에 심어논 목련이 그냥 얼어죽고 말았으려니 했으나 새봄을 맞아 충분한 봄1:1]와 따뜻한 날씨에 다시 소생하여 어여쁜 꽃들도 피우고 이제는 푸릇푸릇 씩씩한 잎사귀들이 많이 돋아나서 신록의 여릎을 맞고 있습니다.이벤에 본인이 뜻하지 않게 한성여자대학 학장서리로서 취임하게 되니 한편 으로는 부풀어 오르는 벅찬희망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앞으로 해결해야 될 여러 문제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능력에 부칠것 같아 무거운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돌이켜 보면 우리 한성여대는지난 72 년 창립 이래 해마다한학년씩 을 늘려 나가는 발돋음을 거듭한 끝에 금년봄에야 제 1 회 졸업생을 내면 서 명 실 공히 4 년제대학으로 출발되었습니다.이는 요로지 초대 학장 검의형 박사님을 위시한 교직원 학생 여러분이 학교발전을 위해 진력해 온 보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간 5년동안은 대학의 모든 활동이 교실을 갖추고 학생과 교직원들을 매년맞아들이면서 대학의 기본기능에 대해서는 겨우 한가지씩 시험해 온 상황이라 하겠습니다.
마치 지난 겨울 혹한에 시달려 몸살을 앓던 나무들이 새봄을 맞아 겨우대지에 새뿌리들을내리면서 활착한단계라고나할까봅니다.따라서 앞으로 수년간은 열심히 이 나무들에 영양을주고 정성껏 가꾸어서 어서 빨리 가지들을 나게 하고 많은 잎을 피워서 빠른 시간에 화사한 꽃들을 피우게 하여야 하겠습니다.이제 이단계에서 우리 한성여자대학 운영의 중책을 맡으며 본인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 방침을 갖고 학교 운영을 하고자 합니다.첫째는 면학분위기의 조성입니다. 본인의 소견으로는 대학설렵의 가장큰 의의는 현대와 같이 고도로 발달된 실업문명사회에서 심각한 경쟁에 적응하여 자기를 확렁하고 사회 및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문화인, 지식인, 과학인의 배양에 있다 하겠습니다.따라서 이제부터는 비록 빈약한 여건이나마 최소한의 여건을 그동안 갖춘것£로생각되으로모든역량을집중하여 면학하는대학을만들도 록 다같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이와 같은 면학하는 분위기를 조성 발전시켜 줄 대학의 여러 가지 제도 및 기능을 확립하고 개선해야 하겠습니다.지난 5년 동안의 초창기에는 창설대학의 어려운 제반요건으로 많은 혼란도 있었고 시행착오도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그동안의 여러 경험을 을 바탕A로 하여 대학이 해마다 눈에 띄게 발전할 수 있고 전진할 수 있도록 우선 학내의 모든 제도와 기능을 재정비하여 학생 및 교수 여러분이 각기 본연의 업무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셋째로는인화와협조입니다. 이는어느사회나단체에도공통적으로 요구되는 바이겠지만 특히 우리학교에서와 같이 여러가지 불편과 미숙한 점이 많고 경험과 역사가 짧은데에서는 어느 무엇보다도 중시되어야할것입니다.우리 대학이 앞A로힘찬발전을하기 위하여는학생 및 교직원 여러분의 불타는 애교심에 바탕한 절대적인 협조가 필요합니다.대학이란 본래 개성있는 자아를 발전시키는 특수사회이묘로 다른 어느 단체보다는자아를 내세우는습성이 뚜렷합니다. 따라서 사사건건 시시비비 분명해야 하겠지만 서로가 상대를 자기와 같이 존경하고사랑하는 기풍을 세움으로써 인화와 협조를 이룩합시다.
우선 학내에서 이러한 전통을 이룩함으로써 우리 대학은 학외에서도 자랑스럽고 존경받고 인정을 받는 대학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끝A로 본인은 학장채임 기간동안 이상에서 말씀드린 목표를 달성시키기 위하여 학생 교직원여러분의 뒷바라지에 최대최선의 노력을 본인의 능력이 자랄 수 있는 한 경주할 것임을 서약코자 합니다. 감사합니다.2. 저 12회 낙산체전이해 10월 8 일과 9 일 양일간 제 2회 닥산체전이 성대하게 열렸다.전년도 제 1 회 낙산체전 때보다 그 규모나 내용띤에서 많은 발전을 가졌왔으며 서클도 카톨릭학생회 서예반 등 새 서클의 탄생과 함께 낙산체천의 질적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제 1 회 낙산체전 때보다 않은 발전 을 가져온 제2회 낙산체전은 1977 년 10월 8일과 9일 앙일간성대히 치뤄졌 다.
3. 제3대 학도호국단 구성
제3대 학도호국단 임원구성을 다음과 같이 편성하였다.총학생제대장 연영순(국문학과 3년), 부제대장 이순분(가정학과 3년), 1중대장 정난순(생활미술학과 3년), 2중대장 정해덕(무용학과 3년), 총무부장 유하행(가정과 3년), 새마을부장 최명숙(경영학과 3년), 지도부장 배애숙(가정학과 3년), 훈련부장 황규인(생활미술학과 3년), 문예부장 백인숙(국문학과 3년) , 체육부장 김정인(무용학과 3년).IX. 남 · 여공학i로 교명변경 제 2의 탄생1. 제 2의 탄생 남 · 여공학으로1978년 1 월 11 일 본교는 한성여자대학에서 한성대학으로 교병 변경과 함께 종전 야간 여자대학에서 남 · 여공학 주 · 야간 설치 등 본교제 2의 탄생을 한 해이기도 하다.
그해 10월 15 일 문교부로부터 학과 정원조정승인을 받아 국문학과, 영문학과, 의상학과, 생활미술학과, 무용학과 입학정원이 각 10명의 증원을 보게 되었£며, 경영학과와 무역학과는 입학정원이 각 50명의 획기적인 증원을 하게 되었다.한편 가정 학과 폐과로 행 정학과(입 학정 원 30 명 )의 신규증과를 보게 되어 입학정원이 종천 9개학과 230명에서 9개학과 380명우로늘이나게 되었다.1978년 3월 5 일 78학년도 입학식은 본교가 제 2의 탄생을 하는 한성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날이기도 하었다.이날 이희순 학장은 입학개식사를 통하여우리 한성대학은 이제 명실상부한 남 · 여 공학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 오늘 입학의 영광을 안고 첫출발하는 신입생 여러분은 한성역사의 새로운 역사적 소영의식을 가져주기를당부하였다. 이어 설립자이시며 초대 학장이신 이사장 김의형 박사는 축사에서 “오늘 입학시험의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여 영광의 이 자리에 참석한 신입생 여러분을 마음 속 깊이 축하한다”고 전제하고 “이번 남 · 여 콩학의 발전이란 새로운 탄생을 가져온 이희순 학장의 노고를 치사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앞서 2월 제 2회 학위 수여식을 가졌었다.이날 영예의 학위를 받은 여학사는 모두 82 명이다. 학과별로 보면 국문학과 24명, 영문학과 24 명, 경영학과 2 명, 무용과 6명, 생활미술학과 15 명, 의상학과 4명, 기-정학과 10명이다.한펀 이해 2월 교무과장에 정연길 교수가 취임하였우며, 그해 3월 행정학과 신설에 따라 이창신 교수를 학과장에 업영하였다. 이해 8월 일부 보직개편이 있었는 바 교무과장 정하경, 학생과장 이창신 교수를 각각 임명하였다.2. í한성대학보」로제호 변경
한성 여자대학보는 교명변경과 함께 제호를 한성대학보로 개칭하고 제 7호부터 주간교수에 이창신 교수로 바캠과 동시에 펀칩인 이근수, 주간 이창신 교수의 이릉으로 혁-보를 발간하였다.8호부터 연정열 교수가 주간교수에 취임히-면서 종전 학생과장 주관으로 발잔한 학보를 독렁해 발행인 이희순, 편집인 · 주간 연정열의 명의로 문공부에 등록 허가를 받았다.본교 학보는 대내적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기반이 닦여 전국대학 학보사 주잔교수협의회에 연정열 주간이 공동대표 및 감사에 선임되기도하였다.3. 남 · 여 공학체제 학도호국단 설치지난해 77년까지 여학생만으로 구성되었던 본교 학도호국단은 78년 신학기를 맞아 남 · 여 공학에 따른 학도호국단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그해 11 월 4 일 78 년도 정기검열에서는 총검술 등 이제끼-지 볼 수 없었던 남학생들의 씩씩한 교련사열을 보여줌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믿음직스러움을 자아내게 하였다. 그러나 남학생이 아직 1 학년이기 때문에 학도호국단 간부는 될 수 없었다.
당시 학도호국단 임원명단은 다음과 같다.총학생제대장 문현숙(의상과 3 년) , 부제대장 이은정(국문과 3년) , 제 1중대장 박소춘(무용과 3 년) , 제 2중대장 이은자(가정과 3 년) , 총무부장 신소영(경영과 3 년) , 새마을부장 김 숙(국문과 3 년) , 지도부장 이향숙(생미과 3 년) , 체육부장 이정희(무용과 3 년) , 문예부장 장 미(영문과 3 년) , 훈련부장 주은주(의상과 3년)로 구성되었었다.한편 제 3 회 낙산축전 을 그해 6월 2 일부터 4 일까지 성 대하게 개최 한 바있었다.4. 탁구를 통한 스포츠 명문터전 마련
이해 본교는 탁구텀 조직을 통한 새로운 스포츠 명문의 터전을 마련한 해기도 하다.일찍이 한국 여성탁구의 스타 플레이였던 이희순 학장은 탁구팀 창단에 많은 도움을 주어 창단 첫해부터 대학탁구의 우승가도를 달렸다.
1977 년 탁구팀이 조직된 이래 현재까지 국가대표를 비롯한올림픽 메달리스트까지 배출한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다.
본교 탁구팀은 부장 연정열, 코치겸 주무 이석구, 선수 김혜정, 김길자, 안화순, 김정자로 팀을 구성하고 5월 10일 부터 열린 전국종별탁구선수권대회에 처음출전, 전년도우승팀인 효성여대를결승전에서 깨 고감격의 첫우승을 차지 하였다. 이어 11 월 문교부 장관기 쟁탈 남 • 여탁구선수권대회 대학부에서 강호동덕여대를결승전에서 격파하고우승을 차지, 창단 첫해부터 탁구 명문교의 천통을 마랜하였다.
5. 전국대회 미전서 특선입상그해 10월 중앙학도호국단주최 제 9회 전국대학 미전에서 생활미술학과 4학년 정란순 양이 당당히 동양화 부분 일부에서 특선에 업상, 미술 한성대학을 대내외에 과시하였다.X. 김옥형 학장 취임 및 동창회 조직
1. 저 13회 졸업식1979년 2월 24일 제 3회 학위수여식을 가졌다.이날 영광의 학위를 취득한 여학사는 다음과 같다.국문학과 14명, 영문학과 19명, 경영학과 7명, 무용학과 6명, 의상학과 7명,생활미술학과 11 명, 가정학과 10명 등모두 82명의 학사를 배출하였다.2. 제 3대 김옥형 학장 취임1979년 3월 제 3대 학장에 깅옥형 화장이 취임 하였다.검옥형 학장은 취임사에서 “날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한성대학을 보다 짜임새 있고 훌륭한 학교를 만들겠다”고 전제하고 “앞으로 한국의 명문교로서 손색 없도록 말천시켜 나가자”고 강조하였다.검옥형 학장이 취임천 장시 정연길 교수가 학장직무대리를 대행하였다.한편 3월 신학기를 맞아 일부 보직개편이 있었다.
학생과장에 김계욱교수가임명되고,도서관장에 정연걸교수가취임하였다. 그리고 국문학과장 정연길, 영문학과장 허광일, 의상학과장이남희, 생활미술학과장 하인두 교수를 각각 임명하였다.3.5개 학과증원 승인이해 9월 11 일 문교부로부터 의상학과를 비롯한 5개 학과에 대한 증원승인을받았다.의상학과, 생활미술학과, 무용학과, 행정학과 각 10명씩 입학정원이 늘어 났£며, 77년 10 일 20일 국사학과에서 학과 명 칭을 바꾼 사학과는 20명의 증원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입학정원이 9개학과 440명 A로 늘어 나게 되었다.4. 경영 · 무용두 학과교직과정 설치
문교부로부터 이 해 12월 본교 경 영 학과와 무용학과 두 학과에 교직과정 설치를 인가받았다. 이 두 학과는 80학년도 신입생부터 적용 실시하게 되었다.5. 저15대 학도호국단 출범제 5대 학도호국단 임원 구성을 다음과 같이 새로 편성하였다.총학생제대장 고정숙(무용학과 3년) , 부제대장 윤오남(경영학과 3년), 제 1중대장 송창희(의상학과 3 년) , 제 2중대장 김영식(무용학과 3년), 제 3중대장 강걸순(영문학과 3년), 제 5중대장 민혜영(생활미술학과 3년), 제 6중대장 검경자(국문학과 3년), 총무부장 신현균(의상학과 3년) , 문예부장 킴호경(국문학과 3 년) , 새마을부장 이춘미(영문학과 3 년), 지도부장 오미숙(경영학과 3 년), 체육부장 김정숙(무용학과 3년), 훈련부장 이정숙(가정학과 3년)을 각각 임명하였다.한편 제 4회 낙산체전이 이해 5월 16, 17일 양일간 성대히 열렸다. 이어 10월 14 일 추계교내 체육대회를 가졌다.6. 한성대동창회조직
이해 7월 제 1 회 졸업생흐로 재학시 초대 대대장과 안보문제연구회장을 지낸 조인지- 동문(국문학과 77년졸업)의 발기로 동문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동문 상호간 친목도모와 모교발전을 위 한 터 전마련을 목적 사엽으로 동문회를 조직하었는 바, 초대 동창회장에 조인자 동문이 신임되었다.7. 본교 탁구팀 연승가도 달려본교 탁구팀은 79년에 들어와서 더욱 짜임새 있는 팀원과 맹훈으로 이해 7월 31 일부터 8월 6 일까지 문화체육관에서 열렸던 전 국종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깅-원대학교를 결승전에서 만나 시종 일방적인 공략을 펴 우승을 차지하었다. 이어 같은해 11 월 17 일부터 열린 79년도 문교부장관기 쟁탈 탁구선수권대회에서 강호 동댁여대팀을 만나 일진일회의 시소게임을 별렸지만 본교텀의 패기에 찬 경기운-용A로 동덕여대텀을 격파하고 이해들이 두벤째 대학탁구의 패권을 누리게 되었다.
XI. 학과 증과 및 직제 개편
1. 직제개편과 보직개편1 980년 8월 직제개편으로 교무과장 및 학생과장을 교무처 장 및 학생처장으로 그 명칭을 바꾸고 교무처장 이근수, 학생처장 신은숙 교수를 각각 임명하였다. 그러나 3개월 뒤 교무처장 이근수 교수가 타교로 전직함으로써 그 후임에 최명규 교수를 교무처장에 보임하였다.이에 앞서 3월 무역학과장 최영규, 무용학과장 검숙자 교수를 각각 임영하였다. 이어 국문학과장 이석주, 영문학과장 고정자, 사학과과장 지배선 교수가 임명되었다.2학기에 접어들어 무역학과장에 김신교수로교체되었다.2. 저 14회 학위수여식 거행
이에 앞서 1980년 2월 처14회 학위수여식을 갖고 101 명의 여학사를 배출하였다.국문학과 28명, 영문학과 21 명, 경영학과 8 명, 무용학과 6 명, 생활미술학과 18명, 가정 학과 14 명 등 모두 101 명의 새학사가 탄생되었다.3. 경제학과 · 도서관학과 증과이해 10월 15 일 문교부로부터 경제학과와 도서관학과 등 두 학과의 증과 승인과 함께 두 학과의 졸업정원을 각 40명으로 인가받았다.한편 140학점 실혐대학 채 택에 따른 본교 학과정원을 117B 학과에 졸업 정원 520명, 입 학정원 676명으로 승인받았다.4. 전학과 교직과정 설치본교는 지난 79학년도 경영 · 무역학과 두 학과에 교칙과정 설치인가를 받은데 이어 80년 12월 전학과에 교직과정 설치 인가를 받게 되었다.XII . 김옥형 학장 사임과 대학미전서 큰 성과 거둬
1. 신학기 맞아 보직개편1981 년 3월 신학기를 맞아 보직개편이 있었다.교무처장 연정열, 학생처장 신은숙, 사무처장 김범주 교수를 각각 임명하고 도서관장에 김복걸 교수가 유임되었다. 그리고 경영학과장에 최명규, 경제학과장 한창호, 도서관학과장 조점환 교수를 각각 임명하였다.2. 학보 편집인 학생처장이 겸직키로이해 3월 학보사 편집인 · 주간 연정열 교수가 교무처장으로 전보됨으로써 공석이 된 학보사편집인 · 주간후속인사가 있었다. 학생처장 신은숙 교수가 학보사 편접인을 학생처장이 겸하도록 제의한 것을검옥형 학장이 이를 받아들여 동학보는 편집인 신은숙, 주간 윤경로 교수의 명의로 문공부에 등록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전국대학 학보사 주간교수협의회 감사의 직은 연정열 교수에 이어 새주간인 윤경로 교수가 계속 맡게 되었다.
3. 저15회 학위 수여식이에 앞서 제 5회 학위수여식을 이해 2월 25 일 가졌다.이날 영예의 학위를 받은 학사는 모두 87명£로서 국문학과 6 명, 영문학과 15명, 경영학과 18명, 무용학과 15명, 경영학과 18명, 무용학과 12 명, 의상학과 15 명, 생활미술학과 14명, 가정학과 9 명 등 모두 87명의 새 학사를 배출하였다.4. 남학생 주축이 된 저16대 학도호국단81 년도 신학기를 맞은 학도호국단은 전년도 2학기말에 남학생을 주축드로 임원을 구성하고 전날에 비하여 보다 활발한 사업을 펼쳐나갔다.제 6대 학도호국단 조직 편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총학생장호진규(영문과 4년) ,총부학생장문교승(무역과 4년) ,총무부장 이승각(경영과 4년) , 문예부장 박해영(국문과 4년), 새마을부장 이명아(생미과 4년), 지도부장 박찬암(경영과 4년) . 체육부장 조영애(무용과 4년), 훈련부장 깅해룡(무역과 4년), 여학생부장 전광의 (의상과 4년) 등으로 임원을 구성하였다.한편 국문학과 학생장 김성일, 영문과 학생장 황현, 무용과 학생장정창영, 가정과 학생장 임재수, 생미과 학생장 구천회, 의상과 학생장 문진한, 경영과 학생장 한득희, 무역과 학생창 신영수가 각각 선임 되었다.5. 종합관 신축교사 준공이해 12월 29 일 1 년간의 공사 끝에 종합관 신축교사 준공식을 가졌다.이 신축교사는 지하2층, 지상 5층 연건평 1 , 772 평 철근 콘크리트 교사로서, 중강당을 비 롯해 교수연구실 및 일반교실로서 사용키로 하였다.
현재 중학교로 사용되고 있는 당시 종합관 맨위층은강당과 무용실기실로 사용하였다.
6. 대학미전에서 큰 성과 거둬
문교부 주최 저111 회 전국대학 미전에서 본교 생활미술학과는 동양화, 서양화, 디자인, 공예부분 등 4개 부분에서 많은 입상자를 내어,대학 미술관계 인사들을 놀라게 하였다.하인두(서양화),정하경(동양화) 두교수의 열성어린 지도아래 본교생활미술과는 개교 이래 가장 큰 성과를 거둔 미천이기도 하다.각 부분별 입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A 동양화부분특선조연영, 김경해, 신순희A 서양화부분특선정호}주, 검인숙, 전경숙A 디자인부분이명。L 구천회A 공예부분특선
남윤선7. 동남아해외연수문교부 주관으로 실시한 해외연수가 본교 개교 이래 처음흐로 행하여졌다.이해 2월중 실시한 동해의 연수는 이석주 교수의 인솔로 필리핀 자유중국, 태국, 일본 등 동남아 4개국을 순방하며 해외견문을 넓혔다.이 해외연수에 참가한 견 학단원은 다음과 같다.김영호(국문과 3 년), 김선옥(영문 3 년) , 최예지(무용과 2 년), 이근화(경영과 2년), 김진환(경영과 2 년) , 배기성(영문과 2 년), 장동우(사학과 2년), 문경숙(생미과 2 년), 정영애(무용과 2년) 등 9명무로 구성되었다. 이에 앞서 영문학과 3년 호진규군도 한국문예협회 주최로 가진 대학생 해외연수단의 일원으로 중동 지역을 견학하고 돌아왔다.8. 김옥형 학장사임
검옥형 학장이 이해 1 2월 사정에 의해 사임함A로서 학장직무대리로 서 연정열 교수가 82학년도 입시업무를 다루고 이듬해인 1982 년 2월말 제 4대 학장A로 부임해 온 강병규학장에게 업무를 인계하였다.9. 안보 우수서클교로 선정1982년 3월 바우회(회장 김양태 일명안보문제연구회)가한국반공연맹 산하 전국 1307B 대학중 우수교의 하나로 선정되고 동서클 지도교수인 연정열 교수가 전국대학반공서클 총책임지도교수로 선임되어 88년 12월 31 일까지 동직에 연임되었다.한편 바우회장 김양태는 본교 무역학과를 졸업한 후 아시아반공청년회 부회장에 선임된 바 있다.〈연 정 열〉
제2장 도약기
(1982~1984)
제 2 장 도약기
1. 제 4대 강병규 학장의 취임1982년 2월 19일 제 4대 학장으로 강병규(姜秉奎) 박사가 취임하면 서 한성대학은도약기(跳鍵期)를맞게 된다. 다양한정치적 경력을가진 교수 출신의 강학장은 학장취임식에서 장문의 취임사를 통해 향후 정보화시대에 부응한 미래지향적 대학과 대학 문화 창달의 산실로서 의 면모를 갖춘 획기적인 한성대학의 장 · 단기적인 발전 계획과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의욕을 보였다.강병규 학장은 그의 취임사에서 “새로운 대학상(大學像)의 정럽(定立)"을 아래와 같이 정의하며 향후 도약기를 맞이한 한성대학이 지향해야 할 바를 아래와 같이 천명하였다.무릇 대학은 진리(률理)의 전당(願堂)이요 교육과 학문연구의 공동광장(共同廣場) 인 바 민족의 발전과 함께 대학 또한 무한히 발전되어야만 하는 본질적 속성(本質的 屬性)을 가지고 있£니 본인은 오늘을 기하여 한성대학의 새로운 출발, 즉 발전에의 도약을 다짐하고져 합니다. (중략) 현대의 대학교육은 고대대학(古代大學)과 같이 사서삼경 (四書三經式) 대학이어서는 아니되며 추상적 (抽象的) 역사철학적( 歷史哲學的) 대학이념(大學理念)에만 구애(狗짧)될 수 없읍니
다. 또한 현대의 대학기능은 근대대학(近代大學)처럼 무한한 학운의 자유만 고창(高n昌)할 수 없으며 민주주의 개냄과 혼동되는 지도자만 을 양성하는 기관에 그치어서는 않되겠읍니다. 즉 현대의 사회적 변천과 역사적 조류에 적극적 A로 대응하려면 현대산업사회에 적합한 대학의 기능이 발휘되어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원적사회기능(多元的社會機能)과 직업주의척(職業主義的), 실용주의적(寶用主義的) 대학으로 개혁되어야 할 줄 압니다. 그리하여 대학의 본질인 진리탐구(훌理探究)와 창조 및 학생의 교육과 함께 대학이 지니는 모든 역량을 접약하여 국가발전에 공헌하는 사회봉사적 기능을 다할 때 바로 소 대학이 고려(高麗) 충숙왕(忠輔王) 교령(敎令)이 말하는 ‘학교풍화지원(學校風化之源)’이 되고 조선(朝蘇朝) 유학(協學)이 말하는 사회의 ‘수선지지(首善之地)’가될 것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성대학은 사회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여 왔읍니다만 앞으로 더욱 더 사회봉사 기능을 확충하는 것이 새로운 대학상을 정렵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생각합니다.
이상의 취임사 내용에서 보듯 강학장은 급변하는 현대사회에 부응한 대학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현대 산엽사회가 요구하는 ‘다원적 사회기능과 직업주의적이며 실용주의적인 대학’으로 키워나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으며 이같은 대학의 사회기능적 능력을 고양하고 혹L충시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 점을 실천목표로 장을 것을 밝혔다.첫째, 새로운 대학천통의 수렵과 창조둘째, 학문연구체제의 정비셋째, 연학의 기틀과 학풍의 진작이 바로 그것이었다.한편 당시 우리대학의 현실적인 열악한 조건과 환경을 빠른 시간에 극복하면서 일정한 수준의 대학으로 진입하기 위한 단기적인 대학발전 방안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아래와 같이 제시하기도 하였다.일반적무로 말씀드려서 대학이 성장하는데 백년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오늘날 구미선진(歐美先進) 각국(各國) 대학이나 기타 세계의 유수한 대학은 그러한 장구한 시간에 부단한 노력과 전통의 축적을 통하여 세계적 대학상(大學象)을 정렁하였습니다.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발전의 속도와 평행해서 대학 또한 그 발천사(發展史)를 단축시키고져 하는 강렬한 의지와 사회적 기대 빛민족적 여망이 상승작용(相乘作用)을 하여 국가적 필요에 부응하고 있습니다.그러한 뜻에서 한성대학은 그동안의 시간을 기반조성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생각하고 이제부터 모든 대학가족이 합섬단결하여 버약적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면 그 숭고한 목표는 달성되리라고 생각하는 바업니다.말하자면 한성대학의 역사가 비록 일천하지만 지난 10년간 쌓아올린 기초를 토대로 삼아 한성인 모두의 의지를 결칩하여 자신의 재임기간에 한성대학 발전의 도약기를 마련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던 것이다. 이날 장시간에 걸쳐 계속된 강학장의 취임식은 그의 의욕과 패기에 찬 취임사로 식장에 참석한 교직원과 하객들을 고무시컸는데 그 가운데서도 향후 한성대학의 ‘비약적 발전’을 위한 다음과 같은 실천방안을 제시하는 대목에서 더욱 그러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같다.
