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대학교 30년사
Thirty-year History of Hansung University漢城大學校
역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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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총장(학장)
1972~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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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대학교의 과거&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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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10월 개교기념체육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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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7월21일 대학 상효 교류 협정식
1999년 4월26일 성북구 협력 협약식
5월 8일 전네덜란드수상 명예박사 수여식
「한성대학교 30년사」발간에 부쳐
1973년 6개학과, 150명의 야간대학으로 출범한 한성여자대학은 1978년에 남녀공학으로 전환됨으로써 발전의 전기를 마련하고,끊임없이 증과·증원을 거듭하여 오늘날의 4개 단과대학,12개학부, 28개전공, 2개학과, 편제정원 6,480명의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양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1999년 대학종합평가 최우수대학으로 선정되는 등 질적으로도 꾸준히 저력 있는 내실을 기해 왔습니다.그리고 바야흐로 설립 30주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 한성대학교는 지난 해 젊음과 문화의 거리 대학로에 제2캠퍼스를 새롭게 마련한 바 있고,교수회관과 학생회관 별관,대학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도서관을 대형으로 신축하는 등,21세기 신정보화 시대의 미래형 대학을 건설하기 위한 투자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습니다.그런데 이 모든 것을 원천적으로 가능하게 해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앞서 가신 뜻 있는 분들의 피와 땀이며 그간 한성대학교에 젊음을 바친 많은 구성원들의 노고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성대학교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역사입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간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 H. Carr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끈이 바로 역사입니다. 이 끈을 제대로 움켜잡으면 과거의 이해를 토대로 하는 올바른 현재인식이 가능해지며, 나아가서 미래에 대한 비전과 나아갈 길을 불을 보듯 훤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의 고금을 막론하고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역사를 가치 있게 여겨 현실에 반영하는 자는 실패가 없는 법입니다. 오늘의 우리 한성대학교의 모든 구성원은 시대를 선도하는 사학의 이상을 가지고 한성학원과 한성대학교를 설립하신 우촌 김의형 박사님의 실사구시적이며 개척적인 건학정신을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받들어 희망의 비전으로 가득한 미래를 가꾸어나가는 모습을 견지해야 하겠습니다.이러한 의미에서 이번에 발간되는 「한성대학교 30년사」는 지난 20세기의 후반에 걸쳐 묵묵히 내실과 저력을 다지고 이제 새 천년 21세기를 맞아 힘차게 웅비하고 있는 우리 한성대학교의 자랑스러운 그간의 역사를 가감 없이 정성껏 담아,이 한 권의 책자 자체로도 한성대학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뿐 아니라,향후 우리 한성인의 거울과 같은 기능을 다하며 아울러 한성대학교의 구성원이라는 자긍심을 배가시키는 계기를 선사해 줄 것으로 믿습니다.
끝으로 이 뜻깊은 책자를 만드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느라고 애써 주신 관계 구성원 제위의 노고를 깊이 치하합니다.2002년 9월한성대학교 총장 사회과학박사 이성근한성 대학교 30주년을 축하하며
역사란 원래 창업과 건설, 수성(守城)과 시련 그리고 좌절과 극복의 연속이다.한성대학교도 역사적인 보편적 과정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는 10월 5일이면 30주년을 맞이한다. 적지 않은 세월이다. 30년이면 한 세대라 하지 않는가. 한 세대가 넘어가고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시점이다. 창업자의 정신을 이어받고 한 차원 높은 발전단계로 도약해야하는 시점이다.지난 30년 동안에 우리사회는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으며, 급속한 산업화·근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경제적 발전과 생활수준의 향상을 달성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제적 발전에 수반해서 사회·문화적 변화 또한 엄청난 것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지난 30년의 우리 사회는 격변의 시대였다. 전반부 약 20년은 군사정권의 연속이었으며,후반부 약 10년은 이른바 문민정부의 시대였다. 우리 나라의군사정권은 무려 32년이나 계속되었으며,그 기간동안 우리 사회의 민주화 세력은 끈질기게 민주화투쟁을 전개해 왔다. 그 민주화 투쟁의 핵심 속에 대학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수많은 학생이 희생되었으며,교수들 또한 적지 않게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교육 또한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국가나 정부가 일방적으로 주입식 교육을 하는 경향으로부터 현실사회의 요구와 학생들의 지적 수요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대학은 타율로부터 자율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대학의 주체인 교수,학생,직원이 삼위일체가 되어서 학교를 자율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대학은 특정 정권으로부터도, 특정 재단으로부터도 자율적이어야 한다. 다만 자율적이라는 것은 책임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다.한성대학교는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다. 교육·문화의 중심인 서울에 위치하고 있으며 훌륭한 교수님들과 우수한 학생들,그리고 성의를 다하는 직원들로 짜여져 있디최신식 건물인 교수회관,학생회관별관이 신축되었으며 내년이면 훌륭한 도서관이 완공된다. 시대상황에 부응하는 학문 영역에 교육의 중점을 맞추고 있으며,이러한 경향은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다. 여기에 우수한 교수님들을 보충해 나가면 한성대학교는 ‘특색 있고 내실 있는 오붓한대학’으로 가꾸어질 것이다.
한성대학교의 개교 3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한성대학교의 교수·학생·직원 여러분들에게도 축하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2002년 9월학교법인 한성학원 이사장 이상희편찬원칙
1. 한성대학교 30년사는 한성대학교 개교 3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추진되었다. 본서의 수록범위는 한성대학교 설립배경과 교육이념을 밝히고 1972년 개교에서 시작하여 30주년을 맞이하는 2002년 8월 1일까지의 발전과정을 취급하였다.2. 이 책은 모두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제1편은 한성대학교 설립배경과 교육이념,제2편은 형성기(1972년~1981년),제3편은 성장기(1982년~1992년), 제4편은 발전기(1993년~2002년 8월 1일),제5편은 21세기 한성대학교 모색기(진입기 2002년 8월 1일 이후)로 그 각 편의 명칭을 정하였다. 집필 시기 구분은 다음과 같은 근거 하에서 이루어졌다. 한성대학교 설립 배경과 교육이념은 제1편에서 다루었고 제2편 형성기는 1972년 개교에서부터 1981년까지로 하였는데 이때는 야간대학시대로서 본교의 초석을 다지는 시기였으며, 제3편은 성장기로서 1982년부터 1992년까지인데 이 무렵에는 대부분의 학과가 야간에서 주간으로 변모하였으며 졸업 정원제에 의해 입학정원이 676명으로 늘어났고 남녀공학으로서의 위상이 정립되어 성장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리하여 종합대학교로 승격될 수 있는 여건이 구현되었다. 제4편은 발전기로서 1993부터 2002년 8월 1일 까지이다. 1993년에는 본교가 개교한지 21년만에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였고 뒤이어 4개 단과대학을 두어 종합대학교 체제를 갖추었다. 2000년 2월 대학종합평가 최우수대학으로 선정되어 발전하는 본교의 모습이 노정되기도 하였다. 제5편은 21세기 한성대학교 모색기로서 2002년 8월 1일부터 앞으로를 이 시기로 설정했다. 이 시기에는 한성비전 21세기에 의해서 중장기 발전계획이 입안되었고,이를 토대로 21세기의 지식정보화시대에서 한성대학교 는 새 도약을 이룩할 것이다.
3. 30년사 편찬의 원칙은 자료집으로서의 역할과 동시에 한성대학교의 발전과정과 새 방향을 살펴보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를 위하여 「한성대학교20년사」와 「한성학원 50년사」를 참조하고 행정부서의 협조 하에 현황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활용하였다.
4. 이 책은 5인의 집필위원이 분담하여 집필하였다. 집필위원의 분담내용은 아래와 같다.제1~3편은 정후수 교수가 책임 집필하였다. 제4편 중 원형갑 총장 시대(1993년 3월~1995년 3월)는 조인숙 교수, 이용남 총장 시대와 그 외의 시대(1995년 4월~1998년 9월)는 신경숙 교수,이성근 총장시대(1998년 10월~2002년 10월 14일)는 박준철 교수가 집필을 담당하였다. 제5편 21세기 한성대학교 모색기는 윤석효 교수가 집필하였다.5. 본 30년사는 가급적 평이한 문체로 간결하게 기술하고 사실에 총실하려고 노력하였으며 한글서술을 원칙으로 하되 고유명사의 경우는 한자를 병기하여 기록하였다.
