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申東曄)
1930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났다. 전주 사범학교를 거쳐 단국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195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장시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대지}가 입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63년 시집 ~아사녀를 출간했고, 1967년 총 4,800여 행의 대작 장편 서사시 |금강}을 발표했다.1969년, 향년 39세에 간암으로 별세했다. 사후에 ~신동엽 전집(1975), 시선집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1979), 유고시집 ~꽃같이 그대 쓰러진(1988) 등이 간행되었다. 1982년 신동엽창작기금(현 신동엽문학상) 이 제정되었으며, 2013년 생가가 있는 부여 에 신동엽문학관이 건립되었다.(재)부여군지역공동체활성화재단은 신동엽 시인의 마을 사랑과 공동체 정신을 담아내고자 지역 주민들과 함께 서체를 개발하였다.
"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
시인 신동엽의 좋은 언어
서문
부여 냄새가 피어나고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은……책갈피에서 아득한 그리움이 피어오릅니다.백제의 미학을 담은 부여 고유의 ‘정림사지체’와 신동엽 시인의 전경인全耕人 공동체 정신을 담은 ‘신동엽손글씨체’를 개발하자는 아이디어 하나만 가지고 지난 2년간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온 부여군공동체활성화재단과 관계자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번에 엮어낸 시·산문 선집에 쓰인 2종의 서체는 전문가들이 정림사지를 비롯하여 부여 곳곳의 백제 사적과 신동엽 시인의 청장년기 육필 원고들을 거듭 되살펴 분석하고 창안한 것으로, 백제와 신동엽 시인의 정신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흔히 글씨에는 혼이 담기어 있다고 합니다. 2종의 새로운 서체로 만든 이 책의 각 페이지에 정림사지5층석탑의 아름다운 곡선과 금강의 유려하고도 힘찬 물줄기가, 백제와 신동엽 시인의 혼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낍니다.새로운 서체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준비한 이 선집에는 30편의 시와 3편의 산문이 실려있는데, 시인의 고향 부여 주민들이 친근하게 느낄 작품들을 위주로 선정하였습니다. 또 시는 ‘신동엽손글씨체’로, 산문은 ‘정림사지체’로 사용하여 그 특성을 살리고 가독성을 높이고자 했으며, 한글날 행사를 통해 서체를 공표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살리고자 하였습니다.
이번에 개발된 서체가 부디 널리 전파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우리 시대의 공동체 활성화에 기여하기를 기대합니다.2023년 10월 9일
신동엽 시인의 장남 신좌섭차례
서문 4신동엽의 시들진달래 산천 10향香아 14풍경 16아사녀阿斯女 21그 가을 24나의 나 26빛나는 눈동자 28
산에 언덕에 34꽃대가리 35응 37발 38담배연기처럼 44껍데기는 가라 46종로5가 48봄은 52수운水雲이 말하기를 54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57그 사람에게 60
고향 61산문시散文詩1 62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64조국 67좋은 언어 70봄의 소식 72너에게 74강 75만지蠻地의 음악 77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 79새해 새 아침은 82그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84신동엽의 산문들시인정신론 88금강 잡기雜記 107엉뚱한 이론 112찾아보기 118
신동엽의 시들
진달래 산천
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꽃 펴 있고,바위 모서리엔이름 모를 나비 하나머물고 있었어요잔디밭엔 장총長銃을 버려 던진 채
당신은잠이 들었죠.햇빛 맑은 그 옛날후고구려 적 장수들이의형제를 묻던,거기가 바로그 바위라 하더군요.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산으로 갔어요
뼈섬은 썩어 꽃죽 널리도록.남해 가,두고 온 마을에선언제인가, 눈먼 식구들이굶고 있다고 담배를 말으며
당신은 쓸쓸히 웃었지요.지까다비 속에 든 누군가의발목을과수원 모래밭에선 보고 왔어요.꽃살이 튀는 산허리를 무너온종일탄환을 퍼부었지요.길가엔 진달래 몇 뿌리
꽃 펴 있고,바위 그늘 밑엔얼굴 고운 사람 하나서늘히 잠들어 있었어요꽃다운 산골 비행기가지나다기관포 쏟아놓고 가버리더군요.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산으로 갔어요.그리움은 회올려하늘에 불붙도록.뼈섬은 썩어꽃죽 널리도록.바람 따신 그 옛날후고구려 적 장수들이의형제를 묻던,거기가 바로
그 바위라 하더군요.*잔디밭엔 담뱃갑 버려 던진 채당신은 피흘리고 있었어요.(조선일보·1959년 3월 24일)*『아사녀』에는 이 연이 빠져 있음.
향香아
향아 너의 고운 얼굴 조석으로 우물가에 비최이던 오래지 않은 옛날로 가자수수럭거리는 수수밭 사이 걸쭉스런 웃음들 들려나오며 호미와 바구니를 든 환한 얼굴 그림처럼 나타나던 석양……구슬처럼 흘러가는 냇물 가 맨발을 담그고 늘어앉아 빨래들을 두드리던 전설 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눈동자를 보아라 향아 회올리는 무지갯빛 허울의 눈부심에 넋 빼앗기지 말고
철 따라 푸짐히 두레를 먹던 정자나무 마을로 돌아가자 미끄덩한 기생충의 생리와 허식에 인이 배기기 전으로 눈빛 아침처럼 빛나던 우리들의 고향 병들지 않은 젊음으로 찾아가자꾸나향아 허물어질까 두렵노라 얼굴 생김새 맞지 않는 발돋움의 흉낼랑 고만 내자들국화처럼 소박한 목숨을 가꾸기 위하여 맨발을 벗고 콩바심하던 차라리 그 미개지에로 가자 달이 뜨는 명절 밤 비단치마를 나부끼며 떼 지어 춤추던 전설 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 냇물 굽이치는 싱싱한 마음밭으로 돌아가자.
(조선일보·1959년 11월 9일)풍경
쉬고 있을 것이다.아시아와 유럽이곳저곳에서탱크부대는 지금쉬고 있을 것이다.일요일 아침, 화창한
토오꾜오 교외 논둑길을한국 하늘, 어제 날아간이국異國 병사는걷고.히말라야 산록山麓,토막土幕 가 서성거리는 초병은흙 묻은 생고구말 벗겨 넘기면서하얼빈 땅 두고 온 눈동자를회상코 있을 것이다.
순이가 빨아준 와이셔츠를 입고어제 의정부 떠난 백인 병사는오늘 밤, 사해死海 가의이스라엘 선술집서,주인집 가난한 처녀에게
팁을 주고.아시아와 유럽이곳저곳에서탱크부대는 지금밥을 짓고 있을 것이다.해바라기 핀,지중해 바닷가의촌 아가씨 마을엔,온종일, 상륙용 보트가
나자빠져 뒹굴고.흰 구름, 하늘제트 수송편대가해협을 건너면,빨래 널린 마을맨발 벗은 아해들은쏟아져나와 구경을 하고.동방으로 가는
부우연 수송로 가엔,깡통 주막집이 문을 열고대낮, 말 같은 촌색시들을팔고 있을 것이다.어제도 오늘,동방대륙에서서방대륙에로,산과 사막을 뚫어굵은 송유관은
달리고 있다.노오란 무꽃 핀지리산 마을.무너진 헛간엔할멈이 쓰러져 조을고평야의 가슴 너머로.고원의 하늘 바다로.
원생의 유전지대로.모여 간 탱크부대는지금, 궁리하며고비 사막,빠알간 꽃 핀 흑인촌.해 저문 순이네 대륙부우연 수송로 가엔,예나 이제나가난한 촌 아가씨들이빨래하며,
아심아심 살고있을 것이다.(현대문학·1960년 2월호)아사녀阿斯女
모질게도 높은 성城돌모질게도 악랄한 채찍모질게도 음흉한 술책으로죄 없는 월급쟁이가난한 백성평화한 마음을 뒤보채어쌓더니산에서 바다
읍에서 읍학원學園에서 도시, 도시 너머 궁궐 아래.봄 따라 왁자히 피어나는꽃보래돌팔매,젊은 가슴물결에 헐려잔재주 부려쌓던 해늙은 아귀들은그예 도망쳐 갔구나.― 애인의 가슴을 뚫었지?
아니면 조국의 기폭旗幅을 쏘았나?그것도 아니라면, 너의 아들의 학교 가는 눈동자 속에 총알을 박아 보았나?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나우리들의 피는 대지와 함께 숨쉬고우리들의 눈동자는 강물과 함께 빛나 있었구나.4월 19일, 그것은 우리들의 조상이 우랄 고원에서 풀을 뜯으며 양달진 동남아 하늘 고운 반도에 이주 오던 그날부터 삼한三韓으로 백제로 고려로 흐르던 강물, 아름다운 치맛자락 매듭 고운 흰 허리들의 줄기가 3·1의 하늘로 솟았다가 또다시 오늘 우리들의 눈앞에 솟구쳐오른 아사달阿斯達 아사녀의 몸부림, 빛나는 앙가슴과 물굽이의 찬란한 반항이었다.