첫째, 한국의 유수한 대학£로 발전시켜 새로운 대학상(大學象)을 확렵한다.학생정원의 증원 및 전문학과의 증과, 대학원설치, 전문연구소 운영둘째, 학문연구의 생산체제를재정비 · 확렵한다.학문자유의 보장, 교수우선의 학사행정 전개, 연구기금 조성 빛 연구버 지급 확대, 논문접편찬 활성화, 교수의 각종 학 · 예술단체 가입 권장셋째, 대학문화(大學文化)의 창달(創達)에 힘쓴다.‘문화창조계획(文化創造計劉)’을 수렵하여 이를 매학기마다 시행,축적 교수연구비 및 학생장학금 확충, 올림픽대비 교내 체육부(體育部) 강화, 학생후생시설 확충 빛 해외연수 · 유학 기회 확대, 교사정비와교구,교재 확보
넷째, 특색있는대학A로육성 · 발전시킨다.전일제(全日制) 수업을 통한 평생교육과 전인교육의 시행,산학협동체제의 강화, 지역개발 공개강좌 빛 문화센터 개설 등 성안대학적(成A大學的)특성을 활성화함으로써 대학의 사회봉사기능을 강회-함.다섯째, 국제적 교류사업을 적극 추진한다.외국의 대학과 자매결연 추진, 교수 · 학생의 해외연수기회 확대, 국제적 대학 예술대회 (緊術大會) 참가 빛 개최를 적극 추진끝으로 그는 이상에서 제시한 대학발전 방안을 실천화하기 위해 재단, 대학, 동창회 3자로 ‘대학발전협의회’를 구성하여 추진할 것을 제안하는등 강학장은취임식에서 매우 의욕적인 태도와자신에 찬모습을 한성인들에게 심어주었다. 이어 그는 자신이 제시한 일련의 대학발전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천면적인 인사 개펀을 1982년 2월 22일자로 아래와 같이 단행하였다.교무처장 : 정하경 교수(미술학과)
학생처장 : 김계욱 교수(교양학과)사무처장:이승록도서관장 : 연정열 교수(경영학과)학과장개편국어국문학과 : 정 연길 교수영어영문학과 : 박양구교수사학과:지배선교수경영학과: 연정열교수무역학과:검평광교수경제학과:최명규교수행정학과: 이창신교수도서관학과:이용남교수의상학과 : 이남희 교수
미술학과:하인두교수무용과:김경자교수II. 대학기구의 정비와학사행정의 개혁1. 한성대학 종합화 계획의 발표강학장의 취임사에서 제시되었던 대학발전협의회는 바로 구성되어 1982년 4월 2일 ‘한성 대학 종합화 계획 ’을 발표하게 되는데, 그 주요내용은 아래와 같은 것이있다.첫째, 교육환경 개선을위해 재단과의 지속적인 협조체제 유지둘째, 1983년 R. O. T. C설치를 위해 해당부처와 적극 협의셋째, 대학의 대외홍보를 위한 홍보지 발깐
넷째, 교과과정 개선을 위한 교과과정 추진위원회 설치다섯째, 국가인력 수급상황에 따른 적정학과 증과 · 증원에 총력여섯째, 향후 3.4년내에 획기척 말전을 이룰 수 있는 구체적 사업계획 마련 이상의 계획안은 그동안 한성인 모두가 바라고 있던 주요 숙원사업들을 망라한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대학의 규모와 그간의 대학 운영의 정황 등을 감안할 때 대학체제의 정비 및 계획적이고도 예측 가능한 대학운영에 관한 청사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계획안은 괄목할만한것이었다.2. 위원회의 신설이같은 계획안은 대학내 기구 확장과 신설 및 개펀 등의 작엽으로 시작되었다.우선 주요사업별로 각종 위원회를 구성하여 연구 · 심의토록 하였는데, 1982년 4월 7일 각과 학과장을 위원흐로 하는 교과과정추진위원회를 비롯하여 아래와 같은 각종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표1)〈표 1 ) 新設委員會名稱과 委員名
위원회명발족연·월일위구성목적
대학운화육성심1982.9.17위원장:강병규학장대학문화육성방향수럽
김평광,김원중,김용정교수(이상무역)
(표1)에서 보듯 당시 전임교수 천원이 참여한 〈연구소설립추진위원회〉를 비롯한 〈기획위원회), <대학요람편찬위원회 ), <영문요람편찬위원회 ), <대학문화육성 심의위원회〉 등 5개 위원회의 구성은 과거에 없었던 획기적인 조치였다.
새로 구성된 위원회는 기존의 각 위원회와 같은 심의 • 자문기구가 아닌 대학체제의 창조적 개혁을 목표로 하는 조사 • 연구기구로서의 한시적(限時的) 성격이 강한 것£로 그 활동이 의욕적 A로 진행되었다.3. 학사행정체제의 정비
한편, 학사행정의 개혁과 대학행정기구의 대폭적인 정비 그리고 대흐L운영과 관리 전반을 관장할 기구로서 지금까지 없었먼 기획실을 대학의 주요 부서의 하나로 신설하였다.1982년 4월 기획과와 예산관리과로 구성된 기획실(초대실장 : 손영일)은 우선 대학요람 및 영문요람 등을 처음우로 발간했으며 이를 각대학과 관계 요로에 배포항으로써 대학홍보의 효과를 높히기도 했다. 또한 대학조직이 갖추어야할 제규정을 제정 · 배부함으로써 각 행정부서의 체제를재정비하였다.아울러, 정보화 시대에 부응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1983년 10월 25일 컴퓨터실을 설치하였A며 이어 이를 좀더 발전시켜 1984년 4월 정보전산연구원(초대소장 : 이우범 교수)을 개원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모체가 되어 현재 전자계산소(1989년 설립)로 확대 발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기구 개편과 확대 작엽이 이후 한성대학의 분위기를 일신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음은 물론이다. 우선 대학행정을 정비 •확대함흐로써 보다 적극적이고도 창의적인 대학행정이 이루어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교무처는 교과과정추진위원회와 함께 합리적인 교과과정의 개발을 위한 실무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의 개발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특히, 1982년 6월 7일 무용과 • 경영학과 학생 49명에 한해 처음으로 교생실습을 실시한 이래 ’ 83학년도 신학기부터 전 학과에 걸쳐 교직과정을 확대 개설하고 실습대상 중 · 고교장을 초벙하여 간담회 등을 개최하여 대학홍보는 물론 학생들의 졸업후 사회 진출의 활로를 마련해 주는 등 일에도 적지 않은 노력과 관심을 기울였다.
이같은 졸엽후 학생들의 진로 모색과 취업 알선을 위한 노력은 학생처에서도 시도되었다. 우선 학생처는 이 시기 장학제도의 보다 합리적인 개선책을 마련하는 한편 외부 장학금의 적극적인 유치노력을 통해 수혜의 폭을 확대하는 등 학생 복지를 위해 제반 노력과 조치를 취했다.이밖에도 전일제 수업에 따라 중원된 주깐학생의 부직알선 빛 졸업 후의 취업 강구를 위해 1984년 2월 22 일 “취업대책위원회(위원장 : 한창호교수)"를구성 · 운영함으로써 학생들의 부업 빛 취업알선을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 “취업대책위원회”는 현재 “취업보도실”로 상설기구화하여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학생 복지 행정을전개하고있다.한편, 당시 대학의 규모상 영세성을 면치 못했던 중앙도서관은 장서 확보 빛 열람실의 확장에 지속적인 노력을 전개함£로써 대학내 연구기능의 산실로 자리잡을 수 있는 초석이 마련된 것도 이 시기였다. 특히, 1982년 6월 10일 -7월 10일까지 “도서수집운동”을 전개하여 대학내 모든 구성원들에게 중앙도서관의 발천에 대한 관성을 유도하는 효과와 함께 5.08 1권에 달하는 도서를 수접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 “도서수집운동”기 간에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께서도 3차에 걸쳐 소장도서를 기증하였는데 도서관측은 이 특별 기증도서를 한곳에 보관하였다가 우촌 선생께서 타계하신 후 고인의 뜻을 영원히 기 리는 뜻에서 1983년 4월 18일 도서관내 에 〈우촌문고)(友村文庫)를 마련오늘에 이르고있다.
4. 학부제 운영과 인 사개편1983년 2월 18일 단행된 학사개혁 조치로써, 학부제 운영에 대한 발표가있었다.성 격 이 유사한 학과들을 분류해 4개의 학부를 두고 모든 학사행 정을 학부중심 운영체제로 천환하는 것을 기본내용으로 히-는 학부제 운영 방안은 당시 대학의 규모로 볼 때 매우 과감하고도 획기적인 조치였다. 이 때 단행된 학부제는 인문학부, 사회학부, 예술학부, 교양학부등 4개학부로 나누어겼으며 각학부에 소속된 학과와 학부장의 명단은 아래의 (표2) 와 같다.〈표2) 學部名과 所屬學科및 學部長名單
학부 소속학과 초대학부장
그러나 이상과 같은 학부제 도입은 처음부터 시기상조라는 일부 비판적 시각에서 이미 예견되었듯운영상의 미숙과기구확대에 따른부수적인 조치들이 진행되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활성화되지 못한채 유명무실화 되고 말았다. 지나친 의욕에 서 비롯된 결과라고 하겠으나 한
편 돌이켜 보면 이같은 학부제운영은 향후 종합대학체제로의 전환에 대비한 의지를 실천에 옮겨 보았다는 점에서 다소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것이다.
한편, 이상과 같은 학부제 운영방침에 따른 효율적인 학사행정을 위하여 아래와같이 대폭척인 인사개편이 단행되었다.교무처 장 : 이용남 교수(도서관학과)학생처장 : 최명규 교수(경영학과)도서관장 : 정연길 교수(국어국문학과)학과장개편국어국문학과 : 이석주 교수영어영문학과 : 조효진 교수사학과:지배선교수경영학과:최송길교수무역학과:김용정교수
경제학과:한창호교수행정학과:김범주교수도서관학과 : 이우법 교수의상학과: 이명회 교수미술학과:강국진교수무용과:김경자교수교양과:김용석 교수교칙과:김양현교수학부제 운영과 더불어 이시기 단행된 학사운영제도의 개편 작업중에서 특별히 주목되는 것은 학과 전용강의실제를 도업했다는 점이다. 이는 국내대학중에서는 처음i로 시도된 제도로써 강의실의 효과적인 활용과 학과 운영의 효율성을 좀더 극대화 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사회산업발전연구소의 제안으로 처음 행정학과에서 시도한 이 새로운 학과 전용강의실제는 원래 목적 이 학부제 운영의 내실을 기하기 위한 보조기능a로 시작했A나 점차 전학과로 확대 · 발전되어갔다. 효율적인 시청각 교육과 풍부한 연구자료를 갖추고 세미나식 강의 및 개인별 · 그룹별 연구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 이 독특한 교육시스템은 당시 학내 외적우로 많은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이러한 교육환경의 개선은 자연히 각 학과별 연구활동을 활성화 시켰으며 그에 따른 연구성과물로 학과마다 논운접이 발간되기 시작하였다. 즉 1982년 국어국문학과의 「漢城語文學j, 사학과의 「漢城史學j , 경영학과의 「經營論集j , 미술학과의 「漢城美術」등 학과 논문접 창간호가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교육환경 개선이 가져다준 구체적인 결실이자, 산물이었다. 이로써 한성대학은 진리와 학문을 탐구하고 연구하는 대학 본래의 모습과 위상을 정렵해나가는 도약의 단계로 진입하였다.ill. 학문연구체제 확렵과 대학이마지 구축
1. 부설 연구소의 설립과 활동1982년 6월 1 일 한성대학의 제반 여건을 종합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본 대학의 실정에 맞는 아래와 같은 4개의 대학 부설연구소를 개설하였다. 대학이 필수적 o 로 갖추어야 할 기능의 하나가 전문 분야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기능에 있다는 점에 유념할 때 다소 때 늦은 강도 없지 않았A나 아무튼 이 때 한성대학 산하에 전문적인 연구기관이 탄생 되었다는 것은 ‘연구하는 대학’, ‘공부하는 대학’으로서의 대학 이미지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기억될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래의 (표3) 에서 보듯 이때 설립된 연구소는 민족사상연구소, 사회산업발전연구소, 한국전통문화예술연구소, 학생생활지도연구소 등 4개 연구소가 문을 열었으며 연구소의 특정과 성격에 따라 이 분야 전공교수들을 전임연구원으로위촉하였다.〈표3) 4개 부설연구소명과 연구원 및 설립취지
연구소명연구원설립취지
이상의 4개 연구소는 그동안 꾸준히 활동하면서 각종 학술세미나, 학술지 발간 등 활발한 연구활동 등을 통하여 학내의 중추적 연구기능으로 성장,오늘에 이르고 있다.
〈민족사상연구소) (초대소장 : 정연길 교수)는 1982년 10월 27일 창럽기념강연회를 개최한 이래 매년 정기적인 강연회 · 학술세미나 개최 및 학술지 (民族文化) 발간 등 인문과학 분야의 연구발전에 크게 기여
각 연구소는 교내 의 학문 을 위한 전문기관으로 탄생되었다.
하고 있다. 1985년 11월 1일 〈민족사상연구소〉는 연구활동의 효율화를 위하여 〈한국천통예솔연구소〉와 통협, <민족문화연구소〉로 새롭게 발족하였으며 현재는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농기구와 생활도구를 상설 전시하고 있는 〈전통생활사천시관〉을 연구소 산하에 두고 있다.
〈사회산업발전연구소)(초대소장 : 이창신 교수)는 1982년 6월 16일 창렵기념사엽으로 미국 스텐포드대 학의 Richard. B. Foster교수를 초벙하여 한국일보 대강의 실 에서 각계인사들과 학생, 교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강대국의 동북아시아 전략 전망”이라는 주제로 대규모의 성대한 강떤회플 개최한 바 있다. 그후 제 2대 연구소장으로 취임한 정연선 교수(행청과)에 의해 보다 연구소로서의 체제가 정비되었다. 1 983년 3월 31 일 〈사회산업연구소〉로 개칭하는 한편 각 전문분야별로 연구책임 교수제를 도입, 명실상부한 전문적인 연구소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다. 이 때 개편, 확대된 사회산업연구소의 연구분야와 연구책임자를 정리해 본 것이 아래의 (표4) 이다.〈표4) 사회산업연구소 분야별 연구실 명칭과 연구자 명단
연 부 분 야 연구잭 입 자 연 구 분 야 연구책임자
위와 같은 9개의 전문 연구실의 연구활동을 중심으로 정기적인 학술세미나 개최 및 학술지(사회과학논접) 발간 둥 지속적인 활통을 해오고있다.
한국천통예술연구소(초대 소장 : 하인두 교수)는 1982년 11월 4일창렵기념강연회 개최 이후 국내 대학에서는 유일한 성격의 연구기관요로 독보적인 활동을 전개하던 중 연구활동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하여 〈민족사상연구소〉와 통합하여 〈민족문화연구소〉로 그 액을 잇고 있다.〈학생생 활지도연구소〉 역시 단순한 학생지도 및 상담활동에 국한하지 않고 정기적인 학생의식 실태조사, 학생생활관계 학술지 발간,세미나 개최 등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대학생활 빛 졸업후 사회생활에 대한 각종 정보를 제공해온 이 연구소는 현재 그 명칭을 〈학생생활연구소〉로 개칭하여 보다 활발한 연구활동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2. 국제교류와 대 학 이미지 구축
이밖에도 이 시기 대학발전을 위해 추진된 또하나의 괄목할만한 일로서 우리는 국외대학과의 국제교류를 시도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83년 1월 12일 본대학은 국제문화교류의 일환으로 자유중국( 自由中國· 짧灣) 명박대학(銘뺨大學)과 자매결연식을 갖었다. 이날 자유중국 대사 빛 교육부정-(문교부장관) 이 배석한 가운데 갖게된 이 조인식은 본대학이 외국대학과 맺는 최초의 자매결연사업이었£며 이를 통해 한성대학의 위상과 지평을 국제무대로까지 펼처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1983년 5월 13일 명박대학(銘博大學)의 이응조(李應~IS) 이사장과 포덕명(包德明) 학장 등 일행 4명이 강병규 학장의 초청으로 본대학을 방문함으로써 향후 한성대학과 자유중국,명박대학 사이에 구체적인 교류 협력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그 가운데 교수 · 학생의 상호교환, 한중문화교류 및 공동연구 등을 추진할 것에 합의하였다.한편 이처럼 국제교류의 추진과 학내 체제정비가 급진전됨에 따라 자연히 한성대힘L을 대내외적 3로 알리고 홍보하는데 긴요한 대학 상징물 제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기획실 주관하에 “상징물 제정 사업”이 계획되 었고 이 착엽을 위해 강국진교수(미술과)등이 중심이되어 “상징물제정추진위원회”가구성되어 교직원, 학생 동창회 등 폭넓은 의견 수렴과정을 통해 1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1983년 9월26일 개교 10주년을 기념하여 대학 상징물로서 “거북이” 를 선정,완성된 거북이 상정 도안물을 발표했A며 동시에 ‘삼학송’을 한성대학의 교목(校木)으로 선정하였다.
학생설문조사 및 전문위원의 연구를 토대로 제정된 상징물 “거북이”는 꾸준한 노력과 쉽없는 전진을 상징하며 교옥A로 선정된 “삼학송”은 본 대학 정문 앞에 마치 우리대학의 수호목(守護木) 모양 우뚝 서있어 한성인 모두로부터 늘 사랑을 받아왔다.또한 소나무의 변치 않는 푸르름은 대학의 청년성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우리대학과 같은 ‘신생대학’의 미래를 기약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독럽된 세개의 소나무가 하나로 어루어져 하나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 모습이 마치 대학을 형성하고 있는 학생, 교수, 재단의 상위일체(三位-體)를 상정하는 의미까지 있어 그 의마를 한층더해주고있다.이 시기 진행된 또 하나의 사업드로 우리는 대학발전을 위한 재정확보에도 다각적인 방안이 강구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83년 1월 20일 기공식을 가진 ‘한성농장종합개발공사(漢城屬場綠合開發工事) ’
대만명박대학과의 자매결연을통하여 학문의 국제화에 첫발을내딛게되있다.
는 재단과 학교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사업이 이 때 추진되었다.
충남 당진군(居律部) 송산면(松山面) 동곡리(東용里)에 소재하고 있는 한성농장은 설립자 킴의형 박사께서 본 대학 발천을 위해 회사하신 것으로써 본래 염전(짧田)이었으나 1979년 10월 26 일 정부의 농경지확장사업의 일환으로 삽교천이 준공되자 5개년계획으로 총면적145 , 852평의 기계영놓에 의한농작물재배 빛 축산영농을 병행할수 있는 복합영농단지를 조성함으로써 보다 유용한 대학의 수입사업체로 전환할수있게되었다.이밖에도 1983년 10월 4일에는 개교 10주년기념사업의 일환무로 그간 학생들의 숙원이있먼 학생복지관이 착공되어 1 년여의 공사끝에 1984년 9월 5일 완공되 었다. 지 상 4층 건물에 연건평 1350평 에 달히는 학생복지간의 설렵 o 로 그동안 부족했만 학생복지관을 확보하게 되었다. 새로 건립된 학생복지관에는 학생들을 위한 각종 복지시설과 학생회 회의실 써클실, 학보사, 서점, 그리고 학생처 등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상에서 보듯 1982 -83년 사이 한성대학은 대학으로서의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환경과 여건을 일정하게 조성한, 다시말해 대학 발전의
학샘들의 숙원이었던 학생복지관이 건립되어 학샘들의 복지시설 및 도서관으로 사용되있다.
토대를 마련한도약의 시기였다고 하겠다. 그러나그 이연에는 여러가지 문제점이 내재하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여기에는 대학이라는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구성원 사이의 난마(亂麻)모양 뒤얽힌 요인들을 적시(適示)할 수 있겠우나 이 시기 대학사회에 일기 시작한 이른바 스투던트 파우워 (student power) 의 세찬 물결과 설상가상(雪上加露)으로 한성학원의 설링자이자 본 대학의 초대 학장을 역임하신 우촌 검의형 박사의 서거로 인해 한동안 시련의 늪에 빠지는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였다.w 설렴자 우촌선생의 서거1.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의 타계1983년 3월 1 일 설렵자로서 한성학원의 큰 기둥이셨던 우촌(友村) 김의형(金義衛)박사께서 향년 79세를 일기로 타계(他界)하셨다. 시대의 격랑을 헤치며 일평생을 교육이라는 지난하고도 고독한 외길을 걸어오신 한성인의 영원한 스승 우촌 김의형 박사,그의 서거 소식은전 한성인(全漢城人) 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가져다 주었다. 장례는 1983년 3월 4 일 한성여고 교정에서 한성학원장( 漢城學園賽)(장례위원장 : 安浩相理事長)으로 염숙히 거행되었다. 한성학원의 전 교직원을 대표하여 조사를 봉정한 연정열 교수의 아래와 같은 조사에서 당시 전 한성인들이 받은 충격과 우촌선생을 떠나보내는 슬픈 섬정의 일단이 잘표현되어있다.
“한성대학의 설링자 우촌 검의형 박사님의 서거 를 당하여 온 한성 가족은 이 청천벽력과 같은 부음의 슬픔A로 앞이 캄캄합니다. 한 평생을 교육사업으로 조국광복(祖I훨光復)과 영재교육(英材育成)..2..로근세 한국문화 창달에 위업을 냥기신 우촌 김의형 박사님은 낙산 기숨에 우리 한성 학원을 세우시어 중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와 최고학부인 대학까지 진라탐구의 전당을 마련해 주셨읍니다. 우리 한성학원 산하 각 학교 교직원들은 박사님의 건학정신을 받들어 앞날 이 나라의 주인공이 될 청소년 학생 지도에 긍지와 샤명감을 갖고 맡은 바 직무에 보람을 가져 왔읍니다.
그런데 박사님이 우리를 떠나서 타계 하시 다니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고 이 막중한 박사님이 한 평생 이루어 놓으신 사업을 이끌어 나갈 것인지 답당할뿐입니다.
흔택교육계의 원로인 우촌김의형 선생의 잠례식이 1 983년 3월 4일 학원장으로 거행되었다.
박사님은 우리 교육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체육계에 남기신 그 엽적 역시 크시어 대한체육회(大韓體育敎育會) 회장무로써 대한올림픽위원회 이사(理事)로써 스포츠를 통한 대내외 (對內外)에 큰 업척을 남기셨읍니다.
박사님은 생전에 일본으로부터 조국광복을 찾았으니 더 큰 소원은 없다고 하셨읍니다. 박사님의 그같은 심정은 그 가신날도 일제(日帝)의 압박으로부터 독립을 되찾기 위하여 온 겨레가 대한독렵만세를 외쳤던 3. 1절 기념일 이라는 것은우연의 일치만도 아닐것 입니다.우리 교육계와체육계의 거성(巨星)이 떨어지니 하늘도슬퍼 박사님의 서거(遊去)와때를같이하여 연 이틀조용히 비가내렸음니다.우리 한성학원 각급 학교 교직원들은 박사님 생전의 위엽(偉業)을 돌이켜 보며 눈물을 닦고 박사님의 위엽을 더럽히지 않도록 온 힘을 기울여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할 것을 박사님 영전앞에 굳게 다짐합니다. 이것이 박사님의 위업을 받드는 길임을 가슴깊이 새기며 오는 봄과 함께 한성학원의 힘찬 발전을 우리 온 한성가족은 박사님 영천앞에서 재차 다짐합니다.
박사님 ! 비록 봄은 타계하셨지만 그 영혼은 항상 저희들에게 힘과 슬기를 주시어 저희들이 빗나가지 말고 정도(lE道)를 향해 쉬임없는 발전의 걸음을 결을 수 있도록 가르첨을 주십시요.박사님, 슬픔이 앞서 더 말을 이을 수 없습니다. 부디 평안히 눈을 감으십시요.장례식에 참석한 3, 000여 한성인은 위의 조사(렴群)내용처럼 큰 슬픔속에서도 낙산기숨 곳곳에 새겨진 고인(故A) 의 위엽(偉業)과 건학정신(建學情채빼)을 계승 발전시킬 것을 마음속표로 다짐했다.이제 우촌 선생(友村先生)께서 가신지 10년, 선생께서 마지막 남은 생(生)을 아낌없이 바쳐 일구어 놓무신 한성대학의 개교 20주년을 맞이하여 다시금선생의 생애(生進)를되돌아보며 그유덕(遺德)을 기리는것도뜻깊은일이라하겠다.2. 우촌선생의생애
우촌(友村) 김의형(金義衝) 박사는 1904년 8월 25일(음력) 충남(忠南) 공주군(公州휠ß) 탄천면(離川面) 견동리(見東里)에서 부친(父親) 김우창(金禹昌) 선생과 자당(慧堂) 경주(慶州) 이씨 숙부인 (李]3;; 淑夫A) 사이에 둘째 아블로 태어났다. 남달리 엄격한 유교 가정에서 자란 우촌 선생은 유년시절을 고향에서 천통적인 한학(漢學)과 신학문(新學問)을 수학하며 자랐다. 이 시절 고향에 있던 유년기의 우촌선생은서울서 내려온구한말군인출신이자얼찍이 일본유학까지 다녀온 이은우(李股雨)라는 분이 세운 삼홍학교(三興學校)를 다니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眼텀)이 개화(開化)되었으며 장차 일제(日帝)에 빼앗긴 민족의 주권(主權)을 되찾기 위한 독럽정신을 품게되었다.특히 이은우 선생은 체육(體育)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체조 등 체육을 수업시간에 많이 할애했는데, 어린 우촌 선생은 남달리 강건한 신체적 조건을 천부적으로 타고나 총애를 한 봄에 받았다. 훗날 선생께서 체육분야를전공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인연과무관하지 않다.
