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구리시 국가유공자 기록화사업

잠들지 않는 이야기여섯 번째

김동현 어르신 외국가유공자 13인 구술

목차

1장 독립을 이뤄낸 독립운동가

가가슴슴에에 늘늘 품품고고 있있던던 태태극극기기

06

독립운동가 故김상준 선생의 유족 김동현 어르신

모모두두가가 애애국국자자였였다다

20

독립운동가 故김인상 선생의 유족 김정숙 어르신

상상해해 임임시시정정부부의의 비비밀밀 특특파파원원

34

독립운동가 故김태원 선생의 유족 김홍장 어르신

나나라라를를 위위한한 의의무무이이자자 도도리리

48

독립운동가 故나광열 선생의 유족 나기영 어르신

삼삼형형제제가가 나나란란히히 만만세세를를 부부르르다다

64

독립운동가 故원정선 선생의 유족 원의선 님

학학생생 지지식식인인의의 사사명명으으로로

78

독립운동가 故이희남 선생의 유족 이용순 어르신

선선비비 정정신신으으로로 외외친친 대대한한독독립립만만세세

94

독립운동가 故정순완 선생의 유족 정지상 어르신

힘힘없없고고 가가난난한한 농농민민과과 함함께께

108

독립운동가 故형광욱 선생의 유족 형유진 어르신

조조선선의의 독독립립을을 간간절절히히 원원했했던던 의의사사

122

독립운동가 故함태홍 선생의 유족 함천우 어르신

2장 조국을 지켜낸 6.25전쟁 참전유공자

한한 명명이이라라도도 더더 살살리리기기 위위하하여여

138

6.25전쟁 참전유공자 김용만 어르신

152

책책 대대신신 총총을을 든든 학학생생 용용사사6.25전쟁 참전유공자 지동시 어르신

3장 평화를 수호한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전전쟁쟁터터에에서서 사사랑랑을을 꽃꽃피피우우다다

172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유갑준 어르신

헌헌신신적적인인 군군수수지지원원 십십자자성성부부대대

186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이영태 어르신

최최전전방방에에서서 총총을을 들들었었던던 1188세세 소소년년

200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이용구 어르신

1장

독립을 이뤄낸 독립운동가

가가슴슴에에 늘늘 품품고고 있있던던 태태극극기기독립운동가 故김상준 선생의 유족 김동현 어르신김동현 어르신은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 김상준 선생의 삶을 닮고자 했다.

위험하다는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늘 가슴에 태극기를 품고 다녔던 할아버지.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범한 농민으로 살고자 했지만,

시절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기에

김상준 선생은 총검을 지닌 상대에 굴하지 않고

나라를 위해 맞서 싸웠다.

국가유공자

김동현 1940. 11. 27. _

독립운동가

김상준 1876. 10. 12. _ 1926. 10. 16.

1919.청양군 정산시장 만세운동2004.대통령표창 추서

청양은 안동, 홍성 다음으로 전국에서 국가유공자를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정산면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청양읍, 비봉면, 남양면, 운곡면 등으로 퍼져 나가면서 7,000명 이상이 만세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만세운동이 시작된 정산면은 공주, 청양, 부여 등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라 늘 인파가 모여들었다. 정산면 만세운동이 대규모로 진행될 수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지리적 조건 덕분이다.

당시 정산면 백곡리에 살던 청년이었던 홍범섭은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여 고향 청양군으로 돌아왔다. 홍범섭은 평소 친분이 있던 임의재, 윤석희, 홍세표, 박상종 등을 집으로 불러 서울의 정세를 설명하면서 함께 독립선언서를 읽었다. 3.1만세운동 이후 독립선언서는 홍법섭과 같은 애국지사들에 의해 전국 각지로 전달되어 배포되고 있었다.

홍범섭은 동지들과 함께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군중들에게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려면 거사일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이 적격이었다. 1919년에도 4월 5일, 장날을 맞아 정산장터에 군중들이 몰려들었다. 홍범섭과 임의재, 윤석희, 홍세표, 박상종, 김필현 등은 오후 세 시부터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대한독립만세

10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를 외쳤다. 이에 호응한 주민들이 뜻을 하나로 모아 함께 만세를 외쳤다. 그 행렬에 정산면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던 김상준 선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범한 농민으로 살았던 김상준 선생은 늘 가슴에 태극기를 품고 다녔다. 위험하니 그러지 말라고 가족들이 만류해도 소용없었다. 만세운동이 시작되자 김상준 선생도 품에서 태극기를 꺼냈다.

3.1운동 이후 일제는 전국에서 일어나는 만세운동에 경계를 강화했다. 특히 사람이 많이 모이는 지역은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정산장터에서 만세운동이 본격화되자 정산헌병분견소 소속 일본 헌병이 즉각 출동하여 시위 참여자들에게 해산을 명령했다. 그러나 조국 독립의 염원을 담은 목소리는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한 헌병들은 주동자들을 체포했고, 결국 만세 시위를 주도한 30여 명은 헌병분견소로 연행되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김상준 선생은 7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헌병분견소로 달려갔다. 분노한 군중은 연행자를 석방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시위가 점차 격렬해지자 헌병은 군중을 향해 공포탄을 두 발 발포했다. 순식간에 얼어붙은 분위기 속에서,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던 정산향교 직원 권흥규가 앞가슴을 풀어헤치며 거세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총성이었다. 권흥규는 가

가슴에 늘 품고 있던 태극기11

12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가슴에 늘 품고 있던 태극기13

슴에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사망했다. 권흥규는 67세 노인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만행에 시위대는 우선 흩어졌다.

밤새 비가 많이 내렸다. 권흥규의 죽음은 시위가 이어지는 기폭제가 되어, 다음 날 권흥규의 시신을 운구하는 과정에서 전날보다 더 큰 규모로 불타올랐다. 4월 6일 아침, 헌병주재소로부터 권흥규의 시신을 인수하여 목면 안심리 고인 자택으로 운구하는 대열에 김상준 선생도 참여했다. 수많은 만장과 대한독립만세 깃발이 운구 행렬을 이루었다. 군중들은 운구가 지나가는 길마다 상여를 대고 노제를 올리며 통곡했다. 운구 행렬은 점점 늘어나, 1,000명에 가까운 군중이 모여들어 두 줄로 빼곡하게 섰다. 연령, 직업,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모여든 군중들은 권흥규의 죽음을 슬퍼하는 동시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했다.

권흥규의 운구가 단순히 추모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시위로 발전하는 것을 확인한 일제는 헌병만으로는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인근 공주에 주재하던 헌병이 정산에 급히 투입되었다. 헌병들은 정산장터 시위에서처럼 군중을 향해 무차별 발포했다. 이 발포로 권흥규의 조카딸 최윤안, 상여꾼이었던 김국삼 외 유행길, 장응렬, 윤광원 등이 사망했으며, 권흥규의 어린

딸은 칼날을 손으로 막다 손가락이 잘리고 볼에 총알이 관통했다. 함께 만세를 부르던 사람들이 총칼에 의해 끔찍한 부상을 입는 바람에 운구 행렬은 밤이 되어서야 장지인 고인의 자택에 도착했다. 곧장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었다. 헌병은 주동자를 색출하기 위해 사람들을 논두렁으로 마구 끌어냈다. 당시 김상준 선생은 골격이 크고 힘이 좋아 씨름대회에도 출전한 경력이 있었다. 마을에서 작게 농사를 짓는 농사꾼이었으나 씨름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이겨서 막걸리를 타 와 동네에 막걸리 잔치를 할 정도로 기골이 장대했다. 사람들이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논두렁으로 사람들을 끌고 가는 헌병에게 거세게 저항했다. 상대는 총검을 지니고 있었으나 굴하지 않고 힘으로 밀어붙이며 맞서 싸웠다.

결국 김상준 선생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4월 22일 보안법 위반으로 청양헌병분견소에서 태형 90대를 선고받았다. 아무리 기골이 좋다 해도 1919년 당시 김상준 선생은 사십 대였다. 태형 90대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결국 7년 뒤인 1926년에 사망했다.

김상준 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온 식구가 도망을 다녔다.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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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준 선생의 손자 김동현 어르신은 할아버지가 사망한 지 한참 뒤에 태어나 할아버지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일제의 경계와 감시로 김동현 어르신의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두고 일본으로 떠났고, 어머니 역시 집을 떠나셔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가슴을 쳤다. 무엇 하러 독립운동을 한다고 태극기를 흔들었냐고. 무엇을 위해 맞아 죽은 거냐고. 할머니는 맞아 죽은 남편이 불쌍해 자주 눈물을 흘렸다. 어린 김동현 어르신은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통해 할아버지의 존재를 어림짐작했다.

해방이 되자 일본에서 머무르던 아버지가 돌아왔다. 아버지가 돌아오자 이번에는 할머니가 다른 곳으로 가셨다. 김동현 어르신은 서울 이태원동에서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아버지와 살게 되었다는 즐거움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 발발했다.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가 아버지를 찾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객지 생활을 하며 고생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야 겨우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어려서 일제에 의해 아버지를 잃고, 일본까지 도망가서 살아야 해도 김동현 어르신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늘 밝고 명랑한 분이었다. 부자가 같이 동대문에서 피복장사를 하며 살았다. 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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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살다 보니 할아버지에 대해 생각할 여력도 없었다. 다만 아버지를 통해 할아버지도 비슷한 성품이지 않으셨을까 추측할 뿐이었다. 어느 날, 할아버지 산소를 벌초해 주시던 동네 어르신이 r이제부터는 자네가 하게.s 하기에 산소를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할아버지에 관해 알아 보았다. 그러던 중 1984년에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청양군 백곡리새마을회가 3.1운동에 참여했던 애국지사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를 건립한다는 소식이었다. 백곡리 마을회관 옆에 건립된 기적비에는 백곡리 출신의 홍범섭 등 5명, 총칼에 중상을 당한 김필현 등 2명, 그리고 김상준 선생과 같이 태형 90대를 받은 1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할아버지가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고초를 겪는 바람에 집안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가족과 헤어져 살아야만 했다. 하지만 김동현 어르신은 할아버지가 나라를 위해서 헌신하셨다는 사실이 영광스러웠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던 할아버지였지만, 자랑스럽고 감사한 마음으로 광복절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해 만세삼창을 선창하기도 했다.

국가에서 독립유공자를 추적하고 확인해 추서한 덕분에 김동현 어르신도 할아버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어떤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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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았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해도 죄 없이 끌려가던 사람들을 보고 몸을 던지던 할아버지를 닮고자 했다. 남에게 피해 안 끼치고, 삶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더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먼저 도와주며 평생을 살았다. 정부는 2004년 김상준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고향에 안장되어 있던 김상준 선생의 유해도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가슴에 늘 품고 있던 태극기19

모모두두가가 애애국국자자였였다다

독립운동가 故김인상 선생의 유족 김정숙 어르신할아버지 김인상 선생은

배움에 관한 확고한 믿음으로 계몽운동을 펼쳤다.

손녀인 김정숙 어르신은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것과는 별개로,

일제강점기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신 모든 분들이 애국자라고 생각한다.

어르신의 말처럼 모두가 애국자였고, 모두가 독립운동가였다.

국가유공자

김정숙 1949. 05. 28. _

독립운동가

김인상 1900. 02. 17. _ 1959. 06. 03.

1921.흠치교 계통의 독립운동에 참여2008.건국포장 추서

일제강점기에는 증산교를 비롯하여 민족주의적이고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종교들이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종교단체는 때로 독립운동가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종교단체에 가입하여 민중 속에 섞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경우도 많았다. 김인상 선생도 1920년 음력 8월경에 김정기의 권유로 영양군 석계면에서 흠치교에 가입했다. 이정호, 여성백과 함께 8인조 교도가 되어 김정기의 집 뒷산에서 함께 입도제를 치르고 일심동체를 서약했다. 겉으로는 종교 활동을 하는 척했으나 이들의 진짜 목적은 종교 활동을 하는 척하면서 국권회복운동에 전력하는 것이었다. 증산교의 초기 명칭인 흠치교는 전라도 고부 출신의 유생이었던 강일순이 1902년 창시했다. 동학농민운동에 참가했던 사람들 중 급진적인 성격을 가졌던 이들은 사회 개혁을 목적으로 다시 뭉쳤다. 그중 강일순도 있었다. 강일순은 사회의 혼란을 수습하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종교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1901년 전라북도 모악산에서 수도하기 시작해 1902년부터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그러던 중 1907년 강일순과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의병 창설을 모의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으나 제자들은 강일순의 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19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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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애국자였다25

사망하고, 차경석 등 몇 제자 몇 명만 남아 장례를 치렀다. 2년 뒤, 강일순의 아내 고(高)부인이 강일순의 성령이 자신에게 들어왔다고 주장하며 다시 하나의 집단이 형성되었다. 1914년 이들은 교명을 선도교, 태을교, 흠치교 등으로 불렀다. 이후 신자가 크게 늘면서 60인의 고문을 임명하고, 60인은 각자 6인조, 12인조, 8인조, 15인조를 아래에 둔 조직을 갖추었다. 신자들 중에서는 증산교의 교리를 믿고 따르는 자가 있는가 하면, 종교단체를 표방한 독립운동단체를 구성하기도 했다.

1916년 이용규, 김태영, 전용규 등 독립의군부에 관련되어 있던 인사들도 흠치교를 이용해 비밀결사 했다. 치성비를 명목으로 돈을 걷어 일부는 제사 비용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치성비를 65원 걷으면 60원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는 식이었다. 교도들 사이에서 독립운동 자금은 r고폐s라는 은어로 불리었다. 김인상 선생은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신도를 모집했다. 선생의 고향 경북 영양군은 김녕김씨 집성촌이어서 서로의 사정을 뻔히 다 알았다. 사람들은 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는 줄도 모르고, 자식이 열이나 되면서도 밖으로만 나돈다고 손가락질했다. 열 명이었던 자식들도 전염병 등으로 죽고 셋밖에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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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일곱이나 자식을 잃는 동안에도 김인상 선생은 집에 들어오지 않고 활동에만 매진했다. 심지어 큰아들 장가가는 날에도 체포될까 봐 나타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일본 경찰은 김인상 선생을 잡겠다고 집을 들쑤셨다. 그러나 김인상 선생은 신출귀몰했다. 찾으러 올 때마다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일본 경찰은 김인상 선생을 잡기 위해 집에서 일하는 머슴들에게 집에 불을 지르라고 지시했다. 불을 지르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이는 실제로 일본 경찰들이 독립운동가를 잡을 때 사용하던 야만적인 방법이었다. 집에 숨어 있다가도 불이 나면 밖으로 나올 거라는 게 이유였다. 결국 한 머슴이 살기 위해 기와집에 불을 질렀고, 불길은 순식간에 가족들이 살던 기와집을 집어삼켰다. 기둥이 불에 타고 서까래가 무너질 때까지도 김인상 선생은 나타나지 않았다. 멀쩡한 집만 불태운 격이었다. 김인상 선생의 가족은 집이 없어지는 바람에 기와를 한쪽에 쌓아 두고 빈 터에다 초가집을 짓고 살아야 했다. 살림도 없고, 먹을 것도 하나 없었다. 김인상 선생은 15인조 신도 모집에 착수하여 흠치교 가입을 권유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모아 돈이 만들어지면 치성비 일부를 제하고는 모조리 독립자금으로 사용했다. 김인상 선생에게

모두가 애국자였다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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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애국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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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인 믿음은 없었다. 독립운동을 위한 위장일 뿐이었다. 가족이나 이웃에게 단 한 번도 포교한 적이 없었고, 오직 김인상 선생 혼자 숨어서 활동했다.

그렇게 숨어 지냈건만 1921년 4월, 신도들과 함께 경찰에 붙잡혔다. 5월 12일 구류 처분을 받고 5월 23일에 기소되어 1921년 6월 2일에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r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s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치성비를 출자하고 집단을 조직하여 국권회복원동을 결의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정치 활동이 아닌 종교 활동이라며 불복하고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11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안동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이듬해 1922년 7월 31일에 출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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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와 보니 집도 없어지고, 가정은 처참했다. 김인상 선생의 가족은 이제 아버지가 가정에 충실하시지 않을까, 작게나마 기대했다. 형무소에서 나온 김인상 선생은 집을 떠나 저수지나 농로를 만들어주는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그 돈을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종교 활동을 안 한다뿐이지 독립자금을 모으는 일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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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1927년이 되어서야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가정은 후순위였다. 김인상 선생은 농민야학 소계여자학원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계몽운동을 했다. 당시에는 여성을 교육하지 않아, 여자들은 모두 문맹 수준이었다. 김인상 선생은 독립을 위해서라면 시골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배워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남자가 공부를 가르친다는 데 부녀자들은 거부감부터 느꼈다. 야학을 벌여놓아도 아무도 오지 않았다. 결국, 시집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며느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동네 친구들을 불러 모아 오라는 특명이었다. 당시 며느리는 어깨 너머로 사서삼경 같은 책들을 떼고 왔던 터라, 김인상 선생은 며느리를 앞세워 학생을 모집했다.