6. 각 장별 서술은 기술방법을 채택하기로 하였고 그 나열순서는 이 ·취임에 따른 보직명단 순서와 중요한 학사 결정사항을 아울러 기술한다. 한편 그 다음으로 그 해 일어났던 각종 행사 및 사건들을 요약해 싣기로 한다.7. 화보는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도록 하기 위하여 엄선하여 수록하였다.8. 부록은 한성대학교의 현황을 알 수 있도록 하였고, 연표는 최근 상황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첨가해 놓았다.목차
제1편 한성대학교 설립배경과 교육이념 3제1장 설립배경 3제1절 설립자의 생애와 창학정신 31. 우촌 선생의 생애2. 우촌 선생의 교육정신 5제2절 한성학원의 설립 91. 설립배경 92. 한성 학원 설립과 교세확장 12제3절 한성여자대학 인가 141 한성여자대학 인가 발족 142. 한성여자대학 인가의 일화 8제2장 건학이념 19제1절 한성학원의 교육이념 191. 한성 학원의 교육이념 192. 교시(校是) 20
제2절 한성대학의 교육목적 및 교육목표 24제3절 교기,교표, 이미지마크, 교가, 상징물 271. 교기 및 교표 272 이미지 마크 293. 교기 294. 상징물 30제2편 형성기 35제1장 첫발을 내딛는 한성 35제1절 제1회 입학식과 증과·증원 351. 제1회 입학식 352. 증과·증원과 활발한 학생활동 353. 학도호국단의 설치와 활동 37제2절 성장을 향한 움직임 381.보직개편과 학술활동 382. 한성경영학보 발간, 한성여자대학보 창간 391. 제1회 학위 수여식 개최 43
제2장 이희순 학장 취임 43제1 절 이희순 학장 취임과 새로운 도약 다짐 43제2절 남·여 공학으로 제2의 탄생 461. 제2의 탄생 남·여 공학으로 62. 남·여 공학체제 학도호국단 설치 47제3장 김옥형 학장 취임 49제1절 김옥형 학장 취임과 동창회 조직 491. 제3대 김옥형 학장 취임 492. 5개학과 증원 승인, 교직과정 설치 493. 한성대 동창회 조직, 탁구팀 강세 50제2절 학과 증과 및 직제개편 511. 직제개편과 보직개편 512. 제4회 학위 수여식 거행 513. 경제학과.도서관학과 증과 및 전학과 교직 과정 설치제3절 김옥형 학장 사임과 대학미전 수상1. 보직개편과 제5회 학위수여식 52
2. 종합관 신축교사 준공 533. 대학미전입선 및 동남아 해외연수 534. 김옥형 학장 사임 545. 안보 우수 서클 학교로 선정 55제3편 성장기 59제1장 강병규 학장의 취임 59제1절강병규 학장과 대학의 성장 59제2절 대학기구의 정비와 학사행정의 개혁 631. 한성대학 종합화 계획의 발표 632. 위원회 신설 633. 학사행정체제의 정비 654. 학부제 운영과 보직개편 67제3절 학문연 구체제 확립과 대학이미지 구축 691. 부설연구소의 설립과 활동 692. 국제교류와 대학 이미지 구축 72제4절 시련과 새로운 도약 741.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의 타계 74
2. 강병규 학장 퇴임 743. 새로운 도약 75제2장 홍순태 학장 취임 76제1절 홍순태 학장 취임 761. 제5대 홍순태 학장 취임 762. 학생복지관 준공 783. 각 위원회 통폐합 작업 79제2절 성장을 위한 진통 801. 제9회 학위수여식, 1985학년도 신입생 입학식 802. 축구부 창단, 지하철역명 개명 813. 성장을 위한 진통 81제3절 교사이 전 및 시 설확장 821. 제 10회 학위수여식, 1986학년도 신입생 입학식 822. R.O.T.C. 창설 및 보직개편 833. 교사이전 및 본관 신축 기공식 854. 졸업정원제 운영시행시책 86
제4절 시설획충 및 대학원 신설 871. 제11회 학위수여식 872.우촌관 준공 883. 보직개편, 졸업시험제 실시 89제5절 홍순태 학장 퇴임 901. 제12회 학위수여식, 신설학과장 임명 902.제 규정심의위원회 발족과 보직개편 91제3장 신영기 학장 취임 93제1절 신영기 학장 취임 931. 제6대 신영기 학장의 취임 932.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한 노력 963.과학관 준공 984. 전자계산소 설립 995. 북방문제 연구소 설립 1016. 출판부 설립 1027. 대학원 신설, 경영 ·행정 대학원 분리 증원 1028.연구분위기 조성 103제4장 원형갑 학장 취임 104
제1절 제7대 원형갑 학장취임 104제2절 교수확충 1091. 대폭적인 교수 충원 1092. 대학발전 연구위원회 발족 1123. 부속기관 활성화 1184.홍보활동 강화와 대학 이미지 제고 1285. 교육환경 개선은 교육 내실의 밑거름 1326. 체육을 통한 대외적 이미지 향상 139제4편 발전기 145제1장 종합대학교로 승격, 초대 원형갑 총장 145제1절 성년을 맞게 된 한성대학교 1451 개교 20주년 기념행사 1452.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 10주기, 추모집 「낙산의 삼학송」 「한성대학교 20 년사」 및 「대학백서」 발간 1493. 대학발전기금 조성사업 추진 150
4 사회교육관 설립신청서 제출 151제2절 종합대학교 승격, 초대총장 원형갑 박사 취임 151I. 종합 대학교 승격 1512. 초대총장 원형갑 박사 취임 152제3절 신임교수요원 초빙 및 강의평가 1521. 신임교수요원 초빙 1522. 강의평가제 정착 1543.객원교수제도 활성화 155제4절 교과과정 개편 및 입시제도 개선 1561. 교과과정 개편 1562. 교육과정 전면개편 1593.증원 및 학과 신설 1604 전국 9개 대학 본고사 실시, 우리대학 위상 높여 161제5절 대학환경 개선 및 공간확보 1651. 대학 환경 조형물 제작 및 공간획보계획 1652. 도서관 공간확보 및 정보검색실 신설 168제6절 대학발전과제 수행 및 학사협의회 1691. 1994년도 대학발전과제 및 연구책임자 선정 169
2 제주도에서 1995학년도 학사협의회 개최, 제2대 총장 선출 1703. 학위 수여식 및 입학식 1724. 대학 발전기금조성을 위한 ‘한성회화제’ 개최 173제2장 도약하는 푸른 대학, 제2대 이용남 총장 174제1절 도약을 위한 새로운 체제와 교육이념의 정립 1741. 이용남 총장선출과 취임 1742. 교육이념과 교육목표 재정립 176제2절 교육제도의 변화 1781. 교과과정 개편 및 학부제 확대 실시 1782. 특성화된 대학원 1783. 입시제도의 꾸준한 개선 179제3절 대학 정보화와 세계화 추진 1841 대학 정보화 1842. 국내외 대학괴 학술교류를 통한 세계화 192제4절 대학발전을 위한 연구제도 1941. 대학발전과제 연구제도 194
2. 교육개혁 추진 실적 1963. 학사협의회 제도 198제5절 교수요원 확충과 교수 연구활동 1991. 꾸준한 교수요원 확충과 대학 위상 제고 1992. 교수 연구활동 활발 201제6절 학생 복지와 학생들의 대외활동 2031. 학생 후생복지 향상 2032 학생들의 대외 활동 활발 204제7절 교내 환경 개선 2111. 건물의 신축 및 시설개선 2112.교내조경과 상징물 214제8절 화합과 조화를 위한 노력 2181. 한성 가족의 밤 2182. 지역민을 위한 사회교육 프로그렘 219제9절 변화를 위힌 전통괴 임시 이사체제 2201.총장대행 체제와 임시이사 체제 2202. 행정조적 개편과 총장선출위원회 구성 222제3장 변화하는 한성대학교, 이성근 총장 224
제1절 제3대 이성근 총장 취임과 보직개편 2241. 이성근 총장 취임 2242. 보직개편 227제2절 대학편제의 변화 2281 학장제 신설 2282. 모집단위 통폐합과 학부제 실시 2293. 대학원 증과·증원 230제3절 교육공간의 확대 2311. 공간확충 계획수립 2312. 외부건물 매입 2323. 교수회관, 도서관, 학생회관 별관 착공 233제4절 최우수 대학으로 거듭난 한성대학 235제5절 이사회 구성의 변동 243제6절 변화하는 한성대학 245
1. 우수교수 확보 2452. 벤처창업지원센터 개편 2463. IT(Information Technology)의 중심부로 받돋움한 한성대학 2484. 외국과의 활발한 교류 2495. 3,700명의 인재배출 216 내실을 다진 중안도서관 2517. 우리대학 학군단 129-1 학군단으로 승격 2528. 제 증명서 인터넷 발급 및 전송서비스 개시 253제5편 21세기 한성대학교 모색기 257제1장 한성비전 21세기 257제1절 비전 21기 발전계획의 기본구성 257제2절 중장기 발전계획의 주요지표 2581. 중장기 특성화 계획 2582 종합적 중장기 발전계획의 주요지표 261제2장 21세기 도약의 염원 267[부록] 273
1. 연혁 2732.학교법인 2783 조직 및 기구 2814.교원 3235.직원 3426.학생 3487.재정 3608.행정 3629.시설 381편집후기 387표목차<표 1> 신설 위원회 명칭과 위원명 64<표 2> 학부명과 소속학과 및 학부장 명단 67<표 3> 4개 부설연구소벙과 연구원 및 설립취지 70
<표 4> 사회산업연구소 분야 1월 연구실 명칭과 연구자 명단 71<표 5> 한성대 소식지(1호~24호) 130<표 6> 대학기념품 판매가격(1992년) 131<표 7> 교양선택과 학과별 이수학점 157<표 8> 영역별 교양선택 교과목 158<표 9> 신·구 교과과정 학점수 대비표 158<표 10> 1995학년도 신입생 선발고사 요강 163<표 11> 대학 특별위원회 현황 170<표 12> 1996학년도 본고사 출제의 기본방향 180<표 13> 1996학년도 본고사 과목 181<표 14> 1996학년도 전형요소별 반영 비율 181<표 15> 1996학년도 종합생활기록부 반영 비율 182<표 16> 1996학년도 종합생활기록부가 없는 자의 반영 방법 183<표 17> 각 위원회별 연구 현황 195<표 18> 1996학년도 대학발전과제 및 연구책임자 196<표 19> 자금소요 현황 266<표 20> 연도별 자금소요 현황 266
<표 21> 건설관계 자금조달 계획 267<표 22> 건축자금 조달 및 건축기금 사용 계획 267부록표 목차<부록 표 2-1-1역대 이사장 명단 280<부록 표 3-1-1> 역대 총(학)장 명단 284<부록 표 3-2-1> 역대 보직자 명단 286<부록 표 3-2-2> 역대 교무처장 명단 287<부록 표 3-2-3> 역대 기획연구처장(기획실장) 명단 287<부록 표 3-2-4> 역대 학생처장 명단 288<부록 표 3-2-5> 역대 총(사)무처장 명단 288<부록 표 3-3-1> 역대 학장 명단 90<부록 표 3-4-1> 역대 대학원장 명단 291<부록 표 3-4-2> 역대 특수대학원장 명단 291<부록 표 3-5-1> 역대 도서관장 명단 292<부록 표 3-5-2> 역대 전자계산소장 명단 293
