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구리시 국가유공자 기록화사업

잠들지 않는 이야기일곱 번째

이현욱 어르신 외국가유공자 12인 구술

목차

1장독립독립을 운이낸뤄동가

앞장 서 외친 독립만세

독립운동가 故박두완 선생의 유족 박용달 어르신

6

민족정기를 지키겠다는 일념

독립운동가 故이봉하 선생의 유족 이석진 어르신

20

2장국켜지낸조을 참전쟁652. 전유공자

다시 찾은 아버지

6·25전쟁 참전유공자 故김판준 선생의 유족 김애순 어르신

36

평생을 영웅으로 살아온 사나이 6·25전쟁 참전유공자 이현욱 어르신

50

이름 없는 영웅들을 기리며 6·25전쟁 참전유공자 이택무 어르신

64

3장평화베트를 남수호쟁전한참전유공자

가족을 위해 참전한 청년 농부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강영수 어르신

80

가슴에 품은 전우들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김병기 어르신

92

남편과 함께한 아름다운 시절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故안호진 선생의 유족 박순영 어르신

106

든든한 나의 벗, 전우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서병원 어르신

120

떠나간 그대와 남겨진 이들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故박순길 선생의 유족 여양래 어르신

132

조국을 지켜냈다는 자부심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정연혁 어르신

146

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믿음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최성진 어르신

160

행복을 지원한 보급병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최우상문 어르신

174

1장

독립을 이뤄낸독립운동가

앞장 서 외친 독립만세

독립운동가 故박두완 선생의 유족박용달 어르신

신용르어박 달사에순본 일게용신어 르달박을람들을마사. 의 을 있아 고하지애한으버강다닮 려직 성우고직품 은쓰옥 을고혀는고서치색든뤘감당지 를 만문게고 족에을 하 한에 가옥잡내힘 자랑나앞럽은를도지 이위키변세기가 함해 없지장선 라이 아스버 지월나 동선3조직생에. 앞1만완장선해세 故박운 두. 도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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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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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달공 국지정가-자유1 국훈애건.9추90장장족 추령3창 대통표.서198의 평9.0 .북군 안31.5 9 911.1성-면 경. 완-196116 88 두.. 081 . 26.28. 0박독립가운동서만 세운동

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처음 시작되자마자 전국으로 들불처럼 만세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r우리는 일본의 지배를 원하지 않으며, 스스로 독립 국가를 세울 권리가 있다.s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 대표 33인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이 울림은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경북 의성에서는 3월 12일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과 교사의 의거로 처음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원래는 3월 11일 비안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는 걸로 계획했으나, 어떻게 알았는지 일본 순사들이 눈치를 채고 경계와 검문을 강화했다. 할 수 없이 만세운동은 하루 늦춰 3월 12을 거행했다. 학생들은 학교와 일본 순사의 삼엄한 경계를 피해 학교 뒷산으로 올라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참가한 학생 수는 150명이었다. 이들의 만세 함성은 곧바로 인근 마을인 쌍계리로 퍼졌고, 이어 박두완 선생이 살고 있었던 안평을 포함해 봉양, 점곡, 신평, 가음, 춘산으로 번졌다.

마을사람들을 모아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었다. 예배를 보기 위해 교회에 모였던 사람들은 예배를 마치고 품에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꺼내 당당히 펼치며 대한의 독립을 소리높여 외쳤다. 지금도 안평면 진입로에 들어서면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며 세운 기념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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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 서 외친 독립만세

t응봉산의 정기가 서린 이곳 우리골에서 여호와 닛시를 방패삼은 기독교인들의 선봉으로 일제로부터 조국의 독립을 위한 만세 함성이 시작되었다. 태극기를 앞세워 도리원 장터까지 진입한 700여 명의 안평인들은 왜군의 무차별 총탄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절정적 항거로 목숨을 잃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다.u 여기에 적힌 우리골이 대사동을 가리킨다. 여호와 닛시는 히브리어로 r여호와는 나의 깃발s이란 뜻이다. 총과 칼을 든 일본 순사에 맞서 태극기를 든 맨손으로 독립을 외쳤던 비무장 평화시위운동이 바로 3h1운동이었다. 불안과 공포가 엄습한 눈앞의 현실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건 신분과 계층을 초월한 단결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 믿고 의지했다.

박용달 어르신은 고향인 안평면 박공리를 찾아갈 때마다 마을 진입로에 있는 충혼탑을 찾아갔다. 충혼탑 앞에서 깊은 생각에 잠기다보면 어느새 어린시절로 돌아가곤 했었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어려운 학창시절을 보냈다. 살아 계셨을 때도 비가 오면 온몸이 쑤신다며 아파하셨던 아버지. 그러나 자리에 누워 편히 쉬시는 모습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평일에는 아침 일찍부터 논과 밭에 나가 농사를 지으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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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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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 서 외친 독립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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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주말이면 교회일을 보셨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r영수님s이라고 불렀지만, 영수가 어떤 직책인지 당시에는 잘 몰랐다.

아버지 박두완 선생은 박곡교회 영수였다. 교회 살림을 책임지는 사람답게 교회 안팎의 허드렛일을 거의 혼자 도맡아 하셨다.

박곡교회는 1904년 10월 16일 금곡리에 사는 권수백의 전도를 받은 김학배, 이만기, 손용지, 최달모 등에 의해 설립되었다. 설립은 되었지만 살림은 늘 쪼들렸기 때문에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의 선량한 참여로 운영되었다. 이처럼 어려운 형편 가운데, 박두완 선생은 교회가 운영될 수 있도록 온 힘을 쏟았다. 박용달 어르신은 아버지와 함께한 기억이 많지 않다.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인상만은 깊다. 의지가 강하고 성실히 일하셨으며, 사람들에게 친절했다. 박용달 어르신은 아버지의 장점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렇기에 형편은 어려웠지만 평생 남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었다.

t어렸을 때는 잘 몰랐는데, 아버지께서 교회에 다니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만세운동에 앞장섰다고 합니다.u

박곡교회도 쌍계교회, 대사교회와 더불어 의성 지역 3h1운동에 중요한 거점 역할을 했다. 의성 지역에 처음 3h1운동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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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 서 외친 독립만세

한 인물은 괴산교회 김원휘 조사였다. 그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평양에 갔다가 마침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던 격렬한 만세 시위를 목격했다. 시위가 평양 전체를 넘어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을 안 김원휘 조사는 학업을 계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길로 고향 의성으로 돌아왔다. 3월 6일 쌍계에 도착한 김원휘 선생은 이 소식을 쌍계교회와 대사교회, 박곡교회 등에 알리고 괴산교회 담임목사였던 박영화 목사를 만나 시위를 계획하고 실행했다. 대사교회는 1909년 설립되었는데, 쌍계교회 교인 이이경이 대사동으로 이사 와 뜻을 같이한 사람들과 힘을 합쳐 세웠기에 서로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계획은 치밀했다. 주일예배를 보기 위해 교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은밀히 소식을 전하고 일제히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역할을 나눠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은 몰래 이웃 교회를 찾아가 만세운동을 하는 날과 시간을 전했다. 그사이 교회에 남은 사람들은 주민들에게 나눠줄 태극기를 만들었다.

독립만세운동 소식을 전해들은 박곡교회도 곧바로 준비했다. 박두완 선생은 교회에 오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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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16

앞장 서 외친 독립만세

태극기를 만들며 만세운동에 참가할 준비를 마쳤다. 의성군 일대 모든 교회가 착실히 만세운동을 준비했기 때문에 비안공립보통학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금방 주변으로 퍼졌다. 3월 13일 비안면 동부리, 15일 안평면 대사리, 16일 안평면 석탑리, 17일 사부리, 18일 점곡면 사촌리h서변리h윤암리와 의성읍, 19일 봉양면 도리원, 25일 신평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박두완 선생을 포함한 박곡교회, 쌍계교회, 대사교회, 괴산교회 신도들은 주일예배 후에 곧바로 거리로 나가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했다. 1919년 3월 15일 계획했던 날이 밝았다. 마음이 바빠졌다. 일본 순사들도 전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만세운동도 중요했지만 사람들이 다치는 일이 없어야 했기 때문에 신중했다. 박두완 선생은 이종출, 이양준, 이북술 등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먼저 일본 순사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동시에 마을 사람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그리고 태극기를 나눠주며 거사를 일으킬 시간을 일러주었다. 드디어 시간이 되었다.저녁 7시 무렵, 교인들과 마을주민 70여 명이 일본 순사의 눈을 피해 마을 뒷산에 모였다. 이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동네를 돌다가 밤 10시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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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렵 흩어졌다. 다행히 별다른 피해 없이 끝났다. 이날의 만세운동이 안평면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3월 15일에 시작된 만세운동은 5일 동안 계속되었다. 만세 인원도 크게 늘어났다. 3월 16일 오후 8시, 마을 주민들은 다시 독립만세를 외치며 마을을 출발해 머전리와 기도리를 거쳐 4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면소재지 창길리까지 행진했다. 3월 17일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이날은 전날보다 인원이 더 모여 150명이 되었다. 이날은 마을에 태극기를 게양하기도 했다. 3월 18일은 군중의 수도 더 늘어났고, 19일은 도리원에 장이 서는 날이라 규모를 더 키워 시장으로 행진하기로 했다.

3월 18일이 되었다. 다음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도리원 장날에 맞춰 만세운동을 진행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안평면 주민들은 각자 도시락을 가지고 도옥동 하단에 모이기로 했다.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었고 다음날 해가 뜨자 모인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길을 메웠다.

박두완 선생은 앞장서 만세를 외쳤다. 함성이 커지자 일제히 도리원으로 향했다. 도중에 연도의 많은 군중도 시위 대열에 함류했다. 장날에 모인 군중과 합세하면서 만세 함성은 더욱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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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 서 외친 독립만세

져갔다. 1,000여 명으로 확대된 군중 행렬은 8LN에 이르렀고, 이들이 목놓아 부른 함성은 인근 산을 울렸다. 안평주재소에서 만세 시위를 끝내고 돌아가던 군중도 다시 만세를 외쳤다. 1시간 이상 시위가 계속되지 결국 일본 순사가 시장을 폐쇄하고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붙잡았다. 이때 붙잡힌 사람이 51명이었고 그 가운데 46명이 재판을 받았다. 박두완 선생은 1919년 7월 1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일 년을 언도받고, 8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박용달 어르신은 지금도 곧잘 아버지를 떠올려본다. 나라를 되찾고자 앞장서 만세를 외치고 그 일로 힘든 시기를 보내셨던, 그럼에도 끝내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지셨던 분. 1983년 정부는 아버지 박두완 선생의 공훈을 기리며 대통령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박용달 어르신은 그런 아버지를 생각하며 독립유공자의 자손다운 자부심으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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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기를지키겠다는일념

독립운동가 故이봉하 선생의 유족이석진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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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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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이석진 어르신은 사고로 몸이 불편하다. 젊어서 형의 권유로 부산으로 가 직장을 다녔다. 형은 무역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마침 부산지사에 인력이 필요했다. 부산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어느 날 평소처럼 사촌형과 퇴근하던 길이었다. 사촌형이 운전을 했고 이석진 어르신은 조수석에 앉았다. 퇴근길 도로는 혼잡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과속을 하던 차와 부딪혀 교통사고가 크게 났다. 정신을 잃었고, 눈을 떠보니 병상에 누워 있었다. 병원에서 이 년을 보내야 할 정도로 사고는 컸다. 수술을 여러 번 했고, 위험한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 결국 하반신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당시 나이가 서른여덟 살이었다. 젊은 나이에 병상에서 지내야 하는 신세가 되니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결혼한 지 겨우 이 년, 아이도 한 명 있었다. 행복했던 일상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가라앉듯 사라졌다. 절망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아내는 가족의 생계, 어린아이를 돌보는 것뿐만 아니라 남편 간호까지 책임져야 했다. 이석진 어르신은 수십 년 동안 그 고달픈 일상을 견뎌준 아내를 생각하면 한숨과 눈물이 나온다고 했다.