고향에서 보통학교 과정을 마친 우촌 선생은 좀 더 배워야 겠다는 생 각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중등교육과정을 마친후 20세 되던 1924년 현해탄을 건너 일본 동경(東京)으로 유학걸에 올랐다. 당시 식민지‘조선인’에게는 입학의 문이 매우좁았던 일본체육전문대학(日本體育專門大學)(現日本體育大學)에 입학한 그는 ‘식민지 백성’이라는 일인(日A) 학생들의 멸시와눈총을굳은의지로극복하며 학업에 열중하였다.우촌 선생 이 체육을 전공하려 한 데는 남다른 뜻이 있었다. 어린 시절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은사(恩師) 이은우 선생 A로부터 평소 신체의 단련과 건강이 중요하다는 교육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우총 선생 자신의 생각에도 과거 고루한 유학자들처럼 연약한 신체와 정신으로 는 향후 일제(日帝)에 강정당한 국권을 되찾을 수는 없다고판만했기 때문이었다.따라서 남들이 별반 관심을 갖지 않으나 사실 체육교육이 어느 분야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체육분야를 천공하기로 결성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 유학길에 오른 젊은이들은 대부분 법학이나 의학 분야를 공부하고 돌아와 총독부 관리가 되거나 아니면 안정된 직업에 안주하기를 바랐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우촌 선생과 같이 처음부터 남들이 외면하고 있던 체육분야를 전공하려 했던 점은 외로운 길을 스스로선택한것무로당시로는대단히 어려운결단이었다.
교육자로서 우촌 선생의 출발은 1927년 3월 20 일 일본체육전문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천안보통학교(天安普通學校) 교사로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칩안 어른들과 주위에서는 일본 유학까지 마치고 돌아와 국민학교 ‘훈도’를 자청한 우촌 선생의 결심에 완강힌- 반대와 불만을 표했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교육자로서의 우촌 선생은 그후 공주(公州)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를 거쳐 1930년 4월 서울의 광신상업고등학교(光新商業高等學校)와 동덕여자고등학교(同德女子高等學校)의 체육교사로 봉직하다가 일제말기 ( 日帝末期) 인 1939년 4월 경 성 여자의과전문학교(京城女子醫學專門學校)교수로 재직하며 체조와 육상 등 체육 분야 전반의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체육인이자 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1945년 광복을 맞은 지 한 달 만인 그해 9월 우촌 선생은 오늘의 한성대학교의 모체가 된 한성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과 이사장 A로 여러해 봉직하였다.한편, 우촌 선생은 신생 대한민국(大韓民國)의 체육발전사(體育發展史) 에 척지 않은 공헌과 족적을 남겼다. 1961년 대한핸드볼협회 회장직을 시작무로 대한체육회(大韓體育會)와 대한올럼픽위원회 이사를 거쳐 1966년 대한체육회(大韓體育敎員會) 회장의 중책을 역임하는 등 한국 체육의 발전을 위해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이러한 체육회 발전의 공적 이 인정되 어 우촌 선생은 1970년 12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國民勳章) 동백장 (~f百章)을 수상하였다.우촌 김의형 박사는 1983년 3월 1 일 이 땅을 떠나기까지 80여 전생애를 교육구국(敎育救國)의 일념과 한국 체육의 발전을 위해 헌신 봉사한 교육자이자 체육인이었다.
이제, 선생께서 40여 성상을 바쳐 신념과 접념으로 일구어 놓으신 한성학원은 선생의 숭고한 교육정신과 영원히 함께 할 것이다.v. 시련과 새로운도약1.학장의 퇴임1984년 신학기 개강과 더불어 3월 12일 아래와 같이 일부 보직개편을 통한 학사행정의 정비를 기하였다.사무처장 : 최명규교수(경영학과)기획실장 : 강병식 교수(사학과)최명규 학생처장이 사무처장A로 임명됨에 따라 3월 19일 공석중인 학생처장에 김용석 교수(영문학과)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설렵자 타계후 좌표를 잃고 학원전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즈음 “대학자율화”라는 외풍까지 가세하여 시련은 더욱 가중되었다.1984년 신학기부터 전국대학에서 거세게 일고 있던 대학자율화의 바람은 각 대학마다 내연하고 있었던 문제점들을 일시에 분출하는 계기가 되었고 한성대학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984년 3월 28일 ~29일양일간에 걸친 “대학발천을 위한 공청회”에서 비롯된 자율화의 외풍은 학내의 복잡한 갈퉁요소들과 함께 작용하여 급기야 교내시위로 까지 파급되기에 이르렀다.5월 25 일 부터 11 일간에 걸친 학내소요는 대흑L구성원 모두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긴 가슴아픈 일。1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성여자중 • 고등학교와 대학의 상호이전을 골자로 하는 획기적인 ‘한성대학 발전계획안’을제시함A로써 일단수습국면에 들어 갔다.1984년 7월 4일 학내소요의 여파와그과정에서 빚어진 학원내의 갈등으로 인해 강병규 학장은 결국 4년깐의 임기를 채우지 못한채 도중에 사임하게 되었다.
2. 새로운 약학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채단의 주도하에 교사이전 및 대학발전계획은 큰 차질 없이 추진되어 갔다.한성여자중 • 고등학교, 한성대학 빛 채만 관계자를 망라하여 구성된 교사이전추진위원회는 “교사이천 5개년 계획”을 구체화하여 발표하였는데, 그 주요내용은 아래와 같다.l 차년도 (1985) : (1)대학강의실(한성여고위치)및 화장실 증축공사(2) 대학강의실(한성 여고위치) 목재 Flooring 철거 후 Terrazzo개 축(3) 종합기본 계획 확정2차년도 (1986) : (1) 한성여고 건물 대학강의동£로 완천 개조
(2) 대학강의실 및 종합관을 여중 · 고 건물로 개조3차년도(1987) -5차년도 (1989)(1)한성여중건물 철거 및 대학건물 신축공사(2) 종합운동장 확보 및 학원부지의 효율적 재활용이와같은 계획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재단의 의욕적인 사업추진으로 예정보다 2년을 단축한 1987년 8월 대학본관(우촌관)이 완공되면서 교사이전(校舍移轉)의 대역사(大投事)를 완수하기에 이른다.이상에서 보듯 제 4대 강병규 학장 재임기긴: (1982-1984) 은 2년여의 짧은 기간에 불과하지만 그 기간에 본 대학을 ‘대학다운 대학’무로 성장 발전시키는데 있어 기본적무로 갖추어야 할 대학 행정의 제도 정비와 기구 확대는 물론 향후 종합대학으로서의 님 l 견을 바라 보며 과감한 학부제의 도입과 연구하는 대학A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각종 종 연구소의 설립 등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한성대학 20년역사 가운데 도약기 (歐鍵期)로서의 자리매김을 하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윤경로〉제3장 확장기
(1984~1988)
제3장 확장기
1. 홍순태 학장취임1. 제 5대 홍순태 학장 취임1984년 9월 5일 신축된 학생복지회관 강당(현 학생회관 소강당)에서 제 5대 학장으로 임명된 홍순태의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그는 취임사에서 “대학은 학문과 진리 탐구에 그 목적을 두며 이를 통한 창조적 연구로 인간생활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는 곳”으로 규정하고 “계속적이고도 신념있는 교육의 계획과 연구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하였다.또 그는 “앞으로의 학교운영에 있어서 본대학의 설렵자인 동시에 선배인 고 김의형 박사의 위업을 받들어 안으로는 내실화에 힘쓰며 밖으로는 한국내의 명문대학으로 부상하기 위한 충실한 성장을 기하고저 한다”고 그의 포부를 밝혔다. 그러면 다음에 홍학장의 취임사를 기록하여 그가 이끌어나잘 한성발전의 포부를 알아보자.낙산동산에 내린 고 우촌 검의형 박사의 민족교육의 뿌리는 1945년 조국광복과 더불어 시작되어 마침내 1972년에는 현 대학인 한성대학이 설렵되어 명실공히 중 · 고 대학을 갖춘 한성학원으로 타 사렵학원과는 다른 발전과정을 가지고 있읍니다.
인간의 성장과정 중 가정을 중심으로한 환경교육이란 것이 인간형성을 좌우합니다. 그 중에서도 청소년시대 교육은 인간형성의 기초를 만들어 주는 주요한 과정엽니다. 고 우촌 박사는 이 이성을 위하여 이 학원의 발천을 중 · 고에서 대학에 이르는기까지 진심무로 성취시컸읍니다.
한성대학은 설렵된지 불과 12년 경과한 시설대학입니다. 제 5대 학장으로 취임하는 본인은 설립자인 동시에 선배인 고 김의형 박사의 위엽을 받들어 안으로는 내실화에 힘쓰며 밖으로는 한국내의 명문대학으로 부상하기 위한, 알뜰하고도 충실한 성장을 기하고자 합니다.대학이란 학문진리의 탐구에 그 목표를 두고 그 학문을 통한 창조적 연구로 인간생활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읍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서는 계속적이고도 신념 있는 교육의 계획과 연구가 이루어져야되겠읍니다.교육에 종사하는 교육자나 교직원이나 모두가 확고한 신념하에 교육사업에 임해야 할 것이며 행정책임자는 교육에 필요한 적절한 환경과 조직적인 교육계획의 수링을 위해 힘써야 하겠읍니다. 학생제군들은 장차 대한민국의 지도급 인채로 국가적으로 중요한 간성이 될 사람들입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청년기는 인생의 기틀을 만드는 중요한 시기이니 만큼 진리탐구를 위한 연구의 수련을 통하여 대학시절을 신념 있게 수학하며 덕성을 기르고 품성 높은 인격자가 되기 위한 실천과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길 바랍니다.
학생 제군! 대학의 발전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성과 덕성을 기르며 사물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근시적인 시야보다 원시적인 대망에 시야를 돌려 개인의 영달과 더불어 조국의 발전을 위하여 영원한 영광을 목표로 전진하여야 하겠읍니다.상기한 바와 같이 계획, 교육, 학생 3자가 일체가 되어 우리의 학원 한성대학을 영광스러운 모교로 건립합시다.1984년 9월 5 일학장 홍순태신임 홍순태 학장의 취임과 때를 같이하여 9월 1 일자로 처장들의 인사개편이 단행되었다. 이 때의 인사이동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교무처장 : 윤석효교수(사학과신규)사무처장 : 검걸평 교수(경영학과신규)학생처장 : 강은석 교수(교양학과유입)기획실장 : 김용정 교수(무역학과유임)이어서 12월 14일에는 학생 처 장과 일부 연구소장 및 학과장의 인사개편이 단행되었는데 그내용은다음과같다.학생처장 : 한진만교수(미술학괴)도서관장 : 홍봉춘 교수(무역학과)학보사 주간 : 이종수 교수(행정학과)민족문화연구소장 : 정연길 교수(국어국문학과)사회산업연구소장 : 최송길 교수(경영학과)영어영문학과장 : 김용석 교수
경영학과장:김원중교수행정학과장 겸 고시반 지도교수 : 황진수 교수도서관학과장 : 이우범 교수의상학과장 : 최해주 교수미술학과장 : 정하경 교수2. 학생복지회관준공착공연기로 인하여 학생들의 원망을 사기도 하였던 학생복지회관이 9월 5일 완공되어 개관식을 가졌다. 본 복지관이 완공됨으로서 그동안 시설에 불편을 겪던 학생들에게 후생복지시설로서 편의를 제공하게 되었다. 83년 4월초에 착공예정이었으나 허가상 문제 등£로 인하여 결국 본교 개교 12주년 기 념 일인 10월 5일 착공식을 갖고 통년 12월 15일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당초 지상5층£로 계획한 바 있 o 나 예산상의 부속으로 안하여 4층으로 결정, 완공을 보게 된 것이다. 본 복지관의 충별 용도는 다음과 같이 확정되었다.
지하 : 교직원 식당, 주방, 휴게실, 탈의실, 샤워실, 학생식당1층 : 학보사, 서정 및 우체국, 학생처, 강당, 의무실, 영사실, 학생처장실2총 : 학생생활 연구소, 총학생회장실, 여학생휴게실, 회의실, 학도호국단실,학생장실3충 : 도서관장실, 자료정리실, 복사및 보관실, 참고논문실, 서고, 목록실,특수자료실4충 : 도서관 휴게실, 일반열람실3. 각 위원회 통폐합 작업그동안 복잡 • 다원화 되어있던 각 위원회를 간소화 시컴드로써 실제적인 기능을 강화시키고, 업무의 내용이 중복되거나 유사한 위원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이 11월 1 일 확정되었다. 기존의 21개에서 14개 위원회로 축소 통폐합된 위원회는 다음과 같다.인사위원회, 재무위원회, 교무위원회, 기획위원회, 학생지도위원회, 교원징계위원회, 일반직원 징계위원회, 학사개혁위원회, 도서관 운영위원회, 장학위원회, 홍보위원회, 고시반 지도위원회, 취업대책 위원회, 체육진흥관리 위원회.
II. 성장을위한진통1. 저|꿇l 수여식 거행제 9회 학사학위 수여식이 1985년 2월 23일 2시 종합관 대강당에서 거행되었다.금변 학위 수여자는 11개 학과 총 425명이며, 도서관학과와 경제학과는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수석졸엽의 영예는 신세준(사학과)이 차지하였으며 각학과의 학위수여자의 수는 다음과 같다.국어국문학과 30명
영어영문학과 34명사학과 21 명경영학과 85명무역학과 76명경제학과 21 명행정학과 27명도서관학과 24명무용학과 39명의상학과 39명미 술학과 29명합계 425명2. 85학년도 신입생 입 학식85학년도 신입생 입학식이 2월 25일 2시에 대강당에서 거행되었다. 입학식에서 홍순태 학장은 “대학이란 인간으로서 독창적인 학문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며 인간적£로 성숙하여 가는 곳, 사회생활에 필요한 바탕을 마련하는 곳, 자기가치 확립 및 힘찬 정진에 대한 발판이 될 수 있는 곳3로서 질서를 중요시하며 차분히 스스로의 실력을 갈고 닦을 것”을 당부하였다.
한편 85학년도 신입생 수석은 다음과 같다.인문학부 : 박동익 ( 영문학과 야간)사회과학부 : 박준련(무역학과 야간)예술학부 : 유정일(미술학과)3. 축구부창단3월 20일 학생회 소강당에서 그동안 예산 등 행정적 절차문제로 난항을 거듭하던 축구부가 창단되었다. 본교 축구부는 학생들이 모금한 체육진흥기금 8백여만원을 바탕A로, 홍순태 학장을 단장으로 감독에
재학생들의적극적인 지지로 1985 년 3월 20일 창단되어 전국대학우승까지 가져온축구부.
검계욱 교수 초대 코치에는 정은식을 초벙하여 4학년 3명, 3학년 6명, 2학년 5명 및 신입생 3명 등 총14명의 선수들로 구성되었다. 한편 정은식 코치는 가난한 살림을 힘들게 꾸려가고 있어 당장 큰 성과를 기대하지 않지만 앞£로 2-3년을 바라보고 띔 각오를 밝히면서 무엿보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호응도라고 강조하였다.
4. 지하철역명 개명지하철역명 ‘삼선교’가 ‘한성대 입구(삼선교)’로 개명되었다. 이 사실은 4월 30일 서울시장과 안호상 이사장, 홍순태 학창과의 면담시에 확정 · 발표되었다. 본교에서는 그 동안 지하철역 주변 다-른 대학의 예를 들어 삼선교역도 한성대 입구로 변경해야 한다는 건의를, 서울시와 지하철공사에서 수용하여 금번에 개영되게 되었다.5. 성장을위한진통
학원문제 대책위원회 주도로 5월 28 일 개최된 교사이전 및 교수퇴진 문제에 대한 공청회 이후 시작된 학생 농성이 2주 이상 장기화에 따라 학사가 일시적인 마비상태에 이르게 되자 따라 학원정상화를 위한 조치로 교내시위와 관련 18명의 학생들이 징계를 받았다. 한편 정상화조치의 한 방편무로 일부 인사 개편이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무처장 : 최명규교수(경영학과)학생처장 : 김경배 교수(교직과)도서관장 : 한창호교수(경제학과)학생생활 연구소장 : 김용석 교수(영문학과)영문학과장 : 박양구 교수이번 보직 개편을 하면서 기획실이 기획과로 축소고 사무처 관할하에 위치하는 기구개편도 아울러 이루어졌다.Ill. 교사이전 및 시설확장1.제 10회 학위수여식제 10회 학위수여식이 1986년 2월 22일 1시 종합관 대강당에서 홍순태 학장과 많은 내외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거행되었다. 금벤 학위수여자는 11개학과 총408명으로 영예의 수석졸업자는 검철수(행정학과)가 차지하였다. 각 학과별 학위수여자 수는 다음괴- 같다.
국어국문학과 31 명영어영문학과 36명사학과 25명경영학과 57명무역학과 88명경제학과 20명행정학과 20명도서관학과 37명무용학과 31 명의상학과 36명미술학과 27명총계 408명2.86학년도 신입생 입 학식
2월 24얼 2시 종합관 대강당에서 86학년도 신입생 입학식이 거행되었다. 개식사를 시작우로 국민교육헌장 낭독, 학장 훈시, 이사장 축사의 순서로 진행된 금번 업학식에서 홍순태 학장은 “대학이란, 가치창조의 제 1단계로서 자링자행하고 스스로 판단하여 나름대로의 자기인 생 수련을 위한 독렵된 학푼연구의 장업니다. 인생의 완숙을 목표로 볼 때 대학학문이라는 것은 기초에 불과한 것이니 행복의 토대라 할 수 있는 학문토대를 잘 닦도록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고 당부하였다. 이어서 안호상 이사징L은 “대학의 가장 큰 2대 목표는 인격도야와 학문연구에 있습니다. 학생 여러분의 인격도야와 학문연구도 홍익인간의 위대한 이상에 목표를 두고 백두산을 바라보며 열심히 노력하기를 바랍니다고 부탁하였다.한편 86학년도 신입생 수석은 예년과 같이 학부별로 지정되었는데 수상자는다음과같다.언문학부 한진수(국어국문학과 야간)사회과학부 유원준(무역학과 야간)예술학부 이강은(미술학과 서양화)3. ROTC 창설
서울권에 속해 있는 4년제 정규대학(여자대학 제외) 중 유일하게 ROTC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던 본교가 그 동안 꾸준하게 펴 온 각고의 노력 끝에 12월 4일 국방부령 제 281호(’75. 9. 25) 학군무관 후보생규칙에 근거 인교(’84. 11. 22) 학군사관 후보생과정 설치 송인을 얻었다. 이에 따라 85학년에 l학년 재학중인 교련대상자 중 후보생을 선발, 86학년부터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게 되었다. 금번 ROTC 설치로 본교는 명실 공히 대학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화군사관후보생 (ROTC) 창설 빛 입 단식 이 3월 11 일 본교 운동장에서 안호상 이사장, 홍순태 학장 빛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본 행사는 창설경과 보고, 계급장 수여, 후보생 선서 둥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1985 년 12월 4일
창단한 ROTC 입단식모습.ROTC는 여러가지 제반여건의 어려움£로 그동안 설치 인준을 받아오지 못하다가 지난해 학교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금번 창단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날 행사에서 흐L군단장은 훈시를 통해 대학은 학문을 연구하며 탐구하는 곳요로 명예로운 학군사관 후보생 과정에 선발된 힘L군사관 후보생들에게 진심 ξ로 축하하며 세가지 당부를 하었다. “첫째, 투철한 사명감과 긍지를 잃지 말 것 . 둘째, 강인한 체력과 실력 배양에 힘쓸 것 . 셋째, 예의 바르고 학교를 사랑하는 학생이 될 것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홍순태 학장은 “여러가지 제반 여건이 부족한 미흉한 가운데 여건부족을 보완하여 ROTC 승인을 받아 오늘과 같은 뜻깊은 자리가 마련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선말된 후보생 모두에게 축하를 보낸다고 치 하하였다.
4. 대폭적 인 인사개편
28일간에 걸친 장기 적인 학내사태를 수습하고 학원의 정상화를 기하기 위하여 8월 1 일자로 대폭적인 인사개편을 단행하였다. 개편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교무처장 : 한창호 교수(경제학과)학생처장 : 이우범 교수(도서관학과)도서관장 : 이용남 교수(도서관학과)
학보사주간 겸 방송실장 : 황진수 교수(행정학과)민족문화연구소장 : 지배선 교수(사학과)사회산업연구소장 : 허창채 교수(경제학과)학생생활 연구소장 겸 취업대책위원장 : 강석중 교수(무역학과)국문학과장 : 김창용 교수영문학과장 : 김용석 교수사학과장:윤경로교수경영학과장 : 연정열 교수무역학과장 : 검용정 교수행정학과장 : 이종수 교수경제학과장 : 권혁제 교수도서관학과장 : 정진식 교수무용학과장 직무대리 : 김진결 교수미술학과장 : 강국진 교수교양과장:김계욱교수
건설본부장 : 김길평 교수(경영학과)체육부장 : 강은석 교수(교양학과)5. 교사이전 및 본관신축 기공식교사이전 및 본관신축 기공식이 8월 12일 오전 10시 전 여중 자리에서 거행되었다. 이날 열린 기공식에는 안호상 이사장, 이회순 이사, 홍순태 학장, 3처장 등 내외 귀빈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식순에 따라 치루어졌다.건설본부장인 김길평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기공식은 공사개요 소개와 김정웅 목사(영동 성서 첨례교회)의 축도, 시삽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새로이 들어서게 될 본관 신축건물은 대지면적 2천2백94.3평, 건축면적 7백 35.5평 A로 동럼건축 주식회사가 설계를 맡고, 우진토건주식회사가 시공을맡게 되었다.
본관 건물인 우촌관 건물의 준공 . 87 년 8월 25일 이희순여사와안호상 박사의 테이프절단모습.
본관 신축건물은 전체 6층, ’철근; 콘크리트라멘조 구조로 86년 8월 12 일 착공되어 87년 8월 15일 완공 될 예정으로 있다. 한편 이에 앞서 여중 · 고의 방학과 동시에 대학 · 중 · 고의 자리바꿈이 이루어져 교사이전이 완전히 마무리 되었다. 교사이전이 단행됨으로써 천 여고건물이 본관으로, 전 과학관이 별관£로 각각 명 칭 이 바뀌 어 사용된다.
6. 졸업정원제 운영시행시책본 대학의 질적수준을 향상시키고 졸업정원제 운영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한 학칙개정이 9월 26일 교무위원회를 통해 결정되었다. 금번 학칙개정으로 졸업정원제 운영시행 세칙이 새로 재정되었고, 성적평가에 관한 세칙 중 제 3조 평가비율이 변경되었무며 제 3조 단서조항(2) , 제 5조 2항, 제 8조 2, 4, 5항이 각각 삭제되었다. 또한 제 13조 2항은 변경되었다. 첨가된 규정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졸업정원제 운영시행세칙
재학기간중 학사경고를 2회 받은 자는 학칙 제 38조에 의거 제적된 다. (제 3조) 재학중 중도수료 사정은 학년말에 각 처장, 도서관장, 각 학과장으로 구성되는 중도수료 사정회의에서 행하며 졸엽운영 단위별로 사정한다. 81-84년도 입학자로 휴학 후 복학한 자는 재학학년의중도수료 비율에 따라 사정한다. (제 5조 1 , 2항) 중도수료의 학년별 비율은 2학년 말 졸업정원의 115%초과인원, 3학년말 졸엽정원의 105% 초과인원에 각각 적용된다. (제 6조) 중도수료의 사정기준은 채학한 전체학기의 학기말평점, 평균의 합계점 수로사정한다. (제 7조) , 학장은 중도수료 사정회의의 결정에 따라 중도수료자 중에서‘ 학업성취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유급을 허가할 수 있다. 단, 유급은 4학년에 한한다. (제 9조) , 유급은 1년단위로 1회에 한해서 허가한다. (제 10조)유급된자가 해당학년에 취득한 학점은 무효가 되며 채이수 해야한다. 단, 군사교육학청은 예외 (제 11조) . 유급된자는 실제졸업하는 학년도의 졸엽정원의 적용을 받는다. (저;]1 2조) 등이다.
