駱山의 三鶴松
駱山의 三鶴松
“ 일제의 압제에서 우리 민족이 눈물겹도록 배움에 굶주렸던 것과 8.15 광복과 함께 외국의 그른된 풍조가 노도와 같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안일하게 좌시할 수가 없어서 ‘한국정신 ’을 이어받아 국가와 이 사회를 위한 인재를 양성해야겠다는 외욕과 취지에서”
한성학원 창립 21 주년 기념식사에서
우촌김의형 박사존영
<추도시>
뒤돌아
뒤돌아아보는 마음이, 아릴수록가슴 깊이 스며드는 님의 따사한입김.1 땅의 하많은 설움을 삭여알뜰한 젊음솟구치는 정열을 쏟아스스로 올연하신님은 진정한 그루 울창한 나무올시다.뜨거운 가슴으로 쌓아올린
「진리」와 「지 섣 」의 탑은낙산의 언덕에평은뿌릴 내리고이나라어느 고을 마을에도님이 가르치신 슬기를 펴는아들 딸들의슬픔 찬 기원이 울려옵니다.이제 우리님께서 펴신 넓은 그늘 아래평온과 안식올 누리며
내일올 위해 전진하오니「삼학송」과 「창립의 탑」님의 손길 닿으신돌맹이 하나풀한포기에도항시 잔잔한말씀으로살펴주소서하늘 가득 퍼지는 은혜로움으로영원하소서「한성」의 이름과 더불어님의 뜻길이 벚나리니여기 울려 퍼지는간절한기원과더붙어우리 모두 합장하며 기리우뜰님은 진정 이. 땅의한그루울창한나무올시다.
우존 선생 생가와 주변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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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내 낙산 중턱에 자리잡은 의화정
견동제 축조를 기리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세운
견동제 축조를 기리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세운 우촌 선생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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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촌 선생 소장품, 백제 시대 토기 (견동리 출토)
정종해 작
하서(寶序)
안호상(초대 문교부장관, 전 한성대학교 이사장)한성학원 셜렵자이신 우촌(友村) 선생에 대한 일대기 ( -代記)와 그를 추모하는 글 모음집인 「路山의 三總公」발간을 진심으로 경하( 慶웰 )해 마지 않는 바이다.우선 나 개인적으로 오렌 기간 한성학원과 연(緣)을 맺고 우촌 선생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며 낙산 기숨에 육영( 育英)의 터를 마련하는데 통참했기 때문에 더욱 감회가 깊은 것 같다.우촌 김의형( 金義術) 박사가 낙산(路山) 기슭에 펼친 영재(英材)교육의 열청은 일제의 압제로부터 광복의 기쁨을 맞이한 1945년 그해부터였다. 그러나 실제 우촌이 교육구국( 敎育救國) 신념을 기슴에 안고 교육계에 투신한 것은 이미 1920 년대부터였다. 식민지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에게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길이 첩경(提짧)이라는 판단 아래 일본 유학 길에서 돌아오자마자 교육계에 투신한 후 그 전 생애(生灌)를 교육에 몸바친 분이다. 말하자면 전 생애를 교육의 현장에서 한번도 떠나지 않은 교육자로서의 외길을 걸은 분이다.
이러한 참 교육자의 한 분인 우촌 선생의 일대기가 그의 탄신 90주년과 서거 10주년을 맞이하는 뭇 깊은 해에 발간하게 되었으니 경하(慶賀)할 일이 아닐 수 없다.자고로 영재를 키우는 일은 사람의 사업중에 가장 으뜸가는 대사업이라고 하였다. 이 중에서도 우촌 선생같은 굳은 집념으로 육영(育英)의 터전을 마련하고 굳센 의지로 수 많은 재원(才援)을 육성한 분은 보기 드물다.
우촌 김의형(金義衛) 박사는 교육사업에 있어 누구보다도 엽연(微然)하고도 장엄(莊嚴)하신 분이었다. 이렇게 거목(巨木)같은 큰 뜻으로 한성학원(漢城學園)을 이룩하셨으니, 오늘의 닥산 언덕에 자리한 한성학원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이 학원에서 자라는 재원들은 우촌 선생의 건학이념(짧學理念)과 그의 민족에(民族愛)에 기초한 교육정신(敎育精神) 을 받들어 한성학원의 고유한 정신(精祚)과 학맥(學)j)iÜ 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아울러그의 드높은 기품(氣品)과 기상(氣像)을 낙산에서 세계로 펼쳐나기는 젊은이로서의 꿈과 의지를 구현(具顯)할 수 있기를 당부한다. 바로 이길이 우리 모두가 기리는 우촌 선생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다시 한번 우촌 선생의 일대기와 추모집을 겸한 「略山의 三鶴松」 간행을 축하하며 하서(寶序)에 가름하는 바이다.〈발간사〉
騎山의 三麗松학교법인 한성학원 이사장공학박사 徐廷熙漢城大學校와 漢城女子中學校,漢城女子中高等學校가 서로 맞나는 곳, 한성의 正門象徵i참 옆자리에 이 세 학교를 象徵하는 세 그루의 쳐씀松들이 이들 학교를 設立하신 友村先生의 꿈과 敎育意志를 反映하듯 지금도 푸르 게 꿋꿋이 서서 이 곳을 아침 저녁으로지나가는 學生들, 敎職員들, 손님들을 굽어보고 있습니다.
일찌기 日帝治下에서 日本體育大學을 나오시고 體育敎師로서主로 女學校에만 근무하시던 友村光生은 解放의 흔란기에 女性敎育에만 뜻을 이으셔서 漢城女子中· 高等웰校를 設立하시고 뒤에 핏城女子大學을 設立하셔서 素朴한 꿈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友村先生의 이러한 素朴한 꿈은 校花로 指定하신 木花(一名 義花)의 例에서 보듯이 외양의 화려함보다는 설용적인 면을 重視하셨고 남들이 校勢擴張에 열을 올려서 象牙塔이 아닌 牛骨塔들을 다투어 건립하고 이나라의 敎育大家로 자처할때도 조용히 大韓體育會일과 漢城女中高의 여러가지 內實 있고 實用性 있는 敎育發展에만 專念하셨습니다. 지금의 價値基準으로 判斷하면 너무도 세상물정에 어두우셨던 것도 같고 意愁이 적으셨던 것 같기도 합니다만 友村先生은 平生좋아하시던 木花꽃같이 냥들이야 거들떠 보던 말던 이나라 初創期中· 高女性敎育의 素朴한 꿈을 이루시기만을 專念하셨습니다. 제가 美國留學을 마치고 귀국 했을 때인 1973 년 봄 선생은 마침 漢城女子大學의 設立을 맞아 平生의 所願을 成就하신듯 의기양양해 하셨고 지금의 과학관 자리에 만드신 수영창에서 安浩相박사님과 子女들과 함께하시는 일을 무척 기쁘게 생각하고 자랑하고 계셨습니다.
그뒤 先生의 건강이 점점 약해지셔서 가끔씩 精神이 오락가락하실 때에도 제가 근무하는 上漢洞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불쑥불쑥 찾아오셔서 學校일, 특히 저도 역시 初年兵이던 大學 운영에 대해 여러가지 상의를 하시던 일이 바로 헛그제 같은데 우연찮은 일로 20 년이 지난뒤 제가 한성학원의 이사장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夜間女子大學이던 한성대학은 4 년제 주야간 남녀공학 대학으로 변화되었고 특히 금년 전후기 입학시험에는 전국 최고 경쟁율을 보이면서 착실히 명문대학으로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욱더 온 교직원들의 정성을 한데 모아서 서울의 명문대학, 명문 중 · 고등학교를 만들어 우촌 선생이 이 路山언덕에 심어 놓으신 三歸松과 더불어 늘 푸르고 싱싱하게 나아갈 것이고 저높고 넓은 짧쪼을 향하여 힘껏 나래를 펼치는 飛翊을 하고져 합니다.
이것만이 우촌 선생의 꿈과 意志를 계속 이어가는 길이라고 궁게 믿고 었습니다.友村先生年諸
1904年8 月25 日(陰) 忠淸南道 公州郡 獅川面 見東里265 番地에서 嚴親 金禹昌(字 洛瑞 高宗 훗午 5 月15日生쫓西 3 月25 日쭈, 義l埈參奉中樞院議官)慧堂慶州李f;\;;(淑夫A , 格憲f;\;;의 女;j(;辰9 月24 日生甲午10 月10 日후)의 둘째 아드념으로 출생學1927. 3. 20 日本體育大學(舊體育專門學校) 卒業經歷1927. 4. 1 忠南天安國民學校敎師
1928. 4. 1 公州永明學校敎師1930. 4. 1 光新商業高等學校敎師1932. 4. 1 同德女子高等學校敎師1939. 4. 5 京城女子醫學專門學校敎授경흉 學生主事1945. 9. 25 漢城女子中高等學校設立및 學校長1950. 3. 2 中央敎育委員서울 城北殘留中高等學生힘11 育所長1953. 1. 20 學校法A 漢城學園設立및 理事長1957. 10. 6 30年動調功勞表뿔 受첼1951. 9. 26 大韓體育會理事1961. 12. 16 大韓올림픽委員會 理事1968. 1. 30} 大韓헨드볼 協會長1961. 3. 1 大韓私立中等學校長會理事1962. 3. 1 文敎部體育賞審훌委員1963. 3. 1 서울특별시 體育賞審짧委침
1964. 4. 1 大歸;私立뎌 1 等學校 敎職員j、티助會 理핍-서울特別市 中等學校융뿔育徵}없 委員1966. 3. 11967. 2. 17 大韓體育敎될會 會長1967. 1. 28 서울新聞社 主健第13 回韓國體育功勞賞受賞1967. 2. 281968. 2. 28 大歸짧育會 藍事1968. 2. 29 大헬體育會 理펄1970. 1. 30 파銀國民述페1 서울市委員會長1970. 5. 10 서울특별시 中等敎育會웰펄1970. 12. 5 國民勳픽£ 걷채할 受줬·韓國UN奉{士團理콸1972. 2. 23 第10 [꾀 大歸民國體育/휩· 審훌委員
1972. 12. 21 랜城女子大學 設立1973. 3. 1 짧;城女子大學;長1974. 12. 11 文敎部長官表향1976. 2. 25 名짧 哲짧폐士學位 授與1983. 3. 1 ↑따界家族夫A 추홉:JI頂 女史子女貞淑(사위 임양수)玉子(사위 서정희)仁子(사위 이창성)成子(사위 안일승)1월子(사위 안웅남)淑子德子(사위 Mark Sur dick)成容騎山의 三關松
友村 金義衡 博土의 꿈과 意志목차추도시 ............................ (정연길)................................. 5화보 ........................................................................... 6하서 ................... (안호상)............................................. 23발간사 ............................ (서정희) .......................... 25연보 ..................................................... 27제1편 우촌 선생의 생애와 활동제1장 : 서장 ............................................................ 35제2장 : 소년의 의지 (成長期1904~1923) ..................... 43
l. 션조의 길을 따라 ...................................................... 432. 나라의 운명 이 ............................................................ 453. 포근한 금강 ............................................................................. 494. 학소리의 첫울음 ........................................................................ 535. 빨간 두루마기 ............................................................. 566. 글방파 병정놀이 ...................................................................... 637. 조국과 배움 ........................................................................ 678. 삼흥학교의 삼총사 .............................................................................. 75제3장 : 용기와 집념 (留學期1924~1927)....................................... 85l. 현해탄의 노을 ............................................................ 852. 아버님이시여 ................................................................. 101제4장 : 애향과 교직 (敎騙期1927~1944) .................. 103
1. 민족의 사표 ............................................................ 1032. 사학공헌의 기점 ........................................................ 1103. 발랄한 교육자 상 ...................................................... 1164. 여성 체육의 조성 ...................................................... 1185. 애향의 장거 ............................................................ 1316. 의리의 우정 ........................................................... 139제5장 : 육영과 시련 (漢城學園創立期1945~1952) ........................ 1451. 8.15광복과 풍운의 출범 .......................................... 1452. 난판을 넘어서서 ..................................................................... 1513. 6.25의 소용돌이 속에서 .................................................... 155제6장 : 교육과 체육계 활동
(漢城學園設立期1953~1972).................................................................................... 1731. 재기 또 시련 ............................................................ 1732. 전진파 활약 ............................................................ 1803. 한성여자대학의 탄생 ....................................................................... 195제7장 : 거인의 말년 (漢城大學發展期1973~1983) ... 1991. 한성대학 교세 확장 ................................................... 1992. 세계 핸드볼 제패 기틀 마련 .................................................................................... 2033. 명예철학박사 학위 취득 ..................................................................................... 2054. 한성대학으로의 확대개편.................................................................................... 2085. 말년 우촌 선생의 도전 정신 .................................................................................... 2116. 낙산 기숨에 떨어진 거성 ......................................................... 213제 2편 우촌 선생의 교육정신과 건학이념
윤경로(한성대 교수)1. 우촌 선생의 교육이념 ............................................. 2191) 역사 소명의 고취 ............................................... 2202) 민족정신의 계승 ................................................... 2203) 지 ·덕 ·체의 조화 .............................................................. 2212. 한성학원의 교훈과 건학이념 ......................................... 2241) 교훈 : 지리, 지선 ..................................................................... 2242) 진리탐구 ............................................................ 2263) 언격도야 ............................................................ 2274) 인재 양성 ................................................ 2293. 한성대학의 교육목적과 목표 ........................................................ 230제3편 우촌 선생을 추모하며
*빈관식 전 문교부 장관이 본 우촌 김의형 박사-연정열(한성대 교수)정리 ................................................. 239*先훨와의 義理를 지키며-홍순태(전 한성대 학장) ............... 247*예술과 교육을 병행하라시던 -김진걸 (전 한성대 교수) ......... 257*의리를 평생의 신조로 삼았던 우촌 김의형 박사-연정열(한성대 교수) ................................................ 261*人生은 有限하고 因緣은 永행-송대빈(한성여자중학교 교장) 275*신의가 있는 사람은 승리한다-김희소(한성여자중학교 교사) 287편집후기 ..................................................................... 299
제1편 우촌 선생의 생애와 활동
제1장 서장
I한 인간이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가 공생애(公生灌)로서의 삶을 영유했는가라는 전제가 붙기 마련이다. 즉 그의 삶이 개인의 영달(榮達)과 안녕(安寧)만을 추구한 생애였다면 적어도 그는 역사적 평가 대상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 한 개인 이 ‘역사적 인물’이 된다는 것은 그 생애가 그의 삶의 현장이었던 그시대의 역사적 상횡속에서 순기능 01휠機能) 이었든 역기능(遊機能) 이였든 간에 공적인 족적(足跳)을 남기었을 예 비로서 ‘역사의 반열’에오르는 법이다. 역사서(歷史書)에 회자 (H會쫓)되는 인물들이 바로 이에 헤당된다할것이다.
우리나라는 청구한 역사-를 갖고 었다. 그 뿐만 아니라 남다른 지정학적(地政學的) 위치와 이에 따른 역사성(歷史性)으로 고대(古代)에서 현대(現代)에 이르기까지 숫한 전화(戰뼈)와 민족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한마디로 절곡(程推)과 수난(受難)~로 점철된 한민족(韓民族)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민족 내부의 충분한 준비없이 타율적(他律的)으로 개항(1 876 년)된 이래 전개된 근대 한국사회의 성격은 더욱 그러하다.그러나 한편 이러한 역사척 조건들로 우리 민족은 남다르게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배출하게 되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험난한 역사를 경험한 민족이 위대한 위언을 탄생시킨다’는 말은 이러한 연유에서 생겨났는지 모른다.H
한국 근 • 현대사에 나타났다 스러져간 역사적 인물들의 삶은 한마디로 ‘고난의 생애’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 근 • 현대사는 ‘위인들의 수난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강요된 외압(外壓)으로부터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지켜내야 하는 수절( 守節)의 고통을 감내해야 했는가 하면 변절( 變節) 의 회한(悔恨)을 가송 깊이 안은 채 일생을 괴롭게 지내야 했던 인물들도 적지 않았다.이러한 면에서 볼 때 ‘역사적 인물’이 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도 꼭 명예스러운 일민-도 이·닐지 모른다. 적어도 그 개인에게는 엄청난 자기희생(自己懶性)이 있기 마련이며 훗날 그의 행위에 대한 엄중한 역사적 평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연간은 본래부터 불완전한 생명체라는 생태학적 당위론( 짧鳳論)과 인간은 신(패1) 앞에 예외 없이 ‘죄인’이라는 종교적 명제를 들어 자위 ( 自戀) 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일회적( 一回的) ‘ 개인의 삶’을 ‘ 역사적 삶’으로 숭화한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치도 쉽지도 않은 것이 사실이다.이상과 같이 ‘ 역사척 삶’을 영유한 위인들을 우리 민족은 장구한 역사 속에서 많이 배출해 왔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구미 (歐美) 국가들의 그것과는 달러 주로 정치 • 군시-척 분야에 몰려 있는 감이 없지 않다. 이는 과거 우리 민족이 외세로부터의 잦은 침략과 특히 일제(日帝)의 식민지배(植民支配)하에서 실추된 국권(國械)을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獨立週폐J) 을 전개한 정치 군사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할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민족이 분단( 分斷)된 이래 남북 사이에 첨예한 정치 군사척 대치 둥으후 국민적 정서( 情網)가 정치 지향척이었다·는 데에도 한 원언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의 인물론 (A物論)이나 위언전(↑합A챔 )은 주로 그 대상 인물의 ‘위대한 점’을 부각시키는 데에 치중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까지 나온 역사적 인물에 대한 위언전(偉A{핑. )이나 개인의 전기류( 댐記類)를 보면 대체로 아래와 같은 세가지 유형a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는 영웅형( 英雄型) 위인전이다. 이순신, 김유신, 을지문덕 등 주로 나라기-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민족과 국가를 위해 몸바친 인물들에 대한 일대기 (-↑협ô) 가 이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둘째는 학자형(學者型) 위언전이라 하겠다. 한 평생을 학문 연구에 받쳐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思想)과 학문(學問)을 개척하고 정립한 인물들의 위언전이 이에 속한다. 우리나라의 고유한 불교 사상을 정립한 원효를 비롯해 성리학을 대성시킨 이퇴계, 이율곡, 서경덕 등과 근대 실학사상을 정립한 정다산, 박지원, 박제가 등이 이 반열에 속할 것이다. 끝3로 재능형(才能型) 위언전을 들 수 있다. 음악, 미술, 체육 등 예체능 분야와 발명가 등 과학 분야에 남다른 재능을 천부적 3로 타고나 개인의 재능을 통해 우리 민족의 우월성({끓밸|生)을 세계에 선양한 인불들이 이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이 유형에 속하는 우리나라의 위인전은 다론 나리들의 그것에 비해 매우 열악한 상태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m그러면 우리가 이 책에서 다루려는 주인공인 우촌(友村) 선생은 과연 위의 세가지 유형 중 어디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까. 뒤에서 상세하게 언급하겠지만 우촌 김의형(金義衛) 박사는 위의 세 가지 조건을 고루게 갖추신 분이었다고 보아 과히 빗나가지 않을 것이다.
우촌 김의형(金義衛) 박시는 1904 년에 태어나 1983 년 서거하시기까지 80 년의 생애를 영유하셨다. 80 여년의 그의 생애는 바로 파란만장하게 진행된 한국 근 • 현대사의 운명과 맥락(服絡)을 같이 하면서 민족이 안고 있던 아폼과 역사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응한 삶을 영유하셨던 분이다. 특히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통치 하에서 획책된 우리 한민족에 대한 민족말살책을 극복하고 더 니-아가 해방된 조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새로운 세대에게 새로운 교육(新敎育)을 가르치는 일이 급선무라는 인식에서 그의 전생애를 교육사업에 헌신하신 교육자(敎育者)이셨다.우촌 선생의 생애를 편의상 나누어 본다면 대체로 아래와 같은 다섯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즉, 첫째 성장기(成長期, 1093~1923), 둘째 유학기(留學期, 1924~1927) , 셋째 교편기(敎輪期, 1927-1944), 넷째 한성학원(淡城學園) 창립기(創立期) (1945~ 1952), 다섯째 한성대학 설립기 (設立期) (1953~ 1972), 마지막으후 대학 운영자로서 헌신봉사하신 한성대학 발전기 (發展期)(1972~1983) 등으로 나눠 볼수 있다.
한마디로 우촌 선생의 80 여 년의 생애는 교육자로서의 생애였으며 이에 대한 결실이 바로 한성학원의 셜럽으로 구체화되었으며 따라서 그의 생애는 한성학원을 세우고 이를 발전, 확장시키는 데에 전 생애를 바친 한성학원의 개척자이자 설립자였던 것이다.본격적 인 우촌 선생의 일대기 (一代記)를 기술하기에 앞서 여기서 잠시 그의 활동 면모를 시기별로 요약해 보기로 한다. 제 1 기에 해당하는 성장기 (1904 -1923) 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우촌 김의형 박사는 1904 년 8 월 25 일(음력) 충남 공주군(公州那) 단천면(離川面) 견동리(見束里)에서 부친 김우창(金禹昌) 선생과 자당 숙부인(淑夫A)경주(慶州) 이씨(李民) 사이에서 둘째 이들로 태어났다.
남달리 엄격한 유교(偏敎) 가정에서 자란 우촌 선생은 유년 시절을 고향에서 전통적인 한학( 漢學) 과 신학문(新學問)을 수학하며 자랐다. 이 시절 고향에 었던 유년기의 우촌 선생은 서울서 내려온 구한말 군인 출신이자 일찍이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이은우( 李股雨)라는 분이 세운 삼홍학교(三興學校)를 다니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眼目)이개화(開化)되었으며 장차 일제( 日帝)에 빼앗긴 민족의 주권(主權)을 되찾기 위한 독립정신(獨立精iÏÏ$)을 품게 되었다. 특히 이은우 선생은 체육(體育)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체조 퉁 체육시간을 많이 할애했는데, 어린 우촌 선생은 남달리 강건한 신체조건을 천부척으로 타고나 총애를 한 폼에 받았다. 훗날 우촌 선생이 체육 분야를 전공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인연과 무관하지 않다.제 271 인 유학기(1 924-1927) 는 일본으로의 유학길에 오른 후 만3년 간의 동경(東京) 일본체육전문대학(日本體育專門大學) 에서의 유학생활기가 이에 해당된다. 고향에서 보통학교 과정을 마친 우촌 선생은 좀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에서 서울로 상경하여 중등교육 과정을 마친 후 20 세 되던 1924 년에 현해탄을 건너 일본 동경 (東京)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식민지 ‘조선언’에게는 업학의 문이 매우 좁았던 일본체육전문대학(현 日本體育大學)에 업학한 그는 ‘식민지 백성’이라는 일본인 학생들의 멸시와 눈총을 굳은 의지로 극복하여 학업에 열중하였다.
우촌 선생이 체육을 전공하려 한 데는 남다른 뭇이 있었다. 어린 시절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던 은사인 이은우 선생£로부터 평소 신체의 단련과 건강이 중요하다는 교육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우촌 선생 자신의 생각에도 과거 고루한 유학자들 모양 연약한 신체와 정신A로는 향후 일제에 강점 당한 국권을 되찾을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따라서 남들이 별반 관심을 갖지 않으나 사실 체육교육( 體育敎育) 이 어느 분야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체육 분야를 전공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 유학길에 오른 한인 학생들 대부분은 법학이나의학 등을 공부하고 돌아와 총독부 관리가 되거냐 아니면 안정된 직업에 안주하기를 바랐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우촌 선생과 같이 처음 부터 남들이 외면하고 있던 체육분야를 전공하려했던 점은 외로운 길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당시로는 대단한 용기 없이는 결정하기 어려운 결단이었다.
제 3기 (1927 -1944)는 1927 년 3 월 20 얼 일본 체육전문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천안보통학교(天安普通學校) 교사로 부임한 후 해방을 맞이하는 시기로 끊어진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교육자의 길을 선택하려고 했을 때 어려움이 많았다. 즉 당시 집안 어른들과 주위에서는 일본 유학까지 마치고 돌아와 국민학교 ‘훈도’를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격에 맞지 않는 일이라 하여 적지 않은 반대에 부딪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교육자로 서의 우촌 선생은 그후 공주 영명학교(公州 永明學校) 교사를 거쳐 1930 년 4 월 서울 광신상엽고등학교(光新商業高等學校)와 동덕여자고 등학교(同德女子高等學校)에서 이름난 체육교사로 봉직하다기- 일제말엽인 1939 년 4 월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京城女子醫學專門學校) 교수로 근무하며 체조와 육상 퉁 체육분야 전반의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체육언으로서의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였다.
제 4 기와 제 5710 945- 1972) 는 우촌 선생의 전 생애 중 가장 활동이 돋보이는 인생의 황금기, 곧 절정기에 해당하는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45 년 광복을 맞은 지 한 달만인 그해 9 월 우촌 선생은 오늘의 한성대학교의 모체가 된 한성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하야 교장과 이사장으로 여러 해 봉직하였다.한편 우촌 선생은 신생(新生) 대한민국의 체육발전사(體育發展史)에 적지 않은 공헌과 족척을 남겼다. 1961 년 대한핸드볼협회 ( 大韓핸드볼柳會) 회장직을 시작으로 대한체육회( 大핸體育會)와 올렴픽위원회(올렴팩委員會) 이사를 거쳐 1966 년 대한체육교원회( 大韓體育敎員會) 회장의 중책을 역임하는 등 한국 체육의 발전을 위하여 혁혁한 공척을 남겼다. 이러한 체육회 발전의 공적이 인정되어 우촌 선생은 1970 년 12 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國民勳章 걷拍章)을 수상하였다.
우촌 선생의 말년기 (1972 ": 1983) 에 해당하는 이 기간에 그는 생의 최대 꿈이었던 대학 셜럽을 이루어 냈다. 1972 년 12 월 한성여자대학( 漢城女子大學) 설립 언가를 받기까지 그가 대학 설립을 위해 노력한 그 노고와 열정은 필셜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지난(至雖)한 일이였다. 이로써 일단 당신의 평생의 꿈이자 과업인 대학 설립을 달성하신 우촌선생은 대학의 학장으로 혹은 이사장으로서 오늘의 한성대학의 초석을 놓고 발전의 토대를 마련하셨던 것이다.한 마디로 우촌 김의형 박시·는 1983 년 3 월 1 일 이 땅을 떠나기까지 80 여년 전 생애를 교육구국(敎育救國)의 일념과 한국 체육의 발전을 위해 헌신 봉사한 교육자이자 체육인이었다. 그리고 그의 전 생애 가운데 40 여 성상을 낙산(路山) 언덕에 웅비의 나래를 펼친 ‘한성 ( 漢城)’을 위해 바치신 교육자의 한 분이라고 할 것이다.이 책은 이상에서 요약한 내용을 좀더 구체적£로 기술하려는 데 목척이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가능한 진솔하고도 소박하게 우촌 선생의 일대기를 그려보려고 한다. 교육자(敎育者)와 체육인(體育人) 으로서의 생애를 보내신 우촌 선생의 일생의 삶을 더듬어 보면서 그 가운데 흐르고 있는 선생의 인품 CA品)과 그의 교육철학(敎育哲學) 그리고 남달리 체육 분야에 열정을 보였던 그의 모습을 가감없이 그려 우리 모두의 귀감(龜鍵)을 삼고자 한다.
제2장 소년의 의지
(成長期, 1904~ 1923)1. 션조의 길을 따라현재는 과거의 계송이며 미래의 기점이다. 과거의 위대함은 현재를 지나 미래로 이어지는 것이며, 과거의 위대함을 과장됨 없이 미래로 전달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선조들은 후손을 위해 당신들의 모든 것을 바치셨으며 후손들은 그 모든 은덕을 고맙게 받아 다시 후손들에게 물려 주어야 한다.한 시대를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점을 깨달아야 하며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여기 우촌(友村) 김의형(金義術) 선생을 통해 하나의 모법을 볼 수 있는 행운을 갖게 된 우리는 그 분을 통해 후손에게 가르쳐야 할 길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우촌 김의형 선생은 선조들의 위대함을 이어 나갔으며 나아가 선조들의 뭇한 비플 자신이 몸소 설천함으로써 션조들뿐 아니라 지·신의 이름과 엽적도 후세에 남긴 분이다.선생의 위대함은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에서 비릇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조상의 빛나는 가계(家系)에서 이어진 것이기도 하다. 요즈음 시대에 가계나 가문을 말한다는 것이 시류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나 조상을 공경하고 그 음덕(陰德)을 기려 후세에 귀감(騙鍵)으로 삼는 것이 우리의 훌-륭한 전통이므로 우선 선생의 가계를 살펴 보아 선생의 근본을 살펴 보기로 한다.지금으로부터 천여 년 전인 928년, 신라(新羅)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은 그렇게도 찬란했던 신라의 사직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 나라를 고려(高麗) 왕조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길만이 백성을 구하는 길이었고 왕으후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결국 신라는 나라를 고려에 넘겨주고 말았다.
망국의 비통함을 처절하게 느낀 경순왕의 태자(太子) 일공(銀公)은 비분과 통한의 눈물을 삼키며 금강산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마의(麻衣)만 업고 풀뿌리만 먹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마의태자(施衣太子)라는 멸칭이 붙게 되었다.둘째 이들 황공(熺公) 역시 속세를 떠나 가야산(빼椰山)의 해인사(海印寺)로 들어가 불교에 귀의하였다. 법호(法號)를 범공(梵空)이라 하고 세상사의 무상함을 갚이 깨달아 제행무상(諸行無常)의 불섬에 오로지 몰두하였다.범공대사가 해탈하여 업산하기 전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이 운발(雲發)이고 차남이 우발(雨發)이었다. 고려에서는 장남인 운발공에예를 갖추어 대우하여 니주군(羅州君)으로 책봉하니 이 분이 나주(羅州) 김씨의 시조(始祖)이다.
나주군의 16세 손은 정준(廷偶)이었다. 이 분은 천성이 온화하고, 한편으로는 강직하여 주변에 칭송이 자자하였다. 특히 충성과 의리가 대단하였다. 이 분은 관직도 도총부(都總府) 부총제(副總制)에 이르렀다. 조선(朝蘇) 정조(正祖) 때에 왜구가 변방을 어지럽히자 용맹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선두에 서서 이를 격퇴함으로 나라의 위세를 떨치는 한편 개언에게도 커다란 영예가 되었다.그는 문무(文武) 양면에 출중하여 무예가 뛰어났을 뿐 아니라 문학과 음악에도 훌륭한 재능이 있었다. 만년에는 경기도 포천군 기을산 기숨에서 자손을 비롯한 청소년들의 교육에 전념하였다.정준공(廷偶公)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양공(壞公)은 황해도 해주 목판관(收判官)을 지냈고 둘째아들 증공(增公)은 사옹원직장(司짧院直長)을 지냈으며 세째아들 저공(樓公)은 성균진사(成均進士)를 역임하였다.저공은 난리를 평정한 공신으로 금성군(鎬城君)에 책봉(冊封)되었다. 그의 손자인 취장공(就長公)은 문과에 급제하여 의성(義城) 현령(縣令)으로 있을 때에 그의 외조부인 김종서(金宗瑞) 장군이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화를 당하자 이에 항거하여 거시플 일으키려 하였으나 돗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세상을 버리고 산에 들어가 일생을 마쳤다.
정준공의 증손인 봉서공은 통정대부 절충*균 의홍위호군(通政大夫折衝將軍義興衛護軍) 증가선대부 병조참판(體흙善大夫兵훨參判)이었으며, 그 다음인 현손(玄孫) 경석공(景錫公)은 무과 출신£로 전공을 세워 일등훈을 제수 받았다., 5대 손인 적공(適公)은 왜척을 영암포(靈購浦)에서 무찌르고, 행실이 흘륭하여 서원(書院)에 배향되었다. 그의 자제인 충수공(忠秀公)은 임진왜란 떼 선무꽁훈으후 가선직(嘉善職)무로 제수 되었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의리에 순국함으후 조정에서는 적공과 함께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사창리에 있는 서원에 배향하였다. 더구나 그의 부인인 금성 않밟成) 나씨도 절개를 지켜 의에 죽으니, 이는 한 가문에서 나온 짱절이었다. 조정에서는 그 충의 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공주군 단천면 대학리에 충신, 효자, 열녀가 났다하여 정문(推門)을 세웠다.
지금까지 우촌 선생의 가계를 어렴풋이 살펴보았다. 우촌 선생의 가계를 살펴보면 그 기원이 오래 되었을 뿐 아니라, 조성들이 모두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흔적 이 역력하다. 우촌 선생은 이러한 혈통을 이어 받은 기푼의 35대 손으로 선조들의 위대함을 되살리고 자신의 맡은바를 충실히 이행하는 한편, 창의력과 능력을 한껏 살려 보람에 찬일을성취하신 것이다.이렇게 훌륭한 션조 밑에서 또 하나의 거목이 자라났으며 이 거목이 우촌 김의형 선생인 것이다.2. 나라의 운명이우촌 선생이 태어나신 1904년은 러일전쟁이 얼어난 해이다. 국제정세는 나날이 변화하는 가운데 서구 열깅들은 식민지 확장에 혈안이었다. 시대의 변화에 무심하고 나라의 치세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던 이 나라는 밀려드는 외세 앞에 나라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고 조선왕조의 종말은 다가오고 있었다.
당시는 시기도 어려운 시기였고, 이 나라는 지정학적으로도 어려운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축에 해당하는 위치에 있었던 까닭으로 각국이 세력 확정L을 위한 전초기지로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우촌 선생은 충청남도 공주군(公州那) 탄천면(離川面) 견동리(見東里) 256번지에서 태어났다. 역사척으로 중요한 전환기 백제왕조의 유서 깊은 땅에서 태어난 그는 어차피 역사의 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숙명을 지니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고난의 시기에 뜻 깊은 땅에서 태어난 그에게 단순하고 평범한 인생이 주어질 것인가, 아니면 난국을 극복할 지혜와 용기가 주어질 것인가. 선생은 후자의 인생을 살아야 했다. 그의 선조가 걸었던 길을 당신도 걸어야 했던 것이다.
거센 물결과도 같이 빌려드는 외세들, 미· 영·불·독·이 등의 유럽 국가들 뿐 아니라 북쪽의 러시아, 그리고 10년전 청국(淸國)을 격파하고 동아시아 전체를 한 손에 넣고자 하는 신홍 강국 일본, 삼천리 금수강산은 이제 그들의 힘의 각축장이 되어 언제 어떻게 어느 나라의 손아귀에 떨어질 지 모르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그 중에서도 국가의 숙원언 남하정책을 달성하그찌 하는 러시아와 일본이 가장 큰 위협이였다.제정 러시아는 청나라로부터 조차받은 여순과 대련을 근거지로 삼아 만주 일대를 불법 정유하고 이어서 한반도마저 장악하려 하였다.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러시아 공사언 파블로프가 우리나라의 공사로 부임하면서 극도로 쇠약해져 있는 구한국 정부에 간교한 계교를 꾸였다. 러시아 백작 께제련의 명의로 함경, 강원, 경상 등 3도의 포경권을 교묘히 빼았고, 이어 마산포에 그들의 석탄 저장소와 해군병원 동의 시설을 만들어 이것을점유하려 하였다.
이러한 러시아의 행동에 대해 일본은 선수를 빼앗긴 시기심에서 러시아와 우리나라에게 항의를 제기하였다. 궁지에 몰린 러시아는 일단 후퇴를 하였으냐 그들의 야욕을 포기 단녕하지 않았다.1903년 8월, 러시아는 감언이설로 구한국 정부를 설득하여 용암포를 조차하는 한편, 내창원경(內藏院椰)인 이용익(李容翊)과 러시아 삼렴회사 대표인 문스부록 사이에 암록 삼렴 벌채권에 대한 가계약을 체결하였다. 이어 벌채권의 발매를 시작하고 용암포에는 포대를 설치하여 러시아 군대를 주둔시켰다.이러한 러시아의 행위는 러시아와 일본, 양국이 저희들 멋대로 우리 국토를 38도 선에서 분할하여 각기 점유하려던 음모와, 다른 한편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일본의 야마가타가 참석하여 러시아 외상인 로마노프 사이에 구한국을 중렵지대로 만든다는 명목으로 39도 선에서 양국이 분할 정령한다는 음모를 꾸였다가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 다음 행동이 이어졌다.39도 선 문제, 만주에 러시아 군대를 주둔시키는 문제, 러일 양국의 이권문제 등으로 드디어 양국은 1904년 2월 6 일에 국교를 단절하고 무력으로 대치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明治維新)을 기점으로 하여 과거의 체제를 일신하여 새로운 정치체제를 갖추었다. 수년간의 혼란기를 거쳐 어느 정도 국내의 안정을 이룩하자 국내에서 해외로 시션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1894년에는 청나라와의 전쟁을 일으켜 승리를 거두자 이제는 감히 러시아와 일전을 겨루어 동북아에서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러시아와 일본은 이러한 팽창주의와 제국주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어 피할 수 없는 전쟁에 몰두하게 되었다. 결국 일본의 함대가 인천 근해에서 러시아 군함 두 척을 불시에 기습하여 격침시키니 이것이 러일전쟁(露日戰爭)의 시작이었다.우리나라를 가운데 놓고 양국이 치열한 전쟁을 벌이게 되니 이 나라는 10년전 청일전쟁(淸日戰爭)에 이어 또다시 강국들의 이권 싸움에희생되어 니라를 씨움터로 내주고 도탄이l 빠져 불쌍한 백성들만 고통을 겪게 되었다.
우리 정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님의 나라들 사이의 전쟁애서 전쟁터만 내주고 힘없음을 한탄만 하고 있었다. 국가도, 왕실도, 백성도 좌절과 절망에 빠져 내뿜고 있었다.드디어 다음해인 1905년의 을사 5조약으로 나라의 외교권마저 빼앗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당시 아 나라는 한단과 슬픔만이 기득했고 희망도 없었다. 다가올 외세의 거센 물결 앞에 모두 불안하게 하루하루의 삶만 꾸러나갈 뿐이었다.이 땅에는 인물이 없었나. 이 나라에는 모두 허수아비 뿐이었나. 그러나 이 시대의 비극은 어느 한 시람만의 잘못만도 아니었고 인재가 없었기 떼문만도 아니였다. 역사의 흐름 앞에 우리 민족 모두가 무력했£며 시-태의 파악에 정확한 얀옥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고 누구를 원망할 수는 더구나 없었다.500년 조선 사직은 무너지려 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험은 모자라 결국 남의 나라의 먹이가 될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시대에 태어난 인물은 무기력한 인물이 되든가, 아니면 큰 돗」을 푼고 위대한 엽적을 남기든기· 하는 극단적인 대비를 이루는 인물이 되기 쉽다.우촌 선생은 과연 어떠한 인물이 되기 위해 이 시대에 이 땅애 태어났는가.1904년 8월 25 일 선생은 태어났다. 나라의 고난을 극복하고 민족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과시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다. 시대의 요청 앞에 역사의 정기를 이어 나가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났던 것이다.그가 이 민족과 국기흘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디에서부터 시작하여 어떠한 길을 걸어 어떠한 엽적을 남길 것인가. 그는 시대의 요청에 따라 선조들이l 게 부끄힘지 않은 길을 걷고 후손에게 부끄럽지 않은 유산을 남겨주기 위해 선생만이 할 수 있고 선생만이 해야할 일을 위해 당당하게 걸아 나가셨던 것이다.3. 포근한 금강
한 그루의 아름다운 나무를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이 필요하다. 비옥한 토양과 충분한 햇벚, 풍족한 물, 맑은 공기가 필요하다.한 사람의 인재를 키우기 위해서도 많은 조건이 잘 어루어져야 한다. 출생지의 풍토, 전통, 역사 등이 기초가 된 위에 시대적 요청, 그리고 그 인물을 낸 가문이 중요한 요인이 되기 마련이다.우촌 선생의 기운과 당시의 시대상황에 대하여는 앞에 말하였다. 이제 선생이 태어난 고장이 얼마나 유서 깊고 아름다운 곳인가에 대해 살펴보고자한다.경부선 철도를 따라가다가 충청남북도와 전라북도로 갈라지는 요충지인 조치원역에서 서쪽을 향해 충남 쪽으로 대로를 가기 약 60 여리, 또는 대전에서 서쪽으로 90여리를 가면 아득한 옛날 백제가 남긴 향기로운 꿈을 안고 고요히 잠들어 있는 고도(古都) 공주에 다다른다.이 콧은 그 옛날 마한( 馬韓) 시대에는 웅진성(熊、律城) 또는 웅천(熊川)이라고 하던 곳이었다. 또한 백제 때에는 5대 64년간 도읍이었으며 사비성(四批城)이라 하던 부여와 함께 백제의 왕성이었다.
그러나 1300여년 전 황금시대를 이루었던 백제의 찬란한 문화와 문명을 지금은 찾아 보기 어렵고 다만 곰나루의 전셜이 있는 용당리(龍堂里)의 사당이 고대의 향기를 풍길 뿐이다.이콧에는 거란의 침업A로 파천을 하였던 고려 현종의 고시 한 수가 문헌에 전해지고 있다.曾聞南地在公州 전에 들으니 남쪽에 공주(公州)가 있다네,到此心情歡樂處 여기 다다른 심정 기쁘고 즐거읍구나.仙境玲瓏永未休 신선(神f山)의 경계(境界) 영롱하니 길이 다행스럽고 좋도다.群臣共會放千愁 여러 신하들이 함께 모여 천수(千愁)의 근심을 푸는도다.조선 시대에는 인조(仁祖)가 이괄의 난(李造의 亂)으로 이곳으로 피신하였다. 이때 건조한 산성공원에는 쌍수정(雙樹후)과 쌍수정 앞에 서있는, 인조가 금대(金帶)와 관직(官職)을 하사하여 유명해진 쌍수(雙樹)라는 나무가 있다. 그리고 웅심각(雄心聞), 공북루(拱北樓) 등의 사적이 었다.
백제의 도읍이었으며 그 후로도 임금이 옴을 의지했던 이콧에 지금 남아 있는 유적이 너무 희미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지만, 유구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왕도로서의 품위와 단아함이 전셜처럼 보존되고 있음은 이곳을 찾는 이들이 모두 마음으로 느끼고 있다.이콧이 왕도였기 때문인지, 워낙 산수의 지세가 뛰어난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 전통의 고장이라는 긍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인지, 이콧 사람들은 교육열이 높고 평온하고 부드러운 품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고풍스러운 멋을 지니고 있다. 이 지방의 풍습은 순박하면서도 덕성이 있으며, 사람들은 겸허하면서도 끈기가 있는 것으로 전해 요고 있다.이콧의 유적 가운데 무열왕흥(武烈王陸)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유산이다. 거의 사라진 백제의 유척들 가운데 그 원형을 보전하고 있A며 당시의 숨결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그리고 또 남아있는 유척으로는 금강을 끼고 우뚝 서 있는 공산성(公山城)이다.
그러나 그 모든 역사나 전통이 이어지고, 이콧 사람들이 평온하고 풍요롭게 생활할 수 있으며, 이 땅이 이 땅으혹 남아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그 옛날이나 지금이나 공주땅을 포근히 감싸안고 흐르는 금강(銘江)이 있기 때문이다.역사는 강변에서 이루어 진다는 옛말을 구태어 인용하지 않더라도 금강이야말로 공주 지역의 젖줄이며 생명의 원천이었다.말없이 수억겁을 흐르며 이콧에 자리잡고 살고자 하는 사람들을 돌보아 주는 금강의 물줄기는 예나 지금이나 포근하기만 하다.유유히 흐르는 금강 위에 웅장하게 걸려 있어 역사의 옛모습을 보여주였다던 웅진교는 지금은 혼척도 없이 사라져 버렸으나 대신 새로 건립된 다리가 날렵한 몸매를 자랑하며 시간의 흐름을 대변해 주고 었다.풍요와 멋과 기개가 어울려 전통을 벚내던 공주땅은 옛시인 신공유의 한시로더욱 빛난다.
-片뾰城tt體頭 일편의 황성(휴城)은 나루를 베고 있는데,無A說與興亡事흥망(興亡)의 일을 말해주는 이 없네.長江不避古今流장강(長江)은 변함없이 옛이나 지금이나 흘러가고,堆見東風草滿Vtl 다만 동풍(東風)에 풀이 모래섬에 가득함을 볼 뿐이다.천년을 두고 전해 내려오는 선인들의 인생의 애환을 담은 이러한 사연을 강심(江心)은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말없이 흐르고만 있다.말없이 도도하게 흐르는 금강을 끼고 사는 이곳 사람들의 인심이 넉넉하고 정의감이 강하다는 것은 난을 당한 임금들이 이콧으로 피신했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으며, 예나 지금이나 그 너그러운 품성은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다.
이 고창의 인섬에 감복하면서 금강 물줄기를 따라 서해 연안에 자리한 서천(합)11) 과 창항(長項)을 향해 40여 리를 가면 이인면(利仁面)이 나온다. 이곳을 지나면 탄천면 사무소 소재지인 삼각리에 이르른다. 다시 탄천o雖川)을 등 뒤로 하고 북쪽으로 껴어 들어가면 볼외(見東里)로 나서게 된다.이콧 공주군 탄천면 견통리가 바로 우촌 검의형 선생이 탄생하신 콧이다. 여기는 백제의 고도 부근이기도 하거니와 30 리 떨어진 곳에는 유명한 명산 계룡산(類龍山)이 우뚝 솟아 었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조선의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건국시에 이콧에 도읍을 정하려고 하였던 콧이다. 산세가 뛰어나고 장엄한 정기를 풍고 있는 이콧은 지금도 지나가는 사람이 옷깃을 여밀 정도로 서기(瑞氣)가 어린 곳이다.이 계룡산의 산자락을 달려가면 앞으로 심리봉(審理~옳)이 되고 이어서 굴덕재(屆德짧)가 활처럼 더 뻗어 나가고 있다. 그 앞 남쪽에는 소가 엎드려 있는 모양의 박동산이 휘돌아 냐가 마을 하늘을 얼싸 안고 있다. 이 마을 서쪽에 금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금강을 옆에 끼고 %여 호의 아담한 마을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우촌 선생이 태어난 견동리인 것이다.
이 볼외(見東里)는 원래 반탄면(半離面)과 곡화천면(曲火川面)의 두개 면이었으나 합하여 탄천면이 되었다. 예로부터 이곳에 대한 풍수설이 있었다.老龍審水늙은 용(龍)은 물을 돌고,黑牛波江검은 소(牛)는 강을 건년다.111lA調書선인(仙A)은 책을 읽고黃뿜웰歸짧 누런 학(j짧)은 퉁지로 톨아간다.이러한 형상이라고 하였으니 이콧의 지형과 산세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한편 이렇게 신묘한 명당자리이며 산자수명(山앓水明)한 풍치에 싸인 볼외에 금상첨화로 풍치를 돋우고 있는 고목이 있었으니, 수백 년간 이 마을의 지주(支柱)가 되어 마을 한복판에 수백 년 된, I은행나무 고목이 자리를 틀고 있었다.순박하고 의연한 인심의 마을에, 그리고 멀리 가까이에 계룡산과 금깅을 끼고 있는 볼외는 이 나라 삼천리 금수강산 중에서도 몇 안되는 풍광수려(風光秀麗)한 콧이 아닐 수 없다.볼외는 지금은 전형적인 한척한 시골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이 근처에서 생산되는 곡물을 반출하는 나루터가 가까이에 있어 선박이 분주히 왕래하여 자못 활기를 띤 콧이였다.이 고장의 산천이 이렇게 아름다우니 이곳 출신 인사들의 인물이 출중하지 않을 수 없다. 우촌 선생의 용모가 수려한 것도 이러한 연유와 무관하지 않을것이다.자연의 혜태을 듬뿜 받아 정기에 쌓인 곳이 이 마을의 서편에 우람하게 솟은 대가가 하나 있었으니 이콧이 우촌 선생의 생가이다.4. 학소리의 첫울음
성격과 외모는 그 사람의 정신이 만드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성격과 외모는 스스로 책임져야 하며 높은 수준의 정신을 지닌 인물은 그 성격과 외모에서 그것이 이미 표출되는 법이다.“초변에 실례되는 말씀이 이·닌지 모르겠으나 선생의 모습은 학(碼)의 자티l 이십니다"
v 우촌 선생 생가
우연한 기회에 우촌 선생을 만난 어느 유명한 관상가가 남긴 말이다. 이것이 실제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구태어 따질 필요까지 는 없겠으나 우촌 선생의 풍모를 말해주는 한 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선생의 모습이 단아한 기상과 우아한 품격을 지녔으며 군계일학의 자태였음을 충분히 알 수 있게 해주는 상정척인 표현이라 하겠다.
이같이 학의 풍채를 지닌 우촌 선생이 이 땅에 태어나셨을 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이에 앞서 우촌 선생의 형제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우촌 선생의 부친이신 의관(↑義官) 우창공(禹昌公)은 따님 두 분을 두셨는데 이를 두고 동네 아낙네들은 이렇게 걱정하였다.“의관 나으리 댁은 딸 삼형제를 채워야 할 것 같으니 아 일을 어쩌나. 틀림없어. 어느집이나 딸 형제를 두면 꼭 삼형제를 채운다던데, 앞마을고 생원 댁도 딸 삼형제를 채우지 않았냐. 옛날부터 그런 법이래."김 의관도 아낙네들의 이러한 말을 전해 듣고 그것이 확실한 근거가 있는 말이 아님은 알고 있었으나 딸 삼형제를 채운다는 말에는 다소 섭섭함을 느끼며 마음 속으로는 은근히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낙네들 말대로 또 딸이면 어찌 하냐.’사랑방에 홀로 앉아 있던 우창공은 불안한 마음에서 긴 담뱃대를 두드리며 근심하였다.한편, 내당 안방에 계신 이써 부인도 역시 초조함을 금치 못하였다.“자식이란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이번에 또 딸이면 조성들에게 면목도 없고 사랑방 어른을 어떻게 대하냐"예의범절이 단정한 규중의 젊은 부인무로서 자녀의 생산 문제를 업밖에 낼 수는 없는 일이였으니 마음속으로 더 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아침 저녁£로 천지신명(天빼깨明)에게 기도를 올리고 향상 마음을 펑온하게 가지도록 노력하였디. 옛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따르고 옹갖 유익한 태교(服敎)를 정성으로 수행하면서 소망을 이룰 수 있도록 지성을 다 바쳤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남달리 착한 심성을 지닌 김 의관 내외의 정성에 하늘도 도움을 주셨는지 이씨 부인은 순산을 하여 옥동자를 낳았으니, 이 분이 우촌 선생의 형님이신 직형(直術)써이다.볼되 마을의 우창콩의 친척과 마을 사람들은 우칭꽁 댁의 문앞에 모여 축하를 드리기에 바쨌다.“우청공 나리, 인줄에 빨간 고추가 달렸으니 이제는 소원성취 하셨습니다. 기다리던 아들을 낳았£니 진심A로 축하를 드립니다."모여든 사람마다 이렇게 축하를 해주고 자기 집안 일처럼 기빼하니 온 마을의 경사였다. 이것은 평소에 우창공이 후덕한 인품으로 마을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인심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우청꽁은 제사를 받들어 줄 맏아들을 얻으니 더 할 니-위 없이 기쨌다.이제야 조상을 봐올 면목도 서고 자신에게도 커다란 보람이 있게 된 것이다.
장지를 얻어 그 기쁨을 한참 누리고 있던 차에 우창콩은 3년만에 다시 둘째 이들을 얻었다. 이때 우칭꽁 내외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둘째 아들이 바로 우촌 낌의형 선생이다. 마을 사람들은 또 다시 기쁨을나누었다.“잇달아 득남을 하시니 이것은 틀럼없이 하늘이 우창공 내외의 덕이 큼을 알고 계신 것업니다“올해는 갑진년(甲辰年)이라 용(龍)의 해이니 이번에 보신 아드님은 틀림없이 크게 될 것입니다. 더구니- 이 아이의 울음소리가 남다르고 특히 요즈음 같이 나라가 어지러운 떼에 태어났으니 이 아이는 장차 나라에 요긴하게 쓰일 인물이 될 것업니다모든 사람들이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는 이때에 우촌 선생이 탄생하신 것은 이미 예삿일이 아니었으며 그 학소리 같은 고고지성(孤孤之鍵)에 더욱 큰 기대를 결지 않을 수 없었다.
우창공도 이 아이가 평범한 아이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며 이 아이를 위해서는 아우것도 가릴 것이 없다는 다짐을 마음 속으로 하였다.그 해는 러일전쟁이 터진 1904년이었고 선생의 탄생일은 8월 25 일이었다. 나라 안팎으로 어지러운 이때에 태어난 우촌 선생은 탄생 때부터 사명과 기대를 한 폼에 지니고 태어났던 것이다.5. 빨간두루마기우촌 선생은 천성이 온화하고 신체가 건강한데다가 부모님의 막내아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 덕분으로 아무 탈없이 무럭무럭 성장하였다.검 의관은 성격이 강직하고 엄격한 유학( f需學) 정신을 지난 분이라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는 곁으로는 엄하였으나 마음 속으로는 말할 수없는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엄격하였다. 자녀 교육에서도 이런 면을 보여주었다.
“자식이란 귀여울수록 마음 속£로 사랑해야지 곁드로 보이게 사랑하면 아이들이 못쓰게 되는 법이요”우창콩은 부인에게 향상 。l 런 말로 주의를 환기시켰으며, 4남매에게 도 일상생활에서 조금이라도 예절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자녀들이 무엇을 하려고 허락을 요청하띤 그것이 모든 법절에 맞아 선비집의 규범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허락하였다.그러나 시대는 더욱 더 헝악해져 나라의 운명은 기울어질대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우창공은 의관직을 사퇴하고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집에서 경서(經환) 읽는 것을 낙으후 삼고 있었다. 간흑 가까운 곳에 있는 유렴들과 더불어 시국을 논하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기도 하였다. 나라의 앞날이 걱정되면 될수록 지손들이 성장해 가는 것에 더욱큰 기대를 결게 되었다. 이런 때 마음이 어지러우변 하인들에게 이렇게 이르고 출타하기도 하였다.
“오늘은 좀 늦게 돌아올 것아니 어두워 지거든 햇불을 들고 동구밖까지 미중을 나오도록 하여라그리고 어린 4남매에게도 주의의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법도가 있는 집안의 자손들은 예절을 지켜야 하느니라. 내가 늦더라도 반드시 밤인사를 하고 자야 한다"이렇게 우촌 선생 형제들에게 이르고 출타한 우창공은 밤늦게 취기를 띠우고 가동(家童)과 함께 귀가했다. 마중을 나옹 하인에게 아이들이 잘 놀았느냐 라고 묻고 잘 지냈다는 하인들의 대답을 듣고는 흡족한 기분에 이렇게 흔자말을 하였다.“기특한 지고”홀로 벙그레 웃음을 짓는 우창공은 새삼 자녀들에 대한 애정이 솟아오르는 것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단 대문 안에 들어 서 면 우창콩의 태도는 다시 엄해졌다. 어린 형제들이 앞다투어 귀가핸 부친에게 인사를 드리면 내심 반가운 마음을 지니면서도 엄한 훈계를 하는 것이었다.