아버지에서 형으로 이어졌던 독립유공자 자격이 형이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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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기를 지키겠다는 일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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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아가시면서 이석진 어르신에게로 승계되었다. 할아버지가 고향 철원에서 독립운동을 크게 일으켰다는 이야기를 아버지와 형에게 들어 알았지만, 솔직히 독립유공자라는 자격이 생기기 전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몸도 자유롭지 않아 주변을 챙길 처지가 아니었다. 아버지와 형이었다면 3.1절 행사나 국가유공자가 모이는 행사에 참석도 하고 주변 사람들도 잘 챙기며 어울렸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기에 이석진 어르신은 가족과 할아버지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게다가 세월이 지나면서 가족들마저 할아버지를 잊는 듯해 씁쓸했다.

t할아버지는 강원지역에서 3.1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애국지사이시고, 봉명학교를 설립해 신교육을 가르친 교육자셨습니다. 이러한 업적을 저라도 나서서 챙기고 자료라도 남겨둬야 하는데 몸이 불편해서요. 평소 챙겨놓은 자료도 없고, 무엇 하나 해놓은 게 없어 안타깝습니다.u

이석진 어르신은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켜놓은 텔레비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할아버지 이봉하 선생은 신문화 교육과 민족정신 함양을 위해 1909년 4월 1일 고향 철원군 서변면 용담, 지금의 철원읍 율이리에 봉명학교를 설립했다. 학교 설립까지 많은 사람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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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기를 지키겠다는 일념

도움이 있었다. 이봉하 선생은 먼저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았다. 뜻을 같이 했던 사람들도 십시일반 돈을 모았다. 비용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교육을 해야 한다는 바람이 워낙 컸기에 많은 사람들의 참여와 뜻을 모아 학교를 열 수 있었다. 김철회, 조종대, 강대려, 이동환, 노재명, 이정하, 이규자 등 교사 일곱 명이 자원봉사로 학생을 가르쳤다. 설립 당시 학생 45명으로 시작해 매년 조금씩 늘어 1925년에는 150명이 될 정도로 커졌다. 3h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을 받다가 1925년 강제 폐교령에 의하여 폐교되었고 이후 모든 재단은 철원감리교회로 이관되었다. 봉명학교에 대한 기록은 간혹 남아 있지만, 그 흔적은 모두 사라져 지금은 논밭으로 변했다. 칠 년 동안 운영하면서 배출한 학생 수는 1,500여 명이 되었고, 그 가운데 한국 단편문학의 문장가로 손꼽히는 상허 이태준 작가도 있다. 이태준 작가는 자신의 고향 철원을 추억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r내 고향 용담은 산 많은 강원도에 있다. 철원 땅이지만 세상에 알려진 금강산 전철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고요히 정거장도 없는 경원선 한 모퉁이에 산을 지고 산을 바라보고 그리고 사라지는 연기만 남기고 지나다니는 기차들이나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았는 조그만 산촌이다.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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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기를 지키겠다는 일념 29

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이태준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철원읍 율이리 조그만 산촌마을에서 이봉하 선생은 태어났다. 교육운동에 뜻을 두고 설립한 봉명학교는 민족정신을 교육한다는 이유로 일제가 지속적으로 탄압했다. 이봉하 선생은 굴하지 않고 교육은 물론 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1919년 3h1운동이 일어나자 곧바로 교사와 학생들을 조직해 독립만세운동을 펼쳤다. 만세운동이 일본 순사에 의해 진압된 뒤에도 그 불씨를 살려 지역 사람들과 독립투쟁 활동을 이어갔다. 1919년 8월 11일 이봉하 선생은 도피안사에서 김재근, 박연서, 강대려, 이용우, 박건병, 김완호, 오세덕 등과 함께 대한독립애국단 철원군단을 결성했다. 이 자리에서 이봉하 선생은 단장으로 선임되었고, 서무과장에 강대려, 재무과장에 김완호, 통신과장에 박연서, 학무과장에 박견병, 외교부원에 이용우, 김철회, 오세덕을 선출했다. 그 후 서울의 대한독립애국단 본부는 철원군단을 강원도단으로 승격시켰다. 이에 따라 강원도단은 강원도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가 목사, 승려, 유학자 등 각층에서 가담해 규모가 커졌다. 강원도단에는 철원군단을 비롯 강릉군단, 평찬군단, 단양군단을 예하로 거느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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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기를 지키겠다는 일념

대한독립애국단은 자발적으로 결성한 민간 항일투쟁 조직이다. 1919년 3h1운동이 일어나고,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항일투쟁을 실효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이때 3h1운동 대중화에 기여하고자 뜻을 같이한 사람들이 대한독립애국단을 결성했다. 1919년 5월, 서울 이화학당 부속학교 교사였던 신현구 선생이 주도했다. 처음에는 3h1운동 대중화를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결되면서 임시정부의 구심력에 의해 그에 대한 지원을 행동지침으로 삼게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주축으로 대한독립을 이루자는 뜻은 곧바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전국에 세워진 대한독립애국단의 지단은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등지에 세워졌는데, 앞서 말했듯 강원도단은 철원애국단으로도 알려져 있다. 강원도단은 전국 도단 가운데 가장 활동도 활발하였고 규모도 컸기 때문에 대한독립애국단은 몰라도 철원애국단을 아는 사람은 많았다. 강원도단은 결성과 부서 구성을 단 이틀 만에 마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것은 이봉하 선생을 비롯해 철원애국단 결성에 참여한 사람들이 일찍부터 신교육에 앞장설 만큼 민족의식이 성숙했기 때문이었다. 철원애국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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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지원하고 임시정부가 반포한 각종 문서를 국민들에게 알렸다. 자금을 모금해 전달하는가 하면 일본 관직에 있는 한국인에게 접근해 퇴직할 것을 설득하는 등 국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철원애국단의 활약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1919년 10월 10일 철원에서 강원도단 전원이 참여한 2차 만세운동이다. 1919년 9월 중순 당시 대한독립애국단의 강원도단 단장을 맡고 있던 이봉하 선생은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파견된 신상완 선생을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축하 독립만세 시위 계획을 전달받고 이를 추진하였다. 이후 1919년 10월 10일 박건병, 오세덕 등의 단원들이 철원지역 대중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이끌어내며 임시정부 축하 연설을 가진데 이어 태극기 게양과 만세 시위를 벌였다. 만세 시위 직후 박건병과 오세덕 등 시위를 주도했던 단원들을 상해로 망명시켜 시위 주체를 철저히 위장하는 전략까지 사용했다.

하지만 일본 순사들의 끈질긴 추적은 계속되었고, 1920년 1월 철원읍 월하리 거주 재력가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참여와 독립자금 모금 동참을 요청하다가 밀고자에 이해 대한독립애국단 강원도단 조직이 발각되었다. 이로 인하여 철원애국단 본부의 정체도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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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정기를 지키겠다는 일념

이봉하 선생을 비롯해 조직 임원 35명이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후 1922년 철원애국단 사건으로 43명이 검거되어 정치범죄 처벌령 위반,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등의 죄명으로 판결을 받았다. 이봉하 선생은 징역 일 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 후에도 창씨개명 반대, 납세 거부 등 항일투쟁을 벌이다가 광복을 맞았다. 이봉하 선생은 1963년 2월 24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철원애국단의 항일투쟁 정신을 기리기 위해 추모비를 건립했다. 현재 철원읍 화지리 철원중고등학교 교정에 3중 기단으로 세워져 있다. 이봉하 선생은 1963년 대통령 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이봉하 선생의 묘소는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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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조국을 지켜낸

6h25전쟁 참전유공자

다시 찾은 아버지

6h25전쟁 참전유공자 故김판준 선생의 유족김애순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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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11. 13. -

국가유공자김애순국91정 지.공90 9 401자.유.가1김8291 .7판1512 2. . 021 .준. . 5-1공·2자5 참쟁전 전유

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김애순 어르신의 생일은 1952년 11월 13일이다. 이것은 주민등록상에 적힌 날인데, 김애순 어르신이 기억하고 있는 실제 생일은 음력 1951년 11월 20일, 양력으로 하면 12월 18일 즈음이라고 했다. 이것도 친척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유추한 것이었다.

t아버지가 네가 태어나고 일주일 뒤에 돌아가셨어. 딸이 눈에 밟혀 어떻게 가셨을고.u

김애순 어르신의 아버지 김판준 선생은 1927년에 태어나 1951년 12월 25일에 돌아가셨다. 김애순 어르신이 태어나고 꼭 일주일 뒤였다. 순천이 고향인 김판준 선생은 경찰이 되어 순천 지역에서 근무했다. 6h25전쟁 중에는 지리산으로 숨어든 빨치산을 소탕하기 위해 군대와 함께 빨치산 토벌작전에 투입되었다. 조정래 작가의 소설 ~태백산맥에는 1948년 있었던 여수h순천사건과 이후 이어진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 이야기가 나온다. 빨치산에게 지리산은 마지막 결전의 장소였다. 소설에 나오는 대사는 빨치산의 마지막 모습을 잘 보여준다. t지리산은 본격적인 투쟁지가 아니라 투쟁의 마지막 장소일 뿐입니다. 지리산으로 들어오면 더 이상 갈 곳이 없거든요.u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는 빨치산을 토벌하려는, 국군과 경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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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의지 또한 대단했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전남, 전북, 경남 서부지역 경찰은 지리산지구 전투경찰사령부를 창설하고 본격적인 작전을 펼쳤다. 1951년 11 월부터 동계토벌작전이 시작되었다. 백운산지구에서 활동하던 남부군의 주력부대인 81사단의 은거지를 토벌하기 위해 제200 경찰연대와 제205경찰연대가 돌아가면서 투입되어 교전했다. 김판준 선생은 스물네 살 젊은 나이였다. 전투에 투입되었을 때, 더구나 이제 막 결혼한 새신랑이었다. 그런 아들을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 보내는 어머니 심정도 애달팠지만, 남편을 눈물로 보내야 하는 부인의 심정도 찢어졌다. 김애순 어르신은 부모님 두 분이 어떻게 만나 결혼하게 되었는지 잘 모른다고 했다. 어머니는 서울 사람이었지만, 두 분은 신혼집을 친가에 마련했다. 신혼의 달콤함을 즐길 틈도 없이 아버지인 김판준 선생은 빨치산 토벌로 바쁘셨다.

실제로 김판준 선생이 동계토벌작전에 투입되기 일주일 전에 김애순 어르신이 태어났다. 뽀송뽀송한 아이가 품에서 자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비는 행복했을 거였다. 김판준 선생은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길을 나섰다. 곧 돌아오리라 다짐도 했을 것이다. 월등히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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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병력으로 교전을 치뤘지만 빨치산의 저항은 거셌다. 토벌대가 오리라는 것을 예상했던 빨치산은 산 속에 함정을 파고 지뢰도 설치해두었다. 적의 함정을 피해 포위망을 좁혀가고 있을 때 어디선가 지뢰가 터졌고, 파편이 날아와 김판준 어르신의 복부에 박혔다. 지뢰 파편은 열심히 싸웠던 김판준 어르신을 한순간 쓰러뜨렸다. 피를 많이 흘렸기에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었다. 피가 멈추지 않았다. 서둘러 후송해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전투는 더욱 격렬해졌고, 후방으로 후송을 도와줄 인원이 없었다. 게다가 산중이라 후송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피를 계속 흘리자 의식이 점점 희미해져갔다. 생명이 위태로웠지만 속수무책이었다. 후송이 늦어지면서 피를 너무 많이 흘리게 되자 점점 온몸이 축 늘어졌고, 결국 돌아가시게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슬픔을 느낄 겨를도 없이, 가족은 일상을 추슬러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어머니는 막 태어난 아이를 키워내야 했다. 외할머니는 멀리 순천까지 시집간 딸을 안타까워 했고, 친할머니도 남편을 잃고 홀로 아이를 키워야 하는 며느리를 안쓰러워 했다.

갓 스무 살을 넘긴 어머니는 순천에 머물면서 아이를 키우기로 결심했다.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고, 첫아이 출생신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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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았다. 5~6년쯤 지나 작은아버지가 결혼해 혼인신고를 하면서 김애순 어르신을 자식으로 등록했다. 그때쯤 외할머니가 어머니를 외가로 데려가기 위해 순천으로 오셨다고 했다. 그렇게 사는 젊은 딸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외할머니는 딸을 서울로 데려와 중매를 써 새로 시집을 보냈다.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재혼했지만, 새아버지는 어린 김애순 어르신을 예뻐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기 힘들었던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혼자 살 결심을 했고, 그 길로 김애순 어르신을 데리고 도망치듯 집을 나와버렸다.

어머니는 뱃속에 아이가 들어 있었다는 것을 모르셨다. 둘째를 가진 몸으로 혼자 독립하려 했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하지만 어머니는 당차게 현실을 이겨내셨다. 둘째를 낳은 뒤 돌아가신 아버지와 함께 가호적을 만들어 가족을 이루셨다. 김애순 어르신은 작은아버지 호적에 이미 올랐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니 당연히 어머니의 호적에도 올리셨다.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던 어느 날, 오랫동안 연락이 없던 막내 작은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작은아버지는 두 가지 이야기를 했다. 하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뵙지 못해 얼굴도 희미했지만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마음을 아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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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했다. 먹먹한 가슴을 쓰러내리던 중에 다른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하셨다. 아버지가 국가유공자 지정을 받으면서 연금을 할머니가 받고 계셨는데, 돌아가시면서 이 연금 상속을 딸인 김애순 어르신에게 하기로 했다는 거였다. 친딸이 다음 승계를 하는 게 당연하다며, 수소문해 어렵게 찾아 연락을 했다고 하셨다. 어머니가 평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일절 하지 않으셨기에 작은아버지에게서 갑작스레 전해듣는 이야기가 낯설고 어색했다. 들으니 낯설고 어색했다. 국가유공자 승계는 쉽지 않았다. 일단 호적부터 정리해야 했다. 작은아버지 호적에 올라가 있는 이름을 빼는 일부터 진행했다. 사촌동생이 비슷한 경우를 담당한 변호사를 알고 있다며 소개시켜주었다. 서초동에 있는 변호사 사무실에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가호적을 정리해본 경험이 있는 변호사는 복잡한 서류를 차근차근 정리하더니 작은아버지 호적에서 김애순이라는 이름을 지웠다. 다음은 아버지의 친자식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마침 순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소를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했는데, 다행히 아버지의 유골은 석관에 모셔져 있었기 때문에 훼손되지 않은 채였다. %/를 채취해 친자확인을 진행했다. 유골이 잘 보관되어 있다고는 해도 워낙 오래되어 채취가 쉽지 않았다. 습기가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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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랜 시간 자연건조한 다음 샘플을 채취해야 했다. 8개월이나 걸렸다. 다행히 친자가 맞다는 확인을 받을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부녀지간의 연이 끊어졌던 터여서 %/ 검사만으로는 증빙이 부족했다. 변호사는 친척들의 증언을 받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다. 작은아버지는 전국에 흩어져 사는 형제들을 찾아다니며 친자확인서 받는 일을 흔쾌히 같이 해주셨다. 인감증명서, 친자확인서 등 챙겨야 할 서류가 많았지만 친척들은 잘될 거라는 격려와 함께 서류를 빠르게 만들어 주셨다. t평생 보지 못했던 친척들이었지만 너무 반갑게 맞아주셔서 고마웠어요. 그 뒤로 가끔 안부를 묻는 관계가 되었죠.u 2019년 5월 2일, 김애순 어르신은 김판준 선생의 딸로 전몰군경유족회 구리지부에 등록했다. 예순여덟 해가 지나도록 아버지의 울타리를 제대로 느껴보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딸로 이름을 올리고,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되돌아보며 자신의 삶이 그제서야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 들었다.