1935년에는 지하 조직에서 활동했던 이력을 숨기기 위해 이름을 r김창휴s로 개명했다. 종교 활동과도 완전히 연을 끊었다. 안타깝게도 1년간의 복역은 김인상 선생에게 커다란 후유증을 남겼다. 뇌전증(간질) 증세가 시작된 것이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돌아오다 논에서 쓰러지면서 허무하게 사망했다. 사망연도가 제적부 상 1968년이나 실제로는 기재보다 10년 전인 1959년이다.김인상 선생의 부인은 남편이 죽었음에도 눈물도 나지 않더라고 했다. 혼자 자식을 일곱이나 앞세우고, 일제의 감시에 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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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 세월이었다. 기와집이 홀랑 타버리고 초가집 하나도 유지하기 힘들었다. 큰아들 장가가던 날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남편을 향한 원망이 길었다. 그러던 중 2008년에 독립유공자 발굴 사업을 하면서, 흠치교에 소속되어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운동가들이 대거로 발굴되었다. 김인상 선생도 독립유공자로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다.

손녀인 김정숙 어르신은 독립운동을 하고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례들을 안타까워했다. 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가 되면서 독립운동에 대해 살펴보기 시작했는데, 3.1운동 당시 이천만 인구 중 15퍼센트가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김정숙 어르신은 일제에 저항하다 돌아가신 무명용사들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특히 만주나 시베리아, 카자흐스탄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분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다.

t할아버지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은 것과는 별개로, 힘들었던 일제강점기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신 분들도 다 애국자라고 생각합니다. 몇 사람만 조명받는 것도 가만히 생각하면 죄송스럽습니다. 모두가 애국자였고, 모두가 독립운동가였습니다.u

모두가 애국자였다33

상상해해 임임시시정정부부의의 비비밀밀 특특파파원원독립운동가 故김태원 선생의 유족 김홍장 어르신

김홍장 어르신의 아버지 김태원 선생은

비밀 특파원 임무를 수행했다.

청년 시절부터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열망 하나에

생애를 걸고 왕성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늘 집을 떠나 살아오신 아버지였기에

기억은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만 채워졌다.

하지만 그 족적만은 김홍장 어르신에게 귀감이 되었다.

국가유공자

김홍장 1949. 07. 26. _

독립운동가

김태원 1896. 10. 17. _ 1975. 10. 14.

1919. 05.상해임시정부 임정특파원 활동

1963.대통령표창 추서

1990.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919년은 독립운동 역사에 기념비적인 해이다. 3월 1일, 한민족이 일제의 식민지배에 저항하여 대규모로 만세운동을 벌이고, 독립선언서를 전 세계에 선포하였으며 4월 13일에는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3.1운동 이후 국내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일제의 통치에 조직적으로 저항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상해에 집결한 애국지사들은 프랑스 조계에 기관을 두고 임시 의정원을 구성했다.

임시정부는 각 지역에서 들불처럼 일어나는 독립운동을 발전시키기 위한 사령부이자 구심점이었다.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선전과 다양한 활동을 개시했다는 사실을 알려 국민의 신임과 지지를 얻어야 했다. 그러나 국외에 있다는 지리적 한계가 분명했다. 당시 내무총장이었던 안창호는 이를 극복해 상해와 국내를 연결하고 조직력을 강화, 국내와 원활하게 소통하기 위해특파원을 파견해 비밀 행정조직망을 조직했다. 바로 연통제와 교통국이다. 연통제는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운영된 제도였다. 임시정부와 국내를 잇는 비밀 연락망으로, 국내 13도 12부 211군 행정단위로 구획하여 연락이 닿도록 했다. 연통부는 다시 3급으로 나누어 각 도에 감독부, 각 군에 총감부, 각 면에 사감부를 두기

38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로 했다. 임시정부의 행정조직망을 국내로 확대해 구성함으로써 지방자치제와 유사한 방식을 시도했다. 이를 통해 임시정부에서 발표하는 법령과 공문을 전포하고 독립전쟁에 대비한 군인 징집, 군수품 조사, 독립시위운동을 준비했다. 정부와 국민이 떨어져 있는 현실이었지만 연통제를 이용하여 발 닿는 데까지 상해와 서울, 지방까지 연결하고자 했다.

교통국은 말 그대로 통신 기관이었다. 정보를 수집하고 교환하며 국내와 상해 사이의 연락 업무를 관장했다. 연통제와 교통국의 원활한 시행을 위해서는 특파원의 역할이 중요했다. 이들이 있어야 국제 정세와 독립운동을 대내외적으로 알리고, 동포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장려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국내 지도자와의 협의, 국내 독립운동 단체의 조직과 정세 파악에도 특파원이 필요했다. 당시 김태원 선생은 상해 후장대학(滬江大學)에서 1년간 유학하다 학자금이 부족해 자퇴하고, 전차 차장 감독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조국에서 들려온 만세운동 소식은 청년 김태원 선생에게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바로 조선인청년단체와 접선해 안창호를 만났다. 독립운동에 참가하고 싶다는 뜻을 전하자 안창호는 김태원 선생을 충청북도 특파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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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상해 임시정부의 비밀 특파원41

보낸다는 사령서를 건넸다. 사령서에는 대한독립애국단 단장 신현구와 함께 연통제를 실시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이화학당 부속학교 교사였던 신현구는 3.1운동이 확산될 무렵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대한독립애국단을 결성했다. 대한독립애국단은 서울에 본부를 두고 강원도, 충청도, 전라도 등지에 지단을 설치하고, 결성 초기부터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규모가 크지는 않아도 임시정부와 밀접한 교류를 가지면서 국내와 임시정부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 즉 연통부와 같은 기능을 수행했던 것이다.

안창호의 사령서를 품에 넣은 김태원 선생은 1919년 7월 23일 서울로 돌아와 신현구와 접선했다. 그렇게 만난 두 사람은 지역 유지에게 임시정부의 r연통제취지서s를 전달하면서 연통제 조직 설치에 힘을 쏟았다. 동시에 연통부를 관리할 적임자를 추천받아 연통제 직원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11월 20일, 신현구가 대규모 만세시위를 추진하던 중 체포되면서 대한독립애국단 지도부에 공백이 발생할 위기에 처했다. 김태원 선생은 혈복단을 새롭게 조직하여 대한독립애국단과 충청남도단을 흡수·개편했다. 혈복단은 주로 경기도 수원에서 활동했는데, 경기도의 유관순이라 불리는 이선경 열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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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복단 소속이었다. 혈복단은 임시정부에서 발간한 기관지 z독립신문{을 배포하고 대한적십자회 가입을 추진했으며 임시정부의 공채를 팔아 군자금을 모집했다. 특파원인 김태원 선생이 조직한 단체였으므로 연통제의 목적을 이어 임시정부와의 연락, 독립운동 자금 모집, 민족의식 고취, 시위운동 전개를 주도했다. 김교상, 김교선 형제와 임시정부 특파원 중 하나였던 신봉균 등이 가세하여 임시정부지원단체의 성격은 더욱 강화되었다.

김태원 선생은 국내에서 활동하는 여러 독립운동 단체와 제휴하여 조직력을 키워 나갔다. 혁신단과 제휴하여 z혁신공보{를 발행해 독립운동 참여를 독려하고 노백린, 김좌진, 신현대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항일단체 대한광복회와도 함께했다. 대한광복회는 단원의 수가 수백에 이르렀으며, 국권을 되찾기 위해 죽음으로써 결의하겠다고 선서한 단체였다.

1920년 5월에 김상옥, 한훈, 김동순 등 20여 명과 암살 행동반을 조직하여 일본 총독 암살을 계획했다. 8월에 미국의원단이 내

한하는 날이 적기였다. 암살 행동반은 일본 총독을 암살하고 각

관서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하지만 행동을 개시하기 전, 비밀이 누설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9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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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함경북도 특파원이 일제에 발각되어 관련자 75명이 모두 재판에 회부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1921년 11월, 김태원 선생은 경성지방법원에서 r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s 위반으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불복하고 항소했지만 1922년 4월,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이 확정되었다. 그때 나이 27세였다. 김태원 선생은 함흥형무소에서 3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1924년 4월 17일에 가출옥했다.

그 이후 김태원 선생의 궤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유족인 김홍장 어르신에게도 아버지에 관한 기억이 많지 않다. 어린 시절, 잠시 함께 살았던 아버지는 어렵고 무섭기만 한 분이셨다. 그나마도 김홍장 어르신이 여덟 살이 되던 해, 의사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아버지와도 헤어졌다. 그 뒤로는 외조모와 함께 살았다. 아버지에 관한 기억은 외조모에게 들은 이야기뿐이었다. 배제학당을 나오고 배제학교에서 영어 교사를 했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중국에서 유학까지 하신 만큼 외국어에 능통해 쓰임이 많으셨다고 했다. 가족과 뿔뿔이 흩어져 외롭게 살다 다시 아버지를 만난 건 스물일곱 살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결혼도 하지 않았고 사회적으로 기반도 마련되지 않았을 때 갑자기 아버지가 나타나 당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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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웠다. 당시 이모 댁에 살고 있던 터라 방 한 칸에 아버지를 모셔야 했다. 김홍장 어르신에게는 이복형들이 있었으나 일평생 만난 적도, 연락이 닿은 적도 없었다. 형들이 미국에 살았던 터라 갈 곳이 없어진 아버지의 말년을 책임질 사람은 김홍장 어르신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일 년도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장례와 장지도 이십 대의 김홍장 어르신이 다 책임졌다.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은 어릴 적 몇 년과 돌아가시기 직전의 몇 개월이 전부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아버지의 족적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었던 만큼 알아보기도 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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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제일교회에서 집사로 활동하셨다는 말씀을 들어 정동제일교회에 찾아갔으나 기록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근무했다는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6.25전쟁을 겪으면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말뿐이었다. 아버지가 책도 몇 권 쓰셨고 번역도 하셨다는데,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이제는 알 수가 없다. 김홍장 어르신 역시 아버지 김태원 선생처럼 번역가로 오랫동안 일했다. 전공은 공학이었는데 나중에는 번역가협회에서 번역을 했다. 독립운동가인 아버지가 자랑스럽기도 하고, 아버지로서는 그립고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결국 아버지와 같은 일을 하며 살았다. 1990년 김태원 선생이 애족장을 추서 받으면서 장지를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했다. 장자가 아닌 탓에 유족으로서 혜택 하나 받지 못해도 여전히 아버지를 모시는 막내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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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라라를를 위위한한 의의무무이이자자 도도리리독립운동가 故나광열 선생의 유족 나기영 어르신나기영 어르신은 아버지 나광열 선생에게서

독립운동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을 들었다.

나라를 위하는 게 대단한 일이 아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의무이자 도리일 뿐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살아온 삶은 투옥과 고문의 연속이었다.

묵묵히 나라를 위한 헌신에 몸을 맡긴 아버지처럼

어르신도 평생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국가유공자

나기영 1948. 03. 11. _

독립운동가

나광열 1921. 11. 21. _ 2007. 07. 11.

1941. 11.충남 예산공립농업학교 재학 중 반일의식 고취 발언

2023.대통령표창 추서

t우리들은 조선인의 민족혼을 뺏기지 말고 끝까지 싸우자. 만주에서 독립군을 이끌고 싸우는 김좌진 장군, 지청천 장군을 생각하고, 그 휘하로 가서 활동하자. 우리가 상해 임시정부를 돕자!u1941년 11월 15일, 예산 공립농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나광열 선생이 동급생들 앞에서 외쳤다. 일본인이었던 예산경찰서장이 예산 공립농업학교 학생들에게 육군 지원병으로 신체검사를 강행하던 날이었다. 강제적인 신체검사에 모두가 반기를 들었고 결국 나광열 선생은 교장을 찾아가 강제 신체검사의 부당함을 강력하게 항의했다. 교장은 그저 예비적으로 시켜 보았다고 변명하면서도 뒤로는 사상이 불온한 자라며 예산경찰서에 나광열 선생을 고발했다.

비단 신체검사 사건만이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인 교장에게 나광열 선생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나광열 선생이 예산 공립농업학교에 입학할 때 신입생은 일본인 두 명을 포함하여 총 50명이었다. 상급생 중에는 항일사상을 가진 학생이 많았으며, 학생들은 이를 예산 공립농업학교의 자랑이자 전통으로 여겼다. 그러나 조선인 교사는 단 한 명뿐이었고, 학교는 신입생을 1년간 의무적으로 기숙사에 수용하면서 황국신민화를 세뇌 교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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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항일정신을 보고 배웠던 나광열 선생은 강제적인 세뇌 교육에 굴하지 않았다. 경성 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부친 나상원 선생은 세계정세에 밝으셨고,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남다른 조국애를 자랑하시는 분이었다. 한약방을 하며 독립자금을 대셨던 조부 나기하 선생 역시 어린 나광열 선생의 손을 붙잡고 크거든 꼭 나라를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셨다. 그렇기에 나광열 선생의 항일운동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전개되었다.

3학년 때부터는 학생들에게 자행되는 황국신민화 교육을 반대하기 위해 r일본어 안 쓰기 운동s을 전개했다. 당시 우리말 말살 정책에 의해 일본어를 배우는 시간이 r국어s로 표기되어 있었다. 이에 기숙사 각방을 돌아다니며 학생들의 수업 시간표에 일어 시간은 r일(日)s 자로, 조선어 시간은 r국(國)s자로 표기하라고 알렸다. 일본어를 사용하는 학생을 발견하면 혼을 내기도 했다. 이것이 나광열 선생이 학생으로서 일본인 교사의 지시에 반대하고, 조선총독부의 우리말 말살 정책에 반기를 든 첫 시작이었다. 일제의 만행이 날로 심해졌으나 나광열 선생은 굴하지 않고 교내에서 항일운동을 이어 나갔다. 4학년 때인 1940년 4월 29일이었다. 일황 생일을 맞이하여 학교에서는 봉안전을 마련했다.

나라를 위한 의무이자 도리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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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광열 선생은 차마 시키는 대로 경례할 수 없었다. 봉안전뿐만 아니라 강당 단상에 걸린 일황의 사진 앞에서도 고개를 빳빳이 세웠다. 이듬해 1941년 봄날에는 급우들에게 독립만세를 불러보자고 제안했다. 나광열 선생의 선창으로 r우리나라 독립만세s를 크게 불렀다. 교무실과 거리도 멀었고, 다행히 두 명의 일본인 학생은 그 자리에 없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애국 애족하는 충성심으로, 윤봉길 의사를 비롯한 독립투사들의 항일정신과 김구 주석의

나라를 위한 의무이자 도리55

상해 임시정부 활동 상황도 급우들에게 알렸다. 앞서 말했듯 의도가 분명한 지원병 신체검사에 학생들이 반발했고, 나광열 선생은 학생 대표로 강력하게 항의했다. 육군 지원병 제도는 일제가 조선인을 대상으로 시행한 제도였다. 말이 지원이지, 일본군과 조선총독부의 강제였다. 조선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일제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한 강제동원이었다. 그 일로 예산경찰서에서 4개월간 혹독한 취조를 당했다. 학교에서 심기를 거스르는 활동을 이어 갔기에, 신체검사 거부를 빌미로 경찰에 넘긴 것이었다. 이후 홍성검찰청으로 이송되어 수감되었고 60일 동안 전기 고문, 물고문, 구둣발로 차거나 뺨을 때

리는 등 악랄한 고문을 받았다.

신체검사에 반대한 죄라기에는 심한 처사였다. 동급생 중 하나가 예산경찰서 최재형 형사에게 밀고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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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게 되었다. 매일 꼼꼼히 작성하던 일기와 평소 써 왔던 수필, 산문은 투옥 수감 때 불리한 증거물로 작용했다. 일기장에는 애끓는 조국애가 가감 없이 표현되어 있었다.

1942년 4월, 홍성경찰서 사법주임이 점심시간에 취조실로 끌고 갔다. 나광열 선생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그를 따라나섰다. 다행히도 그는 아버지의 공주고등보통학교 동창이었다. 친구 아들이 나라를 위하다 위험한 처지에 놓였다는 사실에 크게 감동하여 t우선은 부인해라. 너는 항일 운동사실을 부인하고 석방되어 나가서 우리나라 독립을 위하여 힘쓰라u고 부탁했다. 그러고는 누가 볼까 얼른 다시 감방으로 보냈다.