<부록 표 3-5-3> 역대 사회교육원장 명단 293<부록 표 3-5-4> 역대 출판부장 명단 294<부록 표 3-5-5> 역대 학보사 주간 명단 295<부록 표 3-5-6> 역대 영자신문사주간 명단 296<부록 표 3-5-7> 역대 방송국 지도교수 명단 296<부록 표 3-5-8> 역대 교지편집실 지도교수 명단 297<부록 표 3-6-1> 대학본부 설치연표 298<부록 표 3-7-1> 학과별 설치 년표 303<부록 표 3-7-2> 설치학과(부) 및 입학정원 304<부록 표 3-8-1> 대학원 설치연표 309<부록 표 3-8-2> 특수대학원 설치연표 310<부록 표 3-8-3> 대학원 학과 현황 311<부록 표 3-9-1> 부속기관 설치연표 314<부록 표 3-10-1> 역대 연구소장 명단 315<부록 표 3-11-1> 역대 교수협의회 임원 명단 318<부록 표 3-11-2> 역대 직원노동조합 임원명단 319<부록 표 3-11-3> 역대 총학생회장 명단 322
<부록 표 4-1-1> 연도별 교원 현황 324<부록 표 4-1-2> 연도별 조교 현황 324<부록 표 4-1-3> 전임교원 임용 및 퇴직 현황 325<부록 표 4-2-1> 외국인 전임교원 현황 332<부록 표 4-3-1> 연도별 교원퇴직 현황 332<부록 표 4-4-1> 역대 겸임교수 현황 334<부록 표 4-5-1> 역대 대우교수 현황 339<부록 표 4-6-1> 1993년~1996년 객원교수 현황 340<부록 표 4-6-2> 1997년~1998년 객원교수 현황 341<부록 표 5-1-1> 일반·기술직 현황 342<부록 표 5-1-2> 직급별 현황 342<부록 표 5-1-3> 기능직 현황 342<부록 표 5-2-1> 직원임용, 승진 및 퇴직현황 344<부록 표 6-1-1> 학과(부)별 학생정원 현황 348
<부록 표 6-2-1> 졸업생 현황 351<부록 표 6-3-1> 대동제 현황 353<부록 표 7-1-1> 연도별 재학생 1 인당 교육바 현황 360<부록 표 7-2-1> 연도별 세입중 학생둥록끔 비율 361<부록 표 7-3-1> 연도별 세출중 인건비 비율 361<부록 표 8-2-1> 특별위원회 개최 현황 364그림목차<그림 1> 한성 대학교의 4인상 25<그림 2> 전자계산소 조직도 100<그림 3> 도서관 전산화 계획 123<그림 4> 교육이념과 교육목표 177<그림 5> 전자도서관 기술구성 186<그림 6> 1996년 조직기구도 202<그림 7> 2002학년도 기구조직도 281제1편 한성대학교 설립배경과 교육이념
제1편 한성대학교 설립배경과 교육이념
제1장 설립배경제1절 설립자의 생애와 창학정신1. 우촌 선생의 생애우촌(友村) 김의형(金義衡) 박사는 1904년 8월 25일(음력) 충남 공주군 탄천면 견동리에서 부친 김우창(金萬昌) 선생과 자당(慈堂) 경주이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남달리 엄격한 유교 가정에서 자란 우촌 선생은 유년시절을 고향에서 전풍적인 한학과 신학문을 수학하며 자랐다.
이 시절 고향에 있던 유년기의 우촌 선생은 서울서 내려온 구한말 군인 출신이자 일찍이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이은우(季般雨)라는 분이 세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다니면서 세상을 바라보눈 안목이 개화되었으며 장차 일제에 빼앗긴 민족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정신을 품게 되었다.특히 이은우 선생은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체조 등 체육을 수업시간에 많이 할애했는데, 어린 우촌 선생은 남달리 강건한 신체적 조건을 천부적으로 타고나 총애를 한 몸애 받았다. 훗날 선생께서 체육분야를 전공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인연과 무관하지 않다.고향에서 보통학교 과정을 마친 우촌 선생은 줍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종등교육과정을 마친 후 20세가 되던 1924년 현해탄을 건너 일본 동경으로 유학 길에 올랐다. 당서 식면지 ‘조선인’에게는 입학의 문이 매우 좁았던 일본체육전문대학(현 일본체육대학)에 입학한 그는 ‘식민지 백성’ 이라는 일본인 학생들의 멸시와 눈총을 굳은 의지로 극복하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우촌 선생이 체육을 전공하려고 한 데는 남다른 뜻이 있었다. 어린시절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은사 이은우 선생으로부터 평소 신체의 단련과 건강이 중요하다는 교육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우촌 선생 자신의 생각에도 과거 고루한 유학자들처럼 연약한 신체와 정신으로 는 향후 일제에 장점 당한 국권을 되찾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따라서 남들이 별반 관심을 갖지 않으나 사실 체육교육이 어느 분야 못지 않게 종요하다는 생각에서 체육분야를 전공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 유학 길에 오른 젊은이들은 대부분 법학이나 의학분야를 공부하고 돌아와 총독부 관리가 되거나 아니면 안정된 직업에 안주하기를 바랐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우촌 선생과 같이 처음부터 남들이 외면하고 있던 체육분야를 전공하려 했던 점은 외로운 낄을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 당시로는 대란히 어려운 결단이었다.교육자로서 우촌 선생의 출발은 1927년 3월 20일 일본체육전문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천안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집안 어른들과 주위에서는 일본 유학까지 마치고 돌아와 국민학교 ‘훈도’를 자청한 우촌 선생의 결심에 완강한 반대와 불만을 표했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교육자로서의 우촌 선생은 그후 공주(公州)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를 거쳐 1930년 4월 서울의 광신상업고등학교와 동덕여자고등학교의 체육교사로 봉직하다가 일제말기인 1939년 4월 경성여자의과전문학교(京城女子醫科專門學校) 교수로 재직하며 체조와 육상 등 체육 분야 전반의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체육인이자 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1945년 광복을 맞은 지 한달 만인 그 해 10월 우촌 선생은 오늘의 한성대학교의 모체가 된 한성여자 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과 이사장으로 여러 해 봉직하였다.한편,우촌 선생은 신생 대한민국의 체육발전사에 적지 않은 공헌과족적을 남겼다. 1961년 대한핸드볼협회 회장직을 시작으로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 이사를 거쳐 1966년 대한체육회 회장의 중책을 역임하는 등 한국 체육의 발전을 위해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이러한 '체육회 발전의 공적이 인정되어 우촌 선생은 1970년 12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였다.
우촌 김의형 박사는 1983년 3월 1일 이 땅을 떠나기까지 80여 전생애를 교육구국의 일념과 한국 체육의 발전을 위해 헌신 봉사한 교육자이자 체육인이었다. 그리고 전 생애 가운데 40여 성상을 낙산언덕에 웅비의 나래를 펼친 ‘한성’을 위해 바쳤다.2. 우촌 선생의 교육정신8.15 광복을 맞이하자 우촌 김의형 박사는 과거 오욕된 일제 36년의 식민통치를 초래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를 민족과 역사에 대한 소명의식을 품은 청소년에 대한 교육을 소홀히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판단 하였다. 따라서 광복 이후 가장 시급한 사업은 신생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 헌신 봉사할 수 있는 젊은이를 양성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1945년 10월 한성여자 중·고등학교를 설립한 우촌 선생은 아래와 같이 몇 가지 점을 한성학원의 건학정신으로 삼아 이를 교육 현장에서 실천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1) 역사소명의 고취역사는 시대의 흐름과 함께 변천한다. 이 변천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도리에 역행하는 사람은 역사의 이름으로 후세에 지탄을 받기 마련이다.이 같은 역사의 변천 속에서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참된 도리를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몸과 마음가짐은 교육을 통한 역사소명 의식의 배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우촌 선생은 일찍부터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자기가 하고 싶거나 이익에 결부된 일만을 찾아 하는 개인주의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개인적으로는 하고 싶지 않으나 자기가 소속된 사회의 필요에 의해 이를 피하지 않고 일생을 그 일에 매달리며 헌신 봉사하는 희생적인 삶을 사는 유형이 있다고 보았다.이 같은 두 가지 유형 중 이른바 역사의 소명에 합당한 삶은 말할 것도 없이 후자의 경우를 말한다.우촌 선생은 이와 같이 역사에 부름과 민족과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양성을 그의 첫 번째 교육사상이자,교육정신으로 삼았다.(2) 민족정신의 계승우촌 선생이 평생을 교육자로서의 외길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8·15 광복 이후 이 사회와 국가의 주인이 될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시대인식에서 비롯되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있다.