물러가라, 그렇게쥐구멍을 찾으며검불처럼 흩어져 역사의 하수구 진창 속으로흘러가버리려마, 너는.오욕汚辱된 권세 저주받을 이름 함께.어느 누가 막을 것인가
태백 줄기 고을고을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진달래・개나리・복사알제리아 흑인촌에서카스피 해 바닷가의 촌 아가씨 마을에서아침 맑은 나라 거리와 거리광화문 앞마당, 효자동 종점에서노도怒濤처럼 일어난 이 새 피 뿜는 불기둥의항거……
충천하는 자유에의 의지……길어도 길어도 다함 없는 샘물처럼정의와 울분의 행렬은억겁億劫을 두고 젊음쳐 뒤를 이을지어니온갖 영광은 햇빛과 함께,소리치다 쓰러져간 어린 전사戰士의아름다운 손등 위에 퍼부어지어라.(학생혁명시집·1960년 7월)그 가을
날씨는 머리칼 날리고바람은 불었네냇둑 전지戰地에.알밤이 익듯여울물 여물어담배연긴 들길에
떠가도.걷고도 싶었네청 하늘 높아가듯가슴은 터져들 건너 물 마을.바람은 머리칼 날리고추석은 보였네호박국 전지에.버스는 오가도
콩밭머리,내리는 애인은 없었네.그날은 빛났네휘파람 함께수수밭 울어도
체부遞夫 안 오는 마을에.노래는 떠갔네. 깊은 들길하늘가 사라졌네, 울픈 얼굴하늘가 사라졌네스무살 전지에.(조선일보·1960년 10월 17일)나의 나
사양들 마시고지나 오가시라없는 듯 비워둔 나의 자리.와, 춤 노래 니겨싶으신 대로 디뎌 사시라.한물 웃음떼 돌아가면
나 죽은 채로 눈망울 열어갈겨진 이마 가슴과 허리황량한 겨울 벌판 돌아보련다.해와 눈보라와 사랑과 주문,이 자리 못 물고굴러떨어져 갔음은아직도 내 봉우리 치솟은 탓이었노니.글면 또 허물으련다
세상보다,백지장 하나만큼 낮은 자리에나의 나없는 듯 누워.고이 천만년 내어주련마
사랑과 미움 어울려 물 익도록.바람에 바람이 섞여 살도록.(신사조·1962년 6월호)빛나는 눈동자
너의 눈은밤 깊은 얼굴 앞에빛나고 있었다.그 빛나는 눈을나는 아직잊을 수가 없다.검은 바람은
앞서 간 사람들의쓸쓸한 혼을갈가리 찢어꽃 풀무 치어오고파도는,너의 얼굴 위에너의 어깨 위에 그리고 너의 가슴 위에마냥 쏟아지고 있었다.
너는 말이 없고,귀가 없고, 봄[視]도 없이다만 억천만 쏟아지는 폭동을 헤치며고고孤孤히눈을 뜨고걸어가고 있었다.그 빛나는 눈을
나는 아직잊을 수가 없다.그 어두운 밤너의 눈은세기世紀의 대합실 속서빛나고 있었다.빌딩마다 폭우가
몰아쳐 덜컹거리고너를 알아보는 사람은당세에 하나도 없었다.그 아름다운,빛나는 눈을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조용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만 사랑하는생각하는, 그 눈은그 밤의 주검 거리를걸어가고 있었다.너의 빛나는그 눈이 말하는 것은자시子時다, 새벽이다, 승천昇天이다.어제
발버둥치는수천수백만의 아우성을 싣고강물은슬프게도 흘러갔고야.세상에 항거함이 없이,오히려 세상이너의 위엄 앞에 항거하려 하도록빛나는 눈동자.
너는 세상을 밟아 디디며포도알 씹듯 세상을 씹으며뚜벅뚜벅 혼자서걸어가고 있었다.그 아름다운 눈.너의 그 눈을 볼 수 있은 건세상에 나온 나의, 오직 하나지상至上의 보람이었다.그 눈은
나의 생生과 함께내 열매 속에 살아남았다.그런 빛을 가지기 위하여인류는 헤매인 것이다.정신은빛나고 있었다.몸은 야위었어도
다만 정신은 빛나고 있었다.눈물겨운 역사마다 삼켜 견디고언젠가 또다시물결 속 잠기게 될 것을빤히, 자각하고 있는 사람의.세속된 표정을개운히 떨어버린,승화된 높은 의지 가운데
빛나고 있는, 눈산정山頂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정신의눈깊게. 높게.땅속서 스며나오듯 한말 없는 그 눈빛.이승을 담아버린
그리고 이승을 뚫어버린오, 인간정신미美의지고至高한 빛.(『아사녀』·1963년)*『금강』(3장)에 삽입됨.
산에 언덕에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화사한 그의 꽃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맑은 그 숨결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울고 간 그의 영혼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아사녀』·1963년)꽃대가리
톡톡두드려보았다.숲 속에서자라난 꽃대가리.맑은 아침
오래도마셨으리.비단자락 밑에살냄새야,톡톡두드리면먼 상고上古까장 울린다춤추던 사람이여
토장국 냄새.이슬 먹은 세월이여보리타작 소리.톡톡두드려 보았다.삼한三韓 적
맑은 대가리.산 가시내사랑, 다보았으리.(『아사녀』·1963년)응
응 그럴 걸세, 얘기하게응 그럴 걸세응 그럴 걸세응, 응,응 그럴 수도 있을 걸세.응 그럴 수도 있을 걸세.응, 아무렴
그렇기도 할 걸세그녁이나, 암, 그녁이나응, 그래, 그럴 걸세응 그럼, 그렇기도 할 걸세.허,더 하게!(시단·1965년)발
백화점 층계를비 뿌리는 오후, 내려오던 다리.스커트 속을한가한 미풍微風은 왕래하고 있었지만깜장 힐 위 중력을 주면서가벼운 오뇌 속삭이고 있었다.언제부터 시작되어
너희들의, 걸음은어데까지 가고 있는 걸까.희끗희끗 눈발 날릴 때중학교 원서 접수시키러 구멍가게 골목종종치던 종아리.송화강松花江 끝에서도 왔다구름 같은 흙먼지,
아세아 대륙 누우런 벌판을군화 묶고 행진하던 발과 다리,지금은 어데 갔을까.꽃 피는 남국南國부드러운 모래밭 해안에 배가 닿으면부지런히 신무기를 싣고 뛰어내리던이유 없는 발톱.보리밭을 밟고 있었다,
물방아 위에도 있었다,해수욕장에선그 싱싱한 허벅다리 사이로태양이 지고.깎아놓은 유리창 위 비는 내리고넘치는 가슴덩이
찰떡같이 몸부림은 흐느낄 때,노래하고 싶었다.뱀같이, 열반涅槃같이, 경련하다 급기야나른하게 죽어 뻗던 그 흰 다리.다리,너를 보면빛나는 여름우렛소리 들으며 산맥을 넘던
낭만,나리꽃 동산에 전쟁은 가고채소밭 가운데 섰던국적 모를, 두 개의 무릎뼈에도눈은 없었다.어머니를 불렀지.집행장 문 앞엉버티었지, 안 가겠다고있는 힘 다하여 안간힘 하며
마지막 땀 흘리던연약한 다리여.밀회密會도 실어 날랐지,착취로 기름진 아랫배,음모로 반짝이던 골통들도 실어 날랐지,그리고 눈은 없어도링 위에선 멋있게 그놈의 턱을 걷어찼다.다들 남의 등 어깨 위로 올라갔지만
아직 너만은 땅을 버리지 못했구나넌 우리네 조국넌 하층구조내 한恨을 실어오고 또 실어간다.백악관 귀빈실 주단 위에도 있었어,대영제국 궁전 금의자 아래에도 있었어,종로3가 창녀娼女 아랫목에도 있었지,발바닥코 없는 너를 보면
눈물이 날밖에.강산은 좋은데이쁜 다리들은 털 난 달러들이다 자셔놔서 없다.일어서야지,양말 신은 발톱 흉물 떨고 와논밭 위 세워논, 억지 있으면
비벼 꺼야지,열번 부러져도 그 사랑발은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있는 것,발은 인류에의 길멎고 멎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있는 것,다리는, 절름거리며 보리수 언덕 그 미소微笑를 찾아가려 나왔다.다시 전화戰火는 가고쓰러진 폐허함박눈도 쏟아지는데어데서 나왔을까, 너는 또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었다.(현대문학·1966년 3월호)담배연기처럼
들길에 떠가는 담배연기처럼내 그리움은 흩어져갔네.사랑하고 싶은 사람들은많이 있었지만멀리 놓고나는 바라보기만했었네.들길에 떠가는
담배연기처럼내 그리움은 흩어져갔네.위해주고 싶은 가족들은많이 있었지만어쩐 일인지?멀리 놓고 생각만 하다말았네.아, 못다 한
이 안창에의 속상한두레박질이여.사랑해주고 싶은 사람들은많이 있었지만하늘은 너무 빨리나를 손짓했네.언제이던가
이 들길 지나갈 길손이여그대의 소매 속향기로운 바람 드나들거든아파 못다 한어느 사내의 숨결이라고가벼운 눈인사나,보내다오.(한글문학·1966년 겨울호)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사월도 알맹이만 남고껍데기는 가라.껍데기는 가라.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껍데기는 가라.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아사달 아사녀가중립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부끄럼 빛내며맞절할지니껍데기는 가라.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52인시집·1967년)종로5가
이슬비 오는 날,종로 5가 서시오판 옆에서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밤 열한시 반,통금에 쫓기는 군상群像 속에서 죄 없이크고 맑기만 한 그 소년의 눈동자와
내 도시락 보자기가 비에 젖고 있었다.국민학교를 갓 나왔을까.새로 사 신은 운동환 벗어 품고그 소년의 등허리선 먼 길 떠나온 고구마가흙 묻은 얼굴들을 맞부비며 저희끼리 비에 젖고 있었다.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아니면전라남도 해남 땅 어촌 말씨였을까.나는 가로수 하나를 걷다 되돌아섰다.그러나 노동자의 홍수 속에 묻혀 그 소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눈녹이 바람이 부는 질척질척한 겨울날,종묘宗廟 담을 끼고 돌다가 나는 보았어.그의 누나였을까.부은 한쪽 눈의 창녀가 양지쪽 기대앉아
속내의 바람으로, 때 묻은 긴 편지 읽고 있었지.그리고 언젠가 보았어.세종로 고층건물 공사장,자갈지게 등짐하던 노동자 하나이허리를 다쳐 쓰러져 있었지.그 소년의 아버지였을까.반도의 하늘 높이서 태양이 쏟아지고,싸늘한 땀방울 뿜어낸 이마엔 세 줄기 강물.대륙의 섬나라의그리고 또 오늘 저 새로운 은행국銀行國의
물결이 뒹굴고 있었다.남은 것은 없었다.나날이 허물어져가는 그나마 토방 한 칸.봄이면 쑥, 여름이면 나무뿌리, 가을이면 타작마당을 휩쓰는 빈바람.변한 것은 없었다.이조李朝 오백년은 끝나지 않았다.옛날 같으면 북간도라도 갔지.
기껏해야 버스길 삼백리 서울로 왔지.고층건물 침대 속 누워 비료 광고만 뿌리는 거머리 마을,또 무슨 넉살 꾸미기 위해 짓는지도 모를 빌딩 공사장,도시락 차고 왔지.이슬비 오는 날,낯선 소년이 나를 붙들고 동대문을 물었다.그 소년의 죄 없이 크고 맑기만 한 눈동자엔 밤이 내리고노동으로 지친 나의 가슴에선 도시락 보자기가비에 젖고 있었다.
