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에 간 심리학

박소진 지음

믹스커피

지은이의 말

당신에게도 인생 영화가 있나요?

누군가가 내게 특별한 영화를 묻는다면 나는 언제나 서슴없이 영

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꼽는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나는 이영화가 왜 나에게 특별한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저 좋은 작품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

이 영화를 처음 접했던 순간부터 수십 번 영화를 보고 또 보았지만 이해되지 않았던 부분과 장면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으로 수십 번 재생해보았을지도 모르는 그 장면들이 있었다. 그

* 〈하울의 움직이는 성> Howl’s Moving Castle, 2004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 출연: 바이쇼 치에코(소피 목소리), 기무라 타쿠야(하울 목소리)

어느 날 소피는 마녀의 저주를 받고 할머니가 되어버린다.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물던 곳을 떠나게 되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들어가게 된다. 청소부가 되어 미소년 하울과 동고동락하면서 다시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게 되고 하울과 점점 가까워지는데….

l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 스틸

러던 어느 날, 그 답이 나를 찾아왔다.

내 기억에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영화 속 한 장면이 있다. 소피가 시공간을 초월해 이동 가능한 ‘하울의 성’에 입성한 후, 타이머를 돌리고 문을 열면 사람들이 왁자지껄한 시장통부터 아름다운 정원, 황량한 벌판까지 신기하게도 다양한 장소들이 펼쳐진다. 소피가 여느 때와 같이 타이머를 돌리고 문을 열자 화창한 봄날의 초원이 있다. 모처럼 신이 난 소피와 마루쿠루와 허수아비, 그리고 정체 모를 강아지가 신이 나서 뛰어나간다.

햇살 좋은 한낮, 빨래를 널어놓고 맛있는 점심을 먹는 장면은 보기만 해도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다. 잠시 후 마루쿠루와 소피가 의자에 앉아 초원과 초원의 끝닿은 곳에 조용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던 장면. 그리고 더 시간이 흐르면 소피 혼자 망연히 앉아 있는 뒷모습.

누군가에게는 그냥 스쳐 지나갈 만한 이 장면이 왜 나에게는 오

랜 시간 각인되어 있었던 것일까? 소피의 뒷모습에서 나의 20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깨닫는다.

이 영화의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내리는 눈물의 의미를, 영화를 처음 접하고 10여 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20대 초반, 나는 가슴이 답답하고 벅차오를 때마다 공터에 앉아 있곤 했다. 푸른 잔디가 펼쳐진 공터에 앉아 온종일 그 잔디를,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파편화된 나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끼워 맞추다 보면, 시간이 흐르는지도 모르게 하루가 저물곤 했다. 해가 기울고 노을이 지기 시작할 때까지 있다 보면 하염없이 누군가가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위로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

덕에 외로움과 고독감 그리고 막막한 두려움을 오롯이 견딜 수 있었다. 한동안 바쁘게 살며 잊고 있었던 기억이 이 영화를 보며 떠올랐던 모양이다.

이 영화의 설정은 황당하다. 그렇지만 영화를 보면서 황당함이 오래 가지는 않는다. 그 의미를 왠지 알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도 스무 살 무렵에 빨리 늙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 내 삶의 지도가 전혀 없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열패감과 무기력감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었다.

어떤 이들은 20대 초반까지를 청소년기 후기로 보는데, 이 시

기에는 자아정체성을 형성하고 앞으로 일어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것들을 준비해야만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충분한 경험도 없는 시기에 진로와 결혼 등 삶의 중대한 사안을 결정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 때문인지 소피는 자신이 할머니가 된 사실에 충격을 받지만 이를 곧 수용한다. 어쩌면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영화 속에서 소피는 아름다운 여인임에도 스스로 아름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흔히 20대는 그 자체만으로 아름답다고 하지만, 정작 20대에는 그 시절이 아름답게만 느껴지지 않는다.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경험도 부족하고 갖추어진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또 그에 비해 이상은 높기 때문에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기 쉽다. 그래서 20대는 아름다운 만큼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운 시기이기도 하다.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 영화 〈은교〉 중 적요의 대사