2025년 1월 17일, 스물한 살 때 김애순 어르신을 낳아 일평생 딸을 애뜻하게 보살피며 사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아흔네 살의 연세지만 정정하셨는데, 담도암 판정을 받고 두 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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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지나지 않아 급작스럽게 돌아가셨다. 평생 자식 걱정만 했던 어머니가 끝내 아버지를 찾아주고 눈을 감으신 듯했다. 김애순 어르신도 어머니가 먼 길을 가시기 전, 부디 하늘에서 아버지를 꼭 만나시길 바라며 어머니 손을 꼭 잡아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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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욱 어르신은 1932년 9월 29일 전라남도 영광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 이현욱 어르신은 해방을 맞이하여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고 없이 닥쳐온 비극이 청춘의 무한한 꿈을 무참히 앗아갔다. 야심한 새벽 북한군이 남침하여 6h25전쟁이 발발한 것이었다. 당시 이현욱 어르신의 나이는 불과 열아홉 살,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전쟁의 비극은 이현욱 어르신의 가족에게도 닥쳐왔다. 삼촌이 전쟁터에서 전사하셨고, 그 충격에 숙모도 돌아가셨다. 5남 4 녀나 되는 형제자매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현욱 어르신은 단란한 가족을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으로 만든 원수를 갚아주고 싶었다. 1951년 2월 4일, 군대에 입대한 이현욱 어르신은 거제도에 있는 훈련소에서 신병 교육을 받았다. 먹을 것은 부족했고, 날씨는 추웠다. 어느 날 밤 11시에 훈련병 모두를 집합시키더니, 전방특공대에 지원할 희망자를 뽑았다. 지원자 20명을 받았는데, 밥을 많이 먹을 수 있다는 소리에 고민 없이 지원했다. 20명이 순식간에 채워졌다. 간부들은 이현욱 어르신을 비롯해 지원자들을 그 자리에서 차에 태우더니 어딘가로 데려갔다. 도착한 곳은 대구에 있는 육군사령부였다. 이현욱 어르신은 그곳에서 며칠 동안 대기했는데, 군 지휘부여서 장교가 많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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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덕분에 한 장교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군대생활을 잘하려면 장교가 되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전쟁 중이라 장교가 많이 필요해졌다는 것이 이유였다. 단기사관의 형태로 간부요원을 훈련시켜 각 부대에 배치하는 갑종장교 시험이 있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조언을 잘 새겨들었던 이현욱 어르신은 갑종장교 시험에 응시했다. 그리고 1952년 2월 2일, 입대한 지 1년 만에 당당히 24기로 임관해 포병 소위가 되었다. 영화 x태극기 휘날리며y가 이현욱 어르신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닮아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 중이던 바로 위, 넷째 형이 갑종장교 18기로 합격해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심지어 같은 지역으로 배치되었다. 포병장교는 원거리에서 적진을 향해 쏘는 포를 지휘했지만, 넷째 형은 보병이었기에 적군과 대치하며 교전해야 했다. 같은 소속에 있던 건 아니었지만,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전쟁터에서 형의 존재는 이현욱 어르신에게 큰 힘이 되었다. 형의 생일인 9월 29일, 생일을 축하하려 형이 근무하는 부대로 찾아갔다. 그런데 그곳에는 형이 없었다. 수소문하니 형이 전날 밤에 매복을 나갔다는 거였다.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하며 돌아서는데, 대대장이 이현욱 어르신에게 잠깐 기다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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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며 붙잡았다. 이현욱 어르신은 얌전히 상관의 명령에 따랐다. 이윽고 형이 부대로 복귀했다. 대대장은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동생의 이야기를 가벼이 넘기지 않았다. 넓은 아량을 베풀어 형을 복귀시켰고, 덕분에 이현욱 어르신은 형을 만날 수 있었다. 하룻밤이었지만, 이현욱 어르신은 형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웃을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형과 같은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 노리고지전투는 혈전과 격전이 거듭된 치열한 전투로 유명했다. 끝내 노리고지전투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국군의 투철한 의지와 미군의 탱크와 포 지원이 큰 힘이 된 덕분이었다. 1952년 8월 13일, 이현욱 어르신은 포병 89대대 소속으로 미 3사단과 1사단의 일반지원 임무를 받아 전투에 투입되었다. 전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치열하게 벌어졌고, 포 지원사격도 수시로 이루어졌다.

그로부터 두 달여 뒤인 1952년 10월 13일, 이현욱 어르신의 형도 1사단 12연대 소속으로 노리고지전투 방어에 투입되었다. 이현욱 어르신과 달리 형은 보병으로 투입되었기에 매일 적과 대치하면서 교전을 치루었다. 적과 싸우던 어느 날, 형이 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지고 말았다. 수도육군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생사가 위태로울 정도로 많이 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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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다쳤던 날, 이현욱 어르신은 꿈을 꾸었다. 형이 환자복을 입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꿈이 너무 생생해서 잠에서 깬 뒤에도 뇌리에 남았었다. 기운이 뒤숭숭하고 하도 이상해 다음날 형이 근무하는 부대로 찾아갔다.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이현욱 어르신은 형이 교전 중에 총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눈물을 흘리며 형이 있는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은 중경상을 입은 환자로 가득했다. 형은 복부에 심한 총상을 입고 누워 있었다. 다행히 형은 차츰 차도를 보이며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나 옆 병상에 누워 있던 소위는 끝내 세상을 떠났다. 형을 간호하고 싶었지만, 다시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형과 이별한 뒤 이현욱 어르신은 눈물을 훔치며 전방으로 향했다. 곧바로 백마고지 쟁탈전에 투입되었다. 백마고지는 일주일 만에 수십 번 주인이 바뀌는 격전지였고, 6h25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장 중 하나였다. 이곳에서 이현욱 어르신은 전포대장으로 참전했다. 이 작은 고지에 많을 때는 하루에 포탄 3만 발을 쏘기도 했으니, 정말 물러설 수 없는 전투였다. 9사단 총 인원의 세 배가 넘는 적과 싸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적의 공세도 만만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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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밤사이 중공군이 점령하면, 다음날 낮에는 국군이 다시 탈환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아군이 점령하고 있으면 이내 적군이 쳐들어왔다. 곳곳에 박격포가 떨어져 한순간에 아군 진지가 폭파되었고 네이팜탄으로 인한 화염은 하늘을 뒤덮어 눈을 제대로 뜨기 힘들었다. 얼마나 포탄을 많이 투하했으면 고지 높이가 1미터나 낮아졌을까. 적과 아군을 통틀어 하루 평균 1,800여 명의 사람이 죽었다. 결과는 아군의 승리로 끝났다. 북한은 이 전투로 1만 4,390여 명이 죽었고, 수많은 무기와 장비를 잃었다. 이 처절한 전투의 승리 뒤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임무에 최선을 다한 이현욱 어르신을 포함한 우리 국군이 있었다.

휴전을 맞이했지만, 이현욱 어르신은 군을 떠나지 않았다. 장교로 복무하며 여전히 국가에 헌신했다. 그사이에 이현욱 어르신은 결혼해 가장이 되었다. 어여쁜 아들이 이현욱 어르신 부부에게 선물처럼 찾아왔다. 6h25전쟁을 이겨낸 이현욱 어르신은 축복과도 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예기치 않은 전쟁이 한 가정의 행복을 해치려 하고 있었다. 머나먼 타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베트남전쟁이었다. 1967년 9월, 한국군이 베트남전쟁에 파병을 결정함에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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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이현욱 어르신도 베트남전쟁 파병을 명령받았다. 군인으로서 당연히 명령에 따라야 했지만, 이현욱 어르신은 쉽게 짐을 싸지 못했다. 홀몸이었다면 과감히 나라를 위해 한 몸 투신했겠지만, 이현욱 어르신에게는 지켜야 할 가족이 있었다. 고통스러운 고민 끝에 이현욱 어르신은 결정을 내렸다. 군인으로서 다시 한번 나라를 위해 싸우기로. 그리고 아내와 손을 맞잡고 약속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살아 돌아와 당신과 자식을 책임지겠노라고. 담백하게 말하려 했지만, 이현욱 어르신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이현욱 어르신만큼 아내도 강한 엄마였다. 아내는 남편에게 안심하라고 말하는 듯, 맞잡은 두 손을 더욱 꼭 쥐었다. 이현욱 어르신은 육군 중령으로 맹호부대 감찰참모와 대대장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전쟁은 하루아침에 목숨뿐만 아니라 일가족의 행복, 한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끔찍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6h25전쟁의 경험을 살려 병사들이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작전의 성공 여부와 문제점을 보고하는 감찰 임무와 여러 부대를 방문하여 애로사항을 해결해주는 전시 소원수리 임무를 수행했는데, 그 성과가 탁월하여 사단장의 격려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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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욱 어르신은 전쟁터에 투입된 어린 병사들을 볼 때마다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병사들은 항상 가족을 그리워했고 죽음을 두려워했으며, 외로움에 떨었다. 6h25전쟁 참전용사인 이현욱 어르신은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따뜻하고 세심하게 병사들을 대했다. 이에 감동한 병사들은 이현욱 어르신을 아버지처럼 따랐고, 이현욱 어르신은 기꺼이 그들의 아버지가 되어주었다.

이현욱 어르신은 은퇴한 후에도 안보교육에 이바지하는 삶을 살았다. 군 생활과 직장생활을 마무리하고 구리로 이사 온 뒤 구리시재향군인회장을 맡아 뿔뿔이 흩어진 보훈향군단체를 한 곳으로 모으고, 국가유공자의 처우개선에 앞장섰다. 그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안보교육은 물론 전방사단 위문편지 보내기 운동, 호국 안보평화공원 건립 등 군인 사기를 크게 진작시키는 일에 일조했다. 이현욱 어르신은 최근까지도 활발한 호국, 애국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전쟁영웅으로 존경받는 이현욱 어르신. 그러나 이현욱 어르신을 r전쟁s 영웅으로 한정지을 필요는 없다. 그는 이 시대의 영웅으로 앞으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남은 생을 뜨겁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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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h25전쟁 참전유공자이택무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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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무 어르신은 음력 1932년 11월 22일 성동구 응봉동에서 태어났다. 이택무 어르신은 무려 5대 독자였다. 항상 사랑을 독차지했고, 크게 될 인재라며 가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귀한 아들의 인생은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한창 학업에 열중하던 고등학교 1학년 시절, 6h25전쟁이 발발한 탓이다. 서울 곳곳이 포탄과 폭음으로 뒤덮였다. 많은 시민이 죽거나 다쳤다. 평화로운 일상이 송두리째 사라졌다. 이택무 어르신의 가족도 전쟁의 화를 피하지 못했다. 강남 봉은사에 떨어진 폭탄으로 이택무 어르신의 둘째 외삼촌이 돌아가셨다. 가족들은 모두 큰 충격에 휩싸였다. 설상가상으로 이택무 어르신의 어머니마저 병 져 누웠다. 이택무 어르신은 지극정성으로 아픈 어머니를 모셨다. 그러나 전쟁통에 약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어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택무 어르신의 곁을 떠나고 말았다.

이택무 어르신은 눈앞이 막막했다. 나라는 전쟁통이었고, 사랑하는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다. 의욕 없이 살아가던 어느 날, 길을 걷던 이택무 어르신은 지프차를 탄 국군 병사들을 보았다. 그들은 큰 목소리로 신병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이택무 어르신의 가슴에 불꽃이 일었다. 전쟁에 참전해 가족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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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아간 원흉을 처단해야겠다는 생각이 이택무 어르신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좌절감이 곧 적을 향한 분노로 바뀐 순간이었다. 이택무 어르신은 곧바로 자원입대 지원서를 적었다. 이웃에 사는 형도 이택무 어르신과 함께 자원입대 지원서를 썼다. 이택무 어르신을 데려간 곳은 종로2가 화신백화점 지하였다. 어림잡아 200명 정도 되는 젊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남자가 150명, 여자가 50명쯤 되었다. 처음엔 놀랐지만, 이택무 어르신은 나라를 지키는 일에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여자가 많이 모인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택무 어르신이 징집된 부대는 스케논스톰부대였다. 적 후방에 침투해 정보를 수집하거나 적군의 보급창고 폭파, 적군 교란 같은 것이 주 임무였다. 이런 비밀스러운 업무에는 여성이 꼭 필요했다. 스파이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정체가 드러날 확률이 낮고, 다양한 장소에 의심 없이 오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택무 어르신은 자신이 첩보부대에 배속되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차를 타고 한참을 가니 강원도 설악산 아래였다. 50DN가 넘게 쌓인 눈밭에 구르며 극한의 훈련을 겪은 뒤에야 심상치 않은 부대에 왔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첩보부대원이 된 이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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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어르신은 각종 위험한 임무에 투입되었다. 무려 56번이나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려 적 후방에 침투했으니, 이택무 어르신의 담력과 용기는 적군을 압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어느 날, 이택무 어르신은 26사단의 요청으로 원산고지전에 투입되었다. 낮에는 한국군이 점령했지만, 밤이 되면 밀려오는 중공군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밤낮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이었다. 밤사이, 고지를 점령한 적군을 몰아내 완전히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했다. 새벽 한시 반, 이택무 어르신은 땅에 밀착해 인기척없이 움직였다. 숨도 함부로 내쉴 수 없었다. 적군에게 발각된다면 그 자리에서 벌집이 될 터였다. 이택무 어르신은 조심스레 적 경계병 근처에 다다랐다. 풀숲에 숨어 목표를 확인했다. 그리고 품 안에서 서슬 퍼런 단도를 꺼냈다. 수없이 훈련했다. 이택무 어르신은 외삼촌과 어머니를 빼앗은 그놈의 이마를 떠올리며, 굳은살이 터져 피가 날 때까지 단도를 표적에 던지는 연습을 했다. 노력은 실전에서 빛을 발했다. 이택무 어르신이 던진 단도에 경계병은 소리도 내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어지는 예광탄 신호. 바닥에 엎드린 전우들은 동시에 일어나 수류탄을 던지며 고지를 향해 내달렸다. 적군은 예기치 못한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이택무 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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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영웅들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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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신의 기습을 선두로 하여 국군은 비로소 원산고지를 완벽히 점령했다. 승전보의 중심엔 늘 이택무 어르신이 있었다. 하루는 서울로 들이닥치는 인민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교량을 기어올랐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금세 힘이 빠져 떨어졌을 테지만, 이택무 어르신은 비범한 엘리트 첩보부대원이었다. 성공적으로 폭탄을 설치한 이택무 어르신은 적군의 트럭이 지나가는 타이밍에 맞춰 폭발 스위치를 눌렀다. 고철이 된 차량과 불타는 식량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이택무 어르신은 적에게 들키지 않고 현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교량과 배급차량이 폭파되었기에 적군은 한동안 굶주리며 험난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설악산 공비 토벌작전은 설악산에 숨어든 공비를 토벌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4인 1조가 되어 신흥사계곡에서 선불동계곡까지 수색해 공비를 토벌했다. 이 작전에서 공비 32명을 사살하고 14명을 생포하는 공을 세웠다.