5월 7일, 나광열 선생은 일본인 판사 앞에 섰다. 아버지 동창의 부탁과는 달리 모든 것을 자백하고 시인했다. 그러면서도 그저 우리나라가 없으니 독립운동만 했지, 폭동을 일으키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졸업을 하고 군대에 가면 되지 학생 때 신체검사를 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항의했다. 판사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판결을 내렸으나 공분한 검사들이 경성복심법원으로 공소하였고, 나광열 선생은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서대문형무소 투옥은 혹독한 고문을 자행하기로 악명이 높았지만, 전국의 대학생들과 독립운동을 도모할 기회였다. 전국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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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 대학생들이 치안유지법으로 잡혀와 투옥 중이었다. 고향은 제각각이었어도 뜻을 같이한 동지들이라 마음만은 하나로 통했다. 그들은 끝까지 나라를 위해 몸 바치자고 결의했다. 그러나 동지들과의 만남은 길지 않았다. 일제는 나광열 선생이 수감된 독립투사들에게 독립사상을 심어줄 것을 염려해 부역도 시키지 않고 독방에 감금시켰다. 나광열 선생의 기록에 따르면 r고독의 벌s이었다. 고문과 고초, 그리고 고독의 벌까지 더해졌다. 그렇게 무려 2년의 세월을 서대문형무소에 복역했다.

출감 후에도 자유의 몸이 아니었다. 움직일 때마다 신고해야 했고 출타할 때는 몸수색까지 당했다. 가족들까지 감시 대상이 되는 바람에 해방이 될 때까지 모두가 불안 속에서 살았다. 해방되고도 독립운동의 여파가 이어졌다. 부여에서 촉탁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는데, 학교에서 졸업장 제출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예산 공립농업학교에서 제적 처리가 되는 바람에 졸업장이 없었다. 결국 교사직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1946년에 혼인하고 가장이 된 그에게는 암담한 일이었다. 다행히 1948년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에서 나광열 선생을 불렀다. 그제서야 예산공립농업학교에서의 항일 투쟁 사항이 항일운동의 공으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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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가을에는 예산 공립농업학교 30대 졸업생이 나광열 선생을 찾아왔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했다는 명예로 교정에 항일 독립투사 동상을 건립하고자 하니 승인해 달라는 이유였다. 그러나 나광열 선생은 r나는 아직 살아있고, 당시 항일 투쟁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하여야 할 의무이며 도리s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나광열 선생의 유족인 나기영 어르신 역시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셨고, 훌륭하신 분이라는 칭찬을 줄곧 들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r나라 위해서 독립운동을 한 게 대단한 일이 아니다. 당시는 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s이었다고만 말씀하셨다. 나라에서 특별히 인정해 주지 않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우리말로 공부한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으냐는 말에 나기영 어르신도 수긍했다.증조부와 조부, 부친 모두 항일운동을 하셨던 집안이었다. 대대로 내려오던 애국정신이었으므로 특별한 줄도 몰랐다. 나라에서 애국지사로 대우받는 것 없이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았다. 아버지가 홍성읍사무소, 서천군 마서면 면사무소, 국립농산물검사소 등에서 공무원으로 평생을 보내신 바람에 어릴 때는 6개월에 한 번씩 이사해 그게 좀 불편하긴 했다. 아버지는 당신이 겪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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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초 때문인지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거나 남 앞에 나서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 바람에 나기영 어르신은 일흔이 다 되어서야 대학에 가서 공부를 시작했다. 어느 날 보훈처에서 나기영 어르신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 오더니, 대뜸 아버님 성함을 물었다. 처음에는 보이스피싱인 줄 알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도 한참 지났기 때문이었다. 보훈처에서 나광열 선생이 애국지사로 발굴되어 국가유공자로 선정되셨다는 소식에 눈물부터 났다. 육남매가 어렵게 공부했던 상황과 열심히 사시다 2007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안타까웠다. 나광열 선생이 돌아가시고 16년 뒤인 2023년, 정부는 항일운동을 기리어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늦게라도 나라에서 인정받았다는 것이면 충분했다. 포천에 있던 묘를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하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학생회장에 뽑혀 학생들 앞에서 연설했던 모습을 떠올리면 확실히 아버지를 닮은 것 같다. 지금도 나기영 어르신은 아버지를 본받아 봉사하는 삶을 살고 있다. 예순여섯에 입학한 대학교에서도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씀처럼 r누구든지 할 수 있는 일s이라 생각할 뿐이다.

62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삼삼형형제제가가 나나란란히히 만만세세를를 부부르르다다독립운동가 故원정선 선생의 유족 원의선 님

할아버지 원정선 선생은 1919년 4월 4일

서산군 정미면 천의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군경은 시위대를 무작위로 체포하고 구타했다.

이때 체포된 원정선 어르신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지만,

무자비한 구타로 척추가 부러졌다.

거동조차 할 수 없게 된 원정선 어르신은

46세 이른 나이에 생을 마치셨다.

원의선 님은 그런 할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아파온다.

국가유공자

원의선 1970. 03. 02. _

독립운동가

원정선 1892. 02. 01. _ 1938. 08. 17.

2022.대통령표창 추서

68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삼형제가 나란히 만세를 부르다69

참으로 짧은 인생을 사시다 돌아가셨다. 원의선 님은 할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가난한 시골 농부로 사셨던 할아버지가 조선의 독립을 외쳤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46년의 짧은 인생을 사셔야 했을까 충청남도 서산 대호지 송전에서 태어난 원정선 선생은 1919년 4월 4일 충청남도 서산군 정미면 천의 장날에 있었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000여 명의 대호지면 면민과 당시 장을 보러온 사람들과 합류하며 인근에서는 최대 규모의 시위운동이었다. 대호지 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은 여러 방향에서 동시에 추진되었다. 중요한 한 축은 남주원을 중심으로 한 지역 유생들이었다. 이들은 1919년 3월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을 목격했다. 고향으로 돌아올 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1통을 입수하여 대호지에서도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동시에 천도교 중심인물인 백남덕도 홍순국, 김장안 등은 천도교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다. 천도교가 대호면 송전리에 근거지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면사무소 직원을 통해 유림들이 만세운동을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백남덕은 천도교 중심이 아닌 면사무소와 유생들이 준비

70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중인 대호지 만세운동에 가담하기로 했다.

홍성으로 가 김복한 문하에서 수학하던 대호지 출신 남상혁도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김복한은 명성황후시해사건과 을사늑약 이후 두 번이나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지사였고, 3.1만세운동 때 유림들의 독립 의사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파리 장서를 주도한 인물이었다. 그는 남상혁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의거를 일으키라고 지시했다. 존경하는 스승의 말씀에 따라 남상혁은 대호지로 돌아와 조부 남진희와 남주원을 만나 김복한의 뜻을 전했다. 때마침 남주원도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있었으니, 서로의 뜻이 맞물리면서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만세운동을 준비했다.대호지 유생들은 r독립운동 추진 위원회s를 구성하여 구제적인 만세운동 일시와 장소를 논의했다. 거사 장소는 유동인구가 많은 천의장터로 정해졌다. 평소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에 대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던 면사무소 사환 송재만이 행동 총책을 맡았다. 송재만은 4월 2일부터 3일까지 면사무소 직원 김동운, 강태원 등과 모의하여 도로와 나무 정리 작업을 구실로 작성한 공문을 각 구장에게 보냈다. 구장들은 공문 내용을 주민들에게 알렸고, 4월 4일 이름 아침부터 도로를 보수하기로 했다. 그사이 송재만은 한운석과 함께 애국가를 만들고, 자신의 상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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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만할 예정으로 사 두었던 흰 광목 3척으로 대형 태극기를 제작했다. 주민들의 각 가정에서는 태극기를 따로 준비했다. 독립기념관에 기증되어 전시되고 있는 r남상락 태극기s가 바로 대호지면에서 나온 것이다.

거사일인 4월 4일 아침, 유생들과 행동대원, 도로 수선을 위해 참여한 주민들이 대호지 면사무소 앞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송재만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삼십 척 죽간에 옷감으로 만든 대형 태극기를 달았다. 대호지면장 이인정은 도로 수선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라는 취지로 주민들 앞에서 연설했다. 이어 남주원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했고, 한운석이 만든 애국가가 제창되었다. 노래가 끝나자 이인정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주민들은 세 개의 편대로 나뉘어 행진했다. 대호지면 조금리에서 천의장터까지 7킬로미터를 가는 동안 900여 명의 주민이 행렬에 참여했다. 천의장터에 이르러 태극기를 시장 광장에 세우자 장꾼, 인근 주민들이 합세하여 1,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원정선 선생의 삼형제도 결의하고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했다.만세를 부르던 군중들은 시위를 제지하고자 하는 일본 순사들까지도 잡아다가 대열에 합류시켰다. 순사들은 어쩔 수 없이

72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만세를 부르는 척하다 겨우 도망쳤다. 순사들은 그 길로 가까운 당진경찰서에 도움을 요청했다. 당진경찰서에서 온 무장 경관 두 명은 대형 태극기부터 탈취하려고 했다. 뺏으려는 경관들과 뺏기지 않으려는 군중들 사이에서 치열한 다툼이 벌어졌다. 몸싸움을 벌이던 군중들은 당진에서 온 순사를 논 가운데로 밀어 넣었다. 그 순간, 총성이 울리며 군중들을 향한 무차별 총격이 시작되었다. 시위대 4명이 총상을 입자 군중은 크게 분노하여 돌을 던지고 무기를 빼앗았으며, 경찰주재소를 파괴했다. 도망가는 순사들을 쫓아가면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면서도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4월 4일에 천의로 출동한 홍성수비대 보병 5명, 서산과 당진 경찰서 경관 8명으로 구성된 일제 군경은 4월 5일 새벽이 되어서야 대호지에 도착했다. 정미면 여미리의 운산교는 무너진 채로 보수되지 않아 차량이 통행할 수 없었다. 보수공사를 하기로 했던 주민들은 죄다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미면 대운산리 이연종 구장이 수비대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복구를 미루었다.

군경은 주모자 색출에 혈안이 되었다. 대호지 면사무소 앞을

삼형제가 나란히 만세를 부르다73

거닐던 송봉운을 마주치고는, 다짜고짜 폭행했다. 서산으로 연행하겠다며 앞세워 놓고 사격을 가했고, 대호지에서 처음으로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을 시초로 군경은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대호지 주민들은 탄압에 굴하지 않고 시위를 이어나갔다. 경찰을 폭행하고, 만세를 외치고, 봉화산에 봉화를 올렸다. 그러나 서산·당진·공주에서까지 동원된 일본 군경에 의해 만세 군중은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만세운동에 참가했던 수백 명의 인사가 체포되었다. 군경은 시위대를 잡아 들여 시장 바닥에 늘여 놓고 마구 때렸다. 매 맞은 사람들은 걷지도 못하고 기어 다녔다. 주모자급 인물 56명은 검거 직후 공주지청으로 이송되었다. 이들은 항고와 상소를 거듭하며 옥중에서까지 항쟁했고,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원정선 선생도 만세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원정선 선생은 1919년 5월 21일 r보안법 위반s과 r소요s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음에도 체포와 함께 벌어진 무지막지한 구타로 척추가 부러져, 거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일본 경찰은 나무의자에 사람을 묶은 다음 그대로 집으로 보냈다고 한다. 병원에도 가지 못하고 약도 써보지 못한 상태로 원정선 선생은 돌아가시고 말았다.

7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삼형제가 나란히 만세를 부르다75

대호지 천의장터 4.4독립만세운동은 남주원을 위시한 유림과 이인정 면장이 참여한 점에서 전국 최초의 민·관 합동 항일운동이었다. 면장, 면서기, 소사, 구장으로 이어지는 행정조직이 만세시위를 이끌었기에 체계적으로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행정조직의 지휘하에 전 주민이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일제에 맞섰다. 총과 기물을 빼앗고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적극적이고 치열한 시위였다. 그 결과 4.4만세운동으로 인한 피해자 199명 가운데 대통령표창 이상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분이 2023년 3월 현재 156명에 달한다. 애국장 3명, 애족장 39명, 건국포장 1명, 대통령표창 113명이다.

76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학학생생 지지식식인인의의 사사명명으으로로

독립운동가 故이희남 선생의 유족 이용순 어르신

아버지 이희남 선생은 어릴 때부터 일본에 대한 증오심이 가득했다.항일운동의 뜻을 굽히지 않고 학생동맹을 조직해 활동했고,

대학생 시절에는 일제의 수색에 들켜 고문을 당하고 강제노역을 했다.이용순 어르신은 부모의 등을 보면서 자란다는 말처럼

아버지의 뒤를 이어 평생 공무원으로 살았다.

모진 세월을 겪으셨지만, 꼿꼿하고 바르게 사셨던 아버지를 기억한다.

국가유공자

이용순 1961. 01. 21. _

독립운동가

이희남 1925. 12. 16. _ 2008. 06. 16.1941.경성유학5인조 학생동맹 운동

1995.건국포장 추서

이희남 선생은 강원도 회양군 난곡면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일본의 강제침략과 이에 항거한 의병활동, 기미만세운동의 역사를 들으면서 성장했다. 한민족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일제의 잔혹성에 일찍 눈떴기에 자연스럽게 일본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되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의 마음에 항일의 씨앗이 심어진 것이다.

그 씨앗은 난곡보통학교 5학년 때 싹을 틔웠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난곡 오일장에서 백색 옷을 입은 조선인들에게 흑색 염색물감을 무차별적으로 뿌려대는 모습을 목격했다. 경찰은 염색물을 살포한 자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피하려는 농민들을 군화로 차고 난타했다. 이에 놀란 이희남 선생은 다음날 학교에서 담임 이종덕 선생에게 실토했다. 이종덕 선생은 식민지 조국의 설움과 일제의 잔혹성을 소상하게 알려 주셨다. 나라를 되찾으려면 열심히 공부해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깊은 감명을 받은 이희남 선생은 보통학교 시절부터 일제에 저항하고 조국 독립에 힘을 보태고자 마음먹었다.일제는 지금의 초등학생인 보통학교 학생들에게도 잔혹했다. 이희남 선생이 6학년일 때, 급우와 조선어로 대화했다는 이유로 일본인 선생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은 사건이 있었다. 폭행도

82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모자라 일주일간 청소 당번까지 떠맡았다. 어린 나이임에도 일본을 향한 분노와 증오는 날이 갈수록 더해졌다. 나라가 힘이 없어 저항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통탄스러웠다. 1940년 철원 남공립 심상고등소학교 고등과에 진학한 뒤부터는 행동에 나섰다. 일본인 선생으로부터의 모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학생들에게 r불정 조선인s 운운하는 언사에 격분한 이희남 선생은 동급생 국중일, 안중환, 정석호, 최남수, 이상배 등은 의기투합해 학급 전원이 동맹 휴학하기로 모의했다. 학생동맹 운동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일을 진행하기도 전에 휴학을 모의했다는 사실을 학급 담임에게 들켰다. 항거는커녕 전원이 걷지도 못할 만큼 검도용 죽도로 난타 당했다. 그럼에도 이들은 굴하지 않았다. 졸업 사은회에서는 목청 높여 민요를 불렀다. 민요란 민중들이 일을 하거나 의식을 거행할 때 부르는 노래인데도 일제는 민요를 금지하고 검열했다. 민요가 일제 치하의 세태를 고발하고 항거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희남 선생은 졸업 사은회에서도 r사상이 불온한 조선인s이라는 수모와 체벌을 당했다.

1941년에는 고향을 떠나 서울 경성공립직업학교 광산과에 진학했다. 서울에 가자마자 심상고등소학교 고등과 시절에 함께

학생 지식인의 사명으로83

8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학생 지식인의 사명으로85

뜻을 모았던 동창생 국중일, 이상배, 임정호, 이상운과 r경성유학5인조학생동맹s을 조직했다. 철원에서 서울로 유학을 온 학생들의 모임이었다. 이들은 매주 일요일마다 만나 신사참배와 내선일체운동에 반대하며 실천을 결의하고 독립운동에 관해 논의했다. 그들은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저항해 민족사를 연구하고 민족의 얼을 찾는 데에도 열중했다. 독립문과 고궁, 성곽 등의 유적지를 탐방하고 <조선명인위인전>, <조선반만년사>, <이왕궁비사>와 같은 민요시집을 구해 읽으며 민족의식을 함양했다. 목표는 오로지 조국의 독립이었다.

