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대학교 30년사

Thirty-year History of Hansung University

漢城大學校

한성대학교 30년사

Thirty-year History of Hansung University

漢城大學校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

이사장 이상희

총장 이성근

역대 이사장

초대~5대 김의형 이사장

6대~7대 이희순 이사장

8대 김의형 이사장

9대~11대 안호상 이사장

12대 서정희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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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딘 •:’…: !:.:;.-i젠I ~'ιf J ‘’ ii3대 김옥자 이사장

14대 박병호 이사장

15대 차인석 이사장

16대 김재윤 이사장

17대 (현) 이상희 이사장

역대 총장(학장)

1대 김의형 학장

2대 이희순 학장

3대 김옥형 학장

4대 강병규 학장

5대 홍순태 학장

6대 신영기 학장

7대 원형갑 학장

1대 원형갑 총장

2대 이용남 총장

3대 (현) 이성근 총장

1972~1977

1978~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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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1990

1991~현재

한성대학교의 과거&미래

1960년대 한성여중·고 전경(現 진리관·지선관)

1980년대 교사이전 전(대학본부·종합관)

1990년대 교사이전 후(우촌관·진리관)

2002년 조감도(증축 도서관·교수회관·학생회관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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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한성여자대학 본관

1980년 한성대학 본관·의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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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한성여자대학 정문

1974년 체육관

1980년 낙산 의화정

1981년 12월 29일 종합관 준공

1980년 연못(현 학생회관 자리)

1982년 낙산수영장(현 과학관자리)

1983년 지산관

1983년 학교 진입로

1984년 9월5일 학생복지관 준공

1985년 진리관

1987년 8월25일 우촌관 준공

1988년 한성대학정문

1989년 지선관

1990년 2월27일 과학관 준공

1991년 대강당(동아리실)

1991년 8월 소강당

1991년 11월 29일 상징탑 기공

1993년 우촌전시실

1995년 과학관(증축전)

1995년 과학관(증측후)

1995년(이인현교수作)

1994년 9월 남문(고영란 교수作)

1995년 학생 회관

·

1994년 이념탑(문법교수作)

1995년 노천극장(고영란 교수作)

1995년(이인현 교수作)

1995년 분수대(정종해 교수作)

1995년 깃발(조태병교수作)

1997년 1월 후생관

1996년 5월10일 전자정보관 개관

1997년 지선관

1997년 진리관

1997년 의화장(팔당 연수원)

1999년 우촌관

1999년 3월 강의동 준공

2001년 한성대학교 대학로캠퍼스

2002년 9월 교수회관 준공

2002년 10월 학생회관 별관 준공(예정)

2003년 8월 도서관 준공(예정)

2002년 삼학송

1973년 민관식 문교부 장관 내교

1973년 3월 5일 제1회 입학식

1975년 11월9일 제1회 체육대회

1977년 2월25일 제1회 졸업식

1977년 2월 25일 제1회 졸업식

1977년 개교기념체육대회

1979년 10월 개교기념체육대회

1981년 10월 개교기념체육대회

1982년 5월 28일 낙산축제

1983년 10월 4일 학생복지관 기공

1983년 11월 18일 개교10주년 기념

1985년 12월 ROTC창설

1986년 8월12일 우촌관 기공식

1987년 8월25일 우촌관 준공식

1991년 11월 29일 상징탑 제막식

1991년 11월 전국추계대학축구

1991년 11월 전국추계대학축구

1992년 탁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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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4월15일 우촌전시실 개관

1992년 8월25일 이현재전국무총리특강

1993년 8월24일 전국대학미전 개최

1994년 6월 한성회화제

1994년 10월 4일 남문낙성식

1996년 5월 10일 전자정보관 개관

1997년 3월21일 사회봉사단 발대식

1997년 7월21일 대학 상효 교류 협정식

대학간l 장!19호97f교21 류j1 。。 g협 i정 조언 ~힘經륭뜯를뜯톨띔.

1999년 3월 6일 강의동개관식

1999년 4월26일 성북구 협력 협약식

1999년 10월 17일 전독일총리

1999년 11월 23일 쯔꾸바대학교

1999년 대학종합평가 최우수상대학

2000년 5월 10일 국제포크페스타

5월 31일 벤처창업지원센타 협력

2월 27일 하기국제대학 교류식

5월 8일 전네덜란드수상 명예박사 수여식

2001년 9월 27일 기공식

「한성대학교 30년사」발간에 부쳐

1973년 6개학과, 150명의 야간대학으로 출범한 한성여자대학은 1978년에 남녀공학으로 전환됨으로써 발전의 전기를 마련하고,끊임없이 증과·증원을 거듭하여 오늘날의 4개 단과대학,12개학부, 28개전공, 2개학과, 편제정원 6,480명의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양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1999년 대학종합평가 최우수대학으로 선정되는 등 질적으로도 꾸준히 저력 있는 내실을 기해 왔습니다.

그리고 바야흐로 설립 30주년을 맞이하여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 한성대학교는 지난 해 젊음과 문화의 거리 대학로에 제2캠퍼스를 새롭게 마련한 바 있고,교수회관과 학생회관 별관,대학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도서관을 대형으로 신축하는 등,21세기 신정보화 시대의 미래형 대학을 건설하기 위한 투자에 한 치의 소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원천적으로 가능하게 해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앞서 가신 뜻 있는 분들의 피와 땀이며 그간 한성대학교에 젊음을 바친 많은 구성원들의 노고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성대학교의 과거이자 현재이며 역사입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간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E. H. Carr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끈이 바로 역사입니다. 이 끈을 제대로 움켜잡으면 과거의 이해를 토대로 하는 올바른 현재인식이 가능해지며, 나아가서 미래에 대한 비전과 나아갈 길을 불을 보듯 훤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의 고금을 막론하고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역사를 가치 있게 여겨 현실에 반영하는 자는 실패가 없는 법입니다. 오늘의 우리 한성대학교의 모든 구성원은 시대를 선도하는 사학의 이상을 가지고 한성학원과 한성대학교를 설립하신 우촌 김의형 박사님의 실사구시적이며 개척적인 건학정신을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받들어 희망의 비전으로 가득한 미래를 가꾸어나가는 모습을 견지해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번에 발간되는 「한성대학교 30년사」는 지난 20세기의 후반에 걸쳐 묵묵히 내실과 저력을 다지고 이제 새 천년 21세기를 맞아 힘차게 웅비하고 있는 우리 한성대학교의 자랑스러운 그간의 역사를 가감 없이 정성껏 담아,이 한 권의 책자 자체로도 한성대학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뿐 아니라,향후 우리 한성인의 거울과 같은 기능을 다하며 아울러 한성대학교의 구성원이라는 자긍심을 배가시키는 계기를 선사해 줄 것으로 믿습니다.

끝으로 이 뜻깊은 책자를 만드는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느라고 애써 주신 관계 구성원 제위의 노고를 깊이 치하합니다.

2002년 9월

한성대학교 총장 사회과학박사 이성근

한성 대학교 30주년을 축하하며

역사란 원래 창업과 건설, 수성(守城)과 시련 그리고 좌절과 극복의 연속이다.

한성대학교도 역사적인 보편적 과정을 겪으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는 10월 5일이면 30주년을 맞이한다. 적지 않은 세월이다. 30년이면 한 세대라 하지 않는가. 한 세대가 넘어가고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시점이다. 창업자의 정신을 이어받고 한 차원 높은 발전단계로 도약해야하는 시점이다.

지난 30년 동안에 우리사회는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으며, 급속한 산업화·근대화 과정을 겪으면서 경제적 발전과 생활수준의 향상을 달성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경제적 발전에 수반해서 사회·문화적 변화 또한 엄청난 것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지난 30년의 우리 사회는 격변의 시대였다. 전반부 약 20년은 군사정권의 연속이었으며,후반부 약 10년은 이른바 문민정부의 시대였다. 우리 나라의

군사정권은 무려 32년이나 계속되었으며,그 기간동안 우리 사회의 민주화 세력은 끈질기게 민주화투쟁을 전개해 왔다. 그 민주화 투쟁의 핵심 속에 대학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수많은 학생이 희생되었으며,교수들 또한 적지 않게 희생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교육 또한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국가나 정부가 일방적으로 주입식 교육을 하는 경향으로부터 현실사회의 요구와 학생들의 지적 수요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대학은 타율로부터 자율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대학의 주체인 교수,학생,직원이 삼위일체가 되어서 학교를 자율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대학은 특정 정권으로부터도, 특정 재단으로부터도 자율적이어야 한다. 다만 자율적이라는 것은 책임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다.한성대학교는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다. 교육·문화의 중심인 서울에 위치하고 있으며 훌륭한 교수님들과 우수한 학생들,그리고 성의를 다하는 직원들로 짜여져 있디최신식 건물인 교수회관,학생회관별관이 신축되었으며 내년이면 훌륭한 도서관이 완공된다. 시대상황에 부응하는 학문 영역에 교육의 중점을 맞추고 있으며,이러한 경향은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다. 여기에 우수한 교수님들을 보충해 나가면 한성대학교는 ‘특색 있고 내실 있는 오붓한

대학’으로 가꾸어질 것이다.

한성대학교의 개교 3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하며,한성대학교의 교수·학생·직원 여러분들에게도 축하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2002년 9월

학교법인 한성학원 이사장 이상희

편찬원칙

1. 한성대학교 30년사는 한성대학교 개교 3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추진되었다. 본서의 수록범위는 한성대학교 설립배경과 교육이념을 밝히고 1972년 개교에서 시작하여 30주년을 맞이하는 2002년 8월 1일까지의 발전과정을 취급하였다.

2. 이 책은 모두 5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제1편은 한성대학교 설립배경과 교육이념,제2편은 형성기(1972년~1981년),제3편은 성장기(1982년~1992년), 제4편은 발전기(1993년~2002년 8월 1일),제5편은 21세기 한성대학교 모색기(진입기 2002년 8월 1일 이후)로 그 각 편의 명칭을 정하였다. 집필 시기 구분은 다음과 같은 근거 하에서 이루어졌다. 한성대학교 설립 배경과 교육이념은 제1편에서 다루었고 제2편 형성기는 1972년 개교에서부터 1981년까지로 하였는데 이때는 야간대학시대로서 본교의 초석을 다

지는 시기였으며, 제3편은 성장기로서 1982년부터 1992년까지인데 이 무렵에는 대부분의 학과가 야간에서 주간으로 변모하였으며 졸업 정원제에 의해 입학정원이 676명으로 늘어났고 남녀공학으로서의 위상이 정립되어 성장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리하여 종합대학교로 승격될 수 있는 여건이 구현되었다. 제4편은 발전기로서 1993부터 2002년 8월 1일 까지이다. 1993년에는 본교가 개교한지 21년만에 종합대학교로 승격하였고 뒤이어 4개 단과대학을 두어 종합대학교 체제를 갖추었다. 2000년 2월 대학종합평가 최우수대학으로 선정되어 발전하는 본교의 모습이 노정되기도 하였다. 제5편은 21세기 한성대학교 모색기로서 2002년 8월 1일부터 앞으로를 이 시기로 설정했다. 이 시기에는 한성비전 21세기에 의해서 중장기 발전계획이 입안되었고,이를 토대로 21세기의 지식정보화시대에서 한성대학교 는 새 도약을 이룩할 것이다.

3. 30년사 편찬의 원칙은 자료집으로서의 역할과 동시에 한성대학교의 발전과정과 새 방향을 살펴보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를 위하여 「한성대학교

20년사」와 「한성학원 50년사」를 참조하고 행정부서의 협조 하에 현황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활용하였다.

4. 이 책은 5인의 집필위원이 분담하여 집필하였다. 집필위원의 분담내용은 아래와 같다.

제1~3편은 정후수 교수가 책임 집필하였다. 제4편 중 원형갑 총장 시대(1993년 3월~1995년 3월)는 조인숙 교수, 이용남 총장 시대와 그 외의 시대(1995년 4월~1998년 9월)는 신경숙 교수,이성근 총장시대(1998년 10월~2002년 10월 14일)는 박준철 교수가 집필을 담당하였다. 제5편 21세기 한성대학교 모색기는 윤석효 교수가 집필하였다.

5. 본 30년사는 가급적 평이한 문체로 간결하게 기술하고 사실에 총실하려고 노력하였으며 한글서술을 원칙으로 하되 고유명사의 경우는 한자를 병기하여 기록하였다.

6. 각 장별 서술은 기술방법을 채택하기로 하였고 그 나열순서는 이 ·취임에 따른 보직명단 순서와 중요한 학사 결정사항을 아울러 기술한다. 한편 그 다음으로 그 해 일어났던 각종 행사 및 사건들을 요약해 싣기로 한다.

7. 화보는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도록 하기 위하여 엄선하여 수록하였다.

8. 부록은 한성대학교의 현황을 알 수 있도록 하였고, 연표는 최근 상황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첨가해 놓았다.

목차

제1편 한성대학교 설립배경과 교육이념 3

제1장 설립배경 3제1절 설립자의 생애와 창학정신 3

1. 우촌 선생의 생애

2. 우촌 선생의 교육정신 5

제2절 한성학원의 설립 9

1. 설립배경 9

2. 한성 학원 설립과 교세확장 12

제3절 한성여자대학 인가 14

1 한성여자대학 인가 발족 14

2. 한성여자대학 인가의 일화 8

제2장 건학이념 19

제1절 한성학원의 교육이념 19

1. 한성 학원의 교육이념 19

2. 교시(校是) 20

제2절 한성대학의 교육목적 및 교육목표 24

제3절 교기,교표, 이미지마크, 교가, 상징물 27

1. 교기 및 교표 27

2 이미지 마크 29

3. 교기 29

4. 상징물 30

제2편 형성기 35

제1장 첫발을 내딛는 한성 35

제1절 제1회 입학식과 증과·증원 35

1. 제1회 입학식 35

2. 증과·증원과 활발한 학생활동 35

3. 학도호국단의 설치와 활동 37

제2절 성장을 향한 움직임 38

1.보직개편과 학술활동 38

2. 한성경영학보 발간, 한성여자대학보 창간 39

1. 제1회 학위 수여식 개최 43

제2장 이희순 학장 취임 43

제1 절 이희순 학장 취임과 새로운 도약 다짐 43

제2절 남·여 공학으로 제2의 탄생 46

1. 제2의 탄생 남·여 공학으로 6

2. 남·여 공학체제 학도호국단 설치 47

제3장 김옥형 학장 취임 49

제1절 김옥형 학장 취임과 동창회 조직 49

1. 제3대 김옥형 학장 취임 49

2. 5개학과 증원 승인, 교직과정 설치 49

3. 한성대 동창회 조직, 탁구팀 강세 50

제2절 학과 증과 및 직제개편 51

1. 직제개편과 보직개편 51

2. 제4회 학위 수여식 거행 51

3. 경제학과.도서관학과 증과 및 전학과 교직 과정 설치

제3절 김옥형 학장 사임과 대학미전 수상

1. 보직개편과 제5회 학위수여식 52

2. 종합관 신축교사 준공 53

3. 대학미전입선 및 동남아 해외연수 53

4. 김옥형 학장 사임 54

5. 안보 우수 서클 학교로 선정 55

제3편 성장기 59

제1장 강병규 학장의 취임 59

제1절강병규 학장과 대학의 성장 59제2절 대학기구의 정비와 학사행정의 개혁 63

1. 한성대학 종합화 계획의 발표 63

2. 위원회 신설 63

3. 학사행정체제의 정비 65

4. 학부제 운영과 보직개편 67

제3절 학문연 구체제 확립과 대학이미지 구축 69

1. 부설연구소의 설립과 활동 69

2. 국제교류와 대학 이미지 구축 72

제4절 시련과 새로운 도약 74

1.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의 타계 74

2. 강병규 학장 퇴임 74

3. 새로운 도약 75

제2장 홍순태 학장 취임 76

제1절 홍순태 학장 취임 76

1. 제5대 홍순태 학장 취임 76

2. 학생복지관 준공 78

3. 각 위원회 통폐합 작업 79

제2절 성장을 위한 진통 80

1. 제9회 학위수여식, 1985학년도 신입생 입학식 80

2. 축구부 창단, 지하철역명 개명 81

3. 성장을 위한 진통 81

제3절 교사이 전 및 시 설확장 82

1. 제 10회 학위수여식, 1986학년도 신입생 입학식 82

2. R.O.T.C. 창설 및 보직개편 83

3. 교사이전 및 본관 신축 기공식 85

4. 졸업정원제 운영시행시책 86

제4절 시설획충 및 대학원 신설 87

1. 제11회 학위수여식 87

2.우촌관 준공 88

3. 보직개편, 졸업시험제 실시 89

제5절 홍순태 학장 퇴임 90

1. 제12회 학위수여식, 신설학과장 임명 90

2.제 규정심의위원회 발족과 보직개편 91

제3장 신영기 학장 취임 93

제1절 신영기 학장 취임 93

1. 제6대 신영기 학장의 취임 93

2.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한 노력 96

3.과학관 준공 98

4. 전자계산소 설립 99

5. 북방문제 연구소 설립 101

6. 출판부 설립 102

7. 대학원 신설, 경영 ·행정 대학원 분리 증원 102

8.연구분위기 조성 103

제4장 원형갑 학장 취임 104

제1절 제7대 원형갑 학장취임 104

제2절 교수확충 109

1. 대폭적인 교수 충원 109

2. 대학발전 연구위원회 발족 112

3. 부속기관 활성화 118

4.홍보활동 강화와 대학 이미지 제고 128

5. 교육환경 개선은 교육 내실의 밑거름 132

6. 체육을 통한 대외적 이미지 향상 139

제4편 발전기 145

제1장 종합대학교로 승격, 초대 원형갑 총장 145

제1절 성년을 맞게 된 한성대학교 145

1 개교 20주년 기념행사 145

2.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 10주기, 추모집 「낙산의 삼학송」 「한성대학교 20 년사」 및 「대학백서」 발간 149

3. 대학발전기금 조성사업 추진 150

4 사회교육관 설립신청서 제출 151

제2절 종합대학교 승격, 초대총장 원형갑 박사 취임 151

I. 종합 대학교 승격 151

2. 초대총장 원형갑 박사 취임 152

제3절 신임교수요원 초빙 및 강의평가 152

1. 신임교수요원 초빙 152

2. 강의평가제 정착 154

3.객원교수제도 활성화 155

제4절 교과과정 개편 및 입시제도 개선 156

1. 교과과정 개편 156

2. 교육과정 전면개편 159

3.증원 및 학과 신설 160

4 전국 9개 대학 본고사 실시, 우리대학 위상 높여 161

제5절 대학환경 개선 및 공간확보 165

1. 대학 환경 조형물 제작 및 공간획보계획 165

2. 도서관 공간확보 및 정보검색실 신설 168

제6절 대학발전과제 수행 및 학사협의회 169

1. 1994년도 대학발전과제 및 연구책임자 선정 169

2 제주도에서 1995학년도 학사협의회 개최, 제2대 총장 선출 170

3. 학위 수여식 및 입학식 172

4. 대학 발전기금조성을 위한 ‘한성회화제’ 개최 173

제2장 도약하는 푸른 대학, 제2대 이용남 총장 174

제1절 도약을 위한 새로운 체제와 교육이념의 정립 174

1. 이용남 총장선출과 취임 174

2. 교육이념과 교육목표 재정립 176

제2절 교육제도의 변화 178

1. 교과과정 개편 및 학부제 확대 실시 178

2. 특성화된 대학원 178

3. 입시제도의 꾸준한 개선 179

제3절 대학 정보화와 세계화 추진 184

1 대학 정보화 184

2. 국내외 대학괴 학술교류를 통한 세계화 192

제4절 대학발전을 위한 연구제도 194

1. 대학발전과제 연구제도 194

2. 교육개혁 추진 실적 196

3. 학사협의회 제도 198

제5절 교수요원 확충과 교수 연구활동 199

1. 꾸준한 교수요원 확충과 대학 위상 제고 199

2. 교수 연구활동 활발 201

제6절 학생 복지와 학생들의 대외활동 203

1. 학생 후생복지 향상 203

2 학생들의 대외 활동 활발 204

제7절 교내 환경 개선 211

1. 건물의 신축 및 시설개선 211

2.교내조경과 상징물 214

제8절 화합과 조화를 위한 노력 218

1. 한성 가족의 밤 218

2. 지역민을 위한 사회교육 프로그렘 219

제9절 변화를 위힌 전통괴 임시 이사체제 220

1.총장대행 체제와 임시이사 체제 220

2. 행정조적 개편과 총장선출위원회 구성 222

제3장 변화하는 한성대학교, 이성근 총장 224

제1절 제3대 이성근 총장 취임과 보직개편 224

1. 이성근 총장 취임 224

2. 보직개편 227

제2절 대학편제의 변화 228

1 학장제 신설 228

2. 모집단위 통폐합과 학부제 실시 229

3. 대학원 증과·증원 230

제3절 교육공간의 확대 231

1. 공간확충 계획수립 231

2. 외부건물 매입 232

3. 교수회관, 도서관, 학생회관 별관 착공 233

제4절 최우수 대학으로 거듭난 한성대학 235

제5절 이사회 구성의 변동 243

제6절 변화하는 한성대학 245

1. 우수교수 확보 245

2. 벤처창업지원센터 개편 246

3. IT(Information Technology)의 중심부로 받돋움한 한성대학 248

4. 외국과의 활발한 교류 249

5. 3,700명의 인재배출 21

6 내실을 다진 중안도서관 251

7. 우리대학 학군단 129-1 학군단으로 승격 252

8. 제 증명서 인터넷 발급 및 전송서비스 개시 253

제5편 21세기 한성대학교 모색기 257

제1장 한성비전 21세기 257

제1절 비전 21기 발전계획의 기본구성 257

제2절 중장기 발전계획의 주요지표 258

1. 중장기 특성화 계획 258

2 종합적 중장기 발전계획의 주요지표 261

제2장 21세기 도약의 염원 267

[부록] 273

1. 연혁 273

2.학교법인 278

3 조직 및 기구 281

4.교원 323

5.직원 342

6.학생 348

7.재정 360

8.행정 362

9.시설 381

편집후기 387

표목차

<표 1> 신설 위원회 명칭과 위원명 64

<표 2> 학부명과 소속학과 및 학부장 명단 67

<표 3> 4개 부설연구소벙과 연구원 및 설립취지 70

<표 4> 사회산업연구소 분야 1월 연구실 명칭과 연구자 명단 71

<표 5> 한성대 소식지(1호~24호) 130

<표 6> 대학기념품 판매가격(1992년) 131

<표 7> 교양선택과 학과별 이수학점 157

<표 8> 영역별 교양선택 교과목 158

<표 9> 신·구 교과과정 학점수 대비표 158

<표 10> 1995학년도 신입생 선발고사 요강 163

<표 11> 대학 특별위원회 현황 170

<표 12> 1996학년도 본고사 출제의 기본방향 180

<표 13> 1996학년도 본고사 과목 181

<표 14> 1996학년도 전형요소별 반영 비율 181

<표 15> 1996학년도 종합생활기록부 반영 비율 182

<표 16> 1996학년도 종합생활기록부가 없는 자의 반영 방법 183

<표 17> 각 위원회별 연구 현황 195

<표 18> 1996학년도 대학발전과제 및 연구책임자 196

<표 19> 자금소요 현황 266

<표 20> 연도별 자금소요 현황 266

<표 21> 건설관계 자금조달 계획 267

<표 22> 건축자금 조달 및 건축기금 사용 계획 267

부록표 목차

<부록 표 2-1-1역대 이사장 명단 280

<부록 표 3-1-1> 역대 총(학)장 명단 284

<부록 표 3-2-1> 역대 보직자 명단 286

<부록 표 3-2-2> 역대 교무처장 명단 287

<부록 표 3-2-3> 역대 기획연구처장(기획실장) 명단 287

<부록 표 3-2-4> 역대 학생처장 명단 288

<부록 표 3-2-5> 역대 총(사)무처장 명단 288

<부록 표 3-3-1> 역대 학장 명단 90

<부록 표 3-4-1> 역대 대학원장 명단 291

<부록 표 3-4-2> 역대 특수대학원장 명단 291

<부록 표 3-5-1> 역대 도서관장 명단 292

<부록 표 3-5-2> 역대 전자계산소장 명단 293

<부록 표 3-5-3> 역대 사회교육원장 명단 293

<부록 표 3-5-4> 역대 출판부장 명단 294

<부록 표 3-5-5> 역대 학보사 주간 명단 295

<부록 표 3-5-6> 역대 영자신문사주간 명단 296

<부록 표 3-5-7> 역대 방송국 지도교수 명단 296

<부록 표 3-5-8> 역대 교지편집실 지도교수 명단 297

<부록 표 3-6-1> 대학본부 설치연표 298

<부록 표 3-7-1> 학과별 설치 년표 303

<부록 표 3-7-2> 설치학과(부) 및 입학정원 304

<부록 표 3-8-1> 대학원 설치연표 309

<부록 표 3-8-2> 특수대학원 설치연표 310

<부록 표 3-8-3> 대학원 학과 현황 311

<부록 표 3-9-1> 부속기관 설치연표 314

<부록 표 3-10-1> 역대 연구소장 명단 315

<부록 표 3-11-1> 역대 교수협의회 임원 명단 318

<부록 표 3-11-2> 역대 직원노동조합 임원명단 319

<부록 표 3-11-3> 역대 총학생회장 명단 322

<부록 표 4-1-1> 연도별 교원 현황 324

<부록 표 4-1-2> 연도별 조교 현황 324

<부록 표 4-1-3> 전임교원 임용 및 퇴직 현황 325

<부록 표 4-2-1> 외국인 전임교원 현황 332

<부록 표 4-3-1> 연도별 교원퇴직 현황 332

<부록 표 4-4-1> 역대 겸임교수 현황 334

<부록 표 4-5-1> 역대 대우교수 현황 339

<부록 표 4-6-1> 1993년~1996년 객원교수 현황 340

<부록 표 4-6-2> 1997년~1998년 객원교수 현황 341

<부록 표 5-1-1> 일반·기술직 현황 342

<부록 표 5-1-2> 직급별 현황 342

<부록 표 5-1-3> 기능직 현황 342

<부록 표 5-2-1> 직원임용, 승진 및 퇴직현황 344

<부록 표 6-1-1> 학과(부)별 학생정원 현황 348

<부록 표 6-2-1> 졸업생 현황 351

<부록 표 6-3-1> 대동제 현황 353

<부록 표 7-1-1> 연도별 재학생 1 인당 교육바 현황 360

<부록 표 7-2-1> 연도별 세입중 학생둥록끔 비율 361

<부록 표 7-3-1> 연도별 세출중 인건비 비율 361

<부록 표 8-2-1> 특별위원회 개최 현황 364

그림목차

<그림 1> 한성 대학교의 4인상 25

<그림 2> 전자계산소 조직도 100

<그림 3> 도서관 전산화 계획 123

<그림 4> 교육이념과 교육목표 177

<그림 5> 전자도서관 기술구성 186

<그림 6> 1996년 조직기구도 202

<그림 7> 2002학년도 기구조직도 281

제1편 한성대학교 설립배경과 교육이념

제1편 한성대학교 설립배경과 교육이념

제1장 설립배경

제1절 설립자의 생애와 창학정신

1. 우촌 선생의 생애

우촌(友村) 김의형(金義衡) 박사는 1904년 8월 25일(음력) 충남 공주군 탄천면 견동리에서 부친 김우창(金萬昌) 선생과 자당(慈堂) 경주이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남달리 엄격한 유교 가정에서 자란 우촌 선생은 유년시절을 고향에서 전풍적인 한학과 신학문을 수학하며 자랐다.

이 시절 고향에 있던 유년기의 우촌 선생은 서울서 내려온 구한말 군인 출신이자 일찍이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이은우(季般雨)라는 분이 세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다니면서 세상을 바라보눈 안목이 개화되었으며 장차 일제에 빼앗긴 민족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독립정신을 품게 되었다.

특히 이은우 선생은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체조 등 체육을 수업시간에 많이 할애했는데, 어린 우촌 선생은 남달리 강건한 신체적 조건을 천부적으로 타고나 총애를 한 몸애 받았다. 훗날 선생께서 체육분야를 전공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인연과 무관하지 않다.

고향에서 보통학교 과정을 마친 우촌 선생은 줍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종등교육과정을 마친 후 20세가 되던 1924년 현해탄을 건너 일본 동경으로 유학 길에 올랐다. 당서 식면지 ‘조선

인’에게는 입학의 문이 매우 좁았던 일본체육전문대학(현 일본체육대학)에 입학한 그는 ‘식민지 백성’ 이라는 일본인 학생들의 멸시와 눈총을 굳은 의지로 극복하며 학업에 열중하였다.

우촌 선생이 체육을 전공하려고 한 데는 남다른 뜻이 있었다. 어린시절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은사 이은우 선생으로부터 평소 신체의 단련과 건강이 중요하다는 교육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우촌 선생 자신의 생각에도 과거 고루한 유학자들처럼 연약한 신체와 정신으로 는 향후 일제에 장점 당한 국권을 되찾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남들이 별반 관심을 갖지 않으나 사실 체육교육이 어느 분야 못지 않게 종요하다는 생각에서 체육분야를 전공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 유학 길에 오른 젊은이들은 대부분 법학이나 의학분야를 공부하고 돌아와 총독부 관리가 되거나 아니면 안정된 직업에 안주하기를 바랐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우촌 선생과 같이 처음부터 남들이 외면하고 있던 체육분야를 전공하려 했던 점은 외로운 낄을 스스로 선택한 것으로 당시로는 대란히 어려운 결단이었다.

교육자로서 우촌 선생의 출발은 1927년 3월 20일 일본체육전문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천안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시작된다. 당시 집안 어른들과 주위에서는 일본 유학까지 마치고 돌아와 국민학교 ‘훈도’를 자청한 우촌 선생의 결심에 완강한 반대와 불만을 표했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교육자로서의 우촌 선생은 그후 공주(公州) 영명학교(永明學校) 교사를 거쳐 1930년 4월 서울의 광신상업고등학교와 동덕여자고등학교의 체육교사로 봉직하다가 일제말기인 1939년 4월 경성여자의과전문학교(京城女子醫科專門學校) 교수로 재직하며 체조와 육상 등 체육 분야 전반의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체육인이자 학자로서 명성을 떨쳤다.

1945년 광복을 맞은 지 한달 만인 그 해 10월 우촌 선생은 오늘의 한성대학교의 모체가 된 한성여자 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장과 이사장으로 여러 해 봉직하였다.

한편,우촌 선생은 신생 대한민국의 체육발전사에 적지 않은 공헌과

족적을 남겼다. 1961년 대한핸드볼협회 회장직을 시작으로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 이사를 거쳐 1966년 대한체육회 회장의 중책을 역임하는 등 한국 체육의 발전을 위해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이러한 '체육회 발전의 공적이 인정되어 우촌 선생은 1970년 12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였다.

우촌 김의형 박사는 1983년 3월 1일 이 땅을 떠나기까지 80여 전생애를 교육구국의 일념과 한국 체육의 발전을 위해 헌신 봉사한 교육자이자 체육인이었다. 그리고 전 생애 가운데 40여 성상을 낙산언덕에 웅비의 나래를 펼친 ‘한성’을 위해 바쳤다.

2. 우촌 선생의 교육정신

8.15 광복을 맞이하자 우촌 김의형 박사는 과거 오욕된 일제 36년의 식민통치를 초래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를 민족과 역사에 대한 소명

의식을 품은 청소년에 대한 교육을 소홀히 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판단 하였다. 따라서 광복 이후 가장 시급한 사업은 신생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 헌신 봉사할 수 있는 젊은이를 양성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1945년 10월 한성여자 중·고등학교를 설립한 우촌 선생은 아래와 같이 몇 가지 점을 한성학원의 건학정신으로 삼아 이를 교육 현장에서 실천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1) 역사소명의 고취

역사는 시대의 흐름과 함께 변천한다. 이 변천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인간으로서의 도리에 역행하는 사람은 역사의 이름으로 후세에 지탄을 받기 마련이다.

이 같은 역사의 변천 속에서도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참된 도리를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몸과 마음가짐은 교육을 통한 역사소명 의식의 배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촌 선생은 일찍부터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유형

이 있다고 보았다.

하나는 자기가 하고 싶거나 이익에 결부된 일만을 찾아 하는 개인주의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개인적으로는 하고 싶지 않으나 자기가 소속된 사회의 필요에 의해 이를 피하지 않고 일생을 그 일에 매달리며 헌신 봉사하는 희생적인 삶을 사는 유형이 있다고 보았다.

이 같은 두 가지 유형 중 이른바 역사의 소명에 합당한 삶은 말할 것도 없이 후자의 경우를 말한다.

우촌 선생은 이와 같이 역사에 부름과 민족과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재양성을 그의 첫 번째 교육사상이자,교육정신으로 삼았다.

(2) 민족정신의 계승

우촌 선생이 평생을 교육자로서의 외길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8·15 광복 이후 이 사회와 국가의 주인이 될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시대인식에서 비롯되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한편 어떤 정신의 젊은이들을 양성할 것인가에 대해서 또한 우촌 선생의 교육목표는 분명하였다. 즉 ‘한국정신’ 에 투철한, 말하자면 우리 민족에 대한 분명한 주인의식과 민족의식에 기초한 젊은이들을 교육하고 양성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던 것이다.우촌 선생은 1966년 10월 5일 한성학원 창립 21주년 기념식사를 통해 광복과 동시에 한성학원을 설립하게 된 동기를 아래와 같이 밝힌 바 있다.

“일제의 압제에서 우리 민족이 눈물겹도록 배움에 굶주렸던 것과 815 광복과 함께 외국의 그릇된 풍조가 노도와 같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안일하게 좌시할 수 없어서 ‘한국정신’ 을 이어받아 국가와 이 사회를 위한 인재를 양성해야겠다는 의욕과 취지에서였다.”

위에서 보듯 한성학원의 창학 이념과 교육철학은 ‘한국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젊은이들에게 우리 민족에 대한 투철한 민족혼을 심

어주어 다시는 외세의 지배를 받는 오욕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아야겠다는 역사의식과 민족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우촌 선생은 일제 통치하 일본 최고학부의 고등교육을 받고 청소년들에게 민족정기 계승의 불빛을 밝히기 위한 교육자의 길을 택하였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경성여자의과전문학교(京城女子醫科專門學校) 교수 등 각 학교의 교직생활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정기의 혼을 불어넣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바 있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일인들이 한인을 멸시하고 그들의 우월성을 뽐내는 태도에 한민족의 우수성과 항거의 기개를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이는 대부분의 지식인이 지식은 많으나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의 지와 용기가 부족했던 점을 비교할 때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말하자면 진리탐구는 아무리 훌륭한 지식과 논리를 갖고 있더라도 이를 실천의 길로 옮기지 못하였을 때 그 진리는 그 순간 빛을 잃게 된다.

⑶ 지(智)·덕(德)·체(體)의 조화

우촌 선생이 제시한 민족의 소명의식 계발과 민족정신을 불어넣어 주는 민족교육의 토대 위에 지식과 덕성(德性),그리고 체력을 갖춘 참 지혜의 실력 있는 지성인과 신체적으로 건강한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을 한성학원의 교육 지표로 삼았다.

요컨대 ‘한국 정신’ 을 바르게 가르치는 한편 그 위에 지·덕·체를 조화 있게 갖춘 ‘참 한국인’ 양성을 그의 교육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교육의 '일차적인 목적과 목표는 피교육자에게 새로운 지식을 가르쳐 알게 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말과 같이 교육의 일차적인 목표는 무지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안다’ 는 것은 무한한 것이기도 하다. 단순한 사실에 대한 지식에서 시작하여 복잡하고 고둥한 것으로 전개되어 나간다. 여기서 낮은 데서 높은 곳으로 전개하여 나가는 발달과정은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이 같은 교육을 통하여 얻어진 산물이 곧 지력이다. 이 지력을 가리켜 사고라고도 하며, 현대 사회는 보다 생산적인 지력을 요

구한다.

한편 지력의 교육과 함께 참다운 인간 형성은 인간의 품성도야가 전제된다. 즉 인격적인 교육이 결핍될 때 학습자의 올바른 가치 정립이 불가능한 법입니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교육은 지력의 신장 못지 않게 도덕성이 내포된 정의(情意)의 개념이 그 교육 속에 담겨져야 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이건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훌륭한 인간의 배양,즉 ‘품성도야’ 와 ‘인간교육’ 의 근본을 도덕교육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교육을 통하여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더 나아가 그 사회의 번영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구성원을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교육의 목적은 의식적이며 의도적인 데서부터 출발한다.

특히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이라고 지칭될 만큼 예의와 도의심 을 모든 가치 관에 우선하는 사회 윤리 로 지 켜 왔다. 우촌 선생은 이 점을 기회 있을 때마다 늘 강조하며 예의도덕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우촌 선생은 덕성의 함양을 그의 중요한 교육의 덕목으로 삼았다. 우촌 선생은 기회 있을 때마다 ‘덕(德)은 충(忠)과 효(孝)와 선(善)의 기본 바탕이 된다’ 는 점을 강조하였다.매사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한 마음과 태도를 보이는 것이 덕성을 함양시키는 첫 걸음이라고 생활 속에서 본을 보여 온 우촌 선생은 항상 사람은 인간답기 위해 매사 겸허하고 성실한 몸과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

그는 평소 주위 사람과 제자들에게 “실없는 생각은 정신을 상하게 하며 망령된 행동은 화를 자초하는 법이며, 한 때의 분함을 참으면 백년의 근심을 면한다” 는 고사를 즐겨 인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사람의 성품은 물과 같아 그 성품을 한번 놓아버리면 돌이킬 수 없어 반드시 양심의 제방을 쌓아 제어하여야 한다.’ 는 점과 ‘귀한 재물은 없어져도 쌓은 덕은 흐트러짐이 없으며, 충성과 효도는 덕에서부터 시작된다’ 고 하였다. 말하자면 올바른 인간의 성품은 평소 덕성을 꾸준히 쌓을 때 비로소 바람직한

인간으로 성장해나갈 수 있음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끝으로 우촌 선생의 교육사상이자 교육이념으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체육교육을 남달리 강조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는 점이다. 사실 아무리 지력과 덕성을 갖춘 사람이라도 체력이 뒷받침 해주지 못하면 절름발이,용기 없는 기형적인 인간이 되기가 십상이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정신교육과 신체교육의 심신일원론(心身一元論) 교육이 강조되었던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이다.

체육활동은 한 개인의 신체에 잠재적으로 감추어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여기서 체육활동을 보다 활발하게 촉진시키는 것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보다 건강하고 ‘인간답게’라는 희망에서부터 출발하며,이 같은 체육활동의 효과는 한 인간에게 주체성과 용기 그리고 결단성과 추진력을 배양시켜 주는 밑거름이 된다.

제2절 한성학원의 설립

1. 설립배경

⑴ 8.15 정국과 한국사회

한성학원이 낙산기슭에 터를 잡은 것은 1945년 10월이었다. 따라서 한성학원의 창립은 광복과 역사적 맥락을 함께 하고 있다.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는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 현대사가 걸어온 발자취는 간단치가 않다. 일제의 식민지 지배 36년간 질곡과 수난의 고통을 딛고1945년 8월 해방을 맞이했으나 그 광복의 감격과 기쁨은 잠시 잠깐이었으니 이후 정치 사회적 혼란과 동족간의 싸움 그리고 민족분단 이후 계속된 정변 속에서 민족과 국가적인 가난의 아픔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사회적 혼란 속에서도 교육입국을 향한 백년대계를 전망하며 인재양성 곧 교육사업은 계속되었으니 오늘의 세계 속에 명실상부한 위상을 정립한 대한민국을 건설하기까지 교육사

업이 미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한성학원 또한 신생 대한민국 건설과 함께 이 땅에 태동되어 인재를 배출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할 것이다.

앞서 일제 통치하 우리 청소년 교육의 장인 경성여자의과전문학교 교수를 역임하였지만 그때는 교사로서의 역할이었고,이제 광복된 조국에서 젊은 청소년의 배움의 터전을 세우고 교육백년대계를 실현시켜야 하겠다는 우촌 김의형 박사의 원대한 포부가 한성학원 설립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일의 젊은 인재육성 및 발굴은 앞날 훌륭한 2세를 낳아 키울 여성교육에 힘써야 하겠다는 것이 한성학원 설립의 또 하나의 배경이라 하겠다.

(2) 청소년 교육을 통한 영재교육

나라는 망하여도 역사는 망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비록 나라가 망해도 언젠가는 그 나라를 다시 재건할 수 있으나, 역사가 망하면 다시

는 이 지구상에 그 나라의 재건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이스라엘은 일찍이 기원전 나라는 망하였지만 유대의 역사는 죽지 않고 오랜 기간 면면히 이어져 1948년 나라를 되찾았다. 그러나 금(金)나라나 요(透)나라는 오랜 시간 세계1등 국가로, 그 위세를 떨쳤던 중국 본토에 비록 일부이지만 정복왕조(征服王朝)까지 세웠던 나라들이지만 나라가 망한 후, 그 역사마저 끊겨 이 지구상에서 이들 나라의 재건 따위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이 우리 인류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이같이 비록 나라는 망하였어도 역사는 죽지 않고 이어져 언젠가 다시 나라를 되찾게 하는 바탕의 힘은 청소년 교육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비록 나라를 잃은 청소년들이지만 자기 조상의 역사와 말과 글과 정신을 잃지 않고 이어간다면 언젠가 나라를 되찾을 기회가 올 것이다. 유대 젊은 청소년들은 나라를 잃고 오랜 기간 세계 각지에서 흩어져 삶을 이어가면서도 자기 조상의 역사와 말과 풍습을 잊지 않고 끗꿋하게 동류의식을 꾀하여 드디어는 1948년 5월 이스라엘 독립을 쟁취하였던 것이다. 어느 문명사학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세계 어디에 가서도 하루세끼 중 반드시 한끼는 꼬삽을 먹는 동류 의식의 확인이 오늘의 이스라엘 독립을 가져온 요인이 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꼬삽이란 우리나라 조밥과 유사한 식품으로 유대사람들은 식생활 풍습까지 오랜 기간 버리지 않고 간직해 왔던 것이다. 나라를 되찾은 이스라엘이지만 수억의 아랍 여러 나라 톰바구니에 끼여 여러 차례 전쟁을 겪고서도 꿋꿋하게 이 지구상에 이스라엘 깃발을 휘날릴 수 있는 그 저력은 이스라엘 청년들의 역사의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젊은 청소년들의 역사의식의 효율적인 고취는 오직 청소년 교육에서 비롯된다.

우촌 김의형 박사는 일찍이 청소년 시절, 우리 한국이 비록 일본에나라를 빼앗겼지만, 우리 한국 젊은이들이 한국 혼이 죽지 않고 불타고 있음에서 언젠가 다시 나라를 일본으로부터 되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었다고 그 생전에 그와 가까운 교육동지들에게 들려주곤 하였다. 이 같은 그의 확신은 앞으로 우리의 역사를 젊은 청소년들에게 올바르게 가르쳐 한국의 역사가 면면히 이어 지켜져, 조국광복의 한줌

의 밑거름이 되어야겠다는 굳은 신념이 교육자의 길로 나서게 된 동기였다. 구한말 개화파와 수구파의 격심한 는쟁으로 일찍부터 서구 신문화를 본격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여 이로 인하여 우리보다 몇 발짝 앞서 서구 신문화를 받아들인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국치를 당하였다. 이 같은 나라 잃은 설움을 가슴에 안고 적도(敵都) 일본 동경을 비롯한 교토, 오사카 등지에서 앞선 신문화를 배우고 있는 한인 유학생들은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을 크게 느꼈던 것이다. 우촌 김의형 박사도 이러한 한인 유학생 가운데서도 가장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일본에 나라를 앓는 국치를 당하였던 것도 일본보다 신문화와 청소년들의 신교육이 단지 몇 발 뒤늦었던 것에 기인하며, 그리하여 이렇게 멀리 이국 땅 일본 하늘아래에서 나라를 잃은 서러움과 쓰련 가슴을 안고 공부를 하는 것인 만큼, 일본인 학생보다 더 열심히 배우고 익혀야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앞선 일본의 신문화를 익혀 고국에 돌아가 우리 청소년들을 가르쳐서 언젠가는 광복의 한줌 밑거름을 만들겠다고 재삼 마음속으로 다짐하였던 것이다. 특히 김의형 박사는 일본에서 학문연구에 정진하

면서, 틈틈이 일본이 오랜 기간똥안 우리 한국문화의 영향을 받아오다가 최근 1세기도 채 안 되는 극히 짧은 기간동에 우리를 앞서 우리가 그들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국치를 왜 당하게 되었는가를 곰곰이 생각하여 원인규명도 하였던 것이다.

우촌 김의형 선생은 일제 36년반애 되찾은 우리 한국의 광복이 다시는 외세에 의하여 침해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독립의 기초가 되는 청소년 교육에 있음을 다시 한벤 절감하였던 것이다.

한편 해방정국의 좌·우익간의 피나는 동족상잔은 전일 당파싸움을 연상한 김의형 박사로 하여금 띤족 장래에 암담한 그늘을 느끼게 하여 다음 세대 주인공언 청소년들애게 올바른 나라사랑과 겨레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어린 청소년 시절부터 올바른 애국관과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이 급선무임을 착안하여 우선학교룹 세우고 젊은 청소년을 가르쳐야겠다는 굳은 신념이 한성학원설립의 또 하나의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 에로부터 효자, 충신을 만드는 근본은 어진 어머니의 정성어

린 가정교육에 있었음을 돌이켜 생각한 우촌 김의형 선생은 여성교육기관 설립을 착안하였다.

2. 한성학원 설립과 교세확장

(1) 한성학원 설립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을 맞은 우촌 김의형 선생은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은 우리 조국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과제는 미래 우리 한국의 주인공이 될 젊은이 교육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예로부터맹모삼천이란 말이 전해 오듯이 미래 훌륭한 어머니를 양성하는 여성교육의 비중이 크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즈음 한 친지로부터 성북구 삼성동 2가 389번지에 위치한 일본인이 경영하던 경성여자기예학교(京城女r技藝學校)를 인수할 것을 제의 받게 되었다. 이 경성여자기예학교는 대지 2.290평에 세워진 373평의 작은 교사에, 일본인 여자중학교

(6년제)를 졸업한 젊은 여성들에게 시집가기 전까지 바느질, 꽃꽂이, 수예, 재봉 따위를 가르쳤던 신부수업의 미니스쿨이었던 것이다. 우촌선생의 친지 가운데에는 “이 같은 작은 학교를 전별금(歸·別金)까지 주고 인수할 것까지 뭐 있겠느냐”고 반류하는 이도 있었다. 여기서 전별금이란 패망한 일본인들이 남한에서 경영하던 기업이나 가옥 따위를 두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이들에게 위로금으로 지급했던 돈을 말한다. 공산 치하의 북한에서는 전별금이란 생각조차 못하였다. 우촌 김의형 선생은 이 같은 만류에도 겸허하게 이 작은 미니학교를 앞으로 기존의 어떤 큰 학교보다 더 훌륭한 학교로 키울 것을 마음 속 깊이 다짐하였던 것이다. 우촌 선생은 평소 존경하던 페스탈로치 선생이 일찍이 부르크 지방에서 빈민학교를 열고 훌륭한 인재를 키워 후일 스위스뿐만 아니라, 전세계 교육계에 새로운 교육사상의 출현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을 돌이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학습자에게 학습활동을 통한 능력계발 및 인간성 도야에 역점을 두었음을 상기하고, 이 인수한학교를 여성교육의 참된 명문으로 만들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우촌 선생은 이렇게 마음속으로 굳은 각오를 하고 이 미니스쿨을 언수하였지만, 당시 미군정 당국은 이 학교의 재정과 시설의 미비 등을 들어 학교법인으로서의 허가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우촌 선생은 당시 문교부장관(현 교육인적자원부장관에 해당)을 3번씩이나 찾아 그의 포부를 피력 그로 하여금 우촌 선생의 끈질기고 뜨거운 교육열의에 감명을 받게 하여 조건부 인가를 얻어내게 되었다. 드디어 1945년 10월 5일 재단법인 한성학원 설립과 동시에 총 학생 3백 여명의 한성고등여학교를 개교하게 되었고 1946년 7월 5일 한성여자중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2) 교세 확창과 지 · 덕 · 체 교육의 구현

한성여자중학교 개교의 벅찬 첫발을 내닫기는 하였지만, 좌 · 우익 해방정국의 혼란이 이 학교에도 불어닥쳤다. 일부 교사와 학생 가운데, 좌익사상에 빠져 학사행정을 방해하는 사태도 있었지만, 김의형 교장의 확고하고도 신념에 찬 교육정신은 이 같은 좌익분자들을 덕으로써

교화시켰다. 그러나, 머지않아 6.25 동란과 9.28 수복, 1.4 후퇴, 그리고 수포 서울수복 등 동족상잔의 전란 속에서도 한성학원 발전에 대한 굽힘 없는 의지는 변하지 아니하쳤다. 1951년 10월 1일, 수도 서울 수복 후, 서울 시내의 통서남북 네 곳에 잔류 중 · 고등학생 훈육소를 개설, 배움에 목말라하는 3천명 학생이 모여들었다. 세계각국의 추세에 따른 문교부 방침에 의해 한성여자중학교도 1952년 5월 31일, 한성여자중학교와 한성여자고등학교로 빨리하고 두 학교의 교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 후, 교세확장에 힘써 돌산인 낙산을 갈고 닦아 15,000평의 대지 위에 4층 철근 콘크리트인 건평 1,200 평의 새 본관 건물을 신축하는 한편, 연건평 1.100 평의 4층 과학관· 건물을 지었다. 이어 강당, 체육관 풍원 짓고 볼모의 낙산 언덕에 늪 진될-래와 각종 수목을 심고 의화쟁이라는 정자를 세워 서울 시내 여자고등학교 캠퍼스 가운데 가정경관이 아름다운 캠퍼스로 탈바꿈시켰다. 한편, 지·덕·체교육에 힘써 앞닫 어진 부덕을 가진 현모양처 고I 육을 교육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인다는 우촌의 교육철학은 변함

이 없었다.

제3절 한성여자대학 인가

1. 한성여자대학 인가 발족

우리 나라 교육계의 거성인 우촌 김의형 박사는 한국여성전문영재 양성기관인 한성여자대학을 1972년 12월 문교부로부터 설립인가 받아 창립하였다.

일찍이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는 일제치하 암흑기에 교육만이 조국광복을 앞당기는 길임을 확신하고 교단에 선 이후,광복을 맞은 해인 1945년 10월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동 2가 389번지 소재에 한성학원을 창립,6년제 한성여자중학교를 설립하였다.

1953년 1월에 재단법인 한성학원을 문교부로부터 인가 받았으며,

1955년 2월에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는 충남 당진군 송산면 동곡리 소재 한성염전 10만8천평을 수익사업으로 재단법인 한성학원에 희사, 교육재정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1955년에 중·고 분리에 따라 고등학교 9학급, 중학교 12학급으로, 1959년에 고등학교 18학급, 중학교 30학급으로 확장 발전을 시킨 바 있다. 1972년 10월에 한성여자대학은 문교부로부터 야간 4년제 여자대학으로,입학정원 국어국문학과 30명, 영어영문학과 30명, 비서학과 20명,가정학과 30명,의상학과 20명,생활미술학과 20명 둥 모두 6개학과 150명으로 인가를 받게 된 것이다.

한성여자대학 개교에 즈음해 초대학장에 취임한 김의형 박사는 1972년 12월에 다음과 같은 취지의 내용이 담긴 개교사를 발표하였다.

60년대 중반부터 우리 나라에서 일기 시작한 조국 근대화 운동은 동남아 및 남미 개발도상국가들간에 깊은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다. 이들 개발도상에 있는 나라들이 조국 근대화 운동이 국가발전을 위한 운동으로 표현된 말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경제면을 비롯한 여러 국가 생활 면에서 발

전의 의욕을 담고 있기 때문에 후진 개발도상국들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경제를 내세운 국가발전 계획과 그 전략은 양질의 교육 성과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특히 경제의 중요성만을 강조하고 교육적인 면을 등한시하면 자칫 인간소외 현상마저 초래하기 쉽다. 그러므로 국가발전 계획에 경제전략 못지 않게 참다운 인간교육이 병행되어야 한다. 여기서 참다운 인간교육이란 바람직한 가치관이 정립된 교육을 뜻한다.

이제 70년대에 들어선 우리 나라는 오랜 후진국에서 탈피, 당당히 중진국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음을 그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그쳐서는 아니 되며 선진국을 향한 목표설정과 이에 대한 실천이 우리에게 당면과제로서 주어졌다.

이 같은 선진국 달성을 목표로 한 국가발전이란 우리가 당면한 이 시점에서, 미래 우리 나라를 짊어지고 갈 전문인재를 육성하는 한성여자대학의 탄생은 우리 국가발전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고 확신하는 바다.앞으로 우리 한성여자대학은 이 같은 시대가 요청하는 교육을 통한 국가발전계획을 펼쳐 가는 물줄기의 흐름 속에서 그 맡은 바 임무를 다하며, 우수한 여성전문 인력을 배양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우리대학은 교육을 통한 영재 발굴과 계발에 힘써, 학문 연마를 통한 개인의 창의력을 높여 앞날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 양성을 그 교육목표의 하나로 삼기로 하였다. 그리고 지·덕·체(智·德·體)의 삼위일체가 된 이 세 가지 요소 중에 어느 하나도 빠뜨림이나 빈틈이 없는 균형 잡힌 교육을 구현해 펼쳐나가고자 한다.

한편 이 같은 지·덕·체(智·德·體) 잡힌 교육의 구현은 학교시설 환경 못지 않게 교수의 질에서 가름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여기서 전문 인력 양성을 위한 꾸준한 교수의 질을 높이기 위해 종합 장기교육계획의 일환으로 쉼 없고 계획성 있는 교수들의 교육연구 분위기 조성에 힘써 나가고자 한다.

그리고 지난날 순국선열들의 애국애족의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학생들에게 계승 진작시켜,후세에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바람직한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인재로서 육성시키는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는 우리 나라 교육이념인 홍익인간 교육의 나라사랑 마음의 함양과도 일치되는 일이기도 하다.

한편 반공의식 고취로서 국가안보에 빈틈없는 통일 역군 배양을 위해 확고한 국가관 확립에도 힘쓸 것이다. 이는 나의 교육신조로서 나의 일생을 통해 항일 반공의 신념을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 나라 여성 최고학부의 막내로 태어난 우리 한성여자대학은 재단·학교,그리고 교수·학생이 합심, 협력하여 빠른 시일 내에 한국의 명문교의 하나로 만들어 가꾸어 나갈 것을 굳게 다짐하며 개교사에 갈음하고자 한다.

한편 이희순 이사장은 한성여자대학 개교에 즈음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축사를 하였다.

우리가 흔히들 말하기를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합니다. 그리고 이를 셋으로 똑같이 우리 생활과 관심 및 사고의 대상인 것처럼 가름하려고 들합니다.

그러나 기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관심사는 과거의 것이 아니면 현재의 것입니다. 한편 미래의 것도 없지 않으나, 있어봐야 기껏 1, 2년 앞이나, 한껏 길어봐야 10년 앞의 것에 불과합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역사적 지식은 이 같은 과거로는 수 천년에 뻗어있음에 반하여 앞날을 내다보는 역사적 지식은 고작 10년도 뻗지 못합니다.

이같이 미래는 그저 막연하고 때로는 불안한 구름이나 안개처럼 앞을 막는 것과 같고 그것은 돌이켜 몇 천년의 과거를 돌이켜 돌아보는 것보다도 선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앞을 내다보기 힘든 우리의 역사적 지식은 교육을 통해서만이 보다 선명하게 미래를 내다보고 건설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교육의 비전과 힘이 숨겨져 있습니다.

특히 20세기에 대한 오늘의 미래는 어제의 미래와 엄청나게 다릅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미래는 어제의 미래와 달리 급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발명 및 발견 그리고 새로운 제도 및 새로운 양식이 쉼 없이 새로운 것들을 계속 터져 나오게 하고 있으며 우리 눈앞에 이러한 것들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하고 있습니다.

교육도 이 같은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이에 뒤떨어지지 않는 미래를 내다본 한치의 오차도 없는,빈틈없는 바람직한 교육관의 확립과 교육 내용이 선행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편 이 같은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여성에 대한 종래 구속적이고 그릇되고 안일한 인식의 굴레에서 벗어나 남성과 모든 분야에서 명실상부하게 실질적으로 평등한 미래에 대한 준비와 각오가 새롭게 정립되어야 할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이 같은 사회 각 분야에 걸쳐 명실상부한 미래를 향한 무대의 설계는 오직 여성 최고학부의 교육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20세기 세계 속에서 오늘 우리 한국은 앞으로 30년 남짓한 다가오는 21세기 2천년대 세계의 움직임 속에 남의 뒤를 따르는 수동적이 아닌 지구촌을 움직여 가는 능동적인 존재 곧 다름 아닌 우리 청소년 세대입니다.

이 같은 세계사적인 전환기에 대한 우리대학가에 한성여자대학의 탄생은 우리 나라 여성계에 새로운 희망이요, 우리 나라 대학가에 새로운 이정표가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특히 여성 최고학부의 교육은 심오한 전문적인 학문 연마와 이에 못지 않게 사랑과 믿음의 성실하고 근면한 여성상의 확립이 무엇보다도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성은 아름다워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다같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우리 한성여자대학은 이러한 21세기 미래를 향한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사회에 희망의 등불이 되고,국가 사회에 봉사의 기수가 될 여성 지도자 양성을 우리대학의 교육목표로 삼을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 한성여자대학은 우리 사회에 부응하는 진실 되고 성실하고 참된 교육 혁신을 통하여 미래를 향한 한 치의 빗나감이 없는 여성 인재양성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굳게 다짐하며 축사의 인사에 갈음합니다.

2. 한성여자대학 인가의 일화

한성여자대학 설립인가가 있기 까지 당시 문교부장관이었던 민관식 장관의 공이 컸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수도권 지역 대학설립 억제를 국가정책으로 삼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민관식 문교부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재가를 얻기까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민관식 문교부장관과 우촌 김의형 박사는 대한체육회 발전에 힘써 온 사이였으며,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안호상 박사와 이 두 사람 사이 또한 민족지도자들로서 깊은 인연이 있었다는 점이 한성여자대학 설립인가에 보이지 않는 작용을 하였던 것이다.

민관식씨가 문교부장관에 취임 전에 대한체육회장으로 있을 당시 방콕 아시안게임에 참석,식전행사에서 일사불란하게 펼쳐지는 카드 섹션을 처음 대하고 내심 감탄하고 돌아온 바 있었다. 귀국 후 대한체육회 사무국 임원을 당시 카드 섹션 수준이 세계 제일 높다는 캄보디아에 파견, 카드섹션 연출 방법을 익혀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무국 임원이 그 연출 방법을 배워왔지만 이를 구현해 줄 학교가 나서주지 아니하였다.

민관식 대한체육회장의 이 같은 고민에 처함을 보고,당시 대한체육회 이사직에 있던 우촌 김의형 선생은 한성여자고등학교장으로서 카드 섹션 구현을 시켜 전국체전의 근대화를 돕게 하였던 것이다.

민관식 대한체육회장이 문교부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 이 같은 인연이 많은 도움이 되어 한성여자대학 설립인가의 재가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제2장 건학이념

제1절 한성학원의 교육이념

1. 한성학원의 교육이념

한성학원은 진리와 지선을 교육이념으로 삼아 설립되었다. 여기서 진리라 함은 교육기관의 궁극적인 목적이 진리탐구라는 데 있다는 보편적인 의미에서 출발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한성학원의 교육이념에 담긴 진리의 의미는 이 밖에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서의 말씀에서 보듯 인간이 추구하는 '참 자유로움'을 뜻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로움을 누리기에 앞서 진리를 깨달아야 하며 이를 위한 사명이 교육기관에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교육기관을 흔히 '진

리의 전당'이라고 지칭하는 연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성학원의 또 하나의 교육이념인 지선(至#)역시 진리의 개념과 동일한 선상의 덕목(德)에 해당한다. 본래 「대학(大學)」의 '지어지선(止於至善)'에서 비롯된 이 말은 '더할 수 없는 지극한 선(善)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자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의 완성을 위하여 수득(修得) 할 대학의 도는 사람의 본성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사리를 올바로 인식할 영명(英明)한 재덕(才德)을 개발하여 지고(至高)의 선(普)에 이르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결국 학문을 완성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도 지선(至善)을 목표로 할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고 또한 학문추구의 결실도 선(善)함으로 귀결되는 법이다. 이와 같은 선한 인성계발을 한성학원의 교육이념으로 삼았다는 것은 진리탐구의 근본을 올바로 인식하였다는 견지에서 한성학원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전을 확고히 해주고 있다. '진리는 궁극적으로 선에 이른다'는 깊고 오묘한 건학정신은 우리대학의 인문, 사회,예술, 자연학부 등 전 분야의 학문영역에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케 해 줄 것이며 바람직한 학문활동을 보장케 해 줄 것이다. 그리하여

학문연구를 통한 인성의 계발은 새로운 이론의 정립과 더불어 이 시대가 요구하는 교육기관의 사명이며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바람직한 민주시민과 사회의 지도자,더 나아가 건강한 한국인을 육성하기 위한 좌표인 것이다. 따라서 전 한성인은 이러한 훌륭한 건학 이념의 뜻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실천하는 데 앞장서야 할 것이다. 예컨대 상징적이고 전시적인 교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진리,지선의 참 의미를 깨우쳐 생활하는 교육인이 될 때 한성학원의 교육이넘 은 한성인의 활력 소로 영원히 빛을 발할 것이다.

2. 교시(校是)

초대 학장 김의형 박사는 우리대힉- 교시(校是)를 진리(眞理),지선(至善)으로 삼고,건학이념으로 ① 진리탐구 ② 인격도야 ③ 인재양성으로 할 것을 밝혔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충 설명하면 다음과 같이 정

리 될 수 있을 것이다.

(1) 진리탐구

진리탐구는 상아탑의 본연의 임무요 사명이다.

진리란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 타당한 논리의 법칙이요,참된 도리를 뜻한다. 이 같은 진리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규정되어 왔다. 곧 새로운 시대에는 이에 부응한 새로운 지식이 요구되는 법이다. 그러나 사물의 근본원리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 원리를 밝혀내기 위하여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온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이를 탐구하기 위해 무엇보다 창의력 개발이 있어야 한다. 우리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무한한 창의력을 개발,창출하여 인류문화 창달에 기여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 대학교육의 중요한 목표이자 목적이라 할 것이다.

문화란 인류의 산물로써, 인간에 의하여 창조되고 생성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선조로부터 대대로 전승되어 온 하나의 민족적인 유산이다.

이 같은 문화의 전승은 진리탐구를 전제로 계승 발전한다.

한편 진리의 탐구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탐구의 올바른 자세가 요구된다. 사물을 올바로 보는 시각 및 탐구의 바른 자세가 확립되어 있지 않다면 진리를 찾아낼 수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진리 탐구의 자세는 어느 시대 어느 환경 속에서도 흔들림이나 굴하지 않고 참된 도리를 찾아 밝혀 나가는데 있다. 따라서 우리대학의 첫 번째 교육목표인 진리탐구의 구체적인 시행 목표로서 진리 탐구 외에 창의성 계발과 올바른 가치관의 확립을 덕목으로 설정하였다.

(2) 인격도야

우리대학의 두 번째 교육목표는 인격도야이다. 대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전당이자, 인격도야의 장이다. 따라서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는 것 이 많은 사람이 라도 그 사람됨이 바르지 못한다면 그는 올바른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올바른 사람은 세상의 시류에 끌려 다니지 아니하고 참된 도리를

바르게 지켜 나가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일쩍이 우리 동양에서는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사람은 학문 연마와 함께 인격수양어 1 힘써 덕을 쌓는 일을 중하게 여겨왔다. 인간으로서 참된 도리를 지켜가며 살아가지 않는 이는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속마음과 다른 말이나 몸가짐을 하거나 자기 고접을 내세우는 사람을 바른 인격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즉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도 인격을 갖추지 못했을 때 그 사람에서 올바른 사람으로 평가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움이 넓어가고 깊어갈수록 그에 비례하여 올바른 가치관이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 먼 앞날을 내다보며 바른 몸과 마음가짐을 가지고 행하지 아니한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의 지성인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 는 말이 있듯이 한 인간이 인격을 도야하는 데 있어 전제조건의 하나가 건전한 신체의 단련이다. 특히 우리대학의 경우 설립자 우촌 선생의 교육이념 가운데 체육교육은 매우 종요한 비중올 차지하고 았다. 건강을 잃을 때 모든 것을 잃

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올바른 지식의 함양과 함께 건전한 육체 단련을 위한 이원적 교육이 강조된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덕을 쌓은 이라도 건강하지 못하면 용기와 과단성과 추진력의 결핍으로 그 배운 바 참뜻을 바로 실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이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여러 교육자들에 의해 지식교육 못지 않게 체육교육이 강조되었던 것도 여기에 있었다. 요컨대 개인의 인격도야는 물론 민족 구성원 전체의 건전한 인격과 건강한 사회인을 양성하기 위해 체력을 단련하며 연마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대학교육의 과제이자 목표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오늘날 민주시민사회에서 아무리 배운 것이 많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녔더라도 그 사회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그 사회로부터 환영받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작고 변변치 못한 일이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일과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할 때 비로소 민주시민으로서의 자격이 부여되는 것이다.

이상의 점에 유념하여 우리대학은 두 번째 교육목표로 인격도야를

설정하였으며 그 실천 덕목으로 첫째, 덕성의 함양 둘째, 건강한 신체의 단련 셋째,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인간상을 우리대학의 또 하나의 덕목으로 삼은 것이다.

(3) 인재양성

우리대학이 설정한 세 번째 교육목표는 인재양성이다. 대학의 사명은 국가사회에 유익하고 유능한 언재를 양성하는데 있다. 대학은 그나라의 최고학부로서 예로부터 국가의 고급 인재양성 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해 왔다. 역사적으로 우리 나라의 최고 교육기관에서는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재양성을 기본적인 목표로 삼고 ‘배달겨레’의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는 교육에 모아왔다. 이를 한 마디로 함걷뜸하고 있는 교육이념이자, 교육철학이 홍익인간 구현이다.

홍익인간 사상은 우리 배달겨레의 건국신화이자 단군 조선의 건국이념을 함축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이다. 여기서 단(鎬)이란 ‘밝달’이라 하여 ‘밝은 땅’이란 뜻으로 ‘배달’이라고 전해 왔으며, 우리

가 말하는 ‘한얼’은 ‘단일민족’또는 ‘백의빈족’을 의미하며, 시조 단군의 혈통을 그대로 계송하였음을 뜻하는 사상이다. 그러고 ‘홍익인간’이란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정신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이자 오늘날 우리 교육의 최대 덕목으로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 정신과 사상에 부합한 인재 양성을 우리대학의 교육목표의 실천덕목의 하나로 삼았다.

따라서 우리대학은 이 덕목의 실천을 위해 첫째,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과 민족정신에 투철한 ‘참 한국인’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다시말해 우리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불어넣어 한민족에 대한 주체성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둘째, 건전한 시민의식을 소유한 지성인을 양성하는 일에 주력하고자 하였다. 우리 민족은 유구한 역사에 비하여 근대적 시민의식에 기초한 민주사회를 건설한 것은 1945년 해방 이후이다. 따라서 장구한 민족사에 비해 매우 일천하다.

최근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이기적 개인주의나 공공의식의 절대 결여 현상도 우리사회가 진정한 의미의 민주시민으로서의 훈련과 경험을 축적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다 할 수 았다. 따라서 향후 우리 사회가 진정한 민주시민사회 건설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대학에서 젊은이들에게 건전한 시민의식을 고취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선챙되어야 할 과제의 하나이다.

모든 대학의 궁극적인 교육목적이 그러하듯 우리대학 역시 인재양성의 최종목표와 목적을 민족과 국가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머물지 않고 세계 인류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적인 지도자를 양성, 배출하는 데 두고자 하였다.

따라서 민족의 장래를 책임져야 할 인재양성의 책무를 담보하고 있는 오늘의 대학은 이 같은 대내외적인 변혁기와 함께 도래한 겨레 민족의 국운을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갈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는 일을 우리대학의 교육지표로 삼아 마땅할 것이다.

제2절 한성대학의 교육목적 및 교육목표

우리대학은 ‘진리·지선’이라는 건학이념에 입각하여, 민족정신을 계승하고 언류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섬오한 이론을 연구·교육하며, 봉사정선이 충만한 지도적 인격을 함양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건학이념인 '진리·지선'은 학문의 전당으로서 진리를 추구할 뿐 아니라, 지식 자체의 수수에 얽매이지 않고 국가.사회에 기여하는 봉사정신이 충만한, 바로 「대학」이 추구하는 '지어지선(止於至善)'의 경지를 지향하는 도덕적인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과 같은사회에서는, 단순히 기능적인 인재가 아닌 사회의 지도자로서의 도덕적 품성을 지닌 인재를 요구하는 것과 부합한다. 우리대학의 교육목적은 이러한 건학이념에 따라 “민족문화 창달에 기여하고, 현대 정보화사회와 고도 산업기술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학문을 연구·교육하며, 지역사폐 및 국가·인류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도덕적이며 창의적인 인제룹 양성한다."로 하였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교육목표는 다음과

목표는 다음과 같다.

1.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올바른 한국인을 양성한다.

2. 세계적 가치기준에 부합하는 건전한 민주시민을 양성한다.

3. 정보화 사회에 필요한 창의적 인재를 양성한다.

4. 문화·예술적 소양을 갖춘 지성인을 양성한다.

학문은 시대 조류에 상관없는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그 시대가 요구하는 가장 절실한 주제를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과 같이 무한 경쟁의 고도 기술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현대를 정보화 사회라 특징 짓는 것은 정보의 생성, 전달에 관련된 모든 일들이 산업의 중추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보화 사회와 고도 산업기술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학문을 연구·교육하는 것은 오늘의 대학이 가져야 하는 기본 사명이며, 이는 결국 시대에 맞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다. 새 밀레니엄에 접어든 시점에서, 우리대학이 양성

하고자 하는 인재는 교육목표가 제시하고 있는 아래 <그림 1> 한성대학교 4 인상으로 요약된다.

올바른 한국인

건전한 민주시민

창의적 인재

예술적 지성인

<그림 1> 한성대학교의 4인상

21세기를 선도할 대한민국의 인재는 우선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올바른 한국인으로서의 품성을 갖추어야 한다. 새 시대는 극심한 경제 갈등과 언어 경쟁을 통하여 민족 정체성이 특히 위협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대학은 옛 한성의 역사, 문화 유적이 풍부한 성북구의 중심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올바른 한국인은 우리 지역사회가 요구하는 인재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수적인 민족성의 고수는 곧 경쟁에서의 도태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올바른 한국인은 다시 세계적 가치기준에 부합하는 보편적 세계인이 되기를 요구한다. 이 세계인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뿐 아니라,진정한 민주질서의 구현이라는 한국의 발전방향과 보편적 세계질서를 선도하는 새 시대 한국의 위상강화를 위해 절실히 요구된다. 이와 같이 세계적 가치기준에 부합하는 건전한 민주시 민의 양성은 대한민국의 발전뿐 아니라,인류사회의 번영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대학의 기본 임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21세기에도 예견되는 국가·민족 사이의 경쟁을 이겨나가기 위해 예상되는 정보 시대의 발전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20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정보· 통신혁명은 정보의 복잡화· 고속화· 대용량화로 특징 지울 수 있는 정보중심사회를 구성하였다. 이 시기에서 정보의 생산,가공,전달은 3차 산업의 틀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으며,이에 종사하는 인력의 능력 및 소양은 이제까지 산업에 필요했던 자질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따라서 대학은 앞으로 요구되는 인재를 중심적으로 길러낼 필요가 있다. 이에 우리대학은 정보화 사회가 요구하는 과학적 지식과 기술을 갖춘 창의적 인재 양성을 교육의 주요한 목표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인재는 지식기반산업을 선도하는 미래 지식인의 모습이며,교통의 요지에서 지식 집약의 벤처산업을 집약적으로 육성하려는 우리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대학은 공과대학이 컴퓨터공학부와 정보공학부, 산업 및 기계시스템공학부로 구성되어 있으므로,복수 전공의 활용과 교양교육의 강화를 통한

특성 있는 교육 프로그램으로 이러한 교육목표를 달성하고 있다. 21세기가 요구하는 인재는 사회가 요구하는 정보내용을 생산할 수 있을 뿐 아니라,생산된 정보내용을 심미적으로 가공할 수 있는 문화· 예술적 소양을 갖춘 지성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21세기 문화경쟁을 주도할 수 있는 인재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 더구나 우리대학은 문화· 예술의 중심인 대학로에 인접하고 있기 때문에 문화적 감각이 뛰어난 교양인을 양성하는 데 지리·환경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은 우리대학의 교육프로그램에도 적절 히 반영되어 패션예술이나 컴퓨터그래픽을 활용한 실용디자인 교육이 활성화되도록 하고 있다. 특히 국내 최초의 예술대학원은 지역적 특성과 연계한 문화인프라의 한 거점으로 활용되고 있다.

제3절 교기, 교표, 이미지마크, 교가, 상징물

1. 교기 및 교표

개교 당시 우리대학의 교표는 가운데 대학이라는 한글에 글씨체로 동그랗게 둘러싼 형태로 좌우로 한성이라는 교명과 영문 HANSUNG WOMEN’S COLLEGE를 적어 놓았다. 이후 1978년 남녀공학이 되면서 교표가 바뀌었다. 건국대 생활미술학과장 이명구 교수가 디자인 한것으로 가운데 대학이라는 한글을 한자로 글씨체로 동그량게 둘러싼 형태를 두 개의 원으로 하고 그 안에 영문명으로 HANSUNG UNIVERSITY를 적어 놓고 바깥으로 부드러운 육각형의 별 모양을 그려놓았다. 그 의미는 귀형(龜形)으로 꾸준한 노력을 상징하며, 꽃처럼 아름다운 학문의 전당이며, 색채는 청색과 은색으로 청색은 무한한 희망과 젊음을 상징하고, 은색은 영구불변을 표현한 것이다. 다시 1984

년 우리대학 미술학과장 강국진 교수가 상징물 거북이 문양을 상징하는 새로운 교표를 제작하였다. 진한 밤색의 세 개 육각형으로 구성되었으며, 가장자리와 가운데의 육각형은 한성대학교의 상징물 거북의 모양으로 대학의 울타리와 교수를 의미하며, 가장 안쪽의 육각형은 다이아몬드를 의미하고 학생을 나타낸다. 육각형을 받치고 있는 도형은 대학의 발전과 학교, 교수, 학생을 받치고 있음을 의미하는 문양으로 진리탐구와 협동을 나타낸다. 교색은 VANDYKE BROWN(황갈색)으로 결실, 완성을 나타낸다. 1991년에 산업디자인학과 이상원 교수가 교표의 원래 취지와 형태는 살리되 띠로 둘러싸고 육각형을 받치고 있는 도형에 들어있던 영문명 HANSUNG UNIVERSITY를 띠안으로 옮기고 좌우로 별 모양 두 개와 한성대학교라는 한글을 새겨 넣는다. 개교 당시 학교의 교기는 그 바탕을 자주색으로 하고 중앙에 교표를 그려 넣고 아래에 흰 글씨로 한성여자대학을 새겨 놓는다. 1978년 교명과 교표가 바뀌면서 자주색 바탕에 교표와 한성대학을 1984년 거북이 문양으로 교표가 바뀌면서 새로운 교표와 아래 흰색으로 한성대학교라 적어 놓는다. 한가지 특이한 것은 가운데 진한 밤색을 백색으로 표

현하고 아래 육각형을 떠받치고 있는 밤색 도형을 하늘색으로 변경하였다. 이후 1991년 제작되어 지금까지 내려온 교기는 같은 자주색 바탕에 원래의 진한 밤색과 도형으로 제작되어 있다.

1972〜1977 디자인ᅳ 한성대학

1978〜1984 디자인-- 건국대 생활미술학과장 이명구 교수

1984~990 디자인.- 미습학과장 강국리 교수

한성대학의 산징인 거북이 문양을 상징

1991 - 현재 미디어디자인 학부 이상원 교수

가운데 대학이라는 한글에 글씨체로 동그랗게 둘러싼 형태로 좌우로 한성이라는 교명과 영문 HANSLJNG WOMEN’S COLLEGE를 적어 놓았다.

한성의 ‘ᄒ’자룹 monogram방식으로 표현하고,‘ㅅ'자 사방으로 구성표현하여 시각적으로 발전을 상징하며, V자는 승리를 나타낸다. 형태는 귀형(龜形)으로 꾸준한 노력을 상징하며, 꽃처럼 아름다운 학문의 전당을 뜻한디. 색채는 청색과 은색이며, 청색은 무한한 희망과 젊음을 상징,은색은 영구불변을 표현한다.

세 개의 육각도형 중 가장자리에 위치한 것은 거북이의 문양으로, 대학의 울타리를 상정하고, 가운데의 것은 거북이의 문양으로 교수활 상징하며, 가장 안쪽의 것은 다이아몬드를 나타내고 학생을 의미한다. 이들을 떠받치고 있는 포형은 진리탐구와 협동을 나타낸다. 색채는 황갈색으로 결실과 완성을 나타낸다.

육각형은 우리대학의 상징물 거북의 모양으로 대학의 울타리와 각각 교수, 학생을 의미한다. 육각형을 받치고 있는 도형은 대학의 발전과 학교, 교수, 학생을 받치고 있음을 의미하는 문양으로 진리탐구, 진리의 보고인 책과 협동을 나타낸다.

2. 이미지마크

1991- 현재 디자인 -산업디자인 이상원 교수

대학의 이니셜인 U자를 기본으로 반복활용 하였으며 두 개의 점은 교수·학생 또는 남녀를 상징하며 마크전체의 분위기는 상호 보완작용·협동을 나타내는 형으로 국제화를 향해 끊임없이 창조하려는 대학의 정신을 형상화하였다.

대학을 상징하는 학사모를 단순화한 마름모형을 바탕으로 지구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조형요소로 접목시켜 세계화를 향해 웅비하는 모습을 이미지화 한 것이다. 3개의 선형은 대학의 과거 현재, 미래의 점진적인 발전상을 시각화한 것이다.

대학의 이니설인 U자를 기본으로 반복활용 하였으며 두개의 점은 교수 학생 또는 남녀를상정하며 마크전체의 분위기는 상호 보완작용 ·협동을 나타내는 형으로 국제화를 향해 끊임없이 창조하려는 대학의 정신을 형상화하였다. 대학을 상징하는 학사모를 딘순화한 마름모형을 바탕으로 지구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조형요소로 접목시켜 세제화를 향해 웅비하는 모습을 이미지화 한 것이다. 3개의 선형은 대학의 과거, 현재, 비래의 점진적인 발전상을 시각화한 것이다.

3. 교가

한성여자대학 작사작곡

1. 한성은 문화중심 나라의 심장 낙산언덕 위에 터전을 닦고 배움의 전당을 우뚝 세우니 우리들의 보금자리 한성여대

2 현실의 어려움이 가로막아도 내 뜻 내 생각 굽히 잖으리 슬기와 희망을 북돋아 주는 우리들의 보금자리 한성여대

1978년 남녀 공학으로 전환하면서 새로 제정.

정연길 작사 이영조 작곡

1. 북악에 마주선 낙산언덕에 슬기의 샘물이 용솟음친다. 우람한 내일을 다져가리라 청운의 배움터 한성대학교 후렴드높은 이상을 가슴에 품고 진리와 지선을 기르고 닦아 겨레의 빛되리 희밍이 되리

2. 삼학송 푸른뜻 닦은 터 전에 보람의 강물이 넘쳐흐른다. 영광된 내일을 다짐하여라 상아의 높은탑 한성대학교 후럼 드높은 이상을 가슴에 품고 진리와 지선을 기르고 닦아 겨레의 빛되리 희망이 되리

4. 상징물

(1) 거북

거북은 예로부터 십장생의 하나로 일컬어져 왔으며 기린, 봉황, 용과 더불어 4대 명물로 지칭되기도 할만큼 신령스러운 동물로 간주되어 왔다. 우리대학은 거북이처럼 슬기롭고, 짧은 기간 내에 성장하여 유구한 발전을 추구해 나가고 있다. 거북이의 지혜와 영특성은 ‘진리’와 통하고,구전되어 오는 대로 인간을 구원해 준다는 그 성품은 ‘선(善)’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대학의 교훈인 진리·지선과 거북이는 이러한 상징적 관계에 있다.

(2) 삼학송

1975년 5월 우리대학 정문 옆에 세 그루 나란히 우뚝 선 소나무에 삼학송이란 이름을 붙이고, 한성인들에게 젊은 학도로서의 기개를 함양하는 상징나무로 삼기로 하였다.

이 소나무는 지난 1920년부터 이 곳에 야생하던 소나무로 고사 직전 설립자 김의형 박사가 손수 그 나무를 오늘의 거목으로 키워 왔었다.

당시 학생처장인 윤태영 교수 등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 세 그루의

소나무를 김의형 학장은 삼학송이라 명명하고 우리대학의 상징나무로 삼기로 하였다.

여기서 삼학송이란 병자호란 때 나라를 위해 순절한 삼학사(三學士)의 절개를 뜻하고 있다. 병자호란 때 적지 청나라에 끌려가 항복화친을 끝까지 반대,살해당한 홍익한, 윤 집, 오달제 세 선비의 절개를 받들어 삼학사의 이름을 따서 삼학송이라 이름을 칭하게 된 것이다.

제2편 형성기

제2편 형성기

제1장 첫발을 내딛는 한성

제1절 제1회 입학식과 증과 · 증원

1. 제1회 입학식

1973년 3월 5일 역사적인 한성여자대학 제1회 입학식을 성대하게 가졌다. 초대 학장 김의형 박사는 입학 개식사에서

“우리 한성여자대학이 오늘 제1회 입학식을 갖게 된 것은 우리 한국 대학가에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고 전제하고 “여성 전문 영재 육성에 최선을 다할 것”을 강조했다.

이어 한성학원 재단 이희순 이사장은 축사에서 “급변하는 세계 정세외 변화는 여성 전문 영재 교육의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고 강조하고 “앞으로 이 같은 역사척 소명을 다하는 대학으로 만들어 나가겠다” 고 덧붙였다.

한편 1973 학년도 3월 제1회 신입생을 맞아 교무처장에 고창식, 학생처장에 윤태영 교수가 각각 취임하였다.

2. 증과 · 증원과 활발한 학생 활동

(1) 무용학과 · 경영학과 · 무역학과 증과

1974년도부터 입학정원이 전년도인 1973년 150명보다 80명이 증원

된 23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는 지난해 12월 20일 학과정원조정에 의하여 불문학과 20명, 무용학과 20명, 경영학과 30명, 무역학과 30명으로 각각 증과된 반면 비서학과(20명)는 폐과되었다.

그리하여 1974학년도부터 우리대학 입학정원이 9개학과 230명으로 증원을 보게 되었다.

한편 3월 신학기를 맞아 보직개편이 있었다.

교무처장 고창식,학생처장 윤태영 교수를 임명하는 한편 국문학과장 윤태영,가정학과장 김복길,생활미술학과장 차주환 교수를 각각 임명하였다. 그리고 연정열 강사를 경영학과 및 무역학과장 대행에 명하였다.

(2) 각종 서클 탄생과 웅변반의 활약

1974년은 국내적으로 북한공산집단의 사주를 받은 조총련 문세광이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저격 시해하는 등 그 어느 때보다도 북

한공산주의자들의 도발행위가 극에 딸한 시기였다. 이 같은 북한공산접단의 도발행위는 상대적으로 우리의 총력안보가 강조되었다. 이 같은 국가안보와 총력안보의 강조는 대학을 비롯한 각급 학교에 그 영향이 파급되어 안보교육이 강조되었다.

한편 개교 2년을 맞은 학생활동도 총력안보 차원에서 안보문제연구회(회장 조인자, 지도교수 연정열)을 비롯한 R.C.Y.(회장 박옥면, 지도교수 원태영) 불교학생회 등 세 서클이 처음으로 선보이게 되었다.

폭히 안보문제 연구회는 한국반공연맹 산하 전국대학 반공서를 회원교로 가입하게 되었다.

이 해 1974년은 국가안보와 총력안보의 각종 궐기대회 및 행사가 여기 저기서 열렸으며 이 같은 시대적 상황은 각종 반공웅변대회가 개최페기도 한 시기였다.

이 같은 시기에 부응하여 우리대학도 웅변반이 조직되고 웅변활동을 통해 선설교인 한성여자대학을 대외에 홍보하는데 힘쓰기도 하였다.

본 웅변반은 서명애 (영문학과 1년), 이경숙 (영문학과 1년), 이정국(경영학과 1년) 등 세 명의 반원을 주축으로 연정열 교수 지도 아래전국 규모의 웅변대회에서 그 해 7관왕을 차지 대학웅변을 제패했다.

이 해 6월 31일 제26회 대통령 친수기 쟁탈 제헌절 전국 남여 웅변대회에서 우리대학 웅변반은 대학일반부 단체우승을 하지하였으며, 이날 전국 웅변인회가 주최한 총력안보 전국 남녀 종별 웅변대회에서 서명애 양이 최우수상을 획득, 하루 똥안 두 대회에서 2관왕을 차지하는 진기록을 낳기도 하였다.

3. 학도호국단의 설치와 활동

1975년 2월 직제개편에 따라 처장을 과장으로 직제를 바꿔, 교무과장 정기수, 학생과장 연정철 교수를 임명하였다. 그러고 불문학과장에

정기수,무용학과장 대행에 김진걸 교수가 취임하였다.

1975년도는 전년도 이어 총력안보가 강조되던 시국적인 형편에 부응하여 우리 대 학에 도 학도호국단이 처 음으로 조직 되었다.

임원으로는 대대장 조인자 (국문 3),부대대장 박옥면 (영문 3),총무부장 박순식 (가정 3), 지도부장 임기옥 (생활미술 3), 새마을과장 정득영 (가정 3), 문예부장 문장옥 (국문 3), 체육부장 주순희 (의상 3)를 각각 임명하였다.

그 해 1975년 11월 초 비가 쏟아지는 속에 한성여자대학 학도호국단 자체검열을 받았다.

한편 우리대학 웅변반은 1975년도 신학기를 맞아 조인자 (국문 3), 문현숙 (가정 1),정정숙 (경영 1) 등으로 개편하고 그 해 7월 17일 제27회 제헌절 전국 웅변대회에서 전년도에 이어 단체 우승을 차지하여 동 대회에서 2연패를 달성하는 등,이 해도 전년 1974년도에 이어 총력안보 웅변대회 등 대학 웅변 7관왕을 차지하여 1975년도 대학 웅변을 제패한 해이기도 하다.

이 해에 접어들어 기독교 학생회,등산반 등 서클들이 하나 둘씩 새

서클이 선보이게 되었고 우리대학 학생들의 대외봉사 활동도 개교이래 활발하게 펼쳐지기도 하였다.

1975년 7월 18일부터 1주간 우리대학 학도호국단 봉사단은 윤태영, 연정열 두 교수의 인솔 밑에 충남 아산군 탐정면 신리 소재 온양 양로원에서 수익 사업체인 묘목밭 경작을 도와 김매기 등의 봉사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그 해 12월 5일부터 1주간 동 양로원에서 동계 봉사활동을 하였다.

이에 앞서 이 해 5월 8일,전교생이 참가한 가운데 우리대학 안보문제연구회(회장 조인자) 주최로 북괴만행규탄 궐기대회를 갖고 3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전국 각 대학별로 북괴만행규탄 궐기대회를 갖고 대학생으로서의 안보의식 고취와 결의를 다진 이 행사에 우리대학도 동참 이 날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① 우리대학생은 총화단결로서 안보자세를 굳건히 할 것을 대학생

들에게 호소한다.