성적적 평가어| 관한 세칙평가바율은 기말성적 30%, 중간성적 30%, 과제물 및 부정기시험20%, 출석 및 수업태도 20%에 의하여 종합성적£로 평가한다. 단, 중간성적은 학사진행상 기말성적에 통합될 수 있다. (제 3조) , 학사경고는 매학기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자에게 학장이 행한다. 학기성적평점평굵 1. 75미만인자 학기수강신청 교과목중 2과목이상 낙제 (F)재학기간중 학사경고를 2회 받은잔는 학사제적된다(제 13조) 등이다. 위의 새로 개정된 셰칙 및 개정들은 1987년 3월 1 일부터 시행된다.
N. 시설확충 벚 대학원 신설1. 제 11회 학위수여식11 회 학사학위 수여식 이 2월21 일 요후1시 대학본부뒤 강당에서 거행됐다. 이번 학위수여식은 학장 및 많은 내외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개식사,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국민교육현장낭독, 학사보고, 학위증서 및 상장수여, 학장 격려사, 이사장 축사, 동창회장축사, 기념품중정, 교가제창, 폐식사순으로진행되었다. 이번 학사학위 수여자는 11개학과 총410명으로 밝혀졌다. 각 학과별 졸업인원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국어국문학과 31 명영어영문학과 31 명경영학과 63명무역학과 78명경제학과 20명행정학과 28명도서관학과 36명무용학과 29명의상학과 41 명미솔학과 29명총 계 410명한편 이날 진행된 학위 수여식에서는 경제학과 검봉학 군이 평균평점 4.08점 A로 영예의 수석을 차지하였다.2. 신축건물준공
우촌관(신축건물)공사가 8월 25일 준공되었다. 대지면적 2994. 3평,건축면적 3447평흐로 웅장한 규모의 우촌관 완공은 본교 발전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데 큰 의 미 를 둘 수 있다. 그동안의 공사내역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우촌관은 지난 86년 8월 12 일 기공식을 가져 만 378일만에 완공을보게 되었다. 그동안총공사비는 22익 3천 9백 68만 4천원(설계감리비 5천8백 6십만4천원+공사비 21 억 8천 1 백 8만원)이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우촌관의 주요배치 상황을 알아보면다음과 같다.1층 : 종합천시실, 교관실,무용실기실 빛 교수연구실2층 : 어학실, 컴퓨터실, 사회산업연구소, 민족문화연구소,교수연구실, 의상학과실기실3층 : 교무처, 사무처, 당직실, 기획실, 교수연구실4층 : 자료실, 이사장실, 학장실, 법인사무국5, 6충 : 강의실
또한 5, 6충에는 넓은 베란다를 두어 휴식공간A로 활용하게 된다.3. 인사이동8월20일자로 보직교수 인사이동이 있었다. 이변 인사이동은 학생처장 이우범 교수가 일신상의 사유로 인하여 개편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같다.학생처장 : 이종수교수(행정 학과)행정학과장 : 정성돼 교수방송실장 : 김길평 교수(경영학과)4. 졸업시험실시취업에 보다 능동적으로 대처하자는 목적 아래 각 학과별로 졸업종합시험이 시행되고 있다. 그 동안 진행되어 왔던 상황을 보면 2월 11일현행 졸업논문을 졸업종합시험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하였다. 그후 5월 1 일 각학과의 졸업종합시험과목이 확정, 발표되어 현채 시행되고있는 중이다. 한편 교무위원회에서는 과옥낙제 (평균점수 40점 이하) 인 경우 재시험에 한하여 전형료플 징수하기로 하였A니- 각 학과 준비위원회와 혐의를 통해 전형료를 징수치 않기로 결정하였다. 이외에 졸업종합시험과 관련된 전반적인 사항은 학과 단위의 졸업시험준비위원회에서 일괄적:로 처리하기로 하였다.
5.4개학과 및 경영 · 행정대학원 신설본교는 10월 19일 4개학과(산업공학과, 전산통계학과, 의류직물학과, 산업디자인학과)의 신설로 엽학정원 15개학과 720명으로 증원되었다. 또한 도서관학과는 문헌정보학과로 개명되었다. 이어서 11월 9일 문교부로부터 경영 • 행정대학원의 설치인가를 받게 됨£로써 학부와 대학원의 공존체제 를 가지게 되었다. 문교부로부터 확정 발표된 대학원 설치인가의 내용을보면, 경영학과와행정학과 2개 전공에 각 40명씩의 정원이 책정되어 있다. 또한 야간에 강의를 하게 되는 특수대학원은 5학기를 기준A로 하며 석사과정까지 이수하게 된다.
한편 대학원의 신설로 12월 16일자로 다음과 같이 인사개편이 이루어졌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대학원장:홍순태학장대학원 교학과장 : 강병식 교수(사학과)대학원 경영학과 주임교수 : 김용정 교수(무역학과)대학원 행정학과 주임교수 : 황진수 교수 (행정학과)학생생활 연구소장 : 최명규교수(경영학과)무역학과장 : 강석중 교수v. 홍순태 학장퇴임1.학위수여식
87학년도 제 12회 학위수여식이 2월 20일 오후 2시 본교 대운동장에서 열렸다. 이번 학위수여식에서는 11개학과 총 512명의 학사를 배출하였는데 이는 작년의 419명보다 100명이 늘어난 숫자이다. 학위수여식은 학장, 이사장, 동창회장 퉁 많은 내외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개식사, 국민의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국민교육현장낭독, 학사보고, 학위증서 빛 상장수여, 학장 격려사, 이사장 축사, 동창회장 축사, 기념품증정, 교가제창, 폐식사순으로진행되었다. 홍순태 학장은격려사에서 “시련의 민족적 격동기에 사회에 진출함에 있어서 지-유정신 구현과 신뢰성의 확립이 중요하다고 딩-부했다.이날 학위수여식에서 전체 수석졸엽은 4. 5점 만점에 평균평정 4.09를 취득한 임동혁(도서관학과)군이 최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한종휘(국문학과) 군 등 10명이 우수상을, 검상복(행정학과)군등 36명이 공로상을 각각 수상하였다. 이번에 졸업한 학과별 학사수여자 인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국어국문학과 36명
영어영문학과 42명사학과 40명경영학과 81명무역학과 70명경제학과 42명행정학과 39명도서관학과 34명무용학과 36명의상학과 49명미술학과 33명총 계 512명2. 신설학과장임명올해부터 신설된 전산통제학과, 의류직물학과, 산업디자인학과, 산업공학과등 4개학과의 학과장이 다음과같이 임명되었다.
전산통계학과 : 이우범 교수(문헌정보학과)산업공학과 : 김길평 교수(경영학과)의류직물학과 : 임채영 교수(의상학과)산업디자인학과 : 정하경 교수(미술학과)한편 이번 학과장 임명은 현재 재직중인 교수들을 선별 발령함에 따라 학교측의 신설학과 전문적 양성을 위한 보다 성의있는 교수공개채용방안이 지적되고 있다.3. 제규정심의위원회 발족채규정심의위원회가 3월 16일 발족되어 학칙개정 및 학내천반에 관한 제반규정과 준칙 등을 심의하게 된다. 이날 발족과 함께 열린 제규정심의위원회에의 위원은 다음과 같다.위원장 : 이용남 교수(문헌정보학과)위 원 : 한창호교수(경제학과. 교무처장)
최송길 교수(경영학과. 사무처장)이종수 교수(행정학과. 학생처장)윤경로교수(사학과)지배선교수(사학과)김용정 교수(무역학과)황진수 교수(행정학과)이번에 구성된 제규정심의위원회는 각 대학에서 활발히 추진되고 있는 학칙 개정작업을 우선적 a로 착수해 나가게 될 것이다.4. 인사이동본교 보직 개편에 따른 인사이동이 전면적으로 단행되었다.6월 22일 열린 교수회의에서 일팔통보된 이번 개편은 지난 1학기 일련의 학사사태와 홍순태 학장의 임기만료에 따른 것이다. 주요 보직개편 내용은 다음과 같다.교무처장 : 김용정 교수(무역학과)학생처장 : 이석주교수(국어국문학과)
사무처장 : 박양구 교수(영문학과)학보사 및 교지편집실 주간 : 김용석 교수(영운학과)방송국장 : 조점환교수(교양과)민족문화연구소장 : 윤경로 교수(사학과)학생생활연구소장 겸 취업대책위원장 : 지배선 교수(사학과)체육부장 : 검계욱 교수(교양과)한편 도서관장인 이용남 교수(문헌정보학과)와 건설본부장인 김길평 교수(경영학과), 사회산업연구소장 허창채 교수(경제학과)는 각각 유임되었다. 이번 보칙 개편과 더불어 각 학과 학과장들도 전면 이동되었다. 각 학과 임명된 학과장은 다음과 같다.국어 국문학과장 : 원형갑 교수영어영문학과장 : 고정자 교수
제4장 성장기
(1988~현재)제4장 성장기
1. 제 6대 신영기 학장취임과교육의 질적 향상홍순태 학장의 임기 만료가 다가옴에 때라 신임학장에 관한 문제가 학내외를 통하여 많은 관심이 접중되었다. 본교의 후임 학장이 누구인가에 따라 학교 운영의 방향과 발천에 지대한 영향이 마칠 것이기 때문이다.특히 학내에서의 관심은 대단허 컸다. 당시 전국에 있는 상당수의 대학들은 그 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교수 중에서 총 · 학장을 선출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으며, 앞£로 거의 모든 대학이 그러한 추세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이 본교에 미친 영향도 있었다.이에 따라 교수협의회에서는 본교에 재직중인 교수 중에서 학장을 추대하자는 여론이 크게 일어낮다. 당시 재단에서도 이러한 여론을 과감히 수렴하여 적격지을 추천해 보도록 교수협의회에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교내의 실제 사정은 이상적인 생각만A로는 역부족이었는지 뚜렷하게 어느 누구를 추천하지 못하고 시일만 촉박하게 흘러갔다. 교수협의회에서 미온적인 태도로 나오게 되자 일부에서는, 이번만큼은 할 수 없이 또 한번 외부인사를 영입하자는 의견도 흘러나오게 되었다. 결과적£로 재단 이사회에서는 학장 초벙을 맡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신영기 학7-J-을 초벙하게 되었다. 일단 신임학장이 내정되자 교수협
의회에서 인준 동의 절차를 거치고 최종적으로 확정이 되어 1988년 8월 22일 오전 10시 소강당에서 신 • 구 학장 이 •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그간의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연 다음과 같다.교수협의회에서는 신임 학장 선임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7월 14 일 회의를 열고 2가지 사헝을 결의하여 재단이사회와 협의를 하였다. 그 사항은, 첫째 후입 학장을 이사회에서 선임하되 반드시 학내 교수로 한다는 것과, 둘째 부득이한 경우-에 학외 인사를 선임하되 그 즉시 교수협의회 총회의 인준을 거친 뒤 취임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첫번째 사항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두번째 사항으로 귀결되었다. 재단이사회는 8월 11 일 회의를 열어 신영기 박사를 내정하고 19일 11시 교수협의회의 동의를 구하였다. 이 교수 협의회 총회에서는 전체 44명의 회원 중 31 명이 참석하여 찬성 23표, 반대 8표로가결되었다.신영기 학장은 1921 년 2월 22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1944년 일본 동경대학 토목콩학과를 졸업하고, 1975년에 동경대학에서 공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신 학장은 약 30년간을 서울대학 교수로 채직하다가 1986년 2월에 정 년퇴 임을 하였고 학술원 회원£로 있었다.
신영기 학장은 ‘뜨거웠던 정열을 부드럽게 누그러뜨려 화합과 단결로서 나라와 학교의 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자기 자신들의 계발과 성찰에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할 것’이라는 취임사를 읽으며 한성가족 모두 하나가 되자고 역설하였다. 다음은 취임사 전문이다.취임사친애하는 한성가족 여러분, 그리고 공사다망하신 중에도 멀리 왕럼하시어 이 자리를 빛내 주신 내외 귀빈 여러분, 제가 방금 이사장님께 서 학장으로 임명해 주신 신영기업니다. 지난 40여년간의 교직생활중에도 보직 한번 맡지 않고 오로지 학문의 길에만 뜻을 두어 왔고 얼마천 정년을 맞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던 저에게 이 대학의 학장이라는중책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왔을때, 저는 특히 요즈음과 같이 그동안 억압되었던 민주화와 통일에의 열기로 학내외가 격동하는 시기에 저와같이 부덕한 사람이 과연 그 소임을 다 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에서 사양을 거듭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회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 이것이 제가 학문 외의 길로서 교수와 학생 여러분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저에게 주어진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로서 비록 그 전도가 순탄치만은 않으리라고 예상되더라도 그것이 제가 이 세상에서 치루지 않A연 안될 業이라는 생각이 들어 감히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지금 우리나라는 그 어느때 보다도 격심한 변혁기에 들어서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는 계속되는 노사분규나 학생운동A로 매우 혼란스러워 보입니다.그러나 제가 보기에 우리는 지금 한창 무르익은 봄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야는 자고 나면 하루가 다르게 푸르름을 더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우리 국민의 대다수가 절대 빈곤이라는 통로 속에서 밭을 일구고 싹을 퇴워 봄을 맞이하고 있을 때 다른 일부에서는 오는 봄을 마처 기다리지 못하고 초겨울부터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인공난방과 인공급수 시설로서 성급하게 때이른 야채와 과일을 재배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대다수가 자연속에서 미처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들의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비닐로 덮여진 그 속에서는 여러가지 무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르익으면 비닐하우스는 더 이상 존재할 펄요도 또 존재 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지금이 바로그러한시기라고생각합니다.
이러한 시기에는 부드럽고 따뜻한 봄의 햇살이 필요합니다. 잎이 채 무성해지기도 전에 너무 뜨거운 햇볕을 받게 되면 잎은 여물지를 못하고 오히려 시들게 되고 결실도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즈음 일부 젊은 학생들의 열기는 너무 뜨겁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마치 한 여름의 뜨거운 햇볕과 같습니다. 또 여러분들께서는 금년 여름이 다른 해에 비해서 유난히 더웠던 것을 기억하실 것임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햇볕이 필요할 때 이와 같이 뜨거운 열기들이 겹치면 이제 막 싹퇴워가꾸기 시작한 민주주의가 채 여물기도 전에 시들어 버리게 되지나 않을까우려되는바가적지않습니다.
우리나라가 이제 무르익은 봄을 맞고 있다면 우리 한성대학은 이제 막 초봄을 맞고 있는거나 다릎 없습니다. 설립된 지 이제 15년이니 대학의 역사로서는 결코 긴 편은 아닙니다. 아니 이제 겨우 싹을 퇴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필요한 것은 따뜻한 햇볕보다도 부드러운봄바람입니다.여기 계신 교수님들 대부분은 스승으로서의 훌륭한 인품과 능력을 갖추고 계시리라고 믿어지지만 좀 못하신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또 여기 계신 학생 여러분들도 대부분은 다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계시겠지만 그렇지 못한 학생도 일부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좀 못한 스승밑에서도 얼마든지 훌륭한 제자가 나올 수 있으며 또 학교 다닐때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학생들이 졸업한 후에 사회에 나가 훌륭하게 성공한 예를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우리는누가좀더 잘나고못나고 또잘하고못하고를따질 때가 아니라, 일단 한성가족£로서 인연을 맺은 이상 모두 일치단결하여 이제 막퇴운싹을가꾸고돌보아야할시기라고생각합니다. 지금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뜨거운 열기보다는 부드러운 봄바람과 같은 화합인 것입니다.저는 어느 단체이든간에 책임자의 역할이란 단체 소속원 모두가 힘을 합쳐 그려 놓은 용의 모습에 눈을 그려 넣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용의 모습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눈을 잘못 그려 넣으면 그 그림은 생명을 잃고 밥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아름답게 그려 넣으려 해도 먼저 용의 모습이 훌륭하게 만들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한성가족 여러분, 저는 이제 이 자리에서 앞으로 우리 한성대학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을 약속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제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해도 여러분들께서 모두 일치단결하여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 젊은이들은 나름대로 나라와 학교의 발전을 위하여 많은 정열을 받쳐 왔습니다. 그 결과 얻은 것도 많지만 또 한편응로는 지나친 희생이 뒤따랐던 것도사실입니다.이제는 다시 냉정을 되찾아 그 모든 것을 역사의 저 편£로 흘려보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뜨거웠던 정열을 부드럽게 누그러뜨려 화합과 단결로서 나라와 학교의 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자기 자신들의 계발과 성찰에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하여 나날이 발전하는 우리조국 대한민국 속에서 더더욱 발전해 나가는 우리 한성대학을 위해 제가 힘껏 봉사할 수 있도록 여러분 모두 가 도와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럽니다.끝으로 이 자리에 나와주신 한성가족및 내외귀빈 여러분께 다시 한 먼 감사를 드리며 이것£로 깐만하나마 취임사에 대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1988년 8월 22일학장 신영기1.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한 노력신영기 학장의 취임사에서는 학장A로서의 대학운영 방향에 대해서 언급한 점은 구체적무로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것은 신학장의 성품과 도 무관하지 않았고, 또 학장무로 위촉 받고 취임하기까지의 시일이 너무 짧은 나머지 미처 계획을 수립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신학장은 바둑에 아마 5단이라는 고수로서 항상 조용한 성품의 소유자였고, 행동£로 옮길만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i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취임사라는 것은 평소에 품고 있던 내면의 성실성과 학교 운영의 기본적인 자세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면은 비단 취임사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해 10월 5일 한성대학 개교 16주년 기념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다음에 그 전문을 싣는다.개교기념사한성학원 창럽 43주년과 함께 개교 16주년을 맞이하면서 먼저 오늘의 한성학원이 있을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하신 설렵자 님과 역대 학원 이사장님 그리고 교직원 여러분께 충성 A로 경의와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아울러 한성학원을 거쳐간 모든 졸업생과 친애하는 재학생들에게 변함없는 기대와 격려의 뭇을 전하면서 한성가족 모두와 더불어 오늘의 기쁨을나누고자합니다.
1972년 민족정신을 되살려 끊임없는 학문탐구에 기초하여 국가에 이바지하고 나아가 인류의 평화와 복리증진에 힘쓸 수 있는 지도자를 양성함을 설렵이념으로 진리와 지선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교육기관흐로서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학문연구를 통해 새로운 전통을 다져가기 위해 많은 시련과 난관을 극복하고 열과 성무로 만들어 온 한성역사 16년, 그리 길지 않은 시간속에서 발전의 발판을 만들기 위한 전통과 그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진 중 · 고등학교와의 교사 이전, 운동장확조L공사, 우촌관 신축건물의 완성 등 양적팽창과 함께 학과의 신설 및 증원, 경영행정대학원의 설렵 등 명실상부한 대학으로 면모를 갖추어 나가며 끊임없는 학문탐구로 개성있는 전통 구축을 위한 한성인 천체의 결실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초라해 보이지만 한성인의 의지가 응어리져 가꾸어 온 한성의 역사가 값진 역사로 수 놓아질 고귀한 시간들이 될 수 있도록 가일충분발해야할 것입니다.개교기념을 축하하는 참된 뜻은 이러한 우리 대학의 역사플 통찰하면서 그토대 위에 내일의 포부와 자신을 다짐하는 새로운 결의를 갖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계기를 맞이하면 새로이 마음을 가다듬고 미래를 다짐하는 슬기를 지닌바 개교 16주년을 맞아 우리대학은 발전의 양적추구에 앞서 질적 a로 심화된 성숙한 안정기의 내실을도모해야할중요한시점에 서 있다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성인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한평생 더불어 사는 진정한 한성가족우로서의 자긍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그 다음 끊임없는 학운탐구를 통하여 실력을 연마하면서 학문연구의 최적의 장소로서 명실공히 공부하는 면학의 장을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우리는 지금 대학자존의 능력 함양과 대학의 자주적인 대학발전을 위해 새로운 각오로 더욱 많은 노력과 정열을 기울여야 할 것 입니다.그러한 가운데 새로운 한성 인 상을 창조하고 새로운 역사창조를 위해 열과 성을 다해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이러한 우리의 새로운 역사를 위해 아무쪼록 한성인 모두의 적극적인 참여와 더욱 애정 어린 마음으로 단합하여 내일의 더 큰 영광과 기쁨을 나누킬 바라면서 개교 16주년 기념사에 가름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이러한 신영기 학장의 의지는 크게 두가지 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질적 • 양적 향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곧바로 이를 실천에 옮겼다. 그 중에 주요 사항을 들자면, 우선 과학관 준공을 비롯하여, 전자계산소 설립, 그리고 북방문제연구소, 출판부 설럽과 아울러 대학원신성을 하였던 것이다. 이제 각 항목에 대한 간단한 내역을 살펴보기로한다.1) 과학관준공신영기 학장은 취임하자마자 곧 여러가지 구상을 하였다. 이 구상내용은 학보사에서 마련한 인터뷰를 통하여 지면£로 인쇄되어 나왔다. 여기서 신학장은 본교의 교육공간이 절대적 A로 부족함을 인식하고 공간확보 방안을 생각하였다. 곧 1971년도에 준공한 교내 수영장 자리에, 과학관 건축을 추진해야겠다고 말하였다. 이 사업은 곧장 실챙에 옮겨져서 다음해인 1989년 1월 19일 서울시청의 사업승인, 4월 7일 성북구청의 건렵 허가에 따라 4월 15일 과학관 기공식을 갖게 되었고 10개월에 걸친 공사 끝에 1990년 2월 27일 준공을 보게 되었다.
이날 준공식에서는 그동안 교내 건설 본부조L을 맡아요던 검걸평 교수의 경과보고에 이어 공로패 수여(김걸평 교수 수상)와 감사패 증정(성북구청장, 성북경찰서장 수상) , 테이프 절단의 순서로 진행되었다.지상 5층의 A동과, 지상 4층 지하 1충의 B동£로 된 과학관은 총면적 1 , 626평에 건축면적이 366평이다. 당초완공예정은 1989년 12월경이었으나 약 2개월 정도 늦어졌다. 또한 부수적인 공사로서 노천극장, 테니스장, 주위환경 조성이 과학관 준공식 천인 2월 23일 착공하여 4월말에 일단략맺었다.이 과학관의 내부현황은 강의실로 사용될 6개실, 산업디자인학과, 의류직물학과, 전산 통계학과가 각각 4개실을 과별 실험실로 사용하게 되었고, 교수 연구실 107~ 실, 전자계산소 1 개실, 학과사무실 3개 등 총 35개실을보유하게 되었다.
이로써 1988년도에 신설된 자연계열 학과가 병실공히 실험실습실을 천용£로 소유한 과학관을 갖게 되 었다.2) 전자계산소설렵오늘날 우리 사회의 급속한 변화는 온 세계를 정보화 시대로 만들었고, 이에 따라 모든 학술정보의 신속한 전달과 처리업무 능력의 보유여하에 따라 연구성과가 크게 좌우되며 , 모든 업무부문에 있어서의 능률향상을 위해서는 업무의 전산화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이러한 추세와 현실성에 입각하여 1984년 7월에 정보전산연구원을 설립하여 학생들의 실습에 많은 공헌을 해왔다. 그러나 시대적 요청은 정보전산 연구원의 수준에 그대로 머무를 수 없었다. 앞A로의 시대는 연구를 비롯한 학교 업무 처리에 전산화가 이추어져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1988학년도부터 천산통계학과를 비롯한 산업공학과, 의류직물학과 산업디자인학과 등의 자연계 학과가 신설되어 전산을 필요로 하는 요청이 쇄도되었고, 1989년도부터는 이 학과의 전공학목강의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전자계산소의 설립을 적극적으 추진되었다.
전자계산소 설럽에 우선 해결해야 할 것은, 컴퓨터를 비롯한 기본설비 도입을 위한 재원 조달과 앞으로 대학규모의 확대 빛 발전에 성-응하여 어떤 기종과 시스템을 도입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었다.이에 따라 우선 1990\건 1월 6일에는 ‘MV / 15,000 System’을 도입하였고, 2월 28일 과학관 2층에 전자계산소 개설의 테이프를 끊게 되었다. 초대 소장무로는 경제학과 권혁제 교수가 임 명되 었고, 1990년 9월에 다시 천산통계학과최병수교수가 2대 천산소장으로임명되었다. 그리고 초창기에 PC실습실 1개소를 개설하였고, 그해 9월에는 제2PC실습실을 개설하였다.조직
전자계산소장
1) 개발과
신규업무 발계획 및 업무개발2) 운영과
기존업무운영 및 MAINTENANCE3) 실습상담실SYSTEM관리, 교수 연구지원 및 학생 실습지원전자계산소 실습실 이용안내1) 터미날실습실터미날 실습실에서는 중형기종인 MV-15, 000 SYSTEM에 설치되어 있는 각종 PROGRAMING LANGUAGE와 SOFTWARE PACKAGE를 사용할 수 있으며 사용권한은 다음의 2가지 경로를 통하여 부여받을 수 있다.(1) 전산관련과목을 수강하는 학생으로 해당 교과목 담당교수가 일괄사용 신청을 하는 경우(2) 논문작성 등 필요한 경우 학과장의 추천에 의해 전자계산소로 사용신청을 하는경우2) PC실습실
PC실습실에서는 개인용 컴퓨터를 이용하여 각종 LANGUAGE실습 SOFTW ARE P ACKAGE와 WORD PROCESSOR 등을 사용할 수 있으며 특별한 사용허가 없이 학생중만 제시하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3) 컴퓨터 관련교육전자계산소에서는 급증하는 COMPUTER 수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수시로 COMPUTER기본과정, DATABASE, SPREAD SHEET, WORD PROCESSOR 등의 특강을 실시하고 있으며 새로운 요구가 발생할 경우 이에 적절히 대응해 나가고 있다.3) 북방문제연구소 설립
북방문제연구소는 1989년 4월 1 일 설립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전세계는 이제 이념의 대렵에서 벗어나 서로의 필요성에 의한 실질적인 상호협력체제로 전환해 갈 것이 눈앞에 보이고 있다. 이미 소련이 해체되었고 중국의 모든 체제가 개방화로 전환되고 있음도 현실적인 상황이다.본 연구소는 한국의 북방정책과 관련이 있는 중국과 소련 및 기타 지역에 있는 공산국가들에 관한 지식의 학문적 연구를 통하여 인류평화와 동서화해무드에 따른 강대국 관계의 재편, 한국의 국제적 지위향상, 북한에 대한 한국의 통일 및 대화정책, 한국의 국기-이익 증진에 어느 정도 기여할 목적을 두고 설렴하였다.본 연구소는 소장과 운영위원, 연구소 후원회, 연구원 빛 조교를 구성하고, 연구원으로는 교내외 유관 교수들을 위촉하였다. 사업 내용으로 는, 미국, 소련, 중국, 및 동유럽이나 기타 지역에 관한 도서 및 자료의 구입 배치, 연구발표 등 각종 학술회의 개최, 연구논문칩 및 문헌자료 등의 펀찬 발행, 자료교환, 학자초벙 및 국내외 연구 기관들과의 학술교류 등을 추진하고 있다.