(동서춘추·1967년 6월호)*『금강』(후화)에 일부가 삽입됨.
봄은
봄은남해에서도 북녘에서도오지 않는다.너그럽고빛나는봄의 그 눈짓은,
제주에서 두만까지우리가 디딘아름다운 논밭에서 움튼다.겨울은,바다와 대륙 밖에서그 매운 눈보라 몰고 왔지만이제 올너그러운 봄은, 삼천리 마을마다우리들 가슴속에서움트리라.
움터서,강산을 덮은 그 미움의 쇠붙이들눈 녹이듯 흐물흐물녹여버리겠지.(한국일보·1968년 2월 4일)
수운水雲이 말하기를
수운이 말하기를,슬기로운 가슴은 노래하리라맨발로 삼천리 누비며감꽃 피는 마을원추리 피는 산길맨주먹 맨발로밀알을 심으리라.
수운이 말하기를한울님은 콩밭과 가난땀 흘리는 사색 속에 자라리라.바다에서 조개 따는 소녀비 개인 오후 미도파 앞 지나는쓰레기 줍는 소년아프리카 매 맞으며노동하는 검둥이 아이,오늘의 논밭 속에 심거진그대들의 눈동자여, 높고 높은
한울님이어라.수운이 말하기를강아지를 한울님으로 섬기는 자는개에 의해은행銀行을 한울님으로 섬기는 자는은행에 의해미움을 한울님으로 섬기는 자는미움에 의해 멸망하리니,총 쥔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그, 사랑에 의해 구원받으리라.수운이 말하기를
한반도에 와 있는 쇠붙이는한반도의 쇠붙이가 아니어라한반도에 와 있는 미움은한반도의 미움이 아니어라
한반도에 와 있는 가시줄은한반도의 가시줄이 아니어라.수운이 말하기를,한반도에서는세계의 밀알이 썩었느니라.(동아일보·1968년 6월 27일)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
술을 많이 마시고 잔어젯밤은자다가 재미난 꿈을 꾸었지.나비를 타고하늘을 날아가다가발아래 아시아의 반도
삼면에 흰 물거품 철썩이는아름다운 반도를 보았지.그 반도의 허리, 개성에서금강산 이르는 중심부엔 폭 십리의완충지대, 이른바 북쪽 권력도남쪽 권력도 아니 미친다는평화로운 논밭.술을 많이 마시고 잔 어젯밤은자다가 참
재미난 꿈을 꾸었어.그 중립지대가요술을 부리데.너구리 새끼 사람 새끼 곰 새끼 노루 새끼 들발가벗고 뛰어노는 폭 십리의 중립지대가점점 팽창되는데,그 평화지대 양쪽에서총부리 마주 겨누고 있던
탱크들이 일백팔십도 뒤로 돌데.하더니, 눈 깜박할 사이물방개처럼한 떼는 서귀포 밖한 떼는 두만강 밖거기서 제각기 바깥 하늘 향해총칼들 내던져버리데.꽃 피는 반도는남에서 북쪽 끝까지
완충지대,그 모오든 쇠붙이는 말끔히 씻겨가고사랑 뜨는 반도,황금이삭 타작하는 순이네 마을 돌이네 마을마다높이높이 중립의 분수는나부끼데.술을 많이 마시고 잔어젯밤은 자면서 허망하게 우스운 꿈만 꾸었지.
(창작과비평·1968년 여름호)그 사람에게
아름다운하늘 밑너도야 왔다 가는구나쓸쓸한 세상세월너도야 왔다 가는구나.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호젓한 산골길서 마주친그날, 우리 왜인사도 없이지나쳤던가, 하고.(창작과비평·1968년 여름호)고향
하늘에흰 구름을 보고서이 세상에 나온 것들의고향을 생각했다.즐겁고저입술을 나누고아름다웁고저화장칠해 보이고,우리
돌아가야 할 고향은딴 데 있었기 때문……그렇지 않고서이 세상이 이렇게수선스럴까닭이 없다.(창작과비평·1968년 여름호)산문시散文詩 1
스칸디나비아라던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쎌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기지도 탱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
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 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 소리 춤 사색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월간문학·1968년 11월 창간호)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누가 구름 한 송이 없이 맑은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네가 본 건, 먹구름그걸 하늘로 알고일생을 살아갔다.
네가 본 건, 지붕 덮은쇠항아리,그걸 하늘로 알고일생을 살아갔다.닦아라, 사람들아네 마음속 구름찢어라, 사람들아,네 머리 덮은 쇠항아리.아침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볼 수 있는 사람은외경畏敬을알리라아침저녁
네 머리 위 쇠항아릴 찢고티 없이 맑은 구원久遠의 하늘마실 수 있는 사람은연민을알리라차마 삼가서발걸음도 조심마음 아무리며.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서럽게눈물 흘려살아가리라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누가 구름 한 자락 없이 맑은하늘을 보았다 하는가.(고대문화·1969년 5월)*『금강』(9장)에 일부가 삽입됨.
조국
화창한가을, 코스모스 아스팔트 가에 몰려나와눈먼 깃발 흔든 건우리가 아니다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금강 연변무를 다듬고 있지 않은가.신록 피는 오월
서부 사람들의 은행銀行 소리에 홀려조국의 이름 들고 진주眞珠 코걸이 얻으러 다닌 건우리가 아니다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꿋꿋한 설악雪嶽처럼 하늘을 보며 누워 있지 않은가.무더운 여름불쌍한 원주민에게 총 쏘러 간 건우리가 아니다조국아, 우리는 여기 이렇게
쓸쓸한 간이역 신문을 들추며비통 삼키고 있지 않은가.그 멀고 어두운 겨울날이방인들이 대포 끌고 와강산의 이마 금 그어놓았을 때도그 벽壁 핑계 삼아 딴 나라 차렸던 건우리가 아니다조국아, 우리는 꽃 피는 남북평야에서주림 참으며 말없이밭을 갈고 있지 않은가.조국아
한번도 우리는 우리의 심장남의 발톱에 주어본 적없었나니슬기로운 심장이여,돌 속 흐르는 맑은 강물이여.한번도 우리는 저 높은 탑 위 왕래하는아우성 소리에 휩쓸려본 적
없었나니.껍질은,껍질끼리 싸우다 저희끼리춤추며 흘러간다.비 오는 오후버스 속서 마주쳤던서러운 눈동자여, 우리들의 가슴 깊은 자리 흐르고 있는맑은 강물, 조국이여.돌 속의 하늘이여.우리는 역사의 그늘소리 없이 뜨개질하며 그날을 기다리고 있나니.조국아,
강산의 돌 속 쪼개고 흐르는 깊은 강물, 조국아.우리는 임진강변에서도 기다리고 있나니, 말없이총기로 더럽혀진 땅을 빨래질하며샘물 같은 동방東方의 눈빛을 키우고 있나니.(월간문학·1969년 6월호)좋은 언어
외치지 마세요바람 탄 재티처럼 날아가버려요.조용히될수록 당신의 자리를아래로 낮추세요.그리고 기다려보세요.
모여들 와도하거든 바닥에서부터가슴으로 머리로속속들이 굽이돌아 적셔보세요.하잘것없는 일로 지난날언어들을 고되게부려만 먹었군요.때는 와요.
우리들이 조용히 눈으로만이야기할 때허지만그때까진좋은 언어로 이 세상을
채워야 해요.(사상계·1970년 4월호)봄의 소식
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되나 쑥덕거렸다.봄은 발병 났다커니봄은 위독하다커니눈이 휘둥그레진 수소문에 의하면봄은 머언 바닷가에 갓 상륙해서동백꽃 산모퉁이에 잠시 쉬고 있는 중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렇지만 봄은 맞아 죽었다는 말도 있었다.광증이 난 악한한테 몽둥이 맞고선지피 흘리며 거꾸러지더라는……마을 사람들은 되나 안되나 쑥덕거렸다.봄은 자살했다커니봄은 장사 지내버렸다커니그렇지만 눈이 휘둥그레진 새 수소문에 의하면봄은 뒷동산 바위 밑에, 마을 앞 개울
근처에, 그리고 누구네 집 울타리 밑에도,몇날 밤 우리들 모르는 새에 이미 숨어 와서몸단장들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말도 있었다.(창작과비평·1970년 봄호)너에게
나 돌아가는 날너는 와서 살아라두고 가진 못할차마 소중한 사람나 돌아가는 날
너는 와서 살아라묵은 순 터새순 돋듯허구많은 자연 중너는 이 근처 와 살아라.(창작과비평·1970년 봄호)강
나는 나를 죽였다.비 오는 날 새벽 솜바지 저고리를 입힌 채 나는나의 학대받는 육신을 강가에로 내몰았다.솜옷이 궂은비에 배어가랑이 사이로 물이 흐르도록 육신은비겁하게 항복을 하지 않았다.물팡개치는 홍수 속으로 물귀신 같은
몸뚱어리를 몰아쳐 넣었다.한발짝 한발짝 거대한 산맥 같은휩쓸려 그제사 그대로 물너울처럼 물결에쓰러져버리더라 둥둥 떠내려가는 시체 물속에주먹 같은 빗발이 학살처럼등허리를 까뭉갠다. 이제 통쾌하게뉘우침은 사람을 죽였다.그러나 너무 얌전하게 나는 나를 죽였다.가느다란 모가지를 심줄만 남은 두 손으로꽉 졸라맸더니 개구리처럼 삐걱! 소리를 내며혀를 물어 내놓더라.
강물은 통쾌하게 사람을 죽였다.(창작과비평·1970년 봄호)만지蠻地의 음악
꽃들의 추억 속 말발굽 소리가 요란스러우면,내일 고구려로 가는 석공石工의 주먹아귀막걸리 투가리가 부숴질 것이다.오월의 사람밭에 피먹 젖은 앙가슴갖가지 쏟아져오면우물가에 네 다리 던지던 소부리所夫里* 가시내
진주알 속 사내의 털보다 가을이 고일 것이고우리의 역사밭 핵核 자랑의 아우성 깃발 올리면피의 능선 상엿집 산모롱이를 돌아들엿장수의 가위 속에서 징글맞게 뱀이동강 날 것이다.대낮처럼 조용한 꽃다운 마을다시 가시줄 늘이고 가는 소리 보이면나비들은 구태여 건넛마을 꽃핀 전설 속의머리채로 사무치게 노래 불러 강산 채울 것이며.