② 우리대학생들은 면학으로서 나라에 보답하고 총력안보에 기수가 될 것을 굳게 맹세한다.

③ 우리는 한마음 한뜻으로 굳건히 뭉쳐 북괴야욕을 분쇄,승공 통일의 지표를 굳건히 할 것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바이다.

제2절 성장을 향한 움직임

1. 보직 개편과 학술활동

(1) 보직개편

개교 4년째를 맞는 1976년 신학기를 맞아 이제 1학년부터 4학년까지 전학년이 함께 수강을 하게 되어 명실상부한 4년제 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신학기를 맞아 교무과장 정기수 학생과장 연정열 교수가 유임되었으며, 그 해 6월 다시 보직개편이 있었다.

교무과장에 이경식, 학생과장에 이근수 교수가 각각 취임하였다. 그리고 국문학과장 이근수, 영문학과장 이경식, 가정학과장 김복길, 생활미술학과장 차주환, 경영학과 및 무역학과장 연정열, 무용학과장 김진걸 교수가 각각 임명되었다.

2학기에 접어들어 학도호국단 직제개편과 임원개편이 있었다.

대대장이 제대장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제대장 이혜숙 (국문 3), 부제대장 유선봉 (무용 3), 제 1 중대장 김을남 (생활미술 3), 총무부장 주완숙 (경영 3), 새마을부장 이영란 (가정 3), 지도부장 김명옥 (생활미술 3), 문예부장 전미화 (국문 3), 훈련부장 김수광 (영문 3) 을 각각 임명하였다.

(2) 국어국문학과 방언 · 민속 학술 조사활동

이에 앞서 6월 국문학과 남해도 방언 민속 학술조사 활동을 이근수

교수 지도 아래 펼쳐 우리대학 학술조사활동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

한편 그 해 10월 23일, 24일 이틀에 걸쳐서 제1회 한성축전이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이로서 한성축전의 새로운 전통의 터전을 마련하케 된 것이다.

11월 13일 1976학년도 학도호국단 병영실기를 포함한 자체겸열을 받았다.

2. 한성경영학보 발간, 한성여자대학보 창간

우리대학이 개교 4주년을 맞는 1976년 아직까지도 학보가 없다는 아쉬움을 느낀 경영학회(동년 4월 최초로 학희를 구성, 회장 주완숙)에서 처음으로 타블로이드판 신문인 한성경영학보를 11월 22일자 창간호로 내놨다.

동 신문은 발행인 김의형, 편집인 연정열로 되어 있으며, 편집장은 경영학과3년 정상란이 맡았다.

이 한성경영학보가 발간됨으로써 우리대학 최초의 선문으로 선보이게 되었다. 그러고, 이는 한성여자대학보 발간의 시급성을 촉진시켜 드디어 그 해 12월 한성여자대학보의 창간을 보게 되었다. 한편 한성경영학보 창간호에서 발행인 김의형 학장은 다음과 같은 발간사를 실었다.

경영학회를 창립하고서 그나마 타블로이드판 회지까지 창간호를 내놓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건데,우리 한성여자대학이 고고의 성을 울린 지 4개 성상,이 짧은 시간동안 우리학교 안팎으로 내실을 기하는데 힘써왔습니다. 우리는 대내외적으로 여러 어려운 요건을 극복하면서 오늘에 이르렀고 앞으로 이를 이겨 나가며 명문 한성여자대학의 굳건한 상아탑을 쌓아 올려가야 합니다.

도전(Challenge)과 응전(Response)의 되플이 속에서 문화가 발전한다는 20세기 영국의 석학 아놀드 토인비의 말이 이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고대 인

류문명의 발생이 비옥한 초원지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가뭄과 흥수가 빈번한 황하유역이나 나일강유역에서 일어난 것도 인간이 자연의 도전에 대한 굽힐 줄 모르는 슬기와 용기의 응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경영학회 창립과 함께 이번 창간호를 내게 된 경영학회보의 탄생은 제반 어려운 요건을 극복하고 내일의 참다운 경영인으로서의 소양을 수련하는 광장으로서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성여자대학의 밑거름이 될 한 씨앗이기도 합니다. 경영학과 학생들은 이번 회지 창간을 계기로 더욱 열심히 연구하고 수양하는 바람직한 몸과 마음가짐을 갖고 내일의 올바른 경영인으로서의 자세를 다시 한번 새롭게 가다듬기 바람니다.

앞으로 이 회지가 판을 거듭할 때마다 더욱 짜임새 있고 알찬 내용으로, 경영학회의 새 소식과 함께 참다운 학술지로서 발전하기를 바람니다.

끝으로 이 회지가 나오기까지 힘쓴 지도교수와 관계학생의 노고에 다시 한 번 치하하는 바입니다.

1976년 11월 30일 문공부로부터 정기간행물 허가를 받고 격월간 대학신문인 한성여자대학보가 이 해 12월 10일자로 창간을 하였다.

동 신문은 학생과에서 관장 발간키로 하고 발행인 김의형,편집인

겸 주간 이 근수로 등록을 마쳤다. 한성여자대학보가 창간됨 으로써 한성경영학보는 폐간을 하였다. 한성여자대학보 창간에 즈음해 발행인 김의형 학장은 다음과 같은 발간사를 실었다.

고난을 무릅쓰고,한국의 얼을 심음으로써 참된 여성교육을 실현하려는 건학정신으로 정착한 지 벌써 4년,이제 조출하게 우리의 솜씨로 「한성여대학보」를 창간하게 됨을 진심으로 경하해 마지않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자체 내에서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 끊임없는 변화에 다각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갖가지 지식들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을 ‘지식의 폭발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편안히 이 지식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을 지니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생활의 일부를 담당 하면서 폭발하는 다량의 지식을 보호할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새로운 지식,새로운 교육이념을,그리고 높은 지혜와 두터운 덕행, 튼튼한 체력을 갖춘 미래지향적인 인격형성을 위하여, 우리 선인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살리고 심오한 이론을 실제의 현장에 실현시키기 위하여,국제 초유의 순수 여성야간대학을 설립한 것입니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적 난관을 살피건대 독서삼여의 하나인 야간을 이용하여 학문을 연찬하고,이것을 주간의 실무에 충실히 응용할 수 있도록 함이 시급한 일임을 감득해야 할 것입니다.

이 주경야독의 자세와 그 본직은 의지의 응결입니다. 그것은 남성의 사유물이 아닙니다. 현대적 의의로는 여성으로까지 확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 학보의 창간은 본교의 건학이념을 더욱 창조적으로 구현하려는 노력의 한 표현입니다. 알찬 내용과 분명한 논지,다양한 편집으로 대학언론의 일익을 맡으면서 사계에 날로 성가를 높이면 우리의 의지는 서서히 구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 학보를 의지 구현의 장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본 학보는 우리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관심 밖으로 나가서는 안됩니다. 하나하나 미세한 것에도 관심을 두어 잘잘못을 가려보고 비판과 질정을 아끼지 않아 건전하게 이끌어야 할 것입니다. 참여 없는 비판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학술을 연마하고 심오한 학술의 이념을 연결하여 국가와 민족,나아가 인류사회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내용을 발표할 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조상이 남긴 빛난 문화유산을 보전해야 하며 나아가서는 새로운 문화창조의 전진적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모교애를 지녀야 합니다. ‘대학의 입’이라고 지칭 할 수 있는 본 학보는 우리 학문의 깊이요,정서의 향취,대화의 광장으로서 우리 모두의 정신의 집결지요,시선의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지나온 짧은 몇 년이지만 서서히 저력을 기르면서,이 힘이 모교를 위하여 얼마나 활용될 수 있을까 측정해야겠습니다. 오늘날의 대학은 부하된 기능이 다원화되어 가고 활동의 양상 또한 복잡 다양하여지 기 때문에 대학 내의 복잡한 그 의식을 본 학보를 통하여 통일시키면서 공통된 최대공약수를 발견하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졸업 후 사회에 나아간 뒤라도 모교와의 연락 역은 역시 본 학보에서 담당하여야 될 것입니다. 모교에 대한 향수로 공허해진 마음의 여백을 한 장의 학보가 날아듦으로써 메울 수 있을 때 비로소 학보의 존재를 알게 되고 뜨거운 모교에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학보는 학원 저널로서의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학교내의 행사·학사문제·제반 학술내용 등을 모두 수용하여야 하며,미래의 문을 두드리는 자세로 ‘학원 입’노릇을 할 때,학풍수립의 선구적 역할을 할 때,전 학생들에

대하여 선도적 자세로 일할 때 참다운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이제 시발의 시점에 서있는 우리 한성여자대학보는 학교당국·교직원, 그리고 학생들의 어느 한편에만 기울어지는 편향성을 띠지 말고 한성여자대학 전체를 투영하는 의연한 자세로 굳건히 발전해 주기를 바람니다. 젊은 지성의 소리를 대변하고,배움의 전당 속에서 학구의 반려가 되어 창의적인 노력과 자율적인 의지로서 꾸준히 노력해주길 바람니다. 학생 스스로가 만드는 순수성을 상실하지 말고 강렬한 면학의 열의로 자기를 통찰하여 여성교육기관의 기관지적 성격을 갖추는 것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우리 앞에 산재해 있는 지식의 본질을 외부에서만 파악할 것이 아니라 직접 그 안에서 탐색해 내는 자세로 임하길 바랍니다.

아무쪼록 뜻깊은 한성여대학보의 창간을 맞아 본교 발전에 새로운 초점이 될 것이며 아울러 본교 건학이념의 발현체로서 지성의 선도자가 되어주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3. 제1회 학위수여식 개최

1977년 2월 25일 한성여자대학 제1회 학위수여식을 가졌다.

이 날 학위수여식에서 김의형 학장은 개식사에서

“오늘 우리 한성여자대학 제1회 졸업식을 맞아 4년간 형설의 공이 쌓여 영예의 학위기를 받는 졸업생 여러분들을 중심으로 축하한다”고 전제하고 졸업생들이 오늘의 영광이 잇기까지 뒷받침 해주신 학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여 사회에 나가 훌륭한 등불과 같은 훌륭한 일꾼이 되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희순 이사장도 축사에서

“오늘 영광의 학위를 받는 졸업생들의 졸업을 중심으로 축하한다”고 강조하고,

“앞으로 졸업 후에도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학교에서 배운 전공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 모교 한성여자대학을 빛내줄 것”을 강조하였

다.

이 날 영광의 학위기를 받은 졸업생들은 다음과 같다.

국문학과 25명, 영문학과 21명, 의상학과 6명, 생활미술학과 14명, 가정학과 23명 등 모두 89명이다.

제2장 이희순 학장 취임

제1절 이희순 학장 취임과 새로운 도약 다짐

1977년 3월 1일 제2대 학장에 이희순 학장이 취임하였으며, 보직임명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교무과장 이경식, 학생과장 이근수 교수를 유임시커고, 국문학과장 이근수,영문학과장 이경식, 가정학과장 김복길, 생활미술학과장 차주

환,경영학과장 겸 무역학과장 연정열,무용학과장 김진걸 교수를 각각 유임 시키고 새로운 의상학과장에 장석향 교수를 임명하였다.한편 1977학년도 불문학과 폐과에 따라 새로 인가를 받은 국사학과장에 신은숙 교수를 임명하였다.

이희순 학장은 제2대 학장에 취임하면서 다음과 같은 취임사를 하였다.

유난히도 혹독했던 지난겨울 날씨에 현관 옆에 심어 논 목련이 그냥 얼어숙고 말았으려니 했으나 새 봄을 맞아 중분한 봄비와 따뜻한 날씨에 다시 소생하여 어여쁜 꽃들도 피우고 이제는 푸릇푸릇하고 씩씩한 잎사귀들이 많이 돋아나서 신록의 여름을 맞고 있습니다.

이번에 본인이 뜻하지 않게 한성여자대학 학장서리로서 취임하게 되니 한편으로는 부풀어오르는 벅찬 희망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앞으로 해결해야 될 여러 문제들이 아무리 생각해도 능력에 부칠 것 같아 무거운 부담을 느끼게 됩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한성여자대학은 지난 1972년 창립이래 해마다 한 학년씩을 늘려 나가는 발돋움을 거듭한 끝에 금년 봄에야 제 1회 졸업생을 내면서 명실공히 4년제 대학으로 출발되었습니다.

이는 오로지 초대 학장 김의형 박사님을 위시한 교직원과 학생 여러분이 학교 발전을 위해 진력해 온 보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지나간 5년 동안은 대학의 모든 활동이 교실을 갖추고 학생과 교직원들을 매년 맞아들이면서 대학의 기본 기능에 대해서는 겨우 한가지씩 시험해 온 상황이라 하겠습니다.

마치 지난겨울 혹한에 시달려 몸살을 앓던 나무들이 새봄을 맞아 겨우 대지에 새 뿌리들을 내리면서 활착한 단계라고나 할까봅니다.

따라서 앞으로 수년간은 열심히 이 나무들에 영양을 주고 정성껏 가꾸어서 빨리 가지들을 나게 하고,많은 잎을 피워서 빠른 시간에 화사한 꽃들을 피우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제 이 단계에서 우리 한성여자대학 운영의 중책을 맡으며 본인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방침을 갖고 학교 운영을 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면학분위기 조성입니다.

본인의 소견으로는 대학 설립의 가장 큰 의의는 현대와 같이 고도로 발달

된 실업 문명사회에서 심각한 경쟁에 적응하여 자기를 확립하고 사회 및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문화인, 지식인,과학인의 배양에 있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비록 빈약한 여건이나마 최소한의 여건을 그 동안 갖춘 것으로 생각되므로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면학하는 대학을 만들도록 다같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이와 같은 면학하는 분위기를 조성 발전시켜 줄 대학의 여러 가지 제도 및 기능을 확립하고 개선해야 하겠습니다.

지난 5년 동안의 초창기에는 창설대학의 어려운 제반요건으로 많은 혼란도 있었고 시행 착오도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그 동안의 여러 경험들을 바탕으로 하여 대학이 해마다 눈에 띄게 발전할 수 있고 전진할 수 있도록 우선 학내의 모든 제도와 기능을 재정비하여 학생 및 교수 여러분이 각기 본연의 업무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합니다.

셋째로는 인화와 협조입니다.

이는 어느 사회나 단체에도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바이겠지만 특히 우리학교에서와 같이 여러 가지 불편과 미숙한 점이 많고 경험과 역사가 짧은 데에서는 어느 무엇보다도 중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대학이 앞으로 힘찬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학생 및 교직원 여러분의

불타는 애교심에 바탕한 절대적인 협조가 필요합니다.

대학이란 본래 개성 있는 자아를 발전시키는 특수사회이므로 다른 어느 단체보다는 자아를 내세우는 습성이 뚜렷합니다. 따라서 사사건건 시시비비 분명해야 하겠지만 서로가 상대를 자기와 같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기풍을 세움으로써 인화와 협조를 이룩합시다.우선 학내에서 이러한 전통을 이룩함으로써 우리대학은 학외에서도 자랑스럽고 존경받고 인정을 받는 대학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끝으로 본인은 학장 재임 기간 동안 이상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목표를 달성시키기 위하여 학생과 교직원 여러분의 뒷바라지에 최대 최선의 노력을 본인의 능력이 자라날 수 있는 한 경주할 것임을 서약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해 10월 8일과 9일 양일간 제2회 한성축전이 성대하게 열렸다.

전년도 제1회 한성축전 때보다 그 규모나 내용 면에서 많은 발전을 가져왔으며 카톨릭 학생회,서예반 등 새 서클의 탄생과 함께 한성축전의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제3대 학도호국단 임원 구성을 다음과 같이 편성하였다

총학생제대장 연영순 (국문 3),부제대장 이순분 (가정 3), 1중대장 정난순 (생활미술 3),2중대장 정해덕 (무용 3),총무부장 유하행 (가정 3),새마을부장 최명숙 (경영 3),지도부장 배애숙 (가정 3),훈련부장 황규인 (생활미술 3),문예부장 백인숙 (국문 3),체육부장 김정인 (무용 3)

제2절 남·여 공학으로 제2의 탄생

1. 제2의 탄생 남·여 공학으로

1978년 1월 11일 우리대학은 한성여자대학에서 한성대학으로 교명 변경과 함께 종전 야간 여자대학에서 남·여 공학으로 우리대학 제2의 탄생을 한 해이기도 하다.

이 해 10월 15일 문교부로부터 학과 정원조정 승인을 맏아 국문학과,영문학과,의상학과, 생활미술학과, 무용학과 입학정원이 각 10명의 증원을 보게 되었으며,경영학과와 무역학과는 입학정원이 각 50명의 획기직인 증원을 하게 되었다. 한편 가정학과 폐과로 행정학과 (입학 정원 30명) 증과를 보게 하여 입학정원이 종전 9개학과 230명에서 9개 학과 38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1978년 3월 5일 1978학년도 입학식은 우리대학이 제2의 탄생을 하는 한성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날이기도 하였다.

이 날 이희순 학장은 입학 개식사를 통하여

“우리 한성대학은 이제 명실상부한 남·여 공학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되었다.(중략) 오늘 입학의 영광을 안고 첫출발 하는 신입생 여러분은 한성 역사의 새로운 역사적 소명의식을 가져주기”를 당부하였다.

이어 이사장 김의형 박사는 축사에서

“오늘 입학시혐의 어려운 관문을 통과하여 영광의 이 자리에 참석한 신입생 여러분을 마음 속 깊이 축하한다”고 전제하고

“이번 남·여 공학의 발전이란 새로운 탄생을 가져온 이희순 학장의 노고를 치사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앞서 2월 제 2회 학위수여식을 가졌다. 이 날 영예의 학위를 받은 여학사는 모두 82명이다. 학과별로 보면 국문학과 24명, 영문학과 21명, 경영과 2명, 무용과 6명, 생활미술학과 15명, 의상학과 4명, 가정학과 10명이다.

한편 이 해 2월 교무과장에 정연길 교수가 취임하였으며, 그 해 3월챙정학과 신설에 따라 이창선 교수를 학과장에 임명하였다.

이 해 8월 일부 보직개편이 있었는데 교무과장에 쩡하경 학생과장에 이창신 교수를 각각 임명하였다.

한성여자대학보는 고l 명 변경과 함께 제호를 한성대학보로 개칭하고 제7호부터 주간 교수에 이창신 교수로 바렘과 동시에 편집인 이근수, 주간 이창신 교수의 이름으로 학보를 발간하였다.

제8호부터 연정열 교수가 주간교수에 취임하면서 종전 학생과장 주관으로 발간한 학보를 독립해서 발행인 이희순, 편집인 · 주간 연정열의 명의로 문공부에 등록 허가를 받았다.

2. 남 · 여 공학체제 학도호국단 설치

지난해 1977년까지 여학생만으로 구성되었던 우리대학 학도호국단은 1978년 신학기를 맞아 남 · 여 공학에 따른 학도호국단 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이 해 11월 4일 1978년도 정기 검열에서는 총검술 등 교련 사열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남학생이 아직 1학년이기 때문에 학도호국단 간부는 될 수 없었다.

당시 학도호국단 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총학생제대장 문현숙 (의상 3), 부제대장 이은정 (국문 3),제1중대장 박소춘 (무용 3),제2중대장 이은자 (가정 3),총무부장 신소영(경영 3), 새마을부장 김숙 (국문 3),지도부장 이향숙 (생활미술 3), 체육부장 이정희 (무용 3),문예부장 장미 (영문 3), 훈련부장 주은주(의상 3)로 구성되었었다.

한편 제3회 낙산축전(제1,2회는 한성축전)을 그 해 6월 2일부터 4일까지 성대하게 개최한 바 있었다.

이 해 우리대학은 탁구팀 조직을 통한 새로운 스포츠 명문의 터전을 마련한 해이기도 하다.

일찍이 한국 여성 탁구의 스타 플레이어였던 이희순 학장은 탁구팀 창단에 많은 도움을 주어 창단 첫 해부터 대학탁구의 우승 가도를 달

렸다. 우리대학 탁구팀은 부장 연정열,코치 겸 주무 이석구, 선수 김혜정, 김길자,안화순,김정자로 팀을 구성하고 5월 10일부터 열린 전국 종별 탁구선수권대회에 처음 출전,전년도 우승팀인 효성여대를 결승전에서 깨고 감격의 첫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어 11월 문교부 장관기 쟁탈 남·여 탁구선수권대회 대학부에서 강호 동덕여대를 결승전에서 격파하고 우승을 차지,창단 첫해부터 탁구 명문교의 전통을 마련하였다.

이 해 10월 중앙학도호국단 주최 제9회 전국대학미전에서 생활미술학과 4학년 정란순 양이 당당히 동양화 부분 일부에서 특선에 입상, 한성대학을 대내외에 과시하였다.

1979년 2월 24일 제3회 학위수여식을 가졌다. 이 날 영광의 학위를 취득한 여학사는 다음과 같다.

국문학과 14명,영문학과 19명,경영학과 7명,무용학과 6명,의상학과 7명, 생활미술학과 11명,가정학과 12명 등 모두 76명이다.

제3장 김옥형 학장 취임

제1절 김옥형 학장 취임과 동창회 조직

1. 제3대 김옥형 학장 취임

1979년 3월 제3대 학장에 김옥형 학장이 취임하였다. 신임 김옥형 학장을 맞이함에 있어 이사장 김의형 박사는 “그간 공석 중이던 학장에 김옥형 학장 취임을 충심으로 환영한다."로 말하고 “경륜이 뛰어난 김학장을 맞이하여 우리 한성대학은 날로 그 발전이 크게 기대된다.”고 인사말을 하였다. 김옥형 학장은 인사말을 통하여 “인화와 단결을 통한 한성대학의 발전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하고 “우리가 하기에 따라 우리나라의 명문교로까지 발전할 수 있다.”고 전제,“우리 한성인은 일치단결하여 참다운 배움의 전당으로 가꾸어 나갈 사명감을 갖자”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간 학교발전에 노고가 많았던 정연길 학장직무대리의 노고를 치하한다”고 말하고 “앞으로 여러 교수와 학생들의 건투를 빈다”고 덧붙였다.

한편 3월 신학기를 맞아 일부 보직개편이 있었다. 학생과장에 김계욱 교수가 임명되고, 도서관장에 정연길 교수가 취임하였다. 그리고 국문학과장에 정연길,영문학과장에 허광일, 의상학과장에 이남희, 생활미술학과장에 하인두 교수를 각각 임명하였다.

2. 5개학과 증원 승인,교직과정 설치

이 해 9월 11일 문교부로부터 의상학과를 비롯한 5개학과에 대한 증원 승인을 받았다.

의상학과,생활미술학과, 무용학과, 행정학과 각 10명씩 입학정원이 늘어났으며,1977년 10월 20일 국사학과에서 학과명칭을 바꾼 사학과

는 20명의 증원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입학정원이 9개학과 44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문교부로부터 이 해 12월 경영학과와 무용학과 두 학과에 교직과정 설치를 인가 받았다. 이 두 학과는 1980학년도 신입생부터 적용 실시하게 되었다.

제5대 학도호국단 임원 구성을 다음과 같이 새로 편성하였다.

총학생제대장 고정숙(무용 3),부제대장 유오남(경영 3),제1중대장 송창희(의상 3),제2중대 장 김명식(무용 3),제3중대장 강길순(영문 3), 제5중대장 민혜영(생활미술 3),제6중대장 김경자(국문 3),총무부장 신현균(의상 3), 문예부장 김호경(국문 3), 새마을부장 이춘미(영문 3), 지도부장 오미자(경영 3),체육부장 김정숙(무용 3), 훈련부장 이정숙(가정 3)을 각각 임명하였다.

한편 제4회 낙산축전이 이 해 5월 16일, 17일 양일간 성대히 열렸다.

이어 10월 14일 추계 교내 체육대회를 가졌다.

3. 한성대동창회 조직, 탁구팀 강세

이 해 7월 제1회 졸업생으로 대학재학시 제1대 대대장과 안보문제 연구회장을 지낸 조인자 동문(국문학과 1977년 졸업)의 발기로 동문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동문 상호간 친목도모와 모교발전을 위한 터전마련을 목적사업으로 동문회를 조직하였는 바, 초대 동창회장에 조인자 동문이 선임되었다.

우리대학 틱구팀은 1979년에 들어와서 더욱 짜임새 있는 팀원과 맹훈으로 이 해 7월 31일부터 8월 6일까지 문화체육관에서 열렸던 전국 종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강원대학교를 결승전에서 만나 시종 일방적인 공략을 펴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어 같은 해 11월 17일부터 열린

1979년도 문교부 장관기 쟁탈 탁구선수권대회에서 강호 동덕여대 팀을 만나 일진일퇴의 시소게임을 벌였지만 우리대학 팀의 패기에 찬경기운영으로 동덕여대 팀을 격파하고 이 해 들어 두 번째 대학탁구의 패권을 누리게 되었다.

제2절 학과 증과 및 직제개편

1. 직제개편과 보직개편

1980년 8월 직제개편으로 교무과장 및 학생과장을 교무처장 및 학생처장으로 그 명칭을 바꾸고 교무처장 이근수, 학생처장 신은숙 교수

를 각각 임명하였다. 그러나 3개월 뒤 교무처장 이근수 교수가 타교로 전직함으로써 그 후임에 최명규 교수를 교무처장에 임명하였다.

이에 앞서 3월 무역학과장 최명규, 무용학과장 김숙자 교수를 각각 임명하였다. 이어 국문학과장 이석주, 영문학과장 고정자, 사학과장 지배선 교수가 임명되었다. 2학기에 접어들어 무역학과장이 김신 교수로 교체되었다.

2. 제4회 학위수여식 거행

이에 앞서 1980년 2월 제4회 학위수여식을 갖고 101명의 여학사를

배출하였다.국문학과 28명, 영문학과 21명, 경영학과 8명, 무용학과 6명, 생활미술학과 18명, 가정학과 14명, 의상학과 6명 모두 101명이다.

3. 경제학과 · 도서관학과 증과 및 전학과 교직과정설치

이 해 10월 15일 문교부로부터 경제학과와 도서관학과 두 학과의 증과 승인과 함께 두 학과의 졸업정원을 각 40명으로 인가 받았다.

한편 140학점 실험대학 채택에 따른 우리대학 학과정원을 11개 학과에 졸업정원 520명, 입학정원 676명으로 승인받았다.

우리대학은 지난 1979 학년도 경영·무역학과 두 학과에 교직과정 설치인가를 받은 데 이어 이 해 12월 전 학과에 교직과정 설치 인가를 받게 되었다.

제3절 김옥형 학장 사임과 대학미전 수상

1. 보직개편과 제5회 학위수여식

1981년 3월 신학기를 빚-아 보직깨편이 있었다. 교무처장에 연정열, 학생처장에 선은숙, 사무처장에 김범주 교수를 각각 임명하고 도서관장애 김복길 교수가 유임되었다. 그리고 겸영학과장에 최명규, 경제학 과장에 한창호, 도서관학과장에 조점환 교수를 각각 임명하였다.

한편 이 해 3월 학보사 편집인 · 주간 연정열 교수가 교무처장으로 전보됨으로써 공석이 된 학보사 편집인 · 주간 후속인사가 있었다. 학생처장 신은숙 교수가 학보사 편집인을 학생처장이 겸하도록 제의한 것을 김옥형 학장이 받아들여 동학보는 편집인 신은숙, 주간 윤경로 교수의 명의로 문공부에 등록인가를 받았다.

또한 이에 앞서 제5회 학위수여식을 이 해 2월 25일 가졌다. 이 날 영혜의 학위를 받은 학사는 국문학과 6명, 영문학과 15명, 경영학과 18명, 무용학과 12명, 의상학과 15명, 생활미술학과 14명, 가정학과 7명 등 모두 87명이다.

1981년도 신학기를 맞은 학도호국단은 전년도 2학기말에 남학생을 주축으로 임원을 구성하고 전날에 비하여 보다 활발한 사업을 펼쳐나갔다.

제6대 학도호국단 조적 편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총학생장 호진규 (영문 4), 총부학생장 문교승 (무역 4), 총무부장이승각 (경영 4), 문예부장 빅·해영 (국문 4), 새마을부장 이명아(생활미술 4), 지도부장 박찬암 (경영 4), 체육부장 조영애 (무용 4), 훈련부장김해룡 (무역 4), 여학생부장 전광의 (의상 4) 등으로 임원을 구성하였다.

한편 국문학과 학생장 김성일, 영문과 학생장 황현, 무용과 학생장정창영, 가정과 학생장 임채수, 생활미술과 학생장 구천회, 의상과 학생장 문찬관, 경영과 학생장 한득희, 무역과 학생장 신영수가 각각 선임되었다.

2. 종합관 신축교사 준공

이 해 12월 29일 1년간의 공사 끝에 종합관 신축교사 준공식을 가졌다. 이 신축교사는 지하 2층, 지상 5층 연건평 1,770 평 철근 콘크리트 교사로서, 중강당을 비롯해 교수연구실 및 강의실로서 사용키로 하였다.

3. 대학미전입선 및 동남아 해외연수

문교부 주최 제11회 전국대학며전에서 우리대학 생활미술학과는 동양화, 서양화, 디자인, 공예부분 등 4개 부분에서 많은 입상자를 내어, 대학 미술 관계 인사들을 놀라케 하였다.

하인두(서양화) 정하경(동양화) 두 교수의 지포 아래 우리대학 생활미술학과는 개교이래 가장 큰 성과를 거둔 미전이기도 하다.

각 부분별 입상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 동양화 부분 특선

조연영,김경해,신순희

• 서양화 부분 특선

정화주, 김인숙, 전경숙

• 디자인 부분

이명아, 구천회

• 공예부분 특선

남윤선

이 해 2월 문교부 주관으로 실시한 해외 연순가 우리대학 개교이래 처음으로 행하여졌다.

국어국문학과 이석주 교수의 인솔로 필리핀, 자유중국, 태국, 일본 등 동남아 4개국을 순방하며 해외 견문을 넓혔다. 이 해외연수에 참가

한 견학 단원은 다음과 같다.

김영호(국문 3), 김선옥(영문 3), 최예지(무용 2), 이근화(경영 2), 김진환(경영 2), 배기성(영문 2), 장동우(사 2), 문경숙(생활미술 2), 정영애(무용 2) 등 9명으로 구성되었다.

이에 앞서 영문학과 3년 호진규군도 한국문예협회 주최로 가진 대학생 해외연수단의 일원으로 중동 지역을 견학하고 폴아왔다.

4. 김옥형 학장 사임

김옥형 학장이 이 해 12월 사정에 의해 사엄함으로서 학장 직무대리로서 연정열 교수가 임명되어 1982학년도 입시 업무를 다루고 이듬해인 1982년 2월말 제4대 학장으로 부임해 온 강병규 학장에게 업무를 인계하였다.

5. 안보 우수 서클 학교로 선정

1982년 3월 바우회(회장 김양태 일명 안보문제연구회)가 한국반공연맹 산하 전국 130개 대학 중 우수교의 하나로 선정되고 동 서클 지도교수인 연정열 교수가 전국대학 반공서클 총책임 지도교수로 선임되어 1988년 12월 31일까지 동직에 연임되었다.

한편 바우회장 김양태는 우리대학 무역학과를 졸업한 후 아시아 반공 청년회 부회장에 선임된 바 있다.

제3편 성장기

제3편 성장기

제1장 강병규 학장의 취임

제1절 강병규 학장과 대학의 성장

1982년 2월 19일 제4대 학장으로 강병규 박사가 취임하면서 우리대학은 성장이기를 맞게 된다.

다양한 정치적 경력을 가진 교수 출신의 강병규 학장은 학장 취임식에서 장문의 취임사를 통해 향후 정보화 시대에 부응한 미래지향적 대학과 대학문화 창달의 산실로서의 면모를 갖춘 획기적인 한성대학의 장 · 단기적인 발전계획과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의욕을 보였다.

강병규 학장은 그의 취임사에서 ‘새포운 대학상(大學像)의 정립’을 아래와 같이 정의하며 향후 도약기를 맞이한 우리대학이 지향해야 할 바를 아래와 같이 천명하였다.

무릇 대학은 진리의 전당이요 교육과 학문연구의 공동광장인 바 민족의 발전과 함께 대학 또한 무한히 발전되어야만 하는 본질적 속성을 가지고 있으나 본인은 오늘을 기하여 한성대학의 새로운 출발, 즉 발전에의 도약을 다짐하고자 합니다.(중략)

현대의 대학교육은 고대 대학과 같이 사서삼경식(四書三經式) 대학이어서 는 아니 되며 추상적 역사철학적 대학이 1념에만 구애 될 수 없습니다.

또한 현대의 대학기능은 끈대 패학처럼 무한환 학문의 자유만 고창 할 수 없으며 민주주의 개념과 혼동되는 지도자만을 양성하는 기관에 그쳐서는 안되겠습니다.

즉 현대의 사회적 변천과 역사적 조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면 현대 산업사회에 적합한 대학의 기능이 발휘되어야 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원적

사회 기능과 직업주의직,실용주의 적 대학으로 개혁되어야 할 줄 압니다.

그리하여 대학의 본질인 진리탐구와 창조 및 학생의 교육과 함께 대학이 지니는 모든 역량을 집약하여 국가발전에 공헌하는 사회 봉사적 기능을 다할 때 비로소 대학이 고려 충숙왕 교령이 말하는 ‘학교풍화지원’이 되고 조선유학이 말하는 사회 의 ‘수선지지’가 될 것입 니 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성대학은 사회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여 왔습니다만 앞으로 더욱 더 사회봉사 기능을 확충하는 것이 새로운 대학상을 정립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상의 취임사 내용에서 보듯 강병규 학장은 급변하는 현대사회에 부응한 대학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현대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다원적 사회 기능과 직업주의적 이며 실용주의 적인 대힉_’으로 키워나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으며 이 같은 대학의 사회기능적 능력을 고양하고 확충시키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실천목표로 삼을 것을 밝혔다.

첫째,새로운 대학전통의 수립과 창조

둘째,학문연구체제의 정비

셋째,면학의 기틀과 학풍의 진작이 바로 그것이었다.

한편 당시 우리대학의 현실적인 열악한 조건과 환경을 빠른 시간내에 극복하면서 일정한 수준의 대학으로 진입하기 위한 단기적인 대학 발전 방안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아래와 같이 제시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말씀드려서 대학이 성장하는데 백년의 시간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오늘날 구미선진 각국 대학이나 기타 세계의 우수한 대 학은 그러 한 장구한 시간에 부단한 노력과 전통의 축적을 통하여 세계적 대학상을 정립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경우 국가 발전의 속도와 병행해서 대학 또한 그 발전사를 단축시키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와 사회적 기대 및 민족적 여망이 상승작용을 하여 국가적 필요에 부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뜻에서 한생대학은 그 동안의 시간을 기반 조성을 위한 준비 기간으로 생각하고 이제부터 모든 대학 가족이 합심 단결하여 비약적 발전을 위해서 노력하며 그 숭고한 목표는 달성되레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말하자면 한성대학의 역사가 비록 일천하지만 지난 10년간 쌓아 올린 기초를 토대로 삼아 한성인 모두의 의지를 결집하여 자신의 재임기간에 한성대학 발전의 성장기를 마련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던 것이다.

이 날 장시간에 걸쳐 계속된 강병규 학장의 취임식은 그의 의욕과 패기에 찬 취임사로 식장에 참석한 교직원과 하객들을 고무시줬는데 그 가운데서도 향후 한성대학의 ‘비약적 발전’을 위한 다음과 같은 실천방안을 제시하는 대목에서 더욱 그러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의 유수한 대학으로 발전시켜서 새로운 대학상을 확립한다.

학생 정원의 증원 및 전문 학과의 증과, 대학원 설치, 전문연구소 운영

둘째, 학문연구의 생산체제를 재정비 · 확립한다

학문자유의 보장, 교수 우선의 학사행정 전개, 연구기금 조성 및 연구비 지급 확대, 논문집 편찬 활성화, 교수의 각종 학 · 예술단체 가입권장

셋째, 대학문화의 창달에 힘쓴다.

‘문화창조계획’을 수립하여 이를 매 학기마다 시행, 축적 교수 연구비 및 학생 장학금 확충, 올림픽 대비 교내 체육부 강화, 학생 후생시설 확충 및 해외연수 · 유학 기회 확대, 교사 정비와 교구, 교재 확보넷째, 특색 있는 대학으로 육성 · 발전시킨다.

전일제 수업을 통한 평생교육과 전인교육의 시행, 산학협통체제의 강화, 지역개발 공개강좌 및 문화센터 개설 등 성인 대학적 특성을 활성화함으로써 대학의 사회봉사 기능을 강화함.

다섯째,국제적 교류사업을 적극 추진한다.

외국의 대학과 자매결연 추진,교수·학생의 해외연수기회 확대,국제적 대학 예술대회 참가 및 개최를 적극 추진

끝으로 그는 이상에서 제시한 대학발전 방안을 실천화하기 위해 재단, 대학,동창회 3자로 ‘대학발전협의회’를 구성하여 추진할 것을 제안하는 등 강학장은 취임식에서 매우 의욕적인 태도와 자신에 찬 모습을 한성인들에게 심어주었다.

이어 그는 자신이 제시한 일련의 대학발전 계획을 추진하기 위해 전면적인 보직개편을 이 해 2월 22일자로 아래와 같이 단행하였다.

교무처장: 정하경 교수(미술학과)

학생처장: 김계욱 교수(교양학과)

사무처장: 이승록

도서관장 : 연정열 교수 (경영학과)

학과장 개편

국어국문학과: 정연길 교수

영어영문학과 : 박양구 교수

사학과: 지배선 교수

경영학과: 연정열 교수

무역학과: 김평광 교수

경제학과: 최명규 교수

행정학괴 이창신 교수

도서관학과 이용남 교수

의상학과 : 이남희 교수

미술학과: 하인두 교수

무용과: 김경자 교수

제2절 대학기구의 정비와 학사행정의 개혁

1. 한성대학 종합화 계획의 발표

강병규 학장의 취임사에서 제시되었던 대학발전협의회는 바로 구성되어 1982년 4월 2일 ‘한성대학 종합화 계획’을 발표하게 되는데,그 주요내용은 아래와 같은 것이었다.

첫 째, 교육환경 개선을 위해 재단과의 지속적인 협조체제 유지

둘 째, 1983년 R.O.T.C 설치를 위해 해당 부처와 적극 협의

셋 째, 대학의 대외홍보를 위한 홍보지 발간

넷 째,교과과정 개선을 위한 교과과정 추진위원회 설치

다섯째, 국가인력 수급상황에 따른 적정학과 증과·증원에 총력

여섯째, 향후 3, 4년 내 획기적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구체적 사업계획 마련

이상의 계획안은 그 동안 한성인 모두가 바라고 있던 주요 숙원 사업들을 망라한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대학의 규모와 그간의 대학 운영의 정황 등을 감안할 때 대학 체제의 정비 및 계획적이고도 예측 가능한 대학 운영에 관한 청사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계획안은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2. 위원회 신설

이 같은 계획안은 대학 내 기구 확장과 신설 및 개편 등의 작업으로 시작되었다.

우선 주요 사업별로 각종 위원회를 구성하여 연구·심의하도록 하였는데, 1982년 4월 7일 각과 학과장을 위원으로 하는 교과과정 추진 위원회를 비롯하여 아래〈표 1〉과 같은 각종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표 1> 신설 위원회 명 칭과 위원명

위원회명 발족일 위원 구성목적

연구소설립 추진위원회 1982. 5. 6 이창신 교수(행정) 김길평 교수(경영) 정연길 교수(국문) 김중렬 교수(국문) 하인두 교수(미술) 김숙자 교수(무용) 학문연구지원체제 확립 및 대학문화 창달 기여

기획위원회 " 정연선 교수(행정) 조효진 교수(영문) 윤석효 교수(사학) 최해주 교수(의상) 이정숙 교수(국문) 학사행정 개혁 및 학교발전계획심의

대학요람 편찬위원회 " 이석주 교수(국문) 강국진 교수(미술) 정연선 교수(행정) 윤석효 교수(사회) 손영일 기획실장 대학요람 및 홍보책자 편찬

영문요람 편찬위원회 " 박양구, 고정자, 김용석,조효진 교수 (이상 영문학과) 해외 홍보용 요람편찬

대학문화 육성 심의 위원회 1982. 9.17 위원장:강병규 학장 학술분과, 김중렬교수(위원장)

이정숙 교수(국문) 이창신 교수(행정) 박양구, 고정자, 김용석, 조효진 교수 (영문) 지배선,강병식 교수(사학) 예술분과: 강국진 교수(위원장)

김숙자, 김경자 교수(이상 무용) 이남희, 이명희, 최해주 교수(이상 의상) 강은석 교수 (교양)

출판분과: 김길평 교수(위원장)

이용남 교수(도서) 이동섭 교수(사학) 이성주 교수(국문) 최송길 교수(경영) 김평광, 김원중, 김용정 교수(무역) 사회·교육분과: 김범주교수(위원장) 윤석효, 윤경로 교수(이상 사학)

조점환 교수(교양) 한창호 교수(경제) 신은숙, 김양현 교수(이상 교직) 대학문화육성 방향 수립 및 심의·조정

<표 1> 에서 보듯 당시 전임교수 전원이 참여한 연구소설립추진위원회를 비롯한 기획위원회, 대학요람편찬위원회, 영문요람편찬위원회,

대학문화육성 심의위원회 등 5개 위원회의 구성은 과거에 없었던 획기적인 조치였다.

새로 구성된 위원회는 기존의 각 위원회와 같은 심의 · 자문기구가 아닌 대학체제의 창조적 개혁을 목표로 하는 조사 · 연구기구로서의 한시적(限詩的) 성격이 강한 것으로 그 활동이 의욕적으로 진행되었다.

3. 학사행정체제의 정비

한편, 학사행정의 개혁과 대학행정기구의 대폭적인 정비 그리고 대학운영과 관리 전반을 관장할 기구로서 지금까지 없었던 기획실을 대학의 주요 부서의 하나로 신설하였다.

1982년 4월 기획과와 예산관리과로 구성된 기획실(초대실장: 손영일)은 우선 대학요람 및 영문요람 등을 처음으로 발간했으며 이를 각

대학과 관계 요로에 배포함으로써 대학홍보의 효과를 높이기도 했다. 또한 대학조직이 갖추어야 할 제 규정을 제정 · 배부함으로써 각 행정부서의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아울러, 정보화 시대에 부응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1983년 10월 25일 컴퓨터실을 설치하였으며 이어 이를 좀더 발전시켜 1984년 4월 정보전산연구원(초대소장 : 이우범 교수)을 개원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모체가 되어 현재 전자계산소 (1989년 설립)로 확대 발전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기구 개편과 확대 작업이 이후 한성대학의 분위기를 일신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음은 물론이다. 우선 대학챙정을 정비 · 확대함으로써 보다 적극적이고도 창의적인 대학행정이 이루어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교무처는 교과과정 추진위원회와 함께 합리적인 교과과정의 개발을 위한 실무작업을 지속적으로 추전하는 -한편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의 재발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1982년 6월 7일 무용과·경영학과 학생 49명에 한해 처음으로 교생실습을 실시한 이래 1983학년도 신학기부터 전 학과에 걸쳐 교직 과정을 확대 개설하고 실습대상 숭·고 교장을 초빙하여 간담회 등을 개최하여 대학홍보는 물론 학생들의 졸업 후 사회 진출의 활로를 마련해 주는 등 일에도 적지 않은 노력과 관심을 기울였다.

이 같은 졸업 후 학생들의 진로 모색과 취업 알선을 위한 노력은 학생처에서도 시도되었다. 우선 학생처는 이 시기 장학제도의 보다 합리적인 개선책을 마련하는 한편 외부 장학금의 적극적인 유치노력을 통해 수혜의 폭을 확대하는 등 학생 복지를 위해 제반 노력과 조치를 취했다.

이밖에도 전일제 수업에 따라 증원된 주간학생의 부직 알선 및 졸업 후의 취업 강구를 위해 1984년 2월 22일 ‘취업대책위원회 (위원장: 한창호 교수)’를 구성·운영함으로써 학생들의 부업 및 취업 알선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이 ‘취업대책위원회’는 현재 ‘취업상담실’로 상설 기구화하여 보다 조

직적이고 체계직 인 학생복지 행정을 전개하고 있다.

한편,당시 대학의 규모 상 영세성을 면치 못했던 중앙도서관은 장서 확보 및 열람실의 확장에 지속적인 노력을 전개함으로써 대학 내 연구기능의 산실로 자리잡을 수 있는 초석이 마련된 것도 이 시기였다.

특히,1982년 6월 10일~7월 10일까지 ‘도서수집운동’을 전개하여 대학 내 모든 구성원들에게 중앙도서관의 발전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는 효과와 함께 5,081권에 달하는 도서를 수집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 ‘도서수집운동’ 기간에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께서도 3차에 걸쳐 소장도서를 기증하였는데 도서관 측은 이 특별 기증도서를 한곳에 보관하였다가 우촌 선생께서 타계하신 후 고인의 뜻을 영원히 기리는 뜻에서 1983년 4월 18일 도서관 내에〈우촌문고〉(友村文庫)를 마련,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학부제 운영과 보직개편

1983년 2월 18일 단행된 학사개혁 조치로써 학부제 운영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성격이 유사한 학과들을 분류해 4개의 학부를 두고 모든 학사행정을 학부 중심 운영체제로 전환하는 것을 기본 내용으로 하는 학부제 운영 방안은 당시 대학의 규모로 볼 때 매우 과감하고도 획기적인 조치였다.

이때 단챙된 학부제는 인문학부, 사회학부, 예술학부, 교양학부 등 4개학부로 나누어졌으며 각 학부에 소속된 학과와 학부장의 명단은 아래와 같다.

<표 2> 학부명과 소속학과 및 학부장 명단

학부 소속 학과 초대 학부장

인문학부 국어국문학과,영어영문학과,사학과 이동섭 교수(사학)

사회학부 경영학과,무역힉과, 경제학과,행정학과, 도서관학과 연정열 교수(경영)

예술학부 미술학과, 무용과, 의상학과 하인두 교수(미술)

교양학부 교양과정 박양구 교수(영문)

그러나 이상과 같은 학부제 도입은 처음부터 시기상조라는 일부 비판적 시각에서 이미 예견되었듯 운영상의 미숙과 기구 확대에 따른 부수적인 조치들이 진행되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활성화되지 못한 채유명무실화되고 말았다.

지나친 의욕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하겠으나 한편 돌이켜보면 이 같은 학부제 운영은 향후 종합대학체제로의 전환에 대바한 의지를 실천에 옮겨 보았다는 점에서 다소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상과 같은 학부제 운영방침에 따른 효율적인 학사행정을 위하여 아래와 같이 대폭적인 보직개편이 단행되었다.

교무처장: 이용남 교수 (도서관학과)

학생처장: 최명규 교수(경영학과)

도서관장: 정연길 교수 (국어국문학과)

학과장

국어국문학과 : 이석주 교수

영어영문학과: 조효진 교수

사학과: 지배선교수

경영학과: 최송길 교수

무역학과: 김용정 교수

경제학과: 한창호 교수

행정학과: 김빔주 교수

도서관학과: 이우범 교수

의상학과: 이명희 교수

미술학과: 강국진 교수

무용과: 김경자 교수

교양과: 김용석 교수

교직과: 김양현 교수

학부제 운영과 더불어 이 시기 단챙된 학사 운영제포의 개편 작업 중에서 득별히 주목되는 것은 학과 잔용 강의실제를 도입했다는 점이다. 이는 국내 대학 중에서는 처음 시도된 제도로서 강의실의 효과적인 활용과 학과 운영의 효율성을 좀더 극대화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사회산엠발전연구소의 제안으로 처음 행정학과에서 시도한 이 새로운 학과전용 강의실제는 원래 목적이 학부제 운영의 내실을 기하기 위한 보조기놓으로 시작했으나 점차 전학과로 확대 · 발전되어 갔다.

효율적인 시청각 교육과 풍부한 연구자료를 갖추고 세미나식 강의 몇 개인별, 그룹별 연구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 이 독특한 교육시스템은 당시 학내외 적으로 많은 관심을 끌기도 하였다.

이련한 교육환경의 개선은 자연히 각 학과별 연구활동을 활성화 시

켰으며 그에 따른 연구성과물로 학과마다 논문집이 발간되기 시작하였다.

즉 1982년 국어 국문학과의 「漢城語文學」, 사학과의 「漢城史學」, 경영학과의 「經營論藥」, 미술학과의 「漢城美術」등 학과 논문집 창간호가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교육환경 개선이 가져다 준 구체적인 결실이자 산불이었다 이로써 한성대학은 진리와 학푼올 탐구하고 연구하는 대학 본래의 모습과 위상을 정립해 나가는 도약의 단계로 진입하였다.

제3절 학문연구체제 확립과 대학이미지 구축

1. 부설연구소의 설립과 활동

1982년 6월 1일 한성대학의 제반 여건을 종합 분석한 결과를 토대로 우리대학의 실정에 맞는 아래와 같은 4개의 대학 부설연구소를 개설하였다.

대학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기능의 하나가 전문 분야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기능에 었다는 점에 유념할 때 다소 때늦은 감도 없지않았으나 아무튼 이 때 한성대학 산하에 전문적인 연구기관이 탄생되었다는 것은 ‘연구하는 대학’, ‘공부하는 대학’으로서의 대학 이미지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기억될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래의 <표 3> 에서 보듯 이때 설립된 연구소는 민족사상연구소, 사회산업발전연구소 한국전통문화예술연구소 학생생활지도연구소 등 4개 연구소가 문을 열었으며 연구소의 특징과 성격에 따라 이 분야 전공교수들을 전엄연구원으로 위촉하였다.

<표 3> 4개 부설연구소명과 연구원 및 설립취지

연구소명 연구원 설립취지

민족사상연구소 고문 : 안호상 박사(본교 이사장) 상임연구원 : 김중럴 교수(국문) 지배선,윤석효 교수(이상 사학) 보조연구원 : 정후수 조교(국문) 한국고유의 사상연구 및 관련 외국사상의 연구를 통해 한국전통 사상을 체계화

사회산업발전 연구소 상임연구원 : 정영선 교수(행정) 김길평 교수(경영)

김평광, 김원중 교수 (이상 무역) 보조연구원 : 이승각 조교(경영) 사회산업발전 및 과학분야 의 전반직 이론과 실체를 연구하여 국제문화교류에 기여

한국전통예술 연구소 상임연구원: 정하경,강국진 교수(미술) 김숙자, 김경자 교수 (이상 무용) 보조연구원:정혜란 조교(미술) 한국전통예술의 발굴,연구를 봉한 고유문화의 긍지 부여

학생 생활지도 연구소 상임연구원: 김계욱, 강은석 교수(교양) 이석주 교수(국문) 박양구 교수(영문)

김양현 교수(교직) 최혜주 교수(의상) 보조연구원 : 김문정 조교(경영) 학생생활과 관련된 제반문제에 대한 지도, 상담 및 정보 안내

이상의 4개 연구소는 그 동안 꾸준히 활동하면서 각종 학술세미나, 학술지 발간 등 활발한 연구활동 등을 통하여 학내의 중추적 연구기능으로 성장,오늘에 이르고 있다.

민족사상연구소 (초대소장 : 정연길 교수)는 1982년 10월 27일 창립기념강연회를 개최한 이래 매년 정기적인 강연회,학술세미나 개최 및 학술지(民族文化) 발간 등 인문과학 분야의 연구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1985년 11월 1일 민족사상연구소는 연구활동의 효율화를 위하여 한국전통예술연구소와 통합, 민족문화연구소로 새롭게 발족하였으며 현재는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농기구와 생활도구를 상설 전시하고 있는 농경생활사전시관을 연구소 산하에 두고 있다.

사회산업발전연구소 (초대소장 : 이창신 교수)는 1982년 6월 16일

창립기념사업으로 미국 스텐포드대학의 Richard. B. Foster 교수를 초빙하여 한국일보 대강의실에서 각계 인사들과 학생 교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강대국의 동북아시아 전략 전망’이라는 주제로 대규모의 성대한 강연회를 개최한 바 있다. 그후 제2대 연구소장으로 취임한 정연선 교수(행정과)에 의해 보다 연구소로서의 체제가 정비되었다.

1983년 3월 31일 사회산업연구소로 개칭하는 한편 각 전문분야별로 연구책임 교수제를 도입, 명실상부한 전문적인 연구소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던 것이다. 이때 개편, 확대된 사회산업연구소의 연구분야와 연구책임자를 정리해 본 것이 아래의 <표 4> 이다.

<표 4> 사회산업연구소 분야별 연구실 명칭과 연구자 명단

연구분야 연구책임자 연구분야 연구책임자

경영문제연구실 경제문제연구실 무역문제연구실 정보문제연구실 법률문제연구실

최명규교수(경영) 한창호교수(경제) 강석중교수(무역) 이우범 교수(도서) 김범수교수(행정)

교육문제연구실 공산권문제연구실 현대사상연구실 국제문화연구실

김양현교수(교직) 홍봉준교수(무역) 조점환교수(교양) 허광일교수(영문)

위와 같은 9개의 전문 연구실의 연구활동을 중심으로 정기적인 학술세미나 개최 및 학술지(사회과학는집) 발간 등 지속적인 활동을 해오고 있다.

한국전풍혜술연구소(초대소장: 하인두 교수)는 1982년 11월 4일 창립기념강연회 개최 이후 국내 대학에서는 유일한 성격의 연구기관으로 독보적인 활동을 전개하던 중 연구활동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하여 민족사상연구소와 통합하여 민족문화연구소로 그 맥을 잇고 있다.

학생생활지도연구소 역시 단순한 학생지도 및 상담활동에 국한하지 않고 정기적인 학생의식 실태조사, 학생생활관계 학술지 발간, 세미나 개최 등을 통하여 학생들에게 대학생활 빛 졸업 후 사회생활에 대한 각종 정보를 제공해온 이 연구소는 현재 그 명칭을 학생생활연구소로 개칭하여 보다 활발한 연구활동을 추진해 나가고 있다.

2. 국제교류와 대학 이미지 구축

이밖에도 이 시기 대학발전을 위해 추진된 또 하나의 괄목할만한 일로서 우리는 국외대학과의 국제교류를 시도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83년 1월 12일 우리대학은 국제문화교류의 일환으로 자유중국(自由中國) 명전대학(銘傳大學)과 자매 결연식을 가졌다. 이 날 자유중국 대사 및 교육부장(문교부장관)이 배석힌- 가운데 갖게 된 이 조인식은 우리대학이 외국대학과 맺는 최초의 자매결연사업이었으며 이를 통해 한성대학의 위상과 지평을 국제무대로까지 펼쳐나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일이었다.

1983년 5월 13일 명전대학(銘傳大學)의 이응조(李應兆) 이사장과 포덕명(包德明) 학장 등 일행 4명이 강병규 학장의 초청으로 우리대학을 방문함으로써 향후 한성대학과 자유중국,명전대학 사이에 구체적인 교류 협력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었으며 그 가운데 교수·학생 상호교환, 한,중문화교류 및 공동연구 등을 추진할 것에 합의하였다.

한편 이처럼 국제교류의 추진과 학내 체제정비가 급진전됨에 따라 자연히 한성대학을 대내외적으로 알리고 홍보하는데 긴요한 대학 상징물 제정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따라서 기획실 주관 하에 ‘상징물 제정 사업’이 계획되었고 이 작업을 위해 강국진 교수(미술과) 등이 중심이 되어 ‘상징물제정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교직원,학생 동창 회 등 폭넓은 의견 수렴과정을 통해 1년여의 준비기간을 거쳐 1983년 9월 26일 개교 10주년을 기념하여 대학 상징물로서 ‘거북이’를 선정, 완성된 거북이 상징 도안물을 발표했으며 동시에 ‘삼학송’을 한성대학의 교목(校木)으로 선정하였다.

학생설문조사 및 전문위원의 연구를 토대로 제정된 상징물 ‘거북이’는 꾸준한 노력과 쉼 없는 전진을 상징하며 교목으로 선정된 ‘삼학송’은 우리대학 정문 앞에 마치 우리대학의 수호목(守護木) 모양으로 우뚝 서있어 한성인 모두로부터 늘 사랑을 받아왔다.

또한 소나무의 변치 않는 푸르름은 대학의 청년상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우리대학과 같은 ‘신생대학’의 미래를 기약한다는 의미도 내포

되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독립된 세 개의 소나무가 하나로 어루어져 하나의 형상을 하고 있는 그 모습이 마 대학을 형성하고 있는 학생, 교수, 재단의 삼위일체(三位一體)를 상징하는 의미까지 있어 그 의미를 한층 더해주고 있다.

이 시기 진챙된 또 하나의 사웹으로 우리는 대학발전을 위한 재정확보에도 다각적인 방안이 강구되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983년 1월 20일 기꽁식을 가진 ‘한성농장종합개발꽁사’는 재단과 학교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준 사업이 이 때 추진되었다.

충남 당진꾼 송산면 동곡리에 소재하고 있는 한성농장은 설립자 김의형 박사서 우리대학발전을 위해 회사하신 것으로써 본래 염전이었으나 1979년 10월 26일 정부의 농경지 확장사업의 일환으로 삽교천이 준공되자 5개년 계획으로 총면적14만5천 8백 52평의 기계영농에 의한 농작물재배 및 축산영농을 병행할 수 있는 복합영농단지를 조성함으로써 보다 유용한 대학의 수입사업체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

이밖에도 1983년 10월 4일에는 개교 1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그간 학생들의 숙원이었던 학생복지관이 착공되어 1년여의 공사 끝에 1984년 9월 5일 완공되었다. 지상 4층 건물에 연건평 1천 3백 50평에 달하는 학생복지관의 설립으로 그동안 부족했던 학생복지관을 확보하게 되었다. 새로 건립된 학생복지관에는 학생플을 위한 각종 복지시설과 학생회 회의실 서클실 학보사 서점 그리고 학생처 등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상에서 보듯 1982~1983년 사이 우리대학은 대학으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환경과 여건을 일정하게 조성한, 다시 말해 대학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도약의 시기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내재하고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여기에는 대학이라는 하나의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구성원 사이의 나마모양 뒤얽힌 요인들을 적시할 수 있겠으나 이 시기 대학사회에일기 시작한 이른바 스튜던트 파워 (student power) 의 세찬 물결과 설상가상으로 한성학원의 설립자이자 우리대학의 초대 학장을 역임하신 우촌 김의형 박사의 서거로 인해 한똥안 사련의 늪에 빠지는 어려움을 당하기도 하였다.

제4절 시련과 새로운 도약

1.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의 타계

1983년 3월 1일 설립자로서 한성학원의 큰 기둥이셨던 우촌 김의형 박사께서 향년 79세를 일기로 타계하셨다.

시대의 격랑을 해치며 일평생을 교육이라는 지난하고도 고독한 외길을 걸어오신 한성인의 영원한 스승 우촌 김의형 박사,그의 서거 소식은 전 한성인에게 큰 충격과 슬픔을 가져다주었다.

장례는 1983년 3월 4일 한성여고 교정에서 엄숙히 거행되었다.

2. 강병규 학장 퇴임

1984년 신학기 개강과 더불어 3월 12일 아래와 같이 일부 보직개편을 통한 학사행정의 정비를 기하였다.

사무처장 : 최명규 교수 (경영학과)

기획실장 : 강병식 교수 (사학과)

최명규 학생처장이 사무처장으로 임명됨에 따라 3월 19일 공석중인 학생처장에 김용석 교수(영문학과)가 임명되었다.

그러나,설립자 타계 후 좌표를 잃고 학원 전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을 즈음 ‘대학자율화’라는 외풍까지 기-세하여 시련은 더욱 가중되었다. 1984년 신학기부터 전국 대학에서 거세게 일고 있던 대학 자율화의 바람은 각 대학마다 내연하고 있었던 문제점들을 일시에 분출하는 계기가 되었고 우리대학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984년 3월 28일~29일 양일간에 걸친 ‘대학발전을 위한 공청회’에서 비롯된 자율화의 외풍은 학내의 복잡한 갈등 요소들과 함께 작용하여 급기야 교내 시위로까지 파급되기에 이르렀다.

5월 25일부터 11일간에 걸친 학내소요는 대학구성원 모두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긴 가슴 아픈 일이 아날 수 없다. 그러나 한성여중 · 고등학교와 대학의 상호이전을 골자로 하는 획기적인 ‘한성대학 발전계획안’을 제시함으로써 일단 수습국면에 들어갔다.

1984년 7월 4일 학내소요의 여파와 그 과정에서 빚어진 학원내의 갈등으로 인해 강병규 학장은 결국 4년간의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도중에 사임하게 되었다.

3. 새로운 도약

학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재단의 주도하에 교사이전 및 대학발전계획은 큰 차질 없이 추진되어 갔다.

한성여자 중 · 고등학교, 한성대학 및 재단 관계자를 망라하여 구성된 교사이전추진위원회는 ‘교사이전 5개년 계획’을 구체화하여 발표하

였는데, 그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차년도 (1985) : (1) 대학강의실 (한성여고 위치) 및 화장실 증축공사

(2) 대학강의실 (한성여고 위치) 목재 Flooring 철거 후 Terrazzo 개축

(3) 종합기본계획 확정

2차년도 (1986) : (1) 한성여고 건물 대학 강의동으로 완전 개조

(2) 대학강의실 및 종합관을 여중 · 고 건물로 개조

3차년도 (1987)~5차년도 (1989)

(1) 한성여중건물 철거 및 대학건물 신축공사

(2) 종합운동장 확보 및 학원부지의 효율적 재활용

이와 같은 계획은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재단의 의욕적인 사업

추진으로 예정보다 2년을 단축한 1987년 8월 대학본관(우촌관)이 완공 되면서 교사이전의 대역사를 완수하기에 이른다.

이상에서 보듯 제4대 강병규 학장 재임기간(1982~ 1984)은 2년여의 짧은 기간에 불과하지만,그 기간에 우리대학을 ‘대학다운 대학’으로 성장 발전시키는데 있어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대학행정의 제도 정비와 기구 확대는 물론 향후 종합대학으로서의 비 전을 바라보며 과감한 학부제의 도입과 연구하는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각종 연구소의 설립 등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한성대학 30년 역사 가운데 성장기로서의 자리 매김을 하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제2장 홍순태 학장 취임 제1절 홍순태 학장 취임

제1절 홍순태 학장 취임

1. 제5대 홍순태 학장 취임

1984년 9월 5일 신축된 학생복지회관 강딩아현 학생회관 소강당)에서 제5대 홍순태 학장의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그는 취임사에서 “대학은 학문과 진리의 탐구에 그 목적을 두며 이를 통한 창조적 연구로 인간 생활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는 곳”으로 규정하고 “계속직이고도 신념 있는 교육의 계획과 연구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 그는 “앞으로의 학교운영에 있어서 본 대학의 설립자인 동시에 선배인 고 김의형 박사의 위업을 받들어 안으로는 내실화에 힘쓰며 밖으로는 한국내의 명문대학으로 부상하기 위한 충실한 성장을 기하고자 한다”고 그의 포부를 밝혔다.

그러면 다음에 흥순태 학장의 취임사를 기록하여 그가 이끌어나갈 한성 발전의 포부를 알아보자.

낙산동산에 내린 고 우촌 김의형 박사의 민족교육의 뿌리는 1945년 조국광복과 더불어 시작되어 마침내 1972년에는 현 대학인 한성대학이 설립되어 명실공히 중 · 고 대학을 갖춘 한성학원으로 타 사립학원과는 다른 발전과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성장과정 중 가정을 중심으로 한 환경교육이란 것이 인간 형성을좌우합니다. 그 중에서도 청소년 시대 교육은 인간 형성의 기초를 만들어 주는 주요한 과정입니다.

고 우촌 박사는 이 이상을 위하여 이 학원의 발전을 중 · 고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진심으로 성취시켰습니다.

한성대학은 설립된 지 불과 12년 경과한 신설대학입니다. 제5대 학장으로 취임하는 본인은 설립자인 동시에 선배인 고 김의형 박사의 위업을 받들어 안으로는 내실화에 힘쓰며 밖으로는 한국내의 명문대학으로 부상하기 위한, 알들하고도 충실한 성장을 기하고자 합니다.

대학이란 학문 진리의 탐구에 그 목표를 두고 그 학문을 통한 창조적 연구로 인간 생활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서는 계속적이고 신념 있는 교육의 계획과 연구가 이루어져야 되겠습니다.

교육에 종사하는 교육자나 교직원이나 모두가 확고한 신념 하에 교육사업에 임해야 할 것이며 행정책임자는 교육에 필요한 적절한 환경과 조직적인교육계획의 수립을 위해 힘써야 하겠습니다.

학생제군들은 장차 대한민국의 지도급 인재로 국가적으로 중요한 간성이 될 사람들입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청년기는 인생의 기틀을 만드는 중요한 시기인 만큼 진리탐구를 위한 연구의 수련을 통하여 대학시절을 신념 있게 수학하며 덕성을 기르고 품성 높은 인격자가 되기 위한 실천과 노력을 게을려 하지 말길 바랍니다.

학생제군! 대학의 발전은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성과 덕성을 기르며 사물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픈시적인 시야보다 원시적인 대망에 시야를 돌려 개인의 영탈과 더불어 조국의 발전을 위하여 영원한 영광을 목표로 전진하여야 하겠습니다.

상기한 바와 같이 계획, 교육 학생 3자가 일체가 되어 우리의 학원 한생대학을 영광스러운 모교로 건립합시다.

신임 홍순태 학장의 취임과 I대를 같이 하여 9월 1 얼자로 처장들의 인사개편이 단행되었다. 이 때의 보직개편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교무처장 : 윤석효 교수 (사학과 신규)

사무처장 : 김길평 교수 (경영학과 신규)

학생처장 : 강은석 교수 (교양학과 유임)

기획실장 : 김용정 교수 (무역학과 유임)

이어서 12월 14일에는 학생처장과 일부 연구소장 및 학과장의 인사

개편이 단행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생처장 : 한진만 교수 (미술학과)

도서관장 : 홍봉춘 교수 (무역학과)

학보사 주간 : 이종수 교수 (행정학과)

민족문화연구소장 : 정연길 교수 (국어국문학과)

사회사업연구소장 : 최송길 교수 (경영학과)

영어영문학과장 : 김용석 교수

경영학과장: 김원중 교수

행정 학과장 겸 고시반 지도교수: 황진수 교수

도서관학과장:이우범

의상학과장: 최해주 교수

미술학과장: 정하경 교수

2. 학생복지관 준공

착공 연기로 인하여 학생들의 원망을 사기도 하였던 학생복지관이 9월 5일 완공되어 개관식을 가졌다.

본 복지관이 완공됨으로서 그 동안 시설에 불편을 겪던 학생들에게 후생복지 시설로서 편의를 제공하게 되었다.

1983년 4월초에 착공 예정이었으나 허가상 문제 등으로 인하여 결국 우리대학 개교 12주년 기념일인 10월 5일 착공식을 갖고, 동년 12월 15일 기공식을 거행 하였다.

당초 지상 5층으로 계획한 바 있으나 예산상의 부족으로 인하여 4층으로 결정, 완공을 보게 된 것이다. 본 복지관의 층별 용도는 다음과 같이 확정되었다.

지하 : 교직원 식당, 주방,휴게실,탈의실,샤워실,학생식당

1층 : 학보사,서점 및 우체국, 학생처,강당,의무실,영사실, 학생처장실

2층 : 학생생활연구소,총학생회장실, 여학생휴게실,회의실,학도호국단실,학생장실

3층 : 도서관장실, 자료정리실, 복사 및 보관실,참고 논문실,서고, 목복실,특수자료실

층 : 도서관 휴게실,일반열람실

3. 각 위원회 통폐합 작업

그동안 복잡· 다원화 되어있던 각 위원회를 간소화함으로써 실제적인 기능을 강화시키고,업무의 내용이 중복되어가 유사한 위원회를 하나로 통합하는 작업이 11월 1일 확정되었다.

기존의 21개에서 14개 위원회로 숙소 통폐합된 위원회는 다음과 같다

인사위원회,재무위원회, 교무위원회,기획위원회,학생지도위원회, 교원징계위원회,일반직원 징계위원회,학사개혁위원회,도서관운영 위원회,장학위원회,고시 반지도위원회, 취업 대책위원회,체육진흥관리위원회

제2절 성장을 위한 진통

제9회 학위수여식,1985학년도 신입생 입학식

제9회 학위 수여식이 1985년 2월 23일 2시 종합관 대 강당에서 거행되었다. 금번 학위 수여자는 11개학과 총 425명이며, 도서관학과와 경제학과는 첫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수석졸업의 영예는 신세준 (사학과)군이 차지하였으며 각 학과의 학위 수여자의 수는 다음과 같다.

국어국문학과 30명

영어영문학과 34명

사학과 21명

경영학과 85명

무역학과 76명

경제학과 21명

행정학과 27명

도서관 학과 24명

무용학과 39명

의상학과 39명

미술학과 29명

합계 425명

1985학년도 신입생 입학식이 2월 25일 2시에 대강당에서 거행되었다. 입학식에서 홍순태 학장은 “대학이란 인간으로서 독창적인 학문연구를 지속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며 인간적으로 성숙하여 가는 곳, 사회생활에 필요한 바탕을 마련하는 곳,자기가치 확립 및 힘찬 정진에 대한 발판이 될 수 있는 곳으로서 질서를 중요시하며 차분히 스스로의 실력을 갈고 닦을 것” 을 당부하였다. 한편 1985학년도 신입생수석은 다음과 같다.

인문학부 : 박동익 (영문학과 야간)

사회과학부 : 박준련 (무역학과 야간)

예술학부 : 유정일 (미술학과)

2. 축구부 창단,지하철역명 개명

1985년 3월 20일 소강당에서 그 동안 예산 등 행정적 절차 문제로 난항을 거듭하던 축구부가 창단되었다. 우리대학 축구부는 학생들이 모금한 체육진흥기금 800여만원을 바탕으로 하여 홍순태 학장을 단장으로, 감독에 김계욱 교수를,초대 코치에는 정은식을 초빙 하여 4학년 3명,3학년 6명,2학년 5명 및 신입생 3명 등 총 14명의 선수들로 구성되었다.

한편 정은식 코치는 가난한 살림을 힘들게 꾸려가고 있어 당장 큰 성과를 기대하지 않지만 앞으로 2〜3년을 바라보고 뛸 각오를 밝히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호응도라고 강조하였다.

지하철역명 ‘삼선교’가 ‘한성대입구(삼선교)’로 개명되었다. 이 사실은 이 해 4월 30일 서울시장과 안호상 이사장,홍순태 학장과의 면담시에

확정·발표되었다. 우리대학에서는 그 동안 지하철역 주변 다른 대학의 예를 들어 삼선교역도 한성대 입구로 변경해야 한다는 건의를, 서울시와 지하철 공사에서 수용하여 개명되게 되었다.

3. 성장을 위한 진통

학원문제 대 책위 원회 주도로 이 해 5월 28일 개최된 교사이전 및 교수 퇴진 문제에 대한 공청회 이후 시작된 학생 농성이 2주 이상 장기화에 따라 학사가 일시적인 마비 상태에 이르게 되자 학원정상화를 위한 조치로 교내시위와 관련 18명의 학생들이 징계를 받았다. 한편 정상화 조치의 한 방편으로 일부 보직개편이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무처장 : 최명규 교수 (경영학과)

학생처장 : 김경배 교수 (교직과)

도서관장 : 한창호 교수 (경제학과)

학생 생활 연구소장 : 김용석 교수 (영문학과)

영문학 과장 : 박양구 교수

이번 보직개편을 하면서 기획실이 기획과로 축소되고 사무처 관할 내에 위치하는 기구 개편도 아울러 이루어졌다.

제3절 교사이전 및 시설확장

1. 제10회 학위수여식,1986학년도 신입생 입학식

제10회 학위 수여식이 1986년 2월 22일 1시 종합관 대 강당에서 홍순

태 학장과 많은 내외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거행되었다.

금번 학위수여자는 11개학과 총 408명으로 영예의 수석졸업자는 김철수(행정학과)가 차지 하였다.

각 학과별 학위수여자 수는 다음과 같다.

국어국문학과 31명

영어 영문학과 36명

사학과 25명

경영학과 57명

무역학과 88명

경제학과 20명

행정학과 20명

도서관 학과 37명

무용학과 31명

의상학과 36명

미술학과 27명

합계408명

2월 24일 2시 종합관 대강당에서 1986학년도 신입생 입학식이 거행 되었다. 개식사를 시작으로 국민교육헌장 낭독,학장 훈시,이사장 축사의 순서로 진행된 금번 입학식에서 홍순태 학장은

“대학이란,가치창조의 제1단계로서 자립자행하고 스스로 판단하여 나름대로의 자기인생 수련을 위한 독립된 학문연구의 장입니다. 인생의 완숙을 목표로 볼 때 대학학문이라는 것은 기초에 불과한 것이니 행복의 토대라 할 수 있는 학문 토대를 잘 닦도록 노력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당부하였다.

이어서 안호상 이사장은 “대학의 가장 큰 2대 목표는 인격도야와 학문연구에 있습니다. 학생 여러분의 인격도야와 학문연구도 홍익인간의 위대한 이상에 목표를 두고 백두산을 바라보며 열심히 노력하기를 바람니다”라고 부탁하였다.

한편 1986학년도 신입생 수석은 예년과 같이 학부별로 지정되었는

데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인문학부 한진수 (국어국문학과 야간)

사회 과학부 유원준 (무역학과 야간)

예술학부 이강은 (미술학과 서양화)

2. R.O.T.C.창설 및 보직개편

서울권애 속해있는 4년제 정규대학(여자대학 제외) 중 유일하게 R.O.T.C.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던 우리대학이 그동안 꾸준하게 펴 온 노력 끝에 12월 4일 국방부령 제281호(1975년 9월 25일) 학군무관 후 보생 규칙 에 근거 인교(1984년 11월 22일) 학군사관 후보생 과정 설치 승인을 얻었다.

이에 따라 1985학년에 1학년 재학중인 교런대상자 중 후보생을 선

발, 1986학년부터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게 되었다.

금번 R.O.T.C. 설치로 우리대학은 명실공히 대학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학군사관후보생(R.O.T.C.) 창설 및 입단식이 3월 11일 우려대학 운동장에서 안호상 이사장, 홍순태 학장 및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되았다. 본 행사쓴 창설경과 보고, 계급장 수여, 후보생 선서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R.O.T.C.는 여러 가지 제반여건의 어려움으로 그 동안 설치 인준을 받아오지 못하다가 지난해 학교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금번 창단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 날 행사에서 학군단장은 훈시를 통해 대학은 학문을 연구하며 탐구하는 곳으로 명예로운 학군사관 후보생 과정에 선발된 학군사관 후보생들에게 진심으로 축하하며 세 가지 당부를 하였다.

“첫째,투철한 사명감과 긍지를 잃지 말 것. 둘째,강인한 체력과 실력 배양에 힘쓸 것. 셋째, 예의 바르고 학교를 사랑하는 학생이 될 것”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홍순태 학장은 “여러 가지 제반 여건이 부족하고 미흡한 가운데 여건 부족을 보완하여 R.O.T.C. 승인을 받아 오늘과 같은 뜻깊은 자리가 마련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선발된 후보생 모두에게 축하를 보낸다”고 치하하였다.

한편 28일간에 걸친 장기적인 학내 사태를 수습하고 학원의 정상화를 기하기 위하여 8월 1일자로 대폭적인 보직개편을 단행하였다.

개편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교무처장 : 한창호 교수(경제학과)

학생처장 : 이우범 교수(도서관학과)

도서과장 : 이용남 교수(도서관학과)

학보사주간 겸 방송실장 : 황진수 교수(행정학과)

민족문화연구소장 : 지배선 교수(사학과)

사회산업연구소장 : 허창재 교수(경제학과)

학생생활 연구소장 겸 취업대책위원장 : 강석중 교수(무역학과)

국문학과장 : 김창용 교수

영문학과장 : 김용석 교수

사학과장 : 윤경로 교수

경영학과장 : 연정열 교수

무역학과장 : 김용정 교수

행정학과장 : 이종수 교수

경제학과장:권혁제 교수

도서관학과장:정진식 교수

무용학과장 직무대리 : 김진걸 교수

미술학과장 : 강국진 교수

교양과장 : 김계욱 교수

건설본부장 : 김길평 교수 (경영학과)

체육부장 : 강은석 교수 (교양학과)

1. 교사이전 및 본관 신축 기공식

교사이전 및 본관신축 기공식이 8월 12일 오전 10시 전 한성여자중학교자리에서 거행되었다. 이 날 열린 기공식은 안호상 이사장, 이희순 이사,홍순태 학장, 3 처장 등 내외 귀빈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식순에 따라 치루어 졌다.

건설본부장인 김길평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이 날 기공식은 공사개요 소개와 김정웅 목사(영동 성서 침례교회)의 축도,시삽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새로이 들어서게 될 본관 신축 건물은 대지면적 2천2백94.3평,건축면적 7백35.5평으로 동림건축 주식회사가 설계를 맡고,우진토건 주식회사가 시공을 맡게 되었다.

본관 신축건물은 전체 6층,‘철근 콘크리트 라멘조’ 구조로 1986년 8월 12일 착공되어 1987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한편 이에 앞서 여중·고의 방학과 동시에 대학, 중·고의 자리 바뀜이 이루어져 교사이

전이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교사이전이 단행됨으로써 전 여고건물이 본관으로, 전 과학관이 별관으로 각각 명칭이 바뀌어 사용된다.

4 졸업정원제 운영시행시책

우리대학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고 졸업정원제 운영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한 학칙 개정이 9월 26일 교무위원회를 통해 결정되었다.

금번 학칙 개정으로 졸업정원제 운영시행 세칙이 새로 재정 되었고, 성적평가에 관한 세칙 중 제3조 평가비율이 변경되었으며 제3조 단서조항(2),제5조 2항,제8조 2, 4, 5항이 각각 삭제되었다. 또한 제13조 2항은 변경되었다.

첨가된 규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졸업정원제 운영시행세칙

재학기간 중 학사경고를 2회 받은 자는 학칙 제38조에 의거 제적된 다.(제3조), 재학 중 중도수료 사정은 학년 말에 각 처장, 도서관장, 각 학과장으로 구성되는 중도수료 사정회의에서 행하며 졸업운영 단위별로 사정한다. 1981~1984년도 입학자료 휴학 후 복학한 자는 재학학년의 중도수료 비율에 따라 사정한다. (제5조 1,2항), 중도수료의 학년별 비율은 2학년말 졸업정원의 115% 초과 인원,3학년말 졸업정원의 105% 초과 인원에 각각 적용된다. (제6조),중도수료의 사정 기준은 재학한 전체 학기의 학기말 평점, 평균의 합계 점수로 사정한다. (제7조),학장은 중도 수료 사정회의의 결정에 따라 중도 수료자 중에서 학업성취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유급을 허가할 수 있다. 단, 유급은 4학년에 한한다. (제9조), 유급은 1년 단위로 1회에 한해서 허가한다. (제10조), 유급된 자가 해당 학년에 취득한 학점은 무효가 되며 재이수를 해야 한다. 단,군사교육 학점은 예외 (제11조),유급된 자는 실제 졸업하는 학년도의 졸업정원의 적용을 받는다. (제12조) 등이다.

· 성적 평가에 관한 세칙

평가비율은 기말성적 30%,중간성적 30%,과제물 및 부정기시험 20%, 출석 및 수업태도 20%에 의하여 종합성적으로 평가한다. 단,중간성적은 학사 진행상 기말성적에 통합될 수 있다. (제3조),학사경고는 매 학기 다음 각 호의 1에 해당하는 자에게 학장이 행한다. 학기성적 평점평균 1.75 미만인 자 학기수강신청 교과목 중 2과목 이상 낙제(F) 재학기간 중 학사경고를 2회 받은 자는 학사제적 된다. (제13조) 등이다.

위의 새로 개정된 세칙 및 규정들은 1987년 3월 1일부터 시행된다.

제4절 시설확충 및 대학원 신설

1. 제11회 학위수여식

제11회 학위수여식이 2월 21일 오후 1시 강당에서 거행됐다.

이번 학위수여식은 학장 및 많은 내외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개식사,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칭-,순국 선열에 대한 묵념,국민 교육헌장 낭독, 학사보고,학위증서 및 상장수여,학장 격려사,이사장 축사,동창회장 축사, 기념품 증정,교가 제창,폐식사 순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학사학위 수여자는 11학과 총 419명으로 밝혀졌다. 각 학과별 졸업인원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국어국문학과 31명

영어영문학과 31명

사학과 33명

경영학과 63명

무역학과 78명

경제학과 20명

행정학과 28명

도서관 학과 36명

무용학과29명

의상학과 41명

미술학과 29명

총계 419명

한편 이 날 진행된 학위 수여식에서는 경제학과 김봉학군이 평균평점 4.08점으로 영예의 수석을 차지하였다.

2. 우촌관 준공

우촌관 공사가 8월 25일 준공되었다. 대지면적 2,994.3평,건축면적

3,447평으로 웅장한 규모의 우촌관 완공은 우리 대학 발전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데 큰 의미를 둘 수 있다.

그 동안의 공사내역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우촌관은 지난 1986년 8월 12일 기공식을 가져 만 378일만에 완공을 보게 되었다. 그 동안 총 공사비는 22억3천968만4천원(설계 감리비 5천860만4천원 + 공사비 21억8천108만원)이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우촌관의 주요배치 상황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층 : 종합전시실, 교관실, 무용 실기실 및 교수연구실

2층 : 어학실,컴퓨터실, 사회산업연구소,민족문화연구소,교수연구실, 의상학과 실기실

3층 : 교무처,사무처, 당직실,기획실,교수연구실

4층 : 자료실,이사장실,학장실,법인사무국

5, 6층 : 강의실

또한 5, 6층에는 넓은 베란다를 두어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게 된다.

3. 보직개편,졸업시험제 실시

8월 20일자로 보직개편이 있었다. 이번 개편은 학생처장 이우범 교수의 일신상의 사유로 인하여 개편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생처장 : 이종수 교수 (행정학과)

행정학 과장 : 정성택 교수

방송실장 : 김길평 교수(경영학과)

한편 취업에 보다 능동적으로 대처하자는 목적 아래 각 학과별로 졸업종합시험이 시행되고 있다. 그 동안 진행되어 왔던 상황을 보면 2월 11일 현행 졸업논문을 졸업종합시험으로 전환한다고 발표하였다. 그후 5월 1일 각 학과의 졸업종합시험과목이 확정, 발표、되어 현재 시행되고 있는 중이다.

교무위원회에서는 과목 낙제 (평균점수 40점 이하) 인 경우 재시험에 한하여 전형료를 징수하기로 하였으나 각 학과 준비위원회와 협의를 통해 전형료를 징수치 않기로 결정하였다.

이 외에 졸업종합시험과 관련된 전반적인 사항은 학과 단위의 졸업시험준비 위원회에서 일괄적으로 처리하기로 하였다.

우리대학은 10월 19일 4개학과 (산업공학과, 전산통계학과,의류직물학과, 산업디자인학과)의 신설로 입학정원 15개학과 720명으로 증원되었다. 또한 도서관학과는 문헌정보학과로 개명되었다.

이어서 11월 9일 문교부로부터 경영·행정대학원의 설치인가를 받게 됨으로써 학부와 대학원의 공존체제를 가지게 되었다. 문교부로부터 확정 발표된 대학원 설치인가와 내용을 보면,경영학과와 행정학과 2개전공에 각 40명씩의 정원이 책정되어 있다. 또한 야간에 강의를 하게 되는 특수대학원은 5학기를 기준으로 하며 석사과정까지 이수하게 된다.

한편 대학원의 신설로 12월 16일자로 다음과 같이 보직개편이 이루어졌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대학원장 : 홍순태 학장

대학원 교학과장 : 강병식 교수(사학과)

대학원 경영학과 주임교수 : 김용정 교수(무역학과)

대학원 행정학과 주임 교수 : 황진수 교수(행정학과)

학생 생활 연구소장 : 최명규 교수(경영학과)

무역학과장 : 강석중 교수

제5절 홍순태 학장 퇴임

1. 제12회 학위수여식,신설학과장 임명

1987학년도 제12회 학위수여식이 2월 20일 오후 2시 우리대학 대운

동장에서 열렸다. 이번 학위수여식에서는 11개학과 총 512명의 학사를 배출하였는데 이는 작년의 419명보다 100명이 늘어난 숫자이다.

학위수여식은 학장,이사장, 동창회 장 등 많은 내외 귀 빈이 참석한 가운데 개식사,국민의례,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국민교육헌장낭독, 학사보고,학위증서 및 상장수여,학장 격려사,이사장 축사, 동창회장 축사,기념품 증정,교가 제창, 폐식사 순으로 진행되었다. 홍순태 학장은 격려사에서 “시련의 민족적 격동기에 사회에 진출함에 있어서 자유정신 구현과 신뢰성의 확립이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이 날 학위수여식에서 전체 수석졸업은 4.5점 만점에 평균 평점 4.09를 취득한 임동혁(도서관학과)군이 최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한종휘(국문학과)군 등 10명이 우수상을,김상복(행정학과)군 등 36명이 공로상을 각각 수상하였다.

이번에 졸업한 학과별 학사수여자 인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국어국문학과 36명

영어영문학과 42명

사학과 40명

경영학과 81명

무역학과 70명

경제학과 42명

행정학과 39명

도서관 학과 44명

무용학과 36명

의상학과 49명

미술학과 33명

총계 512명

또한 올해부터 신설된 전산통계 학과,의류직물학과, 산업 디자인학과, 산업공학과 등 4개학과의 학과장이 다음과 같이 임명되었다.

전산통계학과 : 이우범 교수 (문헌정보학과)

산업공학과 : 김길평 교수 (경영학과)

의류 직물 학과 : 임재영 교수 (의상학과)

산업디자인학과 : 정하경 교수 (미술학과)

한편 이번 학과장 임명은 현재 재직중인 교수들을 선별 발령함에 따라 학교측의 신설학과 전문적 양성을 위한 보다 성의 있는 교수공개 채용방안이 지적되었다.

2. 제규정심의위원회 발족과 보직개편

제규정심의위원회가 3월 16일 발족되어 학칙개정 및 학내 전반에 관한 제반규정과 준칙 등을 심의하게 되었다.

이 날 발족과 함께 열린 제규정심의위원회의 위원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 이용남 교수 (문헌정보학과)

위원 : 한창호 교수 (경제학과, 교무처장)

최송길 교수(경영학과,사무처 장)

이종수 교수(행정 학과,학생처장)

윤경로 교수(사학과)

지배선 교수(사학과)

김용정 교수(무역학과)

황진수 교수(행정학과)

이번에 구성된 제규정심의위원회는 각 대학에서 활발히 추진되고 있는 학칙 개정작업 을 우선적으로 착수해 나가게 될 것 이다.

우리대학 보직개편이 전면적으로 단행되었다. 6월 22일 열린 교수회의에서 일괄 통보된 이번 개편은 지난 1학기 일련의 학사사태와 홍순태 학장의 임기만료에 따른 것이다.

주요 보직개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무처장 : 김용정 교수 (무역학과)

학생처장 : 이석주 교수 (국어국문학과)

사무처장 : 박양구 교수 (영문학과)

학보사 및 교지편집실 주간 : 김용석 교수 (영문학과)

방송국장 : 조점환 교수 (교양과)

민족문화연구소장 : 윤경로 교수 (사학과)

학생생활연구소장 겸 취업대책위원장 : 지배선 교수 (사학과)

체육부장 : 김계욱 교수 (교양과)

한편 도서관장인 이용남 교수 (문헌정보학과)와 건설본부장인 김길평 교수 (경영학과), 사회산업 연구소장 허창재 교수 (경 제학과)는 각각 유임되었다. 이번 보직개편과 더불어 각 학과 학과장들도 전면 이동되었다.