까치봉 점령작전은 6h25전쟁이 끝나고 60년 동안이나 비밀정보사항이어서 이택무 어르신은 자신이 참전해 공을 세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모두가 기뻐했다.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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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영웅들을 기리며

장에서 외롭게 싸워온 군인들은 더욱 그랬다. 드디어 무거운 철모를 벗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란 기대를 했다. 그러나 이택무 어르신는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복잡미묘한 심경이었다. 더 이상 무고한 생명이 죽지 않아도 되었기에 분명 기쁜 일이었으나, 외삼촌과 어머니의 복수를 해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심지어 동고동락한 전우들의 일부는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북파되어 스파이 임무를 수행하던 중, 휴전이 되어 국경선이 막혔기 때문이었다. 이택무 어르신은 군대를 떠날 수 없었다. 다시 전쟁이 발발하면, 누구보다 먼저 적지에 침투해 전우를 구해야 했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원흉, 우두머리를 끄집어내 윽박지를 것이었다. r당신의 고약한 욕심이 우리 가족의 목숨 값보다 정녕 대단하느냐고.s 여전히 그 놈의 멱살을 쥐고 흔들며 따져 묻고 싶었다.

더구나 스케논스톰부대의 군인은 분명 우리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운 청춘이었으나 국군 소속이 아니었다. 미군이 관할하고 운영했기에 병적을 법적으로 관리하지 않았다. 휴전 이후, 스케논스톰 부대원들은 비로소 국군으로 편입되어 곳곳으로 흩어졌다. 이택무 어르신도 이런 경우 중 하나였다. 6사단으로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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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치된 이택무 어르신은 기존보다 한 단계 낮은 계급을 부여받았다. 항상 선봉장에 서서 적지에 뛰어들었던 이택무 어르신에게 이보다 부당한 처사는 없었다. 다른 스케논스톰 부대원들도 공적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전역을 택한 부대원들은 국군에서 복무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에 다시 징집되어 군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택무 어르신은 나라를 탓하지 않았다. 언젠가 맞이할 기회를 위해 매일 훈련에 매진하며 자신을 갈고닦았다. 하지만 상황은 이택무 어르신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휴전이 길게 이어졌고, 이북으로 좀체 발을 내디딜 수 없었다. 전우들을 구할 수도, 가족의 한을 갚을 수도 없었다. 결국 이택무 어르신은 1956년 3월, 군대를 떠났다. 후련한 마음으로 위병소를 떠나지는 못했다. 군 생활을 더 이어가고 싶었지만, 제대의 명을 받은 이상 군대를 떠나야 했다. 이택무 어르신은 후배들이 자신의 바람을 이뤄주길 바랐다. 사회로 돌아가 결혼을 하고, 토목 일을 하며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뉴스를 확인했다. 뉴스를 볼 때마다, 이택무 어르신은 단검을 던지느라 손 곳곳에 잡힌 굳은살을 검지로 누르곤 했다. 미군 소속의 첩보부대라는 특수성 탓이었을까. 세상은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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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영웅들을 기리며

케논스톰 부대원을 기억하지 않았다.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이들을 기리면서도 스케논스톰부대는 늘 등한시되었다. 그러나 잊혀서는 안 되었다. 함께 목숨을 걸었던 전우들, 심지어 이북에 남겨진 채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이 이택무 어르신의 눈에 밟혔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이택무 어르신은 여전히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본 것, 겪은 것, 들은 것, 느낀 것 그리고 스케논스톰부대의 모든 것들을. 가슴속에 살아 숨 쉬는 전우들과 이미 고인이 된 가족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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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평화를 수호한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가족을 위해 참전한 청년 농부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강영수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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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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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강영수 어르신은 1946년 7월 2일, 남양주에서 태어났다. 강영수 어르신의 집안은 대대로 남양주에서 농사를 지어왔다. 자연스럽게 강영수 어르신도 어릴 적부터 농사일을 배웠다.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농업을 익히던 아이는 자라면서도 학교가 끝나면 곧장 밭으로 달려와 일손을 거들었다. 수완도 빼어났다. 남들보다 손이 빨라 남이 한나절 동안 하는 일을 반나절 만에 끝내기도 했다. 가족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도 강영수 어르신을 좋아했다. 무거운 것을 옮길 때나 수리해야 할 것이 있을 때면 늘 강영수 어르신을 찾았다. 시간이 흘러, 강영수 어르신에게 영장이 날아왔다. 국방의 의무인 만큼 당연히 해결하고 올 심산이었다. 그러나 가족과 마을 사람들이 눈에 밟혔다. 강영수 어르신은 자신의 입대로 부족해질 일손을 걱정했다. 아버지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아들이 군대에 가면 삼 년 동안의 농사를 그르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강영수 어르신은 군대를 미뤘다. 그리고 다시 농사일에 집중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면 다시 영장이 왔고, 강영수 어르신은 또 연기를 신청했다. 반복하다 보니, 사 년이 훌쩍 지나갔다. 정신없이 농사를 짓던 중에 마지막 영장을 받았다. 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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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위해 참전한 청년 농부

입대를 미룰 수 없다는 문구가 맨 아래에 적혀 있었다. 강영수 어르신은 가족, 마을 사람들과 뜨거운 인사를 나누고 논산으로 향했다. 논산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한 강영수 어르신은 2군단사령부 직할 통신대대에 통신병으로 배치되었다. 강영수 어르신은 스물네 살의 나이로 남들보다 늦게 군대에 갔기 때문에 선임병은 물론이고 하사관과 초급 장교들도 강영수 어르신보다 어린 경우가 있었다. 철저한 계급제인 군대이기에 강영수 어르신은 깍듯하게 나이 어린 선임을 우대했다. 그러나 가끔 익살스러운 선임들이 무얼 하다가 아저씨가 돼서 군대에 왔냐며 강영수 어르신을 놀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강영수 어르신은 특유의 넉살을 발휘해 내무반의 분위기를 밝게 만들었다.

군 생활을 충실히 이어가던 강영수 어르신은 1970년 11월 29일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파병에 지원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했다. 부족한 살림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다. 강영수 어르신은 위험을 무릅쓰고 과감히 신청서를 냈다.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아버지는 소중하고 든든한 아들이 전쟁터로 향하는 모습을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었다. 하지만 강영수 어르신은 단호했다. 사지 멀쩡한 대한의 남아로서 나라를 위해 몸 바치는 숙명을 모른 체할 수 없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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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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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위해 참전한 청년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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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이 있듯, 결국 아버지는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강영수 어르신은 주특기를 살려 백마부대 5통신대대에 배치되었다. 전시 상황에서 통신병은 운전병과 더불어 가장 위험한 보직이었다. 상대방의 작전을 무력화하기 위해서는 통신을 차단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늘 무겁고 큰 통신장비를 짊어진 채 움직였기에 적에게 쉽게 노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던 강영수 어르신에게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강영수 어르신이 자대에 배치되던 시기에, 현지 국군 라디오 방송국에서 통신병으로 근무하던 선임이 귀국길에 오른 것이었다. 부대 원사는 일 잘하는 통신병을 수소문했고, 한국에서 성실함을 인정받은 강영수 어르신이 물망에 올랐다. 원사는 강영수 어르신을 찾아가 함께 일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강영수 어르신은 새로운 경험을 할 생각에 가슴이 설레어 바로 수락했다. 그리고 이 결정은 신의 한 수가 되었다.

그렇게 강영수 어르신은 나트랑에 위치한 전시 라디오 방송국을 지키는 업무를 봤다. 방송을 담당하는 아나운서를 호위하며 테으프 수령을 하러 다녔다. 오전 방송은 8시부터 10시, 오후 방송은 5시부터 8시까지였다. 그 외의 시간은 온전히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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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위해 참전한 청년 농부

영수 어르신만의 자유 시간이었다. 강영수 어르신은 자신이 정말 축복받았다고 생각했다.

베트남전쟁을 다룬 영화를 보면, 비처럼 내린 고엽제가 군인들을 적시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강력한 독극물인 만큼 몸 안에 침투해 다양한 합병증을 유발하는 것으로도 악명이 높다. 얼마나 악랄한 성분을 지녔는지, 고엽제는 전우의 피복과 장구류에 그대로 남아 함께 자대로 복귀했다. 당시, 베트남에서 고엽제 안전지대란 없었다. 강영수 어르신이 근무 중이던 라디오 방송국도 그러했다.

강영수 어르신은 파병 생활에 만족하여 일 년을 연장 신청했다. 그러나 1차 철수 명단에 포함되는 바람에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강영수 어르신은 1972년 1월 28일에 고국으로 돌아왔고 당해 9월에 전역했다. 전역 후, 강영수 어르신은 다시 농사를 지을 생각으로 고향으로 향했다. 그러나 비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강영수 어르신이 군대에 간 사이 농사를 지을 땅이 전부 팔렸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강영수 어르신이 군대로 떠나자 일손이 부족해 매해 흉작을 거듭한 것이었다. 강영수 어르신은 느슨했던 마음을 바짝 다잡았다. 곧바로 강영수 어르신은 빙그레에 입사해 청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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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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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위해 참전한 청년 농부

불살랐다. 청년 농부 특유의 부지런함을 발휘해 회사로부터 신임을 얻기도 했다. 1975년 10월 31일, 강영수 어르신은 결혼식을 올리고 한 가족을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다. 회사 일에도, 가정 일에도 강영수 어르신은 항상 최선을 다했다. 더 이상 농사를 짓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부지런하게 살았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건실하게 살아온 강영수 어르신에게 뜻밖의 고난이 닥쳐왔다. 건강이 악화되면서 병원을 다녔다. 처음엔 고엽제 후유증인 줄도 몰랐다. 나이를 먹으니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고통이라 여겼다. 그러나 위 수술을 집도한 의사가 경도 고엽제 후유증일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일러주었다. 잠시 생각에 빠진 강영수 어르신은 이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인생사 새옹지마였다. 농사를 지을 땅이 다 팔려 좌절했지만, 멋진 회사원이 되었다. 편한 보직을 두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억울했지만, 덕분에 전쟁터에서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지나온 삶에 후회가 없을리 없겠지만, 그럼에도 가족을 위해 나라를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강영수 어르신은 인생의 황혼에서도 깨달음을 얻는 지혜 깊고 겸허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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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품은 전우들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김병기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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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김병기 어르신은 경상북도 문경에서 음력 1945년 2월 20일에 태어났다. 격동의 시기였다. 김병기 어르신이 다섯 살일 때 6h25전쟁이 터졌다. 어른이 된 김병기 어르신은 1967년 3월 9일에 군대에 입대했다. 생각보다 군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기강과 군기를 잡는다는 이유로 얼차려를 받았지만, 적어도 밥을 굶는 일은 없었다. 김병기 어르신은 가난에 허덕이는 유년 시절을 보냈기에 끼니와 옷, 잘 곳까지 제공해주는 군대에 만족감을 느꼈다. 열심히 군 생활을 하다보니 어느덧 군대가 집처럼 느껴졌다. 적응을 마친 김병기 어르신은 1967년 12월, 하사관으로 임관하여 직업 군인이 되었다. 나라에 헌신한다는 애국심을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김병기 어르신은 양평에 있는 20사단 60연대 수색중대에 배치되었다. 수색중대는 다른 부대보다 먼저 작전지에 침투해 적군을 교란하거나,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장소를 정찰하고 경계하는 것이 주 역할인 부대였다. 그런 만큼 아무나 갈 수 없는 부대였다. 최정예 군인으로 선발되어 혹독한 훈련을 받아야 비로소 수색중대 훈장을 가슴에 달 수 있었다. 김병기 어르신은 당당히 모든 관문을 통과한 최정예 수색대원이었다.

험난한 임무를 수행하던 어느 날, 김병기 어르신의 군 생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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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품은 전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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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뒤바꾼 사건이 벌어졌다. 야심한 밤에 철책 주변을 걸으며 경계근무를 서던 김병기 어르신은 철책 너머의 수풀이 낯설게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인기척인지 동물의 기척인지, 아니면 흩날리는 바람인지 좀체 구별되지 않았다. 무작정 총구를 겨눌 수는 없었기에 김병기 어르신은 위치를 기억하고 막사로 복귀했다. 잠시 뒤 비상 사이렌이 울렸다. 간첩이 침투했다는 것이다. 실제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김병기 어르신은 병사들을 데리고 기이함을 느꼈던 장소로 내달렸다. 도착하니 뜯어진 철책과 바닥에 놓인 가방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김병기 어르신은 가방을 챙기고 수풀이 꺾어진 곳으로 사라진 간첩들을 추격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은밀하게 침투 중이던 간첩들을 발견했다. 총격전이 벌어졌다.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일념으로 김병기 어르신은 처절하게 그들과 맞섰다. 혹독한 훈련이 빛을 발했다. 간첩 세 명 중, 두 명을 사살하고 한 명을 생포했다. 엄청난 공훈이었다. 간첩을 잡은 군인, 당시 시대상에서는 전쟁 영웅과 비견될 정도로 명예로운 공적이었다. 그러나 찬사를 받은 사람은 김병기 어르신이 아니었다. 지휘관인 중대장이 자신의 덕으로 간첩들을 생포했다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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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품은 전우들

그 때문에 전투 현장에서 목숨을 걸고 간첩을 생포한 김병기 어르신의 이야기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항의하고 싶었지만,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걸 깨닫고 포기했다. 부사관은 명백히 장교의 부하였기에 함부로 대들다가는 하극상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부당한 현실에 김병기 어르신은 큰 회의감에 빠졌다. 의욕을 잃고 하루하루를 보내던 김병기 어르신은 베트남전쟁 파병 소식을 접했다. 김병기 어르신은 주저하지 않고 신청서를 제출했다. 부당한 현실을 겪은 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던 마음이 한 청년을 머나먼 타국으로 이끌었다.