20대 초반 한 수필집에서 읽었던 희랍신화에 등장하는 무녀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름이 꽤 알려진 한 무녀가 신들의 만찬에 초대되고 제우스 앞에 서게 된다. 제우스는 무녀에게 “네 소원

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 그녀는 영원한 삶을 이야기했고, 제우스는 그에 화답해 그녀의 손안에 든 먼지만큼의 시간을 선사한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는 무궁한 시간을 의미했다.

그녀는 소원대로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생명을 얻었고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잊은 한가지가 있다. 그 치명적인 실수로 그녀는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영원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녀가 놓친 것은 바로 ‘젊음’이었다. 젊음 없는 영원의 삶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나 젊은 무녀는 당시에는 그 젊음의 위대함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처럼 젊음은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 시절은 한 번 흘러가면 다시 오지 않기 때문에 소중하다. 그래서 순간순간 깨어 있으

면서 우리는 현재의 삶을 즐기는 방법을 알아가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나이를 먹은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소피는 이와 반대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차근히 알아가면서 점점 원래 자신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나이가 들고 성숙하면서 나다워지고 자신의 본질에 가까워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영화는 자신의 인생을 닮아 있기도 하고, 어떤 영화는 삶의 지표가 되기도 하고, 어떤 영화는 한 사람의 인생에 강한 영향을 주기도 한다. 영화가 주는 가장 큰 미덕이고 내가 영화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 속 심리학』을 출간한 지 벌써 수년이 훌쩍 지났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를 TV에서 우연히 보다가 영감을 얻어 쓰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영화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는 것도 무척이나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화는 누구에게나 친근한 매체이고,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지금까지 이 두 분야를 적절히 조합하는 과정에 대해서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터라 가능한 것이었다. 어렸을적 꿈이 글쟁이였던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다시 ‘영화 속 심리학’을 쓰려고 한다. 이번에는 병리보다는 좀 더 일반적인 심리에 대해 다루려고 한다. 앞서 인간 심리를 쉽게 이해시키고자 영화를 끌어들여 흥미와 재미뿐 아니라 감동을 주고자 했던 의도와 달리, 영화 속 인물들의 정신병리(이상심리)에 집

중하다 보니 너무 심각한 병리들을 다뤄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나마 영화라는 매체가 주는 매력 덕분에 여기저기에서 강의 의뢰가 들어왔고, 관심을 가져주는 분들이 많았다는 것은 고무적이었다. 추계예술대학 영상시나리오학과에서도 강의 의뢰가 들어왔다. 내 책을 교재로 대학에서 강의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꿈으로 끝나지 않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시나리오 작가나 제작자를 꿈꾸는 학생들과의 교감은 매우 흥미로웠다. 영화전문가가 아닌 심리학자가 영화전문가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윈윈’하는 작업이 될 것이라 믿었고, 학생들의 순수한 궁금증이 오히려 어떤

식으로 영화와 심리를 연결하고 접근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방안을 강구하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 기회를 주신 김상호 교수님 겸 감독님께 감사드린다.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러서 불혹을 넘어 곧 지천명의 나이가 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극 중에 시공간을 초월하기도 하고, 시간으로 인해 나의 존재와 그 절대성에 의문을 던지게 만든다. 나이를 한둘 먹어감에

따라 삶의 순간순간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어감은 시간이 주는 교훈 덕분이다.