제3장 신영기 학장 취임

제1절 신영기 학장 취임

1. 제6대 신영기 학장의 취임

홍순태 학장의 임기 만료가 다가옴에 따라 신임학장에 관한 문제에 학내외를 통하여 많은 관심이 집중되었다. 우리대학의 후임 학장이 누구인가에 따라 학교 운영의 방향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학내에서의 관심은 대단히 컸다. 당시 전국에 있는 상당수의 대학들은 그 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교수 중에서 총·학장을 선출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으며,앞으로 거의 모든 대학이 그러한 추세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이 우리대학에 미친 영향도 있었

다. 이에 따라 교수협의회에서는 우리대학에 재직중인 교수 중에서 학장을 추대하자는 여론이 크게 일어났다. 당시 재단에서도 이러한 여론을 과감히 수렴하여 적격자를 추천해 보도록 교수협의회에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교내의 실제 사정은 이상적인 생각만으로는 역부족이었는지 뚜렷하게 어느 주구를 추천하지 못하고 시일만 촉박하게 흘러갔다.

교수협의회에서 미온적인 태도로 나오게 되자 일부에서는, 이번만큼은 할 수 없이 또 한번 외부인사를 영입하자는 의견도 흘러나오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재단 이사회에서는 학장 초빙을 맡게 되었고, 이에 따라 신영기 학장을 초빙하게 되었다. 일단 신임학장이 내정되자 교수협의회에서 인준 도의 절차를 거치고 최종적으로 확정이 되어 1988년 8월 22일 오전 10시 소강당에서 신·구 학장 이·취임식을 거행하였다.

그 간의 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교수협의회에서는 신임학장 선임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7월 14일 회

의를 열고 두 가지 사항을 결의하여 재단이사회와 협의를 하였다.

그 사항은,첫째 후임 학장을 이사회에서 선임하되 반드시 학내 교수로 한다는 것과,둘째 부득이한 경우에 학외 인사를 선임하되 그 즉시 교수협의회 총회의 인준을 거친 뒤 취임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첫 번째 사항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두 번째 사항으로 귀결되었다. 재단이사회는 8월 11일 회의를 열어 신영기 박사를 내정하고 19일 오전11시 교수협의회의 동의를 구하였다. 이 교수 협의회 총회에서는 전체 44명의 회원 중 31명이 참석하여 찬성 23표,반대 8표로 가결되었다.

신영기 학장은 1921년 2월 22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1944년 일본 동경대혁-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1975년에 동경대학에서 공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신학장은 약 30년간을 서울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1986년 2월에 정년퇴임을 하였고 학술원 회원으로 있었다

신영기 학장은 ‘뜨거웠던 정열을 부드럽게 누그러뜨려 화합과 단결

로써 나라와 학교의 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자기 자신들의 계발과 성찰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 이라는 취임사를 읽으며 한성가족 모두 하나가 되자고 역설하였다. 다음은 취임사 전문이다.

친애하는 한성가속 여러분,그리고 공사다망하신 중에도 멀리 왕림하시어 이 자리를 빛내 주신 내외 귀빈 여러분,제가 방금 이사장님께서 학장으로 임명해 주신 신영기입니다. 지난 40여 년간의 교직생활 중에도 보직 한번 맡지 않고 오로지 학문의 길에만 뜻을 두어왔고 얼마 전 정년을 맞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던 저에게 이 대학의 학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왔을 때,저는 특히 요즈음과 같이 그 동안 억압되었던 민주화와 통일에의 열기로 학내외가 격동하는 시기에 저와 같이 부덕한 사람이 과연 그 소임을 다 할 수 있을까하는 우려에서 사양을 거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기회라는 것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 이것이 제가 학문 외의 길로서 교수와 학생 여러분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저에게 주어진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로서 비록 그 전도가 순탄치만은 않으리라고 예상되더 라도 그것이 제가 이 세상에서 치루지 않으면 안될 菜이 라는 생각이 들어 감히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도 격심한 변혁기에 들어서 있습니다. 그

리고 사회는 계속되는 노사분규나 학생운동으로 매우 혼란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우리는'지금 한창 무르익은 봄을 맞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야는 자고 나면 하루가 다르게 푸르름을 더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국민의 대다수가 절대 빈곤이리는 통로 속에서 밭을 일구고 싹을 틔워 봄을 맞이하고 있을 때 다른 일부에서는 오는 봄을 미처 기다리지 못하고 초겨울부터 비닐 하우스를 만들어 인공 난방과 인공 급수 시설로서 성급하게 때 이른 야채와 과일을 재배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대다수가 자연 속에서 미처 결실을 거두지 못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들의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비닐로 덮여진 그 속에서는 여러 가지 무리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르익으면 비닐 하우스는 더 이상 존재할 필요고 또 존재 할 수도 없습니다. 저는 지금이 바로 그러한 시기라고 생각 합니다.

이러한 시기에는 부드럽고 따뜻한 봄의 햇살이 필요합니다. 잎이 채 무성해지기도 전에 너무 뜨거운 햇볕을 받게 되면 잎은 여물지를 못하고 오히려 시들게 되고 결실도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즈음 일부 젊은 학생들의

열기는 너무 뜨겁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마치 한 여름의 뜨거운 햇볕과 같습니다. 또 여러분들께서는 금년 여름이 다른 해에 비해서 유난히 더웠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햇볕이 필요할 때 이와 같이 뜨거운 열기들이 겹치면 이제 막 싹틔워 가꾸기 시작한 민주주의가 채 여물기도 전에 시들어 버리게 되지나 않을까 우려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가 이제 무르익은 봄을 맞고 있다면 우리 한성대학은 이제 막 초봄을 맞고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설립된 지 이제 15년이니 대학의 역사로서는 결코 긴 편은 아닙니다. 아니 이제 겨우 싹을 퇴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필요한 것은 따뜻한 햇볕보다도 부드러운 봄바람입니다.

여기 계신 교수님들 대부분은 스승으로서의 훌륭한 인품과 능력을 갖추고 계시리라고 믿어지지만 좀 못하신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또 여기 계신 학생 여러분들도 대부분은 다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계시겠지만 그렇지 못한 학생도 일부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좀 못한 스승 밑에서도 얼마든지 훌륭한 제자가 나올 수 있으며 또 학교 다닐 때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던 학생들이 졸업한 후에 사회에 나가 훌륭하게 성공한 예를 우리는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누가 좀 더 잘나고 못나고,또 잘하고 못하고를 따질 때가 아

니라,일단 한성가족으로서 인연을 맺은 이상 모두 일치단결하여 이제 막 틔운 싹을 가꾸고 돌보아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뜨거운 열기보다는 부드러운 봄바람과 같은 화합인 것입니다.

저는 어느 단체이든 간에 책임자의 역할이란 단체 소속원 모두가 힘을 합쳐 그려 놓은 용의 모습에 눈을 그려 넣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용의 모습이 아무리 훌륭하더라고 눈을 잘 못 그려 넣으면 그 그림은 생명을 잃고 맙니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아름답게 그려 넣으려 해도 먼저 용의 모습이 훌륭하게 만들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한성가족 여러분,저는 이제 이 자리에서 앞으로 우리 한성대학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을 약속드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제가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해도 여러분들께서 모두 일치단결하여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시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 젊은이들은 나름대로 나라와 학교의 발전을 위하여 많은 정열을 받쳐 왔습니다. 그 결과 얻은 것도 많지만 또 한편으로는 지나친 희생이 뒤따랐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는 다시 냉정을 되찾-아 그 모든 것을 역사의 저편으로 흘려보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뜨거웠던 정열을 부드럽게 누그러뜨려 화합과

단결로써 나라와 학교의 발전에 기여함은 물론 자기 자신들의 계발과 성찰에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나날이 발전하는 우리조국 대한민국 속에서 더더욱 발전해 나가는 우리 한성대학을 위해 제가 힘껏 봉사할 수 있도록 여러분 모두가 도와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이 자리에 나와주신 한성가족 및 내외귀빈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리며 이것으로 간단하나마 취임사에 대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2.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한 노력

신영기 학장의 취임사에서는 학장으로서의 대학운영 방향에 대해서 언급한 점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았다.

이러한 면은 비단 취임사에서 뿐만이 아니라 그 해 10월 5일 한성 대학 개교 16주년 기념사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다음에 그 전문을 싣는다.

한성학원 창립 43주년과 함께 개교 16주년을 맞이하면서 먼저 오늘의 한성학원이 있을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하신 설립자님과 역대 학원 이사장님 그리고 교직원 여러분께 충심으로 경의와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아울러 한성학원을 거쳐간 모든 졸업생과 친애하는 재학생들에게 변함없는 기대와 격려의 뜻을 전하면서 한성가족 모두와 더불어 오늘의 기쁨을 나누고자 합니다.

1972년 민족정신을 되살려 끊임없는 학문탐구에 기초하여 국가에 이바지하고 나아가 인류의 평화와 복리 증진에 힘쓸 수 있는 지도자를 양성함을 설립이념으로 진리와 지선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힌- 교육기관으로서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학문 연구를 통해 새로운 전통을 다져가기 위해 많은 시련과 난관을 극복하고 열과 성으로 만들어 온 한성 역사 16년,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속에서 발전의 발판을 만들기 위한 전통과 그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진 중고등학교와의 교사이전, 운동장 확장 공사,우촌관 신축건물의 완성 등 양적 팽창과 함께 학과의 신설 및 증원, 경영 행정 대학원의 설립 등 명실상부한 대학으로 면모를 갖추어 나가며 끊임없는 학문 탐구로 개성 있는 전통 구축을 위한 한성인 전체의 결실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초라해 보이지만 한성인

의 의지가 응어리져 가꾸어 온 한성의 역사가 값진 역사로 수놓아질 고귀한 시간들이 될 수 있도록 가일층 분발해야 할 것입니다.

개교기념을 축하하는 참된 뜻은 이러한 우리대학의 역사는 통찰하면서 그 토대 위에 내일의 포부와 자신을 다짐하는 새로운 결의를 갖는데 그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계기를 맞이하면 새로이 마음을 가다듬고 미래를 다짐하는 슬기를 지닌바 개교 16주년을 맞아 우리대학은 발전의 양적 추구에 앞서 질적으로 심화된 성숙한 안정기의 내실을 도모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 서 있다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한성인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한평생 더불어 사는 진정한 한성가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 끊임없는 학문탐구를 통하여 실력을 연마하면서 학문연구의 최적의 장소로서 명실공히 공부하는 면학의 장을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학자존의 능력 함양과 대학의 자주적인 대학 발전을 위해 새로운 각오로 더욱 많은 노력과 정열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새로운 역사를 위해 아무쪼록 한성인 모두의 적극적인 참여와 더욱 애정 어린 마음으로 단합하여 내일의 더 큰 영광과 기쁨을 나누길 바라면서 개교 16주년 기념사에 갈음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러한 신영기 학장의 의지는 우리대학에 양적인 향상뿐만 아니라, 질적인 향상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이는 곧바로 실천에 옮겨졌다.

3. 과학관 준공

신영기 학장은 취임하자마자 곧 여러 가지 구상을 하였다. 이 구상 내용은 학보사에서 마련한 인터뷰를 통하여 지면으로 인쇄되어 나왔 다. 여기서 신학장은 우리대학의 교육공간이 절대직으로 부족함을 인식하고 공간확보 방안을 생각하였다. 곧 19기년도에 준공한 교내 수영장 자리에 과학관 건축을 추진해야겠다고 말하였다. 이 사업은 곧장 실행에 옮겨져서 다음해인 1989년 1월 19일 서울시청의 사업승인,4월

7일 성북구청의 건립 허가에 따라 4월 18일 과학관 기공식을 갖게 되었고 10개월에 걸친 공사 끝에 1990년 2월 27일 준공을 보게 되었다.

이 날 준공식에서는 그 동안 교내 건설 본부장을 맡아오던 김길평 교수의 경과보고에 이어 공로패 수여 (김길평 교수 수상)와 감사패 증정 (성북구청장, 성북경찰서장 수상),테이프 절단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지상 5층의 A동, 지상 4층 지하 1층의 B동으로 된 과학관은 총 면적 1,626평에 건축 면적이 366평이다. 당초 완공 예정은 1989년 12월 경이었으나 약 2개월 정도 늦어졌다. 또한 부수적인 공사로서 노천극장,테니스장, 주위환경 조성이 과학관 준공식 전인 2월 23일 착공하여 4월말에 일단락 맺었다.

이 과학관의 내부 현황은 강의실로 사용될 6개실, 산업디자인학과, 의류직물학과,전산통계학과가 각각 4개실을 과별, 실험실로 사용하게 되었고, 교수연구실 10개실,전자계산소 1개실,학과사무실 3개 등 총 35개실을 보유하게 되었다. 이로써 1988년도에 신설된 자연계열학과가 명실공히 실험실습실을 전용으로 소유한 과학관을 갖게 되었다.

4. 전자계산소 설립

오늘날 우리 사회의 급속한 변화는 온 세계를 정보화 시대로 만들었고,이에 따라 모든 학술정보의 신속한 처리업무 능력의 보유여하에 따라 연구성과가 크게 좌우되며,모든 업무부문에 있어서의 능률향상을 위해서는 업무의 전산화가 절실히 요청되고 있었다.

이러한 추세와 현실성에 입각하여 1984년 7월에 정보전산연구원을 설립하여 학생들의 실습에 많은 공헌을 해왔다. 앞으로의 시대는 연구를 비롯한 학교 업무처리에 전산화가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한편 1988학년도부터 전산통계학과를 비롯한 산업공학과, 의류직물학과 산업디자인학과 등의 자연계 학과가 신설되어 전산을 필요로 하는 요청이 쇄도되었고, 1989년도부터는 이 학과의 전공 과목 강의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전자계산소의 설립이 적극

적으로 추진되었다.

전자계산소 설립에 우선 해결해야 할 것은, 컴퓨터를 비롯한 기본설비 도입을 위한 재원조달과 앞으로 대학규모의 확대 및 발전에 상응하여 어떤 기종과 시스템을 도입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이에 따라 우선 1990년 1월 6일에는 ‘MV/15000 System’을 도입하였고, 2월 28일 과학관 2층에 전자계산소 개설의 테이프를 끊게 되었다. 초대 소장으로는 경제학과 권혁제 교수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초창기에 PC 실습실 1개소를 개설하였고, 그 해 9월에는 제2 PC 실습실을 개설하였다.

전자계산소장

전산운영위원회

개발과

실습상담실

운영과

<그림 2> 전자계산소 조직도

► 개발과

신규업무 개발계획 및 업무개발

► 운영과

기존업무 운영 및 Maintenance

► 실습상담실

System 관리,교수 연구지원 및 학생 실습지원

(1) 전자계산소 실습실 이용안내

1) 터미널 실습실

터미널 실습실에서는 중형기종인 'MV/15000 System'에 설치되어 있는 각종 Programing Language와 Software Package를 사용할 수 있으며 사용권한은 다음의 2가지 경로를 통하여 부여받을 수 있다.

• 전산 관련 과목을 수강하는 학생으로 해당 교과목 담당교수가 일괄 사용 신청을 하는 경우

• 논문작성 등 필요한 경우 학과장의 추천에 의해 전자계산소로 사용 신청을 하는 경우

2) PC 실습실

PC 실습실에서는 개인용 컴퓨터를 이용하여 각종 Language 실습 Software Package와 Word Processor 등을 사용 할 수 있으며 특별한 사용허가 없이 학생증만 제시하고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3) 컴퓨터 관련 교육

전자계산소에서는 급증하는 Computer 수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수시로 Computer기본과정,Database, Spread Sheet, Word processor 등의 특강을 실시하고 있으며 새로운 요구가 발생할 경우 이에 적절히 대응해 나가고 있다.

5. 북방문제연구소 설립

북방문제연구소는 1989년 4월 1일 설립되었다.

본 연구소는 한국의 북방정책과 관련이 있는 중국과 소련 및 기타 지역에 있는 공산국가들에 관한 지식의 학문적 연구를 통하여 인류평화와 동서 화해 무드에 따른 강대국 관계의 재편, 한국의 국제적 지위향상,북한에 대한 한국의 통일 및 대화정책, 한국의 국가이익 증진에 어느 정도 기여할 목적을 두고 설립하였다.

본 연구소는 소장과 운영위원,연구소 후원회, 연구원 및 조교를 구성하고, 연구원으로는 교 내외 유관 교수들을 위촉하였다. 사업 내용으로는 미국, 소련, 중국 및 동유럽이나 기타 지역에 관한 도서 및 자료의 구입 배치,연구발표 등 각종 학술회의 개최,연구논문집 및 문헌자료 등의 편찬 발행, 자료교환,학자초빙 및 국내외 연구 기관들과의 학술교류 등을 주진하고 있다.

초대 소장으로는 1989년 4월 1일 유영옥 교수가 임명되었으며,같은 해 9월 7일에 문교부인가를 받았다. 1990년 5월 25일 북방정책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였고,같은 달 논문집 「북방연구」를 발행하였으며,그 후 유영옥 교수가 학교를 그만두고 2대 소장으로 무역학과 강석중 교수가 부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6. 출판부 설립

우리대학 출판부는 대학교육의 목적이 전문지식의 연구와 지성인으로서의 성실한 인격도야에 있으므로 이를 뒷받침하는 이상적인 교과 내용을 담은 우수한 교재개발과 학술연구물 출판에 관한 교수연구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1989년에 설립되었다. 아울러 우리대학교 건학 정신에 입각한 차원 높은 교재 개발에 노력하고 있으며,각종 학술연구물 간행과 학술 및 교양문고 간행 등의 출판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초대 출판부장을 맡은 국문학과 원형갑 교수는 “대학은 책이 생명이므로 교수들의 논문 출간 뒷바라지와 함께 전문 서적 및 교양서적 등 많은 책을 출판하고 싶다”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우선적으로 착수한 것이 교양과목 교재를 편찬하는 것으로서 「,t巧와 生活세계」, 「文章과 炎現」, 「INTERACT and SENSIBILITYj 를 다음해인 1990년 2월에 발간하였으며,1990년 9월 2대 출판부장으로 부임한 이석주 교

수는 다음해인 1991년 2월에 「현대사회와 생활체육」을 발간하였다. 이 4가지 책은 주로 교양국어,교양영어,교양체육 과목에 활용되고 있다.

7. 대학원 신설,경영·행정 대학원 분리 증원

사회가 점차 고학력화 함에 따라 대학원 진학자 수가 늘고 대학원 출신자에 대한 인력 수요 증대로 인하여 대학원 교육기회의 증대와 대학원 중심교육이 점차 활성화되는 것 요즈음 추세다

우리대학에서도 연구활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는 대학원 교육의 내실화를 통해 보다 높은 수준의 학문을 연구하고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전문 인력양성을 위해 대학원 신설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학부의 발전과 연계하여 우리대학의 교수진을 비롯한 외부의 우수 교수를 초빙하여 강좌를 개설함으로써 보다 폭넓고 깊은 학문에 접할 기회를 마련하도록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89년 11월에 문교부로부터 국어국문학과·사학과·무역학과에 36명을 인가 받아 1990학년도부터 석사과정이 설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편 1988년에 신설한 경영·행정대학원은 다시 1988년 11월에 문 교부로부터 분리인가를 받게 되었다. 그 결과 경영대학원과 행정대학원은 1990년도부터 독자적인 행정체제를 갖고 교육에 임하게 되었으 며 각각 60명의 정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1989년 11월에는 문교부로부터 행정대학원 내에 정원 15명의 교육행정학과 설치를 인가 받았다.

8. 연구분위기 조성

우리대학은 1972년에 개교한 이래 10여 년간을 그런 대로 지내왔으

나 1980년대 초반부터는 공간의 부족을 심각하게 느껴왔다. 비록 현재 중학교로 사용하고 있는 교사를 마련하긴 했으나, 운동장을 비롯한 모든 것이 불만족스러웠다.

이에 제5대 홍순태 학장이 취임하면서 한성여중·고둥학교와 대학 건물을 바꾸는 동시에 대형건물을 신축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건물이 우촌관이다.

이 우촌관은 지하를 포함한 6층 건물로서 상당한 건축비가 소요되었다. 그러나 특별히 예산이 비축된 것도 아니어서 교내의 모든 예산은 건축비를 위해서 집중 투자 되기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연구소의 활동이 위축되었고, 당분간 예산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자 해마다 발행하던 논문집도 중단 상태에 이르렀다.

드디어 1987년 8월 우촌관의 준공을 보게 되었고,1년 뒤에 각 연구소에 예산을 지원하는 동시에 과학관 준공과 아울러 전자계산소까지 설치하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대학은 미력하나마 각 연구소가 제 기능을 되찾는 동시에 각 연구소의 논문집 발간이 속간을 보게 된 것이다.

제4장 원형갑 학장 취임

제1절 제7대 원형갑 학장 취임

1991년 4월 1일 우리대학으로서는 처음으로 우리대학 교수로 재직 하면서 교수 회의에 의해 선출된 제7대 원형갑 학장이 취임하였다.이보다 앞서 1990년 10월에 신영기 학장이 사임함으로써 당시 교무처장이 학장 직무대리를 맡아온 바 있다. 새로운 학장 선출은 우리대학에서 선출한다는 원칙 아래 2월 8일 1990학년도 동계교수연수회를 이천군 소재 설봉 호텔에서 가졌으며,이곳에서 제7대 학장후보선출을 위한 회의가 있었다.

이 자리에 서 교황 선출 방식을 통해 국어국문학과의 원형갑 교수가 학장 후보로 선출되었으며, 재단 이사회의 인준을 얻어 4월 1일자로

취임하게 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한성학원 이사장인 안호상 박사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신임 이사장으로 서정희 박사가 재단 이사회의 동의를 거쳐 취임하였다. 다음은 학장취임사 전문이다.

교수는 교단에 서야 생명감을 누립니다. 문학을 떠날 때 이미 그는 죽은목숨이니· 같습니다. 저는 그 동안 이런 생각으로 밤늦게 일어나 수업준비하고 원고 쓰며 살아왔고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학교 당국은 물론 학생늘과 농료 여러분늘이 무한하게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이번에 저는 교수님들의 선거에 의하여 학장 후보로 공천 되었고 재단 이사회가 이를 만장일치로 받아 들였다고 합니다. 저의 보잘 것 없는 문학적 일생,교수적 생활관에 일대 변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한성학원을 창건하신 분의 소명일지도 모릅니다. 10년 가까이 저의 다소곳한 삶의 터전이었고 다섯 권의 책을 쓰게 해주신 대학이기에 이제 이 대학을 위하여 정력을 바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오히려 신께 감사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7, 8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아직 지금의 학생회관이 서기전에 고 하인두 교수와 저는 낙산마루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하 교수 말이 지금도 귀

에 생생합니다. 그는 저 밑의 진리관 쪽을 내다보면서 독백처럼 “원형! 한성도 꽤나 크지!” 라고 중얼거렸고 충청도에는 10만평이 넘는 땅도 있다고 뽐 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한성대학의 장래는 밝기만 하다는 자신감인 듯했습니다.

그 후 저는 어떤 교육계인사로부터 한성학원의 자산 속에는 우촌 선생의 생가까지 들어 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선생께서는 그의 모든 것을 학교에 바치셨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촌 선생께서는 교수들과 직원들에게는 매일 점심 값으로 곰탕 값을 지불 하시면서도 그 자신은 학교 근처의 허름한 대포집에 들어가 값싼 된장밥으로 끼니를 때우시며 흐뭇해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우촌 선생을 직접 뵌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헌신적인 교육자 상(像)에 대해서는 많은 교육계 인사들로부터 들어왔습니다. 그것은 결코 단순한 예찬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을 누구보다도 아끼시던 안호상 박사께서는 지금도 미수(米壽)의 노구를 이끄시고 그분이 안 계시는 한성을 돌보시는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분이 가신 후 한성은 학생회관을 비롯해서 우촌관과 과학관을 세웠습니

다. 물론 우리학교 안에서 우리학교만을 보는 눈에는 가히 우리도 발전했다고 자부할지 모릅니다. 사실 저는 과학관의 낙성식 날 그 공로자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작년 말부터 전국대학 총·학장들의 모임에 나가본 저는 우리 한성의 발전걸음이 토끼도 아니고 거북이도 아니란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눈뜬 봉사였습니다. 불과 15개의 학과에 3,000명도 못 되는 학생수로서는 이제 키 재기 할 만한 학교를 찾아보기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만큼 한국 대학들의 발전속도는 우리 한성을 저 아래 산기슭에 떨쳐놓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우리가 떨어진 채 주저앉아서 하늘에 호소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대학은 오직 발전을 요구하는 현실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고 그것은 오직 우리 교수들과 교직원들 그리고 재단과 학생들에 달려 있습니다.

다행히 재단은 지난해 불행한 사태를 계기로 재기했고 일신했습니다. 낡고 어지러운 껍데기는 깨끗이 벗겨내고 있습니다. 서정희 이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추진력에 있어서 진취적인 의지와 기상은 누가 보아도 완연합니다. 교육환경은 날로 개선되고 있고 기자재 확보는 학과마다 확충되고 있으며, 2학기와 92학년도에 대비하기 위한 대대적인 교수 증원계획도 착실하게 세워

져 있습니다. 이러한 재단의 쇄신과 의욕에 대해서 우리는 매우 감사하는 마음으로 환영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성의 현실에 있어서 재단은 아직 구체제와 얽혀있는 잡음을 개운하게 풀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잡음이 재단의 내부문제에 한정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일부러 아는 체 할 까닭이 없습니다. 이 잡음이 바로 우리 학내외 뜻하지 않은 잡음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에 보직자로서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이 잡음이 대학인으로서의 양심과 도덕성에 저촉되는 문제라면 우리는 서로 힘을 모아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되리라고 믿어집니다. 대학이 교육의 장인 이상 상식을 벗어난 비도덕성은 용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학내의 면학분위기가 안정을 찾고 있습니다. 다른 어떤 대학보다도 밝고 명랑하다는 말씀도 들려읍니다. 물론 지난해의 위기상황을 슬기롭게 극 복해준 우리 학생들에게 보내고 싶은 찬사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 학생들 역시 일부 소수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전반직인 대학가 현실이 그러한 것처럼 아직 부모님들을 애태우고 있습니다. 이 사태는 향후 1~2년은 더 갈 것입니다.

그러나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까지 3~4년 동안 이러한 사태를 겪은 구미의 대학가에서는 요새 그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이른바 “정신의 공동화”라는 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정신이 뿌리째 뽑혀버린 가치관의 상실 현상을 말하는 것이니까 그야말로 심각한 인간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부에서 불러오는 시대적 바람이기 때문에 이 바람이 이념적 갈등이 끝나는 우리대학가에 불어올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가치관의 상실현상에는 다른 묘약이 없습니다. 서구의 교육계 와 지식사회가 그렇게 대비하고 있는 것처럼 폭넓은 교양의 함양 외에는 그 어떤 방법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한성은 작고 아담한 대학입니다. 이건 저의 사견입니다만 앞으로 5, 6 천명 정도의 알차고 이상적인 대학으로 발전하였으면 합니다. 한성대 출신이라면 에외 없이 교양 있고 실력 있으며 믿을 수 있다는 평판을 받을 수 있는 그런 대학 말입니다.

정신의 공동화라는 말이 암시해주는 것처럼 어차피 앞으로의 시대사회는 교양을 우선 중요시하고 교양 있는 인재를 찾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렇게 이뤄지기 어려운 꿈이 아니란 것도 우리는 서로 잘 알고 있습니다. 맡은 바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 모두의 성실성이야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저를 이끌어 주신 교수님들과 교직원들 그리고 재단의 안호상 박사님과 이희순 이사님 그리고 서정희 박사님께 충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우리대학은 개교이래 모든 구성원들이 꾸준히 노력한 결과 어느 정도의 질적·양적인 향상을 가져왔다고 하지만,그래도 아쉬움이 있었다.

1991년 초는 재단 이사장을 비롯한 학장이 새로 출범하면서 새로운 시기를 맞기 시작하였다.

이제 1991년 초부터 이루어진 학교의 변화·발전 모습을 항목별로 들춰보도록 하자.

이러한 구상은 서정희 이사장이 3월부터 학교 운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그 해 9월에 자신의 계획을 「한성대 소식」 제10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다음은 그 전문이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요즈음 같이 그 변화의 속도와 양상이 급격하고 획기적인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의 공통된 관심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시대에 또한 역사에 순응해서 낙오자가 안되나 하는 것일 것입니다.

먼 후일에나 이루어질까 했던 독일의 재통일은 이미 지난 일이 되었고 남북한의 유엔가입도 기정 사실화된 반면에 여태까지 그래왔던 소련의 권력이 동 (쿠데타)은 어이없이 삼일만에 실패하였습니다 참으로 우리들 같은 시민들은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묶음으로 현실화하고 있는 것이지요.

악몽 같았던 지난해 10월 이후의 한성대학의 수난기의 재단이사장의 직무를 대행해 오면서 자나깨나 늘 제 머리에 맴돌고 있는 것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제가 한성대학과 인연을 맺은 것은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73년 봄이었습니다. 그때 지금은 고인이 되신 우촌 선생께서 막 이 대학을 설립하시고 대학초창기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저에게 자세히 말씀해 주시고 앞으로도 대학은 네가 잘 도와주어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하셨습니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 전부터 제가 한성학원 재단 이사직을 맡아오긴 하였습니다만, 훌륭하신 역대 학장님과 교수님들이

학교를 잘 이끌어 주셔 왔기 때문에 저는 1년에 두 세 번 재단이사회에 참여하는 일이 고작이었고 최근 몇 년 동안 신임교수 임용후보자의 면접에 참여 하였을 뿐입니다.

지난해 …월초 한성대학의 부정입학사건이 터져서 갑자기 재단의 수습대표로 매일같이 한성대학으로,여러 변호사 사무실로 뛰어다닐 때에는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일들도 많이 겪었었습니다만 그나마 금년 초에 사태수습이 어느 정도 된 것은 오직 하나님과 한성대학의 학생,교직원들을 비롯한 각계의 따뜻한 이해와 협조의 덕분이 아닌가 생각되고 아직은 이 대학이 그 명운을 다한 것이 아니고 앞으로 더 크게 성장해야 할 것이라는 소명을 느끼게까지 되었습니다.

학생 여러분,그리고 교직원 여러분,그러면 우리 다같이 한성대학의 발전을 위하여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지난 1학기 동안 대학에서 벌렸던 여러 가지 사업들 속에 제 나름대로 생각해온 뜻이 숨어 있습니다.첫 번째로 제가 느낀 것은 대학의 환경이 좀더 공부하고 연구하는 분위기가 되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아무리 음식이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그 음식을 담을 그릇이나 밥상이 지저분해서야 음식 맛볼 기분이 나지 않겠지요. 그래

서 대학 구내 여러 곳의 환경개선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두 번째로는 교육의 주요수단인 강의 내용을 좀더 알차게 하기 위해서는 강사수를 대폭 줄이고 대신 전임교수의 수가 대폭 증원이 되어야겠다고 느낌 것입니다. 아무리 옆집 아주머니가 열심히 도와준다고 하더라고 자기 어머니의 정성에 미치겠습니까. 그래서 약 20명의 교수 증원작업을 했습니다만 그중 17명만 충원하고 나머지는 내년에 다시 추가 공채하기로 하였습니다. 앞으로도 각 분야 교수 충원작업은 계속하겠습니다.

세 번째로 학생들도 요구해오고 있습니다만 장기발전계획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각 부서는 부서대로 또 대학전체로서는 대학전반에 대한 중·장기발진계획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연초부터 각 학과,각 부서별 발전계획작성을 부탁드려왔고 대학전체로는 몇 개의 연구위원회를 구성,가능하면 대학의 모든 교수님들이 참여하여 공동협력으로 발전계획을 연구토록 부탁드렀습니다. 연말에 이들 연구가 완료되면 이를 책자로 하여 여러분들이 모두 보실 수 있도록 할 것이며 이들을 기초로 하여 대학발전계획을 계속 수정 보완해 나갈 작정입니다.

그러나 학생 여러분,그리고 교직원 여러분,앞으로 정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지금까지 제나름대로의 대학발전에 대한 소신과 그 실행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만 이것만 가지면 되겠습니까. 저의 짧은 생각에는 우선 앞서

씀드렸던 외형적인 것 한두 가지입니다.

두 번째는 첫 번째와 같은 맥락입니다만 상호 신뢰의 기풍입니다. 교직원들은 학생들을 귀찮은 일과성 손님이 아니고 영원히 책임져야할 자기 자식과 같이 생각하고 보살펴야 한다는 마음으로, 학생들은 교직원들을 자기들 등록금이나 축내고 있는 기생충이 아니고 자기들을 위하여 또 대학발전을 위하여 봉사하고 있는 자랑스런 한성의 어른들로 예우할 때, 앞서 말씀드린 모든 외형적 발전도 이루어질 수 있고 이렇게 되어야만 우리대학의 진정한 발전도 이룩될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대학에 시급히 요구되는 것이 증과·증원을 통한 종합대학으로의 승격 이라는 것을 제 자신이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에 앞서 우리들의 뼈를 깎는 자성과 회개의 노력들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러한 노력들이 이루어 지면 우리들의 꿈도 이루어지리라 확신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추가한다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것입니다.

한성의 학생,그리고 교직원 여러분,우리들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합심하여 기도합시다. 그리고 앞으로 과연 어떻게 할까를 다함께 진지하게 생각해 봅

시다.

제2절 교수확충

1. 대폭적인 교수 충원

대학의 발전은 양적인 발전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질적인 수준의 향상이 토대가 되는 것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대학인의 인적구성에서 우수한 교수의 확보와 우수한 학생의 유치는 교육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첩경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학의 자체적 노력으로 가능한 것은 우수한 교수를 최대한으로 확보하여 교수 대 학생 비율을 가능한 한 낮추는 일이다.

1991년 9월부터 1992년 8월말 현재까지 확보한 교수는 23명으로서, 종전 총 교수 숫자의 절반 가량이나 되었다.

특히 전임교수 초빙은 종래의 전통적인 방법을 과감히 개선하여 공

개채용제도를 정착시키고 이에 따라 국내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우수교수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1년 사이에 초빙한 교수는 23명으로서 특수 예술분야를 제외한 전원이 국내외 우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먼저 공개채용을 위한 교수 임용후보자 선정절차를 살펴보고, 1년 동안 초빙한 교수들의 약력을 본다.

(1) 전임교수 중원

① 전임교수 임용후보자 선정 절치

교수충원 계획서 제출요구 - 각 학과

I

각 학과 교수충원 계획 취합 보고

I

교수초빙 계획 보고

|

교수초빙 공고

|

교수조빙 서류접수 마감

② 신규 교원 임용 심사절차 및 평가기준 마련

1차 심사 : 학위 미취득자 제외

2차 심사 : 학과교수전원이 각자±5배 추천

3차 심사 : 인사위원회에서 ±3배 추천

면접대상자 면접 일정 통보 - 등기 속달 및 전화 통지 면접실시 (학과별 시차별)

인사위원회 - 최종 임용 동의

③ 신규교수 확보 현황(1991. 8. 15. ~1992. 8. 15.)

학과 성명 최종 줄신교 학위 부임일자

행정 정주택 미국 아메리칸대학 박사 1991. 8. 15.

문헌정보 조인숙 성균관대 " "

의상 신인숙 프랑스 국립파리7대학 " "

산업 디자인 김지현 미국 이스턴미시간대 석사 "

전산 통계 차운옥 성균관대 박사 "

산업공학 흥윤기 미국 사우스캘리포니아대 " "

의류직물 전경숙 미국 메릴랜드대 " "

교양 강욱 미국 콜럼비아대 " 1991. 2. 15.

경영 최명규 미국오클라호마 주립대 " "

경영 홍용식 미국 미시간 주립대 " "

무역 최옥근 미국 뉴욕대 " "

경제 이우관 미국 노스웨스턴대 " "

무용 박인숙 미국 뉴욕대 " "

미술 문범 서울대 석사 "

산업 디자인 김응화 일본 多摩미술대 " "

산업공학 위남숙 미국 버클리대 박사 "

사학 윤혜영 서울대 " 1992. 8. 15.

무역 유병호 미국 죠지아대 " "

행정 이창원 미국 뉴욕 주립대 " "

미수 이인현 일본 동경미술대 " "

산업 디자인 박진배 미국prat Institutein " "

전산통계 엄종석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 "

산업공학 박준영 미국 미네소타대 " "

(2) 객원교수 초빙

현대의 사회는 지적인 지식과 아울러 사회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역군을 길러내기를 각 대학에 바라고 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산학협동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지적해 주듯이 대학도 이제는 지식교육으로서만 만족하고 주저앉을 수 없는 시대라는 말이다. 특히 전문대학원의 경우는 이를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우리대학에서는 이러한 점에 착안하여 강의실에서의 이론은 물론 사회 각계 각층에서 뿌리박은 전문가를 객원교수로 초빙하여 교육의 내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들 객원들은 각 대학원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현장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특강을 담당하고 있다. 물론 이들 객원교수뿐만 아니라 우리대학에서는 사회 전반에 걸친 전문가를 초빙해 특강을 실시함으로써 실 제적으로 이론 연구에 뒷받침하도록 보완적인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 객원교수 규정과,이규정에 의하여 초빙한 객원교수의 간단한 약력을 비롯하여 이제까지 실시했던 특강 내역을 살펴보기로 한다.

한편 객원교수 뿐만 아니라 명예교수와 대우전임교수 제도를 제정하여 지속적 학문 연구의 향상을 도모하고 있다.

2. 대학발전 연구위원회 발족

우리대학은 1991학년도에 접어들면서 여러 분야에 걸친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 중에는 경제적인 목적을 지닌 것도 있고,교육의 내실을 기하기 위한, 또 교내 공간 시설을 충분히 활용하기 위한 목적에서 출발한 위원회도 있다. 이제 각각의 위원회 설립의 배경과 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한다.

(1) 한성대학 발전기금 조성·운영위원회

사립대학의 재정난 문제는 비단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각 신문지상을 통해 기회 있을 때마다 반복되는 얘기이며,각 대학의 재단 관계자나 총·학장회의에서도 번번이 나오고 있는 것이 우리 나라 사학의 실정인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한 몇몇 대학에서는 동문을 비롯한 독지가들에게 눈물어린 호소로써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여,개중에는 어느 정도 목표를 달성한 사례도 있다. 우리 한성대학도 이 점에 착안하여 본 위원회를 구성하게 된 것이다.

위원회의 구성은 기획실에서 시작하였다. 1991년 2월 27일 첫 번째 준비 모임에서는 우선 이 위원회의 설립 취지가 나왔고 위원이 결정

되었다. 위원장에는 학장이, 위원에는 교무처장,기획 살장,대학원장이 당연직으로 참여하고,그 밖에 이석주·이종수·정후수 교수 (간사)가 위원으로 결정되었다.

그 후 몇 차례에 걸친 회의 결과 4월 24일 최종안이 마련되었다. 여기서 결정된 사항을 보면 우선 본 위원회의 설립취지를 알리는 동시에 기금 조정에 참여할 수 있는 실질적 안내문과 기탁 약정서를 학부모를 비롯한 독지가에게 전달하기로 하였다. 다음은 본 위원회의 설립 취지와 사업 내용들이다.

1) 설립취지

우리 한성대학은 1972년에 설립된 이래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교수 충원,교사이전 및 신축,대학원 설치 등 외형적인 성장과 함께 내적인 충실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습니다. 이는 교직원, 학생,학부모,동문을 비롯하여 우리 한성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의 열정 어린 보살핌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전 세계가 놀라고 찬탄해 마지않는 기적적인 고도경제 성장을 이룩해 온 이면에 우리 나라의 문교정책 특히 사립대학에의 국고 지원은 아직도 대학 재정의 1% 수준에 머물고 있어서 이웃나라 일본의 22.4%와는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또한, 미국, 일본 등에서는 국가 뿐 아니라 사회 각계에서의 지원액도 상당 수준(30~40%)이므로 우리나라와 같이 교육비의 대부분을 등록금에만 의존하는 형편에서는 대학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경비를 조달하기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이는 곧 대학에 대한 외부의 적극적인 투자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지식의 장이자 연구의 장이기도 한 오늘의 대학은 날로 그 사명과 영역이 확대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변화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고도의 과학기술시대에 대응하고 준비해야 하는 것이며 또한 급격히 변모하고 있는 인문사회 세계에 대해서도 그 수용능력과 발전능력을 창조적으로 배양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 것입니다. 사실 대학은 이러한 시대사회를 조감하는 장이며 앞장서는 실험적 성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대학이 이러한 시대 사회적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정적 지원이 요청됩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 한성대학은 개척정신으로 비교적 견실하게 발전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금년에 들면서 우리 대학은 설립자인 고 김의형 박사의 창학 정신을 일깨우는 기풍이 일기 시작 했습니다. 박사께서 마련해 놓고 가신 학원의 재산은 생산적인 재정비 운동이 진행되고 있으며 우리의 당면 목표인 아담한 종합 대학에의 꿈도 계획이 수립되는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한성대학의 비약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그 밑받침이 되는 교육시설 확충과 연구 환경조성이 요구되는 바,여러 뜻 있는 분늘과 힘을 합하여 우리들의 공동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한성대학을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와 후진에 대한 성실한 교육은 대학의 사명이며 책임이지만,그 책무를 다하기 위한 내실 있는 교육여건을 만드는 일은 우

리 모두 함께 참여해야 할 공동 과제입니다. 한성대학을 발전시키는 것은 결국 우리 한성대학과 관련된 한사람 한사람의 관심과 사랑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에 우리 한성 대학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분들과 우리 대학을 아끼는 인사들의 격려와 관심 아래 장기적인 학교발전을 추진하기 위하여 ‘한성대학 발전기금 조성·운영회’를 설립하오니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2) 사업 및 안내

① 사업내용

한성대학 발전기금조성·운영위원회 사업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장학금 확충

• 연구 줄판 지원

• 도서관장서 확충

• 학교 시설 보완

• 기타

② 안내 말씀

• 본 위원회의 후원을 위한 귀하의 기탁금에 제한이 있을 수 없으나 편의상 만원 단위로 기탁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기금 조성에 뜻이 있으신 분은 먼저 본 위원회에서 보내드린 ‘한성대학발전기금 기탁 약정서’를 제출하시고 적절한 기간 내에 일시 또는 분할하여 기탁하실 수 있습니다. 이 경우 기탁 약정은 우편 또는 FAX (745-8943) 를 통하거나 전화로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 기탁금은 다음 3개 금융기관의 전국 어느 곳에서나 무통장 입금표를 이용하여 송금하실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031-01-0353-991

(수신 : 위원장)

농업협동조합중앙회 : 029-01-114670

(수신 : 위원장)

서울신탁은행 : 18901-2668401

(수신 : 위원장)• 본 대학에 직접 증여하거나,현금 및 유가증권 이외의 기탁은 본 위원회의 간사를 통해 절차를 밟으시고 영수증을 수령해 주시기 바랍니다.

• 천만원 이상의 기탁자로서 기금의 명칭을 부여하기 원하시는 분은 본 위원회의 사무실로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 특별히 기탁금의 용도를 지정하기 원하시는 분은 약정서 해당 란에 〇표 해주시기 바랍니다.

(2) 대학발전 과제연구위원회

1991년도 신학기에 접어들면서 기획실의 기능이 활성화되었다. 특히 대학의 제반 행정을 보다 합리적이고 전문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대학 발전에 관한 주요과제를 선정하여 전임교수로 하여금 연구하도록

위촉하는 동시에 연구비를 지원해주고,여기서 도출된 연구결과를 토대로 대학행정에 참고하여 수행해 나갈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결정된 과제연구분야와 연구원들은 다음과 같다.

1) 한성대학 건학이념 및 교육목표 정립에 관한 연구

① 연구 목표

. 한성대학의 교육이념 확립

• 한성대학의 교육목적 정립

• 한성대학의 교육목표 정립

② 연구 책임자 : 윤경로 교수

2) 대학시설 공간 사용의 효율성 극대화에 관한 연구

① 연구목표

• 연구실 • 강의실•실습실 공간 이용의 효율성 극대화

• 대학의 한계 시설면적에 적합한 공간 재배치 연구

② 연구 책임자 : 이석주 교수

3) 대학 환경미화 개선에 관한 연구

① 연구 목표

• 캠퍼스 조경미화에 관한 연구

• 캠퍼스 환경개선에 관한 연구

• 대학 고유 이미지 부각

• 대학 휴식공간 조성

② 연구 책임자 : 정종해 교수

4) 대학 행정 및 부속기관 발전에 관한 연구

① 연구 목표

• 각 부서별 사무직원의 소요 판단

• 행정조직 발전 연구

• 행정 전산화 연구

• 각 부속기관 및 연구소 발전 모델 모색

② 연구 책임자 : 강석중 교수

5) 대학 이미지 형상화에 관한 연구

① 연구범위

• 대학고유 로고 제정

• 대학교표 제정에 관한 연구

• 교색 개정에 관한 연구

② 연구 책임자 : 조열 교수

6) 학부·대학원 교과과정 개정에 관한 연구

① 연구 목표

• 신커리큘럼이론 적용, 사회적 수요에 부응하는 교과과정 편성

• 각 분야의 학문발전을 교과과정에 반영

• 전임교수 위주의 교과과정 편성지양

• 동일과목 및 유사과목의 전공간 학과간 통폐합

• 강의시간의 합리적 편성

② 연구 책임자 : 조점환 교수

위와 같은 연구에 의하여 공간배치에 관한 연구가 가장 먼저 완료되어 1991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교수연구실을 비롯한 교내 모든 공간의 재배치가 이루어졌다.

그 후 1992년 2월 14일 동계 교수연수회에서는 각 연구 단위별로 중간 보고를 가졌으며 2개월 뒤에는 연구결과를 묶어 「한성대학교 발전과제 연구종합보고서」 제1집을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총 282 페이지 4X6 배판으로 엮어진 이 보고서는 각 연구단위별로 연구목적을 비롯하여 연구내용이 일목요연하게 드러나 있다.

한편 기획실에서는 이 1차 연구결과를 토대로 미진한 부분에 대해서는 계속적인 연구를, 그리고 새로 필요한 부문에 대해서는 새로운 과제를 선정하여 2차 연구과제를 설정하였으며,연구과제와 책임연구자는 다음과 같았다.

(3) 제2차 대학발전과제연구

1) 대학업무개선에 관한 연구(II). 강석중 (대학행정편람 발간)

2) 대학장기발전 계획에 관한 연구. 박헌영 (대학백서 발간)

- 대학자체평가 및 대학특성화 방안을 중심으로 -

3) 한성대학 20년사 연구. 연정열 (한성대학 20년사 발간)

4) 대학이미지 형상화에 관한 연구(II). 조열

5) 대학시설공간의 효율적 사용에 관한 연구(II). 김대흥

6) 대학 * 대학원 교과과정발전에 관한 연구(II). 조점환(총괄책임자)

① 대학 교과과정 분야 김경배

② 대학원 교과과정 분야 황진수

③ 교양과정 분야 김종섭

(4) 특별위원회

1) 우촌 김의형 박사 추모집 간행위원회

고문 : 안호상

위원장:윤경로

위원 : 김창룡,강원도,김진걸,정후수 교수

2) 한성대학 개교 20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회

위원장:이석주

위원 : 정진식,권오, 조태병 교수

3) 대학홍보 자문위원회

위원장:김원중

위원 : 이상원, 이상한, 문범, 조덕현, 김응화,정병용 교수

3. 부속기관 활성화

(1) 중앙도서관

우리대학 도서관은 1973년에 한성여자대학 도서관으로 개관하였다.

1978년 3월에 한성대학으로 변경됨에 따라 한성대학 중앙도서관으로 개칭하였고,1981년 10월 종합관 준공과 함께 이전하였으며,1984년 8월 현 건물의 신죽 이전과 더불어 지속적인 성장을 하였다. 특히 1988년 3월부터는 완전개가식 체제로 운영해왔다.

도서관의 생명은 장서의 확보와 정보제공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도서관 시설도 이에 따라 신축성 있게 운영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1988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약 4년간의 변천 모습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1) 장서 확보 및 법정 기준률

1988년 4월 (61.403권 : 72%)

1989년 4월 (61.817권 : 75%)

1990년 4월 (68.289권 : 83%)

1991년 4월 (78.057권 : 95%)

1992년 4월 (88.035권 : 100.6%)

2) 연속간행물

1988년 4월 (170종, 100%)

1989년 4월 (180종,109%)

1990년 4월 (218종, 132%)

1991년 4월 (192종,113%)

1992년 4월 (229종,138%)

3) 열람석

1989년 2월 (637석)

1990년 6월 (643석)

1991년 8월 (703석)

1992년 6월 (701석)

4) 기타

1988년 3월 완전 개가식 체제로 운영 (3층 245평)

연속 간행물 자료 독립 (2층 68평)

복사실 운영 (2, 3층)

과제도서실 설치

1990년 2월 사무용 Processor와 목록카드 전용복사기 구입

1991년 8월 사무용 PC 2대 프린터 1대 구입

1992년 2월 도서관 환경 개선

• 금연휴게실 설치

• 흡연 휴게실 설치

• 일반열람실 대형 온풍기 교체

• 신문 열람대를 계단 벽면으로 위치 변경

1992년 8월 최신 에어콘 교체 설치

5) 전산망 구축

도서관이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좋은 시설을 지녔다는 것은 학문 연구를 위한 기본적인 여건은 될 수 있다. 문제는 최종적으로 도서관에 소장된 많은 자료를 어떻게 관리·운영하여 이용자에게 짧은 시간에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이에 본 도서관에서는 정보의 효율적 제공을 위해서는 모든 정보를 전산망으로 엮어야 한다는 점을 감지하고 차근차근 실무작업에 착수하였다. 현재 수서 작업부터 1995년도까지 대출·반납에 이르기까지 연차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전 직원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다음에 전산화 계획을 추진하기 위한 실무책임자였던 김명수 사서 과장의 기고를 전문 이용해 본다.

도서관 전산화를 앞두고

대학이 고도의 지적문화를 보존계승하고 창달 발전시키며,국가가 요구하는 지도적 인재를 양성하고 국가와 사회가 당면한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참여하는 사명이 있다고 할 때, 도서관은 이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진행 중 연구의 기능(학문탐구)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자료, 정보를 평 가하여 체 계직으로 수집 정리하고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신속하게 전하면서 학문발진에 기수가 되는 곳이다.

그러므로 대학도서관의 모든 자료와 시설은 연구하는 학생과 교수들에게 이용되기 위해 존재함은 물론 모든 자료는 내일의 문화와 문명의 창조를 위하여 개방되어야 한다.

나날이 모든 분야에서 사무자동화 및 정보처리 컴퓨터가 이용되어 도서관 내에 수서 목록 검색,대출관리,연속간행물 관리 등 전문적인 시스템도 컴퓨터에 의해 개발되어 가는 실정이다.

최근 10여 년간 각 연구소 대학도서관의 전산화는 거대한 물결처럼 밀려와 현재 여러 대학도서관의 전산화를 지켜보며 아직까지는 총체적인 자료활용 및 이용자 서비스의 많은 문제 해결이 필요함을 인식하면서 머지않아 닥쳐올 도서관들의 Soft-Ware 공동개발,도서관간의 협력체계 Network 형성을 대비하여 가장 기초가 되는 데이터베이스 구축부터 시행하고 있는 본 대학 도서관은 단계적 전산화 방안을 마련하여 추진 중에 있다.

그리하여 1991년 이후 PC 3대와 프린터 전산목록카드 등을 완비하여 그

동안 꾸준히 Database 구죽작업을 진행하여 왔으며 사서들의 기술과 경험을 축적토록 하여 토털시스템 실시에 대비하고 있다. 토털시스템은 수서목록 검색 대출관리 연속간행물 관리와 그에 따른 세부사항을 각 시스템이 개별적이고 독립된 단일 시스템으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 체계적인 정보교환과 동일한 데이터는 중복 입력시키지 않으며 또한 한 파일 내에서 변경사항이 있을 때에는 관련된 다른 파일에서도 자동 변경토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학교 규모나 역사로 보아서 타 대학에 비해 빠른 감이 있지만 대학도서관 장서규모 10만권 이하일 때 전산화시키기에 가장 적합하고 경제적이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자료 입력은 신중한 검토를 통한 입력 원칙에 입각하여 2, 3년 전부터 시 행한다고 한다.

과거에는 주요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작업을 처리하던 컴퓨터가 지능을 필요로 하는 작업에 응용이 되므로 본 도서관도 국립중앙도서관 프로그램(KOLAS)에 의하여 업무를 처리하고 있다. 완전자동화계획은 시간을 늦추더라도 차근차근 예산의 허실 됨이 없이 추진함을 원칙으로 하되 단계별 추진 방안은 1단계 1992년 4월 이후 기증. 구입되는 모든 도서의 수서,편목,목록 부출,등록원부 처리와 동시 자료의 입력이 수반되고 있으며, 2단계로는 곧이어 북카드,북포켓,라벨 등의 장비작업이 자동화되고 3단계로 기존 장서의 입력과 동시에 자료의 검색이 수반되며 연속간행물의 처리와 전자감응장치

설치가 이루어지면 체계적인 정보의 교환이 가능한 토털시스템의 개념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프트웨어의 구성과 흐름을 숙달함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뒤따르게 된다.

이번(1992년 4월 7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도서관정보전산망 구축계획에 따른 사서교육 및 토털프로그램 보급은 본 도서핀· 전산화계획의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도서관 전산화는 각 대학 및 타 도서관,국가전산망에 근접할 수 있는 디딤돌을 마련하는 것으로 본 대학의 빈약한 자료 보완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학의 중요한 역할인 연구의 기능에 보다 신속 정확한 자료 제공에 크게 기여하게 되리라 믿는다.

일부 대학에 교양과목으로 개설된 ‘도서관 이용법’ 강의는 매우 성공적이며 모든 학생들에게 수강시켜야 한다는 제안도 도서관 이용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교수연구실에서부터 도서관 내에 비치될 단말기를 통하여 이용자 개개인이 직접 필요로 하는 Reference-Service 신착 자료 안내, 자료검색 등을 손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학교 및 도서관의 노력은 물론이지만 학생 여러분의 적극직인 이용과 협조가 따라야만 그 시기를 앞당길 것이며 연구하는 대학 발전하는 대학분위기 조성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대학에서 어느 한 계층이 소외되거나 경시된다는 것은 그 대학의 후진성에 기인한 것이며 전문화의 장애 요인이라는 인식 하에 한성인 모두가 독자적인 지위나 역할 등 수준 높은 창조의 힘을 기울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3차(1995)

연속간행물 전자감응장치 기존장서입력 검색 대출/반납

바코드 마그네틱테입부착

국내잡지 국외잡지 국내외학회지 신문

서명 저자명 키워드

2차(1993)

장비 라벨 북포켓 북카드

학부생 대학원 교직원 재단산하기관

1차(1992)

목록부출 편목 원부작성 수서

사무용 기본목록 저자명

열람용 저자명목록 서명목록 분류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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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도서관 전산화 계획

(2) 전자계산소

우리대학 전자계산소(이하 “본 전산소”라 한다)는 우리대학 교육이념의 수행과 정보화 시대의 도래에 따른 교직원,학생들의 연구활동지원 및 실습지원과 행정업무 전산화를 목적으로 1990년 2월 28일 개소 하였다.

우리대학 전자계산소는 미국의 Data General사의 최신형 Computer

인 HV/1500CT System 에 30대의 터미널을 연결하고 각종 Programming 언어와 Software package를 설치하여 학교행정의 전산화와 함께 학생들이 원하는 시간에 실습을 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또한 개인용 PC 사용을 원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제1 PC 실습실(과학관 302호)과 제2 PC 실습실 (과학관 3이호)에 각각 35대의 PC와 각각 40MB씩의 Hard disk를 장착하여 학생들이 원하는 시간에 사용 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있다.

본 진자계산소는 개소이래 우리 대학의 행정 업무 전산화를 최대의 과제로 선정하여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타 대학보다 나은 완벽한 전산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1991년 1학기까지 교무, 학사 관련 업무를 완전 전산화하였고 1차로 학적과에 On-line을 설치하여 학생들이 제증명서를 신청하

면 즉시 발급이 되도록 하였다. 2차로 교무,관리,기획, 경리업무 등을 전산화하여, 교무과에서는 학생 신상이나 성적,수강신청 등 모든 필요한 내용들은 On-line으로 조회할 수 있게 되었으며, 관리과에서는 비품의 이동 상황이나 신규 배치 등을 즉시 처리할 수 있게 되어 불필요한 비품의 구입을 방지하고 필요한 비품만을 적절히 배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예산의 효율적인 편성과 집행을 위하여 예산의 편성 및 지출에 관련된 일년의 작업들을 전산화하여 예산을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직 전산화가 미비된 업무의 종류와 개발일정은 다음과 같다.

• 인사관리개발 및 On-line 1992년 2학기

• 장학,부직관리 1993년 1학기

• 도서관 대출관리 1993년 2학기 이후

끝으로 전산화 추진 계획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교직원, 학 생들을 대상으로 한 특강을 각각 년 2회 정도 실시하여 현대인의 필수지식인 Computer에 대한 이 해를 높일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으며

수요에 따라 System을 적절히 증설해 나갈 예정이다.

1) 전산교육

전자계산소에서는 급증하는 Computer 수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수시로 Computer 기본과정,Database, Spread-Sheet, Word Processor 등의 특강을 학생 및 직원들 대상으로 실시하고 있고 새로운 요구가 발생할 경우 이에 적절히 대응해 나가고 있다.

1992년도 1학기에는 신입생을 대상으로 컴퓨터 기본과정과 Word Processor 과정의 특강을 실시하였다.

2) 부서별 행정전산화

본 전산소 주도로 각 부서별로 부분적인 On-line화가 추진됨에 따라 우리 대학의 행정전산화가 본격 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따라서 각 부서의 업무처리가 신속,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부서별 주요 작업 및 계획 내용을 업무별로 분류하여 살펴보면 다

음과 같다.

① 학적 관리 <학적과〉

1991년 11월부터 재학증명서를 비롯하여 졸업(예정)증명서,재적증명서, 학적부 및 성적증명서 등 학적과 증명업무가 전산화되어 현재 전체졸업 및 재학생들은 모든 증명서를 즉석에서 On-line으로 발급 받을 수 있다.

그 외의 기타 학적 업무는 변동이 발생하는 즉시 처리토록 하여 학적업무의 신속 정확성을 높였다.

② 교과과정 관리 <교무과〉

교무과는 연도별 교과과정표 관리, 교과과목관리,담당교수 배정, 분반 관리,강의실 관리,시간표 작성 등의 업무를 전산 처리한다.

이를 토대로 교원 책임시간 및 초과 강의시간관리 등 많은 교무업무 관련자료를 행정부서가 쉽게 이용할 수 있다.

③ 수강신청 관리 <교무과〉

학생들의 수강신청서를 전산소에서 입력하게 되는데 이에 발생되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수강신청서를 학생 본인이 전산소 실습실 터미널을 이용하여 입력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수강신청 자료를 이용하여 대학 교무과에서는 초과 수강신청자,미등록 수강신 청 자, 학점미 달 수강신 청 자,수강신 청 누락자 등을 전산 관리할 수 있게 된다.

④ 성적 관리 <학적과〉

매 학기 학적과에서 성적표를 교수에게 배부하면 담당교수는 소정 기일 내에 성적을 기입하고 서명 날인하여 학적과에 제출한다.

전산소에서는 담당교수의 성적표를 입력하고 학생은 성적 확인 및 정정 기간 중에 전산소 터미널에서 본인이 직접 성적을 확인하고 이상이 있을 경우 학적과에 이의신청을 하면 소정 절차를 거쳐 수정하게 되며 전산소에서는 영구보관 성적 파일을 만들어 보관한다. 이후

성적 정정은 불가능하다.

⑤ 장학관리 기타 <학생과〉

매 학기 재학생 성적 파일이 완성되면 학과별 성적순 명부를 학생과로 송부하여 장학위원회를 거쳐 장학생이 결정되면 장학생 및 장학금을 입력하여 등록금 고지서 발송 시 이를 반영한다. 또한 학생과 관련된 제반 사항들도 On-line 조회가 가능하다.

⑥ 등록 관리 <경리과〉

전산소에서 재학생 및 복학예정자에 대한 등록금 고지서를 출력하여 경리과에 인계하고 경리과에서는 학생들에게 등록금 고지서를 발송한다. 전산소는 등록예정자 파일을 은행으로 송부하고 등록기간이 끝나면 등록자 파일을 은행으로부터 받아 처리하여 이를 경리과에 통보한다.

미등록자 조회,추가등록, 등록금 고지서 분실로 인한 재발급 등은 경리과 창구에서 처리할 수 있다. 또한 등록사항에의 일자별, 시간별 관리도 가능하다.

⑦ 교직원 인사관리 <교무과, 총무과〉

교직원의 신상자료 및 임용, 승급,논문,보직 등에 관한 데이터베이

스를 구축하여 이를 활용한다. 또한 중·고등학교까지 포함하는 교직원 인사관리 업무를 개발하여 On-line으로 가동할 예정이다.

⑧ 급여 및 회계 관리<경리과〉

급여 업무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연말정산까지 자동 처리되는 급여 전산 System을 구축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는 회계업무까지 On-line화 할 예정이다.

⑨ 병사 및 예비군 관리 <예비군대대〉

전산 입력된 학적자료와 교직원 인사 관리자료에 의거 병무청 보고용 학적보유자 명부를 전산처리하고 있으며 학적 변동 등의 각종 병사 및 예비군 관련자료를 추출하여 업무에 활용한다.

10 예산 관리 <기획과〉

예산 관리 System을 도입하여 배정 예산과 사용내역을 즉석에서 입력 조회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예산 설정에서부터 집행·결산에 이르기까지 효율적인 예산 관리를 하도록 한다.

⑪ 비품 관리 <관리과〉

비품관리 System을 도입하여 비품이 사장되는 것을 막고 비품이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되게 함으로써 경비 절감에 기여하도록 하기 위해 관리과에서 비품의 이동사항, 신규 배치 등을 입력하고 필요한 내용들은 즉시 출력하여 이용한다.

· 1992년 당시까지의 전자계산소 연혁

1990년 1월 6일 MV/15000 System 도입

2월 28 일 전자계산소 개소

3월 제1 PC 실습실 개설

4월 초대 소장 권혁제 교수 취임

9월 2대 소장 최병수 교수 취임

제2 PC 실습실 개설

1991년 5월 제2 PC 실습실 확장

1993년11월 학적과 On-line 가동

1992년 9월 1일 제3대 소장 김대흥 교수 취임

(3) 민족문화연구소

우리대학 부설 민족문화연구소의 윤경로 소장을 비롯한 임민혁 조교,그리고 당시 대학원 석사과정의 정동일씨는 우리 선조들이 사용해왔던 농경 생활 기구를 수집하여 1991년 6월 11일 전시관을 개설하였다.

우리대학 민족문화연구소에서 오래 전부터 계획, 준비해 온 ‘농경생활사 전시관’은 우리 농촌의 어제와 오늘의 모습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각종 농기구와 민속자료로 꾸며졌는데 아직 어느 대학 박물관에서도 시도하지 못한 희귀한 전시관이다.

현재 이 전시관의 소장품은 5백여점,품목으로는 2백여점에 이른다. 이 전시품들은 주로 경기도 일원에서 최근까지 사용되던 농기구들을 수집한 것. 그러나 이들 전시품 중에는 이미 상당수는 우리 농촌에서 찾아보기 어렵거나 머지않아 사라질 것들로, 시대적으로는 고대로부터 쓰여 오던 단순 농기구류로부터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철제 농기구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비록 한국 농경문화 전체를 조망할 만한 규모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으나 오히려 그 동안 향토사 연구분야에서 소외되어 왔던 경기 일원,특히 한수 이북 농촌사회의 지역적 특성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들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4. 홍보활동 강화와 대학 이미지 제고

대학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점은 그 대학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리대학처럼 역사나 규 모가 대규모 대학보다 열세에 있는 경우에는 더욱 간절한 현실이다. 그것은 요즘같이 취업난이 피부로 닿는 재학생들에게 절실하게 필요성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경로를 통해서건 각 대학은 대학 홍보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고, 이와 함께 우리대학도 각종 홍보물 제작에 열의를 띠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나온 제 작물이 「한성 대 소식」이 라는 홍보물이다.

(1) 「한성대 소식」발간

1991년 3월 4일자 제1호를 낸 이「한성대 소식」은 8페이지 4X6배판으로 제작되었다. 기획실에서 발간한 이 흥보지는 학생들이 자치활동으로 제작하는 「한성대학보」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특별히 학생을 주 대상으로 하지 않고 교직원 및 교육부를 비롯한 전국 주요 고등학교는 물론 서울 시내에 있는 중소, 대기업에도 배포함으로써 동시에 여러 가지 목적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는 교내에서 움직이는 각 부서의 활동 모습을 포함하여 교직원의 동정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소식을 접할 수 있으며,각 고등학교의 우수한 졸업생을 유치할 수 있는 계기도 가질 수 있다. 또 많은 기업체에 우리의 활동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졸업생들에게 취업의 관문을 넓힐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해봄직 하였다.

「한성대 소식」은 1992년 당시까지 25호가 나왔으며 1호부터 25호까지 기사의 취재에서 기사 작성, 편집의 모든 과정은 국문학과 정후수 교수가 담당했다. 아래에 첫 호부터 25호까지 주요 내용을 살펴본다.

〈표 5〉한성대 소식지(1 호~24호)

호수 발간일 주요내용 면수

1호 1991. 3. 4. 한성대학 발전기금 조성 및 운영위원회 설립 8

2호 3.18. 도서구입· 기증 홍보용 게시판 설치 8

3호 4. 1. 도서관 전산업무추진. 특별원고 (서울대 조완규 총장) 12

4호 4.15. 학장취임사.

교수해외연수 및 연구년제 규정 8

5호 5. 6. 캠퍼스 미화운동 전개 8

6호 5.20. 한성대학과 낙산주변 8

7호 6.17. 「농경 생활사 전시관」 개관 8

8호 7.22. 캠퍼스 환경미화. 교내공간 배치 상황 28

9호 8.19. 신임교수 초빙. 객원·명예·대우 16

10호 9.16. 신입생 전후기 분할모집. 이사장 기고 8

11호 10. 한성대학의 연구·면학환경(특집. 칼라) 20

12호 11. 4. 92학년도 신입생 모집요강 8

13호 11.18. 축구부->대학축구 전국우승 4

14호 12. 2. 상징탑 건립. 녹다원 개장 8

15호 1992. 1. 1. 객원교수 초빙.

신년사(이사장·학장) 12

16호 2. 3. 캠퍼스 환경 개선 전력 추구 20

17호 2.17. 대학 재정 위기(기고. 이종수 교수) 16

18호 3. 2. 신임교수 소개. 대학발전 연구과제 16

19호 3.23. 객원교수 특강요지.

우촌 김의형박사의 건학정신2호 20

20호 4.20. 제2차 대학발전 연구과제 확립 20

21호 5.11. 우촌전시실 개관 20

22호 6. 1. 대학발전 연구과제 결과 보고(칼라) 24

23호 6.29. 민족문화연구소 특강. 환경개선 내역 20

24호 8.10. 신임교수 소개. 학부모님께 (학부모용 특집 칼라) 32

(2) 홍보자문위원회 구성 운영과 대학 기념품 제작 판매

한편 기획실에서는 각종 흥보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홍보자문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홍보자문위원회는 기획실에서 제작한 안을 놓고 자문에 응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간 제작된 흥보물은 1992년 카렌다를 비롯하여 브로셔로서 주요대학 관계 기관은 물론 서울 시내 고등학교에 배포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와 아울러 대학에서 생활하는 교수· 직원 및 학생들에게 한성대학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각종 생활 필수 기념품을 제작하여 염가로 판매함으로써 학교 사랑하기 운동도 함께 펼치고 있다. 1992년 여름 당시 제작된 기념품과 가격은 아래와 같다.

<표 6> 대학기념품 판매가격 (1992년)

(단위 :원 )

품목 신청수량 가격비교 원가 시중가 교내 판매과 비고

시계 100 10,500 15,000 11,000

액자 50 1,500 3,000 1,600

라이타 100 120 300 250 인쇄 포함가격 =370원

클리퍼 120 500 700 인쇄 포함가격 =717원

동호리컵 100 3,500 백-5,600 사4,500 4,000

스탠머그 100 1,500 2,000

전화카드 500 2,605 2,000 2,000 카드제+원색필름비 + 세액 =2,825원

키홀더 100 1,700 2,000 1,800

메모지 100 1,800 1,900

타올

- 1세트 150 4,000 4,200

- 2세트 150 8,000 8,400

5. 교육환경개선은 교육 내실의 밑거름

우리대학이 개교한지 15년에 접어들면서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면서 교육공간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더구나 과학관을 신축하는 등 공간문제에 많은 신경을 써왔으나,그에 비해 환경 자체에 대해서는 미처 눈길을 돌리지 못했었다. 낙산은 좋은 숲이 우거진 공원이었으나 그대로 방치되었고,실내의 시설물도 크게 손봐야할 부분도 많이 있었다.

그 내용 중 중요한 몇 가지를 소개하고,아울러 현재까지의 모든 공사내역을 요약 정리해 온다.

(1) 실내환경

1) 소강당 보수

학생회관에 자리잡은 소강당이 새 모습으로 변모하여 개관되었다. 무대확장을 비롯하여 천장 텍스가 교체되고 환풍 시설이 설치되었으며,사면의 별과 출입문을 방음처리하고 조명시설을 새로 교체하였다. 그리고 에어컨을 설치하여 냉·난방 장치를 갖추었다.

2) 휴게실(休憩室) 개장

우리대학 우촌관 옥상에 스카이 라운지 형태를 지닌 휴게실 ‘녹다원’이 개장되었다. 이에 따라 교내 외 손님을 맞아 마땅히 찾을만한 곳이 부족하던 우리대학 교직원에게 큰 편리를 안겨 주었다.

50여 평의 규모로 64석을 확보하고 있는 ‘녹다원’은 양식을 주로 하고 차와 와인 종류를 준비하고 있는 고급 휴게실이다. 한편 여기에 ‘주식회사 인켈’의 조석구 사장이 오디오 셋트를 기증하여 클래식 감상도 경할 수 있게 되었다.

3) 우촌전시실

우리대학 우촌관 1층에 자리잡은 ‘우촌전시실’. 당초에는 65평이던

우촌전시실은 1층의 본 전시관 65평과, 2층 소전시관 22평으로 총 87평을 갖게 되었다. 천정은 철재 H빔으로 현대적인 공법으로 설계하였으며, 2층 현관문 옆에는 따로 야외 휴게실을 마련하였다.

1992년 4월 15일 ‘우촌전시실’은 국내 여타 대학의 전시실은 물론 어떤 화랑의 수준에도 뒤떨어지지 않은 공간으로서 한성인 누구도 자랑스럽게 여길만한 것이다. 한편 이 전시관 개관을 기념하기 위하여 우리대학 미술학과 교·강사, 졸업생·재학생들이 마련한 ‘제3의 장’이란 주제의 전시회를 가졌다.

4) 교내 복지홀 및 이용실 개설

여학생들을 위한 학생 ‘복지홀’이 학생회관 1층에 자리잡고 문을 열었다. 기존에 있던 서점이 우촌관 1층으로 옮겨지고, 이 자리에 들어선 복지홀은 미용실과 아울러 화장품 코너가 마련되었다. 특히 미용실과 화장품 코너는 시중보다 월등히 싼 가격으로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

으며, 여학생들을 위한 휴게실을 겸하고 있어서 여학생만의 전용시설이 부족한 상황에서 여학생들로부터 많은 환영을 받았다.

한편 매점 옆에는 이용실이 새롭게 단장되어 남학생들이 저렴하게 이발할 수 있게 되었고,학생식당 옆에는 안경점이 설치되었다.

5) 학생 휴게실에 오디오 세트 설치

학생처에서는 이번 학기 학생회관 구내매점을 겸한 휴게실에 오디오 세트를 설치하였다.

총학생회의 요청을 받아들여 학생처에서 설치한 오디오 셋트는 주로 학생들이 이용하고 있는 휴게실의 분위기를 아늑하고 밝게 꾸민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며,이는 학교 전체 환경을 아름답게 한다는 학교의 방침과도 일치하는 일이다.

6) 체력 단련실 및 샤워실 마련

학생회관 지하에 체력 단련실이 말끔히 정리·보수되었다. 1, 2년까지는 주로 남학생만 이따금 이용되었던 체력 단련실은 학생들의 인식

부족과 관리 소홀로 방치되어 왔으나,금년 여름부터는 보다 훌륭한 시설과 분위 기를 가지 고 활동되게 꾸며 졌다. 곧 남자와 여자의 구분을 두고 각자 취향에 맞는 운동기구를 이용할 수 있으며,체력 단련실 곁에는 남·녀 샤워실을 별도로 만들어 이용에 편리하게 만들었다.

(2) 실외환경

1) 상징탑

학교를 올라오다 보면 한성대학의 이미지를 나타내주는 상징탑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상징탑은 십장생인 거북이를 형상화한 모습으로 대형탑,소형탑과 수위실 3부분을 일체식으로 건립하였는데, 거북이가 지니는 의미 (장수 동물,끈기,신통성,영통성)와 함께 이제는 한성의 상징으로 한성인과 더불어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

① 상징탑의 형태

상징탑은 십장생의 하나인 거북이를 형상화한 모습으로 대형탑, 소형탑과 수위실 3부분을 일체식으로 건립하였음

② 우리대학 상징물 거북이의 의미성

• 생태학적 특성

- 100년 이상의 수명을 가진 장수동물

- 성장기간이 짧다

- 끈기의 상징

• 거북이의 상징성

- 거북이는 상서롭고, 신통성,영통성을 지닌 우주를 대변하는 동물로 여겨져 왔다. 그리고 고대로부터 우리 인간을 구원해 준다는 우화와 실제적인 실화가 있다. 따라서 거북이는 우리대학의 교훈인 ‘진리’와 ‘지선’에 부합되는 상징물임.

③ 상징탑의 규모 및 재질

• 대형팁- 높이가 12m, 소형탑의 높이가 7.2m, 수위실의 높이는

3.7m 임

• 화강암인 황등석을 건식으로 축조하였음.

• 소요 자재 : 황등석 152톤,철근 10톤

2) 낙산 의화정(義化事) 개축

낙산 중턱에 자리잡은 의화정이 말끔히 개축되었다. 원래 이 의화정은 한성학원 설립자 우촌 선생이 40여 년전 학교를 개교하면서 동네 어른들과 담소를 즐기거나 활 쏘는 장소로 활용하던 곳인데 근래에 특별히 돌보는 사람이 없어서 완전히 퇴락되었다.

이번에 개축하게 된 의화정은 원래의 모습과 크기를 그대로 유지하되 지붕의 추녀를 좀더 길게 내리고 약간 치켜올리는 모습을 한다. ‘義化事’이라는 현판은 옛날 것에 다시 색을 입혀 걸었으며 뒷편의 방은 모습을 달리해서 등파고라 (등나무 그늘) 시설을 하였다.

3) 낙산야외공원

우리대학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 뒷편에 6,000평 정도의 낙산(落山)은 공원으로서의 면모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1991년 봄부터 정비작업을 시작하여 1992년 가을에 최근 마무리 지은 이곳은 울창한 숲 속에 잘 다듬어진 산책로와 그 사이 곳곳에 30여 개의 벤치가 마련되어 틈틈이 학생들의 휴식처가 되었다.

4) 대규모 화단 조경 시설

지선관 앞에 자리잡고 있었던 스탠드가 화단 조경공사를 실시함에 따라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이번에 꾸며진 조경은 학생들에게 스탠드라는 딱딱한 분위기에서 화단이라는 신선한 모습으로 선보이게 되었다.

한편, 지선관 앞 분수대가 있는 마당도 새로이 화단으로 모습이 바뀌게 되어 초록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도록 조성하였다.

5) 육각정자 설치낙산 정상에 육각형의 아담한 정자가 마련되었다. 붉은 인조석으로 기둥과 지붕을 얽어매고 그 위에 대나무 차양막을 얹어서 등파고라를 만든 이 정자는 낙산언덕 바위 위에 설치된 휴식처로 벌써부터 많은 학생들이 이용하고 있다. 한편 그 주변에는 잡풀을 솎아내고 잔디를 입혔으며 곳곳에 벤치를 만들어 놓았다.

6) 과학관 진입로 아스팔트 포장

학생회관에서 과학관까지 도로가 마련되면서 포장공사를 끝냈다. 이 공사는 기존의 운동장 스탠드를 전면적으로 바꾸어 조경시설을 설치하고,그 아래에 과학관 진입로를 개설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이다. 이로써 종전에는 운동장을 가로질러야만 과학관으로 갈 수 있었던 것이 이 진입로가 완성됨으로써 운동장을 거치지 않고 곧장 과학관으로 연결될 수 있게 된 것이다.

7) 의화장

경기도 팔당 강변에 위치한 이곳은 설립자 김의형 박사가 사용하던 개인주택을 한성학원에 기증한 건물로서 학생들의 수양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번에 새로 보수하거나 신설된 점을 보면,먼저 2층으로 된 건물 전체에 파손된 부분을 수리하였다. 떨어진 문짝을 새로 만들어 끼우고 방마다 산뜻한 분위기를 창출하도록 꾸며 놓았다.

한번에 2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본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진 의화장은 원래 설립자인 우촌 김의형 박사께서 사용하던 개인 소유의 건물인 것을 한성학원의 가족을 위해서 희사한 것으로서 대학인은 물론 한성 여중·고인에게까지도 개방을 해왔다.

(3) 교육환경 개선 내역

1) 1992학년도 1학기

① 진자계산소 확장 및 실습실 (터미널실) 닥트 공사

② 전시실 확장 (소전시실) 및 내부시설 (조명 및 페인트 코팅)

③ 우촌관 2층 매점 휴게실 설치

④ 복지홀 (구내 미 용실,화장품 코너,안경점)

⑤ 등파이프 설치 (학생회관 - 우촌관 - 진리관 - 과학관 입구)

⑥ 강의실 조명 보강 설치 (우촌관 1,2층, 강의실,대학원 강의실)

⑦ 휴게시설 (우촌관 3층 로비,진리관 4층 입구, 과학관 A동 2층 입구 로비 의자 설치)

⑧ 식수 (느티나무 100그루,진달래,철쭉,목련, 칸나)

⑨ 지선관 계단 및 조경공사

⑩ 건물 바닥 청소 및 복도 도색 작업 (우촌관 1~5층)

2) 1992학년도 하기방학

① 도로공사 및 조경공사

• 공사기간 : 1992년 6월 13일 ~7월 15일

• 공사개요 : 기존 지선관 앞 스탠드를 허물고 폭 7m 길이 80m

의 도로를 신설하였으며, 그 윗쪽으로 높이 5m의 자연석 쌓기와 석간수 식재 및 3m 폭의 잔디를 심어 캠퍼스의 분위기를 일신하였음.

• 진선관 앞 스탠드 제거 및 굴토 공사

- 장비동원 : 포크레인 7개월 20일

- 잔토처리 : 돌 15톤 차량 50차분,흙 15톤 차량 100차분

• 조경공사 (자연석 쌓기 및 석간수 식재 작업)

- 공사재료 : 자연석 440톤,소나무 외 석간수 10종 식재

• 도로포장 : 아스팔트 포장

• 도로변 은행나무 식재 및 인조목 평의자 설치 (은행나무 16주, 평의자 18개)

② 운동장 복토 및 낙산석축 공사

• 공사기간 : 1992년 6월 20일 ~7월 29일

• 공사개요 : 스탠드 돌 제거 및 굴토 작업에서 나온 잔토를 효과적으로 처리하고 낙산 급경사 사태방지를 위하여 운동장 복토와 낙산 좌측 담장쪽 비탈진 부분에 석축작업을 시행길이 90m,높이 3m의 석

축작업을 시행길이 90m,높이 3m의 석축을 쌓으므로 폭 4m의 산책로와 낙산 중앙에서 100m2의 휴식공간이 생겼음.

• 운동장 복토 및 배수로 공사

~ 작업 기간 : 흙 및 돌처 리 포크레인 3년 30일. 덤프트럭 1.5톤 1대 20일. 정지작업 연인원 100명

- 배수로. 공사

- 운동장 옹벽 돌무늬 콘크리트 처리

• 낙산 석죽공사

- 공사기간 : 년 40일

- 공사개요 : 연인원 120명

- 작 업 량 : 350m2

- 공사재료 : 스탠드 제거 견치석 15톤 50차분,흙 15톤 80차분

③ 학생회관지하 개조공사

• 학생회관 지하휴게실 및 학생식당으로 통하는 입구 개통

• 구내 이용실 및 체육 기재실 개축

• 기존 체력단련실 개조 남 여 체력단련실 및 샤워실로 분리

• 휴게실 매점에 기념품 진열장 코너 신설

• 식당주방 닥트 설치 및 실내 개조

④ 강당 보수 작업

• 실내벽,천장,바닥 도색 및 창문 썬팅 작업

⑤ 과학관 스탠드 연장공사 및 락카룸(샤워실 및 탈의실) 신설

• 공사개요 : 기존 스탠드를 25m 연장 그 아래 공간을 활용하여 샤워실 및 탈의실을 만들고 스랜드 전체에 등 파이프를 설치하여 그늘 막을 형성

⑥ 낙산개발

• 휴식공간 100m2에 야외도서실 겸 휴식처가 되도록 원형탁자 12개를 설치

• 육각정 설치

6. 체육을 통한 대외적 이미지 향상

본 항목에서는 이러한 점에 초점을 맞추어 몇 가지 중요한 실적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우리대학의 탁구부는 전국 최고의 수준임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우리대학 탁구부 출신으로서 세계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국가대표선수만 해도 김기택,김완을 비롯하여 1990년 북경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1992년 바르셀로나 올 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홍차옥 등은 바로 좋은 예에 해당된다.

우리대학에 탁구부가 창설된 것은 1976년도부터였다. 그리고 최근까지 계속해서 국내외에서 훌륭한 성적을 거둔 기록을 가지고 있다. 다음에 탁구부의 이 당시까지의 주요 연혁을 살펴보기로 한다.

(1) 탁구부

1976년 3월 3월 여자탁구부 창설

1981년 3월 여자탁구부 해체 남자탁구부 창단

1982년 국무총리기 쟁탈대회 남자대학부 우승

종별선수권 대회 남자대학부 우승

전국체육대회 대학부 우승1983년 제1회 대학선수권대회 남자부 단체,개인, 복식우승

1984년 8월 일본 체육대학 탁구부 방한,우리대학 선수와 합동훈련 (8 일~15일)실시

1985년 1월 (1~15일) 일본체육대학 방문 합동훈련 및 상호교류 협정서 작성,대만방문 친선경기

1985년 7월 전국 종별 선수권 대회 우승

1985년 8월 일본체육대학 우리 대학방문 합동훈련실시

1986년10월 전국체육대회 준우승

1989년10월 제22회 체육부장관기 여대부탁구 단체우승

1992년 5월 제10회 전국춘계대학연맹 3위

1992년 6월 제 38회 전국종별선수권대회 3위

► 졸업생 현황

이상국 (쥬니어 대표 총감독)

김완 (제일 합섬 코치)

김기택 (제일모직 코치)

권오택 (삼성라이온즈)

윤지훈 (대우증권 대리)

박용민 (대우증권 여자 코치)

노윤관 (충북투자금융 감독)

유시흥 (강원대 코치)

황남숙 (탁구클럽 운영)

흥차옥 (한국화장품 소속)

(2) 축구부

우리대학에 축구부가 창설된 것은 불과 6년 전의 일이었다. 당시 학

교에서는,학생들의 단체의식과 애교심을 불러 일으킬만한 사업을 모색하던 중 총학생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축구부를 창설하였다. 축구야 말로 많은 사람이 동시에 관전하며 열성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학생회에서는 학생회 나름대로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왔다. 매년 등록금에 일부를 추가시켜 축구부 후원금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성원에 힘입어 드디어는 1991년도 추계대학 축구 연맹전에서 전국 우승이라는 감격의 순간을 차지했던 것이다. 아울러 축구부에서 배출한 선수 중에서 국가대표까지 길러내게 되었다.

다음에 이 당시까지의 축구부 연혁과 졸업생 활동을 간략히 소개해 본다.

1986년 3월 4일 체육특기생 9명,일반재학생 5명으로 출범

감독 : 정은식

► 역대전적

1989.11 전국축구선수권대회 8강

1991. 4 춘계전국대학축구연맹전 8강

1991.11 추계전국대학축구연맹전 우승

1992. 4 춘계전국대학축구연맹전 8강

국가대표진출 : 우동명 (사학과,4년)

► 졸업생 실업 및 프로 진출

현대프로팀 임채용(무역)

퓨마프로팀 노웅(경영)

제일은행 신양균(무역)

상무 권정근(경제)

철도청 김재훈(경영)

제4편 발전기

제4편 발전기

제1장 종합대학교로 승격,초대 원형갑 총장

제1절 성년을 맞게 된 한성대학교

1. 개교 20주년 기념행사

이제 당당하게 성년의 나이로 성장하게 된 우리대학은 '연구하는 대학', '푸른 미래의 대학'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대내외적으로 명실공히 발전하고 있는 대학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렇게 뜻깊은 개교 20주년을 맞이하여 다채로운 기념행사를 준비하였으며,1992년 10월

24일 소강당에서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이 기념식에는 원형갑 학장 및 한성학원 서정희 이사장을 비롯하여,전 이사장 안호상 박사 등 300여명의 내외 귀빈들이 참석하였다. 이 날 행사에서는 이희순 설립자에 대한 공로패 증정과 장기근속자에 대한 표창이 있었다. 장기근속 10년 표창을 받은 교직원은 이정숙(국문학과)교수,조효진(영문학과)교수, 윤석효(사학과)교수,강병식(사학과)교수, 이동섭(사학과)교수,이용남(문헌정보학과)교수, 최해주(의상학과)교수,공대원(교무과)과장,정대홍(기획과)과장,이정봉(경리과)과장,정철환(학적과)과장, 유재국(교학과)과장,이성민(도서관)주임, 엄재용(관리과),김순매(관리과), 백남한(관리과) 등 총 16명이었다.

이어서 개교 20주년을 기념하여 발간된 「한성대학교 20년사」와 「한성대학교 백서」봉정식과 우리대학의 발전상을 소개하는 홍보슬라이드 「한성은 미래를 향해 뛰고 있습니다」를 방영하여 내외귀빈들과 함께 시사회를 가졌다. 또한 개교 20주년 기념사진전 및 우리대

학 교직원들이 직접 제작한 작품전시회가 우촌전시실에서 전시되어 내외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테이프를 끊었다. 한편 20주년을 기념하는 우리대학 객원교수의 기념식수도 거행되었다.

원형갑 학장의 20주년 기념사는 다음과 같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낙산을 즐기는 학생들이 여기저기 많아지고 있다. 이미 야외강의도 학과에 따라서는 시도하고 있고 골짜기에는 지금 한참 오솔길이 만들어지고 있으니까 내년 봄에는 산책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날 것이다. 낙산마루에서 저 아래 한성의 조용한 모습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2, 3년 전까지도 그 소란했던 상황들이 옛말처럼 느껴진다. 무엇 때문에 그리도 사나웠고 파괴적이어야 했던지 이젠 그런 모양을 찾아보기도 어렵다. 온종일 북소리, 꽹과리 소리, 유리창은 깨어지고 강의실과 복도마다 붉은 혁명군의 뺑기칠,이마들마다 붉은 띠 매고 붉은 깃발 팔랑거리며 화염병과 최루탄 속에 민중을 외쳐대던 확성기들, 그야말로 생각만 해도 악몽 같은 나날이었지만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떠하던 아랑곳없이 새 모습의 의화정이 우뚝 서고 나무그

늘마다 벤치들이 놓아졌으며 앙상했던 스탠드가 웅장하고 아름다운 바위벽으로 바뀌어 졌다. 그 아래 과학관으로 돌아가는 아스팔트 길이 새로 생기고 운동장이 제 모습을 찾았으며 어느 결에 마련된 등나무 아치 길과 더불어 우촌관의 진경이 높은 거북이 상징탑 아래 우아하고 아담한 공원지대를 이루었다. 물론 예술대학생들은 새로 확장 단장된 우촌전시실을 자랑할 것이다. 오늘도 그 휴게실에는 10여명의 학생들이 커피 잔을 들고 대화를 즐기고 있다.올 여름 우리는 중국의 한국인 교수 한 분을 초청하여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강연이 끝나고 도서관과 전산실을 들러보신 그는 최신 컴퓨터시설에 놀라는 표정이었거니와 빈자리 없이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의 정숙한 분위기를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러나 조용히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 밝고 넓은 학생식당과 교직원식당 그리고 샤워장이 갖추어진 남녀학생의 체력단련장을 보고는 입을 닫지 못했다. 그리고 교수들의 심포지움 장소 겸 손님맞이 식당이기도 한 우촌관 옥상의 녹다원으로 점심을 모셨더니 호텔로 착각하겠다고 부러워했다.