김병기 어르신은 1969년 1월 5일,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베트남으로 가는 배 안에서 김병기 어르신은 긴장해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가 상상되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간첩을 생포한 경험이 있어도, 사람이 쉴 새 없이 죽어 나가는 전장에 투입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러나 선택을 무를 순 없었다. 이왕 나라에 몸 바치기로 결심했으니,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내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김병기 어르신은 베트남 디안에 있는 비둘기부대에 배치되었다. 비둘기부대는 한국군 건설지원단으로 후방에서 시설 복구와 건설, 대민 지원을 담당하는 부대였다. 예상과 달리, 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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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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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어르신은 다소 무탈한 파병 생활을 보냈다. 비행장에서 105NN 포를 담당하는 포반장으로 근무했는데, 국토가 세로로 긴 형태인 베트남의 특성상 후방에서 포격을 지원할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었다. 김병기 어르신은 비행장 경계 근무와 한국에서 갓 파병 온 군인들의 현지 교육을 담당했다. 총알, 포, 수류탄, 크레모아 등 고위력 살상 무기를 다루었기에 신병들의 기강을 확립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어느 하루, 김병기 어르신은 자신이 담당하는 신병 교육을 동기에게 맡긴 적이 있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김병기 어르신이 담당하는 교육대에는 매주 신병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가르친 탓에 이골이 나 하루 정도는 쉬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필이면 그날 사고가 났다. 동기에게 맡긴 신병 교육 현장에서 신병의 실수로 크레모아가 터진 것이다. 크레모아는 대인용 산탄 지뢰로, 스위치를 누르면 쇠구슬 700개가 한꺼번에 발사되어 근방을 초토화하는 무지막지한 무기다. 이 크레모아 산탄 수백 발이 훈련병들 사이에서 터진 것이다.

신병의 작은 실수로 인해 김병기 어르신 대신 교육을 지도했던 동기를 포함해, 그 자리에 있던 70명 훈련병이 전부 몰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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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품은 전우들

당했다. 사고 현장으로 달려간 김병기 어르신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피범벅이 된 시체 파편들이 난잡하게 흩어져 있었다. 형체를 알아보는 것조차 힘들어 신원 파악에 애를 먹었다. 사고를 수습한 김병기 어르신은 큰 죄책감에 빠졌다. 그날 순리대로 자신이 교육을 맡았다면 동기가 죽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죽은 동기에게 미안했다. 무엇보다 떠나간 신병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김병기 어르신은 누구보다 신병 교육에 능숙했다. 원래대로 내가 교육했다면 혹여나 사고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김병기 어르신을 무너뜨렸다.

1970년 1월 5일, 김병기 어르신은 귀국길에 올랐다. 다른 전우들은 가족을 만나러 갈 생각에 한껏 설레었지만, 김병기 어르신은 비참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돌아오는 배에서 제1공수특전단 소속 간부에게 영입 제안을 받았다. 군인으로서 전우들을 잃은, 한이 서린 김병기 어르신의 눈빛이 마음을 끈 모양이었다. 김병기 어르신은 큰 고민 없이 공수부대원이 되기로 했다.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치기 위해서는 몸이 힘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상대로 공수부대 생활은 이전의 군 생활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조금만 몸이 흐트러지면 즉각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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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먹이 날아왔다. 이유 없이 매 맞는 날이 일상이었다. 훈련도 거칠었다. 목숨을 건 공수낙하훈련을 16번이나 수행했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있었던 그날의 비극은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몸은 몸대로 힘들었고, 마음은 마음대로 힘들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김병기 어르신은 더 이상 군 생활을 이어갈 수 없었다. 1970년 8월, 김병기 어르신은 42개월의 파란만장한 군 생활을 마무리 지었다.

김병기 어르신은 사회에 나와 바쁘게 직장에 다니고 가정을 꾸리며 전쟁의 기억을 지워내려 애썼다. 시간의 힘이 그날의 기억을 차츰 옅어지게 했다. 희미한 기억, 사고의 참상이 다시 뇌리에 떠오른 건 건강 검진에서 발견된 패혈증 증세 때문이었다. 김병기 어르신의 참전 기록을 살펴본 의사는 고엽제 후유증으로 패혈증 증세가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베트남전쟁, 군대에서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찰거머리같이 김병기 어르신을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김병기 어르신은 그 순간과 당당히 마주하고자 한다. 이젠 잊으려하지 않고 남은 평생을 기억하며 살아가겠다고, 떠나간 전우들에게 약속했다. 김병기 어르신은 오래전, 먼저 떠난 이들을 가슴에 품으며 그들의 몫을 대신해 더 힘차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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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한 아름다운시절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故안호진 선생의 유족박순영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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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110

남편과 함께한 아름다운 시절

전라북도 남원이 고향인 박순영 어르신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구리에 사는 언니네로 와 직장을 다녔다. 2남 4녀 가운데 다섯 째였기 때문이 위로 언니가 네 명이나 있었다. 언니들이 모두 사회에서 자리를 잡거나 출가를 해, 박순영 어르신은 언니들을 따라 서울로 올라와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에는 공장이 많아 취직이 비교적 쉬었다. 게다가 비슷한 또래가 많아 친구도 쉽게 사귈 수 있었다. 함께 일하고 점심으로 큰 솥에 라면을 끓여 먹는 것만으로 즐겁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서울에 올라온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는 일상이 단조로웠다. 회사와 집을 오갔고, 가끔 친구들과 나들이를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이웃에 사는 아저씨가 언니를 통해 중매를 서겠노라고 했다. 박순영 어르신에게 어울리는 좋은 남자가 있다는 거였다. 남자를 만날 생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어르신은 그 제의를 거절했다. 하지만 김제가 고향인 그 이웃 아저씨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찾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한 사내가 박순영 어르신 주위를 서성거렸다. 처음 안호진 선생을 만났던 날을 박순영 어르신은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안호진 선생이 구리시 교문동에서 중국집을 하고 있다는 건 중매를 서겠다며 찾아온 이웃집 아저씨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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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들어 알고 있었다. 아저씨는 잊을만 하면 찾아와 안호진 선생을 만나보라고 보챘다. 아저씨는 박순영 어르신 곁에서 안호진 선생의 자랑을 늘어놓았고, 멀리서 안호진 선생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거였다. 박순영 어르신은 안호진 선생이 누구인지 궁금하거나 무엇을 하는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박순영 어르신의 무관심과는 상관없이 안호진 선생은 거의 매일 박순영 어르신이 있는 곳을 찾아왔다. 당시 제약회사 공장을 다니고 있었던 박순영 어르신은 안호진 선생의 시선을 뒤로 하고 친한 동료 다섯 명과 어울려 한강변이며 시내로 놀러다녔다.

나중에 알았지만 해병대 정신은 끈질겼다. 싫다고 해도, 무관심해도 좋다고 따라다니는 사람을 뿌리칠 냉정함이 박순영 어르신에겐 없었다. 한번 만나보자고 마음을 바꾸니 사람이 좋아 보였다. 한 번 두 번 만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사이, 두 젊은 남녀에게서 사랑이 꽃피었고 결국 만남은 결혼으로 이어졌다. 남편 안호진 선생은 1944년 9월 2일 태어나 1965년 8월 30일 해병대에 입대해 이듬해인 1966년 08월 11일 무더운 한여름에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청룡부대에서 맹활약을 펼친 뒤 1967년 6월 21일 귀국해 남은 군 생활을 무사히 마쳤다. 청룡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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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한 아름다운 시절

대는 베트남전쟁에 파병된 해병대다. 1965년 9월 20일 해병대 제1사단 병력을 바탕으로 새로 창설한 부대가 r청룡부대s라는 별명이 붙여진 제2여단이었다. 청룡부대는 베트남전쟁에 한국군 최초 전투병력으로 참전한 만큼 수많은 전투에서 승전을 기록했다. 베트남에 참전한 육 년 오 개월 동안 여단급 작전 66회, 대대급 작전 109회, 소부대작전 15만 1,347회를 치르며 무적불패의 신화를 만들었다. 3만 7,304명이 파병되었는데 이 가운데 1,156명이 전사하고, 2,702명이 부상당하는 아픔이 있었지만 여전히 무적해병이라는 자부심이 이어지고 있다. 안호진 선생도 평소 해병대라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자신이 맡은 일은 열심히 하고 주변을 보살피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남자 중의 남자였다. 박순영 어르신은 처음 안호진 선생을 보면서 패기와 열정을 엿볼 수 있었고, 그 점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t그때 왜 그랬는지. 내가 눈이 삐어도 단단히 삐었지. 결혼을 했더니 딸린 식구가 여럿이었어. 시어머니는 빨리 돌아가시고, 시아버지와 손위 시누이 한 명, 시동생 두 명이 한 집에서 살지 뭐야. 시집 가자마자 시집살이가 시작되었지. 게다가 작은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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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114

남편과 함께한 아름다운 시절115

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자식까지 와 있었어. 내가 다 키웠지.u

친구들 얼굴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나오던 스무 살 젊은 시절에 사랑을 찾아 청춘의 봄날을 뒤로 하고 결혼했더니, 사랑은커녕 시집살이가 기다리고 있었다며 지난 날을 추억하는 박순영 어르신. 그렇다고 행복한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남편이 하는 중국집 안동장은 장사가 잘 되었다. 일손이 늘 부족했기 때문에 낮에는 가게에 나가 장사를 돕고 저녁이면 퇴근해 집안일을 해야 했다. 청춘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게 세월이 빨랐다.

남편에게 해병대는 무의식에도 남아 있었다. 밤이 되면 잠꼬대를 했다. 아마 베트남전쟁에 참전했을 때 상황이 꿈에 나타나는 듯했다.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면 전투를 하는 상황이었다. 잠꼬대만 하는 게 아니었다. 갑자기 주먹을 휘두르고 몸부림을 쳤다. 곁에서 잠을 자다 허공으로 휘두른 주먹에 맞기도 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시간이 지나니 익숙해졌다. 하지만 젊어 패기 넘치는 모습이 나이 들어서까지 계속 좋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술자리에서 옆 테이블 손님들과 싸움이 일어날 때면 민망하고 밉기도 했다. 합의금을 물어줄 때가 여러 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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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함께한 아름다운 시절

작은 일화지만 지나온 세월을 뒤돌아보면 참으로 힘들고 잊히지 않는 일도 많았다. 둘째를 가지고 산달이 가까워졌을 여름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7월이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버스도 잘 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해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만삭의 몸으로 남원까지 내려갔다. 몸이 무겁다고 그냥 앉아 있을 수 없어 손님들을 맞이하고 설거지도 했다. 어떻게 상을 치렀는지 모르게 시간이 지났다. 운구차가 장지로 떠나 잠시 한숨을 돌리는데 산통이 왔다. 친척들이 모두 산파가 되어 아이를 받아주었다. t그렇게 정신 없이 살았어. 더구나 예전에는 돈도 잘 벌었어. 이렇게 벌면 구리에 있는 땅을 전부 살 수도 있겠다, 생각했으니까. 그때는 투자라는 걸 몰랐어. 애 아빠가 어련히 잘 하겠어, 하고 생각했지. 힘들게 돈을 버니까 현금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어. 영악하게 땅도 사고 건물도 샀더라면 늙어서 고생을 덜 했을텐데 말이야. 무엇보다 애 아빠가 심장병을 앓다가 일찍 세상을 떴는데, 돈이 좀 풍족했으면 약이라도 더 써봤을텐데. 그게 늘 마음에 남고 미안하지.u

구리가 터가 좋고 인심이 좋아서인지 다른 곳으로 확장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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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전을 하면 손님이 없어 문을 닫았는데, 다시 구리에서 가게를 하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구리에서 돈을 벌어, 다른 곳에 가서 까먹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보니 재산을 많이 모으지 못했다. 그 바람에 안호진 선생이 늙어 병을 얻었는데도 제대로 치료를 못했다고 한다.