햇빛 퍼붓는 목화밭, 서해 가의 무논에서젖이 흐르는 주먹팔 봄 포도밭에서손 고운 흰 허리를 잃어버렸을 때후삼국의 유민遺民은 역사를 건너뛸 것이다.하여 세상없는 새벽길꽃다운 불알 가리고 바위에 걸터앉아베잠방이 속의 상쾌한 천만년을 자랑할 것이다.(창작과비평·1970년 봄호)*백제 고도古都 부여의 옛 지명.
밤은 길지라도 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
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내 옆에는 네가 네 옆에는또다른 가슴들이가슴 태우며한가지 염원으로행진말 없어도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앞에는 사랑이 사랑 앞에는 죽음이아우성 죽이며 억億진 나날넘어갔음을.우리는 이길 것이다구두 밟힌 목덜미생풀 뜯은 어머니어둔 날 눈 빼앗겼어도.우리는 알고 있다.
오백년 한양漢陽어리석은 자떼 아직몰려 있음을.우리들 입은 다문다.이 밤 함께 겪는가난하고 서러운안 죽을 젊은이.눈은 포도鋪道 위
묘향산 기슭에도속리산 동학골나려 쌓일지라도열 사람 만 사람의 주먹팔은묵묵히한 가지 염원으로행진고을마다 사랑방 찌개그릇 앞우리들 두쪽 난 조국의 운명을 입술 깨물며
오늘은 그들의 소굴밤은 길지라도우리 내일은 이길 것이다.새해 새 아침은
새해새 아침은산 너머에서도달력에서도 오지 않았다.금가루 흩뿌리는새 아침은우리들의 대화우리의 눈빛 속에서열렸다.보라
발밑에 널려진 골짜기저 높은 억만개의 산봉우리마다빛나는눈부신 태양새해엔한반도 허리에서철조망 지뢰들도
씻겨갔으면,새해엔아내랑 꼬마아이들 손 이끌고나도 그 깊은 우주의 바다에 빠져달나라나 한바퀴돌아와봤으면,허나
새해 새 아침은산에서도 바다에서도오지 않는다.금가루 흩뿌리는새 아침은 우리들의 안창영원으로 가는 수도자修道者의 눈빛 속에서구슬 짓는다.(주간경향)그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그의 행복을 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그의 파랑새처럼 여린 목숨이 애쓰지 않고 살아가도록길을 도와주는 머슴이 되자.그는 살아가고 싶어서 심장이 팔뜨닥거리고 눈이 눈물처럼빛나고 있는 것이다.그는 나의 그림자도 아니며 없어질 실재도 아닌 것이다.그는 저기 태양을 우러러 따라가는 해바라기와 같이 독립된
하나의 어여쁘고 싶은 목숨인 것이다.어여쁘고 싶은 그의 목숨에 끄나풀이 되어선 못쓴다.당길 힘이 없으면 끊어버리자.그리하여 싶도록 걸어가는 그의 검은 눈동자의 행복을기도 드리는 유일한 사람이 되자.그는 다만 나와 인연이 있었던어여쁘고 깨끗이 살아가고 싶어하는 정한 몸알일 따름.그리하여 만에 혹 머언 훗날 나의 영역이 커져그의 사는 세상까지 미치면 그때순리로 합칠 날 있을지도 모를 일일 게며.
신동엽의 산문들
시인정신론
1한 사람의 인체에 백여명의 의사가 엉겨붙어 제가끔 전문적인 한가지씩만 분해해가지고 달아나버렸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손톱·발톱 미장美裝 전문 연구의가 새로 나왔다 해도 결코 놀랄 세상은 이미 아니다.많은 사람들이 씨부렁거리며 현대사의 피부면을 겉으로 더듬어갔다. 그것은 마치 벌집처럼 구멍난 포대자루를 한 사람 한 사람의 눈물겨운 노력과 그들의 몸으로 안간힘 쓰며 덮어가려는 늙은 역사의 발자취와도 비슷한 것이었다. 열 부족으로 위축되어가는 피부를 피부약으로 고칠 순 없다. 흡사 발사된 산탄과 같이 공중으로 흩뿌려진 현대의 문명 파편 어느 곳을 뒤따라가봐도 그곳엔 침줄 자리는 없었다.
나는 지금 현대를 진단하려 한다.피와 정력과 인생으로 투쟁하고 계발하고 독을 마시어 간 아테네 철인哲人의 이야기는 현대에 와서 한갓 우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었을 뿐이며, 도시마다에 우뚝 솟은 사변철학의 크고 작은 상아탑에서는 두개골만이 남아 있는 정신 기술자들의 반인정적反人情的인 창백한 정력에 의하여 말라비틀어진 사유의 형해形骸와 피 없는 허구로서의 언어적 체계 건축 작업만이 직업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법조문, 대헌장, 정치원리, 왕봉학王蜂學 등등의 제품소에서는 노련한 맹목盲目 기술자들에 의해 수천년래 반복되어온, 실은 하나도 새로울 것이 없는 왕도王道 원리가 오색 칠색으로 장식 개증되어 각 지방 수혜국으로부터 모여오는 교활하고 호전적인 두목 상인들에게 넘
겨지고 있다. 그들 일단의 정치 전문 기술자들에게 인민이나 인생이란 이름의 구제 현황이 무슨 소용으로 실감될 리가 있겠는가.
교황곡의 맴도는 신비탑은 허공 속에 다만 솟아 있을 뿐이다. 아무도 그것을 통째로 혈관 속에 흡수하여 자양분으로 소화시키려는 사람은 없다. 전문적으로 화장化粧되고 광적으로 기교화된 현대 예술의 단단한 기구성機構性과 조직성 속에서 사람들은 여남은개의 음계 부호를 뜯어내어오는 것으로 종생終生 만족하고 살아간다.유럽의 고층건물 어느 화실 속에는 20여억 인구 중 단 두 사람의 준이해자準理解者를 얻어 ○○파 속으로 들어가버린 회화 예술가가 있었다고 우리는 듣는다.성서는 문법 연구가들의 문법 연구 대상이 되고 있을 뿐이며 성가는 성악가가 전임하고, 설교는 목사가, 예배는 신자가 각각 전임한다.
원자핵 연구소의 천만길 솟은 밀실 속에서는 가정도 세계도 자기 인생의 귀로마저도 말살당한 맹목 기능자들의 발광적인 활약에 의하여 또 하나의 더 무서운 맹목 기능자, 눈도 코도 귀도 없는 방사능의 집단을 분출시키고 있다.문학이라고 불리는 단자單子가 직업명사화한 것은 이미 옛날의 일이며 그것은 다시 더 영업적인 아들에 의하여 분주히 분가分家되어 나가고 있다. 이발사, 구두수선공, 영문타자수 등 한줄에 꿰 매달린 직업 명패 가운데서 시업가 소설업가 평론가 등 동류품적 명패를 발견할 수 있는 것도 결코 난처한 일이 아닌 현대가 되어버렸다. 신문은 다시 또 심리 전문, 행동 전문, 애욕 전문, 계율 전문 등 영업적 전문 점포로 분가를 거듭해나가고.
오늘날 철학, 예술, 과학, 경제학, 정치, 종교, 문학 등은 인생에의 구심력을 상실한 채 제각기 천만개의 맹목 기능자로 화하여 사발팔방 목적 없는 허공 속을 흩어져 달아나고 있다.우리는 어려운 시대, 어떻게 말하면 우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의 대지 위에는 우리가 나오기 전 이미 한그루의 고목이 서 있었다. 썩은 고목의 둘러리엔 행복한 갑충甲蟲들의 행렬이 눌어붙어 오랜 날부터 이어받아온 관습적인 언어들을 적청赤靑으로 물들여가며 기계적으로 뽑아 늘여놓고 있었다. 순조롭고 합리적인 공동 작업을이룩하기 위하여 반맹목反盲目의 만인은 그 그늘로 기어올라갔다.
우리들의 시대는 들떠 있다. 그 무엇인가 미래에 가리어진 운명적인 힘에 끌려 인류의 거품집은 성급히 들끓어오르고 있다.황하기黃河期를 벗어나 중세, 근대, 현대에 걸친 인류의 노력은 이상한 괴물 같은 거대한 축대 위에 선업先業을 이어받아가며 거의 맹목적·관습적 동작으로 돌을 쌓아 올리는 일로 집중되어오고 있다. 우리 시대의 문명은 ― 과학적 발전, 정치이론의 진보, 언어수사학의 개화 등은 모두 이 축대 위에서 피어났다. 이 축대는 그 체계 밑에서 일하고 있는 만인의 눈에 한편 구석에 서 있는 한그루 고목으로서가 아니라 세계 자체, 말하자면 절대적 전일자全一者, 바로 그것으로 인식되어져오고 있는 것이다. 유물唯物과 유리唯理, 자연주의와 낭만주의, 실존과 이상 등 동일한 고목 위에 피어난 이들 버섯은 불행히도 자기들 스스로가 세계적 조화를 이루는 데 불가결한 절대적 성립자, 다시 말해서 뿌리를 달리하고 있는 자립적 나무들이라고 착각되어왔던 것이다.
실은 광막한 대지 한구석에 피어난 고목 속에서 시험되고 있는 잡다한 벌레들의 코러스에 지나지 않았던 이들의 난립이······이미 쌓여져가고 있는 축대 위에 돌멩이 하나 보태주고 간다는 것, 그리고 이미 이루어진 고목 위에 따라 올라가 많은 동료들과 함께 귀뚜라미의 노래에 협주해본다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 순리로운 일일 것임에 틀림이 없다.그러나 새로운 우리 이야기를 새로운 대지 위에 뿌리박고 새로운 우리의 생각을, 새로운 우리의 사상을, 새로운 우리의 수목을 가꿔가려 할 때 세상에 즐비한 잡담들의 삼림은, 그리고 생경한 낯선 토양은 우리의 작업을 기계적으로 방해할 것이다. 황량한 대지 위에 우리의 터전을 마련하고 우리의 우리스런 정신을 영위하기 위해선 모두 이미 이루어진 왕궁, 성주, 문명탑 등의 쏘아 붓는 습속적인 화살밭을 벗어나 우리의 어제까지의 의상, 선입견, 인습을 훌훌히 벗어던진 새빨간 알몸으로 돌아와 있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2잔잔한 해변을 원수성原數性 세계라 부르자 하면, 파도가 일어 공중에 솟구치는 물방울의 세계는 차수성次數性 세계가 된다 하고, 다시 물결이 숨자 제자리로 쏟아져 돌아오는 물방울의 운명은 귀수성歸數性 세계이고.