그러나 한편 어떤 정신의 젊은이들을 양성할 것인가에 대해서 또한 우촌 선생의 교육목표는 분명하였다. 즉 ‘한국정신’ 에 투철한, 말하자면 우리 민족에 대한 분명한 주인의식과 민족의식에 기초한 젊은이들을 교육하고 양성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우촌 선생은 1966년 10월 5일 한성학원 창립 21주년 기념식사를 통해 광복과 동시에 한성학원을 설립하게 된 동기를 아래와 같이 밝힌 바 있다.“일제의 압제에서 우리 민족이 눈물겹도록 배움에 굶주렸던 것과 815 광복과 함께 외국의 그릇된 풍조가 노도와 같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안일하게 좌시할 수 없어서 ‘한국정신’ 을 이어받아 국가와 이 사회를 위한 인재를 양성해야겠다는 의욕과 취지에서였다.”위에서 보듯 한성학원의 창학 이념과 교육철학은 ‘한국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젊은이들에게 우리 민족에 대한 투철한 민족혼을 심어주어 다시는 외세의 지배를 받는 오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아야겠다는 역사의식과 민족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우촌 선생은 일제 통치하 일본 최고학부의 고등교육을 받고 청소년들에게 민족정기 계승의 불빛을 밝히기 위한 교육자의 길을 택하였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경성여자의과전문학교(京城女子醫科專門學校) 교수 등 각 학교의 교직생활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정기의 혼을 불어넣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바 있다.그는 일제 치하에서 일인들이 한인을 멸시하고 그들의 우월성을 뽐내는 태도에 한민족의 우수성과 항거의 기개를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이는 대부분의 지식인이 지식은 많으나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의 지와 용기가 부족했던 점을 비교할 때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말하자면 진리탐구는 아무리 훌륭한 지식과 논리를 갖고 있더라도 이를 실천의 길로 옮기지 못하였을 때 그 진리는 그 순간 빛을 잃게 된다.⑶ 지(智)·덕(德)·체(體)의 조화
우촌 선생이 제시한 민족의 소명의식 계발과 민족정신을 불어넣어 주는 민족교육의 토대 위에 지식과 덕성(德性),그리고 체력을 갖춘 참 지혜의 실력 있는 지성인과 신체적으로 건강한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을 한성학원의 교육 지표로 삼았다.요컨대 ‘한국 정신’ 을 바르게 가르치는 한편 그 위에 지·덕·체를 조화 있게 갖춘 ‘참 한국인’ 양성을 그의 교육목표로 삼았던 것이다.교육의 '일차적인 목적과 목표는 피교육자에게 새로운 지식을 가르쳐 알게 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말과 같이 교육의 일차적인 목표는 무지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다.그러나 ‘안다’ 는 것은 무한한 것이기도 하다. 단순한 사실에 대한 지식에서 시작하여 복잡하고 고둥한 것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여기서 낮은 데서 높은 곳으로 전개하여 나가는 발달과정은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이 같은 교육을 통하여 얻어진 산물이 곧 지력이다. 이 지력을 가리켜 사고라고도 하며, 현대 사회는 보다 생산적인 지력을 요구한다.
한편 지력의 교육과 함께 참다운 인간 형성은 인간의 품성도야가 전제된다. 즉 인격적인 교육이 결핍될 때 학습자의 올바른 가치 정립이 불가능한 법입니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교육은 지력의 신장 못지 않게 도덕성이 내포된 정의(情意)의 개념이 그 교육 속에 담겨져야 한다.어느 시대, 어느 나라이건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훌륭한 인간의 배양,즉 ‘품성도야’ 와 ‘인간교육’ 의 근본을 도덕교육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교육을 통하여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더 나아가 그 사회의 번영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구성원을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교육의 목적은 의식적이며 의도적인 데서부터 출발한다.특히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지칭될 만큼 예의와 도의심 을 모든 가치 관에 우선하는 사회 윤리 로 지 켜 왔다. 우촌 선생은 이 점을 기회 있을 때마다 늘 강조하며 예의도덕교육의 중요성을강조하였다.
우촌 선생은 덕성의 함양을 그의 중요한 교육의 덕목으로 삼았다. 우촌 선생은 기회 있을 때마다 ‘덕(德)은 충(忠)과 효(孝)와 선(善)의 기본 바탕이 된다’ 는 점을 강조하였다.매사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한 마음과 태도를 보이는 것이 덕성을 함양시키는 첫 걸음이라고 생활 속에서 본을 보여 온 우촌 선생은 항상 사람은 인간답기 위해 매사 겸허하고 성실한 몸과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그는 평소 주위 사람과 제자들에게 “실없는 생각은 정신을 상하게 하며 망령된 행동은 화를 자초하는 법이며, 한 때의 분함을 참으면 백년의 근심을 면한다” 는 고사를 즐겨 인용하였다.뿐만 아니라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사람의 성품은 물과 같아 그 성품을 한번 놓아버리면 돌이킬 수 없어 반드시 양심의 제방을 쌓아 제어하여야 한다.’ 는 점과 ‘귀한 재물은 없어져도 쌓은 덕은 흐트러짐이 없으며, 충성과 효도는 덕에서부터 시작된다’ 고 하였다. 말하자면 올바른 인간의 성품은 평소 덕성을 꾸준히 쌓을 때 비로소 바람직한인간으로 성장해나갈 수 있음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끝으로 우촌 선생의 교육사상이자 교육이념으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체육교육을 남달리 강조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는 점이다. 사실 아무리 지력과 덕성을 갖춘 사람이라도 체력이 뒷받침 해주지 못하면 절름발이,용기 없는 기형적인 인간이 되기가 십상이다.일찍이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정신교육과 신체교육의 심신일원론(心身一元論) 교육이 강조되었던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이다.체육활동은 한 개인의 신체에 잠재적으로 감추어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여기서 체육활동을 보다 활발하게 촉진시키는 것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보다 건강하고 ‘인간답게’라는 희망에서부터 출발하며,이 같은 체육활동의 효과는 한 인간에게 주체성과 용기 그리고 결단성과 추진력을 배양시켜 주는 밑거름이 된다.제2절 한성학원의 설립
1. 설립배경⑴ 8.15 정국과 한국사회한성학원이 낙산기슭에 터를 잡은 것은 1945년 10월이었다. 따라서 한성학원의 창립은 광복과 역사적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는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현대사가 걸어온 발자취는 간단치가 않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 36년간 질곡과 수난의 고통을 딛고1945년 8월 해방을 맞이했으나 그 광복의 감격과 기쁨은 잠시 잠깐이었으니 이후 정치 사회적 혼란과 동족간의 싸움 그리고 민족분단 이후 계속된 정변 속에서 민족과 국가적인 가난의 아픔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교육입국을 향한 백년대계를 전망하며 인재양성 곧 교육사업은 계속되었으니 오늘의 세계 속에 명실상부한 위상을 정립한 대한민국을 건설하기까지 교육사업이 미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한성학원 또한 신생 대한민국 건설과 함께 이 땅에 태동되어 인재를 배출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할 것이다.
앞서 일제 통치하 우리 청소년 교육의 장인 경성여자의과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하였지만 그때는 교사로서의 역할이었고,이제 광복된 조국에서 젊은 청소년의 배움의 터전을 세우고 교육백년대계를 실현시켜야 하겠다는 우촌 김의형 박사의 원대한 포부가 한성학원 설립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일의 젊은 인재육성 및 발굴은 앞날 훌륭한 2세를 낳아 키울 여성교육에 힘써야 하겠다는 것이 한성학원 설립의 또 하나의 배경이라 하겠다.(2) 청소년 교육을 통한 영재교육나라는 망하여도 역사는 망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비록 나라가 망해도 언젠가는 그 나라를 다시 재건할 수 있으나, 역사가 망하면 다시는 이 지구상에 그 나라의 재건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일찍이 기원전 나라는 망하였지만 유대의 역사는 죽지 않고 오랜 기간 면면히 이어져 1948년 나라를 되찾았다. 그러나 금(金)나라나 요(透)나라는 오랜 시간 세계1등 국가로, 그 위세를 떨쳤던 중국 본토에 비록 일부이지만 정복왕조(征服王朝)까지 세웠던 나라들이지만 나라가 망한 후, 그 역사마저 끊겨 이 지구상에서 이들 나라의 재건 따위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이 우리 인류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이같이 비록 나라는 망하였어도 역사는 죽지 않고 이어져 언젠가 다시 나라를 되찾게 하는 바탕의 힘은 청소년 교육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나라를 잃은 청소년들이지만 자기 조상의 역사와 말과 글과 정신을 잃지 않고 이어간다면 언젠가 나라를 되찾을 기회가 올 것이다. 유대 젊은 청소년들은 나라를 잃고 오랜 기간 세계 각지에서 흩어져 삶을 이어가면서도 자기 조상의 역사와 말과 풍습을 잊지 않고 끗꿋하게 동류의식을 꾀하여 드디어는 1948년 5월 이스라엘 독립을 쟁취하였던 것이다. 어느 문명사학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세계 어디에 가서도 하루세끼 중 반드시 한끼는 꼬삽을 먹는 동류 의식의 확인이 오늘의 이스라엘 독립을 가져온 요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꼬삽이란 우리나라 조밥과 유사한 식품으로 유대사람들은 식생활 풍습까지 오랜 기간 버리지 않고 간직해 왔던 것이다. 나라를 되찾은 이스라엘이지만 수억의 아랍 여러 나라 톰바구니에 끼여 여러 차례 전쟁을 겪고서도 꿋꿋하게 이 지구상에 이스라엘 깃발을 휘날릴 수 있는 그 저력은 이스라엘 청년들의 역사의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젊은 청소년들의 역사의식의 효율적인 고취는 오직 청소년 교육에서 비롯된다.