2010년 남편은 심장병으로 향년 육십육 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박순영 어르신은 안호진 선생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로는 홀로 중국집을 운영하며 남편 병간호까지 했다. 참으로 고된 세월이었다. 하지만 아들들이 많은 위안이 되었다. 해병대였던 씩씩한 남편이었기에 늘 건강할 줄 알았는데. 술도 많이 마시고 그만큼 일도 열심히 했던 그였으니까. 남편은 특히 짬뽕을 잘 만들었다. 다른 집보다 해물이 두 배는 더 들어가니 맛이 없을 수 없었다. 지금도 남편이 해주던 짬뽕이 그립기만 했다. 고된 시절을 이기게 해주었던 아름다운 추억이 여전히 가족을 지켜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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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한 나의 벗, 전우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서병원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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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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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베트남전쟁이 끝난 지도 어언 오십 년이 흘렀다. 오랜 시간이 지났기에 잊힐 만도 했다. 그러나 서병원 어르신은 아직도 머나먼 타국에서의 기억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가끔 옛 기억이 흐릿해질 때면, 서병원 어르신은 전우들과 함께 나눈 추억록을 꺼냈다. 추억록에는 청춘의 순간이 담긴 사진과 글이 아련하게 적혀 있었다. 서병원 어르신은 천천히 추억록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고국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담긴 시 한 편을 발견해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두고 온 고국, 한탄강의 비애를 듣는다

여기 열하의 나라, 이름 없는 고지에서

구릿빛 따이한의 병사는 향수에 포위가 되어

고국의 산천을 방황하는가 보다

지난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찜통 같은 더위, 고엽제를 맞아 말라비틀어진 초목들, 질퍽거리는 늪, 생명을 위협하는 거머리와 전갈들. 열악한 상황이었다. 언제 적군이 급습할지 모르기에 늘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하지만 서병원 어르신은 물러서지 않았다. 총알과 파편이 어지럽게 오가는 전쟁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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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한 나의 벗, 전우

서병원 어르신은 맹렬하게 싸우며 전진해 나갔다. 무서운 순간도, 두려운 순간도 있었다. 40LH에 달하는 완전 군장을 내팽개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고개를 들어 전우를 바라봤다. 힘든 나날이 이어졌지만 전우들은 밝게 웃으며 서병원 어르신에게 농담을 던졌다. 서병원 어르신도 장난을 치며 화답했다. 그 시절, 머나먼 타국에서 대한의 청춘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생사의 순간을 함께했다. 할아버지가 된 서병원 어르신은 눈을 감고 먼저 떠나간 전우들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모두 어울려 술이라도 한잔 기울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서병원 어르신은 1969년 10월 4일, 논산훈련소로 입대했다. 기초군사훈련을 수료하고 강원도 철원에 있는 8사단에 배치되었다. 철원의 악명 높은 추위와 혹독한 훈련이 서병원 어르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뚜기부대라는 별명답게 군대는 서병원 어르신을 오뚝이처럼 만들었다. 서병원 어르신의 주특기는 무반동포였다. 무반동포는 땅이나 차량에 거치하거나, 어깨에 메고 발사하는 대포의 일종이었다. 훈련에 임할 때마다 무지막지한 무게의 포신이 서병원 어르신의 어깨를 짓눌렀다. 이를 악물고 버텼다. 본인이 힘든 만큼 고향에 있는 가족들이 안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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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지낼 수 있다고 여겼다.

나라와 가족을 위해 고단한 나날을 보내던 중, 서병원 어르신은 베트남전쟁 파병 소식을 접했다. 머나먼 타국에서 서병원 어르신 또래의 전우들이 맹렬히 싸우고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총알이 빗발치는 월남의 전쟁터와는 다르게, 한국은 상대적으로 평온했기 때문이었다. 파병 모집 홍보물을 본 서병원 어르신은 끓어오르는 심정에 사로잡혔다. 전우들은 연고도 없는, 바다 건너 나라에서 싸우고 있었다.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대의. 서병원 어르신은 과거 6h25전쟁 때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참전한 수많은 나라의 젊은이들을 떠올렸다. 가만히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청춘의 혈기가 가득한 서병원 어르신은 곧장 베트남전쟁 파병 지원서를 제출했다.

서병원 어르신은 1970년 10월에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우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부푼 꿈을 안고 다낭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닌호아로 이동했다. 서병원 어르신이 배치된 부대는 9사단 29연대 소속의 화기소대였다. 29연대는 박쥐부대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했다. 그곳에서 서병원 어르신은 무전병으로 활약했다. 세간의 인식으로, 무전병은 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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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한 나의 벗, 전우

과 직접 전투를 벌이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통신을 무력화해야 승기를 잡을 수 있기에, 전장에서 무전병들은 늘 1순위 사살 목표였다. 게다가 통신 장비는 어마어마하게 무겁고 컸다. 몸을 숨기기도, 빠르게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항상 죽음의 위험이 서병원 어르신을 쫓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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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서병원 어르신은 전장 곳곳을 오가며 조국에 헌신했다. 한번은, 땅굴 안에 숨어 있는 적군을 포로로 잡았다. 썩은 내가 코를 찔렀다. 냄새가 너무나 고약했기에 어디선가 시체가 부패한 줄로 알았다. 포로에게서 나는 냄새였다. 급습을 위해 땅굴을 파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버텼기 때문이었다. 서병원 어르신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자신의 발밑에서, 나무 위에서, 강물 아래에서 적들이 급습할 수도 있었다. 불안이 심해질 때면 눈치 빠른 전우들이 서병원 어르신에게 와 긴장을 풀어주었다. 같이 노래를 부르거나 고국에서 기다리는 애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전우들과 이야기 나누며 한 데 어울리면 어느새 두려움은 눈 녹듯 사그라졌다.

작전을 충실히 수행하던 서병원 어르신은 혼바산전투에 투입되었다. 혼바산은 큰 바위산으로 울창한 나무들과 가시덤불로 뒤덮여 있었다. 고지 근처 급경사 지역에는 많은 동굴이 있었는데, 적군들은 그곳에 숨어 기습을 노렸다. 혼바산 정상에 있는 큰 바위를 청룡바위라고도 불렸다. 이곳에서 작전을 수행하던 청룡대대 부대원이 적군에게 급습당하여 몰살당한 사건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그만큼 위험한 작전지에 서병원 어르신이 투입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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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든한 나의 벗, 전우

서병원 어르신은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가파르고 험난한 바위산을 올랐다. 이리 뛰고, 저리 뛰니 무릎이 남아나지 않았다.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끊임없이 다리를 움직였다. 무전병인 서병원 어르신이 전사하면 소속 부대원들이 모두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고국에서 애인과 가족이 기다리고 있는 전우들을 살리기 위해 서병원 어르신은 주저앉을 수 없었다. 그렇게 여러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서병원 어르신은 1971년 7월 6일, 귀국길에 올랐다. 남겨두고 온 전우들이 눈에 밟혔지만, 철수 명령이 떨어졌는지라 어쩔 수 없었다. 고국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서병원 어르신은 육지를 바라보며 이 년을 함께 지낸 전우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전우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서병원 어르신은 꼭 모두 살아 돌아와 술잔을 기울이자고 말했다. 전우들은 기필코 그러겠노라고 화답했다. 끝내 약속을 지킨 전우들도 많았지만, 그렇지 못한 전우도 있었다. 살아 돌아오지 못했지만, 그들이 남긴 사진과 글은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서병원 어르신의 마음에도 떠나간 전우들은 영원히 남아있 을 것이다. 오늘도 서병원 어르신은 떠나간 이들을 떠올리며 추억록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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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그대와 남겨진 이들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故박순길 선생의 유족여양래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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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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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수십 년도 더 된, 까마득한 옛날이지만 여양래 어르신은 박순길 선생과의 첫 만남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여양래 어르신은 우이동계곡에서 친구들과 밥을 해 먹으며 휴일을 만끽하고 있었다. 멀리서 훤칠한 청년 둘이 수줍게 다가오고 있었다. 여양래 어르신은 인기척을 느꼈지만,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모르는 척을 했다. 거리가 가까워졌고, 한 청년이 여양래 어르신과 친구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빵을 건네며 같이 먹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긴장했는지, 빵을 든 손이 부드럽게 떨렸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웠다. 여양래 어르신과 친구들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렇게 청춘 남녀들은 한데 모여 즐겁게 어울렸다.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해가 저물어갔다. 청춘들은 계곡에서 내려와 각자의 곳으로 흩어졌다. 한참이 지나, 여양래 어르신은 금강양화점에 가기 위해 친구와 광화문을 찾았다. 신호를 기다리며 친구와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멋진 교통 제복을 빼입은 남자가 호루라기를 불며 여양래 어르신에게 다가왔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 년 전 우이동계곡에서 수줍게 말을 걸어왔던 그 청년, 박순길 선생이었다. 어린 시절에 스쳐 간 여러 기억 중 하나로 잊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열혈남아 박순길 선생은 인연의 끈을 붙잡아 운명으로 매듭짓기 위해 여양래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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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그대와 남겨진 이들

을 기억해냈다. 여양래 어르신과 박순길 선생은 편지를 주고받기 위해 주소를 교환했다. 알콩달콩한 연애의 시작이었다. 어느 순간 편지는 러브레터가, 산책은 데이트가 되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사랑은 결실을 이루었다. 여양래 어르신과 박순길 선생은 1975년 12월 29일 성대한 결혼식을 열고 백년가약을 맺었다. 서른셋 박순길 선생과 스물다섯 여영래 어르신은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갔다. 분양받은 열여덟 평 고덕주공아파트에 일곱 식구가 모여 살았지만, 든든한 남편과 함께였기에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퇴근길에 한잔 걸치고 들어온 박순길 선생은 아이들에게 줄 과일과 과자를 한가득 손에 든 채 r양래야 낭군님 오셨다.s며 애교 섞인 주정을 부리곤 했다. 결혼기념일도 잊지 않고 챙겼다. 12월 29일이 되면, 회사 근처 식당으로 여양래 어르신을 불러 고기를 구워주었다. 그리고 덕수궁 돌담길이나 여의도공원을 걸으며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함께 걸으며, 박순길 선생은 종종 하수영의 x아내에게 바치는 노래y를 불러주었다. 여양래 어르신에게 한없이 자상한 박순길 선생이었다.

그러나 행복했던 순간도 잠시였다. 잠들어 있던 전쟁의 상흔이 먹구름처럼 몰려와 박순길 선생과 가족들을 덮치려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박순길 선생의 오른쪽 목에 종기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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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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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그대와 남겨진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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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이 생겨났다. 차일피일 미루다 병원에 다녀온 박순길 선생은 별 것 아닌 비지밥(피지 낭종)이라며 걱정하는 여양래 어르신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상태는 심각해졌다. 처음에 비지밥이라고 했던 종기는 사실 폐암 증상이었다. 게다가 이미 곳곳으로 전이가 되어 수술도 할 수 없었다. 여양래 어르신은 남편을 포기할 수 없었다. 부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원자력병원을 찾았다. 박순길 선생은 의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소상히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머뭇거리던 의사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t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u 낮고 진중한 목소리였다. 갑작스러운 시한부 선고에 박순길 선생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여양래 어르신과 길고 괴로운 이야기를 나눈 끝에 퇴원을 결심했다. 항암을 할 수는 있지만, 연명 치료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순길 선생은 하루라도 더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소중한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1990년 12월 20일, 박순길 선생은 10개월간의 투병 생활 끝에 영면에 들었다.

남편이 떠난 뒤, 여양래 어르신은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 여길 보아도, 저길 보아도 집안에서 온통 박순길 선생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r남편이 누워 있기만 해도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s라는 생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한 달에 한 번, 여양래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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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그대와 남겨진 이들

르신은 아이들을 데리고 구리 공동묘지에 갔다. 아이들 없이 혼자 온 적도 있었다. 여양래 어르신은 박순길 선생의 묘비를 바라보며 남몰래 원망하기도 했다. 왜 자신을 두고 먼저 떠났냐고 남편에게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는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강했다. 아비를 잃은 채 남겨진 아이들이 눈에 밟혔고, 어머니로서 자식들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이 여양래 어르신을 일으켜 세웠다. 여양래 어르신은 가정부로 일하며 생계를 책임졌다. 고맙게도, 아이들은 정말 올곧게 자라주었다. 겨울이면, 초등학교 1학년 막내딸은 다른 집의 집안일을 하고 돌아온 엄마를 돕고자 찬물에 언 손을 호호 불며 설거지를 도맡았다. 그 모습이 대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 한번은 막내딸을 꼭 끌어안고 운 적이 있었다. 딸은 오히려 엄마를 안심시켰다.

t엄마, 나 괜찮아. 왜 울어. 엄마는 울지 마.u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아이들 덕분에 살아갈 수 있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각자 해야 할 일을 척척 잘 해냈다. 여양래 어르신의 생일날이면, 초코파이와 과자를 사 소박한 케이크를 만들어 깜짝 생일 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어쩌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은 늘 아이들을 칭찬했다. 고초를 겪은 가족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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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여양래 어르신과 아이들은 서로 의지해가며 험난한 삶을 헤쳐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여양래 어르신은 동아일보에서 고엽제 후유증 피해자를 제보받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족한 살림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했기에 여양래 어르신은 의정부 보훈처로 달려가 남편의 파병 정보를 적어냈다.

r박순길, 35사단 맹호부대 239호(포병대), 파병 기간 1966년 8월 19일~1969년 7월 26일.s

서류를 한참 들여다본 담당자는 박순길 선생이 고엽제 후유증 피해자 대상에 해당한다며 1차 서류를 작성해 오라고 했다. 그러나 본인이 사망했기에 서류 처리가 힘들 수도 있다는 사견을 덧붙였다. 그러나 이 정도 염려로 포기할 여양래 어르신이 아니었다. 시간을 쪼개어 이곳저곳을 오가며 동네 주민과 남편 친구의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여양래 어르신은 병명, 증상, 사인 등이 적힌 소견서를 꼼꼼히 챙겨 보훈처에 제출했다. r안 되면 어떡하나.s 심란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1995년 2월, 각고의 노력 끝에 박순길 선생은 고엽제 피해자로 인정받았다. 그 덕분에 연금을 수령 받는 건 물론이거니와, 아이들의 학비까지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서류 신청 6개월 만에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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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그대와 남겨진 이들

값진 결과였다. 다음 날, 여양래 어르신은 연금통장을 들고 박순길 선생의 산소를 찾았다. 그리고 묘비 위에 통장을 올려두고 남편에게 말했다.

t여보, 당신 덕분에 아이들 대학까지 보낼 수 있게 되었네. 그동안 당신한테 원망도 많이 했는데 미안하고 고맙고j.u

박순길 선생은 하늘에서도 가족을 책임지는 든든한 남편이었다.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낸 여양래 어르신은 일을 그만두고 만학도가 되어 대학 졸업장까지 땄다. 수많은 역경의 시기를 이겨냈으니 여생을 편하게 즐기면 되었다. 그러나 왜 고난은 가장 행복한 순간에 닥쳐오는 것일까. 여양래 어르신은 2018년 10월, 건강검진에서 백혈병 판정을 받았다. 원망할 사람이 없어 하늘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이 미웠다. 죄라고는 열심히 산 죄밖에 없었다.

그러나 삶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믿음직한 아들, 딸들이 여양래 어르신의 치료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나섰다. 마냥 귀엽게 장난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장성하여 늙은 어미를 부양했다. 여양래 어르신은 힘들게 아이들을 기른 지난날이 떠올라 마음이 뭉클했다. 힘겨운 투병 생활. 골수 이식과 수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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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의 투석. 험난한 치료 과정을 견딘 후에 병원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온갖 역경을 극복해 낸 여양래 어르신을 병마 따위가 굴복시킬 순 없었다.