이와 같은 우리대학 캠퍼스의 이모저모는 거의 모두가 대학가 소요가 끝나기 전인 90년대부터 대학재단의 성실성으로 이뤄져가고 있는 성과의 일단들이다. 물론 이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10월중의 20돌 기념행

사가 끝나는 대로 우리대학은 4개의 단과대학을 모아 종합대학으로 개편된다. 설립자이신 우촌 김의형 박사의 뜻이 마침내 이뤄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학제간의 발전하고 있는 커리클럼을 어떻게 수용하며 개발해 나가느냐의 문제와 그것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고 개발해 나갈 수 있는 교수님을 어떻게 확보하느냐 라는 어려운 문제들이다. 이미 시작되고 있거니와 여기에는 재단의 열의도 중요하지만 기존 교수 여러분의 사심을 떠난 관심 과 노력 이 있어 야 하는 것 이 다. ‘그러 나’라고 나는 또 한번 부정접속사 로 다짐하고 싶다. 캠퍼스보다 교수보다 중요한 것은 학생들의 학문의지요 공부하는 분위기인 것이다. 우선 시대가 전반적으로 크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면 아니 된다. 자연과학분야만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역시 낡은 고정관념에 안주하고 있을 수가 없게 급속도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주물거리고 있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 흥미진진한 변화세계야 말로 젊음을 불태워 도전해 볼 만하지 않은가?

서정희 이사장의 축사는 다음과 같다.

평소 존경하는 귀빈 여러분과 한성대학, 한성여중고의 교직원 학생 여러분을 모시고 한성대학교 개교 20주년 기념식을 갖게 됨을 무한한 기쁨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대학의 역사로 따진다면 수 백년의 역사를 갖는 대학도 많으므로 개교 20주년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꼭 오래 사는 인생이 보람된 인생이 아니고 길든 짧든 얼마나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인 것같이, 대학의 경우에도 이 대학이 이제 성년을 맞이하였으므로 이 민족과 국가사회를 위하여 앞으로 얼마나 훌륭한 기여를 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일이겠습니다. 이제 성년을 맞은 우리 한성대학교는 앞으로 열심과 성의를 다함으로써 이 민족과 국가사회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 있는 훌륭한 인재들을 많이 길러내도록 더욱더 굳은 결의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직은 여러 가지로 부족하고 미비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만은 우리가 이와 같이 굳은 결심과 좋은 목표를 갖고 열심히만 노력하면 하늘은 스스로 돕고자 하는 우리 한성대학교를 적극 도와주실 것이고,한성대학교는 ‘연구하는 대학’,‘젊고 푸른 미래의 대학’으로서 우리나라의 그 많은 대학 중에서도 우뚝 높게 솟아나는 대학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를 빛내주신 여러 귀빈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한성대학교의 발전을 위해 많은 지도 편달과 격려 있으시기를 부탁드리면서

한성 대학교 개교 20주년 기념사에 갈음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귀빈을 대표해서 김정례 전 보건사회부 장관이 기념 축사를 하였다.

존경하는 서정희 이사장님과 원형갑 학장님, 그리고 여러 교수님과 임직원 여러분!

또한 친애하는 학생 여러분! 오늘 한성대학교의 개교 제20주년 기념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아울러서 일찍이 선견지명을 가지시고 이 학교를 세우신 고 김의형 선생님과 이희순 여사님께서도 깊은 존경의 마음을 보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한성의 오늘이 있기까지 학교의 발전을 위해 온갖 정성과 노고를 아낌없이 기울여 오신 한성의 모든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찬사와 위로를 드리는 바입니다. 옛말에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20년이라는 한성의 연륜은 강산이 두 번 바뀐,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한성이 걸어온 지난 20년을 우리의 인생과 비교한다면 지금 한성이야말로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 그리고 넘치는 패기를 가미하는 인생의 황금기,바로 도약의 청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대학은 지식의 진당이요 학문과 인격도야의 요람으로 인정되어 왔습니다.

또한 비관과 창조적 지성을 가미하는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학은 고도의 지적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여 그것을 국가사회를 위해 활용하도록 요청 받아 왔습니다. 그러므로 대학이야말로 연구와 교육과 봉사 등의 활동을 사명으로 하는 지성인의 공동체임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지난 20년 동안 한성이 배출한 수많은 인재들이 한성의 캠퍼스에서 갈고 닦은 학문적인 지식과 인격을 바탕으로 각계각층에서 훌륭한 활동과 많은 기여를 하셨을 것임을 확신합니다.

존경하는 한성대학 가족여러분! 특히 사랑하는 학생여러분! 저는 이제 그 누구보다 학생여러분에게 간곡한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의 나라 안에서는 여러분 모두가 체험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영역에 걸쳐 극심한 전환기적 갈등을 수없이 겪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라밖에서는 동서냉전의 종식과 함께 새로운 세계질서의 재편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각 나라마다 자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혁명적인 몸부림들을 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나라 안팎의 갈등과 도전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해답은 너무도 간단명료합니다. 첫째도, 둘째도,셋째도 실력입니다. 그것은 개인의 실력,국민과 국가의 실력을 쌓는 길 외에 다른 방도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10년 내지 20년 뒤 여러분이 주역이

될 21세기는 후기산업사회 즉 고도의 두뇌사업인 정보산업이 지배할 것이라는 사실은 오래 전부터 확실하게 예견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장차 현실 담당세력이 되어 떠맡게 될 우리 나라가 다른 나라에 결코 뒤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엄청난 지식과 산업·과학기술 수준의 축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학생 여러분! 지금 우리는 세계가 하나인 지구촌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경쟁자는 세계의 젊은이 모두입니다. 여러분의 고귀한 젊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젊음을 세계와 당당하게 겨룰 수 있는 실력을 길러 나가는 데 송두리째 바쳐주시기를 다시 한번 간곡히 당부 드리는 바입니다. 그리하여 다가오는 21세기에 우리 대한민국을 위대한 조국으로 이끄는 힘이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한 한성의 여러분 안에서 창조되기를 진심으로 성원해 마지 않습니다. 존경하는 한성가족 여러분! 다시 한번 한성대학교 개교 20주년을 축하드리며,한성대학의 무궁한 발전을 축원합니다. 아울러서 여러분의 가정과 건강 위에 신의 가호가 있으시기를 기원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2.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 10주기,추모집「낙산의 삼학송」,「한성대학교 20년사」및「대학백서」발간

한성학원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 10주기를 맞이하여 그분의 건학이념과 학교사랑의 정신을 기리는 뜻으로 추모집 「낙산의 삼학송」을 발간하였다. 추모집은 화보를 포함하여 총 300여 페이지로 구성되었으며 ‘우촌 김의형 박사의 꿈과 의지’라는 부제를 붙여 발간되었다.

1945년 한성여자중·고등학교로 시작했던 한성학원이 1972년 한성여자대학을 설립함으로써 명실공히 중등 및 고등교육기관을 모두 갖춘 한성학원으로 발전시켰으며 우촌 김의형 박사께서는 재단이사장과 한성여자 중·고등학교 교장,한성여자대학 학장직을 맡아 학교발전에 진력하다가 1983년 3월 1일에 별세하였다.

우촌 선생의 10주기를 맞이하여 1993년 3월 1일자로 우리대학이 종합대학교로 승격된 것은 우촌 선생의 숭고한 교육이념을 본받는다는 의미에서 뜻깊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촌 김의형 박사의 건학이념에 따라 설립된 한성대학이 건학 20주년을 맞이하여 그 동안 대학운영에 관련된 사료 및 자료들을 수집하여 「한성대학교 20년사」를 발간하였다. 경영학과 연정열 교수를 연구책임자로 하여 발간된 20년사는 한성여자대학의 인가를 시작으로 한 요람기 (1972~1982),도약기 (1982~1984), 확장이기 (1984~1988) 및 성장기(1988~1992)로 구분하여 편년체로 기술하였으며 연표,약사, 졸업생 현황,재직교수 및 교직원 명단,퇴직교수 및 교직원 명단, 역대 학장명단, 역대 동창회장 명단,10년 근속 표창자 명단 등을 부록에 수록 하였다.

이는 개교 2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발간된 것으로서 20년 동안 우리대학의 발전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우리대학의 운영 현황과 각종 관련 자료들을 계량화하고 평가할 수 있는 「대학백서(1992)」를 발간하였으니 이는 대학운영 전반에

걸친 현황과 교육과정 및 학생활동 등에 관한 통계자료들을 집대성한 것으로써 앞으로의 대학발전계획 수립 등에 필요한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3. 대학발전기금 조성사업 추진

한성대학교에서는 대내외적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하는 교수, 교직원, 학부모 및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대학발전기금을 조성하기로 결정하고 ‘학교발전기금 조성사업’을 추진하였다. 이 사업에 설립자, 서정희 이사장, 이현순 이사, 황문길 국민은행 돈암동 지점장 등을 비롯하여 많은 교수들과 교직원, 학부모,동문들이 대학발전기금 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4. 사회교육원 설립신청서 제출

기획과에서는 1992년 9월 23일 교육부에 사회교육원 설립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이번 사회교육원 설립계획은 사회교육원 설립추진위원회(위원장 이종수 교수)의 심의를 거쳐 5개 교육과정(25개 전공과정, 총정원 1,370명)개설을 목적으로 하였다.

교육과정은

1) 독학에 의한 학위 취득과정(3년 과정)

2) 전자계산 교육과정(1년 과정,2년 과정)

3) 미술·디자인 교육과정(1년 과정)

4) 문학과 언어 및 역사연구과정(6개월 과정)

5) 생활경제 특별과정(6개월 과정)으로 계획된 것이다.

제2절 종합대학교 승격,초대총장 원형갑 박사 취임

1. 종합대학교 승격

그 동안 단과대학으로 운영되어 오던 우리대학이 1993년 3월 1일자로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었다. 이에 따라 대학명칭을 한성대학교로 변경하였으며, 학부로 운영되었던 4개학부가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예술대학, 이공대학의 4개 단과대학으로 변경되었다. 이번 종합대학교로의 승격은 우리대학이 1973년 3월 한성여자대학으로 신설된 이래 20여 년만에 이루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1992년 7월 대학원 석사과정에 경영학과와 행정학과가 신설, 행정대학원에 행정학과가 신설되었 으며,동시에 행정대학원 증원이 이루어졌다. 또한 교육부로부터 전산통계학과와 산업공학과 야간에 각각 40명씩 증과·증원을 받아 1993학년도부터 800명의 입학정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한편, 종합대학교로 승격됨에 따라 1993년 3월 1일자로 학칙이 개정 되었는데 학칙개정 주요 내용은 명칭변경(교명, 기관장명, 단과대학명)

과 1992년도에 변경된 교과과정 등이었다. 명칭변경의 내용은 교명이 ‘한성대학’에서 ‘한성대학교’로 변경되었고, 기관장이 학장에서 총장으로, 단과대학명이 각 학부에서 대학으로 변경된 것이다. 개정된 교과과정의 학칙은 매 학기별 최대 학점 기준이 21학점에서 20학점으로 변경되었으며, 수강신청자가 10인 미만일 때 폐강되는 규정을 일정인원(전공 10인, 교양 20인)미만으로 변경되었다.

2. 초대총장 원형갑 박사 취임

종합대학교로 승격됨과 동시에 초대 한성대학교 총장으로 원형갑 박사가 취임하였다. 원형갑 총장은 1991년 4월 1일 제7대 학장으로 취임하여 2년 동안 학장직을 봉직하였으며, 1993년 3월 1일자로 한성대학이 종합대학교로 승격됨으로써 초대총장으로 취임하게 된 것이다.

제3절 신 임교수요원 초빙 및 강의 평 가제 정착

1. 신임교수요원 초빙

대학발전의 질적 성장을 위해서는 우수한 교수진의 확보와 우수한 학생의 유치가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교수 대학생의 비율을 낮추어 보다 깊이 있는 학문연구의 장을 조성하고자 우수한 교수자원 확보계획이 1991년 9월부터 학교발전 장기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되어왔다. 이러한 계획아래 초빙된 신규임용 교수가 1991년 9월부터 1992년까지 30여명을 넘어섰으며 1993년에 10명,1994년에 18명, 1995년에 16명 등 총 44명의 우수한 교수진이 원형갑 총장의 재임기간동안 임용되었다.

또한 시대적 요구인 산학협동에 발맞추어 대학원에 각계각층의 저

명인사와 전문가를 객원교수로 위촉하여 현장의 경험을 토대로 한 밀도 높은 학문연구의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노력하였다.

· 1993년 3월 1일자 초빙

국어국문 박호영 서울대 박사

경제 강신일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박사

문헌정보 서은경 미국 일리노이즈 대 박사

무용 김주자 미국 뉴욕대 박사과정

의상 김경인 서울대 석사

의상 김용주 미국 캘리포니아대 박사

전산통계 권영미 미국 워싱톤대 박사

산업공학 원형규 미국 트로이 뉴욕대 박사

의류직물 김성복 미국 뉴욕대 박사과정

의류직물 홍성애 미국 캔사스대 박사

· 1994년 3월 1일자 초빙

국어국문 고창수 고려대 박사

영어영문 이병은 미국 오클라호마 주립대 박사

경영 최용식 미국 뉴욕 주립대(버팔로) 박사

경영 민성기 미국 텍사스 주립대(알링톤) 박사

경영 정승환 미국 네브라스카 주립대 박사

무역 김상조 서울대 박사

행정 권해수 서울대 박사

문헌정보 강순애 성균관대 박사

회화과 강관식 한국학 대학원 박사과정

회화과 허은영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석사

산업 디자인 고영란 미국 코넬대 석사

산업 디자인 김미지자 한양대 박사과정

전산통계 이재문 한국과학기술원 박사

전산통계 강승식 서울대 박사

산업공학 이재득 미국 펜실바니아 주립대 박사

컴퓨터공학 황기태 서울대 박사

정보공학 김인철 서울대 박사

산업안전 이남식 한국과학기술대 박사

· 1995년 3월 1일자 초빙국어국문 김동환 서울대 박사

국어국문 신경숙 고려대 박사

영어영문 서영윤 이화여대 박사

영어영문 흥성훈 미국 아리조나대 박사

사학 황혜성 하와이 주립대 박사

무역 최용일 미국 퍼듀대 박사

행정 이태교 한양대 박사

행정 김백유 독일 Freiburg 대 박사

행정 이성우 미국 펜실바니아대 박사

무용 박영애 미국 뉴욕대 박사

의상 정경임 이화여대 박사

산업안전 제무성 미국 UCLA 박사

산업안전 최기흥 미국 버클리대 박사

정보전산학부 이민석 서울대 박사

정보전산학부 김진환 서울대 박사

정보전산학부 정영모 서울대 박사

2. 강의평가제 정착

강의평가제란 한 학기가 끝난 후 각 교수에 대한 교육내용의 질을 학생들이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각 교수가 한 학기 동안 어느 정도의 수준 높은 교육을 학생들에게 심어주었는가를 객관적으로 평가함으로써 교수의 강의내용을 개선하여 보다 나은 교육의 질적 성장을 가져오도록 유도하자는 취지에서 시행하는 것이다.

우리대학에서는 교육 개방을 비롯한 21세기의 무한경쟁 시대에 대비하기 위하여 「대학교육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강의평가제를 추진하여 왔으며 1991년 6월에 국내 최초로 한 학기 동안 대학에서 개설한 모든 교과목을 대상으로 강의평가를 실시하였다.

실시방법은 1991년은 대학당국의 평가(안)으로 시도하였고,1992년에는 교수협의회의(안)으로 실시되었으며 1993년에는 다시 강의평가준비위원회에서 마련한 평가(안)으로 방학동안에 전 재학생을 상대로 실시되었다.

1994년에는 대학의 강의실이 아닌 가정통신을 통해서 년 2회에 걸쳐 실시되었다. 강의평가는 1994년 7월까지 총 5회에 걸쳐 실시되었는데 평가의 결과가 교수들에게 환류(feedback) 됨으로써 강의의 수준을 향상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강의평가에서 조사한 항목은 ①「학습량」,②「강의의 질」,③「교수의 강의준비 정도」, ④「교수강의의 전달정도」, ⑤「학생들의 출석률」등 5가지 분야이다.

3. 객원교수제도 활성화

우리대학에서는 사회 현장의 실무경험이 많은 인사들을 초빙하여 학생들에게 산지식을 전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객원교수 제도를 활성화하여 운영하였다. 대학 내의 이론과 사회현장의 실무를 접촉하고자 하는 쥐지에서 마련된 객원교수제도에 초빙된 인사로는 박찬종(신정당 대표 및 국회의원)을 비롯하여, 이종찬,유인태 국회의원,강경식 전 재무장관, 정연춘 방송교육원 원장, 황교선 한일약품 부회장 등 폭넓은 분야에 걸쳐 있다.

제4절 교과과정 개편 및 입시제도 개선

1. 교과과정 개편

(1) 전공·교양 선택과목 범위 확대

1993학년도 1학기부터 시행될 교과과정 개정원칙과 편성원칙을 정하였다. 당시 교과과정 개편은 ‘학문발전에 맞는 새로운 경향의 교과과목과 정보화 및 개방화 사회에서 미래지향적 교과과정 개편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교양과목에 있어서 과목 수를 대폭 늘리고,교양 선택과목을 5개의 학문영역과 소영역별 과목으로 나누어 학부별 특수성을 감안하여 운 영할 방침을 세웠다. 교양 필수과목에서는 지금까지 운영해 온 교양 필수과목을 축소하고 대부분을 교양 선택과목으로 교체하게 된 것이

다. 또한 교양 필수과목에 전자계산개론을 포함시켜 컴퓨터분야를 폭넓게 다루고자 한 것이다.

전공과목 역시 시대에 맞지 않는 과목은 폐지하고 새로운 교과목으로 대체되며,전공선택과목을 늘리는데 중점을 두었다.

<교과과정 편성원칙〉

구체적인 교과과정 편성원칙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지금까지 18학점에서 21학점까지의 학기 당 이수학점을 20학점으로 조정한다.

2) 교양과목에 포함되었던 기초전공을 전공기초로 변경하여 전공과목에 포함한다.

3) 교양과목을 인문,사회,자연, 과학,예·체능 계열 및 기타 교양에 속하는 과목을 균형 있게 편성하고,교양 필수과목으로는 한국어 의 이해,영어,영어실습(LAB), 체육,전자계산개론으로 조정한다.

4) 지금까지 교양 필수과목인 국사와 현대사회와 윤리,제2외국어를 교양선택으로 조정한다.

5) 교양필수 요구학점인 21학점을 16학점으로 축소한다.

6) 현행 교과과정에서의 전공분야 이수요구학점(기초전공 9, 전공필수 30, 전공선택 27) 66학점을 전공기초 12학점(1 과목 증가),전공필수 24학점 (2과목 축소),전공선택 30학점 (1 과목 증가)으로 조정한다.

7) 4학년의 전공필수과목 개설을 없앤다.

8) 인접학문 학과간의 상호 교과목을 개방하여 전공선택 인정학점으로 인정한다.

<표 7> 교양선택과 학부별 이수학점

학부 영역 인문과학부 사회과학부 예술학부 자연과학부

외국어 영역 1개의 외국어 (I, II) 를 택해 4학점 인문과학부와 동일 인문과학부와 동일 인문과학부와 동일

인문과학영역 영역 I,II,III에서 각1과목 9학점 영역 I, II에서 각 1과목 6학점 인문과학부와 동일 영역 I,II에서 각 1과목 6학점

사회과학영역 영역 I,II에서 각1과목 6학점 영역 I,II,III에서 각1과목 9학점 인문과학부와 동일 인문과학부와 동일

자연과학영역 영역II에서 1과목 3학점 인문과학부와 동일 인문과학부와 동일 영역 I에서 4과목 8학점

교양자유선택 영역 영역 I , II에서 4학점이상 또는 타학문영역에서 4학점이상I인문과학부와 동일 인문과학부와 동일 영역 I,II에서 2학점이상 또는 타학문영역에서 2학점이상

학점 계 26 26 26 26

<표 8> 영역별 교양선택 교과목

외국어영역 학점 인문과학영역 학점 사회과학영역 학점 자연과학영역 학점 교양자유선택영역 학점

독어 I 영역 I 영역 I 영역 I 영역 I

독어 II 철학의 이해 3 사회학개론 3 수학 II 미학개론 2

일어 I 논리와 사고 3 정치학개론 3 수학 II 2 예술과 철학 2

일이 II 2 현대사회와 윤리 3 인간과 교육 3 물리 2 헌대사회와 여성 2

불어 II 헌대시조의 이해 3 심리학개론 3 물리 II 2 동양철학의 이해 2

불어 II 2 화학 2 현대사회와 2

중국어 I 2 잉역 II 영역 11 화학 II 2 대중매체

중국어 II 2 인이와 생활 3 민주행정의이해 3 과학의 역사 2

에스파냐어 I 2 한국고신의 이해 3 경영학입문 3 영역 II 시사영어 I 2

에스파냐어 II 2 문학과 인생 3 경제학개론 3 일반수학 3 생활영어회화 I 1

러시아어 I 2 한국문학과 민속 3 무역학개론 3 물리학입문 3 구기 1

러시아어 II 2 한문 3 화학과문명 3 탁구 1

영역 II 인간생활과 환경 3 배드민턴 I

영역 II I 법과헌대사회 3 생명의 기원과 3

동양문화사의 이해 3 인류학의 이해 3 분질 영역 II

서양문화사의 이해 3 북한정치와 경제 3 영어원서독해 2

한국사 3 사회사상사 3 복식과 사회 2

양 근현대사회의 제문제 3 음악의 이해 2

미술의 이해 2

근대 한국사회와 3 영화의 이해 2

민족주의 연극의 이해 2

무용의 이해 2

시사영어 2

생활영어회화 II

볼링 1

테니스 1

<표 9> 신·구 교과과정 학점 수 대비표

이수학점 개설학점

구분 교양필수 교양선택 진공기초 전공필수 전공선택 일반선택 합계 교양필수 교양선택 전공기초 전공필수 전공선택 전공합계

현행 21 16 9 30 27 37 140 21 52 9 30 57 96

개정안 12 24 30 32 140 16 100 이상 12 24 16/69 96/106

(2) TOEFL 및 특강(실용한문,상식) 신설,졸업자격 영어시험 합격 기준 제시

1994학년도부터 면학분위기 조성을 위하여 재학생 및 신입생을 대상으로 각각 특강이 개설되며,신입생의 경우에는 졸업 전까지 학교에서 주최하는 영어자격시험에 통과하여야 졸업할 수 있는 등 교과과정이 대폭 개정되었다.

곧 1994학년도 신입생부터 토익과 토플시험 실시로 일관된 졸업 영어시험을 치르기로 결정한 것이다. 매 학기마다 전학과의 희망자를 대상으로 토익과 토플시험을 치르도록 하고, 이 시험은 매 학기마다 실시되며 4학년 졸업시까지 학교가 제시한 일정점수를 넘어야 하며,외부에서 실시하는 TOEFL이나 TOEIC 점수로도 대체할 수 있도록 규정을 개정하였다.

한편 이 시험의 합격기준은 총점수의 60%를 취득해야 하며,예술대

학은 50%를 취득하도록 결정하였다.

2. 교육과정 전면 개편

(1) 컴퓨터 교육

현대 교육의 특징이라고 하면 외국어 교육과 컴퓨터에 관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우리대학에서는 컴퓨터 과목을 교양필수로 지정하였다. 이것은 이 분야에 대해서는 전국에서 뒤지지 않는 첨단 지식을 습득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하여 우리대학 컴퓨터실에는 국내 최첨단 기종을 갖추고 학생들이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도록 시설을 대폭 확충하였다.

(2) 외국어 교육

외국어 교육은 사회현장에서 요구하는 실용분야이다. 현장감 있는 외국어교육을 실시하여 언제든지 현지인과 대화를 할 수 있는 수준으

로 교육시킬 계획이다. 이를 위해 전학과에 걸쳐 토플이나 토익 점수를 필수적으로 얻도록 하고 이를 취득하지 못하였을 경우 졸업을 할 수 없도록 규정을 개정하였다.

3. 증원 및 학과 신설

(1) 1993학년도 신입생 80명 증원

1993학년도 신입생 모집에는 전년도에 비하여 80명이 증원되어 입학정원 총 800명을 모집할 수 있게 되었다. 증원이 허가된 학과는 전산통계학과 야간 40명과 산업공학과 야간 40명이며 후기전형으로 확정 되었다.

한편,전년도까지 는 후기전형 이 었던 미 술학과가 1993학년도부터는

전기전형으로 신입생을 선발하게 되었으며, 전기전형에서는 320명(40%), 후기전형에서는 480명(60%)을 모집하게 되었다.

(2) 1994학년도 이공계 4개학과 신설

1994학년도 학과의 신설이 인가되었다. 이는 그간 계속적인 교수채용과 시설확보 등을 통해 미래지향의 대학발전에 힘써온 결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대학은 대학 및 대학원 정원조정을 위하여 각 분야별 연구팀을 구성,교내외의 여건과 미래의 산업사회에 걸 맞는 학교발전 방향을 면밀히 분석, 신청서를 교육부에 제출한 바 있다. 우리대학은 앞으로도 계속적인 투자와 기자재 및 시설확보 등을 통해 명실공히 미래를 선도하는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연구하는 대학, 미래지향의 한성대학교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것이다. 우리대학은 이번의 학과 신설로 신입생이 총 800명에서 990명으로 늘어나 명실공히 종합대학으로의 발판을 확고하게 굳히게 되었다. 한편, 일반 대학원의 석사과정에는 산업공학과, 의류 직물 학과, 경제학과가 신설되었으며, 경영대학원의 무역학과는 학문적인 전문성을 심화하기 위하여 국제경영 학과로 변경하였다.

4. 전국 9개 대학 본고사 실시,우리대학 위상 높여

(1) 1993학년도 전기입시 전국 최고 경쟁률 보여

1993학년도 신입생 전기 입학원서 접수 결과 전기 총 320명 모집에 6,544명이 지원하여 전체 평균 20.5:1 의 경쟁률을 보였는데 전국의 전기모집 대학에서 최고였다. 이는 전년도 경쟁률 148:1보다도 훨씬 높은 것으로서 개교 이후 최고의 경쟁률을 나타낸 것이다. 그 중 가장 높은 경쟁률을 보인 문헌정보학과는 40.6:1로서 매스컴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2) 1994학년도 최초로 본고사 실시

개교 이래 최고의 경쟁률을 보인 1994학년도 입시는 본고사를 치루게 되는 전국 9개 대학 중 우리대학이 포함되어 교육계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1994학년도부터 달라지게 된 입시제도는 고교내신제도

와 대학수학능력시험의 문제점을 보완하고 대학의 특성화와 자율성을 위하여 본고사를 실시하고 아울러 전·후기 분할모집에서 전기모집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또한 내신성적과 수학능력시험의 합산이 상위 10% 이내에 드는 학생을 대상으로 모집정원의 30%까지 특차전형을 실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특차전형은 면접을 거쳐 선발하게 되며, 예술대는 특차전형을 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본고사를 위한 시험문제 출제는 경찰관의 경호 아래 진행되었으며 공정하고 합리적인 입시관리를 위하여 입시 공정관리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특차와 본고사로 구분하여 실시한 1994학년도 입시는 예년보다 우수한 전국 상위권 학생들이 대거 지원하여 합격함에 따라 우리대학의 위상을 한층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며 학교발전을 위한 한 단계 도약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본고사 시행은 시종일관 대학 자체의 인적, 물적 자원만으로 독자적으로 수행하였으며 새로 시도한 본고사 준비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우리대학이 가지고 있는

잠재능력을 대내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본고사 시행을 앞두고 1993년 8월에는 예시문제를 각 고교와 입시 전문지에 공개하였고 이를 통하여 우리대학의 출제방향과 형식을 널리 홍보한바 있다.

또한 예술대학에서는 실기고사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제고시키기 위하여 출제부터 채점과정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특히 무용학과에서는 실기시험에 학부모들을 참관시켰으며 실기고사장에 채점 전산시스템을 갖추어 실기고사 성적을 공개하고 부전공 실기,전공기초 실기시험은 2일 전에 공개 리허설을 통해 출제하는 등 타 대학에서 실시하지 않는 제도를 국내 최초로 단행함으로써 학부모와 수험생에게 큰 호응을 얻었으며 매스컴에도 소개되었다.

한편 미술계열 회화과와 산업디자인학과의 실기고사는 입시안내 홍보를 통해 각 종목별로 미리 예시한 실기문제 내에서 출제하였다. 이는 기존의 비밀 출제방식에서 크게 탈피한 것으로써 수험생들이 사전

에 충분한 연습을 거쳐 실기시험에 응시함으로써 우연히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드는 대신에 평소에 얼마나 연습했는가를 측정할 수 있는 공정한 평가가 되어 수험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3) 1995년도 입학시험,영어 200점으로 비중 높여

1995년도 입학시험에서 특차모집의 지원자격과 전형요소별 반영비율, 대학별 고사과목 등이 변경되었다. 특차모집의 지원자격은 대학수학능력시험 계열별 성적 상위 10%이내여야 하며 전형요소별 반영비율은 인문계와 자연계가 내신성적 40%, 수학능력시험이 30%, 대학별 고 가 30%이며 예·체능계는 내신성적 40%, 수학능력시험 30%, 실기고사 30%로 예년에 비해 실기고사 40%에서 30%로 축소된 것이다.

이로써 우리대학의 본고사 비율이 전년에 비하여 20%에서 30%로 상향 조정되었다. 이는 대학입시의 획일적 국가관리에 따른 기능적 문제점들을 보완,고교교육 정상화에 기여할 뿐 아니라,신입생 선발을 비롯한 대학운영의 전반적 자율성을 제고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출발한 것이다.

특히 전년도의 본고사 시행은 우수 신입생 선발과 우리대학의 위상을 대외적으로 높였다는 점에서 학내 외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우리대학은 앞으로도 자율적인 신입생 선발 고사를 시행함으로써 교육 개방화에 대비함은 물론 학교 발전의 기회로 활용할 것이다. 1995학년도 신입생 선발 고사는 다음과 같이 시행되었다.

<표 10> 1995 학년도 신입생 선발고사 요강

과목 수준 분량 시간 배 점

일반적이고 평이한 논제 제시

논술 논리적 사고 표현 창의력 측정 맞춤법에 맞는 문장 1,000자 내외 70 분 100 점

4지 선다형 33 문항 100 점

영어 단답형 10 문항 90 분 60 점

서술형 5 문항 40 점

수학 고등학교 교과서 내에 있는 기본개념과 원리 이해 9~10 문항 100 분 100 점

실기 예·체능계열만 실시

(의상학과는 인문사회계와 동일) 300점

1) 출제 기본방향

우리대학 본고사 출제의 기본 방향은 단순 암기에 의한 지식 평가 보다는 해당 영역의 기본 개념을 이해하고 문제 해결 과정을 서술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특히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범 교과적으로 출제됨으로써 현실적으로 고교교육의 정상적 운영에 오히려 장애를 초래하고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이를 상호 보완할 수 있도록 논술과 주관식 문제 위주로 출제하려는 것이다.

전반적인 출제 수준은 고교 교과 과정을 충실히 이수한 학생이면 대부분 풀 수 있는 평이한 수준으로 별도의 본고사 준비가 없어도 가능하도록 배려하였다. 우리대학의 본고사 특징은 국제화 시대 대비의 일환으로 영어 과목을 공통으로 실시하며 배점도 2배로강화하였다.

2) 본고사 관리 철저

우리대학은 또한 성공적인 입시를 치루기 위하여 본고사 관리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다. 첫째, 철저한 사전 준비를 위하여 출제실무 워크숍,모의고사 출제,모의고사 실시 결과의 분석,문제은행의 구성 등 치밀한 사전준비를 통해 입시관리 능력을 기르고,출제 및 채점의 엄정한 관리를 통해 입시의 공정성을 확보하였다.

둘째, 엄격한 출제 관리를 위하여 각 과목별로 30세트 이상의 문제은행을 구성, 무작위 방법으로 출제 문제를 선정함으로써 출제 위원 개개인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동시에 예·체능계의 시험문제는 사전에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셋째,공정한 채점 관리를 위하여 주관식 답안지의 채점은 5인의 위원이 채점하여,최고점과 최저점을 제외한 나머지 중간 점수들을 합산, 평균하는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채점위원 상호간의 편차로 인하여 발생하는 문제를 해소하였다. 객관식 답안지는 주전산기를 통해 채점한

결과를 PC를 이용하여 재점검함으로써 오차의 가능성을 줄였다.

(4) 1995년도 입시,전국 최고의 경쟁률

평균 24.6 : 1,최고의 경쟁률은 정보전산계열 42 : 11995학년도 본고사는 우리대학 설립이래 최고의 경쟁률을 보인 가운데 치러졌다. 특차를 제외한 980명 모집 정원에 24,120여 명이 지원한 본고사는 모두 13개 학교에 분산하여 영어, 논술,수학 3과목 중 2개 과목을 시행하였다.

(5) 예술대학원 신설

1994년 10월 21일 우리대학에 예술대학원 신설이 인가되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단일 대학원으로 인가된 예술대학원은 석사학위과정 5학기제를 원칙으로 무용, 산업디자인,회화전공으로 구성되었으며,입학정원은 60명이었다. 예술대학원 신입생 모집은 1994학년도 12월부터 실시하였다.

제5절 대학환경개선 및 공간확보

1. 대학 환경 조형물 제작 및 공간확보 계획

(1) 교육환경 개선작업

대학의 면학 분위기 조성을 위하여 1991년부터 교육환경 개선작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1993년 봄철을 맞이하여 학교주변에 나무심기에 주력을 하였으며 그 밖의 환경 개선도 아울러 병행하였다.

1) 낙산 환경 조성,낙산교 완공,오솔길 계단 설치, 진달래와 넝쿨장미 식재

2) 정문 진입로 고압전주 이설

3) 우촌관 6층 복도 테라스 창문 및 어학실습실 이중창 설치

4) 각 건물 옥상 및 지하 물탱크 청소

⑵ 지선관 앞 분수대 설치

지선관 앞 분수대가 1992년 10월 3일 설치되었고 주변 조경공사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정종해(회화과)교수의 설계로 건설된 새로운 분수대는 발전하는 대학을 상징하고 있으며 높이 10~13m의 스텐파이프(지름 20인치) 6개와 1.5~2.3m 높이의 스텐과이프 24개로 구성되었으며 주변에 지름 7m, 원형둘레 20m의 인조바위도 동시에 설치되었다.또한 낙산 오솔길 계단 설치작업 및 학생회관 뒤 낙산계단공사도 진행되 었다.

(3) 우촌관 계단광장에 이념 탑 건립

우촌관 계단광장에 예술대학 회화과 문범 교수가 제작한 새로운 조형물이 설치되었다. ‘세계-나무’라고 이름이 붙여진 이 조형물은 하늘이 투영 반사되는 아메바 형상 위에 세계를 상징하는 지구의가 올려져 있다. 아울러 이 조형물을 떠받치는 기둥은 여섯 개의 기둥으로서 이 여섯 개는 우리대학 상징물인 거북의 등을 상징하고 죽 뻗어 오른

기둥은 나무와 그를 둘러싼 수풀을 나타낸다.

(4) 새로운 한성의 상징,낙산에 ‘남문’ 건립

우리대학 낙산 정상에 새로운 조형물을 겸한 문이 건립하였다. 높이12m, 폭 15m의 웅장한 규모로 짜여진 이 문은 우리대학의 상징물인 거북이 형상에 새로운 조형미를 가미하여 제작된 상징물로서 스테인리스 재질을 사용하였다.

우리대학 산업디자인학과 고영란 교수의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이 낙산 남문은 우선 그 열고 닫는 형태부터가 색다르다. 대개 문이라고 하면 열었을 때 가운데가 열리는 것이 상식이지만 이 문은 열었을 때에는 오히려 닫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문을 열 때에는 가운데로 모이고 닫았을 때에 옆으로 퍼지는 모양이다. 이 문의 형태는 중앙에서 양쪽으로 열고 닫을 수 있는 여닫이 식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문을 열었을 경우에는 그 형태가 기존의 우리대학 상징탑과 같은 모양을

지니게 되어 있다.

‘남문’ 디자인은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동양적인 발상에 의해 구상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남문’은 가운데를 중심으로 하여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담장과 함께, 시원하고 산뜻한 느낌을 줄 수 있도록 디자인 하였다. 담장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경계선을 이루는 조형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를 갖게 하였다. 이 조형물은 담장 안이 들여다보이면서 담장 역할을 하는 ‘문-상징탑’이다,

(5) 대학 ‘이미지 마크’ 제작

이미지 마크는 ‘모든 행사와 각종 인쇄물에 활용, 대학의 이미지를 세계화 속에 부각,대학 구성원의 의식개혁과 일체감 조성’을 목적으로 산업디자인학과(현 미디어디자인학부) 이상원 교수가 제작하였다. 제작된 이미지 마크는 대학의 심벌마크(교표)와 함께 모든 행사와 각종 인쇄물에 공식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그 제작 배경을 살펴보면 대학의 이미지를 세계화 속에 새롭게 부각시키고자 하는 대외적인 면과 대학 구성원(학생, 교수,교직원, 동문)들의 의식개혁과 일체감을 이루기 위

한 내적인 측면,그리고 대학 이미지를 고양시킬 수 있는 유형의 다양화,즉 너무 복잡하고 경직되어 보이는 기존 심벌 마크만으로는 각종 홍보물 적용에 한계점이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이를 보완한다는 측면에서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제작 과정으로는, 먼저 각 기업이 최근에 도입한 이미지 마크 사례들을 조사 분석한 후, 우리대학의 상징적인 의미가 강한 요소들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보았다. 결국 대학은 인간,교육, 미래사회를 위한 장으로 귀결되어 이를 디자인 컨셉으로 설정 제작하게 되었고 여러 안 중에서 최종안으로 A, B 타입이 선정되었는데 두 안의 성격이 서로 달라 상황에 따라 적절히 활용하기로 하였다.

이미지 마크의 의미는 A 타입의 경우, 학사모(대학 상징)를 단순화 한 마름모형을 바탕으로,지구의 하이라이트 부분을 조형요소로 접목시켜 세계화를 향해 웅비하는 모습을 이미지화 하였고,3개의 선형은 대학의 과거,현재, 미래의 점진적인 발전상을 시각화하였다. B 타입의

경우,대학의 이니셜인 ‘U’ 자를 기본으로 반복 활용하였으며 두 개의 점은 교수, 학생,또는 남녀를 상징하며,마크 전체 분위기는 상호보완 작용· 협동을 나타내는 형으로 국제화를 향해 끊임없이 창조하려는 대학의 정신을 형상화하였다.

색상 활용에 있어서는 A, B 타입 모두 우주와 미래를 나타내는 청색과 한성인의 기상을 상징하는 적색을 기본색으로 하여, 상황에 따라 각기 3종류의 보조색을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활용 방안으로는 A, B 타입 모두 대학의 각종 인쇄물인 신문,잡지광고, 홍보물,선물용품 등에 활용되며, A 타입은 주로 대학의 공식적인 행사, B 타입은 주로 대학축제, 스포츠 행사, 학생들의 활동을 대내외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이벤트성 마크로 활용하고 있다.

당시에 제정한 대학 이미지 마크는 급변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 보다 새롭게 발전하는 여러 기업들이 이미 도입하여 심벌마크와 함께 적절히 활용하고 있는 시점에서 대학에서 정식으로 도입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다. 따라서 이미지 마크의 제정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관리, 그리고 적절한 활용이 먼저 선행되어야 대학 이미지 쇄신에 도움이 될 것이다.

(6) 학생회관,과학관 증축

공간확보 계획에 따라서 학생회관과 과학관 증축에 관한 설계를 1994년 5월에 관할구청에 신청하였다. 계획에 따라 학생회관 4층을 6층으로, 과학관 5층을 6층으로 증축하여 총 3천여 평방미터가 늘어나는 것이다. 증축 후 공간사용 용도는 학생회관 5층은 첨단 시스템을 갖춘 도서관 공간으로,6층은 문헌정보학과 교수연구실로,과학관은 전산통계학과, 산업공학과 증원에 따른 실험실습실 및 강의실,교수연구실로 배치하였으며 1995년 3월말에 완공하였다.

2. 도서관 공간확보 및 정보검색실 신설

우리대학의 중앙도서관은 1개 학년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는 열람공간을 비롯하여, 교육부가 제시한 기준을 초과한 110%에 달하는 장

서율을 확보하였다. 또한 포항공대를 비롯한 국내 유수 기관과 정보협조 체계를 맺음으로써 명실공히 정보사회에 선도하는 대학이 되기 위하여 발돋움하고 있다. 한편 휴게실을 설치하여 학생들에게 휴식공간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1993년 10월 19일 정보검색실을 신설하여 각종 기자재를 갖추고 국내외 도서관을 비롯한 첨단 과학기관에 소장되어 있는 각종 자료를 현장까지 가지 않고 온라인으로 필요한 자료를 검색, 프린터로 자료를 출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정보검색실은 명실공히 정보화 사회로 나가는데 필요한 시설로 활용이 될 것이며 대학의 학문연구에 많은 공헌을 하게 될 것이다.

제6절 대학발전과제 수행 및 학사협의회

1. 1994년도 대학발전과제 및 연구책임자 선정

대학발전과제 연구 제4차 연도를 맞이하여 1994년도에는 6개 과제를 선정하여 연구를 진행토록 하였다. 과제별로 연구책임자가 5인 이상의 공동 연구원을 선임하여 기획과에 신청하도록 하였다.

(1) 대학발전 과제 연구

과제명 연구목적 및 취지 연구책임자

대학 장기발전 계획 연구 1. 대학특성화 방안 및 교육목표 수립

2. 학과 증과·증원 방안 및 계열화 운영에 관한 연구 강신일 조교수(경제학과)

대학시설 공간 사용의 효율성 제고연구 증축·기존 시설 공간의 효율성 증대를 위한 제문제 연구 원형규 교수 (정보공학과)

대학 행정전 산화 발전연구 대학 행정전산화 방안 수립 및 학사 프로그램 개발 홍윤기 조교수 (산업 공학과)

대학교과과정 발전연구 대학 교과과정 연구 (계속) 조점환 교수(교직과)

대학교양 교과과정 연구 국어,영어,한자 등 개성 있는 교양교과 과정 개발 박호영 부교수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교과과정 발 전 연 구 대학원 교과과정 연구 (계속) 김경배 교수(교직과)

(2) 대학 특별위원회 구성

우리대학의 현안 사업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1994년도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위원장에는 우리대학의 중진 교수들을 위촉하고, 위원에는 주임급 이상의 직원 1명을 포함시켜 위원회 운영 및 연구에 효율성을 기하도록 하였다.

〈표 11〉대학 특별위원회 현황

위원회명 설치목적 및 취지 위원장 위원

대학자체종합 평가위원회 1996년 본 대학 종합 평가를 대 비한 사전 자체 평가 및 보완책 수립 이용남 교수(문헌정보학과) 이정숙,최병수 김종섭,권오 김명수

한성학원50년사 편찬위원회 한성학원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학원사 편찬 윤경로 교수(사학과) 연정열,김창룡 정진식, 정후수 강홍빈

대학전산화심의관리위원회 1) 대학 진산체제 통합 운영 연구

2) 대학 전산기기 구입 사전 심의 이종수 교수(교무처장) 권혁제,김대흥 조열,전화숙 조인숙, 김용주 정영만

대학 이미지 형상화 위원회 1) 대학이미지 개발 작업

2) 대학요람 발간 자문

3) 대학연보 발간 자문 A) 대학백서 발간 자문

5) 한성대 소식 발간 자문

6) 대학 브로슈어 발간 자문7) 기타 이상원 조교수(산업 디자인 학과) 조덕현,김지현 문범,박진배 고영란,조승호 후수,윤혜영 조태병,고창수

2. 제주도에서 1995학년도 학사협의회 개최,제2대 총장 선출

1995학년도 우리대학 학사협의회가 2월 16일~18일까지 제주도 서귀포시의 프린스호텔에서 서정희 이사장,원형갑 총장을 비롯한 전임교수,1995학년도 1학기 신임교수, 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번 학사협의회에서는 구성원들 간의 화합과 재충전을 위한 기회와 대학 발전과제 연구결과 보고 및 제2대 총장선출을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다.

(1) 총장 선출

18일 진체 교수회의에서는 제2대 총장선출을 위한 선거가 진행되었다. 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 황진수 교수)의 주관 아래 열린 이 날 선거에서는 국문학과 원형갑 당시 총장과 문헌정보학과 이용남 교수가 총장후보로 등록하였다. 후보자의 소견 발표에 이어 곧바로 무기명 비

밀투표에 들어갔으며 이용남 후보 (문헌정보학과)가 원형갑 후보보다 다수표를 얻어 제2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2) 대학발전과제 연구결과 보고

이번 학사협의회의 중점 사항으로 마련된 ‘대학 발전과제 연구결과 보고’ 에서는 21세기를 향한 우리대학의 발전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구성된 여러 연구 위원회별로 그간 진행된 연구결과를 보고하였다.

이번 보고회에서는 대학 장기 발전계획연구 (연구 책임자 : 강신일 교수),대학 시설 공간 사용의 효율성 제고 연구 (연구책임자 : 원형규 교수),대학행정 전산화 발전 연구 (연구 책임자 : 홍윤기 교수), 대학 교과과정 발전 연구 (연구 책임자 : 정성택 교수), 대학 교양교과 과정 발전 연구 (연구 책임자 : 박호영 교수),대학원 교과과정 발전 연구(연구 책임자 : 김경배 교수) 등 여섯 분야에 걸쳐 밀도있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3) 강의평가 결과보고

대학 강의평가위원회 (연구위원 : 김경배 교수)가 분석해서 보고한 1994학년도 2학기 강의평가 결과에 따르면 16개 평가항목 모두 평점 3이상(5점 만점)으로 나타나 전반적으로 양호한 평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대학별 주·야간,성별,학년별로 다소 편차를 보이기는 했지만 가장 높은 평점을 받은 항목은 ‘강의가 계획대로 진행된 정도’로서 3.69의 평점을 받았다. 강의평가의 핵심 항목이라 할 수 있는 ‘강의에 대한 전반적 만족도’에서는 전체적으로 3.25의 평점을 받았는데,학생들이 생 각하는 강의에 대한 만족도는 ‘강의내용의 전달정도’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분석 결과가 제시되어 주목을 끌었다.

3. 학위수여식 및 입학식

(1) 1992학년도 학위수여식

1992학년도 학위수여식이 1993년 2월 20일 오전 11시 노천극장에서 개최되었다. 총 616명의 학사학위 수여자를 배출한 수여식에서 원형갑 총장은 “언제나 자신감과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사회에서 열심히 생활 해주기 바란다”는 격려사를 하였으며 서정희 이사장은 “교육을 통한 지식의 축적이 이 세상을 이끄는 힘이다”라고 언급하고 앞으로 사회발전을 위하여 노력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 날 학위수여식에서 황은경(미술학과)양이 전체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2) 1993학년도 입학식

1993학년도 신입생 입학식이 이 해 3월 2일 오후 2시 노천극장에서 거행되었다. 총 800명이 입학하게 된 이번 신입생 중 전체 수석입학자

는 무역학과를 지원한 마승립군으로 우촌장학금을 수혜하였다.

(3) 1993학년도 학위수여식

1993학년도 학위수여식이 1994년 2월 19일 오전 11시 노천극장에서 개최되었다. 이 날 학위수여식에서는 총 631명이 학사학위를,9명이 석사학위를 각각 취득하였으며 최고관리자과정을 수료한 14명의 수료자를 배출하였다. 한편 전체 수석졸업은 경영학과의 정미영양이 차지하였다.

(4) 1994학년도 입학식

1994학년도 신학기 개강과 더불어 신입생 입학식이 이 해 3월 2일 오후 2시 학과교수, 재학생 및 학부모가 참석한 가운데 노천극장에서 거행되었다. 전체수석은 정보전산계열 정진호군이 차지하였다. 이 날 입학식에는 본고사와 수학능력고사를 치르고 합격한 990명이 입학하였으며 전년도에 비하여 입학정원수가 190명이 늘어난 것이다.

(5) 1994학년도 학위수여식

1994학년도 학위수여식이 1995년 2월 20일 오후 2시 체육관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학위수여식에는 630명의 학사학위수여와 14명의 석사학위수여가 있었으며 전체 수석졸업자에게 수여하는 우촌상에는 전산통계학과의 이명희양이 수상하였다.

(6) 1995학년도 입학식

1995학년도 신입생 입학식이 개강과 함께 3월 2일 오후 2시 체육관에서 거행되었다. 총 990여명의 신입생과 학부모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입학식에서 원형갑 총장은 “여러분의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학부모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또한 신입생들이 대학에서 고정관념을 깨고 자유롭고 활력적인 대학생활을 보내기 바란다”는 축사가 있었다.

4. 대학 발전기금 조성을 위한 ‘한성회화제’ 개최

대학발전기금 조성을 위한 작품전 ‘한성회화제’가 1994년 6월 2일부터 7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전시회는 우리대학 교수와 동문들이 주체가 되어 작품을 출품하였고, 월간 산학연저널에서 주관하여 여러 기업체에 알선하고 여기서 얻은 수익금은 우리대학의 대학발전 기금 조성으로 사용하게 된다. 이 날 출품된 작품은 30호 내외의 작품 100여 점이며, 전시회 관람객 수는 약 1,000여명이 넘었으며 내외 관람인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다. 이에 앞서 산학연저널 6월호에는 우리대학 회화전에 대한 포커스 기사가 작품사진과 함께 게재되었다.

제2장 도약하는 푸른 대학,제2대 이용남 총장

제1절 도약을 위한 새로운 체제와 교육이념의 정립

1. 이용남 총장 선출과 취임

1996년 2월 16일부터 18일까지 3일긴-,제주도 서귀포시 프린스호텔에서 우리대학 1995학년도 학사협의회를 가졌으며 그 마지막 날 전체 교수회의에서는 제2대 총장후보 선거를 치렀다. 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 황진수 교수)의 주관 아래 열린 이 날 선거에서는 후보자의 정견 발표에 이어 곧바로 무기명 비밀투표에 들어갔다. 이 투표에서 이용남 후보 (문헌정보학과)가 제2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한편 제6대 한성학원 이사장에 서정희 박사를 이어 김옥자 이사장

이 4월 1일자로 취임하였다. 3월말 재단 이사회의 만장일치로 의견이 모아진 가운데 취임한 김옥자 이사장은 지난 몇 년간 학교에 상주하면서 학원의 제반 업무를 수행해온 바 있다. 그리고 서정희 전 이사장은 명예이사장으로서 계속하여 학원발전에 헌신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로써 또 한 번의 도약을 위한 체제를 새롭게 갖추었다.

이용남 총장의 취임식은 5월 15일 우리대학 소강당에서 거행되었고,신임 총장의 취임사는 다음과 같다.

‘조화와 협력의 구조 속에 대학발전 이룩해야’

오늘 본인이 20여 년의 역사를 발판으로 새롭게 웅비하고 있는 한성대학교 제2대 총장으로 취임하게 된 것을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아울러 지난 몇 년 동안 서정희 이사장님을 비롯하여 학교 관계자 여러분이 혼연일체가 되어 쌓아올린 괄목할만한 발전상을 생각할 때 여러모로 부족한 본인이 이 막중한 소임을 다할 수 있을 지 어깨가 무거울 따름입니다.

아시다시피 우리대학은 진리와 지선의 교육이념 아래, 진리를 탐구하고 인격을 도야하며 훌륭한 인재를 양성한다는 교육목표를 세워,그 동안 ‘연구하는 대학,푸른 미래의 대학’을 지향해 오면서 부단히 노력해 온 결과 많은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정치, 경제,문화,과학기술 등 전 분야에 걸쳐 격변의 물결이 소용돌이치고 있으며,따라서 대학사회에도 훨씬 무거운 과제와 책무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변화에 대처하면서 우리대학을 장차 명문사학으로 발전시켜야만 된다는 것이 한성가족에게 부여된 엄숙한 소명이라 믿으며,신임 총장으로 취임하는 저의 소견을 간략히 피력하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대학이 지향하여야 할 궁극적인 발전 전략으로서는 교육의 근본을 튼튼히 하고 내실을 충실히 갖추는데 기본을 두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대학은 아직도 외양 면에서는 규모가 작고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내실도 부실할 수밖에 없다는 패배 의식은 불식시켜야 하겠습니다.

제한된 여건 속에서 조금은 힘들다 하더라도 ‘연구하는 교수, 봉사하는 행 정,공부하는 학생'의 맡은 바 직분을 다함으로써,외형상 규모가 작다는 일반적인 약점을 강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지혜를 모아가야 하겠습니다.

둘째,우리는 대학의 자율능력을 신장시킴으로써 대학의 체질을 강화시켜 나가야 되겠습니다. 지금까지 대학은 정부당국의 통제와 지시에 익숙해지면

서 본의 아니게 온실 속의 화초로 안주해왔습니다. 그러나 교육 개방화와 경쟁의 논리가 지배할 수밖에 없는 앞으로의 냉엄한 현실 속에서 대학은 스스로 외부의 비바람을 이기며 생존해 갈 수 있는 야생 조직의 강인한 체질을 필요로 합니다.

대학이 강인한 체질을 갖추기 위한 제1차적인 과제는 대학 구성원들의 자율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참다운 자율능력은 구성원 각자가 우리 조직의 주인으로서의 책임의식, 그리고 우리대학에 대해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애정을 바탕으로 하여야만 합니다. 그러기에 내부로부터의 강한 자성과 진통을 바탕으로 하여야만 합니다. 내부로부터의 강한 자성과 진통을 거친 후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자율성이야말로 대학이란 조직을 유연하게 하며, 사회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대학의 참다운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요즈음 세계화와 무한경쟁의 시대를 맞이하여, 사회 각계가 커다란 변화에 직면해 있습니다. 대학사회도 변화와 개혁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대비하고 국제 경쟁력을 키우지 않으면 낙오와 퇴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만큼,우리대학도 이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극복할 수 있는 여러 방안을 신중히 마련한 후 실천해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어떠한 분야보다도 교육 분야의 개혁이야말로 시류에 편성하여 허둥대는 식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은 백년대계 라는 말

도 있듯이,대학 교육의 참다운 개혁은 외형적인 제도만을 뒤바꾸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과거의 타성을 과감히 탈피하고자 하는 대학 내부의 의식 개혁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 동안 간과해왔던 교육의 기본을 되찾고 대학 내의 갖가지 부실 요소를 시정하려는 우리들의 능동적인 노력이 곧 개혁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한성가족 여러분의 중지를 모아가며 장· 단기 대응책을 수립해 나가겠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대학의 발전을 위해 본인이 생각하는 몇 가지 기본적인 방향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이러한 과제를 구현시킬 수 있는 조직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올 수 있겠습니까? 정부의 행·재정적 재원을 늘리고,각종 공익재단이나 사회 각계로부터 경제적 도움을 끌어들이는 등의 대외적인 노력도 물론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외부의 지원이 대학의 발전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며,근본적으로는 우리 내부에서 지니고 있는 에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는 메카니즘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한성가족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무한한 에너지를 활성화시키고,이를 대학 공동체의 발전이라는 하나의

초점에 맞추어 발화시키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사회의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구성원들 각자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능력과 다양한 지혜를 ‘조화와 협력’의 과정을 통해 극대화시킬 수 있도 록 분위기를 조성해 나가겠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러한 소망은 결코 몇 사람만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재단과 교직원, 그리고 학생이란 삼위일체의 구조 속에서만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한성가족 여러분의 아낌없는 격려와 협조 그리고 주저 없는 편달을 간곡히 바라면서 취임사에 대하고자 합니다.

2. 교육이념과 교육목표 재정립

우리대학은 1991년「한성대학교 건학이념과 교육목표 정립에 관한 연구(위원장 : 사학과 윤경로 교수)를 통하여 한성대학교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의 창학 정신에 입각한 교육 이념과 교육목표를 새롭게

해석하고 정립하였다. 이후 1994년에는 21세기 개방화 시대에 맞는 새로운 위상과 역할을 반영하여 우리대학의 교육목표를 수정 보완하였다. 이 교육이념과 목표는 이용남 총장 시대를 맞아 본격적으로 구성원들이 나아갈 지표로서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되었다. 재정립된 교육이념과 목표는 다음과 같다.

교육이념(교훈)

진리

지선

교육목적(학칙 제1조)

대한민국의 교육이념과 진리, 지선이라는 본교의 교육이념에 입각하여 국가와 인류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심오한 이론과 광범위하고 치밀한 응용방법을 교수 연구하여 지도적 인격을 도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민주시민양성

민족 자부심 함양

건전한 시민의식 고취

국가인류 번영 기여

교육목표

연구하는 대학, 미래를 준비하는 대학으로서 국가에 이바지하고 나아가 세계화 사회 속에서 인류의 평화와 복지 증진에 힘쓸 수 있는 민주 시민을 양성하는 데 그 목표를 둔다.

진리탐구

진리탐구

창의성 개발

바른 가치관 확립

인격도야

덕성의 함양

건전한 신체 단련

책임, 의무 이행

<그림4> 교육이념과 교육목표

제2절 교육제도의 변화

1. 교과과정 개편 및 학부제 확대 실시

1997년 우리대학 교과과정이 전면 개편되었다. 변화하는 대학의 모습에 따라 ‘최소인정 학점제’라는 전제를 받아들여 새로운 교과과정 대학의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이다.

이 개편에 따르면 졸업에 필요한 학점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총 140학점을 유지하기는 하되,한 학과에 필요한 전공학점은 45학점으로 줄어드는 대신,기타학점은 나머지 학점으로 보충하게 된다.

이에 따라 종래에는 복수전공이 4년 내에 이수하기가 불가능하였지만,이를 실시함으로써 실제적인 복수 전공이 가능하게 되었다. 다원적이고 개방적인 사회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준비의 하나로 학생들은 이제 명실상부한 복수 전공의 기회를 갖게된 것이다. 이 제도

는 신입생은 물론이고 재학생들도 적용을 받게 되었다.

1998년 10월에는 학부제 확대개편으로 모집단위 통폐합을 시행했다. 모집단위 통폐합으로 어문계열, 인문계열, 사회계열로 분류하는 한편,의상학과 및 의류직물학과를 의생활학부로 통합하고 명칭을 의상 디자인 전공,의류패션산업 전공으로 정하였다. 정보전산학부에는 정보시스템공학전공을 신설하고 전산통계학과,정보공학전공을 멀티미디어정보처 리전공,정보통신공학전공으로, 산업 시스템공학부 산업 안전공학전공을 기계시스템공학전공으로 각각 명칭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야간학과 모집 정원의 30%를 주간으로 전환하여 1999학년도 입학정원이 주간 960명 야간 660명이 되었다.

2. 특성화된 대학원

1996년 10월 18일 대학원에 ‘국제통상정보대학원’이 신설 인가되었다. 지난해 국내 유일하게 ‘예술대학원’이 단일 대학원으로 독립 신설

된 이래 ‘국제통상정보대학원’ 역시 국내 최초의 단일 대학원인 것이다. UR, WTO 등의 세계 무역정세의 변화 속에서 국가 간 무역 및 국내 경제 전망과 이에 따른 무역에 관한 전문가를 양성키 위해 국제 통상정보대학원이 큰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신설된 국제통상정보과는 5학기 과정에 총 정원 60여명이다. 이로써 우리대학에는 대학원,경영대학원,행정대학원,예술대학원을 포함하여 5개의 대학원에 20개학과가 설치되었다.

한편 행정대학원에 신설된 부동산학과는 전공에서 승격되었고,복지 행정학과는 사회복지 전문가 양성, 복지행정 전문 관료 재교육의 취지로 신설되었으며,이수시 사회복지사 1급을 획득할 수 있는 이점이 부여되었다.

또한 1997년에는 예술대학원에 패션예술학과를 신설하였다.

이처럼 우리대학 각 대학원이 날로 특성화되고 있다. 각 대학원에서는 타 대학원에 못지 않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이를 더욱 확대하여 국내 학계는 물론 국제적인 학습 기회를 가지며 그 스케일

을 넓혀 나가고 있다.

대학원의 행정적 지원도 확대되고 있으며,학생을 위한 서비스 행정 지원도 여기에 따라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휴게실에는 언제든지 음료와 다과가 마련되어 휴식시간에 활용할 수 있고 원우회실도 마찬가지로 운영되고 있다.

강의는 각 강의실에 비치된 OHP,Slide, Video 등의 기자재가 언제든지 활용되고 있으며, 우리대학의 자랑인 전자정보관을 이용한 강의가 진행되고 있다.

3. 입시제도의 꾸준한 개선

(1) 1996학년도 입시

1994학년도부터 대학별 본고사를 치러온 우리대학은 1996학년도 입시요강을 확정하면서 역시 본고사를 치르기로 하였다. 특히 1996학

년도 입시는 전형요소를 다변화하여 균형 있는 입시를 도모하고 세계화 시대에 대비한 인재를 선발, 육성하기 위한 방향을 설정하였다. 전형일자는 1996년 1월 18일이며, 전기모집 중 ‘다’ 그룹에 속했다.

또한 예·체능계열을 제외한 전 학과에 영어를 필수 과목으로 두었다.

<표 12> 1996학년도 본고사 출제의 기본방향

구분 출제 기본 방향 배점

논술

가. 출제방향 : 대학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과 제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측정함을 원칙으로 한다.

나. 출제유형 : 자료 제시형 700 ~ 800자 기준

다. 시험시간 : 70분 총점 100점 만점

1. 주체,창의성,명료성 : 30점

2. 논리적 전개능력 : 30점

3. 구성능력 : 20점

4. 문장능력 : 20점

영어

가. 출제방향 : 고교 교과과정을 충실히 이수 한 학생이며 풀 수 있는 문 제로 주관식 및 객관식으로 출제한다.

나. 출제유형 : 주관식 - 서술형 7문항,단답형 10문항

객관식 - 4지 선다형 20문항

다. 시험시간 : 90분 총점 200점 만점

1. 주관식 : 140점

2. 객관식 : 60점 (20문항)

수학II

가. 출제방향 : 고교수학의 기본개넘과 원리 이해,수학적 사고력을 필요로 하는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 한다.

나. 출제유형 : 주관식 100%(7~9) 출제. 문제풀이 과정도 평가함

다. 시험시간 : 70분 총점 100점 만점

(문항별 난이도에 따라 각각 문항별 점수를 부여함)

실기고사 실기고사에 관한 내용과 준비물은 별도의 안내 책자를 참고하기 바람

► 본고사 관리의 주안점

① 철저한 사전 준비

출제 실무 워크숍,최근 2년간 본고사 실시 결과의 분석,새로운 문제 은행의 구성 등 치밀한 사전 준비를 통해 입시관리능력을

기르고, 출제 및 채점의 엄정한 관리를 통해 입시의 공정성을 확보한다.

② 엄격한 출제 관리

본고사 줄제는 각 과목별로 30~40세트 이상의 문제은행을 구성, 무작위 방법으로 출제 문제를 선정함으로써 출제 위원 개개인의 영향력을 축소하고,예·체능계의 시험 문제는 사전에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③ 공정한 채점 관리

주관식 답안지의 채점은 3인의 위원이 채점하여 점수들을 합산, 평균하는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채점위원 상호간의 편차로 인하여 발생하는 문제를 해소한다. 객관식 답안지는 주전산기를 통해 채점한 결과를 PC를 이용하여 재점검함으로써 오차의 가능성을 줄인다.

<표 13> 1996학년도 본고사 과목

계열 공통과목 계열별 선택과목

인문 사회계열영어(200점) 논술(100점)

자연계열 영어(200점) 수학(II)(100점)

예체능계열 실기고사(300점)

※ 의상학과는 인문계와 동일

<표 14> 1996학년도 전형요소별 반영 비율

계열 내신성적 수학능력시험 대학별고사 실기고사

인문계 및 자연계 40%(400점) 30%(300점) 30%(300점) -

예체능계 40%(400점) 30%(300점) - 30%(300 점)

위와 같이 확정된 입시 요강의 내용으로 1996학년도를 대비한 입시 설명회를 1995년 10월 27일 오후 3시에 우리대학 소강당에서 가졌다. 당시 입시 설명회에는 수도권 고등학교 입시 담당교사 약 100여명이 참석하였다. 이 설명회에서는 먼저 학교 소개용 슬라이드가 방영된 뒤에 입시 요강 설명과,본고사 과목별 출제 방향에 대한 안내가 있었으

며, 여기에 참가한 진학 지도 교사들의 많은 질문을 받았다. 이 설명회 를 통해 각 고등학교에서 우리대학에 대한 관심도가 꽤 높은 것으로 분석되기도 하였다.

당시 1996학년도 입학정원은 1,180명으로 확정되었다. 경제학과와 행정학과에 야 간이 신설되고 국어국문학과와 영어영문학과, 경영학과, 무역학과,산업디자인학과, 정보전산학부 등이 증원되었다.

1996년도 본고사는 1996년 1월 18일 시행되었는데,당시 경쟁률은 6.2:1 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보였었다.

(2) 1997학년도 입시

1997학년도 신입생 모집 요강은 새로이 시행되는 종합생활기록부에 의한 배정을 전체 성적의 30%를 반영하며 이 중에 영어과목에 한해 적용한다는 원직을 세웠다.

전년도에도 영어성적을 타 교과목 성적보다 2배수로 적용했던 우리대학은 미래 사회의 주역이 될 신입생들의 영어 성적을 중요시 여기고 있다는 점을 대변하기도 하였다. 그 반영 비율은 다음과 같다.

① 인문,자연계열 : 종합생활기록부 30%, 수학능력시험성적 60%,논술고사 10%

② 예·체능계열 : 종합생활기록부 30%, 수학능력시험성적 35%, 실기고사 35%

세부적 반영 비율은 아래와 같다.

<표 15> 1996학년도 종합생활기록부 반영 비율

학년별 반영 비율 영역별 반영 비율

1학년 20% 교과성적 출석성적

2학년 30% 80%

3학년 50%(240점)(60점)

100%(300점) 100%(300점)

<표 16> 1996학년도 종합생활기록부가 없는 자의 반영 방법

1995학년도 이전 고교 졸업자

생활기록부 전학년 전체 교과목 계열 석차 백분율을 종합생활기록부 반영 방법에 따라 점수를 산출함

공업계 고교 2+1 해당자

①교과 성적은 1학년 성적(40%)과 2학년 성적(60%) 의 전체 석차 백분율을 기준으로 반영

고교 졸업 후 5년 이상 경과자

검정고시 출신자의 반영 방법과 95학년도 전 졸업자의 반영 방법 중 본인이 선택함

검정고시 출신자

수힘생의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 계열의 전국 석차 백분율을 기준으로 점수를 산줄함

다음의 해당자는 옆에 검정고시 출신자와 같다

• 외국의 고등학 교과정 이수자

• 일반계 고교 직업과정 위탁생

• 특수 목적 고둥학교 출신자 중 동일계 학과 지원자

종합생활기록부는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적성과 소질을 계발하여 자아를 실현하고, 지성과 인성의 균형을 이룬 전인으로 성장하도록 마련한 것이다. 우리대학은 교육개혁위원회의 이러한 교육의지를 적극 수용하고 또한 고교교육의 정상화를 위하여 종합생활기록부를 1997학년도 입시에 적극 반영,우리대학의 특성에 맞는 새로운 입시체계를 갖추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특히 종합생활기록부 반영 교과목을 영어로 단일 선택함으로써,수험생들의 학업부담을 완화시키는 한편 객관적인 학업능력을 판단할 수 있는 통일된 지표를 갖추어 보다 공정성 있는 입시 체계로 마련하였다.

또한 전국 주요 도시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춘천, 제주도에 원서접수 창구를 개설하였다. 이로써 지방에서도 손쉽게 우리대학 입시원서를 접수할 수 있게 하였다. 수도권 소재 대학교들이 대 국민 서비스 차원에서 실시하는 지역별 공동 접수 운영은 종전의 지방 지원생들에게 커다란 부담을 덜어주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3) 교육부 1998학년도 정원 자율화 대상 대학으로 선정

교육부는 1997년 10월 13일 우리대학의 교수 확보율 등이 교육부 기준율을 초과 달성함에 따라 정원 자율화 대학으로 선정되었다. 이날 교육부는 전국 150개 대학 중 우리대학을 비롯하여 수도권 32개교,

지방 41개교를 정원 자율화 대학으로 선정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대학은 앞으로 정원 조정의 자율권 확대에 따라 교육여건 지표 범위 내에서 정원 규모와 학과의 신설과 증설 등을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대학은 1998학년도에 신입생 390명을 증원하였다. 당시 정원 자율화 대학 선정은 교육여건을 엄격하게 심사한 후 결정한 것이다. 정 부가 제시한 적용지표와 이에 따른 우리대학의 교육여건 현황은 다음 과 같았다.

• 적용지표

- 교수 확보율 : 50% 이상

- 교사 확보율 : 50% 이상

- 학생 1인당 교육비 : 250만원 이상

• 우리대학 교육여건 현황

- 교수 확보율 : 73.4%

- 교사 확보율 : 63.5%- 학생 1인당 교육비 : 291만4천원

제3절 대학 정보화와 세계화 추진

1. 대학 정보화

(1) 전자정보관 건립계획과 개관

1) 전자정보관 건립계획

1996년 5월에 국내 대학에서는 최초로 전자정보관을 개관하였다. 전자정보관을 개관하기까지는 정보화에 대한 우리대학의 남다른 의지와 이에 따른 치밀한 계획이 있었다.

전자정보관 설치의 목적은 첨단 정보통신기기를 이용한 신속한 정보의 제공과 정보화 사회에 대비한 구성원들의 정보체계 적응능력 제고 및 첨단 설비를 통해 구성원들의 자긍심을 고취하는데 있다.

또한 첨단 전자장비를 이용한 학술 정보의 신속한 제공 및 정보화 사회에 대비한 교육프로그램의 제공과 ‘다기능 교육공간’ 확보를 통한 학생들의 자율학습 유도 및 첨단기능을 갖춘 오락, 휴식공간의 제공과 기획행사 둥 각종 유인장치를 통한 이용 극대화를 운영방침으로 수립 하였다.

이러한 전자정보관을 국내 대학 최초로 갖기까지는 그 필요성에 대해 대학구성원간의 공통된 인식과 그 설립을 위한 노력이 있었다.

먼저 1995년 5월 4일 우리대학 중앙도서관 주관으로 전자정보시스템(전자정보관) 구축을 위한 연구발표회가 김옥자 이사장,이용남 총장을 비롯한 관계자가 참석한 가운데 대회의실에서 거행되었다. 이에 앞서 우리대학은 눈부시게 변모되는 정보매체의 발전에 발맞추어 획

기적인 타입으로 도서관 내에 전자정보관을 개설·운영할 계획 하에 그간 추진계획을 마련해온 바 있었다.

이 날 발표 중에는 산업공학과 홍윤기 교수가 미국 남가주대학의 첨단 전자정보관 운영 사례를 비디오를 통해 소개함으로써 참석자에게 큰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이후,증축된 학생회관 5층에 전자정보관(전자 정보시스템)을 설립 할 구체적인 계획이 수립되었다. 막대한 자본이 들어가게 될 전자정보관 설립은 총면적 274평인 학생회관 5층 공간에,중앙도서관에서 방학 중에 공사를 시작,11월에 완료하여 실질적으로 학생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리대학의 전자정보관은 국립중앙도서관의 ‘ 전자도서관’이나 국회도서관의 ‘멀티미디어 자료실’보다 기능과 시설 면에서 훨씬 뛰어난 첨단 설비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전자정보관의 특징, 국내 전자도서관과의 대비,구성과 기능,기술 구성 등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 특징

· 국내 대학 가운데 최초의 정보화 도서관 모형 제시

• 칠판 없는 강의실,원격화상 강의 및 미래지향적 시설

• 세계 유명 전자도서관의 첨단시설 응용

• 소요예산 : 약 20억원

► 국내 전자도서관과 대비

구분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한성대학교

명칭 전자도서관 멀티미디어 자료실 전자정보관

면적 280평 107.5 평 274평

설비 총액 4억원 3억 5천만원 20억 원

► 구성과 기능

실별 구성 기능

전자정보데스크 정보검색 및 정보 서비스

전자정보검색실 국내외 학술정보 데이터 검색. 인터넷 검색

위성통신실 세계 각국의 위성방송 수신

교육매체제작실 교육용 자료 제작을 위한 각종 시실 설치

종합영상음향실 영상 음향을 이용한 강의 및 회의장소로 활용

V.O.D. 및 세미나실 세미나 및 회의 V.O.D. 시설

서버# 및 광파일 제작실 광 이미지 스캔으로 한성대 데이터베이스 구축

도서관 시스템

V.O.D.

전자정보관

INTERNET

광파일 시스템

<그림 5> 전자도서관 기술구성

당시 중앙도서관 관장 이종수 교수는 전자정보관 건립을 앞두고 그 설립취지와 대학구성원의 관심을 부탁하며 1995년 10월 9일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하였다.

· 국내 최초의 미래형 ‘전자정보관’ 건립을 앞두고

국내 최초로 미래형 전자 도서관이 본교에 건립된다. 본교에서는 지난 6월 ‘전자정보관’설립 기본 계획안을 확정하고 금년 연말부터 설치 공사를 추진할 계획이다.

우리대학에서 건립하는「전자정보관」은 문헌 목록을 단순히 전산 입력하거나 문자정보를 디지털 정보로 바꾸는 기존의 도서관 전산화의 차원을 넘는 새로운 개념의 도입을 시도하고 있다. 즉 대학의 도서관은 새로운 유형의 강의실이자 연구실이라는 기 인식에서 출발하여,정보인프라 강화를 통한 국내외 학술정보망의 구축은 물론 미래형의 ‘칠판 없는 강의실’ 환경의 실험적 조성과,아울러 ‘원격 화상 강의 시스템’ 의 시험적 도입도 구상하고 있다.

세계 첨단을 지향하는 뉴욕 대학의 ‘가상 대학’ 개념에 바탕하고,미국의 대학 도서관 가운데 첨단 시설을 갖춘 use의 전자 도서관을 모델로 한 본교의 ‘전자정보관’은 국내에서 가장 앞선 시설을 갖춘 국립중앙도서관의 ‘전자정보관’(1993년 건립)이나 국회도서관의 ‘멀티미디어 자료실’ (1994년 건립) 보다 기능이나 시설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첨단 설비를 갖출 계획이다.

본교 ‘전자정보관’의 설치 목적은 미래형의 다기능 교육공간을 마련함으로

써 다양한 학술정보의 신속한 제공은 물론 정보화 사회에 대비한 구성원들의 정보체계 적응 능력을 제고하는데 있다.

대학의 새로운 심장을 마련하는 이 작업에 한성가족 여러분과 한성대학의 발전을 지켜보는 여러 후원자들의 많은 관심과 후원을 바란다.

2) 전자정보관 개관

드디어 1996년 5월 10일 우리대학 중앙도서관에 자리 잡은 전자정보관이 개관되었다. 삼성전자와 산학협동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뉴욕대학의 ‘가상대학 개념’과 미국 대학도서관 중 첨단 시설을 갖춘 USC 전자 도서관을 모델로 개발한 이 전자정보관은 국내 정보화 사회를 리드하는 한 발 앞선 쾌거로 평가되었다. 약 5년간의 구상과 추진기간을 가진 이번 전자정보관 개관 기념식에는 안호상 전 이사장을 비롯하여 전국의 각 대학 도서관장은 물론 정보를 매개로 하는 분야의 학자들 약 400여 명이 참석하여 우리대학 전자정보관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다.

이종수 도서관장의 경과보고와 함께 시작된 이 날 행사에서는 이용

남 총장의 전자정보관 개관 기념사와 김옥자 이사장의 축사, 감사패 전달 등이 1부로 진행되었다.

2부에서는 개핀- 테이프 컷팅과 전자정보관 시스템 시연으로 인터넷,위성통신실,CD-NET 도서관리시스템,V.O.D. 시스템, 이미지 시스템 구현이 있었다.

아울러 3부에서는 개관을 축하하는 리셉션을 도서관 6층과 7층 로비에서 가졌다.

그 설립 목적과 운영계획을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가) 설립 목적

① 정보 인프라 강화를 통한 신속한 정보의 제공

- 국내외 학술정보망의 구축 강화를 통한 실시간 정보(Real Time Informarion) 제공 체제를 지향.

② 미래형의 ‘칠판없는 강의실’ 모형의 실험적 구축

③ 정보화 시대에 대비한 구성원들의 적응 능력 제고

(나) 운영 계획

① 전문 데이터 베이스 구축

② 우리대학에서 소장한 주요 외국 학술지를 광파일로 스캐닝하여 데이터베이스화 할 예정

③ 현재 우리대학 논문집, 연구소 논문집,한성50년사, 요람,낙산의 삼학송 등이 CD-ROM 데이터베이스로 제작되었음

④ 한성대학교 인터넷 교육 실시 예정

(다) 인터넷 웹사이트 유지 관리, 인터넷 검색 및 교육

① 인터넷 웹사이트 유지 및 관리

② 한성대학교 인터넷 교육 실시 예정

(라) V.O.D.(Video On Demand)

①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한 새로운 시도로 비디오를 통한 교육 실시

② 우리대학 자체적인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할 예정

③ V.O.D.는 V.O.D.전용 S/W와 H/W 등의 장비만 준비되면, 축적할 자료를 디지털로 저장해 두고 이용자와 접속된 PC에서 원하는 자료를 검색할 수 있도록 구성

④ V.O.D.를 위해서 영상 화면의 키워드를 추출하여 색인화하고 키워드 검색으로 자료를 검색하도록 할 예정

(마) 전자정보관 세부 기구

21세기형 대학을 지향하는 전자정보관을 세부 기구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전자정보검색실

카페처럼 밝은 조명과 쾌적한 분위기의 전자정보관에 들어서면 가장 눈에 띄는 곳이 있다. 바로 전자정보검색실이다. 컴퓨터 세대들답게 전자정보관 시설중 학생들의 이용률이 가장 높은 이 곳은 인터넷 국내통신망을 통해 국내외 학술정보를 편리하게 검색할 수 있다.

특히 DIALOG, KINITI-IR, CD-NET을 통해 학술데이터베이스를 자유롭게 검색 및 원문검색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한 예술,언어, 멀티미디어 등 다양한 주제의 CD-ROM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어 학생들의 이용도가 높은 곳이다.

► 위성통신수신실

세계 유수의 국제위성 방송인 CNN, NBC, NHK 1·2, V-Channel, STAR PLUS, STAR SPORTS, 러시아 방송,북경방송 등의 채널을 원하는 대로 선택 시청할 수 있다. 위성방송 뿐 아니라 국내외 비디오 자료를 구비,각종 주제의 영상자료 감상까지 가능하여 생생한 시청각 교육효과를 올리고 있다.

► V.O.D.

전자정보관의 또 다른 자랑인 이곳은 어학, 영화,스포츠,명강의 등 동영상자료를 디지털화하여 저장해놓은 곳이다. 각종 수업에서 다수의 수업 참가자가 동시에 영상을 보거나 혹은 원하는 시간에 다른 영상

을 볼 수 있는 첨단 교육용 시스템이다.

► 교육매체제작실

더욱 효과적인 교육과 학습능률을 위해 만들어진 이 곳은 영상합성 편집시스템, 문자인식시스템, 가상현실 제작시스템, 주파수 변환 VCR 등을 갖추고 있다.

이 장비들을 이용하여 강의에 필요한 자료를 경제적,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고 앞으로는 멀티미디어 교재 또한 효과적으로 만들 수 있도록 하고 있다.

► 종합영상음향실

학술비디오,슬라이드 OHP, 레이저디스크,빔 프로젝트를 통해 다각적인 교육방법을 실행하는 곳이다.

또한 사회교육의 일환으로 인근 중·고등학생들에게 PC통신 및 인

터넷 교육을 실시하였고,사회교육원생들은 인터넷 전자상거래 교육을 받고 있으며,재학생 및 교직원들에게도 인터넷 및 홈페이지 제작과정을 교육하는 등 살아 숨쉬는 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다.

(바) 한성 미래를 향한 첨병 역할을 위한 노력

전자정보관이 우리대학에 최초로 개관된 이후 타 대학에서도 전자도서관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하루만 지나도 기술이 업그레이드되는 현 상황에서 최초라는 명예에만 만족할 수 없다고 당시 전자정보관 관계자는 말했다. 그런 의지의 표현이 1997년 5월 구축된 SLIMA 시스템과 T.R.S 시스템이다.

SLIMA는 기존의 우리대학의 도서관이리 시스템인 LINNET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이용자 중심의 시스템이다. 이전의 LINNET과 다르게 연속간행물 관리시스템이 보강되었고,비디오자료 등의 특수 자료도 검색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그래픽 요소가 많아져서 학생들이 더욱 편리하게 도서 검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기존의 광이미지 시스템을 개선한 T.R.S 시스템은 문자로만 입력이 가능했던 단행본, 논문자료 등을 이미지로 전체 입력하여 마치

책을 보는 것처럼 자료를 화면에서 검색할 수 있다.

전자정보관은 그 외에도 위성통신 시설을 확장할 계획으로 학교 어디서나 위성방송을 볼 수 있도록 준비중이며, 전산 인프라의 완벽한 구축으로 한성의 미래화 의지를 실현하고 있다.

(2) 실습용 컴퓨터 및 PC시설의 확충

1995년도에는 과학관 5층에 컴퓨터 관련 통합 실습실 6개를 더 마련한 바 있다. 이후 1997년도에는 우리대학 전자계산소 내에 있는 486 PC 140대가 최신형 컴퓨터인 펜티엄급(166MHz)으로 완전 교체되었다. 이 실습용 컴퓨터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전교생 누구나 언제든지 이용이 가능하며 수업시간에도 활용되었다. 이로써 우리대학의 실습환경은 첨단 기자재를 확보하게 되어 변화하는 시대에 맞추어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컴퓨터 실습실은 강의동 2층의 강의전

용실과 컴퓨터 실습 전용실로 분리해서 운영되고,실습 전용실은 학생들이 언제든지 이용할 수 있도록 항상 개방하고 있다.

실습실 컴퓨터는 모두 펜티엄급 이상이고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수강신청이나 학생 관련 자료들은 물론 원하는 정보를 빠르고 간편하게 얻을 수 있다 또한 전자계산소에서는 매 학기 방학을 맞아 지역주민들을 위해 주부 및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컴퓨터 특강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그 동안 전자계산소에 집중적으로 설치되었던 실습실이 진리관과 우촌관에 각각 1개소씩 설치됨으로써 실제로 이를 이용하는 학생과 담당교수들은 이동거리가 줄어들게 되었다. 따라서 훨씬 실용적으로 활용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진리관 3이호에는 50명이 활용할 수 있고, 우촌관 220호에는 70~100명이 동시에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3) 학생종합서비스센터

학생종합서비스센터는 수요자 중심의 행정 서비스를 지향한다. 이를 위하여 1998년 6월 15일 학생회관 1층에 학생종합서비스센터를 설치하

고 개소식을 가졌다. 특히 이곳에서는 취업정보망을 구축하여 취업 상담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학생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복사기와 팩시밀리 등이 설치되어 있어, 앞으로 학생들의 쾌적한 면학 분위기에도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다.

또한 학생종합서비스센터에서는 교내에 무선 랜이 가능해짐에 따라 우리대학 재학생을 대상으로 노트북 및 노트북용 무선 랜 카드를 대여해 주고 있다. 무선 랜 카드만 대여 할 경우에는 랜 카드 드라이브 파일이 들어있는 CD도 함께 대여할 수 있다.

2. 국내외 대학과 학술교류를 통한 세계화

(1) 국내대학간 학점교류 조인

우리대학은 1997년 7월 서울지역 9개 대학과 학점 교류 조인 협정

을 맺었다. 이 해 7월 21일 올림피아 호텔에서 열린 ‘대학간 상호 교류에 관한 협정서 조인식’에서 우리대학을 비롯한 광운대학교, 덕성여자대학교,동덕여자대학교,삼육대학교,상명대학교, 서경대 학교,성신여자대학교,세종대학교 등 9개 대학 관계자들은 학점교류협정을 조인하였다. 이로써 이들 대학간에 학점 교류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97학년도 2학기부터 재학생들은 대학간의 교환과목을 상대 대학에서 이수하여 학점을 취득할 수 있게 되었다. 단 교류 학점은 매 학기 당 소속 대학 학점의 20%를 초과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류 범위

학점교류(대학,대학원),교수 공동연구,교직원 상호교류, 도서관 사용 및 자료 교류, 전산시스템 공동 활용

•교류 내용학기 중 일부 과목 수강,방학 중 계절학기 강좌 수강

· 자격

1학년 이상 수료자. 평균 성적 B학점 이상인 자, 징계가 없는 자

• 수강 및 의무

수강학점은 소속 대학 졸업 학점의 20%를 초과할 수 없다.

등록금은 소속 대학에 등록(단,계절학기 수강료는 수강대학에 납부) 교류에 따른 비용은 본인이 부담

• 관리

교류 학생은 소속대학 학생과 동일한 복지시설을 이용할 수 있다.

(2) 국외 대학과 학술 교류 협정

우리대학은 국외 6개 대학과 학술교류 협정을 맺었다. 협정을 맺은 외국 대학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University of Idaho(미국)

Virginia Common Wealtti(미국)

University of Evansville(미국)

he University of Tennessee at Martin(미국)

萩學園(일본)

블라디보스톡 주립 경제대학(러시아)

이 가운데 University of Idaho, Virginia Common Wealth, University of Evansville, The University of Tennessee at Martin, 萩學園은 이미 1997년 1학기에 맺었고,2학기에 새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 주립 경제대학과 자매결연을 맺게 된 것이다.

이를 기회로 실질적인 교류와 협력을 증진시킴으로써 우리대학을 세계화,국제화된 대학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교직원 및 학생의 교환,연수,방문, 공동의 연구 둥의 구체적인 관계가 맺어질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우리대학의 교직원이나 학생들이 자매결연 대학의 국가를 방문할 때 이들 대학을 특별히 방문해 주거나 학생들에게 각별히 그 대학을 소개하는 등의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대학은 국제적으로 발돋움을 하기 위한 계기를 마련했다. 대체로 상호 이해와 발전을 위한 목적으로 추진된 이 교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교류를 갖게 된다.

시설 및 학술 정보 교류

인적 자원 교류(교수 및 행정 직원)

유학생 교류

국제회의 조직

학점 교류 등

제4절 대학발전을 위한 연구제도

1. 대학발전과제 연구제도

(1) 1995학년도 대학발전과제 연구 보고

우리대학은 1991년부터 우리대학을 발전시킬 방안 모색을 위해 교직원을 대상으로 ‘대학발전 연구제도’를 시행해오고 있다. 그간 상당한 연구결과가 축적되었고,현재 이 결과물들은 대학 발전을 위한 구상과 계획에서 적절히 반영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1996년 2월 16일부터 18일까지 제주도 서귀포시 프린스 호텔에서 열린 1995학년도 학사협의회에서는 1995학년도에 이루어진 대학발전 과제 연구결과 보고가 있었다. 이번 학사협의회의 중점 사항이기도 한 ‘대학 발전과제 연구결과 보고’ 에서는 21세기를 향한 우리대학의 발전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구성된 여러 연구 위원회별로 그간 진행된 연구결과가 보고되었다.