“완식(完植 : 우촌공의 兒名)아, 너는 형이 하는 행동을 보고 그대로 잘 배워야 한다. 어른을 벌 때마다 반드시 절을 해야 하고 또 어른 앞에서는 두 손을 모아 가지런히 해야 한다. 행세하는 집에서는 어려서부터 이런 예의범절을 잘 지켜야 하느니라"이다지도 엄한 우칭공이었으나 그의 천성은 더할 나위 없이 온화하고 인정이 많았다. 우칭공은 자녀들에게 엄격하였으며 그것은 아랫사람에 대한 자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자녀들은 물론 하인들도 우창공의 너그러운 마음씨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우창공 댁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부농이었다. 가을이 되어 추수를 할예나 보리를 거두어 들일 떼가 되면 수많은 얼꾼들이 모여들어 일을 하였다. 이런 때에는 부근의 가난한 사람들도 모여들어 일꾼들 틈에 끼어 벼나 보리 이삭을 주웠다. 그들에게는 그나마 나락이라도 주워갈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우창꽁 댁 하인들은 이것을 막으려고 했고 마침내 그 사람들과 성강이가 벌어지고 주위가 소란스러워지곤 하였다. 그러면 우창공께서는 년즈시 이렇게 하인들을 타일렸다.“이봐, 원삼이. 너무 그러 야속하게 굴지 마라. 저 사람들이 오죽하면 이삭을 줍겠느냐. 그대로 두어라. 그리고 벼 몇다발만 풀어 저 사람들이 춧어가도록 하게 하여라"이렇게 오히려 벗다발을 풀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 주었다. 우창공은 덕을 베푸는데 인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진실성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대단히 엄격하였다.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가을에 곡식을 거두어 타작을 하려고 마을 사람 여렷이 우창꽁 댁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돌쇠라는 마을 사람 하나가 꾀를 부려 슬쩍 나가서 놀다가 일이 끝날 무렵에 돌아와 일을 열심히 하는척 하였다. 이를 본 우호냉운 돌쇠를 불러 놓고 크게 꾸짖었다. 평소의 우창꽁 같지 않게 옆에 서있는 나무의 잎파리가 흔들렬 정도로 불호령이 떨어쳤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땀흘리며 열심히 일하는데 너만 혼자 꾀를 부려 놀고 먹으려 하니 이것이 될 법한 일이냐"추상같은 호령에 돌쇠는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개미 기어가는 듯한 소리로 이렇게 변명하였다.“저, 몸이 좀 불편해서 잠깐"변명을 들은 우창공은 더욱 노하였다.“내가 너의 소행을 이미 다 알고 있는데 그래도 변명이냐. 네가 일하기 싫어 나가서 놀다가 이제 일자리로 돌아왔으면 의당 잘못을 뉘우쳐 나에게 사실대로 고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하건만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딴 소리냐. 그 따위로 성의없이 일을 하려면 다시는 내 앞에 보이지 말아라. 앞으로 너에게는 일을 시키지 않겠다
이렇게 하여 돌쇠는 다시는 의관댁 출업의 기회를 앓고 말았다.이러한 일은 돌쇠에게만 한정된 일이 아니었다. 누구든지 성실성이 없는 사람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서가 없었다. 우청꽁은 때때로 친지나 후배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우리나라가 이렇게 어지럽게 된 것은 조정에서 나탓일을 보는 벼슬아치들이 성실하지 못하고 자기 책임을 다하지 못한 때문이야”관리들이 성설치 못하게 국사를 다루어 나라꼴이 이렇게 되었다며 날로 쇠퇴해 가는 국운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우칭공의 이러한 생각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자연히 성실하게 우창공을 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한편 우청꽁의 눈밖에 나 일을 못하게 된 돌쇠는 당장 하루 세끼 끼니도 이어가기 어렵게 되었다. 더구나 돌쇠의 어린아이는 굶기를 밥먹듯 하다가 아침내는 부황이 나고 말았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어린 우촌 선생은 성실치 못한 돌쇠의 행위는 미웠지만 그 가족들이 불쌍하여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인정이 많은 어린 우촌 선생은 그 길로 돌쇠의 집을 찾았다.빨간 두루마기에 탱기를 길게 늘어뜨련 도련님이 찾아오자 툴쇠는 크게 놀랐다.“아니 도련님이 이게 웬일입니까유. 이렇게 누추한 곳을 다 찾아주시다니"돌쇠는 감격하여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였다.“기복 아버지, 다시는 그런 거짓 행설을 하지 않을 거지요”“그럼요 참말로 도련념 봐올 면목이 없구먼유."돌쇠는 하염없이 눈물을 훌렸다. 찰못을 저지른 별로 고생을 하고는 있지만 피골이 상접한 돌쇠의 몰골이며 더구나 누렇게 부황이 난 돌쇠의 아들 기복이를 보는 우촌 선생의 어린 마음은 몹시도 아파 목이 메어왔다.
“도련님, 저도 인두겁을 쓴 사람인데 또 다시 그런 짓을 하겠어유. 제발 의관 나리께 말끔드려 용서해 주라고 해 주세유. 정말 부탁이에유."돌쇠는 머리를 숙여 사정을 하였고 옆에 었던 돌쇠처도 연신 눈물만 훔쳐내고 있었다.우촌 선생은 그 길로 아버지 우창공에게 냐아가 톨쇠의 벌을 풀어 줄것을 간곡하게 사정하였다. 우창꽁은 이들의 진정어린 호소를 들어주였다.“잘 알았다. 돌쇠의 소행은 패씹하나 용서해 주라는 너의 정성이 가룩하여 이번에는 용서를 해준다. 그러나 돌쇠에게 다시는 그런 불성실한 짓을 못하도록 단단히 맹세토록 하게 하여라 "
돌쇠의 벌을 용서헤 준 우청콩은 아들의 이러한 행동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일가 권속에게 이렇게 말하며 기대를 거는 것이었다.“완식이는 큰 인물이 될 기틀을 지녔어."우촌 선생에 대한 기대는 우칭공만에 한한 것이 아니었다. 마을의 어른들도 업을 모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완식이는 대단한 아이야 너그렵기가 웬만한 어른보다 낫고 언청이 많아 사람을 포용하는 험이 우리보다 나아”우촌 선생의 너그러운 마음에 감화된 돌쇠는 그 후L부터는 우촌 선생의 말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하였음은 물론 이다.이러한 일이 있던 즈음에 의관댁의 추수도 다 끝나 독광마다 곡식이그득그득 쌓이기 시작했£니, 풍년가가 저절로 나오는 대풍(大豊)의 해를맞아했다.
추수가 끝나자 어느덧 한 해가 다 지나고 새해가 다가 왔다. 남달리 조상 섬기기를 잘하는 의관댁에서는 정초의 차례 지낼 준비에 바쨌다.어머니 이씨 부인은 조상에게 바칠 제물을 정성스레 준비하여 정결하게 마련하는 한편 잘 익은 과일을 추려서 우촌 선생 형제에게 나누어 주였다. 그런데 과일을 받은 우촌 선생은 그것을 먹을 생각은 하지않고 접밖으로 뛰어나오+ 동네 아이들을 부르는 것이었다.“기복아, 삼룡아. 이라 와라. 이것 같이 먹자. 너희들은 이런거 구경잘 못하지. 어서 와서 먹어우촌 선생은 자기얘게 먹으라고 준 과일을 동네 어려운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였던 것이다. 아이들은 고마워 하면서 즐겁게 과일을 먹었다. 이렇게 좋은 것이 있요면 동네 아이들과 나누어 먹는 것이 우촌 선생의 어린 시절의 버릇이었다.이러한 어린 우촌 선생의 행동은 자연히 동네 어른들의 눈에 주목되었다. 보통 어린 아이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완식이는 참 이상한 아이야. 아이들이란 대개 저만 먹고 다른 사람에게는 나누어 주지 않고 도리어 남아 먹을 것까지 빼앗아 먹는데 저 아이는 항상 다른 아이에게 나누어 주니 참 기특한 일이야"예로부터 설날이라고 하면 어린 아이들을 위한 날이었다.어린이들이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새옷을 업고 즐기는 날이 이날이었기 때문이다.어린 아이들 마음에는 그날은 다른 아이들보다 무엇연가 더 좋은 것을 해야만 하는 날이었다. 다른 아이보다 더 좋은 옷을 업던지 더 좋은 음식을 먹어야만 기를 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모에게 더 좋은 옷을 해 달라고 조르는 것이 보통이었다.가난한 집 아이들과는 달리 생활이 넉넉한 우칭굉 댁에서는 좋은 설빔을 해줄 수 있었다. 이씨 부인은 두 딸에게 갑사 탱기에 오복 수 저고리와 대접무늬의 제병치마를 내어 업혔다. 그리고 우촌 선생 형제에게는 오복 수 저고리를 비롯해서 명주 바지에 숙수 두루마기를 똑맞게 지어 내주셨다. 형제들이 이렇게 좋은 설빔을 업고 방안에 서니 고운 옷바람에 방안이 환하게 밝아지는 것 같았다.
“어머나, 곱기도 해라"“정말 설빔이 좋구나"“야 신난다두 누나와 형은 너무 좋아 깡충깡충 뛰었다. 그러나 우촌 선생은 별로 좋아 하는 기색이 없었다.“어머니, 저는 이렇게 사치한 옷은 업기 싫습니다. 어머니께서 애써 지어주셔서 감사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못 업겠으니 거두어 두시고 대신 깨끗한 무명옷이나 한 벌 주십시요”이렇게 자기의 뜻을 밝혀 검소한 옷으후 갈아업고는 정조차례(표朝茶禮)를 지내려고 사당으로 향하였다. 사당에 참배하려고 왔던 일가어른들은 어린 우촌 선생의 이같은 검소한 모습을 보고는 크게 놀라며 한마디씩 칭찬하였다.
차례가 끝나자 우칭냉에게 세배를 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 떼마다 조출한 세배상이 사랑방으로 들어갔으며 술잔이 오가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어린 우촌 선생에 대한 칭찬의 소리가 들려나왔다.어머니 이써 부인은 손념을 접대하는 한편 면육이며 수정과를 아들 형제를 위해 따로 남겨두었다. 그러나 우촌 선생은 음식 욕심을 내지 않았다.“어머니. 저 현육과 수정고}를 손님상에 더 내다 드리고 싶어요”그리고는 재빨리 조그만 상에 음식 그릇을 깔금하게 차려서 들고 사랑방으로 나가는 것이였다.“이것은 너희 형제를 위해 남겨 둔 것이니 손님상에는 안 가져가도 된다"자녀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어머니는 만류하였지만 우촌 선생은 기어코 사랑방A로 음식을 들고나 손님들 앞에 공손하게 내 놓았다.
우촌 선생의 손님에 대한 미「음가짐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집안에 맛있는 음식이 마련될 때마다 대접할 손념이 오지 않으면 섭섭해 하며 손님을 기다리는 것이었다.우촌 선생은 이렇게 어려서부터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며, 욕심없이 성장하였으니, 이것은 훗날 선생이 요로지 남을 위해 폼을 바치고 자 하는 위대한 교육자로서의 자질을 일찍부터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6. 글방과 병정놀이“다른 사람보다 앞서야 할 것이며 절대로 남에게 뒤지지 말라우촌 선생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선생이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부터 폼소 실천하였던 정신이다.
선생이 일곱살이 되자 우칭공은 집안에 훈장을 두고 어린 우촌 선생에게 한학 공부를 시켰다. 우촌 선생은 학문에 있어서도 남보다 앞서야만 하는 성격이라 공부에도 날달리 열중하였다.아침마다 천자문 책을 끼고 사랑에 있는 글방에 나간 소년 완식은 훈장 앞에 공손히 절을 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 조용히 책을 펴놓았다. 예절이 남달리 바픈 완식을 대하는 한학 선생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면 서 하얀 수염을 쓰다음으며 이렇게 말했다.“완식이로구나. 잘갔니? 야제 배운 것을 다 외워 보도록 해라그러면 완식 소년은 전날 배웠던 것을 막힘없이 물 흐르듯이 줄줄 외우는 것이었다.“과연 재주가 뛰어난 아이로구나. 학문이란 열심히 하는 사람만이 크게 이룰 수 있는 법이니, 완식이는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한학 훈장의 칭찬도 칭찬이었거니와 그 밖의 여러 어른들의 청송도 대단했다. 훈장의 칭찬대로 완식은 학업에 소질도 있었으니 그날 배운 것을 그날 완전히 외우지 않고는 잠자리에 들지 않을 정도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만일 다 외우지 못했는데 잠이 쏟아절 때에는 우물가로 달려가 물을 뒤집어 쓰기도 했고, 날이 몹시 추운 겨울에는 마당에 나가 쌓인 눈을 듬뿜 모아 세수를 하여 정신을 차련 다음 눈뭉치를 들고 방으로 들어와 잠이 달아날 때까지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정신을 가다듬기도하였다.이렇게 열성으로 공부하는 것을 본 부친 우창콩은 마음 속으로 대단히 기특하게 여기면서 부인에게 년즈시 그의 건강을 찰 톨 볼 것을 이렇게 말했다.“본래 학문이란 완식이처럼 해야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지나치게 하면 병이 날 수도 있으니 적당히 자면서 공부하도록 완식이에게 일러 주시오”건강을 우려하여 적절히 쉬면서 공부할 것을 권유받을 만큼 그는 열심히 공부했으니, 이는 남보다 앞서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성격 탓이기도 했다. 완식의 방에는 밤이 갚어도 호롱불이 좀처럼 꺼지지 않았다.
‘돗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천재의 별명은 노력’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러한 열성적인 노력의 결과 완식은 글방에서 좌상(座上)으로 지목 받기도하였다.그러나 완식 소년은 오직 공부에만 몰두하는 문약한 소년 이 아니었다. 친구들과의 놀이에서도 언제나 앞장을 서는 활달한 소년이었다. 완식의 남보다 뒤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여기서도 나타난 것이다.우촌 선생의 고향인 이콧 공주는 전봉준(全珠準)의 통학군(東學뚫)이관군과 맞서 써우다가 크게 패했던 옛 전투장이었다. 전봉준은 호남고부군의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나 당시 부패의 절정에 이른 봉건왕조(封첼王朝)에 항거하여 자유와 평등, 그리고 인권을 위해 평민주의를부르짖a며 봉기하였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북진하다가 이곳에서 관군과 마주쳤던 것이다.
이러한 교전이 있은 지 불과 10여 년 후, 1007년 8월에 일제의 강점으로 비통하게도 구한국의 군대가 완전히 해산되었다. 이에 항거하는 구한국의 군대가 각지에서 궐기한 의병군(義兵軍)이 되어 일어나, 선생의 고향 인접지인 콩주읍을 비롯하여 유구, 정산, 청양 등지에서 일본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하였다.그러나 결국 냐라는 일본에 병탄(佛캄)되었고 온냐라는 비통한 슬픔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국가적인 비통한 일은 모든 어른들에게도 절치부심(切團I肉心)할 일이었£니 혈기왕성한 소년에게는 더욱 기숭아 메어지는 일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소년 완식은 위풍이 당당하던 전날의 우리나라 무인들의 그 늠능한 모습을 더욱 동경하였으며, 이후 동네 친구들을 모아 전쟁놀이에 몰두하게끔 하였던 것 이 다.글방에서 공부가 끝나면 소년 완식은 두 손을 높이 들고 앞장 서서 동리의 정자나무인 은행 고목이 있는 콧으로 뛰어가며 외쳤다.“야, 병정놀이를 시작하자 야, 모두 모여라"
앞에서 달려나가는 완식의 모습은 실로 당당하였다. 뒤따르는 친구들은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완식이의 뒤를 따르자“완식이는 우리의 대장이다"완식을 앞세운 글방의 도령들은 볼외마을의 기퉁이라고 일컴는 은행나무밑으로 몰려들었다. 모인 어린이들은 들고 온 책보따리를 여기저기 내 팽기쳤다. 무질서하기 짝이 없는 행동들이었다. 이 모양을 본 완식 소년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안돼 . 이게 난장판이지 어디 글방 도령들이 할 짓이냐. 너희들이 가지고 온 책들을 이렇게 내 던지면 안돼완식 대장의 호령은 서릿발 같았다. 지금까지는 같이 공부히는 친구였으나 이제는 대장과 부하가 되어 위 아래가 분명히 구분되었다. 부하는 대장의 말에 절대 복종을 해야 한다는 것은 어린 소년들도 너무나 잘알고있었다.
“아이구, 너무 급해서 책을 아무렇게나 던지고 말았구나"“빨리 빨리 같은 반 아이들끼리 책을 모아 놓자"“그래, 대장한터l 더 야단 듣기 전에 빨리 찰 챙겨 놓자”병정놀이를 시작하려고 하던 아이들은 자기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기라도 하듯이 재각기 한마디썩 하면서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책들을 모아 한곳에 가지런히 잘 정돈해 놓았다. 그리고는 줄을 잘 맞추어 정열해 선 다음 완식 대장의 명령이 떨어질 때를 기다혔다.양편에 한줄씩 정열해 선 어린 병정들은 서로 옆구리를 묵묵 찌르며 쑥덕거렸다.“책을 마구 내 던졌£니 대장이 얼마나 호령을 철까-7"“그래, 보통때에는 유순하다가도 대장만 되면 너무 까다로워. 그래서완식이가 아니고 완가 대장이 된단 말이야"
“맞。L 완가야 완가 대장,"어린이들은 이렇게 자기들끼리 수근거렸다. 완식은 이렇게 병정놀이에서 대장만 되면 평소와는 달리 엄하게 통솔을 하였으표로 친구들은 그를 완식이란 이름에서 따온 ‘완7F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것이다.영민한 완식 소년이 이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친구인 부하들이 수근거리면 그는 이렇게 호령했다.“이 대장이 항상 하는 말처럼 일단 병정이 된 다음에는 군기를 찰 지켜야 한다. 소중한 책을 함부로 던지고서야 어떻게 훌륭한 병정이 될 수 있다는 말이냐. 앞으로 또다시 병정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때에 는 영창살이를 시킬테니 그렇게들 알아라. 알겠냐?"버드나무로 만든 칼을 뽑아들고 엄숙한 자세로 훈계를 하는 완식 소년의 자태는 정말 대장다운 모습이었고 위엄이 철철 념쳤다. 잘 정열해 서 있던 부하들은 눈하나 깜짝하지 못하고 대장의 훈계를 들었다.
“예, 알았습니다부하들은 일제히 합창하듯 대답을 했다.완식 대장은 이렇게 훈시를 해서 군기를 잡은 다음에 작전지시를 내렸다.“오늘도 전과 마찬가지로 돌격반, 계교반(計巧班), 운반반으로 나누어 전투를 시작한다"이렇게 펀대를 짜면 그때부터 병정놀이가 시작되는 것이다. 병정놀이를 하는 동안에도 완식 대장은 부하를 격려하기도 하고 몰아세우기도 하면서 놀이를 더욱 재미있게 이끌어 갔다. 친구들은 이 병정놀이에 빠져들어 한없는 재미를 느꼈다. 이 모두 완식 대장의 탁월한 지휘능력의 결과였다.완식 소년은 병정놀이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형과 친구들과 함께공치기놀이(그때는 고무공이 없어서 나무로 깎아 만든 공을 가지고 놀았다), 기퉁놀이(기풍을 빼앗는 놀이)도 즐겨서 했다.
글방에서는 향상 남보다 앞서가며 꽁부를 하고, 놀이에서도 향상 대장 노릇을 하던 어린 완식 소년은 이때부터 공부는 물론, 놀이에 있어서도 일단 시작을 하면 보다 훌륭하게, 보다 조리있게 자기 할 일을 해나가는 훗날의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갔던 것이다.7. 조국과 배움“지난날의 우리 션조는 진취성이 부족했던 까닭으로 후손인 우리에게 모든 면에서 후진성이라는 좋지 못한 유산만 남겨주였다. 국가나 개인이나 진취성이 없으면 그 국가나 개인은 발전할 수 없는 것이다. 학생들은 이것을 명심하여 진취성을 지니고 나아가야 한다."이것은 우촌 선생이 훗날 학생들에 즐겨하신 훈화 중의 한 대목이다. 이 말씀은 선생이 젊었을 때부터 실천했던 것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라고할수 있다.
서당에서 열심히 공부하던 소년 우촌 선생은 언제부터인가 공부에 대하여 회의를 품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한학 션생에게 이렇게 질문하였다.“선생님, 저 앵무새는 말을 할 줄 알지만 결국 새에 불과하고, 원숭이는 사람의 흉내를 잘 내지만 역시 짐송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저희들도 선생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문자를 배우연 그것은 잘 알 수 있겠지요 그러나 앵무새나 원숭이가 말이냐 행동이 사람과 비슷하다고 해서 사람이 될 수 없는 것과 갇이 우리도 문자나 얽을 줄 안다고 해서 진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컷에 의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저의 의문을 풀어 주십시오."어린 우촌 선생의 이러한 놀라운 질문에 한학 선생은 어안이 벙병하여 벌련 업을 다물지 못하였다.우촌 선생은 이때 이미 한학 선생이 가르치는 대로 한자나 되풀이하여 읽고, 옛 성현들의 말을 암송하는 고루한 교육방식얘 점차 회의가 들었던 것이다. 시대는 새롭게 변하는데 언제까지 이러한 교육을 받아야 효}는지 답답하기만 했던 것이다. 다시말해 그는 새로운 학문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의 업장에서는 그러한 것을 생각할 수가 없였다.
우촌 선생에게는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반얼(反더) 감정과 신학문(新學問)의 습득 사이에서 일어나는 고민이었다. 언젠가 신학문을 배워야 당}는데 그것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당시로서는 신학문과 반일감정의 문제는 서로 용납되기 어려운 문제였던 것이다.오래전 동학농민전쟁 떼의 일이다. 조정의 군대가 일본 병시들을 앞세우고 이 고장으로 동학군을 치러 왔을 때, 일병들은 모두 신식 무기로 무장을 갖추고 스즈끼리-는 지휘관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동학군은 제대로 된 무기를 갖추지 못하고 겨우 활이나 창으후 이들에게 대항하여 결국은 패퇴하고 말았다. 따라서 이고장의 민심은 일본인에 대해 극도로 니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중앙의 조정에서는 일인들이 강압적으로 조선의 조정을 역눌러 무슨 조약이니 무슨 협약이니 하여 우리의 국권을 날로 침탈해 가고 있었으니 국민의 배얼 감정은 날로 더욱 악화되었다.더구나 우촌 선생의 선조이신 충수공(忠秀公) 내외분이 정유재란CT핍再亂) 때 왜인에게 무참히 변을 당하셨던 까닭으후 김씨 일문의 일인들에 대한 감정은 더욱 나쨌다.여기에 김씨 문중에 지산(쪼山)이라는 아호를 지닌 분이 있었는데 이 분은 배일사상이 철저한 분오로 최근에 일어난 위급한 일들이 모두 일인들의 악랄한 야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통렬하게 주창함으로 이 고장의 배일감정(排日感|춤)을 더욱 고양시켰다.당시의 상황이 이러했으으로 신학문이나 개화사상, 또는 세계의 새로운 사조에 발맞추려는 것에 대헤 이지역 사람들은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은 일본의 학문이라고 몰아부쳤으며, 친일사상, 매국행위라고 공격하였던 것이다.그러나 우촌 선생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남다른 시대인식(時代認識)과 혜안( 慧眼)의 안목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말해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사태를 냉정하고 예리하게 분석하고 판단하고 있었다. 우촌 선생은 구한국이 외국에게 침략을 함}는 것은 우리 나라가 신문명에 뒤지었기 떼문이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하루라도 빨리 신문명을 받아 들이는 길 밖에 없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판단아래 우촌 선생은 신문명을 받아들여 나리를 위기에서 구하고 국민을 어둠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친일(親日)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빼앗으려고 하는 일인들에게서라도 배워 그들을 몰아내어야 한다는 판단에 이른 것이다.그러나 당시로서는 이같은 생각과 판단을 바로 행동에 옮긴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였다. 여기에 우촌 선생의 고민이 있었다. 시세에 뒤지는 한문 공부를 그만두고 지금부터라도 신학문을 배워 망국의 위기에 서 있는 나라를 구하고 싶었으나, 현상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주위 어른들이 극구 반대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신학문과 친일 행위를 잘 구분하지 못하여 신학문을 공부하겠다고 하면 옴 동네 사람들이 친일을 한다고 비난하며 반대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우촌 선생은 잠을 이루지 못하며 고민을 했다.
이때에 우촌 선생에게 진로의 방"ß"J:-을 인도해 주는 하나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그것은 한성에서 군관학교에 근무했던 이은우(李股雨)라는 분이 이 고장으호 내려왔던 것이다.이은우 선생은 구한국 군대가 해산될 때에 군에서 나와 잠시 일본에 건너가 그곳에서 군사 공부플 하다가 나라가 나날이 쇠망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보고 관직을 버린 채 이 고장을 찾아온 것이다.그러냐 이은우 선생은 한기롭게 시골생활만 할 수가 없었다. 동민들의 대부분이 패배의식에 깊게 빠져있는 모습을 그대로 볼 수만 없었다. 동민들은 날로 멸망헤 가는 나라의 운명을 한탄만 하고 있였고, 또 온갖 악랄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침략헤 들어오는 일본을 저주만 하고 있었다. 나라의 힘을 다시 회복하여 국권을 회복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그는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다.그래서 이은우 선생은 그때부터 이곳의 유지들을 찾아 다니며 빼앗긴 국권을 되찾을 방도를 설파하였다. 그러나 이곳의 유지들 역시 시야가 좁고 완고하였다. 오히려 완강한 말투로 선생을 공박할 뿐이었다.
“이 선생, 그게 무슨 말이요왜놈들이 이 땅에 들어 오면 오는 대로 몰살시키면 되지 않겠소.”“은우, 자네는 일본에 갔다 오더니 왜놈의 물을 먹어 그런 어이없는 말을 하는가 장차 어떻게 하자느니 하는 말은 하지도 말게. 그런 말을 우리 앞에서 다시 하려면 나타나지도 말게. 만약 그런 박쥐 같은 말을 다시 하고 다니면 결백한 우리 마을에는 있지도 못하게 할 것인즉 쫓겨나기 싫으면 말을 삼가하게. 알겠나."마을 노인들은 。1은우 선생에게 욕설까지 퍼부A면서 그를 친일분자로 낙인을 찍어 버렸다. 선생은 자신의 충정을 올라주는 어른들에 대헤 답답함과 울분을 참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바위처럼 굳은 어른들의 완고함을 그로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그 중에서도 지산공(효山公)의 반대가 특히 심하였다. 그도 역시 신학문의 수입과 친일을 혼동하여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겠다면 그것이 바로 친일이라고 단정하면서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자세를 보였다.
그래도 이은후 선생은 단념하지 않았다. 이 곳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연장자 몇 분을 설득하려고 계속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마침내 선생은 연장자들을 설득하는 대신 이콧의 후배들에게 신학문을 가르치는 방향으로 생각을 바꾸어 그것을 어른들에게 권유해 보았으나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이은우 선생은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아우리 주변에서 반대를 한다 해도 그는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꺾지 않았다. 그는 구국(救國)의 길은 교육(敎育)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 콧의 후배들을 모아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이것을 알게 된 마을의 어른들은 무턱대고 선생을 친일분지·니, 심지어는 일언에게 매수를 당한 끄나풀이니 하며 비방하고 백안시(白眼視) 하였다. 이은우 선생은 그럴수록 더욱 마음을 굳건히 하며, 참고 견디면서 교육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확고히 다져나갔다.
“첫째는 해외로 망명하여 세계 열강에 우리의 처지를 호소히면서 독립운통(獨立運動)을 히는 길이요 둘째는 장기적으후 이 고장의 후배를 교육시켜 내일의 독렵운동을 준비하는 것이다"이은우 선생은 이러한 생각에서 이 고장에서 유력한 어른이며 이해가 깊은 우촌 선생의 부친 우칭공(禹昌公)을 기회 있는대로 찾아가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고 협조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였다.“우창 선생님, 오늘날 우리가 u.}국(亡國)의 고통을 당하게 된 것은 개화(開化)기- 늦었기 때문업니다. 왜놈들도 지난 날에는 미개한 민족엄에 틀렴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미개인의 나라가 대국인 청나라와 싸워 이겼고, 러시아와 싸워서도 이겼으며, 우리나라까지 념보게 된 것은 단지 개화가 우리보다 한 발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개화된 모습을 냐는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돌아왔습니다. 우리가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개화를 서둘러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독립운동의 씨를 우리 후손에게 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교육업니다. 여기에 학교를 세워서 교육을 시키십시오 한성에서도 이러한 생각을 가진 많은 선각자들이 학교를 세워 교육을 실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저는 몸이 약하여 해외로 망명을 할 수가 없으니 내 한 몸을 바쳐 할 수 있는 일이란 교육 밖에 없습니다. 나리를 되찾는 길은 이 길 밖에 없습니다."
이은우 선생은 우칭공 앞에서 피를 토하는 듯한 열정으로 자신의 심정을 말하고 나중에는 눈물까지 흘리며 호소했다. 우청공도 처음에는 쉽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으나 이은우 선생이 짚신 감발로 여러번 찾아와 애가 끊어지도록 호소를 하는 데에 감통을 받고, 또 그 말의 내용에도 일리가 었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학교 셜렵에 협조하기로 하였다.이인면(利仁面)에 자리하고 있던 구 찰방관사(察誌官舍)를 교사로정하고 반탄면(半離面), 대곡천면(大빼川面), 목동면(木洞面) 동 3개 면에서 공동으로 학교를 셜렵하기에 이르렸다.3개 면이 학교를 설립 했다는 뜻으로 삼홍학교(三興學校)라고 교명을 지어 개교를 하였다. 이은우 선생이 교장과 교사, 그리고 사환까지 겸하면서 신학문의 교육을 시작하게 되었다.
소년 우촌 선생은 누구보다 삼홍학교가 세워지게 된 경위와 그 취지를 잘 알고 있었다. 이은우 선생의 이상이 실현되어 신문명의 온상인 학교가 설렵되는 것을 호기성과 셜레임으로 지켜보았다.처음에는 개화 교육이 바로 ‘일언화(日A化) 교육’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이 절대 다수였던 까닭으로 취학할 학생들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것이 우려되었다. 완고한 학부모들이 자제들을 순순히 학교에 보낼 리가 만무했기 때문이다.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하였으나 신교육의 실시야말로 독렵운동의 일환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이은우 선생의 노력으로 학교는 계속 발전되어 나아갔다. 이 학교가 후에 이인공립보통학교(利仁公立普通學校)로 계승된 것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였다.소년 우촌 선생은 신시대의 신교육을 받아야만 자신이 희망하는 진취적인 기상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던 차에 신교육의 전당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학교가 개교되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우촌 선생은 당장에라도 뛰어가 삼홍학교에 업학하고 싶었다. 그러나 주위의 여건은 그렇지 못하였다.
우촌 선생은 상홍학교 설립을 이해하고 협조해 주신 분이 아버님인 우창공이었으므로 학교가 개교만 하면 당연히 형님과 함께 학교에 입학할 것으로 예상하고 기쁜 마음우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학교가 개교되어도 우칭꽁께서는 학교에 대해 일언반구 말씀이 없었다.이은우 선생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칭공이야말로 학교 설립에 힘이되어 준 볼외의 유일한 어른이었£며, 개교만 하면 두 자제를 남보다 먼저 취학시켜 줄 것으로 믿었으나 실제로 개교를 하였으나 입학시킬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은우 선생은 실망했다. 그리고 가만허 있을 수가 없어 중간에 사람을 시켜서 우촌 선생 형제의 입학을 촉구해 보기로 하였다.“새로 설럽한 학교에 학생이 적은데 우창공 같은 분이 솔선하여 자제를 업학시켜야 다른 완고한 분들도 자제를 취학시키지 않겠습니까. 개교를 도와 주신 공께서 자제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은우 선생의 이같은 권유와 힐책에 대해 우창공은 이렇게 답변을 전해왔다.“모든 사정을 내가 모르는 바는 아니다. 나도 개인적으로는 우리 아이들을 지금 당장에라도 삼홍학교에 보내고 싶다. 그러나 이 고장에서 나의 처지로는 그것이 쉽지 않다"이러한 말로 우청공도 좀처럼 응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c、l 때의 나라 형편은 어떠했는가 한일합방 후에 모든 사태는 시시각각으로 변하여 앞날을 예측하기가 어려웠다. 시국의 변회는 급박하여 볼꾀의 구석까지도 변화의 물결이 밀려왔다. 구세대는 물러가고 새로운 세대가 동장하는 새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국의 변화를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깨닫고 있던 우촌 선생은 구세대의 편에 머물며 천자문이나 얽으면서 낙오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진취성은 글방 도련님으로 행세동}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촌 선생은 어떻게 해서든지 삼홍학교의 학생이 되어 신학문을 배우고 싶었다.그러나 감히 아버님에게 학교에 보내달라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대신 어머니에게 말씀을 드리는 한편, 이은우 선생과 친척 어른들에게 부탁하여 간접척무로 아버님의 허락을 얻을 수 있도록 백방으후 노력하였다. 그러나 우청공은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이렇게 어려움이 더해 갈수록 우촌 선생의 신학문에 대한 향학열과 동경은 더욱 깊어만 갔다.우촌 선생은 최후의 수단을 썼다. 자신의 심정을 가장 찰 이해해 주고, 우창공께서도 사리가 분명하다고 늘 칭찬을 아끼지 않던 사촌형이형(利衛)씨에게 아버님의 허락을 받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였던것이다.
이형씨께서는 기회를 보아 우창공 앞에서 학교 입학 문제를 거론하였다.“작은아버님, 완고한 분들과 함께 하시렵니까. 이은우 선생이 왜인들에게 아첨을 하거나 아이들을 일인A로 만들려고 저 고생을 합니까. 아침 저녁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수업료도 받지 않으면서 공부를 시키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 선생은 선생대로 뜻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뭇을 높이 사야 합니다. 그리고 완식이의 장래를 생각해서라도 학교에 다니도록 허락해 주시지요”위의 말은 사실이다. 이은우 선생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학교를 세운 것이 결코 아니었고 숭고한 릇이 있어 학교를 세웠던 것이다.“내가 수업료를 받으려고 학교를 세운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이 일은 독렵운동을 하는 것이다이은우 선생은 이렇게 말하며 학생들로부터 보수를 받는 것도 거절하였다. 이형씨의 말을 들은 후 우창공의 생각에 다소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도 이은우 선생의 인품이나 뭇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형씨의 말에 동의했던 것이다. 이제는 무턱대고 완식 형제의 취학을 반대할 수만은 없었다.
“완식이가 스스로 학교에 간다면 내가 막을 수는 없지. 그러나 내가 앞장서서 완식이를 학교에 보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이 고장의 여러 사정으로 보아 그럴 수 없는 처지를 잘 알지 않는가?"이형씨는 우창공이 절대 안된다는 업장에서 많이 후퇴한 것을 알고는 그 내용을 그대로 완식에게 전해주고 새로운 방안을 의논하였다.“완식아 이제 됐다. 네가 우선 학교에 입학을 해 버려라. 그러면 아버념께서는 구태어 막지는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작은아버님의 꾸지람은 내가 대신 들을테니 너는 킥정하지 말아라."이 말에 용기를 얻은 완식 소년은 그 길로 이인면에 있는 학교로 달려가 이은우 선생을 찾았디; 이 선생은 왼·식의 철석같이 굳은 업학의 의지를 듣고는 완식 소년을 부등켜 안았다. 두 사람은 감격의 눈물까지 흘혔다. 이렇게 해서 볼외에서는 최초의 학생이 탄생되었다.
완식의 겉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머리를 길게 땅고 빨간 두루마기를 엽은 모습은 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천자문을 외우는 글방 도련님이 아니라 신학문을 배우는 신식 학생이 된 것이다. 보자기에 싼 책도 천지문책에서 〈조선어독본), <속수얼어), <산수교과서〉로 바뀌었음은물론이다.8. 삼흥학교의 삼총사우촌 선생은 글방 도련님에서 학도 도련념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아버님 우청공의 정식 허락을 받지 못한 형편이라 집에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사촌형 이형씨 댁에서 며칠 머무르며 20 리 걸이나 되는 학교로통학을 해야했다. 이것을 딱하게 생각한 이형씨는 다시 우창공을 찾아 우촌 선생의 학교 입학을 허락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 몇 차례의 간청 끝에 우호L공3로부터 반승락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그 아이가 이미 학교에 업학을 하였다나 이제 와서 내가 만류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제가 알아서 할 일이지"우촌 선생이 학교에 다니는 것을 묵인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밝혀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우촌 선생은 배움에 대한 소망을 이루게 되었고 집에서 마음놓고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우촌 선생은 그 동안 애써 주신 이형씨에게 깊이 감사를 드렸고 이번 일을 통해 부모님의 깊은 사랑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신식학생 우촌 선생은 삼홍학교에 업학하고 난 다음에는 친척인 성국(成國)을 비롯한 여러 친구들의 부모님을 찾아볍고 자제들을 신문명의 교육을받도록 간곡히 말씀드혔다. 그리하여 여러 학부모로부터 숭락을 얻어내어 많은 소년들이 신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비록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시골이지만 이 콧에 신교육을 받은 인사들이 많은 까닭은 우촌 선생이 이 때에 씨앗을 뿌려 놓았기 때문이다. 우촌 선생의 진취성과 선견지명이 그 당시에 이미 그 탁월함이 벚나 같은 또래 아이들의 부모까지 설득하여 야러한 훌륭한 엽적을 남겨 놓게 되었던 것이다.
기초가 약한 건물은 사상누각이요 든든한 반석위에 지은 건물은 불멸의 금성철벽이 된다. 어려서부터 이렇게 교육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의지를 지니고 자신의 연마는 물론, 친우들까지 새로운 학문에 눈을 뜨게 한 우촌 선생은 분명 교육자로서 대성할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이후 그의 생애에 있어 교육에 대한 신념은 무너질 수 없는 철벽과 같은 것이었다.우촌 선생이 삼홍학교에 업학해 보니, 그 콧의 학도들은 대부분 숙성한 사람들이었다. 나이도 17세부터 23세에 이르는 청년층이었고 그중에는 성례를 마친 기혼자도 있었다. 그들은 상투를 짜르고 교문에 들어섰던 까닭으로 어린 학생들은 그들에게 별명이 붙어 다니기도 했“애기 아버지"
“영감님"이렇게 놀려 대며 장난치기를 어린 학생들은 아주 재미있어 했다.우촌 선생은 학생들 중에서도 나이가 가장 어리고, 매일 20리나 되는 먼 길을 통학하여 어려움이 많았으나, 언제나 성적은 뛰어나 반장의 자리를 맡고 있었다. 우촌 선생은 공부도 잘 했을 뿐 아니라 학교에 빠짐없이 출석하였다.새벽에 먼동이 터서 하늘이 뿌영게 밝아 올 때면 우촌 선생은 벌써 볼외 어귀의 쑥티고개에 이르러 있었다. 쑥티고개는 볼외와 학교 사이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는 고개였다. 이 고개에 오르면 계룡산의 영봉이 장엄한 모습A로 솟아 있는 것이 멀리 바라보이고, 발 아래에는 둥글풍글한 야산들이 나즈막히 엎드련 있는 것이 손에 잡힐듯 하였다. 그 사이사이로 구불구불 휘어나간 길이 이인면의 상홍학교로 멤어 나가있었다.쑥티고개에는 두어 아름이나 되는 산벗나무가 떠억 버티고 서 있고,그 아래에는 금잔디밭이 있어 가파른 고갯길을 숨가쁘게 올라온 길손이면 누구나 이 나무 아래 시원한 그늘에서 한숨 돌리며 쉬어 가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 나무 한쪽 옆에는 나무를 의지하여 돌을 쌓아 올린 성황당(城P皇堂)이 있었다.
학도 우촌 선생은 이른 아침 쑥티고개로 향하는 길로 나와 동구 밖의 세갈래 길에 이르르면 대(大) 자의 한 획을 땅바닥에 그어놓고 쑥티고개로 달려가는 것이 매일 아침마다 하는 버릇이었다. 그것은 세갈래길에서 쑥티고개로 모이는 세 동창이 대(大) 자의 한 획씩을 맡아 긋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기 떼문이었다. 그들은 우촌 선생과 남정관(南廷培), 박창식(朴影植) 세 사람으로 관포지교(管廳之交)의 두터운 우정으로 맺어진 사이였다. 이들은 아침마다 이 콧을 통과하며 나이순으로 정해놓은 대(닛j 자의 획을 긋기로 했던 것이다. 띠라서 각자 맡은 획 이 그어져 있으면 그 사람은 세갈래 길을 통과한 것이고, 획이 그어져 있지 않으면 그 콧을 통과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미 통과한 사람은 천천히걸으며 뒤따라 오는 사람을 기다렸고, 뒤에 오는 사람은 통과한 사람과 만나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였다. 그래서 세 학우는 쑥티고개에 가는 도중에 모이게 되였다.
이렇게 약속을 하고 매일 이것을 실천하는 이유는, 세 학우가 먼 통학길을 함께 다념으로써 지루하고 힘든 것을 잊자는 것이었고, 대(大)자를 선택했던 것은 먼훗날 ‘대성하자’는 뭇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세 학우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우촌 선생이 마지막 획인 파엄을 맡아 쓰고 있었다.이렇게 절친한 세 학우가 학교 가는 도중에 모이면 공부 이야기, 학교 이야기, 그리고 존경하는 이은우 선생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각자 달성하고 싶은 미래의 이상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였다. 우촌 선생도 자기의 꿈을 이야기 했다.“사람은 반드시 학문을 해야만 사람답게 살 수 있어. 배움의 터전인 학교를 남의 나라에 뒤떨어지지 않게 만들어 공부하고 싶어하는 우리 후배들을 가르쳐야 해.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 좋은 학교를 세워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내꿈이야"
우촌 선생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련 이야기를 하며, 친구들의 의견을 묻기도하였다.“배움의 전당을 잘 꾸미고 못 꾸미는 데에 따라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7"이런 이야기들을 하며 우촌 선생은 장차 자신이 설계할 이상적인 학교를 푸른하늘파 흰구름 위에 그려 보는 것이다.세 학우는 이렇게 각자의 꿈을 이야기하며 학교까지의 먼 20리 길을 함께 걸어갔다. 그러면 그 먼 길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주 재미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아침마다 학교에 기는 시간이 기다려지곤 하였다.아침 등교길에 나누는 이야기 중에는 스승이신 이은우 선생에 대한이야기가 많았다. 이은우 선생에 대헤 이야기 할 때는 특히 그의 군인다운 씩씩한 기상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모두 이은우 선생을 존경하고 따르고 있었다.
이은우 선생은 애국지사로서의 면모와 독립운동에 대한 남디론 자신감과 열정을 학생들에게 늘 심어주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그는 조그만 부정이나 불의에 대해서도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엄격하고 준엄했다. 학생 중에서 누가 옳지 않거나 의룹지 못한 일을 했을 때에는 몇 시간씩 엄한 벌을 주는 것도 이러한 그의 교육철학에서 비릇된 것이었다.그러나 그 학생이 자기가 찰못했다고 반성을 하고 깊이 뉘우치면 그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잘못된 내용을 깨우쳐 주고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자상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 디음에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잊어 버리고 그 학생을 전과 같이 명랑하게 대해 주었다.우촌 선생은 이은우 선생의 이러한 가르침이 좋았다. 그리고 그 솔직담백한 성격도 닮고 싶어 했다. 어느 사이인가 우촌 선생은 마음 속으로 이은우 선생을 모법으로 상고 있었던 것이다.
이은우 선생의 가르침은 그 뿐이 아니었다. 그는 체조시간이 되면 군인 시절에 업던 구한국 군대의 복장을 본떠 만든 체조복과 모자를 쓰고 나왔다. 광목으로 만든 체조복과 체조모를 쓴 선생은 군대식 교련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그러한 복창은 이 곳에서는 처음 보는 것이라 부근의 농민들은 그 모양을 보고 우습다고 했으나, 우촌 선생은 그 기상이 늠늠하여 그 복장을 무척 좋아하였다. 우촌 선생은 다론 학생들과 교련을 받으며 속으로 말했다.“거룩한 선생님이시다. 훌륭한 선생님이시다"쑥티고개를 향해 걸어 올라가는 세 학우눈 이은우 선생 이야기를 그칠줄 모르고 계속하였다.“정관형, 나도 크면 이 선생님 같은 군인이 될테야"우촌 선생은 남정관 학우에게 자신의 포부을 말하였다.“완식아, 이 선생닙 같이 되는 것을 막지는 않겠지만, 지금 선생님은 군인이 아니얘 학교 선생님이야. 지금 우리나라에는 군대가 없어. 그래서 이 선생님도 군안을 그만 두신거야 전에 공주에서 의병이 일어났던 것도 일인들에게 강제로 해산 당한 우리나라 군인들이 일인에 대향해서 일어났던 것이래"
남정관이 새삼 일깨워 주는 말투로 설명을 해 주었다. 우촌 선생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기는 했지만 정관 학우의 말을 다시 들으니 온몸의 기운이 쭉 빠지는듯 하였다.“나도 알고 있어. 나라를 빼앗겼으니 그럴 수 밖에 없지. 군인이 참멋있고 좋기는 좋은데 ....하며 몹시 안타까워 했다.소년다운 꿈과 희망에 벅찬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 받으며 세 학우는 쑥티고개를 향해 힘차게 달려 올라갔다. 고개 꼭대기에 제일 먼저 오른 우촌 선생은 고개 아래를 내려다 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호령을 했다.
“기착(氣훌)."“앞으로 나란히"“바롯“앞으로 갓"이은우 선생의 구령을 흉내내어 큰소리로 외쳐 보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벽력 같은 구령 소리에 깜쩍 놀란 남정관과 박창식 두 학우는 귀를 막고 산벗나무 뒤로 숨었다. 우촌 선생의 구령 소리는 앞산에 부딪쳐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구령 소리에 쑥티고개와 앞산도 놀라고 흔들리는것만같았다.우촌 선생은 되고 싶은 군인이 될 수 없다는 실망 때문에 이렇게 큰소리로 호령을 해 울분을 달래였던 것이다. 우촌 선생이 훗날 체육과를 돼한 것도 이때에 이미 마음 속으후 정한 것일지도 모른다.쑥티고개 정상에서 큰 소리로 구령을 부른 다음에는 또 매일 하는행사가 있었다. 그것은 산벗나무 옆의 성황당에 돌쌓기를 하는 것이었다. 아것은 우촌 선생이 먼저 제안하여 시작한 일로써 이 콧을 지나가는 킬손들에게 돌을 치워줌으로 통행에 불편함을 없애주고, 성황당도 튼튼하게 해주기 위한 뜻에서 시작한 일이다. 만일 누가 돌쌓기를 하지 않을 때에는 별로 돌을 두배나 많이 쌓아야 했다. 이 돌쌓기를 감시하는 것이 우촌 선생이 맡은 일이었다. 때때로 돌쌓기를 하지 않는 학우에게는 불 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우리가 다같이 하기로 약속한 일을 혜 안하는 거야? 남자가 그래서 야 이 다음에 무슨 일을 하겠어. 예 꾀를 부리지?"우촌 선생은 끝내 용서를 하지 않고 돌쌓기를 두배로 시키고야 말았다. 학우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우촌 선생의 말에 동의를 하고 돌쌓기를 하였다. 훗날 우촌 선생이 봉사정신이 투철하고, 후생들에게도 봉사정신을 강조한 것은 이때 동네 사람들을 위해 톨쌓기를 하면서부터 이미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이렇게 성황당에 돌을 잘 쌓자 부근 동네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 어린 소년이 마을 사람들을 위해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이 몹시 기특하게 보였던 것이다.
학교에서 공부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쪽다리’라고 하는 농가 4~5호가 모여 사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 콧에는 ‘문성 어머니’라고 하는 노파가 차린 초라한 주막이 한 채 있었다. 세 학도가 이 주막 앞을 지나면 노피는 매일 보면서도 언제나 몹시 반가워 하였다.“의관댁 학도 도련님들이 요늘도 학교 갔다 오시는구먼. 여기서 좀 쉬었다 가시유. 오늘도 공부 많이 했수?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니 이 다음에는 틀림없이 높은 어른이 될 거유. 내가 정심이라도 차려 드리고 싶은데 드릴 것도 변변치 않고, 우리 농부들의 요기거리는 이거니 이거라도 좀 마시구들 가시우. 우어라도 꼭 좀 드리고 싶어 그러는 거니 디른 생각 말고 좀 마시고 가유. 자 사양 말고 좀 드시유. 이것은 내 정성이고 공부 잘 하라고 드리는 거니 그렇게들 아시유."문성 어머니는 수다를 떨면서도 진정 어린 태도로 정성스럽게 늦주발에 막걸리를 딸아 세 학도에게 권했다. 세 학도는 학도의 신분으로 숨을 마신다는 것이 그렇게 내키지 않았지만 문성 어머니가 하도 지성으로 권하는 바람에 어찌할 줄을 모르고 망설이기만 하였다.
“이거 큰일인데? 어쩌지7"“그렴, 안되는 일이지. 그러나 우리에게 대접을 하고 싶어 정성으로 저러시니 어떻게 하나r’세 학우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자 재차 권하므로 그 정성에 감동되어 조금씩만 마시기로 하였다. 마침 시장하기도 하여 몇 모금씩 마시며 문성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였다.문성어머니의 대접을 받은 세 학도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길을 걸으며 방금 있었던 일과 앞£로 해야 할 일을 호탕한 기분으혹 이야기 했다. 어렵게 술을 마신 일이며, 문성 어머니 이야기며, 한없이 높게 펼쳐진 푸른 창공을 바라보며 앞날의 꿈과 설계를 끝도없이 펼쳐나갔다.
이즈음 우촌 선생은 학교에서는 다른 학도보다 성척이 뛰어나 향상 으뜸의 자리에서 학업에 정진하였으며, 학교 밖에서도 모든 사람의 기대와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창래가 촉망되는 청년으로 자라고 있었다.그 후, 우촌 선생은 이은우 선생의 자택에서 숙식을 하며 학업을 계속하였다. 존경하며 모든 면에서 본받을 점이 많은 이은우 선생 밑에서 같이 생활한다는 자체가 우촌 선생에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이은우 선생의 일거수 일투촉을 눈여겨 보며 따라 배우며 모르는 것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즉시 물어 볼 수 있다는 것도 우촌 선생에게는 다시 없는 행운이었다.이은우 선생도 우촌 선생의 학엽이나 생활을 세심하게 보살펴 주며 정성을 쏟았다. 책 한 줄, 행동 하나에도 일일이 지도를 아끼지 않았다.그리고 장래의 일에도 기탄없는 조언을 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너는 분명히 군인의 기상이 있다. 그러니 군인이 되어 이 나라, 이 민족을 다시 살리도록 해라. 너는 틀림없이 할 수 있을 것이다이은우 선생은 모든 기대를 우촌 선생에게 걸며, 혼신의 정성을 기울여 가르침에 힘썼다. 이러한 것을 잘 알고 있는 우촌 선생도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선생닝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모든 면에서 최선의 열과 성을 다하였다. 미래의 희망을 위해 선생님과 학도가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우촌 선생은 이미 보통학교 시절부터 이렇게 뛰어난 자질과 능력을 보이며 창차 위대한 교육자가 될 기초를 쌓아 나갔다. 마치 쑥티고개에서 성황당에 돌 하나하나를 쌓아 나기듯, 실력과 소양을 쌓이- 나갔던 것이다. 한 시람의 인물이 형성되기까지는 이같은 훌륭한 선생이 그 뒤에 있게 마련이다.
제 3 장 용기와 집념
(留學期, 1924~ 1927)1. 현해탄의 노을우촌 선생은 삼홍학교의 후신인 이인보통학교(利仁普通學校)에서 초등교육 과정을 이수하였다. 스스로 학업에 열중하고 스승 이은우 선생의 정성어린 지도를 받은 우촌 선생은 하루가 다르게 학문의 깊이를더해 갔으며 인격도 고매하게 도야되어 갔다.
그러나 이 고장의 어른들은 아직도 학교라는 콧에서 공부플 하여 초등교육이라도 받으면, 그것은 곧 우리 민족성을 잊어버리고 고유의 미풍양속을 파괴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일인화가 되어 친일에 앞장 서서 국가와 민족에 반역을 한다고 믿고 있었다.그러나 이은우 선생 문하에서 수학한 우촌 선생을 비롯한 몇몇 학도들을 보고는 그러한 생각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자신들이 가졌던 그러한 선업견은 편견이었으며 고루한 시대착오적인 생각이었음을 점차 인식하게 되었다.우촌 선생이 수학하는 모습과 행동을 보건대 학년이 높아질수록 예의범절이 더욱 단정해쳤으며, 향리(獅里)에 대한 봉사정신은 헌신적이었으며, 애국애족하는 마음도 더욱 굳건해졌음을 분명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완고하던 여론도 상당히 완화되고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이제는 시대가 바뀌었£니, 세계의 조류에 따라 모두 신학문을 배워야 할 때가 되었어 "
“그렇구 말구. 우리가 지금 얼인들에게 압박을 받게 된 것도 새 문명에 뒤졌던 때문이야 아우렴 배워야지. 아는 것이 힘이니까"“의관댁 자제가 이번에 졸업을 한다지? 그 댁에서는 학비에 구애 받을 것도 없으니 완식이를 서울에 보내 더 높은 학교에 다니도록 해야 헤. 만일 의관 어른이 안 보낸다면 우리가 권고해서라도 보내도록 해야지"은행 정자나무 밑에 모인 촌로들도 이렇게 생각이 바뀌었던 것이다. 신교육을 받아야겠다는 우촌 선생의 집념이 이룬 놀랄만한 변화였다.우촌 선생은 그렇지 않아도 경성( 京城)으로 유학갈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보통학교에 취학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았는데. 이 고장에서 통학하는 것도 아니고 그 먼 곳에 가서 흔자 공부한다는 것에 일종의 두려움도 없지 않았다. 더우기 부모님께서 허락하실것 같지도 않았다. 우촌 선생은 다시 고민하기 시작하였다.홀로 애태우며 마음을 졸이고 었던 중, 졸업식이 가까운 어느 날이었다. 부친이 사랑으로 우촌 선생을 불렀다. 얼굴에 기쁨을 가득 띠운아버념이 놀랍게도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다.“내가 들£니 이번에도 우퉁을 했다지? 게다가 개근까지 하고, 잘했다. 사내가 한번 시작했으면 그렇게 해야 하느니라. 그래서 너만 하고자 한다면 서울로 보내 공부를 더 시키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마음을 정하여라. 이 콧에서 서울로 유학떠날 사람은 너 하나 밖에 없는듯 하니 서울로 가면 외로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장차 이 나라 이민족을 위해 큰 일을 해야 할 사람이라면 그 정도의 고통은 이겨내야 할 것이다. 가겠다면 머무를 곳도 내가 마련해 줄 것언즉 그리알고 아무 염려 말도록 하여라하늘 같은 아버님의 유학 권유와 그 사려 깊은 염려에 우촌 선생은감격하여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아버님 앞에서 벌떡 일어나 큰 절을 올리면서 감사의 말씀을 올렸다.
“아버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아버님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탄천면과 이인면에서 최초의 서울 유학생이 탄생하였다. 우촌 선생은 단신으로 경성을 향하여 청운의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우촌 선생이 떠나던 날, 이 고장에서는 처음 탄생된 유학생이라 온통네가 떠들썩했다. 가족과 일가친척은 물론, 학교 선생님, 친구들, 그리고 두 개 면의 동민들까지 나와 장도를 축하해 주었다. 우촌 선생을 앞세우고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5-6마정의 먼거리까지 전송을 나왔다. 우촌 선생은 동민의 뜻깊은 환송에 갚이 감사하였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내가 이콧에 다시 돌아올 때는 나 개인의 금의환향이 아니라 이 분들 모두에게 조금씩이라도 나누어 줄 금의(鎬衣)를 가지고 와야겠다"우촌 선생은 이 다짐을 훗날 실천하였다. 탄천과 이언을 위하여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노력하였으며, 이 고장을 위한 여러가지 사업을 벌여 고향에 대한 보은의 뭇을 전하였던 것이다.