팔순의 노모가 병마와 싸우는 동안 나는 그 옆을 지키며 틈틈이 글을 쓴다. 인생은 어느 한순간도 헛되이 흘러가지 않고 있고, 그저 우리는 그 순간을 묵묵히 살아갈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들이다. 이 한 조각의 삶들이 이어져 소중한 결과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2020년 10월 강릉에서

박소진

목차

지은이의 말 _당신에게도 인생 영화가 있나요? … 4

글을 시작하며 _영화와 심리학이 만나다 … 16

PART 1

영화관에서 사랑을 읽다

반사회성 인격장애도 사랑을 할 수 있나요? … 23

〈7년의 밤〉

남녀는 원래 한 몸이었다? … 36

〈헤드윅〉 〈무뢰한〉

사랑의 이름으로 그대의 죄를 사하노라! … 49

〈불멸의 연인〉

결혼은 미친 짓이다! … 57

〈나를 찾아줘〉 〈부부의 세계〉

PART 2

영화관에서 가족을 읽다

가족의 이름으로… … 77

〈킬링 디어〉 〈케빈에 대하여〉

또 다른 가족의 이야기 … 97

〈기생충〉

PART 3

영화관에서 폭력을 읽다

넌 건드리면 안 되는 걸 건드렸어! … 113

〈존 윅〉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아저씨〉

폭력의 두 얼굴 … 130

〈더 퍼지〉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동조와 복종의 패러다임 … 141

〈피아니스트〉 〈밀그램 프로젝트〉

PART 4

영화관에서 범죄를 읽다

진짜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 … 159

〈악인전〉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연쇄살인, “인간인가, 괴물인가?” … 181

〈세븐〉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배트맨과 조커 … 191

〈다크 나이트〉 〈조커〉

PART 5

영화관에서 공포 · 코미디를 읽다

좀비가 되어버린 사람들 … 207

〈부산행〉

왜 좀비인가? … 216

〈킹덤〉 〈스위트홈〉

코미디, 유머와 해학 그 어디쯤… … 228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극한직업〉

글을 마치며 … 244

참고문헌 … 246

글을 시작하며

영화와 심리학이 만나다

영화의 기원은 1895년 뤼미에르의 〈뤼미에르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열차의 도착〉이라는 동영상에서부터 출발한다.

움직이는 영상을 본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움직이는 영상 자체가 주는 신기함도 있었지만, 영원히 기록되어 대대손손 남는 영상의 존재가 죽음에 대한 극복의 의미도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불과 100여 년이 지났을 뿐인데 영화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

었고, 우리의 일상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최근에는 인터넷과 결합한 넷플릭스, 왓챠 등과 같은 OTT 서비스를 통해 많은 영화와 드라마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공유되고 있다. 국경을 넘어 우리나라의 영화와 드라마에 전 세계인들이 함께 울고 웃으며 열광하고 있는 현상에 놀라울 뿐이다.

영화는 강력한 매체임과 동시에 안전한 매체다. 흔히 영화를 ‘2시간짜리 인생’이라고 한다. 2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인간

l 영화 〈열차의 도착〉의 스틸

프랑스의 해변 도시 라 시오타(La Ciotat)의 기차역에 열차가 들어오는 모습

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영화 속 인물과 스토리에 몰입하고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해 울고 웃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며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도가니〉, 〈소원〉 등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공분을 일으키며 약자, 특히 아동이나 장애인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높여 처벌을 강화하도록 요구하는 촉매제로서 역할을 했다.

또한 영화는 심리 치료적 특성을 갖는다. 영화는 놀이적인 속성이 있는데, 시간과 장소, 인과론의 법칙을 허무는 즐거움이 있다. 영화를 통해 자신이 경험한 세계와 조우할 수 있고 과거의 나를 만나기도 하고 미래의 나를 경험하기도 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타인의 삶을 훔쳐보고 싶은 욕구가 있다. 이런 욕구를 영화가 일정 부분 해소해주면서 그 안에서 자신을 투

* 김은하 외 지음, 『영화치료의 기초』, 박영스토리, 2016

영하기도 하고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기도 한다.