이번 보고회에서는 대학 장기 발전계획연구(연구 책임자 : 강신일 교수) 대학 시설 공간 사용의 효율성 제고 연구(연구 책임자 : 원형규 교수) 대학행정 전산화 발전 연구(연구 책임자 : 홍윤기 교수) 대학 교과과정 발전 연구(연구 책임자 : 정성택 교수) 대학 교양교과 과정 발

전 연구(연구 책임자 : 박호영 교수) 대학원 교과과정 발전 연구(연구 책임자 : 김경배 교수) 등 여섯 분야에 걸쳐 밀도 있는 연구결과가 발표되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표 17> 각 위원회별 연구 현황

연번 과제명 연구 기본방향 및 범위 연구 책임자

1 대학 장기발전계획 연구 개성 있는 대학으로의 발전을 위한 장기 마스터 플랜 체계 확립 홍윤기

2 대학 교육 자율화 추진 연구 학기제 및 학점제도 개선 방안 연구 박호영

3 대학시설, 공간사용의 효율성 제고연구 기존 시설의 효율성 방안 연구. 종합관 신축공간 배정에 관한 연구 이재득

4 대학 행정 전산화 발전 연구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한 기본 연구 황기태

5 대학 교과과정 발전 연구 급변하는 세계 환경에 부응하기 위한 교 과과정 연구 정주택

6 대학 교양교육 발전 연구 특색 있는 교양과목 발전 연구 강욱

7 대학원 교과과정 발전 연구 세계화와 정보화 시대에 부응하는 교과과 정 발전 연구 김동환

8 대학종합평가성적 제고 연구 대 학종합평가성 적제고를 위한 방안연구 권오

9 대학 종합정보화 발전 전략 정보통신기술의 급속한 발전에 따른 대학 교육 및 시설의 혁신방안연구 이남식

(2) 1996학년도 대학발전과제 연구 보고

1997학년도를 맞이하면서 1년을 마감하는 학사협의회가 2월 14일부터 16일까지 2박3일의 일정으로 전라남도 광주 신양파크호텔에서 있었다. 이 협의회에서 1996학년도 대학발전과제 연구 결과 보고가 있었다. 금년에는 처음으로 대학발전과제와 연구 책임자를 응모제로 채택 하였다. 응모에서는 산업안전공학과 이남식 교수가 응모한 ‘대학 종합정보화 발전 전략’이 자유 과제로 선정되었고,지정 과제에서는 4명의 교수가 응모하여 연구 책임자를 맡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표 18> 1996학년도 대학발전과제 및 연구책임자

과제명 연구책임자

대학장기 발전계획 연구 홍윤기 교수

대학교육 자율화 추진 연구 박호영 교수

대학시설·공간사용의 효율성 제고 연구 이재득 교수

대학행정 전산화 발전 연구 황기태 교수

대학 교과과정 발전 연구 정주택 교수

대학 교양교육 발전 연구 강욱 교수

대학 교과과정 발전 연구 김동환 교슈

대학 종합평가 성적 제고 연구 권오 교수

대학 종합정보화 발전전략 연구 이남식 교수

국가 발전을 위한 대학활성화 연구 이상한 교수

2. 교육개혁 추진 실적

우리대학에서는 그 동안 의욕적으로 교육개혁을 추진해온 바 있으며,그간의 진행과 실적을 종합하여 「한성대 소식」1996년 제51호에 게재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성과를 되짚어보고 앞으로 또 한번의 도약을 위한 자료로 삼았다. 당시 정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교육개혁 추진 방향

교육개혁 조기 추진 및 정착

교육 중심 대학으로 교육의 질 개선

각종 제도 개선으로 대학의 공공성 및 열린 체제 구축

► 교육개혁 중점 사항

• 교수업적,강의평가제 및 인센티브제 실시

전임교수의 연구업적 평가에 따르는 합리적인 승진제도를 정착시킴으로써 연구의 활성화를 도모하고 있다. 그와 함께 1990학년도부터 강의평가제를 실시하여 학생의 학업 성취도 향상 및 교수 강의의 질 개선을 위한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아울러 교수연구활동에 따른 인센티브 제도를 정착시켜 나가고 있다.

• 우수교수 대폭 충원 및 연구활동 강화

교육의 수월성을 추구하기 위하여 우수한 전임교원을 다수 충원하여 교수 확보율을 높였다. 1996년 4월 1일 기준 전임교수는 134명으로,교수 1인당 재학생수는 29.3명이었다. 또한 사회 저명인사, 연구소 및 산업체 우수 인력을 객원교수로 다수 초빙하여 현장성 있는 교육에 역점을 두고 있다. 특히 특수한 분야에 대해서는 대우교수 제도를 마련하여 교육의 질을 강화하였다.

• 유사학과의 학부 운영 활성화

기존의 14개학과를 통합하여 7개의 학부로 재구성하여 학부 운영을 확대하였다. 학부제 운영은 유사한 전공에 다양한 선택을 가능하게 하여 학생들의 교육 수요 충족에 이바지하고 있으며,과목의 성격도 세계화·정보화 시대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내용으로 전환하여 개편 하였다.

• 교육과정 혁신

세계화와 정보화시대의 사회적 요구에 부응한 학부제 운영으로 폭 넓은 교육을 실시하고,시대의 주역으로서 활동할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자 교육과정을 혁신적으로 개편하여 1인 3기 교육, 인성 교육강화 및 전공교육의 질적 향상에 노력하였다.

• 첨단 정보시설의 집중 투자

효율적 도서관 이용 및 도서관리를 위해 국내 초유의 전자정보 도

서관을 구축하였다. 삼성전자가 10억원을 출연하고 우리대학이 10억원을 출자하여 국내 최초의 전자정보관을 1996년 5월에 개관하였다. 또한 전교생에게 ID 카드를 배부함으로써 전국 유일의 정보전산화 구축에 기여하였다. 그밖에도 대학 교육,행정 전산망을 구축하고 인터넷의 활발한 활용을 도모하고 있다.

· 실험실습 및 시설 확충

강의실, 실습실, 도서관 등 교육에 직접 관련된 시설의 제반 보조 시설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13억여 원의 자금을 투입하여 첨단 산업 관련 학과에 필요한 각종 실험 및 실습기자재를 확보하였다. 특히 문헌정보학과, 의상학과,무용학과 등에 실험·실습기자재를 완비하였다.

3. 학사협의회 제도

우리대학 학사협의회는 여름방학 기간과 겨울방학 기간에 각각 1회씩 개최되며, 전교수가 참여하여 학사에 관한 제반 업무보고와 평가가 이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이들 학사협의회는 교수들의 참여율이 상당히 .높은 것이 특징이다. 또한 동계 학사협의회는 대개의 경우 서울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2빅-3일 일정으로 진행된다. 그만큼 학사협의회는 학사 전반에 관한 주요한 사항들이 이 협의회를 거쳐, 전교수의 의견을 수렴함으로써,대학 발전이 좀더 고무적으로 추진되도록 돕는 제도이다.

(1) 1995학년도 학사협의회1995학년도 동계 학사협의회는 1996년 2월 16일부터 18일까지 제주도 서귀포시의 프린스호텔에서 서정희 이사장, 원형갑 총장을 비롯한 전임교수,1995학년도 1학기 신임교수, 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번잡한 서울을 떠나 아늑한 섬, 제주에서 개최된 1995학년도 학사협

의회는 우리대학의 구성원들 간의 화합의 장이자 재충전을 위한 매우 유익한 기회였다. 참석자 모두 남국의 훈풍만큼이나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했으며,밝은 얼굴들에는 미래에 대한 무형의 기대가 가득 담겨 있었다.

특히 당시 학사협의회에서는 전체 교수회의에서 제2대 총장 후보 선거를 진행하였다. 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 : 황진수 교수)의 주관 아래 열린 이 날 선거에서는 후보자의 정견 발표에 이어 곧바로 무기명 비밀투표에 들어갔는데, 이용남 후보(문헌정보학과)가 원형갑 후보에 앞서 다수표를 얻어 차기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대학발전과제 연구결과 보고는 당시 학사협의회의 중점 사항이었다. 21세기를 향한 한성대학교의 발전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 구성된 여러 연구 위원회별로 그간 진행된 연구결과가 보고되었다.

(2) 1996학년도 동계 학사 협의회

1997학년도를 맞이하면서 1년을 마감하는 학사협의회가 2월 14일부터 16일까지 2박3일의 일정으로 전라남도 광주에서 있었다.

이번에도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1부에서는 각 부서의 업무 보고와 아울러 신임교수 인사 소개와 대학발전 연구 보고가 진행되었다. 둘째 날은 광주 일원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친목의 시간을 가져 서로간의 우의를 다짐하였다.

제5절 교수요원 확충과 교수 연구활동

1. 꾸준한 교수요원 확충과 대학 위상 제고

우리대학은 교육의 수월성을 추구하기 위하여 1995학년도 1학기에 우수한 전임교원 16명을 새로 충원하였다.

신입생 입학 정원은 최근 6년 동안 불과 37% 증가에 그쳤으나,전임교수는 매년 대폭적으로 충원됨으로써 같은 기간 중 140%를 보강하

는 노력을 경주한 것이다.

이는 사립대학 평균을 훨씬 초과하는 교수 확보율로서 교육부 기준 정원 90%에 올랐다. 이 기간 중 우리대학이 초빙한 전임교수는 국내외 명문대학 박사학위 취득자를 원칙으로 하였으며, 완전한 공개 초빙제도와 함께 공정한 심사제도를 적용하였다.

다시 1996학년도 1학기에 우수 전임 교원 16명과 특임교수 1명을 새로 증원하였다. 신입생 입학 정원이 최근 6년 동안 불과 37% 증가에 그쳤던 것에 비해, 전임교수 충원은 같은 기간 중 112%를 보강한 것이며,사립대학 평균을 훨씬 초과하는 교수 확보율로서 교육부 기준 정원 83.7%를 달성한 것이다.

이 같은 교수 충원을 위한 우리대학의 남다른 노력은 교육부로부터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그 결과 교육부에서는 1997년 10월 13일 우리 대학의 교수 확보율 등이 교육부 기준율에 초과 달성하였음을 인정하고 이에 따라 정원 자율화 대학으로 선정하였다. 이날 교육부는 전국

150개 대학 중 우리대학을 비롯하여 수도권 32개교, 지방 41개교를 정원 자율화 대학으로 선정하였다. 따라서 우리대학은 정원 조정의 자율권 확대에 따라 교육여건 지표 범위 내에서 정원 규모와 학과의 신설과 증설 등을 자율적으로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정원 자율화 대학 선정을 위해 정부가 제시한 교수확보율 적용지표와 우리대학의 교육여건 현황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 교육부 적용지표

교수 확보율 : 50% 이상

• 우리대학 교육여건 현황

교수 확보율 : 73.4%

위의 결과표만으로도 우리대학의 교수요원 충원의 확고한 의지를 잘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교육부의 정원 자율화 대학 선정은 우리의 노력에 답하는 응분의 결과였다고 판단된다.

2. 교수 연구활동 활발

우리대학 교수들이 외부 각 기업체나 학술진흥재단 등의 연구비 지원을 받아 연구하는 실적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어 우리대학 교수의 연구 성과가 매우 높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1995년에 외부 각 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연구 중인 과제는 모두 18건이다. 이 중 8건이 외부 기업체로부터 연구과제를 따낸 것이고, 10건이 학술진흥재단 연구과제 응모에 선정된 것이다. 전체 교수 숫자를 생각하면 이는 상당히 높은 비율이다.

특히 우리대학은 신임교수의 연구활동이 두드러진다. 그만큼 최근 교수 요원 충원이 충실히 잘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최근 학술진홍재단이 펴낸「학술연구지원 통계연보」에 따르면 1995년도 ‘신진교수 연구선정 과제수’는 우리대학이 8건으로서 신진교수 상위 지원 10개 대학에 속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이는 연세대와 인

천대,고려대,전남대,서울대에 이어 다섯 번째로 많은 숫자를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대학의 전체 교수 숫자 대비로 볼 때는 사실상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자유공모과제와는 달리 신진 교수 연구과제를 충분히 확보한 결과의 하나이면서 동시에 우리대학 교수들의 연구 의욕을 여실히 보여 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우리대학 연구진흥과에서는 교수들의 연구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양상은 앞으로 더 늘어날 전망이다.

한편 1996년도에는 무용과 박인숙 교수가 이사도라 무용 예술상을 수상했다. 3월 23일 수여된 이 상은 한국현대무용진흥회가 지난 한 해 동안 가장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전개한 무용가에게 주는 것으로 국내 최고 권위의 상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박인숙 교수는 항상 개성 있는 작품 활동을 펼쳐 국내 무용계의 주목받는 무용가이기도 하다.우리대학은 이상과 같은 교수들의 고무적이고 능동적인 연구 수행을 적극 지원하기 위해 1996년 새로이 연구처를 신설하였다.

이 기구는 우리대학에 교수 연구를 비롯한 모든 연구 영역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기 위하여 새로이 신설된 것이다. 이로써 이제까지 교무

처에서 관장하던 연구 기능이 새로이 조직된 연구처에 의하여 보다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전망이다. 연구처에는 ‘연구 진흥과’와 ‘국제 교류과’를 두고 있다. 신설된 연구처를 포함해 새로 개편된 조직기구표는 다음과 같다.

대학교 본부

교무처

교무과 입시관리과

연구처

연구진흥과 국제교류과

학생처

학생과 장학복지과

기획실

기획과 관리과 시설과

총무과 경리과

〈그림 6〉 1996년 조직기구도

또한 1998년 9월부터 교수 연구년제를 시행키로 했다. 연구 기간은 1년이고,첫 1년간 연구년을 갖게된 교수는 모두 16명이었다. 1998년 9월에는 5명이었고, 1999년 3월부터 11명이었다. 그 외 해외 파견교수도 2명이 신청했다. 이제 연구년제를 시행함으로써 우리대학은 명실상부하게 교수들의 연구를 위한 제도를 완비한 셈이다.

제6절 학생 복지와 학생들의 대외활동

1. 학생 후생복지 향상

(1) 복지시설 신축 및 확충

• 과학관 증축공간에 들어선 편의시설

1995년 5월말 과학관 1층에 새로 설치한 교직원식당,학생식당, 매점 등은 이공대 학생,교수 특히 야간학생들에게 크게 환영받고 있다. 과학관을 증축하고 공간을 확보하여 아담하게 꾸며진 이 식당은 한성인의 다양한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기존의 교내 식당과 달리 중화요리만을 전문으로 제공하게 되었다. 삼송원(드松死)은 교직원 전용으로, 학송원(學松死)은 학생 전용으로 사용되었다. 과학관에도 식당이 개설됨에 따라 1층 휴게실과 함께 학생들의 휴식공간이 늘어나게 되었으며, 먼 거리를 이동하지 않아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옥상에는 야외 무대가 설치되는 등 휴식공간이 새롭게 단장 되었다.

• 학생회관 지하층 인테리어 공사

우리대학은 1998년 7월 23일부터 학생회관 지하층에 있는 교직원 식당과 학생 식당, 휴게실,체육단련실 등을 재배치하고,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개수, 보수를 포함한 인테리어 공사를 시작했다. 9월 15일까지 계속된 이 공사가 완료되어 학생들의 쾌적한 공간으로 사랑 받게 되었다.

• 후생관 신축

1997년 2월에 우리대학 우촌관 입구에 새로이 후생관이 완성되었다. 지하 1층,지상 3층의 이 건물은 우촌관 중문 앞에 들어섰다. 6개월 공사 끝에 완성된 후생관은 총면적 287m2의 4층 규모로 지하에는 25평 규모의 사이버카페가 들어섰으며,1층에는 23평 규모의 국민은행, 2층

은 21평의 컴퓨터 관련 점과 안경점 이, 3층에는 사진관이 들어섰다.우촌관 1층에 있던 국민은행이 후생관으로 자리를 옮겨감에 따라 구내서점 자리는 그대로 통행로로 남겨두고 이전의 국민은행 자리에 구내서점이 들어서게 되었다.

· 학사 E동 완공 7개 동아리 입주

또한 학사 E동의 동아리방이 완공되어서 새롭게 7개의 동아리가 1997년 3월 3일자로 입주하였다. 새로 입주한 동아리는 야구반,바둑 사랑회,해랑사리우,피닉스,UBF, 낙산 극딘단, 트리플 이상 7개 동아리다.

(2) 장학금 종류 신설

우리대학은 1998년 7월 30일 총장실에서 장학위원회를 개최하고 1998학년도 2학기 성적장학생과 특별장학생,그리고 근로봉사장학 신

청서를 교부하기로 했다. 그런데 당시 회의에서는 어려운 경제 여건을 고려하여 장학생 추천서 제도를 임시로 신설하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IMF 및 가사 어려움으로 학업을 계속하기 힘든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 혜택이 돌아가게 되었다.

2. 학생들의 대외활동 활발

(1) 각종 대회 석권 및 역사 유적 발견

우리대학 학생들의 대외 활동은 갈수록 활발해져, 학교 위상과 이미지 제고해 큰 몫을 하고 있다.

· 환경보전협회 주최 현상논문 공모 우수작 당선

환경보전협회는 환경부, 조선일보사 후원 아래 1994년 12월부터 1995년 3월 10일까지 환경에 관한 자유주제 논문 및 수필을 현상 공모한 바 있었다. 여기서 우리대학 무역학과 서재호, 최은석군이 공동 작성한 「환경과 지방화시대,그리고 국가경쟁력」이라는 논문이 우수

작으로 당선되어 환경보전협회 회장상을 수상하였다. 시상식은 4월 21일 오후 4시 대한상공회의소 상의클럽에서 있었으며 상금은 100만원 이었다. 한편 이번 논문 현상 공모에서는 30여 편의 논문이 접수되어 최우수작에는 경희대 대학원생이 그리고 다른 한편의 우수상에는 한국과학기술원생의 논문이 선정된 바 있다.

• 국내 최초로 연산군 금표비 발견

우리대학 사학과 대학원생 정동일씨에 의해 1994년 12월 국내 처음으로 연산군 금표비가 발견되었다. 즉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금천군 묘역에서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조선조 연산군대의 금표비가 발견되어 한국 사학계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그리고 이 발견 사실은 각 일간지마다 일면 기사로 다루어졌다. 이 금표비는 국문학과 정후수 교수의 고증을 거쳐 연산군대의 금표비임이 입증되었다. 이러한 중요한 역사적 유물의 발견이 우리대학 대학원생에 의해 이루어지고 학계와 일반에 주목받은 사실은 학생들의 향학열에 매우 고무

적으로 작용했다.

• 산업디지인학과, 한글디자인 공모전 휩쓸어

1995년도에 한글에 대한 우수성과 소중함을 일깨우고 이를 디자인 차원에서 더욱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목적에서 문화체육부,한국방송공사,조선일보사가 공동 주최한 제2회 한글디자인 공모전에서 우리대학 산업디자인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금상을 비롯하여 특선과 입 선에 대거 입상하였다.

아울러 입상 작품들은 1995년 10월 9일부터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되어 우리대학의 실력을 교내 외에 과시하였다. 산업디자인학과의 실력은 이번 공모전에서는 물론이고 여러 대회에서도 커다란 성과를 올려 우리대학의 자랑거리를 만들기도 하였다.

금상 : 이기범(산디 4)

특선 : 박윤정,김옥희, 김주훈(이상 산디 4) 윤창옥, 김범식, 구선정(이상 산디 3)

입선 : 염삼민,서현인(이상 산디 4) 정재윤, 구효정(이상 산디 3)

• 산업디자인학과,디자인 공모전 대거 입상

1996년도에 열린 ‘제32회 전국 산미 공모전’,‘제1회 서울 비엔날레디자인 공모전’ ‘제31회 대한민국 산업디자인전’ 등에서 산업디자인학과 학생 19명이 대거 입상하여 다시 한번 우리대학의 면모를 전국에 드날렸다.

• 제32회 전국산미공모전 수상자

- 은상 : 김수진, 구선정(산디 4 / 주:C.L.P)

- 특선 : 이주형(산디 3 / 야:광고포스터)

- 입선 : 흥승국,이재복(산디 4 / 주 : 광고포스터)

전신종,송문기(산디 3 / 주 : 광고포스터)

김묘수, 박진아(산디 3 / 주 : 광고포스터)

박성제,한수봉(산디 2 / 주 : 광고포스터)

- 주최 : 대한산업미술가협회

- 전시일정 : 1996년 5월 22일~26일

• 제1회 서울 비엔날레디자인 공모전

- 특선 : 안주현,정응태(산디 4 / 주 : C.L.P)

- 입선 : 정재윤,구효정(산디 4 / 주 : C.L.P)

김영식(산디 3 / 주 : 광고포스터)

은창익(산디 3 / 야 : 광고포스터)

- 주최 : 서울 비쥬얼 아티스트 비엔날레협회

- 후원 : 산업디자인포장개발원

- 전시일정 : 1996년 5월 23일~28일

- 전시장소 : 운현궁 미술관

• 제31회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

- 입선 : 김범식(산디 4 / 주 : 놀이한과 포장디자인)

고우석(산디 1993년 졸업)

• 전국대학 졸업작품디자인 경연대회 금상 수상

또한 1997년 전국대학 졸업작품 디자인 경연대회에서 우리대학 학생이 금상을 수상하였다.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문화 창조를 위해 신선한 감각의 신인 디자이너를 발굴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개최된 제1회 전국대학 졸업작품디자인 경연대회에서 우리대학 의류직물학과의 김호정이 영예의 금상을 수상하였다. 국제 패션디자인 연구원이 주관하고 패션 전문지 ‘WWD KOREA'가 개최한 대회에는 총 97개 대학에서 185점이 교수의 추천으로만 출품되었다.

1월 27일 하얏트 호텔에서 3차 마지막 심사를 거쳐 금상을 수상한 김호정의 작품 면은 ‘색다른 바다 (조개 1)’ 이다. 금상의 특전으로는 상금 300만원과 400만원 상당의 국제패션디자인연구원 1년 연수업체 장학특전과 시상패를 받았다.

• 제1회 삼성화재 논문 현상공모, 본교생 4명 입상

제1회 삼성화재 사고 예방 논문 현상공모에서 우리대학 산업안전공학 전공 학생 4명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손해보험 업계에서 최초로 실시한 이번 현상공모에는 대학생 및 대 학원생(석사, 박사 과정 포함),제조업체 등에서 약 50여 편의 논문이 접수되었으며,시상은 은상,장려상, 입선에 이르는 세 분야로 분류하여 이루어졌다.

총 세 편의 논문을 응모한 산업시스템공학부는 장려상 1편,입선 1편을 수상하였다.

• 한국정보학회 공모전 수상

제1회 한국정보학회 주최 ‘세계는 한글로’라는 논문공모에서 하유경(국문 4)은「한글과 정보화 사회」, 최혜숙(국문 3)은 「한글의 독창성 및 과학성」이라는 주제로 각각 격려상과 입선을 하였다.

시상은 12월 23일 한일은행 본점에서 치뤄졌다.

. 우리대학 동아리 ‘영화두솜’ 제1회 대학영화축제에 출품

영화 동아리 ‘영화드솜’이 제작한 영화 「마지막 낙원」,「ET를 기

다리며」,「그물 벗기」가 3월 25일~29일까지 연세대 장기원 기념관에서 열리는 제1회 대학 영화축제에 출품되었다.

선정위원단은 각 영화제 대표가 위촉하는 선정위원 39명으로 구성 되었다.

총 50여 편 가운데 기술적 완성도와 대학영화로서의 독창성,진지한 현실인식이 돋보이는 작품 15편이 본선에 출품된 것이다.

· 1997년 우리대학 학군단, 최우수 표창

우리대학 학군단이 1996년도 부대평가 최우수 학군단으로 선정되었다.

12월 21일 전국 주요지휘관 회의에서 수상한 이 표창은 전국 학군단 중 가장 높은 훈격에 해당되는 평가이다.

이번 평가에서 우리대학 학군단은 부대관리,군수,시설관리,후보생 군사학 교육실기, 후보생 군사학 교육필기 측정을 통해 최고 수준을

인정받은 것이다.

(2) 탁구부,축구부 활동

1976년에 창설된 이후 약 20년의 역사를 지닌 우리대학 탁구부는 여러 차례 전국 대회를 석권하는 등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한성여자대학의 여자 탁구부로 시작,그 초창기부터 10여 차례에 걸친 우승,그리고 1981년 남자부가 생기면서 우리대학 탁구부의 명성은 드높아졌다.

남자팀은 1997년에 다시 창단되었다. 1984년도부터는 일본 체육대학 탁구부와 합동훈련 및 친선 경기를 가졌으며, 이어 대만탁구협회의 초 청으로 대만을 방문,대학부 팀과의 경기에서 모두 승리하여 우리대학 탁구부의 실력을 널리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도 많은 대회에서 우승하였으며, 무엇보다 우리대학 출신 역대 국가대표를 살펴보면 우수함을 눈여겨볼 수 있다.

축구부는 1991년 전국대학 축구연맹전에서 우승의 영예를 차지한 바 있다. 예전의 명성을 되찾고자 하는 축구부의 노력도 눈에 띤다.

• 대통령기 전국탁구대회 종합 준우승

우리대학 탁구부가 1995년도 대통령기 전국탁구대회에서 영예의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각 지역을 대표로 예선을 치른 이번 대회에서 우리대학은 서울시대표로 본선에 진출하였으며 잠실 체육관에서 4월 18일부터 24일까지 열린 본선에서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앞으로 5월에 춘계대학 연맹전(서울대 체육관),6월에 여수(진남 체육관)에서 전국 종별 선수권대회,8월에 문화체육부 장관기 등 대회를 치렀으며 모두가 노력 분투하여 좋은 성과를 얻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한편 전년도 실적은 다음과 같다.

• 제13회 한국대학 탁구연맹전 우승

우리대학 탁구부가 춘계대학 탁구연맹전에서 영예의 종합우승을 차지하였다. 서울대 체육관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우리대학은 한남대학을 4:0으로 누르고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개인단식에서도 준우승의 영광을 차지하였다.

1976년 창설된 이래 초창기부터 그 명성을 대학 사회에 떨쳐왔던 우리대학 탁구부는 이번에도 그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한성대학의 탁구를 전국에 드날렸다. 이 같은 우리대학 탁구부의 발전 뒤에는 이희순 한성학원 설립자의 열의와 후원이 큰 힘이 되었다.

• 제41회 전국 남·여 종별 탁구선수권 대회 우승

이은영(의상학과 1) 3관왕 차지

- 기간 : 1995년 6월 14일~21일

- 장소 : 여수 진남체육관- 경기결과

여자대학부 단체 결승

한성대 4:1 한체대 승리 우승

여자대학부 개인 단식 결승

이은영(의상 1) 2 : 0 이효주(동의대) 승리 우승

여자대학부 개인 복식 결승

이은영(의상1) 오윤정(한체대)

2:1 승리 우승

이선미(국문 1) 정수진(한체대)

여자대학부 개인 복식 3위

박혜연(국문 3)

임은정(문정 2)

· 전국종별탁구 우승,창단 남자팀도 준우승

제43회 전국종별 탁구선수권대회에서 우리대학 선수들이 전년도에 이어 3연페의 기록을 차지했다.

1997년 6월 18일부터 24일까지 청주 올림픽기념국민생활관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우리대학 선수는 1개월 전에 있었던 한국대학탁구연맹전의 전적을 훨씬 능가하는 호조를 보였다. 한편 1997년 새로이 창단된 남자팀도 단체 순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의 성적은 다음과 같다.

남자 · 단체전 준우승

여자 · 단체전 3위

개인단식 · 우승(김진숙, 사학 ’96)

준우승(이은영, 의상 ’95)

개인복식 · 우승(대회 3연패)

(이은영,의상 ’95)

(이선미,국문 ’95)

• 탁구부,문화체육부 장관기 대회 우승

제30회 장관기 전국학생탁구대회에서 우리대학 선수들이 수상의 영예를 안고 돌아왔다. 1997년 9월 27일부터 10월 1일까지 진행된 이 대회에서 우리대학은 남자가 창단 1년만에 개인단식 우승과 단체전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특히 개인전에서는 우리대학의 정지우(정전 1)와 박상수(사학 1)가 결승에서 겨뤄 우승과 준우승을 함께 안아왔다.

• 축구부, 1997년 추계연맹전에서 4강 진출

우리대학 축구부가 1997년 9월에 열린 추계 전국대학 축구연맹전에서 연달아 강팀 대학들을 이기고 4강에 진출했다. 축구부의 이번 4강 진출은 1997년 들어 가장 좋은 성적이었으며, 우리대학 축구부는 지난 1991년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바가 있다.

제7절 교내 환경 개선

1. 건물의 신축 및 시설 개선

우리대학은 늘어나는 정원과 학생들의 편의시설을 위해 지속적으로 건물을 신축하고 시설을 개선해 왔다. 아래에 그간에 신축과 시설 개선을 개관한다.

• 과학관, 학생회관 증축 완료

과학관과 학생회관 증축이 완공되었다. 1994년 8월부터 비계설치와 더불어 시작된 이 공사는 1995년 5월말 준공을 보게 되어 학생회관이 500여 평, 과학관이 500여 평이 확장되었다.

학생회관 5층에는 총 274평 규모의 ‘전자정보관’이 국내 대학 최초로 개설되고, 6층에는 교수연구실이 들어섰다.

한편 과학관 5층에는 컴퓨터 관련 통합실습실 6개,교수연구실이 들어서게 되어 교육공간 확충에 기여하게 되었고 1층에 새로 설치한 교 직원식당, 학생식당, 매점 등은 이공대 학생,교수와 야간학생들에게 크게 환영받고 있다.

아울러 옥상에는 야외무대가 설치되는 등 휴식공간이 새롭게 단장 되었다.

• 우리대학 신축 복합건물 계획 설명회

우리대학은 한성의 변모를 일신시킬 초대형 건물을 계획하였으며, 체육관 자리에 새로 들어설 신축건물에 대한 설명회가 1995년 9월 15

일에 열렸다.

서정희 명예이사장 및 김옥자 이사장을 비롯해서 각 보직교수, 시설·공간위원회 위원, 예술대학 교수가 참석한 설명회는 건물의 설계가 완성되기 전에 참석자의 의견을 청취하여 시설 및 공간을 효율적으로 배치하기 위하여 열리게 된 것이다.

신축 건물의 규모는 지하 2층 지상 15층의 고층 건물로 연건평이 6,000평(주차장 포함)에 달하며 실내체육관,수영징' 전시징' 연구실, 실습실,강의실 등이 들어설 계획이었다.비록 계획으로 그치고 실행되지 않았지만, 이는 우리대학이 교내 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한 신축계획의 하나로 의의가 있다. 이러한 노력들의 축직이 오늘과 같은 다른 신축 건물의 완성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 1997년 2월 학군단 건물 준공

그 동안 진리관 1층에 자리잡고 있던 학군단 관련 시설이 단독 건물로 이전하여 1997년 2월 28일 준공식을 가졌다.

이 날 준공식에는 한성학원 설립자 이희순 여사를 비롯하여 김옥자 이사장, 서정희 명예이사장, 이용남 총장이 참석하였다. 학군단 관련 인사로는 학군단 교장 노연웅 소장과 129학군단장 원종관 대령이 참석했다. 그리고 이 날의 행사를 축하하기 위해 광운대,고려대, 성균관대,시립대의 학군단장도 참석했다.

신축 학군단 건물은 총 681m2면적에 지상 2층의 철골 구조물로 축조되었다. 새로 준공된 건물에는 학군단장실외 학군단 관련 시설 일체가 들어섰다.

한편 우리대학 학군단이 1996년도 부대평가 최우수 학군단으로 선정되었다. 12월 21일 전국 주요 지휘관 회의에서 수상을 힌: 이번 표창은 전국 학군단 중 가장 높은 훈격에 해당되는 평가다. 이번 평가에서 학군단은 부대관리, 군수, 시설관리, 후보생 군사학 교육 실기, 후보생 군사학 필기 측정을 통해 최고의 수준을 인정받은 것이다.

• 1997년 2월 후생관 준공 입주

우촌관 중문 앞에 후생관이 완공되었다. 6개월 끝에 완성된 후생관은 총면적 287m2에,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로서, 지하에는 25평의 사이버 카페가 들어섰으며,1층에는 국민은행,2층은 컴퓨터 관련 점과 안경점이, 3층은 사진관이 들어서게 되었다. 국민은행이 후생관으로 자리를 옮김에 따라 그 자리에 구내서점이 입주하게 되었다.

• 1997년 5월 새로운 명물,지하 주차장 완공

국내 대학에서 처음 시도된 운동장 지하의 주차장 건축이 완공되어 1997년 5월 17일 준공식을 가졌다.

1년 이상 공사를 진행해왔던 한성주차장은 한성여고 교정에 지하 2층으로 시공되었다. 이 주차장은 1,700평의 규모로서 약 150대의 차량이 주차할 수 있으며 차량의 출입이 완전히 전자동으로 관리된다.

주차장 1층 내부에는 70평 규모의 휴게실이 들어서 있어 휴식처로

서의 역할 외에도 회의용이나 전시용으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또 지하 2층에는 80여평 규모의 탁구부 전용 연습실을 두어 우리대학 탁구부가 사용하고 있다.

이 주차장이 완공됨으로써 우리대학의 주차난 해소는 물론 이후 대규모 종합 건물 건립이 순조로워지게 되었다. 또한 주민들의 차량을 야간에 주차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검토되었으며, 그 후 이 제도가 시행되어 대학 시설을 지역사회에 환원한다는 차원에서 큰 성과를 가져 왔다.

한편 지하 주차장 이외에 각종 차량이 통과하는 곳에는 차단기를 설치하며,자동감식장치인 TAG 카드를 부착하여 차량 주차의 유료화를 시행하게 되었다.

• 학사 E동 개축, 7개 동아리 입주

그 동안 공사를 진행해오던 학사 E동의 동아리방이 완공되어 새롭게 7개의 동아리가 1997년 3월 3일자로 입주하였다. 새로 입주한 동아리는 야구반,바둑 사랑회,해랑사리우, 피닉스,UBF, 낙산 극단,트리 플이다.

지하 2층, 지상 5층의 현대식 강의동 착공식

우리대학은 1998년 현재의 강당 자리에 지하 2층,지상 5층의 현대식 강의동을 신축하기로 하였다. 1998년 5월 29일 강의동 신축을 위한 착공식을 가졌고, 1999년 2월말에 준공하였다. 대지면적이 1,440평의 건물에 모두 35억원의 예산을 투여했다.

2. 교내조경과 상징물

우리대학은 타 대학에 비해 작은 캠퍼스를 갖고 있지만,쾌적하고 효율적인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고,그 결과 현재 공간 효율의 극대화를 이룩하였다.

• 또 하나의 상징탑 ‘깃빌-’ (산업디자인학과 조태병 교수 제작)우리대학 우촌관 광장에 새로운 조형물 ‘깃발’이 설치되었다. 한성학

원의 문화적 공간을 위하여 설치된 ‘영원한 깃발’이라는 이 조형물은 탑 자체가 움직일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지름 4.5m, 높이 12m의 조형물은 4각의 스테인리스 스틸을 용접하여 나선형으로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형태로 주위 환경과 어우러져 새로운 시각적 공간을 창조하는 ‘움직이는 조형물’이다. 한 단위가 40cm인 방으로 구분되어 그 안에서 회전하는 바람개비는 미풍에도 회전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쉬지 않고 움직이며 변모를 갈망하는 한성인의 염원을 깃발에 담아 형상화한 이 조형물은 우리대학의 또 하나의 명물로 자리잡은 것이다.

• 낙산에 초대형 벽화의 길 조성

우리대학을 감싸고 있는 낙산 남문 맞은 편 길에 벽화가 제작되어 지나는 행인에게 미적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우리대학 회화과 허은영 교수가 제작한 이 벽화는 총 길이 150m, 높이1~6m의 초대형 산수화 그림으로 「낙산의 아침」이란 제목을 달았다.

낙산의 아름다움과 자연을 배경으로 구도와 색채를 결정한 한 폭의 산수화이다. 이 그림은 우리 고전의 맛을 느끼게 하면서도 현대적 감각과 평면화 시킨 단순미를 중요시하였다.

마치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평면적 구도가 누구에게나 쉽고 편안하게 다가 올 수 있도록 중점을 두었으며 낙산에 있는 소나무들과 함께 어우러져 소나무,해, 구름 등을 모티브로 삼아 우리의 정서를 배출 한 것이다.

대형건물에 벽화를 제작하는 예는 있으나 길의 옹벽 전체를 화폭으로 삼아 대형벽화를 제작한 것은 획기적인 일로 우리대학의 창조적 감각을 보여 주는 것이다.

• 중문확장 소공원 조성

우촌관 앞 중문이 1995년 11월 10일부터 확장공사가 시작되어 2개 월만에 완공되었다. 담과 기존의 문을 헐고 인근 민가를 구입하여 공 간을 확보하여, 산업디자인학과 고영란 교수의 설계로 길이 27m,높이 2m의 슬라이딩 방식으로 제작된 중문은 주변이 콘크리트로 포장되고 화단과 계단을 설치하여 새로운 쉼터로 자리잡게 되었다.

중문 주변 공간이 확장됨에 따라 차량 및 학생들의 통행이 더욱 편리해졌으며,우리대학의 또 하나의 작은 명소로 학생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 본관에 이미지 마크를 이용한 옥외 상징물 건립

1995년 겨울방학 동안에 우촌관 상단에 새로운 이미지 마크를 제작한 상징물이 등장하였다.

폭 13m, 높이 12m 패널 구조물 형태의 이미지 마크와 교명 ‘한성대학교’가 설치되어 멀리서 보더라도 금방 눈에 띄게 드러난다.

·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 흉상 제막

한성학원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의 흉상이 1996년 우촌관 3층 현관 로비에 세워졌다. 원래 이 흉상은 조각가 김경화(현 공주사대 교수)씨가 1972년에 제작했던 것이다.

흉상의 크기는 높이 60cm로서 청동으로 만들어졌고 120cm의 검정 마천석 기단으로 되어 있다.

우촌 김의형 박사 약력

-1904년 8월 15일 충청남도 공주로 탄천면 견동리 256번지에서 줄생

-1927년 3월 20일 일본체육대학 졸업

-1939년 4월 5일 경성여자의과전문학교 교수

-1945년 9월25일 한성여자중·고등학교 설립 및 학교장

-1950년 3월 2일 중앙교육위원

-1961년 12월 16일 대학핸드볼 협회장-1961년 3월 1일 대한사립 중·고등학교장회 이사

문교부 체육상 심사위원

대한체육회 이사

대한올림픽위원회 이사

-1963년 3월 1일 서울특별시 체육상 심사위원

-1966년 3월 1일 대한체육교원회 회장

-1967년 1월 28일 서울신문사 주최 제13회 한국체육공로상 수상

-1968년 2월 29일 대한체육회 이사

-1970년 1월 30일 재건국민운동 서울시위원회장

-1970년 5월 10일 서울특별시 중등교육회 이사

-1970년12월 5일 국민훈장 동백장 수상 한국 UN 봉사단 이사

-1972년 2월 23일 제10회 대한민국 체육상 심사위원

-1972년 12월 21일 한성여자대학 설립

-1974년 12월 11일 문교부장관 표창-1976년 2월 25일 명예 철학박사 학위수여-1983년 3월 1일 타계· 1997년 조경공사로 새로워진 낙산공원

낙산공원이 날로 변모하고 있다. 6년에 걸친 낙산 조경 사업도 1996년도의 대규모 성토작업 및 자연석 쌓기 공사로 큰 획을 긋게 되었다. 원형탁자 등 휴식시설이 확충되고 교육공간의 연장으로서 야외 강의실·도서관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보다 더 아름답고 기능이 뛰어난 공원으로 가꾸기 위해 공원 정상 부근에 열린 마당을 조성하여 소공연장으로 활용하게 하였다.

한편 교정에서 낙산공원으로 올라가는 진입로는 이전보다 훨씬 넓어져 시원한 모습과 아울러 기능을 확대하여 사용하고 있다.

• 1997년 식목일 낙산 곳곳에 꽃나무 심어

1997년 새봄을 맞이하여 낙산 곳곳에 많은 꽃들이 심어졌다. 남문 근처에는 철쭉 300그루를 심었고,낙산 진입로에는 회양목은 1,000여 그루 심었다. 해마다 많은 종류의 꽃나무가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을 하여 이곳을 찾는 이에게 새로운 느낌을 가져다주게 되었다.

• 쓰레기 소각로 설치로 쓰레기 없는 대학 실현

우리대학에서 발생하는 모든 쓰레기를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쓰레기 소각로가 설치되었다. 시간 당 50킬로그램을 소각할 수 있는 이 소각로를 통해 우리대학에서 발생하는 쓰레기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그 동안 치러왔던 상당 액수의 경비를 약 1/3 정도로

해결할 수 있어서 경제적으로도 많은 이익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더욱 기대할 만한 것은 이 쓰레기 소각로 설치를 계기로 우 리대학에서 발생하는 쓰레기를 완전 분리 처리의 기회로 삼아 환경자정 운동에 앞장서겠다는 의지이다.

가장 효율적인 방향은 대학의 모든 구성원들이 쓰레기를 처음부터 완전 분리해서 처리하는 습관을 기르는 일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이미 행정 부서에서는 재활용 분리를 철저히 시행하고 있으며,앞으로 학생 개개인이 이러한 의지에 동참할 때에 우리대학 쓰레기 처리는 성공적이 될 것이다. 환경관리공단의 품질 검사를 통과하고 성북구청에 신고를 마치고 가동에 들어갔다.

제8절 화합과 조화를 위한 노력

1. 한성가족의 밤

한성가족이 된 이들의 화합을 위한 한성가족 초청 ‘한성가족의 밤’ 행사가 있었다. 이 행사는 한성 교정에서 베풀어졌는데, 한성 가족들이 학교를 좀더 잘 알고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이로써 학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 1995년 한성가족 축제의 밤

1995년 5월 27일 오후 5시,우리대학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성대한 잔치를 가졌다.

이 날은 학생회관과 과학관 증축을 기념하는 동시에 한성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자기가 소속한 대학이 어떠한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는가를 가족들에게도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이 자리에는 이희순 한성학원 설립자, 서정희 명예 이사장, 김옥자 이사장 가족과 이용남 총장 가족을 비롯한 총 400여명이 참석하여 4시간 동안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행사는 모누 3부로 진행되었는데, 1부에서는 한성대학의 발전상을 알리는 대학 홍보 슬라이드가 소개되었으며,2부는 저녁 만찬, 그리고 3부는 유명 가수 초청음악회의 순서로 이루어졌다. 한편 가족들 가운데는 어린 자녀들이 함께 따라와 부모의 직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 날 출연한 가수 중에는 우리대학 강은석 교수의 친동생인 강은철,김원중 교수의 처남인 권인하,그리고 탤런트로 활약 중인 우리대학 무용학과 노현희양이 포함되어 있어 한성 가족 한마당의 뜻을 더욱 새롭게 하였다.

• 1997년 21세기를 향한 큰 잔치 ‘한성가족의 밤’

한성가족의 밤이 1997년 5월 17일 우리대학 낙산야외공원과 노천극

장에서 열렸다. 해마다 고조되는 관심과 늘어가는 참여 속에 열린 ‘한성 가족의 밤’은 1997년으로 세번째를 맞이했다.

500여명의 교수와 직원이 가족 동반으로 참여한 가운데 열린 이 행사는 특별히 우리대학 대단위 한성주차장이 준공된 것을 함께 기념하여 더욱 큰 의의를 가졌다.

내빈들은 한성주차장 준공식을 가진 뒤 주차장 내부를 둘러보고 특별 전시실에 마련된 대학발전상 및 흥보물을 관람하였으며,이어 낙산 야외공원에서 서정희 명예이사장과 김옥자 이사장 그리고 이용남 총장이 참석한 가운데 행사 개회식을 가졌다.

서정희 명예이사장은 “한마음으로 단결하여 학교를 크게 발전시킨 모든 한성 가족에게 감사한다”고 말하고 더욱 분발해 주기를 당부하기도 하였다.

참석자들은 놀랍게 변모되고 단장된 낙산야외공원의 모습에 찬탄을 아끼지 않았으며 화사하게 꾸며진 경관 속에서 만찬을 즐겼다. 또한 노천극장에서 유명 가수와 인기 개그맨 엄용수씨가 진행하는 음악회

와 즐거운 단합의 시간을 가졌다.

2. 지역민을 위한 사회교육 프로그램

우리대학은 대학이 지역사회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매년 지역주민을 위한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왔다. 이 프로그램은 해가 거듭될수록 지역주민의 요구를 적극 수용하여 강좌수를 대폭 늘여가고 있다.

· 1996년 지역주민을 위한 방학 특강

컴퓨터 교실, 어린이 축구교실 성황

1996년 여름방학에 이어 겨울 방학에도 지역주민을 위한 방학 특강이 개설되었다. 어린이 축구교실과 컴퓨터 강좌가 그것이다.

이 두 프로그램은 이미 여름 방학에 시행해 본 결과 주민들의 호응이 좋았는데, 겨울방학에도 많은 수강생들이 참여하였다. 특히 어린이 축

구 교실은 왕년의 국가대표 선수인 박종원 우리대학 감독이 직접 지도를 맡게 되어 한층 열기를 더했다. 이 두 강좌는 모두 수강료 없이 무료 봉사로 제공되었다.

- 컴퓨터 교실

기간 : 1996년 1월 22일~2월 3일

시간 : 10:00~14:00(매일)

장소 : 본교 전자계산소

- 어린이 축구교실

기간 : 1996년 1월 8일~12일

시간 : 10:00~12:00(매일)

장소 : 본교 대운동장

· 1997년 더욱 다양해진 지역주민을 위한 사회교육 프로그램

지역 주민을 위한 사회교육 프로그램이 다채롭게 개설되어 많은 호응을 받은 가운데 진행되었다. 1997년도에는 특히 재테크 교실, 생활경 제 교실,무역통신문 교실 등 경제분야가 개설되어 다양한 강좌가 한여름의 무더위를 식혀주었다.

당시 개설되어 좋은 반응을 얻은 강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컴퓨터 교실,PC통신 및 인터넷 교실,재테크 교실, 생활경제 교실, 무역통신문 교실,탁구교실, 어린이 축구교실

제9절 변화를 위한 진통과 임시 이사체제

1. 총장대행 체제와 임시이사 체제

· 1997년 12월 재단내분으로 임시이사체제로

1997년 재단 분규로 김옥자 이사장을 비롯하여 이사 전원이 퇴진하고 12월 23일 교육부 임시이사가 파견됐다. 그리고 이용남 총장은 12

월 30일 사임했다.

학교법인 이사로 있던 서정희 이사 등 11명의 이사진이 1997년 12월 22일 사임함에 따라 교육부로부터 파견된 임시 이사진 11명으로 임시이사체제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1998년 첫 소집된 이사회에서 박병호 이사를 이사장으로 선임한 후 학원의 안정과 발전을 위하여 노력을 경주하였다. 당시 이사진은 다음과 같다.

박병호 이사장(전 서울대 법대 학장)

이영수(경기대, 교수신문 발행인) 교수

차인석(서울대, 교육개혁위원회 위원) 교수

길희성(서강대) 교수박은정(이화여대) 교수

김창국(변호사,전 서울변호사협회 회장)

류해돈(전 서울시 부교육감)

전영운(중앙대) 교수

권영빈(중앙일보 논설위원,교육개혁위원회 위원)

정종섭(변호사,건국대) 교수

임시이사회는 교육부 감사결과를 바탕으로 이전의 재단이사회가 절차에 따라 운영되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우선적인 시정을 단행하여, 직위해제한 두 명에 대하여 원인무효화하고 정기승진에 누락된 교수들에 대하여 소급적용하여 승진토록 하였다. 재단내분은 사실상 1997년 11월부터 시작되었는데,일련의 사태의 흐름 속에서 학교 구성원들은 나름대로 이에 대한 대처를 고민하고 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리하거나 밝혀왔다. 이러한 진통은 한편으로는 학생, 교수, 교직원들이 학교 주체로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문제해결을 위한 능동적인 움직임을 보임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고민하는 중요한 시간들을 갖게 했다.

· 윤경로 총장 대행체제

이용남 총장을 비롯한 관련 보직교수들도 사표를 제출함에 따라,1998년 1월 28일자로 윤경로(사학과) 교수가 총장 직무대행 및 교무처장으

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2월 2일 보직개편이 단행되어,윤경로 총장대행 체제가 가동되었다.

윤경로 총장대행 체제 하의 보직개편은 다음과 같다.

학생처장: 박명환(산업공학과) 교수

사무처장: 이상한(경제학과) 교수

기획실장: 유병호(무역학과) 교수

도서관장: 이정숙(국어국문학과) 교수

대학원장: 이석주(국어국문학과) 교수

이와 함께 2월 7일 과장급 교직원, 2월 13일 일반직원의 인사이동이 이루어졌다.

2. 행정조직 개편과 총장선출위원회 구성

· 1998년 1월 행정조직 개편하여

대학설립당시 우리대학의 행정조직은 교무처, 학생처, 사무처로 시작 하였으나 1975년 2월 직제개편으로 처를 과로 낮추었다. 1980년 10월 다시 처로 승격하여 교무처,학생처,사무처로 개편하면서 교무처에 교무과와 학적과를 학생처에 학생과와 행정과를 두었다. 사무처는 1991년 폐지하고 총무과 및 경리과를 총장직속기구로 하였다.

1995년 교무처 학적과를 폐지하고 연구처를 신설하여 연구진흥과 및 국제교류과를 그 아래 두었다. 1998년 1월 사무처를 재신설하여 총무과 및 경리과를 그 아래 두었으며 5월에 연구처를 기획실과 통폐합 연구기획처로 개편하여 그 아래 연구지원과,국제교류과, 기획과를 두었으며, 시설과, 관리과는 사무처 소속으로 하였다.

우리대학의 행정조직 개편에서 기획실의 신설 및 사무처의 폐지 및 재신설은 우리대학의 복잡한 학내 문제와 연결되어서 이루어졌다.

1982년 기획실의 신설은 우리대학을 명실상부한 대학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신설하였으나 1984년 학내문제와 그로 인한 외부에서 영입

한 기획실장의 중도 하차로 기획실이 축소 폐지되었다가 1984년 재신설 되었다.

사무처의 경우는 대학조직에 없어서는 안될 조직이나 1990년 학내 사태 이후 법인에서 사무처의 업무를 일부분 관장하다가 1998년 임시 이사체제가 되면서 다시 사무처를 부활하고 기획실에 있던 시설과,관리과도 그 소속으로 하였다.

• 교내연구비 신설 및 교원연구년제 확대

1998년 2월 교원의 학문연구를 장려하고 대학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교내연구비를 신설하였다. 당초 1998년 예산 수립시 교직원 인건비 인상율을 5%로 책정하였으나, 3%만 반영하고 2%에 해당하는 2억6천3백여만원을 연구비 명목으로 전환하여 전 교직원을 대상으로 지급하였다. 또한 이 해 4월에는 행정학과 이창원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는 대학발전위원회에서 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한 결과를 토대로 교원연구년제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였다. 주요 내용은 우리대

학 6년이상 재직한 교원을 대상으로 매년 전임교원 총수의 10% 이내로 하되 학과별 1명을 초과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연구년제를 허용키로 하였다.

• 본교 총장 선출을 위한 총장선출위 구성

1998년 1월 제14대 박병호 이사장 그리고 7월 제15대 차인석 이사 이 연이어 취임하면서 새로운 대학 분위기 쇄신을 위하여, 총장 선출을 위한 총장추천위원회를 구성하여 공개 모집키로 했다.

총장대행체제의 출발부터 총장 선출을 위한 추천위원회의 결성을 놓고 여러 차례 학교 구성원들과 이사회 간의 주요 쟁점으로 논의되었다. 오랜 논의 끝에 법인 이사회에서는 우리대학 최초로 공개채용을 통한 총장 선출방안을 제시하였고, 이에 따라 교수대표(인문대학,사회대학, 이공대학,예술대학)8인,직원대표 2인, 학생대표 2인, 사회 저명인사 2인,동문회대표 1인 등 15인으로 구성된 총장추천위원회가 발족 하였다. 총장 선출은 추천위원회에서 3명을 추천한 뒤,법인 이사회에서 최종 선출하기로 했다.

총장 추천위원회의 첫 활동으로 6월 20일 후보자를 공모키로 하고, 추천위원장에 정하경(회화과) 교수를 선출했다. 당시 추천위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교 수 : 고창수(국어국문학과) 이병은(영어영문학과) 박헌영(경제학전공)정하경(회화과) 최해주(의상학과) 김대홍(산업공학 전공) 이재문(전산통계학 전공)

교직원 : 조현호(노동조합위원장,전자정보과 주임) 엄재용(시설관리과)

학생 : 박광식(학생복지위원장, 안공 2) 현낙철(행정 4)

사회저명인사 : 임혁재(중앙대학교 철학과 교수) 김종심(동아일본 논설실장)동문: 하등룡(본교 동문회장)

· 황진수 총장대행과 총장추천위원회의 활동

총장 후보자 공모에 당시 총장직무대행을 맡고 있던 윤경로 교수가 입후보함에 따라 총장직무대행을 사퇴하였다. 이에 따라 새로운 총장

직무대행 겸 교무처장에 행정학과 황진수 교수가 임명되었다. 추천위원회는 일련의 활동결과 외부인사 1인을 포함한 3인(이성근 전 배재대 총장, 윤경로 사학과 교수,강병식 사학과 교수)을 총장후보로 이사회에 추천함으로 활동을 일단락 하였다.

제3장 변화하는 한성대학교,이성근 총장

제1절 제3대 이성근 총장 취임과 보직개편

1. 이성근 총장 취임

1997년말에 발생한 학내분규 사태로 어수선했던 대학의 분위기는 임시 이사진의 파견과 더불어 1998년 10월 이성근 박사가 제3대 총장으로 취임함으로써 수습되었다. 총장선출위원회의 규정에 따라 이사회

는 10월 14일 이성근 박사를 제3대 총장으로 최종 결정하였으며,이해 10월 23일 교직원을 비롯한 많은 내외빈이 참석한 가운데 총장 취임식이 학생회관 소강당에서 거행되었다. 이성근 신임 총장은 취임사에서 “대학은 내일의 문화를 창조하여 가는 요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우리대학이 “새로운 시대가 대학에 요구하고 있는 열린 대학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총장으로서 모든 역할을 다하겠다고 강조하면서 한성대의 새로운 지도자로서의 각오를 표명하였다.

이성근 총장 취임사 전문은 아래와 같다.

교육개혁의 본보기가 될 한성대학교

존경하는 이사장님과 고명하신 이사님 여 러분,그리고 평소 후학들의 교육에 심혈을 쏟고 계신 교직원 여러분, 또한 분주하신 가운데에서도 한성대학의 21세기를 위한 발돋움을 지켜보아 주시고,격려하여 주시기 위하여 멀리 이곳 교정까지 방문하여 주신 내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바입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이 사람이 할 일 많은 한성대학의 책임 있는 직책을 맡게

된 것을 분에 넘치는 일로 생각하며,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흔히들 말하기를,21세기는 문화의 척도가 한 나라의 명운을 가름하게 될 것이라고들 합니다. 어느 의미에서 대학은 내일의 문화를 창조하여 가는 요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21세기는 곧 대학의 시대라고도 말합니다. 20세기를 마감하는 마지막 해가 앞으로 두 달 후에 다가오고 있는 시점에서 돌이켜 볼 때 앞서가는 사회 치고 명문대학이 없는 나라는 없습니다. 그 반대로 뒤에 쳐져 고생하는 나라 치고 명문대학을 갖고 있는 나라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씀드려 나라가 잘 되려면 대학이 그 본연의 길을 잘 수행하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21세기 새로운 시대에 우리 민족사회가 크게 일어서고자 한다면,대학들이 스스로 본분을 깨닫고 일어서야만 합니다. 참된 대학들의 깨우침이 없이는 내일의 이 사회를 떠메고 나갈 훌륭한 재목들이 자랄 수 없을 것입니다. 내일의 민족사회 번영을 위하여서는 우리 한성대학에서 창조적인 지성인들을 길러 내어야만 할 것입니다. 바로 이 터전에서 내일의 예술계를 주도하여 갈 훌륭한 예술인들이 배출되어야 합니다. 이 민족의 통일을 이룩하고 아세아의 평화를 주도할 수 있는 원칙을 중요시하는 경륜 있는 정치인들이 배양되어야 합니다. 기업의 사회적 윤리에 충실한 뛰어난 기업가들이 배출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능력과 양식을 겸비한 훌륭한 공직인들을 길러내어야만 합니다.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문학가,사회사업가, 종

교인을 우리는 길러내야만 합니다. 일그러진 오늘의 우리의 모습을 닮지 않은,의연하고도 당당한 믿음직한 내일의 한국인을 길러내야만 하겠습니다.

일그러진 우리의 모습은 극히 작은 데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태국이나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와 같이 우리들이 현재 부르고 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실제로는 우리 나라의 동남쪽에 위치한 나라들이 아닙니다. 지도를 펴들고 보면 그곳은 분명 우리가 서있는 곳에서 보면 서남쪽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남아시아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남쪽 있는 나라들을 동남쪽에 있는 나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단지 언제인지 모르게 우리의 뇌리에는 서남 지방의 나라들에게 동남아시아 나라라는 고유 명사화된 관념이 박혀 버리게된 것입니다. 그 까닭은 아마도 인도를 지배 하던 영 국인들이 인도에 서서 볼 때 인도네시아가 동남쪽에 있어 Southeast Asia로 부르기 시작한 데에서 비롯되었을 것입니다. 남들이 서쪽을 동쪽이라 부르면 나도 동쪽으로 부른다는,주관을 상실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한 부분을 보여주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후학들을 가르쳐 나갈 것입니까! 교육 개혁을 말하지만,무엇을 위한 교육 개혁이어야 하는가를 되씹어 볼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뜻에서,첫째로 한성대학교는 앞으로 한국학을 중시하여야만 할 것

입니다. 우리를 새롭게 발견하고,참다운 우리의 모습을 세계에 알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설익은 국제인으로 교육하기 이진에, 올바른 한국인을 길러내야 할 것입니디.. 그와 같은 토대 위에서, 우리는 좁아져 가고 있는 국제 사회를 우리 삶의 터전으로 삼을 줄 아는 국제인을 양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갇혀 있는 한국인이 아니라,활짝 열린 내일의 한국인으로 성장시켜 나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풍요로운 21세기를 맞기 위하여 뛰어난 기능인을 양성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향하여야 할 목표는 굴뚝 없는 산업에 공헌하는 21세기형 기능인을 길러내는 것입니다. 산업디자인이나 패션 분야가 그렇고,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분야,보험·금융 분야,조직·관리 분야 등 적은 자원으로 커다란 효용 가치와 윤택함을 가져오게 하면서도 공해를 유발하지 않는 침단 산업의 역군들을 길러내는 데에 심혈을 기울일 것입니다.셋째로,사이버 공간 속에서 창백해져 갈 수도 있는 고도로 조직화되어 있는 미래 사회 속에서도, 훈훈한 인간미와 재치 있는 유머 감각을 잃지 않고, 정의를 식별할 줄 아는 균형 잡힌 가치관과,실천할 줄 아는 정열과 패기를 겸비한 인간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조건을 강화시켜 나아가는 교양 교육에 중점을 두어야만 할 것입니다.

넷째로,한성대학교는 새로운 시대가 대학에 요구하고 있는 열린 대학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고자 합니다. 급속히 변화를 거듭하는 현대 산업사회의 환

경 속에서 사회인들에게 지적 충격을 제공하고 정서적 토대를 제공하는 평생교육의 기능을 강화시켜 나아갈 것입니다. 대학의 사회봉사 기능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사회 교육의 중요성을 결코 외면하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내가 접하여 보는 한성대학교의 학생들은 인격적으로 겸허하면서도,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는 지적 욕구가 강렬하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내가 접해 보는 교수님들은 학자로서의 성취욕도 강한가 하면,양질의 교육을 펼치는 데에 진지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대학의 직원들 역시 교수들과 학생들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데에 열성들이 있습니다. 더구나, 대학의 운영을 총괄하시는 이사님들은 모두들 경륜과 학식이 뛰어나며 누구보다도 대학의 본질을 잘 이해하고 계신 인격자들이십니다. 한성대학교야말로 모두들 해보겠다는 결심만 굳힌다면,교육개혁의 참다운 모습을 어느 대학보다도 확실히 보여줄 수 있는 본보기가 될 수 있는 대학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개혁함으로써 전체를 개혁하고, 새로운 세기를 향한 탈바꿈을 즐거운 마음으로 감내하여 가는 용기를 보여주는 한성인이 되기를 고대하면서, 취임사에 갈음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상과 같은 취임의 포부를 밝힌 이성근 총장은 임기 4년을 눈앞에 둔 2002년 8월 현재까지 임시 이사 체제하에 있는 우리대학을 이끌고

있다.

2. 보직개편

한편 새 총장이 취임함에 따라 대학의 실무를 총괄할 보직개편이 단행되었다. 교무처장에 사학과 윤석효 교수,연구기획처장에 산업시스템공학부 홍윤기 교수,학생처장에 경상학부 권오 교수,사무처장에 경 상학부 홍용식 교수가 각각 임명되었다. 도서관장에는 문헌정보학과 이우범 교수가 임명되었으며 대학원장은 이성근 총장이 겸직하게 되었다.

한편 2000년 11월 기존 보직교수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이성근 총장의 후반 임기 동안 대학의 업무를 책임질 새로운 보직교수들이 임명되었다. 교무처장에 영어영문학부 김용석 교수,학생처장에 미디어 디자인학부 조열 교수, 기획연구처장(기존 연구기획처장의 명칭변경)

에 경영학부 최명규 교수,총무처장(기존 사무처장의 명칭변경)에 경영학부 김길평 교수,도서관장에 영어영문학부 고정자 교수가 임명되었다. 이성근 총장이 겸직해 왔던 대학원장에는 경영학부 연정열 교수가 임명되었으나 연정열 교수는 2002년 2월 정년 퇴임하였고,공석으로 남아 있던 대학원장직은 최근 2002년 8월 이성근 총장이 재겸직하 게 되었다. 한편 김용석 교무처장은 총장 후보로 출마하기 위하여 2002년 8월 2일 사퇴하였고,그 후임으로 교직과 김경배 교수가 임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제2절 대학편제의 변화

1. 학장제 신설

우리대학은 1993년 3월 종합대학교로 승격하면서 4개 단과대학으로 개편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대학 단위로 운영되지 않았다. 그러나 제3대 이성근 총장이 취임하고 모집단위가 4개 단과대학으로 통폐합되면서 1998년 11월 26일 각 4개 단과대학의 업무를 분장관할하기 위한 학장제가 신설되고 이 날 4명의 학장들이 임명되었다. 인문대학장에는 영어영문학과 김용석 교수,사회과학대학장에는 경상학부 김평광 교수, 이공대학장에는 정보전산학부 차운 옥 교수, 예술대학장에는 무용학과 김숙자 교수가 각각 임명되었다.

한편 2000년 11월 보직교수개편이 단행되면서 2년 임기의 4개 단과대학의 학장들도 교체되었다. 인문대학장에 사학과 윤석효 교수,사회과학대학장에 정경학부 정성택 교수, 예술대학장에 회화과 정하경 교수, 공과대학장에 정보공학부 이두성 교수가 각각 임명되어 지금에 이 르고 있다.

2. 모집단위 통폐합과 학부제 실시

1998년 10월 우리대학은 기존의 모집단위를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이공대학,예술대학의 4개 단과대학, 10개 모집단위로 통폐합하였다. 인문대학에는 어문계열(주·야)에 국어국문학과,영어영문학과,인문계열(주·야)에 사학과, 문헌정보학과가 편성되었고,사회과학대학에는 경상학부(주·야)에 경영학 전공,무역학 전공, 경제학 전공, 사회계열(주·야)에 행정학과, 부동산학과가 편성되었다. 한편 이공대학은 정보전산학부(주·야)에 컴퓨터공학 전공, 멀티미디어정보처리 전공(전산통계학 명칭변경), 정보통신공학 전공(정보공학 명칭변경),정보시스템공학 전공(신설), 산업시스템공학부(주·야)에 산업공학 전공, 기계시스템공학 전공(산업안전공학 명칭변경)으로 재편되었다. 마지막으로 예술대학은 의생활학부(주· 야)에 의상디자인 전공(의상학과 명칭변경), 의류패션산업 전공(의류직물학과 명칭변경), 예능계열에 무용학과(주), 회화과(주), 산업디자인학과(주·야)으로 새로이 구성되었다. 총 입학

정원 1,620명으로 전년과 동일하나 야간 정원 940명 가운데 280명을 주간으로 대체하여 주간 960명, 야간 660명으로 바뀌었다.

우리대학의 편제에 있어서 큰 분수령이 된 것은 학부제의 실시였다. 학부제 실시는 오랜 기간 동안 국가 교육정책의 주요 지표 가운데 하나였다. 우리대학은 국가 교육정책에 부응하고 학생들의 전공 선택의 폭을 확대하기 위하여 1999년 10월 14일 본격적인 학부제를 채택하였다. 기존 학과 중심의 체제를 한국어문학부, 영어영문학부, 역사문화학부,지식 정보학부,사회과학부, 경 영 학부,미디어 디자인학부 개편하였고,이로써 무용학과와 회화과만이 학과체제로 존속하고 나머지 학과는 모두 학부로 통폐합되었다. 이에 따라 대학편제는 4개 단과대학,10개학부 28개전공, 2개학과로 구성되어 명실상부한 학부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한편 20이년 6월에는 모집단위 변경으로 기존 사회과학부를 경상학부(무역학 전공, 부동산학 전공)와 정경학부(지식경제학 전공,행정학 전공)로,정보전산학부를 컴퓨터공학부(멀티미디어정보처리 전공, 컴퓨

터시스템 전공)와 정보공학부(정보시스템공학 전공, 정보통신공학 전공)로 분리하였다. 1973년 3월 150명 정원의 한성여자대학으로 출범한 우리대학의 편제는 이제 4개 단과대학,12개학부 28개전공,2개학과, 입학정원 1,620명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대학원 증과·증원

이성근 총장 재임 기간동안 현저한 변화를 맞게 된 분야 가운데 하나는 대학원의 증과· 증원이었다. 1999년 11월 2일 교육부의 인가를 통해 대학원 석사과정 15명,박사과정 5명이 증원되었고, 국제통상정보 대학원에서 명칭을 변경한 국제대학원에 15명, 예술대학원에 20명이 각각 증원되었다. 한편 각각 30명과 20명을 입학정원으로 하는 컴퓨터 신기술대학원과 안전보건경영대학원이 신설되었다. 또한 2000년 7월에는 부동산대학원(20명 정원)이 신설되었고,국제대학원에 국제마약범

죄학과가 경영대학원에 e-business학과가 새로이 증과되었다.

이와 더불어 이 해 10월에는 교육대학원(40명 입학정원)이 신설됨에 따라 대학원은 일반대학원과 8개 특수대학원 등 총 9개 대학원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20이년 10월에는 경영대학원에 서비스 경영학과, 행정대 학원에 지방정부경영학과와 경찰행정학과가 신설되었고 , 교육대학원의 입학정원은 기존 40명에서 34명으로 감축되었다. 대학원 체제의 두드러진 변화 가운데 하나는 교육대학원을 제외한 7개 특수대학원이 2001년 3월 기존 5학기 제에서 4학기 제로 학기를 단축하였다는 것이다. 1987년 11월 9일 경영행정대학원의 설립인가를 받아 출발한 한성대학의 대학원은 이제 규모와 위상에 있어 현저한 발전을 이루어 고급인력의 양성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제3절 교육공간의 확대

대학편제의 변화는 우리대학이 새로운 모습으로 도약하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뚜렷한 징표였다. 비록 학부의 정원은 1998년이래 1,620명으로 변함없이 유지되었지만, 대학원의 정원은 괄목할 만한 증가를 거듭해 왔고 모집단위 통폐합과 학부제 실시는 시대적 조류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조치였다. 그러나 편제와 관련된 구조적 개혁만으로는 대학교육의 질적 향상을 가져 올 수는 없다. 보다 성숙된 교육기관으로 진일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우리대학의 절실한 과제였던 교육공간의 확대가 수반되어야 했고,이 점에서 이성근 총장 재임기 동안 우리대학은 대단히 중요한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1. 공간확충 계획수립

1999년 3월 6일 준공된 강의동은 그 동안 부족했던 교육공간 문제를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강의동이 준공되기 이전인 1998년말부터 대학당국은 기존건물의 안전문제를 해결하고 대학평가를 대비하기 위한 캠퍼스 중장기 발전계획 수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결국 오랜 기간 구성원들의 의견수렴과정을 거쳐 마침내 교수회관, 중앙도서관, 학생회관 별관을 신축하고 대학로에 건물을 구입하는 결정이 이루어 졌다. 그 세부적인 과정과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98년 12월 29일 차인석 이사장과 총장 및 처·관장이 배석한 간담회에서 참석자들은 중앙도서관 안전문제에 관한 논의 끝에 도서관 신축이라는 원칙에 인식을 같이하게 되었고,이사장은 이를 이사회에 안건으로 상정하였으며,1999년 1월 4일 이사회는 사전조치로서 한성학원 공문(학법 99-1 호)을 통하여 도서관이 위치한 학생회관은 물론 대학 내의 모든 건물에 대하여 안전진단을 실시하도록 대학당국에 지시하였다. 이 해 2월 1일 이사회는 도서관 건축규모를 2,600평으로 의결하였고,2월 9일 중앙도서관 건축을 위하여 각각 이사회에서 3명,대

학에서 3명의 위원을 천거하여 건축위원회를 구성키로 하는 결정이 이루어졌다.

한편 이사회의 지시에 따라 2월부터 한 달 동안 전문용역회사가 대학의 각 건물들에 대한 안전진단을 실시한 결과 학생회관에 위치한 도서관은 앞으로 추가적인 하중부과는 무리라는 진단이 나왔다. 또한 우촌관 지하,과학관,진리관의 안전문제가 드러나게 되었고,이에 따라 대학당국은 교내 건물에 대한 종합적 계획을 마련하게 되었다. 첫째, 붕괴가 우려되는 우촌관 지하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중앙도서관 건물을 신축한다. 둘째,지선관 앞에 교수연구실과 무용실기실 그리고 전시실 용도의 교수회관을 건립한다. 셋째,도심형 특성화 대학이라는 취지로 시내 중심지에 적당한 건물을 매입하여 대학의 일부 기능을 이전한다. 넷째, 학생들의 활동공간을 증대한다는 차원에서 학생회관 뒤편에 노천무대를 건립한다. 다섯째, 과학관과 진리관은 보강공사를 실시하여 안전도를 제고한다. 이사회는 같은 해 5월 31일 이 계획을 최종 승인하였으며,교직원을 대상으로 한 의견수렴에서도 긍정적인

결과가 나왔다. 교수의 경우 135명 가운데 97명 (72.2%), 직원의 경우 69명 가운데 51명 (73.9%)가 대학당국이 제시한 계획안에 찬성하였다. 한편 2000년 7월 25일 이사회는 기존의 건축계획에 학생들을 위한 학생회관 별관 건축을 추가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비록 신축건물의 구체적 용도를 둘러싸고 대학당국,교수협의회, 그리고 일부 학과의 갈등이 이후로도 상당 기간 지속되고 또한 학생들이 형사 기소되는 불행한 사태까지 발생하였지만, 교육공간확대라는 목표는 전 구성원의 공감대를 형성하였고, 오랜 기간의 의견수렴 과정을 거친 우리대학은 공간확보에 있어서 현저한 진보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2. 외부건물 매입

1998년말부터 시작된 공간확충 계획은 2001 년 9월 13일 첫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 날 인근 대학로에 위치한 (종로구 명륜동 2가 41-4)

동원빌딩을 80억원에 매입한 것이다. 이는 낙산 캠퍼스의 협소한 부지에 계속적으로 건물을 신축하는 것은 장기적으로는 한계에 이르게 되는 문제점을 해소하고 또한 대학의 다양화· 특성화에 걸맞는 도심형 캠퍼스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50m 거리에 위치한 동원빌딩은 지상 8층,지하 2층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서 대지 1,420m2(427평), 건축면적 637m2(193평),연면적 6,525m2(1,974평)의 규모이며 차량 50대를 수용할 수 있는 주차장을 보유하고 있다. 연면적 1,974평은 우리대학 강의동의 면적(1,430평)을 훨씬 상회하는 규모로서 공간부족의 문제가 크게 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성대학교 대학로캠퍼스’라 명명한 이 건물의 일부 공간은 현재 도심형 예술대학을 구현하기 위한 일환으로 미디어디자인학부가 사용하고 있으며, 기존의 세입자들이 퇴거하게 되면 예술대학 공연장 및 대형강의실을 비롯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될 것이다. 대학로캠퍼스는 특성에 맞는 학과를 도심에 적절히 분산하여 부족한 공간문제를 효율적으로 해결하

고 또한 문화예술의 메카인 대학로에 위치함으로써 학교 이미지를 더욱 높일 수 있게 되었다.

3. 교수회관,도서관,학생회관 별관 착공

대학로캠퍼스를 매입한 지 9일 후인 2001년 9월 22일 우리대학은 공간확대를 위한 또 하나의 이정표를 세웠다. 이 날 오전 10시 한성대학의 면모에 대변화를 가져 올 교수회관,도서관, 학생회관 별관(동아리동) 신축을 위한 기공식이 거행되었다.

이 공사는 2000년 7월 현상설계 공모방식으로 설계업체를 선정하였는데,교내외의 추천을 받은 11개 업체가 현장설명회에 참여하여 5개의 업체가 현상공모에 접수하였다. 7월 28일 엄격한 심사에 의해 주식회사 공간종합건축사무소가 설계업체로 최종 선정되었다. 심사는 공정성과 투명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심사당일인 7월 28일 오전 7시에 조달청의 건축설계 전문평가위원 명단에서 무작위로 전화 통화하

여 심사가능 여부를 확인한 후 5명(민철홍 서울대 교수,신범식 서울시립대 교수,안경환 수원대 교수, 오인욱 경원대 교수,이경훈 단국대 교수)을 선정하였고,이들은 법인추천 심사위원인 전영운 이사와 대학추천 심사위원인 이우범 도서관장과 함께 심사위원회를 구성하여 토의절차 없이 투표에 의해 공간종합건축사무소의 설계를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당선작으로 선정된 설계작품은 이 해 7월 29일 건축소위원회의 보고를 거쳐 이사회의 승인을 받았으며,대학당국은 8월 9일에 공간종합건축사무소 측과 교수회관,도서관에 대한 설계 용역계약을 체결하였다.

설계업체 선정 후 교수회관,도서관과 별개로 진행되어 온 학생회관 별관의 설계를 공간종합건축사무소와 협의한 결과, 교수회관,연구동 설계에 학생회관 별관의 설계를 무료로 포함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설계가 시작된 9월 이후 학교당국과 공간종합건축사무소는 3개 건물에 대한 시설 설비와 공간배치 등의 문제에 대하여 여러 번의 회의와 의

의 견조정을 통해 우리대학의 실정에 보다 적합한 용도로 설계를 실시하였다.

한편 2001년 8월 18일 우촌관 회의실에서는 시공업체 선정을 위한 현장설명회가 열렸다. 이 날 현장설명회에는 그 동안 건축소위원회에서 시공능력 순위 30위 이내의 업체 중 경영상태와 재무구조 등을 충분히 검토하여 1차 선발된 10개 업체 중 8개 업체가 참여하였다. 우리 대학이 제시한 조건에 맞추어 심사를 한 결과 2001년 9월 1일 최종적으로 주식회사 삼성건설이 시공업체로 낙찰되었다.

총 공사비 150억원이 투입되는 이 공사를 통하여 우리대학은 총 22,807.75m2(6,889평)의 교육공간을 새로 확보하게 되었다.

20이년 9월에 착공된 교수회관과 학생회관 별관은 각각 연건축면적 6,902.26m2(2,088평)과 1,838.88m2(556평)으로 건립되며,2002년 3월에 착공된 도서관은 연건축면적 14,066.61m2(4,255평)의 공간을 보유하게 된다. 지선관 앞 분수대 자리에 건립되고 있는 교수회관은 지하 1층, 지상 7층 철근콘크리트 구조로서 우리대학 거의 모든 교수들의 연구실을 수용하게 된다. 학생회관 별관은 열악한 시설에 놓여 있던 동아리들의 공간으로 사용될 예정이다. 1996년 공간상의 문제로 학교가 구

입한 주변 민가에 둥지를 튼 이래 동아리들은 좁은 공간과 낙후된 시설로 원활한 활동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으며,더구나 동아리가 현재의 43개로 늘어나면서 동아리 공간확보는 시급한 당면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낙산 자락을 깎아 건설될 학생회관 별관은 지상 5층으로 각 층마다 5~9평 규모의 동아리실과 소규모 공연장이 들어갈 예정이다. 한편 기존의 민주광장 자리에 건립되고 있는 도서관은 지하 2층, 지상 6층의 건물로 지하에는 무용실기실, 대형강의실,박물관 등이 들어서고, 1층은 연속간행물실, 2층은 정보자료과, 도서관장실, 갤러리(Gallery), 3층은 인문과학 열람실, 4층은 사회과학 열람실,5층은 자연과학 열람실,6층은 예술 열람실, 음향자료실,시청각실 등으로 사용되고,3층부터 5층의 일부는 일반열람실로 사용되게 된다. 2002년 9월 초에 교수회관이 완공되고 곧 이어 학생회관 별관(2002년 10월 완공 예정)과 도서관(2003년 6월 완공 예정)이 건립되면 기존의 도서관과 연구실은 강의 및 실습공간으로 재배정되고 이에 따라 교사확보율이 상승하여 공간부족 현상이 상당부분 해소되게 된다. 턱없이 부족했던

강의실과 문화공간,교내 여기 저기에 흩어졌던 열람실,열악한 동아리 시설에 시달려 온 한성대학의 구성원은 이제 보다 나은 교육환경에서 교육과 연구,수업과 학생활동,그리고 행정업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제4절 최우수 대학으로 거듭난 한성대학

‘작지만 알찬 대학’ 이는 우리대학이 추구해 온 목표였다. 2000년 2월 2일 한국대학교육협의회에서 발표한 1999년도 대학종합평가 인정결과 및 평가점수에 의하면 ‘작지만 알찬 대학’이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우리대학이 이를 실현하고 있음을 명백히 입증하였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주관한 1999년도 대학종합평가에서 우리대학이 학부기준 최우수 대학으로 선정된 것이다.

교육,연구, 사회봉사,교수, 시설·설비,재정·경영 등 6개 영역에

서 실시된 평가에서 우리대학은 학생수 1만명 미만의 18개 일반대와 10개 산업대 등 총 28개 대학 가운데 교수 영역을 제외한 5개 영역에서 우수판정을 받아 최우수 대학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우수대학의 인정기준은 평가영역별 총점의 90%이상으로,우리대학의 평가점수를 구체적으로 보면,교육영역에서 120점 만점에 117.1 점(100점 환산 점수로 97.58점), 연구 영역에서 65점 만점에 60.37(100점 만점에 92.88점),사회봉사 영역에서 35점 만점에 35점(100점 만점에 100점), 시설설비 영역에서 W0점 만점에 95.아점, 재정경영 영역에서 100점 만점에 91.2점으로 우수대학으로 인정을 받았고, 교수 영역에서는 80점 만점에 기점(100점 만점에 88.75점)을 얻어 대부분의 항목에서 높은 점수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종합하면 우리대학은 총 500점 만점에 469.68점 (100점 만점에 93.94점)을 기록해 18개 일반 대학교 가운데 상위 3개 대학교 안에 포함된 것이다.

대학종합평가에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우리대학은 오랜 기간 동

안 자체평가위원회를 구성하여 매년 자체평가를 실시하였고,이를 통해 교육목적과 교육과정 개선, 우수 교원 확보 및 교육시설의 확충, 행정업무의 전산화 등 외형적 평가지표 관리와 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다각도로 추진해 왔다.

특히 대학종합평가에 앞서 우리대학은 기숙사를 신설하였고, 도서관 공간확대,장서구입 예산확보,교수업적 평가제 도입, 학술연구기금 조성,교내연구비 지원,사회교육원의 활성화, 학과 홈페이지 제작 등을 추진하여 내실을 기해 왔다.

더욱이 우리대학은 1990년부터 우수 교수 확보를 대학발전의 최대 과제로 삼아 평가가 있었던 1999년까지 매년 10명 이상의 우수한 신임교수를 초빙했고, 전자정보관 개관, 학생서비스센터 설치, 전산망 구축 등 교육환경 개혁에 지속적인 투자를 해왔기 때문에 평가의 좋은 결과는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대학은 21세기 정보화 시대를 선도해 나갈 창의적 사고와 전문적 지식을 가진 인재를 양성하는 미래형 대학으로 거듭나기 위해 1999년 중장기 발전 계획안을 수립하였고 이 계획안 역시 우리대학의 발전성에 대한 평가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우선 교육시설 분

야에서 위에서 언급한 교수회관,중앙도서관, 학생회관 별관의 건립계획과 예술대학을 최고 수준의 도심형 예술대학으로 특성화하기 위한 청사진의 준비 등은 심사위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학사개혁위원회를 구성하여 교과과정 개선작업을 추진한다는 계획은 21세기가 요구하는 대학교육 혁명을 주도적으로 실천하여 우리대학은 특성화된 21세기 대학교육의 전형으로 이끌 수 있는 뛰어난 추진과제로 평가받았다. 물론 평가와 상관없이 교육여건을 제고하기 위해 독자적으로 추진한 사업도 있었지만 이 역시 결과적으로 평가에 긍정적으로 반영되었다.

1999년도 대학종합평가에서 우리대학이 최우수 대학으로 선정된 것은 대내외적으로 우리대학을 보는 시각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또한 한성의 구성원들에게 우리대학이 ‘작지만 알찬 대학’이라는 긍지를 심어 놓았으며,나아가 21세기를 선도할 명문대학으로 도약하기 위 해 더욱 분발하는 전환점이 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한편 1999년도 대학종합평가를 앞두고 제정된 대학헌장은 앞으로도

향후 우리대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목표를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한성대학교 대학헌장

제1장 총칙

저1조 (설립목적)

한성대학교는 진리·지선(眞理·至善)이라는 건학이념에 입각하여 민족정신의 계승과 인류 사회발전에 기여하는 심오한 이론을 연구·교육하며,봉사 정신이 충만한 지도적 인격을 함양한다.

제2조 (교육목표)

본교의 교육목표는 다음과 같다.

1. 전통문화를 계승하는 올바른 한국인을 양성한다.

2. 세계적 가치기준에 부합하는 건전한 민주 시민을 양성한다.

3. 정보화 사회에 필요한 창의적 인재를 양성한다.

4. 문화·예술적 소양을 갖춘 지성인을 양성한다.

제2장 교육과정

제3조 (특성화 방안)

본교는 사회 각 분야의 지도자와 다기능 진문인을 양성하는 한국 제일의 도심형 대학을 구현하기 위한 특성화 방안을 다음과 같이 정한다. [본교는 21C 대한민국의 지식 기반 산업을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여 관련 연구분야를 선도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특성화 방안에 의거 구체직인 특성화 정책을 수립하도록 한다.]

1. 한국학 인구의 활성화

2. 도심형 에술 디자인 대학의 육성

3. 경영 및 정보화 지식에 기반하 신문 인력의 양성

제4조 (개실 학부의 발전 방안)

1. 대학,학부 또는 제일의 편재는 학칙으로 정한다.

2. 각 개설 학부는 건학이념과 교육목표에 근거하여 각 교육단위별로 교육목표와 특성 및 발전방안을 수립하여 비치한다.

세5조(교육과정 편성과 운영)

1. 교과과정은 학부, 계열, 학과 또는 전공단위로 편성된다.

2. 교무처장은 총장의 결재를 받아 교과과정을 편성한다.

제3장 교육여건

제5조 (교원확보)

1. 교육목표의 달성과 교육 및 인구의 수월성을 제고하기 위하여 대학의 여건과 환경에 부합하는 교원확보계획을 5년 주기로 수립하여 운영한다.

2. 진임교원 법정정원 미달분은 교원직제를 다양화하여 객원교수. 대우교수,특임교수,진임교수 등을 임용할 수 있다.

3. 교무처장은 매년 6월 30일까지 연구기획처장과 협의,총장의 결재를 얻어 다음 연도 교원충원재획을 수립한다.

4 대학설립운영규정에 의한 전임교원의 법정정원과 교원확보계획은 별도로 비치한다. 제7조 (지적·교사시설 및 교육자료)

1. 본교는 쾌적하고 효율적인 교육·연구환경 조성에 필요한 과지 및 교사시설을 충분히 확보하여 양질의 대학기반시설을 제공한다.

2. 대학설립운영규정에 의한 본교의 지적시설과 교사시실 및 도서관, 진산시설 등 교육설비 자료의 확보계획과 현황은 연구기획처에 비치한다.

제8조(연구부속·기타시실)

1. 본교는 양질의 교육 및 연구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교육기본시실 이외에 연구·부속·기타 시설을 중분히 확보한다.

2. 본교의 연구·부속·기타 시설 확보계획과 현황은 연구기획처에 비치한다.

제4장 학사관리

제9조 (학생선발)

1. 학생선발의 기본방향은 우수한 잠재력을 가진 학생을 선발하여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데 있다.

2. 학생선발의 세부적인 방법 및 기준은 학칙 및 모집단위별 입학요강으로 정한다.

제10조(학생정원관리)

1. 본교는 국가와 사회의 인재수요에 부응하는 교육을 실현하기 위하여 학생정원을 탄력적으로 운영한다.

2. 학생정원에 관한 사항은 본교 학칙에 의하여,개설학과(부) 단위로 관리·운영함을 원칙으로 한다.

3. 교내 진과(부) 및 편입학은 개설학과(부)별 입학정원 내에서 허가할 수 있으며,학사학위를 취득한 자의 학사 편입학은 입학정원 외로 허가할 수 있다.

4. 학생정원관리에 관한 사항을 심의하기 위하여 학생정원조정위원회를 둔다.

제11조 (학기)

1. 학년은 3월 1일부터 다음해 2월 말일까지로 한다.

2. 학년은 다음과 같이 2학기로 나눈다.

① 제 1학기 : 3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② 제 2학기 : 9월 1일부터 다음해 2월 말일까지3. 진항의 학기 외에 계 절학기제를 둘 수 있으며, 그에 관한 구체 적 인 사항을 별도 세칙으로 정한다.

4. 수업일수는 매 학년 30주(매 학기 15주) 이상으로 한다.

5. 정기 휴업일은 다음과 같다.

① 하기휴가② 동기휴가

③ 일요일 기타 국정 공휴일

④ 개교기넘일

6. 임시휴업 및 휴업기간의 변경은 필요에 따라 총장이 정한다. 휴업일 이라도 필요할 때에는 실험실습 등을 과할 수 있다.

7. 수업년한은 4년으로 한다.

제12조 (대학간 학술교류 등)

1. 본교는 다음과 같은 목적을 위하여 국내외 대학간 학술교류를 촉진하며,구체적인 방법과 절차 등에 관한 사항은 별도로 정한다.

① 대학역량의 국내외 확산

② 교원의 연구수준 향상 및 연구의욕 제고

③ 학생의 교육수준 제고와 학습의욕 고취와 견문확대

2. 국내외 대학간의 학점 상호인정 및 교육과정 공동운영에 관한 시행방안을 수립·운영한다.