이희남 선생이 대학생이던 때는 일제강점기의 막바지였다. 경성 유학 5인조는 신문 보도를 꼼꼼히 확인하며 국내외에서 활약하는 독립투사를 흠모했다. 사회 분위기로 보아 전쟁 발발을 눈앞에 두고 있고, 일제의 전세가 불리함을 눈치챘다. 경성 유학 5인조도 해외 도처의 독립투사들이 분기하는 때에 맞추어 투쟁에 힘을 보태기로 했다. 때가 올 때까지 국내에서 최선을 다해 투쟁하고, 그때까지 각자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러나 1942년 3학기 첫 등교일, 평범한 학생처럼 등교하려던 이희남 선생의 하숙집에 용산경찰서 고등계의 형사들이 들이

86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닥쳤다. 가택수색을 당한 후 곧장 용산경찰서에 수감되었다. 형사들은 하숙집에서 압수한 서적을 들이밀며 책을 어떻게 구했는지부터 경성 유학 5인조의 결사 목적과 활동내용, 토론 기록에 해명을 요구했다. 입을 열지 않자 갖가지 고문이 자행되었다. 그중에서도 압수된 경성 유학 5인조 사진에 관해 집요하게 추궁했다. 입을 열 때까지 심야에 옷을 벗겨 놓고 냉수 고문을 시켰다. 발가락이 얼어 거동할 수도 없었으나 고문은 계속되었다.

수색은 서울 하숙집에서 그치지 않았다. 고향 본가까지 찾아가 남아 있던 서적과 기록을 압수했다. 이를 증거로 1942년 5월 8일 기소되어 국중일, 이상배, 임정호, 이상운, 장연송, 이중섭, 임호연, 이응렬, 임부연과 함께 경성지방검사국으로 송국했다. 서대문형무소 구치소에 수감되는 동안에 검사의 취조를 받으며 모진 고문과 수모를 당했다. 1943년 2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및 육해공군형법위반죄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약 1년 1개월의 옥고를 치룬 뒤 출감했다. 출감한 뒤에도 고향 회양경찰서 고등계의 감시가 이어졌다. 결국 경성보호관찰소 수용보호대상자로 지목되어 서대문구 죽첩정에 소재한 r대화숙s에서 집단수용기거 생활을 했다. 대화숙은 사상적으로 문제가 되는 독립운동가 등을 집단적으로 관리하는

학생 지식인의 사명으로87

88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사상교양 단체였다. 동시에 고양군 집단농장에서 사상불순분자 10여 명과 강제노역에 종사해야 했다. 외출도, 서신의 왕래도, 외부인과의 면접도 불가했다. 고문으로 몸도 성치 않았다. 제제와 감시 속에서 노역하다 1945년 조국광복을 맞이했다. 피땀 흘려 독립운동을 하였는데도 해방 후의 분위기는 예상과 달랐다. 독립운동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미군정도 독립운동가들을 좋게 보지 않았고, 민족반역자들이 그대로 기득권을 가지는 바람에 오히려 독립운동가와 그의 후손들이 힘들게 살았다. 이희남 선생도 독립운동을 했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러고는 6.25전쟁이 발발했다. 이희남 선생의 고향인 회양군은 삼팔선 너머 이북 땅이 되었다. 이희남 선생을 비롯해 경성 유학 5인조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희남 선생의 큰딸도 이북에 있었다. 이산가족 찾기에 신청해보려 했지만, 이희남 선생이 공무원이니 혹여 이북에 사는 누이 쪽에서 피해를 볼까 걱정되어 신청하지 못했다.

이북에 가족을 두고 온 경성 유학 5인조는 친구이자 가족으로 오래도록 만남을 이어갔다. 매주 일요일마다 만나던 친구들이 나이가 들어서는 한 달에 한 번 종로2가에서 만나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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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친구들이 평생 친구가 된 격이었다. 같이 활동했던 동지들이 국가유공자로 인정받는 동안에도 이희남 선생은 말없이 공직생활을 이어갔다. 3남 3녀 중 다섯째였던 이용순 어르신이 아버지 이희남 선생을 모셨다. 성격 자체가 워낙 온화하고 점잖으신 데다 평소 말씀도 없으셔서 이용순 어르신도 아버지에 대해 잘 몰랐다. 아들로서는 안타까운 점이 많았다. 독립운동을 안 하셨더라면 이희남 선생은 일본으로 유학할 계획이었다.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한 고모부가 유학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희남 선생은 독립운동을 택했다. 생활인으로서도 이희남 선생은 수의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에는 의사 수가 현저히 부족해 수

90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의사 자격증만 있어도 한지(閑地)에서는 의사 활동을 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이희남 선생은 거절하고 조용히 공무원으로서의 생활만 이어갔다. 아들로서는 아버지가 날개를 펼치고 더 큰일을 하셨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2008년, 이희남 선생을 마지막으로 경성 유학 5인조가 모두 사망했다. 이북 땅이 된 고향에서부터 평생을 친구로 지내면서 나라를 위해 헌신한 분들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희남 선생이 살아계실 때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으셨다는 사실이다. 경성 유학 5인조가 다 대통령 표창을 받는 동안에도 한마디 말씀 없으시다 공직생활이 끝나고 나서인 1995년에야 건국포장을 받으셨다. 이용순 어르신은 r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면서 자란다s는 말에 공감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평생 공무원으로 살았고, 아버지를 따라 부지런하게 살았다. 가정적인 아버지는 옛날 분답지 않게 젊어서부터 빗자루질, 걸레질을 직접 하셨고, 어머니에게도 경어를 쓰셨다. 이용순 어르신도 자식과 배우자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랐다. 이용순 어르신의 아들 역시 할아버지의 뜻을 받들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셨으니, 자신은 특전사로 가야 한다며 최전방에서

학생 지식인의 사명으로91

근무했다. 이용순 어르신은 이희남 선생을 끝까지 집에서 모셨다. 모진 세월을 다 겪으셨으면서도 티 하나 내지 않고 꼿꼿하고 바르게 사셨던 아버지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한다. 옆에서 보고 배운 아버지의 모습 그 자체가 삶의 지침이 되었다.

92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선선비비 정정신신으으로로 외외친친 대대한한독독립립만만세세

독립운동가 故정순완 선생의 유족 정지상 어르신

아버지 정순완 선생은 동료들과 안의면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배포하고는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불처럼 달아오른 마음으로 앞장섰고, 결국 헌병에게 체포당하기도 했다.정지상 어르신은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양반의 관습과 유교를 중시하는 고지식한 분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선비 정신과 기백을 품고 살아온 애국지사였다.

국가유공자

정지상 1939. 04. 19. _

독립운동가

정순완 1901. 07. 21. _ 1970. 02. 28.

1919.안의장터 3.1운동

2019.대통령표창 추서

3.1만세운동은 지리산 자락 아래의 경상남도 함양군까지 퍼졌다. 함양에서는 함양읍과 안의면 두 곳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첫 만세운동이 이루어진 3월 28일은 함양 장날이었다. 인파가 장터에 모이기 시작했을 때 거사를 준비했던 정순길, 윤보현, 정순귀, 노형식 등 지역 유지들이 태극기를 꺼내들고 만세를 외쳤다. 인파는 순식간에 한마음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예상치 못했던 일본 헌병이 총검을 휘두르며 강제진압에 나섰다. 만세운동을 주동했던 인물들이 헌병에 체포되면서 인파는 빠르게 해산했다.

안의면의 만세운동은 정순완 선생과 처남이었던 전재식 그리고 전병찬, 임채상, 조제헌 등이 주도했다. 이들은 비밀리에 만나 배포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며 의거를 준비했다. 정순완 선생은 당시 유학에 심취하여 향교에서 일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 함양에는 명종 때 창건되어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았던 남계서원이 있었다. 정순완 선생은 남계서원에서 유사(有司)를 맡았다. 지역 향교와 향교의 본부였던 서울의 성균관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성균관 관장이자 r마지막 선비s라 불리던 김창숙 선생은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유림은 단 한 명도 참여하지 못했다는 데 책임감을 느끼고, 파

98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리강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해 전달했다.정순완 선생은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3.1운동과 유림의 지도자였던 김창숙 선생의 움직임에 감명을 받았다. 충과 효는 유교의 중심 사상이었다. 모름지기 선비라면 나라에 충을 다해야 했으며 나라를 빼앗기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충에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그리하여 정순완 선생은 동지들과 함양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밀의했다. 이들은 급천서당 학생이었던 김채호와 안의면 금천리의 최석룡 등과도 합세했다. 적기는 인파가 많이 모이는 3월 31일, 안의면에서 열리는 장날이었다.

거사일 오후 1시 30분경, 정순완 선생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안의장터 500여 명의 군중에게 배포했다.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만세의 열기가 불길같이 타올랐다. 앞서 함양장터에서 만세운동이 있었던 터라 일본 헌병들은 주동자를 찾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삼엄한 경계 속에서 정순완 선생은 남들이 볼 수 있도록 소금가마니 위에 올라가서 만세를 불렀다. 당연히 일본 경찰의 눈에 가장 잘 띄는 자리였다. 정순완 선생은 만세운동 주동자로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오후 2시쯤, 최석룡이 다시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만세운동은 순식간에 다시 불타올랐다. 이들은 정순

선비 정신으로 외친 대한독립만세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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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 선생과 연행된 인물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항거했다. 일본 헌병의 체포는 오히려 군중의 들끓었던 마음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고, 오후 7시까지 대대적인 만세운동으로 퍼지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헌병은 분노한 시위대를 쉽게 진정시키지 못했다. 결국 인근지역인 거창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강제로 해산시켰다.

안의장터 만세운동이 일어나고 이틀 뒤인 4월 2일, 일본 경찰들의 만행에 분노한 김한익이 커다란 태극기를 들고 함양 장터로 나왔다. 3,000명에 달하는 군중이 다시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헌병들이 김한익을 체포하자 군중은 안의장터에서처럼 다시 만세를 부르며 돌진했다. 두 차례의 독립운동을 제압하고도 또 만세운동을 벌이는 상황에서 헌병들은 더욱 악랄해졌다. 군중을 향해 총기를 난사했고 만세운동을 하던 하승현이 총을

102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맞고 즉사했다. 그의 아버지와 숙부도 모두 총탄을 맞았다. 일가족이 총탄에 쓰러지는 광경에 군중들은 경악했다. 수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고 수십 명이 끌려가 고문과 고초를 겪었다.함양에서의 만세운동은 다른 지역들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지역 유지들과 민초가 힘을 합쳐 일제에 거세게 항거했던 독립운동이었다. 누군가의 지시가 아닌 자율적인 움직임이었고 선비, 농민, 학생 구분 없이 시위에 동참했다. 정순완 선생 역시 선비 정신으로 소금가마니 위에 올라 만세를 외쳤다. 안의장터 만세운동으로 현장에서 체포된 정순완 선생은 진주형무소에 투옥되어 있다가 4월 29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출소한 뒤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손발이 묶였다. 일본군은 집요하게 정순완 선생을 감시했다. 한동안 선생은 지역 향교에서 사무를 보거나 아이들을 가르치고, 농사일에만 몰두했다. 시간이 흘러 6.25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으로 인해 정순완 선생이 투옥했던 진주형무소가 불탔다. 진주에서 대구로 이관된 사람들은 자료가 남아 있는데, 진주형무소에서 끝까지 복역한 애국지사들은 복역한 흔적이 완전히 소실되고 말았다. 정순완 선생의 유족들이 40여 년간 독립운동과 관련한 자료를 아무리 찾아

선비 정신으로 외친 대한독립만세103

도 찾지 못했던 이유였다. 함양읍 만세 기념비에도 정순완 선생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함양군지나 도서관에서 찾은 자료에도 분명히 독립운동의 기록이 있었는데 쉽사리 애국지사로 인정받지 못했다.

모진 고문을 당했으면서도 정순완 선생은 꼿꼿함을 유지했다.

자식들에게 독립운동을 했다고 말한 적도 없었다. 한참이나 시간이 흘러, 정순완 선생의 처남 전재식 선생의 손주들이 다시 자

료를 조사했다. 전재식 선생 역시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을 고통

스러워 하셨다. 후손들은 옛날 경찰 자료와 총독부 시절 서류까지 뒤졌다. 그 과정에서 정순완 선생이 독립운동을 했던 흔적을 함께 발견할 수 있었 다. 정순완 선생의 막내아들 정지상 어르신은 아버지가 뭘 하고 사셨는지 몰랐다. 어릴 때는 그저 고향을 떠나 서울에 계셨고 자주 보기 힘

들었다고 기억할 뿐이다. 몇 년 만에 한 번씩

집에 오시면 아버지

10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가 아니라 아저씨 소리가 먼저 나올 정도였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에 형님이 공적 조사를 한다고 해서 그때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는 걸 알았다. 양반의 관습과 유교를 중시하는 고지식한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전형적인 선비의 모습이었으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진보적이었다. 모두가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다녔던 함양에서 상투를 자른 사람도 정순완 선생이었다. 서울로 올라가 지금의 휘문고등학교 전신인 휘문의숙에서 공부했으나, 끝까지 마치지 못하고 귀향했다. 양반가의 장남으로서 타지에 머무르며 공부를 오래 할 수 없었던 탓이었다. 공부를 다 하지 못한 한으로 막냇동생과 큰아들, 사위는 서울로 올려보내 공부를 시켰다. 정지상 어르신도 아버지의 지지로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

아버지는 전쟁 이후에는 출판사를 운영하다가 대서소를 했다. 닥나무 밭도 일구었다. 평생을 공부와 교육에 매진하셨다. 그렇다고 자식들에게까지 선비의 삶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양반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양반답게 살기만을 바랐다. 만세운동 당시 군중들 가운데에서 태극기를 배포하고, 높은 곳에 올라가 목소리를 높일 수 있었던 것은 정순완 선생이 평생 품고 살았던

선비 정신과 기백 때문이었다.

선비 정신으로 외친 대한독립만세105

정순완 선생은 1919년 만세운동으로 투옥된 지 100년 만인 2019년에 이르러서야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았다. 작고하신 지 50년이 지나 자식 몇이 세상을 떠날 만큼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정지상 어르신은 이제라도 인정을 받아 다행인 동시에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 이루어졌다면 참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한다. 젊었을 때는 아버지가 고루하고 답답할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아버지가 품으셨던 기백이 존경스럽고 자랑스럽기만 하다.

106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힘힘없없고고 가가난난한한 농농민민과과 함함께께

독립운동가 故형광욱 선생의 유족 형유진 어르신

할아버지 형광욱 선생은 1919년 4월, 남원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서

거침없이 태극기를 들고 r조선독립만세s를 외쳤다.

일제는 탄압했지만, 만세 행렬은 굴하지 않았다.

손녀인 형유진 어르신은 뒤늦게 할아버지 생전의 기록을 찾았다.

공적을 알게 될 수록 형유진 어르신은 할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커졌다.힘없고 가난한 사람들 편에서 선한 삶을 살아오신 할아버지가

고스란히 삶의 지침이 되었다.

국가유공자

형유진 1963. 03. 11. _

독립운동가

형광욱 1898. 05. 18. _ 1977. 04. 08.