고향을 떠날 때, 우촌 선생은 멀리 가까이에 있는 산천과 눈앞에 펼쳐진 모든 풍경에게 작별을 고하였다. 유유히 후르는 저 금캉의 줄기, 은행 정자나무, 굴덕재, 박동산이며, 정다운 쑥티고개, 쪽다리의 노파,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는 소중한 고향의 추억이었다. 이 모든 것들을 당분간 못 볼 것을 생각하니 가솜이 에어졌다. 그래서 다정한 마음으로 다시 볼 날을 기약하며 작별을 고하였다.그 아름다운 모습들이 점점 눈앞에서 아득해질수록 오히려 그것들이 더욱 진한 모습으로 기슴에 새겨지는듯 하였다.우촌 선생은 고호뇨을 떠나 경성의 새로운 분위기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다가 방학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와 마을 어른들을 일일이 찾아 볍고 인사를 드리는가 하면 어린 시절에 뛰어 놀던 곳도 돌아보면서 고향에 대한 애정을 더욱 갚게 간직하였다.
경성 유학을 하는 동안 우촌 선생은 전섭전력£로 학업에 열중하였다. 학교 성적이 우수한 것만이 부모님과 고향 분들에 대한 보답이요? 애향심을 키우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잘알고 있었기 때문아다. 타고난 학업에 대한 열의와 타향에서의 외로운 생 활을 극복하려는 그는 남달리 강한 의지력을 지난 그는 어느 학생보다도 열심히 공부하였던 것이다.
고향에 계신 우칭공 어른도 경성에 보낸 자제에 대한 애정이 각멸하였다. 훌륭한 국가의 동량을 키우기 위해 귀한 자식을 경성에 보내기는 하였으냐 부모된 마음으로 언제나 자식의 안부가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우창꽁의 부성애(父性愛)도 극진하였으니, 다음의 한 예로서 그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우촌 선생은 본래 천품이 건장하여 신체도 건강하고 의지력도 강하였다. 그러나 고향의 부모님 슬하에서 자랄 때와 경성 객지에서 혼자 생활할 떼와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컸다. 객지 생활이 불편한 데다가 불굴의 결심으로 학업에 불철주야 정진하니 그 건강한 몸이라도 무리가 가지 않을수 없었다.마침내 병이 나게 되어 부득이 약을 먹어야 했다. 그런데 그 약값이 만만치 않아 다른 사람에게서 약간의 돈을 벌려야만 하였다. 고향댁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얄 리가 없었고, 전과 마찬가지로 날짜가 되면 정해진 금액만 보내 왔다. 그러나 병은 쉽게 낫지를 않고 남의 돈을 무작정 벌려 쓸 수도 없어 걱정이 늘어났다. 우촌 선생은 몸과 마음이 모두병들어 갔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고향의 부모님에게 알리면 부모님의 심려만 끼쳐 드리고 또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을 하라고 할 지도 몰라 어두운 방안에서 신음만 하고 있었다.우촌 선생이 이러한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아버님 우창콩이 마침 평양에 볼 일이 있어 여행을 떠냐게 되었다. 가는 길에 우촌 선생이 기거하는 콧에 들러 보았다. 여기에서 병들은 이들의 초훼한 모습과 돈에 쪼들리는 사실을 알게된 우창꽁은 즉시 친구에게 빌린 돈을 내주는 것은 물론 효과가 좋다는 약을 사방에서 구하여 복용토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우촌 선생이 건강을 회복한 것을 본 다음에야 평양길로 떠났던 것이다. 우j품의 우촌 선생에 대한 지극한 부성애의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이후 아버님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더욱 깊어졌음은 물론이다.경성에서 홀로 병을 앓기도 하고 고독함을 참아야 하는 어려움을 겪어 가면서 학업을 예정대로 마친 우촌 선생은 여기에서 학교를 마칠생각은 하지 않았다. 상급학교로 진급하여 앞길을 개척해 보고 싶었다.
우촌 선생의 고민은 또다시 시작되었다. 청년의 고뇌를 몇 번이나 거둡한 끝에 마침내 결론에 도달하였다.“우리 한민족의 현재 처지에서는 마땅히 구국 독립운동을 벌여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해외 망명을 하여 열사나 의사로 독립투사가 되거나, 국내에 남아 한민족의 정신을 새롭게 일깨워 주는 교육자가 되어야 한다. 먼저, 내가 독립투사가 될 수 있겠는가? 아니다. 나의 출신, 성격, 그리고 주위 환경과 처지가 독립투사가 되기에는 맞지 않는다. 더구나 나의 성격이 망명 투샤로서는 적합치 못하다. 그렇다면, 이은우 선생넘처럼 후배를 교육시킴으로 교육을 통해 훗날을 기약하는 교육자가 되어 독립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교육 중에서도 어느 분야의 교육을 전공해야 할 것인가? 전에 이은우 선생의 군인다운 성격을 흠모하기도 하였고 또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건강이라고 한다면 우리 후배 국민의 신체를 단련시키는 체육을 전공하는 교육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개 그래서 우리 민족 전체의기상을 높여 주어야 한다. 과거의 고루한 유학자들이 유약한 인물로 후학을 교육시켰던 까닭으로 이 민족, 이 국가가 오늘의 이런 무기력한 모습이 되지 않았는가? 모든 면에 진취성이 없고 나약한 정신의 소유자가 되는 교육을 시켜서는 안된다. 앞으로도 그러한 나약한 교육을 계속시킨다면 지금처럼 일본의 속국이 되거나 식민지하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나는 체육을 전공해 체육 교육자가 되어 강인한 국민을 키우는 데 나의 신명을 바쳐야한다"
우촌 선생은 몇 년 동안이나 심사숙고 하고 자문자답 한 끝에 마침내 체육교육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체육을 전공하려면 일본으로 가야만 했다 국내에는 체육을 전공할 수 있는 학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일할 결심을 하고 그 준비에 착수하였다.우촌 선생의 결심은 굳었고 이상은 컸으나 그 실천은 어려웠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부친인 우창공이 허락하지 않는 점이었다. 우창공은남달리 부성애가 강하고 자식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그 힘탤이l 서는 처음으로 자제를 경성의 중학교에까지 보냈으나, 일본으후 유학을 보낸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당시 국내에는 전문교육 시설이 거의 없어 중등교육을 마치는 것이 고작이었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등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특수층과 친일파 몇몇 시람의 자제 등 극소수에 한정되어 있었다. 더구나 배일 사상이 투철한 우창공으로서는 자제를 도일시켜 교육을 더 받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자제가 일본 유학길에 오르면 당사자는 물론 온 가문이 친일파로 지목되어 비난받을 염려도 없지 않았다. 따라서 그러한 위험한 일을 자처할 수 없는 처지였다.우창공의 생각으로는 당시 실정에서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유식계급에 속하므로 고향에 돌아와 얼제의 관리가 아닌 교육자가 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교육애 종사하며 은연중에 민족정기를 양성케 하고 착실하게 가정을 꾸려가기를 바랬던 것이다.
이러한 판단에서 우청공은 자제를 도일시키려는 의사가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우촌 선생이 방학이 되어고향에 돌아올 때나, 펀지로 장래의 진로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도 일본유학 문제에 대혜서만은 단호한 입장이였다.
“현재 우리 나라의 처지에서 그만큼 공부를 하였으면 되었다. 이제 는 고향에 돌아와야 하지 않겠느냐.?"아버님의 뜻이 이러하니 효성이 갚은 우촌 선생은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일본 동경A로 길을 떠나고 싶었으나 마음속으로 생각할 뿐 이 뜻을 쉽게 내비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이러는 사이에도 세월은 흘러 우촌 선생의 경성 유학도 마칠 때가 다가왔다. 이제는 유학을 갈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할 기로에 놓여 있었다. 우촌 선생은 고민에 고민을 거둠하고, 갈등에 갈등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일본£로 가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리고 어머니 이씨 부인에게만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리고 혈혈단신으로 그먼 이국땅, 그것도 적의 땅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으후 떠났다.
그러나 출발에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일본으로 기는 여행권이 없었던 것이다 당시에 일본은 이른바 ‘합방’(合돼)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나라를 약탈하여, 일본인들은 출업을 자유롭게 허락하여 조선해협을 마음대로 오가게 하면서도, 우리 나라 사람들은 ‘불령선언’(不違蘇A) 이라는 이릉을 붙여 놓고 여러가지 까다로운 기준을 만들어 일본에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우리 나라 사람으로 일본에 갈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특수층으로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다.부산 부두에 도착한 우촌 선생은 막막하였다. 오로지 일본으로 가겠다는 결심만 세웠을 뿐 일본에 갈 수 있는 기준에 맞는 조건은 아무 것도 없었으니, 도일하는 데에 필요한 도헝증이라는 것을 얻을 길이 막막하였다. 일본행 배를 타려하니 일경은 운항증을 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막았다 일본 동경에 가서 반드시 체육학을 전공하고 돌아오겠다는 선생의 굳은 의지가 좌절되려는 순간이였다.승선을 거부당하자 선생은 실의에 빠져 어찌할 바를 올랐다. 모든 일이 암담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이미 굳게 결심한 의지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온갖 생각과 지혜를 짜내어 도일의 방법을 강구했다. 여러 날을 침식도 전폐하면서 심사숙고 한 결과 승선을 담당하고 있는 일경에게 사정을 호소하여 승락을 얻어 배에 타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다.
우촌 선생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경을 찾아가 사정을 호소했다. 일경은 처음에는 말대꾸도 하지 않고 거절만 하더니 하루 이툴 지나자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사흘이 지나자 우촌 선생의 끈기와 집념에 감동이 되어 동정적인 태도를 보이더니 마침내 비공식적인 방법오로 승선을 허락해 주였다.“학생의 무서운 열성에 내가 지고 말았네. 그렇게도 일본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내가 한 번 눈감아 주는 수 밖에 없겠구만.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지만 자네의 열성과 끈기를 봐서 허락하는 것이니 일본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게생전 처음 이국땅을 향해 현해탄을 건너는 선상에 오른 우촌 선생은 얼본에 가서 기필코 목적한 바를 달성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각오를 다시 한번 다짐하였다.
일인들이 ‘관부연락선’이라고 이름 지은 선박의 길손이 된 청년 우촌선생의 기슴에는 만감이 교차하였다. 장래를 위해 철석 같은 의지로 나선 걸이기는 하지만 생각하면, 나라없는 창민(蒼뼈)이 되어 앞날을 알 수 없는 막연한 길을 떠난다는 비분이 가슴을 때렸다. 그리고 비록 일시적아기는 하지만 정든 고국산천과 이별히l 야 한다는 감상이 물밀듯이 빌려왔다.그러나 무엇보다도 우촌 선생의 기슴을 아프게 하는 것은 부모님의 뜻을 어기고 일본3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누구보다도 효심이 깊었으며, 념-달리 부모님의 각별한 보살펌을 받아 온 그로서는 이것이 야말로 스스로도 용서할 수 없는 불효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펀치 않았다.우촌 선생은 멸라 서북편의 고향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버님, 부디 용서해 주십시£ 저의 장래와 고국의 내일을 위해 부득이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기어야 뜻을 이루어 아버님 슬하로 돌아가겠아오니 그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요”그리고 저 멀리 사라져 가는 고국 삼천리 강산에도 작별을 고했다.“고국악 잘 있거라. 다시 너를 찾는 날에는 너를 광명의 천지가 되게 할 것이다"선상에 서서 수평션을 붉게 물들이는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업친과 조국산하에 작멸을 고하는 우촌 선생의 두 눈에는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후르고 있었다. 이때가 1924년, 선생 나이 20세가 되던 해였다.일단 결심을 하면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그 일을 완수하지 않고는 못배기는 것이 선생의 성격이었다.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도착한 우촌 선생은 여러 난관을 헤치고 업학하기 어렵기로 이름이 난 일본체육학교(현재의 일본체육대학)에 유일한 한인 학생으로서 업학하였다.
이렇게 해서 우촌 선생은 소망대로 유학의 첫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나 이역만리 타국의 외로운 생활에서 오는 고초는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먼저, 가는 곳마다 일인들이 자기네 식민지의 백성이라고 깔보교 멸시하는 것이었다.
숙식처를 얻으려 하여도 조선언이라고 내쫓는가 하면, 아예 말도 부치지 못하게 하는 콧도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선생은 거리에서 며칠씩 방황하기도 하였다. 생전 처음 이러한 멸시와 고통을 당한 선생은 뺏속까지 사무치는 비통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솟구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은 오로지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이었으며, 어떻게든 지 이 난관을 극복하여 일인들에게 이겨보겠다는 일념 뿐이었다.숙식처마저 제대로 구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마침 친절하고 양심적인 일인을 만나 하숙집을 가까스로 얻을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생활풍습과 관습이 다른데서 오는 어려움 또한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우촌 선생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이렇게 다짐했다.“이기고 말테다. 반드시 이기고 만다. 그리고 이 쓰라렴을 후배들은 맛보지 않게 하리라"
온갖 고초를 다 겪는 우촌 선생이었지만 학교에서는 언제나 열성을 다해 수업을 받았다. 학업에 대한 굳은 결심과 타고 난 명석한 두뇌로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학교 수업에 임했던 것이다. 그 결과 학과 성적 뿐만 아니라 각종 체육실기에 있어서도 일본 학생들은 그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그러나 식민지 학생을 우등생으로 뽑을 수 없다는 성나라 사람들의 옹졸한 생각을 지닌 교수들의 농간으로 우촌 선생의 학교 성적은 겨우 중간 정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선생은 이러한 불공평한 처사를 감수하거나 좌시하지 않고 여러 차례에 결쳐 분노어린 항의를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일인 교수들은 교활한 언사로 적당히 얼버무리며 자기들의 평가는 정당하다는 주장만 되풀이 하였다.이러한 편파적인 성적 평가는 끝까지 시정되지 않았으며, 우촌 선생의 당당한 항의는 번번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부당한 처시는 교수 뿐만이 아니었다. 일인 학생들도 선생의 뛰어난 자질과 노력에 대해 시기심을 가지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거나 방해공작을 하는 것이였다.
일인 학생들이 우촌 선생을 괴롭힌 일 중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기계체조시간에 휩틀넘기 실기 수업 받고 있던 중에 우촌 선생이 가장 높은 띔틀을 무난히 념자 일인 학생들이 심한 질투심을 품었던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우촌 선생이 다시 띔플을 넘기 위해 도움달리기를 하여 힘차게 뛰어 오르려는 순간, 발을 걸어 우촌 선생을 넘어뜨려 부상까지 입혔던 것이다.그동안 참고 참았던 우촌 선생이었지만 이 순간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넓은 운동창이 찌령찌령 울리는 무서운 고함과 함께 비호처럼 그 일본 학생에게 달려들어 일격을 가했다. 크게 한 대 얻어 맞은 일본 학생은 비명을 지르며 운동장에 넘어져 졸도하고 말았다. 선생이 그동안 일인들로부터 받은 모멸과 수모에 대한 감정이 일순간에 폭발하였던 것이다.
이 창면을 보고 있던 일인 교수와 학생들은 지금까지 자기들이 우촌 선생에게 저지른 잘못을 깨달아서인지 졸도한 학생을 돌볼 생각도 못하고 새파렇게 질려 우촌 선생의 분노가 가라앉을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촌 선생의 분노가 자기에게까지 미치지 않을까 하고 쩔쩔매는 것이었다.이 사건이 있는 뒤로 일인들은 우촌 선생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아래 학년에 재학중인 한인 학생 한 두 명에 대해서도 전과는 달리 훨씬 부드럽고 상냥하게 대하였다. 비겁한 행동이 없어진 것은 물론이고 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친절까지 베푸는 것이었다. 역시 야비한 무리에게는 힘의 논리가 통하는 모양이었다.그러나 이즈음 고향의 우창콩으로부터는 지금 당장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하라는 독촉이 성화같았다. 그러나 우촌 선생이 귀국할 뜻을 보이지 않자 우창공께서는 급기야 학비의 송금을 중단시커 버렸다. 이때부터 우촌 선생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모든 일에 있어서 여유가 있고 늠늄한 자세를 보이던 선생이었지만 갑자기 당하는 경제적 어려움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념의 뜻에 따라 귀국할 수도 없었다. 그 동안 많은 시련을 겪으며 어렵게 계속한 학엽이므로 지금에 와서 중단할 수는 없었기 띠l문이다. 다시 한번 와신상담하는 수 밖에 없었다.
풍족한 국가에서도 대학생이 되면 자력으로 학비를 조달하는데, 하물며 남의 나라 식민지가 된 나라의 학생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학비는 자신이 조달해야 된다고 생각한 우촌 선생은 이떼부터 학비 마련을 위해 거리로 뛰쳐 나왔다.고국의 유복한 가정에서 아무런 부촉함 없이 자란 우촌 선생이 무슨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었£나, 지금 수만리 타국에서 적수공권이 되고보니 무슨 일이든지 하여 학비를 조달아여야만 하였다.가장 먼저 시작한 돈벌이는 일인의 가정에서 어린아이들을 돌보아 주는 일이었다. 줄기차게 울어대는 어린애 를 업어주고 안아주고 달래는 일은 성질이 급한 선생에게는 무척 견디기 어려운 일이었으나 참고계속하는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고국에서는 시남매 중에 막내로 자라 장난으로라도 누구를 업어 본 일이 없는 선생으로서는 어린애를 엽어 준다는 것이 여간 어색하고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학업을 계속해 야만 한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밤늦게까지 아이를 업어 달래었다. 그리고 시간을 아끼기 위해 아이를 엽은 채로 교과서를 펴들고 공부를 하였다. 훗날, 그때의 일을 회고하는 선생의 회고담에 의하면 여러가지 고된 일을 해보았지만 그 중에서도 아이 보는 일이 가징 힘들었다고 히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 선생의 고생을 짐작할수가 있다.그러나 아이 보는 일도 오래 계속할 수가 없어, 그 다음에는 한인 학생들이 많이 하고 있던 신문 배달을 시작하였다. 이 일은 이른 새벽 등교하기 전과 하교 후에 하는 일이라 학생에게는 시간적으로 아주 적합했으나 수엽이 너무 미미하여 학비에 별로 보탬이 되지 못하였다.좀 더 수엽이 좋은 일거리를 찾던 우촌 선생은 인력거 끌기를 시작하였다. 이 일은 수업이 제법 두둑하였으나 무척 고된 일이었다. 그러나신체가 단련되고 체육을 전공하고 있는 선생에게는 차라리 거의 움직이지 않고 서 있어야만 하는 아이 보는 얼보다는 험이 덜 들었다.
인력거에 한 사람을 태우고 가피른 고개길을 오를 때면 온몸에서 땀이 비오듯 흐르고 뼈마다가 쑤시고 아왔다. 그러나 이것도 식민지 된나라의 국민이 겪어야 할 시련이라고 생각하며 달게 받았다. 선생이 나중에 신경통을 고생한 것은 이때의 과로에서 얻어진 병이 아닌가 싶다.
또 다른 일거리도 생겼다. 정초가 되어 떡을 쩡는 품팔이 일이었다. 이 일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어서 하려고 하는 일꾼들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선생은 그들과는 반대로 몸에 이로운 전신운동이 된다고 하면서 풍삼도 많이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기꺼이 떡메를 메고 나섰다.
땀흘려 가며 떡을 쩡다 보니, 고향에서 어린 시절에 지내던 설날의 온갖 추억이 꿈결처럼 아련히 되살아 났다 고향에서는 정초가 되면 머슴들이 넓은 마당에서 떡을 치느라고 법석을 떨었고, 아낙네들은 커다란 쟁반이며 소쿠리를 들고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여러가지 음식을 만드느라고 분주히 오가먼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우촌 선생 형제와 일기- 친척 소년들은 입맛을 당겨주는 흰떡이며 인절미, 그리고 부침개들을 주는데로 받아 먹으며 즐거워 했다. 정초 음식이 다 되면 세배차 오는 통네 어른들을 위해 음식 접대를 하며 재미있게 지내기도 했다.지금 그 얼들을 생각하니, 너무냐 처지가 달라져 마치 아득한 다른 세계의 일로만 여겨졌다. 험에 겨운 떡메질을 땅을 1멜벨 흘리며 해대는 우촌 선생은 지나간 시절을 생각하니 콧날이 시큰해지며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리고 불효한 자식을 기다리며 애태우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니 두 분의 모습이 눈 앞에 어른거리며 웹고 싶은 정이 한없이 치미는 것이었다.
하엽없는 고향을 향한 그리움과 부모님 생각에 온몽이 떨려 오는 우촌 선생은 떡메가 무척이나 무겁고 하던 일도 몹시 힘들게 느껴졌다.“이런 외로움을 견디고 이렇게 힘든 노동을 하면서 과연 돗을 이루어 고국에 몰이-갈 수 있을까? 그리고 고국에 돌아가서 과연 보람있는 일을할수 있을까?"우촌 선생은 이같은 의구심이 들 때마다 곧 머리를 저였다.“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나는 할 수 있다. 힘차게 싸워 반드시 뜻을 이루어 고국에 돌이-갈 것이다"잠시 가졌던 의구심을 떨쳐 버린 우촌 선생은 다시 의욕을 불태우며 떡메를 힘차게 내려쳤다.
선생의 중노동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정초에는 떡치기를 하였고 그것이 끝나면 긴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도로꼬(사람이 밀고 가는 토목공사용 철로 경차량)를 밀었다. 이 일은 너무 중노동이라 일인들은 별로 하려 들지 않는 일이었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렇게 힘든 일을 주저하지 않고 하는 우촌 선생을 보며 일인들은 그의 장사같은 힘과 성실성에 찬사를 보내기도 하였다.이역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나라의 앞날을 위해 훌륭한 교육자가 되겠다는 일념£로 온갖 험난한 길을 걸어가는 우촌 선생의 그 모습은 숭고한 한국인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일본체육대학재학 당시
(1925 년)2. 아버님이시여
큰뜻을 풍고 일본으로 건너가 온갖 고초를 겪으며 유학 생활을 하는 우촌 선생은 마음 속으후는 향상 고향과 고국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향의 소식이 무척이나 궁금하였다. 이런 일에 대비하여 선생은 미리 준비해 둔 것이 있다.국민학교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던 동창 남정관씨와 서로 소식을 주고 받기로 약조를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촌 선생은 일본에서 발생되는 〈동경일일신문〉을 우편으로 발송하였고, 고향의 남청관씨는 고국에서 발간하는 〈동아일보〉를 보내주였다.이렇게 고향의 소식을 신문을 통하여 알게 된 우촌 선생은 간접적으로나마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었고 고독감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리고 힘든 고학을 하며 생기기 쉬운 좌절감도 가라 앉힐 수가 있었다.이제는 비록 힘들기는 하지만 하루하루 공부를 계속하며 체육 실기도 익혀 유학 생활의 의미를 찾을 수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고향무로부터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날아왔다. 부친 우창꽁이 중병으로 위급하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던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우촌 선생의 기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나무는 가만히 있고 싶으나 바람이 멈추지 않고자식이 부모를 모시고 싶으나 부모념이 기다려 주지 않는구나."이런 옛 글귀를 되뇌이며 우촌 선생은 그칠줄 모르는 눈물을 뿌리며 황망히 고향으로 돌아왔다.다행히 임종전에 고향에 돌아 오기는 하였으나 병세가 위중하여 어떻게 치료를 해야할 지 방도가 막연하였다. 유학길을 떠날 때 부친의 허락을 얻지 못한 일과, 부모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성심껏 봉양을 하지 못한 회한에 우촌 선생은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였다.그러나 이미 지난 얼은 후회하고 둬우쳐도 어찌허는 수가 없었고, 단지 부친의 빠른 쾌유만을 바랄 뿐이었다. 우촌 선생은 온 정성을 다해 부친 곁에서 시중을 드는 한편, 새벽이고 한밤중이고 수시로 굴덕재에 있는 옹달생을 찾아 목욕재개 하고는 천지신명께 부친의 쾌차를 소원하였다.
무심한 것이 하늘의 뭇이런7h 부친 우창공은 선생을 비훗한 온가축의 기원에도 불구하고 고요히 눈을 감으셨다. 우촌 선생은 애끓는 효심을 가눌 길이 없어 손가락까지 끊으시니 가족의 비통함은 더욱 애절하였다. 이때 우창공의 춘추 52세였고 우촌 선생의 나이 22세였다.우청공의 장례식은 원근각지에서 모인 일가전속들과 탄천면 일대의 온주민의 애도속에 엄숙하고도 장엄하게 치루어졌다. 장례절차를 모두 마친후 우촌 선생은 더욱 향학에 대한 결심을 굳혔다. 돌아가신 부친과 잃어버린 나라를 위해서는 오직 내가 뭇을 이루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우촌 선생은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그리고 또 다시 온갖 고난을 겪어가며 학업을 계속하여 1927년 3월 20일 드디어 선생은 일본 체육전문학교를 우수한 성적£로 졸업하였다.제4장 애향과교직
(敎辦期, 1927 ~ 1944)1. 민족의 사표(師表)스위스의 위대한 교육가였던 페스탈로치는 교육의 개량을 통해 빈민을 향상시킬 수 있고, 이것이 일반 사회에 까지 보편화될 때 인류의 복리는 크게 증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를 손수 실행에 옮김£로써 자신의 이상을 달성한 위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육가로서 지금까지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우리 우촌 선생도 페스탈로치 못지 않은 사람이어서 교육으후 우리 국민을 향상시키고, 우리의 애잔한 국기플 개진하여 국민의 복지를 증진시키는 동시에 국가를 부-유케 하고자 하는 대사업을 마음에 품고 계셨다. 일찍이 동경에 유학을 한 것도 그렇고,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교육 현장에 투신하신 것도 다 그런 커다란 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선생이 동경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자 고향에서는 난생 처음으후 맞는 동경 유학생이라 하여 온 동네뿐만 아니라, 면, 군까지 선생을 맞기 에 분망하였다. 이렇게 성대한 환영 속에서 고향땅을 밟게 된 선생의 감회외· 기쁨은 한이 없었다. 변함없이 으젓한 산과 들의 모습이며, 예나 지금이나 그칠 줄 모르고 유유히 흐르는 금강의 물줄기, 같은 체온을 느낄 수 있는 혈족들, 호홉이 같은 부락민들을 대한다는 것은 선생으로서는 억제하기 어려운 환희였다. 험악한 일인들과 사사건건이 부딛히다가 포근한 고국의 품에 안긴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평안 그 자체였던 것이다.그러나 그 평안도 잠시일뿐, 선생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다가오교 있었다. ‘볼외’에서는 처음으로 외국 유학을 갔다오신 분이었고, 최고의 학부를 공부하신 분이었기 때문에 선생에게 거는 기대도 그만큼 컸다. 그래서 동네 어른들은 제각기 그 기대치를 조심스럽게 털어놓는 것이였다.
“이제는 신학문도 많이 배웠고, 최고의 자격도 갖추었으니 얼마나 높은 벼슬을 할라우?"“크게 영달할 것은 떼놓은 당선이자 ...... 도장관도 싫다고 할 것 아닌가베"“아따, 이 사람애 그까짓 도장관 띠-위가 무에 그리 높은 자리란 말인기? 일국의 대신도 싫다고 할 처지인데 ..... .이러한 동네 노인들의 구구한 억측은 그칠 줄을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당사자인 우촌 선생의 대답은 이런 통네 어른들을 놀라게 하고야 말았다.“여러 가지로 생각해 주시는 것은 고맙습니다만, 저는 일본에서 돌아올 때에 이미 일자리를 정해 놓고 왔습니다."
일자리를 이미 정해 놓고 왔다는 소리에 큰 기대감을 가진 촌로들은 바싹 다기· 앉으며 호기심을 돋구었다.“그렇겠지, 서울의 높다란 벼슬자리로 정혜졌겠지?"“이왕이면 우리 도의 장관이 돼 주였으면, 우리 고장의 명예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좋았을 터인데 말이야촌로들의 기대어린 말들을 잠잠히 듣고 있던 선생은 담담하게 이렇게 대답을하셨다.“그련 것이 아닙니다. 모두 아니고요 저는 천안 보통학교의 훈도로 가기로 했습니다"이 말을 듣고 있던 촌로들은 자신들의 기대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알고 아연실색하는 모습이었다. 흥분에 가까웠던 기대치기· 일시에 무너지자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이들의 태도가 변해갔다. 차츰 경멸과 멸시의 눈초리로 변해가더니 서로들 쑤군거리는 것이었다.
“겨우 보통학교 훈장이냐 될려고 일본인7}, 동경인가를 유학했단 말인가?" “아 훈도쯤 할려면 이 고장에서 부모를 봉양하면서도 얼마든지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거의 모멸과 비난이 뒤범벅이 된 이들의 수군거럼에 대해 선생은 확고하고도 의연한 태도로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국권이 없는 지금, 우리는 독렵을 서둘러야 합니다. 우리가 살 길은 요직 그 길 뿐업니다. 이 일을 하는데에 꼭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자녀를 교육시키는 것입니다. 여러 어른들께서 는 교육이 국가 백년대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이 나라 교육에 종사하려고 하는 것도 그 돗에서입니다. 우선 보통학교의 어린이 교육부터 손을 대고, 나아가서 소년, 소녀, 그리고 청년 남녀의교육에까지 손을 1엠치려고 결심했습니다.
한번 결심한 것은 반드시 완수하고야 말 것업니다. 여러 어른들께서 는 저의 앞무로의 행로를 지켜 보아 주십시오."그러나 선생의 결연한 자세외는 달리 촌로들은 이를 이해히는 것 같지가않았다.“돌아가신 의관 영감도 헛수고만 하셨구먼“다아, 쓸데 없고 소용 없는 일이야. 십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더니 ...... 다 허사로구만"그래도 우촌 선생은 계획대로 1927년 천안보통학교로 부임하였고, 여기서 학문에서 얻은 지식을 실제로 활용뺨데 전력을 다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천안보통학교는 그 당시 체육(그때는 체조라고 불렀다) 연구지정학교여서 하나에서부터 열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이에 선생의 교육열은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난듯 하였다.
당시 선생은 체육교육에 있어서는 신진기예였고1 실기변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일본에서는 정평이 나 있는 체육전문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선생이니 그 세련된 능력은 한층 돋보였다. 선생께서 체육 시간에 실기 시뱀을 보이면 구경하는 모두가 혀 를 내두르는 것이었다.“김선생의 체조를 보면 마치 땅재주라도 넘는 것민- 갇아 정말 놀라운 솜씨야!"“난생 처음 보는 재주야 저런 것이 참 체조인 모양이지!"우촌 선생 덕분에 천안보통학교는 일반 도수체조는 물론이고, 다른학교에서 감히 엄두도 못내던 육상경기의 각 종목과 기계체조, 그리고 여학생들의 율동과 무용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실시하게 되었다. 뿐만아니라 체육을 보급하는 데에도 앞장 서 갔다.
당시 전국 우수 체육 담당교사들의 모임이였던 체육연구발표회가 천안보통학교에서 이루어진 것도 다 우촌 선생의 노력이었고, 여기서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군 전체 운동회가 개최되기도 했다.그때 당시 교육이라고 말하면 일어, 산술, 이과 등등의 학술에 관한 학과만을 공부의 대상우로 삼았고, 도회 창가, 체조 등의 과목은 명칭만 갖추고 있을 뿐 이렇다 할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던 때였다. 이러한 떼에 선생의 활약으로 체육과목이 놀라운 두각을 발휘하게 되자 구식 교육관에 사로잡혀 였던 교원들은 비난과 비방의 화살을 쏘아댔다. 체조 따위를 숭상하는 것은 교육의 본령에서 어긋난다는 것이였다. 그때 어처구니 없는 일이 한 두기-지가 아니었다.그 중에서도 가장 선생을 괴롭히는 것은 같은 학교 통료인 일본인 본전(本田) 훈도였다. 이 자는 체육연구에 공헌이 었다고 하야 자타가 인정하는 체육교육의 권위자였다. 그런데 우촌 선생이 이 학교에 부임하면서 자신의 위치가 대낮에 춧불처럼 되어 버리자 선생을 적대시하여 온갖 모략을 하였던 것이다.“선언(일본인이 경멸조로 우리를 부르던 통칭)인 주제에 겉으로는
천안보통고등학교 재직 당시(둘째줄 왼쪽에서 두번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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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실한 교육자의 척하면서 뒷구명으로는 어린 학생들을 유언하여 놀러다닌다는 소문이 척적합니다. 세상이 제 것인양 까부는 김군의 벼르장머리를 뽑아 버려야 합니다"
본전 훈도는 동족인 일인 교장에게 이갇이 고자질을 하였고, 또 이것을 과장하여 학부모에게까지 퍼뜨렸다. 뿐만 아니라 우촌 선생에게 좋지 않은 인상을 가진 교원들을 부채절하여 세 규합에 나서기도 했다.대체로 당시 보통학교의 여학생들은 십 칠, 팔세의 소녀였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가르치는 무용 공부를 우촌 선생에게 배우게 되자 이들은 선생을 따르고 존경하는 것이 남달랐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사제지간의 정이었지 분전 훈도가 말하는 것처럼 유언하여 인기를 독차지 한것은 아니었다. 선생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셨다.“구국운동은 가정에서부터 개량하여야 할 것이며, 그러자면 가정을올바르게 만들고, 가정이 올바르려면 여자교육이 충실해야 한다"
이렇게 순수한 이념을 가지고 교육에 임했던 선생이 그런 불순한 뜻이 있었을 리가 없다. 이런 외중에서도 우촌 선생에게 용기를 준 것은 정작 일인 교장 선생님이었다. 우촌 선생의 숭고한 교육정신과 열의를 눈여겨 보았던 교장 선생님은 본전 훈도를 경계하라고 귀뜸을 해주시는 것이었다. 교장 선생님은 비록 일인였지만 본전 훈도의 인품됨을 알고 우촌 선생에게 이렇게 귀뜸을 해주었던 것이다.그러나, 이런 속사정을 모르는 본전 훈도는 여전히 불미한 풍설을 유도하고 다녔다. 이에 참다 못한 우촌 선생은 풍설의 진원인 본전 훈도를 크게 꾸짖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하루는 여러 동료들이 모인 면전에서 엄숙한 태도로 본전 훈도를 질책키로 했다.“본전군! 나의 말을 분명히 들어라. 네가 퍼뜨린 나의 소문에 대하여 증거가 있거든 여기 여러 사람 앞에서 그 증거를 대라. 그대신 확증이 없을 때에는 냐에게 깊이 사죄하고 교장 선생님 이하 여러 사람들 앞에서 허위를 유포했다는 고백을 하라. 일본 사람들이 항상 내세우는 소위 〈대화흔〉이라는 것이 겨우 이런 것이냐?"
선생의 강렬하고도 준엄한 질책은 마치 맹호의 노도와 같았다. 이는 어디까지나 선생 자신이 결백했고, 거리낌 없이 당당했기 떼문에 나온 태도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기회에 민족적언 설분을 하려는 선생의 심정이 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무나도 급격히 내려치는 철추와도 같은 반격을 받은 본전 훈도는 일언반구의 대꾸도 못하고 기가 꺾여 몸을 사리고 말았다.
이런 사건이 있은 후에는 본전 훈도는 물론이고, 다픈 일언교사들도 감히 선생과 대립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촌 선생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선생의 지론대로 숭고한 교육정신을 실천에 옮기는데 더욱 매진하였다. 그 성과는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다. 당시 각종 운동경기에서 전국 대표가 되는 운동선수들을 우수히 배출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을 통해 우촌 선생의 지도이념과 정신이 면면이 계승, 발전되어 오늘의 한국 체육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2. 사학 공헌의 기점참략자의 일원이었던 일인 본전 훈도의 콧대를 꺾어 놓기는 했지만, 그것이 바로 교육정책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인들은 〈일선융화〉니 〈내선일체〉니 하는 정책을 내세워 일인화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에 우촌 선생의 내심과는 서로 상충동}는 바가 많았다. 특히 공립학교에서의 교육은 전혀 융통성이 부여 되지 않았다. 민족정신을 고취시켜 보고자 했던 선생의 뜻이 전혀 융통성이 부여 되지 않았다. 민족정신을 고취시켜 보고자 했던 선생의 뜻이 갈수록 어렵게 되자, 보다 자유로운 사립학교로 옮겨 보기로 작정하였다. 당시 비교척 일인들의 간섭이 척었던 콧은 미국 선교사들이 운영히는 사렵학교였다. 그래서 우촌 선생이 태하게 된 곳은 우리나라 독립투사들(조병욱같은 분들)을 허다하게 배출한 공주의 영영학교였다.
그 당시 선생의 행적은 직접 선생에게 훈도를 받았던 제자의 회고담을 들으면 보다 선명해질 것 갇다.선생의 영명학교(현 영명고퉁학교) 재직시의 제자였던 박태석씨는 현재 영명고등학교에서 교변을 잡고 있는 모범적인 선생닝이시다. 박태석 교사는 우촌선생에게 직접 지도를 받던 사십여 년 전의 아득한 옛날의 정경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제가 훌륭하신 김선생님께 교육을 받은 것이 저라는 한 개인이 형성되어 오늘에까지 이르는 동안 중요한 구섬점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제가 영명학교 학생으로 있을 때의 일업니다.
체육시간이 되자, 오신지 얼마 되지 않으셨던 김선생님이 운동장에 서 정례 대기하고 있떤 우리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선생님의 수업을 처음 받게 된 우리는 매우 긴장되어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때의 선생님 인상은 지금도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나애게 중대한 일이 닥칠 때마다 그 예의 일이 떠오르곤 합니다. 선생님은 우리의 폐부까지도 들여다보시는 듯한 눈초리로 우리를 주욱 훌어 보시더니 일장 훈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내 이야기를 명심해 들어라. 어느 따뜻한 봄날에 훈련을 받던 일본군인들이 연병장에 기착하고 있었단다. 그 때에 공교롭게도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던 한 병정의 머리위에 왕퉁이별 한 마리가 와서 벙벙 돌더니 팽하는 무서운 소리와 함께 그 병정의 눈퉁이를 쏘아 부쳤다고한다. 평상시 같으면 미리 왕퉁이 벌을 쫓아 버렸을 것이고, 또 불행하게도 벌에게 쏘였으면 이것이 아파서 눈퉁이를 만지면 야단법석을 떨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병정은 자신이 기착하고 있다는 지상목표가 있는 한 어떠한 방해물에도 동요되지 않는다는 굳은 신념에서 눈 하나까닥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이 기착에 대하여 가져야 할 기본정신이 지만, 그러한 문제보다도 각자가 삶에 대한 신념을 그대로 수행하는 데에 있어서 이러한 정신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런 정신을 만사의 근본으로 삼으라! ’
선생넙의 이러한 가르침을 받고 난 후 나는 마음을 굳혔고, 그것이 나의 커다란 생활지침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게 되었습니'C~. 선생념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동의 신념’을 훈시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나라의 독렵’과 ‘자유, 자립정신’이었습니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서는 항상 ‘부동의 신념’을 지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하는 사렵학교나 외국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사립학교나 할 것 없이 일인들의 감시의 눈초리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언행에 주의를 해야만 했을 때업니다. 그런 까닭에 김선생님은 함축적인 말씀£로 우리에게 훈시를 찰 하셨습니다. 그래서 무심히 듣는 일반 학생들은 보통 교사들이 학생에게 하는 수양강화 정도로 알았지만, 다소 사려가 깊은 학생들은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깊은 못이 어디에 있는가를 감득하고 용기백배했습니다. 우리의 의기는 더욱 굳어져 갔고, 가슴에서 용기가 솟았던 거죠 저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깊이 감격하였고 마음애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고 새겼습니다.
김선생님이 영명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신 것은 겨우 이년 여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영향력을 대단했습니다. 저에게는 그 떼 선생념의 교시가 나의 일생의 중요한 지침들이 되었습니다. 서울로 영전허·여 가셨을 때 우리가 맛보아야 했던 그 버통함은 사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선생님과 작별한 지 오년이 되던 해 저는 결국 일인들에 의해 보안법 위반이라는 엉터리 죄목으로 투옥되고 말았습니다. 푸옥을 당한 저는 냐의 언행이 우리 한민족으로서는 정당한 것이었고, 또 바른 신념에서 나온 것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일경들의 무서운 고문을 받을 때면 흔들이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나의 결성이 확절되는 것 같고, 나의 하는 일에 회의가 들 때면 문득 과거 영명학교 재학시절 검선생님께서 들려 주셨던 왕퉁이벌 이야기를 생각해 내고 ‘부꽁-의 신념 ’을다시 불러 일으키곤 했습니다.
만일 그 때에 왕퉁이 벌이 쏘는 것 갇이 일경이 가해대는 고문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혼들렸더라면 어찌 할뻔 했습니까? 우리 김선생님의 그 ‘부동의 신념’ 교훈이 없었더라띤 이 사람은 영훤히 민족 앞에 죄인이 되고 말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선생님의 그런 정신 밑에서 살려고 노력해 왔고, 제가 가르키는 후학들에게도 김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그런 정신을 깊 이 명성케 하고 생활신조로 삼게 하고 있습니다"
우촌 선생께 교육을 받았던 박태석씨는 감회어린 과거를 회상하면서 몇번이고 ‘부동의 신념’을 되풀이 하였다. 제자였던 박태석씨의 증언에서와 같이 우촌 선생의 훌륭한 교육이념은 후학들에게 계속 계숭될 것이 틀럼없다.
3. 발랄한 교육자 상우촌 선생은 감화력과 영향력이 탁월한 교육자였다. 그렇다고 완고하거나 무미건조한 도학자갇은 인상을 풍기는 분은 더욱 아니었다. 당시 영명학교애서 같이 근무를 했던 동료 선생님들과의 친분관계를 조명해 보면 선생의 발랄한 모습이 더욱 잘 드러난다.영명학교는 남, 녀고등학교가 각기 별개의 교사로 병설되어 있었지만 양교의 교시는 서로 겸임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남녀를 모두 교육하게 되어 있었다.우촌 선생이 부임할 때에 동기로 취임한 젊은 교사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후일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고 송병돈씨를 비롯하여 신예였던 정, 채 선생이 있었다. 선생은 이들을 송동지, 정동지, 채동지라고 불렀다. 이 「동지」라는 호청은 조선시대의 직명이었던 「同知」를 연상케함£로서 일반 사람들에게는 희롱조로 들렸다. 그러나 선생의 속뭇은 행·얼의식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갇다는 의미에서 「同志」로 불렀던 것 이 었다. 이 처럼 함축적인 말을 즐겨 사용했던 것으로보인다--
우촌 선생은 이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였다. 이들은 어떠한 일이 있던지 방과 후에는 서로 만나서 이야기 꽃을 피웠고, 하루라도 만나지 못하면 서로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 학교 일이 일찍 끝났거나, 흑은 휴일같은 닐·은 어김없이 네 동지들이 모여 고도인 공주 부근의 명승지나 금강의 강변을 위시해서 곰나루, 봉황산, 그리고 계룡산이며 마곡사 등지까지 찾아다녔다. 이렇게 명승고적지를 순례하면서 점차 말살되어 가는 민족흔을 어떻게 일깨울 것이며, 장차 이 나라의 길- 길이 어떠하며, 국가의 백년대계인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논하는 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또 이 분들이 가는 콧마다 두주를 불사했고, 얼큰해지면 이야기는 더욱 꽃을 피웠다.
이럴 때마다우촌선생은“교육이란 재래의 우리 선인들이 했듯이 종래의 비현실적인 서적의 강독이나 문장의 훈고만을 일삼아서는 안되는 거야. 자구나 해석하고 경서의 고증만을 교육의 전부로 알아서는 희망이 없어. 우리는 이러한 진부한 방법을 시급히 지양하고 실용화를 해야만 해. 이런 일을 하자면 천하지대본이 농사라고 발}는 것처럼 인간지대본이 신체이니 만큼 신체를 단련함으로써 정신 단련까지 이루도록 힘을 써야만 할 결세. 그런 뜻에서 나는 저 유명한 영국의 체육교육자 토마스 아놀드 주장에 동의하네. 옥스포드대학의 교수였£며, 후일 「럭비학교」의 교장을 지냈던 그는 체육으로 성격을 단련시켜야 한다고 했네.저 유명한 영국의 철학자 존 록크는 ‘건전한 정신은 건전한 신체에 머문다’라는 말을 했잖는가, 그의 말대로 우리 민족에게 건전한 신체를 만들어 주어야 건전한 정신을 갖게 될 거야. 니는 기회만 있으면 독일의 「학교체육의 아버지」라고 불리웠던 슈피이스와 같이 사럽학교를 경영할 생각이고, 그 다음에는 막그라아렌이 오뢰에루덴에 체육관을 지어 체육무로서 국민의 신체와 정신을 건강하게 만들었던 것과 같이 나도 이 일을 반드시 이루고야 만다네"
이렇게 우촌 선생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뜻을 즐겨 표명하셨던 것이었다. 이런 선생의 포부를 들은 동지들은 탄복해 마지 않았으며, 그 중에서도 활달한 성격이어서 해학을 즐겼던 송동지는 크게 박수를 치면서“김동지 말이 백보 옳은 이야기지. 나도 그 포부에 대찬성이네만, 나나 김동지의 전공학과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천하게 여기는 환쟁이에다가 근육 노동자로 인정을 받고 었는 체조이니 그 꿈을 이루기가 쉽지 않을 걸세. 하지만 이를 뚫고 나아가야만 할 것이니, 기세를 올리는 뜻에서 우리 건배하세”하고 쾌활하게 동지들의 용기를 돋구어 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희망에 차고 이상에 불타는 동지들은 서로 용기를 북돋우어 주면서 호연지기를 길렀던 것이다.4. 여성체육의 조성영명학교에서 뜻있는 교편생활을 하던 우촌 선생은 1930년에 서울에 있는 협성실업학교(후, 광신성-엽고등학교)로 영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오래 계시지 않고 그 이듬해인 1931 년 4월 1 일에 다시 동덕여자중학교(후, 동덕여지-고등학교)로 발탁되어 가시게 된다. 우촌 선생은 바로 여기애서 징구한 세월을 두고 한국 여성의 체육교육을 위하여 온갖 정열을 바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우촌 선생의 인간적인 변에서 보아도 가장 화려했던 청춘시절에 해당하며, 열과 성을 다해 교육에 커다란 공헌을 한 곳이기도 하다.선생이 동덕여고에 취임하면서 첫번째로 착수하신 일은 학생들의 기강과 규율을 바로 잡는 일이었다. 선생이 생각하기에는 우리나라 국민성이 개인적£로 놓고 볼 때는 침략지·인 일인보다 월등히 우수한· 면이 많았고,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특출했으나, 일단 단체를 구성하고 보면 그 반대로 다른 어느 민족보다도 낙후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시정하려면 우선 질서있는 생활태도를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또 다른 일면에서 보띤 체육교육이란 외적인 형식에서부터 시작하여 내척인 내용을 형성해가는 것이므로 질서생활을 강조하지 않을수 없었다.
다시 말하띤 운동을 히는 것이 강인한 체랙을 기르기 위함 뿐만 아니라 그에 걸맞는 정신융 기르기 위험- 같이, 학생들의 기강과 규율을 바로 잡는다는 것은 이들의 정선을 바로 잡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적인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그래서 우촌 선생은 훈육주임으로서 기강확립어l 책임을 맡으셨다. 아침이띤 등교시간 한시간 전에 벌써 출근하시어 교문을 지키며 등교하는 학생들의 복장과 두발을 검사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아이쿠! 벌써 호랑이 선생님이 나와 계시네!"
말이 많았던 여학생들은 선생을 보자 이렇게 질겹을 하면서 자신의 복장과 두발을 점검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선생의 날카로운 눈은 여학생들의 두발에서부터 교복, 양말, 신발에 이르기까지 교칙에서 허용한 것이 아니면 결코 용납하지 않고 지적해 내셨다. 선생의 감시는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할 수만 있£면 교칙을 어겨 가며 멋을 부리거나 학생의 신분을 이탈하려고 하는 학생들을 철저히 추적하셨다. 조회가 끝나면 교실로 들어가는 어구에 서서 위반 학생들을 찾아냄으로써 형평의 원칙을 지켰다. 요행히도 교문에서 적발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다시 교실문에서 붙잡히게 되었으니 대충 눈가렴으로 는 선생의 감시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철저히 심어줌으로써 아예 위반할 생각은 하지 말라는 효괴를 노리기 위한 것이였다.어느 해 졸업식을 앞두고 송별 음악회가 개최되었다. 이떼쯤 되면 대개 졸업반 학생들은 하루라도 빨리 교칙이라는 규제를 벗어나 보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습성이다. 선생들의 눈을 속여 가죽구두언 ‘하이힐’을 신고 출연을 하려는 학생들이 있었다. 아마 학생들은 선생에게 발각되더라도 졸업반이니 설마 어떻겠느냐 하는 계산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촌 선생이 이를 그냥 묵과할 수가 없었다. 흑 다른 선생님이라면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냥 묵과할법도 했지만, 우촌 선생은 그러지 않았다. 무대 뒤에까지 와서 검사를 하던 선생에게 발각된 학생들은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혜냐하면 당장 무대에서 내려가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난감한 것은 이 학생 뿐만이 아니었다. 전체적언 진행을 맡고 있던 다른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막이 오를 시간을 다 되었는데 출연자 보고 내려 가라고 하시니 난감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명백히 교칙을 위반한 학생을 두둔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 무대 뒤쪽은 난리가 났던 것이다. 출연자들도, 반주자도, 진행자도 발만 동동 굴리고 있었다. 하이 힐을 신은 당사자들은 창백한 얼굴로 선생에게 간청을 하였다.
“선생님, 이번 연주만은 그대로 끝내게 해주세요”그러나 선생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출연을 못했으면 못했지 그렇게는 안돼!"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기념 출연이라서 엄청난 기대와 들뜬 마음으로 수 개월을 연습하였을 터인데, 이제 그 ‘하이혈’때문에 모든게 수포로 돌아가게 되는 것을 생각한 「하이 힐」의 여학생들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말았다.그제서야: 선생은“다른 학생의 운동호}를 바뀌 신고 나가!"하시는 것이였다. 이리하여 「하이힐」의 여학생들도 출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막아 내혔을 때 격찬의 박수외- 격려의 말을 해주신 분도 바로 우촌 선생이었다.무대에서 압수한 그 문제의 ‘하이힐’들은 졸업식이 끝난후 학생들을 친히 불러 되돌려 주면서“자, 이제는 마음놓고 신고 다녀라”
라고 웃으시며 말하셨다. 구두를 돌려 받은 여학생들은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자신들의 치기어린 행동이 이제는 약간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고, 엄정하면서도 다정한 선생념이 고맙기도 했기 때문이었다.정규수업 시간이 끝나고 방과후가 되면 여학생들은 우촌 선생의 총 지휘하에 각 운동연습에 들어갔다. 이 운동연습은 방괴~후 뿐만 아니라 방학기간에도 계속 되었다. 선생은 방학기간에도 평소와 같이 등교하여 각 운동부 학생들을 지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선생은 세심한 계획을 세워 독특한 방법으로 훈련을 시켰고, 밤늦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시켰다. 이런 결과로 해서 훌륭한 선수들을 많이 배출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이야기는 오히려 이런 맹훈을 거쳐 당시 탁구계의 거성이 되였던 강팽옥 여사 회고담을 직접 들어 보는 것이 선생의 진면목을 이해동}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갇다.
“생각해 보면 지금으로부터 삼십여년이 훨씬 념은 아주 오랜 옛일이기는 합니다만, 아직도 머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일들이예요 그러니까 우리 모교인 동덕여고가 교주 이석구 선생님의 희사로 법인이 설립되고, 이어서 관훈동에서 창신동으로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게 되었습니다.이사 오자마자 김선생님께서는 각 운동부을 조직하셨어요 지금이야 각 학교에서 특별활동이라는 명목으로 학생들이 각자의 특기를 살릴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김선생님께서는 미미하기 그지 없었던 여성체육을 육성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계셨다는 거예요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여학교에 운동부를 설치하시고, 우리 동덕여고를 여성체육의 온상과 요람으로 가꾸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시작했던 거예요.요즘 같으면 이를 설치하고 운영하는데 제일 먼저 경비문제가 대두 되겠지만, 당시로서는 여학생들이 운동부에 참가하느냐 안하느냐가 더 큰 문제가 되었어요 당시로서는 운동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고, 보수적인 시대라서 운동을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도 척지 않은 제재가 가해졌어요 학생들 자신들의 언식문제도 크게 작용했지만, 더 웃지 못할 일은 운동부에 가업한 것을 안 다른 선생님들이 적극척으로 이를 말렸던 거예요 교무실로 호출하여다가 몇 시간씩 벌을 세우면서 그만 둘 것을 종용하기도 했죠 체육이라는 것이 여자에 무슨 소용이 있느냐, 양전하게 공부나 하라는 식으로 독촉을 하다가 여의치 않으면 부모님을 동원하여 만류하기도 했어요 운동부에 가담하면 후일 시집을 가서 수태를 하지 못하는 불구여성이 된다느니, 정숙성이 없어 소박을 맞게 된다느니 하며 공공연하게 방해를 했습니다.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였어요 같은 학생들을 선동하여 운동을 하면 얼굴이 햇볕에 타서 검게 되고, 다리가 굵어져서 수종다리가 된다는 소문을 퍼뜨려 운동부 참가를 기피하게 만들기도 했어요
이렇게 되자 선생님은 운동부를 창설해 놓고 사면초가가 된 거예요.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학교 숙직실에 머물면서 학생들을 찾아 다니며 설득을 해야 했고, 방과후에는 부형들을 찾아다니며 설득과 양해를· 구해야만 했어요 보기에 민망하고 딱하기 이를 데가 없었어요 게다가 처음에는 선생님의 숭고한 정신에 찬동을 해마지 않던 조동식 교장선생님도 차츰 용기를 잃으시고, 김선생님에게 학교 전체의 문제로 비화하지 않도록 지중해 줄 것을 부탁하게 되었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한발 뒤로 물러섰다가 두발 앞으로 전진하며 꾸준히 열심을 다한 기운데 동덕여고에 정구부, 배구부, 육상부, 빙상부, 그리고 탁구부를 하나씩 결성하기에 이르렀어요 청말 선생님의 놀라운 인내와 불굴의 노력 덕분이었죠 그래서 저도 탁구부에 들어가게 되었답니다.
이렇게 해서 어렵게 결성된 운동부가 연습을 개시하게 되자 선생님은 놀라운 집념을 보이셨어요 또 그 훈련방법도 독특하셨어요 우선 무서울 정도로 전신훈련을 시키신 후에야 실기연습을 시켰어요 이렇게 훈련을 시작한 후에도 학교에서 운동부흘 폐지하려는 공작과 음모는 그치지를 않았어요 그러한 역경에 부딪칠 때마다 운동부원들은 의기소침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어요 울기도 많이 했죠 그럴 떼마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다과를 베풀어 주시며 독려해 주셨고, 우리는 우리 나츰대로 약주를 받아다가 선생님을 위로하기도 했었죠 그러다가 보니까 우리 운동부원들과 선생님은 동생동사의 처지에 놓이게 되어 한층 우의가 두터워졌고, 사제지간을 넘어 부녀지간 같은 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반발심에서 더욱 열심히 운동을 했었습니다. 뭔가를 보여 주기 위해서였어요 이처럼 한 일년쯤 열심히 노력하자 우리의 모습은 눈에 띄게 발전되어 갔습니다. 각 부가 차츰 각종 경기에 출전하기에 이르렀죠 어떻게 보면 흑독한 방해공작이 오히려 우리의 성장을 촉진시켜 주는 역할을 한 셈이 된 거예요 서로 이를 악물고 연습을 했으니까요.드디어 부푼 꿈과 기대를 가지고 처녀출전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나 그 결과는 모두 참패였습니다. 각 부마다 모두 패배의 고배를 마시고고등여자학교였는데 아주 강탬이었습니다. 우리는 두가지 점을 가지고 있였어요 전번에 참패한 셜욕을 하기 위해서 쾌승을 해야 했고, 민족적인 감정에 있어서도 일언 학교에 질 수는 없였던 거죠 게다가 정말 이번에도 아무런 성과가 없으면 아마도 운동부가 해체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도 느끼고 있었어요 아마 선생님도 우리와 같은 심정이었을 거예요 우리는 전장에 나가는 병사와 조금도 다를바 없는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출전했습니다.