3. 국내외 대학간 학술교류 등의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하여 각종 지원정책을 수립·운영한다.

제5장 대학운영

제1절 인사관리

제13조 (교직원의 채용기준)

1. 우수한 교직원을 임용하기 위하여 합리직이고 객관적인 임용기준을 수립하여 시행한다.

2. 교직원의 임용기준은 대학 교직원 자격에 관한 관계법령과 법인정관,교원임용규정 및 직원인사규정이 정하는 바에 따른다.

3. 전임교원의 신규임용·승진임용·재임용은 연구업적, 교직경력 및 그와 관련된 활동상황 둥을 고려하여 교원임용규정에 의해서 결정한다.

4. 직원의 신규임용과 승진임용은 인사규정에 의해 소관업무를 수행할 능력과 자질 등을 고려하여 결정한다.

5. 교직원의 인사에 관한 중요사항을 심의하기 위하여 교원인사위원회와 직원인 사위원회를 둔다.

제14조 (교직원 채용절차)

1. 교직원 임용질차의 합리성,공정성, 투명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명료한 임용절차를 수립·시행한다.

2. 직원의 신규임용은 공개징쟁을 원칙으로 하고,인사규정에 따라 총장의 제청으로 이사장이 임명한다.

3. 교원의 신규채용은 다음의 절차를 거친다.

① 교무처는 응모자의 공식적인 결격사유 및 자격요건을 심사한다.

② 학과 전체교수회의는 서류심사 후 임용후보자를 5배수로 추친한다.

③ 5배수로 추천된 임용후보자의 최근 논문들을 외부심사하고, 공개강좌를 한 후 3배수로 추천한다.

④ 총장은 임용후보자 면접 후 임용대상자를 선정한다.

⑤ 교원인사위원회는 임용대상자에 대한 임명제청 동의 여부를 결정한다.

⑥ 총장은 임용대상자의 임명을 법인에 제청한다.

⑦ 이사장은 교원을 임명한다.

4. 교직원 임용에 관한 기타 세부적인 절차 및 심사지침은 별도로 정한다.

제15조(교원평가)

1. 교원의 능력개발을 촉진하고 교육·연구·봉사의 질적 수준 향상을 위하여 교

원업적평가제를 시행한다.

2. 교원들의 업적평가는 교육·연구·봉사 등의 영역을 구체적으로 항목화한 기준에 따라 객관성·공정성·투명성이 반영된 종합적인 평가가 되게 한다. 각 영역별 평가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교육업적평가는 수업담당 실적,강의계획서 작성 및 제출, 학칙에 의한 성적평가, 학생지도 열의,강의평가를 기준으로 학기 단위로 누계 합산한다.

② 연구업적평가는 학술논문, 학술저서, 학위논문, 학술발표,특허 및 지적소유권,학술 관련 수상 및 상훈, 외부연구비 수탁실적 등으로 평가하여 누계 합산한다.

③ 봉사업적평가는 교내봉사,교외봉사,학회활동,기타 봉사활동, 상훈실적, 교수회의 및 연수회 참여 실적 둥을 기준으로 학기 단위로 평가하여 누계 합산한다.

3. 교원에 대한 평가는 교원업적평가규정에 의하고,그 결과는 승진임용과 재임용 및 연구비 지원 등의 기초자료로 활용한다.

4. 교원업적평가의 공정성 확보를 위하여 교원업적평가위원회를 둔다.

제16조 (교직원의 질 제고를 위한 계획)

1. 교직원이 자기 전문분야에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운영 한다.

2. 각 학과(부),단과대학 및 연구소는 정기적·부정기적인 학술세미나를 개최하여 교원의 교수능력과 연구능력을 향상시키는 기회로 삼는다.

3. 교원의 국내외 연수 기회를 연차적으로 확대하고,각종 학술활동에 대한 지원체재를 강화한다.

4. 교직원의 질 제고를 위한 계획은 연구기획처에 비치한다.

제2절 재정

제17조 (재정확보 방안)

1. 대학운영을 위한 정규적 일반 재원 확보방안은 다음과 같다.

2. 대학운영을 위한 비정규적 특별 재원 확보방안은 다음과 같다.

① 학생등록금의 적정화와 표준화: 계열별,전공단위별 차등화

② 대학 재정 관리·운영의 효율화: 재정 계획 및 예산집행의 효율화

③ 발전기금의 조성, 확대

④ 대학·학교법인간 협동을 통한 수익사업의 전개

제18조 (발전기금 조성)

1. 본교는 교육 및 연구의 수월성 제고 등 대학기능의 활성화와 장기적인 발전을 위하여 대학발전기금을 모금한다.

2. 대학발전기금의 모금과 관리를 위한 다음의 계획을 수립하여 운용한다.

① 대학발전기금 모금계획 및 세부실천방안

② 대학발전기금의 운용계획

③ 모금 프로그램의 개발

3. 대학발전기금은 다음의 목적으로 사용함을 원칙으로 한다.

① 장학금 확충

② 연구 출판 지원

③ 도서관 장서 확충

④ 학교시설 보완

⑤ 기타

4. 대학발전기금의 조성,중식 및 운용을 효율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발전기금 조성 및 운영위원회』를 둔다.

제19조 (재정공개)

1. 예산편성과 집행내역 및 결산사항에 대한 회계법인의 감사결과는 재정운영의 투명성과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공개한다.

2. 재정운영 상태는 주요 일간지 및 교내외 언론·통신매체를 통하여 공개한다.

3. 재정운영 상태의 공개범위는 법인회계와 학교회계로 한다.

제20조 (재정운영의 공정성 확보를 위한 방안)

1. 재정운영의 민주화·합리화·효율화를 실현함으로써 공정성을 확보한다.

2. 예산편성은 사학기관 재무·회계규칙 및 특례규칙에 준거하여 본 대학교 장·단기 발전계획에 따라 기본방향과 지침을 실정하고,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편성한다.

3. 예산집행은 사업 우선 순위와 가대효과 등을 감안한 예산집행원칙에 따라 회계법규를 준수하여 효율적으로 예산을 집행한다.

4. 예산의 집행과정 및 결산에 대한 심사·분석을 분기마다 실시하며,그 결과가 차기 예산 편성과정에 최대한 반영될 수 있도록 한다.

5. 재정운영의 효율성 제고 및 집행의 적법성을 위하여 내외부 감사제도를 의무화한다.

6. 재정운영에 관한 제반사항을 논의하기 위하여 관련 위원회를 둔다.

제21조 (법인의 수익용 재산 확보계획 및 관리)

1. 수익용 재산이라 함은 학교법인이 설치·경영하는 학교의 경영에 필요한 재산 중 수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말한다.

2. 법인은 수익용 재산을 확보하여 관리·운영함으로써 효율적인 대학운영을 지

원하며, 학문발전에 기여한다.

3. 법인의 수익용 기본재산의 운영·관리는 정관에 의거 이사회의 건의에 따라 운영 한다.

4 법인의 수익용 기본재산내역은 별도로 비치한다.

제6장 후생복지

제22조 (학생장학급)

1. 본교는 건학이념에 의거 우수한 잠재력을 가진 학생을 유치하고 학습의욕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교내외 장학재원을 확보·지원한다.

2. 장학재원 확보 및 장학제도 운영에 관한 사항을 논의하기 위하여 장학위원회를 둔다.

3. 『장학금지급규정』은 따로 정한다.

제23조(학생 자치기구 지원)

1. 학생의 자융성에 입작한 자치 동의 신장과 진공분야의 자유롭고 창조직인 학문연구 및 실천을 위하여 총학생회하 두이 학생활동에 대하여는 대학에서 행·재정의 지원을 한다.

2. 학생회의 원활한 학생활동을 지도 육성하기 위하여 학생지도위원회가 두고 그 기능,구성 및 운영 등에 관한 규칙은 이를 따로 정한다.

제24조(교직원 복지)

1. 본교는 건전하고 쾌적한 복지환경을 추구함으로써 교직원으로 하여금 안정된 학교생활을 영위토록 하여 교육 넷 연구의 효율성을 향상할 수 있도록 함을 교직원 복지의 목표로 한다.

2. 교직원 복지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적정 수준 이상의 후생복지 시실을 갖추고 이를 관리·운영하며,제도의 수립 및 운영방법 등 구체적인 사항은 별도로 비치한다.

제25조(학생 진로지도 및 취업 대해)

1. 본교는 학생이 진로 및 취업정보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각종 프로그램 운영 및 지도대책을 수립하여 제공한다.

2. 학생의 대학생활 상담 및 진로지도를 위하여 학생생활연구소를 두고 학생종합서비스센터에 취업정보실을 둔다.

3. 취업 정보 제공 및 취업대책 수립·시행에 관한 사항을 논의하기 위하여 취업대책위원회를 둔다.

4 전임교원의 진로 및 취업지도실적은 업적평가에 반영토록 한다.

제7장 장·단기 발전계획

제26조 (장기발전계획)

1. 본교는 장·단기 발전계획을 수립하여 본 대학교의 발전을 위한 지침으로 활용하다.

2. 장기발전계획의 수립은 기획위원회가 주관한다.

제8장 보칙

제27조 (대학헌장의 보완)

본교 헌장은 학교법인 한성학원 이사 정수 3분의 2이상의 찬성에 의한 이사회의 의결을 거쳐 누가 기록하는 방법에 의하여 수정 보완될 수 있고,그 내용을 교육부장관에게 제출한다.

제28조 (시행일)

이 헌장은 1999년 8월 일 공표한다.

부칙

이 헌장은 년 월 일 개정 공표한다.

제5절 이사회 구성의 변동

1997년 말에 발생한 학내분규 사태로 학교법인 한성학원의 서정희 이사를 비롯한 11명의 이사진이 1997년 12월 22일 사임하면서 우리대

학은 교육부에서 파견된 임시이사체제로 들어갔다. 이성근 총장이 부임하기 전 제14대 박병호 이사장(1998년 1월 15일 취임),제15대 차인석 이사장(1998년 7월 6일 취임) 체제로 존속해 온 임시이사회는 1999년 8월 개정 공포된 사립 학교법에 명시된 임시이사의 임기는 2년에 1회에 한하여 연임할 수 있고 기존 임시이사의 임기는 12월 31일자로 한다는 규정에 따라 1999년 12월 31일 자로 차인석 이사장 등 6명의 이사가 교체되었고, 김민하 이사 등이 새로 파견되었다. 2000년 1월 22일 이사회는 제16대 이사장으로 김채윤 이사를 선임하였으며,2001년 8월 김채윤 이사장이 사임함에 따라 전 상지학원 이사장 이상희 이사를 새로 영입하여 8월 22일 제17대 이사장으로 선임하였다. 한편 20이년 12월 31일자로 임기가 만료된 이영수 이사를 비롯한 6명이 퇴임하고 손봉호 이사 등 6명이 새로운 임시이사로 파견되었다. 2002년 8월 현재 우리대학의 이사진과 감사진은 다음과 같다.

이사장 이상희 (서울대 명예교수, 전 상지학원 이사장)

이사 강무섭 (직업능력개발원 원장)

이사 서동구 (진 한국언론재단 부이사장)

이사 이태형 (전 호남대 총장, 국제교과서 연구소장)

이사 장회익 (서울대 교수)

이사 손봉호 (서울대 교수)이사 김삼웅 (대한매일신문 주필)이사 박재권 (변호사)이사 박은정 (이화여대 교수)

이사 윤지희 (참교육학부모회 회장)

이사 한상진 (서울대 교수,전 한국정신문화원장)

감사 정상용 (변호사)

감사 홍기택 (공인회계사)

2002년 8월 현재까지 약 4년 8개월간 지속되어 온 임시이사체제하에서 우리대학은 큰 소요 없이 대학의 본연의 임무를 무난히 수행해왔다. 그러나 임시이사진이 파견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97년말 당시의 교내 상황이 이사진으로서는 대학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어 결국 대학의 운영을 외부에 맡기게 된 것인데,이는 국가로 비유하자면 신탁통치에 해당하고 회사로 말하자면 법정관리에 들어간 것이다. 차후 우리대학의 전 구성원은 각자 맡은바 소임을 다하여 학교를 정상화시키는 데 매진해야 할 것이며 이를 통해 교육인적자원부로 하여금 정규이 사회체제로의 복귀가 적절하다는 판단을 얻어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제6절 변화하는 한성대학

1. 우수교수 확보

대학을 견실하게 이끌기 위한 관건 가운데 하나는 우수한 교수의 확보라고 할 수 있다. 종합대학으로 승격된 후 학교의 규모가 커지게 된 90년대에 우리대학은 거의 매년마다 우수 교수들을 대대적으로 임용하여 왔다. 특히 이성근 총장이 취임하기 전년도인 1998년 입학정원이 1,230명에서 1,620명으로 무려 390명이나 파격적으로 증원되면서 교수 충원은 대학의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대두하였고, 이에 따라 이성근 총장 재임기간 동안 외국인 교수를 제외하고 29명의 신임교수가 임용되어 한성의 새 식구가 되었다.

연도별로 보면, 1999년 9월 1일 정보전산학부 이항찬 교수를 포함하여 3명,2000년 3월 2일 부동산학과 안정근 교수를 포함하여 8명,

2001년 3월 1일 경상학부 노재확 교수를 포함하여 7명, 그리고 2002년 3월 1일 경영학부 오경주 교수를 포함하여 11명이 각각 신규 임용되었다. 단과대학으로 구분하면, 이공대학에 M명, 사회과학대학에 9명, 예술대학 미디어디자인학부에 4명,교양학부에 2명의 분포를 보인다. 이는 이공대학과 사회과학대학에 교수임용이 편중되었음을 보여 준다.또한 우리대학은 1999년 교수확보율을 증진하기 위해 겸임교수제도를 채택하였고 2002년 8월 현재 59명의 겸임교수를 확보하고 있다. 겸임교수들은 이론적 지식뿐만 아니라 전공관련 기관에 근무하면서 풍부한 경험과 실무능력을 겸비함으로써 다양한 형태의 고급 교육 제공에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성근 총장 재임 기간 동안 젊고 유능한 신진교수들이 대거 등용되는 이면에는 학교를 떠나는 기존 교수들도 있었다. 1999년 2월 28일자로 전산통계학과 전화숙 교수,무역학과 권순범 교수, 1999년 8월31일자로 정보공학과 김인철 교수, 경상학부 이욱 교수, 2000년 2월 29일자로 산업디자인학과 박진배 교수, 20이년 2월 28일자로 의생활학부 정경임 교수,정보전산학부 강승식 교수, 2001년 8월 31일자로 미디어

디자인학부 김응화 교수,영어영문학부 치이크 교수,그리고 2002년 2월 28일자로 산업안전공학과 제무성 교수 등 총 W명이 개인 사정으로 사임하였다. 한편 1981년 9월 1일 우리대학 교양과 교수(체육학 전공)로 임용된 이래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교육과 연구에 매진해 왔던 강은석 교수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하여 2000년 6월 30일자로 퇴임처리 되었다. 그리고 20이년 2월 28일자로 부동산학과 이태교 교수(1995년 3월 1일 임용),무역학과 강석중 교수(1983년 3월 2일 임용),교양과 강욱(1992년 2월 15일 임용) 교수가,2002년 2월 28일자로 경영학과 연정열 교수(1975년 2월 10일 임용)가 각각 정년 퇴임하여 정든 교정을 떠나게 되었다. 전체 전임교원수는 외국인 교수를 포함하여 1998년 152명에서 2002년 8월 현재 169명으로 늘어났다. 우수교수 확보는 대학발전의 기본이며 이는 우리대학이 앞으로도 계속 견지해 나갈 방침이다.

2. 벤처창업지 원센터 개관

대학의 궁극적 목적은 인재양성을 통한 사회봉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대학은 산업체와의 제휴를 통한 지역사회 봉사의 일환으로 성북구의 벤처창업을 지원하기로 하였고,그 구체적인 결실로 나타난 것이바로 벤처창업지원센터의 개관이라 할 수 있다. 2000년 5월 31일 ‘성북벤처창업지원센터 및 중소기업제품 전시장’ 개관식이 이성근 총장, 진영호 성북구청장을 비롯한 150명의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개최되었다. 우리대학이 위탁 관리하게 되는 벤처창업지원센터는 성북구 장위동 65-154에 위치하고 있는 지하 1층, 지상 4층, 총연면적 1,376m2(416평) 규모로 총 19개 업체, 중소기업제품 전시판매장,부녀교실 등이 입주하였다.

개관인사에서 진영호 성북구청장은 “오늘의 신기술이 내일이면 해묵은 기술로 외면 당하는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첨단기술의 요람인 창업센터를 건립하게 된 것이 시의적절하고 자랑스럽다”고 소감을 밝혔

으며,이성근 총장은 축사를 통해 “신생아가 인큐베이터 속에서 성장을 기다리는 것과 같이 창업센터를 통해 훌륭한 기업이 나오도록 꾸준히 지원할 것”이라 피력하였다.

벤처창업지원센터의 개관은 산학연의 정신을 기초로 하며,우리대학이 입주업체 기술개발 및 경영지원에 관해서 위탁운영을 한다. 개관당시 이곳에는 PC 자가정비시스템 사업체인 포올피씨,지리정보시스템 개발업체인 리누소프트가 입주해 있었고,또한 이 업체들에는 우리대학의 재학생과 졸업생 7명이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나듯이 창업센터의 개관은 지역사회,학교, 산업체가 연계하는 협력체제 구축의 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벤처창업지원센터는 2001년 중소기업청에서 지원하는 창업보육기관에 선정됨으로써 다시 한번 도약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2001년 중소기업청은 창업촉진을 위한 기본 인프라를 확충한다는 취지로 창업보육센터 34개를 신규 지정하고 총 218억원을 지원하기로 하였는데,20이년 2월에 지정을 신청한 성북구·한성대학교 벤처창업

지원센터는 서울지역에서 지정을 신청한 6개 기관들 가운데 최우수 성적으로 창업보육센터로 지정 및 지원을 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성북구•한성대학교 벤처창업지원센터는 중소기업청으로부터 시설자금으로 총 8,000만원을 지원 받았고, 이와 별도로 서울시로부터 5,000여 만원에 해당하는 시설자금 등 총 1억3천여만원의 시설비 지원을 받게 되었다. 또한 성북구· 한성대학교 벤처창업지원센터가 창업보육기관으로 지정됨에 따라 입주업체들에게는 대외적 홍보 및 기술개발 등을 위한 자금신청 시 타 지역의 미 지정 창업보육기관에 입주한 업체들 보다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고, 나아가 본 센터는 성북구의 이미지 제고와 지역발전에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지원 결정이 이루어진 직후 20이년 7월 27일에 시작된 창업강좌에는 본 센터의 특화분야인 무선인터넷 분야의 기업 및 인력 육성과 지원을 위한 4개 과정에 80명이 참가하여 교육을 받았고 총 712만원의 강좌지 원이 이루어졌다. 중소기업청, 중소기업진흥공단,성북구청이 후원하고 3개월 교육과정인 본 창업강좌는 구체적으로 무선 인터넷 비즈니스 창업 기본과정,무선 인터넷 창업 전문가 과정, 무선 인터넷 비

즈니스 개발과정, 그리고 무선 인터넷 비즈니스 구축 등이고 각 과정에 20명이 참가하였다. 이 행사를 통하여 교육생들은 첨단 기술 분야인 무선 인터넷 비즈니스에 관한 지식 및 인력수급에 큰 도움을 받았고 외부 업체들과의 업무협력에 있어서도 많은 효과를 누리게 되었다.

3. ITdnformation Technology)의 중심부로 발돋움한 한성대학

벤처창업지원센터의 활동에서도 나타나듯이 한성대학은 첨단 기술분야의 주체로 성장하고 있다. 특히 정보통신부가 지원하는 2002년 해외 우수 IT교육기관 파견·교육 지원사업 수행기관으로 선정된 것은 이를 잘 예증하고 있다. 이제 한성대학은 우수한 IT 잠재인력을 해외 IT 연수를 통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고급 IT인력으로 양성하는

데 적극적인 지원을 펼치게 되었다.

2002~2003년 해외 IT 연수에 선발된 40명은 소프트웨어 수출 세계 제 2위국인 인도의 전문 IT 교육기관 STG(Software Technology Group)사를 교육 파트너로 하여 1년간 교육받게 된다. 교육과정은 1개월 동안 IT 기본과정과 영어교육,2개월 간 S/W 프로그래밍과 영어교육, 그 후 6개월간 국제공인 자격증 대비과정, 그리고 남은 3개월 간 인턴십에 대한 교육을 받게 된다. 교육기관이 위치한 인도 뱅갈로르는 인도에서 5번째로 큰 도시로 인도 최대의 IT 도시이며 또한 고지대로 인도의 타 지역에 비해 기후 조건이 양호한 도시이다. 2002년에 파견되는 우리대학 학생들은 정보통신부에서 500만원, 우리대학에서 약400만원 규모의 지원금을 받게 된다.

전자정보관 설립,교내 전 PC의 인터넷화, 초고속 통신망, 전 캠퍼스에 무선 랜 도입 등 고급 정보인프라를 확보하면서 IT 부문에 과감한 투자를 해 온 우리대학이 2002년 해외 우수 IT 교육기관 파견·교육사업 수행기관으로 선정됨으로써 우리대학의 IT 열풍은 더욱 거세어 질 전망이다.

4. 외국과의 활발한 교류

(1) 외국 대학과의 자매결연 체결

20세기말 부터 시작된 세계화의 거센 물결은 외면하기 힘든 시대적 대세이며 이에 부응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퇴락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발맞추어 우리대학은 오래 전부터 외국대학과의 협력과 교류에 큰 관심을 보여 왔으며, 이는 이성근 총장 재임시에도 계속되었다.

2000년 3월 9일 일본 상반대학교 국제학부 2학년 학생 20명이 문화탐방과 학생교류를 통해 양국에 대한 이해를 도모한다는 취지로 우리대학을 방문했다. 이들은 우리대학 학생들과 함께 ‘한일 협력에 관하여’라는 주제 하에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경제발전에 관한 세미나를 열어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하였다. 또한 당일 상반대학교 학생들은 우리대학이 선발한 학생들과 함께 한일협력위원회가 후원하는 ‘한일 대학생의 만남 시간’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서울 관광을 하였고,오후에는

뉴서울 호텔에서 만찬회를 가지면서 대화와 정겨운 시간을 나누었다.

한편 이 해 11월 7일 우리대학 총장실에서는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 소재한 코핀(Coppin) 주립대학과의 자매결연이 체결되었다. 양 교는 교환학생,교환학점, 교환교수제 등에 합의를 이루었고,아울러 메릴랜드 공영 TV에서 우리대학 홍보 비디오를 촬영하여 6백개의 비디오를 메릴랜드주 전 도서관에 비치하기로 하였다. 코핀 대학과의 자매결연은 단순한 명목상의 교류가 아닌 실제적인 교류를 지향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겠으며,우리대학의 국제적 홍보에도 큰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다.

또한 20이년 2월 27일에는 우리대학과 일본 하기국제대학과의 자매결연이 이루어졌다. 우리대학에서는 이성근 총장과 보직교수들이,하기국제대학 측에서는 타시로 타까히데 학장,무라까미 하야오 도서관장,권순진 국제학과장이 배석한 이 자리에서 양 교는 학생 및 교직원 교류,공동연구,학술· 정보물의 교환 등의 학술교류협정에 동의하였다. 하기대학의 국제학과장이자 국제교류위원회 위원장인 권순진 교수

는 “이번 행사는 형식직인 행사가 아닌 학생파견과 같은 양 교간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결과물을 계속 낼 수 있는 교류의 출발”이라 언급하면서 그 의미를 부각시켰다. 자매결연 체결 당시 이미 하기국제대학에는 한성여고 졸업생 1명이 유학 중이었고 20이년 2월 졸업하는 3명의 입학이 예정되어 있었다. 이 날 조인식에 앞서 하기 대학의 방문단은 우리대학 전자정보관 소개 및 흥보 비디오를 관람하였으며 한성여고생들을 대상으로 유학설명회를 가졌다.

(2) 외국 저명인사 명예박사학위 수여

1999년 10월 17일 소강당에서는 헬무트 슈미트 (Dr. Helmut Schmidt) 전 독일 수상의 명예 경영학 박사학위 수여식이 열렸다. 영어영문학과 서영윤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이 행사는 이성근 총장의 인사말을 시작으로 1부 행사가 진행되었으며,학위수여식 이후 ‘21세기 세계인의 윤리와 의무’라는 주제로 슈미트 박사의 기념특강이 이어졌

다. 독일연방공화국 건국 50주년 기념 한국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내한한 슈미트 박사는 이성근 총장의 초청을 흔쾌히 수락하였고,명예박사 학위수여는 EC 통합에 주도적인 역할을 그의 공로를 인정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20이년 5월 8일 소강당에서 전 네덜란드 수상 Andreas Van Agt의 명예 행정학 박사 수여식이 거행되었다. 당초 2000년 7월로 예정되었던 학위 수여식은 Van Agt의 개인사정으로 연기되었다가 비로소 이 날 이루어지게 되었다. 네덜란드 법무부 장관-, 부수상,국가의회의원,수상 등 화려한 정치경력과 주일본 및 주미 EC대사,도쿄 UN대학 국제통치학부 교수 등을 역임하면서 국제협력에 큰 역할을 수행한 공로를 인정하기 위한 학위수여식에서 그는 ‘The Successes and Failures of Europe's Efforts at Integration, in Particular the European Union's External Relations’라는 주제의 특별강연을 하였다.’

5. 3,700명의 인재배출

이성근 총장이 부임한 이후 1999년 전기부터 2002년 전기까지 총3,712명의 학부학생들이 한성대학을 졸업하였다. 연도별로 보면,1999년(23회 졸업)에 792명, 2000년(24회)에 888명, 20이년(25회)에 999명, 그리고 2002년(26회) 전기에 1,033명으로 해가 거듭할수록 입학정원이 늘어나면서 졸업생의 수도 함께 증가하였다.

우리대학에서 학업을 마친 졸업생들은 비교적 높은 취업률을 보여왔다. 2001년도 2월 졸업생의 경우, 대학원 진학자와 군입대를 제외한 취업대상자 889명 가운데 직장을 갖게 된 학생은 502명으로 순수취업률 56%를 기록하였다. 이는 20이년 3월 7일 교육인적자원부와 취업전문기관에서 밝힌 20아년 전국 170여개 4년제 대학교 졸업생의 평균 순수취업률 53% 보다 3% 높은 수치였다. 각 단과대학별 취업률을 보자면, 예술대학이 159명 가운데 107명(67%)로 가장 높은 취업률을 나타냈고,이공대학이 297명 중 180명(61%),사회과학대학(부동산 전공

제외)이 236명 중 127명(54%), 그리고 인문대학이 197명 중 88명(45%)의 수치를 보였다.

6. 내실을 다진 중앙도서관

한 대학의 수준을 알려면 그 대학 도서관을 가보라는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도서관은 대학의 심장부와 같다. 앞에서 서술했듯이,우리대학은 교육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한 인프라 구축의 일환으로 이미 4,255평 규모의 중앙도서관 신축공사에 들어갔고, 이 공사는 2003년 6월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우리대학의 도서관은 비록 소규모이기는 하지만 다 양한 경로를 통하여 내실을 기해 왔고 또한 이를 대외적으로 인정받았다. 1999년부터 매년 독서의 달을 맞이하여 정보검색대회,다독왕선 발대회,저자와의 만남,외국학술도서 전시회 등 다채로운 도서관 문화

행사를 개최하여 지식제공의 공간인 도서괸· 이용확대를 적극 권장해 왔다.

한편 2000년 11월 13일 우리대 학은 국내 최대 규모인 국회 도서관과 정보공유 협약을 체결함으로써 교수와 학생들에게 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디당일 국회도서관에서 체결된 이 협약은 두 기관간의 지식·정보의 유통 및 공유,협력체제의 구축을 통해 지식정보 자원의 효율적 활용과 정보의 민주화에 이바지한다는 취지로 성사되었고,이에 따라 우리대학의 모든 구성원은 국회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내 석·박사 학위논문,학술지,정부간행물에 대한 디지털 원문검색과 출력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국회도서관과 협약을 체결한 다른 모든 도서관과의 정보 공유도 가능해 졌다.

이와 같이 적극적 변신을 모색해 온 우리대학의 도서관은 ‘2001년 3월 30일 한국도서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당일 국립중앙도서관 대강당에서 개최된 한국도서관협회 제52차 정기총회 행사에서 우

리대학 도서관이 제33회 한국도서관상을 수상하였는데,이는 국내도서관 발전에 노력하고 기여한 공을 인정받아 한국사립대학교 도서관협회의 추친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우리대학 도서관은 1996년 5월 10일 국내대학으로는 최초로 미래형 전자도서관인 전자정보관을 개관했고,그 후 많은 대힉- 및 공공 전문 도서관의 관계자들이 방문하여 시설운영 및 서비스 현황 등을 견학할 정도로 첨단 도서관의 모델로 인정받아 왔다. 현재 우리대학의 전자정보관은 전자정보검색실,교육매체제작실,종합영상음향실,V.O.D.실, 위성통신 수신실 등으로 구성되어 운영되고 있다.

7. 우리대학 학군단 129-1 학군단으로 승격

2000년 12월 27일 우리대학 학군단이 독립적인 위상을 갖춘 129-1 학군단으로 승격되었다. 이에 따라 129-1 초대 학군단장으로 김득중 중령이 취임하였다. 각급 부대에서 근무했고 고려대학 학군단 교수부장을 역임한 신임 김득중 학군단장은 정통 학군단 출신으로 “눈빛이

살아 있고 기가 넘치며 강인한 체력을 겸비한 조국과 군이 필요로 하는 정예 초급 장교 육성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새로 거듭난 학군단 초대 단장으로서의 취 임 포부를 밝혔다.

학교의 규모가 작아 그 동안 인근의 국민대가 관장하는 학군단으로 존속해 왔던 우리대학 학군단은 이제 모든 업무와 행정을 자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8. 제 증명서 인터넷 발급 및 전송서비스 개시

학생들의 모든 민원사항을 한 곳에서 해결하는 One-Stop Service를

실시해 온 우리대학 학생종합서비스센터는 2001년 8월 24일 (주)아이디씨택과 공동으로 인터넷 제증명 발급 및 전송 시스템 개통식을 갖고 온라인 서비스를 개시했다. 새로이 시작된 이 서비스를 통하여 각종 증명서를 필요로 하는 졸업생과 재학생은 인터넷으로 신청하여 개인 프린터를 통하여 증명서를 발급 받을 뿐만 아니 라 e-mail을 통하여 원하는 곳으로 보낼 수도 있게 되었다. 또한 지하철역의 유인 PAST, 공공장소에 설치된 KIOSK(무인종합정보안내시스템) 등을 통해서도 모든 증명서를 발급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학생들의 시간 절약과 편의 증대에 크게 공헌한 이 서비스는 수요자를 위주로 하는 정신의 발현이며,이러한 정책은 대학당국에 의해 가속화될 전망이다.

제5편 21세기 한성대학교 모색기

제5편 21세기 한성대학교 모색기

제1장 한성비전 21세기

제1절 비전 21세기 발전계획의 기본구성

우리대학의 비전 21세기는 1998년부터 계획 목표연도인 2007년까지 10년간의 발전계획으로 작성되었다. 이 발전계획은 2단계로 나누어 1998년부터 2002년까지의 중기계획, 2003년부터 2007년까지의 장기계획으로 구성되어 있다.

' 비전 21세기는 실현 가능한 사항을 중심으로 작성되었다. 비전의 기

본목표는 이 발전계획이 완료되는 2007년에는 주도적 교육중심 대학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고,국제적으로 경쟁력 있고 질 높은 교육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비전 21세기의 체계화를 위해서는 먼저 계획의 기본배경,대학발전의 기본방향을 제시하여야 한다. 그에 따라 발전계획 수립의 당위성 및 기본계획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세부계획은 교육, 연구,대학의 특성화,대학 정보화, 사회봉사 및 산학연 협동, 공동체의 연대성 강화, 행정,시설,기자재, 재정 등 각 분야별로 나누어 수립하고, 비전 21세기에 따른 현황 및 주요지표를 추정하여 종합기본계획을 수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비전의 모색은 한꺼번에 실현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우리대학의 실정에 맞추어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우선 순위를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비전의 실현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토대로서 교육과 연구의 질적 향상을 도모할 수 있는 전제조건의 기본 틀을 강구해 보기로 한다.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다양한 모색기에 접어든 장년 한성대학교는 1972년 10월에 설립되었다. 소규모의 종합대학교이기는 하지만, 한

대에 걸쳐 사회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대학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 왔다고 자부한다. 그 동안 우리대학의 교육환경은 열악한 측면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수교수들의 초빙,강의 질을 높이기 위한 꾸준한 노력,교육 효율성을 증대시키기 위한 업무혁신 등이 결실을 맺음으로써,대학 종합평가에서 우수대학으로 선정될 수 있었다.

우리대학이 21세기 비전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들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정확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규모의 경제에 이르지 못한 학교규모

2) 열악한 재정규모에 따른 시설 부족

3) 학교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특성화 미흡

4) 산·학·연 교류와 지 역사회 와의 교류 저조

5) 세계 속의 대학으로서의 국제화 수준 열악

이러한 현재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장기적이고 체계적인 정책수립과 이를 위한 집중적인 투자가 요망된다. 그리하여야 소위 상위권 대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비전 21세기 모색의 목표가 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제2절 중장기 발전계획의 주요지표

1. 중장기 특성화 계획

학교 특성화는 우리 학교의 잠재적 역 량을 극대화하고,21세기 대한 민국 지식기반 사회를 이끌어 갈 인재양성과 관련 연구분야의 활성화를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하여 우리 학교는 그 동안 다음과 같은 특성화 방안에 의거하여 이를 추진해 왔다.

• 한국학 연구의 활성화

• 도심형 예술대학의 육성

• 경영 및 정보화 지식에 기반한 전문인력의 양성

이러한 기본 특성화 방안은 우리대학이 비교적 짧은 역사 동안 축적해 온 실용적 인재 육성방안과 궤를 같이 한다. 오늘날과 같은 지식기반 사회에서는 실용적 인재의 요구가 더욱 커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지식수준의 복합성과 난이도 또한 증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대학은 이러한 특성화 방안을 중심으로 오늘의 한국사회가 요구하고 있는 우수한 인재의 육성에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1) 한국학 연구의 활성화

1) 연구소의 활성화

한국학 연구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할 연구센터를 설립하고,기존의 관련 연구소를 통폐합한다. 10명 내외의 유급 연구원을 두고,이들에게 1.5평 정도의 연구공간을 제공함으로써 자유롭고 실질적인 연구를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한다. 이를 위한 외적 지원계획도 적극적으로 수립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연구센터는 매년 1~3억 원 규모의 외부 연구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도록 다양한 수주 기회를 확보해 나갈 것이다. 그럼으로써 10년 안에 연구비 자립연구소로 성장시킬 계획이다.

2) 한국학 교육의 내실화

한국학 교육은 중장기적으로 미래 한국발전을 조망하는 미래학에 초점을 두는 강의들을 확충해야 한다. 이를 위하여 한국학 연구센터에 관련 프로젝트를 위촉할 뿐 아니라,국내외 석학들의 정기 특강 실시, 한국학과 한국문화의 현대화· 세계화를 도모하는 다양한 학술세미나의 개최, 연구논문 및 저작물의 출판사업 등을 추진할 것이다.

(2) 도심형 예술대학의 육성

1) 연구소의 활성화

아트 앤 커뮤니케이션 연구소가 활발히 연구를 진행할 수 있도록 관련 예산을 대폭 증액하고,특히 외부에 연구소의 연구활동을 정기적으로 알리고 외부의 관심을 유도할 수 있는 이벤트를 통해 산학협동의 기회를 축적할 계획이다. 특히 유능한 연구인력을 자체 보유할 수 있는 재정 자립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2) 캠퍼스 도심화

대학로캠퍼스의 시설을 현대화하여 연구와 실습공간으로서 뿐만 아니라,전시행사 공간으로 적극 활용하여 접근의 용이성 및 홍보기능을 최대한 이용한다. 이를 위하여 미디어디자인 학부뿐만 아니라 관련 대학원 기능을 흡수하고,공간 편의시설을 적극 유치할 것이다.

(3) 경영 및 정보화 지식에 기반한 전문인력의 양성

1) 창업보육센터 운영

창업보육센터의 지원을 확대하여 학생들이나 교수들의 직접 창업을 유도함으로써,캠퍼스 연구분위기를 활성화 할 계획이다. 이를 위하여 예산확보 뿐 아니라 창업센터의 위상 제고 및 외부기관과의 협력도 단계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2002년에는 서울특별시의 중소기업 지원사업에 참여함으로써,이미 관련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2) 취업지원센터 확대

취업지원센터의 운영도 확대하여 졸업 예정자 뿐 아니라 입학과 동시에 취업지원이라는 개념을 실천하고, 모든 학생들이 취업지원센터 홈페이지를 통해 졸업 이후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시 지원 개념으로 발전시킬 계획이다. 또한 외부 교육기관과 적극 협조하여 일회성 보다는 체계적인 교육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유도할 것이다. 무엇보다

도 현재 정보사회가 요구하는 인재상인 경영지식과 정보산업지식이 어우러진 인재를 양성하는 외적 지원 이외에도, 모든 구성원들에게 관련 지식이 전파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내적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할 것이다.

2. 종합적 중장기 발전계획의 주요지표

(1) 교육,연구,행정 분야

1) 각 구성원의 정원 확충

당초 수립된 한성비전 21세기에서 제시된 각 구성원의 정원은 목표 연도인 2007년에 학부학생수 8,480명, 대학원생수 300명,전임교원수

252명, 조교수 150명,직원수 135명으로 증원하며,학과(학부제로 전환되면 전공 수)는 24개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교육인적자원부의 대학정책과 우리대학의 현실적 여건을 고려하여 다소의 수정이 불가피하다. 그리하여 2007년까지 학부학생수는 6,480명으로 동결하고, 대학원생수 360명, 특수대학원생수 1,250명, 전임교원수 195명, 조교수 150명,직원수 136명,학과 11학부 29개전공 2개학과를 둔다.

2) 2001년 2월 주요지표와 제2단계 (2003~2007) 장기 주요지표

• 학부학생수는 수도권대학 입학정원 동결조치에 따라, 우리대학은 1998년에 수도권 야간 정원자율화대학으로 선정되어, 당시 입학정원 1,230명에서 390명 증원된 입학정원 1,620명이 지금까지 동결되어 왔으며,2007년까지도 이 입학정원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당초 계획에 반영되었던 학부 입학정원 500명에 대한 증과·증원은 중장기 발전계획에서 제외한다.

• 대학원생수는 박사과정을 포함하여 1998년도에는 입학정원이 55명이던 것이 2000년도에는 65명으로 증원되었으며, 2007년도까지

150명으로 증원할 계획이다, 특수대학원의 경우에는 1998년도에 예술대학원 안에 패션예술학과를 신설하고,1999년도에는 안전보건대학원과 컴퓨터신기술대 학원을, 2000년도에는 부동산대 학원과 교육대학원을 개설하여 입학정원이 233명으로 늘어났고, 2007년까지 500명 이상으로 증원할 계획이다. 다만 대학원의 경우에는 교육인적자원부에서 교수확보율을 일정 비율 이상을 요구할 때, 교수 충원이 제때 이루어지지 않으면 증원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특수대학원의 경우에는 교수회관이 준공되고,강의실 및 교육여건이 확충되면,증과·증원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 전임교수수는 1999년도에 152명으로 교수확보율이 57.5%이며, 2000년도에 158명,2001년도에 162명,2002년도 2월에 11명을 충원하고 3명이 퇴직하여 현재 총 170명(총장 포함)이다. 따라서 교수확보율은 57.9%에 이르러, 1999년도와 대비할 때 큰 차이가 없다. 이는 교수수의 승가율이 학생수의 승가율에 비례하는 정도의

성장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003년도부터는 매년 5명 이상씩 충원하여 2007년도에는 교수확보율 65% 이상을 유지하도록 한다.

• 조교들의 숫자는 해마다 늘어 1998년의 52명에서 2002년 2월 현재 98명이다. 당초 수립한 100명에 육박하는 숫자이다. 그러나 이들이 교수의 연구를 보조하고 학생지도를 도울 수 있는 교육환경 조성을 위해서는 더욱 그 숫자의 확충이 요망된다. 따라서 2003년도부터 매년 10명씩 증원하여 2007년도에는 150명이 되게 한다.

• 직원수는 1998년도에 정원 135명이었다. 현원은 기능직과 임시직이 119명이며, 일반직원은 62명이다. 1999년도에는 정원조정으로 인하여 124명으로 줄었고, 현원도 연차적으로 대학의 구조조정 또는 행정조직 개편을 고려하여 최소한으로 충원되었다. 1999년도에는 일반직원의 경우 59명으로 줄어들었다가, 20이년 현재 62명으로 큰 변동이 없다. 그러나 기능직을 포함하면 94명이며, 임시직까지 포함하면 121명이다. 그러나 앞으로 학교건물의 신축과 시설 및 재정규모의 확대 등으로 말미암아 직원수의 충원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따라서 2003년도까지 건물이 3동이나 늘어나는 실

정을 감안하여 기능직을 포함한 직원의 수는 현재 94명에서 30명을 충원하며,2007년도에는 124명이 되게 한다. 일반직원의 수는 62명에서 82명으로 증원하여 학생수와 일반직원의수가 80:1 정도의 비율이 되도록 하며,효율적인 행정지원체제를 구축토록 한다.

• 전공은 2000년도에 모집단위를 2개전공 이상으로 해야 한다는 고등교육법의 취지에 따라, 학과를 학부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전공을 세분화하였다. 국어국문학과는 한국어문학부로 개편하면서 2개의 전공을 두고,산업디자인학과는 미디어디자인학부로 개편하면서 5개의 전공을 두는 등 전체적으로 전공의 수가 많이 늘어났다. 학부의 경우에도 2001년도에 사회과학부를 경상학부와 정경학부로,정보 전산학부를 컴퓨터공학부와 정보공학부로 분리하였다. 2007년도까지 입학정원에 변화가 없으면, 전공도 큰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본다.

• 대학본부의 조직은 사회적 요구,행정 합리화 계획에 따라 개편한다. 1998년도에 교무처, 연구기획처, 학생처, 사무처의 4처로 구성

되어 있던 조직이 2000년도에 연구기획처를 기획연구처로, 사무처를 총무처로 명칭변경하고,대외협력업무 및 발전기금 모금, 홍보 업무를 강화할 목적으로 대외협력실을 신설하여 총장 부속기구로 두었다. 앞으로 능동적이면서 보다 전문저인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는 수혜자 밀착 체제를 구축하여 연구/연구 조직의 활성화를 도모하고,내부적으로 전략적 중요도에 입각한 유연한 조직 구성, 핵심 프로세스의 리엔지니어링,역량 개발을 통한 전문성 제고를 추진하며, 외부의 환경 변화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과 적극적인 지원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체제를 구축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3) 그 외 중점사업

• 사이버강좌 실시 및 백업장비 구입 : 2억6천만원

• 취업지원강화

- 인턴사원지원, 취업교육 훈련비지원 : 4억원

•IT 관련 해외 우수기관 학생파견 : 3억4천만원

• 교수 교재개발비 신설 : 1억원

• 흥보 공모전 개최 : 대학 홍보강화 차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홍보공모전 개최

• 홈페이지 경진대회

• 실험실습 기자재 구입비, 실험실습비,행사비 확충

(2) 시설,재정 분야

1) 기존의 학교시설 확충계획

2000년에서 2002년까지 3,300여 평의 도서관과 1,200평의 교수회관을 증축하며, 2003년까지 4,的0여 평의 이공관을,2005년까지 체육관 및 강딩' 2007년까지 신진리관을 증축한다.

이러한 계획은 현재 신축중인 건물의 규모와 여러 여건상 수정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2002년 8월에 2,았)0여 평의 교수회관(교수연구동 명칭 변경)과 550여 평의 학생회관 별관을 준공하고,2003년 6월에 4,200

여 평의 도서관 건물을 준공한다. 종합관 및 신과학관(신진리관) 증축을 고려한다.

2) 2001년 2월 주요지표와 제2단계(2003~2007) 장기 주요지표• 우리대학의 교육시설 보유면적은 1999년도의 38,897m2에서 2002년2월 현재 39,096m2로 거의 정체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신축중인 3개 건물이 준공되는 2003년 6월이면, 61,094m2로 교사확보율이 96.7%에 이른다. 더욱이 대학로캠퍼스 6,600m2 면적까지 포함하면 100%를 훨씬 상회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대학처럼 주간과 야간의 입학정원이 비슷한 상황에서 교사확보율 100%는 그 의미가 반감된다. 이는 교사확보율이 주야간 정원 중 큰 정원을 시설정원으로 포함하기 때문에, 우리대학의 경우 960명에 대한 기준면적으로 야간 660명에 대한 교육시설은 실제적으로 포함되지 않고 있다. 또한 현재 증축중인 3개 건물 중 도서관 및 학생회관 별관은 교육지원 시설로서,교육기본시설인 강의실 및 실습실의 부족현상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무용과 실기실

및 일부 예술대학의 실습실도 증축건물과 상관없이 해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따라서 캠퍼스 종합기본계획에 의한 다음 단계인 이공관,체육관 및 강딩신진리관 신축이나 증축에 대한 기본계획을 재검토하여 현실적인 마스터플랜을 수립할 것이다.

• 장·단기 재정운영계획에 의한 자금소요계획 중 인건비 인상률은 매년 6%, 관리운영비의 인상률은 10% 정도로 책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설투자자금은 1단계로서 도심지 건물매입과 중앙도서관 증축부터 신과학관(신진리관) 신축에 이르기까지 264억원을 사용하고, 2단계로는 493억원을 투자하고,시설투자를 제외한 신규사업부문 소요자금으로 교직원 신규채용 및 인건비 증가 등으로 347억 원을 투입한다.

• 기존 자금조달계획은 등록금 인상률을 2년마다 5%로 하고,법인 전입금은 당진 농장의 수익사업체 개발로 인한 수익금을 2003년도부터 매년 15억원씩 계상 한다는 것이었다. 그 동안 인건비 인상률은 1999년도 동결, 2000년도 8.6%, 20이년도 10%, 2002년도

교원 6%, 직원 5%, 2002년도 교원 6%, 직원5%이었다. 이를 이듬해부터는 매년 6%로 인상한다. 관리운영비는 연 인상률 10%로 한다. 시설투자자금은 1단계로 대학로캠퍼스 건물매입과 교수회관, 학생회관 별관, 도서관 신축에 따른 300억원이 투입되고 있으며,2단계는 추후 검토한다. 시설투자를 제외한 신규사업부문 소요자금으로 교직원 신규채용 및 인건비 증가 등으로 347억원을 투입한다. 자금조달계획으로는 등록금 인상률을 매년 5%로 하고, 법인전입금은 현재보다 크게 변화가 없을 것으로 보고 연 3억원으로 계상한다.

(3) 캠퍼스 중장기 발전 분야

2001년부터 2004년까지 캠퍼스 중장기 발전계획에 따라 추진중인 교수회관, 학생회관별관-,도서관 신축비로 150억원,대학로캠퍼스 빌딩 매입비 83억원, 그리고 현 강당 좌측에 신축할 예정인 종합관(가칭) 건축비

70억원 등 300억원에 대한 종합 자금소요 및 조달계획은 다음 표와 같다.

<표 19〉 자금소요 현황

용도 금액 (원)

감리비 226,403,100

교수회관 신축비 3,858,222,865

학생회관 별관 증축비 1,204,034,881

도서관 신축비 9,917,742,254

냉난방 연료교체 20,000,000

대학로 캠퍼스 빌딩 매입 및 수리비 8,300,000,000

종합관 신축비 7,000,000,000

총계 30,526,403,100

<표 20〉 연도별 자금소요 현황

연도별 세부내역 금액(원) 비고

2001 년 학생회관 별관 교수회관 감리비 42,000,000

교수회관 신축비 1,893,144,950

학생회관 별관 증축비 603,355,259

냉난방 연료 교체용 정압기 20,000,000

동원빌딩 매입 기자재 구입, 수리비 8,300,000,000

소계 10,858,500,209

2002 년 학생회관 별관 교수회관 감리비 56,000,000

중앙도서관 감리비 42,000,000

교수회관 신축비 1,965,077,915

학생회관 별관 증축비 600,679,622

중앙 도서관 증축비 4,159,053,206

소계 6,822,810,743

2003 년 중앙도서관 감리비 84,000,000

중앙도서관 증축비 4,654,940,318

종합관 신축비 3500,000,000

소계 8,238,940,318

200신년 중앙 도서관 감리비 2,403,100

중앙 도서관 증축비 1,103,748,730

종합관 신축비 3,500,000,000

소계 4,606,151,830

총 계 30,526,403,100 VAT 포함 금액

재 5 편 21 세기 한성대학피 또색기

<표 21〉 건설관계 자금조달 계획

(단위: 백만원)

구분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계

건설가계정 지출 예상 10,858 6,823 8,239 4,606 30,526

교비자금 4,396 3,823 4,239 3,606 16,064

건축기금인출 7,000 5,000 4,000 1,000 17,000

이월액중사용 1,462 1,462

<표 22> 건축자금관계 조달 및 건축기금 사용 계획

(단위: 백만원)

구분 2001년 2002년 2003년 2004년 계 비고

건설가계정지출예상 10,858 6,823 8,239 4,606 30,526

교비자금충당액 4,396 3,823 4,239 3,606 16,064

건축기금인출액 7,000 5,000 4,000 1,000 17,000

이월액중사용액 1,462 1,462

건축기금인출후잔액 14,150 11,783 8,372 7,765 수입이자 포함 잔액

(기금이자발생액) (1,392) (633) (589) (394)

제2장 21세기 도약의 염원

한 세기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세기를 맞이한 이 시점에서,우리대학은 한민족의 대학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세계 속의 대학으로 거듭나야 할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다. 이제 우리는 외래의 학문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면서 사회변화에 추종하던 과거의 태도에서 벗어나,학문과 사회변화를 앞장서서 이끌어야 할 적극적 자세를 가져야 할 때이다. 특히 21세기는 세계화와 정보화라는 거대한 물줄기 속에서 대학도 이제

경쟁력을 갖추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머지않아 대학이 문을 닫을지 모른다는 피터 드러커의 예언이나,인터넷을 타고 국경 없이 전세계를 넘나드는 선진국 대학들의 장거리 통신교육,2002년 고졸자 수의 대학모집 정원미달사태와 비인기 학과의 퇴출 등은 대학으로 하여금 대학개혁이 선택이 아닌 필연적인 생존전략임을 깊이 인식케 하고 있다.

우선 대학개혁과정에서 변화의 주역과 대상은 먼저 교수를 들 수 있다. 교수에게는 시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길러내고,또 21세기 지식 기반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지식에 천착해야 할 막중한 임무가 부여되고 있다. 우리대학과 같은 교육중심 대학의 역할이 강조되는 대학에서는 양질의 강의를 통한 인재의 육성이 시급히 요청된다. 우리의 학생들에게 중격적인 감등과 전율을 전하여 그늘의 가슴에 향학의 불꽃을 지필 수 있는 뜨거운 열정을 지닌 교수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새로운 학문의 장을 일깨워주며,더 나아가서 건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이 되도록 가르쳐야 한다. 전문적 식견과 교양을

갖춘 성숙한 사회적 인간의 탄생에는 교수의 책임이 그만큼 크다고 할 수 있다.

사회는 어느덧 정보화시대라는 신대륙에 도달했지만,‘교수’라는 말 속에는 정보나 지식뿐만 아니라 인간적 성숙의 개념도 아울러서 내포되어 있다. 누구나 교수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가르치는 행위’에 대한 자의식,자신을 향한 물음을 끊임없이 던질 때만이 우리는 ‘진정한 교수’로 거듭날 수 있다. 세상물정을 모르고 삶의 의미와 가치에 몽매한 학생들에게 식견과 지식 그리고 성숙된 인격을 갖춘 한 사람으로 서 자기 삶을 당당히 꾸려나가고 사회발전에 기여할 인재로 길러낸다는 것은 교수의 사명인 것이다. 이와 같은 교수의 책임을 다할 때, 21세기 우리대학은 무한한 발전을 이룩할 것이다. 따라서 교수 임용시에는 우수한 교수를 채용하기 위해서 연구실적,강의능력, 인성, 경력 등을 충분히 고려하여 객관적이고 투명한 채용이 보장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대학이 21세기에 도약하기 위해서는 경쟁의 원리를 도입하여 교육의 질과 연구의 수준을 신장시키기 위한 경쟁체제도 마련해야 한다.

우리 나라는 대학간 또는 대학 내의 구성원간 경쟁이 부재 되어 있는 실정이다. 특히 심각한 것은 대학 내에서의 경쟁부재이다. 일단 대학의 전임교원이 되고 나면 평생직장을 얻었다는 생각에 교육과 연구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노력이 줄어들기 쉽다. ‘한 번 교수는 영원한 교수’라는 생각은 대학이 침체되는 원인이 되며, 국제경쟁력도 상실하게 되어 도태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대학도 공정하고 합리적인 경쟁체제를 도입하여 시행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교수업적 평가나 연봉제 등과 같은 경쟁체제가 우리 나라 대학에 도입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명목적인 수준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경쟁체제를 보다 합리적으로 구축하고 활성화 시켜 교수간의 건전한 경쟁을 유도하여, 대학의 교육 및 연구의 질 향상에 박차를 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경쟁체제가 제대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우수한 교수를 위한 적절한 인센티브 제도의 마련이 요구된다. 연봉제나 업적평가와 같은 경쟁체제가 교수들에게 스트레스와 불안의 요소로만 작용해서는 안되

기 때문이다. 인센티브가 뒷받침되지 않는 경쟁체제는 오히려 학문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대학의 경쟁체제는 열심히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수를 위하여 지원하고 격려하는 제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대학에서 경쟁체제를 성공적으로 시행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평가시스템을 개발하고 구축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평가시스템이 마련되어야만 건전한 경쟁풍토를 조성하고,경쟁에 의해 산출되는 교육과 연구의 효과도 극대화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1세기 도약의 전제조건 중의 또 하나는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우수한 교수진과 학교의 경쟁시스템이 있다고 하더라도 피교육자가 이를 수용할 수 없는 자질과 태도를 갖추고 있다면,성공을 기약하기에는 어려움이 수반된다. 따라서 우리대학은 입학과를 입학흥보처로 기구의 승격을 단행하고,이 부서에서는 수시 입학과 정시입학을 통하여 좋은 학생들이 우리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여러 방안들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수한 교수진과

학구적인 학생들의 공동참여 속에서 우리대학의 교육이 이룩될 때,참다운 의미의 한성학파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끝으로 우리대학이 경쟁력 있는 대학이 되기 위해서는 잠재력을 바탕으로 한 고유의 톡성 을 개 발해 나가야 한다는 것 이다. 첫 째,인문대학과 사회과학대학,예술대학과 공과대학 등 다양한 학문분야의 학제 간 협력을 통해 새로운 학문적 발전을 유도하며 학문의 수월성을 높여야 한다. 다음으로 학내에 있는 각 연구소들을 연계시켜 공동 연구 쓰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능 연구의 북성화를 꾀해야 한다.그리고 단과대학 중심으로 행정체제를 개편하고,수업지원과의 업무와 조직을 대폭 단과대학에 이양하여,실질적 수업의 진행은 단과대학 학장 주관 하에 이루어지게 하고,학생지도도 이러한 연관 속에서 출발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대학에서는 타 대학에서 볼 수 없는 내실과 역동성이 겸비된 수업이 진행될 수 있는 독특한 시스템을 마련해야 될 것이다.

21세기의 우리대학은 위와 같은 ‘한성 21세기의 비전’과 ‘몇 가지 도약의 염원’을 실천하는 가운데,새로운 명문대학으로 성장하고 발전할 것이다.

부록

[부록]

1. 연혁

• 1953년 1월 문교부로부터 재단법인 한성학원 설립을 인가 받고 초대 이사장에 설람자 김의형 박사가 취임한다.

• 1964년 재단법인을 학교법인으로 개편한다.

• 19기년 10월 이희순 여사가 김의형 이사장(초대부터 제5대까지)에 이어 제6대 이사장에 취임한다.

•1972년 12월 학원 발전의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하는 한성여자대학을 설립한다. 이로써 한성학원은 중등·고등 교육기관을 갖춘 명실상부한 한국 여성교육의 요람으로 자리하고 더욱 깊이 있는 학문탐구의 장을 많은 인재들에게 제공한다.

• 1973년 3월 초대학장에 설립자인 김의형 박사가 취임한 한성여자대학은 국어 국문학과,영어 영문학과,비서 학과,가정 학과,의상학과,생활미술학 과 등 6개학과 150명의 야간대학으로 출범한다. 이 해 12월 학과조정을 단행하여 비서학과를 폐과하고 무용학과, 경영학과,무역학과, 불어불문과 등 4개학과를 증과함으로써 9개학과 230명으로 편제된다.

• 1976년 10월 불문학과 20명 폐과하고 국사학과 20명 신설한다.

• 1977년 국사학과를 사학과로 명칭 변경한다.

• 1977년 3월 제2대 학장으로 이희순 여사가 취임하고,이 해 4월에 김의형 박사가 제8대 이사장에 취임한다.

• 1978년 1월 남녀 영재들에게 보다 깊이 있는 학문의 장을 마련해 주고자 한성여자대학을 한성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고 남녀공학으로 전환함으로써 대학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이 해 10월 15일 국어국문학과,영어영문학과,의상학과,생활미술학과,무용학과,경영학과,무역학과 입학정원을 120명 증원하고,행정학과 30명을 신설하고 가정학과 30명을 폐과하여 9개학과 380명 이 된다.

•1979년 2월 제3대 김옥형 학장이 취임한다.

• 1980년 10월 경제학과,도서관학과를 신설하고 졸업정원제의 시행으로 국어국문학과,영어영문학과,사학과, 경영학과,무역학과, 경제학과,행정학과,도서관학과,의상학과,생활미술학과,무용과 등 15개학과 졸업 정원 520명,모집인원 676명으로 정원 조정하고,전일제 수업실시와 더불어 주야간 대학으로 전환한다.

• 1981년 10월 생활미술학과를 미술학과로 명칭 변경한다.

• 1981년 11월 안호상 박사가 제9대 이사장에 취임한다.

• 1982년 2월 제4대 학장 강병규 박사의 취임과 함께 대학문화의 창달을 위하여 민족사상연구소,사회 산업연 구소,한국전통예술연 구소,학생생활연구소 등 4개의 부설연구소를 설립하여 독창적이고도 활발한 연구활동을 추진한다.

• 1984년 12월 민족사상연구소와 한국전통 예술 연구소를 민족문화연구소로 통합하였고 정보화 사회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정보전산연구원을 설립한다.

• 1984년 8월 제5대 홍순태 학장이 취임한다.

• 1985년 12월 R.O.T.C 창설과 축구부를 창단한다.

• 1987년 10월 다양한 정보사회에 신속히 대처해 나갈 수 있는 고급전문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전산통계학과, 산업공학과, 산업디자인학과, 의류직물학과 등 4개학과를 신설하고 도서관학과를 문헌정보학과로 명칭 변경하고 학문의 전문화와 산학협동체제를 기하기 위해 경영행정대학원(경영학과,행정학과 각 40명)을 신설한다.

• 1988년 8월 제6대 학장으로 신영기 박사가 취임하고 이 해 11월 경영·행정대학원이 경영대학원(경영학과,무역학과 총 60명)과 행정대학원(행정학과 60명)으로 분리되고 증과·증원을 받아 보다 수준 높은 특수대학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 1989년 11월 대학원(모집정원36명)이 신설되어 국어국문학과, 사학과, 무역학과를 두어 명실공히 대학원 체제가 확립되고 연구하는 대학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아울러 행정대학원에는 교육행정학과(15명)가 증설된다.

• 1990년 10월 입시부정사태로 학사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큰 진통을 겪고 신영기 학장이 사임한다.

• 991년 3월 한성학원 이사장인 안호상 박사의 임기만료로 서정희 박사가 이사장 직무대리로 취임하고 이 해 4월 최초로 교수 직선에 의하여 선출된 국어국문학과 원형갑 박사가 제7대 학장으로 취임한다.

• 1991년 12월 입시정책을 전환하여 1992학년도 신입생 전·후기 분할모집을 단행한다. 1992학년도 입시에 전기 280명,후기 440명을 모집하게 됨으로써 후기대학이라는 인식을 탈피하고 우수한 신입생들을 유치함으로써 사학의 명문으로 향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대학의 시설 및 교사의 신·개축도 지속적으로 시행한다.

• 1983년 10월 학생복지관을 기공한다.

• 1986년 8월 ‘한성대학 발전계획안’에 의하여 추진된 “교사이 전 5개년 계획”으로 여중·고등학교 교사 및 교지로 이전하여 학문의 전당인 상아탑으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된다.

• 1987년 8월 우촌관을 신축하여 대학 본관으로 우리대학의 중추적인 기

능을 담당하는 곳이 되고 있다.

• 1990년 2월 과학관이 준공되고 정보화 사회에 대비하기 위하여 전자계산소를 개소한다.

이밖에 중앙도서관의 지속적인 확장 및 개수, 장서의 확보 등을 통해 학습분위기를 조성하고 시청각 교육실, 어학실습실, 컴퓨터 실습실,타자 실습실, 트레이닝 센터, 학생수련장 등 후생복지시설의 확충을 지속적으로 시행한다.

• 1991 년 6월 민족문화연구소 산하에 '농경생활사 전시관'을 개관하니 이는 농촌의 어제와 오늘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각종 농기구와 민속자료 등을 소장,전시함으로써 우리나라 농경생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 1991 년 11월 상징탑이 건립된다. 교문을 겸해서 세워진 상징탑은 우리 대학의 상징물인 거북이를 형상화 한 것으로 우리대학의 명물로 자리를 굳힌다.

• 1992년 2월 서정희 박사가 제12대 이사장에 취임하여 재단의 위상을 확립하고 대학의 내실있는 발전과 비전을 제시하여 대학이 새롭게 도약하

는 전기를 마련한다. 이 해 7월 대학원에 경영학과(12명)과 행정학과(12명) 증과로 모집정원이 60명으로,경영대학원은 산업경제학과(30명) 증과로 모집정원이 90명으로,행정대학원은 모집정원이 90명으로 된다.

• 1992년 7월 전산통계학과, 산업공학과 야간 증과로 80명 증원된다.

• 1993년 3월 1일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어 4개 단과대학,26개학과, 3개 대학원, 9개의 부속기관 및 4개의 연구소를 갖추게 된다. 원형갑 학장이 초대 총장을 잇게 된다. 이 해 9월 컴퓨터공학과(주·야) 각 40명, 정보공학과(야),산업안전공학과(야) 각 40명,산업디자인학과(야) 30명 증과로 입학정원 990명이 된다.

• 1994년 입시부터는 전기로 전환하여 본고사를 시행함으로써 우수한 신입생을 유치하는데 성공적인 계기가 된다. 이 해 10월 유일한 예술대학원 설립을 인가 받는다.

• 1995년 4월 제13대 이사장에 김옥자 여사가 취임하고 원형갑 총장의 임기만료로 제2대 총장에 문헌정보학과 이용남 박사가 취임한다. 이 해

10월 정보전산학부 주간 40명,영어영문학과, 국어국문학과 야간 각 20명, 행정학과, 경제학과 야간 각 40명,무역학과, 경영학과,산업디자인학과 야간 각 10명이 증과·증원되어 입학정원 1,180명이 된다. 또한 세계경제의 개방화·국제화 추세에 부응하여 국제경제,통상 및 외환분야의 새로운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국제통상정보대학원이 신설되고 예술대학원에 의상학과가 신설되어 60명이 증원된다.

• 1996년 5월 국내대학 최초로 중앙도서관 내에 전자정보관을 개관하여 가상대학의 개념을 현실화하고 첨단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교육과 연구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해 10월 산업안전공학과 주간 신설을 위해 국어국문학과,영어영문학과, 행정학과 주간에서 각 5명씩, 경상학부 주간에서 15명 도합 30명을 산업안전공학과 주간으로 자체 조정하고 국어국문(야),영어영문(야), 행정(야), 경상학부(야),산업시스템공학부(야)에 각 10명씩 증원 입학정원 1,230명이 된다.

• 1997년 4월 지역사회와의 연계와 평생교육을 실현하기 위하여 사회교육원 인가를 받고 이 해 11월 수도권 야간 정원 자율화 대학으로 선정되어 부동산학과 야간에 40명 증과하고 경상학부(야) 80명, 문헌정보학과(야) 40명,의상학과(야) 40명,사학과(야) 40명 증원 입학정원 1,620명

(주간 680명, 야간 940명)에 이르게 되고 예술대학원에 패션예술 학과를 신설한다. 이 해 10월 시작된 재단분규로 김옥자 이사장을 비롯하여 이사 전원이 퇴진하고 교육부 임시이사가 파견된다. 이용남 총장이 12월 30일자로 사임한다.

•1998년 1월 제14대 박병호 이사장에 이어 7월 제15대 차인석 이사장이 취임하고 신임 총장 선출을 위한 총장추천위원회를 구성하여 공개 모집한다. 이 해 5월 강의동 기공식을 갖고 수요자 행정 서비스를 위하여 학생회관에 학생 종합서비스센터를 개관한다. 10월 모집단위를 통폐합하여 어문계열,인문계열,사회계열로 분류하고, 의상학과와 의류직물학과를 의생활학부로 통합 명칭을 의상디자인전공, 의류패션산업 전공으로, 정보전산학부에 정보시스템공학전공을 신설하고 전산통계학과, 정보공학전공을 멀티미디어 정보처리 전공, 정보통신공학전공으로,산업 시스템공학부 산업 안전공학전공을 기계시스템공학전공으로 각각 명칭 변경하고 야간학과 모집 정원의 30%를 주간으로 전환 입학정원 주간 960명 야간 660명이 된다.

• 1998년 10월 제3대 이성근 박사가 취임한다.

• 1999년 3월 강의동 준공식을 갖고 대학원을 이전하는 등 교사 재배치를 하고 ‘한성대학교 중장기발전계획’과 ‘캠퍼스종합기본계획’을 수립한다. 이 해 6월 모집단위 학부제 확대로 한국어문학부, 영어영문학부, 역사문화학부,지식 정보학부, 사회 과학부,경 영학부,미디어 디자인학부로 개편하여 대학편제를 4개 단과대학, 10개학부 28개전공, 2개학과에 입학정원 1,620명이 된다. 11월에는 컴퓨터신기술대학원(30명), 안전보건경영대학원(20명)이 신설되고 대학원 석사과정 15명, 박사과정 5명 증원, 예술대학원 20명, 국제통상정보대학원을 국제대학원으로 명칭 변경하고 15명을 증원한다.

• 2000년 1월 제16대 김채윤 이사장이 취임하고 이 해 2월 1999년 대학종합평가 결과 우리대학이 교육, 연구, 사회봉사, 시설설비,재정경영에 우수 판정을 받아 평가대상 28개 대학 중 최우수 대학으로 선정된다.

• 2000년 7월 부동산대학원을 신설하고, 경영대학원에 e-business 학과, 국제 대 학원에 국제마약범 죄 학과를 증과하고,10월에 교육대 학원을 신설한다.

•2001년 3월 특수대학원 5학기제를 4학기로 학기단축(교육대학원 제외)하며, 이 해 6월 모집단위를 자체 조정하여 사회과학부를 2개학부로 분리 하여 경상학부에 무역학전공과 부동산학전공을, 정경학부에 행정학전공과 경제학전공을 지식경제학전공으로 명칭 변경하고 정보전산학부를 2개학부로 분리하여 컴퓨터공학부에 컴퓨터시스템전공과 멀티미디어정보처리전공을, 정보공학부에 정보통신공학전공과 정보시스템공학전공을 둔다. 8월 제17대 이상희 이사장이 취임하고 9월 도심형 예술대학을 구현하기 위하여 대학로 소재 동원빌딩을 매입하여 대학로캠퍼스로 명하고, 교수회관, 도서관,학생회관 별관 기공식을 가진다. 10월 경영대학원 서비스경영학과를 신설하고, 행정대학원 지방정부경영학과와 경찰행정학과를 신설한다.

2. 학교법인

• 1945년 9월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돈암동 산48번지(후에 삼선동 2가 392-2에서 389번지로 변경) 소재의 경성여자기예학교(대지 2,290평. 교사 373평으로 일본인 6년제 여자중학교를 졸업한 젊은 여성들에게 바느질,수예 등 신부수업을 가르치던 작은 학교)를 인수한다. 경성여자기예학교는 원래 서소문에 있던 사설학교로 일제 말기에 삼선동으로 이전한다. 이 해 9월 25일 학교법인을 추후 설립한다는 조건부로 4년제 한성여자고급중학교를 인가 받고 10월 5일 공식적으로 개교한다.

• 1946년 4월 6년제 한성고등여학교로 인가 받아 이 해 7월 한성여자중학교로 교명 변경한다. 1952년 6.25전쟁 중 학제개편에 따라 지금처럼 3년 제 한성여 자중학교와 한성 여자고등학교로 분리 개편된다.

• 1953년 1월 문교부로부터 재단법인 한성학원을 인가 받는다.

• 1955년 2월 충남 당진군 송산면 동곡리 소재 한성염전 십만팔천평을 수익사업으로 재단법인 한성학원에 희사한다.

• 1958년 12월 고등학교 본관(현 대학 진리관)과 강당을 준공한다.

• 1963년 12월 여자고등학교 죄조로 체육관을 준공한다.

• 1964년 1월 24일 재단법인을 학교법인으로 개편한다.

• 1967년 10월 5일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팔당리에 교직원 휴양을 위한 의화장을 매입하고 1971년 7월 낙산기슭 지금의 과학관 자리에 수영장을 설치한다.

• 1969년 8월 대학의 교사로 사용키로 하고 연건평 7,260m2의 건물(현 여고 건물)을 착공, 이듬해 준공하고 1972년에 4년제 야간 여자대학을 인가 받아 지금의 한성대학으로 발전한다.

⑴ 이사장

• 1945년 10월 초대 이사장으로 설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가 취임하여 1971년 10월 제5대까지 역임한다.

• 1971년 10월 이희순 여사가 제6, 7대 이사장을 이어서 한다.

• 1977년 4월 제8대 이사장을 김의형 설립자께서 다시 역임한다.

• 1981년 11월 설립자의 오랜 교우이자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내신 안호상 박사께서 제9대에서 제11대까지 역임하시다 임기만료로 물러난다.

• 1991년 4월 서정희 박사가 이사장 직무대리를 거쳐 제12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도중 사임한다.

• 1995년 4월 제13대 김옥자 이사장이 취임하나 1997년 10월 재단분규로 12월 22일자로 사임하고 이 해 12월 31일 교육부로부터 임시이사가 파견되어 1998년 1월 제14대 박병호 이사장, 1998년 7월 제15대 차인석 이사장,2000년 1월 제16대 김채윤 이사장에 이어 20이년 8월 제17대 현 이상희 이사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부록 표 2-1-1> 역대 이사장 명단

대수 이름 재임기간 비고

1~5대 김의형 1945.10.5.~1971.10.28.

6~7대 이희수 1971.10.29.~1977.421.

8대 김의형 1977.4.22.~1981.10.31.

9대 안호상 1981.11.1.~1991.3.30.

직무대행 서정희 1991.4.1.~1992.2.14.

12대 서정희 1992.2.15.~1995.3.30.

13대 김옥자 1995.4.1.~1997.12.22.

14대 박병호 1998.1.15.~1998.7.5.

15대 차인석 1998.7.6.~1999.12.31.

16대 김채윤 2000.1.31.~2001.8.10.

17대 이상희 2001.8.20.~현재 ,

3. 조직 및 기구

총장

대학본부

교무처

•교무과 •입학과 •수업지원과

기획연구처

•기획과 •심사평가과 •연구지원과

대외협력실

학생처

•학생과 •장학복지과 •학생종합서비스센터

총무처

•총무과 •경리과 •시실과 •관리과

대학

인문대학

한국어문학부(주·야)

•국어국문학전공 •응용한국어문진공

영어영문학부(주·야)

•영문학전공 •영어학전공

역사문화학부(주·야)

•한국역사문화전공 •동아시아역사문화전공 •유럽 및 아메리카 역사문화전공

지식정보학부(주·야)

•문헌정보학전공 •기록관리학진공

사회과학대학

경영학부(주·야)

•경영학전공 •경영정보학전공

경상학부(주·야)

•무역학전공 •부동산학전공부(주·야)

정경학부(주·야)

•행정학전공 •정제학전공

공과대학

컴퓨터공학부(주·야)

•컴퓨터시스템공학진공 •멀티미디어정보처리전공

정보공학부(주·야)

•정보동신공학전공• 정보시스템공학전공

산업시스템공학부(주·야)

•산업공학전공 • 기계시스템공학전공

예술대학

무용학과(주)

회화과(주)

미디어 디자인학부(주)

•시각커뮤니케이션디자인전공 •영상에니매이션전공 •팬시프로덕트디자인전공 •인테리어디자인전공

(야) •공간연출디자인전공 •영상애니메이션전공

의생한학부(주·야) •의상디자인진공 •의류페션산업전공

교양과

교직과

대학원

교학과

•대학원 •경영대학원 •행정대학원 •에술대학원 •국제대학원

•안전보건경영대학원 •컴퓨터신기술대학원 •교육대학원 •부동산대학원

부속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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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군대대

학생군사 교육단

<그림 7〉 2002학년도 기구 조직도

(1) 역대 총(학)장

• 1973년 3월 초대학장으로 설립자인 우촌 김의형 박사가 취임한다.

• 1977년 3월 취임한 제2대 이희순 학장이 1978년 7월 사임함에 따라 당시 교무과장 국어국문학과 정연길 교수가 6개월긴- 학장직무를 대행한다.

• 1979년 2월 제3대 학장으로 김옥형 학장이 취임하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1981년 12월 사임함으로 당시 교무처장 연정열 교수가 학장직무대행을 한다.

• 1982년 2월 제4대 강병규 학장이 취임하여 대학기구와 학사행정체제의 정비 등을 통해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나 1984년 신학기부터 불어닥친 대학 자율화 바람으로 ‘대학발전을 위한 공청회’를 시작으로 학생들의 요구가 거세어지면서 5월 25일부터 11일간 학내소요가 있었으며 그 여파로 강병규 학장이 7월 4일 사임힌-다. 김용석 교무처장이 2개월간 학

장직무를 대행한다.

• 1984년 8월 제5대 홍순태 학장이 취임하여,1985년 12월 R.O.T.C를 창설과 축구부를 창단하는 등 발전에 공헌하였으나 1985년과 1986년에 걸친 장기간 학내소요로 어려움을 많이 겪는다.

• 1988년 8월 홍순태 학장이 임기만료됨에 따라 당시 교내 교수 중에서 학장을 직선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법인이사회에서 외부인사인 서울대 명예교수 신영기 박사를 제6대 학장으로 초빙하고 교수협의회의 인준 동의 절차를 거쳐 취임한다. 그러나 1990년 10월 입시부정사태로 중도하차하고 당시 원형갑 교무처장이 학장직무대행을 한다.

• 1991년 4월 최초로 교수 직선으로 선출된 국어국문학과 원형갑 교수가 제7대 학장으로 취임하고 1993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학장에서 초대 총장으로 승계한다.

• 1995년 제2대 총장으로 역시 교수 직선에 의해 선출된 문헌정보학과 이용남 교수가 총장으로 취임하나 1997년 12월 재단분규로 중간에 사임한다. 이 해 12월 교육부로부터 파견된 임시이사들로 법인이사회가 구성

된다.

· 1998년 1월 당시 총장 직무대행을 할 교무처장 최송길 교수가 보직 사퇴함으로써 법인이사회에서 사학과 윤경로 교수를 교무처장 겸 총장직무대행으로 임명한다. 총장 선출방법을 놓고 법인이사회에서 공개 채용 을 통한 총장 선출 방법을 제시하여 교수대표 8인,직원대표 2인,학생대표 2인, 사회저명인사 2인,동문회대표 1인 등 15인으로 총장추천위원회를 구성하여 외부 인사 1인을 포함한 3인을 후보로 추천하면 최종 이사회에서 결정키로 한다. 총장 선출이 늦어지고 사학과 윤경로 교수가 총장 후보로 나오게 됨에 따라 교무처장직을 사퇴하고 7월 행정학과 황진수 교수가 교무처장 겸 총장직무대행을 이어서 한다. 8월 총장추천 위원회에서 내부인사로 윤경로 교수와 강병식 교수를 외부 인사로 배재대 총장을 역임한 이성근 박사를 법인 이사회에 추천하여 현 이성근 총장을 최종 결정하여 10월 제3대 총장으로 취임한다.

•2002년 10월 현 총장의 임기완료를 앞두고 법인이사회에서는 신임 총장

을 선출하기 위하여 대내외적으로 공개 초빙하기로 선출규정을 마련한다. 주요 내용은 이사대표 3인, 교수대표 5인,직원대표 2인, 학생대표 2인, 동문회대표 1인 등 13명으로 구성된 총장서류심사위원회에서 서류심사를 하고 교수회에서 교내외 총장 후보 2인씩을 추천하며 이사회에 서 결정키로 한다. 8월 21일 전체교수의 투표 및 8월 23일 이사회에서 한완상 전 교육부총리를 제4대 총장으로 결정한다.

<부록 표 3-1-1> 역대 총(학)장 명단

대수 이름 재임기간 비고

1 김의형 1973. 3.~977. 2.

2 이희수 1977. 3.~1978. 7.

직무대행정연길 1978. 8.~1979. 1.

3 김옥형 1979. 3.~1981.12.

직무대행 연정열 1981.12.~1982. 2.

4 강병규 1982. 2.1984. 7.학장

직무대행 김용석 1984. 7.~1984. 8.

5 홍순태 1984. 9.~1988. 8.

6 신영기 1988. 8.~1990.10.

직무대행 원형갑1990.10.~1991. 3.

7 원형갑 1991. 4.~1993. 2.

1 원형갑 1993. 3.~1995. 3.

2 이용남 1995. 4.~1997.12.

직무대행 윤정로 1998. 1.~1998. 6. 총장

직무대행 황진수 1998. 7.~1998.10.

3 이성근 1998.10.~2002.10.

(2) 역대 처장

• 1973년 3월 제1회 신입생을 맞아 교무처장에 영어영문학과 고창식, 학생처 장에 국어 국문학과 윤태 영 교수가 임명된다.

• 1975년 2월 직제개편에 따라 교무처장과 학생처장을 과장으로 바꿔 교무과장 불어불문학과 정기수, 학생과장 경영학과 연정열 교수를 임명하고,사무처장에 고등학교 행정실장 김성열씨를 임명한다.

• 1980년 10월 다시 처장제로 바꿔 교무처장에 경영학과 최명규,학생처장에 교양과 신은숙,사무처장에 국어국문학과 김중열, 도서관장에 가정학과 김복길 교수를 임명한다.

• 1982년 3월 강병규 학장이 취임하면서 교무처장에 미술학과 정하경,학생처장에 교양과 김계욱 교수를 임명하고 사무처장에 이승톡,기획실장에 손영일씨를 외부에서 영입하고 도서관장에 경영학과 연정열 교수를 임명한다.

• 1984년 3월 학생처장직에 있던 경영학과 최명규 교수가 사무처장을,기획실장에 사학과 강병식 교수를,학생처장에 영어 영문학과 김용석 교수

를 임명한다. 이 해 학내소요로 인하여 6월 다시 보직개편을 단행하여 교무처장에 영어영문학과 김용석 교수, 학생처장에 교양과 강은석 교수, 사무처장에 무역학과 강석중 교수,기획실장에 무역학과 김용정 교수를 임명하였으나 7월 학내소요의 여파로 강병규 학장이 사임함으로 김용석 교무처장이 총장 직무대행을 수행한다.

• 1984년 8월 홍순태 학장이 취임하면서 교무처장에 사학과 윤석효,사무처장에 경영학과 김길평 교수를 임명하고 이 해 12월 학생처장에 미술학과 한진만,도서관장에 무역학과 홍봉춘 교수를 임명하는 등 한 해에 무려 네 차례 보직개편을 한다.

•1990년 6월 신영기 학장 재임시 당시 유무열 총무과장이 사무처장으로 내부 승진하여 행정직으로 처장 역할을 수행하다 4개월만에 입시부정으로 인한 학내문제로 중도하차한다. 이후 사무처장제는 1998년 1월 윤경로 총장직무대행이 들어설 때까지 없어진다. 원형갑 학장·총장 및 이용남 총장 시절에는 임기에 관계없이 계속 보직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 1998년 1월 전 해 재단분규로 인한 학내문제로 당시 교무처장 경영학과 최송길, 학생처장 회화과 정종해,기획실장 의류직물학과 김종섭,도서관장 행정학과 이종수 교수가 사퇴함으로, 사학과 윤경로 교수가 교무처장 및 총장직무대행을, 학생처장에 산업공학과 박명환 교수가, 사무처장제를 부활하여 경제학과 이상한 교수가 사무처장을, 연구기획처장에 무역학과 유병호 교수가 임명된다. 연구기획처장은 3월에 경영학과 최명규 교수로 교체한다. 8월에는 총장 후보로 나온 윤경로 총장직무대행 겸 교무처장이 사임하고 행정학과 황진수 교수를 임용한다.

• 1998년 10월 이성근 총장이 제3대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교무처장에 사학과 윤석효 교수,연구기획처장에 산업공학과 홍윤기 교수, 학생처장에 경상학부 권 오 교수,사무처장에 경영학과 홍용식 교수, 도서관장에 문헌정보학과 이우범 교수를 임명한다.

•2000년 11월 교무처장에 영어영문학부 김용석 교수, 학생처장에 미디어 디자인학부 조 열 교수, 총무처장에 경영학부 김길평 교수,기획연구처장에 경영학부 최명규 교수,도서관장에 영어영문학부 고정자 교수를 임명한다.

• 2002년 8월 김용석 교무처장이 총장 후보에 출마하기 위하여 사퇴하고 후임으로 교직과 김경배 교수를 임명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부록 표 3-2-1〉 역대 보직자 명단

기간 총(학)장 교무처장 학생처장 사무처장(총무처장) 기획처(실)장 도서관장 비고

1973.3. 김의형 고창식 윤태영 초대학장

1975.2. 정기수연정열 김성열

1976.6. 이경식 이근수

1977.3. 이희순 1제2대 학장

1978.2 정연길

1978.8. 정연길 정하경 이창신 김영기 직무대행

1979.3. 김옥형 김계욱 정연길 제3대학장

1980.6. 이근수 신은숙 김중렬 김복길

1980.9. 최명규

1981.3. 연정열 김범주

1982.2. 강병규 정하경 김계욱 이승록 손영일 연정열 제4대학장

1982.12. 정연길

1983.3. 이용남 최명규 정연길

1984.3. 김용석 최명규 강병식

1984.6. 김용석 강은석 강석중 김용정 연정열

1984.9. 홍순태 윤석효 김길평 제5대학장

1984.12. 한진만 홍봉춘

1985.6. 최명규 김경배 한창호

1986.8. 한창호 이우범 최송길 이용남

1987.8. 이종수

1988.6. 김용정 이석주 박양구

1988.9. 신영기 16대학장

1989.12 김경자

1990.6. 원형갑 최송길 유무열 이동섭

1990.10. 원형갑 직무대행

1991.1 이종수 17대학장

1993.12. 정종해 초대총장

1994.9. 최송길 김경자 이종수

1995.4 이용남 12대총장

1996.11. 김종섭

1998.1. 윤경로 윤경로 박명환 이상한 유병호 이정숙 직무대행

1998.3. 최명규

1998.7. 황진수 황진수

1998.10. 이성근 윤석효 권오 홍용식 홍윤기 이우범 제3대총장

2000.11. 이성근 김용석 조열 김길평 최명규 고정자

2002.8. 이성근 김경배 조열 김길평 최명규 고정자

〈부록 표 3-2-2〉 역대 교무처장 명단

대수 소속 이름 재임기간 비 고

1 국어국문 고창식 1973. 3. - 1975. 2. 교무처장

2 불어불문 정기수 1975. 2. - 1976. 6. 교무과장

3 영어영문 이경식 1976. 6. - 1977.12.

4 국어국문 정연길 1977.12. ~1978. 8.

5 생활미술 정하경 1978. 8. - 1980. 6.

6 국어국문 이근수 1980. 6. - 1980.10.

7 경영 최명규 1980.11. ~ 1981. 2. 교무처장

8 경영 연정열 1981. 3. ~1982. 2.

9 생활미술 정하경 1982. 2. ~1982.11.

10 국어국문 정연길 1982.11. - 1983. 3.

11 도서관 이용남 1983. 3. ~ 1984. 6.

12 영어영문 김용석 1984. 6. - 1984. 9.

13 사 윤석효 1984. 9. - 1985. 8.

14 경영 최명규 1985. 8. - 1986. 8.

15 경제 한창호 1986. 8. ~1988. 6.

16 무역 김용정 1988. 6. ~ 1990. 6.

17 국어국문 원형갑 1990. 6. - 1991. 4.

18 행정 이종수 1991. 4. - 1994. 9.

19 경영 최송길 1994. 9. - 1997.12.

20 사 윤경로 1998. 1. - 1998. 7. 총 장 직무대행

21 행정 황진수 1998. 7, - 1998.10.

22 사 윤석효 1998.10. - 2000.11. 교무처장

23 영어영문 김용석 2000.11. ~2002. 8.

24 교직과 김경배 2002. 8.~ 현재

〈부록 표 3-2-3〉 역대 기획연구처장(기획실장)명단

대수 소속 이름 재임기간 비고

1 기획실 손영일 1982.4.~1984.3. 행정직

2 사 강병식 1984.3.~19846. 기획실장

3 무역 김용정 1984.6.-1985.6.

1985.6.~1988.12. 기획실폐지

4 무용 김경자 1989.12.-1996.11.

5 의류직물 김종섭 1996.11.-1998.1.

6 경상학부 유병호 1998.1.~1998.3.

7 경상학부 최명규 1998.3.~1998.10.

8 산업시스템공 홍윤기 1998.10.-2000.11. 연구기획처장

9 경영학부 최명규 2000.11.~2002.11. 기획연구처장

〈부록 표 3-2-4〉 역대 학생처장 명단

대수 소속 이름 재임기간

1 국어국문 윤태영 1973.3.-1975.2. 비고

2 경영 연정열 1975.2.-1976.6.

3 국어국문 이근수 1976.6.~1978.8.

4 행정 이창신 1978.8.~1979.3.

5 교양 김계욱 1979.3.~1980.8. 학생처장

6 교양 신은숙 1980.8.~1982.2.

7 교양 김계욱 1982.2.-1983.3.

8 경영 최명규 1983.3.-1984.3.

9 영어영문 김용석 1984.3.~19846.

10 교양 강은석 1984.6.~1984.12. 학생과장

11 미술 한진만 1984.12.~1985.8.

12 교직 김경배 1985.8.~1986.8.

13 도서관 이우범 1986.8.~1987.8.

14 행정 이종수 1987.6.~1988.6.

15 국어국문 이석주 1988.6.-1990.6.

16 경영 최송길 1990.6.~1993.1. 학생처장

17 회화 정종해 1993.12.~1997.12.

18 산업시스템공 박명환 1998.1.~1998.10.

19 경상학부 권오 1998.10.-2000.11.

20 미디어디자인 조열 2000.11.~현재

〈부록 표 3-2-5〉역대 총(사)무처장 명단

대수 소속 이름 재임기간 비고

1 사무처 김성열 1975.3.-1978.8. 행정직

2 사무처 김영기 1978.8.~1980.8. 서무과장

3 국어국문 김중렬 1980.8.~1981.3. 사무처장

4 행정 김범주 1981.3.-1982.3.