이렇듯 영화는 안전한 투사 도구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영상 텍스트 맥락에서 심리적으로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영화의 등장인물에게 자신의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투사한다. 이를 통해 방어기제를 완화하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신체적 느낌, 감정, 변화, 통찰 등을 알아차리면서 자신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우리나라 영화 〈기생충〉, 〈미나리〉 등은 각종 상을 휩쓸며 세계인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기생충〉의 반지하 공간은 한국에만 존재하는 특이한 가옥 구조다. 영화는 가난으로 상징되는 반

지하 집에 사는 사람들이 작당해 부자로 상징되는 높은 담벼락과 넓은 정원을 가진 집에 온 가족이 입성에 성공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사실상 그들의 범죄적 행위에도 우리는 심장이 쫄깃쫄깃하게 숨죽이며 지켜보았고, 한편으로 그들이 성공적으로 부자들의 삶에 편입되어 들어가는 모습을 즐기기까지 했다.

그러나 집주인조차 모르는 ‘지하’가 존재하고 있었고 그 지하에서 남몰래 숨어들어 사는 전 집사 문광의 남편 근세의 존재가 드러나며 그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난다. 이후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서로 죽고 죽이는 혈극이 벌어지는 반전의 상황에서 극적인 감정

* 김은하 외 지음, 『영화치료의 기초』, 박영스토리, 2016

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끔찍할 일이지만, 영화니까 괜찮다. 그렇게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칼을 든 사람은 적어도 스크린을 뚫고 나오지 않을 것이기에.

로맨틱 영화와 드라마를 좋아하는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한다.

친구: 요즘 한 드라마를 보면서 애정욕구를 해소하고 있지. 남자배우가 너무 멋있어.

나: 현실에는 저런 남자 없어.

친구: 그러니까, 얼마나 다행이야!

나: 뭐가?

친구: 딱 거기까지, 화면 밖으로 나오지 않으니까.

나: 왜?

친구: 귀찮거든.

글을 마치며

“글을 쓴다는 것은 거대한 목표를 가지고 시작해서 졸렬한 자신의 지식과 능력의 한계를 인식하고 끝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맛있는 음식인 줄 알고 먹었는데 모래알이 씹히는 듯한 퍽퍽함이 오랫동안 남아 있는 것처럼.

『영화관에 간 심리학』 원고를 새롭게 쓰기 시작한 지도 벌써 1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원래 계획보다 원고를 늦게 마무리하는 일은 종종 있지만, 개인적으로 힘든 일들이 많았기에 이 원고를 탈고하

는 것은 나에게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작년 여름, 팔순 노모가 교통사고를 당하시고 이후 폐암 선고를 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악재에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버텼다. 두 달이 넘도록 미친 듯이 비가 퍼부었지만, 병원을 오가며 각종 검사를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했지만, 그 기대는 처참히 무너졌다. 폐암 3기였다.

노모의 뜻을 따라 강원도로 이사를 하고 치료를 받을 때는 서울

에서, 휴식을 취할 때는 강원도에서 시간을 보냈다. 세 시간을 차를 몰고 노모와 함께 강원도를 오갔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아직은 치료할 기회가 있으므로 열심히 항암치료 받으면 나으리라는 기대를 안고 노모와 함께 보낸 시간이 1년이 채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노모가 돌아가셨다.

아직도 꿈에서는 노모가 병원에 환자복을 입고 누워 있다. 아직 내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노모의 빈자리를 생각하면 눈물이 솟구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코미디 영화를 보고 웃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을 내본다. 삶과 죽음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다. 슬프다고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만도 없는 일이다. 다시 힘을 내서 원고를 탈고한다. 책이 출간되면 제일 먼저 엄마가 계신 곳을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할 생각이다.

『영화관에 간 심리학』을 쓰면서 늘 마음으로 응원해주었던 노모와, 곁에서 격려해주시고 도움을 주신 많은 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2021년 12월을 마무리하며

박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