초대 소장으로는 1989년 4월 1 일 유영옥 교수가 임 명되 었으며, 같은해 9월 7 일에 문교부 인가를 받았다.1990년 5월 25 일 북방정책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였고, 같은 달 논문접 「북방연구」를 발행하였으며, 그후 유영옥 교수가 학교를 그만두고, 2대 소장으로 무역학과 강석중 교수가 부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4) 출판부 설렵본교출판부는,대학교육의 목적이 전문지식의 연구와지성인으로서 의 성실한 인격도야에 있으므로 이를 뒷받첨하는 이상적인 교과내용을 담은 우수한 교재개발과 학술연구물 출판에 관한 교수연구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 3로 1989년에 설렵되었다. 아울러 본 대학교 건학정신에 입각한차원 높은교재 개발에 노력하고 있으며, 각종학술연구물 간행과 학술 맺 교양문고 간행 등의 출판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출판부의 경우 타 대학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활발히 활동함으로써 학문탐구와 홍보 둥에 커다란 역할을 맡아오는 부서로 자리잡아 왔다. 이에 본교에 출판부가 설립됨 A로써 타대학에 못지 않은 기능과 함께 학교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리라고 기대하였다.
초대 출판부장을 맡은 국문학과 원형갑 교수는 “대학은 책이 생명이므로 교수들의 논문 출간 뒷바라지와 함께 전문 서적 및 교양서적 등 많은 책을 출판하고 싶다”라고 밝혔다.이에 따라 우선적으로 착수한 것이 교양 과목 교재를 편찬하는 것으로서 「言語와 生活세게 j r文童과 表現j rINTELLECT and SENSIBILITYj를 다음해인 1990년 2월에 발간하였으며, 1990년 9월 2대 출판부장무로 부임한 이석주 교수는 다음해인 1991 년 2월에 「현대사회와 생활체육」을 발간하였다. 이 4가지 책은 주로 교양국어, 교양영어, 교양체육 과목에 활용되고 있다.5) 대학원 신설, 경영 · 행정 대학원 분리 증원사회가 점차 고학력화 함에 따라 대학원 진학자 수가 늘고 대학원 출신자에 대한 인력 수요 증대로 인하여 대학원 교육 기회의 증대와대학원 중심교육이 점차 활성화되는 것이 요즈음 추세다.
본교에서도 연구활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는 대학원 교육의 내실화를 통해 보다 높은 수준의 학문을 연구하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전문인력양성을 위해 대학원 신설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학부의 발전과 연계하여 본교의 교수진을 비롯한 외부의 우수 교수를 초벙하여 강좌를 개설함A로써 보다 폭넓고 깊은 학문에 접할 기회를 마련하도록 노력하였다.그 결과 1989년 11 월에 문교부로부터 국어국문학과 · 사학과 · 무역학과에 36명을 인가 받아 1990학년도부터 석사과정이 설치되어 지금에 이르고있다.한편 1988년에 신설한 경영 · 행정대학원은 다시 1988년 11 월에 문교부로부터 분리 인가를 받게 되었다. 그 결과 경영대학원과 행정대학원은 1990년도부터 독자적인 행정 체제를 갖고 교육에 임하게 되었으며각각 60명의 정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1989년 11 월에는 문교부로부터 행정대학원 내에 정원 15명의 교육행정학과 설치를 인가받았다.
6) 연구분위기 조성본교는 1972년에 개교한 이래 10여년간을 그런대로 지내왔으나 '80년대 초반부터는 공간의 부족을 심각하게 느껴왔다. 비록 현재 중학교로 사용하고 있는 교사를 마련하긴 했으나, 운동장을 비롯한 모든 것이 불만족스러웠다. 이에 제 5대 홍순태 학장이 취임하면서 한성여중 · 고등학교와 대학건물을 바꾸는 동시에 대형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건물이 우촌관이다.이 우촌관은 지하를 포함한 6층 건물로서 상당한 건축비가 소요되었다. 그러나 특별히 예산이 비축된 것도 아니여서 교내의 오든 예산은 건축비를 위해서 집중 투자 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연구소의 활동이 위축되었고, 당분간 예산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자 해마다 발행하던 논문칩도 중단 상태에 이르렀다.드디어 1987년 8월 우촌관의 준공을 보게 되 었고, 1년 뒤에 각 연구소에 예산을 지원하는 동시에 과학관 준공과 아울러 전자계산소까지 설치하게 되었다. 이로써 본교는 미력하나마 각 연구소가 제 기능을 되찾는 동시에 각 연구소의 논문칩 발간이 속잔을 보게 된 것이다.
II. 제7대 원형갑학장취임
1991 년 4월 1 일 본교로서는 처음A로 본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교수회의에 의한 제 7대 원형갑 학장이 취임하였다. 이보다 앞서 1990년 10월에 신영기 학장이 사임함으로써 당시 교무처장으로 있던 중 학장직무대를 맡아온 바 있다. 새로운 학장 선출은 본교에서 선출한다는 원칙 아래 2월 8일 1990학년도 동계 교수연수회를 이천군 소재 설봉 호텔에서 가졌으며, 이곳에서 제 7대 학장후보선출을 위한 회의가 있었다.이 자리에서 교황 선출 방식을 통해 국어국문학과의 원형갑 교수가 학장 후보로 선출되었으며, 재단 이사회의 인준을 얻어 4월 1 일자로 취임하게 된 것이다.이와 비슷한 시기에 전 한성학원 이사장인 안호상 박사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신임 이사장으로 서정희 박사가 재단 이사회의 동의를 거쳐 취임하였다. 다읍은 학장취임사 전문이다.취임사
교수는 교단에 서야 생명감을 누링니다. 문학을 떠날 때 이미 그는 죽은 목숭이나 같습니다. 저는 그동안 이런 생각A로 빔늦게 일어나 수업준비하고 원고 쓰며 살아왔고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학교 당국은 물론 학생들과 동료 여러분들이 무한하게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번에 저는 교수념들의 선거에 의하여 학장후보호 공천됐고 재단이사회가 이를 만장일치로 받아 들었다고 합니다. 저의 보잘것 없는운학적 일생, 교수적 생활관에 일대 변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한성학원을 창건하신 분의 소명일지도 모릅니다.10년 가까이 저의 다소곳한 삶의 터전이었고 다섯권의 책을 쓰게 해주신 대학이기에 이제 이 대학을 위하여 정력을 바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오히려 신께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닐수없습니다.
7 , 8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아직 지금의 학생회관이 서기 전에 고 하인두교수와저는낙산마루에 오른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하교수말이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그는 저 밑의 진리관 쪽을 내다보면서 독백처럼 “원형! 한성도꽤나크지!"라고중얼거렸고충청도에는 10만평이 넘는 땅도 있다고 뽑냈던 것입니다. 말하자연 한성대학의 장래는 밝기만 하다는 자신감인 듯했습니다. 그후 저는 어떤 교육계 인사로부터 한성학원의 자산 속에는 우촌 선생의 생가까지 들어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선생께서는 그의 모든 것을 학교에 바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촌 선생께서는 교수들과 직원들에게는 매일 점심값A로 곰탕값을 지불하시면서도 그 자신은 학교 근처의 허름한 대포접에 들어가 값싼 된장밥£로 끼니를 때우시며 흐뭇해 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저는 우촌 선생을 직접 원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헌신적인 교육자상(像)에 대해서는 많은 교육계 인사들로부터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예찬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을 누구보다도 아끼시던 안호상 박사께서 지금도 미수(米壽)의 노구를 이끄시고 그분이 안계시는 한성을 돌보시는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분이 가신 후 한성은 학생회관을 비롯해서 우촌관과 과학관을 세웠습니다. 물론 우리학교 안에서 우리학교만을 보는 눈에는 가히 우리도 발전했다고 자부할지 오릅니다. 사실 저는 과학관의 낙성식날 그공로자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작년말부터 전국대학 총학장들의 모임에 나가본 저는 우리 한성의 발전 걸음이 토끼도 아니고 거북이도 아니란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눈뜬 봉사였습니다. 블과 15개의 학과에 3, 000명도 못되는 학생수로서는 이제 키재기 할 만한 학교를 찾아보기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만큼 한국 대학들의 발전속도는 우리 한성을 저아래 산기숨에 떨쳐놓고 달려가고 있습니다.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우리가 떨어진 채 주저앉아서 하늘에 호소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대학은 오직 발전을 요구하는 현실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그리고그것은오직 우리 교수들과교직원들그리고 재단과학생들에 달려있습니다.
다행히 재단은 지난해 불행한 사태를 계기로 재기했고 일신했습니다. 낡고 어지러운 껍데기는 깨끗이 벗겨내고 있습니다. 서정희 이사를 중심 A로 한 새로운 추진력에 있어서 진취적인 의지와 기상은 누가 보아도 완연합니다. 교육환경은 날로 개선되고 있고 기자재 도입은 학과마다 확충되고 있으며, 2학기와 92학년도에 대비하기 위한 대대적인 교수 증원계획도 착실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이러한 채단의 쇄신과 의욕에 대해서 우리는 매우 감사하는 마음으로 환영할 따름입니다.그러나 우리 한성의 현실에 있어서 재단은 아직 구체제와 얽혀있는 잡음을 개운하게 풀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잡음이 재단의 내부 문제에 한정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일부러 아는체 할 까닭이 없습니다. 이 잡음이 바로 우리 학내외 뜻하지 않은 잡음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복직자로서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 없는 것업니다. 만일 이 잡음이대학인으로서의 양심과 도덕성에 저촉되는 문제라면 우리는 서로 힘을 모아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리라고 믿어칩니다. 대학이 교육의 장인 이상 상식을 벗어난 비도덕성은 용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학내의 면학분위기가 안정을 찾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대학보다도 밝고 명랑하다는 말씀도 들려옵니다. 물론 지난해의 위기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해준 우리 학생들에게 보내는 싶은 찬사일 것입니다.물론 우리 학생들 역시 일부 소수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전반적인 대학가 현실이 그러한 것처럼 아직 부모님들을 애태우고 있습니다. 이 사태는향후 1 , 2년 더 갈것입니다. 그러나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까지 3, 4년 동안 이러한 사태를 겪은 구미의 대학가에서는 요새 그것보다 훨씬 더 섬각한 이른바 “정신의 공동화”라는 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정신이 뿌리채 뽑혀버린 가치관의 상실현상을 말하는 것이니까 그야말로 성각한 인간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어디까지나 내부에서 불어오는 시대적 바람이기 때문에 이 바람이 이념적 갈등이 끝나는 우리 대학가에 불어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가치관의 상실현상에는 다른 묘약이 없습니다. 서구의 교육계와 지식사회가 그렇게 대비하고 있는 것처럼 폭넓은 교양의 함양 외에는 그 어떤 방법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한성은 작고 아담한 대학입니다. 이건 저의 사견입니다만 앞A로 5, 6천명 정도의 알차고 이상적인 대학흐로 발전하였으면 합니다. 한성대 출신이라면 예외없이 교양있고 실력있A며 믿을 수 있다는 평판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대학말입니다. 정신의 공동화라는 말이 암시해주는 것처럼 어차피 앞으로의 시대사회는 교양을 우선 중요시 하고 교양있는 인재를 찾게 될 것이기 때문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렇게 이뤄지기 어려운 꿈이 아니란 것도 우리는 서로 잘 알고 있습니다. 맡은 바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우리 모두의 성실성이야말로중요한 것입니다.저를 이끌어 주신 교수님들과 교직원을 그리고 재단의 안호상 박사님과 이희순 이사념 그리고 서정희 박사님께 충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렵니다. 고맙습니다.
본교는 개교 이래 모든 구성원들이 꾸준히 노력한 결과 어느 정도의 질적 • 양적인 향상을 가져왔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성대학을 야끼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아쉬움이 있었다.1991년 초는 재단 이사장을 비롯한 학장이 새로 출범하면서 획기적인 시기를 맞기 시작하였다. 이 말은 한성대학의 미래를 약속하는 것과다름이 아니었A며 실제로눈앞의 현실로서서히 그리고빠른속도로 다가왔다.특히 서정희 재단 이사장은 원형갑 학;;<.J-을 비롯하여, 교수와 직원들을 격려하면서 모든 업무에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로 발휘시켜 나감으로써 한성대학의 면모를 새롭게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우선 이사장과 학장은 매일 아침 남보다 이른 시간에 출근하고 밤 늦게까지온갖 정열을 쏟았다. 방학기간에도 휴가란 말은 업밖에 낼 엄두도 못냈고, 토요일이고 일요일이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필요한 장소에서 실무담당자와 얼굴을 맞대고 머리를 짜냈다.
이를 위해 공석중인 교무처장에 이종수 교수를 임명하는 동시에, 모든 업무를 단일화하고 집행력 있는 행정을 마련하기 위하여 기획실 활동을 강화해 나가기 시작하였다.이제 1991년 초부터 이루어진 학교의 변화 • 발전 모습을 항목별로 들춰보도록하자.이러한 구상은 처음부터 채산 이사장인 서정희 박사가 이미 세워놓고 있었다. 서정희 이사장은 3월부터 학교 운영에 적극적 i로 헌신적인 노력과 아울러 그해 9월에 자신의 계획을 「한성대 소식」 처1J1 0호에서 다음과같이 밝혔다. 다음은그전문이다.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요즈음같이 그 변화의 속도와 양상이 급격하고 획기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시대에 또한역사에 순응해서 落f五者가 안되나 하는 것일 것입니다.
먼 후일에나 이루어질까 말까 했던 독일의 재통일은 이미 지난일이 되었고 남북한의 유엔가입도 기정사실화된 반면에 여태까지 그래왔던 소련의 권력이동(쿠테타)은 어이없이 삼일만에 실패하였습니다. 참으로 우리들 같은 시민들은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묶음으로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지요.악몽같았던 지난해 10월 以後의 漢城大學의 수난기에 財團理事長의 職務를 대행해 오면서 자나깨나 늘 제머리에 맴돌고 있는 것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제가 漢城大學과 인연을 맺은 것은 美國유후l을 마치고 돌아-온 1973년 봄이었습니다. 그때 지금은 故A 이 되신 友村선생께서 막 이 大學을 設立하시고 大學초창기의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저에게 자세히 말씀해 주시고 앞으로도 대학은 네가 잘 도와 주어야 겠다고 몇번이고 다짐하셨습니다.그러나 지난 10여년전부터 제가 漢城學院財團理事칙을 맡아 오긴 하였습니다만, 홀륭하신 역대 학장님과 교수님들이 학교를 잘 이끌어 주셔 왔기 때문에 저는 1년에 두세번 재단이사회에 참여하는 일이 고작이었고 最近몇년동안 新任敎授임용후보자의 面接에 參與하였을 뿐입니다.
지난해 10月初漢城大學의 不正入學사건이 터져서 갑자기 財團의收휩代表로 每日같이 漢城大學으로 여러 변호사 사무실로 뛰어다닐 때에는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일들도 많이 겪었었습니다만 그나마 今年初에 事態收휩이 어느 정도 된 것은 오직 하나님과 漢城大學의 學生, 敎職員들을 비롯한 각계의 따뜻한 理解와 協助의 德分이 아닌가 생각되고 아직은 이 대학이 그 命運을 다한 것이 아니고 앞으로 더 크게 成長해야 할 것이라는 김命을 느끼게까지 되었습니다.學生여러분, 그리고 敎職員여러분, 그러면 우리 다같이 漢城大學의 發展을 위하여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지난 1학기 동안 대학에서 벌렸던 여러가지 事業들 속에 제 나름대로 생각해온 뜻이 숨어있습니다.
첫번째로제가느낀 것은대학의 環境이 좀더 공부하고鼎究하는零圍氣가 되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아무리 음식이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그 음식을 담을 그릇이나 밥상이 지저분해서야 음식 맛볼 기분이 나지 않겠지요. 그래서 大學區內여러곳의 환경개선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두번째로는 교육의 주요수단인 강의 內容을 좀더 알차게 하기 위해 서는강사수를대폭줄이고대신專任敎授의 수가大福增員이 되어야겠다고 느낀 것입니다. 아무리 옆집 아주머니가 열심히 도와준다고 하더라도 자기 어머니의 精誠에 미치겠습니까. 그래서 약 20名의 敎授增員작업을 했습니다만 그중 17名만 충원하고 나머지는 내년에 다시 追加公採키로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각 분야 교수 충원작업은 계속하겠습니다.세번째로學生들도요구해오고있습니다만장기발전계획이 있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각 부서는 부서대로 또 大學全體로서는 大學全般에대한 中· 長期發展계획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年初부터 各學科, 各部暑別發展計劉作成을 부탁드려왔고 大學全體로는 몇개의 鼎究委貝會를 構成, 가능하면 大學의 모든 교수님들이 參與하여 共同協力A로 發展計劉을 ~究토록 부탁드렸습니다. 年末에 이들 빠究가 完T 되연 이를 冊子로 하여 여러분들이 모두 보실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이들을 基鍵로하여 大學發展計훤j을 세우고 내년에도, 또 그 이후에도 이러한 연구를 계속하여 大學發展計짧j을 계속 修正補完해 나갈 作定입니다.
그러나 學生여러분, 그리고 敎職貝여러분, 앞으로 정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지금까지 제나름대로의 大學發展에 대한 所信과 그 실행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만 이것만 가지면 되겠습니까. 저의 짧은 생각에는우선 앞서 말씀드렸던外形的인 것 한두가지입니다.두번째는 첫번째와 같은 맥락입니다만 相互信賴의 氣風입니다. 敎職員들은 學生플을 귀찮은 -過性손님이 아니고 永遠히 賣任져야 할 자기 자식과같이 생각하고보살펴야한다는마음으로, 학생들은敎職員들을 자기들 등록금이나 축내고 있는 寄生蟲이 아니고 자기들을 위하여 또 大學發展을 위하여 奉tl:하고 있는 자랑스런 漢城의 어른들로 예우할 때, 앞서 말씀드린 모든 外形的發展도 이루어질 수 있고 이렇게 되어야만 우리 대학의 j훌.ïE한 發展도 이룩휠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 大學에 時急히 요구되는 것이 增員, 增科를 통한 蘇合大學A로의 昇格이라는 것을 제 자신이 切感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에 앞서 우리들의 뼈를 짜는 自性과 悔改의 努力들이 先行되어야 하며 이러한 努力들이 이루어지면 우리들의 꿈도 이루어지리라 確信합니다. 마지막£로 한 말씀만 追加한다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것입니다.한성의 學生, 그려고 敎職員여러분, 우리들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合心하여 기도합시다. 그리고 앞£로 과연 어떻게 할까플 다함께 진지하게생각해봅시다.1. 대학의 생명은 교수 확충에서부터
1) 대폭적인교수충원대학의 발전은 양적인 발천도 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질적인 수준의 향상이 토대가 되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대학인의 인적 구성에서 우수한 교수의 확보와 우수한 학생의 유치는 교육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첩 경 이 되는 것이다.그러고 대학의 자체적 노력으로 가능한 것은 우수한 교수를 최대한 으로 확보하여 교수 대 학생 비율을 가능한 한 낮추는 일이다.1991 년 9월부터 1992년 8웰 말 현재까지 불과 1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기깐에 확보한 교수는 23명으로서, 종전 총 교수 숫자의· 절반가량이나되었다.특히 전임교수 초벙은 종래의 전통적인 방법을 과감히 개선하여 공개채용제도를 정착시키고 이에 따라 국내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우수교수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1 년 사이에 초벙한 교수는 23명무로서 특수 예술 분야를 제외한 전원이 국내외 우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먼저 공개채용을 위한 교수 임용후보자 선정 절차를 살펴보고, 1년동안초빙한교수들의 약력을본다.(1) 전임교수충원@ 전임교수 임용후보자 선정 절차
교수충원계획서제출요구-각학과
교수초빙공고
@ 신규 교원 임용 심사절차 빛 평가기준 마련
1 차 심사 : 학위 마취득자 제외2차 심사 : 학과교수천원이 각자:t 5배 추천3차 심사 : 인사위원회에서 :t 3배 추천연접대상자 연접 일정 통보-등기속달 및 전화 통지연접실시(학과별 시차별)인사위원회-최종임용동의@ 1991. 8.15-1992.8.15까지 신규교수 확보현황(I년간)
학 과 성 명 최종출신교 학위 부임일자
미술 문범 서울대 석사
2) 객원교수초빙
현대의 사회는 지적인 지식과 아울러 사회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역군을 걸러내기를 각 대학에 바라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산학협동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지적해 주듯이 대학도 이제는 지식교육으로 서만 만족하고 주저앉을 수 없는 시대라는 말이다. 특히 특히 전문대학원의 경우는 이를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본교에서는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강의실에서의 이론은 물론 시-회각계 각층에서 뿌리박은 전문가를 객원교수로 초벙하여 교육의 내실에 박차를 가하고있다.이들 객원들은 각 대학원에 소속되어 있요면서 현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특강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이들 객원교수뿐만 아니라 본교에서는 사회 전반에 걸친 전문가를 초벙해 특강을 실시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이론 연구에 뒷받침하도록 보완적인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다음에 객원교수 규정과, 이 규정에 의하여 초벙한 객원교수의 간단한 약력을 비롯하여 이제까지 실시했던 특강 내역을 살펴보기로 한다.@객원교수규정제 1조(목적) 이 규정은 한성대학(이하 “본대학”이라 한다)의 객원교수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 2조(임용대상자) 이 규정에 의한 임용대상자는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한자로한다.1. 교육기관, 공공기관 또는 기업체에서 일정한 학운영역에 대한 전문적인실무경험이나‘연구업적을쌓은자로서 일정 기간 본대학에서 연구활동에 종사할자.2. 외국의 공인된 대학교 또는 연구기관에 소속된 학자로서 한국에 체채하는 동안 본대학에서 교육 또는 연구에 종사할 자.제 3조(임용조건)1. 임용기간은 한학기 또는 1 년단위로 한다.2. 임용기간 만료후 객원교수의 신분은 자동적흐로 상실되며 학장의 제청으로 이사장이 재임용할 수 있다.3. 별도의 연구실을 제공하지 아니한다.4. 학사운영에 참여하지 아니한다.5. 학장은 필요에 따라 교수회의에 참석시킬 수 있다.
제 4조(임용절차)0) 객원교수는 교무처장 또는 대학원장이 추천하여 인사위원회의 동의를 얻어 학장의 제청흐로 이사장이 임명한다.@ 객원교수 후보자의 구비서류는 본대학 교원신규임용에 준한다.제 5조(강의) 학장은 학부 또는 대학원에서 2개과목 6시간 이내에서 객원교수에게 강의를 위촉할 수 있다.제 6조(기타) 이 규정에서 규정되지 아니한 사항은 학장이 따로 정할 수 있다.부 칙(시행일) 이 규정은 1991. 9. 1.부터 시행한다.@객원교수약력
소속 성명학력·주요경력현직
@ 특강실시현황 (1988. 4. -1992.12. 현재)
91. 5. 9 국제정세, 역사적상황변화의 의미 /이규호 /전문교부장관91. 8.22 바람직한매니저의 자세와 역할/황교선/한일약품부회장91.10.29 학습권과 (교육)행정 / 정태수/전문교부차관91.11.14 한국의 안보와 통일문제 /홍성철 /평 화통일자문회수석 부회장91. 12. 6 ’ 92년도 경제 전망과 기업환경 / 강경식 /전 재무부장관3.10 국내자본시장 동향과 기업경영상의 대웅/최명규/경영학과 교수3.10 통일독일의 복지정책 /황진수/행정학과 교수
3.17 인생과 철학/김태길 /전 서울대 교수3.31 1992년 국제 마아켓팅 전략/최명규/경영과 교수3.31 중년기의 건강과 관리 /김계욱/교양과 교수4. 7 1992년 한국경제의 과제와 전망/강경식 /객원교수 전 재무부장관4.14 관리자의 역할과 책임 /이싱국/중앙공무원 교육원 교수4.21 신국제경제질서 형성과 우리의 대응/이순우/대한상사중재원 사무총장4.28 한국 고속전철의 전망과 과제 /주덕 영 /상공부국장5.12 정보와 주식시정 그리고 외환시장/최옥근/무역과 교수5.12 소음공해의 실태분석과 그 대책 /정성택 /행정과 교수5.19 금융환경 변화와 기업경영상의 대응/오경희 /한국은행이사5.26 봉사와 소유의 상관관계 /도재영 /기아그룹 사장5.26 정책갈동과 가치결정의 정치 /이종수/행정학과 교수6. 2 기업경영을 위한 협리적인 절세 방안/황교선/한일약품 부회장6. 9 한국정치의 현실과 과제 /유상현/정치담당비서관6.16 ' 지방행정의 당면과제 /임경 호 /내무부 지방행정연수원장8.25 신국제질서의 형성과 한국경제의 진로/이현재/정신문화연구원장, 전국무총리
사회 전반에 걸친 전문가를 객원교수로 초빙하여 매주 특강을 실시하므로써 산학협동교육에 실효를 거두고 있다.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본교의 객원교수제도는 상당히 효과적무로 운영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객원교수의 특강은 1회성무로 끝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강의내용을 요약해서 「한성대소식」에 게재하여 널리 알리고있다.