땅에 누워 있는 씨앗의 마음은 원수성 세계이다. 무성한 가지 끝마다 열린 잎의 세계는 차수성 세계이고 열매 여물어 땅에 쏟아져 돌아오는 씨앗의 마음은 귀수성 세계이다.봄, 여름, 가을이 있고 유년 장년 노년이 있듯이 인종에게도 태허太虛 다음 봄의 세계가 있었을 것이고, 여름의 무성이 있었을 것이고 가을의 귀의가 있을 것이다. 시도와 기교를 모르던 우리들의 원수 세계가 있었고 좌충우돌, 아래로 위로 날뛰면서 번식번성하여 극성부리던 차수 세계가 있었을 것이고, 바람 잠자는 석양의 노정老情 귀수 세계가 있을 것이다.우리 현대인의 교양으로 회고할 수 있는 한, 유사有史 이후의 문명 역사 전체가 다름 아닌 인종계의 여름철 즉 차수성 세계 속의 연륜에 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은 하늬바람을 눈앞에 둔 변절기가 아니면 이미 가랑잎 물들기 시작한 이른 가을철, 우리들의 발언은 천만길 대지에로 쏟아져 돌아가기 위한 미미한 몸부림인지도 모른다.두치 앞의 모이만을 보고 일평생 쪼아 다니는 닭의 정신을 가리켜 소원小圓이라 한다. 눈과 모이와의 두치 간격을 직경으로 하여 한 바퀴 돌려 그린 원이 즉 그 닭의 정신의 크기이다.문명에 관습되어온 소위 현대식 지성인이라고 불리어지는 소시민들의 정신적 둥근 원은 고층건물과 고층건물 사이의 거리를, 숙소와 직장과 오락장과의 사이를 또는 서명書名과 인명人名과 개념과 개념과의 정신적 거리를 직경으로 하여 돌려 그린 원의 크기와 동등하다.
가령 불전佛典 저술가가 던지고 간 정신 직경의 넓이는 그 어느 현상학적 체계가들이 던지고 간 그것보다 훨씬 멀고 멀었다.한마디 이야기도 없이 한평생 길게 누워 졸다가 죽어 돌아간 사람이 있었다면, 나뭇잎에 고여 오른 이슬알이나 풍우에 밀려다니는 말 없는 모래알과 함께 그들의 정신적 환원의 크기란 부재不在이면서 최대재最大在인 우주환宇宙環의 기점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애석하게도 무엇인가 이야기하려 의욕하는 우리들의 처지와 지혜란 어중뜨기이다. 우리는 차수성 세계 속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규범지어진 속에서나마 최대재의 원을 지향하여 신명을 다스려가고 있는 게 우리 인간 수도의 서글픈 역사가 아니었던가.3인류의 봄철, 인종의 씨가 갓 뿌려져 움만이 텄을 세월, 기어다니는 짐승들에겐 산과 들과 열매만이 유일한 의지요 고향이었으며, 어머니 유방에 매어달린 갓난아기와 같이 그들과 대지와의 음양적 밀착 관계 외엔 어느 무엇의 개재도 그 사이에 용납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곳은 에덴의 동산, 곧 나의 언어로 원수성 세계이어서 그곳에 차수성 세계 건축 같은 것을 기획하려는 기운을 아직 찾아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유구한 세월이 흘렀을 것이다. 그러나 물성物性은, 태양과 봄바람과 지열은 언제까지나 그 씨앗으로 하여 씨앗으로만 덮여 있게 가만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떡잎을 만들어낸 것이다. 대지 위에 나뭇가지를 세우고 그 위에 올라 앉아 재주부리는 재미를 익히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이들 인간들은 대지에 소속된 생명일 것을 그만두고 대지와 그들과의 사이에 새로 생긴 떡잎 위에, 즉 인위적 건축 위에 작소作巢되어진 차수성적 생명이 되었다. 하여 인간은 교활하고 극성스런 어중띤 존재자로서 하늘과 땅 사이에 등록이 되었다.
오늘 인구의 수효보다도 많은 문명 계층의 실내마다 범람하고 있는 불안, 공포, 전제, 부도덕, 파멸, 이런 말거리들은 과연 조급한신경을 가진 소원군小圓群들이 단정하고 있듯이 불과 몇십년적 현대의 시대적 특징에 그치는 현상일 것인가. 과연 인간의 감정이란 하루 이틀 바람볕에 용이하게 개조 변질될 수 있는 특질의 것인가. 우리를 분한케 하고 우리 운명을 불행 속으로 몰아 넣으려는 인류 공동의 적, 우리가 싸워 무찔러야 할 공동의 적은 과연 현대의 구름 낀 그늘, 수다하게 출연한 지엽적 현상들 가운데 그 전신이 실존하고 있는 것일까.
천만에다. 우리 문명된 시대의 도시 하늘을 짓누르고 있는 불안, 부조리, 광기성 등은 다름 아닌 나무 끝 최첨단에 기어오른 뜨물들의 숙명적 심정인 것이다. 우리들의 불안은 바로 이탈자의 불안 그것이다. 차수적 세계성의 5천년 현란眩亂, 환언하면 인류의 장구한 여름철이 성과한 정신적 무성, 그 가운데서 우리는 필대로 펴 우거진 오뉴월의 둥구나무를 보듯 오만가지로 발휘되고 요구되고 천하에 폭로된 바 인간의 지상적 운명과 능력과 그것의 한계를 관망할수가 있다.
잠시, 인간의 천태만상한 성과와 역사를 한 몸에 시현하고 있는 거대한 둥구나무, 인류수人類樹를 그려보자.가지와 가지, 초단梢端과 초단, 잎과 잎, 교착交錯과 거리, 낙조 쪽으로 뻗어나간 황하계의 간지幹枝, 그것들의 횡적 간격, 사찰·교회들의 뻗은 가지, 왕궁의 역사, 봉건 영주의 말라붙은 이파리들, 사변철학의 가지, 첨단에 자리한 몇 사람들의 고치집, 바로 밑에 미처 분가를 못한 채 눌어붙어 농성籠城 이룬 신유리철학新唯理哲學의 발아 시도들, 위세당당히 기어올라간 연구실 물리학의 정점, 그것에 자리한 전자분열학의 아직 생존해 있는 티눈, 휘어져 올라간 자연과학, 거기서 또다시 갈라지고 갈라져서 삭정이 이룬 인체 맹장 전문의의 계보, 손톱 미용학의 소巢, 정치학 문학 총살법연구학.
이 숱한 가지들마다 나뭇잎마다 열린 가녀린 새집들은 앞으로 얼마나 더 문화를 계속하고 생장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20세기경의 허공중에 현란한 잔치를 베풀고 있는 수만 지엽 간의 어느 첨단에도 우리의 소굴은 정좌되어 있었단 말인가.문명인의 고향은 대지가 아니다. 그들의 출생은 허공 속에서 시종始終했다. 전복 등에 소라가 붙고, 소라 등엔 더 작은 조개가 붙어,모르는 동안 행복하게 살아가듯, 그들의 호적은 7천년 축적된 조형 문화적 부피와 인간 상호관계의 허구스런 언어 계층 위에 기록되어 오고 있다.
우리 인류 문명의 오늘이 있은 것은 오직 분업문화의 성과이다. 그러나 그뿐 그것은 다만 이다음에 있을 방대한 종합과 발췌를 위해서만 유용할 뿐이다. 분업문화를 이룩한 기구 가운데 ‘인人’은 없었던 것이다. 분업문화에 참여한 선단적 기술자들은 이 다음에 올 ‘종합인綜合人’을 위해서 눈물겹게 희생되어져가는 수족적 실험체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전경인全耕人’의 개념은 오늘 문명인들의 혐오와 멸시의 대상이 되고 있다. 편인片人들의 맹목 기능자적 집단발효에 의하여서만 자재로이 개미집은 이루어지고 개미집은 부서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흡사 거품 무리와 같은 것이다. 하여 그들이 집단작업으로 받들어 이룩한 축조물이란 다름 아닌 차수 세계적이요, 강집적强集的인 현상 건축인바 그 하나가 언어문화요 또 하나가 조형문화이다. 출발에 있어선 한갓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부대물로서 인간관계의 이기利器에 지나지 않았던 이들 조형성·언어성은 마침내 그의 내부 발전을 거듭함에 이르러 방대한 연대관계 위에 총과 조직을 형성하여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라 오늘 인간의 대지를 덮었다.
흔히 국가, 정의, 원수元首, 진리 등 절대자적 이름 아래 강요되는 조형적 내지 언어적 건축은 그 스스로가 5천년 길들여온 완고한 관습적 조직과 생명과 마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현대인구 거의 전부가 이 일에 종사하면서 이곳으로부터 빵을 얻어먹고 생의 근거를 배급받으며 다시 이것을 모셔 받들어 살찌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대지에 발 벗고 눌어붙어 자급자족하는 준전경인적 개체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인구가 조직되고 맹종되고 전통화된 차수성적 공중기구 속에서 생의 정신적 및 물질적 근거를 급여받고 있다. 시야 가득히 즐비하게 솟은 이러한 조직과 체계와 산봉우리들은 제각기 특유한 생리와 특유한 수단 방법으로써 자체 생명의 이익을 확충시켜가면서, 허약한 공분모公分母 위에 뿌리박아 마치 부식 작용하는 곰팡이의 집단처럼 번식해가고 있다. 하여 분자가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한정된 어머니 즉 일정한 대지로부터 양식을 빨아들이는 그들 공중기구는 기근을 모면할 수 없을 것이며 영양실조에 빠지게 될 것이며 종국에 가서는 생존경쟁의 광기성에 휘몰려 맹목적
인 상쇄로써 불경기를 타개하려고 발악하고 발광하고 좌충우돌하기에 이를 것이다. 무수한 기생탑의 층계 아래 장章과 절節과 구句의 마디마디 들어붙어 꿈틀거리는 부분품으로서 물리적 기능을 행위하고 있는 형형색색의 이들 맹목 기능자는 항상 동업자들끼리의 경쟁에서 도태될 위태성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안전한 영업입지를 닦기 위하여 왼눈 곰배팔이를 다시 더 사상捨象하고 바늘 끝만 한 시점에다 전역량을 집중하여 특수 특종한 기능을 뽑아 늘이는 일에로 기형적 분지分枝를 거듭하고 있다. 현대의 예술, 종교, 정치, 문학, 철학 등의 분업스런 이상 경향은 다만 이러한 역사적 필연 현상으로서만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상품화
해가고 있다. 이러한 광기성은 시공의 경과와 함께 배가 득세하여 세계를 대대적으로 변혁시킬 것이다.