이런 우리의 지성이 감천하였는지 제가 일본 선수들을 보기 좋게 누르고 말았습니다. 동덕여고에 운동부가 창셜된 이래 처음으로 벚나는 우승기를 들고 교문을 들어섰던 거예요 그때의 그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던 거예요 아마 저의 생애에서 가장 큰 감격 중의 하나였을 거예요.
동덕여고재직시
V
육상선수들과 함께 (1934. 7. 1)
말았어요. 우리 탁구부도 출전했다가 참패를 당하고 말았어요. 우리는 선생님께 매달려 영영 울고 말았어요 얼마나 속이 상하고 실망이 되었는지 몰라요 선생님은 침통한 표정만 지을 뿐 아무런 말씀도 안하셨어요. 그야말로 서로가 면목이 서지‘ 않았어요 뭔가 한가지라도 승리를 했어야 다론 선생님들 보기에도 떳떳하고, 같은 학생들 보기에도 당당했을 터인데 모두가 지고 말았£니 운동부의 위상이 말이 아니었죠.
~그런데 문제는 그 디음날 얼어났어요 선생님의 얼굴이 학교에서 보이질 않는 거예요 일찍이 결근이라고는 한변도 없£셨던 분이고, 아침 일찍 교문에 나와서 일일이 복장조사를 손수하시던 선생님이 보이시질 않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밤늦게까지 불호령을 하며 연습을 독려하던 선생님 얼굴이 안보이니 놀랄 수 밖에 없었죠 사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선생님과 얼굴을 맞대야 하는 우리 학생들로서는 우촌 선생님은 바로 우리 동덕의 얼굴에 해당했었죠 그런 선생님이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시지를 않£니 발각 뒤집혔어요.우리 운동부원들은 백방:로 선생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평소 침소인 숙직실이며, 갈만한 모든 곳을 찾아 보았지만 선생님은 거기에 없였어요 우리는 마치 부모를 잃어 버련 자녀와 같은 심정으로 선생님을 찾아 다녔습니다. 우리 선수들은 수업을 마치는 퉁 마는 풍 하고 여기 저기 할 것 없이 떼를 지어 찾아 다니다가 지친 발을 이끌고 돌아와 뜬 눈우로 밤을 새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틀이 지난 후였어요 선생님은 중병을 치룬 사람처럼 초춰l 한 모습으로 교문을 들어서는 것이었어요 그런 선생님을 본 우리는 와르르 달려가 매달리며 대성통곡을 했탑니다. 그러자 선생념은 조용-한 목소리로 “자, 지- 이제 그만 그쳐라. 인내와 열성을 다하면 안되는 일이 없느니라”하고 우리를 위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우리는 더욱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그 떼를 희상하면 지금도 눈물이 흐를 것 같아요.그후 우리는 선생님 말씀대로 열성을 다했고, 용기를 되찾아 맹연습을 한 결과 전 조선 올림픽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상대범이 우리를 침략한 일인들의 자녀가 다니는 제일선생님은 우리가 출전하기 전에
‘일언에 대하여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니 각자는 깊이 명심하기 바란다.’라고 우리에게 격려와 함께 기대를 걸고 있었는데, 그 기대를 만족시켜드릴 수가 있어서 또한 기쨌던 것입니다.이렇게 눈물겨운 감격은 비단 우리 탁구부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구부, 육상부, 배구부, 그리고 벙상부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우승의 기쁨을맛보게 되었어요.그렇게 되자 요즘 딸}는 일종의 붐이 일기 시작하여 각 여학교에서 앞을 다투어 운동부를 창설하기 시작했던 거죠 그러자 여자들이 운동을 한다고 비방하고 방혜를 하던 다른 선생념들이 그만 할 말이 없게 되었고, 끝까지 참고 묵묵히 기다렸던 우리 선생님의 목표는 하나씩 달성되어 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따지고 보면 오늘날 여자의 운동경기가 왕성하게 된 것은 선생님의 선각척인 공로이었던 거예요. 선생님이 내섬 바라며 꿈꾸어 왔던 것이 이제야 그 결실을 보는 것 같아서 제자의 한사람으혹 흐뭇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후 우리 동덕여고의 탁구부는 ‘전 조선 대표’로 선발되어 동경에서 개최되는 소위 ‘전 일본 올렴픽 명치신궁대회’에 출전하게 되었고, 마침내 ‘무척 탁구텀’을 이루고 말았습니다.너무 창황한 회고담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여성들이 재래의 구습을 벗고 의기충천하여 운동을 하게 되고 또 여자는 그늘의 콩나물 같이 유약하고 섬세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한 것도 알고보면 선생님의 공로가 컸던 거예요 오늘의 체질과 체격들을 보세요, 얼마나 아름다워요 마치 저 유명한 닐스 북이 ‘덴마크 체조’를 보급시켜서 덴마크 국민을 갱생시키고, 오늘의 재건과 번영을 가져온 것과 같이 우리 선생님도 똑 갇은 일을 하신 거예요우촌 선생님이 ‘동덕’의 동산에 힘써 뿌려 놓았던 각종 운동경기의 씨앗이 그동안 많은 열매를 맺어 왔지만, 금년 (1973년 4월 5 일) 유고슬라비아 사라예보에서 개최된 세계 탁구 선수권대회에서 섭여 년 간 폐권을 잡고 있던 중공과 일본을 제압하고 우리나라가 단체전에서 우승의 장거를 올리게 한 두 여자 선수가 바로 ‘동덕’ 출신엄을 볼 떼 새삼선생님의 위대하심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황무지를 갈고 씨를 뿌릴 떼에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었지만, 그 씨가 제대로 자라서 멀림을 이루게 되면 그 결실은 장구한 것이 된다는 좋은 교훈을 우리에게 안겨다 준 것입니다. 금년에 우리 ‘동덕’에서는 세계탁구대회에서 개선한 선수들을 환영하고, 우리 선생닝을 기념했답니다"
이렇게 추억담을 말하는 전 한국대표 탁구선수였던 강팽옥 여사는“제가 지금 요섭이 념고 육섭이 불원한 나이인데도 별로 병을 앓아본 일이 없고, 저의 어린것들이 모두 건강하게 태어난 것도 알고 보면 통덕여고시절 선생님 밑에서 열심히 운동을 한 닥택업니다."라고말을끝맺었다.이상의 회고담을 통해서 우촌선생이 동덕여고에 재직하는 동안 여성체육의 진흥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경주했는지를 쉽게 알 수있다. 그러나 학생들이나 선수들이 알지 못하는 비화들도 숱하게 많았다. 각 선수들의 경기 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관련 서적들을 구업하여 밤새도록 공부해야 했고, 각 분야의 권위자들을 초벙하거나 필요한코치를 초벙히는데 필요한 경비를 학교당국£로부터 지급받지 못하여 자비로 해결하신 일 등은 선생님의 열정과 봉사정신을 엿볼 수가 있다.
우촌 선생이 얼마나 열성적이었는기는 아래의 짤막한 이야기로 가늠할수가 있을 것이다.어느 한 겨울이었다. 선생은 다음 해의 각 운동부의 스케줄을 밤늦게까지 세우고 있었는데 한기가 몸에 스며들더라고 한다. 추위를 느끼시자, 선생은 하시던 일에서 손 떼시고는 화다닥 일어서시었다. 십여일 전부터 스케 이트 링크를 만들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그다지 춤지가 않아서 기다리고 있던 차라서 얼른 외투를 결치고 숙직실에서 나와 사환을 깨웠다고 힌다. 날씨가 추워지니 랭크에 물을 대자는 것이었다. 그러자 사환은 투럴거리며,
“김선생님, 지금이 몇시인데 저 큰 링크에 물을 댄단 말입니까? 물을 댈려면 밤을 꼬박새워야 할 것 아닙니까?"
하고는 업맛만 쩍쩍다시고 앉아서 흔잣말로 중얼거리기를,“이놈의 날씨는 왜 갑자가 추워져서 밤잠도 못자게 하는 거야 ..... .아이 추워!"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우촌 선생은“원래 새벽녘의 추위가 가장 맹렬한 것이니 잠을 좀 덜 자더라도 물을 대어서 내일부터 학생들에게 스케이트를 타게 해줍시다”라고 사환을 독려하며 운동장 한쪽에 꾸며 놓은 령크로 달려갔다. 야밤 흑한에 떨면서도 밤새 물을 채워 스캐이트 렁크를 만드시고야 마시는 선생이셨디: 그렇게 함으로써 겨울내 벙상부가 활동을 쉬지 않고 연습할 수 있게 해주었다.
선생의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동덕여고의 자전차부대라면 당시 유명힌- 장안의 명물거리였다. 오, 육십대의 자전거부대가 페달을 밟으며 서울 시내와 시외를 달릴 떼의 그 장관이란 보는 사람드로 하여금 한껏 부러워하게 만들었다. 이것 역시 우촌 선생의 창의와 노력으로 만들어쳤던 것이다.이것 이외에도 동덕여고는 매년 국민학교의 여자 이동의 경기대회를 개최하여 여성체육의 향상을 꾀하였고, 이것 역시 해외의 이목이 집중되는 행사였다.이럼오로써 동덕여고는 당시 ‘여성체육왕국’으로 불리게 되었고, 체육교육의 모범을 보여 주었다.
동덕여자고등학교 재직시 총석정 수학여행에서 (1940 년대)
5. 애향의 장거
〈견동제의 건립〉우촌 선생은 의리에 살고, 보은을 중시하는 것무로 그치지 않았다.그의 고향인 공주군 단천면 견동리에 가면 동구 앞을 우회하며 흐르는 금강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금강을 따라 견고한 제방이 길게 멤어 있는데 이 를 견동제라고 한다. 이 제 1캉 업구에 보면 아담한 폴로 깎아세운 기념비 하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촌 선생을 영구허 기리는 송덕비다.이 비석은 통민들이 그야말로 순수한 돗에서 자진하여 건립한 보기 드문송덕비다.생각해 보면 송덕비란 구시대의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의 고행을 착취하여 자신들의 성공을 그런답시고 건립했던 것들이 허다했다. 이들은대개 자청하여 송덕비를 세우게 하였고, 자신들이 가졌던 권력을 넘·용하여 세운 예기- 허다했다. 그러나 우촌 선생의 송덕비는 그런 후안무치한 송덕비와는 격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 송덕비는 고향 사람들이 우촌 선생의 애향심에 검-동한 나머지 자진하여 건립한 보기드문 것이었다.
이 송덕비에 얽힌 사연은 대략 이렇다. 전장에서 잠깐 서술한 바와 같이 우촌 선생은 소년시절에 신학문에 대한 큰뜻을 품고 고향을 떠나야만 했었다. 비록 어린 마음。171는 했지만 후일 신학문을 많이 배워 반드시 고향을 위해 뭔가 커다란 공헌을 하리라고 마음 먹었었다. 사실 누구든지 자신을 낳아 주고 길러준 고향에 대한 애착이야 없겠는가만은 바쁜 세상을 살다보면 쉬 잊혀지는 법이다. 게다가 고향을 떠나오래 살다가 보면 자연히 멀어지게 마련이다.그러나 우촌 선생은 서울에서 바쁜 교편생활을 하시면서 고향을 결
i 견동리 제방 신축을 감사하는 뜻으로 동네 사람들이 세운 불망비
코 잊지 않으셨다. 틈틈히 시간을 내어 고향에 내려 오시어 농사개량이며, 종묘선택 등 애향사업에 갚은 관심을 보이였고, 후학들의 장학사업에도 앞장섰다.
그중에서도 늘 선생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은 장마철만 되면 금강이 범람하여 숱한 농작물과 가옥들이 침수되어 피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는데 어떻게 이를 막아볼 수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해마다 물난리 속에서 되풀이 되는 재난을 어려서부터 보면서 자란 선생으로 서는 튼튼한 제방을 쌓는 일이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사업의 하나였다. 그래서 틈있는 대로 근방을 배회하며 걸음걸이로 그 길이를 제어보기도 하고, 나름대로 상상의 제방을 쌓아보기도 했던 것이다.그러다가 조국이 광복을 되찾게 되고 지방민들의 고충이 해결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우촌 선생은 이 숙원을 풀기 위해서 고향의 치수사업에 착수할 것을 결심하기에 이르른다.우촌 선생은 세밀한 계획을 세워 당국에 건의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고향사람들과 상의도 없이 건설국, 토목국을 비롯하여 각요토를 순방하면서 공주군 견통리에 제방을 쌓아야 한디는 것을 호소하고 다녔다. 거의 매일 같이 당무자를 찾아다니는 까닭에 담당 공무원은
“김 교장 선생님께서는 여기에 출근부를 만들어 놓£셔야 하겠습니다’,하고 우스개소리를 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선생와 끈질긴 애향심에 감동한 담당 공무원은 성의껏 선생을 도와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원래 관청의 사무란 시일을 요하는 것이 통례고, 여러 통로를 거쳐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견동리의 제방같은 신규사업이 제대로 척척 진행될리가 없었다. 그렬수록 선생은 불굴의 정신을 더욱 발휘하였고, 급기야는 착수단계에 이르게 되었다.어느날 담당 공무원이 찾아온 우촌 선생에게“교장선생님의 끈질긴 문의와 추진으로 이제 곧 결실을 맺을 것 같습니다."하면서 밝은 미소와 함께 제방을 세운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 말에 선생은 기쁘기 한이 없었다. 그 동안 많은 시간과 거액의 경벼가 소모되었지만 이제 그 결실을 보게 된다니 그 보다 더 기쁜 일이 없었다. 선생은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담당 공무원의 손을 업석 잡고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해 주었다.
그러나 좋은 일이란 쉽게 풀리지만 않은 것 같다. 이 치수공사도 예외는 아니였다. 공사가 착수되려고 하는 직전에 의외의 사패가 벌어지고 말았다. 아마 호사다마라고 하는 말이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꿈에도 상상치 않았던 6.25사변이 돌발했던 것이다. 결국 우촌선생의 4.5년간의 수고가 하루 아침에 수포로 돌아가버렸다 하겠다.
이리하여 격동의 사변을 치루고 환도가 이루어지자 선생은 제일 먼저 제방사업을 착수하고자 하셨다. 그러나 사변으로 인해 모든 것이 뒤바뀌게 되었기 때문에 부득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우촌 선생의 불굴의 정신은 여기서도 좌절되지 않고 다시 관청문을 드냐들기 시작했다. 결국 선생의 이런 노력은 7.8년만에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렇게 긴 여정을 통해 야룩된 것이 ‘견동제’였던 것이다. 그러니 부락민들에게 있어서 선생에 대한 고마움이란 형언키 어려운 것이었다. 해마다 쓰라리게 겪어야 했던 인명의 피해, 가옥의 침수, 농작물의 유실이 사라지게 되었요니 그 고마움이야 어찌 다 표현할 수 었으랴. 그리하여 ‘견동제’가 완성되자 부락민들은 선생께 몰려와 그 감사의 못을 전하기에 바쨌다.그러자 선생은“천만의 말씀입니다. 다만 이 사람을 길러준 고향에 대하여 보은을했을뿐업니다”
하고 담담하게 대답하실 뿐이었다.이 인근 농민들은 대대로 홍수를 치루는 일과 이것무로 인해 업은 수없는 피해를 일종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의 끈질긴 집념드로 이를 면케 되었으나 선생은 고향 사람들에게 은인이 되였던 것이다. 이들은 선생에게 사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동안 들였던 경비와 사례를 증정하려고 했으나 우촌 선생은 정색을 하며 이를 거절하셨다.“그렇게 하는 것은 나의 본심을 모독하는 것입니다"이렇게 한마디로 딱 잘라 말씀하시니 이들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선생의 애향청신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선생을 기리는 송덕비를 ‘견통제’에 세우므로써 선생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했다. 이렇게 하여 생기게 된 것이 바로 우촌선생에 대한송덕버다.
참고로 ‘견동제’의 규모를 살펴보면 길이가 600 여 미터에 달하고, 넓이가 20 여 미터, 높이가 10 여 미터가 되는 상당히 큰 제방에 속한다. 시공비는 당시 금액으로 3 억에 달하였다.
〈견동국민학교 설립〉선생의 애향심의 발로는 이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만개되어갔다. 선생은 구석구석을 누비며 선생의 손길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면 서슴없이 일을 착수하기 시작했다. 그의 고향 견통리에서 또 하나 선생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육의 전당인 학교가 필요했다.벽지인 이 지방에는 근거리에 학교가 없어서 견동리에서 공부를 하려고 하는 학생들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같이 육십여리나 되는 길을 걸어 학교에 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곤경을 알고 있는 선생은 학생들에게 배움의 전당을 만들어 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1967년 2월 10 일 학교를 짓기 위해 부지를 사서 회사하시고, 견동국민학교 설럽을 추진하였다.
선생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972년 3월 1 일자로 견동국민학교 설립과 인가를 탱국£로부터 받게 되었다. 이로써 이 고장의 숙원이었던 국민학교가 정식으로 태동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그 해 가을인 10월 16 일 견동리에서는 일대성사가 벌어지게 되었다. 견동국민학교가 정식우로 학교로서의 모습을 갖추고 공주군 교육장을비롯하여 각공 학교장, 각 기관장과 이 지방 유지들, 그리고 학부형과 학생들 모두 4.5백명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한 개교식이 거행되었다. 이 지방으로서는 두번 다시 없을 커다란 성사였던 것이다.이러한 선생의 열렬한 애향심을 기리기 위해 동네 사람들은 ‘우촌검의형 선생 기념비’를 이날 함께 세우게 되었다. 그 기념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특히 애향심이 돈독하신 선생은 향리에 국민교육기관이 없음을 개탄하시던 중, 견동국민학교의 설립이 운위되자 1967년 2월 10 일 학교 교지 전부를 매수 회사하시는 동시에 제반을 척극추진하시어 견동국민학교의 설립과 숭격인기를 당국에서 받게 힘쓰셨으니 이것이 1972년 3월 1 일이다.
선생의 숭고한 공척으후 이 고장의 제2세 국민교육이 날로 융성하니, 이 위대한 공덕은 영구불망할 성사임에 전주민의 동의로 기념비를 세워 기리 기념하노라"이 기념식에 참여했던 많은 인시들은 우촌 선생의 참신한 뜻에 감사함을 아끼지 않았고, 그의 애향심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선생께서는 답사하는 자리에서 이러한 환대가 오히려 송구스럽고, 더욱 커다란 부담을 느낀다고 경영의 모습을 보이셨다. 이럼으로써 이날 기념식은 더 없이 즐거운 축제가 되었다.누구나 고향에 애착을 가지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선대로부터 뿌리를 내리고 삶을 영위해온 콧이며, 자신의 잔뼈가 굵어진 곳이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고향을 떠나면 마음고}는 달라서 그렇게 애향심을 불태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우촌선생은 톰만 있으면 고향의 건설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는 참으로 보기 드문 분이었다. 목전의 이익에만 급급하는 것이 세태인 것을 볼 때 선생갇이 아득한 고향의 옛터를 두고 두고 가꾸어 주는 분은 우리애게 좋은 사표가 되고도 남는 일이다.
견동국민학교 개교 경사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참석하여 축하를 하여 준 것도 알고 보면 선생의 이런 깊은 뜻에 감동된 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 조그마한 마을에 4.5 백명 이상이 운집 할 수 있였던 것은 그 외에 달리 설명할 수가 없었다.또 이날의 경사를 위해 서울에서 한성여자고등학교의 합창반과 무용반을 초청하여 공연을 올렴으로써 향토에서 보기 어려운 축제를 벌이셨다. 이러한 축제는 벽지의 어린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꿈을 심어주기도 했다. 이렇게 선생의 빈틈없는 사려는 고향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기에 충분했던 것이다.그 외에도 고향에 쏟는 선생의 마음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수해 때
는 백미를 수십섬 보내어 이재민을 구호하였고, 노인들을 위하여 경로당을 지어주고, 고향의 풍치미화를 위해 기금을 보내시기도 하고, 동리에 창고를 지어주기도 했으며, 도로 보수와 확충 뿐만 아니라 정기버스를 운행토록 힘써 주시기도 했고, 이 동리 청년 학생들의 장학사업이며, 사회진출문제까지 일일이 돌보이- 주는 의리를 잊지 않았다.
6. 의리의 우정〈춘강조동식 교장〉옛 성현의 말씀에 의리를 보고도 행치 않으면 그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라고 하셨다. 우촌 선생은 이 의리를 지키기 위해 무한히 노력하는 분이었다.동덕여고 재직중의 일이었다. 원래 춘강 조동식 교장은 약관의 나이 때부터 시작하여 일생동안 우리나라 민족교육계의 공로자였다. 그러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우촌 선생은 이 교장의 노후를 위해 뭔가를 해드라는 것이 교장 선생님이 이룩한 공로에 대한 보담이 되겠다고 생각하여 모금운동에 직접 나서셨다. 이 모금운동으로 교장 선생님에게 조그마한 농토라도 마련해 드려 생 활에 보댐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였다. 그러나 세태는 너무나도 각박하였다. 목전의 이혜를 위해 서는 거금이라도 아끼지 않으냐, 단순히 의리만을 위해서는 선뜻 돈을 내놓는 사람이 없었마 춘강 조동식 선생의 문하생만 하여도 수만이 되겠건만 이 모금운동애 참가하는 제자는 겨우 손가락으로 헤아릴 정도에 지냐지 않았다. 그러나 보은의 정시를 고취시키고, 이를 실천하게 하는 것이 교육가가 당연히 해야할 책무라고 생각한 우촌 선생은 불철주야 동분서주하며 뛰기 시작하였t:h 이것은 꼭 조동식 교장 선생님만을 위한 것이 이-니라, 보은교육 그 자체를 위한 실천이라고 믿으신 것이다. 선생의 이련 의지의 결과로 경기도 포천 땅의 한 전답을 매수하여 조동식 노교장 선생님에게 증정함으로써 보은교육의 귀감이 되었다.
Å 9인회 화원과 함께 (조동식 , 이세정 , 황신덕 , 신봉조, 김의형,이숙종, 송금선 , 김수진 , 배상명 , 문남식)
〈이은우 선생〉
우촌 선생의 의리는 그치지 않았다. 의리를 숭상하는 높은 선생의 정신은 과거 소년시절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은사 이은우 선생에게도 쏠리게 되었다. 그렇게도 갈망하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외롭게 살다가 별세한 이은우 선생의 분묘는 자손이 없었으므로 방치되어 형체마저도 분간키 어려운 실정에 놓여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우촌선생은 이를 비통히 여기셨다. 그리하여 선생은 이은우 선생의 산소를 개수하고 버석을 세우기로 마음 먹었다. 솔선 박기하는 동시에 이은우 선생의 문하생들을 규합하여 산소를 개수하고 비석을 세워 독립투사요「 훌륭한 교육자였던 이은우 선생의 공을 기리게 되었다. 이때 이은우 선생의 묘전에 모여 고촌의 명복을 벌면서 우촌 선생은 이렇게 제문을 읽어내려 갔다.".선생님의 지조 높£심은 일월에 견줄만 하고, 강직하심은 높고 험한 산봉우리보다 탁월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엎어진 조국 광복의 길은 요직 영재육성에 있음을 일찌기 밝히셨으며, 그리고 문하생들에게 민족의 살길을 명시하시어 이제는 조국이 광복되었고, 문화생들은 교시하셨던 바의 의리와 강건을 신념무로 하여 오로지 애민
애족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몽매에도 불망하시던 그 국권회복이 이루어졌으나, 이제 선생님의 숭고한 가르침을 받을 길이 없으니 그 비감을 어찌 하오리까.
이제 유택의 황폐함이 그지 없어 문하생들이 수분개축(修밟改藥)하고 비석을 세워 술잔을 올리오니 음찬하시고 길이 명복을 누리소서"우촌 선생은 이렇게 은사요 독렵투사였던 이은우 선생의 흔을 위로하고, 그를 홈모하는 점을 억제치 못하여 애독하기를 마지 않으셨다.이것은 바로 1960년의 일이다.〈박장열 동료 교사〉또 한가지의 일이 있다. 여기서 특별히 선생의 우의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그l자 한다.무룻 세정이라는 것은 비정한 것이라서 자기에게 이득관계가 있으면 과도할 정도로 우의를 표시하는 법이지만, 일단 자신들과 상관이 없으면 서로 상봉했던 사실조차도 없었던 것으로 하고 싶어하는 것이 예사인 법이다. 그러나 우촌 선생의 경우는 달랐다.
이미 고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생전에 특별한 후의를 엽은 것도 아니었지만, 한 동료의 죽음을 보고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우촌 선생이 박창열씨를 알게 된 것은 통덕여고에 재직할 때였다. 박장열씨는 같은 학교 동료였다. 그러나 6.25사변이 터지자 박창열씨는 난을 피하여 지방에 은신하다가 급환으혹 객지에서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그가 객사했다는 사실을 알고 친구의 우의로 동정을 금치 못했던 일이 있었다.그러다가 성 오, 육년이 지난 어느날 우연한 기회에 충남 예산군의 먹산 둥지를 여행하다가 한 여관집 주언으로부터 박장열씨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6.25사변중 서울에서 온 박창열씨가 덕산까지 피난 와서 어렵게 살다가 객사를 하자 동네 사람들이 동정하여 가매장 해주었다는 전말을 듣게 되었던 것이다.그의 처절한 최후에 대해 들은 우촌 선생은 그의 가매장 된 묘소를 찾아가 과거의 정리로 일곡을 하고 보니, 가매장 된 묘소를 돌보는 사람이 없어 봉분은 없어지고 평지가 되어 있었다.
이런 상횡을 대하고 돌아온 우촌 선생은 여러가지 생각 끝에 과거 박창열씨와 친분 관계가 있었던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그의 비참했던 최후와 그 전말을 알리고, 타인의 소유지에 가매장 된 묘소가 그나마도 평지가 되어 볼성샤납게 되었음을 주지시켰다. 그리고는 힘을 서로 합하여 고인의 유택을 새로 마련하고 비석을 세워주자고 설득하였다. 우촌 선생은 솔선수범하여 많은 금액을 자당하고, 이를 성사시컴으로 써 우의의 도를 친허 실천해 보여 주셨던 것이다.이런 선생의 우의는 당시 동아일보(1964년 12월 15 일) 지상에 보도 되었다.“충남 덕산 수댁사 근처 양지 바른 산골에 ‘밀양 박공(密|陽朴公) 장열지묘’라는 낯선 비석이 요즈음 한 개 세워졌는데, 이 비석은 서울의 한성여고 교장 김의형씨가 6.25떼에 피난갔다가 그곳에서 병사한 친구 고 박장열씨(전 서울공고교장)을 위하여 세운 것이라고 김씨는 절친한 친구 박씨가 피난갔다가 객지에서 외롭게 병사하자 박씨의 외로운 넋을 위하여 비석이라도 세워 주려고 향상 애써왔다는 것"
이처럼 우촌 선생은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그것이 옳다고 생각되는 것이면 서슴없이 실행에 옮기는 그런 분이었다.
제5장 육영과 시련
(평城學園 創立期, 1945~ 1952)1. 8.15광복과 풍운의 출범우리 민족이 1919년 3월 1 일에 전세계 만방에 성명(聲明)한 바 유명한 기미독립선언운 중에 이러한 대목이 있다.“ ... 原永寒雪얘 n乎吸을 閔짧한 것이 彼-時의 경행‘이라 하면 쭈oJffi\.n쫓陽에 氣lI1i\을 振함함은 此-時의 勢이니"제국주의 일본의 흑심한 억압 통치 아래서 어둡고 우울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그 시대는 정말로 엄동설한 매운 계절에 호흡마저 막히는 때라고 한다면, 일제의 강철 사슬이 더 이상 맥 못쓰고 풀리워지던 1945년 8월 15 일 광복의 이 날은 정영 온화한 바람과 따사론 햇볕에 맥박이 살아니는 그같은 형세의 때임이 분명하였다. 우리 국민이 피압박 민족의 비운에서 시달리기 36년 햇수에 이르러서, 그 동안 이루 다셀 수 없는 옹갖 굴욕과 수모를 있는대로 당하다가 얻은 나라가 민족의 해방이요 광복이니, 이야말로 ‘회풍난양(和風n쫓陽)에 기액(氣版)을 진서(振합)’하는 떼를 만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떼가, 우촌선생이 그의 생애를 통해서 얼대 자신의 경륜을 실현하고 그것을 왕성하게 펼쳐나가기에 가장 좋은 나이인 42 세 되는 해였다. 우촌 선생이 자신의 교육적 이념을 구현해 보이겠다는 의욕은 하펼 해방을 맞은 그 해에 비로소 불타 올랐던 것은 아니었A니, 이미 여러 해 부터 갈고 닦아온 일이었다.
일찍이 1939년 4월 5 일 이후, 그 당시 우리 나라에서 유일한 여자 의학도의 전문교육기관인 경성여자 의학전문학교(京城女子醫學專門學校)의 교수(敎授) 겸 학생주사(學生主흙)로서 강의를 담당했던 일을 비롯해서, 과거 국민학교 교육기관과 중학교육기관을 단계적으로 거치고, 나아가 고등교육기관인 전문학교에 이르기까지 골고루 관여한 우촌이었다. 그러니 그의 이갇은 경험들이야말로 앞으로의 교육사업에 그가 직접 계획하며 착수하는 데 있어서 더할 나위 없는 자료적 바탕이 되리라 함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처럼 보였다. 더욱이 선생에게는 남다른 교육 이념과 뛰어난 실천의지가 갖추어져 있던 마당이라, 이제 남은 일은 이것을 실제로 구현시키는 것 뿐이였다. 다시 말해, 옮기어 실행하는 기회, 그것만이 문제되었던 것이다.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재직 당시 (1941 년)
그런데 이제, 드디어 몽매에도 잊지를 못하던 나라의 광복을 되찾았고, 따라서 새로 맞은 조국의 봄에 기맥을 더 불어넣어 줄 기막힌 호기(好機)가 찾아든 것이다.
8.15 해방을 맞아서 대부분의 일반 국민들은 이후에 어떻게 해나가 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보다는, 우선 너무도 큰 해방의 환회에 도취되어 기두가두에 홍수처럼 몰려다니변서 흥분에만 사로잡혀 있는 듯 싶었다.그러나 이때에 우촌 선생에게는 벌써 남모르는 헤아림이 있었다.“됐다! 진정한 한국 교육을 건설할 때가 온 것이다. 초등교육까지를 모두 경험해 알고 있는 나의 총 역량을 아낌없이 발휘할 시기가 이제야온 것이다!"이같은 심중(心中)의 독백과 함께 밤에 참도 못 이 룬 채로 선생의 마음속 포부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입안 (立案)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이다.이러는 도중에, 한편에서는 출세와 공명(功名)을 노리는 일부의 친지나 동료들이 그의 앞에 찾아와서는,
“우촌, 이제 좋은 시기가 왔으니 교육계에서는 그만 손을 떼고 정계로 나가세. 우촌의 그 기상은 정치에 맞는단 말이거든. 더구나 그 흑독하던 일인(티 A) 의 탄압하에서도 한국 여성체육계에 새로운 기풍을 진작시키던 그러한 역량으로, 띠분하고 또 보답도 별로 없는 교육계에서 무슨 보람을 느끼겠다고 머무시겠소? 적어도 일국에 호령을 할 자리가 얼마든지 생길 터인데"정치적 출세길로 유인도 하고, 또는“어떤 세상이 되건 황금만능이란 말야 그러나 일인이 경영하던 영리사업체를 인수하세. 나와 함께 이런 일을 착수하세. 천직 아니 무엇이니 하여 늘 한섬한 선생 생활을 하게 마련인 교육계가 이젠 지긋지긋하지도 않은가?"이렇게 경제적 변신을 권고하는 인사(A士)도 있었는가 하면,
“잘 운동을 해서 공렵학교장으로 진출하시지. 내가 아무개에게 말만 하되 김선생이 의사가 있다고 말만하면 그 당장에 연결이 될 것이니까…”하는 등등의 유인과 권유, 권고가 수도 없이 날아 들어왔다.우촌 선생이라고 인간이 아니랴. 인간인 까닭에 친지나 동료들이 마치 모진 겨울 속에 웅크리고 있던 별나비들이 오래 머물던 풍지를 떠나 한번 날개를 치고 창공을 향해 날듯이, 입신양명을 위해 저마다 진출하는 모습을을 볼 때마다 얼마간 심적인 동요를 느끼지 않을 수는 없였으나, 다시 생각하고 또 돌이켜 생각하여 자신에게 이렇게 타이르게 되었다.“내가 염려하던 우리 나라의 광복은 이루어 쳤으나, 이 민족의 진정한 자럽은 바로 지금부터의 일이다. 형식이나 외면 만의 자립을 가지고 진정 옳은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실 질적으로 이 나라, 이 국민을 교육할 적기(週期)는 이제부터인 것이다. 보아라, 소위 과거에 교육한다던 인물들 대부분이 교단을 버리고 공리주의(功利主義)나 이기주의(利금主義)에 사로잡혀서 교단을 떠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이 국가의 중요한 기초요 지주인 이 교육을 누가 담당할 것인가? 그렇지 그래! 나 흔자 만이라도 교단을 지켜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처음에 천안보통학교(天安普通學校)로 부임할 당시 일생을 교단에서 살자고 생각한 그 결심을 굽혀서는 안되지!"
우촌 선생은 이와 같이 마음속의 결론을 짓고 끝까지 교단애 설 것을 결연히 작정하였다.마침 이 무렵이었다. 그 때까지 일본사람들이 운영하고 있던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선통 2가 389번지에 자리하고 있는 경성여자기예학교(京城女子技靈學校)를 양도하고 저희들 본국으후 돌아가겠다는 이야기가 들어왔다. 그리하여 이 교섭에 일단 웅하기로 하고 그 학교의 보다 자세한 내용을 조사하기에 이르혔다.원래, 경성여자기예학교라는 것은, 서울 서소문 턱에 었던 일인의 빈약한 사설학교였였다. 그러다 일제 말기에 바로 여기 삼선동 부지로 이전을 해 왔으니, 전체 평수 불과 2290 평 인데다가 교사(校舍)는 모두 해서 373 평에 더 지나지 않는 초라한 규모의 학교였다.
그러나 우촌 선생은 의도하는 바의 학교를 경영하겠다는 목표 밑에, 일언에게서 이 학교의 경영권을 인수해 받기로 최종 결정을 하였다.이러한 것을 안 주위의 친지들은 우촌 선생을 위한다는 마음에서,“그까짓 형편없는 학교를 적지 않은 돈을 들여 일인들에게 전별금(購別金).9...로 주고 학교를 인수한다는 일이 도리어 골치만을 사는 결과뿐이란 말야라며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뚜렷한 학교법인을 세우게 되면야 모르겠지만, 아직 그렇게도 되지 않은 처지에 도리어 모험이지. 처음부터 손을 대지 않는게 옳아."이런 말로 만류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미군(美軍) 군사정부인 문교부에서조차,
“ 일인의 경영체를 인수하시는 일은 찬성할만한 일이고, 또 이제 해방된 오늘날 교육이 무엇보다 긴급한 문제이니까 크게 의미가 있는 사엽이긴 하나, 확고한 재단의 확립이 당장 이루어지지는 않을 것이니,좀곤란하겠다고난색을표명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촌 선생은 의구심을 품는 친지 및, 단념을 종용하는 동료를 비롯해서, 찬성치 않는 당국자에게 열정을 기울여서 설득을 폈다. 특히 당국자에게 대해서는 자신의 간곡한 심정을 이렇게 펴 보였다.“일제 억압시대에는 배우고 싶어도 그들의 우맹(愚홉)정책으로 말미암아 교육을 받지 못했던 것만도 우리 민족에게는 한없이 비통한 일이었는데, 이제 조국이 광복된 지금에 와서까지 학교법인이며 재단의 완성만을 내세우면서 학교의 교문을 소위 ‘좁은문’으로만 만들고 하니, 그것이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하시오? 학교를 경영함에 있어 물론 재원은 필요한 것이지요 그러나 종래에 었던 몇 군데의 사학기관 말고야 오늘날과 같은 시급한 학교 설립에 있어 어떻게 모든 조건이 구비되어 개교를 할 수가 있겠소? 또 다른 면으로 생각해 보시요 현재와 같이 모든 질서가 흔란된 지금, 학교라도 속히 열어 점차 나라의 질서를 세워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돗에서도 학교의 개교를 서둘러야할 단계업니다. 내가 신청한 학교를 조건부라도 좋으니 인가만 해 주시면 기필코 곧 학교볍인도 완성하고 확고한 우리의 교육장(敎育場)을 이룩시켜 놓을 것이니, 그렇게 하여 주시지요”
우촌 선생이 이렇게 당시 문교장관 앞에 강경하게 두세 차례에 걸쳐 의견을 제시하니, 문교부에서도 결국은 그 열의며 이론의 타당성에 사뭇 감동을 받아 비록 ‘조건부인가(1i爾牛附訊可)’라는 단서를 붙이기는 하였으나, 그의 소원대로 학교 경영을 인가해 주기에 이르렀던 것이다.이것이 바로 1945년 9월 25 일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한성여자고급중학교(漢城女子홉級中學校)가 공식적으로 개교하게 된 날이 1945년 10월 5 일이었다. 하지만 이 때의 모집 학생의 숫자는 300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염원해 온바 개교는 보았으나, 우촌 선생 자신도 불안정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무런 계획없이 벌려 놓은 일이 결코 아니였으나 우선은 학교법인의 구성도 문제였고, 학교의 기반을 이루는 모든 조건들, 그리고 내부의 조직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과제들이 가로놓여 있었다.또 다른 한편 해방이라는 무지개적 환상에 도취만 되었지, 질서를 찾는 가운데 어느 일에 애착을 갖고 새로이 시작을 해본다던가 하는 의욕도 실천도 없이 좌충우돌하는 어린 학생들을 어떻게 이끌어야 학생의 가장 큰 본무(本務)인 학업에다만 몰두시킬 수 있는가 히는 것도 큰문제였다.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면 그것은 사상의 분열로 인해 야기되는 학원내의 혼란이었다.‘내 진심과 열성어린 충정을 보여 주면서, 덕(德)으로 수습하는 길밖엔없다!’
이렇게 굳은 결심을 한 우촌선생은 모든 정성을 다하여 학교 건설의 일 못지 않게 학생을 감화시키는 일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우촌 선생의 진정한 교육자적 신념이 이러하였고, 또 불티는 교육열이 뒤따랐던 것이나, 바깜에서는 이러한 의지의 숭고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태는 노도와 같이 거세기만 하였다. 그것은 오르기에는 너무도 아득히 높고, 무너뜨리기에는 너무도 무겁고 단단한 철벽과도 같았다. 그만큼, 해결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문제가 앞에 완강히 버티고 서 있었다.2. 난관을 넘어서서해방의 기쁨과 환희는 둘 없는 하나였는데 어디서 이같은 이념의 갈렴이 생겨났는지 몰랐다. 이 학교에도 맨 먼저 신임교사들이 취임을하여 교단에 서서 수업을 시작하면, 학생들은 그 새로 부엄한 교시·가 어떠한 사상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아보고 가려내느라 바쨌다. 공부에 최우선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생각의 방향이 과연 죄-익에 가까운지 우익에 쏠리는지를 통계잡아 보는 얼어l 온 신경을 곤두세웠던 것이다. 이를테면 저기 저 교사는
“우리 편이지"“아니 아무래도 저쪽 편 같은데이렇게 사회적 정치적 분위기에 흐르고 거기 휩쓸리기 일쑤였으나, 이제 학교라 한들 일반 사회의 난류(亂流)를 차단하는 방파제를 확보하고 있지는 못하였다. 한마디로 교사거나 학생이거나 대부분이 좌 ·우익의 두 갈래로 나뉘어 서로를 반목(反텀) 질시하였던 것이다.좌익의 학생들은 그들의 이른바 지령이리는 것에 따라서 옹갖 난행을 하였다. 교사들의 눈을 속여서 교무실에 침입하여 출석부를 훔쳐가는가 하면, 조회 때에 갑자기 전교생 앞에 등단을 하여 선동연설을 하는 따위의 행위를 하는 사례가 허다하였다. 그런가 하면 적색분자의 소행인바, 교내에 침입하여 들어와서는 밤 사이 적색 기(廠)를 국기 게양대에 게양하는 등의 일도 있었다. 즉 당시 일반 디·른 학교에서 자행하던 그러한 행동을 본교에서도 역시 헤아릴 수 없이 되풀이하여, 우촌선생의 교육정신이 한없이 침식되고 있었다. 이에 선생은 나날이 번뇌를 거듭하게 되었다.
‘정의는 이긴다. 이우리 좌익분자가 난동을 친다 해도 모든 일은 사필귀정(펄-16'、歸正)이다. 내 나라 내 민족의 우리 민족정신을 교육으로써 높여야한다.!’선생은 날마다 다짐하고 또 다짐을 하면서 그갇은 행동을 일삼는 좌익학생들을 교화시키는 데에 정력을 쏟았다. 경찰 당국에서 좌익 난동학생의 혐의가 있다고 하여 억류하려고 하면 친히 경찰서까지 가서 그 학생의 신원을 보장하고 그처럼 경거망동하는 일이 다시 없게끔 교육시킬 것을 보증하는 가운데 혐의 학생들을 맡아 데려오는 일만도 수십건에 이르렀다.
그러나 좌익세력의 조종을 받은 학생들은 선생의 배려에 감사하기는 고사하고 날로 거칠어지기만 했으니, 선생의 사택에까지 협박장을 보내기를 수십 차례나 하였다. 그 내용은 대개‘ ... 우리의 요구에 웅한다는 돗으후 내일 오전중 교문에 백묵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놓으시요 그렇지 않으면 신상에 해가 있을 것이니 각오하시요 ...... ’하는 따위의 것 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신념은 끝까지 흔들렴 없이 의연(殺然)하였다.‘정의를 보고 행하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다. 남아(男兒)가 불의에 굴복할 수가 있으랴!’아무 얼도 없는 듯 태연히 등교하였으며, 여전히 불순학생들을 억압이 아닌 덕(德)의 교화로 끌어 인도하고자 더욱 힘썼다.그러나 이러한 선생의 굳건한 태도를 역으로 악용하는 세력들은 결국 선생의 등교 떼를 기다려 엿보고 있다가 자택에서 등교하는 도중인 낙산(騎山) 기숨에서 습격하여 난티를 감행하기에 이르렀다. 7, 8명에 의해 피습, 구타를 당한 나머지 십여 군데의 중상을 입고서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이러한 불상사가 야기되었어도 선생의 교육에 대한 정열 만큼은 조금도 사그라들거나 굽혀지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민족을 위하는 정신, 그리고 학교를 건설코자 하는 심정 만큼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흘로 외치면서 비분강개하는 선생의 정신은 가일층 견고해질 뿐, 어떡해도 난동세력의 책동에 말리지는 아니하였다.이렇듯, 나라 전체의 흔란 상태와 더불어 우촌선생의 학교 또한 극도의 문란함을 겪었지만, 참된 한국의 여성교육을 건설해 보이겠다는 가룩한 포부를 지닌 그는 일백 번 꺾어도 굽힘이 없는 정신으로 학교건설에 온 힘을쏟았다.
우선은 일본인£로부터 인수 받은 자그만 학교부지를 확충시키는 것이 선생이 첫번째 목표로 삼은 일이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이같은 기원을 실현하고자 칙수하였던 일차적 과정은 단층짜리 교사(校舍)를 2층으로 올려 증축하는 작업이었다. 이 일이 비록 말하기는 간단한 것이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사회 혼란으로 인해 나날이 뛰어오르는 물가고로 부딪치는 얼마다 예상을 벗어나 난맥에 난맥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선생에게 남아 있는 단 한 가지 그 불티는 교육열과 집념은 모든 난관을 용케 극복하면서 그 어려운 공사플 서서히 점진시켜 나갔던 것이다.학교 구내에는 학교 숲의 주변으로 철조망이 둘러져 있었다. 그런데 이 철조망 콩시-야말로 선생의 신명(身命)과는 깊은 관계가 있는 일화가숨어 있었다.그것은 다름아니라, 바로 6.25 사변이 반발하던 해 이른 봄의 일이었다. 교정 앞 일만 평이 넘는 학교 숲 주변에 가시철망을 만드는 공사가 칙수되었다. 그런데 이 일을 맡은 청부업지는 나날이 뛰는 물가로 인하여 처음 계약 당시의 금액괴는 엄청난 차이와 괴리를 보게되였다. 따라서 이제 청부업지는 그 자신의 이익은 고사하고 그를 따라 품팔이를 하던 사람들의 노임 지불조치- 할 수가 없도록 막대한 손해를 당하게 되었다 그 때 노임을 요구하던 인부들이 그이를 구타하는 불상사 마저 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서로가 애매한 상황에 빠지게 된 이들의 이러한 곤란한 처지를 선생은 그냥 두고 보지 못하였다. 학교와 업지- 사이의 계약괴는 틀리는 일이었지만 업자가 처한 곤경을 우선 구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선생은 하였다. 그리하여 업자의 공사과정에 생긴 손해를 충당해 주었을 뿐 아니라, 업자의 얼마간 이익까지도 배려하는 액수를 그의 손에 건네 주었다. 우촌의 이처럼 너그러운 은덕이 훗날 바로 그의 신명( 광命)을 극적무로 돌이키는 극적 전환의 계기가 될 좋이야 그때는 누구가 알았을 것이랴!.
3.6 .25 의 소용돌이 속에서
1950년 6월 25 일 북한의 돌발적 인 남침으로 인해 일어난 6.25사변으로 조선의 옹 천지는 들끓었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이 어처구니없는 전쟁이 반발한 지 며칠 안에 서울은 북한군대에 의해 점령을 당하고 말았으니, 그 파급의 기운은 삼선동(三仙洞)에서 학교사업에 열중이던 우촌 선생에게도 들이닥치었다. 극단적인 좌익의 무리들은 우촌을 ‘악질 반동분자’라고 지칭하면서, 이른바 내무서( I지務뽑)라는 곳으로 선생을 연행하여 가고 말았던 것이다. 천리(天탤)를 거슬리어 북한에서는 살부회(殺父會)까지 조직하고 부모마저 자식이 살해하는 비인간적 · 반인도적인 무리가 이번에는 오직 교육 하나만을 천직으로 알아 교육만에 종사하는 평생 교육자인 선생을 몰아부쳐 위해(危품)하기에 이른 것이다.선생을 해치려 연행을 하였무므로 선생 자신도 모든 것을 단념하고 말았다. 그랬는데 의외에도 좌익분자들이 선생의 평소 교육지-로서 사람들로부터 받는 인망(1\휠)을 보고 그랬는지 선생에게 한가지 제안을 해왔다. 소위 인민공화국의 적색(*'色) 사상에 따라 학생들을 교육하여 줄 것을 갖가지 감언이설로 유인하기 시직하는 것이었다. 속절없이 죽게된 마당이었는지라 웬만한 사람이라면 죽음의 두려운 상황을 모면 해 보고자, 히는 수 없이라도 그 제안을 물리치기가 참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우촌 선생은 조금도 두려워함아 없이, 요히려 노한 기운을 띠며 그들 앞에 소리쳤다.“나의 근본 사상이 너희들과 틀림은 물론이고, 또 다른 면으로 보아서도 어제까지 학생들 앞에서 애국정신을 고취하띤서 우리 대한민국을 사랑하자고 외치던 내가 이제 와서 소위 인민공화국이니 또 괴뢰정치에 충성을 디-하라는 그러한 이중교육을 하라는 말인가? 나는 양섬에 비추어서 그렇게는 할 수가 없다. 나의 한 목숭을 건지겠다고 나의 정신을 꺾을 수는 없는 일이내 너희들 하고 싶은 대로 나의 생사를 맡기겠다"
이렇게 엄연한 자세로 호령한 뒤에는 좌익운동원들이 온갖 수단을 벌어 유흑도 하고 또는 갖은 공갈과 협박을 얼삼았지만, 업을 국 다문채로 의연한 태도를 고치지 않았다.이제 이러한 상태에서는 선생에게 남은 것이란 참혹한 죽음 밖에 더없을 것이었다.이 떼의 일이다. 좌익의 우리 중에서 어느 사람이 선생의 눈 앞에 나타나면서,“김의형(金義術) 교장 선생이시죠? 저를 모르시겠습니까?"하는 전혀 뜻밖의 물음을 던져왔다. 하지만 삶과 죽음의 갈렴길에 서있는 선생으로서, 눈 앞의 이 사람 저사람을 자세히 볼 수도 없었고, 또 극악무도한 좌익의 무리들을 알아보고자 하는 심정이라곤 조금도 없었던 차에 누가 누군지 알아불 나위라고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가계속말하였다.“교장 선생님, 저는 전에 선생님 학교의 수풀 가시철망을 청부맡았던 사람업니다. 그때 제가 처했던 곤경을 펴서 살려 주신 일은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리 흉악하고 무도한 좌익분자라 할지라도 선생의 그 두터운 은덕에 대하여는 그때의 그 감명과 감격을 못내 잊지 못하였던 모양이었다.당시에 좌익분꺼}들은 그들이 기준 잡은 성분 검색에 따라 체포한 언사들을 A, 8, C의 세 급(級)으로 분류를 하였는데, 이 가운데 A급에 해당하는 반동인사는 여지없이 총살로 다-루게 되어 있었다. 우촌 선생을 그들은 A급 인사로 다루려고 하였던 것이었으나, 마침 그때 내무서란 곳의 간부(幹部)로 었던 그 청부업자가 우촌 선생을 B급으후 고쳐 규정해 놓은 것이다. 그것이 지난날 우촌선생에게 받았던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면서 이른바 자수서(關뽑)라는 것을 써서 제출하라 하고는 한 순간에 석방토록 해 주었던 것이다.우촌 선생은, 과거 청부업자가 요구히는 자수서의 내용 가운데 ‘인빈공화국에 따른다’로 되어 있는 서약 내용을 어럼없는 일로 물리치고는 그의 주장하였던 바 그대로?
‘ ... 대한민국 정부의 교육정신과 그 방침에 의해 교육하였다’라고 써서 내놓으니, 이것을 본 그들 서원(홈員)들이 어떠하였으랴. 펄쩍 뛰며 노발대발하였으나 결국 철석과도 같은 선생의 고집과 의지를 더 이상은 꺾어놓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평소에 선생이 무슨 일이든지 사리에 맞게 처리하고 또 인간적 · 도의 적£로 덕을 베푸는 그 결과로서, 비록 이념을 달리하여 대립되어진사람얼지라도 그 은고(恩願)에 보탑하는 데까지 이르렀던 것이요? 이것이 결과적£로는 선생의 소중한 생명까지 보전할 수 있던 터전이 되었던 것이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라 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선생이 죽을 마당에서도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는 면모를 여기에서 볼 수 있었던 것이니, 그가 일시적인 수단이거나 방법에 따라 임기웅변식의체세를 하는 인물이 아님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나라 교육의 앞길이 그리 쉽게 허물어질 얼 아니었고, 또한 한성여중고교의 운명이 그리 쉽게 꺾일바 아니었던가 보다. 천만 다행으로 우촌선생이 좌익의 손아귀에서 그렇게 벗어날수 있었음은 .. ... .그렇게 사선(死線)에서 빠져나온 선생은 이제 선생을 어린 시절부터 품어주고 업어주며 장성하게 만든 그의 본래 터전, 그렵고도 정디운 그의 고향땅으로 피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이 때의 우촌의 심사를 어찌 이루 말로 형언해 볼 길 있었으랴. 떠나기 전에 그는 일단 학교로 가 보았다. 그랬는데 소위 교책(敎훨)이라는 명분으로 학교장 직책을 빼앗은 좌익의 사람이 선생더러 학교에서 사용하던 개인 사무용품 만큼은 갖고 떠나라며 크게 관용을 베푸는 태도였으나, 선생은 차라리 태연한 모습으로 벙그레 이렇게 응탑할 뿐이었다.“내가 오늘날까지 심혈을 쏟아 나의 모든 것을 기울이고 침식(寢食)조차 돌보지 않는 가운데 건설해 온 학교를 완전히 당신들한테 빼앗기는 이 마당에 그까짓 개인 사무비품은 가져다가 무엇에 쓰겠소? 나는 단 한 가지도 가져가지 않을 것이니 마음대로 처리하시오!"
이 말을 끝으로 남기고선 교문을 나섰던 것이다. 이와 같이 어이없는 추방의 아프고 쓴 잔을 마시게 되니, 아우리 불법척 침략으로 인하여 얼어난· 국가적 비극의 소치라 하더라도, 선생이 학교에 대한 애착이 컸으면 컸던만큼 학교를 빼앗긴 그 비애와 비통함 또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함을 새삼 설명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그러한 선생의 뒤를 따라서 학교를 물러나게 된 진정한 부하 교시들과 함께 통한(痛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하였던 것이다.선생은 호랑이 아구리와 같은 콧에 그대로 있을 수 없는 위험을 깨닫고서 서울을 빠져 나와, 앞에 말한 바와 같이 육지길을 따라 고향으로 향하는 몸이 되었다. 그때까지 20년이 념는 교육자척 생활에 있어서 밤낮 없이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하여 모든 정열을 쏟아옹 서울이었다. 특히 이 나라 여성의 체위(體位) 향상을 위하여 성혈을 다 기울여서 한국의 여성들이 생생하고 발랄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그 중요한 주춧돌 역할을 다 하려던 선생이 그 온전한 보람도 찾지 못한채 초라한 행색으로 한강(漢江)을 건널 때에는, 원래 굳센 의지의 소유자인 선생이건마는 눈앞을 가련 채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억제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저 조선시대 인조조({=祖湖)에, 저 만주의 호족(胡族)에 의해 이 강토를 침략당하던 때에, 그 시대의 아픈 운명을 젊어져야 했던 척화신(J주和닮) 가운데 한 사람인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한양을 떠나면서 옮은 유명한 다음과 같은 시조가 있다.가노라 삼걱-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고국 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시절이 하수상하니 올동말통하여라이 시조가 자아내는 심경과 어쩌면 꼭 같다 싶은 심정으로, 선생도 서울에 작별을 고하고 한강을 건너서 갔던 것이다.맨걸음으로써 옹갖 고초를 다 겪으면서 고향으로 피난한 선생은, 설로 오랜만에 아늑한 고향의 산천, 그 품 안에 안기움과 동시에, 자당(慧掌)을 모시어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전심전력으로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쳐 키워 온 학교를 도적당한 허탈감이 멀리곤 하였다. 게다가 남침의 기세가 정점 심각하여 북한 군대의 총화(統火)가 계속하여 남쪽으로 내려오는 전쟁 상황을 듣는 선생의 초조감은 날로 더하여갔다. 그러나 선생은 인간의 자유와 정의가 마침내는 승리한다는 신념을 항상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국군이 끝내는 이 전쟁에서 개가를 올릴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선생의 이 예감은 적중되었다. 서울이 북한 군대에 의해 점령을 당한 지 3개월만인 1950년 9월 28 일, 저 유명한 멕아더 장군의 9월 16일의 인천상륙작전이 전세를 성공리에 역전시켰던 것이요 이에 서울도 감격적인 수복(收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대한민국 만세!"그리고,“우리 한성여중고 만세!"