3) 명예교수제도도입한편 객원교수 뿐만 아니라 명예교수와 대우전임교수 제도를 제정하여 지속적 학문 연구의 향성을 도모하고 있다. 다음은 명예교수와 대우 전임교원 규정 전문이다.명예교수규정제 1조(목적 ) 이 규정은 교육법 제 75조 제 2항의 규정 및 교육부령 제594호의 규정에 의하여 한성대학(이하 “본대학”이라 한다)의 명예교수 추대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제 2조(자격 ) 명예교수로 추대될 수 있는 자는 한성대학 전임교원무로 20년 이상 근무하고 퇴직한 교수로서, 재직중 공적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다른교원의 모범이 되는자이어야한다.제 3조(추대절차) 명예교수의 추대는 다음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
1. 소속 학과장이 학장에게 명예교수 후보자를 추천한다.2. 학장은 교원인사위원회 동의를 얻어 이를 제청하고 이사장이 명예교수를추대한다.3. 학장은 명예교수 추대를 교육부에 보고한다.제 4조(구비서류) 소속 학과장이 명예교수 후보자를 추천할 때에는 다음과같은서류를구비하여야한다.1. 피추천인의 이력서2. 소속학과장의 추천의견서3. 피추천인의 공적개요서4. 기타필요한서류제 5조(처우)(1) 명예교수에게는 강의 담당시 소정의 강사료를 지급하며 기타 급여는 지급하지 아니한다.@ 명예교수는 본대학 제의식에서 본대학의 교수와 동등한 예우
를 받는다.제 6조(기타) 이 규정에서 규정되지 아니한 사항은 학장이 따로 정할수있다.부칙(시행일) 이규정은 1991. 9. 1.부터 시행한다.4) 대우전임교수제도 도입대우전임교원임용규정제 1조(목적) 이 규정은 한성대학(이하 “본대학”이라 한다) 대우전임교원의 임용에 관한 사항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한다.제 2조(임용대상자) 대우전임교원으로 임용될 수 있는 자의 자격은 다음 각호의 1 에 해망하여야 한다.1. 해당분야의 박사학위 소지자로서 본대학에서 일정기간 연구또는 강의를 담당할 수 있는 자.
2. 교육법 제 79조 3항의 대학교원 자격기준에 해당하는 자.제 3조(임용절차)(!) 대우전임교원의 임용은 본대학 교원인사위원회의 동의를 얻어 학장의 제청흐로 이사장이 임명한다.@ 신규대우전임교원 임용후보자의 구비서류는 본대학 교원신규임용에준한다.제 5조(강의 시간수) 대우전임교원의 강의 시간은 주당 9시간을 초과할수없다.제 6조(임무)(!) 대우전임교원은 본대학 교원으로서의 품위를 유지하고 본대학에서 위임한 교육 및 학생지도에 충실히 임하여야 한다.@ 대우전임교원은 교수회 또는 기타 학사운영에는 참여할 수 없다.제 7조(기타) 이 규정에서 규정되지 아니한 사항은 학장이 따로 정할 수있다.
부칙c!)(시행일) 이규정은 1991. 9.1부터 시행한다.@(내규폐지) 기존의 “대우교수의 처우에 관한 내규”는 이 규정 시행과동시에 이를폐지한다.2. 대학발전 연구위원회 발족대학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과거의 자료를 수집 · 정리 반성하는 동시에 앞날에 대한 철저한 계획이 수립되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세워진 계획에 의거 수정 · 보완을 거치면서 끊임없는 실천에 모든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는 어느 한 분야에서만 노력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학의 구성원 모두가 자기의 전문분야를 충분히 활용하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하겠다.
본교는 1991학년도에 접 어들면서 여 러 분야에 걸친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 중에는 경제적인 목적을 지닌 것도 있고, 교육의 내실을 기하기 위한, 또 교내 공간 시설을 충분히 활용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한 위원회도 있다. 이제 각각의 위원회 설럽의 배경과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한다.1) 한성대학 발전기금 조성 · 운영위원회사립대학의 재정난 문제는 바단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오래전부터 각 신문지상을 통해 기회있을 때마다 반복되는 얘기이며, 각 대학의 재단 관계자나 총 · 학장회의에서도 번번히 나오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사학의 실정인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특히 소규모 짧은 역사의 대학에서는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대학설립자는 이미 대혁을 세울 초창기에 개인의 전 재산을 투여했기때문에 더 이상의 투자를 바란다는 것은 현실적표로 불가능한 얘기다. 그렇다고 맥 놓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한 몇몇 대학에서는 동문을 비롯한 독지가들에게 눈물어린 호소로써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여, 개중에는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한 사례도 있다. 우리 한성대학도 이 첨에 착안하여 본 위원회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물론 처음부터 큰 기대를 갖고 출발하지는 않았다. 다만 모든 한성대학 구성원과, 한성대학과 연관이 있는 독지가를 참여시킴으로써 이뜻을 전달하고 함께 노력하는데 더 큰 의의를 둔 것이다.위원회의 구성은 기획실에서 시작하였다. 1991 년 2월 27일 첫번째 준비 모임에서는 우선 이 위원회의 설립 취지가 나왔고 위원이 결정되었다. 위원장에는 학장이, 위원에는 교무처장, 기획실장, 대학원장이 당연직으로 참여하고, 그 밖에 이석주 • 이종수 • 정후수 교수(간사)가위원A로결정되었다.그 후 몇 차례에 걸친 회의 결과 4월 24일 최종안이 마련되었다. 여기서 결정된 사항을 보면 우선 본 위원회의 설럽 취지를 알리는 동시에 기금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실질적 안내문과 기탁약정서를 학부모를 비롯한 독지가에게 전달하기로 하였다. 다음운 본 위원회의 설립취지와사엽 내용들이다.
(1) 설렵취지우리 한성대학은 1972년에 설럽된 이래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교수 충원, 교사 이천 및 신축, 대학원 설치 등 외형적인 성장과 함께 내적인 충실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습니다. 이는 교직원, 학생, 학부모, 동문을 비롯하여 우리 한성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의 열정어린 보살펌의 결과입니다.그러나 천 셰계가 놀라고 찬탄해 마지않는 기적적인 고도경제 성장을 이룩해 온 이면에 우리나라의 문교정책 특히 사렵대학에의 국고지원은 아직도 대학 재정의 1% 수준에 머물고 있어서 이웃나라 일본의 22.4%와는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미국, 일본 등에서는 국가뿐아니라 사회 각계에서의 지원액도 상당 수준 (30-40%) 이묘로 우리나라와 같이 교육비의 대부분을 등록금에만 의존하는 형편에서는 대학이 펄요로 하는 모든경비를조달하기 매우어려운 일입니다.
이는 곧 대학에 대한 외부의 적극적인 투자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한편, 지식의 장이자 연구의 장이기도 한 오늘의 대학은 날로 그 사명과 영역이 확대되고 있을뿐 아니라 스스로의 변화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고도의 과학기술시대에 대응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이며 또한 급격히 변모하고 있는 인문사회 세계에 대해서도 그 수용능력과 발전능력을 창조척£로 배양하지 않 o 면 아니되는 것입니다. 사실 대학은 이러한 시대사회를 조감하는 장이며 앞장서는 실험적 성격이기도 합니다.그리고 대학이 이러한 시대사회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적 지원이 요청됩니다.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 한성대학은 개척정신흐로 비교적 견실하게 발전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금년에 들면서 우리대학은 설립자인 고 김의형 박사의 창학정신을 일깨우는 기풍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박사께서 마련해 놓고 가신 학원의 재산은 생산적인 재정비 운동이 진행되고 있으며 우리의 당면목표인 아담한 종합대학에의 꿈도 계획이 수럽되는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한성대학의 비약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그 밑받침 이 되는 교육시설확충과 연구 환경조성 이 요구되는 바, 여러 뜻있는 분들과 힘을 합하여 우리들의 콩동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한성대학을사랑하는여러분여러분의 자녀와 후진에 대한 성실한 교육은 대학의 사명이며 책임이지만, 그 책무를 다하기 위한 내실있는 교육여건을 만드는 일은 우리 모두 함께 참여해야 할 공동 과제입니다. 한성대학을 발전시키는 것은 결국 우리 한성대학과 관련된 한사람 한사람의 관섬과 사랑에서 시작되는것입니다.이에 우리 한성대학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분을과 우리대학을 아끼는 인사들의 격려와 관심 아래 장기적인 학교발전을 추진하기 위하여 “한성대학 발전기금 조성 · 운영운영회”를 설립하오니 여러분들의 적극적 인 동참을 부탁드렵니다.
(2) 사업 빛 안내@사업내용한성대학 발전기금조성 · 운영위원회 사업내용은 다음과 갇습니다.• 장학금확충• 연구출판지원• 도서관장서 확충• 학교시설보완• 기타@안내말씀• 본 위원회의 후원을 위한 귀하의 기탁금에 제한이 있을 수 없£나 편의상 1만원 단위로 기탁하여 주시띤 감사하겠습니다.
• 기금 조성에 뜻이 있으신 분은 먼저 본 위원회에서 보내 드린 ‘한성대학 발전기금 기탁 약정서’를 제출하시고 적절한 기간 내에 일시 또는 분할하여 기탁하실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기탁약정은 우편 또는 F싫{: ( 745-8943) 를 통하거나 전화로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기탁금은 다음 3개 금융기관의 전국 어느 곳에서나 무통창 업금표를 이용하여 송금하실 수 있습니다.국민은행 : 031-01-0353-991(수신 : 위원장)농업협동조합중앙회 : 029-01-114670(수신 : 위원장)서 울신탁은행 : 18901-2668401(수신 : 위원장)@ 기탁금을 본대학에 직정 증여하거나, 현금 및 유가증권 이외의 기탁은 본 위원회의 간시-를 통해 절차를 밟으시고 영수증을 수령해 주시기 바랍니다.
• 1, 000만원 이상의 기탁자로서 기금의 명칭을 부여하기 원하시는 분은 본 위원회의 사무실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기탁금의 용도를 지정하기 원하시는 분은 약정서 해당란에 O표 해주시기 바랍니다.이 위워회의 실제적 업무가 시작된 지 1 년 동안에는 별 성과가 없었다. 학부모 몇 분이 약간 액을 기탁해 온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자 교내에 재직하고 있는 교수와 직원 들 사이에서 뜻있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본교에 재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솔선해야 할 것이 아니냐고 자성이 나온 것이다. 이에 따라 교수협의회와 직원협의회에서 곧 실천에 옮겨졌으며 현재까지 약정된 액수도 천년도와 비교될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는더욱나아질 것이라는기대를해본다.2) 대학발전 과제연구위원회
1991년도 신학기에 접어들면서 기획실의 기능이 활성화되었다. 특히 대학의 제반 행정을 보다 합리적이고 전문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대학 말천에 관한 주요 과제를 선정하여 전임교수로 하여금 연구하도록 위촉하는 동시에 연구비를 지원해 주고, 여기서 도출된 연구결과를 토대로 대학행정에 참고하여 수행해 나갈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결정된 과제연구분야와 연구원들은 다음괴 같다.(1) 한성대학 건학이념 및 교육목표 정 럽에 관한 연구@연구목표• 한성대학의 교육 이녕 확립• 한성대학의 교육목적 정립• 한성대학의 교육목표정렵@연구책임자:윤경로교수(2) 대학시설 공간 사용의 효율성 극대화에 관한 연구@연구목표
• 연구실 • 강의실 · 실습실 공간 이용의 효율성 극대화• 대학의 한계 시설면적에 적합한 공간 채배치 연구@ 연구 책임자 : 이석주교수(3) 대학 환경미화 • 개선에 관한 연구@연구목표• 캠퍼스 조경미화에 관한 연구• 캠퍼스 환경개선에 관한 연구• 대학고유이미지부각• 대학휴식공간조성@ 연구 책임자 : 정종해 교수(4) 대학 행정 빛 부속기관 발전에 관한 연구@연구목표• 각부서별 사무직원의 소요판단• 행정조직 발전 연구• 행정 천산화연구
• 각부속기관및 연구소발전 모델 모색@ 연구 책임자 : 강석중교수(5) 대학 이미지 형상화에 관한 연구@연구범위• 대학고유로고제정• 대학교표 개정에 관한 연구• 교색 개정에 관한연구@연구책임자:조 열교수(6) 학부 · 대학원 교과과정 개정에 관한 연구@연구목표• 신커리률램이론 적용.사회적 수요에 부응하는 교과과정 편성• 각분야의 학문발전을교과과정에 반영• 전임교수위주의 교과과정 편성 지양@ 통일과목 및 유사과목의 전공간 학과간 통폐합
• 강의시간의 합리적 편성@연구책임자:조정환교수위와 같은 연구에 의하여 공간배치에 관한 연구가 가장 먼저 완료되어 1991년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교수연구실을 비롯한 교내 모든 공간의 재배치가 이루어졌다.그 후 1992년 2월 14일 동계 교수연수회에서는 각 연구 단위별로 중간 보고를 가쳤으며 2개월 뒤에는 연구결과를 묶어 「한성대학교 발천과제 연구 종합 보고서」 제 1칩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총282페이지 4.6배판으로 엮어진 이 보고서는 각 연구단위별로 연구목척을 비롯하여 연구내용이 일목 요연하게 드러나 있다.한편 기획실에서는 이 1차 연구결과를 토대로 미진한 부분에 대해 서는 계속적인 연구를, 그리고 새로 필요한 부문에 대해서는 새로운 과제를 선정하여 2차 연구과제를 설정하였A며 현재 진행중에 있다.2차 연구과제와 책임연구자는 다음과 같다.
3) 제 2차 대학발전 과제 연구(1) 대학업무개선에 관한 연구(II). 강석중 (대학행정편람 발간)(2) 대학장기발전 계획에 관한 연구. 박헌영 (대학백서 발간)-대학자체평가 빛 대학특성화 방안을 중심으로-(3) 한성대학 20년사 연구. 연정렬(한성대학 20년사 발간)(4) 대학이미지 형상화에 관한 연구(II). 조열(5) 대학시설공간의 효율적 사용에 관한 연구( II ). 검대홍(6) 대학 • 대학원 교과과정 발전에 관한 연구( II ). 조점환 (총괄책임자)@대학교과과정 분야김경배@ 대학원 교과과정 분야 황진수@교양과정 분야검종섭(7) 특별위원회@우촌깅의형 박사추모집 간행위원회
고 문:안호상위원장:윤경로위 원 : 김창룡, 강월도, 김진결, 정후수 교수@ 한성대학 개교20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회위원장: 이석주위 원 : 정진식, 권 오, 조태병 교수@대학홍보자문위원회위원장:김원중위 원 : 이상원, 이상한, 문 범, 조덕현, 김응화, 정병용교수3.부속기관활성화1) 중앙도서관본교 도서관은 1973년에 한성여자대학 도서관A로 개관하였다. 1978 년 3월에 한성대학a로 변경됨에 따라 한성대학 중앙도서관으로 개칭하였고, 1981 년 10월 종합관 준공과 함께 이전하였으며, 1984년 8월 현 건물의 신축 이전과 더불어 지속적인 성장을 하였다. 특히 1988년 3월부터는 완전개가식 체제로 운영해 왔다.
도서관의 생명은 장서의 확보와 정보제공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도서관 시설도 이에 따라 신축성 있게 운영되어야 할것이다.여기서는 1988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약 4년간의 변천 모습을 간략히 살펴보기로한다.(1) 장서 확보 빛 법정 기준률1988. 4. (6 1.403권 : 72%)1989. 4. (6 1.817권 : 75%)1990. 4. (68.289권 : 83%)1991. 4. (78.057권 : 95%)1992. 4. (88 .035권 : 100.6%)
1992. 8. (89.866권 %)(2) 연속 간행물1988. 4. (170종, 100%)1989. 4. (180종, 109%)1990. 4. (218종, 132%)1991. 4. (1 92종, 113%)1992. 4. (229종, 138%)(3) 열람석1988.3.1989. 2. (637석 )1990. 6. (643석 )1991. 8. (703석 )1992. 6. (701 석 )(4) 기타1988.3. 완전 개가식 체제로 운영 (3층 245평)
연속 간행물 자료 독렵 (2층 68평)복사실 운영 (2' 3층)과제도서실 설치1990.2. 사무용 워드프로세스와 옥록 카드 전용복사기 구입1991. 8. 사무용 P.C 2대 프린트기 l대 구입1992. 2. 도서관 환경 개선금연휴게실 설치흡연 휴게실 설치일반 열람실 대형 온풍기 교체신문열람대를 계단 벽면으로 위치 변경1992.8. 최신 에어콘 교체 설치(5) 전산망 구축도서관이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좋은 시설을 지녔다는 것은 학문
본교도서관은 1988 년 3월부터 완전개가식 체제로운영되어왔다.
연구를 위한 기본적인 여건은 될 수 있다. 문제는 최종적흐로 도서관에 소장된 많은 자료를 어떻게 관리 · 운영하여 이용자로 하여금 짧은 시간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느냐에 춧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이에 본 도서관에서는 정보의 효율적 제공을 위해서는 모든 정보를 전산망으로 엮어야 한다는 점을 감지하고 차근차근 실무작업에 착수하였다. 현재 수서작업부터 ’ 95년도까지 대출 · 반납에 이르기까지 연차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전 직원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다음에 전산화계획을추진하기 위한실무책임자인 김명수 사서과장의 기고를 전문 인용해 본다.도서관전산화를앞두고
대학이 고도의 지적문화를 보존계승하고 창달 발전시키며, 국가가 요구하는 지도적 인재를 양성하고 국가와 사회가 당면한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참여하는 사명이 있다고 할때, 도서관은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기능중 연구의 기능(학문탐구)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즉, 무수히 쏟아쳐 나오는 자료, 정보를 평가하여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하고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전하면서 학문발전에 기수가되는곳이다.그러으로대학도서관의 모든자료와시설은연구하는학생과교수들에게 이용되기 위해 존채함은물론모든자료는내일의 문화와문명의 창조를 위하여 개방되어야 한다.
나날이 모든 분야에서 사무자동화 빛 정보처리 컴퓨터가 이용되어 도서관내에 수서 목록 검색, 대출관리, 연속깐행물 관리 등 전문적인 시스템도 컴퓨터에 의해 개발되어 가는 실정이다.최근 10여년간 각연구소 대학도서관의 전산화는 거대한 물결처럼 밀려와 현재 여러 대학도서관의 전산화를 지켜보며 아직까지는 총체적인 자료활용 빛 이용자 써비스의 많은 문제 해결이 필요함을 인식하면서 머 지 않아 닥쳐 올 도서 관들의 SOFT-WARE 공동개 발, 도서관간의 협력체계 NETWORK 형성을 대비하여 가장 기초가 되는 데이타베이스구축부터 시행하고 있는 본 대학 도서관은 단계적 전산화방안을 마련하여 추진중에 있다.그리하여 ’91 년이후 PC 3대와 프린터 전산옥록카드 등을 완비하여 그동안 꾸준히 DATABASE 구축작엽을 진행하여 왔으며 사서들의기술과경험을축적토록하여 토탈시스템실시에 대비하고 있다. 토탈시스템은 수서목록 검색 대출관리 연속간행물 관리와 그에 따튼 세부사항을 각 시스탬이 개별적이고 독럽된 단일 시스템£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체계적인 정보교환과 동일한 데이타는 중복입력시키지 않우며 또한 한 화일내에서 변경사항이 있을 때에는 관련된 다른 화일에서도 자동변경토록되어 있는 것이다.
학교 규모나 역사로 보아서 타대학에 비해 빠른 감이 있지만 대학도 서관 장서규모 10만권 이하일 때 전산화시키기에 가장 적합하고 경제적이라는 것 이 학계의 중론이다. 자료 입력은신중한검토를통한 입력원칙에 입각하여 2.3년전부터 시행 한다고한다.과거에는주요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작업을 처리하던 컴퓨터가 지능을 필요로 하는 작업에 응용이 되므로 본 도서관도 국립중앙도서관 프로그램 (KOLAS) 에의하여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완전자동화계획은 시간을 늦추더라도 차근차근 예산의 허실됨이 없이 추진함을 원칙£로 하되 단계별 추진방안은 1 단계 ’92. 4월이후 기중. 구입되는 모든 도서의 수서, 편목, 목록부출, 등록원부 처리와 동시 자료의 입력이 수반되고 있으며, 2단계로는곧이어 북카드, 북포켓, 라벨등의 장비작업이 자동화되고 3단계로 기존 장서의 업력과 동시에 자료의 검색이 수반되며 연속간행물의 처리와 전자감응장치설치가 이루어지면 체계적인 정보의 교환이 가능한토탈시스템의 개념이 실현되는것이다.그러나소프트웨어의 구성과 흐름을숙달함에는많은시간과노력이 뒤따르게 된다.
이번(’92. 4. 7) 국렴중앙도서관에서 도서관정보전산망 구축계획에 따른 사서교육 및 토탈프로그램보급은 본 도서관 전산화계획의 큰 도움이 되고있다.도서관 전산화는 각 대학 및 타도서관, 국가전산망에 근접할 수 있는 디덤돌을 마련하는 것으로 본 대학의 빈약한 자료보완을 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대학의 중요한 역할인 연구의 기능에 보다 신속 정확한 자료 제공에 크케 기여하게 되리라 믿는다.일부 대학에 교양과목으로 개설된 “도서관 이용볍” 강의는 매우 성공적 이며 모든 학생들에게 수강시켜 야 한다는 제안도 도서관 이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앞£로 교수연구실에서부터 도서관 내에 비치될 단말기를 통하여 이용자 개개 인이 직접 필요로 하는 REFERENCE-SERVICE 신착자료안내, 자료검색 등을 손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학교빛 도서관의 노력은 물론이지만 학생 여러분의 적극적인 이용과 협조가 따라야만 그 시기를 앞당길 것이며 연구하는 대학 발전하는 대학분위기 조성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대학에서 어느 한 계층이 소외되거나 경시된다는 것은 그 대학의 후진성에 기언한 것이며 전문화의 장애요인이라는 인식하에 한성인 모두가 독자적인 지위나 역할 등 수준높은 창조의 힘을 기울였으면 하는 바램이다.도서관전산화계획
2)전자계산소
본 대학 전자계산소(이하 “본 천산소”라 한다)는 본 대학 교육이념의 수행과 정보화 시대의 도래에 따른 교직원, 학생들의 연구활동지원 및 실습 지원과 행정업우 전산화를 목적으로 1990년 2월 28 일 개소하였다.본 전산소는 미국의 Data General사의 최신형 Computer인 MV-15000 System에 30대의 터미널을 연결하고 각종 Programming 언어와 Software Package를설치히여 학교행정의 전산화와함께 학생들이 원하는 시간에 실습을 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또한 개인용 PC 사용을 원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제 1PC실습실(과학관 302호)과 제 2PC실습실(과학관 301 호)에 각각 35대의 PC와 각각 40MB씩의 Hard Disk를 장착하여 학생들이 원하는 시간에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본 전산소는 개소이래 본교의 행정업무 전산화를 최대의 과제로 선정하여 가능한 빠른 시일내에 타대학보다 나은 완벽한 전산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91 년 1 학기까지 교무, 학사 관련 업무를 완전 전산화하였고 1 차로 학적과에 On-line을 설치하여 학생들이 제증명서를 신청하면 즉시 발급이 되도록 하였다.2차로 교무, 관리, 기획, 경리업무 등을 전산화하여, 교무과에서는 학생신상이나성적, 수강신청등 모든 필요한 내용들을 On-피le..2-로 조회할 수 있게 되었으며, 관리과에서는 비품의 이동 상황이나 신규 배치 등을 즉시 처리할 수 있게 되어 불필요한 비품의 구업을 방지하고 필요한 비품만을 적절히 배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예산의 효율적인 편성과 접행을 위하여 예산의 편성 및 지출에 관련된 일련의 작업들을 전산화하여 예산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직 전산화가 마비된 업무의 종류와 개발인정은 다음과 같다.
1. 인사관리 개 발 빛 On-line. ’92년 2학기2. 장학, 부직관리 ’93년 1 학기
3. 도서관 대출관리 ’93년 2학기 이후끝£로 전산화 추진 계획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교직원, 학생들을대상무로한특강을각각년 2회 정도실시하여 현대인의 펼수 지식인 Computer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도록 노력 하고 있A며 수요에 따라 System을 척절히 중설해 나갈 예정이다.(1) 전산교육전자계산소에서는 급증하는 COMPUTER 수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수시로 COMPUTER 기본과정, DA T ABASE, SPREAD-SHEET, WORD PROCESSOR 등의 특강을학생 및 직원을대상ξ로실시하고 있고 새로운 요구가 발생할 경우 이에 적절히 대응해 나가고 있다. 92 년도 1 학기에는 신입생을 대상으로 컴퓨터 기본 과정과 WORD PROCESSOR 과정의 특강을 실시하였다.