1919.전라북도 남원시 만세운동2021.건국포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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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고 가난한 농민과 함께113

조국의 독립, 학문에 큰 뜻을 가지고 한학을 독학한 형광욱 선생은 야학을 운영해 남원군 사매면의 청년 50여 명을 가르쳤다. 일제의 수탈로 먹고살기도 힘든 상황이었지만 늘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일찍이 혼인하여 마을에서 젊은이들을 가르치며 살던 형광욱 선생이, 1919년을 기점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1919년 4월, 남원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을 계기로 확산된 독립의지는 시골 마을 농촌지역까지 퍼져나갔다. 서울에서 전달된 독립선언서가 남원 각 마을에 비밀스럽게 배포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경계와 감시로 거사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당시 덕과면장이었던 이석기는 은밀하게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4월 3일, 식목일이 거사의 날이었다. 식수를 명목으로 모인 800여 명의 면민들과 탁주를 나누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전국적으로 퍼진 3.1운동의 흐름에 경계태세를 강화했던 일본 헌병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단지 만세를 부르며 걷기만 하는 시위였음에도 무장한 헌병분대장과 일본군이 사람들을 구속했다. 그때 사매면 대산마을 이장이었던 형광욱 선생도 함께 있었다. 이석기 면장이 체포되면서 만세운동의 불씨는 더욱 크게 타올랐다. 바로 다음 날인 4일은 남원읍 장날이었다. 전날보다 더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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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군중이 광한루에 모였다. 전날 일제의 총칼을 목도했음에도 만세 행렬은 굴하지 않았다. 태극기를 선두로 남문 쪽으로 향하며 r조선독립만세s를 소리 높여 외쳤다. 걸음 끝에는 일본 헌병분대가 있었다. 형광욱 선생은 거침없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쳤다. 그 순간, 일본 헌병들이 무차별적으로 시위대를 향해 사격했다. 갑작스러운 총격에 8명이 현장에서 순국, 10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시위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형광욱 선생도 체포당하여 구금되었다가 20일 만에 석방되었다. 요주의 인물로 감시되던 형광욱 선생은 남원 지역의 교육과 의식 전환에 힘썼다. 특히 농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고자 했다. 1926년 8월에 남원군 사매리에 용북청년회가 만들어지면서 창립 총회에 집행위원으로 참여했다. 남원 청년회는 문맹 퇴치와 지역민의 의식 개선을 위해 설립된 단체로, 야학을 운영하고, 계몽운동을 하여 농촌 진흥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했다. 이듬해 9월 12일, 형광욱 선생은 남원군 기매독서회에서 개최한 토론회에서 |우리의 살길은 농촌이냐 도시이냐}라는 연설의 찬성 측 연사로 참여했다. 민족 독립을 위해서는 농촌교육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식인으로서 민중과 긴밀하게 접촉하고, 정신교육과 학문교육을 주지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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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남원청년동맹 용북지맹이 설치되면서 서무부 위원으 로 선임되었고, 1928년부터 1929년에는 신간회 남원지회에서 활동했다. 신간회는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세력이 합작해 결성한 항일단체였다. 이념을 초월할 뿐만 아니라 해외 지부까지 두고 있어 당시 회원 수가 30,000명이 넘었다. 표어인 r민족유일당 민족협동전선s 아래 조선민족운동의 대표단체로 발돋움했다. 회원 중에서는 농민이 가장 많았다. 신간회 남원지회 역시 남원 지역의 농촌 계몽운동, 식민지 정책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신간회 남원지회는 고문제도를 폐지하고 일본 이민을 반대하는 것과 더불어 조선인을 중심으로 산업정책을 펼 것을 요구했다. 도척급 토지개량회사를 폐지하고, 조선어를 사용하며 학교에 경찰이 간섭하지 못하도록 했다. 더 나아가 인권 증진에도 힘썼다. 소작인을 노예처럼 부리는 것과 여성 인신매매를 금지했다. 대동단, 형평사 등 민중운동 단체, 남원 지역 청년회가 중심이 되었고 지방신문 기자들도 적극 참여해 농촌 계몽과 식민정치 반대를외쳤다.

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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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없고 가난한 농민과 함께117

형광욱 선생은 선전부 부원 간사로 신간회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신간회에서 간사제를 없애고 집행위원회 체계로 개편하면서 교육출판부 집행위원을 맡았다. 하지만 1929년 일본 경찰의 전국적 검거 선풍으로 인해 신간회는 1931년에 해산되고 말았다.신간회가 해산되던 1931년 가을부터 남원군 이백면에서 적색농민조합이 만들어졌다. 적색농민조합운동은 지방 농민조합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운동이었다. 토지와 식량 약탈에 반대하고, 친일기관에 반대 투쟁을 전개했다. 농민조합운동은 단순히 소작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이 아니라, 전체 농민의 권익을 실현하기 위해 일제에 저항하는 투쟁이었다. 형광욱 선생은 적색농민조합의 북면 일대 책임자였다. 본디 형광욱 선생은 크게 농사를 짓고, 마을 이장을 역임하던 지역 유지였다. 머슴을 부릴 정도로 유복하고 넉넉한 집안이었다. 그럼에도 올곧게 농민들의 편에 섰다. 농민들이 배워서 힘센 자들에게 자신의 것을 빼앗기지 않도록 애썼다. 일제가 국권을 탈취하자마자 토지조사사업을 강행하면서 농민을 수탈하면서 원래 소작농이 아니었던 농민들도 순식간에 소작농으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당시 우리 민족은 대부분 농민이었다. 그렇기에 농민운동은 민족운동과 다르지 않았고, 궁극적인 목적은 일본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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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주의에 대한 항거였다.

형광욱 선생은 1933년 6월 적색농민조합운동으로 체포되어 남원검찰청에 8개월

간 구금되었다. 그리고 전주교도

소로 이송되어 전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위반죄로 징역 1년을 구형받았다. 1934년 10월이 되어서야 겨우 무죄판결을 받고 석방되었으나 여전히 일제의 주요 감시자였다. 선생의 가족들 역시 해방이 될 때까지 불안에 떨며 살아야 했다.

6.25전쟁이 끝난 뒤로는 사매면 지방자치면 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남원군에서는 형광욱 선생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선생은 자신이 가진 영향력을 부를 축적하거나 권력을 얻는 데 쓰지 않고, 오직 교육에만 힘썼다. 1950년 용북중학교 설립 당시 설립이사로, 이후로는 남원양사재와 남원향교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남원향교위성조합의 감사이자 남원충렬사의 평의원을 역임했다.

1977년에 79세의 나이로 사망하실 때까지 전국선행자 표창을 2회 받으시고, 남원군 산림녹화사업에도 참여하셨다. 남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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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동에 위치한 산림녹화탑은 3단으로 구성된 석탑인데, 비문에 새겨진 산림녹화 유공자 7인 중 한 명이 바로 형광욱 선생이다. 1965년에는 산림녹화와 사방공사 유공자로 농림부장관 표창도 수여받았다. 남원시는 형광욱 선생의 공덕을 기려 1998년에 덕과면 3.1만세운동 독립유공자탑에, 2005년에 남원항일운동기념탑에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새겼다. 그럼에도 국가유공자로 건국포장을 추서 받은 건 2021년이 되어서였다. 국가에서 발굴한 것이 아니라 유족이 직접 발로 뛰어서 형광욱 선생의 독립운동 공적을 찾았다. 경찰이었던 아들이 아버지가 애국지사로 활동하셨던 사실을 알고 조사해 2007년에 제출했으나, 결과를 알기 전에 사망했다. 당시 이념 논쟁이 있던 사회적 분위기가 독립운동 공적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았다.

형광욱 선생의 손녀인 형유진 어르신이 아버지가 하던 공적 조사를 이어 갔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데다, 아버지가 남원에 갈 때 늘 형유진 어르신을 데리고 갔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형유진 어르신이 중학생일 때 돌아가셨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할아버지는 늘 마고자를 갖추어 입으시는 분이었다. 키가 크셨고, 동그란 안경을 쓰시는 모습이 꼭 역사책에 나오는 옛날 사람 같았다. 할아버지 댁에 가면 할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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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 책 읽는 소리에 눈을 뜨곤 했다. 형유진 어르신도 할아버지께 육십갑자 같은 걸 배웠다. 할아버지는 만세력을 배워 동네 아이들의 이름도 직접 지어 주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형유진 어르신도 가족들과 서울로 왔다. 할아버지의 공적을 찾기 위해 서울에서 남원까지 오가는 길이 결코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부터 형유진 어르신까지 2대에 걸쳐 조사하면서 공적이 알려질수록 더 자부심이 생겼다. 시간이 더 지나니 손자녀들이 할아버지께 너무 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광욱 선생은 지

식인으로서 민중과 가장 가까이 밀착하였고 교육을 중시했다. 가진 자로서 위세를 떨치

기보다는 못 가진 자들에게 하나라도 더 나눠 주려고 했다. 할아버지의 선한 삶은 지금까지도 형유진 어르신의 삶에 지침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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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선선의의 독독립립을을 간간절절히히 원원했했던던 의의사사

독립운동가 故함태홍 선생의 유족 함천우 어르신할아버지 함태홍 선생은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시절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

2월 말은 학생들의 시험 기간이었지만,

함태홍 선생에게는 독립선언 준비가 더 중요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지만 당연히 후회는 없었다.함천우 어르신은 그러한 할아버지의 기록과 발자취를 따라가며아픔의 역사를 새로이 밝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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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함흥이 고향인 함태홍 선생은 1918년, 서른의 나이로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했다. 그때 이미 가정이 있었으나 학업의 뜻을 품고 홀로 상경했다. 당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지 지배를 받던 나라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시기였다. 독립에 대한 염원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1919년 1월 18일 파리에서 열린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은 14개 조항으로 이뤄진 평화원칙을 발표했다. 그중에는 민족자결주의 원칙도 포함되어 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이나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권리를 실현한다는 내용이다. 각 나라는 독립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은 일제의 지배를 받고 있던 우리나라에 큰 희망이 되었다. 소식은 일본으로 먼저 전해졌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학생 600여 명이 모여 조선청년독립단을 발족하고 2.8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국내에서도 민족대표 33인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준비하고 있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대표들도 3.1만세운동 준비에 참여했다. 학생들은 해외에서 주도하고 있는 독립운동 움직임에 관심이 많았고, 민족 해방을 간절히 바랐다. 4학년 김형기와 2학년 한위건은 처음부터 학생대표 모임에 참여했다. 당시 기록을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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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년 한위건은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중등학교 학생대표를 선정해 학생들만 참여하는 2차 시위를 제안했으며, 독립선언서 배부 등을 주도했다고 한다. 경성의학전문학교 학년 대표들은 동급생들에게 비밀리에 독립선언 계획을 전하며 시위에 참여할 것을 독려했다. 2학년에 재학 중이던 함태홍 선생은 학생회 활동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독립선언이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을 건너 들어 알고 있었다. 함태홍 선생처럼 이북 출신 유학생이 형성한 하숙 네트워크를 통해 듣는 이야기가 많았다. 하숙집을 함께 쓰던 학생들 사이에서 만세운동의 내용이 공유되었고, 학교에도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함태홍 선생은 친구 이익종과 함께 만세운동을 하러 나갈 것을 논의했다. 학생대표였던 한위건도 함께 나가자고 제의해왔다. 일본에서 조선인 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단행한 것에 놀란 일본은 국내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있을 것을 예상하여 학생 통제를 강화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삼엄한 감시에도 민족대표 33인을 비롯한 정부 관료, 여러 기관장, 학생대표 등은 비밀리에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은 필사적으로 일본의 감시를 피했고, 독립선언의 계획을 아는 수백 명은 철저히

조선의 독립을 간절히 원했던 의사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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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독립을 간절히 원했던 의사129

비밀을 유지했다. 조선총독부는 3월 1일 당일까지도 만세운동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몰랐다.

2월 말은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의 시험 기간이었다. 그러나 독립선언 준비에 매진했던 학생들에게 시험공부를 할 정신은 없었다. 마침내 찾아온 3월 1일, 함태홍 선생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결의를 다지며 종로로 나갈 준비를 했다. 정확한 시간과 장소까지 전달된 것은 아니어서 점심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오후 3시쯤 종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많은 인파가 거리로 나와 있었다. 종로 종각 앞에서 만세를 외치는 군중에 합류했다. 인파는 순식간에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품에 숨겼던 태극기를 꺼내 만세를 외쳤고, 수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만세를 외치자 종로 거리는 우렁찬 함성으로 메아리쳤다. 종각에서 탑골공원을 지나 동대문으로 이동했다. 만세를 부르는 함성은 멈출 줄 몰랐고, 더 크고 멀리 울려 퍼졌다. 함태홍 선생도 조선의 독립을 간절히 바라며 만세를 부르고 또 불렀다. 미리 인쇄된 기미독립선언서도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다. r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야 인류 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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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선언서를 읽은 함태홍 선생은 가슴이 더욱 벅차올랐다. 3월 1일 오후 2시, 조선독립선언을 시작으로 만세 시위는 서울거리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1차 시위에 참가했던 함태홍 선생은 경성부 운니동에 사는 나창헌의 집에 숨어, 2차 시위에도 참가하기로 다짐했다. 2차 시위는 나흘 뒤인 3월 5일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일본 경찰은 집까지 수색을 했고, 발각돼 그 자리에서 체포당했다.

감옥에 갇혀 고문을 받고 재판을 기다리는 신세가 되어도 후회는 없었다. 1919년 8월 30일 소위 출판법 위반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성지방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다. 11월 6일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옥하기까지 미결수로 8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함태홍 선생을 비롯해 당시 재판에 회부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만 32명이었고, 체포되지 않은 학생도 수십 명에 달했다.

함태홍 선생은 고문과 옥고를 치르면서도 오히려 조선이 독립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어쩌면 꼭 독립해야 한다는 결의를 다진 것일지도 모른다. 조선의 독립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더욱 치열하게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함태홍 선생에게는 고향에 두고 온 가족 역시 중요했

조선의 독립을 간절히 원했던 의사131

기에, 학교를 졸업하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온 함태홍 선생은 학업에 전념했다. 1922년 3월 본과 특별의학과를 졸업한 뒤 고향인 함경남도 함흥으로 돌아가 함흥자혜의원에 취직했고 가족을 다시 만나 안정적인 일상을 꾸렸다.함흥에서의 일상은 평온했다. 1924년에는 함혜의원을 개업해 진료 외에 수재민을 위한 의료봉사를 하고,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무료로 진료를 봐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마음씨 착한 의사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남몰래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을 숨겨주거나 만주 등으로 자금을 이동할 수 있도록 석고붕대 속에 숨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도 오래가지 못했다. 집요하게 함태홍 선생의 뒤를 캐던 일본 경찰은 기어이 함태홍 선생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다.함천우 어르신은 당시 갓난아기였던 아버지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할머니는 어린 아버지를 업고 매일 감옥으로 찾아가 옥바라지를 하셨다. 할머니의 지극정성이 통했는지 할아버지는 감옥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고

문 후유증으로 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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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독립을 간절히 원했던 의사133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그때 할아버지의 나이가 고작 39살이었다.

함천우 어르신의 아버지는 함흥고등학교 시절 일본 경찰을 패고 서울로 도망가 살았다고 한다.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이북을 오가며 장사를 했는데, 남쪽에 내려와 있던 어느 날 북으로 넘어가는 길목이 통제되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울에 눌러앉아 사셨다.

아버지는 평생 아버지의 기억을 안고 사시면서도 입 밖으로 드러내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역시 함천우 어르신이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아버지가 남기신 작은 상자를 발견하면서 알게 되었다. r남겨 놓는 말s이라고 쓴 상자를 열었더니 어릴 적 살았던 고향에 대한 기록, 가족관계, 아버지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꼼꼼하게 정성스럽게 기록한 문서가 들어있었다. 함천우 어르신은 지금도 아버지가 남겨 놓은 상자 속 문서들을 들춰보며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하나둘 밝혀내고 있다. 나라를 잃은 아픔을 딛고 살아온 한 가족의 역사가 그 상자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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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6.25조전국쟁을 참 지전켜유낸공자

한한 명명이이라라도도 더더 살살리리기기 위위하하여여6.25전쟁 참전유공자 김용만 어르신

김용만 어르신은 1952년 입대해

지금의 의무병인 위생병으로 차출되었다.

최전방에서 싸우는 보병을 따라다니며 부상자를 치료했다.

전쟁의 비극으로 마음의 상처가 가득한 탓에

본인 몸을 돌볼 여력조차 없었다.

임무 중 산에서 넘어져 무릎을 다쳤는데,

수술할 기회를 놓쳐 현재는 거동조차 어렵다.

그럼에도 김용만 어르신은 참전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라를 위해, 전우를 위해 최선을 다한 자신이 자랑스럽다.

6.25전쟁 참전유공자

김용만 1929. 12. 05. _1952.한국전쟁 참전

김용만 어르신은 1929년 충청남도 당진에서 3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지금도 큰집은 당진에 있다. 6.25전쟁이 발발한 당시만 해도 김용만 어르신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청년이었다. 전쟁 중이라도 충청도는 그나마 피난 지역이어서 전방에 비하면 조용했다. 그래서 피난을 가지 않고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영장이 날아왔다. 1952년 8월 3일,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3개월 받고 경상남도 마산으로 이동했다. 보건의료와 관련해 일한 이력이 없는데도 위생병으로 차출되었다. 위생병은 지금의 의무병이다. 6.25전쟁 때 수도육군병원이 서울에서 마산으로 옮겨가면서 당시 마산 시내 주요 건물이 모두 미군 작전용이나 육군 병원으로 사용되었다. 1952년 국군군의학교가 마산으로 이전하면서 위생병을 교육시켰다. 김용만 어르신도 마산에서 추가로 3개월 더 위생병 교육을 받았다. 보병이 싸우는 격전지를 따라 다니며 부상자를 치료하고 조치하는 것이 위생병의 주된 임무였다. 양구, 화천, 춘천, 최전방을 쫓아다녔다. 전투 병사들은 무기라도 있지, 위생병은 총 같은 무기도 없고 달랑 구급낭 하나만 들고 산골짜기를 뛰어 다녀야 했다. 구급낭에는 핀셋과 붕대밖에 없었다. 말할 수 없이 열악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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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하여143

그 구급낭은 전투 중 경상자를 응급조치하는 데 사용되었다. 경상을 입은 병사에게는 붕대를 감아 주고, 중상을 입은 병사들은 은엄폐하여 피신시켰다가 전투가 끝나면 병력을 요청하여 후송했다. 부상병이 제 발로 같이 걸을 수나 있으면 다행이었다. 중상을 입은 병사들은 팔다리가 잘리거나 얼굴이 함몰되는 경우도 허다했다. 어떻게든 살리고자 피범벅이 된 그들을 등에 업거나 끌고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응급처치를 해두면, 보급품을 가지고 올라온 보급병들이 사상자를 데리고 내려갔다. 특히나 강원도 양구에서 일어났던 전투는 산세가 험준해서 피신을 시키기도, 후송하기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전쟁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전사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전사자를 한 구씩 화장하지 못하고 여러 구를 동시에 화장해야 했다. 누가 누구인지도 분간할 수 없었다. 오직 명찰만 보고 신원을 파악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서 살려 달라는 전우를 구하지 못했을 때는 오랜 시간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6.25전쟁은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이었다. 미리 전쟁을 준비하거나 대비할 겨를이 없었다. 군복이나 군화도 넉넉하지도 않았고 탱크조차 없었다. 졸병들은 옷과 신발을 겨우 물려받아 투입되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다들 허름한 옷에 굶어가며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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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에 임했다. 반합 뚜껑에 멀건 된장국을 받아 찬밥을 말아먹는 게 고작이었다. 산속에서는 더했다. 저녁에 밥을 지으면 연기가 나서 인민군이 알아챌 위험성이 있었다. 날 밝을 때 몰래 밥을 하고, 주먹밥을 만들어 배고픈 저녁을 대비하곤 했다. 그러다가 포탄이 옆에 떨어지면 밥그릇이며 냄비가 다 박살이 났다. 그 배고픈 와중에도 배급 받은 건빵을 집에 가져다주겠다며 안 먹고 챙기던 군인들이 있었다.