를 몇 번이고 외치었다. 이 산(山), 저 강(江)은 앞A로 선생이 펼쳐나갈 교육사업을 길이길이 돕겠노라 약속이라도 하는 듯 유유한 산울렴이 되어 퍼져나갔던 것이다.서울이 탈환되었다는 희소식 뒤에 고향에 은둔하던 선생의 마음은 한시가 급해졌다. 더구나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서울이 대부분 폭격과 총화(統火)에 대부분 폐허가 되어 건물마저 거의 파괴를 면치 못하였다는 소식에 심사는 더더욱 초초하여졌다. 아직 정식우로 환도(遠都)하는 단계까지는 못되었고 또한 전화(뿔鋼) 속에 파묻혔던 서울의 모든 질서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온갖 상상이 머리를 다 혼란하게 하였다. 그렇다고 태연히 고향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도 없음을 느낀 우촌은 고향에 함께 피신하고 있었던 직원 몇 사람과 함께 서울길에 올랐다.밀짚모자를 쓰고, 등에다간 쌀 한말 씩을 각각 나누어 진 채였다. 식량이 결핍되었을 서울의 형편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아직 더위가 다 가시지 않은 절기이라 꽤나 따가운 햇볕 아래서 계속하여 길을 재촉하였다. 공주(公州)를 지나 험준한· 고갯길을 넘어 바야흐로 천안삼거리(天安三距里)라는 민요로 이름 높은 그 땅 근방에 이르렀다.
그 무렵은 서울 이날에 흩어져 있던 북한군을 소탕하기 위한 국군과 미군의 흐름이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던 때였다. 그때 마주친 미군의 눈에 이 상하게도 걸음을 재촉해서 북쪽 서울로 향하는 밀 짚모자 차립의 선생 일행이 수상하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선생 일행을 괴이한 눈초리로 아래 위 옳어보더니만, 선생의 일행 가운데 직원 한 사람을 다짜고짜 군용트럭 위에 연행하여 태우고는 재쳐 떠나버리는 것이었다. 필경은 인민공작대원 쪽으호 오안을 하였던 것 이 분명하였다 서로 말도 찰 통하지 않을 뿐더러 자세한 설명조차 해 볼 틈도 없이 자취를 검추었던 것이 니 한마디로 순식간에 포로가 되고만 것 이 다. 그때로 밀하면 국군과 유엔군이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면서 북한군을 몰아치는전투 가운데 있었으니, 일반인에게 증명서 같은 것이 발급될 기회가 있을리 없었다. 아놓든 급작이 속속무책으로 닥친 이 졸경과 위급 ... 일은 정말 맹랑하게 되어버렸다.
우촌 선생은 심사가 매우 괴로웠다. 부하 직원의 횡액(橫m;)을 그대로 방치하여 버린 채 서울로 향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유엔군 군용차가 직원을 싣고 달려간 천안(天安) 시내로 들어가서 그다음 어떠한 방안이든지 깅구하는 길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막 천안 시내쪽으로 가서 어떤 방도이든지 취해 보려고 급히 걸음을 재촉해 시내에 다달을 즈음인데, 이번에는 천안경찰서원 한 사람이 길을 막고는 선생을 조사하겠노라며 경찰서까지 동행을 요구하는 것 이었다. 산넘어 산이라고 실로 난감하고 참담하기 짝 없었으나· 함께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남게 된 두 직원은 앞뒤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런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들은 갈팡질팡하다가 어느 길 옆애 있는 민가 한 집을 찾이- 들어가서는 각자 등에 지고 있던 쌀자루를 맡겨 부탁하였다. 우선 몽이라도 흘가분히 하고 유엔군이며 경찰서를 다니면서 그들의 오언을 풀어 우촌 선생과 포로신세가 된 직원을 풀려나게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서로 해결책을 모색하여 보려 했으나 묘안보다는 푸념이 앞섰다.
“허! 참 기막인 일도 다 함}는군. 장차 어떻게 해야 교장선생님 을모셔 오며, 또 어떻게 유엔군한테 끌려간 사람을 찾아온담. 유엔군에게는 어느 쪽£로 끌려갔는지 알 수나 있어야지 .... . .“전시(뿔이흉)에 이런 뜻하지 않은 일을 당했으니 이 일을 장차 어떡하면 좋을구선생을 수행하던 두 직원은 무한한 한탄과 허무한 논의만을 거듭하나 쉽사리 좋은 방안이 나서지를 않았다.쌀자루를 우연히 맡아 준 그 집 부인이 옆에서 두 사람의 탄식을 듣고 있다가 이상히 여기면서,“왜 그러세요? 무슨 일인데요.7"하고 물으니, 그들은 지금까지 당한 일의 모든 경위를 알려 주며 새삼 답답함을호소하였다.
“그럼 그 학교 선생 이 누구신가요?"여주인이 거듭하여 되묻자.“여기 천안에 계신 분이 아니니까 아주머니는 잘 모르실 겁니다. 김의형 교장 선생님이라고"이렇게 응답을 하였다. 그러자 그 주인이 깜짝 놀라면서,“김의형 교장님이시라구요? 그 분이 경찰에 연행되시다니 말이 됩니까? 제가 가서 모셔오지요."하고는, 그 당장 고무신을 끌고 집 밖을 나서서 경찰서로 달리는 것이였다. 두 사람은 그렇지 않아도 잔뜩 놀란 가슴들이다. 또 어떤 예기치 못한 사건이라도 일어나는 것이나 아닐까 하고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조금 있다가 그집 여주인이 우촌 선생과 함께 눈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있는대로 애간장을 태우던 그 두 사람이 얼마나 기빼하였겠는지. 눈물이 어린 얼굴로 우촌 선생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그 여주인이 누구였던가? 그녀는 다름 아니라, 지난날 우촌 선생이 처음 교육계에 투신하면서 바로 이콧 천안(天安)에 부임하였고, 또 한 참 교육에 온갖 정력을 다 쏟아 부었을 당시의 애제자(愛弟子)였던 것이다.그녀는 마침 북한군을 물리친 직후에 질서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조직되어진 천안시 치안대의 간부로 있었다. 그런 까닭에, 경찰서로 달려가서는 검교장임을 증언하는 말 한마디로 즉시 모셔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옛 논어(論語)의 가르침 가운데 ‘덕불고(德不孤)’란 말이 있다. 덕(德)은 외롭지 않다는 뜻이다. 또한 ‘척선지가(짧뽑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 ’이란 말이 있으니, 착한 일을 쌓는 집에는 반드시 경사로운일이 남게 된다는 뭇이거니와, 이와 같은 옛 교훈들이 바로 이 우촌 선생의 경우에조차 꼭 들어맞는 말이 되었던 것이다.
그 주인인 엄씨(林民)는 우촌 선생 일행을 곧바로 여관에 모시었다. 일행은 먼 걸의 피로함과 초조함 속에 상심한 괴로움을 풀어볼 길이 있게 되었다.그녀는 그 이튿날 아침에 영문(英文)까지 곁들인 완전한 증명서를 만들어 왔다. 그리하여 서울 가는 걸음을 재우칠 수 있게 되었고, 유엔군에 끌려 가서 종래 난감하기만 했던 그 직원 한 사람도 나중에 서울로 무사히 올라와 상봉을 하였다.우촌 선생의 가룩한 교육의 자취는 수십 년이 지난 기나긴 세월의 흐름 뒤에도 제자들마다의 가슴 속에 길이 남아 있어서, 이렇듯 한 편의 드라마와도 갇은 극적인 일이 사제간에 엄연한 현실로 아름답게 승화되어 나타났던 것이다.한펀 선생으로 보면, 그의 이상을 펴고자 하는 콧이 오로지 학교 한군데에 있었고, 학교를 지극히 사랑하는 그 심정은 아무리 치열한 전쟁의 마당이라 할 망정 그것을 뚫고라도 학교를 수호할 일념에 사로잡혔던 까닭으로 상경길에 한 때 이같은 곤욕과 고역을 치루었음이다.
선생의 일행이 막상 서울에 당도해 놓고 보니, 삼개월 남짓을 두고 험한 발굽 아래 시달린 나머지 지난날의 반듯하고 희망 어린 모습은 간 콧이 없었다. 그 간의 모진 고생으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시민들은 간신허 생명 만이라도 살아 남은 것을 천행무로 여기고 있었다. 거리에 즐비하니 그 높다람을 자랑하던 고층건물 자리에는 파괴된 돌덩이만이 핑굴고 있었다. 영설공히 폐허, 그 자체였다.그러나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는 말처럼 하늘은 정성이 가득한 우촌 선생을 크게 절망시키지는 않았다. 북한군이 한성여자중고교의 교사(校舍) 안팎을 수라장으로 만들어 놓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건물 만은 옛 모습 그대로이어서 파괴된 콧이 없었다. 이렇듯 다행한 모습을 확인한 우촌 선생은 감격의 눈물과 함께 갚이 안도의 숨을 쉬어 볼 길 있였던 것이다.그 감격의 9.28 서울 탈환 이후, 무사한 옴으로 다시 학교에 돌아옴학생들은 우촌 선생의 건송함을 보고는 한결같이 재회와 솟구치는 격정을 못이겨 결국은 소리쳐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렇듯 다시금 뿌듯한 학교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게 된 선생은, 새로운 기분으로 보람찬 교육의 도(道)를 쌓아 올리고자 쉬 임 없는 나날을 보내었다.그러나 또 어찌 뜻하였겠는가 이러한 기쁨과 보람의 생활도 얼마 가지는 못하였다. 유엔군과 국군의 승승장구로 다 이긴 전쟁이라 생각하였었다.맥아더 원수의 9월 16 일 인천상륙작전을 전환점으로 전쟁의 형세를 반전시킨 유엔군과 국군은 패하여 달아니는 북한 공산군을 계속하여 뒤쫓으니, 드디어 10월에는 평양을 수복하게 되었고, 더욱 전진하여 마침내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진격, 커다란 감격을 맛보았다.유엔군과 국군의 이같은 승승장구로 이제는 다 아긴 전쟁이라 생각하였다.그러나 돗밖애 개입한 중공군의 반격A로 아군은 12월에는 북한 지역에서 분한 눈물을 훔치면서 철수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일면 계속 후퇴하는 가운데, 유엔 총회에서는 휴전을 하자며 중공과 접촉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정전(停戰)을 위한 유엔의 3 인위원회가 중공과의 접촉에서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하였다.
그 무렵 중공이 정전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은 당연히 그들에게 전세가 유리했던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계속적언 중공군의 반격으로 아군은 다시 남으로 남으로 밀려나기 시작하였고, 이제 그 형세는 서울에까지 또 밀어닥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다시 한번 학교를 비워둔채 서울시민과 함께 납하(南下)하는 피난 대열에 끼게 되였으니, 이것이 1.4후퇴언 것이다.나라의 운명이 아직 불행을 다 면치 못하면서, 몇 차례고 이러한 쓰라렴을 당해야만 하는 선생의 비통한 심정은 이루 말로 형언해 볼 길 조차 없었다. 기가 막힌 노릇이나 현실 앞에 벌어지는 일을 달리 어떻게 해 볼방도는 없었다.또 다시 서울을 내놓게 되는 그 마당에 선생은 학교의 문을 닫고는 참혹한 심경으로 다시금 고향을 찾아야만 했다.
이때의 서울 시민들은 전쟁 직후 북한 군대에 지배를 당하였던 그 여름의 석달 동안 악몽과도 갇이 시달리던 그 고통을 채 씻어 버릴 겨를도 없게 되었다. 아무런 정신없이 푸렷한 방향감각도 잃은 채 그저 남쪽을 향하여만 몰려 갔을 뿐이니, 그 행렬의 대부분은 육로를 따라 걸었다. 극소수가 기차를 이용하였지만, 그 마당에 객차와 화울차를 가릴 것이 없먼지라 기차 지붕 위에까지 올라 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숫자가 하도 념쳐나서 가는 도중에 떨어져서 생명을 잃는 사람도 셀 수 없이 많았다. 그야말로 목불인견(팀不忍見)이란 이런 일을 두고서 하는 말얼 것이다. 하여간 그 6 . 25동란으로 인해 250만이란 엄청난 수의 통포가 고귀한 생명을 잃었으니 그 참혹한 실상을 녁넉히 알 수가었다.이러한 참상을 일일히 눈으로 겪은 선생은 참으호 비강한 마음을 억제할 수 없어 고향에 머무는 동안 한시도 편안한 시간을 지내지 못하고 상심을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정부기관이 모두 부산으로 옮긴 것을 알고는 시국의 정세와 학교에 대한 수습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모색하기 위해 일단 고향을 떠냐서 단신 부산으로 향하였다.전란(행鋼L) 중인지라 이용할 교통 수단이 만만할 리 없었다. 그 먼대부분의 여정(旅程)을 거의 걷다시피하여 부산에 당도하게 되었다.거기서 다행히도 서울에서 헤어졌던 서울시 학교장들을 반갑게 만날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 곧바로 문교부 당국자들과 서울시 당국자들을 만나보고 앞으후 취해 나갈 방향과 태도를 상의한 결과,“북괴군은 거의 괴멸되었지만 중공군이 소위 의용군(義勇軍)이리는 명목으로 조수(폐水)와도 같이 밀려 오고 있오며, 또한 이 전쟁은 길게 갈 것이 틀림없으니 임시 수도인 여기 부산에다 분교(分校)라도 마련하고 서울에서 내려온 여러 학생들을 모아서 지도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하는데요"와 같은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의견을 듣는 가운데 우촌 선생은 한성여고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에 대해 갚은 생각에 잠기였다. 생각 중에 여기 부산에 피난 온 교육계의 원로이지- 우촌선생이 전에 모시고 있던 동덕여고 교장인 조동식(趙束뼈)선생에게 인사도 할 겸 의논도 할 겸해서 그가 계신 거처를 찾아갔다.서로 살아 남아 피난처에서 상봉하는 두 사람의 감회는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친 다음 학교에 관한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상의를 하니, 조교장 역시 임시 분교라도 설립하는 것이 옳겠다는 말씀이었다.그 자리에서 우촌 선생은 조교장 앞에 한 가지 당부를 드렸다. 만약에 문교부의 방침이 부산에다가 피난학교를 설치하기로 정해질 경우에 는 동덕여고교와 한성여고교를 합병하여 설치해 줄 것과, 아울러 임시 담당교사를 정해 둘 일을 부탁하였음이다. 그리고는 고향으로 되돌아온 것이니, 이것이 1951 년 2 월초의 일이었다.바로 그 달 초하룻날(19512.1) 유엔 총회는 미국의 제안에 따라 ‘평화를 위한 단결’ 결의에 준거하여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찬성 44, 반대 7, 기권 9라는 결과에 따라 한반도에서의 중공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가 채택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계속하여 남하하는 중공군에 대한 유엔군의 반격이 1 월 25 일부터 재개되었던 참이었다. 그리하여 2 월 10 일에는 인천과 검포를 탈환하였고. 3월 14 일에는 서울을 재탈환하였으며, 3월 24 일에는 38선 돌파에 성공을 거두었다.
다시금 서울을 뒤로 해야만 했던 그 억장이 메이는 1.4 후퇴 뒤에 국군과 유엔군이 오래지 않아 중공군을 격퇴하고 서울을 되찾기는 하였으나, 이 때엔 9.28 서울수복 당시의 조급하였던 전철을 밟지 않£려는 조심성 때문이었던지 정부 여러 기관의 서울 환도는 생각지도 않고 있었다.돌이켜보면 1950년 8월 18 일 서울을 잃은 정부는 수도를 부산으로 옮겼고, 9.28 서울 탈환 이후 10월 27 일 정부가 비로소 서울로 환도할 수 있었다. 다시 1 월 4 일의 후퇴로 서울이 접령당하고 3월 16 일 다시재탈환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수도를 서울로 옮기지 않은 채 부산을 엄시수도로 정하고서 모든 국가적 행정을 부산에서 처리하였던 것이다. 이 부산 업시수도 시절인 1951 년 8월 15 일의 광복절 기념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신당(新짧) 조직의 필요성에 대해 처음 언급을 하였다. 6.25동란으로 정당정치 제도가 확고히 세워지지 뭇하고 국회 안에는 안전 의석(誠席)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의 정치적 포석과 결심이었던 것이오, 결국 그 해 12월 겨울 자유당을 창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창당(創輸)의 초기부터 ‘원내자유당’과 ‘원외자유당’의 이름이 보여주듯 두개 정당과 같은 분열상을 보였고, 또 이승만대통령이 자유당 족청계(族좁系)의 지도자인 이범석(李範奭)의 세력을 꺾기 위한 거세작업에 힘쓰는 등 정치적 혼란이 적지 않았던 시기였으니 서울 환도는 아예 꿈도 꾸지 않는 양 하였다. 그러다가 나중 1953년 7월 27 일의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난 다음언 같은 해 8월 15 일에나 비로소 서울로의 환도가 이루어졌던 것이요 국회의 환도도 9월 16 일에냐 이루어졌던것이다.
모든 것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천리타향으로 유랑의 신세를 겪어야만 했던 서울시민들은 모두 그야말로 일각( -刻)이 여삼추(1m三秋)로 기다리였고 그속에서도 생명과 같이 학교를 사랑하던 우촌선생은 누구보다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였다.
비록 임시수도인 부산에 5월 20 일을 기하여 동덕여자고등학교와 공동무로 분교(分校) 설치를 하기는 하였으나, 아무래도 우촌 선생의 마음 깊은 곳에서 무언가 허전함을 금할 길 없었으니 다름 아닌 서울에 두고 온 학교가 무엿보다 궁금하여 참기 어려웠던 것이다. 우촌선생은 결국 서울의 텅비어 있을 교사( 校含)라도 보았으면 하는 충동을 더 이상 억제하지 못하고 사면팔방으로 주션을 하여 한강을 넘어도 좋다는 증명서 인 이른바 ‘한강도강증(평江波江;얀)’을 얻어 내고는 그의 고향에서 함께 머물러 지내던 부하 직원과 함께 위험함을 무릅쓰고 다시 학교가 있는 서울로 향하기에 이르렀던 것 이다.
지난 50년 여름과 똑같이 식량으로 쓸 쌀을 등에 지고 맨걸음으후 천신민-고의 고생을 다 겪으띤서 간신히 서울에 당도허-였다.도착하여 살펴보매 서울은 마치 사람이 없는 빈 집과도 같은 모양으로 있었다. 전쟁 전에는 인구 이백 만에 가깝던 고장에 겨우 육십만이 넘-아 있다는 것이었으니, 거리는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시내 거리에 서 있는 건물의 파괴는 작년보다 더 무너지거나 타버린 것은 없었지만, 시민을 만난다는 일이 마치 가뭄에 콩나기 격이었다.거리에 파괴된 건물이 더 늘어나 보이지 않은 것을 본 우촌선생의 심정은 조금 안심하는 듯 하였으나, 그래도 학교 안의 교사(校舍)가 무사한지 종내 염려를 거둘 수 없어 급히 삼선동 교사로 달려갔다. 보니, 터영 비인 공청(公應\)0 1 었지마는 조금도 파손되지 않은채 그대로 서있었다. 오매불망 잊지 못하고 걱정하던 학교의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인데디 거의 반년 만에 대해 보는 교사의 모습 앞에 선생의 감회는형언할 길 없이 벅차 올랐다.
감격에 젖어서 학교 안으로 들어섰고, 그 다음 교사 내부를 두루 돌아- 보았다 외모가 상한 것이 없였던 대신, 교실의 비품들은 깡그리 없어진 채였다. 책상 의자가 단 하나도 남지 않았고 애써 모아 놓았던 교편물이며 교구(敎具)는 그 어디에서도찾아팔수 없었다. 밀하자면 속이 번 장정이라는 밀· 그대로였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시내에 있는 대부분의 학교 교시-를 유엔군이나 국군이 들어가서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런대로 물건들이 그 지-리에 남아있을 수 있었지만, 한성여중고 만은 텅빈 상태로 놓아두었던 까닭임을 알았다.우촌 선생은 당시 서울에 들어와 있언 얼부 시교육당국지플 찾아서 앞으로의 방책을 협의해 보고자 찾아 갔다. 그렇지 않아도 마침 부산 등지로 피난을 못해 시내에 잔류하여 있던 중학교 학생들 사이에 논의가 없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하루 속히 그들 학생들을 위한 교육을 실시해야 할 필요와, 그에 따라 현실적으로 기·르치고 배울 수 있는 시설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대두되어 있었음이다.이어서 우촌 선생의 학교 교사가 그때 마침 비어있었음에 따라, 시교육덩국으로부터 임시 교육장소로 사용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우촌 선생이 먼저 그렇게 하고 싶었던 사항인데 반대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 시책이 실시되는 때에는 교사로 사용해도 좋겠다고 허락하고는 다시 향리로 내려갔다.
그리고 대강의 준비를 갖추고 다시 상경을 한 선생의 심정은 흐뭇하였다. 진정한 나라의 자립을 완성하기 위하여는 교육이 무엿보다 시급한 것임을 늘 역설해요던 선생이었다. 하물며 이러한 동란을 당하여는 국력을 더 키우고 침략의 무리를 물리치기 위해서 더욱 교육이 급선무임을 절실히 느껴온 선생이었다. 전란의 한가운데에 있는 상황임을 무릅쓰고 교육을 시켜야만 정신적 힘이 배양되고, 뿐만 아니라 살벌한 분위기에 물들기 쉬운 후학들을 순화시킬 수 있다고 그것이 가장 빠른 지름길이라고 생각했던 선생이었다. 나라가 역경에 처할수록 더욱 교육의 필요성이 가중된다는 믿음이었던 것이다.이리하여 1951 년 10월 1 일, 서울 시내 동서남북 네 곳에다 잔류 중고등학생의 교육 장소를 정하게 됨에 따라 선생의 학교 자리에 성북잔류 중고등학생 훈육소를 개설하게 되었고, 선생이 소장(所長) 이린· 무거운 책임을 맡게 되었다.
책상도 없는 교실이었지만, 한시가 급하게 교육을 받겠다는 강한 집념으로 선생의 지도를 받으려고 구름처럼 모여든 남녀 중고등학생의 수가 우려 삼천 명 이 상에 이르렀던 것이다.선생의 가슴은 벅갔다. 이러한 때가 오기를 그 생사가 엇갈리는 전쟁 중에 그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6 . 25 의 반발 이후 일년도 넘게 학업에 굶주려 있던 학생들을 위해 온갖 열의와 성의로써 지도를 하니, 평화시에 비하여 몇십 배의 성과가 오르는 듯하였다.이 무렵의 상황을 보면, 서울의 북방 겨우 몇십 리도 안되는 콧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과 대치하여 전투를 벌이고 있었던 떼였다. 전쟁의 불안과 공포를 옴으로 실감하는 그러한 거리에서 학엽은 진행되었다. 말하자면 진중(陣中)에서 학업에 종사하고 있는 형편이였다. 어느 때에 적의 비행기가 공습할런지 모르는 처지였고, 또 어느 떼 척의포탄이 떨어져 버릴런지 모르는 그러한 콧에서 공부에 열중하였던 것이다. 지도를 하는 교사나 공부를 하는 학생이나 하나같이 전전긍긍하는 가운데에서도 학업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렇듯 우촌 선생이 학교운영의 애로와 함께 아직 환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지역언 어두운 서울에서 육영사업을 진행하느라 마음을 쓰는 정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같은 전시교육체제(戰時敎育體制)라 할망정 부산에서 하는 것고}는 비교할 수 없는 세심한 배려가 따라야만 했을 것이다.어쩌다 분교(分校) 관계라던지, 문교부와의 연락 관계로 부산에 가는 때에는, 서울서 피난한 다른 교육자들이 하나같이 안정된 부산의 생활을 자랑삼아 말하곤 했다.“분교도 부산에 있는 마당이니 완전한 환도가 이루어질 때까지 우선 안정된 부산에 와서 있지, 무엇 때문에 외로운 섬모양 외따로 떨어져 있는 쓸쓸한 콧에서 온갖 애로를 겪으며 구차하게 남아 있는 자녀들을 지도하고 있을게 무엇이요? 다 그만 두고 부산£로 내려오시요”
이같은 권고를 수도 없이 받았던 것이지만 선생은 완강히,“어쩔 수 없어서 서울에 남아 있게 된 아이들을 교육하는 일과, 지금의 서울과 갇이 진지(陣地) 안에 있는 것과 다홈 없는 어려운 콧에서 교육송}는 일이 지금의 우리로서는 가장 요긴하고 보람있는 일이 아니겠소?"대답하고, 다시금 의연하게 서울로 돌아오던 것이었다.부산에서 피난중이긴 하지만 그런대로 질서가 서고 정돈이 이루어져서 웬만큼 편안하게 학교 운영을 할 수 있던 다른 교육자들도 선생의 그같은 처사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선생이 사서 고생을 겪는다고 안타까워하는 것이였으나, 이것이 정녕 선생에게 조차 안타까운 일은 못되었던 것이다. 그는 참말 스스로가 기꺼워서 그 일을 수행해 나갔던 까닭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도 선생의 전쟁 중에 행한 바 후학에 대한 굳은 교육적 신념을 껴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애로 투성이의 험난한 환경 속에서 교육을 진행하는 중에, 문교 당국이 세계 여러 나라의 학제(學制)와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종래의 중학교를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하였다. 이것을 각각 삼년제로 하여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만들게 되었으니, 한성여중고도 이제는 한성여자중학교와 한성여자고등학교의 둘로 하는 동시에, 우촌 김의형 선생이 두 학교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이것이 1952년 5월 31 얼의 일이었다.돌이켜 보면, 우촌 선생이 1945년 10월 그의 개인 재산을 회사하여 한성여자고등학교를 설렵한 이래 몇 번의 학제(學制)가 바해였다. 처음 설립 당시는 수업연한이 4년이었으나, 1947년에 6년A로 연장되고 한성여자중학교로 개편되었던 것인데 6.25전쟁 중의 학제개편에 따라 지금처럼 3년제 한성여자중학교와 한성여자고등학교로의 분리 개편을 보았던 것이니, 참으로 격동의 역사 안에서 이상의 그 7 년 세월 동안 적지 않은 변천을 겪어 왔던 것이다.이로써 우촌 선생은 해야 할 일이 더욱 많아졌음을 느꼈다. 그는 이제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분리에 따른 각각의 구상을 새롭게 펴나가는 일에 한층 더 쉴 사이 없이 분주한 몸이 된 것이다.
제6장 교육과 체육계 활동
(漢城學園設立期1953~ 1983)1. 재기 또 시련학교를 온전하게 건설하기 위한 우촌 선생의 피땀어린 노력은 진정국가와 사회의 혼란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또 전시(戰時)임에도 구애없이 끈질기게 계속되었다.그리하여 선생의 흔신을 다바치는 노력으로 내실적인 면은 나날이 충실을 더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문교부에 정식우로 학교법인(學校法A) 의 인가 신청은 제출하지 않은 상태였다.돌이켜서, 그 사이에 법인의 설립의 경로를 되돌아보띤 다음과 같다.
우촌 선생이 법인 설립을 위하여 여러 방면무로 주선의 노력을 거품하였으나, 법인을 설립할 재원(財源)을 내놓겠다는 인사CA士)룹 막상 만나 보면 그 모두가 학교 운영에 사리(私利)를 따지는 면들이 많았다. 즉, 교육적 공도(公道) 실천이리는 관념보디는 개언적 수익을 염두에 두는 동시에 학교의 전체 권한을 차지하겠다는 목적이 너무도 농후하였다.이런 마당이니, 후생(後生)을 교육시켜서 나라의 역군(沒軍)을 만들고자 하는 선생의 순수한 의도와는 근본적으로 어긋나 있음이었다. 선생은 이를 깨닫고서 더 이상 외부에서 법인 설렵지를 구한다는 일은 이주 포기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이제는 어떡해서든 자력(自力)으로 라도 해 내지 않을 수 없다는 결심과 함께, 그것을 실천으로 추진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전쟁 중간에도 꾸준히 진행되어 왔던 것이어니와 이제 선생의 소유로 되어 었던 엄야를 아낌없이 희사하여 학교법인을 창설하니, 이에 오랫동안 숙원해 오던 학교법인 ‘한성학원(ìJ팽成學園)’이 완성된 것이다.이것이 1953년 1 월 20 일의 일 01 며, 설립자인 우촌 김의형 선생이 초대 이사장에 취업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이것으로 한성학원은 명칭과 실제가 서로 부합되는 힘찬 약진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울러서, 같은해 1953년의 3월 31 일에는, 전란 중에 임시 조처로 설치되었던 성북잔류중고등학생훈육소를 해체하기로 한 문교부의 결정이 있었다.
여기서 잠깐 6.25동란 이후의 문교부의 교육에 대한 시책을 돌아보면 이러하였다.전쟁이 반발하자 전시(戰時) 교육체제로 전환하여 온 교육계가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함은 앞에서 보아 왔던 바와 같다. 이 무렵 전시교육은 노천에서 교과서 없이 생활중심의 것으로 시작되었으니, 문교부는 교과서 문제를 해결하고 전시생활을 지도하기 위해 『전시독본(戰時調本).1]이란 책을 발간하여 국민학교와 중학교에 제공하였다. 전쟁중 교육의 목적은 주로 멸공통일과 전쟁 이후의 재건에 있었다. 교재 또한 전시에 따른 생활지도에 비중을 두었음과 동시에, 중학교 이상에서 는 한 사람이 한 가지 기술을 익히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이른바 일인일기 (-A-技) 교육을 폈다. 1951 년 6월에 문교부는 ‘일인일기 교육실시요강’을 발표하여, 체험과 근로를 통해 개인의 적성에 맞는 기술을습득케 하여 자주적 생활 능력을 키우는 동시에 전쟁 뒤의 복구 건설사업에 이바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교육제도의 자치화를 의미핸 구체적안 형태로서 1952년 5월에 시 · 군 교육위원회의 위원이 선출되었던 것이다. 바로 다음 해인 1953년 3월 쯤에는 바야흐로 전쟁이 마무리 되어 가는 분위기 안에서 이제 교육 정상화를 위한 구체적인 실무 계획을 서서히 실천에 옮겨도 좋겠다는 판단이 섰던 모양이다. 서울 성북지역의 잔류학생을 가르치던 공간을 해체하기로 결청을 내렸던 일도 아마 그같은 판단하에서였을 것이다.
바로 이 문교부의 방침에 따라 한성학원에서도 학교에 수용하던 3천여명의 학생을 각각 자기네의 본교로 돌아가게 하고, 본교생언 한성여자중고등학교의 학생 만을 수용하여 지도하기에 이르렀다.이런 다음 약 4개월 만인 7월 27 일에는 3년여에 걸친 오랜 전쟁이 일단 매듭을 짓는 휴전이 성렵되었다. 휴전이 성렵되고 얼마 안된 8월 15 일에는 정부도 임시수도로 지내던 부산에서 서울로 다시 환도를 하니, 부산에 았던 한성분교도 서울에 있는 본교로 모두 복귀하게 되었다. 이것이 9월 1 일의 얼이었다.
학교법인이 확렵되었고, 부산의 본교가 서울 본래의 터전으로 복귀하였으며, 또 이제는 본교생만을 모아서 교육을 실시하게 된 선생은 이제야말로 기슴 속에 풍고 있는 자신의 이념을 한껏 펼 수가 있게 되어 얼마나 기빼했는지 모른다. 주야를 가리지 않고 모든 힘을 학교 교육에 가일층 쏟아 부으니, 정말 하늘로 솟구쳐 오를 듯한 기세로 활기찬 전진을 하기에 이르렀다.학교 안팎의 모든 것을 정비하였으니 기를이 우선 바르게 섰다. 그러나 육영사업이 인재를 육성하는 일종의 소비성 사업이고 보니, 학교 운영에 따른 경비를 지속척으로 충당할 수 있는 수업원이 필요한 것을 알고 있는 선생은 학교법인이 운영하는 기업체를 만들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선생은 법인의 제 2단계 사업£로서 이제 기업체에 착수할
엽전을순시하며
(오른쪽에서 세번째 , 1960 년대)
필요를 절감하였다. 대개는 이러한 기업체가 없는 까닭에 학교가 학부형들의 주머니를 무리하게 털어내게 되며 따라서 세칭 학교가 이익이나 꾀하는 기관처럼 되고 국가샤회의 원성을 사는 대상이 되다시피하는, 이를테면 본말(本末)이 바뀌는 현상마저 생겨 왔던 것이었다.
이것을 극히 꺼려한 선생은 여러 가지 연구와 더불어서 또 사색을 거듭한 끝에 마침 충청남도 당진군(J휩-律那)에 이미 설비되어 있는 적당한 엽전이 있음을 알고는, 이것을 법인 운영체로 사들였다. 그리하여 이것이 한성학원 학교법인의 경영체로 속하게 되었다. 그 총면적은 4,270,563 평방미터가 되었다.이렇게 선생이 의도한 바에 따라서 학교의 근간을 이루는 기반을 굳히게 되자, 명설공허 학교의 시설도 현실적인 모양을 갖춘 단계에 이르렀기 에 이전의 교사(校舍)는 이를 중학교 교사로 사용할 것으로 계획을 세우고, 전에 확보하였던 중학교 옆에 있는 교지에 고등학교 교사를 새로 짓기로 결정하였다.이러하매 우촌 선생이 얼마나 더 바빠지게 되었는지는 이루 설명할필요조차 없을 정도였다. 아침에 일찍 등교하는 선생은 학교 안의 일을 일단 결정한 다음에는 신축 교사의 설계를 비롯하여 여기에 필요한 자재(資材) 마련이며, 건축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의 수속 절차와 교섭등등… 그야말로 눈코 뜰새 없는 분주한 나날을 보내게 되니, 몸이 느끼는 피로는 극도에 달하여 하루하루 쇠약하여지는 모습이 역력히 겉에 나타날 정도였다.
그렇다고 전쟁 뒤에 하루가 다르게 뛰는 물가 때문에 이것저컷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어, 대부분의 밤을 새워가면서 골몰에 골몰을 거듭하였던 것이다.육영사업에 헌신함이 선생의 간절한 소망이었지마는, 그러나 이처럼 과도한 마음의 괴롭힘은 마침내 신상에 해독을 가져온 결과 과로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결국 졸도하고 말았다.전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직원들이 말을 구르며 치료를 서두른 보람에 천행으로 비교적 단시일에 회복은 할 수 있었으나, 급기야는학교 발전을 위한 그 얼념의 노심초사로 인해 당분간 노이로제로 고생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의 결과에 의해 고등학교 교사(校舍)와 강당, 그리고 운동장과 부속건물은 예정대로 착착 건축아 진행되어 나아갔다.이 기간 중에 학교법인의 임원 개선이 있어 우촌 선생은 학교법인 이사장직을 건설 사업에만 열중을 하게 되였다.교사(校舍)의 완성이 점차 임박하여 갈 무렵이었다. 우촌 선생은 따넘만을 여러 자매 두시었고 한 아들이 있아 늘 불안을 느끼던 중에, 공교롭게도 하기 휴기중에 아들을 고향인 견동리(見폈里)로 쉬게 하려고 보내였다. 그 아들이 불행히도 견동제방(見東樓防) 앞에서 익사를 하니 , 이 소식을 들은 선생은 청천벽력을 맞는 것 이상의 횡액과 변괴를당하였다. 선생의 내외는 그만 망연자실로 실신을 하였던 것이다.옛날부터 큰 인물에게는 시련 또한 가혹하다고는 하지만, 이처럼 우촌 선생 앞에 느닷없이 닥친 이 횡액은 너무도 잔인한 운명의 장난이었다. 이러한 흉변을 누군들 감내해 불 길 있으랴!사실은, 선생의 형님되는 분의 후계도 잇게 하여야 할 처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형제들 기운데 한 사람의 남자 자손도 없게됨에, 이제 문자 그대로 비통합이 극도에 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선생의 강인한 정신력은 이 슬픔 안에 꺾이고 굴하지만은 않았다. 자식을 잃은 당시에는 어버이되는 정의(情誼)와 육친을 잃은 。H통과 비련이 그지 없었으나 자식을 생각하는 그 심사를 일단 툴이켜서 생각하되“육영사업은 냐의 천직(天Jf;없)이다. 후생(後生)을 육성하여 조국의 완전 자럽과 번영을 바람이 나의 오랜 소망이 아니던가-7"이러한 철석 같은 굳센 결심과 함께, 일섬A로 학교 사업에 다시금 전력을 기울이게 되니, 고둥학교 교사의 신축사업은 순조로운 진행을 보게 되었다.여기에 고교생과 교사들이 달라진 학교의 모습에 가슴이 뿌듯하여 희희닥낙 업주하니, 이것이 1 958년 12월 21 일의 성사(盛事)였다.그리하여 한성학원은 이제 교사(校舍)가 219,492 평방미터, 강당이 62,142 평방미터, 부속건물이 67,108평방미터에 운동장 넓이 8,264평방미터의 규모를 갖추인 채 낙산(絡山) 기숨에 훌쩍한 모습을 나타나게 되었다.
우촌 선생은 참기 어려운 이 비운과 역경을, 학교의 중홍과 건설이 라는 대사업에 온갖 정열을 다 쏟아 부음A로써 자신에게 닥친 모든 간난을 용케 극복하였던 것이다.
2. 전진과 활약
고등학교 교사(校舍)와 운동장과 강당이 준공된 1958년의 다음 해인 1959년 8월 10 일에도 원래 있던 중학교의 동쪽편 교사를 2층으후 증설을 하였다. 이어서 고등학교 남쪽편 언덕 위에 4층짜리 과학관의 신축공사를 또 착수하였다. 이 공사는 전에 없이 상당한 난콩사였다. 그것은 언덕을 깎아서 그 위에 건물을 세워야 했던 일인데, 암반(岩盤)이 튀어 나와서 이것을 폭발하여야 하므로 공사가 예정대로 잘 진행이 되지를않았다.이렇게 어려운 공사와 직면하다보면 우촌 선생은 순간적으로 무서운 좌절감에 사로잡히는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선생은 그 굳은 의지로써 지손을 잃은 슬픔과 공사의 어려움, 더하여 재정의 곤란 등 이런 모든 역경들을 용케 극복해 나갔다. 그리하여 우리 나라에서 는 처음으로 물리, 화학, 그리고 가사(家事) 실습실과 또 재봉에 필요한 모든 기구를 갖추고 시설하여 학생들의 실질적인 학습을 몹는 일에앞장을 서게 되었으니, 이것이 1961 년 10월 5 일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 무렵 우촌 선생이 건설하였던 일은 한성학원 내의 것으로 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한성학원의 정비와 확장을 한껏 도모하여 제2세 자녀교육에 봉사하는 한편, 선생의 전공분야인 체육 방면에도 그못지 않은 노력을 최대한 경주해 왔었다.돌이켜보면, 선생이 일찍이 체육을 전공으로 삼았던 것은 그저 단순한 취미거나 특기에 따른 선택이 아니었다. 그가 체육을 전공하려 한데는 남다른 뜻이 있었던 것 이다. 역시는 어린 시절 은사언 이은우 선생으로부터의 영향도 물론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일제 때 삼흉학교(三與헬校)의 셜렵자이기도 했던 이은우 선생은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체조 등 체육시간을 다른 누구보다 많이 할애했는데, 어린 우촌선생은 남달리 강건한 신체적 조건을 천부적으로 타고나 많은 총애를 업였다. 그렇기 때문애 우촌 선생이 체육분야를 전공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인연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체육전공을 선택한 데는 바로 그의 강한 시대적 사상을 외면할 도리가 없다. 선생은 일제시대를 청년기로 성장하면서 과거 고루한 유학자들처럼 연약한 신체와 정신으로는 향후 일제에 강제 점령 당한 국권(國權)을 되찾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던 일이 결정적인 기언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남들이 별반 관심을 갖지 않으나 사실 체육교육이 어느 분야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체육분야를 전공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 유학길에 오른 한국인 학생들 대부분은 법학이나 의학 등을 공부하고 돌아와 총독부(總웹府) 관리가 되거나 아니면 다른 안정된 직업에 안주(安住)하기를 바랐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우촌 선생과 같이 처음부터 남들이 외면하고 있던 체육분야를 전공하려 했던 점은 외로운 길을 스스로 선택한 것£로, 당시로는 대단한 각오와 용기 없이는 결정하기 어려운 결단이었다.따라서 그가 나중까지 평생의 교육사상이자 교육적 이념 중에 중요한 한 부분으로 강조하고 실천에 옮켰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사실, 아우리 지력(知力)과 덕성(德性)을 잘 갖춘 사람이라도 체력(體力)의 뒷받침이 원만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절름발이의 용기없는 기형척언 인간이 되기가 십상이다.
일찍이 고대 그리아스 시대부터 정신교육과 신체교육의 심신일원론(心身一元論) 교육이 강조되었던 것도 이와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체육활동은 한 개인의 신체에 잠재척£로 감추어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아울러 체육활동을 보다 활발하게 촉진시키는 것은 우리 인간으호 하여금 보다 건강하고 언간답게라는 희망에서부터 출발하며, 이같은 체육활동의 효괴는 한 인간에게 주체성과 용기 그리고 결단성과 추진력을 배양시격 주는 밑거름이 된다.우촌 선생의 체육에 대한 정열은 그렇게 이른 시기부터 찰 나타나 있었다.1924년에 현해탄을 건너, 당시 식민지 조선언에게는 업학의 문이 아주 좁았던 일본체육전문대학에 유학한 이래, 1927년 3월 20 일 졸업과 동시 귀국하여 천안보통학교 교사로 부엄한 것이 체육교육의 길을 열었던 처음 일이 될 것이다. 당시 집안 어른들과 주위에서는 일본유학까지 마치고 돌아와 국민학교 훈도를 자청한 우촌 선생의 결정에 완강하게 반대와 불만을 표했다. 그러나 그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으니, 이렇게 시작된 교육자로서의 우촌선생은 그후 공주영명학교, 광신상업 고등학교, 동덕여자고등학교의 체육교사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의 교수로 근무하며 체조와 육상 등 체육분야 전반의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체육인으로서의 명성을 키워 왔던 것이다.
1945년 광복을 맞은지 한달 만인 그해 9월 오늘의 한성대학교의 모체가 된 한성여자중고등학교 설립과 동시에 교장과 이사장으후 계속 봉직해 오는 동안, 지금까지 기술(記述)해 왔던 것처럼 학교 일에 영일(寧日)이 없었던 그 와중에서도 한국체육의 성장을 위한 폼짓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이다.그는 과연 하나의 붐으혹써 보통사람 몇 배의 일을 해 내었던 초인적인 노력의 인물임에 툴렴없었다. 선생이 체육 분야에 기울인 공력(功力)이 얼마나 컸던가는 다름아닌 그가 1961 년 12월 16 일에 대한핸드볼협회의 회창에 추대되었던 일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대한핸드볼협회는 일제시대인 1939년 이병학(李쩌學) . 조영하(趙映河) 등의 발기로 일본송구협회 조선지부를 결성하고 발족시킨데에서 그 시작을 찾을 수 있다. 그뒤 1942년 9월 일본 체육전문학교 출신들이 계명송구구락부(량明送球↑뿔뽕部)를 조직하였으나, 일제가 구기(球技)종류를 폐지하겠다는 정책을 시행하는 바람에 중간에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나 1945년의 광복과 더불어 그해 11 월 이 방면의 통호인(同好A) 40여명이 모여서 조선송구협회(朝蘇送球協會)를 조직함으로써 그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 6.25동란 예문에 그 기능이 한때 정지되었다가" 1952년 10월 제 33 회 전국체육대회를 계기로 재기하였고, 1957년에는 종전에 송구(送球)라는 용어를 핸드볼(Hand벼11)로 바꾸면서 ‘대한송구협회’를 ‘대한핸드볼협회’로 개칭을 보았다. 세계 여러나라와의 교류를 위해서 1960년 9월에는 세계핸드볼연맹에 가업을 하였으니, 이 나라의 핸드볼 발전을 위해 획기적인 전기(轉幾)를 이룩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 핸드볼 종목이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우리 나라 체육진홍과 국제 무대에서의 체위(體位)를 향상시킬 필요가 있었고 그같은
새로운 변화의 요구가 가장 아쉬운 계제에 선생이 이 협회의 회장직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1968년 11 월 30 일까지 약 7년에 이르는 장기간을 두고 우리나라에 도업된지 얼마 아니한 운동 종목언 핸드볼운동 육성에 많은힘을기울였다.선생의 임기중인 1963년에는 핸드볼 경기 규칙에서의 11 언제를 폐지하고 세계 조류에 발맞추어 7 언제 만을 채택한 일도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본래 핸드볼운 7 언제와 11 언제가 있었는데, 이 때 이렇게 제정한 이후 11 언제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세계척으로도 1934년에 7 언제의 경기규칙이 제정된 이래 세계선수권대회도 11 인제는 1 966 년부터는 행해지지 않고 있다.
또한 이 동안에 선생의 과거 모교인 일본체육대학소속 헨드볼선수의 한국 초청을 비롯, 일본고교생 핸드볼선수의 내한(來韓)경기 개최와 함께, 우리 나라의 대학곱 고교생의 핸드볼선수단의 일본 원정 등 허다한 사업을 전개하여 혁혁한 엽적을 남긴 것이었다.
이러한 체육 진흥사업과 관련해서 한성학원 안에다가는 우리 나라의 학교로서는 처음인 체육관 건립을 착수하여, 1963년 12월 7 일에 준공개관하였다. 이 해 2월에 장충체육관이 처음 개관되었거니와, 학교내에 체육관이라는 설비가 그 당시까지는 없었던 것이기에 이같은 비롯함에 대해 세인의 이목을 집중받기에 족하였다.선생의 한국체육에의 발전을 위한 노력은 누가 보아도 진지하고 열성적인 바가 있었던가 보다. 그의 우리 나라 체육교육계에 이바지한 콩로와 그 큰 엽척에 따라서 전국의 명예로운 한국체육교원회(韓國體育敎員會)의 회장으로 선출되었던 것이다.마침 이 무렵의 일이다.세계문화기구인 유네스코(UNES∞)의 교육부분 중의 이치파(Iα{PER대회가 제9차로 우리 나라에서 개최하게 되었다.
유네스코는 정확히 번역하면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國|際剛合敎育科學文化機構)로서, 세계 각국 국민들 사이의 교육 · 과학 · 기술 • 문화 등에 관해 여러 국민들 사이에 이해를 돈독히 하고 국제적 협력 관계를 촉진함으로써 국제평화와 안전을 확보하려는 국제연합의 전문기관이다. ‘전쟁은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므로 평화의 수호 역시 인간의 마음에서 구축되어야 한다.’는 헌장(憲章)과 같이, 글자 그대로 평화의 상징이며 평화를 위한 세계 최대의 국제기구인 것이다. 우리 나라는 1950년 5월부터 6월까지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개최된 제 5차 총회에서 6월 14 일 표결에 붙여진 결과 압도적인 다수로 가엽이 확정되고, 이 기구의 회원국이 되었다.그 기구내의 교육 분야언 ICHPER에서는 문맹의 퇴치, 초등 의무교육의 보급, 난민교육을 위한 활동을 벌여나가고 있었는데, 이 해 한국에서 개최하게 된 것이고, 그 주관을 다름아닌 한국체육교원회에서 하기로 한 결과, 우촌 선생의 지휘 아래 진행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이에 이 대회의 개략적인 사실을 여기에 간략히 기록하여 거국적인 본 행사를 알렬 필요가 었다.
우선, 대회의 기간은 1966년 7월 28 일부터 8월 2 일까지이고, 대회의 연구 주제는 「건강과 체육과 레크리에이션의 교육계획」이었다.이에 참가자는 ICHPER의 회장인 베르지움의 훼르체씨를 비롯하여 구미 각국의 대표와 멸리 남쪽의 아프리카의 케냐며 에디오피아 등지에서 온 27개국 47명의 유능한 교육계 인사들이 모여 왔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40명의 대표가 참가한 세계적인 행사이었다.7월 28 일 목요일 하오 4시 30분에 개최된 개회식의 일부를 보띤,1. 개회식(1) 개회 선언 〈훼르체〉(2) 회장, 집행위원 소개 〈훼르체회장〉(3) 한국대표 및 내빈 소개 〈한국체육교원회장 김의형씨〉(4) 개회사 〈훼르체 회장〉(5) 한국측 환영사
'. 대한민국 문교부장관 권오병'-. 한국체육교원회 명예회장 이세정1::. 대한교육연합회장 임영신è. 대한체육회장 민관식P. KOC 한국회장 장기영J'I. 한국체육교원회장 김의형2 폐회선언이렇게 우촌선생을 중심으로 한 세기적인 본 회합이 성황리에 원만히 진행되었다. 같은 해 8월 1 일에는 본 회합의 전 대표와 배석한 참가자들, 모두 합하여 근 300명이 우촌 김의형 선생이 경영하는 한성여자중고등학교를 방문하여 찾았으며, 이어서 회장 초청의 만찬회가 화기애애한 가운데에 원만한 끝맺음을 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세기적인 대행시흘 주재해 나감에 있어서, 우리 나라를 교육을 통하여 국제사회에 뚜렷이 인식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교육 자체가 국가와 민족을 위히는 과업이니만큼, 이 회합도 역시 나라를 위하는 사업임을 선언하고 온갖 정성을 다한 결과로 여기 모였던 외국의 이름난 교육자들마다 두 번 세 번 감탄을 거듭하며 돌아갔던 것이다.
이처럼 선생이 또 다른 각도에서 나라에 공헌한 바가 결코 적지 않은 것이었다.이 해 1966년 10월 5 일에 선생은 한성여지중고동학교 개교 21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그 동안 쌓아올린 사업을 회고하면서 본교 육성에 협력한 교직원들을 표창하고 노고를 치하했다.그는 학교법인 한성학원 설립자로서 기념사를 통해 이렇게 말하였마오늘 아침 10월 5일본 한성학원 창립 21주년 기념 및 10년 이상 근속자 표창식전을 거행함에있어서 본 학교법인 임원 여러분과 학부모 여러분을 모시게 된 것을 충심으로감사하는바입니다.
실상 말씀을 드리자면. 사회의 여러분과 전 학부모님을 모셔서 좀 더 성대한 기념 및 표창식을 올려야 마땅한 일이겠으나 모든 면에서 긴축을 으뜸으로 하는 시국의 관계로 부득이 뜻대로 이 식전 (式典) 을 광범위하게 베풀지 못하는 것을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널리 양해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이 사람이 설립자 겸 교장으로서 본 학원의 이 기념일을 당하여 소호1 (所懷)의 일단(-端)을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오늘날까지 본 학원의 육성 발전을 위해 직접 · 간접으로 본 학원을 애호 편달하여 주신 국가사회의 여러 인사(人士)와 본교를 사랑하여 귀중한 영애(令愛)의 교육을 맡겨 주신 학부모 여러분들께 길은 감사의 뜻을 올리는 바입니다 아울러서 본 학원의 발전과 본교에서 취학하고 있는 저 12세 국민의 교육을 위하여 노고를 아끼지 않고, 이 사람을 협력하여 오늘의 한섬학원을 이룩하여 준 교직원 제위 (응햄立) 에게 도 깊은 감사를 표하는 바입니다생각하건대, 여|로부터 이르기를 군자 (君子) 에게 삼락 (三樂) 이 있다 하였으니, 그 줌의 하나로 전하의 영재 (英才) 를 일어 교육을 시키는 일을 군자로서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손꼽아 왔는데, 이 사람이 본 학원을 창설한 동기에는 전자 (前좁) 와 같은 심정도 없지는 않았으나, 그보다도 으뜸가는 목적으로서 과거 일제 (日뿜) 의 억압하에서 우리 민족이 눈물겹도록 배움에 굶주렸던 것과, 8. 15광복과 함께 외국의 그릇된 풍조가 잘못 노도 (愁濤)와 같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안일하게 보고 앉았을 수가 없어서, 우리 한국정신을 이어받은 여성교육을 하여 이 민족, 이 국가에 이바지하며 보겠다는 의욕에서 이사람의 미력 (微力) 도 돌보지 않고 감히 8 .1 5해방과 더불어 출발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념 아래에 본 학원의 창설을 하였던 것이었으나, 원래가 여러 조건의 미비함으로 말미암아 험준한 역정 (歷程) 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2 1 년간을 두고 걸어오는 동안에 태산과 같은 풍랑도 있었고, 준령(峰複)과 같은 격렬한 파도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이 나라, 이민족을 위하여 내디딘 초지 (初志) 를 굽히지 않겠다는 심정에서 작은 힘을 돌보지 않고 온갖 힘을 기울여 온 것입니다
하늘은 무심치 않으셨던지, 다행히도 선배 • 친지 여러분들이 본 학원을 애호하여 주시기를 인색히 하지 않았고, 또 이 학원에 적 (籍) 을 둔 여러 교직원들이 극력 협조하여 주어, 본 학원의 교육적 이념하에서 배움을 받고 전진한 졸업샘들이 현재까지 6,정3명에 이르렀고 또 현재 본교에 적 (籍) 을 두고 매일 본교의 정신 밑에서 형설 (螢雪) 으| 공 (功) 을 쌓고 있는 저 12세 국민이 삼천 명에 달하고 있으며, 여기 모신 여러분께서 보시는 바와 같은 시설을 겨우 마련한 것입니다, 이 시설의 모습은 겨우 저 11 단계에 불과한 것이어서 현재까지 세계의 문화 문명의 발달이 날로 일취월장(日就月長)하는 터 01므로 창설한지 그 시일이 짧을 뿐 아니라, 무력한 이 사람으로서는 미비한 것이 허다하니, 01 러한 것을 돌이켜 생각할 때에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천행 (天幸) 으로 이 사람의 교육이념에 찬동하시는 여러 학부모를 모시었고, 한편 교육에 열성을 다 하시는 덕망 높으신 여러 학교법인의 임원과, 이사람과 함께 모든 열의를 다 기울여 주는 교직원들이 그 애호와 협력을 계속하며 주신다면 일후(日後)에는 더욱 용기를 내어 우리 나라 여성교육의 향상을 위하여 견마지로 (*馬之勞) 를 아끼지 않을 작정입니다.그리고, 오늘 창립 21주년 기념식을 당하여 동고동락(同苦同樂)을 하여 주신 법인 (法人) 으| 임원 여러분과 여러 교직원에게. 그간의 애써주신 마음에 대하여 전부 사의(謝意)를 올려야 마땅할 것이지만, 매사는 일정한 한도가 없을 수 없어 이번 차(次)에 법인측으로서는 본 법인을 위하여 지도적 역할을 내리시는 우리 나라 교육계의 원로이신 조동식(趙東植 박사님과 내외에 명망이 높으신 안호상 (安浩相) 박사님께 본 법인 창설의 이래 10년을 하루같이 항시 본 법인 육성을 위하여 훈공(勳功)을 아끼지 않으신 일에 대하여 김이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교직원측에는 장장(흩長) 20년 11 개월이라는 세월 동안, 그 분의 반평생을 본교 학생들을 위하여 교단생훌을 하신 이필옥(李弼王)선생을 필투로 하여 10년 이상을 근속하신 분들 24명의 그 지대한 공적에 대하여 깊이 감사를 드리는 터입니다. 겸해서 본교에서는 이미 떠나셨으나, 과거 본교의 교직원으로서 진력하신 구 (舊) 직원들에게도 진심으로 사의를 표합니다 아울러서 감사를 드리고자 하는 것은 10년간 본교의 각 건물을 건축함에 있어서 지성으로 일을 완수한 성기관(成홈寬)씨에게도 고마운 뜻을 올리는 것입니다.오늘, 근속 공로에 대하여 감사의 정을 드리는 여러분에게 바라는 바는 일후 (日後) 어|도 더욱 건죠깐하시고 다복하시어 종래와 다름없이 본 학원 육성에 마음과 힘을 다해 주시기를 바라마지 않는 터입니다
끝으로 오늘 본 학원의 뜻김은 날을 당하여 이 자리를 빛내 주시기 위하여 만장 (滿場)하신 여러분이 더욱 다복하시기를 염원하면서 기념사를 이것으로 끝마치는 바입니다.1 006년 10월 5일學校法人漢城學園設立홈金義衝여기 이 선생의 기념사를 볼 때에, 선생 자신이 누구보다도 학원 건설을 위하여 온갖 전력(專力)을 쏟은 그 천신만고의 노력과 그 결실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하여는 별로 크게 나타냉이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반 사회의 여러분의 혜택으로 이루어쳤으며, 또한 선생의 휘하에있는 교직원의 크나큰 힘으로 완수된 것 만을 내세웠으니, 이로써 선생 자신의 겸허함과 덕망어린 인격을 엿보아 알 수 있게 된다.