우촌 김의형 박사는 일찍이 청소년 시절, 우리 한국이 비록 일본에나라를 빼앗겼지만, 우리 한국 젊은이들이 한국 혼이 죽지 않고 불타고 있음에서 언젠가 다시 나라를 일본으로부터 되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었다고 그 생전에 그와 가까운 교육동지들에게 들려주곤 하였다. 이 같은 그의 확신은 앞으로 우리의 역사를 젊은 청소년들에게 올바르게 가르쳐 한국의 역사가 면면히 이어 지켜져, 조국광복의 한줌의 밑거름이 되어야겠다는 굳은 신념이 교육자의 길로 나서게 된 동기였다. 구한말 개화파와 수구파의 격심한 는쟁으로 일찍부터 서구 신문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여 이로 인하여 우리보다 몇 발짝 앞서 서구 신문화를 받아들인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국치를 당하였다. 이 같은 나라 잃은 설움을 가슴에 안고 적도(敵都) 일본 동경을 비롯한 교토, 오사카 등지에서 앞선 신문화를 배우고 있는 한인 유학생들은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을 크게 느꼈던 것이다. 우촌 김의형 박사도 이러한 한인 유학생 가운데서도 가장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일본에 나라를 앓는 국치를 당하였던 것도 일본보다 신문화와 청소년들의 신교육이 단지 몇 발 뒤늦었던 것에 기인하며, 그리하여 이렇게 멀리 이국 땅 일본 하늘아래에서 나라를 잃은 서러움과 쓰련 가슴을 안고 공부를 하는 것인 만큼, 일본인 학생보다 더 열심히 배우고 익혀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앞선 일본의 신문화를 익혀 고국에 돌아가 우리 청소년들을 가르쳐서 언젠가는 광복의 한줌 밑거름을 만들겠다고 재삼 마음속으로 다짐하였던 것이다. 특히 김의형 박사는 일본에서 학문연구에 정진하
면서, 틈틈이 일본이 오랜 기간똥안 우리 한국문화의 영향을 받아오다가 최근 1세기도 채 안 되는 극히 짧은 기간동에 우리를 앞서 우리가 그들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국치를 왜 당하게 되었는가를 곰곰이 생각하여 원인규명도 하였던 것이다.
우촌 김의형 선생은 일제 36년반애 되찾은 우리 한국의 광복이 다시는 외세에 의하여 침해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독립의 기초가 되는 청소년 교육에 있음을 다시 한벤 절감하였던 것이다.한편 해방정국의 좌·우익간의 피나는 동족상잔은 전일 당파싸움을 연상한 김의형 박사로 하여금 띤족 장래에 암담한 그늘을 느끼게 하여 다음 세대 주인공언 청소년들애게 올바른 나라사랑과 겨레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어린 청소년 시절부터 올바른 애국관과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이 급선무임을 착안하여 우선학교룹 세우고 젊은 청소년을 가르쳐야겠다는 굳은 신념이 한성학원설립의 또 하나의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그러고 에로부터 효자, 충신을 만드는 근본은 어진 어머니의 정성어린 가정교육에 있었음을 돌이켜 생각한 우촌 김의형 선생은 여성교육기관 설립을 착안하였다.
2. 한성학원 설립과 교세확장(1) 한성학원 설립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을 맞은 우촌 김의형 선생은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은 우리 조국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과제는 미래 우리 한국의 주인공이 될 젊은이 교육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예로부터맹모삼천이란 말이 전해 오듯이 미래 훌륭한 어머니를 양성하는 여성교육의 비중이 크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즈음 한 친지로부터 성북구 삼성동 2가 389번지에 위치한 일본인이 경영하던 경성여자기예학교(京城女r技藝學校)를 인수할 것을 제의 받게 되었다. 이 경성여자기예학교는 대지 2.290평에 세워진 373평의 작은 교사에, 일본인 여자중학교(6년제)를 졸업한 젊은 여성들에게 시집가기 전까지 바느질, 꽃꽂이, 수예, 재봉 따위를 가르쳤던 신부수업의 미니스쿨이었던 것이다. 우촌선생의 친지 가운데에는 “이 같은 작은 학교를 전별금(歸·別金)까지 주고 인수할 것까지 뭐 있겠느냐”고 반류하는 이도 있었다. 여기서 전별금이란 패망한 일본인들이 남한에서 경영하던 기업이나 가옥 따위를 두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이들에게 위로금으로 지급했던 돈을 말한다. 공산 치하의 북한에서는 전별금이란 생각조차 못하였다. 우촌 김의형 선생은 이 같은 만류에도 겸허하게 이 작은 미니학교를 앞으로 기존의 어떤 큰 학교보다 더 훌륭한 학교로 키울 것을 마음 속 깊이 다짐하였던 것이다. 우촌 선생은 평소 존경하던 페스탈로치 선생이 일찍이 부르크 지방에서 빈민학교를 열고 훌륭한 인재를 키워 후일 스위스뿐만 아니라, 전세계 교육계에 새로운 교육사상의 출현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을 돌이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학습자에게 학습활동을 통한 능력계발 및 인간성 도야에 역점을 두었음을 상기하고, 이 인수한학교를 여성교육의 참된 명문으로 만들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우촌 선생은 이렇게 마음속으로 굳은 각오를 하고 이 미니스쿨을 언수하였지만, 당시 미군정 당국은 이 학교의 재정과 시설의 미비 등을 들어 학교법인으로서의 허가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우촌 선생은 당시 문교부장관(현 교육인적자원부장관에 해당)을 3번씩이나 찾아 그의 포부를 피력 그로 하여금 우촌 선생의 끈질기고 뜨거운 교육열의에 감명을 받게 하여 조건부 인가를 얻어내게 되었다. 드디어 1945년 10월 5일 재단법인 한성학원 설립과 동시에 총 학생 3백 여명의 한성고등여학교를 개교하게 되었고 1946년 7월 5일 한성여자중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 교세 확창과 지 · 덕 · 체 교육의 구현한성여자중학교 개교의 벅찬 첫발을 내닫기는 하였지만, 좌 · 우익 해방정국의 혼란이 이 학교에도 불어닥쳤다. 일부 교사와 학생 가운데, 좌익사상에 빠져 학사행정을 방해하는 사태도 있었지만, 김의형 교장의 확고하고도 신념에 찬 교육정신은 이 같은 좌익분자들을 덕으로써교화시켰다. 그러나, 머지않아 6.25 동란과 9.28 수복, 1.4 후퇴, 그리고 수포 서울수복 등 동족상잔의 전란 속에서도 한성학원 발전에 대한 굽힘 없는 의지는 변하지 아니하쳤다. 1951년 10월 1일, 수도 서울 수복 후, 서울 시내의 통서남북 네 곳에 잔류 중 · 고등학생 훈육소를 개설, 배움에 목말라하는 3천명 학생이 모여들었다. 세계각국의 추세에 따른 문교부 방침에 의해 한성여자중학교도 1952년 5월 31일, 한성여자중학교와 한성여자고등학교로 빨리하고 두 학교의 교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 후, 교세확장에 힘써 돌산인 낙산을 갈고 닦아 15,000평의 대지 위에 4층 철근 콘크리트인 건평 1,200 평의 새 본관 건물을 신축하는 한편, 연건평 1.100 평의 4층 과학관· 건물을 지었다. 이어 강당, 체육관 풍원 짓고 볼모의 낙산 언덕에 늪 진될-래와 각종 수목을 심고 의화쟁이라는 정자를 세워 서울 시내 여자고등학교 캠퍼스 가운데 가정경관이 아름다운 캠퍼스로 탈바꿈시켰다. 한편, 지·덕·체교육에 힘써 앞닫 어진 부덕을 가진 현모양처 고I 육을 교육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인다는 우촌의 교육철학은 변함
이 없었다.