5 사무처 이승록 1982.3.-1984.3. 행정직

6 경영 최명규 1984.3.~1984.6. 사무처장

7 무역 강석중 1984.6.-1984.10.

8 경영 김길평 1984.10.~1986.8.

9 정영 최송길 1986.8.-1988.6.

10 영어영문 박양구 1988.6.~1990.8.

11 사무처 유무열 1990.6.~1990.10. 행정직처장

1990.10.~1998.1. 폐지

12 경상학부 이상한 1998.1.-1998.10. 사무처장

13 경상학부 홍용식 1998.10.~2000.11.

14 경영학부 김길평 2000.11.~2002.11. 총무처장

(3) 역대 학장

• 1982년 제4대 강병규 학장이 취임하면서 학부제 운영에 대하여 성격이 유사한 학과들을 분류해 4개의 학부를 두고 모든 학사행정을 학부중심 운영체제로 전환하고 12월 10일 사회과학부장 행정학과 이창신, 예술학부장 미술학과 하인두,교양학부장 행정학과 정연선 교수를 임명한다.

• 1983년 2월 학사개혁조치를 통해 4개학부로 운영하나 활성화되지 못하고 유명무실화된다.

설치연도 학부 소속학과 학부장

1983. 2.18.

인문학부 국어국문,영어영문, 사 이동섭 (사)

사회학부 경영,무역,경제, 행정,도서관 연정열(경영)

예술학부 무용, 의상,미술 하인두 (미술)

교양학부 교양과정 박양구(영어영문)

•1984년 6월 사회과학부장 경제학과 한창호, 예술학부장 미술과 정하경, 교양학부장 교직과 신은숙 교수를 임명한다.

•1989년 이공계열 학과의 신·증설과 1993년 3월 종합대학교로 승격하면서 다음과 같이 4개 단과대학으로 개편하나 학장을 임명하지 않았다.

설치연도 대학 소속학과 비고

1993. 3. 1.

인문대학 국어국문,영어영문, 사

사회과학대학 경영,무역,경제, 행정, 문헌정보

예술 대학 무용,의상, 회화,산업디자인

이공 대학 전산통계, 산업공학

• 1998년 제3대 이성근 총장이 취임하면서 단과대학별로 학장을 임명하고 업무를 분장한다.

• 2001년 이공대학을 공과대학으로 명칭 변경한다.

<부록 표 3-4-1〉 역대 학장 명단

대수 구분 소속 이름 재임기간 비고

1 인문대학장 영어영문학과 김용석 1998.11.-2000.11.

사회과학대학장 경상학부 김평광

에술대학장 무용학과 김숙자

이공대학장 정보전산학부 차운옥

2 인문대학장 역사문화학부 윤석효 2000.11.-현재

사회과학대학장 정징학부 정성택

에술대학장 회화과 정하경

공과대학장 정보공학부 이두성

(4) 역대 대학원장

• 1987년 11월 경영행정대학원의 설립 인가를 받아 초대 대학원장에 홍순태 학장이 겸직하고,대학원 교학과장에 사학과 강병식 교수, 경영학과 주임교수에 무역학과 김용정 교수,행정학과 주임교수에 황진수 교수를 임명한다.

• 1988년 경영·행정대학원을 분리하여 경영대학원과 행정대학원을 둔다.

• 1994년 예술대학원을 설립하고 1995년에 국제통상정보대학원, 1999년에 컴퓨터 신기술대 학원과, 안전보건 경영대학원을 설립하고, 국제통상정보대학원은 국제대학원으로 명칭을 변경한다.

•2000년 11월 부동산 대학원과 교육대학원을 신설하여 현재 대학원 및 6개 특수대학원이 있으며, 1990년 경영학과 최명규 교수가 대학원장으로 보직을 맡은 후 특수대학원장까지 겸직하다가 1998년 11월 이성근 총장 재임 시 특수대학원장을 각 대학원별로 임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록 표 3-4-1〉 역대 명단

대수 소속 이름 재임기간 비고

1 경영 최명규 1989.11.~1993.7. 특수대학원장겸직

2 무역 강석중 1993.8.-1986.6.

3 행정 이태교 1993.7.-1998.2.

4 국어국문 이석주 1998.2.~1998.11.

5 이성근 1998.12.~2000.11. 겸직(총장)

6 경영 연정열 2000.11.~2002.2. 정년퇴임

2002.3.~현재 공석

<부록 표 3-4-2〉 역대 특수대학원장 명단

특수대학원 대수 소속 이름 재임기간 비고

경영 1 경영학과 최명규 1989.11.-1993.7.

2 무역학과 강석중 1993.8.~1996.6.

3 행정학과 이태교 1996.7.~1998.2.

4 국어국문학과 이석주 1998.3.-1998.11.

5 경상학부 김길평 1998.11.~2000.11.

6 경영학부 김원중 2000.11.~2002.11.

행정 1 경영학과 최명규 1998.11.~1993.7.

2 무역학과 강석중 1993.8.-1996.6.

3 행정학과 이태교 1996.7.-1998.2.

4 국어국문학과 이석주 1998.3.~1998.11.

5 행정학과 이태교 1998.11.~2000.11.

6 사회과학부행정학전공 황진수 2000.11.~2002.8.

7 " 정주택 2002.8.~현재 직무대행

부동산 " 사회과학부 박병식 2000,11.~2001.11.

2 사회고}학부 안정근 2001.12.~2003.11.

예술 1 무역학과 강석중 1994.11.~1996.6.

2 행정학과 이태교 1996.7.~1998.2.

3 국어국문학과 이석주 1998.3.~1998.11.

4 회화과 정하경 1998.11.-2000.5.

5 회화과 정종해 2000.5.~2002.5.

6 의류산업패션 임재영 2000.5.~현재

국제통상정보 1 무역학과 강석중 1995.10.~1996.6.

2 행정학과 이태교 1996.7.~1998.2.

3 국어국문학과 이석주 1998.3.-1998.11.

4 경상학부 김길평 1998.11.~1999.12. 국제대학원으로 명칭변경

특수대학원 대수 소속 이름 재임기간 비고

국제 1 사학과 강병식 1999.12.~2002.8.

2 역사문화학부 박주철 2002.8.~현재직무대행

컴퓨터신기술 1 정보전산학부 차운옥 1999,11.-2000.5.

2 정보전산학부 최병수 2000.5,2002.5.

3 정보공학부이두성2000.5.~현재 학장겸직

안전보건 1 산업안전시스템공학부 정병용 1999.12.-2001.11.

경영 2 산업안전시스템공학부 한정수 2001.12.~2003.11.

교육 1 교직과 김경배 2000.11.~2002.8.

2 교직과 조점환 2000.11.~현재

(5) 역대 부속기관장

1) 도서관장

• 1973년 3월 본관건물 8층(현 한성여고건물)에 자리잡은 한성여자대학 도서관은 참고열람실과, 일반열람실로 구성되어 사서 1명으로 운영한다.

• 1979년 초대 도서관장으로 국문과 정연길 교수를 임명한다.

• 2000년 11월 영어영문학과 고정자 교수가 도서관장으로 임명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부록 표 3-5-1〉역대 도서관장 명단

대수 소속 이름 재임기간 비고

1 국어국문 정연길 1979.3.~1980.8.

2 가정 김복길 1980.8.~1982.2.

3 경영 연정열 1982.2.~1983.3.

4 국어국문 정연길 1983.3.~1984.6.

5 경영 연정열 1984.6.~1984.12.

6 무역 흥봉춘 1984.12.~1985.8.

7 경제 한창호 1985.8.~1986.8.

8 도서관 이용남 1986.8.~1990.6.

9 사 이동섭 1990.6.~1995.1.

10 행정 이종수 1995.1.~1998.1.

11 국어국문 이정숙 1998.1.~1998.10.

12 문헌정보 이우범 1998.10.~2000.11.

13 영어영문학부 고정자 2000.11.~현재

2) 전자계산소장

· 1990년 2월 우리대학 교육이념의 수행과 정보화시대의 도래에 따른 교수,학생들이 연구활동 및 실습지원과 행정업무전산화를 목적으로 전자계산소를 개소하고,초대 전자계산소장에 권혁제(경제학과)교수가 임명된다.

<부록 표 3-5-2〉역대 전자계산소장 명단

대수 소속 이름 재임기간 비고

1 경제 권혁제 1990.4.-1990.8.

2 전산통계 최병수 1990.9.-1992.8.

3 산업공학 김대홍 1992.9.~1996.8.

4 산업공학 홍윤기 1996.9.~1998.12.

5 정보전산학부 이재문 1998.12.~2000.11.

6 신업시스템공학부(기계) 윤재건 2000.12.~현재

3) 사회교육원장

• 1997년 4월 사회교육원 인가를 받는다.

• 1998년 이성근 총장이 취임한 후 행정학과 황진수 교수를 사회교육원장에 임명하여 사회교육원을 활성화한다.

〈부록 표 3-5-3〉역대 사회교육원장 명단

대수 소속 이름 재임기간 비고

1 행정 황진수 1998.11. - 2000.11.

2 지식정보학부 이우범 2000.11. ~현재

4) 출판부장

· 1989년 2월 교수연수회의에서 공식적으로 발족이 논의됨에 따라 출판부가 신설된다. 초대 출판부장으로 국어국문학과 원형갑 교수가 임명된다.

<부록 표 3-5-4> 역대 출판부장 명단

대수 소속 이름 재임기간 비고

1 국어국문 원형갑 1989. 3. ~1990. 6.

2 국어국문 이석주 1990. 6. - 1996. 6.

3 국어국문 김동환 1996. 6. ~현재

5) 한성대신문사(학보사) 주간

• 1976년 11월 30일 문공부로부터 정기간행물 허가를 받는다. 이 해 12월 15일자로 격월간 「漢城女子大學報」를 창간한다. 김의형 학장을 발행인으로, 학생과장 국어국문학과 이근수 교수를 편집인 겸 주간으로 제6호까지 발간한다.

• 1978년 교명 변경과 함께 「漢城大學報」로 개칭하고 4월 7일 제7호부터 주간교수를 별도로 행정학과 이창신 교수를 임명하고 편집인을 학생처장으로 분리한다. 8호부터 경영학과 연정열 교수가 주간으로 임명되면서 이전의 학생처장 주관하에서 발행되던 학보를 독립하여 발행한다.

• 1981년 3월 보직개편을 하면서 학보사 주간으로 사학과 윤경로 교수가 편집인으로 학생처장 교양과 신은숙 교수로 분리하고 제21호부터 격월 간 4면에서 월간 8·4면으로 바뀐다.

• 1982년 국문과 이석주 교수가 주간이 되면서 1982년 4월 9일 제29호부터는 완전 한글 표기를 채택하였고 제호도 한자로 된 「漢城大學報」를 「한성대학보」로 바뀐다. 한글로 된 한갑수 선생의 제호 글씨가 여성적 이미지를 준다며 1985년 3월 4일 제58호부터 글씨체를 바꾸고 다시 1988년 1월 1일 제1이호부터는 한자로 바뀐다.

• 1984년 3월 19일 제46호부터 월간 8면에서 격주 8면, 4면씩으로 발간하였으며 창간 10주년이 되는 1986년에는 ‘한성문화상’을 제정하여 1986년 12월 1일 제 84호에 시, 소설 수상작품을 발표하고 제2회부터는 ‘한성문화상’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사회분야, 평론까지 확대한다.

• 1988년 8월 22일 제111호부터 가로쓰기 편집으로 전환하고 제호도 당연히 가로쓰기로 바뀐다.

•1990년 8월 27일 제142호부터는 한자 제호 「漢城大學報」를 한글 「한성대학보」로 다시 바뀐다.

꽉]

• 1992년 3월부터 박헌영 주간 재임시 주간이 학생처장이 맡던 편집인을 겸하게 되고 이 시기에 학생기자들이 편집권과 사설권을 요구하면서 학교 당국과 첨예한 대립을 하다가 1993년 4월 제198호를 끝으로 「한성대학보」가 발간 중지된다.

• 1993년 8월 간사제를 도입하여 우리대학 국어국문학과 출신인 강호정씨가 간사로 임명되고 1993년 12월 제199호를 속간한다.

• 1994년 3월 2일 제200호부터 주간 4면과 8면으로 번갈아 발행하던 학보를 격주간 8면으로 발행하다 1997년 3월부터 격주, 8면,12면으로 발행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부록 표 3-5-5〉 역대 학보사 주간 명단

대수 소속 이름 재임기간 비고

1 국어국문 이근수 1976.12. ~ 1978. 2. 학생처장겸직

2 행정 이창신 1978. 4. ~1978. 5. 주간

3 경영 연정열 1978. 6. ~ 1981. 4.

4 사 윤경로 1981. 5. ~ 1982. 2.

5 국문 이석주 1982. 3. ~ 1982.11.

6 사 윤경로 1982.11. ~ 1985. 2.

행정 이종수 1985. 3. ~ 1986. 6.

7 행 정 황진수 1986. 7. ~ 1988. 2.

국문 원형갑 1988. 3. ~1988. 6.

8 영문 김용석 1988. 6. ~1990. 7.

9 행정 이종수 1990. 8. ~ 1991. 3.

10 경제 박헌영 1991. 4. ~ 1996. 6. 주간겸편집인

11 경상 권오 1996. 7. ~2000.12.

12 한국어문학부 정후수 2001. 1. ~ 2002. 2.

13 영어영문학부 이병은 2002. 3. ~ 2004. 2.

6) 영자신문사 주간

우리대학의 저널리즘과 참다운 대학문화 창달, 그리고 대학 언론으로서 의 올바른 위치를 지속하기 위하여 1989년 영문학회 산하에 Minerva Times 창간 이후 1990년 별도 기구로 독립하여 Hansung Times로 제호

를 변경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94년 초대 영자신문사 주간으로 당시 조효진 영어영문학과장이 임명된다.

〈부록 표 3-5-6〉역대 영자신문사주간 명단

대수 소속 이름 재임기간 비고

1 영어영문 조효진 1994. 7. ~ 1996. 6.

2 영어영문 문귀선 1996. 7. ~1998. 6.

3 영어영문 김덕자 1998. 7. - 2000. 6.

4 영어영문 고정자 2000. 7. - 2000.12.

5 영어영문 홍성훈 2001. 1. - 2002.12.

7) 방송국 지도교수

· 1982년 10월 방송국의 발족은 학생들의 수차 건의에 의한 것으로 마땅한 공간이 없어 학생처의 일부 공간을 이용하여 설치하고, 개교 9주년 기념 체육대회부터 첫 방송을 시작한다. 초대 방송국 지도교수로 김길평 교수가 방송국의 기반을 다진다. 그후 낙산가요제와,방송제, 방송잔치 등 을 개최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부록 표 3-5-7〉 역대 방송국 지도교수 명단

대수 소속 이름 재임기간 비고

1 경영 김길평 1982.11.~1990.6.

2 교직 조점환 1988.6.~1990.7.

3 영어영문 김용석 1990.7.~1992.7.

4 산업공학 박명환 1992.7.~1998.2.

5 경상학부 권오 1998.2.~2000.12.

6 정보전산학부 이항찬 2001.1.~2002.12.

8) 교지편집실 지도교수

교지 「漢城」은 대학생들이 대학의 가치와 삶을 표출해내는 기관지로서 1982년 창간호 「漢城」을 발간하여 2002년 현재 24번째 여름호를 발간하였다.

[부

〈부록 표 3-5-8〉 역대 교지편집실 지도교수 명단

대수 소속 이름 재임기간 비고

1 국어국문 이정숙 1982.3.~1988.6.

2 국어국문 김용석 1988.6.~1992.2.

3 국어국문 정후수 1992.2.~1996.8.

4 국어국문 박호영

5 사 박근칠 1998.3.~2000.12.

6 산업시스템공학 박두용 2001.1.-2002.12.

(6) 부서

• 1973년 대학설립당시 우리대학 행정조직은 교무처, 학생처,사무처 등 3개 부처로 구성된다.

• 1975년 2월 직제개편으로 교무처와 학생처를 과로 낮추었다가 1980년 10월 다시 처로 바꿔 교무처,학생처, 사무처로 개편하고 교무처에 교무과와 학적과를 학생처에 학생지도과와 행정과를 사무처에 서무과와 영선과를 둔다.

•1982년 3월 강병규 학장 재임시 기획실을 도입하여 기획과와 예산관리과를 두어 운영하다가 1985년 기획실을 폐지하고 사무처에 기획과를 편입한다.

• 1988년 8월 기획실을 재신설하여 3체실로 운영한다.

• 1991 년 2월 사무처를 폐지하고 총무과, 경리과를 총장직속기구로 두게 된다. 이는 사무처 자체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사무처장제를 없애고 그 역할을 법인사무국에서 관장한다. 그리고 총무과 내 관리업무를 독립시켜 기획실 내에 관리과를 신설한다.

• 1992년에는 기획처 관리과 내 시설업무를 분리하여 시설과를 신설한다.

• 1995년 6월 교무처에 연구과를 신설한다. 이 해 11월에는 연구처를 별도로 신설하여 연구진흥과와 국제교류과를 두고 교무처 내 학적과를 교무과로 통폐합하고 입시업무를 전담하는 입시관리과를 신설한다. 이로써 우리대학은 4체실로 운영하게 되나 연구처장을 교무처장이 겸직함으로 기능적으로 완전히 독립하지 못한 채 운영된다.

• 1998년 1월 윤경로 총장직무대행 때 총장직속기구로 있던 총무과와 경리과를 사무처로 다시 복귀시키고 기획실 내에 있던 시설과와 관리과를 사무처로 이관한다. 또한 연구처를 기획실과 통폐합하여 연구기획처로 명칭 변경하고 연구진흥과는 연구지원과로 명칭 변경하여 국제교류과와 기획과를 그 산하로 둔다. 입시관리과는 입학과로 명칭을 변경한다.

• 1999년 연구기획처를 기획연구처로 사무처를 종무과로 명징을 변경한 다.

• 2000년 현 총장 재임 시 기획연구처 내에 기획과 업무에서 평가 및 예산심사분석업무를 분리하여 심사평가과를 신설하고, 총장부속실업무와 홍보업무 및 국제교류과를 폐지하고 대외협력,국제교류를 담당하기 위하여 총장직속기구로 대외협력실을 신설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부록 표 3-6-1〉 대학본부 설치연표

설치년도 교무처 학생처 사무처(총무처) 기획실(처) 비고

1973. 교무처 학생처 사무처 / 2처

1975. 교무과 학생과 서무처 / 3과

1980.2. 교무처 교무과 학적과 학생처 학생지도과 행정과 사무처 서무과 영선과 / 3처

1984.4 교무처 교무과 학적과 학생처 학생과 장학과 사무처

서무과 경리과 기획실 기획과 예산관리과 3처1실 기획실신설

1985.6. 교무처 교무과 학적과 학생처 학생과 장학과 사무처

서무과 경리과 기획과 3처 기획실폐지

1988.3. 교무처 교무과 학적과 학생처 학생과 장학과 사무처

총무과 경리과 기획실 기획과 3처1실 기획실 재신설

설치년도 교무처 학생처 사무처(총무처) 기획실(처) 비고

1991.2. 교무처 교무과 학적과 학생처 학생과 장학복지과 사무처폐지 총장직속기구 총무과 경리과 기획실 기획과 관리과 2처1실 직속기구 사무처 폐지 총장직속기구 관리과신설

1992.2. 교무처 교무과 학적과 학생처 학생과 장학과 총장직속기구 총무과 경리과 기획실 기획과 관리과 시설과 2처1실 직속기구1 시설과신설

1995.6. 교무처 교무과 학적과 연구과 학생처 학생과 장학과 총장직속기구 총무과 경리과 기획실 기획과 관리과 시설과 2처1실

1995.11. 교무처 교무과 입시관리과 연구처 연구진흥과 국제교류과 학생처 학생과 장학과 총장직속기구 총무과 경리과 기획실

기획과 관리과 시설과 학적과폐지 입시관리과신설 연구처선설 연진흥과 국제교류과

1998.2. 교무처 교무과 입학과 학생처 학생과 장학과 사무처

총무과 경리과 관리과 시설과 연구기획처 기획과 연구지원과 국제교류과 4처 연구처 폐지 기획실에 통합 관리,시설과 총무처 편입

1999.6. 교무처 교무과 입학과 학생처 학생과 장학과 총무처

총무과 경리과 관리과 시설과 기획연구처 기획과 연구지원과 4처 명칭변경

2001.11. 교무처 교무과 입학과 학생처학생과장학과 총무처 총무과 경리과 관리과 시설과 기획연구처기획과심사평가과연구지원과대외협력실 4체실 총장직속기구로 대외협력실 신설 심사평가과신설

(7) 학과(부)• 1973년 3월 국어국문학과,영어영문학과, 비서학과, 가정학과,의상학과, 생활미술학과 등 6개학과 150명의 야간대학으로 개교한다.• 1973년 12월 비서학과를 폐과하고 무용학과, 경영학과,무역학과, 불어

불문학과 등 4개학과를 증과함으로써 9개학과에 입학정원 230명으로 늘어난다.

• 1976년 10월에는 불어불문학과를 폐과하고 국사학과를 신설하고,이듬해 국사학과를 사학과로 명칭 변경한다.

• 1978년 1월 남녀공학으로 전환하고 이 해 10월 국어국문학과,영어영문학과,의상학과, 생활미술학과, 무용학과,경영학과,무역학과 입학정원을 증원하고, 행정학과를 신설하고 가정학과를 폐과하여 9개학과에 입학정원 380명으로 늘어난다

• 1979년 9월 행정, 무용, 의상, 생활미술 사학과 등 5개학과를 60명 증원하여 입학정원이 440명이 된다.

• 1980년 10월 주간에 경제학과,도서관학과를 신설하여 전일제 수업실시와 더불어 주야간 대학으로 전환한다. 당시 졸업정원제의 시행으로 국어국문학과,영어영문학과,사학과,경영학과,무역학과, 경제학과,행정학과,도서관학과,의상학과, 생활미술학과,무용과 등 11개학과 졸업정

원 520명, 모집인원 676명으로 정원 조정한다. 야간에 졸업정원 국어국문학과 20명, 영어영문학과 20명,경영학과 40명,무역학과 40명만 두고 모든 학과를 주간으로 전환하여 국어국문학과 20명,영어영문학과 20명, 경영학과 40명,무역학과 40명,사 40명, 행정 40명,무용 40명, 의상 40명, 생활미술 40명을 두어 야간 4개학과에 주간 11개학과로 이루어진다.• 1981년 10월 생활미술학과가 미술학과로 명 칭 변경한다.

• 1986년 졸업정원제 폐지로 입학정원 520명으로 재조정한다.

• 1987년 10월 이공계열인 전산통계학과, 산업공학과,산업디자인학과, 의류직물학과 등 4개학과에 각각 40명씩 증과하고 도서관학과를 문헌정보학과로 명 칭 변경한다. 이로써 15개학과에 입학정원 720명이 된다.

• 1992년 7월 전산통계학과, 산업공학과 야간 증과로 80명이 증원하여 입학정원이 800명이 된다.

• 1993년 3월 1일 종합대학교로 승격되어 4개 단과대학로 개편하고, 그해 9월 컴퓨터공학과(주,야) 각 40명, 정보공학과(야), 산업안전공학과(야) 각 40명, 산업디자인학과(야) 30명을 증과로 주간 16개학과,야간 10개에 입학정원이 990명이 된다. 미술학과를 회화과로 명칭 변경한다.

• 1994년 10월에 전산통계학과, 컴퓨터공학과,정보공학과를 정보전산학부

로 개편하여 주간 80명,야간 120명이 된다.

• 1995년 10월 정보전산학부 주간 40명,영어영문학과, 국어국문학과 야간 각 20명, 행정학과,경제학과 야간 각 40명, 무역학과, 경영학과, 산업디자인학과 야간 각 10명이 증과. 증원되어 입학정원이 1,180명에 이르게 된다.

• 1996년 10월 산업안전공학과 주간 신설을 위해 국어국문학과,영어영문학과,행정학과 주간에서 각 5명씩,경상학부 주간에서 15명을 빼내 도합 30명을 자체 조정하고 경영학과, 무역학과, 경제학과를 경상학부로, 산업공학과와 산업안전공학과를 산업시스템공학부로 통합한다. 국어국문(야), 영어영문(야),행정(야) 각 10명씩, 경상학부(야) 30명,산업시스템공학부(야)에 10명을 증원하여 입학정원 1,230명이 된다.

• 1997년 11월 수도권 야간 정원 자율화 대학으로 선정되어 부동산학과 야간에 40명을 증과하고, 경상학부(야) 80명,문헌정보학과(야) 40명, 정보전산학부(야) 30명,산업시스템공학부(야) 40명, 의류직물학과(야) 40명, 산업디자인학과(야) 40명, 의상학과(야) 40명, 사학과(야) 40명 등 무

려 390명을 증원하여 입학정원이 1,620명(주간 680명,야간 940명)에 이르게 된다.

• 1998년 10월에 모집단위 통폐합으로 어문계열, 인문계열, 사회계열로 분류하고, 의상학과 및 의류직물학과를 의생활학부로 통합하고 명칭을 의상디자인 전공, 의류패션산업 전공으로,정보전산학부에 정보시스템 공학 전공을 신설하고 전산통계학과 정보공학 전공을 멀티미디어 정보처리전공,정보통신공학 전공으로,산업시스템공학부 산업안전공학 전공을 기계시스템공학으로 각각 명칭 변경하고 야간학과 모집 정원의 30%를 주간으로 전환하여 이 전 주간 680명, 야간 940명이 주간 960명 야간 660명으로 주·야간 신입생 모집 정원이 역전된다.

•1999년 6월 모집단위 학부제 확대로 한국어문학부,영어영문학부,역사문화학부,지식 정보학부,사회 과학부,경 영학부, 미 디어디자인학부로 개편하여 대학편제를 4개 단과대학,10개학부 28개전공,2개학과에 입학정원 1,620명이 된다.

•2000년 6월 산업디자인학과를 미디어디자인학부로 확대하고 시각커뮤니 케이션디자인 전공, 캐릭터 애니메이션전공,스페이스디자인 전공,팬시프

로덕트 디자인 전공을 주간학부 세부전공으로 하고,공간연출디자인을 야간학부 세부전공으로 하며, 산업시스템공학부를 산업 및 기계시스템 공학부로 명칭 변경한다.

• 2001 년 6월 모집단위를 자체 조정하여 사회과학부를 2개학부로 분리하여 경상학부에 무역학전공과 부동산학전공을 정경학부에 행정학전공과 경제학전공을 지식경제학전공으로 명칭 변경하여 두고 정보전산학부를 2개학부로 분리하여 컴퓨터공학부에 컴퓨터시스템전공과 멀티미디어정보처리전공을, 정보공학부에 정보통신공학전공과 정보시스템공학전공으로 분리한다.

• 2002년 현재 우리대학은 4개 단과대학아래 12개학부, 2개학과,33개전공의 편제로 이루어진다.

<부록 표 3-7-1> 학과별 설치년표

구분 학과 인문대학 사회과학대학 예술대학 이공대학 입학정원

1972 국어국문 영어영문 비서 가정 생활미술 의상

1973 국어국문 영어영문 가정 불어불문 경영 무역 무용 생활미술 의상

1976 국어국문 영어영문 국사 가정 경영 무역 무용 생활미술 의상

1977 국어국문 영어영문 사 가정 경영 무역 무용 생활미술 의상

1978 국어국문 영어영문 사 경영 무역 행정 무용 생활미술 의상

1979 국어국문 영어영문 사 경영 무역 행정 무용 생활미술 의상

1980 국어국문 영어영문 사 도서관 경영 무역 경제 행정 무용 생활미술 의상

1981 국어국문 영어영문 사 도서관 경영 무역 경제 행정 무용 미술 의상

1987 국어국문 영어영문 사 문헌정보 경영 무역 경제 행정 무용 미술 산업디자인 의상 전산통계 산업공학 의류직물

1993 국어국문 영어영문 사 문헌정보 경영 무역 경제 행정 무용 미술 산업디자인 의상 전산통계 컴퓨터공학 정보공학 산업공학 의류직물

1996 국어국문 영어영문 사 문헌정보 경영 무역 경제 행정 무용 미술 산업디자인 의상 전산통계 컴퓨터공학 정보공학 산업공학 의류직물

1997 국어국문 영어영문 사 문헌정보 경상학부 행정 부동산 무용 회화 산업디자인 의상 정보전산학부 산업시스템공학부 의류직물

1998 국어국문 영어영문 사 문헌정보 경상학부 행정 부동산 무용 회화 산업디자인 의상 정보전산학부 산업시스템공학부 의류직물

1999 어문계열 인문계열 경상학부 사회계열 무용 회화 산업디자인 의생활학부(의상디자인, 의류패션산업) 정보전산학부(멀티미디어정보처리, 컴퓨터공학, 정보통신공학으로 명칭변경) 정보시스템공ㅇ학 신설 산업시스템공학부(산업안전 기계시스템)

2000 한국어문학부 영어영문학부 역사문화학부 지식정보학부 경영학부 사회과학부 무용 회화 미디어디자인학부 의생활학부(의상디자인, 의류패션산업) 정보전산학부 산업시스템공학부

2001 한국어문학부 영어영문학부 역사문화학부 지식정보학부 경영학부 사회과학부 무용 회화 미디어디자인학부 의생활학부(의상디자인, 의류패션산업) 정보전산학부 산업 및 기계시스템공학부

2002 한국어문학부 영어영문학부 역사문화학부 지식정보학부 경영학부 정경학부(행정학, 지식경제학) 경상학부(무역학, 부동산학) 무용 회화 미디어디자인학부 의생활학부(의상디자인, 의류패션산업) 컴퓨터공학부(멀티미디어정보 컴퓨터시스템) 정보공학부(정보통신 정보시스템) 산업 및 기계시스템공학부

2002학년도에 이공대학이 공과대학으로 명칭변경

<부록 표 3-7-2〉 설치학과(부) 및 입학정원

설치인가 학과/학부 입학정원 구분 비고

1972.12.21. 국어국문(야) 30 신설 ·여자대학,야간 6개 학과 150명

영어영문(야) 30 "

의상(야) 20 "

생활미술(야) 20 "

비서(야) 20 "

가정(야) 30 "

1973.12.20. 불어불문(야) 20 " ·9개 학과 230명

경영(야》 30

무역(야》 30 "

무용(야) 20 "

비서(야) - vP과

1976.12.10. 국사(야) 20 신설 ·9개 학과 230명

불어불문(야) - 폐과

1977.10.20. 사(야) - - ·국사학과명칭변경

1978.10.15. 행정(야》 30 신설 • 1월11일 한성 여자대학을 한성대학으로 변경(남녀공학)

• ( )증원수

• 9개 학과 380명

국어국문(야) 40(10) 증원

영어영문(야》 40(10) "

경영(야) 80(50) "

무역(야) 80(50) "

가정학과 - 폐과

1979.9.11. 행정(야) 40(10) 증원 ·9개 학과 440명

무용(야) 40(10) "

의상(야) 40(10) "

생활미술(야) 40(10) "

사(야) 40(20) "

1980.10.15. 경주) 40 신설 • 경제,도서관학과 신설

• 주간전환:

국문, 영문 각각 20명,경영, 무역 각각 40명,기타학과 주간전환(주간 11개 학과,야간 4개 학과 676명)

도서관(주) 40 "

국어국문(주) 20 주·야전환

국어국문(야) 20 "

영어영문(주) 20 "

영어영문(야) 20 "

사 40 "

경영(주) 40 "

경영(야) 40 "

무역(주) 40 "

무역(야) 40 "

행정(주) 40

무용(주) 40 "

의상(주) 40 "

미술 40 "

설치인가 학과/학부 입학정원 구분 비고

1981. 미술 - 생활미술학과 명칭변경

1987. 10. 23. 전산통계 (주) 40 신설 · 15개학과 720명

산업공학(주) 40 "

의류직물(주) 40 "

산업디자인(주) 40 "

문헌정보 - · 도서관학과 명칭변경

1992. 7. 31. 전산통계 (야) 40 신설 · 입학정원 800명

산업공(야) 40 "

1993. 9. 1. 컴퓨터 공(주) 40 " · 입학정원 990명

컴퓨터공(야) 40 "

정보공(야) 40 "

산업안전공(야) 40 "

산업디자인(야) 30 "

회화 - · 미술학과 명칭변경

1994. 10. 1. 정보전산(주) 80 · 전산통계, 컴퓨터공학, 정보공학과를 학부로 통합

정보전산(야) 120

경 제(야) 40 신설 • 경제(야),행정(야) 신설

• 입학정원 1,180명

행정(야) 40 "

정보전산(주) 120(40) 증원

1995. 10. 14 국어국문(야) 40(20) "

영어영문(야) 40(20) "

경영(야) 50(10) "

무역(야) 80(10) "

산업디자인(야) 40(10) "

1996. 10. 24. 국어국문(주) 35(ᅀ5) 조정 • 자체조정으로 국어국문,영어영 문, 경상학부, 행정 주간 30명을 산업시스템공학부 주간에 조정.

• 경영학과,무역학과,경제학과를 경상학부로 통합

• 산업공학과,산업안전공학과를 통합

• 입학정원 1,230명

국어국문(야) 50(10) 증원

영어영문(주) 35(ᅀ5) 조정

영어영문(야) 50(10) 증원

경상학부(주) 105CA15) 조정

경상학부(야) 150(10) 증원

행정(주) 35(ᅀ5) 조정

행정(야) 50(10) 증원

산업시스템공(주) 70(30) "

산업시스템공(야) 90(10) "

1997. 부동산(야) 40 신설

사 (야) 40 "

문헌정보(야) 40 "

의 상(야) 40 "

의류직물(야) 40 "

경상학부(야) (80) 증원

정보전산(야) (30) "

산업시스템공(야) (40) "

산업디자인(야) 80(40) "

• 부동산학과,사,문헌정보, 의상,의류직물 야간 신설

• 주 680명,야 940명. 입학정원 1,620명

설치인가 학부/학과 입학정원 구분 비고

1998. 어문계열(주) 100(30) 신설 및 조정 · 모집단위 통폐합 (야간정원일부 주간전환) 국어국문,영어영문

어문계열 (야) 70(ᅀ30)

인문계열 (주) 90(10) · 모집단위 통폐합 (야간정원일부 주간전환) 사, 문헌정보

인문계열(야) 70(ᅀ10)

경상학부(주) 200(95) · 모집단위 통폐합 (야간정원일부 주간진환) 경영, 무역,경제

경상학부(야) 135(ᅀ95) "

사회계열(주) 50(15) · 모집딘위 통폐합 (야간정원일부 주간전환) 행정, 부동산

사회계열(야) 75(A15) "

정보전산학부(주) 160(40) 신설 및 조정 · 전산통계를 멀티미디어 정보처리전공,정보공학을 정보통신공학 전공으로 명칭 변경하고 정보시스템공학 전공을 신설

정보전산학부(야) 110(A40) "

산업시스템공(주)120(50) 증원 · 산업안전공을 기 계시스템공학진공으로 명칭변경

산업시스템공(야) 80(A50) 조정

의생활학부(주) 80 통폐합 · 의상학과와 의류직물학과를 의생활 학부로 의상디자인 진공, 의류패션 산업 전공으로 명칭변경

의생활학부(야) 80 "

산업 디자인(주) 80(40) 증원 · 야간정원일부 주간진환

산업 디자인(야) 40(A40) 조정

1999. 한국어문학부(주) 50 . ‘계열’->‘학부’ 모집단위 변경. (어문계열 -> 한국어문학부, 영어영문학부 분리)

국어문학부(야) 35

영어영문학부(주) 50 "

영어영문학부(야) 35

역사문화학위주) 45 · ‘계열’->‘학부’ 모집딘•위 변경. (인문계열 -> 역사문화학부,지식정 보학부분리)

역사문화학부(야) 35

지식정보학부(주) 45 "

지식정보학부(야) 35

사회과학부(주) 150 · ‘계열’一>‘학부’ 모집단위 변경. (사회계열 -> 사회과학부 <행정,부동산,무역,경제〉)

사회과학부(야) 130

경영학부(주) 100 · 경상학부 경영학전공경영학부 변경

(경영학전공,경영정보학 전공)

설치인가 학부/학과 입학정원 구분 비고

1999. 경영학부(야) 80

의생활학부(주) 80

의생활학부(야) 80

회화(주) 40

무용(야) 40

1999. 미디어디자인학부 (주) 80 · 시각커뮤니케이션디자인 캐릭터 애니메이션, 스페이스디자인, 팬시프로덕트 디자인 전공 세분화

미디어디자인학부 (야) 40 공간연출 디자인

정보전산학부(주) 160

정보전산학부(야) 110

산업시스템공학부 (주) 120

산업시스템공학부 (야) 80

2000. 미디어디자인학부 (주) 80 · 시각커뮤니케이션디자인 영상·애니메이션 인테리어 디자인 팬시프로덕트디자인로 전공명칭변경

미디어디자인학부 (야) 40 · 공간연출 디자인, 영상·애니메이션

나머지 학부(과) 1999년과 동일

2001. 2000년과 동일

2002. 경상학부(주) 70 자체조정 · 사회과학부의 무역학,부동산학전 공을 경상학부로 변경

경상학부(야) 58 “

정경학부(주) 90 “

· 사회과학부의 행정학, 경제학전공을 정경학부로 변경

정경학부(야) 72 “

컴퓨터공학부(주) 80 “

컴퓨터공학부(야) 80

정보공학부(주) 80 “

정보공학부(야) 30 “

· 정보전산학부를 컴퓨터공학부 (멀티미디어정보처리, 컴퓨터시스템전공)와 정보공학부(정보통신공학, 정보시스템공학전공)으로 변경

(8) 대학원

• 1987년 10월 경영·행정대학원을 신설하여 경영학과와 행정학과 각 40명을 둔다.

• 1988년 11월 경영대학원과 행정대학원으로 분리,인가 받고 각 20명씩 증원하여 경영대학원 모집정원 60명,행정대학원 모집정원 60명이 된다.

• 1989년 11월 대학원 신설하여 국어국문학과,사학과,무역학과에 모집정원 36명과 행정대학원에 교육행정학과 15명 증과·증원한다.

• 1992년 7월 대학원에 경영학과 12명,행정학과 12명 증과하여 모집정원 60명된다. 경영대학원에 산업경제학과 30명 증과하여 모집정원 90명으로 늘어나고 행정대학원도 15명 증원하여 모집정원 90명이 된다.

• 1993년 9월 대학원에 모집정원 60명에 증원 없이 산업공학과,의류

직물학과,경제학과를 신설한다. 경영대학원 국제경영학과를 무역학과로 명칭 변경한다.

•1994년 10월 예술대학원을 신설하여 회화과,산업디자인학과,무용학과에 모집정원 60명을 둔다.

•1995년 10월 국제통상정보대학원을 신설하여 국제통상정보학과 모집정원 명을 둔다 예술대학원 모집정원 60명에 증원 없이 의상학과를 신설하고 행정대학원에 부동산학과, 복지행정학과 증과하여 모집정원 90명이 된다.

•1996년 11월 대학원에 경영학과 박사과정 5명 신설하고 대학원에 회화과 10명 증과하여 모집정원 70명이 된다,

•1997년 3월 입학정원제 실시로 전체기별 모집정원에서 연도별 입학정원으로 변경되어 대학원 입학정원이 박사과정 5명,석사과정 35명이 된다

•1997년 10월 행정대학원 부동산학과 30명 증과로 모집정원이 120명이 되고 예술대학원 패션예술학과 15명을 증과한다.

•1998년 11월 대학원에 증원 없이 영어영문학과,문헌정보학과를 신

설한다.

•1999년 11월 대학원에 석사과정 15명, 박사과정 5명을 증원한다. 컴퓨터신기술대학원 모집단위 30명, 안전보건경영대학원 20명을 신설하고 예술대학원에 20명 증원한다. 국제통상정보대학원을 국제대학원으로 명칭 변경하고 15명 증원한다.

•2000년 9월 부동산대학원 20명을 신설하고 경영대학원에 e-business학과,국제대학원에 국제마약범죄학과를 증과하고 이 해 10월 교육대학원 모집단위 40명 신설한다.

•2001 년 3월 특수대학원 5학기제를 4학기로. 학기단축하고 특수대학원 간의 모집정원을 자체조정하고 입학정원 364명이 된다.

· 20이년 9월 교육대학원이 6명 감축되어 입학정원 36명이 된다. 경영대학원에 서 비스경영학과, 행정 대학원에 지 방정부경영학과, 경찰행정학과를 신설한다.

<부록 표 3-8-1〉대학원 설치연표

설립인가 학과 정원 비고

1989.11.6. 국어국문학과, 사학과, 무역학과 36

1992.7.28. 경영학과, 행정학과 24 입학정원 60명

1993.9.1. 산업공학과, 경제학과, 의류직물학과 0 입학정원 60명

1996.11.2. 회화과 10 입학정원 석사과정 70명 박사과정 5명

경영학과(박사과정) 5

1998.11. 영어영문학과,문헌정보학과 0

1999.11. 석사과정 15명,박사과정 5명 증원

<부록 표 3-8-2〉특수대학원 설치연표

설립인가 대학원 학과(전공) 정원 비고

1987.11.9. 경영행정대학원 경영학과 40 신설80명

행정학과 40

1988.11.30. 경영대학원 경영학과무역학과 60 경영대학원, 행정대학원으로 분리 증과·증원

행정대학원 행정학과 60

1989.11.6. 행정대학원 교육행정학과 75 증원15명

1992.7.28. 경영대학원 산업경제학과 90 증원30명

행정대학원 90 증원15명

1993.9.1. 경영대학원 국제경영학과 무역학과 명칭변경

199410.1. 예술대학원 회화과, 무용과, 산업디자인학과 60 신설

1995.10.18. 국제정보통신대학원 신설

예술대학원 의상학과 60 신설

1997.11. 행정대학원 120 증원30명

예술대학원 패션예술학과 75 증원15명

1999.11. 컴퓨터신기술대학원 30 신설

안전보건경영대학원 20 신설

예술대학원 83 증원20명

국제대학원 국제통상정보대학원 명칭변경.

증원 15명

2000.9, 부동산대학원 신설 20명

교육대학원 신설 40명

2001.9.8. 교육대학원 34 6명 감축

2001.10.24. 경영대학원 서비스경영학과 신설

행정대학원 지방정부

경영학과 신설

경찰행정학과 신설

<부록 표 3-8-3〉 대학원 학과 현황

대학원 계열 학과 입학정원 비고

대학원(박사과정) 인문사회 경영 행정 국문

입학정원 10명

공학 산공

인문사회 국문 사학 행정 무역 경제 경영 문정 영문

대학원(석사과정)

공학 산공 멀티미디어정보처리공 컴퓨터공 정보통신공 정보시스템공 기계시스템공

예체능 의적 회화 미디어디자인

특수대학원 학과 입학정원

경영대학원 경영 36

E-business

서비스경영

행정대학원 행정 76

교육행정

복지행정

부동산

정책

총무행정

지방서비스경영

경찰행정

에술대학원 무용 83

회화

미디어디자인

의상

패션예술

입학정원 358명

국세대학원 국제통상 39

국제지역

국제마약범죄

안진보건경영대학원 안전보건 20

컴퓨터신기술대학원 컴퓨터신기술 30

부동산 대학원 부동산투자금융 40

부동산 평가

부동산 개발 및 관리

지적 및 토지정보

교육대학원 교육행정 34

상담심리

유아교육

국어교육

(9) 부속기관

1) 도서관

•1973년 3월 한성여자대학 도서관으로 개관하고 본관(현재 한성여고 건물) 8층에 위치한다.

•1978년 3월에 한성대학으로 변경됨에 따라 한성대학 중앙도서관으로

개칭한다.

•1982년 종합관(현 한성여중 건물)이 개관함에 따라 종합관 3층으로 확장 이전한다. 이로 인해 일반열람실과 참고열람실 외에도 정기간행물실과 자료정리서고 등이 마련되고 도서이용방법도 개가제과 폐가제를 겸용한다.

•1984년 10월 복지관(현 학생회관) 건립으로 동 건물 3,4층으로 확장 이전한다.

•1988년부터 완전개가제로 운영하며 총 9만권의 장서와 720석의 열람석을 보유한다.

•1991 년 도서관을 사서과와 열람과로 분리한다.

•1994년 도서관의 전산화 및 정보화를 위하여 정보검색실을 설치하였으며 도서관 Total system인 MAE 3.5를 도입한다.

•1995년 4월 전자정보관을 개설을 준비하면서 전자정보과를 신설하고 이 해 11월 사서과를 정보자료과로,열람과를 정보봉사과로 명칭 변

경한다.

• 1996년 5월 국내대학 최초 전자정보관을 개관하여 대학사회의 정보화에 기여한다.

• 1999년 2월 전자정보관 개관 당시 사용하던 LINNET시스템에서 연속간행물관리를 포함한 도서관 토탈시스템 SLIMA S/T를 도입한다.

•2002년 현재 우촌관 앞 광장에 4,200 여 평에 이르는 도서관 신축공사가 진행중이다.

2) 전자계산소

•1990년 2월에 정보화 시대에 따른 실습 지원과 행정업무 전산화를 목적으로 개소한 전자계산소는 미국의 최신형 'MV/15000 SYSTEM 예 30대의 터미널을 연결하고 각종 Programing Language와 Software Package를 설치하여 운영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1983년 10월 정보화 시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컴퓨터실을 설치하고 1984년 4월 정보전산연구원을 개원하여 초대소장으로 이우범 교수가 임명되어 급여전산화 등을 시행한다.

3) 출판부

•1989년 2월 교과내용을 담은 우수한 교재개발과 학술연구물 출판에 관한 교수연구활동 지원목적으로 설립하여 초대출판부장으로 국문학과 원형갑 교수가 임용되고 다음해 2월에 교양과목 교재인 「언어와 생활세계」 「문장과 표현」 「Intellect and sensibility」를 출간한다.

<부록 표 3-9-1〉부속기관 설치연표

설치년도 중앙도서관 전자계산소 사회교육원 출판부 예비군대대

1981.6. 예비군대대 창설

1984.4. 정보전산연구원(소장도서관학과 이우범)

1989. 출판부

1990.2. 전자계산소

1991.2. 사서과 열람과

1995.4 사서과 열람과 전자정보과

1995.11. 정보자료과 정보봉사과 전자정보과

1997.4. 사회교육원

(10) 부설연구소

• 1982년 5월 대학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할 기능의 하나가 전문분야에 대한 심도있는 연구기능에 있다는 점에 따라 민족사상연구소,사회산업발전연구소,한국전통문화예술연구소,학생 생활지도연구소를 개설하며, 연구소의 특징과 성격에 따라 이 분야 전공교수들을 전임연구원으로 위촉 한다.

• 1983년 3월 사회산업발전연구소는 사회산업연구소로 개칭하는 한편 각 전문분야별로 연구책임 교수제를 도입 명실상부한 전문적인 연구소로의 기능을 빌-휘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학생생활지도연구소는 현재 그 명칭을 학생생활연구소로 개칭하고 1995년 3월 학생상담실을 두어

활발한 연구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 1985년 11월 민족사상연구소는 연구활동의 효율화를 위하여 한국전통예술연구소와 통합하여 민족문화연구소로 새롭게 발족하였으며 1991년 6월 농경생활사 전시관, 1999년 10월 박물관을 설치하여 산하에 둔다.

• 1989년 4월 21C 가장 역동적인 지역으로 발전할 북방지역의 정치사회 경제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활동을 위하여 북방문제연구소를 설립하고 1998년 동아시아 연구소로 명칭 변경한다.

• 1994년 정보화 사회의 구현을 위한 정보통신 시스템 개발 및 전문인력 수요에 대응하여 핵심기반 기술 및 응용기술을 연구·개발 하고자 정보통신연구소를 신설한다.

• 1997년 안전과학기술연구소를 설립하고 1999년 어학연구소 등 9개의 연구소를 설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부록 표 3-10-1〉 역대 연구소장 명단

연구소명 연구소장 이름 기간 비고

민족사상연구소 정연길 1982.6.~1985.6. 민족문화연구소로통·폐합

민족문화연구소 지배선 1985.6.~1987.6.

이동섭 1987.6.~1988.6.

윤경로 1988.6.~1992.7.

강욱 1992.7.~1996.7.

윤석효 1996.7.~2000.11.

김창룡 2000.11.~2002.11.

한국전통예술연구소 하인두 1982.6.~19843.

사회사상연구소 이창신 1982.5.~1982.9.

정연선 1982.9.~1984.3.

사회산업연구소 홍봉춘 1984.3.~1985.3. 1983.4명칭변경

최송길 1985.3.~1986.7.

허창재 1986.7.~1990.7.

이우범 1990.7.~1991.5.

김원중 1991.5.~1998.9.

사회과학연구소 최옥근 1998.9.~2000.8. 1999.2명칭변경

최명규 2000.9.~2000.12.

이상한 2001.1.~2002.2.

권오 2002.3.~2004.2.

학생생활연구소 최명규 1982.4~1983.4.

김계욱 1983.4.~1984.4.

연구소명 연구소장 이름 기간 비고

학생생활연구소 허광일 1984.4.~1985.8.

김용석 1985.8.~1986.8.

강석중 1986.8.~1987.10.

최명규 1987.10.~1988.8.

지배선 1988.8.~1990.4.

이동섭 1990.4.~1990.8.

김창룡 1990.8.~1991.8.

최송길 1991.8.~1994.3.

정종해 1994.3.~1998.3.

이병은 1998.3.~2000.2.

권오 2000.3.~2000.5.

정현이 2000.5.~2002.5.

북방문제연구소 유영옥 1989.4.~1998.2.

강석중

유병호

농아시아연구소 이우관 1998.3.~2000.2. 1998.4 명칭변경

박근철 2000.3.~2002.2,

윤혜영 2002.3.~2004.2.

징보통신연구소 원형규 1994.7.~1998.7.

김인칠 1998.7.~1998.9.

엄종석 1998.9.~2000.8.

강승식 2000.9.~2001.2.

김진환 2001.3.~2003.2.

안전과학기술연구소 한정수 1997,4~1999.3.

윤재건 1999.5.~2001.4.

최재봉 2001.5.~2003.4.

GIS/ITS연구소 이봉규 1999.2.~2003.1.

매카트로닉스연구소 최기흥 1999.12.~2001.11.

정영모 2001.12.~2003.11.

힌국어정보처리연구소 고창수 1999.12.~2003.11.

미레징영연구소 신민칠 2000.2.~2002.2.

박헌영 2002.3.~2004.2.

어학연구소 문귀선 1999.12.~2003.11.

시스則공학연구소 유재건 1999.12.~2001.11.

홍정완 2001.12.~2003.11.

정보처리연구소 지준 1999.12.~2001.11.

방갑산 2001.12.~2003.11.

아트엔디자인커뮤니케이션연구소 조열 1999.12.~2003.11.

국제학연구원 이성근

(11) 교수·직원·학생회

1) 교수협의회

• 1987년 10월 22일 6월항쟁 후 민주화 과정의 영향으로 우리대학 교수협의회 창립에 관한 제반사항을 협의하기 위한 전체 교수회의가 오후 3시 우촌관 5층 교수회의실에서 열린다. 32명의 교수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 날 회의에서는 국문학과 원형갑 교수가 임시의장으로 피선되어 정관 안을 심의, 수정하고 만장일치로 통과시킨다. 한편 임원선출도 투표를 통해 회장에는 참석교수 32명 가운데 25표를 얻은 국문학과 이석주 교수, 부의장에는 영문학과 김용석,미술학과 정하경,간사에는 무역학과 김용정, 감사에는 무역학과 강석중,경영학과 김길평 교수가 각각 선출된다.

• 1989년 3월 13일 오후 4시30분 교수회의실에서 28명의 교수가 참석한 가운데 교수협의회가 열려 감사보고, 회칙개정, 임원개선, 기타사

항 발표 등의 내용으로 진행된다. 임원개선에 있어 교양과 김계욱 교수가 찬성 24표, 반대 3표, 무효 1표로 신임 교수협의회장에 선출 된다.

• 1991년 12월 M일 정기총회에서 협의회 정관을 개정하여 학장 후보자 선출 규정을 확정하여 학장 후보자의 직접 선거를 통한 추천을 가능하게 하였다.

• 1992년 3월 18일 당시 회장인 미술과 강국진 교수의 별세로 부회장인 문헌정보학과 이용남 교수를 회장으로 보선한다.

• 1994년 12월 16일 교육문화회관에서 열린 교수협의회 정기총회에서 행정학과 황진수 교수가 신임회장으로 선출된다.

• 1998년 10월 교수협의회는 총장 선출과 관련하여 교수들의 의견수렴 및 반영에 미흡했다는 표면적인 이유로 총 사퇴한다.

•2000년 10월 공청회를 개최하여 건물증축에 대한 의견을 수렴한다.

•2002년 3월 교수협의회 임시총회에서 지식정보학부 정진식 교수가 회장으로 선출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부록 표 3-11-1〉역대 교수협의회 임원 명단

년도 회장 임원 비고

1987 이석주 부회장 : 김용석,정하경,간사 : 김용정, 감사 : 강석중,김길평

1989 김계욱 총무:최병수

1992 강국진 부회장 : 이용남 김숙자,감사 : 박헌영

1994 황진수 부회장 : 정주택,김경배,감사 : 김평광,총무 : 이남식

1995 황진수 부회장 : 정주택,김경배,감사 : 김평광,총무 : 이남식

1997 박호영 총무 : 김상조

1999 박헌영 부회 장 : 윤제건,총무 : 박두용

2000 윤경로 부회장 : 고창수,이상한,이상원,이재득,총무 : 이창원

2001 박호영 부회장 : 백유,이재문,죄해수,박인숙,종무 : 유병호

2002 정진식 부회장 : 조효진,김상조,조태병,주창업,총무 : 권혜수

2) 직원노동조합

• 1997년 12월 6일 오전 11시 소강당에서 교직원 5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성대학교 노동조합 임시총회’가 열린다. 이번 임시총회에서 신설되거나 개정된 선거관리 규정과 노동조합 규약은 만장일치로 통과되고 임원단 선출에서 조현호(전자정보과) 노조위원장과 박철우(기획과) 부위원장이 만장일치로 선출된다.

• 1998년 9월 12일 노조는 노조가 출범할 당시의 목적이었던 학교측과의 대화와 타협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교직원 인사 이동으로 인한 직원인사위원회와의 마찰,단체협약의 결렬 등 복합적인 이유가 작용하여 소강당에서 비상회의를 갖고 그 자리에서 총사퇴를 결의한다. 노조집행부가 총사퇴를 결의함에 따라 직원 노조에서는 공대원 교무과장을 위원장으로 하여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한다.

• 1998년 10월 1일 노조 집행부는 조합원의 총투표를 거쳐 재구성된다. 총 재적인원 81명중 75%인 61명이 참석한 가운데 공대원 교무과장이 찬성 59표(96%),반대 2표(4%)를 얻어 노조위원장으로 당선 되었으며 부위원장으로 정영만 시설과장이 당선된다. 또한 대의원 8명과 회계 2명도 선출하여 총 12명의 집행부가 새로 구성된다.

• 1998년 11월 노조는 ‘단일노조 가입여부에 대한 찬반 투표’를 놓고

꽉]

우촌관 218호에서는 노동조합 임시총회를 개회한다. 이 날 임시총회에서는 재적인원 79명 중 59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원이 찬성하여 단일노조에 가입을 하게 된다. 한편 초대 지부장으로 현 노조위원장인 공대원 교무과장, 파견대의원으로 김동근(교무과) 선생이 각각 선출된다.

•20이년 5월 지부장 유부상, 수석부지부장 조현호,부지부장 장영우 등이 활동하고 있다.

<부록 표 3-11-2〉역대 직원노동조합 임원명단

설치년월일 지부장(위원장) 내용 비고

1997.11. 조현호 부위원장 : 박철우, 사무국장 : 조윤철 노동조합

1998.10. 1. 공대원 부지부장 : 정영만, 사무국장:이성민 한성대지부

1999. 3.26. 조현호 부지부장 : 한영철, 사무국장:김동근 "

2001. 5.22. 유부상 부지부장 : 장영우,조현호 사무국장 : 이상우 "

3) 총학생회(학도호국단)

•1975년 총력안보가 강조되던 시국적인 요청으로 우리대학에도 학도호국단이 처음으로 조직되었다. 대대장 조인자(국문 3),부대대장 박옥면(영문 3)이 임명된다.

•1980년도 3월 민주화의 봄을 맞은 대학가는 학도호국단과는 별도로 총학생회 선거를 치러 초대학생회장에 안병곤(무역 3)을 선출하나 5월 17일 대학휴교령과 함께 당시 총학생회장인 안병곤은 '제일 유학생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다. 이로써 총학생회는 총학생회장만 선출한 채 구성도 하지 못하고 없어진다.

•1980년 9월 학도호국단은 문교부 훈령과 학도호국단 준칙에 의하여 군대학 편제를 총학생장, 총부학생장 등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전년도 2학기말에 남학생을 주축으로 임원을 구성하여 총학생장 호진규(영문 4),총부학생장 문교승을 임명하고 여학생부를 별도로 두어 부장에 전광의(의상 4)를 임명한다.

•1981 년도부터는 총학생장 및 총부학생장을 러닝메이트로 학과학생

장들로 구성된 선거인단에 의한 간선제로 선출하여 총학생장 배기성(영문 3), 총부학생장 고려남(생활미술 3)을 선출한다.

• 1984년 2학기말에 선출된 제10대 최동욱 학도호국단 체제는 1985년 2월 26일 학도호국단령이 폐지됨으로써 1985년 한 학기도 못 채우고 해체된다. 이 해 5월 새로운 총학생회의 출범과 함께 학도호국단의역사가 마감된다. 이는 문교부가 1985년 1월 24일 오전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제출한 ‘대학의 학도호국단 개편 및 학생자치기구 신설을 위한 대정부 건의안’을 검토하여 올 신학기부터 현 학도호국단 대신에 ‘총학생회’ 즉 학생자치기구를 신설 운영토록 한 것이다.

• 1985년 3월 19일 오전 8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체육관에서 총학생회장 선거를 실시하여 전체학생 2,195명중 1,4아명이 투표에 참가하여 63.8%의 투표율을 나타냈으며,기히번 송인수, 정두진 조, 기호2번 박형만,한영수 조,기호3번 한영준,차정택 조가 경합을 벌인결과 제2대 총학생회장에 박형만(국문 3),총부학생회장에 한용수(경영 3)군이 선출된다.

• 1985년 11월 21일 제3대 총학생회장 선거를 실시한다. 입후보는 기호1번 박성민, 이용주, 기호2번 구성명,김명식,기호3번 김원배, 강귀운이며,전체 학생 2,035명중 1,256명이 선거에 참가하여 61.7%의 투표율을 기록한다. 투표결과 기히번 박성민(행정 2), 이용주(사학 2)군이 당선된다.

• 1986년 11월 19일 치러진 제4대 총학생회장 선거는 기히번 차금남, 이장갑, 기호2번 김원배, 이정구,기호3번 김상복, 신근철이 입후보하며,전체학생 2,196명중 U67명이 투표하여 62.1%의 투표율을 기록한다. 투표결과 기호3번 김상복(행정 3), 신근철(경제 3)군이 당선된다.

• 1987년 5월 14일 제1회 총여학생회장 선거가 실시되어 김미래(경영 4) 양이 단독출마하여 투표자 519명중 465표가 찬성하여 89.6%의 찬성율로 총여학생회장에 단선되어 총여학생회 출범을 동시에 맞는다.

• 1988년 6월 8일 ‘발전적 방향모색’이라는 이유로 총학생회 [회장 : 김승환(의상 3)] 간부들이 총사퇴를 선언하여 학생들로부터 독단적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그러나 이는 17일 집행부 사퇴로 매듭지어지

고 새 집행부를 구성하게 된다. 총학생회와 각 학회장 및 대의원간에 갈등이 있은 후 부총학생회장 이용택(경영 4)군이 사퇴하고 마무리 된다.

• 1989년 11월 17일 제7대 총학생회장 선거를 실시한다. 입후보는 기호1번 정일용,임기범,기호2번 곽민선,문경추,기호3번 이우창, 마재작, 기호4번 김형석,김대중군이다. 투표결과 기히번 정일용(경영3) 임기범(무역 3)이 당선된다.

•1990년 11월 12일 학원자주화 투쟁으로 투쟁위원회와 대의원회에서는 총학생회 선거 연기에 대해 대립한다. 이 해 12월 총학생회 선거에서 전체 유권자 2,604명중 1,017명이 투표해 총 투표인원이 전체 유권자수의 과반수를 넘지 못해 1991년 3월로 연기된다. 다음해 3월 27일 제8대 총학생회 선거를 실시한다고 하였으나 총대의원희의 일방적 결정으로 4월 3일로 변경 공고한다. 결과 기히번 박동화(사학4) 최종근(경제 4),〈기호2번 김태정(사학 4), 박정기(무역 4) 사퇴>, 기호3번 백종철(경영 4),정성철(전통 4) 이 출마하여 기히번 박

동화, 최종근 군이 당선된다.

•1997년 11월 13일 제15대 총학생회 선거를 치룰 예정이었으나 후보자 등록이 이루어지지 않아 총여학생회 선거만 치루게 되고 나머지 선거는 1998년 3월로 연기된다.

•1998년 4월 2일 두 개팀만이 등록한 총학생회 선거가 실시된다. 기호1번 박경모(정전 4),김현정(문정 4), 기호2번 지용현(경제 4),김영석(무역 4)이 출마하여,기호2번 지용현,김영석군이 당선된다.

•2001년 총학생회가 구성되지 못한다.

•2002년 현재 제18대 총학생회장 김유나(무역 4),부학생회장 조영훈(산업공 4)에 이르고 있다.

<부록 표 3-11-3〉역대 총학생회장 명단

년도 대수 총학생장(총학생회장) 총부학생장(총부학생4회장) 비고

1975 1 대대장:조인자(국문3) 부대대장:박옥면(영문3) 학도호국단

1976 2 제대장:이혜숙(국문3) 부제대장:유선봉(무용3) 1

977 3 연영순(국문3) 이순분(가징3)

1978 4. 문현숙(의상3) 이은정(국문3)

1979 5 고정숙(무용3) 윤오남(경영3)

1980 1 학생회장:안병곤(무역3) 초대학생회(1980.3.-5.)

1980 6 총학생장:호진규(영문4) 문교승(무역시 학도호국단(1980.3.~1981.8.)

1981 7 배기성《영문4) 고려남(생미4) 학도호국단

1982 8 김영일(사학4) 이응권(무역4)

1983 9 황제연(경영4) 오한석(도서관4)

1984 10 최동욱(무역4) 박신흥(도서관4) 84.9^85.3

1985 2 총학생회장:박형민(국문4) 한용수(경영4) 총학생회

(1985.3.~1986.2.)

1983 3 박성민(행정4) 이용주(사학4) 총학생회

1987 4 김상복(행정4) 신근철(경제4)

1988 5 조남준(미술4) 민병조(경제4)

1989 6 김승환(의상3) 이용택(경영4)

1990 7 정일용(경영4) 임기범(무역4)

1991 8 박동화(사학4) 최종근(경제4》

1992 9 김경배(산공3) 흥성곤(경제3)

1993 10 최종국(문정4) 박병기(국문3)

1994 11 김태정(사학3) 한준현(경제3)

1995 12 채대병(산업공3) 오순희(의상3)

1996 13 안주영(문정3) 박승효(국문3)

1997 14 함소희(국문4) 김영선(영문4)

1998 15 지용현(경제4) 김영석(무역4)

1999 16 손진우(영문3) 박혜영(문정3)

2000 17 송덕기(사4) 성민지(문정4)

2001 공석 공석

2002 18 김유나(무역4) 조영훈(산공4)

4. 교원

(1) 교원

•1973년 개교하면서 국문학과 고창식, 윤태영 교수가 조교수로 신규 임용되어 각각 교무처장과 학생처장직을 수행하고 윤태영 교수는 국문학과장을 겸직한다.

•1974년 신학기에 김복길,차주환 교수가 신규 임용되어 각각 가정학과 및 의상학과장,생활미술학과장에 임용되고 연정열 시간강사를 경영학과 및 무역학과장대행으로 임명한다.

•1975년 초에 경영학과 연정열, 불어불문학과 정기수,무용과 김형표(예명: 김진걸),교양 신은숙 교수를 신규임용하고 처장제를 과장제로 낮추고 보직개편을 단행하여 교무과장 정기수,학생과장 연정열, 불문학과장에 정기수, 무용학과장에 김진 걸 전임강사대우를 임명한다.

•1976년 신학기에 국문학과 이근수,영문학과 이경식,가정학과 장석

향 교수가 신규 임용되고 이 해 6월 보직개편하여 교무과장 이경식, 학생과장 이근수 교수를 임명하고 각각 국문학과장,영문학과장에 겸직 발령한다. 6월 9일자로 최초 교수 임용된 윤태영 교수가 최초 퇴직한다. 또한 4월 1일 조교수에서 부교수로 최초 승진한 고창식 교수가 8월 31일자로 퇴직한다.

•1977년 가정학과장 김복길, 의상학과장에 새로 장석향 교수를 임명하고 신설된 국사학과장에 신은숙 교수를 임명한다. 이 해 무용과 김경자 교수가 전임강사로 국문학과 정연길 교수가 정교수로 신규 임용된다.

•1978년 신학기에 생활미술학과 정하경,행정학과 이창신, 의상학과 이남희, 박명흐ᅵ,생활미술학과 정하경, 하인두,교양과 김계욱 교수가,2학기에 영문학과 허광일 교수가 신규 임용된다. 이 해 3월 교무과장에 정연길,신설된 행정학과장에 이창신 교수가 임명되나 7월 이희순 학장이 사임함에 따라 교무과장 정연길 교수가 학장직무대행에,교무과장에 정하경,학생과장에 이창신 교수를 임명한다.

•1979년 무용과 김숙자,국문학과 이석주,경영학과 최명규,행정학과 김범주 교수가 신규임용되고 국문학과장 정연길, 영문학과장 허광일, 의상학과장 이남희,미술학과장에 하인두 교수가 임명된다.

•1980년 3월 영문학과 고정자,경영학과 최송길,국문학과 김중열,무역학과 김신,이시환,사학과 지배선 생활미술학과 강국진 교수가 신규 임용되고 무역학과장 최명규,무용과장 김숙자,국문학과장 이석주,영문학과장 고정자, 사학과장 지배선 교수를 임명하고 이 해 8월 직제개편으로 과장제를 처장제로 다시 격상하여 교무처장 이근수, 학생처장 신은숙 교수를 임명하나 이근수 교무처장이 타교로 전직함으로써 최명규 교수를 교무처장으로 보임하고 무역학과장을 김신 교수로 임명한다. 이 해 8월 영문학과 박양구,유명숙 교수가 신규임용된다.

•1981년 3월 신설된 경제학과장에 한창호, 도서관학과장에 조점환 교수가 임명된다.

<부록 표 4-1-1〉연도별 교원 현황(년도말 기준》

구분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신임 8 7 7 7 16 10 19 16

퇴직 2 3 3 1 4 2 0 3

진임 교원 55 59 63 69 81 89 108 121

구분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비 고

신임 16 19 1 4 8 9 11

퇴직 2 2 1 4 2 7 2

진임 교원 135 152 152 152 158 160 169

* 총상 새외인원임.

〈부록 표 4-1-2〉연도별 조교 현황

구분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조교수 16 16 16 - 30 36

구분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조교수 37 52 93 84 98 94

<부록 표 4-1-3〉전임교원 임용 및 퇴직 현황

임용년월 임용대상자 학과(부) 이름 전공분야 퇴(재)직 비고

김의형 1977.2.15. 학장.사망

1973.1.19. 국어국문 윤태영 문예창작 1976.6.9.

국어국문 고창식 국문학 1976.8.31.

1974.3.18. 가정 김복길 가정관리 1982.2.28. 정년

생활미술 차주환 생활미술 1978.2.27.

1975.2.10. 경영 연정열 상사법 2002.2.28. 정년

불어불문 정기수 불문학 1976.9.18.

3.2. 교양 신은숙 교육학 1986.2.28.

무용 김형표 한국무용 1992.2.28. 정년

영어영문 이경식 영문학 1980.2.11.

1976.3.2. 국어국문 이근수 국어사 1980.9.11.

가정 장석향 가정관리 1978.4.10.

1977.5.1. 이희수 1978.7.13. 학장

6.1. 무용 김경자 현대무용 재직

9.1. 국어국문 정연길 현대문학 1992.8.31. 정년, 사망

생활미술 정하경 동양화 재직

교양 김계욱 체육 "

1978.3.2. 행정 이창신 조직이론 1983.5.15.

의상 이남희 의류학 1989.8.31.

생활미술 하인두 서양화 1989.11.12. 사망

의상 박명희 가정관리 1982.2.28.

9,1. 영어영문 허광일 영어학 1987.2.28.

1979.2.16. 김옥형 1982.1.7. 학장

4.17. 무용 김숙자 한국무용 재직

국어국문 이석주 국어학 "

9.1. 경영 최명규 재무관리 1993.8.15. 사망

행정 김범주 공법 1986.2.28.

영어영문 고정자 현대영미시 재직

경영 최송길 회계학 "

1980.3.2. 국어국문 김중렬 국문학 1984.2.29.

무역 김신 무역학 1981.2.28.

무역 이시환 무역실무 1982.8.22.

임용년월 임용대상지 퇴(재)직 비고

학과(부) 이름 전공분야

1980.3.2. 사 지배선 동양사 1992.8.

생활미술 강국진 서양화 1992.3. 사망

9.1. 영어영문 박양구 영어학 재직

영어영문 유명숙 영문학 1985.8.10.

1981.3.2. 경영 김길평 경영과학 재직

교양 조점환 교육학 "

사 윤경로 한국근대사 "

사 임영상 서양사 1982.2.15.

의상 이명희 서양의복구성 1985.2.15.

정제 한창호 경제학 1989.2.28. 정년

9.1. 교양 강은석 체육 2000.6.30. 사망

영어영문 김용석 영어학 재직

경영 김원중 생산관리 "

무역 김평광 무역영어 "

교양 김양현 교육학 1983.5.15.

2.17. 강병규 1984.7.4.

1982.3.2. 사 윤석효 한국고대사 재직

도서관 이용남 도서관경영 "

국어국문 이정숙 현대문학 "

영어영문 조효진 드라마 "

의상 최해주 복식의장학 "

행정 정연선 행정학 1984.7.4.

9.1. 사 강병식 한국근대사 재직

무역 김용정 상품학 1990.11.1. 사망

사 이동섭 서양사 1995.1.23.

1983.3.2. 경제 권혁제 국제경제학 재직

국어국문 김창룡 고전문학 "

" 원형갑 현대문학 1995.8. 정년

도서관 이우범 정보학 재직

의상 임재영 복식사 "

무역 홍봉춘 마아케팅론 1997.8.31. 정년

무역 강석중 무역학 2001.2.28. 정년

경제 홍영표 경제학 1984.2.23.

임용년월 임용대상자 학과(부) 이름 전공분야 퇴(재)직 비고

1983. 3. 2. 미술 한진만 동양학 1988. 3. 1.

무용 김정수 발레 1990. 1.29.

9. 1. 교양 김경배 교육학 재직

행정 이종수 행정이론 "

문헌정보 정진식 자료조직 재직

1984. 3. 2. 경제 허창재 화페 금융론 1996. 3. 8.

행정 황진수 복지행정 재직

8.23. " 홍순태 1988. 8.22. 학장

1988. 8.23. 신영기 1990. 9.27. 학장

산업공학 김대홍 생산관리 재직

의류직물 안영무 섬유학 "

영어영문 엄미숙 영미소설 "

9. 1. 회화 정종해 동양화 "

산업디자인 조열 시각 디자인 "

전산통계 최병수 전산통계 "

행정 유영옥 재무행정 1992. 2.28.

의류직물 김종섭 공학 재직

산업공 박명환 0.R "

경제 박헌영 국제금융"

1989. 9. 1. 의상 양미경 의복구성 "

산업디자인 이상원 시각디자인"

경제 이상한 통계학 "

전산통계 전화숙 컴퓨터통신 1999. 2.28.

영어영문 김덕자 영어 교육학 재직

무용 김학자 발레 "

산업공 정병용 인간공학 "

1990. 9. 1. 회화 조덕현 서양화 1995. 3.31.

산 업디자인 조태병 시각디자인 재직

국어국문 정후수 고전문학 "

무역 권오 무역 보험론 "

산업디자인 김지현 시각 디자인 "

1991. 8.15. 의상 신인숙 섬유예술 "

의류직물 진경숙 의류경영 "

사 윤혜영 중국현대사 "

회화 이인현 판화 "

행정 이창원 조직관리론 "

1993.2.21. 국어국문 박호영 현대문학 " 신규임용:9명

경제 강신일 산입조직 "

" 김용주 머천다이징 "

무용 김주자 무용이론 "

의상 김경인 패션디자인 "

19942.15. 전산통계 권영미 확률론 "

산업공학 원형규 품질공학 "

의류직물 김성복 패션일러스트 "

" 홍성에 의복구성 "

영어영문 이병은 영시 "

경영 민성기 재무관리 "

" 최용식 재무관리 "

" 정승환 생산관리 "

임용년월 임용대상자 학과(부) 이름 전공분야 퇴(재)직 비고

19942.15. 문헌정보 강순애 서지학 " 신규임용:19명

회화 강관식 회화사 "

산업디자인 고영란 디자인이론 "

" 김미지자 디자인이론 "

전산통계 이재문 데이터베이스 "

" 강승식 한국어정보처리 2001.2.28.

산업공학 이재득 인공지능응용 재직

국어국문 고창수 통사론 "

무역 김상조 화폐금융론 "

행정 권해수 지방행정 "

회화 허은영 판화 "

컴퓨터공학 황기태 컴퓨터아키텍처 "

정보공 김인철 정보통신시스템 1999.8.31.

산업안전공학 이남식 인간공학 1997.12.15.

9.1. 무역 장호윤 국제경영학 재직

국어국문 김동환 현대문학 "

" 신경숙 고전문학(고전시가) "

영어영문 서영윤 영미희곡 "

" 홍성훈 음운론및음성학 "

사 황혜성 미국사 "

행정 이태교 부동산정책 2001.2.28. 정년

" 김백유 공법학 재직 신규임용:16명

" 이성우 정책결정론 "

정보전산학부 정영모 디지탈통신시스템 "

" 김진환 분산처리 "

" 이민석 실시간컴퓨터구조 "

무역 최용일 국제경제이론 "

무용 박영애 무용이론 99

의상 정겸임 복식사 2001.2.28.

산업안전공학 제무성 열진달 2002.2.28.

" 최기흥 제어공학 재직

국어국문 이은희 국어학 "

영어영문 문귀선 영어학 "

임용년월 임용대상자 퇴(재)직 비고

학과(부) 이름 진공분야

1995.3.1. 사 박단 프랑스사 재직 신규임용:16명

" 박근친 중국중세사 "

무역 권순범 경영과학 1999.2.28.

경제 이영훈 통계학 재직

의상 주성희 창작디자인 "

정보선산학부 이두성 디지탈자료처리 "

" 조혜경 로봇공학 "

" 정성훈 디탈로직컴퓨터구조 "

의류직물 이기향 의상디자인 "

산업공 흥징완 경제성공학 "

" 유제건 생산자동화 "

산업안전공 윤재건 열유체공학 "

" 한정수 인간공학 "

교양 조난숙 확률론 "

1997.3.1. 경상학부 박영범 노동경제 "

신규임용:10명

회화 김동신 동양화 "

" 홍명섭 현대조각 "

" 정헌이 현대미술 "

정보진산학부 김영웅 객체지향데이타베이스 "

" 이봉규 정보공학 "

" 김일민 분산운영체제 "

" 지준 디지털신호처리 "

" 방갑산 공간객체저장시스템 "

산업시스템공학부 박두용 산업위생학 "

9.1. 사 박준철 서양숭세사 " 신규임용:9명

경상학부 정명호 정영전략 "

" 신민철 마케팅 "

" 이욱 MIS 1999.8.31.

문헌정보 정진택 멀티미디어정보처리 재직

산업디자인 한혜련 인테리어디자인 "

" 전종찬 제품디자인 "

임용년월 임용대상자 퇴(재)직 비고

학과(부) 이름 전공분야

1997.9.1. 정보진산학부 박영환 실시간시스템 재직

산업시스템공학부 주창업 분리공정 "

1999.9.1. 정보진산학부 이항찬 영상정보처리 " 신규임용:3명

" 정인상 소프트웨어공학 "

산업시스템공학부 최재봉 생체역학 "

2000.3.2. 부동산학과 안정근 감정평가론 " 신규임용:8명

" 박병식 부동산학 "

" 이용만 부동산경제론 "

경영학부 안병석 경영정보학 "

정보전산학부 강희중 인공지능 "

" 장재영 컴퓨터네트워크 "

" 오종택 신호처리 "

" 이종복 VLSI설계 "

2001.3.1. 경상학부 노재확 전자상거래 " 신규임용:7명

경상학부 민태욱 부동산조세법 "

정보전산학부 호광춘 마이크로파 및 광통신 "

김성동 자연어처리 "

정인환 컴퓨터네트워크분산시스템 "

이기원 GIS/RS "

산업및기계시스템공학부 강상욱 진동학음성학 "

2002.3.1. 경영학부 오경주 MIS " 신규임용:11명

차종석 경영관리 "

주영혁 마케팅 "

미디어디자인학부 지상현 정보공간디자인 "

김효용 3D애니매이션 "

변대중 인테리어디자인 "

김홍배 제품디자인 "

컴퓨터공학부 조세홍 멀티미디어정보처리 "

정보공학부 김남윤 정보공학 "

교양학부 김로빈 체육학 "

이태주 문화인류학 "

(2) 외국인 전임교원

<부록 표 4-2-1〉외국인 전임교원 현황

학부(과) 이름 직위 기간 비고

영이영문학부

AlisonWakefield 특임교수 1996.9.1.-1997.8.31.

DavidPa"lFenmte 특임교수 1996.9.1.-1998.8.31.

CarolJoanPereh"doff 특임교수 1997.9.1.-1998.8.31.

GossRicarcl 특임교수 1998.9.1.-2000.8.3L

He"velBminLo"is 특임교수 1999,9.1.-2000.8.31.

RichardWayneHatfield 전임강사 2000.8.1.-2000.10.5.

RobertMarkCheek 진임강사 2000.8.28.-2001.8.31.

MartinEdwardFoy 진임강사 2000.3.1.~2001.2.28.

HarveyEdwardSchmidt 전임강사 2001.3.1.~현제

DavidThomasDevea" 전임강사 2001.9.1.~현제

(3) 연도별 교원퇴직

<부록 표 4-3-1〉연도별 교원퇴직 현황

학과(부) 이름 전공분야 퇴직일 비고

국이국문 고창식 국문학 1976.8.31.

국어국문 윤태영 문예창작 1976.6.9.

불이불문 정기수 불문학 1976.9.18.

김의형 1977.2.15.

생활미술 차주환 생활미술 1978.2.27.

가정 장석향 가정관리 1978.4.10.

이희순 1978.7.13.

영이영문 이경식 영문학 1980.2.11.

국어국문 이근수 국어사 1980.9.11.

무역 김신 무역학 1981.2.28.

영어영문 김옥형 1982.1.7.

사 임영상 서양사 1982.2.15.

가정 김복길 가정관리 1982.2.28.

학과(부) 이름 전공분야 퇴직일 비고

의상 박명희 가정관리 1982.2.28.

무역 이시환 무역실무 1982.8.22.

행정 이창신 조직이론 1983.2.28.

교양 김양현 교육학 1983.5.15.

경제 홍영표 경제학 19842.23.

국어국문 김중렬 국문학 1984.2.29.

행정 정연선 행정학 1984.7.4

강병규 1984.7.4

의상 이명희 서양의복구성 1985.2.15.

영어영문 유명숙 영문학 1985.8.10.

행정 김범주 공법 1986.2.28.

교양 신은숙 교육학 1986.2.28.

영어영문 허광일 영어학 1987.2.28.

미술 한진만 동양학 1988.3.1.

홍순태 1988.8.22.

경제 한창호 경제학 1989.2.28.

의상 이남회 의류학 1989.8.31.

생활미술 하인두 서양화 1989.11.12.

무용 김정수 발레 1990.1.29.

신영기 1990.9.27.

무역 김용정 상품학 1990.11.1.

교양과 박수룡 1991.8.31.

무용 김형표 한국무용 1992.2.28.

행정 유영옥 재무행정 1992.2.28.

생활미술 강국진 서양화 1992.3.1.

사 지배선 동양사 1992.8.

국어국문 정연길 현대문학 1993.2.28.

경영 최명규 재무관리 1993.8.15.

사 이동섭 서양사 1995.1.23.

산업공 박준영 생산자동화 1995.2.28.

회화 조덕현 서양화 1995.3.31.

국어국문 원형갑 현대문학 1995.8.

무역학과 정낙채 1996.2.28.

경제 허창재 화폐금융론 1996.3.8.

학과(부) 이름 전공분야 퇴직일 비고

무역학과 홍봉춘 마케팅론 1997.8.31.

산업안진공학 이남식 인간공학 1997.12.15.

교양과 박종원 1998.1.30.

진산통계 진화숙 컴퓨터통신 1999.2.28.

무역 권순범 경영과학 1999.2.28.

징보공 김인현 정보통신시스템 1999.8.31.

경상학부 이욱 MIS 1999.8.31.

산입디자인 박진베 인테리어디자인 2000.2.29.

교양과 강은석 체육 2000.6.30.

부동산학과 이데교 부동산징책 2001.2:28.

의생활학부 정정임 복식사 2001.2.28.

정보진산학부 강승식 한국이정보처리 2001.2.2.

무역 강석중 무역 2001.2.28.

교양 강욱 철학 2001.2.28.

미디어디자인학부 김응화 시각디자인 2001.8,31.

영이영문학부 치이크

산입안진공학 제무성 열전2002.2.28.

경영 연정열 상사법 2002.2.28.

(4) 겸임교수

〈부록 표 4-4-1〉 역대 겸임교수 현황

소속 이름 직위 기간

부동산학과 오광석 겸임교수 1909.9.1.~2000.8.31.

사회과학부 무역학전공 이순우 겸임교수

교양과 서준원 겸임교수 2000.3.1-2001.22&

교양과 송병헌 겸임교수

교양과 홍덕수 겸임교수

국세대학원 류현상 겸임교수

국제대학원 정주년 겸임교수

국제대학원 팜 겸임교수

사회과학부 경제학전공 김채겸 겸임교수

소속 이름 직위 기간

사회과학부 행정학전공 김경섭 겸임교수

사회과학부 행정학전공 김두옥 겸임교수

산업및기계시스템공학부 기계시스템공학 홍지수 겸임교수

안전보건경영대학원 강수헌 겸임교수

안전보건경영대학원 윤충식 겸임교수

예술대학원 김찬형 겸임교수

예술대학원 이시원 겸임교수

예술대학원 패션예술학과 이은임 겸임교수

정보전산학부 정보시스템공학 김광은 겸임교수

행정대학원 김정모 겸임교수

사회과학부 부동산학 전공 노성호 겸임교수

교양과 서준원 겸임교수

교양과 송병헌 겸임교수

교양과 홍덕수 겸임교수

교육대학원 박현주 겸임교수

교육대학원 허윤미 겸임교수

국제대학원 김선민 겸임교수

국제대학원 오병주 겸임교수

국제대학원 이영일 겸임교수

국제대학원 임대환 겸임교수

국제대학원 정희선 겸임교수

국제대학원 국제지역학과 류현상 겸임교수

국제대학원 국제지역학과 팜 겸임교수

사회과학부 경제학전공 김채겸 겸임교수

사회과학부 행정학전공 김경섭 겸임교수

사회과학부 행정학전공 김두옥 겸임교수

사회과학부 행정학전공 김정모 겸임교수

사회과학부 행정학전공 김종상 겸임교수

2000. 3.1.~2001.2.28.

소속 이름 직위 기간

사회과학부 행정학전공 문제풍 겸임교수

사회과학부 행정학전공 호광석 겸임교수

산업 및 기기계시스템 공학부 기계시스템공학 전공 백영기 겸임교수

산업 및 기기계시스템 공학부 산업공학전공 임재남 겸임교수

안전보건 경영대학원 강성규 겸임교수

안전보건 경영대학원 윤종현 겸임교수

안전보건 경영대학원 안전보건경영학과 강수헌 겸임교수

예술대학원 패션예술학과 김친-형 겸임교수

예술대학원 패션예술학과 백호익 겸임교수

예술대학원 패션예술학과 이시원 겸임교수

예술대학원 패션예술학과 지제원 겸임교수

예술대학원 회화과 김장섭 겸임교수

정보전산학부 정보시스템공학 고광범 겸임교수

정보전산학부 정보시스템공학 김광은 겸임교수

컴퓨터신기술 대학원 장정곤 겸임교수

컴퓨터신기술 대학원 하재봉 겸임교수

행정대학원 나상희 겸임교수

2001.3.1.~2002.28.

행정대학원 박호숙 겸임교수

행정대학원 신재주 겸임교수

사회과학부 무역학전공 이순우 겸임교수

경영학부 송충석 겸임교수

경영학부 신홍일 겸임교수

경영학부 장용성 겸임교수

교양과 강호양 겸임교수

교양과 김두옥 겸임교수

소속 이름 직위 기간

교양과 서준원 겸임교수

교양과 송병헌 겸임교수

교양과 유경석 겸임교수

교양과 이재광 겸임교수

교양과 조영화 겸임교수

교양과 홍덕수 겸임교수

교육대학원 상담심리전공 김병선 겸임교수

교육대학원 상담심리진공 허윤미 겸임교수

교육대학원 유아교육전공 박인숙 겸임교수

교육대학원 유아교육전공 박현주 겸임교수

국제대학원 국제마약범죄학과 김선민 겸임교수

국제대학원 국제마약범죄학과 오병주 겸임교수

국제대학원 국제마약범죄학과 윤현준 겸임교수

국제대학원 국제마약범죄학과 임대환 겸임교수

국제대학원 국제마약범죄학과 조성권 겸임교수

국제대학원 국제마약범죄학과 조성남 겸임교수

국제대학원 국제지역학과 류현상 겸임교수

미디어디자인학부 이병계 겸임교수

미디어디자인학부 장성환 겸임교수

미디어디자인학부 주옥자 겸임교수

미디어디자인학부 한혜정 겸임교수

신업및기계시스템공학부 기계시스템공학진공 백영기 겸임교수

산업 및 기계시스템공학부 산업공학전공 김성한 겸임교수

산업 및 기계시스템공학부 산업공학전공 이동경 겸임교수

산업 및 기계시스템공학부 산업공학전공 이용천 겸임교수

산업 및 기계시스템공학부 산업공학전공 임재남 겸임교수

2002.3.1~2003. 2.28.

소속 이름 직위 기간

산업 및 기계시스템공학부 산업공학전공 정주성 겸임교수

안전보건경영대학원 안전보건경영학과 김치년 겸임교수

안전보건경영대학원 안전보건경영학과 윤종현 겸임교수

안전보건경영대학원 안전보건경영학과 이징남 겸임교수

에술대학원 패션예술학과 김삼진 겸임교수

에술대학원 패션예술학과 박상근 겸임교수

에술대학원 패션예술학과 양징학 겸임교수

에술대학원 패션예술학과 지제원 겸임교수

에술대학원 회화과 김장섭 겸임교수

정경학부 지식경제학전공 김체섬 겸임교수

정경학부 지식경제학전공 노성호 겸임교수

2002.3.1.-2003.2.28.