이 동안에 선생은 서울특별시교육회의 공로 표창이며 또 서울신문사가 제정한 체육공로상을 위시하여 대한체육회(大韓體育會)의 공로상 등동 무수한 표창을 받았다. 이것은 모두 우리 국가와 민족을 위해 낮과 밤을 가리지 아니하고 심혈을 기울였던 그 노력의 결과로 나타난 것 외에 달리 아무것도 아니었다.
대한체육회 체육회상 수상기념 (1966 년)
선생이 육영(育英)사업에 쏟는, 그 세상에 보기 드문 정열은 날로 벚나는 것이어서 1967년 10월 5 일에는 경기도 양주군(楊"1'1那) 와부면(표렬面) 팔당리(八堂뿔)에 교직원 휴양을 위한 ‘의화장(義花莊)’을 시설하였다. 학생의 지도에 피로한 교직원들의 휴양할 자리를 마련해 줌으로 하여 간접적으로 학생 지도에 교사들의 활력을 더욱 불어넣어 주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그리고, 앞서 개교 제 21주년의 때에 ‘현재의 시설은 저]1단계에 불과하다’고 이미 천명하여 밝힌 바와 같이, 선생의 교육시설에 대한 경륜은 보통사람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바가 있어서 학교 캠퍼스 내의 청청( 품좁)한 수목(樹木)이 우거진 닥산 기숨에 크고 깨끗한 규모의 수영장(水泳場)을 신설하였다. 이처럼 광복 이후에 학교 내부에 시설하는 풀 시설은 처음 있는 있어서 일반사회에서 선생의 선견지명과 특별난 배려에 모두 감단의 눈을 크게 였다. 뿐만 아니라 이 한성학원의 수영장 시설을 본떠서 풀 시 설을 서두르는 데가 많았다.우촌 선생은 풀 시설을 착수하면서 이렇게 말한바 있다.“국력 배양에 으뜸가는 것은 우선 민족의 체력을 증진시키는 일임과 동시에, 후손을 잇게 해줄 여성의 신체를 강건하게 하여 주어야 할 것이며, 나아가서는 우리 나라가 삼면(三面)이 해양을 대하고 있으면서 물에 접근하지 않았던 까닭에 대외(對外)로 향하는 진취성이 없이 매사가 퇴영적(退몇的)으로 되었으므로 나라의 발전이 더디더디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물과 친하면서 건강을 추진시켜야 할 것이다"
이렇게 표명한 것으로 보아 선생이 얼마나 심오하고 진지한 의도를 갖고서 시설에 착수한 것인지를 넉넉히 살펴 알 수가 있는 것이다.선생의 이 남다른 발상에 따라 이룩된 시설의 혜돼을 받은 여학생들은 해마다 여름 절기만 되면 무더위 폭양(暴陽) 아래에서도 오히려 희희낙낙£로 물장구를 치면서 신체를 곱고 강인하게 단련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이렇듯 선생이 그 하는 얼마다 모두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일이었고, 자라나는 2세들의 보다 나은 교육과 성장을 위해 진력(盡力)하였던 결과로 정부로부터 영예로운 국민훈장동백장(國民뿔h章걷拍章)을 받게 되었무니, 이것이 1970년 12 월 5 일의 일이었다.
또 한 가지 빠뜨리지 못할 일이 었다. 이는 비단 우촌선생의 명예일뿐 아니라 전체 한성학원의 영예로 찬연히 벚나는 일이라 할 만 했다. 다름아니라, 1968년 11 월 이후 1972년에 이르는 동안을 두고 매년 전국체육대회(全國體育大會)에 본교생 삼천여 명이 서울운동장에서 전개되는 업장식에 소위 카드섹션(Card Stction) 연기를 기묘하고도 화려하게 연출하여 운동장에 팍 찬 관람 대중의 열렬한 갈채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 자리애 함께 엄석(協席)했던 박정희(朴正熙)대통령 내외도 그 연기를 다시 보여줄 것을 재청(再請)하였으며 다시금 만장(7빼場)한 관중들의 눈을 현란케 하였으니, 이것이 화제거리가 되어 전 국민의 칭찬을 얻게 되었다. 정부로부터도 이에 대해서 학교로서는 유례없는 ‘대통령단체표지(大統領때體標識)’를 받게 되었으니, 이는 길이 두고 자랑
스런 기념사(紀念훤)가 아닐 수 없었다.
민관식 체육회장과 함께
그리고 이러한 영광은 모두가 우촌 선생의 열의에 찬 인솔력의 결실에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3. 한성여자대학의 탄생이렇듯 벚니는 사업의 펼쳐나감 속에 또 하나의 크고 새로운 전기(~i뺑幾)가 이루어졌다. 다름아니라, 1972년 12월 10 일에 인가플 얻은 한성여지-대학(필城女子大學)의 개교(開校)가 그것이었다.우촌 선생이 해방을 맞던 1945년 힌-성학원을 처음 설립하였을 당시 일찍부터 지녔던 교육사업에 남다른 관심과 의지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에서 그 뜻을 제대로 펼 수 없었던 것이지만 마침내 조국의 광복을 맞이한 바로 그 해 10월 한성여학교를 설립한 이래, 온갖 파란 속의 전진을 거듭해 온 지 27년 광음의 흐름 뒤에 드디어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오랜 전통적 토대 위에 한 단계 더 나아간 상아탑( 象牙搭)의 완성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일찍이 선생이 처음 한성학원을 설립하였을 당시에 밝혔던 취지 가운데,
‘과거 일제의 압제하에서 우리 민족이 눈물겹도록 배움에 굶주렸던 것과 8.15광복과 함께 조국의 그릇된 풍조가 노도와 같이 잘못 빌려 들어오는 것을 안일하게 좌시할 수 없어서 우리 한국정신을 이어받아국가를 위해 이바지할 인재를 양성할 뜻’을 밝힌 바가 있었거니와, 여기서 벌써 우촌 선생의 분명한 교육이념과 역사의식, 그리고 거기에 따라 한성대학이 지향해야 할 건학정신(建學精때)의 중요한 실마리를 파악해 볼 길 있다.광복을 맞아 들인 당시 한국사회는 새롭게 태어날 신생국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새로운 시·회 건설을 위한 인재를 한없이 필요혹 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피지배시대의 오랜 껍질을 벗어 청산할 겨를도 없이 해방의 물결과 함께 멀어닥친 외례의 그릇된 풍조가 길게 만연되어 내려오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진정한 ‘한국정신’을 가진 젊은 인재를 찾는다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바로 이 점에 주목한 우촌 선생은 ‘한국정신’을 바르게 가르쳐 새 국가건설을 위해 이바지할 참 한국인의 양성을 목적으로 한성학원을 설립하였던 것인데, 이제야말로 바로 그러한 청년한국인을 지도, 양성할 수 있는 새로운 발판을 확보할 수 있었으니 기-슴 뿌듯한 일 아니였으랴!
첫 해 학과의 설정은 국어국문학과(國語國文學科), 영어영문학과(英語英文學科), 가정학과(家塵學科), 의상학과(衣避學科), 생활미술학과 (生活美術學科) , 비서학과(秘땀學科.) 등 여섯 개 학과, 150 명 정원의 야간대학으후 출범하였다.
이에서 먼저 1969년 8월 12 일에 착공한 교사(校舍) 건축 예정지 8,250평방미터, 연건평(延建J平) 7,260평방미터의 건물을 대학의 교사(校舍)로 잡아 준공을 보기도 하였다.정녕, 선생이 밤낮으로 구상하면서 오래 숙원(宿願)해 오던 한성학원의 완벽한 체제가 이루어지는 본격적인 단계에 올라선 것이다.이 상아탑을 반석(첼石)과도 같이 견고하게 올려 놓는 일은 오로지선생의 그 쉬엄 없고 굽힘 없는 철석(鐵石)같은 의지와 정열에 힘입어소기(所期)의 완수를 아룰 일이 불 보듯이 뻔하였다. 하물며 선생이 평생 교육사업에 흔백을 바친 관록의 노장(老文)이니 바로 그 깊고 넓은경륜으로 더욱 큰 한성학원의 일대 캠퍼스가 웅장하게 펼쳐질 일이 스스로 기약되고도 남음이 있던 것이다.
우촌 선생이 천직A로 맡은 바의 조국과 민족을 위해 노력 을 쌓은그 육영사업이 이미 적지 않았다. 그 큰 보람이 여러 방면£로 나타났던 것이지만, 이제 생각해보면 그 모든 공적(功績)은 바로 이제부터 전개시켜 나갈 더 크고 새로운 규모의 교육사업을 열어주기 위한 초석과도 같은 것이었다. 진정 이제야말로 과거의 그 커다란 경륜과 칠순(七섭J) 되도록 닦아온 완숙한 인품으로 교육의 또 다론 경지를 건설해 나갈 다른 하나의 출발점 이 었다.바야흐로 교육계의 귀중한 보배이요, 이 민족을 늘 푸르게 키워 주는 만년수( 萬年樹)와도 같은 선생은 다시금 크고 육중한 첫 발걸음을내딛었다.
제7장 거인의 말년
(漢城大學發展期, 1973~ 1983)1. 한성대학교세확장‘경제의 중요성만을 강조하고 교육적인 면을 등한시하면 자칫 인간소외 현상마저 초래하기 쉽다. 그러므로 국가 발전 계획에 경제전략못지않게 참다운 인간교육이 병행되어야 한다. 여기서 참다운 인간 교육이란 바람직한 가치관이 정립된 교육을 뜻한다.’
1972년 12월 문교부로부터 설립 인가를 받아 우촌 검의형박사는 한성학원에 한성여대를 세우게 되었다. 70년대 경제 성장 위주의 정책이 한반도를 흔들고 있을때 우촌선생은 자칫 인간 소외가 만연되는 우려를 금치 못하셨고 한성여대 설립에 즈음하여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기본이 바로 참디운 교육을 통한 올바른 가치관 성렵에 있음을 강조하셨다. 이러한 그분의 뜻에 따라 야간 4년제 여자대학으로 입학정원 국어국문학과 30명, 영어영문학과 30명, 비서학과 20명, 가정학과 30명, 의상학과 20명, 생활미술학과 20명 등 모두 6개학과 150명으로 한성여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촌 선생은 자신의 교육정신과 오랜 교육생활을 통한 웅지를 펼치기 위해 초대 학장에 취임하시어 앞선 다른 대학과 어깨를 견주고 더욱 더 훌륭한 교육을 펼칠 수 있는 터전을 닦기 위해서 불철주야 이와 관련된 고민과 실천으로 꾸준히 한성의 발전을 기획하셨다.
이러한 노력의 가시적인 결고l는 곧 나타나 1973년 12 월, 장래성이 희박한 비서학괴플 과김-히 폐과하고 무용학과 20 명, 경영학과 및 무역학과 각 30명과 불문학과 20명 등 4개학고}를 새로 증과 개편하였다. 그리하여 개교 당시 입학정원 6개학과 1 백 50명에서 9개학과 2백 30명으로 교세를 학장시켜 나갔다; 이것을 단순히 행정적인 팽창£로 치부해 버릴 수 없는 것은 우촌 선생의 교내 구석구석에 깔려 있는 손길이 너무도 깊은 까닭이다. 선생은 오직 한성의 발전만을 일념으로 삼아 매일 새벽 6시에 출근, 저녁 9시가 되어서야 되근하시었다. 또한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도 쉬는 날 없이 학교에 나와 교정회-단이l 심아진 한 그루의 장미에도 남다른 관심무로 손길이 부족한 곳은 없는 지, 눈길이 안 갔던 콧은 없는 지 , 일일이 살펴보시고서야 집으로 발길을 돌리셨다.1974 년 5 월 어느날.학교를 뒤에서 감싸주고 있는 닉·산에 야생하던 소나우가 고사직전에 있는 것을 발견하시고 손수 이 소나무를 정성스럽게 돌보시아 소생시켜 놓았다. 선생의 학교를 사랑히는 마음은 핵교 안에서만 멤도는 것이 아니라 학교 주위로 퍼져 나·가 학교와 관련된 모든 것에 선생 특유의 애정어린 시선을 잔잔하게 보내신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당시 학생처장이며 우촌 선생의 평생의 교육 동지요, 보필지-이었던 윤태영(몇泰永) 교수 등의 제언을 받아들여 이 세 그루의 소나무를 선생은 ‘삼학송( 三‘헬松)’이라 명명하고 한성의 성-정 니-무로 섬키로 했다. 삼학송은 주위의 작은 터에서 조용히 사색에 장기는 이들, 책을 읽는 학생들, 토론을 하는 학생들 그리고 우리의 민속을 연구하는 학생들에게 햇벚을 기-려 그늘을 민들어 주거나 찬 바람을 막아주는 학생들의 보호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삼학송은 세월이 흐플수록 더욱 그 유래외- 더풀어 한성안의 시·랑을 듬뿜 받고 었다.
삼학송의 유래는 1636 년 청(ìj탐國) 태종(太宗)의 침업으로 일어난 병자호란(內子胡亂) 때 끝까지 결사 항전의 자세로 민족의 정기를 지키기 위하여 흉익한(파鍵漢), 윤 집(尹 集), 오달제(吳途濟) 등은 청을 오랑캐라 하여 청과의 써움울 주장하였다. 그러나 인조(↑그祖)가 상전도(三田波)에서 항복한 후, 청은 굴복하지 않고 청과의 싸움을 주장한 척화파(Jf: f[l派)의 강경론자인 이들을 청£로 끌고 가 섬양(審陽)에서 참형에 처하였다. 이 후 소신을 끝내 굴복하지 않은 세 유생을 ‘삼학사(三學士)’라 하였고 우촌 선생은 이들 삼학사의 높은 기개와 지조를 기린다는 의미에서 ‘삼학송’이라 명명하시었던 것이다. 지금도 상학송을 바라보교 있으면 그 삼학사의 혼이 조국의 미래흘 책임지고자하는 한성인을 굽어 보고 자신들의 못다한 꿈을 한성인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는 확신을 보는 듯하다.
이러한 선생의 학교 안팎애 대한 무한한 애정은 학생들에게도 그대로 나타나, 모교에 대한 뜨거운 애교심을 다푸아 교정 화단에 장미와
목련을 심어 그 아름다움을 캠퍼스 내에 한껏 발산시켰다. 이제는 고등학교 교사가 된 당시 대학 본관 교사에는 색색의 장미와 환 목련이 수줍은 촌아가씨처럼 서 있는 모습에서 봄이 왔음을 실감케 한다. 우촌 선생은 이같은 여대생들의 아름다운 애교심의 표현을 받아들이고 이 장미동산에 「통일동산」이란 표말을 붙이도록 하셨다. 그 통일 동산에는 이제 여고생의 순수한 마음으로 되피어나 한껏 아름다원융 자랑하고 었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안보문제 연구회와 불교 학생회, R C. Y등 세 동아리로 표출되어 한성에 피어났다. 또한, 웅변반이 조직되어 신설교인 한성여자대학을 대내외에 홍보하는 데 힘쓰기도 했는데, 특히 1974년 7관왕을 차지하여 대학-웅변을 제패하여 한성의 이름을 전국에 떨쳤다 이에 우촌 선생은 입상하고 돌아오는 모든 학생들에게 격려의 말씀과 함께 기념사진도 함께 촬영하여 그 입상학생에게 주시 어 학생들로부터 뿌듯한 자긍심을 느끼게 함과 동시 에 선생의 자애스러운 마음을 은연중에 전달하시기도 했다.2. 세계 핸드볼 제패 기틀 마련
일본 체육대학을 졸업하시고 일찍부터 체육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던 우촌 선생은 한 평생을 우리나라의 교육과 체육발전에 받친 그 공이 지대하여 1974년 12월 11 일 문교부 장관 표창을 받으셨다. 앞서, 1970년 12월 5 일 국민교육훈장 동백장을 수여하신 바 있던 선생께서 4년 뒤에 또 하나의 큰 상을 받으시게 된 것은 선생이 우리나라 교육계와 체육계에 끊임없는 애정으로 손길을 닦았던 공로를 반증한다.선생은 1968년 2월 29 일부터 1974년 12월 현재까지 대한 체육회 이사로서, 1962년 3월 1 일부터 1974년 12월까지 대한 올림픽 위원회 위원으로 할약하시면서 체육교육발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셨다. 특히, 당시로서는 절대 취약의 비인기 종목이었던 핸드볼 육성에 앞장 서1961 년 12월부터 1968년 11 월까지 대힌헨드볼협회장으로 7 년의 긴 세월을 핸드볼 볼모지 한국에 그 씨앗을 심고 새싹을 기꾸시어 후일 올림픽 2 연패의 큰 재목으로 성장 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 주셨다. 선생께서는 우리나라 여성의 신체적 조건과 근성이 언젠가는 핸드볼로서 세계를 휘어잡을 수 았을 것을 미리 여l 견하신 선견지명(先見之明)의 혜안( 慧眼)을 가지고 계셨다.
주위로부터 인기종목 협회장 추대가 있을 때마다 이를 극구 고사하시고 핸드볼 육성에 그 정성을 쏟으셨다. 말년, 선생이 병석에 누워 계실 적에 일본 체육대학 후배 중의 한 분이셨던 한맹철 (j랜폐압 - 1970년대 초 성균관 대학교 체육교수로 정년 퇴직) 교수가 한성대학교에 헨드볼 팀 조직을 구상하고 계시다고 언질을 주신 바 있었다. 이와같이 선생은 병석에 누워 계시면서도 한성의 발전과 핸드볼 육성 에 대한 생각을 멀리 하신 적이 없었다. 선생이 좀더 생존해 계셨다면 한성대학교에도 남 · 여 헨드볼 팀이 탄생하였을 것이다.
선생이 기·신 지 10년도 채 안되어서 우리나라의 국력과 체력을 만천하에 널리 알린 1988년 서울 올림픽과 1992년 먼 이국의 땅, 태양의 나라인 스페인 바르엘로나 올림벽에서 우리의 헨드볼은 세계를 연거퍼 제패했다. 강동적으로 애국가가 울리고 태극기가 지켜보는 가운데 당당히 금메달을 목애 거는 영광된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본 우리나라 헨드볼 관계자 및 체육관계자들은 그렇게 헨드볼 육성에 애착을 가졌던 우촌 선생 생전의 일들을 회상하며 애릇한 눈시울을 적시였던것여다.
3. 명예철학박사 학위 취득우촌 선생은 말년에 우리나라의 당대 석학mfi웰)들과 빈번히 모임을 갖고 서로에게 한 없는 우정과 존경을 표시하면서 애정어린 교류를 하시었다.초대 문교징관을 역임한 안호상(安浩相) 박사를 비훗하여, 국문학의 대가(大家) 양주동 박사, 고매한 인품으로 이름난 김두헌 박사 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학문과 교육을 논하고 미래의 조국을 이끌어 나갈 젊은이들의 발전된 의식에 대히-여 기쁨을 나누섰다.이 시기에 우촌 선생께서 한 평생을 우리나라 여성교육의 발전에 끼친 공이 지대함을 학계 인사들의 입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건국대학교 성허 기념사업회 회장 이대위(李大偉- 미군정 시대 초대 노동부 장관 역임) 박사 등이 우촌 선생을 명예박시-로 추대하려고
해수욕g뻐|서 안호상 박사와 팔씨름을
추진 중에 있을 때, 동국 대학교 이선근(쩔펄根) 총장이 우촌 선생의 숨은 공을 기려 명예박사 학위를 통교에서 수여하기로 동교 대학원 위원회를 통해 알려왔다. 명예철학박사 학위 수여에 앞서 우촌 선생의 노고를 치하하는 만찬을 이선근총장께서 손수 시내 세종호텔 양식부에서 베풀었다. 만찬에 초대한 이선근 총장은 동교 대학원 관계자 임원과 우촌 선생 등의 인사들과 뜻 있고 보람찬 오찬을 나누게 되었다 이자리에서 이선근 총장은 우촌 선생을 향해,
“김학장념! 그간에 한국여성교육에 끼친 공이 지대하시어 본교 대학원 위원회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수여하게 되었음을 충심으로 축하드렵니다라고 인사 말씀을 한 뒤, 이어“학위복은 저와 같이 회색바탕에 후두는 붉은 색으로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라는 제의를하였다.당시 동대 총장이신 이선근 박시는 박정희 대통령의 정신척 스송의 역할을 하셨던 분으로 그 권위가 대단하셨던 분이다.동국대학교 교수와 동교 대학원에서 배출된 명예박사 빛 과정박사들은 모두 검정색 바탕의 학위복을 착용케 하였지만 통국대학교 이선근 총장과 우촌 선생 두 분만이 유독 회색 바탕에 붉은 색 후두의 학위복을착의 하셨다.
명예박사 학위 수여에 대한 공식적 이야기는 간단히 끝내고 두 분께 서 지난 젊은 날의 일본 유학 시절, 일언 학생들과 학문과 운동을 통해 경쟁하여 일인 학생을을 눌렀던 통쾌한 무용담(?)으로 두 시간이 넘는 유례없는 긴 오찬의 시간을 가졌다.
1976년 2월 25 일 화창한 초 봄에 한성가측들이 참석하여 지켜보는 가운데 우촌 선생은 영예의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으셨다.4. 한성대학으로의 확대 개편우촌 선생은 매우 가정적인 분이셨다. 밖애서는 자상하고 근엄한 교육자로서, 가정에서는 자상한 남편이요「 자애로운 아버지셨마 그리고 8남매의 대가족을 이룬 아버지로서 근엄할 때는 매우 엄격하게 가르칩을 피셨고, 감써-주실 띠l 는 한 없이 넓은 아량으로 8남매의 어느 하나도 소흘합이 없이 포용하셨다. 우촌 선생과 부인 이희순(李첼順) 여사께서는 평소 잉꼬 부부로 교육계에서도 소문난 금실이 좋장녀 김옥자의 피아노 발표를끝내고(1966 년, 시민회관)
(1966년, 시민회관)
은 아름다운 사이였다. 선생이 가시는 곳에는 그림자처럼 항상 이희순 여사가 계셨고 두 분은 동반자로서, 친구로서, 연인으로서, 내조(內助)와 외조(外助)의 존경하는 심성을 한 치도 흐트럼이 없이 수행하셨다. 한성여자대학 설립에서부터 교세확장에 이르기까지 서로 충분한 의견을 교환하시며, 한성의 발전애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기란없이 수렴하셨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미 고인이 되신 우리나라 서양사학의 태두(泰斗) 조의설(趙義탬) 박사께서 생전에 하신 말씀 중에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귀절이 있다.“내가 젊은 시절 안 식구에게 내 주장을 세우기 위하여 안 식구의 말을 듣지 않은 즉은 꼭 손해를 보았네 . 그리하여 이제 나이 든 후로는 안 식구의 말을 무조건 받아들이네. 그러한 즉은 꼭 내가 득(得)이 됐네. 그렇게 하게 손해가 나지 아니 할 테니까이희순 여사의 내조는 매우 슬기로웠고, 우촌 선생 역시 그 내조를받아들여서 그것을 사회와 학원의 발전에 일익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셨다.
1977년 초에 접어들어 우촌 선생은 한성여자대학의 설럽과 핸드볼 볼모지 한국에 핸드볼을 심고 새싹을 키우는 등 우리나라 여성교육 및 체육계에 너무나 헌신적£로 봉사를 하셨다. 그러한 정력적인 활동은 아무리 철저한 교육봉사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을 하신 우촌 선생이셨지만 정신적 3로 또한, 육체적으로 많은 우리를 가지고 오게되어, 1977년 3월 1 일 초대 한성여자대학 학장 자리를 내조자이신 이희순 여사께 넘겨주시고 여사의 외조자로서 자리를 l:lpjL셔서 이사장의 자리를 담당하시게 되었다. 이희순 여사는 우촌 선생의 그럼자 역할에서 전면에 나서게 되는 점에 다소 주저 하셨지만 일심동체의 자세로 우촌 선생의 뜻을 이어 한성의 발전에 기꺼이 나서게 되었다. 이렇게 자리는 바꾸었지만 학교 발전에 대한 열의는 바뀌기보디는 오히려 배가되어 한성학원의 대 발전기 를 맞이하게 되었다.제 2대 학장으로 취임하신 이희순 여사는 먼저, 보다 폭넓은 사학(史學)발전을 위한 첫 작업으로 국사학괴를 사학과( 史짧科)로 개편하는 용단을 내리는 한편, 한성여대를 남 • 여공학의 한성대학교(漢城大學校)로 재편하는 역사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이 일로 한성대학교의 앞 날을 더욱 굳건히 하게 되었고 한성에 다양한 인재를 모아서 나라발전의 시금석이 되는 교육의 폭을 더욱 넓히게 되었다. 우촌선생은 이희순 여사의 이와같은 일련의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용단을 옆에서 지켜보시고 매우 흐뭇하게 느끼셨고, 온 한성가족들은 한성의 비약적인 발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희순 여사의 이 같은 과감한 조치, 곧 한성여대에서 한성대학교로의 발전적 교명 변경 조치를 당시 본교 경영학과에 강사로 출강하셨던 당대 노동경제학의 석학( 碩쩔) 인 김윤환(金뼈煥-당시 고려대학교 교수) 박사와 인사관리핵-의 거두 황대석(黃*錫- 딩·시 건국대학교 상경대학장) 박사 등은 한성대학의 장래가 매우 밝다고 하는 등 극찬의 말들을 아끼지 않았다. 기설 1978년 1 월 한성 대학으혹의 교명 변경으로 한성대학교의 위상은 대외적£로 매우 높아쳤으며 여대 시절보다 보다 성숙된 대학으로서의 명실상부한 교육여건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이희순 여사는 우촌 선생과 숙의를 거듭한 끝에 1978년 10월 15 일 문교부로부터 학과 승언을 얻어 가정학괴플 폐과하고 남 • 여 공학으로 서 새로운 면모를 보이기 위해 행정학과(行政學科)를 신설했다. 그리고 입학정원도 2백 50명 에서 3 백 80명으로 늘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그후 1980년 10월 15 일 문교부로부터 경제학과(經濟學科)와 도서관학과(원l폼館學科) 등 2개학고}를 증설, 국어국문학괴를 비 롯하여 영어영문학과, 사학과, 무용학과, 미술학과, 의상학과, 경영학과, 무역학과, 행정학과, 경제학과, 도서관학과 등 11 개 학과에 졸업 정원 5 백 20멍 입학 정원 6 백 76명£로 장족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1981 년 12월 29 일 설렵자 우촌선생과 이희순 여사는 다년 간의 콩사 끝에 종합관(綠合縮’) 교사를 신축하였다. 두 분께서 심혈을 기울여 신축한 종합관교사는 지하 2층, 지상 5층 연건평 1 ,772평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로서, 이 교사기- 완공됨£로 해서 부족한 교수 연구실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5. 말년 우촌 선생의 도전정신대학은 하나의 사회이다. 따라서 대학사회의 이념과 학문, 더 나아가서는 그 대학의 정신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고 그 대학을 대외적으혹 알리기 위한 대학신문의 발간은 중요한 사업의 하나였다. 평소 이같은 대학의 얼굴이자, 언론매체인 대학신문이 발간되지 못하고 있는 점을 안타까워하던 우촌 선생은 1976년 개교 4주년을 맞이하여 우선 경영학과에서 《한성경영학보》를 발간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한성대학의 대학신문 발간의 모체가 탄생한 것이다. 발행인을 밭으신 우촌선생은 발간사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다.
“ ... 돌이켜 보건대 우리 한성여자대학이 고고의 성을 울린 지 4개 성상, 이 짧은 시간 동안 우리 학교 안팎으로 내실을 기하는 데 힘써왔습니다. 우리는 대내외적으로 여러 어려운 요건을 극복하면서 오늘에 이르렀고 앞무로 이를 이겨나가며 명문 한성여자대학의 굳건한 성아탑을 쌓아올려나가야 합니다.도전 (Q떼lenge) 과 웅전(많뼈nse) 의 되풀이 속에서 문화가 발전한다는 20세기 영국이 낳은 석학 아놀드 토인비의 말이 이를 뜻하는 것 같습니다.
고대 인류문명의 발생이 비옥한 초원지대에서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가뭄과 홍수가 빈번한 황하유역이냐 나일강유역에서 얼어난 것도 인간이 자연의 도전에 대한 굽힐줄 모르는 슬기와 용기의 웅전에서 이루어진 것업니다…”이렇게 〈한성경영학보〉의 발간이 발판이 되어 이어 문공부로부티 정기 간행물 허가를 받고 격월간 대학신문인 〈한성여자대학보〉가 역사적인 창간을 보게 되었다. 발행인을 맡으신 우촌선생은 창간호에서 다융과 같은 창간사를 하셨다.“오늘날 사회는 그 자체내에서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그 끊임없는 변화에 다각적으로 적응할 수 있는 갖가지 지식들을 요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늘날을 ‘지식의 폭발시대’라고들 합니다. 그러나우리는 편안히 이 지식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을 지니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생활의 일부를 담당하면서, 폭발하는 이 다량의 지식을 보호할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새로운 지식, 새로운 교육이념을, 그리고 높은 지혜와 두터운 덕행, 튼튼한 체력을 갖춘 미래지향적인 인격형성를 위하여, 우리 선인들이 남긴 문회유산을 살리고 심오한 이론을 실제의 현장에 실현시키기 위하여(중략)또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모교애를 지녀야 합니다. ‘대학의 업’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본 학보는 우리 학문의 깊이요? 정서의 향취, 대화의 광장으로서 우리 모두의 정신의 집결지요 시선의 춧점이 되어야 합니다”위 두 창간사에서 느낄 수 있듯이 우촌 선생은 학문과 자연과 사회에 대한 도전정신(挑戰精폐1) 을 학생들에게 당부하였으며, 학교 사랑은 일부 교직원이나 교수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 스스로의가슴에서 우러 나오는 애정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이러한 선생의 도전정신은 이후 많은 전국 대회 우승과 사회로 첫 발을 내딛는 학생들에게로 이어져 지금도 전국 각지 각분야에서 한성인들이 국가발전과 개인의 인격완성을 위해 두려움없이 도전하고 있다.
6. 낙산 기숨에 떨어진 거성(巨星)〈한성대학교의 설립자 우촌 검의형 박사님의 서거를 당하여 온 한성가촉은 이 청천벽력과 같은 부음의 슬픔A로 앞이 캄캄합니다. 한 평생을 교육 사업으로 조국광복과 영재교육으후 근세 한국문화 창달에 위업을 남기신 우촌 김의형 박사님은 낙산 기숨에 우리 한성학원을 세우시어 중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와 최고학부인 대학까지 진리팀구의 전당을 마련해 주셨습니다(중략) 박사념! 비록 붐은 타계하셨지만 그 영혼은 향상 저희들에게 험과 슬기를 주시 어 저희들이 빗나가지 말고정도(正道)를 향해 쉬 임 없는 발전의 걸음을 결음을 결을 수 있도록 가르침을주십시요〉
한성학원의 전 교직원을 대 표하여 조사를 봉정한 연정열(延1E'1兌) 교수의 이상과 같은 조사 말씀이 애릇하게 낭독되는 동안 전 한성의 모든 가축은 다시한번 선생의 숭고한 생애를 되돌아보며 옷깃을 여미었다.우촌 선생은 한 평생 교육을 통한 구국사업을 펼치기 위하여 불철주야 자신의 몽을 돌보지 않으시고 오직 그 높은 뜻을 이루고자 몸과 마음을 봉사와 헌신무로 일관하셨다. 일제 강점 당시의 어려운 현실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 흘흘 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체육을 전공하시고 돌아와 교직에 몸담으신 지 50 여 년만에 한성학원이라는 커다란 업적을 남기신 채 누적된 과로를 이기지 못하시고 1983년 3 월 1 일 평생의 소원이셨던 조국통일을 보지 못한 채 향년 8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시고 말았다. 선생이 세상을 하직하신 날이 공교롭게도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던 3 월 1 일인것이 선생을 경애하였던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말았다. 땅 위의 사람들의 슬픔을 하늘도 이는 듯 거인이 가시던날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선생의 서거는 한성학원을 비롯한 전 교육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그 아픈 마음과 애석함은 한순간 멀들을 잃게 하였다.
선생의 영결식은 내외 귀빈과 전 한성여자 중, 고등학교 교직원과 한성대학교 교수, 임직원 그리고 동창 및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선생이 돌아가시는 그 날까지도 걱정하시고 애정이 그유한 눈길로 구석구석을 바라보셨던 교정에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한성학원 제 3대 이사장이신 안호상 박사님이 장례위원장을 맡아 주관하시고, 교무처장 이용남(李勇男) 교수의 사회로 3월 5 일 한성학원장(1웹成웰園흉한)으로
치뤄졌다. 많은 조문객들은 영결식을 마치고 선생의 영구가 평생 정들었던 교문을 나서 장지를 향할 띠l 안타까움으로 오열을 참지 못하였고 그 울음을 차마 떨쳐버릴 수가 없는 듯 영구는 걸음을 더디하고 자꾸 뒤를 돌아다 보는 듯하여 더욱 사람들은 기슴을 도려내는 슬픔을 감출길이 없었다.
교문을 나선 영구행렬은 충남 공주군 탄천면 견동리 장지를 향해 떠났다. 이 날 오후 이희순 여사를 비롯한 유족과 한성학원 산하 각급학교 교직원 대 표 및 학생 대표들의 안타끼운 눈물 속에 유택에 안장되시었다. 선생의 육신은 편히 쉬시고 계시지만 그 넋은 여전히 한성학원을 부지런히 닦고, 강의실의 작은 책상에도, 운동장의 작은 풀에도 살아계셔서 그 분의 분신인 제지·들의 어깨 위에 시-랑스러운 손길을 얹어주고 계실 것이다.
우촌 선생의 교육정신과 건학이념
윤경로(한성대 교수)한평생 교육사업에 옴바쳐 온 우촌 김의형(友村 金義衛) 박사는 1972년 12월 21 일 한성여자대학(漢城女子大學)을 설립, 오늘의 한성대학 터전을 마련했다. 이에 앞서 1945년 9월 25 일 일제로부터 조국광복을 맞아 청소년들에게 민족정기 교육을 통한 교육업국(敎育立國)의 원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한성여자중고등학교(漢城女子中高等學校)를 개교하였다. 따라서 본 대학의 창학이념(創學理念)과 교육목표(敎育팀標)의 정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성학원 설립자의 생애와 그의 교육정신 등을 먼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본 대학이 나아가 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1. 우촌 선생의 교육이념(建學精神)8.15광복을 맞이하자 우촌 김의형 박사는 과거 오욕된 얼제 36년의 식민통치를 초래하게 된 원인 중의 하나를 민족과 역사에 대한 소명의 식(검命意識)을 품은 청소년(춤少年)에 대한 교육을 소홀히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광복 이후 가장 시급한 사업은 신생(新生)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 헌신, 봉사할 수 있는 젊은이를 양성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1945년 10월 한성여자중고등학교를 설립한 우촌 선생은 아래와 갇은 몇 가지 점을 한성학원의 건학정신과 교육이념으로 설정, 이를 교육 현장에서 실천하는 얼에 평생을 바쳤다.
1) 역사소명의 고취역사는 시대의 흐름과 함께 변천한마 이 변천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인간으혹서의 도리에 역행하는 사람은 역사의 이름으로 후세에 지탄을 받게 마련이다. 이갚은 역사의 변천 속에서도 한 점 부끄러움 이 없는 참된 도리를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몸과 마음가짐은 교육을 통한 역사소명(歷史김命) 의식의 배양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우촌 선생은 일찍부터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데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보았다. 하니는 자기가 하고 싶거나 이익에 결부된 일만을 찾아 하는 개인주의적(個A主發的)인 사람이 있는가 하띤, 다른 하나는 개인적으로는 하고 싶지 않으나 자기가 소속된 사회의 펼요에 의해 이를 피하지 않고 일생을 그 얼에 매달리며 헌신 봉사하는 희생적인 삶을 사는 유형이 있다고 보았다. 이갇은 두가지 유형 중 이른바 역사의 소명( 검命)에 합당한 삶은 말할 것도 없이 후자의 경우를 밀한다.
우촌 선생은 이와 갇이 역사의 부름과 민족과 사회가 필요후 하는 인재 양성을 그의 첫번째 교육사상이자 교육청신으로 삼고 었다.2) 민족정신의 계승우촌 선생께서 평생을 교육자로서의 외길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8.15광복 이후 이 사회와 국가의 주인이 될 젊은이들에 대한 교육이 무엿보다 중요하다는 시대인식(r란代認識)에서 비롯되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한펀 어떤 정신의 젊은이들을 양성할 것인가에 대해서 또한 우촌 선생의 교육욕표는 분명하였다. 즉 ‘한국정신’에 투철한, 말하자연 우리 민족에 대한 분명한 주인의식(主A錄識)과 민족의 식(民族意識)에 기초한 젊은이들을 교육하고 양성하는데 그 목적을 두였던 것이다.우촌 선생은 1966년 10월 5 일 한성학원 창렵 21주년 기념식사를 통해 당신께서 광복과 동시에 한성학원을 설럽하게 된 동기를 아래와 같이 밝힌 바 있다.
일제의 압제에서 우리민족이 눈물겹도록 배움에 굶주렸던 것과 8.15광복과 함께 외국의 그릇된 풍조가 노도와 같이 밀려 들어오는 것을 안얼하게 좌시할 수 없어서 ‘한국정신’을 이어받아 국가외- 이 사회 를 위한 언제를 양성해야겠다는 의욕과 취지에서였다.위에서 보듯 우촌 선생의 한성학원의 창학이녕(創學理念)과 교육철학(敎育哲學)은 ‘한국정신’(歸텔l精피 rþ)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젊은이들에게 우리 민족에 대한 투철한 민족훈(民族塊)을 심어주어 다시는 외세(外향)의 지배를 받는 오욕(펀훌)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아야겠다는 역사의식(땀史意짧)과 민족정신(民族情피lþ) 에 기초하고 있다.우촌 선생은 일제 통치하에서 일본 최고학부의 고등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자신의 영달을 위한 고급관리의 길을 택하지 않고 청소년들에게 민족정기 계송의 불빛을 밝히기 위한 교육자의 길을 택하였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京城女子醫學專-門學校) 교수 등각급 학교의 교직생활을 롱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정기(民淡精氣)의 흔(짧)을 불어 넣어 주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일인들이 한언을 멸시하고 자기들의 우월성을 뽑내는 태도에 한민족의 우수성과 항거의 기개를 행동드로 보여 주었다. 이는 대부분의 지식인이 지식의 양에 비하여 이를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의지와 용기가 부족했던 점을 돌아커볼 때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말하자면 진리텀구는 아무리 흘;륭한 지식과 논리를 갖고 있더라도 이를 실천의 길로 옮기지 못하였을 때 그 진리는 그 순간 벚을 잃게 된다.3) 지(智) . 덕(德) . 체(體)의 조화우촌 선생의 교육사상과 이념은 위에서 제시한 민족의 소명의식 계발(량發)과 민족정신을 불어 넣어 주는 민족교육의 토대 위에 지식(知織)과 덕성(德l'生), 그리고 체력(體力)을 갖춘 참 지혜( 智慧)의 실력있는 지성안과 신체적으로 건강한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을 한성학원의교육 지표(指많)로 삼았다". 요컨대 우촌 선생은 ‘현국정신’을 바르게 가르치는 한편 그 위에 지, 덕, 체를 조화있게 갖춘 ‘참 한국인’ 양성을 그의 교육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교육의 일차적인 목적과 목표는 피교육자에게 새로운 지식을 가르쳐 알게 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이는 것이 힘이다’라는 밀과 같이 교육의 일차적인 목표는 무지(無知)로부터 히}방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안다’는 것은 무한한 것이기도 하다. 단순한 시-실의 지식에서 시작하여 복잡하고 고등(高等)한 것으로 전개되어 니-깐다. 여기서 낮은 데서 높은 곳으로 전개하여 나가는 발달과정은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이같은 교육을 통하여 얻어지는 산물이 곧 지력(智力)이다. 이 지력을 가리켜 사고(忠考)라고도 하며, 현대 사회는 보다 생산적인 지력을 요구한다한편 지력의 교육과 함께 참다운 인간 형성은 인간의 품성도야(品1生|빼l台)가 전제된다. 즉 인격적인 교육이 결 핍될 때 학습자의 올바른 가치정럽(假個鼎立)이 불기능한 법이다; 그러므로 바람직한 교육은 지력의 신정- 못지 않게 도덕성이 내포된 정의(‘|펌義) 의 개념이 그 교육 속에 담겨져야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이건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훌륭한 인간의 배양 즉 ‘품성도야’와 ‘인격교육’의 근본을 도덕교육에서 찾고 있다. 그러고 교육을 통하여 한 시-회의 구성원무로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더 나아가 그 사회의 번영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구성원을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이갇은 교육의 목적은 의식적이며 의도적인 데서부터 출발한다. 특히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동벙어l 의지국(束方碼避之I행)이라고 지칭될 만큼 예의와 도의심을 모든 가치관에 우선하는 사회윤리로 지켜왔다. 우촌 선생은 이 점을 기회 있을 때마-다 늘 강조하며 예의도덕교육(짧義遊德敎育)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다음으로 우촌 선생은 덕성(德性)의 함양(싫養)을 그의 중요한 교육의 덕목(德目)으로 삼았다. 우촌 선생은 기회 있을 때마다 ‘덕(德)은 충(忠)과 효(孝)와 선(響)의 기본 바탕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매사 지-신에게는 엄격하고 남에게는 관대한 마음과 태도플 보이는 것이 덕성 (fj편l生)을 함양(펴찮)시키는 첫 걸음이라고 당신 자신이 생활속에서 본을 보여 온 우촌 선생은 항상 사람은 인간탑기 위해 매사 겸허(敵虛)하고 성실한 옴과 마음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 그는 평소 주위 사람과 제자들에게 “실없는 생각은 정신을 상하게 하며 망령된 행동은 화를 자초하는 법이며, 한 때의 분함을 참으면 백년의 근심을 연한다”는 고사(古縣)를 즐겨 인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사람의 성품은 물과 같아 그 성품을 한번 놓아 버리면 돌이킬 수 없어 반드시 양성의 제방을 쌓아 제어하여야 한다’는 점과 ‘귀한 재물은 없어져도 쌓은 덕은 흐트러짐이 없으며, 충성과 효도는 덕에서부터 싹트게 마련이다’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올바른 인간의 성품은 평소 덕성을 꾸준히 쌓을 띠} 비로소 바람직한 인간A로 성장해 나갈 수 있음을 역설하였던 것이다.선생에 관한 일화 중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6 . 25사변 때의 일이다. 한때 공산주의자들에게 ‘반동’으로 몰려 죽음의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공산당의 한 간부가 우촌 선생을 알아보교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김 교장 선생님 저를 몰라 보십니까? 제가 전에 한성여중 학교림의 가시철망 꽁사를 맡았던 사람입니다. 그때 저의 어려움을 도와주셔서 지금까지 잊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념(理念)과 사상(恩想)을 달리 하더라도 평소 쌓은 덕(德)은 이념의 높은 벽도 념을 수 있다는 산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끝으로 우촌 선생의 교육사상이자 교육이념으로 간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체육교육(體育敎育)을 남달리 강조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는 점이다. 사실 아무리 지력과 덕성을 갖춘 사람이라도 체력이 뒷받침 해주지 못하면 절름발이, 용기없는, 기형적인 인간이 되기가 십상이다.일찌기 고대 그리이스 시대부터 정신교육과 신체교육의 심신일원론(心身一元論)교육이 강조되었던 것도 이같은 배경에서이다. 체육활동은 한 개언의 신체에 잠재적으로 감추어진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여기서 체육활동을 보다 활발하게 촉진시키는 것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보다 건강하고 ‘인간당게’라는 희망에서부터 출발하며, 이같은 체육활동의 효과는 한 인간에게 주체성과 용기 그리고 결단성과 추진력을 배양시켜 주는 밑거름이 된다.
우촌 선생은 통갱 유학시절, 어느날 체육시간에 휩툴넘기애서 가장 높은 띔틀을 무난허 뛰어 념자, 평소 식민지 한언을 멸시하던 몇몇 일인 학생들이 절투를 느껴 1000 1 터 달리기를 하는 그를 뒤에서 다리를 결어 넘어뜨렸다. 이때 약간의 부상도 입었다고 한다.우촌 선생은 이같은 일인 학생들의 야비한 행위에 대한 분노가 한순간 일어나 적지(敵I따) 일본 땅에서 넓은 운동장이 떠나가도록 고성(흙盤)과 함께 일인 학생들에게 일격을 가하여 그 학생을 졸도시킨 일도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과감한 행동을 목격한 일인 교수와 학생들은 오히려 우촌 선생의 홍-분과 격정의 모습에 놀라 자기들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였다 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촌 선생의 민족주의적인 자아의식과 용기있는 행동의 일단을 엿볼 수 있으며, 이것이 훗날 한성학원의 셜럽 동기로 이어 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2. 한성대학교의 교훈과 건학이념
1) 교훈 : 진리 (흉理) . 지선 (至善)이상과 갇은 설립자의 교육이념과 설립목적 에 따라 창렵된 한성대학교는 진리(함理)와 지선(至휩)을 교훈으로 삼고 있다. 여기서 진리라 함은 대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진리탐구(훤理探究)라는 데 있다는 보편적 인 의미에서 출발하고 있음은물론이다.그러나 본 대학의 교훈에 담긴 진리의 의미는 이 밖에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서의 말씀애서 보듯 인간이 추구하는 ‘참 자유로움을 뭇한다. 따라서 인간은 자유로움을 누리기애 앞서 진리를 깨달아야 하며 이를 위한 사명이 대학에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대학을 흔히 ‘진 리의 전당’이라고 지칭하는 연유도 여기에 있는 것 이다.본 대학의 또 하나의 교훈인 지선(至善) 역시 진리의 개념과 동일한 선상의 덕목(德텀)에 해당한다. 본래 「대학J(大學) 의 ‘지어지선’(止於至
善)에서 비릇된 이 말은 ‘더할 수 없는 지극한 선(善)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자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학문의 완성을 위하여 수득(修得)할 대학의 도는 사람의 본성(本性)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사리(事理)를 올바로 인식할 영명(英明)한 재덕(才德)을 개발하여 지고(至高)의 선(善)에 이르도록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결국 대학에서 학문을 완성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도 지선(至善)을 목표로 할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고 또한 학문추구의 결실도 선(善)함A로 귀결되는 법이다.이와 같은 선한 인성계발(A性뺨發)을 본 대학의 건학이념으로 삼았다는 것은 진리탐구의 근본을 올바로 인식하였다는 견지에서 본 대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비천을 확고히 해주고 있다. ‘진리는 궁극적으로 선에 이른다’는 갚고 오묘한 건학정신은 본 대학 인문, 사회, 예술, 자연학부 등 전 분야의 학문영역에 올바른 가치관을 형성케 해 줄 것이며 바람직한 학문활동을 보장케 해 줄 것이다. 그리하여 학분연구를통한 인성 (A性)의 계발(량發)은 새로운 이론의 정립과 더불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대학의 사명이며 급변하는 사회에 적웅할 수 있는 바람직한 민주시민(民主市民)과 사회의 지도자, 더 나아가 건강한 한국인을 육성하기 위한 좌표인 것이다. 따라서 전 한성인은 이러한 훌륭한 건학이념의 뜻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실천하는 데 앞장 서야 할 것이다. 예컨대 상징적이고 전시척인 교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진리(훌理), 지선(至善)의 참 의미를 깨우쳐 생활하는 대학인이 될 때 본 대학의 건학이념은 한성인의 활력소로 영원히 빛을 말할 것이다.
2) 진리탐구(흉理探究)진리탐구는 상아탑 본연의 임무요 사명이다.진리(월理)란 누구나 인정하는 보펀 타당한 논리의 법칙이요 참된 도리를 뭇한다. 이같은 진리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되고 규정되어 왔다. 곧 새로운 시대에는 이에 부웅한 새로운 지식이 요구되는 법이다. 그러나 사물의 근본원리리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 원리를 밝혀내기 위하여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온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끊임없는 노력을 기울여야 하며 이를 탐구하기 위해 무엿보다 창의력(創意力)의 개발이 있어야 한다. 우리 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무한한 창의력을 개발, 창출하여 인류문화 창달에 기여하는 언제를 양성하는 일이 대학교육의 중요한 목표이자, 목적이라 할 것이다.
문화란 인류의 산물로써, 인간에 의하며 창조되고 생성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 선조로부터 대대로 전승되어 온 하나의 민족적인 유산이다. 이같은 문화의 전승은 진리 탐구를 전제로 계송 발전한다.한편 진리의 팀구플 추구하는 데 있어서는 탐구의 올바른 자세가 요구된다. 사물을 올바로 보는 시각 및 탐구의 바른 자세가 확럽되어 있지 않다면 진리를 찾아낼 수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진리 탐구의 자세는 어느 시대, 어느 환경 속에서도 흔들림이나 굴함이 없이 참된 도리를 찾아 밝혀 나가는 데 있다. 따라서 본 대학의 첫번째 교육목표인 진리 탐구의 구체적인 시행 목표로서 진리 탐구 외에 창의성의 개발과 올바론 가치관의 확립을 덕목(德目)~로 설정하고자 한다.
3) 인격도야(人格關;台)본 대학의 두번째 교육목표는 인격도야(Á格뼈l台)이다. 대학은 진리를 팀구하는 전당(願堂)이자, 인격도야의 장(場)이다. 따라서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됨이 바르지 못하다면 그는 올바른 사람이라 할 수 없다.올바른 사람은 세상의 시류에 끌려다니지 아니하고 참된 도리를 바르게 지켜 나가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일찌기 우리 동양(東洋)에서는 학문을 배우고 익히는 사람은 학문 연마와 함께 인격수양(Á格修養)에 힘써 덕을 쌓는 일을 중하게 여겨왔다. 언간으로서 참된 도리를 지켜가며 살아가지 않거나, 그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속마음과 다른 말이나 봄가짐을 가지고 행하거나, 자기 고집을 내세우는 사람을 비론 인격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즉 아무리 많이 배우고 아는 것이많은 사람이라도 인격을 갖추지 못했을 때 그 사회에서 윷비흔 사람으로 평가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배움이 넓어가고 깊어갈수록 그에 비례하여 올바른 가치관이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0 먼 앞날을 내다보며 바른 몸과 마음가짐을 가지고 행하지 아니한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의 지성인(知性A) 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건강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듯이 한 인간이 인격을 도야하는 데 있어 전제조건의 하나가 건전한 신체의 단련이다. 특히 본 대학의 경우 설럽자 우촌 선생의 교육이념 가운데 체육교육(體育敎育)은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건강을 잃을 때 모든 것을 잃는디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올바른 지식의 함양과 함께 건전한 육체 단련을 위한 이원적 교육이 강조된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덕을 쌓은 이라도 건강하지 못하면 용기와 과단성과 추진력의 결핍A로 그 배운 바 참뜻을 바로 실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찌기 고대 그리이스 이돼네의 여러 교육자들에 의해 지 식교육 못지 않게 체육교육이 강조되었던 것도 여기에 있었다. 요컨대 개인의 인격도야는 물론 민족 구성원 전체의 건전한 인격과 건강한 사회인을 양성하기 위해 체력을 단련하며 연마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대학교육의 과제이자 목표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오늘날 민주시민사회(헬主市民社會)에서 이우리 배운 것이 많고 너그러운 성품을 지녔더라도 그 사회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그 시-회로부터 환영받을 수 없는 것이다. 아우리 작고 변변치 못한 일이라도 자기에게 맡겨진 일과 책임을 성실하게 수행할 때 비로소 민주시민으로서의 자격이 부여되는 것이다이상의 점에 유념하여 본 대학은 두번째 교육목표로 인격도야(A格關治)를 설정하였으며 그 실천 덕목으로 첫째, 덕성 (1!펌成)의 함양과 둘찌t 건강한 신체(身體)의 단련 셋째,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월任)과 의무(績였)를 다하는 언간상(A問像)을 본 대학 또 하나의 덕목으후 삼고자한다.4) 인재양성 (人材養成)
본 대학이 설정한 세번째 교육목표는 인재양성 (J\才露成) 이다. 대학의 사명은 국가사회에 유익하고 유능한 인지!(Á才)를 양성(養成) 하는 데 있다. 대학은 그 나라의 최고학부로서 옛부터 국가의 고급 인재양성 기관으호서 역할을 다 해 왔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최고 교육기관에서는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재양성을 기본적인 목표로 삼고 ‘배달겨레’의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는 교육에 온힘을 모아왔다. 이를 한 마디로 함축하고 있는 교육이념이자, 교육철학이 홍익 인간(弘益A 問)구현 이다.홍익 인간 사상은 우리 배달겨례의 건국신화(建國패컴펀)이자, 단군조선(펌君朝I핸)의 건국이념을 함축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이다. 여기서 단(평)이란 ‘밝달’이라 하여 ‘밝은 명]이란 뜻으후 ‘배달’이라고 전해 왔으며, 우리가 딸}는 ‘한얼’은 ‘단일민족’ 또는 ‘백의민족’을 의미하며, 시조(始祖) 단군(짧君)의 혈통을 그대로 계송하였음을 뜻하는 사상이다. 그리고 ‘홍익인간’이란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 이다.‘모든 사람을 。1롭게 한다’는 홍익인간 정신은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이자 오늘날 우리 교육의 최대 덕목으로 설정되어 있다. 따라서 이 정신과 사상에 부합한 인재양성을 본 대학의 교육목표의 실천 먹목의 하냐로 삼고자 한다. 따라서 우리 대학은 이 먹목의 실천을 위해 첫 째, 우리 민족의 고유한 사상과 민족정신에 투철한 ‘참한국인’을 양성하고자 힌다. 다시 밀해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불어 넣어 한민족(함民族)에 대한 주체성(主뽑性)과 민족의식(民族意識)을 고취시키고 자하는 것이다.
둘째, 건전한 시민의식(市民意짧)을 소유한 지성인을 양성하는 일에 주력하고자 한다. 우리 민족이 유구한 역사에 비하여 근대적 시민의식에 기초한 민주사회를 건설한 것은 1945 년 해방 이후이다. 따라서 장구한 민족사에 비해 매우 일천하다.최근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이기적 개인주의(個A主義)나 공공의식(公共意짧)의 절 대 결여 현상도 우리 사회가 진정한 의미의 민주시민으로서의 훈련과 경험을 축적하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향후 우리 사회가 진정한 민주시민사회(民主市民社會)건설을 담보(據保)하기 위해서는 대학에서 젊은이들에게 건전한 시민의식을 고취시키는 일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과제의 하나이다.