세계는 맹목 기능자의 천지로 변하고 말았다. 눈도 코도 귀도 없이 이들 맹목 기능자는 인정과 주인과 자신을 때려눕혔고 핸들 없는 자동차같이 앞뒤로 쏘아 다니며 부수고 살라 먹고 눈깜땡깜을 하고 있다. 하다 지치면 뚱딴지같이 의미없는 물건을 만들어도 보고 울고불고하고 있는 것이다. 기생탑과 국가학과 지구는 스스로 길러 내놓은 이들 병신 자식들의 비칠거리는 발길에 차이고 받치고 파괴되면서 있다.현대 문명에 비관론적 해석을 부여한 몇몇 동서東西 지성들의 이야기는 나의 이러한 주장에 유력한 증언의 하나가 되어줄 것이다.오늘날 인구는 맹목 기능자들의 모임인 누상樓上 회의에서 계수기에 의해 집단으로 거래처분되고 있다. 백만명짜리, 천만명짜리가 한꺼번에 한다발로 묶이어 조변석개 이리저리로 흥정된다. 정치 전문 맹목 기능자들은 그 흙 묻은 발로 우리 백성들의 머리 위를 밟고 돌아다니면서 귀 익은 호령, 졸음 오는 연설들을 하고 있다. 사실 부끄럽게도 우리는 이제까지 그들에게 우리 신상에 관련된 모든 처분권을 완전히 위임하고 살아가는 우리도 똑같은 맹목 기능자였다. 비행기에 탑승한 일개 유원인類猿人이 던진 성냥갑만 한 화약에 의하여 순식간에 50만의 시민이 죽으면서도 거기 항거하여 단 한마디 입 벌릴 장사는 없었던 시대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오히려 인류 분업문화의 빛나는 성과로서 하늘 높이 찬양됐던 것이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 거대한 공장기구는 죽은 백성의 형제와 그들의 지능과 손과 발과 가정과 표정을 시장에서 매상買上하여 흡수 흡연하였으며 이러한 가운데 수천수만의 목숨과 일생이 눌어붙어 말라빠진 문명탑의 어둠침침한 왕궁의 바닥에선 발췌 주조된 귀동왕자 50만 단위의 권력자를 모셔내 오게 됐던 것이다.
문명인은 대지를 이탈하였다. 그들은 고향을 버리고 차수성 세계 속의 문명수文明樹 나뭇가지 위에 기어올라 궁극에 가서는 아무도 아닌 그들 스스로의 육혼肉魂들에게 향하여 어제도 오늘도 끌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실은 공중 풍선은 날이 갈수록 기세를 올려 하늘 높이 달아날 것이다. 마침내 인간은 아마도 지구를 벗어날 것이며 지구의 파괴를 기억할 것이며 인조 두뇌를 만들어 자동自動 시작詩作을 희롱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나는 생각한다. 모든 생물의 물질적 능력엔 동물로서의 한계가 숙명지워져 있을 것이라고. 아무리 서구적인 무서운 노력으로 하늘 끝에 이르기 위해 벽돌을 쌓아 올려본다 하더라도 그 하늘 끝은 나타나주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활동은 흡사 끓는 찌개 냄비 속에 일어나고 있는 분자들의 운동 현상과 비슷한 것일 것이다. 물이 끓으면 물방울들은 증기화하여 공중 높이 날아갈 것이다. 마지막에 가서 냄비 속은 텅텅 비어버릴 게 아닌가. 그러면 찌개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그러나 냄비 속을 벗어난 수분은 이미 찌개는 아니다. 찌개의 역사는 냄비 속에서 종말을 고한 것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모든 나무의 열매는 토실히 여물어 스스로 땅에 쏟아져 돌아올 것이다. 그들 인류수도 그 이상 지엽枝葉을 뻗칠 수 없을 곳까지 이르러 열매와 열매를 두루 뭉쳐가지고 말없이 땅에 쏟아져 돌아올 것이다.
그 차수성 세계 속의 문명수 위에서 귀수성 세계의 대지에로 쏟아져 돌아가야 할 씨앗이란 그러면 어떠한 것이어야 할 것인가.○○가家, X X 가라 함은 연구실과 기구와 문명과 점포에 각각 흩어져 모체계의 부분품으로서 자기의 생존 근거와 자기의 가능성을 못박고 있는 눈먼 기능자를 의미한다.주산가는 사무용 탁상에 앉아서 자기 앞으로 돌아오는 계산표만 하루 종일 검산해내는 눈 먼 기능자이다. 그에게 은행기구나 국가기구나 세계 인식이란 애당초 시점 밖의 이야기다.즉 그는 소원적 부분품에 지나지 못한다.사실 전경인적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전경인적으로 체계를 인식하려는 전경인이란 우리 세기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들은 백만인을 주워 모아야 한 사람의 전경인적으로 세계를 표현하며 전경인적 실천생활을 대지와 태양 아래서 버젓이 영위하는 전경인, 밭갈고 길쌈하고 아들딸 낳고, 육체의 중량에 합당한 양의 발언, 세계의 철인적·시인적·종합적 인식, 온건한 대지에의 향수적 귀의, 이러한 실천생활의 통일을 조화적으로 이루었던 완전한 의미에서의 전경인이 있었다면 그는 바로 귀수성 세계 속의 인간, 아울러 원수성 세계 속의 체험과 겹쳐지는 인간이었으리라.
코스모스는 가을에 피는 꽃이다. 긴긴 여름 동안 허공 속으로 푸르게 성장하기만 한다. 그러나 이따금 그 세계 속에서 예외를 발견한다. 세상이 모두 푸르기만 한 무성한 여름날 한송이의 꽃이 빠알갛게 피었다 쏟아져간 여름날의 코스모스를 보고 초록 동산의 동료 나무들은 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윽고 가을이 와 하늬바람이 불면 자기들도 자기 후손들을 시켜 언젠가 여름날 호올로 피었다 쏟아져간 그 코스모스와 똑같이 발화해야 할 것이다.
인류의 여름철 지구 이곳저곳에선 이들 코스모스꽃이 불완전하게나마 몇송이 피어났다. 그들은 세상을 알았고 인생을 알았고 그렇기에 자기 위치에서 가을로 돌아갔다. 불경 저술인, 오천언五千言의 발언인發言人, 성서 저술인, 이들은 무더운 여름날 호올로 피었다 쏟아져 돌아간 철 이른 꽃들이었다. 그들은 직업가도 전문가도 기술자도 맹목 기능자도 아니었다. 그들은 차수 세계 문명수 나뭇가지 위에 붙어산 뜨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대지 위에서 자기대로의 목숨과 정신과 운명을 생활하다 돌아간 의젓한 전경인적인 육혼의 체득자, 시詩의 철哲의 ‘인人’들이었다. 세계 정신의 원초적이며 종말적인 인식 위에 개안했던 그들은 그 정신을 우주와 세계와 인생에서 발산하고 돌아간 위대한 대지의 철인이요, 시인들이었다. 성서나 오천언은 과거가 남겨 놓은 인류 유산 중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전경인 정신이 투영되어 있는 거대한 시편들이다. 2천년 문명사에 기록되어온 수없이 많은 군소 사상가들, 군소 시인들은 이 불경이나 성서의 거대한 둥구나무 밑에 피어난 자질구레한 잡초들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니었던가.오늘 우리 현대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대지에 뿌리박은 대원적大圓的인 정신은 없다. 정치가가 있고 이발사가 있고 작자가 있어도 대지 위에 뿌리박은 전경인적인 시인과 철인은 없다. 현대에 있어서 시란 언어라고 하는 재료를 사용하여 만들어낸 공예품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의 시인 정신이며 시인혼이 문제되지 아니하고, 그 시업가의 글자 다루는 공상의 기술만 문제된다. 핵분열 연구가가 할리우드 광대에게 입힐 기구망신스런 옷을 꾸며내듯, 또는 발광한 빠리의 화가가 자기도 모를 색채로 화면을 난칠해놓듯, 시업가들은 언어를 화구 재료로 하여 무의미하고 불투명한 공예품을 만들어내고 있다.
차수성 세계의 톱니 쓸린 광풍 속에서 시인스런 소성素性을 가진 정신인들은 자기의 거점을 대지에 뿌리박기 전 주위 세계의 현란한분위기에 넋을 잃고 말았다. 정신분석학, 경제이윤론, 인구론, 응용미학 등이 대량으로 쏟아져 나와 각 분과 과학의 빛나는 성과를 다퉈 뽐내며 영화·녹음기·텔레비가 등장하여 인생의 위악적 욕구를 보다 많이 충족시켜주게 됨에 이르러 그들 시인스런 사람들은 사회의 한편 구석 연구실이나 찻집 속으로 도사려 들어가 단자單字 미학이나 어구 나열법에 하염없는 신경을 쏟고 있었다. 치차와 동력이 세계를 압도하여 시인의 주위에까지 밀려들어갔을 때 시인은 모든 털구멍을 닫아 아랫목에서 단어를 뜯고 있었다.
그들은, 정치는 정치가에게, 문명 비평은 비평가에게, 사상은 철학 교수에게, 대중과의 회화는 산문 전문가에게 내어 맡기고 자기들은 언어 세공만을 전업으로 맡고 있다.