당시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강원도는 사람 하나 만나기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웠다. 다 피난을 가버린 까닭이었다. 피난 간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보면 쌀 같은 걸 묻어 놓고 거적으로 덮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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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았다. 군인들은 마을을 지나갈 때 마당이나 밭을 두드렸다. 두드려서 나는 소리로 안에 묻힌 게 있는지 파악했다. 쌀이 들어있기라도 하면 그걸 챙겨서 이동했다. 쌀은 알아서 구하고, 부식으로는 된장 같은 것들이 제공되었다. 하도 먹을 게 없으니 산에서 더덕이나 칡뿌리를 캐어 먹었다. 운이 좋으면 식당에서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듯했지만, 텅 빈 마을에서 적군과 아군은 팽팽히 대치했다. 언제 어디서 습격이 시작될지 몰랐다. 더군다나 무기도 없는 위생병들은 그대로 위험에 노출되었다. 강원도는 특히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라 발밑을 조심하지 않으면 눈구덩이에 빠졌다. 여름에는 비가 문제였다. 비가 많이 와서 부대가 모조리 후퇴했을 때도 있었다. 총소리가 들리면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기를 이어가며 산길을 헤맸다. 그러던 중 물이 가득 찬 계곡을 만났다. 지금이야 제대로 된 돌다리라도 있지, 그때는 나무로 된 다리가 많았다. 그런데 비 때문에 물이 차 다리가 묻혔다. 넘어지거나 손을 놓아 떠내려가면 즉사와 다름없었다. 군인들이 서로 손을 붙들고 계곡을 건넜다. 그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김용만 어르신은 옷이 다 찢어지고 위생낭도 급물살에 휩쓸려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헐벗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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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밑에 숨어 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다들 계곡을 건너간 다음이었다. 다행히 김용만 어르신을 발견한 건너편에서 옷에 돌을 묶어 던졌다. 겨우 그 옷가지에 의지해 살아남았다.

남쪽으로 후퇴해야 했지만, 방향을 확인할 나침반도 없었다. 나중에는 통나무 밑동을 보고 방위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해가 뜨는 쪽인 남쪽으로는 결이 넓었고, 북쪽으로는 결이 좁았다. 그걸 보고 동쪽이다, 북쪽이다 하면서 폐허가 된 길을 더듬어 다녔다. 험준한 산지를 뛰어다니면서 알게 된 지혜라면 지혜였다.김용만 어르신은 철원에 있는 3사단 백골부대에서도 활동했다. 백골부대는 1950년 10월 1일에 전군 최초로 38선을 돌파하고, 한강 방어선 전투에서 7일간을 사수하는 등 엄청난 활약을 한 부대로 유명했다. 목숨을 걸어야 할 상황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고, 그럴 때마다 늘어나는 부상당한 백골부대의 대원들을 김용만 어르신과 같은 위생병들이 치료했다. 옆 사람이 죽어가면 살기 위해 도망가는 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능일 터. 하지만 위생병들은 그럴 수 없었다. 다친 사람을 보호하며 끝까지 버텨야 했다. 실제로 하루 자고 일어나면 옆에 동료가 죽어 있고, 어제까지 같이 있던 전우가 다음 날이면 시체가 되었다. 위생병은 눈앞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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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하여149

전투보다 전우들의 죽음이나 부상을 많이 봐야 하는 보직이었다. 그저 살리겠다는 마음 하나뿐이었다. 그럼에도 전우의 부상과 사망을 끊임없이 목격한다는 건 정신적으로 몹시 힘든 일이었다. 김용만 어르신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참을 수 없는 슬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입대하고 4년 5개월이 지난 1957년 10월에야 제대했다. 6.25전쟁 때 전사한 군인이 많기도 했고, 중상을 입은 상이병사도 많았기에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위생병은 제때 제대하지 못했다. 화천 구만리발전소 근처 사단에 머무르며 전사자들의 부모가 오면 사망 소식을 전하고 사후처리를 도왔다. 화천은 전쟁 중 아군과 적군의 격전이 빗발쳤던 곳이었다. 화천댐은 6.25전쟁 발발 직전까지 국내 발전량의 40퍼센트를 생산할 만큼 중요한 시설이었기에 인민군은 뺏으려고, 국군은 지키려고 치열하게 싸웠다. 전쟁의 막바지까지 북한은 화천발전소를 탈환하고자 했다. 그만큼 사상자가 많았고, 수가 부족한 위생병들은 제대할 수 없었다.

제대를 늦게 하다 보니 결혼도 늦었다. 고향에서 중매를 서 준 덕분에 아내를 만났고, 결혼하고 다시 군에 복귀했다가 반년 뒤에야 완전히 제대했다. 전쟁 통에 전우들의 사상만 챙기다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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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을 만나지도 못했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가 보니, 그사이 민간인이었던 둘째 형이 상공에서 떨어지는 포탄을 맞아 생명을 잃었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혈육의 죽음이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모두에게 슬픔을 남겼다.

남들의 부상을 돌보는 임무를 맡았던 김용만 어르신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아픔은 돌보지 못했다. 후퇴하면서 산에서 넘어져 무릎을 다쳤다. 젊어서는 먹고 사는 게 바빠 무릎 수술하는 시기를 놓쳤다. 염전에서도 일하고, 솜틀도 했다. 쌀가마니 장사도 하면서 처자식을 먹여 살렸다. 나이가 들면서 전쟁 중에 다쳤던 무릎이 빠르게 망가졌다. 올해로 만 94세가 된 김용만 어르신은 제대로 거동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안타깝게도 시기를 놓쳐서 상이등급도 받지 못했다.

그래도 김용만 어르신은 참전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라를 위해서, 또 다치고 죽어가는 전우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지금도 자식들에게 r마음씨가 좋아야 한다, 남을 악하게 대하면 안 된다s고 말한다. 나라를 위해 5년에 가까운 청춘을 희생했는데도 이를 알아달라고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독립운동하고, 전쟁에 참전한 뒤 어렵게 살고 있는 다른 국가유공자들을 걱정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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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책 대대신신 총총을을 든든 학학생생 용용사사

6.25전쟁 참전유공자 지동시 어르신

지동시 어르신은 부족한 군인을 대체하기 위해 민방위로 차출되었다.당시 정규군이 아니라는 이유로 관리조차 받지 못했다.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제대로 군대에 입대했으니

군 생활을 두 번이나 한 셈이었다.

지동시 어르신은 바쁜 삶을 살아오느라

자신이 국가유공자가 될 수 있으리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유공자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2014년에야 지정되었다.

올해 92세인 지동시 어르신은 지금도 문득,

함께 참전했던 학교 친구들이 그립다.

6.25전쟁 참전유공자

지동시 1933. 12. 17. _1950.한국전쟁 참전

지동시 어르신은 1933년 강원도 평창에서 태어났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중학교 4학년, 지금의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평창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경찰들이 공비를 소탕하고, 경계태세를 유지하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쟁이 났다는 소식을 듣기 몇 달 전부터 동해안 지역 장병들이 평창에 와서 도로에 방호벽을 세웠다. 당시 어렸던 지동시 어르신은 만약 전쟁이 난다면 학교나 기관 건물이 방공호가 될 텐데 왜 도로에 방호벽을 세울까, 의아했다.

여름방학을 기다리던 더운 날이었다.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이 전교생을 운동장에 집합시켰다. 학생들이 모이자, 오늘부터 안내가 있을 때까지 학교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당시 지동시 어르신의 형님은 당시 군청 농회에 근무하며 관사에서 살았는데, 집이 멀었던 지동시 어르신은 형님의 관사에 기거하며 학교에 다니던 중이었다. 학교에서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집에서 어른들 말을 잘 듣고 있으라고만 했다. 평창 사람들은 직장이나 학교생활을 일체 중지하고 각자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장소로 떠났다. 전방에서는 전쟁 전에도 가끔 포 비슷한 소리가 들리곤 했다. 그날도 라디오가 있는 이웃집에 갔더니, 어느 지역에서 조그마한 충돌이 있어

156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총소리가 났다는 말이 들려왔다. 전쟁의 조짐이 벌써 소문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형님이 먼저 피난처를 살피러 배낭을 만들어 떠났다. 며칠 있다 돌아온 형님을 따라 지동시 어르신과 어린 조카, 형수가 함께 피난을 갔다. 큰 산 밑에 샘골이라는 산골, 더벅머리 총각이 사는 집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지동시 어르신은 본가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샘골에서 내려와 본가로 갔다. 본가 마을도 피난을 가버린 상황이었다. 남쪽으로 5, 6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물을 건너고 골짜기를 넘어 피난 마을로 갔다. 좁은 집에 갇혀 있는 상황이 답답했다. 학생 시절부터 호기심이 왕성했던 터라 피난 마을에서도 오래 머무르지 못했다. 한 달쯤 지나 길에서 학생복을 입고 책보를 둘러맨 무리를 발견했다. 학생인가 했더니, 대포를 잔뜩 끌고 가는 무리가 뒤따랐다. 알고 보니 그들은 중부전선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진짜 인민군이 아닌 학생들을 동원해서 내려보낸 것이다. 전쟁 상황임이 그제야 실감나기 시작했다.

그즈음 평창의 각 기관은 이미 점령되어 있었다. 마을이 점령되면 군대가 주둔하는 것이 아니라 행정공무원 같은 사람들이 와서 마을을 조사했다. 그들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책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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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도 해 먹으면서 며칠씩 들어앉았다. 점령부대는 여자들이나 젊은이들을 동원해 점령지를 교육시켰다.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아 노래도 가르치고 사상교육도 시켰다. 행정 조직을 하고 위원장을 뽑고, 여성회장이나 청년회장을 뽑으며 지역을 관리했다. 전쟁 발발 한 달 만의 상황이었다.

8월이 되자 사람들을 차출하기 시작했다. 첫째로 보급대를 뽑았다. 젊은 사람들에게 보급대에 지원하라는 안내가 나왔는데, 처음에는 마흔 살쯤 된 양반이 아무것도 모르고 다녀오겠다고 길을 나섰다. 마을 사람들은 건강하게 다녀오라며 배웅했다. 하지만 그는 한 달 만에 다쳐서 돌아왔다. 폭탄이 떨어졌다고 했다.9월이 되자 아군이 다시 올라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평창에는 이북으로 향하는 큰 다리가 있었다. 동부로 가는 다리, 남쪽으로 가는 다리도 있었다. 미군은 인민군이 내려오지 못하도록 다리를 폭격했다. 상공에서 떨어진 포탄에 국민학교 동창 여학생이 맞아 죽었다. 중학교 동창 형님이 운영하던 다리 옆 서점도 폭발했다. 상공은 미군이 꽉 쥐고 있었으니, 분명 인민군의 비행기는 아니었다. 이웃들이 죽어 나가기 시작했다. 전쟁터에 나간 군인이 아닌데도 죽었다. 지동시 어르신은 낮에는 산에 은신해 있다가 밤에 나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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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 장아찌, 쌀 같은 걸 챙겨서 새벽에 올라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러던 중에 인천에 미군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며칠이 지나자 학생들에게 학교로 집결하라는 연락이 왔다. 학교에 갔더니 경찰들이 와 등교한 학생들을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경찰들은 일반 훈련을 학교에서 했을 테니 총 쏘는 것부터 가르쳐 주겠다며 학생들에게 총을 쥐여 주었다. 토요일마다 목총을 다루는 훈련을 받은 게 다였는데 혹시 오발이라도 할까 봐 두려움에 떨며 총을 쥐었다.

이튿날에는 경비를 하러 가야 한다며 학생들을 차에 태웠다. 차를 타고 오대산 입구 진부리로 향했다. 1시간 밖에 되지 않는 거리를 가다 쉬다를 반복하며 한참이나 이동해 오후쯤 도착했다. 동해안에 내려갔다가 후퇴하던 인민군들이 오대산을 지나고 대관령을 넘어갈 테니 경비해야 한다고 학생들을 동원했다.학생 몇십 명이 동서남북으로 2, 3명씩 조를 짜서 숨었다. 학생들에게 주어진 총은 99식이라는, 일본 사람들이 썼다는 소총이었다. 인민군들은 중공군이 쓰다 넘겨 준 아시보 소총을 썼다. 미군들은 .1 소총을 가지고 다녔다. 터무니없이 낡은 99식 소총을 들고 어두운 밤중에 잠복근무했다. 경비를 서는 중 강릉 쪽에 나갔던 경찰들이 소식을 전했다.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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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병들 숫자가 어마어마하다고, 아주 새카맣게 보일 정도라고 했다. 대관령 꼭대기에서 후두둑 후두둑, 낙엽에 총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경찰이 인민군들을 붙잡아 와 새벽에 자고 있던 학생들을 죄다 깨웠다. 그러더니 사살을 명령했다. 그때까지 총 쏘는 걸 본 적도 없고, 경비만 서던 학생들이었다. 경찰은 인민군을 콩밭에 세워놓고 쏘라고 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수천 명의 후퇴병이 대관령 쪽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학생들을 차에 태웠다. 지금의 평창 톨게이트가 있는 용전리까지 후퇴해서 밥을 먹고 산으로 올라갔다. 인민군들이 오가는 루트였다. 산꼭대기에서 보니 꿈틀꿈틀하는 벌레들처럼 인민군들이 이동하고 있었다. 소대장이 총을 쏘니 그들이 숨었다. 총소리를 듣고 공격할지도 모르니 일단 후퇴하기로 했다. 이후 학생들은 집으로 보내졌다.

11월쯤 되자 학교에서 수업을 정상적으로 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모교 국민학교에서 지동시 어르신에게 연락이 왔다. 마을이 점령되면서 남아있던 교사들이 인민군으로 부역하게 되었고, 그 사실만으로도 자격이 박탈되었던 탓에 교사가 없었다. 고등학생

들이 중학생, 국민학생들을 가르쳤다. 학생들은 공부는 안 하고

옛날이야기, 소설책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다. 전쟁 중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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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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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즐거움은 있었다. 그렇게 학생들과 지낸 지 한두 달, 또 우리 군이 후퇴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민방위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젊은 사람들이 다 전쟁에 나가는 바람에 30대였던 형님 한 분도 민방위로 차출되었다. 나이가 어려 징집되지 못했던 지동시 어르신은 민방위 행렬을 따라 갔다. 민방위26지대라는 명칭이 붙기는 했지만, 훈련도 제대로 안 된 시골 사람들이 전쟁이 일어나는 지역으로 이동하는 식이었다. 첫날에는 제천에서 자고, 다음으로는 문경새재를 넘었다. 문경새재에서부터는 경상도 쪽으로 조금씩 이동했다. 의성, 안동으로 해서 경산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대구에 집결하여 최종적으로는 팔공산중학교에 도착했다. 인원 파악만 하고 이름을 적어 내지도 않았다. 주먹밥을 먹으며 버텼다. 근처를 순찰하다 사과 과수원에서 탱크를 발견하기도 했다.