대규모 타대학보다도 먼저 학사 및 행정관리의 완전전산망을 구축할수있다
(2) 부서별 행정 전산화
본 전산소 주도로 각 부서별로 부분적인 ON - LINE화가 추진됨에 따라 본교의 행정 전산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따라서 각 부서의 엽무처리가 신속,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부서별 주요 작업 빛 계획 내용을 업무별로 분류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학적 관리 〈학적과〉9 1 년 11 월부터 재학증명서를 비롯하여 졸엽(예정)증명 서 , 재적증명서, 학적부 빛 성적증명서 등 학적과 증명업무가 천산화되어 현재 전체 졸업 빛 채학생들은 모든 증명서를 즉석에서 ON - LINE으로 발급받을 수 있다. 그 외의 기타 학적 업무는 변동이 발생하는 즉시 처리토록하여 학적엽무의 신속 정확성을 높였다.@ 교과과정 관리 〈교무과〉교무과는 연도별 교과과정 표 관리, 교과과목관리, 담당교수 배정, 분반 관리, 강의실 관리, 시간표 작성 등의 업무를 전산처리한다.이를 토대로 교원 책임시간 빛 초과 강의시간관리 등 많은 교무업무관련자료를 행정부서가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수강신청 관리 〈교무과〉학생들의 수강신청서를 전산소에서 입력하게 되는데 이에 발생되는문제를해결하고자수강신청서를학생 본인이 전산소실습실 터미널을 이용하여 업력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수강신청 자료를 이용하여 대학 교무과에서는 초과 수강신청자, 미등록 수강신청자, 학점미달수강신청자, 수강신청 누락자 등을 전산 관리할 수 있게 된다.
@성적 관리 〈학적과〉매 학기 학척과에서 성적표를 교수에게 배부하면 담당교수는 소정기일내에 성적을 기업하고 서명 날인하여 학적과에 제출한다.전산소에서는 담당교수의 성적표를 입력하고 학생은 성적 확인 및 정정기간중에 전산소터미널에서 본인이 직접 성적을 확인하고 이상이 있을 경우 학적과에 이의신청을 하면 소정절차플 거쳐 수정하게 되며 전산소에서는 영구보관 성적화일을 만들어 보관한다. 이후 성적정정은 불가능하다.@ 장학 관리 기타 〈학생과〉매 학기 재학생 성적화일이 완성되면 학과별 성적순 명부를 학생과로 송부하여 장학위원회를 거쳐 장학생이 결정되면 장학생 및 장학금을 입력하여 등록금 고지서 발송시 이를 반영한다. 또한 학생과 관련된 제반 사항들도 ON-LINE 조회가 가능하다.@등록관리 〈경리과〉
전산소에서 재학생 및 복학 예정자에 대한 등록금 고지서를 출력하여 경 리과에 인계하고 경 리과에서는 학생들에게 등록금 고지서플 발송한다. 전산소는등록예정자화일을은행으로송부하고등록기간이 끝나면 등록자 화일을 은행으로부터 받아 처리하여 이를 경리과에 통보한다. 미등록자 조회, 추가등록, 등록금 고지서 분실로 인한 재발급등은 경리과 창구에서 처리할 수 있다. 또한 등록사항에의 일자별 , 시간별 관리도 가능하다.@ 교직원 인사 관리 〈교무과, 총무과〉교직원의 신상자료 및 임용, 승급, 논문, 보직 등에 관한 데이타 베이스를 구축하여 이를 활용한다. 또한 중고등학교까지 포항하는 교직원 인사 관리 업무를 개발하여 ON-LINE~로 가동할 예정이다.@ 급여 빛 회계 관리 〈경리과〉
급여 업무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연말정산까지 자동 처리되는 급여 전산 SYSTEM을구축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회계업무까지 ON-LINE화 할 예정이다.@ 병사 및 예 비군 관리 〈예비군대대〉전산 입력된 학적자료와 교직원 인사 관리자료에 의거 병무청 보고용 학적보유자 병부를 전산 처리하고 있으며 학적 변동 등의 각종 병사빛 예비군관련자료를추출하여 업무에 활용한다.@예산관리 〈기획과〉예산관리 SYSTEM을도입하여 배정 예산과사용내역을즉석에서 입력조회할수있도록하므로서 예산설정에서부터 집행 · 결산에 이르기까지 효율적인 예산 관리를 하도록 한다.@비품관리 〈관리과〉비품 관리 SYSTEM을 도입하여 비품이 사장되는 것을 막고 바품이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되으로 하으로서 경비 절감에 기여하도록 하기 위해 관리과에서 비품의 이동사항, 신규 배치 등을 입력하고 필요한 내용들은 즉시 출력하여 이용한다.
전자계산소 연혁1990. 1. 6 MV / 1500 System 도입2. 28 전자계산소개소3. 제 1PC 실습실 개설4. 초대 소장 권혁제 교수 취임9. 2대 소장 최병수 교수 취임제 2PC 실습실 개설1991. 5. 제 2PC 실습실 확장1991. 11. 학적 과 On-Line 가동1992.9. 1 제 3대 소장 김대흥 교수 취임3) 민족문화 연구소
본교 부설 민족문화 연구소의 윤경로 소장을 비롯한 임민혁 조교, 그리고 대학원 석사과정의 정동일씨는 우리 선조들이 사용해 왔던 농경 생활 기구를 수집하여 1991 년 6월 11일 전시관을 개설하였다.본대학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오래 전부터 계획, 준비해온 ‘농경생활사전시관’은 우리 농촌의 어제와 오늘의 모습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각종 농기구와 민속자료로 꾸며졌는데 아직 어느 대학 박물관에서도 시도하지 못한 희귀한 전시관이다. 그래서 이 전시관은 전 한성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방문객들도 이구동성으로 칭찬의 소리를 한마디씩 남기고 깐다.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전형적인 농업국가로 발전했기 때문에 생활양식과 관습, 풍속은 울론 민족의 애환이 ‘땅’과 더불어 일구어진 농촌촌략과 그 가운데 형성된 농경문화 속에 담겨 오늘에 이르고 있게 사실이다.그러나 최근의 급속한 산엽화와 도시화의 추진 A로 인하여 우리 모두의 삶의 터전이자 근거지였던 농촌사회는 빡른 속도로 무너져 가고 있다. 바로 이 점을 감안, 농촌사회에서 사라졌거나 잊혀져 가고있는 농민들의 손때 묻은 전통적인 농기구류와 민속자료 등을 수접, 정리하여 꾸민 것이 이 ‘농경생활사 전시관’이다. 여러가지 모양과 각기 다른 용도의 농기구와 전통 생활용품을 통하여 우리는 수천년을 이어온 우리 농촌의 삶의 모습과 선조들의 지혜를 배울 수 있게 된다.
현채 이 전시관의 소장품은 5백여정, 품목으로는 2백여점에 이른다. 이 전시품들은 주로 경기도 일원에서 최근까지 사용되던 농기구들을 수집한 것. 그러나 이들 천시품 중에는 이미 상당수는 우리 농촌에서 찾아보기 어렵거나머지않아사라질 것들로,시대적으로는고대로부터 쓰여 오던 단순 농기구류로부터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제 농기구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바록 한국 농경문화 전체를 조망할만한규모에는아직 미치지 못하고있으나오히려 그동안항토시- 연구분야에서 소외되어 왔던 경기 일원, 특히 한수 이북 농촌사회의
서울을 비롯한 인근 대학으로서는 유일하게 갖추고 있는 농경생활사 전시관.
지역적 특성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들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4. 흥보활동 강화와 대학 이미지 제고대학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점은 그 대학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본교처럼 역사나 규모가 대규모 대학보다 열세에 있는 경우에는 더욱 간절한 현실이다. 그것은 요즘같이 취업난이 피부로 닿는 재학생들에게 절실하게 필요성을 갖게된다. 그러으로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각 대학은 대학 홍보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고, 이와 함께 우리 대학도 각종 홍보물 제작에 열의를 띠기 시작했다.그 결과 나온 제작물이 「한성대 소식」이라는 홍보물이다.1) 1한성대 소식」 발간1991 년 3월 4일자제 1호를낸 이 「한성대 소식 」은 8 페이지 4.6배판으로 제작되었다. 기획실에서 발간한 이 홍보지는 학생들이 자치활동으로 제착하는 「한성대학보」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특별히 학생을 주 대상으로 하지 않고 교직원 빛 교육부를 비롯한 전국 주요 고등학교는 울론 서울시내에 있는중 · 소 · 대 기업에도배포함드로써 동시에 여러가지목적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는 교내에서 움직 이는 각 부서의 활동 모습을 포항하여 교 · 직원의 동정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소식을 접할 수 있으며, 각 고등학교의 우수한 졸업생을 유치할 수 있는 계기도 가질 수 있다.또 많은 기업체에 우리의 활동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졸업생들에게 취업의 관문을 넓힐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해 봄직 하였다.「한성대 소식」은 현재까지 25호가 나왔으며 1호부터 현재까지 기사의 취재에서 기사 작성 , 편칩의 모든 과정은 국문학과 정후수 교수가 직접 담당하고 있다. 아래에 첫호푸터 25호까지 주요 내용을 살펴본다.호수 발간일 주요내용 면수
1991. 3. 4 한성대학 발전기금 조성 및 운영 위원회 설립 82호 3. 18 도서구입 · 기증, 홍보용 게시판 설치 83호 4. 1 도서관 전산업무추진, 특별원고(서울대 조완규 총장) 124호 4.15 학장 취임사. 교수 해외 연수 및 연구년제 규정 85호 5. 6 캠퍼스미화운동전개 86호 5. 20 한성 대 학과 낙산주변 87호 6. 17 r농경 생활사 전시관」 개관 88호 7. 22 캠퍼스 환경미화. 교내 공간 배 치 상황 289호 8. 19 신임교수 초빙,객원 · 명예 · 대우 1610호 9. 16 신입생 전후기 분할 모집. 이사장 기고 811호 10. 한성 대 학의 연구 · 면학 환경 (특접 . 칼라) 201 2호 11. 4 92학년도 신입생 모집요강 81 3호 11. 18 축구부→ 대 학축구 전국우승 41 4호 12.2 상정탑 건럽 . 녹다원 개장 81 5호 1992. 1. 1 객원교수초빙. 신년사 (이사장 · 학장) 1216호 2.3 캠퍼스 환경 개선 전력 추구 20
17호 2.17 대학 재정 위기(기고. 이종수 교수) 1618호 3.2 신임 교수 소개. 대학발전 연구과제 1619호 3. 23 객원 교수 특강 요지. 우촌 김의형 20박사의 건학정신2호20호 4. 20 제 2차 대학 발전 연구과제 확립 202 1호 5.11 우촌 전시실 개관 2022호 6. 1 대학발전 연구과제 결과 보고(칼라) 2423호 6. 29 민족 문화 연구소 특강. 환경 개선 내역 2024호 8. 10 신임 교수 소개, 학부모님께(학부모용특집 칼라) 32대학기념 품 판매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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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홍보자문위원회 구성 운영과 대학 기념품 제작 판매
한편 기획실에서는 각종 홍보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홍보자문위원회를 구성하였다.홍보자문위원회는 기획실에서 제작한 안을 놓고 자문에 응하는 역 할을 하였다. 그간 제작된 홍보물은 ’92 카렌다를 비 롯하여 브로셔로서 주요 대학 관계 기관은 물론 서울 시내 고등학교에 배포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이와 아울러 대학에서 생활하는 교수 · 직원 빛 학생들에게 한성대학의 이미지를 담고있는 각종 생활 필수 기념품을 제작하여 염가로 판매함으로써 학교 사랑하기 운동도 함께 펼치고 있다. 1992년 여름 현재 제작된 기념품과 가격은 위와 같다.5. 교육환경개선은 교육 내실의 밑걸음본교가개교한지 15년에 접어들면서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면서 교육공간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과학관을 신축하는 등 공간문제에 많은 신경을 써 왔으나, 그에 비해 환경자체에 대해서는 미처 눈길을 돌리지 못했었다. 낙산은 좋은 숲이 우거 진 공원이 었으나 그대로 방치되었고, 실내의 시설물도 크게 손봐야할 부분도 많이 있었다.
서정희 이사장은 이를 매우 안타깡게 생각하여, 우선 교육환경을 말끔히 정리하여 가르치고 배우는 장소로써 부끄러움이 없는 장으로 만들어야겠다고 하면서 교육환경 개선에 주력하였다. 그 내용 중 중요한 몇가지는 그 내용을 소개하고, 아울러 현재까지의 모든 공사 내역을 요약정리해 본다.1) 실내환경(1) 소강당 보수학생회관에 자리잡은 소강당이 새모습으로 변모하여 개관되었다. 무대확장을 비롯하여 천장 텍스가 교체되고 환풍시설이 설치되었으며, 사면의 벽과 출입문을 방음처리하고 조명시설을 새로 교체하였다. 그리고 에어컨을 설치하여 냉 · 온방 장치를 갖추었다.(2) 綠茶웰(휴게실)개장
본교 우촌관 옥상에 스카이 라운지 형태를 지난 휴게실 ‘녹다원’이 개장되었다. 이에 따라 교내외 손님을 맞아 마땅히 찾을 만한 곳이 부족하던 본교교 · 직원에게 큰 편리를 안겨 주었다.50 여 평의 규모로 64석을 확보하고 있는 ‘녹다원’은 양식을 주로 하고 차와 와인 종류를 준비하고 있는 고급 휴게실이다. 한편 여기에 ‘주식회사 인켈’의 조석구사장이 오디오 셋트를 기증하여 클래식 감상도 겸할 수 있게 되었다.(3) 우촌관 전시실본교우촌관 1 층에 자리잡은‘우촌 전시관’. 당초에는 65평이던 우촌 전시관은 1층의 본 전시관 65 평과, 2층 소전시관 22평£로 총 87평을 갖게 되었다. 천정은 철재 H 빔으로 현대적인 공법으로 설계하였으며, 2층 현관문 옆에는 따로 야외 휴게실을 마련하였다.1992년 4월 1 5 일 ‘우촌 전시실’은 국내 여타 대학의 전시실은 물론 어떤 화랑의 수준에도 뒤떨어지지 않은 공간으로서 한성인 누구도자랑스럽게 여길만한 것이다.
한편 이 전시관 개관을 기념하기 위하여 본교 미술학과 교 · 강사, 졸업생 · 재학생들이 마련한 ‘제 3의 장’이란 주제의 전시회를 가졌다.
우촌전시실개관테이프 절단식. 시내 어느 화랑에 못지 않은 규모와 조영시설들을 완전히 갖추고 있으며 연중 전시가 이어지고있다.
(4) 교내 복지흘 빛 이용실 개설
여학생들을 위한 학생 ‘복지흘’이 학생회관 1 층에 자리잡고 운을 열었다. 기존에 있던 서점이 우촌관 1층으로 옮겨지고, 그 자리에 들어선 복지홀은 마용실과 아울러 화장품 코너가 마련되었다. 특히 미용실과 화장품교너는 시중보다 월등히 싼 가격으로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으며, 여학생들을 위한 휴게실을 겸하고 있어서 여학생만의 전용시설이 부족한 상황에서 여학생들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고 있다.한편 매점 옆에는 이용실이 새롭게 단장되어 남학생들이 저렴하게 이말할 수 있게 되었고, 학생식당 옆에는 안경점이 설치되었다.(5) 학생 휴게실에 오디오 셋트 설치학생처에서는 이번 학기 학생회관 구내매점을 겸한 휴게실에 오디어 셋트를 설치하였다. 총학생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학생처에서 설치한 오디오 셋트는 주로 학생들이 이용하고 있는 휴게실의 분위기를 아늑하고 밝게 꾸민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는 학교 전체 환경을 아름답게 한다는 학교의 방침과도 일치하는 일이다.(6) 남 · 녀 체력단련실 및 샤워실 마련
학생회관 지하에 체력단련실이 말끔히 정리 · 보수되었다.1 .2년까지는주로남학생만이따금이용되었던체력단련실은학생들의 인식부족과 관리소홀로 방치되어 왔으나, 금년 여름부터는 보다 훌륭한 시설과 분위기를 가지고 활동되게 꾸며졌다. 곧 남자와 여자의 구분을 두고 각자 취향에 맞는 운동기구를 이용할 수 있으며, 체력 단련실 곁에는 남 · 녀 샤워실을 별도로 만들어 이용에 편리하게 만들었다.2) 실외환경(1) 상징탑학교를 올라 오다 보면 한성대학의 이머지를 나타내주는 상정탕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상정탑은 십장생인 거북이를 형상화한 모습으로 대형탑, 소형탑과 수위실3부분을 일체식무로 건렵하였는데, 거북이가 지니는 의미-장수동물, 끈기, 신통성, 영통성-와 함께 이제는 한성의 상징으로 한성인과 더불어 호흉을 맞추게 되었다.
십장생의 하나인 거북이를 형상화한모습인 상징탑은 대형탑, 소형탑과 수위실 3부분의 일체식으로 건립하였다.
@상정탑의 형태
상정탑은십장생의 하나인거북이를형상화한모습으로대형탑,소형탑과 수위실 3부분을 일체식으로 건렁하었음@ 본대학 상정물 거북이의 의미성@ 생태학적 특성100년 이상의 수명을 가진 장수동물성장기간이 짧다.· 끈기의 상징• 거북이의 상징성거북이는 상서롭고, 신통성, 영통성을 지난 우주를 대변하는 동물로 여겨져 왔다. 그리고 고대로부터 우리 인간을 구원해 준다는 우화와 실제적인실화가있다.따라서 거북이는 한성대학교의 교훈인 「진리」와 「지선」에 부합되는 상징물임.
@상징탑의 규모빛 재질• 대형탑의 높이가 12m, 소형탑의 높이가 7.2m 수위실이 높이는 3.7m 입.• 화가암인 황등석을 건식으로 축조하였음 .• 소요자채황등석 152톤, 철근 10폰(2) 낙산義花휴개축낙산 중턱에 자리잡은 의화정이 말끔이 개축되었다. 원래 이 의화정은 한성학원 설렵자 우촌 선생이 40여년 전 학교를 개교하면서 동네어른들과 담소를 즐기거나 활쏘는 장소로 활용하던 곳인데 근래에 특별히 돌보는 사람이 없아서 완전히 퇴락되었다.이번에 개축하게 된 의화정은 원래의 모습과 도王기를 그대로 유지하되 지붕의 추녀를 좀더 길게 내리고 약잔 치켜 올리는 모습을 한다. 「義花亨」이라는 현판은 옛날 것에 다시 색을 입혀 걸었으며 뒷펀의 방은 모습을 달리해서 등파고라(등나무 그늘)시설을 하였다.
40여년전 담소를즐기거나 짧쏘는 장소로 횡용하는 곳인 의화정 . 지금 역시 캠퍼스 낭만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명소로 자리하고 있다.
(3) 낙산야외공원
본교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 뒷편에 6 ,000평 정도의 낙산(路山)은 공원으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작년 봄부터 정비작업을 시작하여 최근 마무리 지은 이곳은 울창한 숲 속에 잘 다듬어진 산책로와 그사이 곳곳에 30여개의 벤취가 마련되어 틈틈이 학생들의 휴식처가되고있다.(4) 대규모 화단 조경 시설지선관 앞에 자리잡고 있었던 스댄드가 화단 조경공사를 실시함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번에 꾸며진 조경은 학생들에게 스탠드라는 딱딱한 분위기에서 화단이라는 신선한 모습으로 선보이게 되었다.한편, 지선관 앞 분수대가 있는 마당도 새로이 화단으로 모습이 바뀌게 되어 초록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5) 육각정자 설치낙산 정상에 육각형의 아담한 정자가 마련되었다. 붉은 인조석으로기등과 지붕을 얽어매고 그 위에 대나무 차양막을 얹어서 등파고라를 만든 이 정자는 낙산언댁 바위 위에 설치된 휴식처로 벌써부터 많은 학생들이 이용하고 있다. 한편 그 주변에는 잡풀을 솜아내고 잔디를 입혔으며 곳곳에 벤취를 만들어 놓았다.
(6) 과학관 진입로 아스팔트 포장학생회관에서 과학관까지 도로가 마련되면서 포장공사를 끝냈다. 이 공사는 기존의 운동장 스탠드를 전면적£로 바꾸어 조경시설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 과학관 진입로를 개설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이다. 이로써 종전에는 운동장을 가로질러야만 과학관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이 이 진입로가 완성됨으로써 운동장을 거치지 않고 곧장 과학관으로 연결될 수 있게 된 것이다.(7) 의화장경기도 팔당 강변에 위치한 이곳은 설립자 검의형 박사가 사용하던 개인 주택을 한성학원에 기증한 건물로서 학생들의 수양관으로 이용되
200여명이 동시에 숙박 · 취사할 수 있는 한성학원 연수장으로 이용되는 의화장.
고 있다. 이번에 새로 보수하거나 신설된 점을 보면, 먼저 2층으로 된 건물 전체에 파손된 부분을 수리하았다. 떨어진 문짝을 새로 만들어 끼우고 방마다 산뜻한 분위기를 창출하도록 꾸며 놓았다.
한번에 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본채외 시랑채로 이루어진 의화장은 원래 설렵자인 우촌 김의형 박사께서 사용하던 개인 소유의 건물인 것을 한성 학원의 가족을 위해서 회사한 것」으로서 대학인은 물론 한성여중 · 고까지도 개방을 해왔다.3) ’ 92년도 1 학기 교육환경 개선 내역(1) 교육화경 개선을 위한 시설 및 공사 내용(완료)· 전자계산소 확장 및 실습실(터미널실) 닥트 공시-· 전시실 확장(소전시실) 및 내부시설(조명 및 페인트 코팅)· 우촌관 2층 매점 휴게실 설치· 복지홀(구내미용실, 화장품코너, 안경점)· 등파이프 설치(학생회관-우촌관-진려관- 과학관 입구)· 강의실 조명 보강 설치(우촌관 1. 2층 강의실, 대학원 강의실). 휴게시설(우촌관 3층 로비, 진리관 4층 입구, 과학관A동 2층 업구로비 의자설치)· 식수(느티냐무 100나무, 진달래, 철쪽, 옥련, 칸나)· 지선관 계단 및 조경공사
· 건물 바닥 청소 및 복도 도색작업(우촌관 1.2.3.4.5층)2) ’92년도 하기방학중 교내공사 및 환경개선 작업내역(1) 도로공사 빛 조경공사공사기간 : ’92. 6.13-7. 15공사개요 : 기존 지선관앞 스탠드를 허물고 폭 7m길이 80m의 도로를 신설하였으며, 그 윗쪽으로 높이 5m의 자연석 쌓기와 석관수 식재 및 3m 폭의 잔디를 심어 캠퍼스의 분위기를 일신하였음θ 지선관앞 스탠드제거 빛 굴토공사。장비동원 : 포크레인 7월 20일。잔토처 리 : 돌 15톤차량 50차분, 흙 15톤차량 100차분• 조경공사(자연석 쌓기 및 석관수 식재 작업 )。공사재료 : 자연석 440톤, 소나무외 석관수 10종 식재• 도로포장 : 아스팔트 포장• 도로변 은행나무 식채 및 인조목 평의자 설치(은행나무 16주, 평의자 18 개)(2) 운동장 복토 빛 낙산석축 공사
공사기 간 : ’92. 6. 20-7. 29공사개요 : 스탠드 돌제거 및 굴토작업에서 나온 잔토를 효과적으로 처리하고 낙산 급경사 사태방지를 위하여 운동장 복토와 낙산 좌측 담장쪽 바탈진 부분에 석축작업을 시행 길이 90m 높이 3m의 석축을 쌓무묘로 폭 4m의 산책로와 낙산 중앙에서 100m' 의 휴식공간이 생겼음.@ 운동장복토 빛 배수로 공사。작업기간 : 흙 및 돌처리 포크레인 03년 30 일. 덤프트럭1. 5톤 1 대 20일정지작엽 연인원 100 명O 배수로공사。운동장 옹벽 돌무늬콘크리트 처리
• 낙산석축공사。공사기간: 년 40일。공사개요 : 연이원 120명。작 업 량 : 350m'。공사재료 : 스탠드제거 견치돌 15톤 50차분, 흙 15톤 80차분(3) 학생회관지하 개조공사@ 학생회관 지하휴게실 및 학생식당으로 통하는 입구 개통@ 구내 이용실 및 체육기재실 개축@ 기존 체력단련실을 개조 남 · 여 체력단련실 맺 샤워실로 분리@ 휴게실 매점에 기념품 진열장 코너 신설@ 식당주방 닥트설치 및 실내 개조(4) 강당보수작업。실내벽, 천정, 바닥 도색 및 창문 씬팅 작업(5) 과학관 스탠드 연장공사 벚 략카룸(샤워실 빛 탈의실) 신설공사개요 : 기존 스탠드를 25m연장 그 아래 공간을 활용하여 샤워실 및 탈의실을 만들고 스탠드전체에 등파이프를 설치하여 그늘막을형성함.