제3절 한성여자대학 인가1. 한성여자대학 인가 발족우리 나라 교육계의 거성인 우촌 김의형 박사는 한국여성전문영재 양성기관인 한성여자대학을 1972년 12월 문교부로부터 설립인가 받아 창립하였다.일찍이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는 일제치하 암흑기에 교육만이 조국광복을 앞당기는 길임을 확신하고 교단에 선 이후,광복을 맞은 해인 1945년 10월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 2가 389번지 소재에 한성학원을 창립,6년제 한성여자중학교를 설립하였다.1953년 1월에 재단법인 한성학원을 문교부로부터 인가 받았으며,1955년 2월에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는 충남 당진군 송산면 동곡리 소재 한성염전 10만8천평을 수익사업으로 재단법인 한성학원에 희사, 교육재정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1955년에 중·고 분리에 따라 고등학교 9학급, 중학교 12학급으로, 1959년에 고등학교 18학급, 중학교 30학급으로 확장 발전을 시킨 바 있다. 1972년 10월에 한성여자대학은 문교부로부터 야간 4년제 여자대학으로,입학정원 국어국문학과 30명, 영어영문학과 30명, 비서학과 20명,가정학과 30명,의상학과 20명,생활미술학과 20명 둥 모두 6개학과 150명으로 인가를 받게 된 것이다.한성여자대학 개교에 즈음해 초대학장에 취임한 김의형 박사는 1972년 12월에 다음과 같은 취지의 내용이 담긴 개교사를 발표하였다.60년대 중반부터 우리 나라에서 일기 시작한 조국 근대화 운동은 동남아 및 남미 개발도상국가들간에 깊은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다. 이들 개발도상에 있는 나라들이 조국 근대화 운동이 국가발전을 위한 운동으로 표현된 말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경제면을 비롯한 여러 국가 생활 면에서 발전의 의욕을 담고 있기 때문에 후진 개발도상국들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경제를 내세운 국가발전 계획과 그 전략은 양질의 교육 성과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특히 경제의 중요성만을 강조하고 교육적인 면을 등한시하면 자칫 인간소외 현상마저 초래하기 쉽다. 그러므로 국가발전 계획에 경제전략 못지 않게 참다운 인간교육이 병행되어야 한다. 여기서 참다운 인간교육이란 바람직한 가치관이 정립된 교육을 뜻한다.이제 70년대에 들어선 우리 나라는 오랜 후진국에서 탈피, 당당히 중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음을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그쳐서는 아니 되며 선진국을 향한 목표설정과 이에 대한 실천이 우리에게 당면과제로서 주어졌다.이 같은 선진국 달성을 목표로 한 국가발전이란 우리가 당면한 이 시점에서, 미래 우리 나라를 짊어지고 갈 전문인재를 육성하는 한성여자대학의 탄생은 우리 국가발전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고 확신하는 바다.앞으로 우리 한성여자대학은 이 같은 시대가 요청하는 교육을 통한 국가발전계획을 펼쳐 가는 물줄기의 흐름 속에서 그 맡은 바 임무를 다하며, 우수한 여성전문 인력을 배양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우리대학은 교육을 통한 영재 발굴과 계발에 힘써, 학문 연마를 통한 개인의 창의력을 높여 앞날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 양성을 그 교육목표의 하나로 삼기로 하였다. 그리고 지·덕·체(智·德·體)의 삼위일체가 된 이 세 가지 요소 중에 어느 하나도 빠뜨림이나 빈틈이 없는 균형 잡힌 교육을 구현해 펼쳐나가고자 한다.
한편 이 같은 지·덕·체(智·德·體) 잡힌 교육의 구현은 학교시설 환경 못지 않게 교수의 질에서 가름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여기서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꾸준한 교수의 질을 높이기 위해 종합 장기교육계획의 일환으로 쉼 없고 계획성 있는 교수들의 교육연구 분위기 조성에 힘써 나가고자 한다.그리고 지난날 순국선열들의 애국애족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학생들에게 계승 진작시켜,후세에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바람직한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인재로서 육성시키는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 나라 교육이념인 홍익인간 교육의 나라사랑 마음의 함양과도 일치되는 일이기도 하다.한편 반공의식 고취로서 국가안보에 빈틈없는 통일 역군 배양을 위해 확고한 국가관 확립에도 힘쓸 것이다. 이는 나의 교육신조로서 나의 일생을 통해 항일 반공의 신념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끝으로 우리 나라 여성 최고학부의 막내로 태어난 우리 한성여자대학은 재단·학교,그리고 교수·학생이 합심, 협력하여 빠른 시일 내에 한국의 명문교의 하나로 만들어 가꾸어 나갈 것을 굳게 다짐하며 개교사에 갈음하고자 한다.
한편 이희순 이사장은 한성여자대학 개교에 즈음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축사를 하였다.우리가 흔히들 말하기를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이를 셋으로 똑같이 우리 생활과 관심 및 사고의 대상인 것처럼 가름하려고 들합니다.그러나 기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관심사는 과거의 것이 아니면 현재의 것입니다. 한편 미래의 것도 없지 않으나, 있어봐야 기껏 1, 2년 앞이나, 한껏 길어봐야 10년 앞의 것에 불과합니다.돌이켜보면 우리의 역사적 지식은 이 같은 과거로는 수 천년에 뻗어있음에 반하여 앞날을 내다보는 역사적 지식은 고작 10년도 뻗지 못합니다.이같이 미래는 그저 막연하고 때로는 불안한 구름이나 안개처럼 앞을 막는 것과 같고 그것은 돌이켜 몇 천년의 과거를 돌이켜 돌아보는 것보다도 선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앞을 내다보기 힘든 우리의 역사적 지식은 교육을 통해서만이 보다 선명하게 미래를 내다보고 건설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교육의 비전과 힘이 숨겨져 있습니다.
특히 20세기에 대한 오늘의 미래는 어제의 미래와 엄청나게 다릅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미래는 어제의 미래와 달리 급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그것은 새로운 발명 및 발견 그리고 새로운 제도 및 새로운 양식이 쉼 없이 새로운 것들을 계속 터져 나오게 하고 있으며 우리 눈앞에 이러한 것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교육도 이 같은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이에 뒤떨어지지 않는 미래를 내다본 한치의 오차도 없는,빈틈없는 바람직한 교육관의 확립과 교육 내용이 선행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한편 이 같은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여성에 대한 종래 구속적이고 그릇되고 안일한 인식의 굴레에서 벗어나 남성과 모든 분야에서 명실상부하게 실질적으로 평등한 미래에 대한 준비와 각오가 새롭게 정립되어야 할 전환점에서 있습니다. 이 같은 사회 각 분야에 걸쳐 명실상부한 미래를 향한 무대의 설계는 오직 여성 최고학부의 교육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20세기 세계 속에서 오늘 우리 한국은 앞으로 30년 남짓한 다가오는 21세기 2천년대 세계의 움직임 속에 남의 뒤를 따르는 수동적이 아닌 지구촌을 움직여 가는 능동적인 존재 곧 다름 아닌 우리 청소년 세대입니다.이 같은 세계사적인 전환기에 대한 우리대학가에 한성여자대학의 탄생은 우리 나라 여성계에 새로운 희망이요, 우리 나라 대학가에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특히 여성 최고학부의 교육은 심오한 전문적인 학문 연마와 이에 못지 않게 사랑과 믿음의 성실하고 근면한 여성상의 확립이 무엇보다도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성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다같이 아름다워야 합니다.우리 한성여자대학은 이러한 21세기 미래를 향한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사회에 희망의 등불이 되고,국가 사회에 봉사의 기수가 될 여성 지도자 양성을 우리대학의 교육목표로 삼을 것입니다.끝으로 우리 한성여자대학은 우리 사회에 부응하는 진실 되고 성실하고 참된 교육 혁신을 통하여 미래를 향한 한 치의 빗나감이 없는 여성 인재양성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굳게 다짐하며 축사의 인사에 갈음합니다.
2. 한성여자대학 인가의 일화한성여자대학 설립인가가 있기 까지 당시 문교부장관이었던 민관식 장관의 공이 컸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수도권 지역 대학설립 억제를 국가정책으로 삼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민관식 문교부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재가를 얻기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민관식 문교부장관과 우촌 김의형 박사는 대한체육회 발전에 힘써 온 사이였으며,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안호상 박사와 이 두 사람 사이 또한 민족지도자들로서 깊은 인연이 있었다는 점이 한성여자대학 설립인가에 보이지 않는 작용을 하였던 것이다.민관식씨가 문교부장관에 취임 전에 대한체육회장으로 있을 당시 방콕 아시안게임에 참석,식전행사에서 일사불란하게 펼쳐지는 카드 섹션을 처음 대하고 내심 감탄하고 돌아온 바 있었다. 귀국 후 대한체육회 사무국 임원을 당시 카드 섹션 수준이 세계 제일 높다는 캄보디아에 파견, 카드섹션 연출 방법을 익혀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무국 임원이 그 연출 방법을 배워왔지만 이를 구현해 줄 학교가 나서주지 아니하였다.
민관식 대한체육회장의 이 같은 고민에 처함을 보고,당시 대한체육회 이사직에 있던 우촌 김의형 선생은 한성여자고등학교장으로서 카드 섹션 구현을 시켜 전국체전의 근대화를 돕게 하였던 것이다.민관식 대한체육회장이 문교부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 이 같은 인연이 많은 도움이 되어 한성여자대학 설립인가의 재가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제2장 건학이념
제1절 한성학원의 교육이념1. 한성학원의 교육이념한성학원은 진리와 지선을 교육이념으로 삼아 설립되었다. 여기서 진리라 함은 교육기관의 궁극적인 목적이 진리탐구라는 데 있다는 보편적인 의미에서 출발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한성학원의 교육이념에 담긴 진리의 의미는 이 밖에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서의 말씀에서 보듯 인간이 추구하는 '참 자유로움'을 뜻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로움을 누리기에 앞서 진리를 깨달아야 하며 이를 위한 사명이 교육기관에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교육기관을 흔히 '진리의 전당'이라고 지칭하는 연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성학원의 또 하나의 교육이념인 지선(至#)역시 진리의 개념과 동일한 선상의 덕목(德)에 해당한다. 본래 「대학(大學)」의 '지어지선(止於至善)'에서 비롯된 이 말은 '더할 수 없는 지극한 선(善)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자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의 완성을 위하여 수득(修得) 할 대학의 도는 사람의 본성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사리를 올바로 인식할 영명(英明)한 재덕(才德)을 개발하여 지고(至高)의 선(普)에 이르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결국 학문을 완성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도 지선(至善)을 목표로 할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고 또한 학문추구의 결실도 선(善)함으로 귀결되는 법이다. 이와 같은 선한 인성계발을 한성학원의 교육이념으로 삼았다는 것은 진리탐구의 근본을 올바로 인식하였다는 견지에서 한성학원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전을 확고히 해주고 있다. '진리는 궁극적으로 선에 이른다'는 깊고 오묘한 건학정신은 우리대학의 인문, 사회,예술, 자연학부 등 전 분야의 학문영역에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케 해 줄 것이며 바람직한 학문활동을 보장케 해 줄 것이다. 그리하여
학문연구를 통한 인성의 계발은 새로운 이론의 정립과 더불어 이 시대가 요구하는 교육기관의 사명이며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바람직한 민주시민과 사회의 지도자,더 나아가 건강한 한국인을 육성하기 위한 좌표인 것이다. 따라서 전 한성인은 이러한 훌륭한 건학 이념의 뜻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실천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예컨대 상징적이고 전시적인 교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진리,지선의 참 의미를 깨우쳐 생활하는 교육인이 될 때 한성학원의 교육이넘 은 한성인의 활력 소로 영원히 빛을 발할 것이다.