강원도에서부터 경상도까지 먼 길을 함께했는데도 민방위26지대는 대구에서 산산이 흩어졌다. 지동시 어르신과 학생들은 나라를 위해 싸우고자 모였는데 정규군이 아니라는 이유로 관리조차 되지 않았다. 현실이 개탄스러웠다. 군 소속이 되고자 부대로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더니 군에서는 이들을 창고에 배치했다. 100명이나 겨우 들어갈 만한 공간에 몇백 명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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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기는 해도 다리를 펼 수가 없었다. 먹은 것도 없어 기운도 없었고, 점차 다리도 말을 안 들었다. 아침에 집합해서 나가면 코피 쏟는 사람, 열병을 앓는 사람이 쏟아졌다. 주사라도 맞아야 할 텐데 그 상황에 주사가 있을 리 없었다.

부대에서는 다친 사람을 소독한다고 살충제인 %%5를 내밀었다. 그 약을 국자로 퍼서 다친 데 들이부었다. 부상을 당해도 치료해 줄 사람 하나 없었다.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에서 약 40명씩 소대를 만들어서 훈련했다. 훈련을 하고 돌아오면 저녁에 누가 죽었다는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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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초가 되자 창고 앞에 눈이 녹고 마늘 순이 올라와 잎이 났다. 결국 부대에 소속되지 못한 채 학생들은 걸어서 평창으로 돌아갔다. 면사무소에서 학생들을 마중해 신분증을 발행해 주고, 가족들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었다. 돌아와 보니 집은 불에 탔고, 벼도 새카맣게 탔다. 친척 집 두 칸을 얻어서 식구가 한방에서 잤다.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 없었다. 그 상황에 전염병까지 돌아 어머니, 형님이 돌아가셨다. 동생도 하나 죽고, 조카 둘까지 다섯 명이 죽었다. 장티푸스였다. 그러던 중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지동시 어르신은 민방위였으므로 군적은 없었다. 전투 중에 군인 신분으로 싸운 이들도 있었지만 부대 요원으로, 경찰로, 사병으로 나간 사람들도 많았다. 오히려 실제 군대에 소속되면 형편이 더 나았다. 말이 좋아 민방위이지,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순찰을 돌고 열악한 환경에서 훈련을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는 농사를 짓고 공부를 했다. 지동시 어르신은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미군정을 보면서 영어 잘하는 사람이 쓸모가 있다는 걸 알았다. 6.25전쟁으로 학교는 제대로 못 다녔지만, 학교에서 졸업장을 주며 연합고사를 보라고 했다. 시험은 봤지만, 대학에는 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형님과 친척들이 가서 공부하라고 해서 대학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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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으로 강원도 일대가 다 불에 타는 바람에 전쟁 복구공사, 다리 공사, 철원 수리시설을 복구하는 현장에서 일하며 학업을 이어나갔다. 영월에 있는 상동텅스텐광산에서도 한 달, 춘천 잠업학교에서 누에를 치기도 했다. 그걸로 학비와 하숙비를 댔다. 그래도 농사는 잘했다. 병아리, 오리, 닭 같은 동물들도 잘 키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제대로 군대에 입대했다. 사실상 군 생활을 두 번이나 한 것과 다름없었지만, 묵묵히 군 복무를 마쳤다. 제대 후 농협에 취직하면서 결혼도 했다. 번듯한 직장이 있으니 좋은 혼처가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군대 있을 적에 아주머니 한 분이 전해준 이야기가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자기 조카딸이 열 살에 피난 가다가 엄마를 잃었다는 거였다. 그래서 한번 만나 얼굴을 봤다. 전쟁 중에 돌아가신 어머니와 동생이 떠올랐다. 그래서 1962년, 가진 것 하나 없어도 결혼을 결심했다.

평생 직장생활을 하고, 배우고 싶은 분야를 공부하며 사느라 국가유공자라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다. 전쟁에 참전한 학생 군은 오랜 기간 인정받지 못했다. 퇴직 후인 2014년에야 강원도 평창에서 후퇴 병력과 싸우고, 진부에서 적군을 막은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유공자로 지정되었다. 올해로 92세인 지동시 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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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여전히 세상에 호기심이 많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며 살고 계신다. 그때 같이 참전했던 학교 친구들이 그립지만, 이제는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168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3장

베트남평화전를쟁 수참호전한유공자

전전쟁쟁터터에에서서 사사랑랑을을 꽃꽃피피우우다다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유갑준 어르신

공부에 관심 많고 착실한 청년 유갑준 어르신은

맹호부대에 배치되어 베트남전쟁 파병에 차출되었다.

미군헬기비행장 경계근무를 서며 매일 밤낮으로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매일 누군가 죽어가는 현장에서 위문편지는

유갑준 어르신의 유일한 활로였다.

지난한 전쟁이 끝나고 무사히 제대한 유갑준 어르신은

무작정 부산에 사는 그녀를 찾아갔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맺어진 인연이었다.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유갑준 1950. 11. 15. _ 1972. 06. 12. _ 1973. 03. 07.

베트남전쟁 참전

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176

번째

전쟁터에서 사랑을 꽃피우다177

유갑준 어르신은 공부에 관심이 많고 착실한 청년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이미 철도공무원에 합격한 터라, 졸업 후 바로 대전역에서 열차 관리를 하며 근무했다. 군대에도 일찍 다녀오려고 해군에 지원했으나 안 되면서 육군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1971년 5월 18일 논산훈련소에 입소했다. 훈련을 받으면서 의무병으로 병과를 받았다. 4주 훈련을 마치고 자대배치를 앞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몸이 아파 일주일 동안 입원하게 된 것이다. 훈련을 마치고 바로 자대로 가지 못해 보병 기관총 사수로 보직을 재편성받았다. 의무병으로 가지 못한 것이 내심 아쉬웠다.

강원도 홍천에 있는 11사단 교육훈련소에서 다시 한 달을 더 훈련받은 뒤 자대로 이동했다. 인제에 있는 맹호부대였다. 보병은 걷는 게 훈련이다. 매일 걷고 훈련하고, 지겹도록 훈련만 했다. 어디를 가도 적응은 잘하는 체질이라 훈련도 열심히 하다 보니 사단장 표창에다 포상으로 지포라이터까지 받았다. 그래서 베트남전쟁 파병에 차출된 걸지도 모른다.

유갑준 어르신은 완전군장을 메고 베트남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강원도에서 기차를 타고 청량리역을 거쳐 부산으로 갔다. 대전역을 지날 때 대전역에서 근무하는 매형을 잠시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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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도 없고 편지로 여러 날이 걸렸던 시절에 가족을 만나 안부를 전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변 장병들의 부러움을 한눈에 샀다. 부산항은 베트남으로 떠나는 군인들로 가득했다. 그들과 함께 해군 상륙함을 타고 베트남으로 떠났다. 일주일이 지나 베트남에 도착했다. 맹호부대 파병 장병들은 베트남 퀴논 항구로 갔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군용트럭이 수천 명의 장병을 태우고 부대로 이동했다. 유갑준 어르신을 비롯한 장병들은 보충대로 이동해 일주일 정도 교육을 받은 뒤 다시 자대로 배치되었다. 훈련이 끝나고 바로 자대로 배치를 받은 병사도 있었지만, 유갑준 어르신은 대기발령을 받았다. 다음 날부터 각 부대에서 트럭을 몰고 와 함께 훈련을 받았던 병사들을 데려갔다.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났다. 모두가 떠나고 겨우 세 명만 남았다. 어디로 간다는 이야기도 없고, 신경 쓰는 사람도 없었다. 베트남은 더웠고 식당에 먹을 물도 없을 정도로 전쟁터는 팍팍했다.

닷새째가 되었다. 이른 아침부터 뜨거운 햇살이 땅을 달구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저절로 났다. 점심쯤 되니 지프 차가 한 대 들어왔다. 상사가 오더니 남은 세 명을 가리키며 모두 타라고 했다.

t니들은 살았다.u

상사는 이 한 마디 뒤 아무 말 없이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전쟁터에서 사랑을 꽃피우다179

도착한 곳은 미군헬기비행장이었다. 그제야 상사가 한 말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정글에서 베트콩과 교전을 할 줄 알았는데, 주어진 임무는 미군헬기비행장을 지키는 것이었다. 병력이 많지 않아 상대적으로 안전한 곳이었다. 아무리 안전하다고 해도 전쟁터는 전쟁터였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경계근무를 섰다. 더운 날씨로 인해 정신이 몽롱하고,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래도 내가 있는 곳은 총알이 빗발치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는 마음이 무색하게 미군헬기비행장 역시 밤낮으로 포탄이 터지고 총알이 발사되는 소리로 가득했다.

하루도 편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일과를 마치고 막사에 돌아 와서 읽는 위문편지가 유갑준 어르신의 유일한 위안이자 휴식이었다. 고국에서 베트남전쟁 참전군인들에게 보낸 위문편지는 하루에도 수십 통이었다. 베트남전쟁 당시 전국의 초, 중, 고등학교 학생들은 베트남전쟁에 파병된 군인들에게 위문편지를 많이 썼다. 국군 장병 아저씨 그간 안녕하십니까. 저는 어느 학교에 다니는 누구입니다. 저에게 편지를 보내주시면 답장 드리겠습니다. 보통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는 베트남 전역에 나가 있는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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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에서 사랑을 꽃피우다181

장병에게 전달되었다. 매일 오는 위문편지를 읽으며 전쟁터에서의 긴장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위문편지는 유갑준 어르신을 위로 해주었다. 편지로라도 고국의 소식을 듣고 그리움을 달랬다. 가끔은 부모님에게도 편지를 썼다. 시시콜콜 적지는 못했다. 위험한 이야기를 쓰면 걱정만 하실 테니 간단한 안부만 전할 뿐 이었다.

위문편지를 읽던 어느 날 아주 마음에 드는 편지를 발견했다. 답장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이 편지에는 꼭 답장하고 싶었다. 마침 잠도 오지 않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적어 보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왔다. 정말 기뻤다. 다시 답장을 썼고, 다시 회신이 왔다. 모르는 어떤 이에게 상담을 받는 심정으로 글을 써 보내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마음에 있는 이야기도 쓰고, 일기처럼 일상도 적어 보냈다. 편지 덕분에 그 시절을 잘 보낼 수 있었다.

1973년이 되자 전쟁은 끝나가고 있었다. 한국군도 철수를 서 둘렀다. 하지만 유갑준 어르신은 미군 부대 소속이었기 때문에 미군이 철수를 끝마친 다음인 1973년 3월 7일에 무사히 한국으로 돌아왔다. 갈 때는 완전군장으로 갔지만 올 때는 큰 더플백과

182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각종 군 보급품을 넣은 상자 두 개뿐이었다 무사히 귀국 후, 부대로부터 두 달간의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향했다. 모처럼 찾아 온 휴식의 시간이었다.

휴가를 끝내고 복귀 후에 10개월을 더 근무했다. 베트남에서 주고받던 위문편지는 한국에 있는 자대에 돌아와서도 이어졌다.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다 보니 편지에 쓰지 않은 이야기가 없을 정도였다. 부모님이나, 형 누나보다 더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그저 편지를 주고받는 얼굴도 알지 못하는 여인이었다.

위문편지는 젊은 청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아주 친한 동생,

혹은 연인이 생긴 것도 같았다.

전쟁터에서 사랑을 꽃피우다183

고대하던 제대를 하게 되었다. 홀가분한 한편 인생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고 생각했다. 문득, 편지를 주고받았던 그녀가 생각났다. 부산에 사는 그녀를 찾아 가고 싶었다. 그녀를 만나면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을 것만 같았다. 주소가 적힌 편지 봉투를 들고 부산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세월은 흘러 김정자 씨는 어른이 되어 있었다. 편지로 서로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던 두 사람은 빠르게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유갑준 어르신은 결혼하여 새롭게 가정을 꾸리려는 계획을 세우고 공사판을 다니며 열심히 일했다. 당시 전국에서 아파트며 건물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일은 차고 넘쳤다. 전문기술이 필요했다. 일하면서 어깨너머로 익힌 전문기술로 철근기능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든든한 직업을 구했으니 가정을 꾸릴 자신이 있었다. 부산에서 사랑을 꽃피운 유갑준 어르신은 구리로 이사를 와 신혼살림을 차리고 지금까지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무자비하고 잔인한 전쟁의 한복판에서 편지 한 장으로 이어진 인연이었다.

18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헌헌신신적적인인 군군수수지지원원 십십자자성성부부대대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이영태 어르신

이영태 어르신은 베트남전쟁에 지원해 피셔호에 올랐다.

전투지원의 모든 것을 책임지는 제100군수사령부에서 근무했다. 전투 병사가 다치면 사이렌이 울리고

헬기가 오가는 비상사태의 연속이었다.

슬퍼할 겨를조차 없이, 전사한 전우 앞에서 냉정하게

신원을 파악하고 기록하는 것이 이영태 어르신의 임무였다.

전쟁은 소년을 비로소 남자로 만들었고,

전쟁의 경험은 어르신의 삶을 더욱 치열하게 했다.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이영태 1950. 02. 01. _

1972. 09. 15. _ 1973. 03. 03.

베트남전쟁 참전

r전투부대의 작전수행을 가능케 해 주는 길잡이s라는 뜻의 십자성부대는 제100군수사령부의 다른 이름이다. 십자성은 남쪽 하늘에 열 십 자로 보이는 별을 일컫는다. 십자성은 예로부터 항해자의 지침이 되어 왔다. 십자성부대는 한국군 최초의 통합 군수부대로, 밤하늘의 십자성처럼 베트남전쟁에서 한국군 전투부대가 오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도록 후방에서 지원했다. 그 시작은 1965년 강원도 홍천군에서 창설된 제100군수사령부였다. 제100군수사령부는 수도사단 소속으로 7개 기술병과 19개 부대로 구성되었으며, 1965년 10월에 맹호부대를 따라 1개 군수지원단 규모로 베트남에 상륙했다. 1966년 백마부대가 증파됨에 따라 제100군수사령부도 약 8,000명으로 증원되고 소속도 수도사단에서 주월한국군사령부로 전환되었다. 이때 십자성부대라는 이름이 붙었고, 주둔지도 퀴논에서 나트랑으로 이동했다. 맹호부대, 백호부대, 청룡부대 등 전투부대가 전선에서 싸우기 위해서는 전투근무지원이 필요했다. 베트남 기후나 환경은 한국과 완전히 달랐다. 연평균 34도 내외의 무더운 날씨에 울창한 정글이나 늪지대 등에서 이루어지는 전투. 온갖 악조건 속에서 대소작전을 수행해야 했다. 주월한국군의 전투근무지원 사령부였던

190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십자성부대는 한국군의 군수 및 행정지원을 맡았다. 전투물자와 보급품 지원, 전투장비의 야전정비, 수송·통신·비전항공 지원 및 전상자 입원과 후송 등이 십자성부대의 주요 임무였다. 특히 파병 초기에 독자적인 헬기가 없었던 한국군이 제반 작전 수행에 제약을 받자 십자성부대가 1967년 제11항공중대를 창설하여 보급지원, 환자이송 등 임무를 수행했다. 한국군 최초의 헬리콥터가 편성된 항공중대였다.

이영태 어르신은 1950년 2월, 6.25전쟁이 발발하기 몇 달 전에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에서 태어났다. 팔 남매 중 막내여서 전쟁의 기억은 분명하지 않았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큰 누님이 업고 피난을 갔다는 말만 들었다. 전쟁터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도 잘 알지 못했다.

평범하게 유년 시절을 보내던 이영태 어르신은 영장을 받고 1971년 1월 7일에 입대했다. 수색에 있는 34사단에서 훈련을 받고, 이후 화천의 승리부대 15사단에 배치되었다. 이미 베트남전쟁이 한창 치열했던 때였다. 입대 전부터 베트남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본인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승리부대에서 베트남전쟁 참전 병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해 9월 15일, 피셔호에 올랐다.

헌신적인 군수지원 십자성부대191

베트남까지는 엿새가 걸렸다. 캄란에 내려 차를 타고 나트랑 까지 들어갔다. 이영태 어르신이 속한 십자성부대는 사방에 4미터 높이의 울타리가 쳐져 있어 외부인의 침략이 불가했다. 정문은 나트랑 시내를 향해 있었고, 후문은 백마부대가 주둔한 호이안 쪽이었다. 26헌병중대에 배치 받고, 보안대와 합동 근무하면서 헌병대처럼 내부에서 사건, 사고가 없도록 감시하는 임무를 주로 맡았다. 철저히 동네를 순찰하고 외부인들의 신변을 보호했다. 사회에서 보면 경찰이 하는 역할과 비슷했다.