(6) 낙산 개발。휴식공간 100m' 에 야외도서실 겸 휴식처가 되도록 원형탁자12개를 설치。육각정 설치6. 체육을 통한 대외적 이미지 향상대학의 사명이 연구와교육이라고 깐단히 규정짓는다면, 교육부문이 차지하는 비율도 우시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교육은 후진 양성에 곧바로 이어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본교는 서울 시내에 위치하고 있을만큼 지방의 대규모 대학보다 우수한 학생을 유치할 수 있는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입학당시의 우수한 학생들을 어떠한 교육 과정을 통하여 보다 우수한 실력과 인격을 지난 사회인으로 형성시키는가에 관심을 모여지게 되며, 결국 이 막중한 역할을 대학당국, 특히 교수의 책임이 크다고 하겠다.물론 교육의 효과가 단기간에 가시적으로 나타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교육의 과정에서 단기간에 가시적인 효과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를들면 각종대회에 참가하여 우수한 성척을 올리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본 항목에서는 이러한 점에 춧점을 맞추어 몇가지 중요한 설척을 더듬어 보고자한다.본교의 탁구부는 천국 최고의 수준임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본교 탁구부 출신으로서 세계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국가대표선수만 해도 검기택, 김 완을 비롯하여 ’90 북경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은에달획득한 홍차옥 등은 바로 좋은 예에 해당된다.
본교에 탁구부가 창설된 것은 1976년도부터 였다. 그리고 최근까지 계속해서 국내외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둔 기록을 가지고 있다. 다음에 탁구부의 주요 연혁을 살펴보기로 한다.1) 탁구부1976년 3월 3월 여자탁구부 창설1981 년 3월 여자탁구부 해체 남자탁구부 창단1982년 국무총리기 쟁탈대회 남자대학부 우승종별선수권 대회 남자대학부 우승전국체육대회 대학부 우승1983년 제 1 회 대학선수권대회 남자부단체,개인,복식 우승1984년 8월 8 일 -15 일 일본체육대학 탁구부 방한, 본교 선수와 합동훈련 실시
1985년 1 월 1 일 -15 일 일본체육대학방문 합동훈련 및 상호교류 협정서 작성, 대만방문 친선경기1985년 7월 전국종별 선수권 대회 우승1985 년 8월 일본체육대학 본교방문 합동훈련실시1986년 10월 전국체육대회 준우승1989년 10월 제 22회 체육부장관기 여대부탁구 단체우승1992년 5월 제 10회 전국춘계대학연맹 3위1992년 6월 제 38회 전국종별선수권대 회 3위졸업생현황이상국(쥬니어 대표 총감독)김 완(제일합성 코치)김기택(제일모직 코치)권오택(삼성라이온즈)윤지훈(대우증권 대리)박용민(대우증권 여자 코치)
노윤관(충북투자금융 감독)유시홍(강원대 코치)황남숙(탁구클럽 운영 )흥차옥(한국화장품 소속)2) 축구부본교에 축구부가창설된 것은불과 6년전의 일이었다. 당시 학교에서 는, 학생들의 단체의식과 애교심을 불러 얼으킬만한 사업을 모색하던 중 총학생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축구부를창설하였다. 축구야말로 많은 사람이 동시에 관전하며 열성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창단 6년만에 전국을 제패한 축구부
학생회에서는학생회 나름대로적극적인지지를보내왔다.매년등록금에 일부를 추가시켜 축구부 후원금£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원에 힘입어 드디어는 ’91 년도 추계대학 축구 연맹전에서 전국 우승이라는 감격의 순간을 차지했던 것이다. 아울러 축구부에서 배출한 선수 중에서 국가대표까지 길러내게 되었다.
다음에 축구부 연혁과 졸업생 활동을 간략히 소개해 본다.1986 년 3월 4 일 체육특기생 9 명, 일만채학생 5명우로 출벙.
감독:정은식역대전적1989. 11. 전국축구선수권대 회 8강1991. 4. 춘계전국대학축구연맹전 8강1991. 11. 추계전국대학축구연맹전 우승1992.4. 춘계전국대학축구연맹전 8강국가대표진출 : 우동명(사학과, 4년)졸업생 실업 및 프로진출현대프로팀 임채용(무역)퓨마프로팀 노웅(경영)제일은행 신양률(무역)상무 권정근(경제)철도청 김재훈(경영)〈정후수〉
〈부록〉
1.한성대학교연표
1945. 9.25 설립자 김의형 박사 경성여자기예학교 인수1945.10. 5 재단볍인 한성학원 설립1946. 4. 9 한성고등여학교 6년제 12학급 인가1946. 7. 5 한성 여자중학교로 교명 변경1951. 8.11 한성여자 중 · 고등학교 각 6학급 300 명 인가1953. 1.21 재단법인 한성학원 설렵 인가(문교부)검의형 박사 초대 이사장 취임1955.10. 영전 한성제염사를 한성학원에서 경영1963.12. 7 실내체육관 준공1964. 1.24 재단볍 언을 학교법 인으로 개 편1971. 7.20 국제 공인 규격 낙산수영 장 준공1971.10.29 이희순 여사 제 2대 이사장 취임1972.12.21 한성여자대학 설렵(국어국문학과 30 명, 영어영문학과 30명, 비서 학과 20명, 가정학과 30 명, 의 상학과 20 명, 생활미술학과 20명 등 6개 학과 150 명 )
1973. 3. 5 초대 학장 김의형 박사 취임1973.12.30 학과 정 원 조정 승인 (불문학과, 무용과 각 20 명, 경영학과, 무역학과 각 30명 증과, 비서학과 폐과, 총 9개학과 230 명)1976.12.10 불문학과 20명을 폐과하고 국사학과 20 명 신설, 한성대학보창간1977. 3. 1 제 2대 이희순 학장 취임1977. 4.22 검의형 박사 제 3대 이사장 취임1977.10.20 국사학과플 사학과로 명 칭 변경1978.10. 학과 정원 조정 승인(국어국문학과, 영 어 영문학과, 의상학과, 생활미술학과, 무용과 각 10명 증원, 경영학과, 무역학과 각 20 명 증원, 행정학과 30 명 신규 증과, 가정학과 폐과로 9개학과 380 명)1979. 2. 1 제 3대 김옥형 학장: 취임
1979. 9.11 학과 정원 조정 승인(의상학과, 생활미술학과, 무용과, 행정학과 각 10명 중원, 사학과 20명 증원, 입 학정원 9711 학과 440명)1980.10.15 학과 정 원 조정 승인( 경 제학과, 도서관학과 각 40명 증과, 계 15개학과 졸엽정원 520명, 입학정원 676명)1981.10.11 생활미술학과를 미술학과로 명칭 변경1981.11. 1 안호상 박사 제4대 이사장 취임1981.12.29 종합관 준공1982. 2.18 제 4대 학장 강병 규 박사 취 임1982. 5. 1 부설연구소 설립 (민족사상연구소, 사회산업 연구소, 한국전통예술연구소, 학생생활연구소)1983. 3. 1 설링자 우촌 낌의형 박사 학원장 거행1983.10. 5 개교 10주년 및 학생복지관 기공식 거행1984. 8.23 제 5대 홍순태 학장 취임1984.12. 4 R.O.T.C. 창설
1986. 7. 교사 확장 이전1987. 8.25 우촌관 준공1987.10.23 산업공학과, 전산통계학과, 의류직물학과, 산업디자인학과등 4개학과 신설(업학정원 19 711 학과 720명 ), 도서관학과를 문헌정보학과로 명칭 변경1987.11.30 경영행정대학원 설링 인가1988. 8.22 제 6대 학장 신영기 박사 취임1988.11.30 경 영 대학원, 행 정 대학원 분리 증원1989. 4.15 과학관 기공식 거행1989.11. 6 일반대학원 3개학과신설(국어국문학과, 사학과, 무역학과)1990. 2.27 과학관· 준공전자계산소개소1991. 4. 1 제 7대 학장 원형갑 박사 취임1991. 6.14 농경생활사 전시관 개관
1991. 9.22 한성 학원 상징 탑 기공1991.11.29 한성학원 상징탑 제막식 거행1991.12. 1992학년도 신입 생 전 · 후기 분할 모접 시 행1992. 2.15 제5대 이사장 서정희 박사 취임1992. 7.28 대학원(석사과정 경영, 행정학과 각 12 명) 증과, 총인원 60명 · 행정대학원 산업경제학과 증과 (30명), 행정대학원 증원 (15 명)1992.7.31 천산통계학과, 산업공학과 야간 각 40명 증과(총 800명)2. 한성대학교약사
한성학원이 이 땅에 진리와 지선을 교육목표로 그 초석을 마련한 지도 어언 반세기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이 짧지 않은 기간에 한성학원은 국가와 민족이 요구하는 인재의 양성과 민족정신의 함양에 전력해 왔음을 자부한다.한성학원은 1945년 민족의 해방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광복을 맞은 한국 사회는 새로 태어날 ‘신생국’ 대한민국과 새사회 건설을 위한 인재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30여년간의 식민지배의 구각을 벗을 겨를도 없이 해방의 물결을 타고 밀어닥친 외래의 그릇된 풍조가 만연되던 당시 상황에서 진정한 ‘한국 정신’을 가진 젊은 인채를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당시 교육을 천직으로 여기고 일선교육에 종사하고 있던 우촌 검의 형 박사는 그와 같은 사회적 혼란상을 목도하게 되었고, 조국과 민족 앞에 펼쳐진 암울한 상황하에서 교육의 위상과 방향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1945년 9월 25 일, 사재를 회사하여 당시의 경성여자기예학교를 인수함으로써 새로운 교육의 터전을 낙산 기숨에 마련한 우촌 김의형 박사는 어려운 주변 여건을 일관된 교육 의지로 극복하고 소중한 꿈나무들을 심고 가꾸기 시작했다.
1945년 10월 5 일.시대의 아픔과 양심을 함께하며 외롭고 험난한 교육의 걸을 걷고 있던 한 교육가의 신념과 집념어린 노력은 마침내 한성학원의 탄생이라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1945년 lQ J웰 5 일 설립된 한성학원은 이듬해인 1946년 7월 교육법의 개정에 따라 6년제 한성고등여학교로 개편하여 한국 여성교육의 발전을 위한 초석을 다져나갔다. 민족의 바극인 6.25천챙 중에도 한성학원은 부산에 임시 교사를 마련하여 교육을 계속하였고 서울 수복 후에는 전화의 위험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잔류하고 있던 남녀 학생을 대상4로 교육함A로써 교육의 맥을 끊지않i 려는 강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1953년 1 월에는 문교부로부터 재단법인 한성학원 설린윤 인가 받고 초대 이사장에 설렵자 검의형 박사가 취임하였다.이어 1955년 1 월에는 문교부로부터 재단법인 한성학원 설립을 인가받고 초대 이사장에 설립자 김의형 박사가 취임하였다.이 어 1955 년 10월 검 의 형 박사는 충청 남도 당진군 송산면 소재의 염천(한성제염사) 108,000평을학교재정의 후원을위해 희사함으로써 한성학원은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였다.이 염전은 1984 년 삽교천 제방공사로 인하여 폐쇄되고 농장으로 개발하여 본 한성학원의 수익용 사업요로 사용하고 있다.천쟁 · 기아 · 빈곤 · 정치적 혼란의 시대 속에서도 끊임없는 교육의 발전을 위해 힘쓰고 노력해 온 한성학원은 새로운 건설과 도약의 기반을 착실하게 다져 나갔다.1955년 한성여자중 · 고등학교로 분리된 이래 지속적인 성장 · 발전을 이룩해 온 한성학원은 한국 여성교육의 새로운 명문으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1964년 ^h 단법인을 학교법인으로 개편한 한성학원은 1971 년 10월 29 일에 이희순 여사가 제 2대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1972년 12월 학원딸천의 획기적인 계기를마련하게 되니 한성여자대학의 설럽이 그것이었다.이로써 한성학원은 중등 · 고등 교육기관을 갖춘 명실상부한 한국여성교육의 요람으로 자리하고 더욱 깊이 있는 학문 탐구의 장을 많은 인재들에게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1973년 3월 초대학장에 설럽자인 김의형 박사가 취임한 한성여자대학은 국어국문학과, 영어영문학과, 비서학과, 가정학과, 의상학과, 생활미술학과 등 6개학과 150명의 야간대학으로 출범 하였다. 이후 1973년 12월과 1976년 12월에 학과 조정을 단행하여 기존의 비서학과를 폐과하고 무용과, 경 영 학과, 무역 학과, 사학과 등 4개 학과를 증과함으로써 9개학과 230명으로 편제되었다.1977 년 3월 제 2대 학장으로 이희순 여사가 취임하고, 1977년 4월에 김의형 박사가 제 3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78 년 1 월에는 남녀 영재들에게 보다 깊이 있는 학문의 장을 마련해 주고자 한성여자대학을 한성대학으로 교명 변경함과 동시에 야간 남녀 공학으로 전환항£로써 학원 말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았다.1979년 2월 검옥형 학장이 취임하였고, 이어 1980년 10월 졸업 정원제의 시행과 동시에 국어국문학고, 영어영문학과, 사학과, 경영학과, 무역학과, 경제학과, 행정학과, 도서관학과, 의상학과, 생활미술학과, 무용과 등 15개 학과 졸업 정원 52명, 모집인원 676명으로 중과 조정하였고, 전일제 주 • 야간 수업을 실시하여 대학의 발전은 본궤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후 생활미술학과가 1981 년 10월 미술학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1981 년 11 월에는 안호상 박사가 제 4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1982년 2월에는 제 4대 학장 강병규 박사의 취임과 함께 대학문화의 창달을 위하여 민족사상연구소, 사회신엽연구소, 한국전통예술연구소, 학생생활연구소등 4개의 부설연구소를설렵하여 독창적이고도 활발한연구활동을 추전하였다. 이후 1984년 12월에 민족사상연구소와 한국전통예술연구소를민족문화연구소로통합하였고정보와사회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정보전산연구원을 설립하였다.
1984년 8 월 제 5 다l 홍순태 학장이 취 임 하였고 1985 년 12 월에는 R.O.T.c. 를 창설함과 더불어 축구부를 창단하여 1976년에 창단한 탁구부와 함께 국내 최장의 한성체육을 이끌어가는 양대 산액이 되고 있다.1987년 한성대학이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한 해였다. 다양한 정보사회에 신속히 대처해 나갈 수 있는 고급전문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전산통계학과, 산업공학과, 산업디자인학과, 의류직물학과 등 4개의 학과를 신설하고 도서관학과를 문헌정보학과로 변경하였으며, 학문의 전문화와 산업협동체제를 기하기 위해 경영행정대학원을 신설하였다.1988년 8월 22 일 제 6대 학장으로 신영기 박사가 취임하였i며 1988년 11 월 30일 경영행정대학원은 경영대학원과 챙정대학원흐로 분리, 증과 · 증원을 인가받음으로써 보다 수준 높은 전문대학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 었다. 또한 1989년 11 월 6일에는 일반대학원이 신설, 국어국문학과,사학과,무역학과를두게 됨으로써 명실공히 대학원체제가 확렵되었고 연구하는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91 년 4월 1 일에 국어국문학과 원형갑 박사가 제 7대 학장으로 선출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1991 년 12월 한성대학은 입시정책을 전환하여 1992학년도 신입생전 · 후기 분할 모칩을 단행하였다. 1992학년도 입시부터는 전기에 280명, 후기에 440명을 모집하게 됨무로써 후기대학이 라는 인식을 탈피하여 새로운 대외적 이마지를 창출하는 전기가 되었고 우수한 신입생들을계속해서 유치함으로써 사학의 명문으로향하는계기를마련하였다.그리고 1992년 7월에는 교육부로부터 증가 증원을 인가 받았다. 이에따라 93학년도부터 입 학정원 800명을 확보하였고, 대학원 석사과정에 경영학과와 행정학과가 신설되며, 경영 대학원에는 산업경제학과가 신설, 행정대학원에는 행정학과가 신설, 행정대학원에는 행정학과의 증원을보게 되었다.
학생들의 학문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대학의 시설 및 교사의 신 · 개축도 지속적으로 시행하였다.1983년 10월 한성대학교 개교 10주년을 맞아 학생복지관을 기공하였고, 1986년에는 현 위치로 교사를 확장 · 이 전하여 학문의 전당인 상아탑£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어 1987년 8월에 우촌관을 신축하여 대학 본관으로 본교의 중추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곳이 되고 있다.한편, 종합대학으로의 승격과 대학의 장기발전계획의 일환£로 추진되어 왔던 과학관이 1990년 2월 27 일에 준공되었으며 정보화 사회에 대비하기 위하여 전자계산소를 개소하였다. 이로써 학교행정 전산화및 교수연구 지원, 학생들의 전산교육에 일익을 담텅-하게 되었다.
그밖에 중앙도서관의 지속적인 확장 및 개수, 장서의 확보 등을 통해 학습분위기를 조성하였고, 시청각교육실, 어학 실습 실, 컴퓨터실습실, 타자실습실,트레이닝센터,학생수련장등후생복지시설의 확충을지속적:로시행하였다.1991 년 6월 14일에 민족문화연구소가 주관하여 ‘농경생활사 천시관’을 개관하였다. 이는 농촌의 어제와 오늘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각종농기구와 민속자료 등을 소장 · 천시함으로써 우리나라 농경생활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1991 년 11 월 29일 전 한성인의 염원이었던 상정탑이 건렵되었다. 교문을 겸해서 세워진 상징탑은 본 대학의 상징물인 거북이를 형상화한 것£로 본 대학의 명물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1992년 2월 15 일에는 서정희 박사가 제 5대 이사장에 취임하여 재단의 위상을 확럽하였고 대학의 내실있는 발전과 비견을 제시하여 한성대학이 새롭게 도약하는 전기를 마련하였다.현재 한성대학은 5개학부 21 개학과, 교양과, 교직과, 4개의 야간강좌, 대학원, 경영대학원, 행정대학원, 9개의 부속기관 및 4개의 연구소를 갖추고 3,000여명의 학생이 진리탐구와 사회봉사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고있다.
진리와 지선, 이는 1983년 3월 1 일 79세를 일기로 생을 마칠때 까지 시대의 격랑을 헤치며 한평생을 교육-이라는 고독하고도 지난한 인생역정을 걸어온 설렵자 우촌 김의형 박사의 일관된 교육정신이었으며우리 한성인 모두가 가꾸어 결실을 맺어야 할 소중한 꿈이기도 하다.이제 연구하는 대학, 젊고 푸른 미래의 대학으로서 한성대학은 인간 가치추구와 참 사회의 창조를 위한 아카데미즘의 참 뜻을 믿고 실천하는 염숙하고도 진지한 삶의 현장이 되어 낙산 언덕에 자리할 것 이다.3. 학과 인가 및 년도별 정원 조정 내역
학과 년도별 ’73 ’74 ’75 ’76 ’77 ’78 ’79 ’80 ’81 ’82
무역학과 30 30 30 30 30 80 80 80 80
학과 년도별 ’83 ’84 ’85 ’86 ’87 ’88 ’89 ’90 ’91 ’93
무역학과
4. 졸업생 현황(총괄)
구분 총계 국문 영문 사학 경영 무역 경제 행정 문정 무용 의상 생미 미술 가정 산디 전통 산공 의직
구분 총계 국문 영문 사학 경영 무역 경제 행정 문정 무용 의상 생미 미술 가정 산디 전통 산공 의직
5. 재직 교수명단
성명 전공분야 임용년월일 학위
이정숙 현대문학 3. 1 운학박사
성명 전공분야 임용년월일 학위
전경숙 의류경영 8. 15 이학박사
6. 재직 교직원 명단
성명 근무부서 임용년월일
전장배 관리과주임 4. 1
성명 근무부서 임용년월일
김복기 총무과 1974. 5. 3
7. 퇴직 교수명단
성명 담당분야 임용년월일 퇴직년월일 비고
김범주 공법 9. 1 1986. 2. 28 행정학과조교수
8. 퇴직 교직원 명단
성명 담당분야 임용년월일 퇴직년월일 비고
김순애 도서관 11. 6 1986. 2.28 사무직
성명 담당분야 임용년월일 퇴직년월일 비고
유무열 사우처 1985. 2.14 1990. 9.27 사무처장
9. 역대 학장 명단
1 대 1973. 3-1977. 2 김의형2대 1977. 5-1978. 4 이희순1978. 5-1979. 1 정연걸 직무대리3대 1979. 2-1982. 1 김옥형4대 1982. 2-1984. 7 강병규5대 1984. 8-1988. 7 홍순태6대 1988. 8-1990. 9 신영기1990.10-1991. 2 원형갑 직무대리7대 1991. 4- 원형갑10. 역대 동창회장 명단
년도 1대 2대 3대 4대 5대 6대
년도 7대 8대 9대 10대 11대 12대 13대
11. 10년 근속 표창자 명단
(’92 현직위)
성명 직위 임용년월일
1989
성명 직위 임용년월일
이동섭 교수 9. 1
편집후기
「한성대학교 20년사」를 개교 20주년을 맞는 10월5일까지 발간 해주기를 요청해 왔을때 내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발간위원들 j이 바쁜 학기초 일과중에서도 최선을 다해 집필 빛 편집 마무리를 해준데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당초 편찬 계획보다 약간 축소시켜 우선 「한성대학교 20년 약사」로 엮기로하였다.시간의 흐름속에 관련자료의 유실이나마 최소화하기 위해 어떤 형태로던지 일단 한성 대학사 사료를 정리하여야 할 필요가있기에 만용을 내어 이번 「한성대학교 20년사」를 엮게 된 동기임을 밝혀 둔다. 그러나 강산이 한번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이 두벤씩이나 거듭되는 기간에 관련 자료가 적지 아니 유실 되었음을 이번 기회에 발견하고 느끼게 되었다.
돌이켜 보건대 지난 5월 「한성대학교 20년사」 편찬 책임연구위원으로 위촉 받았을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착하여야 할지, 연구팀을 어떻게 짜야할 것인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왜냐하면 아직까지 본교에 이와 관련된 선행연구나 「한성대학 10년사」와 같은 자료들이 없기 때문에 시기구분과 분담 집필자 선정을 위한 연구텀 구성에서부터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먼저 집필 시기구분에 착안, 설렵자이신 초대 학장 김의형 박사 집무시기에서부터 현 원형갑 학장 시기까지 역대 학장 집무시기를 대상으로 시기구분의 기준으로 삼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초대 김의형 학장, 2대 이희순 학장, 제 3대 검옥형 학장까지 집무시기를 요람기로 정하고, 제4대 강병규 학장 집무시기를 도약기로, 제 5대 홍순태 학장 접우시기를 확장기, 그리고 제 6대 신영기 학장과 현 원형강 학장 집무시기까지는 성장기로 시기구분을 하기로 하였다.
이같이 시기구분을 일단 정하고 난후 각 시기별로 집필할 적임자 선정을 물색하게 되었다.요람기는 본 필자 연정열, 도약기는윤경로, 확장기는 김원중, 성장기는 정후수가 각각 분담 집필키로 하고 자료 및 도표는 사서과장 김명수가 작성 집필하기로 하였다.도약기 집필자인 윤경로 교수는 한국사 교수로서 사관에 밝고 강명규 학장 정무시기에 학보사 주간을 역임, 누구보다 이 시기 접필자로서 적임자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확장기 집필자인 김원중교수는 일찍이 학부시절 홍순태 학장의 문하생으로서 홍순태 학장의 업무 스타일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어 이 시기 집필자로서 적임자가 아닐 수 없다.한편 성장기 집필자로 내정한 정후수 교수는 본교 78학번 남학생 제 1회 졸업생으로 본교 교수로 임명되기 전까지 오랜 시간 본교 연구소 조교로 일해왔기 때문에 최근 모교 사정에 가장 밝은 적임자가 아닐 수없다.그리고김병수사서과장은본교도서관설렵 유공자의 한사람으로서 각종 관련자료의 수집 및 각종 도표 작성자로서 교내에서는 달리 찾을 수 없는 적임자가 아닐 수 없다.
이같이 각 시기별로 집필 할 적임자들을 내섬 찾았지만 본 20년사편찬 연구위원 위촉을 사양하지 않을까 내심 걱정하였다. 그러나 이네분들이 제 제의를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으며 이에 다시 한번 사의를 표한다.짧은 기 깐에 「한성 대 학교 20년사」를 엮 다보니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우선 관련자료 미흡함의 벽에 부딪치곤 하였다. 그러나 「한성대학교20년사」를 엮음을 계기로 관련 자료들을 정리해 두면 후일 유능한 이들이 보다 많은 자료들을 발굴 수집하여 「한성대학사」를 엮을때 선행연구의 참고자료로 제공할 수 있다는 기대 하나만을 갖고본 20년 약사를 엮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제딴에는 연구위원 천원이 짧은 기간중 최선을 다해 엮었다고는 하나 엮고 보니 용두사미의 미미함과 셰련되지 못한점이 하나 둘이 아닌 여기저기서 발견되어 선배제현과 동료교수들께서 그 부족됨을 관용의 시각에서 보아 주시기를 바랄 뿐이다.단지 다음 한성대학사 펀찬시 마디만한 도움이라도 된다면 엮은 이들로서 그 이상의 기쁨이 없을 것이다.끝£로「한성대학교 20년사」가 엮어져 나오기까지 성원과 도움을 준 정대홍 기획과장에게 말간위원들을 대신하여 사의를 표한다.1992년 10월 5 일 「한성대학교 20년사」책임연구위원 연정열편찬위원
위원장 : 연정열위원 : 윤경로, 검원중, 정후수, 검명수漢城大學校 二十年史
1992년 10월 3일 인쇄1992년 10월 5일 발행발행인원형갑한성대학교 20년사편찬인 편찬 위원회발행처한성대학교 기획실〈비매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