모든 대학의 궁극적인 교육목적이 그러하듯 본 대학 역시 인재양성의 최종목표와 목적을 민족과 국가를 위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머물지 않고 세계 인류평화(A類平和)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적인 지도자를 양성, 배출하는 데 두고자 한다. 작금 우리 민족은 과거에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민족사적인 국운(國週)의 도래를 맞이하고 있다. 안으로는 지난 40여년간 미·소 양대 냉전체제하에서 대립과 반목을 거품하였으며 민족분단(民族分斷)의 벽을 쌓아 왔다. 그러냐 최근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국가들의 변화와 북방정책(北方政策)에 힘업어 통일운동(統-週떼J) 이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88올림픽 개최 이후 세계 속에서의 한국의 위상(位相)이 날로 높아져 가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현재 우리 민족 2천년의 역사 이래 한민족(韓民族)의 최대 민족척중흉기(中興期)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의 장래를 책임져야 할 인재양성의 책무를 담보하고있는 오늘의 대학은 이같은 대내외척인 변혁기와 함께 도래(到來)한 민족겨레의 국운을 주도적무로 이끌어 나갈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는 일을 본 대학의 교육지표(指標)로 삼아 마땅할것이다.
3. 한성대학의 교육목적과 목표교육의 목적과 목표를 설정하는 얼은 교육을 실시하는 현장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문제이다. 그것은 교육과정의 개발 절차 또는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을 규제함에 앞서 교육이 추구해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목적과 목표는 이보다 앞서서 교육의 이념에 의하여 방향이 결정되거나 영향을 받게 된다. 따라서 교육목적과 목표는 위로는 교육의 이념에 의하여 결정되어야 하며, 아래로는 교육과정이라는 실제 교육 현장에서의 실천방향을 제시해 주는 중간 매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이렇게 볼 때, 교육목적은 교육과정보다 교육의 방향 또는 중점을 지극히 일반적 • 포괄적으로 서술하게 되며 가치를 규정짓는 가치규범(價植規範)이라 할 수 었다. 그리고 교육욕표는 이들 교육과정에서 실제로 무엇을 다루어야 하고 어떠한 것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하고 어떠한 내용을 선정하고, 어떠한 학습경험을 강조해야 하는지 등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제시해 주는 일종이 행동강령(行動鋼領)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었다. 따라서 모든 일의 목표는 목척에 대한 분석과정(分析過程)을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과 위에서 논의된 여러 견해와 입장을 정리하여 본 대학의 교육목척과 목표를 설정해 보고자 한다.
우리 나라 교육법(敎育法) 제 1조에는 ‘홍익인간’(弘益A 間)이라고 하는 교육이념이 모든 교육의 근간으로 자리잡고 있어 우리나라의 모든 교육기관의 교육 지표로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교육법(敎育法) 제108조에는 ‘대학은 국가와 인류사회 발전에 필요한 학술의 심오한 이론과 응용방법을 교수 · 연구하여 지도적 인격을 도야한다’라고 하는대학 교육목적(敎育팀的)이 명시되어 있다. 이같은 대학교육의 보면적인 목적 아래 모든 대학은 그 대학의 특수한 설립 취지에 따라 대학 니릉의 교육목적을 설정하고 있다. 이 중에 특히 종교단체에서 셜렵한 대학이 특히 두드러진 교육목표와 목적을 갖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사립대학의 경우는 설립자의 설립 동기가 주요 항목£로 추가되고 있다.
본 대학은 셜렵자 우촌(友村) 검의형(金義衛) 박사가 1972년에 창립한 여자대학으로 출발하였으며, 이보다 앞서 8 .15광복 직후 한성여자고등학교의 설립이 그 모체가 되었다. 설립 당시 우촌 선생의 학교 설렵 취지와 목적을 앞에서 밝힌 바 있으나 이를 좀더 분석적(分析的)으로 정리함무로써 설립자의 창학정신과 새롭게 제정하고자 하는 본 대학의 교육목적을 연계시켜보고자 한다.과거 일제의 압제하에서 우리민족이 눈물겹도록 배움에 굶주혔던 것과 8.15광복과 함께 외국의 그릇된 풍조가 노도와 같이 잘못 밀려 들어오는 것을 안일하게 좌시할 수 없어서 우리 한국정신을 이어받아 국가를 위해 이바지할 인재를 양성할 뜻(한성학원 설럽 21주년 기념 λh 1966. 10.)
위의 내용에서 보듯 우촌 김의형 박사가 한성학원을 8.15광복과 동시에 설립했던 취지는 세 가지로 축약된다. 첫째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하에서 ‘배움에 굶주럼’을 당한 민족적 설움의 극복을 위해서였으며, 둘째 해방직후 ‘밀려드는 잘못된 풍조를 바로잡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가 바로 ‘한국정신’에 바로 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이상 설립자의 한성학원 설립 취지와 의도에 유념하여 우리는 한성대학의 교육목적과 목표를 첫째 진리팀구, 둘째 인격도야, 셋째 인재양성으로 설정하고자 한다. 아래의 〈표〉는 우촌선생의 한성학원 견학취지와 새로 제정하려는 교육목적과 목표를 상호 관련시켜 본 것이다.
설립지-한성학원 창학정신 | 교육목표 및 목적
이상과 같은 설립자의 창학정신에 기초하여 설정된 대학의 교육목적과 목표를 시행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원칙을 설정하고자 한다.
첫째 이상의 교육목적과목표를체계적(體系的)으로운영하고자한다.모든 교육기관의 교육체계는 가장 우위 개녕인 교육이념을 모체로 하여 세워진다. 본 대학은 설립자의 건학정신과 교육부(敎育部)의 교육이념을 토대로 진리(될理) . 지선(至善)이라는 교육이념에 기초하여 교육목적과 교육목표를 진리탐구, 인격도얘 인재양성으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이상의 3개 교육목표의 구현을 위해 각각의 목표마다 아래와 같은 시행덕목을 셜정하고자 한다.
진리탐구 인격도야 인재양성
둘째 이상의 교육의 목척과 목표를 융통성(願通性)있게 시행하고자 한다.
인류사회는 상호간에 보완척이며 유기척인 연결고리로 맺어져 있다. 따라서 대학이 지향하려는 고유한 교육목표와 목적 또한 그때 그때 사회적 요구에 따라 신축성 있게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교육이란 기본적으로 미래지향적이며 교육의 대상자 역시 장래의 이 사회를 이끌어 갈 언재를 양성한다는 점에서 교육의 목표와 목척은 현실사회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할 수 있는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운영되어야할 것이다.이 점에 유념하여 본 대학의 교육이념과 교육목표는 순수한 학문의 영역 뿐만 아니라 사회정의(社會正義) 구현을 위해 실천할 수 있는 유능한 언재를 양성함은 물론 인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재양성을 위해 교육방법과 교육과정을 다양하게 개설, 신축성({뼈網性)있게 운영할 것이다.셋째 본 대학이 설정한 교육목적과 목표 구현은 보편적인 원칙에 충실하고자한다.
대학은 최고의 교육 • 연구기관으후서, 그리고 문화적 기관£로서 보편적 이념을 갖고 있어야 하며, 그것은 일반적이고도 총체적인 가치를 표현하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창기적으로 실현 가능하도록 구성되어야 한다.본 대학은 교육부의 교육 목척에 의거하여 보편척인 틀을 마련하고 자 하며 이에 따라 ‘국가와 인류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심오한 학술의 이론과 광범위하고 치밀한 응용방법을 교수 • 연구하며 , 지도적 인격을 도야는 것’을 본 대학이 교육목적으로 삼고, ‘지식을 탐구하고 덕성을 함양하여 국가 사회 및 인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데 그 목표’를 두고자 한다.넷째 본 대학의 특색(特色)을 최대한 교육목표와 목척에 반영하고자 한다. 본 대학의 경우와 같이 사립대학의 경우는 우선 설립자의 설렵 취지와 교육이념이 충분히 반영되어야 한다. 본 대학 설렵자의 설렵 춰지는 앞의 건학이념에서 밝힌 바 있다.이상에서 언급한 몇 가지 원칙을 충실하게 지키며 앞에서 제시한 교육목표와 목적을 운영할 때 본 대학은 이사회와 국가장래가 요구하는 유능한 인재를 배출할 뿐만 아니라 한성대학이 이 땅에 존재할 의미가 더욱 높고 깊어질 것이다.
*한성대학교의 건학이념과 교육목표*
교육이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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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관식 전 문교장관이 본 우촌 김의형 박사
연정열(한성대 교수)통일원고문회의 의장인 전 문교부 장관을 역엄한 민관식 박사는 올해로 76 세를 맞이 하였지만 40대 젊은이 못지 않은 폐기와 그 건강 또한 놀랄만하다.한편 기억력 또한 남달리 뛰어나 3.40년전 일들을 어제 오늘에 있었던 일처럼 정확하게 막험이 없이 물 흐르는 듯하다.우촌 김의형 박사와 민관식 박사의 첫 만남은 우촌 검의행 박사가 1967년 대한체육회 감사로 선엄되면서부터이다.당시 민관식 박사가 대한체육회장으후 새로 체육회 감시·로 선임된우촌 김의형 박사와 첫만남부터 그 의기가 상통되었던 것이다.
이에 앞서 민관식 박사는 3년 전인 1964년 대한체육회장으로 선출되었던 바, 우리나라 체육계 원로인 우촌 검의형 박사가 대한체육회 임원이 됨으로써 두분 사이에 각별한 교분이 움렀던 것이다.우촌 낌의형 박사는 대한체육회 임원으로서 당시 민관식 대한체육회장이 추진하였던 체육계 근대화에 음으혹 양으로 성원을 아끼지 아니하였으며, 이미 3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갔건만 그떼의 일화들을 어제의 일같이 민관식 박사는 하나도 빠뜨렴이 없이 기억하고 있었다.민관식 박사는 1918년 5월3 일생으로 올해로 76 세를 맞이 하였건만 국가안보를 비롯한 통일방안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혜안(慧眼)은 역대 통일원장관을 비롯한 전직 각료로 구성된 통일원고문회의 의장으로서 앞으로 2천년대 조국통일에 대한 밝은 포부플 말하면서 체육동지요 반공 동지였던 우촌의 타계를 아쉬워하며 연민의 정을 나타내었다.
얼찍이 김의형 박사는 1961 년 12월 대한헨드볼협회장에 취임하여, 1968년 11 월까지 7년간 동직에 있으면서 우리나라의 비인기 종목인 핸드볼을 바로셀로나 올렴픽에서 우승의 영광을 안게 한 그 터전을 마련한 우리나라 핸드볼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1962년 3월 대한올렴픽위원에 피션, 1975년까지 동직에 계시면서 우리나라 체육이 해외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힘써 왔던 것이다.한편 대한체육교원회 회장으로 우리나라 중고등학교 체육발전에 크게 기여하셨던 것이다.이같은 체육지도자로 끼친 공과 그 인품의 너그러움이 체육계에 넓게 지지를 받아 1967년 2월 대한체육회 감사로 선임되어 그 이듬해인1968년까지 동직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임하였던 것이다.
V 대한체육회 창립기념식에서
우촌 김의형 박사의 이같은 우리 체육계에 끼친 공로에 대하여 가장 아끼고 이해하신 분이 민관식 대한체육회장으로서 두분 사이에는 우리나라 체육발전을 위해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았던 것이다.
민관식 체육회장이 전국체전의 근대화 추진을 가장 앞장을 서 도운분이 바로 우촌 김의형 박사였다.전국체전 근대화의 캐치플레이즈로 내걸었던 체전 개회식 식전행사의 하냐로 카드섹손 도업을 도와 민관식 대한체육회장의 업지를 깊게 뿌리 내리게 하여 뒷날 장수 문교장관의 명예를 안게 된 터전을 마련해 드렸던 것이다. 여기서 전국체전 개회식 식전행사에 카드섹손이 도업된 사유를 돌이켜 보면, 민관식 대한체육회장과 우촌 검의형 박사의 합작 작품A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후 선보이게 된 것이다.민관식 대한체육회장이 세계 여러나라 체육행시-에 참석하여 그 나라 체육현황을 면밀히 관찰해 요던 중 태국 방콕에서 열린 아시안 게엄 개회식 식전행사에서 일시불란하게 펼쳐지는 카드섹손을 처음 대하고 내심 크게 감탄하였던 것이다.
귀국 후 대한체육회 사무국 임원을 당시 카드섹손 수준이 제일 높다고 알려진 캄보디아에 파견, 카드섹손 연출 방법을 익혀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사무국 임원이 그 연출땅법을 배워왔지만 이를 구현해 줄 학교들이 나서주지 이니하였다.
민관식 대한체육회장의 이같은 고민에 처함을 보고, 우촌 김의형 박사는 선뜻 한성여자중고 교장으로서 카드섹손을 구현시켜 전국체전의 근대회를 돕기로 하였던 것이다.그후 우촌 김의형 벅·사는 민관식 대한체육회장에 대한 적극적인 협조와 전국 체육인들의 뜨거운 성원A로 1968년 2월 대한체육회 이사로 선출되면서 빈관식 대한체육회장과 뜨거운 우정이 깊어갔다.민관식 박시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오늘날 카드섹손 자료로 비닐을 사용하지만 그예만 허-더라도 마분지를 이용해 만든 카드섹손을 하는데 어려움이 따렀다고 하면서 먼저 가선 우촌 김의형 박사와의 우정을 되뇌인다.한편 김의형 박시는 1975 년까지 대한체육회 이사를 계속하였지만,민관식 대한체육회장은 71 년 10월까지 동직에 계셨다. 이에 앞서 4개월전 민관식 박사는 문교부정관에 취임하였다.
민관식 박사는 문교부장관 취임후 우촌 검의형 박사와의 만남은 전일에 비하여 더욱 빈번해 쳤으며, 이떼는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한 후일 본교 이사장을 지낸 안호상 빅사 등 세분이 자리를 같이하며 이세분 시-이의 교분은 더욱 두럽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교육의 미래를 함께 걱정하고 건설적이고 미래지향척인 의견 교환들을 나누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민관식 문교장관은 우리나라 교육의 미래에 대한 정책개발과 그 연구릎 위하여 한국교육개발원을 창설하기도 하였다.민관식 문교부장관은 어느날 돈암동 우촌 김의형 박사·댁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민장관은 우촌 낌의행 박사댁의 살림살이가 너무나 검소함에 내심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였다고 3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분의 청빈함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술회한다.
민관식 문교장관은 장관이 된 이후도 자신이 대한체육회장으로 있었던 당시 카드섹손드로 도왔던 그 은혜를 잊은 척이 없으며 무엇으로 보답할 것인가흘 항상 염두에 두고 있였다고 한다.
어느날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리셉손을 베푼적이 있었는데, 민관식 문교장관도 각료의 한 사람으로 이 자리에 참석 박정희 대통령과 환담을 나눌 기펴를 가졌다.민관식 문교장관은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기-서 단도직입적으로“전국체전에서 카드섹손을 통해 그 공로가 많은 우촌 김의형 박사에게 대학 안가를 하나 내주시기 바합니다”
라고 말씀드렸던 일화를 어제 얼 같이 회상하며 그때 박대통령과 나눈 말들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민관식 문교장관의 이같은 갑작스러운 제의에 박대통령은 처음은 어리둥절하였지만 민장관은 계속하여“전번 전국체전 개막식 식전에서 카드섹손에 각하의 존영이 마음에 드셨는지요?"하고 말씀을 드러니, 박대통령은
“그 카드섹손에 내 얼굴이 사진과 같이 선명하게 잘 나타내어 내심 놀랐었네 ”
하고 응답을 하시기에 민장관은 다시“각하! 그같은 작품이 연출되기까지 여러 달 동안 김의형 교장 선생님과 전교직원 학생들의 일심단결된 피땀어린 결실입니다”라고 말씀을 이으니, 박정희 대통령은 낮£막하게“하기는그러군요”라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하여 민관식 문교장관은 대통령의 재기-를 얻어 한성여자대학 설럽 승인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그때까지만 하여도 수도권 지역에 대학 설럽을 억제하던 시기에 이같은 한성여자대학의 인가는 교육계 인사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샀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민관식 박사는 그때 일화들을 회상하며 매우 흐뭇한 특유의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우촌 검의형 박사가 그렇게도 평생을 통하여 소망하였던 대학을 설립을 하였지만 1976년 6 월 한성여자대학장의 직에서 물러나 재단이사장에 취엄하신 후 얼마 아니되어 점차 건강이 나빠지셔 병석에 누워 계시다눈 소식에 접한 민관식 박사는 당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1983 년 3월1 일 우촌 김의형 박사의 타계의 소식에 민관식 박사는 또 한번 충격을 받았으며 인쟁의 무상함을 느껴 오늘까지도 그떼의 애석함아 잊혀지지 않는다고 돌이켜 술회하는 그 모습에서 민관식 박사와 우촌 김의형 박사와의 생전의 우의의 갚이를 느끼게 한다.
先輩와의 義理를 지키며
홍순태(전 한성대 학장)A間關係의 緣이란 妙한 것이여서 佛家의 輪뺑說에 의하면 前生現在未來生이 서로 輪꽤하면서 거듭 生滅한다는 三生因綠說이 있다. 말하자면 因綠이 서로가 맞아서 알게 되고 親하게 되고 夫캠;가 되고 父母兄弟子孫에 이르기까지에도 前生의 因*~에서 緣由한다고 생각하는 說이다. 지금에도 흔히 쓰는 말로 길을 가다가 서로가 소매깃만 마주쳐도 前生의 因緣이라고 鍵用하고 있다. 훨在的A로 A 間中에서 ↑可必、이면 그 사람을 골라서 親하게 되고 그 사람을 골라서 上士로 모시게되고 社會生活에서 -生의 苦樂을 같이 하면서 살아갈까하고 생각하여 볼 때에 偶然이리-기 보다는 因緣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一理가 있음직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土f유的일는지는 몰라도 緣分이 맞는다 안맞는다 하여 結婚의 緣分에 대한 好不好를 評하여 天生緣分이니 잘못살게 되면 살이 끼어서 못사느니 하고 있a며 심지어는 家屋뤘買까지에도 緣이 맞다 안맞다하고 있다.
@ 日本體育大學同짧會에서 본 金義衛先훌훌金義衛先輩와 本A과의 關係는 日本體育大學同깜、會라는 因緣에서 부터 시작한다. 여러모로 緣아 있었음인지 몰라도 本A 이 1954年鎭海에 었던 陸軍士官學校가 現花郞台泰陸으로 移輕함에 따라 서울에서 開健하는 各種行事에 참가할 機會가 많아졌다. 直接的인 꽃機는 日本體育大學同짤、會에 參加로 同짤、會 幹事韓炳喆先輩와 같이 同忍會幹꿇의 任務로 同뽕、會 핍務를 시작한데서부터이다.
初代同뿔、會長 李困學先輩에서부터 歷K-t 會長을 모시고 日本體育大學과의 連絡휩:信 等專據하다시피 하였다.同줬會 철훌務가 活性化된 것은 金長勳先꿇 後任으로 金義衛先輩께서 同恩會會長職을 引受한 後더욱 活動이 活撥하였다.後輩들을 母校인 日本體育大學에 留學시키는 데 執念하면서 往來A꿇 및 뽑;信週絡도 맡았다.同웠、會 會長으로 모시기 위하여 韓炳喆幹캘품} 本A 이 漢城學園을 듬쳐問하였을 때다.첫 A象이지만 先歸라 하지만 年敵關係인지 淑훼휴하기만 하였고 情도못부칠 정도로 冷淡한 표정이었습니다. 然이나 A間이란 緣分이 있으면 情이 드는가 보다. 漸次接觸할 機會가 많아지고 回數가 많아절수 록 뚜한 모습이 부드렵기만 하고 自然스럽고도 親密感。l 돌았습니다. 同짤、會 野遊會n#節에는 i빼淡等으로 분위기가 和平스러웠고 本A은 先歸들 앞에서 웅석도 부렸습니다.A間은 節度와 柔軟性이 急備하여야하는가 봅니다. 엄하게 보이든 분이 漸漸정답게 보여지고 同짧會事將로 學멜l을 벙푼하면 親弟와 같이 대하여 주시고 승용차로 交通이 편리한 지정까지 利用하도록 염려하여 주셨습니다.
옛말로 사람은 겉보기는 엄하게 보이고 속으호는 부드렵게 하여야 한다는 어른들의 가르침이 새삼 생각이 납니다.金義衛先輩님이 다음과 같이 本A 에게 以J이팡心 마음에 남기게 하여주셨습니다.A生은 항시 여유있는 JL행이 必몇합니다. 初志一월하여 훌念으로 事物어l 엄하여야 하며 계획을 집행히는 데는 百折不屆의 勇氣로서 公務執行꽃勢가 되어야 합니다. 단 環境과 時期에 따라 原則에 벗어나 지 않은 彈柔를 겸한 인간으로서 폭이 넓은 A間像이 현대에는 필요합니다 하는 以心f핀心의 가르침을 文字로 記錄을 남겁니다.@ 大韓핸드볼協會 會長으로서의 金義衝先輩國內的으로만 보급을 확대하여 大學, 中高, 國民學校部別로는 滿足할지 모르나 國際的으로 볼때 國家展望으로는 切望狀態이고 좁年層에 發展텀標로서도 國內行事로만으로서는 不滿足한 狀態이다. 國際的水準을 確保하기 위하여 不得E 國際聯盟에(I . H . F) 加盟하여야만 하였다. 1960년 當R뽕의 핸드볼 써會長인 韓炳喆先輩와 文顯柱先輩가 스위스 「리허l 지」에서 開f崔한 世界핸드볼聯盟總會에 참가하여 共塵國家들의 1}jj害에도 불구하고 友꾀國家들의 支援으로 근소한 차로 加盟의 榮光을 얻었습니다.
좁年들의 希望을 위하고 또한 l펴家的 發展을 馬하여 國l쩔聯盟에(I.H. F) 加盟하였으나 國際交流는 처음이다. 여러가지 lID을 考慮한 끝에 티本大韓國同짤、會 後援을 얻어 母校인 口;本體育大學핸드볼범을 1960年10 月에 招請하여 國際的우로 最짜l의 l헬11際親善交流鏡-技大會를 가졌습니다.
結果는 4戰4敗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得點差보다 倍點에 敗한 것업니다. 현재까지의 생각을 다시 0점으로 몰려 처음부터도 그러하거니와 더욱 修學하는 쫓황로 出發指평에 熱을 올렸습니다.
同뿔、會 諸兄들의 後援을 얻어 經濟的으로 補助를 받았는데도 面팀 이없습니다. 다시 엄k戰하여 1961年高J校選技립을 招請하여 -次國際大會n풍 失敗한 점을 없檢히-였습니다. 4戰 全敗는 하였으나 每.戰마다 得·點差는 不週2 .3없이었습니다.國際大會가 끝나고 앞으로의 發展과 支援을 위하여 웹會長은 現同意會會長인 金義衛先헤보를 大훼핸드볼쩨會 會長으로 모시기로 f풀案하여 1962年핸드볼協會로서는 激띠b期인 n향期에 金義術先輩가 會長으로 就任하여 國際的으로 發展하는 핸드볼界에 生命水와 같은 活짧素를 접어 넣어주었습니다.金義衛會長을 모시고 歸會長은 띔Ij會長으로 本A (專務)은 彈한 會長때 에 평氣를 얻어 突進하기 시작하였습니다.2년간의 招請擬技로 더 이상은 遠m:팀도 받아들일 수도 없고 이제는不得E 遠m:을 하여야 하였습니다. 1963年5 月大學選했멈을 編成하였습니다. 政策的으로 앞으로 各市道의 將次指평者를 整成한다는 텀 )標아래 同-한 水準이면 地方選手를 選抗하였습니다. 單-탬이 아니라 避技범이므로 돈이 품니다. 經濟面에서 莫大한 金類을 決載를 득하여 合宿힘11練에 突入하여 韓I행蘇初의 遠?正에 올랐습니다.
結果는 8댄끓f핍”인데 3陽1 떼앉敗 記錄이 되었으나 f짧E差는 大同小짧합니다. 日本滿在中高校演習狀況等을 親密하여 同年郞1 963年10 月어l 高校범을 日本에 遠狂하기로 티本때1會와 협 의하였습니다.韓國과 同n총에 全I행的으로 高校選技單을 編成하여 合宿뢰11線에 들어갔다. 合宿은 完7 되고 B 本遠m: 出發이었습니다. 6戰計웬u이었습니다. 1찌會 專將펠事로서의 記者會見업니다.本A은 당당히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번 팀은 日本高校의 弱없을 알고 補彈젊11練된 팀으로 6戰6勝할 것이며 得點差도 많이 날 것업니다. 그러나 第}戰의 結果는 意外로 敗報였다. 本A 의 觀察이 不充分한가週應力이 不足인가 정말로 이외 敗報였다. 더구나 第一戰은 弱한 東京이다. 짧日 第二戰에 勝報*斷灣勝報다 據定한대로 得點의 치-가 많았습니다. 結果的으로 6戰5勝1敗記錄으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韓國最初의 遠?正大學·高校를 63年5 月과 10 日에 걸쳐 헤 낸 것이다.韓民族의 f짤秀性을 다시 한번 確認한 것업니다.
모든 力量과 힘의 發揮는 技能의 힘11練에 있고 技能의 發展은 計劃과適應訓練에 있습니다. 이러한 텀標下에 計劃을 樹立하여 經濟的우로 뒷받침 될 經濟的載可와 執行한 結果업니다. 또한 率先督뼈j 하여주신 분이 金義術先짧업니다. 先짧가 아니였더라면 無理한- 合宿뢰iI練도 不可能하였다고 생각휩니다.先輩는 先見之明에 우리 핸드볼界를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漢城學園에 핸드볼팀을 創I렘하였고 이때만 하더라도 室內體育館이 公設로서는 있지만 私設로는 없었습니다. 先輩께서는 多類으로 體育館을 建立하였고 아끼고 아낀 體育館을 핸드볼 練習場으로 또한 魔技大환易£로 헨드불이라면 소신을 바쳐 아끼는 것이 없었습니다. 섬지어 週動場體育授業을 變‘更하여 가면서 遠웰#易에서 全國헨드볼 大會를 통하여 열을올렸습니다. 그 得分에 漢城女高핸드볼팀은 높은 水準의 탬까지 成長하였습니다.
大會때마다 直接會長이 陣頭指揮下에 諸般뼈設을 돌봐주셔서 不便없이 鏡技가 進行되었습니다.한편 國|際的으로 親善이라 하지만 鏡技뿔웠옳에서 흉닮포 當-한 日本은大學이 半牌寶績이고 高校는 全成이고 보니 國家의 鏡金으로 歐州까지 遠↑正하여 習得한 結果가 國l際舞臺에 處女登場한 韓國에 敗하였으니 國家에 대한 면목이 없었습니다.이로 인하여 63年以後4年間이나 흙信의 P뚫答도 없이 交流가 斷切되었습니다.日本헨드볼協會가 휠;信 往來가 끊어지자 諸般方法을 講究하다 個A的接觸法을 始動하여 努力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습니다. 그러하던 중 1970年7 月世界핸드 聯盟總會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開f崔함에 따라 總會애 參加命을 받고 國際會議後티:本에 ‘滿留하면서 日本內同뿔、會幹事로서 EfJ:校음15問 및 日本헨드볼協會에 魔技交流交涉을 딩的으로출발하였습니다.
우리나라 핸드볼 狀況은 男子普及은 可하나 女子는 여의치 못한 실정이였다. 마침 本A 이 짧花女大 핸드볼 請義를 擔협·하였기 때문에 女性發展을 위하여 授業하면서 鏡技出戰에 對備하여 오던 중업니다 國際會議에 參加ìk 國際械路經由地點인 「고변하겐」에서 「론돈」會講에參加次가던 짧大總、長 金玉吉敎授를 만났다. 탱際會議關係를 이야기하고 젤大 헨드볼텀 遠1iE問題를 相議하여 承諾을 받았습니다. 國際會戰를 마치고 據定대로 母校인 H 本體育大學을 同짧會關係로 話問하고 日本핸드볼1m}會와 k써議가 이루어져 동년 1970年10 月韓國퍼풋初로 女性으로 짧花大 핸드볼팀이 遠f正에 登場하였고 짧大 70年史처음으로 패體로 遠狂하는 歷史的記錄이 된 것이다. 이후 往來는 高校大學-般에 이르기까지 交流는 正챔·化되었습니다.이상과 같은 敬勳1期에 處해 있는 歸l행 핸드볼界를 金義術先歸가 會長職에 就任함으로서 組織서부터 各種編成뢰1I線 普及行政國際擬技에 이르기까지 f많全한 맴l體로 또한 會員들 個A까지 A格{I찢養面에 원4響을 주었고 大韓體育會짧下!때體中 模範이 되어 빠漸‘한 業績을 남겨주셨습니다.
한편으로 校內東쪽 現女高位置에 土木工핍等으로 파地를 造成하여 建第이 可能하도록 하였습니다.大옆의 大學設立을 마음속 갚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大較헨드볼1써會 會長就任을 꽃機로 1968年大韓體育會理事로 就任한後至大한 功勞기- 있었습니다. 韓國最初로 全國體育大會에서 AI으로 座席階段에서 각종 模形의 大形原色카드색션 마스캠을 生따b感있게 發表하였습니다. 1월城學園 科學箱쪽 階段은 模型마스캠 練習場으로 안성마춤이다. 先꿇념 께서는 여기에 훨fli하시여 制期的£로 韓國體育文化의 進取的이고도 創作的인 新風을 일으켰다. 이 功勞를 致짧하면서 i莫城껏子大學 設立認可의 꽃機가 되었고 또 한면으로 體育會選手身體管理및 訓練過程等請問題에 對하여 改짧과 整備에 萬全을 기하였습니다. 1970년 大핸핸드볼1써會 會長解任以後에도 大韓↑뽑育會理事로 1976年까지 泰1J:하여 주셨습니다.@ 金義衛先훌훌의 威業을 繼承하며
1938年師道를 걷기 시작하여 1984年까지 約50餘年間半世紀를 敎導의 生活이다.A間 年敵으로 滿65歲가 되었다. 벌써 A生은 新綠에서 黃葉으로 물들어간다.外國름휩ξ學도 23年이나 動務하였다. 敎授의 1/3 이 外國에서 {I찢學을마치고 돌아온 弟子들이 되었다. 어느듯 敎員停年이 된다. 1984年8 月이면 現投에서 |穩退하여야 한다. 停年이라니 A生을 다 산 느낌이다. 健康과 勇氣는 아직 묘盛하다 하나 制度的으로 交代後陣을 위하여 勇氣를 낸다. 停年1個月程度남았다. 故金義術先輩未亡A 께서 面會를 要請한다. 나는 옛 先짧任 毛으로 발을 옮겼다. 옛과 다름 없이 作故하신 先輩任의 寫률이 應、接室에 보인다. 未t::A과의 面接은 始作되었다. 內容인즉 先輩任이 設立한 漢城大學을 맡아서 連營을 훌任져줄것을 말한다. 因緣이란 묘한 것이다. 同짤、會長으로 大韓핸드볼 會長으로 모신 것도 어제 그제인데 數많은 後輩가 있는데 何必이면 本A 에게 이러한 重責이 引繼될까 何事로운 因緣이 아니다. 特別한 血緣과 같은氣分을 맞아했다. 하나 마음을 가다듬고 沈훨하게 未亡A 에게 大學。l걸어온 이야기를 듣기로 하였다.
이야기인즉 先짧께서 創設한 大學으로 學長動務5個年項交通事故로 인한 後碼뾰으로 病死한 後未亡A께서 引繼하였£냐 如意치 못하여 (任期以前退任) 金J3Ç家門에서 引繼한 家門學長(任期以前退任) ↑방냄RA事學長(事故로 任期以前退任) 現在초席이며 走t任하면 第5代가 된다는 것이다. 創設後短期間에 學長이 여러사람이 交代하였다. 니는 自意든 他意든 途中下車는 違씁上 缺點과 陰閒된 缺點이 있다고 判斷하였다.나는 先輩의 위업을 계송하되 어려운 苦難苦痛이 온다는 것을 각오하고 책임이 중대한 것을 새삼 느꼈다.落後된 大學建設이다. 日體大後輩가 引繼받아 市內의 唯一한 大學으로 責任지고 建設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책임은 지되 大學事務一切의 모든 문제는 간섭하지 않기로 하며 大學位置도 앞으로의 發展을 위하여 현 中高校位置와 바꾸기로 提議合意하였다.中i홈校가 가는 곳은 鐵節콘크리트 現代式建物로 避色이 없기 때문에 그리 移輕시키고 나는 大學建設에만 執念으로 매진 하겠다는 것이다.
文敎部에서 學長認뱉。l 申請3 日만에 나왔다. 外大停年退任前이다. 나는 停年退任한다는 생각보다 새로이 휠-任진 故金載衛先輩가 設立한漢城大學첼設에 마음이 부풀어 있었다.마치 A生을 새로 태어난듯한 氣分이다. 차근히 停年退任A事와 學長삼任 A事IJR精를 쓰기 시작하였다.停年退任式에서 선배 후배 동료들과 친지 제자들의 인간무로서의 1~1j度的停年完途를 祝헬받았다.20餘年間 苦樂을 같이 허든 敎授들 옆을 떠난다고 하니 섭섭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나는 退任式을 마치 고 2 일후 金義術先輩가 셜립한 위업을 계숭하기 위하여 漢城大學의 學長就任式을 가쳤다. 선배 후배 통지 친지들의 축하와 격려속에서 大學述營의 第-步를 내딛었다.우선 상황파악이다.50여년간의 敎育經驗a로 정년퇴임한 나는 대학의 長點과 短點을 찰알고 있다. 나는 各敎科에 대한 週떻狀態를 알기 위하여 순시하며 各課長£로부터 說明을 들었다. 그 結果週營上各科에는 非合理點。l 많았다. 한마디로 대학인데도 고등학교와 같은 느낌이 든다. 擁B는 學部다운 氣風이 있어야 大學다운 環境속에서 . A材가 찮成된다. 各科뿐만 아니라 行政各部處의 諸制度도 그랬다. 이 制度를 大學다운 氣風으로 쩨新 造成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매일 교내를 젠察하며 f痛(휩職員을 ’뽑빼하며 廣錢에 임하였다.
부임시의 계획대로 중고등학교를 大學(現代式建物) 자리로 移輕하고 티帝時代의 木造;짧物(녀J 흙자리) 位5월를 大學本館新樂據定地로 하기로 하고 大學다운 環境으로 發展할 수 있는 않地面積을 確保하여 夏季放學을 利用하여서 建흥똥을 시작시키고 콘셋트等을 架設하여 臨n풍爾議室로 代置하였다. 한편 中흙週j)jjJ場을 改造하여 400m트랙 澈球場넓이로 據張하기로한 希뿔찬 ,建設이 시작되었는데 學生들은 데모를 *隨협한다. 잇슈가 없다. 打性的調病病이다. 나는 內的인 몇ESI 이라 생각하여 視線을 內部로 돌아 학생데모와 관련되어 있는 2 언의 敎授름 지목하까 그교수의 缺點과 非合法↑生을 調훌確認한 後徵폈委員會에 며附시킨 結果退任하게 되었다.
한편 市內에 位置한 大學으로서 所在位置와 交通網을 통한 漢城大學弘報를 通學測面에서 三仙橋로 되어있는 輝을 漢城大學鍵(三il~橋)으로 바꾸였다.또한 男女公學으로 변한 이후 數年問ROTC를 宿命的언 과제로 삼아 왔으나 所願을 이루지 못하였다. 냐는 陸士의 初代體育課長爾敎官으로 맺어진 因緣무로 弟子들이 軍에 服務하고 있었다. ROTC를 申請하여 합任 1年後課題로 삼아 소원이던 ROTC 設置認可를 通報받았다. 數며에 걸쳐 申請하였던 課題인데 이렇게 쉽사리 될 수 있을까. 敎授와 敎職員들이 祝웰하면서 또 다른 視짧으로 學長을 보았다.學生들은 또 데모다 主動者는 15~20名程度였지만 부화뇌동학생으로 온 校內가 소란하여 授業이 안되었다. 愛求案件內容은 千萬不當이다. 東에도 西에도 닿지않은 이론이 없는 무지의 행동이다.학생들은 暴徒와 같이 몰려와 學長室은 破壞당하고 냐는 軟禁을 당하였다.
마치 敵이 降代을 받은 模樣처 럼 學生의 態度및 言語는 이로 그 不敬을 말할 수 없을 程度다. 나는 -녁캡에서 적에 포위되어 있을 떼를 생각하며 강한 l해志」료 대답하지 않고 모든 것이 不應이었다. 食事도 一切不應이다. 나의 態度는 變動될 리가 없었다. 計劃과 텀標로 매진할뿐이다. 나는 생사를 초월하고 -線戰|뼈中隊長勳務를 한 사람이었다.軟禁3 일째다. 학생들은 스스로 태도를 바꾸어 연금을 해제한다. 학생들은 단독으로 範城한다.지성이면 감천이다. 진리가 없이 같은 일을 되풀이 해봤자 표解答은 없다. 역시 진리는 정의이다. ROTC나 지하철이나 이 모든 因果關係가 나의 힘이 아니다. 냐는 先輩와 後輩가 맺어진 以心傳心의 結果로 생각한다. 故金義衛先輩의 형이 뒤받침하여 주신 得分로 본다.선배가 생전에 뿌린 씨앗이 死後에도 그 노력이 헛되지 않고 뿌리를 내려 꽃을 피우는 것이다.이제는 大學다운 대학으로 內容에 充實을 기하여야 한다. 대학다운대학이라면 冊究機能이 活撥하여야 하는데 學部만으혹 그 機能이 不足하다. 나는 大學院을 申請하여 합任後 2년째 명설공히 大學다운 大學a로 大學院設置認可의 榮光을 얻었다.
一年餘만에 新藥校舍가 現代式石造建物로 地下2層地上4層의 거대한 6層建物이 騎山언덕에 그 偉容을 자랑한다.6層建物옆에 40아n트럭으로 환경이 찰 조화되었다. 地域住民들은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또한 發展하는 大學으로 協助가 시작되어 降接하고 있는 8千餘헬 程度의 三仙公園이 대학과 通路가 開設되어 大學休息、處로 利用吸收되었다.이렇게하여 4萬웰程度의 大學쏠地로 市內유일한 대학으로 變身하기 시작한다. 대학의 自活과 自力은 學生數가 휠·千名程度가 되어야 育響事業이 圖滿하게 이루어진다. 나는 自然系學科의 增員과 增科를 申請하여 認可를 得하여 大學院學部를 合하여 育營事業의 基盤이 造成되도록하였다.先輩가 作故하신 後漢城學園은 路步狀態였다.A間이나 때體나 事業體나 國家나 모두가 隆盛할 週과 時期가 있다시피 先輩께서 設立한 大學學園이 이제 그 隆盛期를 맞이하였다고 봅니다.
血緣보다도 더욱 진한 先輩와의 義理와 日體大傳統으로 엮어놓은 험이 바로 大學을 發展시키는 꽃機가 되었다.金義衛先輩가 設立한 大學이 그의 大學後짧} 作故하신 형의 懷을代身하여 뿌린 씨앗을 가꾸어 大學은 隆盛一路를 만진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형의 위업을 책임짐으로서 대학의 基盤이나마 造成이 되어 전진할 수 있도록 된 것을 日體大同뽕을 代表하는 마음으로 滿足과 榮光으로생각합니다.또 나는 漢城大學認可以後唯一하게도 4年의 任期를 마치게 될 傳統初代의 학장이다.坐엽·神經이 말을 듣지 않는다. 더 以上無理한 精力은 내 自身을 判斷못할 것 같아 老年期의 A生으로 차분하게 쉬고 싶다. 故金義衛先輩任의 安R民을 析禮드립니다.대단히 감사합니다.예술과 교육을 병행하라시던
김진걸(전 한성대 교수)정년퇴임식을 가지던 날 갖가지 상념에 젖어 교정을 거닐며 지냐온 날들의 추억에 젖어드는 것은 어이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이끼 끼고 때로는 그늘져 보이기도 하던 학교건물과 교정과 모든 것들이 이날 아침에는 유독 싱싱하고 활기차게 보이는 것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린 시젤에는 꼬마 친구들과 어울려 매미를 잡고 눈싸움을 하던 낙산언덕이었습니다.이 낙산언덕 한성학원에서 젊음의 열정을 펼쳐보이며 반평생을 보낼 수 있었음은 무척이나 큰 축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이러한 모든 기쁨을 향유할 수 있었음은 우촌 선생님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우촌 선생님과의 만남은 35년 전으로 기억됩니다.6 . 25전쟁을 겪고 피난 후 서울에 환도하여 삼선교에서 조그마한 개인연구소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교육에 남다른 열정을 가지셨던 선생님께서는 당시 이미 한성학원을 개교하시어 교육에의 기반을 튼튼하게 닦아가고 있었습니다.삼선교 주변에는 여러 무용연구소가 많이 있었음에도 불구하시고 본인의 연구소에 오셔서 한성여고 특활부 무용반을 맡아보지 않겠느냐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이에 대한 수락이 현 오늘을 있게 한 연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때는 젊은 시절이라 무척이나 신명을 바쳐 열심히 뛰고 열심히 가르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체육을 전공하시였고 여성교육에 특별하신 노력을 아끼지 않으시던 선생님께서는 무용교육에도 크게 관심을 두고 노력하시어 국내 최초로 2부에 무용과를 개설하셨습니다.야칸부 개설로 그 당시 학문에 굶주려 있던 여러 무용학도들에게 직장을 다니면서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줌으로써 한국의 무용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도록 하신 점은 큰 업척으로 보고 싶습니다.초창기에는 여러가지 시설이 미비한 채로 출발하였지만 점차 빼른 시일내에 필요한 제반시설을 확충하여 주심요로써 무용과로서의 단단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선생님께서는 7층의 높은 무용실기실까지 지주 올라오셔서 창밖에서 실기를 하던 학생을을 주의 깊게 보아주시고 격려하여 주셨으며 졸업발표회를 즈음해서는 거의 매일이다시피 밤늦게까지 남으셔서 하나 하나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발표회 당일에는 전 기측이 오셔서 학생 하나하나 관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모든 것들이 지금의 발전된 무용과로 발돋음할 수 있었던 왼동력이 아니었을까 사려휩니다.선생님께서는 이에 만족하시지 않으시고 따님이신 김경자 교수를 무용에 뜻을 두게 하시고 무용에 더욱 큰 신명을 바칠 수 있도록 선생님의 모교인 얼본체대에 유학의 길을 터 주신 점 등은 모두가 선생님의 깊으신 배려가 아니신가 생각됩니다.노을이 어스러히 깔릴즈음 7층 실기실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창가에 다가서 보면 선생님께서는 항상 화초를 기꾸시고 나무를 손질하시며 정원에 계시곤 하셨습니다. 때때로 물구나무서기를 하시는 모습도 보였습니다.화초와 나무에 쏟는 정성은 한성학교 학생 한사람 한사람에게 쏟는 무한한 깊은 애정으로 비쳐지곤 하였습니다.여러가지 이유로 저 자신 좌절과 회의에 빠지곤 할 때에 어떻게 아셨는지 가까이 들리셔서 자상하게 여러 말씀을 주시곤 하여 뒤틀렸던 마음을 다시금 가다듬었던 일과 담석증으로 오랫동안 업원을 하였을 때 여러차례 병원에 오셔서 건강에 유의하라고 수차에 걸쳐 말씀을 주시던 일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체육대학에서 한성대학을 방문하였을 때에 안내와 통역을 하도록 하시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끝까지 깊으신 배려와 관심을 주시어 본교의 방문을 뜻있고 보람있게 마칠 수 있도록 도외주신 일이 기억닙니다.예술적인 면으로만 치우치기 쉬운 기질을 예술과 병행할 수 있게 교육자로서의 틀을 갖출 수 있도록 일일이 모뱀을 보여주시고 알려주시던 일이 생각납니다.고희를 넘기시고 노환에 따른 병환 중에서 수차에 걸쳐 문병을 드리면 알아 보실 적마다 두 손을 꼭 잡으시며 깊으신 의미의 미소를 지으시던 모습이 하나하나 마음속우로 저미어 옵니다.생전에 모교인 일본체대와 무용과 교류를 그토록 원하시었는데 저의재엄중에 소임을 다하지 못함을 송구스럽게 생각하오나 이제는 타 대학 무용과와 조금도 손섹이 없는 발전된 위치에서 따님이신 김경자 교수님의 노력하에 이미 2-3차례 일본체대와 무용과 교류가 있어왔고 앞으후도 여러 무용과 교수들의 노력에 힘업어 보다 뜻있는 교류가 있으리라 기대되어 죄스러움을 미더움으로 가릉해 봅니다.
수차례에 걸친 개인발표회나 동문발표회때에는 일일이 찾아주시고 한성학원 학생들도 관람하게 하여 주시는 등 여러모로 도움과 깨달음을 주신 면에 항시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예술원상이나 국가에서 주는 훈장 서훈식에 선생님과 기쁨을 같이할수 없었던 것은 크신 사랑밑에 었던 저로서는 슬픔을 느낄 수 밖에 없었으며, 졸저 ‘산조춤무보’를 출간하여 유택에 찾아가서는 한없는 눈물로 선생님을 기렸습니다.남겨놓고 가신 모든 것들이 모두 소중하게 하나 하나 생각되는 것은 선생님의 뜻이 매우 높으셨기 때문이라 믿기 때문입니다.한성가족의 단합된 모습을 그토록 원하시고 낙산동산 위에 한성가족만의 삶의 터를 다지셨던 그 자리에 이제는 하늘을 뚫을 듯 웅비의 건물이 새롭게 치솟아 오름은 끊임없는 선생님의 액이 용솟음침과 이어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제 정들었던 교문을 나서며 저의 삶을 주도했던 한성대학에서의 생활과 낙산동산에서 북한산을 바라보시면서 우령차게 고함치시던 음성이 지금도 메아리 쳐 오는 듯 하고 매년 거듭되던 체육대회때마다 무척이나 크게 즐거워 하시며 건강하시던 모습을 그려보면서 무한히 크시던 友村金義衛博士님을 기렵니다.의리를 평생의 신조로 삼았던 우촌 김의형 박사
연정열(한성대 교수)1. 거인(巨人)이 가시던날 하늘도 울었다1983년 3월1 일.아첨부터 봄비가 정원 뜨락에 내리고 있었다.3 .1 절 공휴일이라 비도 요고 하여 서재에서 밀린 원고를 쓰고 있는 데, 뭇밖에도 학교로부터 본교 설럽자이시며 초대학장을 역임하신 우촌 김의형 박사님이 타계하셨다는 부-음에 접하고 펜을 놓고 한동안 넋을잃었다.
그렇게 강직하시고 젊은이 못지 않은 폐기와 건강하신 어르신께서 타계하셨다는 부음이 믿어지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설럽자 우촌 김의형 박사님의 서거는 온 한성학원 가족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에 한동안 말들을 잃었다.검의형 박사념은 우리나라 교육계와 체육계에 끼친 공이 너무나 컸기에, 그분의 타계의 부음은 사회각계로부터 조의가 쇄도하였다.일제 통치하에서 조국굉복은 오직 교육을 통하여 찾아야겠다는 굳은 신념은 1945년 8월 15 일 광복과 함께 낙산 기숨에 한성학원을 세우시고 중학교에서 부터 고등학교, 대학까지 설립하셨던 것이다.우촌 선생님의 서거는 하늘도 무심치 아니하였던지 그날 종일 비가 내려 거인의 타계를 애도하는 듯 하였다.한성학원장으로 치루어진 고 우촌 김의형 박사닝 영결식은 사회 각계 유지를 비롯한 유족 및 한성학원 산하 중 ·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전 엄직원 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거행 되었다.
이날 영결식에서 필자가 낭독한 조사에서 본교 설립자이신 우촌 김의형 박사님의 평생을 통한 일관된 교육사상과 그 배경, 그리고 한성학원 각곱학교 전 임직원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내용이기에 조사 전문을실는다.한성대학의 설렵자 우촌 김의형 박사님의 서거에 당하여 온 한성가족은 이 청천 벼락과 같은 부음의 슬픔으로 앞이 캄캄합니다.한 평생을 교육사업으로 조국광복과 영재육성으로 근세 한국문화창달에 위업을 남기신 우촌 낌의형 박사님은 낙산 기숨에 우리 한성학원을 세우시어 중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와 최고학부인 대학까지 진리탐구의 전당을 마련해 주셨습니다.우리 한성학원 산하 각급학교 교직원들은 박사님의 건학정신올 받들어앞날 이 나라와 주인콩이 될 청소년 학생지도에 긍지와 사명감을 갖고 맡은 바 직무에 보람을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박사님이 우리를 떠나서 타계를 하시다니 우리는 누구를 의지하고 이 막중한 박사님이 한 평생 이루어 놓으신 사업을 이꿀어 나갈 것인지 답답할 뿐입니다.박사님은 우리 교육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체육계에 남기신 그 엽적 역시 크시어 대한체육교육회회장으로써 대한 올림픽 위원회 이사로 써 스포츠를 통한 대내외에 큰 엽척을 남기셨습니다.박사님은 생전에 일본으로부터 조국광복을 찾았으니 더 큰 소원은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박사님의 그같은 심정은, 그 가신날도 일제의 압박으로부터 독립을 되찾기 위하여 온 겨레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3.1 철 기념일이기도 한것은 우연의 일치만도 아닐 것입니다.우리 교육계와 체육계의 거성이 떨어지니 하늘도 슬퍼 박사님의 서거와 때를 같이하여 연 이틀 조용히 비가 내렸습니다.우리 한성학원 각급학교 교직원들은 박사님의 생전의 엽적을 돌이켜보며 눈물을 닦고 박사님의 위업을 더럽히지 않도록 온 힘을 기울여 맡은바 직무에 충실할 것을 박사님 영전앞에 굳게 다짐합니다. 이것이 박사님의 위업을 받드는 길임을 가슴깊이 새기며 오는 봄과 함께 한성학원의 힘찬발전을 우리 온 한성가족은 박사님 영전 앞에서 재차 다점합니다.
박사님! 비록 옴은 타계하셨지만 그 영혼은 항상 저희들 머리 위에 계시어 저희들에게 힘과 슬기를 주시어 저희들이 빗나가지 말고 정도를 향해 쉬임없는 발전의 걸음을 결을 수 있도록 가르침을 주십시요.박사님, 슬픔이 앞서 더 말을 이을 수 없습니다.부디 평안히 눈을 감으십시요영결식을 마치고 유족들과 한성학원 산하 각급학교 임직원, 학생대표들의 오열속에 장의행렬은 교문을 나섰다. 제3한강교를 건너 충남공주군 단천면 견동리 유택을 향해 운구행렬은 경부고속도로를 말없이 질주해 가고 있었다. 운구행렬 차 속에서 필자는 지난 몇해 동안 우촌김의형 학장님을 모시고 학교 안팎에서 있었던 이모 저모의 일들이 눈앞에서 주마등 갇이 스쳐 지나감을 느꼈다.
II. 교육계에 끼친 큰 발자취돌이켜 보건대 1972년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4년제 대학 인기플 받게 된 본교의 셜렵은 우촌 김의형 박사님의 생전에 우리나라 교육계 및 체육계에 끼친 그 콩이 너무 컸기에 문교부로부터 대학인가를 받게 된 것이다.지난해로 개교 20돌을 맞이 했던 본교는 그간 설립자 김의행 초대 학장님과 이희순 2대 학장님의 순교자적인 희생정신의 결과로 명실상부한 명문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다.셜립자 우촌 김의형 박사님의 숭고한 본교 창엽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 한성대학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우리 교수 · 교직원 및 학생이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우촌 김의형 박사님이 우리한성가측에게 베푸신 거인( 巨A) 의 은덕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실감케 한다. 본교 설립 당시 민관식 문교부장관과 초대 문교장관을 역임하신 안호상 박사님이 개교에 콘 도움을 주신분들로서, 우촌 깅의형 박사닝 생전에 교육동지로서 우리나라 교육계 및 체육계 발전을 위해 고락을 함께한 어른들이시다.
한성여자대학이 설립되자 우리나라 석학들이 우촌 검의형 박사님에 대한 평소 존경은 본교 발전을 위한 조언들을 아끼지 않고 성원 협조해왔다.
필자가 당대 우리나라의 3대 석학이라고 일컬음을 받던 검두헌(金斗憲) 박사념께 30명 단위의 특강요청을 해도 한번도 거절함이 없이 응해 주셨던 것도 우촌 검의형 박사님이 일본 동경 유학시절 폭넓은 교육동지로 긴밀한 유대에서 기인된 것이었다.
김두헌 박사념은 서울대학교 총장 직무대리, 숙대 총장, 건대 대학원장 등으혹 봉직하면서 자신이 봉직한 학교에서도 좀체 특강에 응하지 아니하였던 분이다. 왜냐하면 특강은 그 반대급부로 강사료를 받게 되기 때문에 학자가 이러한 부수업을 전제로 한 특강을 가까이 한다면 자칫 학자로서의 본분을 잃기 쉽다고 특강을 기피하였던 고매한 성품의 교육자이셨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촌 김의형 학장님이 학장으후 계신 본교 교수의 특강요청을 거절하지 아니하셨던 것은 평소 우촌 낌의형 박사님이 우리 교육계에 끼친 그 영향이 얼마나 컸다는 가를 엿볼수 있었다.ill. 미락(味樂)의 서정(序情)학생과장으로 재직중인 1975년 10월 중순 어느날.
야간 여자대학생들 수엽이 끝나는 시간이 오후 10시 20분이었다.남달리 세심하고 꼼꼼하신 우촌 김의형 학장님은 평생의 교육동지요보필자인 융태영(尹泰永) 교수님과 펼자가 하루씩 교대로 여대생들이 모두 귀가를 확인한 후 학장님께 1 일 유선보고를 받으신 후에야 취칩을하시었다.10월 중순이라고는 하지만 그날 따라 제법 날씨가 쌀쌀하여 초겨울 날씨를 연상케 하였다.시계를 보니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이때 책상위에 전화 벨이 울렸다.“ 연군 오늘 일과는 다 끝났는가?"굵고 다정스러운 검학장념 특유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하여 들려왔다.우촌 김의형 박사님은 평소 자질배와 같은 연령의 남선생들에게 기분이 좋으실때면 군(君)이라고 즐겨 부르셨다.
학장님£로부터 전화를 받·은 필자가“예! 이제 오늘 일과가 거의 끝냐가고 있습니다”라고 답변을 드리자 곧 이어“나 학교 앞 미락(味樂)에 와 있는데 끝나는 즉시 아리와 와주게”하시며 대답을 드리기도 전에 수화기를 놓으셨다.너무 늦은 시간 날씨마저 차가워 빨리 귀가하고 싶었던 참이었다.미락(味樂)은 지금 벌써 없어진지가 10년이 더 념은, 당시 자그마하고 깨끗한 일식 음식점인데, 현 성북구청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었던 2층집 이-래층에 자리잡고 있었다.대충 책상을 정리하고 교문을 나와 10분쯤 걸어 미락에 도착, 문을 밀고 들어가니 주인 이·저씨가 학장님 계신 방으로 안내를 한다. 이 일식 음식점은 여자 종업원이 없는 것이 특색으로 음식점 규모는 비록 적으니-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어, 그 주인의 취향 뿐만 아니라 이용하는 고객들의 성품도 짐작케 한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근엄한 모습에 인자한 웃음을 지으시면서“오늘 날씨가 무척 차지, 내 그래서 따근한 정종 한컵을 니누고 싶어 불렀네”하신다. 그제서야 우촌 김학장님의 모습을 봐니, 간편한 잠바 스타일이셨다.지금과 달리 그 때만 하더라도 케쥬열한 옷이 유행되지 아니하던 시기요? 권위나 형식을 차라는 지도급 인사들은 가까운 콧에 외출하여도 넥타이를 맨 청장을 선호하던떼였다. 이같은 시기에 김의형 학장님의 형식보다 실질을 숭상히셨던 평소 검소한 생활을 의복차럼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옥고 음식이 상에 들어왔다.