정경학부 행정학전공 김정섭 겸임교수

정경학부 행정학전공 김재필 겸임교수

정경학부 행정학전공 호광석 겸임교수

정보공학부 정보시스템공학전공 고광범 겸임교수

정보공학부 정보시스템공학전공 박용규 겸임교수

정보공학부 정보통신공학전공 김철연 겸임교수

정보공학부 정보통신공학전공 유일선 겸임교수

컴퓨터공학부 멀티미디어정보처리저공 장재영 겸임교수

컴퓨터신기술대학원 컴퓨터신기술학과 박한철 겸임교수

컴퓨터신기술대학원 컴퓨터신기술학과 장정곤 겸임교수

소속 이름 직위 기간

컴퓨터신기술대학원 컴퓨터신기술학과 하재봉 겸임교수

행정대학원 교육행정학과 김정모 겸임교수

행정대학원 복지행정학과 박호숙 겸임교수

행정대학원 복지행정학과 신재주 겸임교수

행정대학원 복지행정학과 이원철 겸겸임교수

행정대학원 복지행정학과 차정희 겸임교수

2002.3.1~2003.2.28.

(5) 대우교수

〈부록 표 4-5-1〉역대 대우교수 현황

전공 이름 직위 기간

교육철학 구병두

동양사 김동애

정치학 김일주

법학 남궁승태

도서관학 서영순

교육심리학 신기명

사학 오종록

행정학 이순우

신문방송학 최재완

대우교수 1998. 3.1.~1998.2.28.

(6) 객원교수

〈부록 표 4-6-1〉1993년~1996년 객원교수현황

이름 학위 진공 전현직 대표경력

강경식 행정학석사 행정학 재무부장관(전) 국회위원(현) 국가경영전략연구윈이사장(현)

박용환 행정학석사 행정학 총무처조직국장(현)

박하종 법학석사 법학 민주당부총재(전) 14대국회위원(헌)신정당대표(현)

오경희 징영학석사 징영학 한국은행이사(전) 금융결재원전무이사(현)

유상현 행정학석사 행정학 법제처법무관(전)

대통령비서실비서관(전)

이종하 행징학석사 행정학 정무장관(전) 14대국회위원(현)

주덕영 경영학박사 경영학 생산기술연구원경영본부장(전)상공부기계공업국장(현)

황교선 정영학박사 경영학 한국상장회사협회금융재무위원(전) (주)한일약품공업부사장(현)

유인태 행정학학사 행정학 민주당정무위원(전) 14대국회위원(현)

이태교 행정학박사 행정학 한국수자원공사사장(전)

임경호 행정학박사 행정학 내무부지방조세국장(전) 지방행정연수원장(전) 경기도지사(현)

정연춘 행정학박사 행정학 국무총리공보비서관(전) 학술진흥재단이사장(전) 학술교육방송원장(전)

강병천 행정학석사 행정학 한국생산성본부능률협회연구위원(전) (주)석천 대표이사(현)

박대권 정치외교학학사 정치외교학 13대국회위원(전)

국회농림수산위원(전) 문화체육부차관(전) 충남도지사(전)

서정욱 공학박사 전기공학 과학기술처차관(전)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전)

최평욱 경영학석사 경영학 산림청장(전) 철도청장(전)

<부록 표 4-6-2〉1997년~1998년 객원교수 현황

이름 학위 진공 전현직대표경력

강경식 행정학석사 행정학 국회의원(현)재무부장관(전)

강병친 행정학석사 행정학 (주)석천 대표이사(현)

김기덕 정치외교학 대통령 공보비서관(현)

김차웅 문학사 영어영문학 동아일보 사회 1부장(현)

김태복 행정학박사 행정학 대한안경사협회장(현)

남정수 공학석사 건축학 감사원 제4국장(현)

박용환 행정학석사 행정학 총무처기획관리실장(현)

박찬종 법학석사 법학 신한국당 상임고문(현)국회위원(전)

박태권 정치외교학학사 정치외교학 충님지사(전) 문화체육부차관(전)

서정욱 공학박사 전기공학 한국이동통신사장(현)

오경희 경영학석사 경영학 금융결제원 상임고문(현)

유균 신문방송학 KBS정치부장(현)

유상현 행정학박사 행정학 법제처공보관(현)

유인태 행정학박사 행정학 국회위원(전)

유자효 문학사 불어학 SBS보도본부 부국장(현)

이수일 법학 강원경찰청장(현)

이종백 법학 서울지검 형사6부장 검사(현)

이종찬 행정학석사 행정학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현)국회의원(진)

임경호 행정학박사 행정학 지방행정연구원장(현)경기도지사(전)

장용성 행정학석사 행정학 매일경제신문사 금융부장(현)

정연춘 행정학박사 행정학 아주대학교 경영대학원장(현) 교육방송원장(전)

조정민 정치학석사 정치외교학 MBC 국제팀장(현)

주덕영 경영학박사 경영학 통상산업부 국장(현)

최평욱 경영학박사 경영학 한국철도물류협회 이사장(현)산림청장(진)

황교선 경영학박사 경영학 한일약품 부회장(현)

(7) 초빙교수 현황

소속 직위 이름 임용기간

산업 및 기계시스템공학부(기계시스템공학전공) 초빙교수 이영 2002.3.1-2003.2.28.

(8) 기타

소속 이름 직위 기간

경영학부 연정열 명예교수 2002. 3.1.

대학원 이태영 석좌교수 2000. 3.1. 2001. 22.28.

5. 직원

(1) 직원 현황

<부록 표 5-1-1〉일반·기술직 현황

* 별정직 포함 인원임.

〈부록 표 5-1-2〉 직급별 현황

구분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행정직

2급 1 1

3급 1 3 4 4 5

4 급 3 5 6 7 6 8 6 6 5

5 급 6 8 8 9 9 7 6 9 5 5 9 9

6급 9 8 7 6 4 4 6 7 9 12 13 14

7급 6 5 6 7 6 11 14 13 22 28 28 25

8급 11 13 13 15 19 31 30 27 15 6 4 11

9급 8 12 10 5 5 2 0 0 0 0 0 0

계 40 46 44 45 48 61 63 63 62 61 65 70

* 별정직 포함 인원임.

〈부록 표 5-1-3〉기능직 현황

구분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2000 2001 2002

인원 11 11 11 12 12 31 30 29 28 26 26 24

(2) 직원인사

• 1973년 우리대학 행정조직은 교무처, 학생처, 사무처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사무처 아래 동일한 사무실에서 업무를 시작한다. 이 해 2월 대학업무 전담직원으로 최초 박관현 선생이 교학 업무를 담당하고 12월 김영기 선생이 서무과장으로,1994년 5월 허천옥 선생이 경리로 임용된다.

• 1975년 2월 직제개편으로 교무처, 학생처를 과로 낮추고 사무처에 당시 고등학교 서무실장인 김성열 선생이 임용되나 1978년 8월 퇴직하면서 이후 서무과장 중심으로 운영한다.

• 1976년 4월 맹형호 선생이 학생과로 1977년 6월 최동운 선생이 교무과로 1978년 4월 김명수 선생이 도서관으로 각각 신규 임용되면서 사무실도 분리하고 업무분장도 나누게 된다.

• 1980년 과를 다시 처로 바꿔 교무처,학생처, 사무처로 개편하고 교무처에 교무과와 학적과를 학생처에 학생지도과와 행정과를 사무처에 서무과와 영선과를 둔다.

• 1981 년 3월 주임제를 두어 최동운 교무주임, 장대환 학적주임, 맹형호

학생지도주임, 박종규 행정주임, 이종수 영선주임,김명수 사서주임으로 최초 보직 승진한다.

• 1982년 2월 기획실을 신설하고 이 해 2월 23일 이승륵 사무처장, 손영일 기획실장을 외부에서 영입한다. 기획실에 기획과와 예산관리과를 두어 기획주임으로 정재문 선생을 신규 임용한다.

• 1985년 2월 14일자로 서무과를 총무과로 명칭변경하고 김영기 서무과장을 중학교 서두과장으로 중학교 유무열 서무과장을 총무과장으로 임용한다.

• 1985년 6월 기획실을 폐지하고 사무처로 기획과를 편입하고 기획과장에 유무열 총무과장을 겸직 발령한다.

• 1987년 11월 총무과장을 제외하고 그 동안 주임제로 운영되던 부서에 주임을 과장으로 보직 승진한다. 인사에 따르면 교무과장 최동운, 학적과장 정대홍, 교학과장 맹형호, 학생과장 공대원, 장학과장 박종규,서무과장,유재국,경리과장 박종욱,사서과장 김명수를 각각 발령 한다.

· 1995년 12월 신입직원을 대폭 임용한다.

〈부록 표 5-2-1〉직원 임용, 승진 및 퇴직 현황

구분 기능직 임시직 5급을(9급) 5급갑(8급) 4급을(7급) 4급갑(6급) 3급을(5급) 3급갑(4급) 2급을(3급) 2급갑(2급) 퇴(재)직 비고

6. 학생

1) 학생 현황

〈부록 표 6-1-1〉학과(부)별 학생정원 현황

구분 국어국문 영어영문 비서 가정 의상 생활미술 불어불문 무용 경여여 무역 국사 사 행정 경제 도서관 문헌정보 산업디자인 전산통계 산업공학 의류직물 계

구분 국어국문 영어영문 사 문헌정보 경영 무역 경제 행정 부동산 무용 회화 산업디자인 의상 의적 전산통계 컴퓨터공학 정보공학 산업공학 산업안전공학 계

구분 한국어문학부 영어영문학부 역사문화학부 지식정보학부 사회과학부 경영학부 의생활학부 회화과 무용학과 미디어디자인학부 정보전산학부 산업시스템공학부 계

구분 한국어문학부 영어영문학부 역사문화학부 지식정보학부 경영학부 정경학부 경상학부 의생활학부 회화과 무용학과 미디어디자인학부 컴퓨터공학부 정보공학부 산업시스템공학부 계

2) 졸업생

• 1977년 2월 25일 제1회 학위수여식을 가지고 90명의 여학사를 배출하고 국문과 조인자 등 9명이 공로상을 수상한다.

• 1978년 2월 25일 제2회 학위수여식에 82명의 여학사가 탄생하고 최우수상은 국문과 신경숙양이 수상한다. 이 해 남녀공학으로 전환하면서 남자 신입생을 맞게된다.

• 1979년 2월 24일 제3회 학위수여식에 76명의 여학사에 최우수상은 영문과 이향순양이,1980년 2월 25일 101명의 여학사를,제5회 학위수여식은 1981년 2월 25일 체육관에서 86명의 여학사와 1명의 남학사를 배출하고 의상학과 박은임양이 최우수상을 수상한다.

• 1982년 2월 20일 제6회 학위수여식부터 남녀학사가 균등하게 배출된다. 이 해 160명의 학사학위자 중 남학생이 77명 여학생이 83명을 차지하고 최우수상은 생활미 술학과 이명아양이 수상한다.

• 1992년에는 65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1982년 졸업생수 160명에 비교해보면 4배 이상 증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1회 졸업생이 배출된 1977년이래 2002학년도 전기학위수여식까지 배출된 졸업생의 수는 총 13,349명이다. 학과별로는 경영학과 졸업생이 1,598명으로 가장 많고, 무역학과 1,498명, 국어국문학과 1,109명의 순으로 졸업생이 많다.

<부록 표 6-2-1〉 졸업생 현황

(2002. 9 기준)

구분 총계 1회 77 2회 78 3회 79 4회 80 5회 81 6회 82 7회 83 9회 85 10회 85 11회 87 12회 88 13회 89

총계

국문

영문

사학

문정

가정

경영

무역

경제

행정

부동산

무용

회화

산디

의상

의류직물

전산통계

멀티미디어

컴퓨터공학

정보공학

정보시스템

정보통신

산업공학

산업공학전공

산업안전

기계시스템

구분 14회 90 15회 91 16회 92 17회 93 18회 94 19회 95 20회 96 21회 997 22회 98 23회 99 24회 00 25회 01 26회 02

총계

국문

영문

사학

문정

가정

경영

무역

경제

행정

부동산

무용

회화

산디

의상

의류직물

전산통계

멀티미디어

컴퓨터공학

정보시스템

정보통신

산업공학

산업공학전공

산업안전

기계시스템

3) 학생활동

<부록 표 6-3-1> 대동제 현황

구분 축제명 기간 비고

1회 한성축전 1976.10.23 ~10.24 장기자랑 등 다채로운 행사. 좀더 높은 참여의식 아쉬워

2회 한성축전 1977.10. 8~10. 9 체육대회,장기자랑 등 다양한 진행.

3회 낙산축전 1978. 6. 2~6. 4 체육대회,장기자랑 둥 다양한 진행.

4회 낙산축전 1979. 5.16 ~5.19 초청강연회,다채로운 행사

5회 낙산축전 1980. 5

6회 낙산축전 1981. 5.13ᅳ 5.16 각 부 서클(왕산악,새마음회, 활공회 등)의 특성살려 진행

7회 낙산축전 1982. 5.25 ~ 5.29 학과 서클강연회 및 발표회,농악,탈춤등 민속공연

8회 낙산축전 1983. 5.19 ~ 5.21 남사당 놀이둥 민속행사 돋보여. 학생참여도 낮아..

9회 낙산축전 1984. 4.27 ~4.28 독특한 변모없는 낙산축진. 학술면 경시,오락위주일관

10회 낙산축전 1985. 5.14 ~5.16 지역주민 초청,경로잔치 배품어

11회 낙산대동제 1986. 5.13 ~5.15 학생자치회가 호국단에서 총학생회에 변함에 따라 축 제의 명칭과 내용도 달라짐

12회 낙산대동제 1987. 5.20 ~ 5.22 행정학과의 ‘한성민국 모의국회’와 노래창작연구회의 총제극 ‘마지막날의 그리움’은 학생들의 호응도가 매 우 높음.

13회 낙산대동제 1988. 5.24 ~ 5.26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 향상. 시기상의 문제로 대동 아쉬워..

14회 낙산대동제 1989. 5.23 ~5.26 ‘오월 핏빛 함성이여! 구치는 열망이여! 한치의 굴복 없이 타올라라!’라는 대주제 아래 개최.

15회 낙산대동제 1990. 5.23 ~ 5.25

16회 낙산대동제 1991. 5.22- 5.24 1991학년도 민중승리 닉-산한마당’으로 명칭 변경되어 진행. 첫째날 학원민주의 날 둘째날 노동해방의 날 셋째날 민중승리의 날

17회 낙산대동제 1992. 5.20 ~5.22 한성사랑운동 진개

18회 낙산대동제 1993. 5

19회 낙산대동제 1994. 5.11 ~5.13 스승의 날 기념행사 진행으로 한마당

20회 낙산대동제 1995. 5.24 ~5.26 ‘멈추지 않는 교육개혁을 선포한다. 고립과 개별주의 의 벽을 깨고 저항하는 미래노동자의 당당한 시대를 선언한다’라는 취지로 개최

21회 낙산대동제 1996. 5.20 ~ 5.23 "학자투 승리를 받아안고’라는 주제로 개최

22회 낙산대동제 1997. 5.21 ~5.23 ‘제자리 찾기’라는 기조로 개최

23회 낙산대동제 1998. 5.20 ~5.22 ‘하늘 넘치나는 우리들의 젊음 찾기’를 기조로 개최. 민중연대 문화제 따로 치루어져 아쉬움 남아..

24회 낙산대동제 1999. 5.19~5.21 ‘일상의 파괴! 우리의 미래를 두려워 하지 말자’를 모토로 열림.

25회 낙산대동제 2000. 5.24 ~5.26 ‘2000년,우리는 살아있음을 동정한다’를 모토로 개최

26회 낙산대동제 2001. 5.23 ~5.25 4We must change HANSUNG’이라는 기조아래 개최

27회 낙산대동제 2002. 5.29 ~5.31 '파괴,건설,시작‘이라는 기조아래 개최

• 1987년 6월 항쟁의 여파로 정부에서 각 대학에 조기방학을 지시하여 우리 대학도 이에 호응하고 6월 17일 조기방학조치가 학장 공고문을 통해 단행된다.

• 1988년 4월 13일 학원자치권쟁취투쟁위원회(위원장: 총학생회장 미술과 남준) 투쟁 전개하여 전면 수업 거부,시험연기 결의 12일 동안 학장실,경리과,교무처 점거하여 농성을 벌인다. 또한 학교측과 10개 사항 합의로 4.29 시위 종결 합의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 째 신입생장학급은 각과에서 선지급한 2명 외에 6명에게 30만원을 지급한다.둘 째 교수는 공개채용 하되 문제된 교수 건은 해당학과에서 처리한다.

셋 째 등록규 분할 납부는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 3회에 걸쳐 분할 납부한다.

넷 째 우촌관 부실공사의 문제는 시공자,설치자,감리사가 학생대표 입회하에 해명한다. 또한 방음장치,난방장치,환기시설을 설치한다.

다섯째 1985년 미해결 13개 조항에 있어 신축건물의 1989년 3월 이전 착공 등 6가지 사항을 시행한다.

여섯째 신설학과에 대한 대책으로 교과과정은 교과과정심의위원회에서 결정 발표

한다. 또한 임시 학회실을 마련하되 2학기부터는 진용강의실을 배정하여 학회실로 사용한다.

일곱째 구속청년학생협의회 요구사항에 있어서 특별기구를 구성 긍정적으로 검토하며 학장의 공개사과는 특별담화를 통해 유감을 표시한다.

여덟째 언론자유의 보장에 있어 사전자료 검열과 지도위원회는 학칙 개정시 폐지한다. 또한 방송국 예산은 1989년부터 등록금의 0.3%를 배정한다.

아홉째 보직교수와 학생대표와의 간담회를 구성하여 정기직으로 개최한다.

열빈째 5월 2일부터 정상수업에 임한다.

• 1988년 5월 25일 전방입소에 대한 범한성토론회 및 거부투쟁 촉구대회를 갖고,학생 14명이 전방입소를 거부하고 전방입소 철폐투쟁한다.

• 1988년 6월 7일 한성대학교 구속청년학생 협의회가 학교측과 타결점을 찾지 못해 학장실 점거하고 6월 24일 한성대학교 구속청년학생 협의회가 학교측과 5개 사항을 합의하고 농성을 종결한다.

5개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 째,부당징계 등에 대한 학교측의 공식사과를 학보와 담화문을 통해 게시할 것

둘 째,학원의 대리사찰 등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사과할 것

셋 째,징계철회 및 피해보상측면에서 구속청년학생 협의회에게 사무실 제공 등의 혜택을 부여할 것

넷 째,구속학생의 조기석방과 수배해제를 위해 노력할 것

다섯째,시국관련 대상자는 집행유예 이상으로 한다.

• 1988년 6월 27일~28일 총여학생회 주최로 팔당의화정에서 여학생 하계수련회가 개최되고,11월 2일~14일 한성 해방제가 개최된다. 또한 11월 9일~11일 써클 웅비제가 개최된다.

•1989년 1월 10일 등톡금 동결투쟁위원회(위원장: 김승환 총학생회장)의 학장실 점거가 장기화됨에 따라 일단락하고 한성발전추진위원회 구성으로 전환하여 학교측에 5개항 공개질의서 채택한다.

- 학생대표의 학사운영 참여 제도적 보장,재단전입금 확충,국고보조금 확대를 위한 공동 노력

- 신입생 입학금을 포함한 신입·재학생 등록금 동결,1985~1989년 예·결산의 실질적 공개

• 1988년 2월 3일 한성발전추진위원회를 구성하며 등록금동결투쟁을 일단락 짓는다.

• 1988년 3월 10일 총학생회와 인권복지위원회가 학장 및 사무처, 학생처를 대상으로 셔틀버스 승차, 우촌관 간이매점설치, 구내식당의 직영화 및 서점의 학생운영,팔당수양관(의화장)의 제반시설 구비, 자치기구 전화의 국선화 및 학과사무실의 송·수신가능,대강당보수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경고문을 전달한다.

• 1988년 4월 27일 춘계대학축구연맹전에서 우리대학이 연세대학교와 성균관대학교를 차례로 제압하고 본선에 진출한다.

• 1988년 4월 28일 학보사,방송국,교지편집위원회로 구성된 언론출판 협의회 발대식을 갖고 신임회장에 김길호(한성대학보사 편집국장/경영학과 3)군을 선출한다.

• 1988년 5월 2일~6일 총대의원회에서 학생자치기구에 대한 중간감사를 실시한다. 6월 2일 동아리연합회가 진리관 뒤 가건물로의 입방식을 가졌으며,9월 29일 민주총학건설위원회가 총학생회에 사퇴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한다.

• 1988년 10월 9일 전국추계대학축구연맹전에서 우리대학 축구부가 16강 진출하고,10월 16일~22일에 개최된 체육부장관배 전국학생 종별 탁구대회에서 종합우승을 한다. 또한 11월 10일 프로팀,실업팀,대학림이 참가하는 한국참피언컵에서 우리대학 축구부가 8강에 진출한다.

• 1990년 5월 24일 제15회 낙산가요제가 방송국주최로 민주광장에서 개최되고,27일 제7회 한성대학교 동문회장배 쟁탈 낙산농구대회가 한성대학교 아마추어 농구부 주최,대 한농구협회 연맹후원으로 개최 된다.

• 1991년 4월 8일~10일 제1기 병영학교가 열려 좌담회,진시회 등이 진행되고 4월 19일 ‘해방의 불바람으로 다시 서는 4. 19 제2차 국민대회출정질의식’이 민주광장에서 열린다. 20일 지ᅵ8대 총학생회는 발대식을 갖고,24일 ‘민중승리 91년을 향한 진군식 및 민중운동탄압 분쇄를 위한 5월투쟁 선포식’을 갖는다.

• 1991년 5월 3일 1991년도 상반기 대의원 총회가 정족수 미달로 무

산된다. 6월 7일 학원민주화추진위원회가 발족식을 가졌으며,위원장에 최종금 부총학생회장(경제 ’88)을 선출한다.

• 1991년 8월 29일 총학생회장실에서 중앙운영위원회가 열려, 제2차 공개질의서에 대한 학교측의 답변서에 대한 검토작업이 수행되고 구체직인 질의서 구성 등이 상정되고,9월 3일 중앙운영위원을 비롯한 약 50여명의 학생들이 학생처장실과 학생처를 점거했으나 교학 간담회 성사와 동시에 해제한다.

• 1991년 9월 26일~30일 ‘진아랑’(경제학과 문헌정보학과 농활팀)팀이 전남 진도군에서 가을농활을 실시하고, 10월 1일~2일 총학생회 학술부 주최로 제7회 학술제가 열려 백기완씨가 ‘북방정책의 본질과 한반도 통일운동의 방향’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한다.

• 1991년 11월 2일~14일 전국 남녀 추계 대학 축구 연맹전에서 우리 대힉- 축구부가 창단 6년만에 우승한다.

• 1992년 3월 20일 전체학생 비상총회가 개최되어 등록금 투쟁에 관한 논의가 진행되고,3월 23일 총학생회가 등록금투쟁과 관련하여 ‘공개질의서’를 학교 당국에 제출한다.

► 공개질의서의 주요 내용

- 과학적 등록금 책정을 위한 1991년도 자금운용 예·결산서와 1992년도 자금운용 예산서를 공개

- 1990년도 부정입학금 32억8천만원을 교비로 환수하여 교수, 직원, 학생 대표로 구성된 ‘부정입학금 공동관리위원회’를 건설

- 민주적인 등록금 책정을 위한 기구로써 대학본부 2인,평교수 1인,직원 1인,학생대표 4인으로 구성되는 ‘등록금 조절위원회’를 건설

- 3월 18일 한성대학장 명의로 학생들에게 발송한 징계조치 경고를 철회하고, 총학생회로 낸 학우들의 등록을 인정

3월 27일 학교당국은 학생측 요구안에 거부 표명

► 학교당국의 입장

- 1991년도 자금운용 예·결산서와 1992년도 자금운용 예산서공개는 3월 19일 열린 교학 간담회에서 공개한 자료이상은 없음

- 부정입학금 공동관리 위원회구성에 대한 입장은 32억8천만원은 한성발전기금으로 신축건물비용에 사용되어야 하므로 등록금과 연결시킬 수

없고, 공동관리위원회는 필요 없음

- 등록금조절위원회의 건설은 등록금문제에 있어서 학생측이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으므로 불가함

- 총학생회 납부자는 교육법시행에 따라 미등록 처리함

•1992년 4월 2일 등록금투쟁 승리를 위한 한성인 실천대회가 홍성곤(경제 ’89)부총학생회장의 사회로 민주광장에서 개최되고,9일 제9대 총학생회 해오름식에서 김경식(산업공학 ’89)총학생회장과 이기준(영어영문 ’91)군의 삭발식이 거행된다. 22일 등록금 문제는 8개항으로 아래와 같이 합의한다.

- 1992년 예결산자료는 행정적으로 마무리되는 5월 20일 전후로 매년 교육부에 보고한 뒤 그 총괄적인 내용의 공개 사항 범위를 교학간담회에서 회의하여 결정

- 등록금에 관한 문제는 현재와 같이 교학간담회에서 논의

- 총학생회로 납부한 학생들의 등록금을 4월 20일까지 학교로 납부하고 차액부분에 대해서는 1개월간의 유예기간을 두며, 이 기간에는 학생증 발급등 학생으로서 신분제약을 받지 않음

- 국고보조금,한성발전기금조성 등 교육재정확보를 위해 공동으로 노력

- 각종 연구위원회의 장단기 발전연구 진행결과는 매년 1학기 내에 연구

보고서를 작성하여 이를 학교 내의 모든 교직원,학생들에게 공개하고 그 요약문을 한성대신문,한성대 소식에 게재하며, 학생들의 건설적인 의견은 전폭 수용

- 32억8친만원에 대해서는 그 동안 전혀 이률 사용하지 않았고, 앞으로 건물 신·증축 시 충딩- 단,신·증축은 현제 진행중인 서울특별시 도시계획대상규획지에 편입승인이 난 뒤에야 가능

- 교육내용의 질적 기1선을 위해 학교에서 계속 노력

- 현재 교육여건 개신사업이 계속 진행 중에 있으며,학생들의 건설적인 건의는 적극 수용

• 1992년 5월 11일 국립중앙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제11회 국제현대무용제에 우리대학 무용학과 20여명의 학생이 참가한다.

• 1993년 3월 11일 총학생회 확대운영위원회에서 3월 26일까지 등록금납부연기를 결의한다.

• 1993년 12월 7일 내부진통을 겪었던 신문사 사태가 마무리되어 3월 15일자로 198호가 발행된 지 9개월만에 199호가 발행된다.

• 1995년 1월 20일 학교 공간배치위원회에서 과학관 증축으로 인한

공간배치 룔 확정됨으로써 의류직물학과 실습실이 축소되는데 대해 의류직물학과 학생들이 강력히 반발한다.

• 1995년 2월 10일~12일 강원도 양양에서 겨울농촌활동이 열리고, 15일~21일 신입생 예비학교가 각 과별로 이루어져 신입생들이 높은 참여도를 보인다.

• 1995년 5월 11일~13일 총학생회 주최로 강원도 양양에서 봄 농활이 실시되고,17일~18일 총여학생회 주최로 ‘낙산여성 한마당’이 실시 된다.

• 1995년 5월 31일~6월 2일 2학기 등록금 유보와 등록금 조절위원회의 결성 등에 대힌· 찬반투표를 실시한 결과 9월 23일까지 등록금 납부유보를 결의한다.

• 1995년 10월 7일~13일 제77회 전국체전에서 우리대학 탁구부가 대학부 우승을 차지하고,30일 ‘공안정국타개와 자주적 학생회강화’를 기조로 낙산 대동문화체전 개최한다.

• 1997년 6월 5일 ‘자본의 교육장악 분쇄와 자치학원 건설을 향한 한

성인 총궐기 대회’가 200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민주광장에서 개최된다.

• 1997년 9월 13일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탈퇴 여부를 결정하는 ‘한총련혁신을 위한 총투표’ 결과 한총련 탈퇴로 결정된다.

• 1997년 11월 20일 ‘한성사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및 비리재단 퇴진을 위한 투쟁 선포식’이 민주광장에서 열린다. 28일 ‘비리재단 퇴진을 위한 수업 거부 결의와 교육부 감사 결과 촉구를 위한 결의대회’가 4백여명의 학생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고 정문 앞에서 경찰의 저지선을 뚫으려는 선봉대와의 몸싸움 중 정보전산학부 1학년 학생이 전경의 최루탄 총 개머리판에 맞아 얼굴 눈 주위가 찢어지는 부상을 입는다. 12월 3일 ‘수업·시험 거부 결의를 위한 총투표’를 실시하여 4일부터 수업·시험 거부에 돌입한다.

• 1997년 12월 6일 ‘한성사태 진상규명과 비리재단 퇴진을 위한 투쟁대회’가 한성사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및 비리재단 퇴진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주최로 종묘공원에서 개최된다.

• 1998년 5월 27일 인문대와 이공대,문헌정보학과 주최로 ‘민주총장 선출과 교육환경 개선을 향한 한성인 투쟁대회’가 열린다.

• 1998년 5월 27일 낙산배 아마츄어 농구 대회가 우리대학 농구 동아리 UP의 주최로 체육관에서 열리고, 6월 2일 소강당에서 중앙노래패 ‘들불’이 제20회 정기공연을 가진다.

• 1998년 9월 22일 우리대학 방송국 HBS 주최로 Open Studio가 민주광장에서 열린다.

• 1999년 4월 14일 '대학간·학문간·대학인간 위계서열화 반대, 교육의 공공성 쟁취,대학운영위원회 건설'을 모토로 '교육투쟁 승리를 위한 한성인 행동의 날'이 열리고,5월 10일~14일 총여학생회 주최로 '낙산 여학우' 한마당이 열린다.

• 1999년 5월 17일 현대사회연구회주최로 5_18 광주 민중항쟁 토론회'가 강의동에서 열린다.

• 2001 년 3월 교수회관 설립계획안을 두고 불협화음이 생겨 예술대학 학생회는 세종문화회관 뒤편까지 가두집회를 가진다.

• 20이년 5월 30일 무용학과 학생회와 의상학과 학생회는 수업거부를 위한

찬·반 투표를 실시하고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수업 거부에 돌입한다.

• 2001년 9월 예술대학 시위에서 재물 손괴로 구속 기소된 이성재(무용 ’97) 예술대 대표에게 징역 6개월의 실형이 선고되고 법정구속 된다. 재판부는 또 같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장동극(의상 3),심원섭(의상 3),오승렬(의상 ’99)등에게도 각각 벌금 8⑴만원이 선고된다. 학교측은 9월 11일자 총장 명의의 공고를 통해 학생상벌에 관한 시행세칙 제12조 1항, 2항에 의거 이성재(무용 ’97),최재헌(무용 2)의 징계를 해제한다.

7. 재정

1) 재학생 1인당 교육비

<부록 표 7-1-1〉연도별 재학생 1인당 교육비 현황

(단위: 천원)

학년도 재학생수 교육비 총액 학생1인당 교육비 비 고

1991 2,899 5,897,057 2,034

1992 2,872 7,251,447 2,424

1993 2,971 10,932,559 3,535

1994 3,331 14,129,508 4,242

199(3 3,765 20,242,959 5,377

1997 4,124 22,571,874 5,473

1998 4,746 26,166,426 5,513

1999 5,098 24,638,123 4,833

2000 5,609 26,884,396 4,793

2001 6,336 43,184,803 6,815

* 교육비총액은 운영수입 계와 고정자산 매입지출을 합하여 산출함.

* 재학생수는 학년도 평균임

2) 세입중 학생등록금 비율

<부록 표 7-2-1〉연도별 세입중 학생등록금 비율

(딘위: 천원)

학년도 세입총액 학생등록금 비율(%) 비고

1992 9,489,621 6,757,184 71.2

1993 13,106,370 8,422,222 64.2

1994 16,834,772 10,728,944 63.7

1995 23,832,858 12,350,929 51.8

1996 23,110,489 17,166,233 74.2

1997 36,606,007 20,352,581 55.5

1998 30,597,948 22,610,605 73.8

1999 32,243,990 24,820,736 76.9

2000 42,637,291 30,427,063 71.3

2001 53,848,775 34,720,396 64.4

3) 세출중 인건비 비율

<부록 표 7-3-1〉 연도별 세출중 인건비 비율

(단위: 천원)

학년도 세출총액 인건비 비율(%) 비고

1992 9,489,621 3,578,244 37.71

1993 13,106,370 4,250,334 32.43

1994 16,834,772 5,522,375 32.80

1995 23,832,858 6,490,703 27.23

1996 23,110,489 8,791,835 38.04

1997 36,606,007 10,472,328 28.61

1998 30,597,948 11,634,377 38.02

1999 32,243,990 12,857,756 39.88

2000 42,637,291 15,001,896 35.18

2001 53,848,775 17,252,870 32.04

8. 행정

1) 위원회 운영

• 1982년 4월 사회과학연구소 설립준비위원으로 행정학과 이창신, 경영학과 김길평 교수,민족사상연구소 설립준비위원에 국문학과 정연길, 김중열 교수,전동예술연구소 설립준비위원에 미술학과 하인누,무용과 김숙자 교수, 학생생활연구소 준비위원에 경영학과 최명규,교직과 조점환 교수가 위촉되고 교과과정개편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에 정하경 교무처장이,위원으로 각 학과장을 위촉한다. 이 해 9월 대학학사개혁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에 정하경 교무처장이,위원으로 김계욱 학생처장,이승록 사무처장, 손영일 기획실장, 연정열 도서관장,정연선 사회산업연구소장, 하인두 전통예술연구소장,정연길 민족사상연구소장,최 명규 학생생활연구소장을 위촉하고 대학문화육성 심의 위원회에 학술분과,예술분과,줄판분과,사회교육분과를 두어 각 위원을 위촉한다.

• 1982년 고시반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지도교수에 행정학과장 김범주 교수를,지도위원으로 정하경 교무처장,김계욱 학생처장, 이승록 사무처장,연정열 도서관장을 위촉하여 고시준비를 하는 학생들의 지원을 도모한다.

• 1983년 4월 학생복지관(현 학생회관) 신축을 위하여 대학건설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에 미술과 하인두 교수를,위원으로 손영일 기획실장,행정학과 정연선,미술과 정하경,경영학과 최명규,행정학과 김범주,사학과 윤경로,행정학과 김길평 교수를 위촉한다. 이 해 11월 학생복지관신축공사 집행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에 강병규 학장이,위원으로 이창성 법인이사,이용남 교무처장,최명규 학생처장, 이승록 사무처장,손영일 기획실장, 간사로 김영기 서무과장을 위촉한다.

• 1984년 2월 취업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에 경제학과 한창호,부위원장에 무역학과 강석중,위원으로 학생처장 최명규,사무처장 이승톡을 위촉 고 4월 추가로 이용남 교무처장, 강병식 기획실장,최송길 경영학과장, 김범주 행정학과장,조점환 교양과장, 신은숙 교직과장을 위촉하고,6월 한창호 위원장의 사임으로 강석중 부위원장을 위원장으로 위촉한다. 이 해 9월 신임 강은석 학생처장이 위원장을 맡으면서 취업업무가 학생처 업무로

자리잡게 된다. 1985년 3월 김우백 선생을 취업담당으로 명한다.

• 1984년 3월 복지관건축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에 최명규 사무처장을 위원으로 기획실장 강병식,학생처장 김용석, 책임위원으로 경영학과 김길평 교수를 위촉한다.

• 1984년 6월 교사이전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에 미술학과 하인두,위원으로 김용석 교무처징•, 강은석 학생처장, 최명규 사무처장,김용정 기획실장, 연정열 도서관장,이동섭 인문학부장, 한창호 사회과학부장,정하경 예술학부장 신은숙 교양학부장,고정자,김범주,윤경로,강병식 교수를 위촉한다.

• 1985년 1월 학보편집지도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에 한진만 학생처장, 위원으로 이종수 학보사주간,영문학과 김용석,교직과 김경배, 경영학과 김원중 교수로 위촉하고 이 해 10월 교지편집지도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에 김경배 학생처장,영문학과 김용석, 행정학과 이종수, 국문학과 원형갑 교수를 위족한다.

• 1985년 3월 28일 도서구입계약심의위원회 위원장으로 흥봉춘 도서관장,위

원으로 김길평 총무처장,김용정 기획실장을 위촉한다.

• 1985년 8월 정보화 시대에 대비하여 정보전산연구원운영위원회를 구성한다. 위원장은 이우범 정보전산연구원장을,위원으로 김길평 총무처장, 최명규 교무처장, 김경배 학생처장,경영학과 최송길, 김원중 교수를 위촉한다.

• 1985년 10월 고시반지도위원회를 개편하여 지도교수에 행정학과장 황진수, 위원으로 최명규 교무처장,김경배 학생처장, 김길평 총무처장,경제학과 허창재,무역학과 강석중,경영학과 김원중,행정학과 이종수, 영문학과 김용석 교수를 위촉한다.

• 1985년 12월 축구부 창단과 함께 체육진흥관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장에 홍순태 학장이 부위원장에 김경배 학생처장,위원으로 최명규 교무처장, 김길평 사무처장,강은석 체육부장, 김계욱,김경자, 강병식 교수를 위촉하고,축구부 특기자 전형심사위원회에 위원장 김경배 학생처장,김계욱, 강은석 체육과 교수, 정은식 축구부 코치, 외부인사로 백금봉 강사가 위촉되어 축구부 신입생을 선발한다.

2) 특별위원회

<부록 표 8-2-1〉특별위원회 개최 현황

연월일 위원회명 위원장 비고

1982. 4 대학발전협의회 강병규 교육환경개신을 위한 재단과의 협조

1982. 5 연구소설립추진위원회 4개 연구소 설치

대학요람편찬위원회 최초 요람 편찬

영문요람편찬위원회 해외홍보용

1982. 9 대학문화육성신의위원회 진통사상과 고유문화 대한 자주의식 고취

1983. 3 대학건설위원회 하인두 복지관 건설

1984. 2 취입대책위원회 한창호 내입보도실’로 상실기구화

상징물제정추진위원회 학교상징물 꺼북이’ 선정,교목은 삼학송

1984. 3 홍보위원회 이용남 대내외 홍보함동 강화

1984. 교사이진추진위원회 하인두 헌 위치로 이전

세규정심의위원회 학칙개정

1984.11 취업대해위원회 허광일 학과장 중심의 취업대혜

1988. 3 제규정심의위원회 이용남 학칙개정 및 규정정비

대학장기발전기획위원회 김용정

1990. 6 한성발전협의회

1991. 2 한성대학발진기급조성· 운영위원회 원형갑

1992. 1 우촌김의형박사 추모집 간행위원회 안호상

1992. 1 개교 20주년 기념행사 준비위원회 이석주 20년사편찬,전시회

1992. 5 대학홍보 자문위원회 김원중

1991 5 대학이미지 통합연구위원회 이상원

1993. 5 대학홍보자문위원회 이상원

1994. 4 한성학원 50년사편찬위원회 연정열 50년 기념사입으로 학원사 편찬

1994 대학 전산화 심의관리 위원회 권혁제 대학전산체제 통합운영연구

1994 대학 이미지 형상화 위원회 조덕현 대학이미지 개발작업

1995. 3 대학자체 종합평가 연구위원회 이석주

1995. 3 한성학원 50년사 편찬· 위원회 윤경로

1995. 3 대학 이미지 형상화 위원회 이상원

1995. 6 교육개혁실 적 보고서 위 원회 권오

1997.10 영문요람 발간위원회 문귀선

1997. 5 교육개혁연구위원회 이성우

1998. 3 한성발전위원회 이창원 대학발전을 위한 새롭고 창조적인 방안 개발. 한성개혁백서 발간

2001. 3 입금체계개선위원회 최명규

3) 상설위원회

가) 역대 교무위원회 위원 명단

설치연도 위원장 위원 비고

1983 강병규 정연길,연정열,하인두,이용남, 최명규, 박양구, 이동섭,이승록,손영일

1984 강병규 김용석, 강은석,강석중,김용정,연정열,한창호,

1985 홍순태 윤석효, 한진만,김길평,김용정, 이종수,강병식,정연길, 허광일

1991 원형갑 이종수, 최송길,김경자,이동섭, 이석주,김재욱,윤경로,조점환,고정자

1992 원형 갑 이종수,정종해, 김경자,이동섭, 황진수,김원중, 권헉제,김학자,김대홍

1993 원형 갑 이종수, 정종해, 김경자, 이동섭, 황진수,김원중, 권혁재, 김학자, 김대홍

1994 원형갑 최송길,김경자, 정종해, 이동섭,강석중,조점환,임재영,김학자,박명환

1995 이용남 최송길,정종해, 김종섭,강석중,이종수, 조점환,임재영,김학자,박명환

1996 이용남 최송길,정종해, 김종섭, 이태교,이종수,조점환,임재영,김학자,박명환

1997 이용남 최송길,정종해, 김종섭. 이태교, 이종수,홍윤기, 윤석효, 유병호,원형규

1998 윤경로 박명환,이상한,최명규, 이정숙,이석주, 홍윤기, 권오, 정하경, 김재욱,김숙자,조점환,최혜주,김창룡,임재영, 황진수,진화숙, 원형규

1999 이성근 윤석효,홍윤기,권오,홍용식, 이우범, 김용석, 김평광, 김숙자, 차운옥, 김길평. 이태교, 정하경

2000 이성근 윤석효,홍윤기, 권오,홍용식, 이우범,김용석, 김평광,김숙자,차운옥, 김길평, 이태교,정하경,강병식,정병용,황진수

2001 이성근 김용석, 최명규,조열,김길평, 고정자, 윤석효, 정성택, 정하경,이두성, 이우범, 윤재건, 연정열, 김원중, 황진수,정종해, 강병식, 최병수,김경배, 정병용,박병식

2002 이성근 김용석, 최명규,조열, 김길평,고정자, 윤석효, 정성택, 정하경,이두성, 이우범,윤재건, 김원중,황진수, 정종해,강병식, 최병수,김경배,한정수, 안정근

나) 교원인사위원회

실치년도 위원장 위원 비고

1983 이용남 하인두, 최명규, 김경자, 지배선

1984 윤석효 한진만, 정하경, 김경자, 김경배

1985 최명규 김경배, 정하경, 김경자, 이용남

1991 이종수 최송길, 이용남, 강석중, 최해주

1992 이종수 최송길, 이용남, 강석중, 최해주

1993 이종수 정종해, 김평광. 윤경로, 김경배

1994 최송길 정종해, 김평광, 윤경로, 김경배

1995 최송길 정종해, 김평광, 윤경로, 김경배

1996 최송길 정종해, 김평광, 윤경로, 김경배

1997 최송길 정종해, 박헌영, 정후수, 정병용

1998 윤경로 박명환, 고정자, 조열, 홍용식

1999 윤석효 홍윤기, 이정숙, 정승환, 정종해

2000 윤석효 홍윤기, 정승환, 정종해, 조인숙 (서은경)

2001 김용석 최명규, 윤석효, 정성택, 정하경, 이두성, 고창수, 박인숙, 김대홍

2002 김용석 최명규, 윤석효, 정성택, 정하경, 이두성, 고창수, 임재영, 한정수

다) 기획위원회

실치연도 원장 위원 비고

1983 손영인 김계욱, 이용남,최명규,최송길,이석주

1984 손영인 김창용, 지배선,김평광,이종수,황진수, 허창제,입원중,정진식, 김정수,최해주,한진만, 김정배

1985 김용저 윤석효, 한진만,김길평, 김용석, 강석중, 최해주, 황진수,이동섭

1993 이송수(최송길) 김경자, 정종해, 강석중,김대홍,홍윤기,강신일,유병호,이창원, 박준영

1994

1995

1996 최송길 김종섭,정종해,이태교, 홍윤기,권오, 홍용식

1997 최송길 김종섭,정종해, 이태교,김대홍, 유빙호,홍윤기, 강신일, 이창원

1998 최명규 윤경로,박명환, 이상한,이성우, 김지현, 박단,이재득, 김진환

1999 홍윤기 윤석효,권오,홍용식,이성우,김지헌,박단, 이재득,김진환

2000 홍윤기 최명규, 윤석효, 권오,홍용식,김대홍, 박단, 이영훈, 이상원

2001 최명규 김용석, 조일, 김길평, 고정자,윤제가, 박단,이영훈, 주창임, 김지현, 김백유

라) 예·결산 자문위원회(재무위원회)

설치연도 위원장 위원 비고

1981 김범주 연정열,신은숙, 정하경, 박명희, 김중열, 최명규, 김영희(여중교장), 임양수(여고교장), 김영기 재무 위원회

1983 김계욱 이용남, 최명규,최송길,이석주

1984 김길평 최명규, 윤석효, 한진만, 김용정

1991 이종수 김정자, 강석중, 김재욱,정진식, 박헌영, 맹형호,징대흥, 이정봉, 이응권

1993 이종수 김경자, 정종해, 김평광, 이석주, 박헌영, 최동운, 이정봉, 정대홍, 이성민

1994 최송길 김경자, 정종해, 김평광, 정후수, 권오, 최동운, 이정봉, 소순무, 정대홍, 전장배

1996 최송길 신종섭, 정종해, 홍윤기, 정후수, 권오, 최동운, 김태식, 진장배,소순무, 정대홍

1997 최송길 최송길,정송해, 김대홍, 정부수, 권오, 최동운, 이 정봉, 조승호, 소순무, 정대홍

199S 최명규 윤경로, 이상한, 박호영,권오, 정후수, 전장배, 맹형호, 김태식, 정대홍, 공대원

1999 홍윤기 윤석효, 권오, 홍용식, 박헌영, 최용식, 전장배, 유재국, 조승호, 정영만, 조현호

2000 홍윤기 윤석효, 권오, 홍용식, 박헌영, 최용식, 윤경로, 원형규

2001 최병규 김용석, 조열, 김길평, 최용식, 윤재건,전장배,맹형호, 정영만, 유제한, 유부상

마) 징계위원회

설치연도 위원장 위원 비고

1983 이용남 하인두, 이용남,김재욱,이동섭, 조점환 교원

1984 윤석효 한진만,김길평,김용정,

윤석효 한진만,김용정,강국진 일반직원

1985 최명규 김경배,김길평, 정연길,김경자 교원

바) 입학공정 관리 대책위원회

설치연도 위원장 위원 비고

1982 정연길 김계욱,이승록,손영일,정하경,지배선, 최명규,정연선,고정자

1983 이용남 최명규,이승록,손영일,정연길, 정하정, 김경자, 조효진,이우범,김용정

1993 이종수 김경자,정종해, 이동섭, 조효진,이정숙,김대홍, 김종섭,홍용식, 정주백

1994 이종수(최송길) 김경자, 정종해, 이동섭,이정숙,김대홍, 김종섭,홍용식,정주택

1995 최송길 정종해, 김종섭, 조효진, 이정숙,김대홍, 임재영,홍용식,정주택

1996 김원중 김덕자,죄해수, 김수자,최병수, 김대홍,김명수

1997 고창수, 이병은,황혜성,최용식,김상조,이우관,이창원,서은경,김경인, 홍성애, 박인숙,이인현,박진배,이재문,황기태, 김인철, 이재득,윤재건

1998 김용석 김동환,황혜성,최용식,김상조, 이창원,김성복,박영애,강관식, 김지현. 엄종석,이민석,김인칠,윤재건

1999 황진수 최용식,이창원,임종석, 김동환, 박영애,황혜성, 윤재긴,김상조

2000 김원중 김동환, 장호윤,이창원,정헌이, 홍성애,김일민,지준, 박두용

2001 이우범 김일민, 박두용, 강희중, 홍성훈,박단, 권해수,강관식,최용식, 신경숙

사) 장학위원회

설치연도 위원장 위원 비고

1991 원형갑 최송길,이종수,김경자,이동섭, 각 학과장, 장학과장

1992 정종해,이종수, 김경자,이동섭,각 학과장,장학과장

1993

1994

1995 이용남 정종해,최송길, 김경자,이종수, 각 학과장,장학과장

1996 정종해,최송길, 김경자, (김종섭),이종수, 각 학과장, 장학과장 김종섭 (96.11~)

1997

1998 윤경로 박명환,윤경로,이상한, 유병호,이정숙, 각 학장,각 학과(부)장

1999 이성근 권오, 윤석효, 홍용식,흥윤기,이우범,각 학장,각 학과(부)장

2000 이성근 권오,윤석효, 홍용식,흥윤기, 이우빔,각 학장,각 학과(부)

2001 이성근 조열,김용석, 최명규, 김길평,고정자, 각 학장, 각 학과(부)장

아) 대학원위원회

연도 위원장 위원 비고

1991 원형갑 원형갑,이종수, 이정숙,지배선,김평광, 이동섭, 김창룡

1992 최명규 이종수,김경자,최송길,강석중,권오,정성택,조점환

1993 최명규 이종수,홍봉춘,권오,정종해,홍용식, 이석주,황진수, 정주택, 김경자, 조점환,이정숙,최명규,김경배

1994 강석중 최송신,김경자,이정숙, 윤정로,홍용식,최옥근, 이창원, 임재영, 홍윤기, 권혁재

1995 강석중 최송길, 정종해,김종섭,김경자,이정숙,윤경로, 홍용식,최옥근,이창원, 임재영, 홍윤기, 권혁재

1996 이태교 최송길, 정종해, 김종섭,박호영, 윤석효,홍용식,권오, 이성우, 임재영, 위남숙,권혁재

1997 이태교 최송길,정종해,김종섭, 박호영, 윤이효. 홍용식. 권오, 이성우, 임재영, 위남숙, 권혁재

1998 이석주 윤경로,박명환,이상한, 유빙호,정후수, 정승환, 황진수, 김지현

1999 이성근 김길평,이태교,정하정,강빙식,정병용,차운옥, 윤석효,권오,홍윤기,홍용식,이성우

2000 이성근 김긴평, 이태교, 정하경, 강병식,정병용, 차운옥, 윤석효, 권오,홍윤기, 홍용식,이성우

2001 언성일 김원중,황진수, 정종해, 강병식, 정병용,최병수, 박병식, 김경배, 조열, 최명규, 이성우

자) 학생지도위원회

연도 위원장 위원 비고

1991 최송길, 이종수, 김경자, 이동섭, 각 학과장

1992 정종해, 이종수, 김경자, 이동섭, 각 학과장

1993

1994 정종해, 최송길, 김경자, 이종수, 각 학과장

1995 이용남 정종해, 최송길,김종섭, 이종수, 각 학과장, 장학과장

1996 정종해,최송길, 김경자(김종섭), 이종수, 각 학과장, 장학과장

1997 정종해,최송린,김종섭, 이종수, 각 학과장, 장학과장

1998 윤성보 박명환, 윤경로, 이상한, 유병호, 이정숙, 각 학장, 각 학과장

1999 이성나 권오, 윤석효, 홍용식, 홍윤기, 이우범, 각 학장, 각 학과장

2000

2001 조열, 김용석, 최명규,김길평, 고정자,각 학장, 각 학과장

차) 도서관운영위윈회

연도 위원장 위원 비고

1980 이근수 신은숙,김중열,최명규,이석주,김범주,지배선,고정자

1983 이용남 최명규,이승록,손영일,연정일, 하인두,이동섭,박양구

1984 정연길 정하경,히광일,홍봉춘,윤석효,한진만, 김길평, 김용정,최송길,이종수,김숙자, 김평광,이정숙,최해주,이우범,이동섭, 김원중, 황진수, 강병식, 강석중

1985

1992 이동섭 김경자,이종수, 정종해,김명수

1994 이종수 최송길,김정자, 정종해,조점환,이용남,김대홍, 임재영, 김명수, 김태식

1995 이종수 조점환, 최송길,김종섭,정종해,이석주. 이우빔, 김대홍,임재영,김명수,김태식

1996 이종수 조점환, 최송길, 김종섭. 정종해,이석주,이우범, 김대홍, 임재영, 김명수,노성수

1997 이종수 조점환, 최송길, 김종섭,정종해,이석주,이우범,김대홍,임재영,김명수,노성수

1998 이정숙 (이우범) 김용석,권혁제, 이우범,최해주,김지현,정병용, 이민석, 윤경로,박명환, 이상한,최명규, 이석주,강은석, 김길평,조열,엄종석,

(윤석효,권오, 홍용식, 흥윤기, 김명수, 이성민,조승호,소순무)

1999 이우범 윤석효,권오,홍용식,홍윤기, 김용석,권혁제,조열,최해주,김길평, 정병용,임승석, 강은석, 최송길,이성민, 소순무

2000 이우범 (고정자) 윤석효,권오,홍용식,흥윤기,최송길,김길평, 조열,최해주,임종석,강은석 (김용석,정병용, 원형규, 김계욱, 최명규. 정진식,이종수,임재영,차운옥,문범,이성민,소순무,임동혁)

2001 고정자 김용석, 조열,최명규,김길평,김계욱,이종수,임재영,‘정진식,차운옥, 원형규 최송길,문범, 이성민, 임동혁2002 고정자 김용석, 조열, 최명규, 김길평,김계욱,이종수, 임재영,정진식,차운옥,원형규, 최송길,문범,이성민, 임동혁

카) 전산운영위원회

연도 위원장 위원 비고

1992 김대홍 김경자,이송수, 정종해,윤경로, 이상한, 최병수

1993 김대홍 최송길,정종해, 김경자, 윤경로,이상한,최병수1994 김대홍 최송길,정종해,김종섭,윤경로,이상한,최병수

1995

1996 흥윤기(이재문) 최송길,김종섭,권혁제,서은경,이상민,김인현,임종석, 최기홍, 이민석 이재문(98.11~)

1997

1998

1999 홍윤기 윤석효,홍용식,김인헌, 이민섭,서온경, 임종섭,최기홍, 이재문, 김지현,황기태, 이재득, 이기향

2000 윤석효,홍용식, 서온경, 임종섭,최기흥, 이재문,김지헌,황기태, 이재득,이기향

2001 윤재건 이재문,김일민, 정영모,지준,정병용,이재득,주창입,박두용

타) 직원인사위원회

연도 위원장 위원 비고

1998 이상한 윤경로,최명규, 박명환, 맹형호, 노성수, 강성진,조현호

1999 홍용식 윤석효, 홍윤기,권오,유재국,배종후, 이성민,송인성

2000 홍용식 윤석효,홍윤기, 권오,유재국,전장배,공대원,유재한

2001 김길평 김용석,조일, 최명규,공대원,맹형호,조현호, 이상우

2002 김길평 김용석,조일,최명규,공대원,맹형호, 이상우, 오순명

4) 특별위원회

가) 자체평가위원회

연도 위원장 위원 비고

1994 이용남 이정숙, 최병수, 이종수, 권오,김명수,

1995 이석주 성주백, 이상원,정병용, 강신일, 김종섭, 권오, 김대홍

1996 이석주 강신일,이상원,권오, 정병용, 김종섭,징주택

1997 이석주 박명환, 정후수, 권오,최용식, 이창원, 이제문, 재무성

1998 이석주 김동환,고창수, 정빙용,이영훈,강신일, 권오, 재무성, 최용식, 조점환, 정승환

1999 김용석 김동환, 고창수,정병용,이영훈, 홍성훈,재무성, 최용식, 조점환, 정승환

2001 최명규 김용석,조열, 김길평, 정하경, 김지현, 조난숙 2001 학문분야 자체평가기획위원

조난숙 신경숙, 홍성훈,박준철,윤재건 2001 교양교육분야 자체 평가연구위원

나) 대학장기발전위원회

연도 위원장 위원 비고

1993 강신일 이상한, 조인숙,박명환,유병호, 박진배,김용주,정영만

1994 강신일 권오,유병호,김상조, 최송길,김원중,홍용식, 최용식,민성기, 정승환,권해수, 이우관, 공대원

1996 강신일 권오,유병호,김상조, 최송길, 김원중, 홍용식,최용식,민성기, 정승환,권해수,이우관, 공대원

1997 강신일 장호윤,황기태, 권혜수,윤재건,홍성애,이영훈

1998 이성우 박단, 김지현, 진화숙,이재득, 전장배

1999 이성우 박단,김지현, 김진환, 이재득,전장배

20 이 최 명규 박단, 김지현,김백유, 김진환,주창업,이용만,이재득, 최용식, 전장배, 정영만

다) 교육개혁위원회

연도 위원장 위원 비고

1996 권오 이성우, 이민석, 안영무,제무성,정승환,민성기, 이병은, 고창수, 최병수,정병용,김상조, 권순범, 이우관,강승식, 장영우,임동혁

1997 이성우 박영범,유재건,고창수,이민석,홍정완

1998 이성우 조태병,김동환, 재무성,신민철, 권해수

1999 이성우 김지힌, 김진환, 조혜경,윤재건,정진택

라) 교과과정 심의위원회

연도 위원장 위원 비고

1994 이종수(최송길) 김경자,정종해,이동섭,강석중,조점환, 김정배,김종석

1995 최송길 정종해, 김종섭,이종수, 조점환,김경배

1996 최송길 정종해,김종섭,이종수, 조점환,김경배

1997 최송길 정종해, 김종섭, 이종수, 강은석, 김경배, 각 학과장

1998 윤경로 박명환,이상헌, 최명규, 이정숙, 강은석,김경배,각 학과장

1999 윤석효 흥윤기, 권오, 홍용식, 김용석, 김평광, 김숙자, 차운옥

2000 윤석효 홍윤기,권오, 홍용식, 김용석, 김평광,김숙자, 차운옥

20이 김용석 최명규, 조열,김길평, 윤석효, 정성택, 정하경, 이두성, 신경숙, 강신일, 안영무, 박영환,조난숙, 김경태

마) 학생정원조정위원회

연도 위원장 위원 비고

1997 대학 흥용석 정영모,김상조,최기흥

대학원 정승환 이성우, 박단, 정성훈

1998 이성우 박단

1999 이성우 박단,김진환,주창입,김지현,공대원,정철환

2000 김대홍 대학 박단,이영훈,이상원

대학원 이성우, 최명규,방갑산

바) 교원업적평가위원회

연도 위원장 위원 비고

2001 김용석 최명규,윤석효,정성택,정하경,이두성,김창룡, 정주택,안영무,정영모

사) 국제교류추진위원회

구분 위원장 위원 비고

미국서부 홍윤기 문귀선,황혜성,민성기, 지준, 최기홍, 한해린

미국동부 이병은, 이영훈, 이성우, 서은정,정현이,원형규

프랑스 박단, 신인숙, 박영환

일본 이인현, 조열

아) 강의평가연구위원회

구분 위원장 위원 비고

1995 김경배 권혁재,이창원,임종석, 홍성애,공대원,김동근

1996 김경배 권혁재,이창원. 이인헌,임종석, 홍성에, 조승호

1997 김경배 이호영, 귀헉새,이창원,이인현, 엄종석,흥성애, 조승호,이성훈

1998

1999 정진석 안영무, 임종석,정승환, 허은영,박단, 정진택,공대원

2000 유시효 신경숙, 박근철, 박영범,김길평, 김경인, 이상원,흥윤기, 강승식

2001 김용식 김동환,박근철 권해수, 정현이,방갑산, 조점환, 이재득,박영범, 이상원

2002 김용석 이용만,황혜성,강신일,홍명섭,방갑산, 김동환,권혜수,이상원, 이재득,조점환

자) 규정류심의위원회

연도 위원장 위원 비고

1999 홍윤기 김백유,정주택,유병호, 최용일,박영범

2000 홍윤기 최명규,정주택,김백유, 최용일,유병호,박영범

2001 최명규 윤석효,정주택,황진수,연정열,임동혁

2002 최명규 윤석효,정주택,권해수,박명환,진장배,임동혁

차) 대학연보 발간위원회

연도 위원장 위원 발간일

1993 박헌영 윤석효, 김주자,문 범,김경인,이정봉 ’93.11. 5

1994 이석주 박헌영,권오, 박명환,이창원 ’94.9.1

1995 권오 권해수 ’95. 1.10

1996 최병수 조인숙,안영무,강승식 ’96. 3.20

카) 대학백서발간위원회

연도 위원장 위원 발간일

1992 박헌영 김재욱,이정숙, 홍윤기,이정봉 ’92.10. 5

1993 박헌영 윤석효, 김주자,문범,김경인,이정봉 ’93.11. 5

1994 이석주 박헌영,권오,박명환,이창원 ’94 9. 1

1995 권오 권해수 ’95. 4.10

타) 대학연보·백서발간위원회

연도 위원장 위원 비고

1993 이석주 박헌영,권오,박명환,이창원

1996 민성기 조인숙,고창수,시영윤, 정영모, 이영훈

1997 정진식

파) 사이버강좌운영위원회

연도 위원장 위원 비고

2002 김용석 윤재긴,홍성훈,안병석,홍성애, 정인환, 조혜경,지준, 이재득, 강상욱

하) 중장기발전위원회

연도 위원장 위원 비고

2001 2002 최명규 김진환, 고창수,주창입, 이용만, 김지힌,김백유, 이재득, 최용식, 박단, 전장배,정영만

5) 제도개선

가) 학칙 개정 및 제정

차수 년월일 주요내용 비고

1 1972.12.21 학칙 제정

8 1981. 3. 1 종입정원제 실시에 따른 개정

18 1993. 3.11 한성대학을 한성대학교로 변징

19 1993. 4. 1 입학선형의 공정관리 추가

재적생 구제를 위한 특례조치 사항 삽입

21 1994.5.14 제3조 계열별 정원을 둘 수 있다. 정보통신연구소 추가

22 1995. 3. 21 계열별을 계열별 또는 학부별로 제3조 수정

23 190S. 12. 1 부속기관에 박물관 포함, 교원의 교수시간, 학칙개정절차 포함

학칙 조문 장, 절, 조 재편성함

24 1999.12. 1 2000학년도 학부 모집단위 변경,대학원 신설, 통합연구소의 분리 및 신설, 시간제 등록생의 조항 신설, 등록금 통합고지에 따른 기성회비 문구삭제, 교무위원회 조항수정

25 2001. 3.21 신설된 부동산대학원 및 교육대학원을 편제에 포함 ‘산업시스템공학부’를 ‘산업 및 기계시스템공학부’로 명칭변경

26 2001. 8.14 2002학년도 학생정원조정에 의한 학칙개정 (사회과학부를 정경학부와 경상학부로 나누는 등 일부학부 및 전공의 명칭변경)

나) 규정 개정 및 주요 사항

규정 개정일자 주요사항 비고

직제규정 1992. 2.25 ~사무처를 폐지하고 총무과와 경리과를 학장 직속으로 ~사무처 관리과를 기획실로 ~기획실에 시설과를 설치1995.12. 1 ~연구처 신설

~부처장은 행정직 부참여로

1998. 6. 9 연구처,기획실’을 ‘연구기획처’로 통폐합 사무처’ 신설

~연구지원과 업무 중 교원인사 부분을 교무과로 이관 야간교학과’ 신설

입시 관리과를 ‘입학과’로 명칭변경 연구진흥과’를 ‘연구지원과’로 명칭변경 ~기획과에 기획예산계와 홍보계를 둠

~관리과 및 시설과를 사무처 소속으로 이관

1999. 4 6 ~학생종합서비스센터의 직제상의 위상을 정함

2001. 3.23 야간교학과’를 ‘수업지원과’로 명칭변경

직원인사 규정 1992. 3. 1 ~수습기간단축,보수정상지급

1998. 8.27 ~기능직을 기술기능직과 일반기능직으로 구분 ~총장결정사항이었던 인사위원회의 조직에 관한 사항을 규정으로 정하도록 함 ~인사위원회의 ‘의결’사항이었던 직원의 임용을 '심의’사항으로 함

~제출서류 중 공무원인사기록카드를 직원인사기록 카드로 개정

1999. 2. 8 ~승진시기 명시 ~승급기간 및 시기 명시 ~특별승진 명시 ~승급제한 명시 ~학기제 도입(교원과 동일)

~기사자격증 소지자는 전문대학 이상의 학력자로서 기술직으로 분류

규정 개정일자 주요사항 비고

도서관 규정 1995. 4. 1 ~열람과를 정보봉사과로 ~전자정보과를 신설함

1998. 4. 7 ~진자정보과에 V.O.D. 시스템 구축 등

1998 6. 9 ~기획실장을 연구기획처장으로

1999. 2. 8 ~전자정보과 관린규정 정비

1999.12.27 ~학부생의 관외대출 열람 책수를 1회 2책 10일간에서 1회 3책 10일간으로

기획위원회 규정 1998. 6. 9 위원장을 교무처장에서 연구기획서장으로 ~당연직위원에 교무서장,사무처장, 도서관장, 진자계산소장 추가

직원복무규정 1997. 224 ~병가규정을 공무원규정에 준함

~휴가기간 중의 공휴인은 휴가일수에 산입하지 아니함

1998. 8.27 ~연가일수재산시 병가를 산입하지 아니함 ~병가와 연가를 모두 사용한 후에는 휴직 조치하도록 함

~'특별휴가’ 신설

교원임용규정 1999. 1.27 ~교원채용시,5배수로 추천된 임용후보자의 최근 논문들을 외부심사하고, 공개강좌를 한 후 3배수로 추친

북방문제연구소규정 1998.4.7 ~북방문제연구소를 동아시아연구소로 명칭 변경

전자계산소운영규정개정 1998. 4 7 ~전자계산소 내에 운영과,개발과,네트워크 운영과, 실습상담실을 두도록 규정

~제11조의 심의사항에 컴퓨터 관련장비 구입 심의 및 심사에 관한 사항을 추가

특임교수에관한 규정 1998 6. 9 ~연구처장을 연구기획처장으로

대학원 장학금 규정 1998. 6. 9 ~ 기획실장을 연구기획처장으로국내이비규정 1998. 6. 9 ~별표2의 주에서 3인 이내를 4인 이내로,주야 동일학과일 경우 2인 이내로

판공비 지급규정 1998. 6. 9 ~경미한 사안의 경우 사무처장의 전결로 시행할 수 있게 함

규정 개정일자 주요사항 비고

용도사무 취급규정 1997. 2.24 ~소모품,사무용품 둥의 구입신청은 소요부서에서 결재 후 총무과로 이관

~총무과는 이관된 문서를 검토하고 관련서류를 갖주어 물품구입 결의서를 작성

~용도사무 취급규정에 의한 계약은 총무과에서 관장

1998. 6. 9 ~계약금액이 2천만원을 초과하는 경우 계약서를 작성

1998. 8.27 ~계약의 원칙에 내용추가 ~계약서의 작성에 단서조항신설

출판부 규정 1999. 2. 8 ~간행도서 범위 명기 ~간행도서 보급 및 판매 사업 명기 ~출판부장의 임명권자(총장)과 임기(2년,연임불가)를 명기

~출판부 직원에 관한 규정 중에서 사무직원과 연구조교의 자격과 업무를 명세적으로 규정 ~운영위원회를 자문기관에서 심의기관으로 변경

~출판부 재정 충당 방법 구체화

학생생활 연구소 규정 1999. 2. 8 ~학생상담실을 학생생활연구소 소속으로 규정 ~학생상담사 삽입

규정류 관리규정 1999. 2. 8 "제 규정”을 “규정류”로 수정 기획처장”을 “연구기획처장으로 ~제4조에 단서조항 삽입

체육부 규정 1999. 2. 8 ~체육특기자 "입학심사”를 체육특기자 “특별전형”으로 문구수정

~제5조 회계조항 신설

직원인사 위원회 규정 1999. 2. 8 ~1항의 “6명”을 “7명”으로

~3항의 “연구기획처장과 총무과장”을 “교무처장과 연구기획처장,학생처장”으로,“위원장의 제청으로”를 삭제,총장이 임명하는 “과장급 이상 2명과 주임 1명”을 “2명의 직원”으로,직원 노동조합에서 추천하는 “1명”을 “2명”으로 함

학생지도 위원회 규정 1999. 4. 6 ~학생지도위원회의 구성에서 처·실·관장을 각처장·도서관장으로 하고,단과대학장을 구성에 추가함

규정 개정일자 주요사항 비고

사무분장 규정 1996. 6.14 ~급여명세표 작성에 관한 사항을 총무과에서 경리과로 이관

1998. 6. 9 ~정관개정에 따라 상충되는 부분 개정 (‘직할부서 ’를 ‘사무처’로 개정 등)

1998. 8.27 ~교무과 업무추가(연구지원과에서 이관)

1999. 2. 8 ~제4조 제5항을 삭제《사회교육원 입무로 이관)

1999. 4 6 ~학생종합서비스센터의 사무분장을 규정

교원연구실적 심사규정 1998. 6. 9 ~연구진흥과를 연구지원과로,기획실장을 연구기획처장으로

1999. 4. 6 ~연구실적 심사는 100점 만점으로 환산

졸업 자격 영어 시험 운영 세칙 1999. 4. 6 ~시험종류에 TEPS를 추가하고,350점 이상을 합격으로 봄

교원임용규정 1999. 6.22 ~승진심 사탈락사유를 명시(연구실적 미비)

특임교수에 관한 규정 1999. 8. 9 ~특임교수의 범위에서 전임교수를 제외함

교무위원회 규정 1998. 6. 9 ~임명직 위원 확대

1999. 2. 8 ~“제 규정”을 “규정류”로 수정

1999. 8. 9

체육위원회 규정 1999.12.27 ~당연직위원 중 교무처장, 인구기획처장,학생 처장올 처·관장으로 함

겸임교수에 관한 규정 2000. 4.11

대우교수 임용규정 2000. 4.11

교원인사위원회운영규정 1998. 6. 9 ~위원 중 학생처장을 삭제하고 연구기획처장을 추가함 ~간사로 교무과장을 임명함

위임전결 규정 1996. 6.14 ~경리과에 급여지급에 관한 사항 추가

1998. 6. 9 ~야간교학과 신설

1998. 8.27 ~교무과 업무추가(연구지원과에서 이관)

1999. 4 6 ~학생종합서비스센터 주요업무에 대하여 위임 전결구분표를 추가함

2000.10.12 ~자금관리에 관한 사항을 자금결제에 관한 사항으로 명칭변경

~수납에 관한 사항을 경리과에서 삭제 (학생종합서비스센터에 이관)

2001. 9.28 ~300만원 이상의 총장결재 “외부의뢰연구비 지급”과 “입학금과 수업료 환불”에 대하여 “처장 전결”로 개정

동아리 규정

2000. 7.27 ~학생처장의 공고없이 동아리로 인정

규정 개정일자 주요사항 비고

시설공간 위원회 규정 2000.10.12 ~필요시 소위원회를 둘 수 있게 함 공간조정

연구회설치근거

장학금 급여 규정 1998. 6. 9 ~기획실장을 연구기획처장으로

2000.10.12 ~문화예술장학금을 학술문화예술장학금으로 명칭변경교원 해외 파견 및 연구년제에 관한 규정 1998. 4. 7 ~해외연수를 해외파견으로 용어변경 ~해외파견의 용어정의

~해외파견 및 연구년 신청시 구비서류 중 휴직원 폐지 ~제13조(타 기관의 파견지원과의 관계) 신설

1998. 6. 9 ~동일인에게 연구년과 해외파견을 연속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소지를 억제함

~해외파견의 허가요건을 강화하여 재정지원을 확보한 자에게 해외파견을 허가함

2000.10.12 ~복귀 후 파견 및 연구년기간의 2베 이상의 기간 의무 근무(종전 ~ 3배 이상)

대학입학 전형관리위원 회 규정 2001. 3. 1 ~위원에 진자계산소장 포함 ~위원의 임기를 보직재임기간으로 함

교원 연구비 규정 2001. 3. 1 ~교직원연구비규정을 교원연구비규정 및 직원연구비 규정으로 분리 교원연구비 규정 및 직원연구비 규정 신설

조교에 관한 규정 1999. 8. 6 ~행정조교 신설

2001. 7.27 ~조교를 행정, 교육,연구조교로 구분 등

교직원 보수 규정 1998. 6. 9 ~‘해외연수’를 ‘해외파견’으로 용어변경2001. 7.27 ~매년 1월 1일, 4월 1일, 7월 1일,10월 1일자로 승급

교원 복무 규정 1997. 2.24 ~책임시수 죽소

~병가규정을 공무원규정에 준함

1998. 6. 9 ~연구진흥과를 연구지원과로

1998. 8.27 ~연가일수계산시 병가를 산입하지 아니함

2001. 7.27 ~일반외국여행 허가신청서를 교무과로 제출 등

보직교수 임용에 관한 규정 1998. 6. 9 ~처, 실장을 처, 원,관장으로

2001. 8.14 ~처장,단과대학장,대학원장, 도서관장,사회교육원장, 전자계산소장 이외 기타보직은 총장이 임명하도록 함.

국내 여비 규정 2001. 9.28 ~국내여비 정액표 2호에 학장을 포함함

연구비 관리 규정 1998. 6. 9 ~연구처를 연구기획처로

1999. 4. 6 ~연구간접경비는 수혜금액의 6%를 관리기관이 징수

2001.12. 1 ~연구간접경비는 수혜금액의 10%를 대학이 징수하고, 연구장려금의 지급은 징수한 금액의 50%를 과제종료 후 지급하도록 함

6) 책자발간

발행일자 책자명

1984.10. 대학요람, 영문요람, 규정집

1991. 3. 4 한성대 소식지 창간호

1992. 2.20 대학요람

1992. 4 한성대학교 발진과제연구 종합보고서 제1집

1992.10. 5 대학백서, 한성대학교 이십년사

1993. 3. 1 낙산의 삼학송

1993. 5. 한성대학교 발전과제연구 종합보고서 제2집

1993.11. 1 대학연보, 대학백서

1994. A. 1 한성대학교 발전과제연구 종합보고서 제3집

1994 7. 강의평가제 실시를 통한 강의수준의 제고

1994 9. 대학연보,대학백서

1995. 2.20 대학요람

1995. 4. 대학연보,대학백서

한성대학교 발전과제연구 종합보고서 제4집

1995. 6. 3 1995학년도 경영·무역학과 자체평가연구보고서

1995.10. 5 한성학원 50년사

1995.10. 대학강의 평가연구

1996. 3. 대학강의 평가연구

1996. 8 교육개혁 추진실적 및 계획

1996. 9 대학강의 평가연구

1996.12.30 북방연구

1997. 1 국가발전을 위한 대학활성화 방안

1997. 2.26 교양컴퓨터.

사고와 표현

1997. 5. 대학연보,대학백서

대학강의 평가연구

1997. 6. 1 한성대학교 발전과제연구 종합보고서 제6집

1997.11. 대학강의 평가연구

1997.12.24 대학요람

1998. 4 한성대학교 발전과제연구 종합보고서 제7집

1998. 6. 대학장기 발전 계획 연구보고서

1998.11. 대학연보, 대학백서

1998.12. 99년도 대학종합평가인정을 위한 한성대학교 자체평가연구보고서 자료집

발행일자 책자명

1999. 2.24 대학요람

1999. 4. 교육개혁추진 우수대학 재정지원 신청 계획서

1999. 6. 1998년도 직원 대학발전과제/업무개선과제 우수과제모음집

1999. 7.27 연구지원편람

1999. 9.15 한성대학교 자체평가 연구보고서,대학원요람

1999. 9. 한성비진 21C

1999.11. 한성대학교 도서관 및 연구동 계획설계연구

2000. 2.10 학생생활연구 제7집

2000. 4.29 대학요람

2000.12 2001년도 신입생 실태조사 연구보고서

2001. 8 대학원요람

2001. 9. 3 규정집

2001. 9.28 2001년도 교양교육분야 자체평가 연구보고서 2001년도 디자인분야 자체평가 연구보고서

2002. 2. 통계연보(1998 ~20아)

2002. 3.30 한성비전 21C (한성 대학교 중장기 발전계획 2)

2002. 5. 6 대학백서 1972-2001

2002. 5.18 한성대학교 요람(2002)

9. 시설

(1) 설치 현황

• 1945년 9월 현재 위치에 있는 경성여자기예학교를 인수(대지: 2,290평,건평: 378평)하여 그 해 10월 5일 한성고등여학교를 개교한다.

• 1958년 12월 교세확장에 힘써 돌산인 낙산에 터를 넓혀 15,000여평의 대지위에 750여평의 한성여고 본관(현 진리관))과 200여평의 강당(현 무용과 실기실)을 준공한다. 진리관은 1964년 4층으로 250여평 증축하고 1987년 대학이 이 전하면서 북쪽으로 500여평 증축한다.

• 1959년 8월 850여평의 과학관(현 지선관))을 착공하여 1961년 10월 5일 준공한다. 이 건물은 국내 처음으로 물리실,화학실,가사실, 재봉실, 미술실,음악실,도서실 등을 갖춘 종합과학관으로의 면모를 갖추었다.

• 1963년 12월 여자고등학교 최초로 400여평의 체육관을 준공하고 19기년 7월 현 과학관 자리에 국제규격의 수영장을 준공한다.

• 1967년 10월에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팔당리에 있는 2,200여평의 ‘의화장’을 구입하여 교직원 휴양 및 학생생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한다.

• 19기년 2월 2,500여평의 대학본관(현 여고건물)을 준공한다.

• 1981년 12월 29일 1,800여평에 지하2층 지상 5층 규모의 종합관을 준공하여 1, 2층은 교수연구실로 3,4층은 강의실,5층은 강당으로 지하 1,2층은 학생복지시설로 사용한다.

• 1983년 10월 5일 개교기념 12주년 기념일에 학생복지시설 및 도서관을 수용하기 위한 학생복지관(현 학생회된-) 착공식을 갖고 동년 12월 5일 기공식을 가진다. 이 건물은 당초 지하1층에 지상5층으로 설계하였으나 공사

도중 예산 부족으로 연면적 1,400여평에 4층으로 변경하여 1984년 9월 5일 준공한다. 이 건물은 1993년 과학관과 함께 증축한다.

• 1986년 ‘한성대학 발전계획안’에 의하여 추진된 “교사이전 5개년 계획”으로 여중·고와 대학간의 대대적인 교사이전 작업이 실시된다. 부족한 대학시설을 해소하기 위해서 중·고등학교의 교사 및 교지와 맞바꿀 수밖에 없다는 법인의 결정으로 당시 대학본관으로 한성여고가, 종합관에 한성여중이 입수하고 대학은 여중·고 모든 건죽물과 운동장,수영장, 체육관을 사용함으로써 대학으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된다.

• 1986년 8월 12일 교사이전 5개 년 계 획 보다 2년이 나 앞당겨 구 한성여중 건물을 칠거하고 그 자리에 연면적 3,000여평에 지상6층 규모의 우촌관 기공식을 갖고 1987년 8월 25일 준공하므로 교사이전의 대역사를 완수 하고 대학 본관으로 중추적인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당시 건설본부장은 경영학과 김길평교수로 이후 과학관 및 강의동을 거쳐 현재 진행중인 교수회관,학생회관별핀-, 도서관 신축의 건설본부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편, 종합대학으로의 승격과 대학의 장기 발전 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되어 왔던 과학관이 1990년 2월 27일에 준공되고 정보화 사회에 대비하기 위하여 전자계산소를 개소한다. 이로써 학교 행정 전산

화 및 교수연구 지원,학생들의 전산교육에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 1991년 11월 29일 상징탑이 건립된다. 교문을 겸해서 세워진 상징탑은 우리대학의 상징물인 거북이를 형상화 한 것으로 우리대학의 명물로 자리를 굳히게 된다.

• 1994년 8월 부족한 교육시설을 확보하기 위하여 기존 학생회관 4층을 6층으로, 과학관 5층을 6층으로 증축하고 1995년 5월 학생회관 5층을 전자정보관으로 개관한다.

• 1996년 8월 마스터플랜에 의하여 체육관 자리에 한성종합관을 추진키로 하고 160여대의 주차 시설을 우선 확보하기 위하여 한성여고 운동장 지하에 1,700여평 규모의 한성 주차장 기공식을 갖고 1997년 5월 17일 준공식을 가진다. 이후 한성종합관 신축은 학내 문제로 무산된다.

• 1997년 2월 28일 독립 학군단 설치를 위한 학군단동이 준공되고 이에 앞서 1996년 1월에 100여평 규모의 후생관을 준공하여 구내은행, 컴퓨터점, 안경점,사진관 등이 입주한다.

• 1998년 5월 17일 강의동 기공식을 갖고 수요자 행정 서비스를 위하여 학생회관에 학생 종합서비스센터를 개관한다.

• 1999년 3월 6일 1,500여평의 강의동 준공식을 갖고 대학원을 이전하는 등 교사 재배치를 하고 ‘캠퍼스종합기본계획’을 수립한다.

• 2001년 9월 13일 도심형 예술대학을 구현하기 위하여 대학로 명륜동에 있는 2,000여평의 동원빌딩을 매입하여 대학로캠퍼스로 명하고, 9월 22일 2,000여평의 교수회관, 4,200여평 의 도서관, 550여평의 학생회관 별관 기공식을 가진다.

(2) 시설설치연혁

1945. 9.25 경성여자기예학교 인수(대지: 2,290평,건평: 378평)

1963.12. 7 실내체육관 준공

1971. 7.20 낙산수영장 준공

1981.12.29 종합관 준공(지하2층, 지싱5층,연건평 1,772평)현재 중학교 교사

1984 9. 5 학생복지회관 준공(현재 학생회관)

1987. 8.25 우촌관 준공

1990. 2.27 과학관 준공(총면적: 1,626평,건축면적: 366평)

1990. 9,25 노천극장 준공

1990. 9.25 지선교 건립(길이: 9m,폭 2m)

1991.11. 상징탑 건립

1994. 9. 낙산 남문 준공

1994. 5 학생회관 및 과학관 증축

1995. 5 전자정보관 개관

1997. 2.28 학군단 건물 준공

1997 후생관 신축(지하1층,지상 3층)

1997. 5.17 한성주차장 준공

1999. 3. 6 강의동 준공

2001. 9.13 대학로캠퍼스 매입

2001. 9.22 교수회관,도서관,학생회관 별관 기공식

3) 지적

(단위: m2)

구분 시설명(용도별) 기준 보유 학교소유 차용 계

교지 대지 127,968 36,450 - 36,450

체육장 - 12,500 - 12,500

소계 127,968 48,950 - 48,950

동인구내학과 유치원 - - -

초등학교 - - -

중학교 10,542 7,105 - 7,105

고등학교 14,366 7,540 - 7,540

신문대학 - - - -

대학교 - ~ - -

소계 24,908 14,645 - 14,645

총개 152,876 63,595 - 63,595

4) 건물

건물명 층수 건축면적 연면적 교육 기본시설 지원시설 학생회관 대학본부 부설 연구소 박물관 도서관 기타

우촌관(본관) 8 층 2,400 10,390 7,852 1,065 1,252 33 188 1987

진리관 4층 735 3,364 2,889 400 75 1962

지선관 5층 719 3,016 2,722 294 1962

학생회관 7층 907 5,965 602 1,856 197 3,310 1984

과학관 7층 1,148 6,980 6,478 226 276 1990

강의동 7층 761 4,750 4,750 2000

체육관 1층 934 1245 1245 1965

강당1층 622 622 622 1962

후생관 4층 96 326 326 1996

창고 1 층 87 87 1992

학군단동 2층 341 681 681 1997

제2후생관 3층 85 275 275 1995

학생회관별관A 3 층 47 150 150 1991

학생회관별관B 3 층 37 116 116 1991

학생회관별관C 3 층 41 125 125 1991

건물명 층수 건죽면적 연면적 교육 기본시설 지원시설 학생회관 전자계산소 연구용 실험실 체육관 강당 학군단 준공년도

학생회관별관D 3층 30 89 89 1991

학생회관별관E 3층 29 88 88 1991

학생회관별관G 3층 49 158 158 1991

학생회관별관1 3층 58 173 173 1991

학생회관별관2 3층 43 127 127 1990

학생회관별관3 2층 78 168 168 1978

학생회관별관4 1층 36 36 36 1970

학생회관별관5 1층 23 23 23 1966

학생회관별관6 1층 46 46 46 1985

학생회관별관7 1층 53 53 53 1969

학생회관별관8 1층 42 42 42 1985

건물명 규모 연면적 교육기본기설(단위: m2) 강의실 실험실습실 교수연구실 행정실 공유면적 교육지원시설(단위: m2) 도서관 학생회관 대학본부 체육관 강당 전자계산소 기타

우촌관 지상7층 지하1층

진리관 지상3층

지선관 지상4층

학생회관 지상6층 지하1층

과학관 지상6층 지하1층

강의동 지상5층 지하2층

체육관 지상1층

강당 지상1층

강당

기타

5) 교사확보

구분 기준면적(m2) 현보유면적(m2) 3개 건물 완공후(교수회관, 학생회관, 도서관) 종합관 완공후

연면적 63,984 39,096 61,904 73,474

편집후기

한성대학교는 2002년 10월 5일 개교 3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장구한 시간이 흘러 30주년에 이른 이 시점에서, 한성대학교 발전의 한 과정을 정리해 둘 필요성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본서를 엮게 된 동기도 기본적으로는 본교의 역사를 정리해야 할 책무와 당위성이 본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이다.

학교사(學校史)를 편찬하는 일은 일회성 행사의 성격에 그쳐서는 안 된다. 한성대학교의 변천과정과 변화의 근원을 알아야,현재에 임해야 할 바가 무엇이며,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보다 정확하고 충실한 학교사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본서의 편찬에 참여한 집필진은 다섯 차례의 편집회의를 거치면서,집필의 체제와 구성,집필원칙 등을 심사숙고하여 결정하였다. 드러나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깔끔하게 보완하고, 윤문에도 심혈을 기울여 주어진 시간 내에 죄선을 다하고자 하였다.

본서의 체제는 다섯 편으로 구성되었다. 제1편은 한성대학교의 설립배경과 교육이넘,제2편은 형성기,제3편은 성장이기,제4편은 발전기, 제5편은 21세기

한성대학교의 모색기로 각 편의 제목을 정하여, 시대의 흐름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시대구분에 따라 제1편에서 제3편까지는 정후수 교수, 제4편은 조인숙· 신경숙· 박준철 교수,제5편은 윤석효 교수가 집필을 담당하였다. 그중에서 역점을 두고자 했던 부분은『한성대학교 20년사』이후,최근 10년 동안에 일어났던 사실들을 기술한 제4편이다. 특히 이 시기는 본교가 종합대학교로 승격함과 동시에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시기로 평가될 수 있다. 학과의 증과와 증원, 신규교수 채용, 교사확장 등 대내적인 괄목할 만한 성장과 함께,대외적으로는 학교의 이미지 개선 및 홍보활동 등에 주력하여 과거보다 많은 진전이 있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3명의 역대 총장의 재직기간을 기준으로 구분하여 집필을 분담 하였다. 가장 최근의 일이라 많은 교수 및 교직원들이 직접 경험하였거나 기억하고 있는 사실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되어,오히려 기술하는데 매우 신중하고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리하여 집필자의 판단에 따라 누락되는 부분이 있기도 하려니와, 시각의 차이에 따른 오해의 소지도 없지 않을 것이므로 사실에 입각한 서술원칙을 준행하도록 하였다.

본서의 작성에는 「한성대학교 20년사」와 「한성학원 50년사」가 많이 참

조되었다. 아울러서 행정부서의 적극적인 협조로 관련 자료를 용이하게 수집하고 활용할 수 있었다. 후일의 한성대학교사를 엮을 때 참고자료로 유용하게 이용되기를 기대해 본다.

본서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시간의 절대적인 부족이라는 사실이다. 이 점은 앞으로 반드시 시정되어,40년사를 편찬할 때에는 충분한 준비 기간을 갖고 많은 자료제공과 협조 속에서 이루어 져야 할 것이다. 그때 본서의 미진한 부분도 보완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그 동안 본서가 출판되기까지 협조하여 주신 4명의 집필위원인 정후수,조인숙,신경숙,박순철 교수님과 자료제공에 협조해 순 이성민 정보자료과장, 전장배 기획과장,우승식 담당직원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 외에도 여러 모로 도움을 주신 분돌이 많이 있는데, 지면을 빌이 깊은 사의를 표한다.

2002년 9월 16일

한성 대학교 30년사 편찬위원회 위원장 윤석효

윤석효

편찬위원

위원장 윤석효

위원 정후수, 조인숙, 신경숙, 박준철 전장배, 이성민, 우승식

한성대학교 30년사

2002년 9월 18일 인쇄

2002년 10월 2일 발행

발행인 이성근

편찬인 한성대학교 30년사 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