2. 교시(校是)초대 학장 김의형 박사는 우리대힉- 교시(校是)를 진리(眞理),지선(至善)으로 삼고,건학이념으로 ① 진리탐구 ② 인격도야 ③ 인재양성으로 할 것을 밝혔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충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 될 수 있을 것이다.
(1) 진리탐구진리탐구는 상아탑의 본연의 임무요 사명이다.진리란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 타당한 논리의 법칙이요,참된 도리를 뜻한다. 이 같은 진리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규정되어 왔다. 곧 새로운 시대에는 이에 부응한 새로운 지식이 요구되는 법이다. 그러나 사물의 근본원리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 원리를 밝혀내기 위하여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온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이를 탐구하기 위해 무엇보다 창의력 개발이 있어야 한다. 우리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무한한 창의력을 개발,창출하여 인류문화 창달에 기여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대학교육의 중요한 목표이자 목적이라 할 것이다.문화란 인류의 산물로써, 인간에 의하여 창조되고 생성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선조로부터 대대로 전승되어 온 하나의 민족적인 유산이다.이 같은 문화의 전승은 진리탐구를 전제로 계승 발전한다.
한편 진리의 탐구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탐구의 올바른 자세가 요구된다. 사물을 올바로 보는 시각 및 탐구의 바른 자세가 확립되어 있지 않다면 진리를 찾아낼 수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진리 탐구의 자세는 어느 시대 어느 환경 속에서도 흔들림이나 굴하지 않고 참된 도리를 찾아 밝혀 나가는데 있다. 따라서 우리대학의 첫 번째 교육목표인 진리탐구의 구체적인 시행 목표로서 진리 탐구 외에 창의성 계발과 올바른 가치관의 확립을 덕목으로 설정하였다.(2) 인격도야우리대학의 두 번째 교육목표는 인격도야이다. 대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전당이자, 인격도야의 장이다. 따라서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는 것 이 많은 사람이 라도 그 사람됨이 바르지 못한다면 그는 올바른 사람이라 할 수 없다.올바른 사람은 세상의 시류에 끌려 다니지 아니하고 참된 도리를바르게 지켜 나가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일쩍이 우리 동양에서는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사람은 학문 연마와 함께 인격수양어 1 힘써 덕을 쌓는 일을 중하게 여겨왔다. 인간으로서 참된 도리를 지켜가며 살아가지 않는 이는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속마음과 다른 말이나 몸가짐을 하거나 자기 고접을 내세우는 사람을 바른 인격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즉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도 인격을 갖추지 못했을 때 그 사람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평가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움이 넓어가고 깊어갈수록 그에 비례하여 올바른 가치관이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 먼 앞날을 내다보며 바른 몸과 마음가짐을 가지고 행하지 아니한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의 지성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 는 말이 있듯이 한 인간이 인격을 도야하는 데 있어 전제조건의 하나가 건전한 신체의 단련이다. 특히 우리대학의 경우 설립자 우촌 선생의 교육이념 가운데 체육교육은 매우 종요한 비중올 차지하고 았다. 건강을 잃을 때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올바른 지식의 함양과 함께 건전한 육체 단련을 위한 이원적 교육이 강조된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덕을 쌓은 이라도 건강하지 못하면 용기와 과단성과 추진력의 결핍으로 그 배운 바 참뜻을 바로 실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여러 교육자들에 의해 지식교육 못지 않게 체육교육이 강조되었던 것도 여기에 있었다. 요컨대 개인의 인격도야는 물론 민족 구성원 전체의 건전한 인격과 건강한 사회인을 양성하기 위해 체력을 단련하며 연마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대학교육의 과제이자 목표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오늘날 민주시민사회에서 아무리 배운 것이 많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녔더라도 그 사회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그 사회로부터 환영받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작고 변변치 못한 일이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일과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할 때 비로소 민주시민으로서의 자격이 부여되는 것이다.이상의 점에 유념하여 우리대학은 두 번째 교육목표로 인격도야를설정하였으며 그 실천 덕목으로 첫째, 덕성의 함양 둘째, 건강한 신체의 단련 셋째,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인간상을 우리대학의 또 하나의 덕목으로 삼은 것이다.
(3) 인재양성우리대학이 설정한 세 번째 교육목표는 인재양성이다. 대학의 사명은 국가사회에 유익하고 유능한 언재를 양성하는데 있다. 대학은 그나라의 최고학부로서 예로부터 국가의 고급 인재양성 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해 왔다. 역사적으로 우리 나라의 최고 교육기관에서는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재양성을 기본적인 목표로 삼고 ‘배달겨레’의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는 교육에 모아왔다. 이를 한 마디로 함걷뜸하고 있는 교육이념이자, 교육철학이 홍익인간 구현이다.홍익인간 사상은 우리 배달겨레의 건국신화이자 단군 조선의 건국이념을 함축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이다. 여기서 단(鎬)이란 ‘밝달’이라 하여 ‘밝은 땅’이란 뜻으로 ‘배달’이라고 전해 왔으며, 우리가 말하는 ‘한얼’은 ‘단일민족’또는 ‘백의빈족’을 의미하며, 시조 단군의 혈통을 그대로 계송하였음을 뜻하는 사상이다. 그러고 ‘홍익인간’이란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정신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이자 오늘날 우리 교육의 최대 덕목으로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 정신과 사상에 부합한 인재 양성을 우리대학의 교육목표의 실천덕목의 하나로 삼았다.따라서 우리대학은 이 덕목의 실천을 위해 첫째,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과 민족정신에 투철한 ‘참 한국인’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다시말해 우리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불어넣어 한민족에 대한 주체성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것이다.둘째, 건전한 시민의식을 소유한 지성인을 양성하는 일에 주력하고자 하였다. 우리 민족은 유구한 역사에 비하여 근대적 시민의식에 기초한 민주사회를 건설한 것은 1945년 해방 이후이다. 따라서 장구한 민족사에 비해 매우 일천하다.최근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이기적 개인주의나 공공의식의 절대 결여 현상도 우리사회가 진정한 의미의 민주시민으로서의 훈련과 경험을 축적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 할 수 았다. 따라서 향후 우리 사회가 진정한 민주시민사회 건설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대학에서 젊은이들에게 건전한 시민의식을 고취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선챙되어야 할 과제의 하나이다.
모든 대학의 궁극적인 교육목적이 그러하듯 우리대학 역시 인재양성의 최종목표와 목적을 민족과 국가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머물지 않고 세계 인류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적인 지도자를 양성, 배출하는 데 두고자 하였다.따라서 민족의 장래를 책임져야 할 인재양성의 책무를 담보하고 있는 오늘의 대학은 이 같은 대내외적인 변혁기와 함께 도래한 겨레 민족의 국운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갈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는 일을 우리대학의 교육지표로 삼아 마땅할 것이다.제2절 한성대학의 교육목적 및 교육목표
우리대학은 ‘진리·지선’이라는 건학이념에 입각하여, 민족정신을 계승하고 언류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섬오한 이론을 연구·교육하며, 봉사정선이 충만한 지도적 인격을 함양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건학이념인 '진리·지선'은 학문의 전당으로서 진리를 추구할 뿐 아니라, 지식 자체의 수수에 얽매이지 않고 국가.사회에 기여하는 봉사정신이 충만한, 바로 「대학」이 추구하는 '지어지선(止於至善)'의 경지를 지향하는 도덕적인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과 같은사회에서는, 단순히 기능적인 인재가 아닌 사회의 지도자로서의 도덕적 품성을 지닌 인재를 요구하는 것과 부합한다. 우리대학의 교육목적은 이러한 건학이념에 따라 “민족문화 창달에 기여하고, 현대 정보화사회와 고도 산업기술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학문을 연구·교육하며, 지역사폐 및 국가·인류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도덕적이며 창의적인 인제룹 양성한다."로 하였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교육목표는 다음과목표는 다음과 같다.
1.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올바른 한국인을 양성한다.2. 세계적 가치기준에 부합하는 건전한 민주시민을 양성한다.3. 정보화 사회에 필요한 창의적 인재를 양성한다.4. 문화·예술적 소양을 갖춘 지성인을 양성한다.학문은 시대 조류에 상관없는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그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절실한 주제를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과 같이 무한 경쟁의 고도 기술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현대를 정보화 사회라 특징 짓는 것은 정보의 생성, 전달에 관련된 모든 일들이 산업의 중추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보화 사회와 고도 산업기술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학문을 연구·교육하는 것은 오늘의 대학이 가져야 하는 기본 사명이며, 이는 결국 시대에 맞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다. 새 밀레니엄에 접어든 시점에서, 우리대학이 양성하고자 하는 인재는 교육목표가 제시하고 있는 아래 <그림 1> 한성대학교 4 인상으로 요약된다.