건강이 많이 회복된 여양래 어르신은 아들딸들과 두물머리로, 구리코스모스축제로 놀러 다니며 여생을 행복하게 보내고 있다. 박순길 선생을 만나러 대전현충원에도 다녀오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지난날의 설움은 눈 녹듯 사라지고 감사한 마음만 남았다. 여양래 어르신은 남편에게 안부를 전한다. 지금의 행복을 이룰 수 있게 해주어 정말 고맙다고. 그리고 안부를 묻는다. t당신은 잘 지내고 있소?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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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지켜냈다는자부심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정연혁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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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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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정연혁 어르신은 2남 4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농삿일을 했기 때문에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삶에 만족했다.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걸로 확신했다. 그만큼 농사 짓는 일이 즐거웠다. t시골에서 농삿일을 열심히 했지. 군대 영장도 안 나오고 해서 그냥 있었는데, 스물다섯 살 때쯤 되니까 영장이 나오더라고. 동기들은 모두 군대에 가고 없었지. 혼자 늦게 갔어.u

1967년 12월에 군대에 갔다.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포천 일동면 8사단으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보직은 탄약병. 군대에서 무기 체계를 운영하고 관리하기 때문에 가장 기본이면서 중요한 보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아침에 기상하면 탄약창고로 가서 탄약의 상태를 점검하고 유효기간이 만료된 탄약이나 손상된 탄약을 판별해 폐기처리하거나 보수했다. 훈련이 있을 때면 탄약을 운반하고 분배하는 일을 했다. 선임이 되면서는 신병들한테 탄약의 올바른 사용법이나 조작법을 교육하기도 했다. 탄약창고는 안전하게 관리되어야 하기 때문에 부대 안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있었고, 벙커 안에 보관했다. 벙커는 흙으로 덮어 외부에서 보았을 때 잘 알아보지 못하게 위장되어 있었다. 탄약병이 벙커 위에 난 풀을 베거나 허물어진 곳이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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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지켜냈다는 자부심

보수도 해야 했다. 보통 대대급에서도 탄약병은 몇 명 없기 때문에 혼자서 작업할 때가 많았다. 정연혁 어르신은 농삿일을 해본 경험과 솜씨가 있었기에 탄약창고를 관리하는 건 아주 쉬운 일로 느껴졌다. 탄약 관리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훈련 많은 보병부대에 배치되었지만 탄약병은 소총수처럼 훈련이 많은 것은 아니어서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군대생활을 할 수 있었다.

군대에 입대한 지 삼 년이 지나고 다시 봄이 되었다. 해가 한 번만 더 바뀌면 제대를 할 수 있었지만, 사회에 나갈 준비가 더 필요해 곧바로 제대하고 싶지 않았다. 마침 베트남전쟁에 갈 지원자를 모집했다. 정연혁 어르신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지원했다. 전쟁터는 위험했지만, 위험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쟁에 투입되기 위해서는 다시 교육을 받아야 했다. 베트남전쟁 파병을 위해 강원도 화천군에 있는 오음리교육장으로 향했다. 오음리는 바람버뎅이골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배후령 너머 첩첩산중에 있는 산간지역이다. 이 훈련장은 국회에서 월남전 파병안이 통과된 1964년부터 1973년까지 8년 동안 월남전 파병 한국군 32만 명의 실전 훈련장이었다. 오음리교육장에는 전국에서 차출된 병사와 장교로 가득했다. 처음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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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터로 가는 장병들을 위해 기초적인 베트남의 문화와 기후, 전투훈련과 전쟁 규칙 등을 6주 동안 교육시켰다. 교육이 끝나면 춘천으로 나와 부산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부산항으로 갔다. 태어나 한 번도 외국을 가보지 못한 정연혁 어르신은 홀로 수송선을 타고 타국땅으로 떠났다. 살아서 돌아올지 알 수 없는 고국이 멀어져갔다. 수송선은 엄청나게 큰 함정이었다. 오랫동안 배를 타는 것도 쉬운 게 아니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남지나해를 지나 베트남으로 가는 선박을 탄 장병은 모두 뱃멀미를 했다. 배 안에서 나오는 식사는 진수성찬이었다. 고기와 야채, 열대과일까지 푸짐했지만 오랜 뱃멀미로 식욕이 없었다. 베트남으로 떠나는 배 안은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가끔 낯익은 얼굴을 만나면 힘이 났다. 같이 훈련을 받은 전우도 반가웠지만, 특히 우연히 목격한 남진 가수가 반가웠다. 위문공연을 떠나는 공연단도 정연혁 어르신과 같은 배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유명한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간다고 생각하니 한결 위로가 되었다.

일주일 이상 배를 타, 이제 그만 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질 무렵 베트남에 도착했다. 처음 도착한 곳은 나트랑이었다. 나트랑에서 1박을 하고 다시 배는 떠났다. 다음날 배에서 내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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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자부

조국을 지켜냈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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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현지부대에서 나온 차량이 대기하고 있었다. 곳곳에 베트콩이 매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장한 병력의 호위를 받으면서 비포장도로를 달려 자대로 향했다.

밀림 속에 매복하고 있는 배트콩의 접근을 막기 위해 무장병력은 사방으로 총을 난사했다. 차는 무더운 여름을 가르며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총알이 날아가 밀림 어딘가에 부딪히는 높고 가는 총소리는 전쟁터에 왔음을 실감나게 했다. 도착한 곳은 뚜이호아 지역에 있는 보병 28연대 백마부대 도깨비연대였다. 탄약병 보직은 베트남에서 105NN 포병으로 바뀌었다. 베트남전쟁에 가면 일반 사병보다 월급을 더 많이 준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지원했는데, 직접 베트남에 와 보니 한국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사방에서 들리는 총소리와 매일 보이는 전우들의 시신들. 그곳은 그야말로 생사를 오가는 전쟁터였다. 정연혁 어르신이 투입된 전장은 혼마산이라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1년을 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 혼마산은 위험하기로 악명 높은 산이었다. 이런 곳에 배치되다니 힘겨운 베트남 생활이 되겠다는 것을 예감했다. 혼마산이 어떤 곳인가. 안정효 소설 ~하얀 전쟁에도 나온다. 소설은 혼마산을 가장 치열하고 험난한 죽음의 그림자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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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지켜냈다는 자부심

른거리는 숲으로 그리고 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에서 배우 이경영이 연기한 r변진수s는 한국으로 철수를 앞두고 마지막 전투인 혼마산 죽음의 계곡에 투입되어 함정, 부비트랩, 독화살 따위로 베트콩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소대원 47명 중 살아남은 7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혼마산 영웅으로 기억한다. 혼마산이 알려진 계기는 1967년 1월 29일 백마 1호 작전이다. 1967년 3월 8일 맹호부대와 합동으로 월남 전국의 동맥인 1번 국도를 개통한 오작교 작전과 1967년 7월 9일 투이호아에서 실시한 홍길동 작전을 비롯해 박쥐작전, 도깨비작전 등 베트남전쟁사에 길이 빛날 많은 전과를 올려 천하무적 백마부대의 전설을 남겼다. 그곳에 정연혁 어르신이 있었다. 위험한 전쟁터이고 매일 교전이 일어나는 곳이지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은 소총수가 아니라 포병이라는 것이었다. 전투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포로 지원사격을 했다. 작전이 있을 때는 주어진 좌표를 향해 하루종일 포를 쏘아댔다. 많을 때는 200발을 쏘기도 했다. 포신이 달아올라 정확한 좌표로 포가 날아가지 않을 때까지 쏘아댔다. 작전을 마치면 부대로 복귀했다. 고지에서 부대 막사로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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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156

조국을 지켜냈다는 자부심157

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귀하는 날이면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다. 잠시 숨을 돌리며 몸도 마음도 쉴 수 있었다. 부대에 있는 날은 대부분 작전이 없었다. 아침에 기상을 하면 편안하게 밥을 먹고 포를 닦거나 내무반에서 대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떤 임무도 내려오지 않았다. 적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부대에 있으면 위문공연단의 공연도 볼 수 있었다. 연예인들의 노래와 춤을 구경하고 있으면 스트레스가 사라졌다. 하지만 위문공연을 한다는 것은 곧 작전에 투입될 것이고, 그 작전에서 누군가는 또 죽음을 맞이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전투가 곧 벌어지니 최후의 만찬처럼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를 같이 타고 온 남진, 가장 인기 있었던 이미자 같이 유명한 가수들이 많이 왔다.

백마부대의 군가는 x달려라 백마y였다. r아느냐 그 이름 무적의 사나이s로 시작하는 군가는 r이기고 돌아오라 대한의 용사s로 마무리된다. 정연혁 어르신은 혼마산 고지에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어느 전투에서든 꼭 이기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리라. 간절한 다짐으로 1년이란 시간을 견딜 수 있었고, 1971년 4월 10일 무사히 고국 땅을 밟았다.

제대를 하고 1975년 3월 10일, 31살 때 결혼해 용산구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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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을 지켜냈다는 자부심

촌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먹고 살기 위해 화곡동, 신정동, 수원, 울산 등지로 이사를 여러 번 다녔다. 아들이 먼저 살고 있던 구리로 이사온 지도 15년이 넘었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부여잡지도 막아내지도 못했다. 젊은 청년이었던 정연혁 어르신은 어느새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그럼에도 베트남전쟁터에서 보낸 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5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정연혁 어르신은 아직도 군인이 되어 조국을 지키는데 일조했다는 자부심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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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해낼 수있다는믿음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최성진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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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최성진 어르신은 하사관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맹호사단 26연대, 일명 혜산진부대 9중대에서 근무하며 오작교작전 등 많은 작전을 수행하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분대장으로 앞장서 적진으로 나아갔고, 위험한 일도 먼저 처리하며 분대원을 지켜냈다. 보병이었던 최성진 어르신의 임무는 수색정찰을 펼치거나 진지공사와 경계근무를 서는 거였다. 작전명령이 주어지면 누구보다 먼저, 가장 가깝게 적과 대치하며 전투를 펼쳤다. 일상적으로 하는 수색이지만, 맡은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늘 지도를 뒤지며 수색지역을 자세히 익혔다. 투입하기 전에는 수통 두 개에 물을 가득채웠다. 덥고 습한 날씨는 아무리 물을 마셔도 목이 마르곤 했다. 완전무장을 하고 먼저 첨병이 출발했다. 그 뒤를 본대가 따르고 마지막에는 척후병이 뒤를 감시하며 천천히 나아갔다. 수색을 시작하고 두어 시간이 지나면 더운 날씨와 더불어 긴장과 스트레스로 온몸이 땀 범벅이었다. 준비한 수통 두 개의 물이 다 비워질 정도였다.

t개울을 만나면 번갈아가며 물을 마시고 다시 수통에 물을 채우죠. 한번은 계곡을 만나 물을 마시고 수통에 물을 채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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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믿음

뒤 계곡 상류로 수색을 했어요. 그런데 상류에 올라가니 베트콩 시신이 계곡에 가득 옆어져 있더라고요. 계곡 아래에서 시신의 썩은 물을 마신 거죠. 어찌나 구역질이 나던지. 수통에 물을 다 버리고 그 지역을 빨리 벗어났는데도 한동안 속이 좋지 않았어요.u

최성진 어르신은 1967년 6월 7일에 펼친 수색작전에서 공을 세워 인헌무공훈을 받았다. 인헌무공훈장은 전투에 참가해 용감하게 분투하고 노력해, 부여된 임무 이상의 능력을 발휘한 공적이 뚜렷한 유공자에게 수요하는 훈장이다. 당시, 최성진 어르신은 분대원들과 베트콩이 살고 있는 마을 인근을 수색했다. 최성진 어르신이 분대장이었기 때문에 앞장서 작전을 짰다. 분대를 두 조로 나눴다. 경계근무조와 수색조로 나눈 뒤 최성진 어르신이 앞장 서 바위군락지로 향했다. 바위군락지를 지나는데 바위 틈에서 연기가 나는 것을 목격했다. 진군을 멈추고 세밀하게 수색해보기로 했다.

먼저 연기가 나는 곳까지 최대한 접근해 수류탄을 대여섯 개 던진 뒤 상황을 살폈다. 인기척이 없었다. 경계를 좁혀 바위를 들치며 들어가보았다. 입구는 좁았지만 그 안은 여러 명이 머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실제로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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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다. 냄비, 침대 등 살림살이는 물론 총도 여섯 자루나 있었다. 수색을 마친 뒤 중대에 보고했고, 전 분대원이 무사히 부대로 복귀했다. 베트콩이 기거한 장소를 찾아낸 공으로 최성진 어르신을 비롯한 분대원들이 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

전라남도 영암이 고향인 최성진 어르신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논산훈련소에 입소해 신병교육을 받고 공병으로 원주에 있는 77비행대에서 군대생활을 시작했다. 군인이 되기 위해 하사관시험을 쳐 하사로 임관하며 직업군인이 되었다. 책임감이 강했던 최성진 어르신은 군인이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꼈다. 위계가 분명했고, 주어진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때 큰 성취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생활해보니 군인이 체질에 잘 맞았다. 하루하루 보람찬 생활을 했고, 차근차근 승급시험도 준비해 진급의 꿈도 가졌다. 하사관 동기들과 함께 장교 임관 시험을 봤다. 합격을 하면 소위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시험이었다. 열심히 준비해 시험을 봤다. 네 명이 시험을 봤는데, 두 명은 합격하고, 두 명은 아쉽게도 떨어졌다. 최성진 어르신은 불합격했다. 진급을 간절히 바랐지만 아쉽게도 떨어져 낙담이 컸다. 재충전의 시간과 상황을 바꿀 새로운 기회를 찾던 중 월남전 파병 소식을 들었다.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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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믿음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다면 진급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망설이지 않고 베트남전쟁 참전을 결심했다. 맹호사단 혜산진부대에 배치된 뒤 전방관측소에서 근무했다. 베트남에 가자마자 바로 투입된 입무가 적의 공격을 관측하는 일이었다. 관측소는 24시간 근무를 서기 때문에 잠시도 현장을 떠날 수 없는 임무였다. 먹거리와 물을 헬기로 보급 받았다. 일주일에 한두 번 보급을 주기적으로 해주었다. 한번은 헬기가 왔어야 했는데 오지 않아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다른 중대 전방관측소에 한 개 중대가 있었는데, 적의 기습으로 전멸당했다고 했다. 신병이 근무를 서는데 적을 제대로 관측하지 못해서 생긴 불상사였다. 적은 밤에 몰래 들어와 전방관측소 열두 개 막사 안에 수류탄을 던졌고 잠을 자던 국군은 그 자리에서 모두 죽었다. 전쟁터에서는 일상적으로 있는 일이라지만 끔찍한 소식이었다.