고답파의 대변자는 말한다. 시인의 임무는 언어의 순화에 있을 뿐이다. 미의 세계는 열등한 지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세계라고. 발레리는 기하학을 전업하고 있었다. 다다는 로마문자 26개를 나열해놓고 세기적 권태에 하품 치고 있는 관중들을 불렀다.입체파는 건축을 지면 위에 시도했다. 모더니즘은 교수들로 조직된 신사단, 신묵시파는 댄스홀 옆 골목에다 간판을 내걸고 빈약한 개업 파티를 열었다.이러한 운동은 물론 구라파를 중심하여 일어났다. 그러나 이틀도 못 가서 눈치 빠른 각국의 문화 도매상인들은 구색들을 갖춰 가지고 바다를 건너갔다. 소위 후진국이라고 불리어지는 반식민지적 수도마다에선 최신식 수입품 선전광고가 푸짐히 나붙고.무슨 파, 무슨 주의자 등 근대적인 명칭으로 불리우는 모든 지식분자들을 한묶음하면 ‘밀려난 특종 계급’이 된다. 그들의 문화는 특수층의 주형적 정신 현상인 것이다. 그들이 역사상에 논 역할은 눈곱에 불과하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약한 병자의 노래가 아니면 대학 연구실 속에서의 언어연금술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독존적 귀족문화만이 우리 시대의 시인 전부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문학은 문학 전문가들끼리의 특수문화가 되어버렸다. 백성과 그들의 아무런 연분도 없어졌다. 그들은 그들대로 만백성의 살림 마을인 대지를 이탈하여 마치 무리떼 지은 하루살이의 덩어리처럼 하늘 높이 달아나고 있다.
시란 바로 생명의 발현인 것이다. 시란 우리 인식의 전부이며 세계 인식의 통일적 표현이며 생명의 침투며 생명의 파괴며 생명의 조직인 것이다. 하여 그것은 항시 보다 광범위한 정신의 집단과 호혜적 통로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하나의 시가 논의될 때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이야기 해놓은 그 시인의 인간정신도와 시인혼이 문제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철학, 과학, 종교, 예술, 정치, 농사 등 현대에 와서 극분업화된 이러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인식을 전체적으로 한 몸에 구현한 하나의 생명이 있어, 그의 생명으로 털어놓는 정신 어린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가히 우리 시대 최고의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란 인간의 원초적, 귀수성적 바로 그것이다. 나는 생각한다.시는 궁극에 가서 종교가 될 것이라고. 철학, 종교, 시는 궁극에 가서 하나가 되어 있을 것이다. 과학적 발견 ― 자연과학의 성과, 인문과학의 성과, 우주 탐험의 실천 등은 시인에게 다만 풍성한 자양으로 섭취될 것이다.
하여 내일의 시인은 제왕을 실직게 할 것이며, 제주를 실업케 할 것이며 스스로 천기를 예보할 것이다. 그는 태허를 인식하고 대지를 인식하고 인생을 인식할 뿐이며, 문명수 가지나무 위에 난만히 피어난 차수 세계성 공중건축 같은 것은 그 시인의 발밑에 다만 기름진 토비로서 썩혀질 뿐일 것이다. 차수성 세계가 건축해놓은 기성관념을 철저히 파괴하는 정신 혁명을 수행해놓지 않고서는 그의 이야기와 그의 정신이 대지 위에 깊숙이 기록될 순 없을 것이다. 지상에 얽혀 있는 모든 국경선은 그의 주위에서 걷혀져나갈 것이다. 그는 인간의 모든 원초적 가능성과 귀수적 가능성을 한 몸에 지닌 전경인임으로 해서 고도에 외로이 흘러 떨어져 살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문명기구 속의 부속품들처럼 곤경에 빠지진 않을 것이다.
하여 시인은 선지자여야 하며 우주지인이어야 하며 인류 발언의 선창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여름철의 장구한 세월을 살아온 우리 인류, 차수성 세계 문명수 가지나무 위에 피어난 난만한 백화를 충분히 거름으로 썩히울 수 있는 우리 가을철의 지성은 우리대로의 인생 인식과 사회 인식과 우주 인식과 우리들의 정신과 우리들의 이야기를 우리스런 몸짓으로 창조해내야 할 것이다. 산간과 들녘과 도시와 중세와 고대와 문명과 연구실 속에 흩어져 저대로의 실험을 체득했던 뭇 기능, 정치, 과학, 철학, 예술, 전쟁 등 이 인류의 손과 발들이었던 분과들을 우리들은 우리의 정신 속으로 불러들여 하나의 전경인적인 귀수적인 지성으로서 합일시켜야 한다.
거두어들일 사람이 따로 있을 것을 기다려, 거두어들여 하나의 열매로 뭉쳐놓을 사람이 따로 있을 것을 기다려 인류는 5천년간 99억의 인종들을 구사하고 시험하여 산간과 들녘에 백화만초로 피어있게 흩어놓았던 것이다. 백화만곡의 흐드러지게 쏟아져 썩는 자리에서 유구하고 찬란한 내일의 꽃은 피어날 것이다.전경인의 출현을 세기는 다만 대기하고 있다. 암흑, 절망, 심연을 외치고 있는 현대의 인류는 전경인 정신의 체득에 의해서만 비로소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인류수 나뭇가지 위에 피어난 뭇 나뭇잎들을 한 씨알로 모아가지고 우리들은 땅으로 쏟아져 돌아가야 할 이른 가을철의 선지자가 되어야 한다.그리하여 대지 위에 다시 전경인의 모습은 돌아와 있을 것이고 인류 정신의 창문을 우주 밖으로 열어두는 서사시는 인종의 가을철에 의하여 결실되어 남겨질 것이며 그 정신은 몇만년 다음 겨울의 대지 위에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바람과 같이 우주지宇宙知의 정신, 이理의 정신, 물성物性의 정신으로서 살아남아 있을 것이다.그리하여 그것은 곧 귀수성 세계 속의 씨알이 될 것이다.(『자유문학』·1961년 2월)금강 잡기雜記
몇해 전 금강 연변에 있는 백제 고도 B읍에서 일어났던 일이다.갑자기 온 천지를 뒤집어놓을 듯 쩌렁쩌렁대는 뇌성벽력에 놀라 마을 사람들은 새벽잠을 깼다. 그런데 그 천지를 째는 듯하던 뇌성은 단 10분도 못 가서 잠잠해지고 하늘은 다시 씻은 듯이 맑아지면서 새벽별들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어제저녁 잠들 무렵까지 그렇게 좋던 하늘에 이게 무슨 뜻하지 않았던 이변이냐고 마을 사람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수군댔다. 그러고선 아침 해가 두어발 동켠 산마루 위에 솟았을 때였다. 마을과 읍내는 놀란 만한 소문에 의해 온통 뒤집혔다.
아까 그 천둥·번개가 있기 조금 전 세 사람의 여승이 조약돌이 가득 담긴 바랑들을 허리·어깨에 졸라매고 나란히 서서 강 속으로 걸어 들어가 죽었다는 것이다. 사건인즉 이러했다.강가엔 백제 패망 시의 애절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조그만 고찰古刹이 하나 있었고, 그 절간엔 며칠 전 젊은 여승 셋이 찾아들어 묵고 있었다. 경주에 있는 무슨 절인가에서 두달 동안의 승려 재강습을 받고 다시 자기 사찰인 이곳에서 오륙십리 떨어져 있는 무량사無量寺까지 가는 도중 잠시 이 B읍의 유서 깊은 고찰에 들러 하루 이틀 여독도 풀 겸 쉬어가자 함이었다.초여름의 관광객이 심심찮게 찾아오는 이곳에서 회색 승려복을단정하게 차려입은 그들은 이틀을 묵으면서 보트도 타고 모래성도 쌓고 조약돌도 주우면서, 때로는 사탕장사 아저씨며 기념사진사 아저씨들과 가벼운 농담도 주고받으면서 조용하게 날을 보냈다.
이때 벌써 그들의 행동에서 심상치 않은 기미를 발견했었다는 사진사의 말에 의하면 세 여승은 아침저녁, 사람들의 눈을 피해가며 예쁜 조약돌들을 주워 모아 각기 자기의 바랑 주머니 속에 가득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마지막 날 밤 절의 주지와 사진사 아저씨를 청해놓고 작별인사를 했다. 과자와 호콩을 사다 대접하며 내일 새벽 일찍 첫 버스로 떠날 예정이니 없으면 간 줄 알아달라고······다음 날 새벽 그들은 조약돌들이 가득 담긴 무거운 그 바랑 주머니들을 어깨에 걸머져 허리에 꽉 졸라매고 귀신도 모르게 조용히 일렬로 늘어서서 강의 중심을 향하여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어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불행히도 발견자가 있었다. 건넛마을 사공이 날씨를 보러 문밖에 나왔다가 어스름 속에서 물소리를 내며 강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상한 세 그림자를 발견하고 놀라 이웃 청년들을 부르면서 소리질렀다. 그러자 그와 때를 같이하여 주먹 같은 소나기 빗발이 온 천지를 덮으면서 난데없는 그 무서운 뇌성이 하늘과 땅을 뒤엎어놓았던 것이다. 소나기와 천둥이 가라앉은 다음 사공과 부락민, 절간의 승려들은 모든 배들을 동원하여 낚시와 삿대로 강물 속을 더듬었다. 두어시간 만에 시체 하나가 낚시에 걸려 물 위에 올라왔다. 사진사의 말에 의하면 가장 나
이가 어린 여승이라 했다. 자기 말로 열여덟······ 그러나 스물두살과 스물네살이라던 두 여승은 끝끝내 나타나주지 않았다. 그 후로도 영영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그날 나는 장화를 신고 강변에 나가보았다. 소나기가 후리고 간산·들·밀밭·보리밭을 초여름의 투명한 햇빛이 영롱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한길씩 되는 호밀밭 사이를 걸어가자니 아랫도리는 물에 빠진 사람 모양 흠뻑 젖어버렸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강 언덕 쪽에서는 굵은 남자들 목소리며 아해들, 그리고 아낙네들의 수런대는 소리들이 점점 가까이 들려오고 있었다. 호밀밭이 다하고 드디어 강 언덕에 나섰다. 많은 사람들이 강 언덕에 서 있었다. 정복 경관의 모자에 붙은 모표가 화사한 햇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강 위에선 아직도 대여섯척의 배들이 물속을 뒤지며 오락가락하고 있는데, 이쪽 모래밭에선 많은 사람들이 둘러서서 무엇인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리로 갔다. 둘러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보았다. 축축한 모래밭에 거적때기를 깔고 그 위에 그 열여덟살짜리라는 여승의 시체를 눕혀놓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자 금세 공의公醫의 검시檢屍가 끝나 하얀 백광목 휘장이 덮여졌지만 나는 그녀의 너무도 앳된, 그 이 세상 아무것에도 상관이 없다는 듯한 평화스런 얼굴, 오뚝 선 지적인 콧모습, 흰 목언저리, 그리고 곱고 긴 열 손가락을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충격케 한 것은 왼쪽 팔뚝에 밤알만큼씩 역력히 흉터져 있는 네개의 우둣자죽이었다. 그녀의 몸에선 그녀의 신분을 알아볼 만한 아무러한 증거물도 나타나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본명이며 본적이며를 알 까닭이 없었지만, 그 우둣자죽은 그녀의 고향이며 어렸을 시절이며를 나로 하여금 생각하게 해주었다. 어딘가에 그녀의 추억 묻은 마을과 길들, 그리고 소꿉동무들이 자라고 있을 게 아닌가. 설사 부모형제가 없는 고아였다 할지라도 우두 놓을 때 그의 주변엔 누군가가 있었을 것이 아닌가.