올바른 한국인
<그림 1> 한성대학교의 4인상
21세기를 선도할 대한민국의 인재는 우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올바른 한국인으로서의 품성을 갖추어야 한다. 새 시대는 극심한 경제 갈등과 언어 경쟁을 통하여 민족 정체성이 특히 위협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대학은 옛 한성의 역사, 문화 유적이 풍부한 성북구의 중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올바른 한국인은 우리 지역사회가 요구하는 인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수적인 민족성의 고수는 곧 경쟁에서의 도태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올바른 한국인은 다시 세계적 가치기준에 부합하는 보편적 세계인이 되기를 요구한다. 이 세계인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뿐 아니라,진정한 민주질서의 구현이라는 한국의 발전방향과 보편적 세계질서를 선도하는 새 시대 한국의 위상강화를 위해 절실히 요구된다. 이와 같이 세계적 가치기준에 부합하는 건전한 민주시 민의 양성은 대한민국의 발전뿐 아니라,인류사회의 번영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대학의 기본 임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21세기에도 예견되는 국가·민족 사이의 경쟁을 이겨나가기 위해 예상되는 정보 시대의 발전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20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정보· 통신혁명은 정보의 복잡화· 고속화· 대용량화로 특징 지울 수 있는 정보중심사회를 구성하였다. 이 시기에서 정보의 생산,가공,전달은 3차 산업의 틀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으며,이에 종사하는 인력의 능력 및 소양은 이제까지 산업에 필요했던 자질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따라서 대학은 앞으로 요구되는 인재를 중심적으로 길러낼 필요가 있다. 이에 우리대학은 정보화 사회가 요구하는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갖춘 창의적 인재 양성을 교육의 주요한 목표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인재는 지식기반산업을 선도하는 미래 지식인의 모습이며,교통의 요지에서 지식 집약의 벤처산업을 집약적으로 육성하려는 우리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대학은 공과대학이 컴퓨터공학부와 정보공학부, 산업 및 기계시스템공학부로 구성되어 있으므로,복수 전공의 활용과 교양교육의 강화를 통한특성 있는 교육 프로그램으로 이러한 교육목표를 달성하고 있다. 21세기가 요구하는 인재는 사회가 요구하는 정보내용을 생산할 수 있을 뿐 아니라,생산된 정보내용을 심미적으로 가공할 수 있는 문화· 예술적 소양을 갖춘 지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21세기 문화경쟁을 주도할 수 있는 인재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 더구나 우리대학은 문화· 예술의 중심인 대학로에 인접하고 있기 때문에 문화적 감각이 뛰어난 교양인을 양성하는 데 지리·환경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은 우리대학의 교육프로그램에도 적절 히 반영되어 패션예술이나 컴퓨터그래픽을 활용한 실용디자인 교육이 활성화되도록 하고 있다. 특히 국내 최초의 예술대학원은 지역적 특성과 연계한 문화인프라의 한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제3절 교기, 교표, 이미지마크, 교가, 상징물
1. 교기 및 교표개교 당시 우리대학의 교표는 가운데 대학이라는 한글에 글씨체로 동그랗게 둘러싼 형태로 좌우로 한성이라는 교명과 영문 HANSUNG WOMEN’S COLLEGE를 적어 놓았다. 이후 1978년 남녀공학이 되면서 교표가 바뀌었다. 건국대 생활미술학과장 이명구 교수가 디자인 한것으로 가운데 대학이라는 한글을 한자로 글씨체로 동그량게 둘러싼 형태를 두 개의 원으로 하고 그 안에 영문명으로 HANSUNG UNIVERSITY를 적어 놓고 바깥으로 부드러운 육각형의 별 모양을 그려놓았다. 그 의미는 귀형(龜形)으로 꾸준한 노력을 상징하며, 꽃처럼 아름다운 학문의 전당이며, 색채는 청색과 은색으로 청색은 무한한 희망과 젊음을 상징하고, 은색은 영구불변을 표현한 것이다. 다시 1984년 우리대학 미술학과장 강국진 교수가 상징물 거북이 문양을 상징하는 새로운 교표를 제작하였다. 진한 밤색의 세 개 육각형으로 구성되었으며, 가장자리와 가운데의 육각형은 한성대학교의 상징물 거북의 모양으로 대학의 울타리와 교수를 의미하며, 가장 안쪽의 육각형은 다이아몬드를 의미하고 학생을 나타낸다. 육각형을 받치고 있는 도형은 대학의 발전과 학교, 교수, 학생을 받치고 있음을 의미하는 문양으로 진리탐구와 협동을 나타낸다. 교색은 VANDYKE BROWN(황갈색)으로 결실, 완성을 나타낸다. 1991년에 산업디자인학과 이상원 교수가 교표의 원래 취지와 형태는 살리되 띠로 둘러싸고 육각형을 받치고 있는 도형에 들어있던 영문명 HANSUNG UNIVERSITY를 띠안으로 옮기고 좌우로 별 모양 두 개와 한성대학교라는 한글을 새겨 넣는다. 개교 당시 학교의 교기는 그 바탕을 자주색으로 하고 중앙에 교표를 그려 넣고 아래에 흰 글씨로 한성여자대학을 새겨 놓는다. 1978년 교명과 교표가 바뀌면서 자주색 바탕에 교표와 한성대학을 1984년 거북이 문양으로 교표가 바뀌면서 새로운 교표와 아래 흰색으로 한성대학교라 적어 놓는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가운데 진한 밤색을 백색으로 표
현하고 아래 육각형을 떠받치고 있는 밤색 도형을 하늘색으로 변경하였다. 이후 1991년 제작되어 지금까지 내려온 교기는 같은 자주색 바탕에 원래의 진한 밤색과 도형으로 제작되어 있다.
1972〜1977 디자인ᅳ 한성대학
가운데 대학이라는 한글에 글씨체로 동그랗게 둘러싼 형태로 좌우로 한성이라는 교명과 영문 HANSLJNG WOMEN’S COLLEGE를 적어 놓았다.
한성의 ‘ᄒ’자룹 monogram방식으로 표현하고,‘ㅅ'자 사방으로 구성표현하여 시각적으로 발전을 상징하며, V자는 승리를 나타낸다. 형태는 귀형(龜形)으로 꾸준한 노력을 상징하며, 꽃처럼 아름다운 학문의 전당을 뜻한디. 색채는 청색과 은색이며, 청색은 무한한 희망과 젊음을 상징,은색은 영구불변을 표현한다.
세 개의 육각도형 중 가장자리에 위치한 것은 거북이의 문양으로, 대학의 울타리를 상정하고, 가운데의 것은 거북이의 문양으로 교수활 상징하며, 가장 안쪽의 것은 다이아몬드를 나타내고 학생을 의미한다. 이들을 떠받치고 있는 포형은 진리탐구와 협동을 나타낸다. 색채는 황갈색으로 결실과 완성을 나타낸다.
육각형은 우리대학의 상징물 거북의 모양으로 대학의 울타리와 각각 교수, 학생을 의미한다. 육각형을 받치고 있는 도형은 대학의 발전과 학교, 교수, 학생을 받치고 있음을 의미하는 문양으로 진리탐구, 진리의 보고인 책과 협동을 나타낸다.
2. 이미지마크
1991- 현재 디자인 -산업디자인 이상원 교수
3. 교가
한성여자대학 작사작곡
1. 한성은 문화중심 나라의 심장 낙산언덕 위에 터전을 닦고 배움의 전당을 우뚝 세우니 우리들의 보금자리 한성여대
1978년 남녀 공학으로 전환하면서 새로 제정.
정연길 작사 이영조 작곡
1. 북악에 마주선 낙산언덕에 슬기의 샘물이 용솟음친다. 우람한 내일을 다져가리라 청운의 배움터 한성대학교 후렴드높은 이상을 가슴에 품고 진리와 지선을 기르고 닦아 겨레의 빛되리 희밍이 되리
2. 삼학송 푸른뜻 닦은 터 전에 보람의 강물이 넘쳐흐른다. 영광된 내일을 다짐하여라 상아의 높은탑 한성대학교 후럼 드높은 이상을 가슴에 품고 진리와 지선을 기르고 닦아 겨레의 빛되리 희망이 되리4. 상징물
(1) 거북거북은 예로부터 십장생의 하나로 일컬어져 왔으며 기린, 봉황, 용과 더불어 4대 명물로 지칭되기도 할만큼 신령스러운 동물로 간주되어 왔다. 우리대학은 거북이처럼 슬기롭고, 짧은 기간 내에 성장하여 유구한 발전을 추구해 나가고 있다. 거북이의 지혜와 영특성은 ‘진리’와 통하고,구전되어 오는 대로 인간을 구원해 준다는 그 성품은 ‘선(善)’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대학의 교훈인 진리·지선과 거북이는 이러한 상징적 관계에 있다.(2) 삼학송1975년 5월 우리대학 정문 옆에 세 그루 나란히 우뚝 선 소나무에 삼학송이란 이름을 붙이고, 한성인들에게 젊은 학도로서의 기개를 함양하는 상징나무로 삼기로 하였다.이 소나무는 지난 1920년부터 이 곳에 야생하던 소나무로 고사 직전 설립자 김의형 박사가 손수 그 나무를 오늘의 거목으로 키워 왔었다.당시 학생처장인 윤태영 교수 등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 세 그루의소나무를 김의형 학장은 삼학송이라 명명하고 우리대학의 상징나무로 삼기로 하였다.
여기서 삼학송이란 병자호란 때 나라를 위해 순절한 삼학사(三學士)의 절개를 뜻하고 있다. 병자호란 때 적지 청나라에 끌려가 항복화친을 끝까지 반대,살해당한 홍익한, 윤 집, 오달제 세 선비의 절개를 받들어 삼학사의 이름을 따서 삼학송이라 이름을 칭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