최성진 어르신이 투입된 가장 큰 작전은 오작교작전이었다. 오작교작전은 1967년 3월 8일부터 5월 31일까지 2개월 동안 군단급 작전으로 실시했다. 작전지는 퀴논 일대에 있던 맹호사단과 투이호아 일대에 있던 백마사단의 중간지점인 호아다에서 만나는 1번국였다. 1번국도에서는 베트콩이 자주 출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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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는

들지 않 이야기 ◆ 일곱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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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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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우리 군의 소통이 차단당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원활한 작전을 위해서는 1번국도에 베트콩이 더 이상 출몰하지 못하도록 소탕과 함께 안정화가 필요했다.

베트콩 소탕과 1번국도 개통을 목적으로 한 대규모 작전. 최성진 어르신이 몸담고 있던 혜산진부대에도 오작교작전 투입 명령이 내려왔다. 작전 투입에 앞서 분대장급 이상 간부들이 소집되었다. 작전회의 겸 회식의 자리였다. 밤 9시경 퀴논 인근 바닷가 해변에 모였다. 백사장에 호를 파고 부대 지휘부 전체 인원이 둘러앉았다. 고기를 굽는 석쇠가 걸리고 야자나무를 깔고 그 위에 음식이 놓였다. 불을 피워 고기를 굽고 회식이 무르익을 때쯤 백사장 속에 있던 불발탄이 열을 받아 터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회식자리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주변에 있던 부대원이 몰려와 사고를 수습했다.

t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죠. 당장 내일 작전 투입인데 전 대대원 가운데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으니까요. 게다가 작전을 지휘할 간부급이 죽었다는 것은 정말 상상하기 힘들 일이었죠.u

있을 수 없는 사고였지만 혜산진부대원들은 자신의 분대장을 먼저 챙기며 전우애를 몸소 보여주었다. 사건 수습과 전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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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비로 부대는 어수선해졌다. 하지만 그 밤에 인근부대에서 오작교작전에 투입할 새로운 간부를 차출했고, 무사히 오작교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1967년 7월 최성진 어르신은 무사히 귀국을 할 수 있었고, 한달간의 휴가를 마치고 32사단으로 복귀했다. 베트남전쟁에서 세운 공이 인정된 덕분에 1계급 특진하여 안정적으로 부대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베트남에 비하면 한국에서의 부대생활은 평온 그자체였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밥을 먹고 근무를 서고, 같은 시간에 잠을 잤다.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어느날, 대민지원 인솔을 나가게 되었다. 부대 근처 일손이 부족한 민가에 일을 도와주는 업무였기 때문에 특별할 것은 없었다. 그 특별한 것 없는 날에 최성진 어르신은 도로를 오가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버스에 왼쪽 다리가 깔리면서 큰 부상을 당했다. 국군대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담당 군위관은 응급처치를 하고 부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지켜보자고 했다. 다리가 많이 부은 상태에서 점점 굳어가는 것을 느낀 최성진 어르신은 다리를 사용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크게 걱정되었지만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게다가 담당 군위관이 일주일 동안 휴가를 가는 바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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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지 해낼 수 있다는 믿음

마음이 더 불안했다. 국군대전병원에서 광주육군병원으로 옮겨 물리치료와 살을 이식하는 수술을 여러 번 했다. 오른쪽 다리에서 살을 떼어서 왼쪽 다리 흉터에 이식하는 수술은 피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지만 다리를 온전히 사용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참아냈다. 이 사고로 최성진 어르신은 더 이상 군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상이군경 9급 판정을 받고 1969년 2월 제대를 했다. 군인으로 살고 싶었던 최성진 어르신의 꿈이 어쩔 수 없는 사고로 좌절되었지만, 군인정신을 가슴에 새긴 어르신은 그대로 주저앉을 수만은 없었다. 제대한 뒤 결혼하고, 가족을 이루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 여러 사업을 하며 새로운 꿈을 써내려갔다. 세탁소, 사진관, 렌터카 등 안 해본 사업이 없을 정도였다. 되돌아보면 힘든 날이 많았지만 생사가 오갔던 베트남전쟁도 이겨냈다. 그런 투지로 지금껏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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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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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지원한 보급병 179

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1972년, 최우상문 어르신은 월남전 참전을 위해 부산항 제 4부두 유엔 병력 수송선인 오클라호마호에 몸을 실었다. 최우상문 어르신은 전역 1개월을 남기고 베트남 전선 남지나해에 철수보충 병력으로 투입됐다. 사소한 보급품 하나도 빼먹지 말고 철수 작전을 잘 마무리하라는 국가의 명령이었다. 남은 군생활을 보내다 집으로 고이 돌아가야 하는 말년병장 입장에서는 썩 내키지 않은 명령일 수 있었다. 그러나 최우상문 어르신은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베트남으로 향했다. 애국심 때문은 물론이고, 낯선 나라에서 새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잡고 싶었다. 최우상문 어르신은 십자성 258 병참 중대로 배속됐다. 낯선 타국에서의 군 생활은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최우상문 어르신은 보직을 배정받기 전, 일주일 정도 부대 내에서 제초작업을 하며 어깨너머로 미군들의 생활을 엿보았다. 누구보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에 늘 깊은 관심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최우상문 어르신이 복무하던 부대는 나트랑공항에 도착한 미군의 긴급 물자를 한국군의 예하 부대로 배분하는 역할을 맡았다. 최우상문 어르신은 미군과 어울리며 영어를 써볼 생각에 가슴이 설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되었다. 길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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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지원한 보급병

흔히 외국인을 찾아볼 수 있는 요즘과 달리, 옛날에는 피부색이 다른 사람을 마주하는 것도 어려웠을 뿐더러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건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었다. 영어를 접한 것이라곤 입대 전 8개월 동안 다닌, 을지로 $$#영어회화학원의 로버트 선생에게 배운 게 전부였다. 하루는 선임하사가 영어 실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최우상문 어르신을 공항에 데리고 갔다. 군수물자 인수를 위해 미군과 대화를 나눠야 했기에 최우상문 어르신은 밤새 한국에서 가져간 회화책을 뒤적이며 물품 수령에 필요한 예상 대화 문장을 빼곡히 적었다. 긴장이 될 만했다. 밤잠을 설친 최우상문 어르신은 적어 놓은 문장을 계속 되뇌며 미군과 마주했다. 선임하사는 옆에 서서 면접관처럼 최우상문 어르신을 지켜봤다. 미국 병사와 무슨 말을 나누는지 꼼꼼히 듣고자 했기에 더욱 부담스러웠고 떨렸다.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누니 미군은 느닷없이 t아이 고러 벳u 하며 갑자기 자리를 떠나려 했다. 간단한 문장이었지만 최우상문 어르신은 이해하지 못했다. t왓스 고러 벳. 민?u (XIBUsT HP UP UIF CBE, NFBO?) 최우상문 어르신은 당신 말의 의미가 뭐냐고 되물었다. 그러나 미군은 똑같은 말을 하며 자리를 뜨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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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다급해진 최우상문 어르신은 다시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그 미군은 t* HP UP UIF CBE.u 아주 천천히 발음했다. 아하! tUPu 발음을 생략하는구나! 이렇게 최우상문 어르신은 전쟁터에서 영어를 익혔다. 찜통 같은 더위에 어디에서 적이 급습할지 모르는 긴장되는 순간 속에서도 최우상문 선생은 영어 학습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낯선 문화에 흥미를 느끼는 최우상문 어르신은 베트남의 낮잠 문화를 신기하게 여겼다. 베트남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낮 12시부터 2시까지 낮잠을 잤는데, 이는 r시에스타s라 불리는 베트남의 낮잠 문화였다. 남베트남군은 작전을 수행하다가도 12시가 되면 자리에 누워 곧바로 잠들었다. 적들도 낮잠을 자기 위해 교전을 멈추고 물러서는 모습이 최우상문 어르신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이렇게 호기심 많은 청년은 타국에서의 매 순간을 노트와 머릿속에 기록했다. 최우상문 어르신은 매일 헬기로 물과 보급품을 전달받아 각 부대로 배급했고 경계 근무를 서기도 했다. 최우상문 어르신은 고국에서 온 우편물과 부대 연락, 19 긴급구매품 등 전우들이 오매불망 원하는 것을 전달해주었는데, 원하는 물품을 받고 기뻐하는 전우들을 보면 그동안의 노고가 싹 잊히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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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그렇게 충실히 임무에 임하며 지내는 중, 최우상문 어르신에게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한 상관이 최우상문 어르신에게 다가와 말했다.

t최 병장, 이번 주월군에 수공구 식별 경진대회가 있는데 대표로 출전해라. 우리 258병참중대 명예를 걸고 우수한 성적을 거두면 그동안 중대나 중대장님께 불명예스러운 일들도 말끔히 씻고, 공헌할 기회도 아닌가! 최 병장을 믿는다.u

경진대회에 참가라니. 최우상문 어르신은 잘 모르겠지만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하고 말하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회 준비는 만만치 않았다. 두꺼운 미군 원서 한 권을 한 달 내 다 외워야 했고 미군에서 들어오는 ,*5, 4&5, 0&. 공구를 가격과 구성 상품별로 무조건 암기해야 했으며 미군의 병참 시스템에 관해서도 배워야 했다. 한국 부대에는 병참 전공자나 전문요원이 없어 시험으로 실력을 가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중대는 물심양면으로 최우상문 어르신을 지원해주었다. 근무를 빼주었으며, 공부할 시원한 공간도 마련해주었다. 상관들은 주월 한국 병참부대 5개 중 1등을 못하면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이라며 최우상문 어르신에게 은근한 부담을 주었다. 어깨가 무거워진 최우상문 어르신은 그럴수록 더욱 공부에 매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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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날이 밝아왔고 최우상문 어르신은 다음날 차분히 미군 시험관 앞에서 시험을 치렀다.

한 시간 후, 최우상문 어르신은 미군 시험관과 눈이 마주쳤다. t혹시? 258병참중대 .3, $)0*(초이) 아닙니까?u t네u

t1등 축하합니다.u 희소식을 부대에 전하자 좋은 의미로 부대가 발칵 뒤집혔다. 최우상문 어르신도 쾌재를 불렀다. 자신 없던 영어로 상관과 동료들에게 인정받는 일은 어떤 성취보다 짜릿했다. 전투 부대는 전투나 작전, 매복 등으로 전공을 올리지만 병참, 수송, 의무와 같은 지원부대는 공적을 쌓기 힘든 게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최우상문 어르신의 공적은 더욱 빛났다. 병참 병과에 투신하면서 각고의 노력을 통해 공훈을 인정받은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외에도 최우상문 어르신은 다방면에서 특출난 끼를 발산했다. 주월군 체육대회에서 가수로 무대에 오른 것인데 입대 전, 기성 가수와 지망생 틈에서 이 년 동안 노래를 배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부 운동 경기가 끝나고 2부인 공연 시간이 다가왔다. 최우상문 어르신은 무대 뒤에서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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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

고 있었다. 그러나 무대 체질을 타고난 것인지, 단상으로 향하는 최우상문 어르신의 발걸음은 그 누구보다 당찼다. 사회자는 익살스러운 목소리로 최우상문 어르신을 소개했다.

t일곱 살 때 일본에서 태어나 기구하게 한국군에 입대하여 베트남 전선까지 온 재일교포 사이또군, 십자성 가수를 소개합니다.u

일본 출생, 재일교포? 모두 거짓말이었다. 관객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기 위한 묘수였다. 우레와 같은 관객의 박수 속에 1절과 2절을 무사히 마쳤다. 전쟁에 지친 전우들이 최우상문 어르신의 노래를 듣고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최우상문 어르신의 마음을 울렸다. 퇴장하는 중에 앵콜 요청이 빗발쳤다. t앵콜, 앵콜!u

외침은 끝나지 않고 이어졌다. 규정상 앵콜을 받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을 되돌려 다시 무대 위로 향하고 싶었다. 최우상문 어르신은 자신의 노래를 통해 조금이라도 전우들이 전쟁의 아픔을 잊었으면 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부대별 회식에 참여했다. 회식 자리는 생각보다 차분했다. 기쁨과 광란의 시간 뒤에는 어김없이 먼저 간 전우들과의 추억이 마음 한구석을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그때마다 최우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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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들의 희생이 이 나라 백 년 국가 발전에 초석이 되어준다면, 진정으로 후손들은 축복받은 이 나라에 대대손손 번창하리라고. 어떠한 새도 제 둥지를 가장 좋아한다는 말이 있듯이, 최우상문 어르신은 조국을 위해서라면 온 몸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 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왔다. 때때로 최우상문 어르신은 속으로 외치고 외쳤다. 내 나라 코리아여, 대한민국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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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구리시 국가유공자 기록화사업

잠들지 않는 이야기 ◆ 일곱 번째발행일 2025. 3. 28.

발행처 다랑어스토리 주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서달로 161-1 3층 전화 02-817-5051

주관 구리시 주소 경기 구리시 아차산로 439 (교문동) 전화 031-550-2213

글작가 이근욱, 최지애, 김한솔

그림작가 이인영

이 책은 구리시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으며, 저작권은 구리시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