학장님은 솔주전자를 들고 제잔에 먼저 술을 따라 주시려고 하신다.직장 상사요 자질배 같은 나어린 필자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학장님 제잔부터 먼저 받으세요”라고말씀드리니“내가 집에 드러 누워 책을 보다가 첫추위에 학교에서 밤늦게 수고하는 연군 생각이 나서, 이렇게 나왔는데 술잔의 순서는 이미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것일세!"하시며 크게 소리 내어 웃으신다.술잔을 받은 필지·는 노교육자의 인자한 마음의 손길을 느끼게 하였다. 여기 오기전 너무 늦은 시간, 날씨도 추워 빨리 귀가하고 싶었던 필자의 속좁은 생각이 한순간 부끄럽게 느껴졌다.상에 놓여 있는 음식은, 일식집에서 그 혼하게 보는 사시미(회)도 아니요? 간소한 두 서너 가지 바른 안주에 따근한 정종 주전자가 올라 앉아 있을 뿐이었다. 담배도 피우지 않고 평소 술도 별로 하지 않는 필자이지만 이날만은 술이 탱겼다.
주인 아저씨는 계속 마론 배추와 같은 멈 악F뜰을 지꾸 날라 왔다. 어느 사이에 상이 그득하게 채워졌다.사시미(회)와 같은 비싼 음식을 시키지도 아니하였는데 이렇게 덤안주를 기쁜 표정£로 상에 올려놓은 주인 아저씨의 푸근한 마음써 못지 아니하게 우촌 선생님에 대한 평소 존경의 념을 엿볼 수 있었다. 아직 철이 아니었기에 노란 고갱이의 이 날배추논 단골 손님에게만 특별서비스였다.우촌 김의형 박사념은 의복 뿐만 아니라 평소 식생활이 매우 검소하시어 일식 음식점에서 사시미(회)와 같은 고가의 안주를 드시는 경우가 별로 없으셨다.벽에 걸린 시계가 어느 사이에 11 시를 가리키코 있었다. 그 시절만하여도 통행금지시간이 었던 시절이라 김학장님은 계산을 하시고 주인아저씨의 인사를 받£시면서 음식점 밖으로 함께 나왔디;
학장님께서는 자가용 운전수의 노고를 생각하시어 돈암동댁에서 걸어 오셨다가 필자가 잡아 드린 택시를 타시고 댁으로 돌아가셨다. 그 때만 하여도 택시잡기가 쉬운 시절이었다. 필자도 택시를 하나 잡아타고 용답동 집에 돌아오니 시계가 5분전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다음날 윤태영 교수님께 간밤에 있었던 일을 말씀 드리니 윤교수님은“김학장님의 노소동락 하시는 그 풍모와 아랫 사람들의 노고를 속사정까지 이해하시고 보살펴 주시는 그 자상한 마음씨는 우리 사회에서 그분만한 분도 별로 흔치 않을 것이에요”라고 말씀하시며 온화한 미소를 띠신다.70년대 중반 이미 고인이 되신 윤태영 교수님은 김학장념 곁에서 반생을 보필하여 옴 교육동지이셨다. 펼자는 윤태영 교수념으로부터 생전에 성원과 가르침을 받았다.
생전 실없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던 윤태영 교수님은 체구는 깡마르셨지만 평소 건강관리를 잘하시어 잔병을 모르고 지내셨던 분이다.1974년 9월 우촌 김의형 박사념 고희 기념문집 「만년수」를 주관 집필 하셨던 윤교수닝께서 이 「만년수」 한 권을 필지·에게 주셨다. 그리고 우촌 김의형 학장님은 백수를 하실 것이라고 하시면서 학장님이 미수가 되시는 해, 우촌 김의형 박사님 기념문집을 새로 엮을 떼 함께 엮자고 업버릇처럼 말씀하셨는데, 우촌 선생념보다 앞서 다계를 하셨으니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N.2등을 싫어하신 우촌 선생님우촌 김의형 박사님은 평생을 통하여 남에게 지는 것을 무척 싫어하신 분이었다. 그것도 당당히 겨뤄 승리를 하여야지 변칙적 방법에 의한 승리는 제일 싫어하셨던 분이다.제자들이 운동경기를 비롯한 각종 행사에서 우승컵을 안고 학교로 돌아올 때 파안대소를 하시면서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었다.
필자가 한성대학에 첫발을 내디딘 1974년 그해 6 월 대통령배 쟁탈전국웅변대회에서 영문학과 1학년 서명애 양이 최우수상을 획득, 우승컵을 안고 학교에 돌아왔을 때 그 기뻐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이해 8월15 일 장충단 소재 국립극장에서 8.15광복절 기념식석상에서 북괴의 사주를 받은 조총련의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쏟 흉탄에 옆에 앉아 계셨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저격 시해당하였다. 전국각지에서 이같은 북괴 만행을 규탄하는 각종 궐기대회가 전국적으로 열렸으며, 그 행사의 일환으후 북괴 만행 규탄 전국남녀웅변대회가 열렸다. 펼자와 윤태영 교수님은 동대회에 앞서 우승한 경험이 있는 서명애 양을 출전시켜 무난한 입상을 꾀하려고 출전 준비를 할 때 김의형 학장님은 많은 제자들이l 게 고루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경영학과 1 학년 이정국 양의 출전을 명하셨다.
지도교수인 필자는 이정국 양에게 짧은 기간에 집중연수를 시키느라고 필자도 웅변반원인 아양도 집중연수로 모두 업이 부르렀다. 그러나 의외로 이정국 양이 동 웅변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당당히 대학일반부에서 1 위를 차지 우송컵을 챙겼다. 이에 김의형 학장님은 매우 기삐하시면서 “무엇이던지 노력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고 웅변반원을 격려해 주셨다. 마침 김의형 학장님의 일본 체육대학 후배이신 한병철(韓炳喆)교수님이 옆에 계시다가
“우리 김학장님은 누구에게나 지기 싫어 하시지만 떳떳하게 이기지 않는 것은 지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신다”고 말씀을 거드신다. 그리고 다음날 필자에게 사석에서 우촌 김의형 박사님의 일본유학시절 일인 학생들과 학습 빛 체육실기에서 당당하게 겨뤄, 일인 학생들의 식민지 조선 유학생에 대한 우월감에 쐐기를 박아 코를 납짝하게 만들고 일인 교수들을 놀라게 하였던 일화들을 들려주었다.V. 의리를 존중하였던 우촌 김의형 박사님
당시 한병철 교수님은 성대 체육과 원로교수로 계시면서 그의 학교 선배이신 우촌 선생님의 학교인 한성여대를 돕기 위해, 그와 그의 제자인 박순철(朴淳哲) 교수, 또한 박교수의 제자인 강인섭 교수등 교수삼대(三代)가 개교 초기에 본교에 출강 교양체육을 가르쳤던 것이다.강인섭 교수는 후일 우리나라 핸드볼이 올림팩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데 큰 기여를 한 체육지도자이다.이와 같이 김의형 학장님은 학교 후배들로부터 존경 과 아낌없는 지지를받은 분이시다.평소 김학장님은 후배들의 어려운 사정과 편의를 내일 같이 보살펴 주어 동문사회에서 소문이 냐 각종 어려운 일에 부닥쳤을 때마다 김학장님을 찾는 후배들의 발거름이 끊일새가 없었다.1976년 봄 어느날. 김의형 학장념£로부터 필자에게 한병철 교수님께서 「世界의 體育史」란 책을 엮게 되었는데 시간이 있으면 협조해드리라는 말씀이 계셔 국판 2백 87페이지의 이책의 편집 문액 · 교열을 도와드린 척도 있었다.
VI. 동심의 일면이 계셨던 노교육자 우촌 김의형 박사님우촌 김의형 박사님은 평소 근엄하시면서 때로는 동심어런 일면을 지니셨다.75학년도 2학기 10월초 쯤으로 기억된다.본교 경영학과에 출강하였던 당시 K대학교 상대학장인 S교수를 김의형 학장님께 출강인사를 드리려 학장실에 안내한 척이 있었다.필자의 소개로 김의형 학장념과 S교수는 반감게 통성명을 하고 악수를 나누었다. 그리고 계절과 관계된 인사말을 나누고 난 연후 필자와 함께 학장실을 나와 연구실로 돌아왔다.그런데 S교수는 얼굴을 쩡그리고 왼손£로 오른쪽 손을 연신 주물르면서
“연교수! 연세가 70세가 넘었다는 검학장념 손아귀 험이 왜 그렇게 세지”하고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이유인즉은 S교수는 당시 기골이 장대한 50대를 갓넘은 중년으로 매일 테니스로 단련된 보기 드은 건강을 가졌던 교수로서 악력이 그 누구 보다도 강하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이였다.그런데 김의형 학장님과 악수하는 순간 70노인의 손아귀 험이 보통이 아닌 것을 느끼고 장난기가 통한 S교수는 검학장님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가하자, 어느 사이에 검학장님도 손에 힘을 주었던 것이다.필자는 그런 내색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가 S교수가 필자의 방에 와서야 그 사실을 알고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였다.VII. 국가안보의 굳은 신념의 반공지도자
김의형 학장님은 평소 국가안보와 반공에 대한 신념이 투철하셨던 분이다.6.25 동란시 미 쳐 피난을 갈 사이도 없이 척도(;ffi都)가 된 수도 서울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붙들려 가서도 부역을 강요하는 그들에게 굽히지 않고“니는 평소 신봉하였던 민주주의를 버리고 공산주의를 따를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하였던 참대와 같은 곧곧한 기개를 가졌던 분이다.우촌 낌의형 박사님은 이제 그 목숨이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6.25동란 전에 학교 철망콩사를 하청하여 작업을 한 이로서 우촌 선생님이 그의 딱한 사정을 구해준 적이 있었는데, 이자가 공산당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었다. 이자가 선생님을 알아보고 구해드려 구사일생으로 서울 수복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이같은 적 치하에서도 확고한 반공 신념을 가졌던 우촌 검의형 박사님이시기에 본교는 다른 대학들에 앞서 안보서클인 안보문제연구회를 조직토록 필자에게 명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에 반공활동의 일환으로 한국반공연맹의 권장사항인 반공웅변반을 조직토록 손수 지시한것도 김의형 학장님이시다.필자는 이같은 확고한 안보관을 학생지도에 반영시켜야 하겠다는 신념과 노력이 후일 필자로 하여금 전국 1307n 대학으로 구성된 한국반공연맹 산하 전국대학반공서클 총책임지도교수를 맡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재학시 안보서클 학생회장이었던 무역학과 출신 김양태 군이 졸업후 아시아반공청년회 부회장에 선출된 것도 돌이켜 보건대 김의형 학장님의 철두철미한 안보관의 소산이 아닐 수 없다.人生은 有限하고 因緣은 永돼
송대빈(한성여자중학교)A生은 有限하고 困綠은 永돼을 잇는 한 부분이리는 말이 있거니와 짧은 생애에 어떤 샤람들과 연분을 맺고 정을 니누며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한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참£로 뜻깊고 重몇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友村金義微博-士님과 내가 인연을 맺은 것은 1 966년 3월부터이니 1982년 타계하시기까지 16년 간의 긴 세월의 交分이 있었다. 재능은 짧고 지혜가 얄은 내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직생활을 해올 수 있는 것은 우촌 선생님의 부단한 격려와 惠뼈가 맡거름이 되었음은 과언이 아니다.
사실 나는 교육을 잘 모르는 일반 대학 출신이었다. 그러다가 육영의 聖域에 서서 교육인으로서의 얼굴을 보전하는데 참된 교육자의 본보기가 필요했으니 바로 그 첫 거울이 友村先生님이셨다. 솔직이 술회하거니와 우촌 선생님의 언행을 표본£로 삼지 않았다면 중도에 선택한 교직생활에 더욱 갈등과 흔들렴이 많았을 것이고 아니면7 자칫 안이한 채로 교직을 가볍고 쉽게 생각하며 편하게 지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결괴는 어떠했을까? 나는 지금도 가끔은 인생을 속이면서 산다는 自責感을 갖거니와 아마도 자라나는 수많은 새싹들에게 더욱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으면서 지내왔을지도 모른다. 그 간의 교직생활에서 어려운 일이나 감사할 일이 있을 때마다 늘 선생님의 의로운 마음을 떠올리며 마음을 단속해 갔으니, 탄탄한 버팀대로 격려해준 선생님은 내게 나사못을 조이듯 교육자로서의 길을 바르게 지켜 주셨다.
내가 처음 友村先生님을 만났을 때, 처음 웹기에도 先生님은 인자하시면서도 엄격한 인품을 느낄 수 있었고 신념에 찬 듯 말씀하시는 모습이, 강인한 성품에 큰 뭇을 품고 있는 교육자로 확신할 수 있었다.사람은 限界가 있고, 생훨- 속에서 피곤을 느낄 때 쉬고 싶기도 하며, 둘러싸고 있는 규범으로부터 벗어나 자기의 안일 속에 빠져들고 싶어지는 것이 평범한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 벙주를 벗어난 강인한 의지의 모습을 보여 주셨으니 그 분의 위대한 기상이 지금도 나를 검-동시키고 있다.선생념께서는 어떤 일에건 적당히 넘어가는 일은 결코 없으셨다. 교사를 채용하실 떼도 면접은 물론 직업 수업을 시켜 보아 사람 됨됨이를 파악해 보시며 실력을 중점적으로 평가하셨다. 그 어떤 때, 수업 t않t를 받던 교시· 응시지카· 교장 선생님(당시 友村先깅5 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수업을 중단했다가 교장 선생님이 다시 오신 후에 수업을 계속하였는데 그 선생님은 채용되지 않았다. 이유인즉 교장이 있고 없음을 따져 일을 가리니, 교장이 없으면 일을 하지 않으며 능히 잔 꾀를 쓰는 사람일 것이라고 채용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友村先生님은 세밀히 사람을 살펴보시며 사람됨을 중히 여기셨다. 그 때문인지 한성 학원에 와서 여러 선생님들과 생활하여 보니 공립학교애 근무할 때보다도 오히려 우수한 교시들이 훨씬 많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우촌 선생님은 학교에 공사가 시작되기 전에 공사 자재를 점검하시느라 서무실 이나 교장실에 시멘트, 벽돌, 기다 건축 자재물을 쌓아 놓고 일얼이 확인하신 후에 결제를 헤 주셨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시는 정확하고 치밀한 성품이신 것이다.
교육은 사람이 사람을 상대로 그 시대가 필요로 히는 사람다운 사람을 길러내는 워대한 및業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장자는 ‘子雖짧이니- 不敎면 不明이라’하였듯이 사람이 비록 어질게 태어났다 할지라도 敎育하지 않으면 寶明하지 못하다함은 古今의 진리이다. 그런데 이렇게 위대한 聖業인 교육을 누가 담당하느냐가 問題일 것 같다.
知· 德· 體를 완전히 갖춘 인간을 걸러내어 자신과 사회와 국가 나아가서는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 우리의 교육목표일진대 全A敎育을 통해서 어느 시대나 어느 사회에서도 적응할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일이 교육의 과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은 저마다 개성이 다르교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회에 척응하며 조화할 수 있는 사람을 교육해 내는 작업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통해보면 위대한 스승은 위대한 제자를 배출했으며 스승보다도 더 훌륭한 언제를 길러 냈음은 만인이 두루 아는 바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해 볼 때 오늘날 敎빨에선 교사들은 莫重한 소엄을 맡은 저 무인도의 燈臺지기와도 같고 때로는 십자기를 젊어져야 할 聖者와도 같은 苦行의 길을 걷는 자라야 할 것 같다. 진정 이러한 모습의 교육자를 꼽을 때 나는 말할 것도 없이 友村先生님을 첫 손가락에 올릴 것이다. 진정코 우촌 선생님은 가히 교육을 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신 분이고, 교육의 사표로 모실만 하다.友村先生님께서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여성교육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아마도 사회발전 나아가서 국가의 발전이 모두 기정의 평화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이 가정의 평화플 이룩하기 위해서는 가정주부 즉 여성의 험이 중요한 것이니, 이웃과 사회 그리고 국가가 잘되기 위하여 좋은 여성 즉 좋은 어머니를 배출해야 한다는 돗에서 각별 여성교육을 주장하신 것 같다. 그래서 여성교육은 애국애족할 수 있는 기틀이라고까지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여성다운 여성을 길러내기 위한 지도로 ‘꽃 기르기’와 ‘노래하기’ 그리고 ‘우정을 중히 여기는 사람’을 길러 보자 하셨으니 이는 근본적으로 아릉다운 풍성에 따뭇한 정을 지닐 줄 아는 여성우로 이끌기 위한 배려였었던 것이다. 언제나 꽃을 사랑하며 가꾸는 사람은 악인이 없고, 그래서 꽃을 대하다 보면 아름다운 여성, 적어도 이름다움을 아는 여성이 될 수 있으며, 이런 성품이 그대로 가정으로 사회로 연결되어 아름다운 사회가 이룩되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학생들이나 교직원들을 깨우쳐 주시곤 하셨다.
음악(노래)지도를 위해서는 매년 10월에 ‘교내 합창대회’를 실시하여 학생들이 의욕적으로 노래하도록 권장하며 학생과 교사가 活氣를 갖고 그 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매우 짧柳的인 지원을 해 주셨으니 지금도 몇 선생님들은 그 당시를 회고하며 이-름다운 추억에 장기기도 한다. 특별히 음악을 즐기도록 배려하심은 여학생의 고운 情總i힘5좁은 물론이고 건전한 노래로 건전한 국민 정신을 배양할 수 있음을 강조하셨던 거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또한 友村先生넙께서는 여성을 위한 i필f펀 킹k育 특히 趙값 敎育에 대한 집념이 강하셨마도덕이란 “ 당게 살려고 하는 RJ표껴며 또는 “ 답게 살려고 노력히는 과정이며 행동”으로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처지에 따라 즉 가정인으로, 사회언으로 그리고 국민으로서, 한 발자욱 더 나가 국제인으로 “ 맙게 사는 길”이니 부모를 존경하고 자녀를 사랑하는 예의가 도덕의 기를임을 강조히시며 교육에 역점을 두셨다.그 당시, 서울에서는 드물게, 교내에 잘 갖추어진 생활관을 지어놓고예절 담당 교사를 따로 두어 생활관 실습을 지도했다. 처음에는 일 주일씩 그 후엔 여건상으로 2박3 일의 과정으로 예의범절을 지도하였으니, 반상 차리기, 전통 절하기, 제물 차리기, 제사의 절차 기타 가정예법등 다양하게 교육을 시켰고 그결과 出家하여 시집살이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졸업생들의 회고담을 지금도 가끔 듣기도 한다.
友村先生념은 교직원들의 복장에 대해서도 참으로 엄격하셨다. 항상 정장이어야 하고, 더운 여름철에도 간소복을 입는 기준을 정해 주셔서 아무렇게나 멋대로 양복 저고리를 벗고 수업에 임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는 교내에서 작업을 하는 인부들도 소매없는 런닝셔츠를 업을 수 없었다. 생각하면 당연한 가르치심이었고 그런 선생님의 품에서 생활 습관을 길들인 덕택으로 아직까지 버릇없고 경망스러운 사람이라는 흉은 잡히지 않고 교직 생활을 할 수 있는 것 같다.友村先生님께서 힘을 기울이신 것 중 體育敎育을 빼 놓을 수 없으니 “체력은 국력이다”라는 신조와 함께 건강교육을 철저히 실시하였다. 매일같이 운동장에서 전체 조회를 실시하여 훈화 및 각종 표창과시상 그리고 국민체조로 체력을 단련시켰다. 비가 오는 날과 겨울에 섭씨 영하 6도 이하로 기온이 내려가는 날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었으니 너무 엄격하신 지도에 반발을 가진 학생들이나 교사도 많았무나 그 분의 꿋꿋한 의지앞에 모두 說得되고 말았다. 그 순간 은 고생스러웠으나 체력이 단련된 것 만큼은 사실이엇다. 더운 여름운동장 조회시 1 학년 신업생들은 몇 명씩 쓰러지는 학생이 있었으나 2.3학년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또한 체육 교육으후 매우 자랑스러운 일이 있었으니, 그것은 1971 년에 수목이 우거진 학교 구내의 낙산 기숨에 한국 최초로 국제 규격의 학교수영장을 시설하신 일이다. 이는 우리나라 私學의 자랑거리로 학생들에게 큰 지부심을 심어 주게 되었다.
설치된 수영장에서는 전교생의 수영지도는 물론 서울 시내 여러 학교에서 단체로 수영훈련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주셨으니 타교 학생들까지도 주도면밀하게 건강교육을 이끌어 주셨다. 友村1先生님께서 사랑과 헌신으로 백년대계 교육을 위해 뿌리셨던 그 발자취를 회고해 보니 새삼 그리움이 절절해져 온다.
더듬어 추억하니 많은 일들이 주마등 갇이 스쳐 지나고 있고 그 중 몇 이야기를 해 보고 싶다.
내가 본교에 奉U없하기 시작한 1966년에 세계문화기구인 유네스코의 敎育部門中의 “ 이치파(lCHPER) 대회”가 7월 28 일부터 8월 2 일까지 개최되였다.8월 1 일에 세계 각국의 대표 300여명을 우리 학교에 초청하시어 밴드부 학생들의 연주와 정교생의 고전무용을 관람하게 하시고 대강당에서 초청 만찬회를 성대히 베풀어 주셨다. 이 대회를 주관하시는 友村充生님의 일사불란한 준비계획과 지시하시는 기량을 보고 나는 매우 감탄했였다. 사실 그 해 3월에 첫부임하여 선생닝을 가까이 보필한 첫 일이었t:l. 대회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어 냐에게 부여된 일은 강당의 만찬회 장소 환경 꾸미기였다. 先生님게서는 손님 맞이용으로 일시적인 눈요기보디는 우리나라를 드러내는 교육적 내용의 차원에서전시회장을 꾸밀 것울 당부하셨다. 몇 차례의 협의 끝에 신사임당 초상화와 미술작품, 충신, 위인의 초상화 그리고 서예 작품 등으로 환경을 장식하기로 결정하였다. 友村先生님께서는 그 중에도 신사엄당 초상에 대한 考證에 각별한 신경을 쓰셨으니 아미-도 사임당을 여성 교육을 위한 사표로 생각하신 이유 때문이었으리라. 실물에 가까운 초상화를 考證하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여러 콧의 화랑을 찾아다니며 자문을 구했고 유명 학자를 찾아 다니며 考證을 받았으나, 정확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어려움 속에 초상화를 만들어 대형으로 제작하여 강당에 게시하였으니 지금도 한성대학 강당에 걸려 있다.
또한 그 행사에서 통역을 담당할 사람을 본교 영어 선생념으로 지명하시어 활동하도록 조치하셨다. 그만큼 본교 선생님들을 사랑하시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신 것이다.1960년대 말과 1970년대에 한성여자중고등학교의 자랑거리인 카드섹손이 생각난다. 1968년부터 시작된 ‘전국 체육 대회’, 10월 1 일의 ‘국군의 날’ 기념행사 떼에 카드 색손을 우리 학교가 모두 맡아 한 일이 있었다. 햇빛이 따가운 ‘전국 체육 대회’떼나 10월 1 일의 새벽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국군의날’ 행사시에는 여의도 광장에 새벽 7시까지 도착해야 했음) 선두에서 교직원과 학생들을 격려하시던 모습이 눈에 생생하다. 오랜 연습이 필요한 이런 행사에도 수업 결손을 염려하시어 약 2주일 동얀을 이용하여 정규수업을 다 끝마치고 방괴후에 2시간 정도씩 연습을 하는 일정이었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모르는 외부에서는 수업을 全閒하고 몇 개월을 연습하는 줄 알고 있어 수업 결손이 없다는 것을 PR하기도 하였다. 카드색손 참가후 전국민이 우리 한성여자중고등학교를 재인식하게 되었고, 특히 대통령 단체표창을 수여받은 것은 영원한 기념이 되는 것이며 永久한 영광이었다. 이 모든 것이 友村先生님의 열의에 찬 통솔의 결실이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이렇듯이 학교를 활기차게 잘 이끌어 운영하시면서도 픔을 주지 않고 교사들의 연구에도 자극을 주시며 연찬 분위기로 이끌어 주셨다.교사는 실력이 있어 수업을 잘 해야 한다. 언제든지 자기 저곳과목
에 대해서는 권위가 있어야 하고, 수학교사는 “이 학교는 수학학교 음악교사는 “이 학교는 음악학교”라고 생각하고 학생들을 지도해야 된다고 강조하셨다.
여러 과목의 鼎究授業을 실시하여 전직원이 모인 평가회에서 각 교과 전원의 의견을 종합하여 과주임이 발표하게 하여 좀 더 니은 수엽연구가 이루어지도록 수업 반성회를 갖게 했으며, 언제나 꾸준히 공부하고 연구하는 氣風을 조성하도록 지도하여 주셨다.그 떼가 1972年度쯤으후 기억된다. 교장실에서 학생들의 실력향상과 대업시 성적 향상을 위한 방안에 대하여 협의한 일이 있었다. 그 당시 고등학교 본관의 각 교실에는 조명시설이 되어 있지 않았다. 그 때 여러 방안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수업량을 늘리는 방안의 하나로 각교실에 조명 시설을 해주실 것을 감히 건의했었다. 저녁 보충 수업을 한 시간 더 늘리고? 희망자에 한하여 야간 자율 학습을 실시허기 위해 서라고 말씀드렸다. 애당초 본관 건축을 할 때 누전 등 기타 전기사고를 염려하시어 본관에 조명시설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때문에 나로선 용기를 내서 건의 말씀을 드린 것이다. 그러나 묵살될 줄 알았던 의견이 의외로 즉석에서 공사애 착수하도록 지시해 주셨다. 선생님께서는 작은 利를 위하여 위선을 가장하는 그런 옹졸한 분이 아니셨고, 용단이 필요할 때는 서슴없이 행동하시는 큰 그릇이셨다. 그 결과 교직원과 학생들의 사기가 높아져 매 년 대입 성적이 향상되었다. 이 모든 것이 학생들을 위한 교육적인 뜻에서 비롯된 것이니 거듭 교육자로서의 높은 기품에 머리가 숙여질 뿐이다.
실로 友村先生님은 오로지 교육을 위한 일념으로 살아오신 교육의 화신이시니 선생님은 개인이나 가정보다는 학교 발전을 제일 먼저 생각하셨고, 그야말로 오늘의 i쫓城 學園으로 이룩된 결실은 교육자로서 正道를 지키시며 평생을 살아요신 선생님의 피땀어린 노고라 생각되어 학교 발전에 책업을 맡은 사람으로서 새삼 숙연한 미음으로 부끄러움이 앞선다.몇 차례 友村先生님의 댁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 때마다 근검절약하는 모습에 사치라고는 터럭 끝만큼도 없는 너무나 소빅한 모습이였다고 생각된다. 자택은 돈암동 아리랑 고갯길에 위치한 오래된 건물에다가 바로 도로변무로 자동차 소음과 공기가 좋지 않은 콧에서 평생을 지내셨던 것으로 안다. 웬만한 사람이면 좋은 집, 쾌적한 환경에 기거하기를 욕심내건만, 일신의 펀안함도 모두 버리시고 오로지 교육하는 일에만 헌신하셨던 교육에의 높은 기상을 잊을 수 없다.
색다른 물건이나 좋은 게 있£시면 모두 학교로 가지고 오셔서 학생들의 교재용으로 활용토록 하셨으니, 어디에서나 무슨 얼에서나 일심 교육자라는 생각으로 외길을 살아가신 선생님은 교육을 위해 태어나신 분임에 틀렴없다.요즈음, 일부 ‘받은 만큼 일하겠다’는 식의 타산적이고 이기적인 교사들과 무사안일에 빠져 나태하기만 한 교사들에게 위대한 스승의 모법을 우촌 선생념으로 깨우쳐 주고 싶다.友村先生님은 남다른 소신으로 학생들의 교육 과정에도 인상적이고 특별한 내용이 있었으니 한성의 모든 졸업생(友村 先生님께서 교장 선생님으로 계셨던 시절)과 옛 교직원들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몇가지의 추억이 었다. 학교에 소동물원을 만들어 주셨던 일. 거기에는 자매부대에서 기증한 오소리, 너구리, 다람쥐 등에다 공작,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새들과 집에서 기르기 쉬운 동물들이 있어서 학생들에게 홍미를 그리고 관찰력을 키워주신 것이다.
또 봄에는 교내에 못자리를 만들어 벼가 자라서 쌀로 생산되는 과정을 눈으후 보게하는 산교육을 실시 하셨던 일, 더우기 전농동 소재 서울 시립 농대의 농장에 한 학년씩 모심기 실습을 시키신 일, 이런 것들은 다른 학교에서는 감히 엄두도 못낼 교육내용이었다. 시럽 농대가 종합대학으로 변경되어 놓장이 없어진 1970년대 후반까지 모심기 교육은 계속되었으니 그 뜻을 지니셨던 교장 선생님을 자랑스러워하는 졸업생들이 많이 있었다.그토록 열정을 바치시던 교육사업이였고 희생으로 돌보시던 한성 학원이었건만 다른 사학보다도 일찍 중 · 고등학교를 분리하여 후계자를 양성하고자 하셨A니 얼어셜 때와 불러설 때를 가렬 줄 아는 위대한 지도자이셨다
일선 학교 경영에서 물러나신 후 건강 상태가 점점 약화되실 무렵 적당한 운동으로 골프를 권해 드려 보았다. 그 때에도
“아, 이 사람애 무슨 돈으로 골프를 치나, 그럴 돈 있무면 학교 경영하는데 써야지"이 말씀을 듣고 냐는 드릴 말씀을 찾지 못했다. 오직 학교 발전에만 몰두하시는 그 뜻을 잠시 잊고 조심성 없는 말씀을 드렸었으니,웬지 이 순간에도 민망함이 생기며 우리 후진들이 그 분 몫을 얼마나 실천에 옮기고 있는건지 反省하는 마음을 가져 본다.장엄한 의기로 교육에 평생을 바치신 선생님이 떠나신 지 10년, 그분의 큰 뜻은 지금도 한성 학원 구석구석 향기로운 숨결로 살아남아 우리 결에 머물고 있음을 느낀다.友村先生님과의 시절을 추억하매 감회가 새로워지고 교문을 들어서시며 학원 구내를 정겹게 여기저기 살피시며 걸어오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마지막으로,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며 교육자에 대한 가르치심을 주셨던- 내용을 이야기해 보겠다.敎師는 기본척으로 A間本性을 구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항시 풍부한 인간적 敎養이 있어야 한다. 또한 이교양을 밑바탕으로 확고한 A↑生觀을 수립하여, 이에서 우러나온 굳은 신념을 통한 권위있는 지도자척 성격을 구비하여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교육정신을 체득하여 확고한 교육관을 세우고 이를 토대로 이상을 실현해 내는 정열의 젊음을 잃지 말고 건전하고 적극적인 태도로 써 고원한 교육이상과 현실올 조화하여 영광된 내일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어디까지나 겨레와 조국을 사랑하는 국민의 대표자로서 국가사회와 인류사회에 크게 공헌할 수 있는 실천력을 구비한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로, 이것은 나의 교육 철학에 그대로 영향을 주었다.
의지와 사랑과 헌신으로 국가의 먼 앞 날을 위하여 백년대계를 세우셨던 반석같은 단단한 버팀돌.
友村先生님께서 뿌리시고 싹을 트여 가꾸시던 우리나라의 여성교육이며 체육교육은 한성학원과 함께 길이길이 영원한 보람과 영광으로 번영하리라.선생님께서 낙산 언덕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신 지 반 세기의 시간이 흘렀고, 이제 선생님의 10주기를 맞아 그 生進와 追폈의 글을 발간하는 지면에 해愚를 무릅쓰고, 그 시절 그 때의 友村先生님을 추모하는 한 조각의 글을 草하자니 선생님의 거룩한 교육관에 얼룩진 흔적이나 남기지 않았을까하는 송구함이 앞선다.이제 애풋한 마음으로 추모의 글을 맺으며, 상가 영전에 향불을 밝히며 머리를 크게 숙인다.신의가 있는 사람은 승리한다
김희소(한성여자중학교 교사)확고한 신녕의 스승님내가 선생님을 처음 펀 것은, ‘북부잔류 학생훈육소’에 입학하면서였다.
선생님은, 6.25사변 중 휴전협정이 맺어지기도 전에 흩어진 여러학교 학생을을 불러 모아 폐허가 된 서울에서, ‘북부잔류 학생훈육소’의 문을 열어 중등교육을 실시하셨던 것이다. 그때 봐었던 우촌 선생님의 확신에 넘치는 의연한 스승상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의 어려운 상황은, 태반이 넘는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교육에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어서, 모여든 남녀 학생들은, 학척을 둔 본교가 제각기인데다, 전란 중에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직업 전선에서 종사했던 경력이 있는 학생이 많아서 선생님들의 고충이 크셨다. 그 뒤에 정부가 수복되면서 학교들도 하나 둘 개교를 하게 되고, 한성여중고에 남아있기를 원하는 학생과 본교생을 제외한 모든 학생들이 자신의 학교로갔다.한 사람의 삶의 행로는 그의 감수성 많은 시절의 성장과정에서 받은 영향력으로 대부분 결정지워지는 경향이 많다. 한쪽 주먹으로 전혼의 상처(폐허가 된 국토 • 배고픔 • 가족분산과 사별 · 전쟁고아들의 방황과아사 퉁)들 국 놓러잡고 재기의 길을 향해 암당한 몸부렴을 쳤던 그 시절에, 우촌 선생님께선 민족의 비극을 번영으로 전환하는 길은, 오로지 청소년 교육을 통한 힘의 배양에 있음을 역설하면서 우리를 격려하시고 진정한 삶의 길로 인도해 주셨다. 당시 우국의 충청을 가진 언사들이 많았지만, 선생님처럼 진정한 민족구원의 길을 실천하신 이는 드물었다. 그때의 학교실황은 전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모든 책걸상이나 비품은 피 • 아간의 군언이 차례로 댈감으로 이용했고, 다-음엔 언근 주민들이 모두 거두어다가 。l용했다는 이야기였으니, 남은 건 건물의 외곽뿐이었다. 이러했음에도, 우촌 선생님의 깊은 사랑과 투철하신 지도력은 우리를 감동시켜, 마루바닥에나마 앉아서 공부할 수 있는 것에 깊이 감사하며 착실한 배움의 길을 결어가게 했었다. 말할 수 없이 어려웠던 시절에, 엄격한 사랑으로 우리를 훌륭히 키워주신 선생님을 회상하니, 부드렵게 웃음지으신 모습이 바로 내 앞에 다가오는 듯하여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누룰 길이 없다. 선생님은 가고 아니 계시지만, 우리 마음에 새겨주신 말씀
들은 오늘날까지 나의 좌우명이 되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선생님의 가르침을 생각하고 분연히 떨쳐버렸던 척이 여러번이었다. ‘용기를 내어라. 그리고 지혜를 짜내야지.’ 선생님의 말씀을 윗가에 느끼며, 앞으로도 냐는 나의 좌우명을 따라서 열심히 살아갈 것을 다짐하면서 엄격하셨지만 가장 인간미가 념쳤던 우촌 선생님을 회상해 보련다.
신의가 있는 사람은 승리한다선생님은 신의를 생명으로 삼고 살으신 분이셨다.‘우리 민족의 홍망이 경각에 달려있는 현실이지만, 신의와 성실을 존중하고 실천하는 청년들이 장성해가고 있a니, 우리나라는 가히 새아침의 나라라고 일컬을 만하다’고 격려하시곤 했었다. 거르는 법이 없었던 아침 조회시간에는, 언제나 신의를 소중히 알고 실천해 온 우리 겨례의 전통이 우리들 핏속에 살아있는 한 이 나라는 머지않아 도약의 기쁨을 누리리란 것을 확신한다는 요지의 간곡한 훈화 내용이 우리 마음에 전달되어 옴을 느낄 수 있었고, 이어서 온 운동장은, 폐허를 딛고 반드시 얼어서고야 말겠다는 의연한 결의의 빛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그떼 나는 생각했었다. ‘사람은 바른 길을 찾아서 열심히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임을. 거짓되고 비똘어진 삶은 자신을 파멸시키고 이 사회를 오염시키는 병균과 같은 것이 아닐까. 신의와 성실로 다져진 젊은이들을 육성해 내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하신 선생님의 말씀이 차곡차곡 쌓여서, 오늘의 운동창이 다져졌고 학교 건물들이 차례로 즐비하게 들어 서서 그 소임을 다하고 있으니, 불의와 타협하는 버리의 젊은이가 한성학원에서는 결코 한명도 자라지 않으리라는 것을 니는 확신한다.감사할줄 알아야지둘째로, 우촌 선생님게서는, 근검 · 절약하는 정신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서 바로 설 수 없는 사람임을 타일러 주셨고, ‘쌀 한툴의 소중함을모르고 농부의 땅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밥먹을 자격이 없다’고 엄격하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뜻이 어찌 쌀 한롤에 그치겠는가. 부모님과 선생님 은혜에 감사하며, 니흘 참되고 건강한 사람이 되게 이끌어주는 내 주변의 모든 이와 모든 것에 감사하고 보답할 줄 아는 ‘삶’을 뜻함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선생님께서는 인생은 노력 그 자체라는 것을 몸소 실천으로 우리를 일깨워주신 분이다. 선생님이 이루신 어느 한가지에도 자성-하게 어루만지는 정성이 배이지 않은 것은 없었무니 교정에 있는 앵두 · 살구 · 자두 · 복숭아 · 감나무에 아침 일찍 나오셔서 쏟으신 정성이며, 화단에 심은 화초와 정원수, 돌조각 하냐에 이르기까지 손으로 매만지며 신경을 쓰셨다. 교정에서 가꾼 과일을 매년 전교생에게 나누어 주곤 하셨는데, 한개 과일에 담긴 고언이 되신 선생님의 깊은 뜻을 40년이 지난지금까지도 모임에서 만난 동창들은 서로 주고 받는다.
“그때 그 과일(앵두 · 살구 · 복숭아 · 지두 등)이 어디 단순한 과일이었니?" “그때 그것은 교장 선생님의 정성이었지"
서로의 소식을 주고 받은 후애는, 언제나 깊은 인간애가 넙치고 부지런하셨던 우리들의 교장 선생님을 희성하며 그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변하곤 한다. 또 선생님은 매일 학교에 제일 먼저 나오셔서는 학교의 구석구석을 두루 살펴시고 바로잡고 하셨다. 이일 저일을 돌이켜보면 볼수록, 냐는 선생님과 한성학원을 별개체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사람 중에는 그릇된 길을 가는 일이 적지 않아서, 불로소득의 기회를 잡으려고 안간힘을 쓴다든자 조금 여유가 있다고 함부로 소비하고 아직 이용할 수 있는 것을 마구 버리는 일이 흔하다. 이러한 사태는 머지않아 그 개인을 불행괴- 가난무로 이르게 하고, 사회적으로는 경제발전에 역행하는 행위임을 깨닫게 해주셨던 것이다. 우리는 양말을 기워서 신고, 해진 교복을 재주껏 기워서 입는 것을 배웠다. 선생님의 업으신 양복이나 넥타이 구두에서도, 우리에게 주시는 근검 · 절약의 교훈을 판소 실천하시는 모범을 보여주셨다. ‘적은 것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큰일을 해낼 수 없다’고 하셨던 우촌 선생님께선 신관 신축을 서두로, 뒤이은 크고 작은 교사 증축 공사와 대학 설립을 이루시기까지, 꾸준하고도 피나는 노력의 나날을 살으셨다. 오로지 후세 교육에 헌신하신 우촌 선생님의 외길인생에 최대의 존경을 표할 뿐이다.
강한 사람이란?세번째로 주셨던 말씀은, ‘의지력을 길러라. 목표점까지 쓰러져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선생념께서는, 아침 훈화시간에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킷든다’는 말씀을 자주 해 주셨다. 우리는 중 · 고시절에 아침 조화와 아침체조를 거른 적 이 없었으며 모두가 심신의 상쾌한 상태를 유지했었고, ‘스트레스 ..... . ’의 말은 생각조차 해 본 일이 없이 밝은 학창생활을 했였다. 또 선생념은 우리 모두에게 굳은 의지로, 학교에 서 배운 지식을 일상생활에 꾸준히 활용하라고 하셨고, 각자의 꿈을 향해서 힘차게 끝까지 달려갈 수 있도록 단련해 주셨던 것이다.
선생님께서 한평생을 바쳐서 이루어 놓으신 업적은 바로 선생님의 갈망하였던 목적 그것이었고 의지력의 실현이었다고 생각한다. 요로지 한길 후진교육에 헌신할 수 있으셨던 것은, 뜨거운 애국심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당시 우리는 마음속 깊이 느끼고 따랐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한성학원 설립자로 걸어오신 길엔 어려움도 많았으련만 목적을 향한 불굴의 정신 앞에서, 차례로 무너지는 장애물을 바라보며 선생님은 아마도 생각하셨으리라. ‘내 사전에서 불가능을 지워버리자’라고.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실태를 돌아다보면, ‘가능’을 ‘불가능’£로 오히려 역전시키며 애를 태우는 사례들이 많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 보통 인간들의 숙명일 것이다. 한마디로 인생은 시행착오의 연속이며, 이길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 일반적이라 하겠지만, 선생님의 시종일관하신 불굴의 청신은, ‘불가능’을 차례로 지우시며, 교육자의 길에서, 사랑하셨던 염원의 이 땅에 건강하고 실한 열매를 맺고자 정성을 다하셨£니, 그 ‘삶’은 실로 우리나라 현대교육의 큰 의지요 자랑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칭찬으로 용기를 북돋아 주신 스승님우리를 이끌어 주셨던 네번째의 말씀은, ‘용기가 없고 지혜를 짜내지 않는 샤람들, 쉬운 일도 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내가 중고시절 당시에는 끼니를 봇잇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 중에는 구호미를 받으러 번지루를 들고 갈 수는 있아도, 팽이와 십·을 들 용기가 없는 사람이 적지 않았으니, 어느 쪽이 제대로 체면을 세우는 일인지를 판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하겠다. 언제나 선생님께서는, 용기있는 학생, 선행을 행한 학생, 학업과 예 · 체능에 뛰어나거나, 꾸준하게 노력하는 학생애게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여러 친구들 앞에서 교창 선생님£로부터 칭찬의 포상을 받는 주인공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며, “아-나도 할 수 있는 일이야 나도 칭찬받을 일을 히l 야지”하며 좋은 일을 찾아서 하는 계기와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하셨다.
어느날 한 학생이 한국 지형의 연못(지금의 학생관 터에 있었다)에 샤는 영어에게 밥을 주고 있였다. 마침 근방을 둘러보시던 선생님께서 이 광경을 보시고, 아침 훈화시간에 그 학생에게 감사와 청찬의 말씀을 해주셨던 일도 있었다. 선생념은 평소에 생명체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시어, 그 서식환경을 마련해주고 먹이를 해결해 주는 등 마음써주는 것을 우리는 여러번 보았었다. 당시 한국지형의 연못에는 30센티 넘는 영어가 대가족 사회를 이루어서 보기에도 화려하고 여유로왔다. 이외에도 소규모의 동물원을 교정 한구석에 만들어, 학생들에게 동물애호의 정신을 걸러주셨고1 집비둘기를 돌보아 주셨는데, (당시 서울에는 집비둘기가 귀했었다) 삼학송 북쪽 음악실 앞에 비둘기 아파트(당시 우리들은 그렇기 불렀다)를 지어주신 자연보호의 선구자。171도하셨다.
엄격하실 떼의 선생님을 법고 간 사람에겐, 풀 한포기도 곱게 어루만져 아끼시는 섬세함이 있£시다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해서 우리의 선생님은, 전란우로 황폐화한 청소년의 가슴에 생명의 존엄성을 일깨워 주셨고, 훈훈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 가장 지혜롭고 위대한 스송님이셨다. 돌이켜 보면, 그때의 학습환경은 요새 학생으로는 상상이 안 갈 정도였다. 사람의 천성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더욱 강해지는 경향이 있는 것같다. 우리는 어려움을 딛고 얼어나는 길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 뿐이라 여기고 착실하게 공부했었다. 모든 지혜의 뿌리는 지식이었으니까.
가장 엄하실 때끝무로 우리에게 매양 타일러주셨던 간독한 말씀은, ‘이무리 재주가 뛰어나도 책임감이 없으면 쓸모가 없는 사람이다’라고 하셨다.선생님께서는, 자신의 책업을 다하지 못할 때 가장 엄한 책망을 하셨다.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는, 제각기의 처지에 따라 해야할 일과 거기 따른 책임이 있는 것이며, 이로써 인간사회는 질서를 유지하며 운영이 된다고 할 것이다.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사회구성원은 그들의바라는 바 안정과 부를 축적하며 여유를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미래의 우수한 동량으로서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던 우리들은, 기대에 맞는 착실한 학생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기에 태만해서는 안되었다. 모든 학과 공부에 부지런하여, 학습 부진이나 누적이 안생기도록 애를썼고? 필요한 학습정보를 서로 나누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교육이념은 지식의 축척보다는, 옳고 그름을 제대로 분멸하며,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이웃을 존중하며 신의를 지키고 함께 협력하며 살아갈 줄 아는 민주시민의 정신을 더 강조하셨다. 우리나라 전래의 미풍양속이 서구풍에 급속도로 밀려나는 것을 안타까와 하셨던 선생님께서는 ‘부모님과 어른 앞에 공손해야 된다’는 것을 주제로 전교생 글짓기를 실시하셨던 적도 있었다. 이는 가장 도덕척이고 사회적인 인간배양을 염원하셨던 선생님의 애타는 고민이었을 것이며, 교육자의 영원한 숙제라 할 양심의 책엄감에 기인함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빙산 일각이상으로애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통해서 본 우촌 선생님의 교육이념의 요점과, 그 당시 우리 학교 학생이면 누구나 영향력을 받고 성창하였던 학교 분위기를 적어보았다. 이것은, 선생님의 일평생을 바쳐 헌신하신 교육실천의 벙산 일각에 불과함을 밝히면서,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오로지 교육을 위하고 후세를 사랑하셨던 그 훌륭하신 돗을 길이 받들어, 뿌리가 깊은 실질척언 교육으로 미래를 다져야 할 때임을 역설하고싶은마음이다.
성실하고 꾸준한 교사들을 위하여이제 나는 1960년 내가 한성여자중학교에 교사로 부임하게 되면서, 직장의 어른으후 대하였을 때의 선생님을 생각해 보려 한다.교사로 부임하고 며칠 안되었을 때의 일이다. 선생념께서 각별히 교장설로 나를 부르시어, 교사로서 소흘함이 없이 근무를 잘 하라고 충고해 주셨다.
“약삭빠른 토끼보다 거북이의 꾸준한 노력과 의지력이 훨씬 본받을 점이여"반짝이는 제치를 믿고 처신하기보다는 사람됨이 겸손하고 성실하며, 학생들 앞에서는 갚은 가슴을 가진 교사가 되라고 말씀해 주셨다.훗날에 은퇴하실 때까지 선생님께서는 성실하고 꾸준하게 노력하는 교사을을 언제나 후한 칭찬으로 격려하셨고, 교육에 해가 미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엄격한 원인규명에 따라 꾸중을 하시고? 철저한 시정을 기다리며 주시해 주셨는데, 이러한 때에는 밤잠을 못 이루시고 마음아파 하셨다고 한다. 이런 일들 때문에, 다수의 사람들이 선생님을 매우 엄한 분으로만 알고 있는데, 다행이도 나는 한성여중에 교사로 근무하면서 선생님을 매일 가까이서 볍게 되어, 다정다감하신 면과 자상하신 면을 많이 보아왔다. 다음의 사례는 선생님의 성품을 소개하는데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상여금을 받는 날이면, 우리학교 교직원은모두가 가래떡을 한보따리(한말이 넉히 되는 분량)씩 선물 받았였다. 가정의 안정이 없이는 학생 교육에 전념은 불가능하다는 배려가 깃든 선생님의 선물이였다.
“오늘은 이 떡을 들고 꼭 집으로 직행하세요”푸짐하게 돈을 받은 날아니, 혹시라도 어울려서 낭비를 하는 선생념이 계실까 염려되어 하시는 말씀이었다. 게다가 떡을 한 보따리씩 들렸으니, 사정이 있더라도 그날만은 집으로 직행하는 수 밖에 없었다. 식량 사정이 어려웠던 그때에 떡 한 보따리는 푸짐한 선물이었고, 나는 부모님과 동생들이 좋아라고 떡국을 맛있게 들었던 모습을 지금도 떠올리며 눈물 짓는다.그리고1 또 특기할 일은, 그때 우리 학교 선생닝 중에는 신경통이나 관절염을 앓는 분이 한 분도 없었다. 아침 조회시간이면 예외없이 체조를 했었는데, 귀찮아하거나 다론 핑계로 피하는 선생님은 한 분이라도 있을 수가 없었다. 학생들과 함께 매일의 일과는 아침체조로부터시작되었던 것이다.
“늙어보면 알게 돼요 꾀부리지 말고… "아침체조를 피하려는 교직원을 나무라시던 우촌 선생님의 뭇이 담긴 말씀에 대하여 많은 세월이 흐른 오늘에 이르러 더욱 감사를 느끼고 있다. 선생님은 오래도록 건강하셨고 그래서 학교를 골고루 둘러보시고 마음을 쏟으실 수가 있었다.학생 교육에 관한 사안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엄격하셨지만, 사사로운 면에서는 자상하고 푸근하시기가 ‘내 할아버지’같으셨으니, 매년 김장철이 되면 학교 재단 염전에서 생산하는 소금을 한 가마니씩 나누어 주시면서,“요새 시장에서 많이 파는 수업 소금은 맛이 없어요”“이 소금을 찬 물에 녹여서 배추를 저리면, 겨우내 맛있는 김치를 먹을 수 있을 거여. 손 시렵다고 미지근한 물에 저리연 못써요”하시던 선생님의 음성이 빗줄기를 타고 오늘따라 생생하게 느껴진다.
교직원 중에 누구라도 전근가려는 사람이 었으면 선생님께서는 서운한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셨다.“직업을 바꿀 수 밖에 없는 사정이라면 몰라도 그냥 눌러있지 않고서이래서 한성여학교의 교무실 분위기는 다른 어다보다도 향토적인 푸근항이 가득하고 여유로운 특색을 향상 간직하고 있음을 냐는 자랑하고싶다.교육에 전념하는 건강하고 지혜로운 교사를 위하시던 우촌 선생님의 손길이 배이고 시션이 멈추었던 구석구석에서 번져나는1. 참되고 착한 사람이 되자2. 슬기롭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3. 의롭고 건강한 사람이 되자는 외침에 숙연하여, 가던 길을 늦추거나 멈춰서는 안되었던 ‘나’이다.
60년 말부터 70년대에, 서울운동장과 5.16광장(국군의 날 행사)에서 행사가 있을 때면 한성여중 · 고에서 카드섹손(우리냐라 최초로)을 흘륭하게 해내어 보는 이들의 감격을 자아냈던 일을 생각하면서 나의 시선은, 운동장 가의 스탠드 있던 쪽 한 지점에 멈추어진다.기쁨의 웃음을 함빡 담은 표정으로 감개무량해 하시던 선생님의 발자취가 멈추었던 자리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이 나라의 내일을 꽃피울 청소년들의 푸른꿈이 자라고 있음이여, 우촌 선생님의 염원의 꽃이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있음업니다고 경건히 고하련다.국난의 시절에 일찌기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통감하셨던 진정한 교육자 성실과 꾸준함으로 학교를 일으키고 이끄셨던 우촌 선생님의 의로운 한 생애에 축복을 벌면서 회고의 필을 멈추련다.
편집후기
1992 년 5 월 한성대학교 창립 20주년 기념 준비위원회의 하나로 〈우촌 김의형 박사 추모집 발간위원회 〉가 발족되었다. 그러니까 이 위원회가 조직된 지 꼭 107fl 월만에 한성학원의 설립자이신 우촌 선생님의 생애와 추모의 글을 모아 「路山의 三觸公」이라는 제하의 책자를 발간하게 된 것이다.한성학원( 漢城學園)을 생각하면 우촌(友村) 선생님이 떠오르고 우촌 김의형(金義째) 박사님을 말하려면 한성학원을 빼 놓을 수 없을만큼 선생님과 한성학원과는 불가분(不可分)의 관계이다. 일제의 압제로부터 광복(光復)을 되찾은 1945 년 9월 이콧 낙산(略山) 기슭에 육영(育英)의 터를 마련하신 이래 선생님은 그의 전 생애(生灌)를 한성학원과 함께 하셨다. 다시 말해 선생념이 계시지 않으셨다면 오늘의 한성학원이 있을 리 없고 따라서 한성인( 漢城A) 이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 한성의 모든 가족은 그 분을 잊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분이 어떠한 삶을 영유했으며 그 분의 교육청신(敎育精神) 그리고 한성학원을 창립한 그 분의 건학이념(建學理念)을 숙지( 熟知)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당연한 의무일지 모른다.
1974 년 선생님의 고희(古橋)를 기념하여 「萬年樹」가 편찬된 바 있£나 벌써 20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 책을 구하기도 쉽지 않으며 읽기에도 매우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우촌 선생님에 관한 전기( 傳記) 간행이 거론되어 왔다. 마침 올해는 선생님의 탄신(誠辰) 90주년을 맞이하는 헤이자 작고(作故) 하신지 10주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뭇 깊은 해를 맞이하여 선생님의 생애를 다시 정리하는 한펀 추모의 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발간하게 되었으니 이는 매우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이 책의 발간 책임을 맡은 위원회에서는 수차의 회의 끝에 앞서 나온 「萬年樹」를 오늘에 맞게 개작(改作) 증보( 增補)한 형태로 간행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오래된 글을 개작하고 증보한다는 것은 새로 쓰는 일보다 어느면에서 더욱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자료 수집 등 충분한 준비과정을 생략한 채 집필에 바로 들어가야 했기에 필자들로서는 척지 않은 어려움에 봉착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본 대학에 몸담고 있는 교수들로서 본 대학의 창립자 어른의 일대기를 저술한다는 것은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가능한 필자들은 선생님의 생애가 실제보다 과장되게 그려져서는 않된다는 공통된 생각에서 가능한 진솔하게 기술하려고 애썼다.
제 1, 2, 3 장은 윤경로 교수(사학과)가 집필했으며 제4장은 강월도 교수(교양과)가 제5, 6장은 김창룡 교수(국문과)가 그리고 마지막 제7 은 생전의 우촌 선생님을 찰 알고 있는 연정열 교수(경영과)가 집필하였으며, 편집과 교정 통 일체의 실무를 정후수 교수(국문과)가 맡았다. 이 밖에 자료 제공과 외부 원고 청탁 및 출판사 교섭 등의 일을 기획실 정대흥 과장이 수고했음도 밝혀 둔다. 그리고 이책의 발간을 더욱 벚내주기 위해 추모의 글과 그림을 보내주신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를드린다.편집을 마우리 하면서 다시 생각해도 이 책야 한성학원 뿐만 아니라 한국 사학계의 거목(巨木)이셨던 우촌 선생님의 생애와 그의 활동을 충분하게 기술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훗날 보다 역량있는 분들에 의해서 좀더 나은 선생님의 일대기가 집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글을 맺으며 문뜩 떠오르는 한마디를 부연한다.“인재를 아끼고 존중할 줄 아는 민족은 홍하고 인재를 아낄줄 모르는 민족은 번영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1993 년 2 월〈우촌 김의형 박사 추모집 발간위원회〉위원창 윤경로편찬위원
위원장:윤경로위 원:강월도,김창룡,정후수,정대홍騎山의 三騙松-友村 金義衡 博土의 꿈과 意志1993 년 3월 1일 인쇄1993 년 3월 1일 발행발 행:한성대학교펀 찬 : 우촌 김의형 박사 추모집 간행위원회인 쇄 : 동일인쇄 264-04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