나는 그곳을 빠져나와 강기슭을 거슬러 한없이 걸었다. 언젠가 버리고 온 내 가슴에 낡은 담장이 자취 없이 무너져 내리고, 그 무너져 내린 담장의 자리 위에서 조그만 꽃씨 하나가 말없이 떡잎을 갈라내고 있는 느낌이었다.이승 저켠 피안의 세계에 무엇을 보았길래 그들은 세 사람이 동시에 서쪽 하늘을 향해 합장하고 행렬 지어 한가닥 미련 없이 점점 깊어지는 물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멀고 먼 그 겨냥을 향해 아무 잡티 없이 달려가는 빠른 화살이 되게 했을까. 그리고 또한 그들의 죽음에 하늘은 어찌하여, 우리를 낳아준 자연은 어찌하여 그 주먹 같은 소나기와 뇌성벽력을 조화했을까.
그것은 필연성에 의한 조화였을까······ 아니면 해후였을까······알 것 같으면서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다만 나는 그들의 행동결행에의 의지 앞에 고개 숙이고 싶었다. 아무의 눈에도 뜨이지 않게 하기 위해 밤을 택했고, 거기다가 물속 깊이 가라앉아 다시는 시체를 남에게 발견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무거운 자갈바랑을 몸에묶고는 흔한 유서 나부랭이, 유품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일렬로 승천했다고 하는, 그 극적인 죽음 앞에 위대한 예술에서와 같은 법열法悅을 느끼고 있었을 뿐이다. 그들이 바랐던 것은 떠들썩한 이 남은 세상의 소문이 아니고 그대로 슬쩍 숨어버리고 싶었던 것이리라.
나는 요새도 가끔 그 세 여승의 죽음을 생각하면 종교·예술이 지니는 어떤 지상의 자세 같은 것을 그들의 마지막 행렬에서 느끼게 된다.(『재무財務』 ·1963년 10월)엉뚱한 이론
나는 때때로 이러한 것을 생각한다. 우리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 걸까? 우리들은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이러한 의문이 나의 사색을 괴롭힐 때 남들이야 어떻게 주장하든 나는 나로서의 여기에 대한 생각을 합리화시키려고 애쓴다. 그리하여 나는 나대로의 판단을 이어간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까닭은 생식을 위해서이다. 지구상에 생활하고 있는 모든 동물들이 그러하듯이 인간도 역시나 종자의 번식만을 유일한 생활 목적으로서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생활 목적을 무시하거나 경시해봐라.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식운동의 절대성을 무시한다면 절종絶種, 즉 인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인간은 만물지영장萬物之靈長이라 자칭하면서 동물과 인간을 근본적으로 분리시키려 애쓴다. 그러나 생물학적으로 고찰할 때 이것은 너무나도 무지몽매한 인간들의 자기도취인 것이다.
태양광선이 없다면 다른 지구상의 모든 생물과 똑같이 인종도 사멸하리라는 것과, 개나 원숭이나 새가 새끼를 퍼뜨려놓고 죽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자손을 낳아놓고 죽어서 흙이 되고 흙이 되고 한다는 것을 눈으로 볼 때 동물로부터 인간을 엄연히 구별하려는 주장에 하등의 타당성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그러면 인간에겐 이성이 있다고 말할 것이다. 내가 한발짝 양보하여 이성이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하자.
그러나 개는 인간의 코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의 발달된 후각의 기능을 갖고 있으며, 개미는 제 몸무게의 16배의 물체를 운반할 수 있는 힘의 기능을 가졌으며, 거미는 인 간이 하지 못할, 제몸에서 실을 제조하는 기능을 갖고 있지 않나.즉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겐 이성의 기능이 부여되어 있다. 그렇다면 또 예술욕이니 명예욕이니 유희욕이니 하는 따위의 감정을 인간의 성욕과 동등시함으로써 이러한 욕망이 본질적 인간 생활에 있어 불가결의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를 앞으로 돌리면 모든 동물 생활의 절대 목적은 오직 번식에 있는 것이며 또 이것을 위하여 성욕은 유일한 최고 수단으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또 식욕은 성생활의 지속, 즉 성교 ‘에네르기’를 축적하기 위한 한 수단으로서의 본능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식욕은 성욕 만족을 위한 기본적인 수단에 불과한 것이면서, 또 그 반면 성교 ‘에네르기’를 양성하는 이 식욕이 없이는 성생활이 잠시도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그리하여 우리 동물 생활에 있어서 식생활과 성생활을 제외한모든 활동은 성생활(식생활도 포함)의 합리화 내지는 효과를 고양시키기 위하여 봉사하는 것이거나 또는 성생활의 클라이맥스와 클라이맥스 사이의 진공 시간을 소비하기 위한 심심풀이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교 시의 클라이맥스에 육체의 전세포가 통틀어 흥분했을 때 그 동물의 전체(육체와 정신)는 그 순간 이상의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오직 그것에만 “완전히” 만족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 행복의 순간을 제외한 나머지의 모든 생활의 욕구에는, 즉 먹는 일이나 명예를 얻는 일이나 노는 일에 있어서는 언제나 그 이면에 현재 이상의 무엇, 바꾸어 말하면 의식적이거나 무의식적이거나 성적 형태에로 향하는 욕구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인간이 돈을 벌려고 애쓰는 이유는 돈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고 오히려 돈을 많이 소유함으로써 성적으로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다는 습관적인 잠재의식에서 기인된 현상이며, 인간이 무용을 하고 노래를 하고 하는 현상은 성적 향락의 여흥의 형태이거나 또는 성생활에 대한 변태적 내지 의식적 모방의 한 형태인 것이며, 인간이 아무 영양분도 없는 연초煙草를 기호嗜好하는 이유는 식생활과 성생활의 사이의 허무한 시간에서, 성 만족과 유기적인 관련이 있는 식욕을 만족시키려는 식食 만족의 모방(시늉)을 함으로써 무위의 시간을 없이하려는 무의식적 목적에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도 역시 유신론자의 말과 같은 어느 선천적으로 부여되어 있는 지상적至上的인 생의 목적(목표)이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유기적인 태양광선과 지열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한 ‘아메바’가 대자연환경의 작용에 의해서 생물학적으로 생존하여가듯 인간의 발생, 생존도 이와 조금도 다름 없는 자연법칙의 결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지상 목적은 정치도 아니며 철학도 아니며 예술도 아니며 다만 순리일 따름이다. 정치나 예술이나 철학이나 명예 같은 것은 다른 동물에 비해 좀 발달된 두뇌조직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인구의 증가와 함께 상대방을 지배해보려는 교활한 이성 작용에 의해서 결과된 산물인 것이며, 원시시대 이후로 이렇게 인간들이 두뇌 신경세포를 사용하여온 결과, 네 발로 기어다니다가두 발로 걸어다니고 그러자 필요치 않은 꼬리가 없어져서 흔적만 남아 있듯이 그와 반대로 인간의 두뇌세포는 자연도태의 법칙 아래 딴 동물에 비해서 고도로 발달되어온 것이다.
이상에서 나는 인간들이 살고 있는 목적은 ‘아메바’가 살아가듯 이 역시 자연의 순리임을 말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이 문제는 간단하다.즉 인간은 문명시대 이후로, 두뇌 신경의 교활한 발달 응용으로 말미암아 그것들에 의해 구속받고 있는 “성적 인간 생활의 자유”를 가지기 위하여 이름 좋은 질곡을 벗어던지기에 인간으로서의 총역량을 경주해야 한다.두뇌 운동의 과잉이나 또는 탈선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알몸 위에 축적되어가고 있는 ‘불필요한 문명’을 전인류의 생활에서 집어 동댕이치고 태양광선의 작용에 의한 인간 생명의 순리에 가장 순리적으로 순응하여 살아가면 된다.
이것은 인간성의 해방에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1951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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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 발행 2023년 10월 9일지은이 신동엽기획 (재)부여군지역공동체활성화재단편집 최준란디자인 안혜선전자책 제작 내일이비즈발행처 책공장발행인 이한나주소 서울시 영등포구 선유로9길 10 문래 SK V1 Center 202호홈페이지 www.booksfactory.co.kr문의 info@booksfactory.co.krISBN 979-11-951362-8-5 (03810)비매품~시인 신동엽의 좋은 언어에 쓰인 2종의 서체는 전문가들이 정림사지를 비롯하여 부여 곳곳의 백제 사적과 신동엽 시인의 청장년기 육필 원고들을 거듭 되살펴 분석하고 창안한 것으로, 백제와 신동엽 시인의 정신을 온전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흔히 글씨에는 혼이 담기어 있다고 합니다. 2종의 새로운 서체로 만든 이 선집의 각 페이지에 정림사지5층석탑의 아름다운 곡선과 금강의 유려하고도 힘찬 물줄기가, 백제와 신동엽 시인의 혼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낍니다.
-서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