십자성부대는 울타리 안, 영내에서만 생활했다. 군수물자가 들어오면 전투부대 헌병들이 인솔해서 차에 실어 갔다. 군수물

192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자는 국내에서 오는 ,-레이션(,-3BUJPO), 미군 부대에서 보급하는 $-레이션($-3BUJPO)이 있었다. ,-레이션은 오늘날의 전투식량과 비슷한 한국식 음식이었다. 장병들의 입맛에 맞게 김치나 장아찌 같은 것들을 한국에서 조달해 제공했다. 전투하다 다친 한국군은 십자성부대 내부 102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헬기로 운송될 때마다 사이렌이 울렸다. 비상사태였다. 부대 전원이 긴장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부상자들이 오면 그렇게 참담하고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팔다리가 절단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슬퍼할 겨를이 없었다. 다치거나 전사한 전우 앞에서 냉정하게 신원을 파악하고 기록을 남겨야 했다.

십자성부대 내부에는 화장터도 있었다. 금요일마다 전사한 전우들을 화장해 영현식을 치르고 유골을 한국으로 봉송했다. 치열한 전투가 이루어지는 부대는 아니어도 심리적으로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부상당한 베트콩이 십자성부대로 생포된 적이 있었다. 비록 적군이었지만 십자성부대는 인류애를 가지고 그들을 치료했다. 베트콩이 치료받는 동안 이영태 어르신이 보초를 섰는데, 죽기로 결심한 듯 살벌한 눈빛을 가진 그들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처음으로 무섭다는 느낌을 받았다.

헌신적인 군수지원 십자성부대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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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가장 두려운 것은 전쟁 중이라는 상황이었다. 언제 사상자가 후송되어 올지, 베트콩이 나타날지 예상할 수 없었다. 사방에서 총소리와 포 소리가 들리는데 어떤 상황인지도 파악되지 않았다. 포 소리가 나면 또 부상당하거나 전사한 전우들이 올 것이기에 심리적 압박감도 컸다. 나트랑 비치에서 군인들이 짬을 내어 휴가를 즐길 때도 십자성부대가 안전을 위해 돌아가면서 해변을 지켰다. 비록 전방은 아니었지만 조금의 긴장도 늦출 수 없었다.

그러던 중 1973년 1월,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이 파리평화협정을 맺으면서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기 시작했다. 십자성부대는 전우들과 병기들을 다 보낸 뒤, 마지막으로 베트남 땅을 떠났다. 철수부대는 배가 아닌 비행기를 탔다. 이영태 어르신도 비행기를 타고 귀국했다. 태어나서 처음 타는 비행기였다. 갈 때는 엿새가 걸렸지만 돌아올 때는 다섯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비행기에 대한 소회보다는 무사히 살아서 돌아간다는 안도감이 컸다. 그렇게 대구 동촌 비행장에 내렸다.

전쟁터여도 사람 사는 곳이라, 즐거운 순간들도 있었다. 유명한 연예인들이 한 번씩 위문공연을 오면 그렇게 신기했다. 당시 봉급이 상병 45불, 병장 54불이었는데, 조금씩 모은 돈으로

헌신적인 군수지원 십자성부대195

전우들과 음료수를 사 먹는 것도 작은 낙이었다. 또래 전우들과 타국에서 동고동락하면서 끈끈한 전우애를 느꼈다. 그중에는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전우들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주소록을 남길 생각을 못 했다. 그래서 이제는 찾을 수도 없다. 희한하게도 우연히 마주친 적도 없었다. 그 점이 지금까지 아쉽다. 8남매 중 막내였던 이영태 어르신은 베트남전에 다녀오고 나서야 소년에서 남자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립심이 커지면서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제대 후 회사 생활을 하다 1978년도에 타워크레인 면허를 취득해 42년간 타워크레인 기사로 일했다. 아파트나 높은 건물을 지을 때마다 꼭대기에 올라가서 작업했다. 새로 생기는 신도시마다 안 가는 데가 없었다. 구리 주공아파트 1단지 등 구리시 내 아파트 건설 현장에도 참여했다. 당시 중동 붐이 일어날 때라 중동에서 5년 5개월을 있었다. 사우디에서의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처음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는 섭씨 45도의 더운 바람에 죽겠구나 싶었다. 그 열기를 견디며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에서 건물을 지어 올렸다. 결혼 전에 한 번, 결혼 후에 두 번이나 더 나갔다. 사우디 왕세자와 정상회담을 했던 킹 사우드 대학을 지을 때, 우리나라 5개 회사가 들어갔다. 그때

196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이영태 어르신도 타워크레인 기사로 근무했다. 이후 건설에 참여했던 건물을 57에서 볼 때마다 감회가 새로웠다.

현역으로 42년을 일하고,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하는 삶을 살다가 이제는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동안 일하느라 읽지 못했던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하는 중이다.

이영태 어르신은 전방에서 피 흘리며 싸우고, 희생당한 전우들이 있기에 말을 아낀다. 전투부대는 그야말로 치열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수많은 전우가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했지만, 후방에 있었다는 사실이 미안해진다. 하지만 실제로 십자성부대는 전투부대가 작전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후방에서 최대로 지원했다. 군수지원 시스템을 체계화해 철수한 뒤에는 제3야전군사령부를 창설했으며, 이때 이영태 어르신도 사령부를 짓는 데 참여했다. 특히 십자성부대의 해외 파병부대 장거리 군수지원은 이후 한국군의 해외 파병에서 군수지원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이영태 어르신도 1997년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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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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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최전전방방에에서서 총총을을 들들었었던던 1188세세 소소년년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이용구 어르신

이용구 어르신은 만 18세 어린 나이에

해병대 입대해 베트남전쟁에 참여했다.

전쟁은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총을 비롯한 보급품은 형편없었고, 방판조끼는 기름때로 가득했다. 이용구 어르신은 전우의 희생에 눈물이 쏟아질 듯했다.

죽고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 배고픔 역시 고통스러웠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쟁에서 재대했지만

지금은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지난날 자신의 용감한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베트남전쟁 참전유공자

이용구 1948. 07. 30. _ 1972. 09.베트남전쟁 참전

충청남도 천안 풍세면 용정리에서 태어나 중학교까지 마치고, 농사일을 돕던 어린 소년 이용구 어르신은 만 18세의 나이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만 17세에도 이미 한 번 해병대에 지원하고자 했지만 나이가 어려 입대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만 18세에 자원해 입대했다.

1966년 4월 4일 진해에서 훈련을 받고, 9월 3일에 배를 타고 베트남으로 향했다. 긴 항해 끝에 퀴논에 도착했다. 이용구 어르신이 소속된 부대는 한국군 전투부대의 선봉이었던 해병 제2여 단, 청룡부대였다. 그때 청룡부대는 캄파, 판랑, 나트랑에서 방어전을 수행한 후 추라이 지구로 이동하고 있었다.

퀴논에 내리자마자 추라이 지구의 여단 본부로 이동했다. 베트남에 왔다는 걸 실감할 틈도 없이, 도착하자마자 줄을 세워 인원수대로 대대를 편성했다. 대대가 나누어지면 곧바로 헬리콥터를 타고 대대 본부로 이동했다. 본부에 내려서는 다시 중대를 나누었다. 이용구 어르신은 2대대 7중대에 배정받았다. 중대에서 기다리면 소대가 전방으로 들어갈 장병들을 데리러 왔다. 소대 병력이 모자라면 바로바로 차출하는 방식이었다. 서류 작성할 시간도 없이 상황은 늘 급박하기만 했다. 3소대 2분대에 소총수로 배정된 이용구 어르신은 한국에서 가

20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져온 군 보따리를 풀자마자 총을 한 자루 받았다. 총을 손에 쥐고 망연자실했다. 즉시 전투에 나가야 하는데 총이 다 부서져 있었다. 차마 쓸 수도 없을 만큼 망가진 총이었다.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방탄조끼라고 주는 것도 너덜너덜한 데다 시커먼 기름때가 묻어 있었다. 어쩌다 방탄조끼에 기름이 묻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누군가 그 기름때가 사실 앞선 전우들의 피였음을 알려 주었다. 분대에서 제일 어렸던 이용구 어르신은 그 자리에서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간신히 참았다. 전우들의 희생과, 앞으로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 펼쳐질지가 피 묻은 방탄조끼에서 그대로 느껴졌다.

최전방에서 총을 들었던 18세 소년205

총과 방탄조끼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상황은 열악했다. 베트남전쟁은 정글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아 정글복이 필수였음에도 옷이 주어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한국에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었다. 면으로 된 옷들은 정글에서 조금만 움직여도 찢어졌다. 찢어진 옷은 철사로 꿰매 입었다. 엉망이 된 방탄조끼, 정글 임무에 적합하지 않은 옷을 입고, 다 부서진 소총 한 자루가 앞으로 얼마나 고단한 전쟁을 치르게 될지 암시했다. 다행히 중대 본부에 들어가고 나서는 새 총을 받았다. 이용구 어르신은 덩치가 있어서 .1보다 크기가 큰 3-15를 받았다. 사격 방법이야 배웠지만 처음 만져보는 총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도 무작정 투입되었다. 수색하는 동안 총알이 날아오거나 적군이 공격할까 봐 하늘만 보고 다녔다.

보통 중대는 1개 소대가 작전을 나가고 2개 소대는 방어했다. 소대가 돌아가면서 작전을 나가는 식이었다. 새벽에 동네를 포위하면 사람 하나 없을 것 같아도 100여 명의 베트콩 가족이 나왔다. 땅굴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땅굴에 숨어버리면 찾을 도리가 없었다. 베트콩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추라이는 청룡부대가 최초로 파견된 지역이었다. 큰 작전을 하게 되면 비행기가 상공에서 한 달

206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전에 r여기는 대한민국 해병대 작전지역이니 피난을 가라s고 방송했다. 그럼에도 미처 피난가지 못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들을 인솔해서 시내로 피난을 보냈다. 작전을 마치면 수류탄을 던져 동네에 불을 질렀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지어진 고급주택도 있었지만, 나무로 만든 집이 대부분이었다. 순식간에 마을은 초토화가 되었다. 산꼭대기에서 한 마을이 불에 타는 광경을 내려다보면 그저 비참했다.

가장 무서운 건 부비트랩이었다. 베트콩들이 설치한 부비트랩은 악명 높기로 유명했다. 폭약과 수류탄을 넣은 철제 용기에다 철편을 꽂고 가느다란 실을 연결해 건드리면 바로 폭발하게 만 들었다. 날카롭게 다듬은 대나무 꼬챙이를 풀로 덮어 위장한 부비트랩도 있었다. 그 외에도 종류가 다양했다. 부비트랩에 잘못 걸리면 끝장이었다. 어디 숨어 있는지 모를 베트콩들을 경계하다 보면 심장이 조일 만큼 긴장되었다. 아무도 없는 평지에서도 숨어 있거나 쉬고 있던 한국군이 총을 들고 일어나기만 하면 어김없이 총알이 날아왔다. 적군의 총알에 전우가 다치면 그때부터는 피 튀기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죽고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도 늘 배가 고팠다. 고통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십대 후반, 한창 잘 먹을 나이에 쫄쫄 굶어가며 작전

최전방에서 총을 들었던 18세 소년207

208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최전방에서 총을 들었던 18세 소년209

을 수행했다. 굶주린 장병들이 $-레이션이라도 갖다 달라고 말했지만 $-레이션 대신 실탄만 잔뜩 가져다주었다. 실탄이라 버릴 수도 없고, 주린 배를 부여잡고 실탄을 차고 다녀야 했다. 원래 가지고 있던 실탄과 수류탄에다, 탄띠에도 수류탄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녔다. 말도 못 할 무게였다. 그러다 보니 먹을 것을 챙겨 다닐 수도 없었다. 중대 본부에 있을 때 밤에 매복을 나갔다가 큰일이 날 뻔한 적도 있었다. 작전지역 매복지점을 제대로 찾지 못하면 아군포에 맞아 죽기도 했다. 공격 지점에 105NN 예광탄이 머리 위로 터졌는데, 우리 포가 날아왔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선두에 서는 천병은 제일 고참들이 맡았다. 총성이 난무하고 사람이 계속 죽어 나갔다. 사람이 죽으면 꼬리표를 써서 후송을 보냈다. 당시에는 전우의 죽음도 슬펐지만, 그가 전사하면서 남긴 장비를 짊어지고 돌아오는 고통이 더 컸다. 참혹한 전쟁터는 슬픔까지도 사치로 만들었다. 이용구 어르신은 베트남전쟁에서 복무한 11개월 중 6개월 동안 최전방에서 근무했다. 중대 방어로 6개월, 그다음은 여단 방어로 이어졌다. 귀국할 때가 되니 짐은 $-레이션 두 박스뿐이었다. 딱히 귀국 준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봉급을 모두 한국에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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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에게 보냈으니 가진 돈도 없었다. 졸병일 때 27불을 받았다. 목숨 값으로는 터무니없이 적었지만 1960년대 우리나라에 서는 큰돈이었다. 당시 면 서기 월급이 4,500원에서 5,000원밖에 하지 않을 때였다.

귀국 후에는 배를 타고 부산에 내렸다. 해병대 포항 5연대로 배치를 받았다. 하필이면 간첩 사건이 많을 때였다. 1968년 김신조 간첩 사건이 일어났고, 원산 부근에서 작전 중이었던 푸에 블로호가 북한 해군에 나포되었다. 나포 과정에서 미국 승무원 1명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북한으로 피랍되었다. 이 사건 직후 미국 정부는 엔터프라이즈호를 원산만 해역으로 급히 파견했다. 이용구 어르신과 해병대 전우들은 전쟁이 또 일어나는 줄 알고 초긴장 상태였다. 완전무장한 채로 연병장에서 대기해야 했다. 베트남전쟁을 겪고 왔던 터라 그 두려움이 어마어마했다. 다행히 전쟁이 발발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제때 제대하지 못했다. 군 복무도 26개월에서 30개월로 연장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지 8개월 뒤인 1968년 9월 30일에야 제대했다. 제대한 뒤에는 농사를 지었다. 공장에서도 일하다가 운수업에 종사했다. 같이 일하던 동료와 눈이 맞아 결혼도 했다. 1남 2 녀의 자녀도 두었다. 평범하게 살아가던 중, 갑자기 혈압이 급

최전방에서 총을 들었던 18세 소년211

격히 오르기 시작했다.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으로 의심되었다. 미군은 베트콩의 은신처였던 정글과 늪지, 논밭을 고사시킬 목적으로 다이옥신이 함유된 고엽제를 살포했다. 그 면적이 베트남 국토의 15퍼센트에 해당했다. 다이옥신은 단 1그램만으로도 20,000명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독성이 강해, 인간이 만든 독극물 중 가장 독하다는 평을 받는다. 미군은 적군을 겨냥해 고엽제를 살포하였으나 그 피해는 아군까지 고스란히 받았다. 1970년대부터 참전국 장병들이 원인 모를 병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미국에서는 미국 정부와 고엽제 제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에서는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보상뿐만 아니라 언급조차 할 수 없었다. 1993년이 되어서야 한시적으로 고엽제법이 제정되었다가, 1995년에 그 명칭과 함께 전면개정했다. 그 이후 여러 차례의 개정을 거쳐 고엽제 후유증 인정 질병은 24개, 후유의 증 17개가 고엽제법에 적용되었다.

만 18세 청년이 해병대에 가겠다고, 베트남전쟁에 참전할 거라고 자신 있게 지원했다. 돌이켜보면 동료들도 거의 비슷비슷한 또래였다. 청룡부대의 소총수로 치열하게 싸웠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결국 고엽제 후유증이 남았다. 최전방에

212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나가 싸운 청룡부대 병사들은 저마다 고엽제 후유증을 겪고 있다. 이용구 어르신도 마찬가지였다. 보건복지부에서 고엽제 후유증 신청을 받을 때도 있었는데, 그때는 먹고 사느라 신청할 여유가 없었다. 용산까지 직접 갈 시간이 없어 때를 놓쳤다. 이용구 어르신은 약 20년 전, 전쟁이 끝나고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고엽제 후유증 등외로 판정받았다. 베트남전쟁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젊은 날 스스로 선택했던 참전에 후회는 없다. 이용구 어르신은 가장 어렸지만 가장 용감하고 자랑스러운 청룡부대 해병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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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최전방에서 총을 들었던 18세 소년215

2024 구리시 국가유공자 기록화사업

잠들지 않는 이야기 ◆ 여섯 번째

발행일2024. 3. 22.

발행처다랑어스토리

주소 서울특별시 동작구 서달로 161-1 3층전화 02-817-5051

주관구리시

주소 경기 구리시 아차산로 439 (교문동) 전화 031-550-2213

글작가최지애, 김은정, 신상준그림작가이인영, 손지원

※ 이 책은 구리시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으며, 저작권은 구리시에 있습니다.